6월 2일 신유
임금이 새로 임명된 수령(守令), 변장(邊將)의 초사자(初仕者)를 불러 보고 칙유(飭諭)하였다.
지평 이영조(李永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서(司書) 한광회(韓光會)는 사람됨이 비루하고 용렬하며 행기(行己)가 거칠고 도리에 어긋납니다. 일찍이 영남 병영의 막료(幕僚)로 임명되었을 때 비루하고 잗단 일이 많아 오명(汚名)을 한 도에 남겼으므로, 사류(士類)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랬다저랬다 하는 태도와 얼굴빛을 잘 드러내어 외람되게 영관(瀛館)106) 의 극선(極選)을 차지하였습니다.
안집(安𠍱)은 별기(別歧)로 벼슬길에 통하여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니, 미원(薇垣)107) 과 백부(柏府)108) 는 그에게 있어 분수에 넘치는 곳입니다. 요행히 세력이 있는 사람을 의뢰하여 외람되게 화선(華選)에 참여하였으니, 만약 깨끗이 도태시키지 않는다면 분경(奔競)109) 하고 아첨하는 풍습이 앞으로 분운(紛紜)해짐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아울러 빨리 개정(改正)하소서.
이관섭(李觀燮)은 흉얼(凶孼) 윤취상(尹就商)의 외족(外族)으로 잠신(簪紳)의 반열에 낄 수 없는데, 내직으로는 낭서(郞署)에 임명되고 외직으로는 수령에 임명되어 구애받는 바가 없는 듯합니다. 박징빈(朴徵賓)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문객(門客)으로 정미년110) 에는 그 사건에 연좌되어 폐고(廢錮)되었는데, 그의 아들 박수유(朴垂裕)가 외대(外臺)111) 에 임명되었으나, 해당 낭관이 막거나 저지한 바가 없었습니다. 또 사관(史官)의 임무를 겸하게 하여 전석(前席)에서 가까이 모시게 되었으니, 일이 극도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아울러 조적(朝籍)에서 삭제하여 방한(防限)을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은대(銀臺)의 직임은 지망(地望)이 높고 중요하여 사람마다 함부로 탐낼 자리가 아닙니다. 동부승지 민계(閔堦)는 어리석고 망령되어 세상에서 천하고도 더럽게 여기고 있으며, 대원(臺垣)에서 오래도록 애썼지만 오히려 성조(聖朝)의 격양(激揚)하는 정사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유윤(惟允)을 출납(出納)하는 지위이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빨리 개정(改正)하여 관방(官方)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수문(水門)에서 돌을 떠낸 종신(宗臣)에 대해서는 당연히 귀양 보내는 법을 시행하여 그로 하여금 징외(懲畏)하는 도리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단지 귀양 보내라는 청만 윤허하였다.
6월 3일 임술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간의 상소에서 이른바 박수유(朴垂裕)·이관섭(李觀燮)·안집(安𠍱)에 대한 일을 하문하자,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박수유와 안집에 대한 일은 대간의 말이 비록 지나치다 하더라도 깨끗하고 준엄한 의논이 되기에는 해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징빈(朴徵賓)은 신축년112) 과 임인년113) 사이에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 윤순(尹淳)을 탄핵하여 논박하였었습니다. 안집은 비록 문예(文藝)가 있다 하나 홍문관의 관원으로 선발된 뒤에는 공의(公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관섭은 문을 닫고 스스로 근신해야 마땅한데 분주하게 동정을 받으려고 하였으니, 잘못입니다. 그러나 안집의 도당록(都堂錄)114) 은 정우량(鄭羽良)이 주관하였는데, 박수유 또한 정우량과 친하기 때문에, 대간의 말이 반드시 이 무리들을 논쟁하는 것은 의도함이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지평 이영조(李永祚)가 피혐(避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광회(韓光會)는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스스로 경계하는 도리에 아주 어두워 잠시 지방의 막료로 있으면서 놀랄 만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순행하여 월성(月城)에 도착하자, 관아가 빈 것을 틈타 말 안장을 새로 꾸미고 수정 갓끈을 별도로 만들게 하니, 읍리(邑里)가 소란스러웠으며, 소모한 비용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루하고 잗단 일은 전후의 외대(外臺) 가운데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거칠고 사리에 어긋난 성질과 다른 사람과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마음은 진실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면, 비록 창자와 밥통을 바꾼다 하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첩괄(帖括)115) 로 글도 할 줄 모르는 무리가 외람되게 경악(經幄)을 더럽히며 거칠고 사리에 어긋나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지목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대단히 짐량(斟量)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아마도 천감(天鑑)에 유실(遺失)한 바가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그리고 박수유(朴垂裕)는 그의 아비 박징빈(朴徵賓)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포악한 위세를 떨칠 때 그가 가까운 인척(姻戚)으로서 응견(鷹犬)이 되어 청의(淸議)가 역적 김일경을 배격한 데 대하여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여 마치 사사롭게 원수를 갚듯 하였는데, 이 사람의 아들을 어떻게 외람되게 잠신(簪紳)에 끼게 하여 평범하게 아무 까닭이 없는 사람처럼 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흉얼(凶孼) 윤취상(尹就商)은 연좌된 바가 어떠하며 관계된 바가 어떠합니까? 그의 유종(遺種)과 여얼(餘孼)은 다시 인류(人類)에 낄 수 없는데, 이관섭(李觀燮)은 벼슬길에 통하고는 뜻대로 된 것에 만족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급급하여 분주히 동정을 바라니, 제방(隄防)이 무너지는 것은 이런 데에서 말미암는 경우가 많은데, 취하지 않는다는 하교에 대해 신은 적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민계(閔堦)는 대궐에 나아가 납패(納牌)하고, 법을 어기면서 출금(出禁)하여 돈을 탐한다는 말이 낭자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침을 뱉어 욕하고 있는데, 기타 해괴한 일들은 다 논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신이 일찍이 대간의 지위에 들어갔었다면, 아간(亞諫)116) 과 중승(中丞)117) 도 개정(改正)하도록 했을 것인데, 더구나 이에서 진취하여 은대(銀臺)에 초탁(超擢)되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논한 바가 모두 개가(開可)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신이 맥이 없고 용렬하여 군부(君父)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청컨대 체임시켜 물리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6월 4일 계해
임금이 세자에게서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춘방(春坊)의 관원을 불러 《어제상훈(御製常訓)》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 이달에 내 마음이 바로잡히지 않아 이 훈계를 지어서 원량(元良)에게 주었었다. 이제 잘 시작한 것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뜻으로 세자에게 시좌하도록 명하고 유신(儒臣)을 불러 이 훈계를 강독하려고 하였는데, 유신이 궐직(闕直)하였기 때문에 춘방의 관원을 불러 글뜻의 어려운 부분을 묻도록 하였다."
하였다.
이철보(李喆輔)를 도승지로, 조명겸(趙明謙)·엄우(嚴瑀)·홍중징(洪重徵)을 승지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강봉휴(姜鳳休)·박필간(朴弼幹)을 장령으로, 임위(任瑋)·송덕중(宋德中)을 정언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지평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판의금부사로, 이천보(李天輔)를 부제학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교리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설서로 삼았다.
6월 5일 갑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 관백(關白)은 바로 지나간 해에 위문한 관백이다. 경자년118) 을 돌이켜 생각하면 마음에 감동이 된다. 물품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말고 빙문(聘問)하여 나의 뜻을 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바다를 건너간 역관(譯官)이 오기를 기다리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즉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희생(犧牲)으로 쓸 소가 전염병에 걸려 죽는 것이 요즈음에 더욱 심하여 30여 두(頭)에서 남은 것이 단지 한 마리뿐인데, 그것도 한창 앓고 있으며 죽으려 한다고 합니다. 추향(秋享)이 수십 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호서(湖西)의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도록 한 소 10여 두를 올려 보내게 하고, 공인(貢人)들에게 나누어 주어 잘 기르도록 해서 전염되는 데 이르는 근심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희생에 쓸 소를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는 것은 바로 《주례(周禮)》의 〈희생에 쓸 소를〉 국문(國門)에다 매어 두고 기른다는 뜻이니, 흩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니 공인(貢人)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구료(救療)하게 하되, 비록 죽더라도 공인에게 대신 징수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7일 병인
예방 승지가 입시하니, 《어제상훈(御製常訓)》을 읽도록 명하고, 다시 남은 회포를 서술하고 훈계를 지어 유시하기를,
"아!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추성(鄒聖)119) 도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라고 말하셨으니, 효제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다. 증자(曾子)가 효(孝)는 미치지 못함이 있고 제(悌)는 제때에 하지 못함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 증자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것을 알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증자처럼 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는데,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가하다고 한 것은 겨우 쓸 만하다는 뜻이다.’고 하였다. 증자의 효도를 가지고 맹자가 오히려 가하다고 일컬었는데, 평범한 사람 이하가 어찌 효라고 말하겠으며 어찌 제라고 말하겠는가? 아! 붙들기 어려운 것이 세월(歲月)이니, 해가 가고 달이 가면 아무리 효도하려고 한들 어찌 미칠 수가 있겠으며, 아무리 우애하려고 한들 어찌 그럴 시기가 있겠는가? 아! 내가 불초(不肖)함으로 인하여 지나간 해에 효도할 수 없었으니,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몇 해 전에 《상훈(常訓)》을 지었고 지난해에 《심감(心鑑)》을 지었지만, 단지 저절로 마음이 서글프다. 아! 《상훈》과 《심감》이 어찌 나를 낳으시느라 애쓰고 힘쓰신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채울 수 있겠는가? 몸은 편전(便殿)에 있지만 마음은 서교(西郊)120) 에 매어 있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감회를 견디기 어려워 옷깃을 여미고 앉아 몸소 제사하는 것을 대신하게 하고, 승선(承宣)에게 명하여 한 편(篇)을 읽게 하였으니, 옛날 사람이 육아(蓼莪)121) 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던 것을 본받는 의미이다. 이로 인하여 감회가 일어나 조목을 따라 회포를 서술하였으니 우리 원량(元良)에게 보이도록 하라.
아! 원량에게는 지금 장락궁(長樂宮)에서 만년을 편안히 지내시는 영광이 있고, 용루(龍樓)에서는 기쁨을 받드는 즐거움이 있으니, 내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교훈하더라도 어찌 쉽사리 감동시키겠으며, 뒷날 또한 돌이켜 후회함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크게 훈계하고 유시한 《상훈(常訓)》·《자성편(自省編)》·《심감(心鑑)》 등의 글을 가지고 그 말이 얕고 속되다고 말하지 말고 또한 몸소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 잘 지켜서 내가 바로 글이고 글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면, 어찌 돌이켜 후회하여 미치지 못하겠는가?
아! ‘하늘을 공경하라.[敬天]’는 두 글자는 바로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인데, 얇은 덕으로 잘 체득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성균관에서 기숙하면서 감회가 일어나 팔목(八目)의 맨앞에 서문(序文)을 썼는데, 조목은 비록 나뉘어졌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오륜(五倫)을 돈독히 하고 오륜을 떳떳하게 하는 것이 곧 하늘의 이치를 본받는 것이고, 친한 이와 친목하는 것이 바로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며, 주밀하여 사당(私黨)을 맺지 않는 것이 바로 공변된 것이니, 공변된 것은 바로 천도(天道)이다. 공평하여 치우침이 없는 것이 바로 홍범(洪範)이고, 편당(偏黨)을 없애는 것이 바로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되, 백성은 때를 맞추어 부려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하늘의 도리를 본받아 인(仁)을 행하는 대도(大道)이다. 비용을 절약하려면 검소하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천명(天命)의 거취(去就)는 학문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역대(歷代)의 치란(治亂)은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분변할 수 없으며, 효(孝)와 제(悌)에 대해서도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극진히 할 수 없고,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데에도 학문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 또한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아! 지난날의 사첩(史牒)에 제왕의 자질과 성품이 비록 아름답다 하더라도 간혹 조금 편안한 것을 인해서 두 사람같이 나뉘어지는데, 이것이 어찌 달리 그러하겠는가? 그것은 학문에 대해 실질적인 공부를 착수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아! 만약 하늘을 공경한다면 어떻게 감히 학문에 방심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으며, 만약 학문에 부지런하다면 어떻게 하늘을 공경함이 돈독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상훈(常訓)》 가운데에서 시작하는 조리(條理)와 마무리짓는 조리를 지은 까닭이다. 비록 그렇다 하나,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으며, 책을 저술함에 이미 앵무새처럼 말만 잘한다고 탄식하였었는데, 지금 나의 이 교훈은 문득 말로만 가르치는 듯하다.
지금의 세도(世道)를 돌아보고 중외(中外)를 두루 살펴보건대, 한결같이 믿을 만한 곳이 없으므로 뒷날 저승으로 돌아가 선대왕을 뵈올 때에 우리 백성을 가지런히 한 것을 가지고 말하면 이미 아뢸 만한 것이 없으며, 붕당(朋黨)을 조정한 것을 가지고 말하면 역시 아뢸 만한 것이 없으니, 책을 어루만져 탄식하면서 진실로 말하고 싶지가 않다. 아! 올해는 바로 성조(聖祖)122) 께서 즉위하여 중흥시키신 해이며, 이때는 바로 소자(小子)가 궁검(弓劍)을 더위잡을 수 없는 때이다. 아! 원량은 이런 때에 매우 두려워하여 때를 놓친 탄식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6월 9일 무진
임금이 진연(診筵)에 나아가 제조 원경하(元景夏)에게 하문하기를,
"박수유(朴垂裕)와 이관섭(李觀燮)의 사건은 어떠한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이 한창 위세를 떨쳤을 때에 붙좇은 자로 어찌 유독 박징빈(朴徵賓)만 처벌이 그 자식에게 미쳤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해년123) 반정(反正)하던 날에 정청(庭請)했던 여러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청하니, 인조[仁廟]께서 하교하시기를, ‘정청에는 나도 참여하였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훌륭하다. 나 또한 김일경보다 앞서 책을 펴서 읽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성조(聖祖)의 이 하교는 바로 진정시키는 의도입니다. 대북(大北)의 자손으로 지금 벼슬하는 자 역시 많습니다만, 박수유의 사건에 대해 신은 공변된 의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박징빈이 김일경을 붙좇으면서 한 차례 윤순(尹淳)을 탄핵하는데 불과하였지만, 김일경의 압객(狎客)이 되었던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조진희(趙鎭禧) 같은 자는 공연히 홍계적(洪啓迪)을 죽인 자인데, 오히려 조정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여 있습니다. 홍계적이 일찍이 조송(趙松)은 죽일 만하다고 말하였었는데, 조진희는 이미 죽일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조송의 사건을 알 것이라고 여겨 이것을 가지고 죄를 얽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그는 승자(陞資)하여 의주 부윤이 되었으며, 지금은 또 선조(先祖)의 시종(侍從)이라 하여 동지 부총관(同知副摠管)이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박징빈의 자식이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이 되어 번번이 탄핵과 논박을 받았지만, 성세(聖世)에서는 인물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니, 이것은 지나치다. 그리고 이관섭이 논박을 당한 것은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의 말에 격동이 되어서 발설한 것인가, 단지 윤취상(尹就商)의 외손(外孫)이라는 것으로 이 말을 한 것인가? 그것이 깨끗한 것인지 준엄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지금 조진희를 기용한 것 또한 널리 기용하는 뜻인가?"
하자,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널리 기용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문장이 훌륭하고 언의(言議)와 수화(數化)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신축년124) 과 임인년125) 사이에는 준엄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정미년126) 뒤로 신의 형과 가까이 지냈는데, 신의 형은 함께 공부한 옛날의 정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버리지 않았습니다. 신도 이조 판서가 되어서 역시 감사로 의망(擬望)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박수유는 공격하고 조진희는 기용하니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조진희를 진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며, 또한 선조(先朝)의 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관섭에 대한 일을 진달하라."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도제조(都提調)가 이관섭이 정우량(鄭羽良)과 친한데도 이관섭은 정우량이 친하게 여기는 바가 아니고, 바로 윤급(尹汲)의 여러 사람들과 친한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일찍이 폐과(廢科)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오늘날 세상에 이와 같은 외가(外家)를 두고서도 재상(宰相)의 반열에 참여하는 경우가 또한 많으니, 폐과시킨 뜻이 신은 옳은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과거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고, 그가 의리로 처신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6월 10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구 관백(關伯)에 대한 예단(禮單)의 수효를 참작하여 마련하되, 국서(國書)에는 두 임금에게 위문한 예의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도록 하고, 인해서 하교하기를,
"임진년127) 의 일기(日記)를 보니 범릉(犯陵)128) 한 원수는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한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각능에 이미 모두 비석을 세웠으니 이 두 능에만 없게 할 수는 없다. 만약 비석을 세운다면 뒷 면에 어떻게 써야 하겠는가? 만약 그 사실을 써야 한다면 차마 못할 바가 있다."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단지 모년(某年) 모월(某月) 일(日)에 다시 봉분(封墳)을 쌓았다고 쓴다면 곡진함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오히려 차마 하지 못하겠으니, 전면에 단지 모대왕릉(某大王陵)이라고 써야 하겠다."
하자, 부사직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비석을 세우면서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비석을 세우는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비석을 세우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규례가 아니라면 세우지 않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수찬 황합(黃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 관록(館錄)129) 이 겨우 완성되었을 적에 물의(物議)가 들끓어 부녀자와 어린이도 모두 그것이 외람되고 잡스러움을 알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관원(館員)이 소장을 갖추어 더러 원록(原錄)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논하기도 하고, 더러 도당(都堂)에서 정밀하게 뽑도록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초고본(草藁本)을 다투어 전달하여 많은 사람의 눈을 거치게 되니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이미 올린 소장은 공의(公議)로 논한 것과 같았는데도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실제로 앞장섰으니, 특별히 고치도록 허락하시어 영선(瀛選)을 소중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합이 ‘신록(新錄)하던 때에 그것을 말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황합 혼자만 그것을 알았을 리가 있겠는가? 이것은 밖으로 물의(物議)를 핑계대어 한 번의 관록을 막는 것이다."
하고, 뒤에 황합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소장 가운데 말한 외람되고 잡스럽다는 등의 말에 대해 하문하자, 자핵(自劾)하는 것으로 대답하면서 끝내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으므로, 잡아다 처치하도록 명하였다.
정익하(鄭益河)를 대사헌으로, 권상일(權相一)을 집의로, 이규채(李奎采)·권기언(權基彦)을 지평으로, 임순(任珣)을 정언으로, 어석윤(魚錫胤)을 교리로, 홍익삼(洪益三)을 사서로, 조명정(趙明鼎)을 보덕으로, 홍봉한(洪鳳漢)·이종적(李宗迪)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1일 경오
임금이 비국 당상과 일찍이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곤임(閫任)130) 을 거친 사람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함경 감사 이종성(李宗城)의 군제(軍制)를 변통하자는 소장을 가지고 그 편부(便否)에 대해 하문하고, 또 그 나머지 쌓여 있는 것을 다시 진달하라는 뜻을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종성에게 유시하도록 하였다.
장령 강봉휴(姜鳳休)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옥(玉)같은 자질을 타고나셔서 조용한 자태가 빼어나시니, 전하의 사기(辭氣)와 용색(容色)은 동궁에게 법이 되지 않음이 없으며, 정령(政令)과 형상(刑賞) 또한 동궁이 계승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즐거워하고 노여워하는 즈음에 간혹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있으며, 말씀과 얼굴빛에서도 비상(非常)한 하교가 많으므로, 신료(臣僚)들이 모두 탄식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춘궁 저하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아! 염치(廉恥)는 바로 왕정(王政)의 풍속이 관계되는 바이니, 임금이 된 도리는 반드시 경계하고 면려하는 것으로 그 신하를 대우하여야 하고, 신하가 된 도리는 반드시 염치로써 그 임금에게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신 상하가 더러는 이익을 취하는 것 때문에, 더러는 권모 술수 때문에 마침내 예의를 무너뜨리고 풍속을 허물어뜨리는 데 이르고야 말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작록(爵祿)과 명리(名利)는 국가에서 권장(勸奬)하고 격양(激揚)하는 것인데, 주거나 빼앗는 즈음에 편벽된 데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세상의 법식이 떨치지 못하고 풍습이 점점 해이해져서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여 구차스럽게 경영하고, 세력이 성하고 약한 데에 따라 붙좇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으므로, 염우(廉隅)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으니, 그 나라의 정치가 어떻게 청명(淸明)하고 정숙(正肅)할 수 있겠습니까?
아! 언로(言路)라는 것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입니다. 전하께서 간언(諫言)을 구하는 정성에 소홀하지는 않지만, 와서 간하는 데 대해 노여움을 도로 일으켜, 말이 군덕(君德)에 미쳐서 숨김이 없는 뜻을 대략 펴면 천청(天聽)을 현혹시키고 일이 조정에 관계된다고 말하고, 조금 바르게 경계하는 정성을 나타내려고 하면 시상(時象)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힌다고 배척하여 매번 신자(臣子)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리시고, 특별히 신자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죄과를 감단(勘斷)하십니다. 그래서 온 조정에서 서로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꺼려하여 차라리 말하지 않는 대간(臺諫)이 될지언정 성세(聖世)에 버림받는 인물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하고는 오직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이른바 대각(臺閣)에서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얼굴빛이 변하게 하면 재상(宰相)이 대죄(待罪)한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다. 강봉휴가 입시하니 조목을 따라 하문하고, 하교하기를,
"그대에게 별로 근거 없는 것이 있는데, ‘권모 술수[權數]’ 두 글자로 은연중에 이미 죽은 대신을 지목하여 배척하였는데, 이는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우선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또 명적(名籍)에서 빼버리고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6월 12일 신미
유성(流星)이 기성(箕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은 갑자년131) 〈이괄(李适)의 난 때에〉 무위(武威)를 떨친 공로가 크다. 그런데 그의 자손이 가난하다 하니 평소 탄식하였었다. 지난번에 화상(畫像)을 보니 드문 인물이라고 말할 만하다. 예조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고 종손(宗孫)이나 지손(支孫)을 논하지 말고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그리고 정충신(鄭忠信)도 마찬가지이니 그의 자손도 조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서 홍익삼(洪益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수찬 황합(黃柙)의 소장을 보건대, 이른바 관원(館員)이 소장을 갖추었다고 말한 것은 신의 지난날 일을 가리킨 듯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에 신록(新錄)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 마침 의견이 어긋난 바가 있어서 과연 이것을 도당록(都堂錄)에서 정밀하게 가려낼 것을 청하려고 하였었으나, 혹시라도 전록(全錄)이 막히게 될까 염려하여 과연 탈고(脫藁)하지 않았었습니다. 유신이 이른바 많은 사람의 눈을 거쳤다고 한 것은 아마도 전하여 들은 것이 지나친 듯하며, 그 정록(政錄)에 대한 말과 같은 것은 더욱 실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그 때 연신(筵臣)이 이미 지명(指名)하여 주달(奏達)하였더라면, 신이 혼잡하게 배척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김명은(金鳴殷)의 회방(回榜)132) 때에 꽃과 식물(食物)을 내리되, 해조(該曹)와 해도(該道)로 하여금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김명은은 안주(安州) 사람으로서, 숙종 정묘년133) 에 과거에 급제하여 나이 88세이었다. 대신이 선조(先朝)의 고 판서 이광적(李光迪)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6월 14일 계유
탁지(度支)134) 에 명하여 신사(信使)가 가지고 갈 예단(禮單)은 모두 기해년135) 에 고쳐서 마련했던 것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예조에서 말한 것을 따른 것이었다.
6월 15일 갑술
임금이 영남 어사 한광조(韓光肇)를 불러 보았는데, 한광조가 말하기를,
"방군포(防軍布)136) 는 바로 대가를 지급하는 물건이며 곤수(閫帥)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좌수사(左水使) 신만(申漫)이 약간만 대가로 지급하게 하고, 전부를 가져다 썼습니다. 쌀 50석(石)과 판재(板材) 5구(具)를 배에 실어 올려 보냈는데, 기타 왜국(倭國)의 물화(物貨)로 선물[善事]할 만한 것이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전 경주 부윤(慶州府尹) 정홍제(鄭弘濟)는 진정(賑政)을 아주 잘하였으나, 9천여 석을 요리(料理)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으며, 또 범수(犯手)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 좌병사 유동무(柳東茂)의 불법(不法)은 문서에 갖추어 있습니다. 그리고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덕후(金德厚)는 그의 모든 짐바리를 모두 소[牛]를 사서 보냈는데, 그 수효가 94두(頭)나 되었으나, 또 서로 결탁한 영비(營裨)137) 가 거짓으로 칭찬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아 대부(阿大夫)138) 이다. 잘 다스린 사람은 누구인가?"
하자, 한광조가 말하기를,
"사천 현감(泗川縣監) 이사순(李思順)은 지처(地處)가 비록 한미하기는 하나, 아주 잘 다스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덕(盈德)의 옥사(獄事)는 향전(鄕戰)에서 나왔는가?"
하자, 한광조가 말하기를,
"영덕의 고가(故家)와 대족(大族)은 모두 남인(南人)인데, 이른바 신향(新鄕)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서인(西人)이 되었다고 일컫는 자입니다. 요즈음에는 서인이 학궁(學宮)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으나, 구향(舊鄕)과 서로 경알(傾軋)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자(朱子)의 화상(畫像)이 비가 스며든 것으로 인하여 더럽혀졌기 때문에, 신향의 무리가 간혹 그 죄를 성토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화(禍)를 전가(轉嫁)시킬 계획을 꾸며 그 화상을 감추고, 아울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화상도 감추어 버리고는 남인이 훔쳐 갔다고 말을 퍼뜨렸습니다. 인하여 모모(某某) 7인의 성명을 지적하여 본현(本縣)에 정소(呈訴)하였는데, 본현에서는 진영(鎭營)에 통보하여 여러 해 동안 추핵(推覈)하면서 형장(刑杖)이 혹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원통하다고 일컬었었습니다. 신이 내려간 뒤에 그 사실을 추핵하여 알아내었으나, 화상이 간 곳은 끝까지 바로 공초하지 않고, 안산(案山)에 묻어 두었는데 사태(沙汰)가 났다고 하니, 물과 불에 던져 버리지 않았음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몇 해 전에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상소하였었다."
하였다.
6월 16일 을해
대신과 추조 당상관과 영남 어사를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영덕(盈德)에 갇혀 있는 죄인을 모두 법조(法曹)로 올려 보내어 주자의 영정(影幀)이 간 곳을 엄중히 신문해서 자복을 받도록 하고, 전일에 갇혔던 여러 사람들은 본도로 하여금 즉시 석방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그 당시의 현령(縣令)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중률(重律)로 감단(勘斷)하게 하고, 아객(衙客) 최덕후(崔德垕)는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체포하여 추조에 보내어 일체로 엄중히 신문하도록 하라. 어사가 아뢴 가운데 탐욕한 관리인 유동무(柳東茂), 신만(申漫), 김덕후(金德厚), 정홍제(鄭弘齊), 이하징(李夏徵), 윤득징(尹得徵), 전천상(田天祥), 김취보(金就寶)는 모두 해부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장오(李章吾)를 승지로, 송수형(宋秀衡)을 대사간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집의로, 김시찬(金時粲)을 사간으로, 홍익삼(洪益三)·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윤광찬(尹光纘)·홍서(洪曙)를 지평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사서로, 김상로(金尙魯)를 이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형조 판서로, 김상철(金尙喆)·오언유(吳彦儒)를 교리로, 민백상(閔百祥)을 부교리로, 이규채(李奎采)를 수찬으로, 윤지태(尹志泰)를 보덕으로, 남학종(南鶴宗)을 정언으로, 서효수(徐孝修)를 설서로 삼고, 신만과 서명빈(徐命彬)은 모두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더하게 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승진시켜 발탁하도록 주청하였기 때문이었다.
6월 17일 병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서 한광회(韓光會)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마침 관직(館職)에 참여하여 합계(合啓)한 양신(兩臣)이 연달아 배척당하여 전보(轉補)되는 것을 직접 보고 적이 근심하여 개탄하는 정성에 덧붙여 대략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라는 청을 진달하자, 당인(黨人)이 원수처럼 미워함이 점차 심해지다가 과연 이영조(李永祚)의 소장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소장에서 이른바 영남의 막료(幕僚)란 말은 바로 신이 잠시 왕래(往來)했던 지역인데도 그의 말이 저와 같았으니, 신은 진실로 황홀(怳惚)하여 그것이 무엇을 지목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피사(避辭)를 보기에 이르러서는 한두 가지 일을 얽어내어 죄안(罪案)을 만들고, 직접 처리하며 추잡하게 욕을 하였으니, 신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별난 사람의 일과 같습니다. 아! 마음과 태도는 곧 사대부가 아주 부끄럽게 여겨야 할 제목(題目)인데, 대신(臺臣)이 스스로 반성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쉽사리 다른 사람에게 가하였습니다. 신축년139) 과 임인년140) 의 화심(禍心)을 고치지 않은 채 오히려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여론(餘論)을 비호하였는데, 마음과 면모가 같지 않고 뜻과 자취가 각기 다르니, 대신(臺臣)과 같은 자인 후에야 바야흐로 마음을 바꾸고 상반된 태도를 짓는 데로 돌아가게 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영조(李永祚)가 배척한 것은 그것이 지나친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대의 소장은 어찌 이와 같이 심하게 드러내는가? 이러한 풍습은 마음속으로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6월 18일 정축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6월 19일 무인
임금이 경기의 세 목사(牧使)를 입시하도록 명하고, 백성들의 병폐를 하문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왕년에 호서(湖西)의 네 주목(州牧)을 불러서 하문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백성을 위하는 성의(盛意)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오늘 세 목사를 입시하게 하여 마음을 터놓고 가난한 백성들의 폐단을 진달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는 바로 백성들의 병폐를 앞장서서 진달할 때인데, 세 목사가 단지 군기(軍器)와 관해(官廨)의 폐단만 진달하고 나머지는 한 가지 일도 아뢴 것이 없었다. 아! 지금의 세상이 이미 화락하여 백성들이 잘 지내는 때가 아니라면, 어찌 그 폐단이 없겠는가? 만약 이런 일을 칙려(飭勵)하지 않는다면, 한갓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입시한 세 목사는 모두 녹봉의 3등(等)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0일 기묘
임금이 춘추관 당상에게 명하여 인조[仁廟] 계해년141) 반정(反正) 때의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베껴서 일기청(日記廳)에 내주고, 다듬고 정리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입시한 한림(翰林)이 불가하다고 여러 번 간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6월 21일 경진
유신(儒臣)을 불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 걸군(乞郡)하는 것도 한 가지 폐습(弊習)입니다. 그 중에 비록 정세를 남들이 모두 아는 자라 하더라도 진달하여 걸군하는 소장이 전후에 서로 잇달고 있는데, 이름난 고을과 부유한 고을을 문득 편리함을 차지하는 바탕으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대각(臺閣)에서 일을 논하는 것은 의도가 나쁜 일을 밝히고 바로잡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의 풍습이 날마다 변하여 염우(廉隅)가 모두 상실되었습니다. 무릇 비평이나 탄핵을 당해도 심상(尋常)한 것처럼 보고 곤수(閫帥)와 읍재(邑宰)를 논할 것 없이 태연하게 일을 보살피며 편안하게 모르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대각의 논의가 그 사이에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수 없으면, 어찌 대각을 설치하여 관원의 간사함을 바로잡는 의미가 있겠습니까? 함안 군수(咸安郡守) 윤붕거(尹鵬擧)는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 취할 만한 재능이 없는데, 외람되게 대망(臺望)에 통의(通擬)되었으며, 두 번이나 지방의 고을을 맡아 탐학(貪虐)하고 비루한 형상이 앞서 서읍(西邑)을 맡았을 적에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이 고을에 제수되자, 옛날의 습관을 고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바야흐로 대단합니다. 신은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대간의 선발에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걸군(乞郡)하는 폐단을 진달한 것은 대관의 체모를 얻었다고 하고, 윤붕거의 일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22일 신사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에게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세 가지 일이 있는데, 경(卿)들에게 유시하겠다. 첫째 여러 신하들이 내가 ‘일하는 데 싫증을 내고 있다.[倦勤]’고 하는데, 일하는 데 싫증을 낸다고 하는 것은 요(堯)임금의 아름다운 제목(題目)이다. 요즈음 환시(宦寺) 가운데 장주(章奏)를 읽어 진달할 만한 자가 없어서 간혹 비답을 쓰도록 명하면 번번이 잘못 쓰는 경우가 많으니 내 마음도 답답하다. 승선(承宣)은 비록 간혹 잘못 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사관(史官)이 곁에서 제기하여 깨우쳐 주니, 이것이 폐단을 제거하게 된다. 둘째 내가 당기(唐紀)를 보다가 현종(玄宗)이 촉(蜀)에 거둥하는 데 이르러 그 전후가 판연하게 다른 것에 대하여 매우 개연(慨然)하게 여겼었다. 지금 내가 비록 여색(女色)에 빠지지 않았다 하나, 만약 해이해지면 아마도 현종과 같이 될 듯하다. 셋째 내가 문자(文字)에 대하여 그전에는 한 번 보면 대략 깨달았었는데, 요즈음 정신이 점차 예전 같지 않으니, 비록 일마다 살피려 하지는 않으나,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은 어떻게 전혀 마음을 느슨히 할 수 있겠는가? 한광회(韓光會)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가 말한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마음을 무릅썼다고 한 것은 마치 김일경·박필몽의 여당(餘黨)이 몰래 치성(熾盛)해진 듯함이 있으니, 어찌 그르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것은 도리어 이영조(李永祚)를 꾸짖는 말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영조 한 사람은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그 폐단은 진실로 무궁한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말한다면,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耉)가 있었을 때에는 이 말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광회가 공을 세우기 위해 정성을 다해서 세도를 어지럽히려고 하였는데, 만약 살펴서 깨닫지 못하고 그에게 이것을 힘쓰라는 것으로 답하였다면, 그 폐단이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내가 정신을 쓰지 않으려는 도리로 경들에게 의논하는데, 경들은 그것을 알겠는가? 원량(元良)은 학문이 비록 진취하지 않았지만 지혜는 남음이 있다. 향사(享祀)에 관한 절차와 군국(軍國)에 관한 일을 내가 어찌 원량에게 위임하겠는가? 그러나 옛날에 대신으로서 합문(閤門) 앞에 누워서 도(道)를 논한 이가 있었는데, 나도 이것을 본받고자 하니, 경들은 내가 휴식(休息)하는 도리를 생각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누누이 하교한 것이 모두 쇠경(衰境)에 관한 뜻인데, 신 등이 천안(天顔)을 우러러 보니 역시 그전과 같지 않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단의 하교는 그 일의 형편에 있어서 결단코 할 수 있는 이치가 없습니다. 휴식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신도 과연 생각하고 헤아려 보았는데, 선조(先朝)에 승지로 하여금 문서(文書)를 줄이도록 한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승지로 하여금 대략을 적어 들이게 한다 하더라도 한광회(韓光會)·박홍준(朴弘儁)의 소장 같은 것은 어떻게 대략을 적겠는가?"
하자,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수상(首相)이 이미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만, 말단의 하교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도승지 이철보(李喆輔)는 말하기를,
"지금의 세도는 한 가지 정치와 한 가지 영(令)도 전하가 아니면 어떻게 진복(鎭服)시키겠습니까? 더구나 동궁(東宮)은 학문에 뜻을 두고 그 길로 나아가기를 바야흐로 부지런히 하니, 성취하는 것이 바로 시급합니다. 여항(閭巷)으로 말하더라도 자손 가운데 크게 기대(期待)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서찰(書札)이나 수응(酬應)이라 하더라도 일체 맡기거나 시키지 아니하고, 그로 하여금 뜻을 기울여 강독(講讀)하도록 합니다. 사가(私家)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더구나 국가이겠습니까? 하교를 비록 누누이 하시더라도 절대로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도 답답하다. 내가 어느 때에 휴식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6월 23일 임오
헌부 【지평 홍서(洪曙)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달 초7일은 바로 명릉(明陵)142) 의 기신(忌辰)으로 재계(齋戒)해야 하는 날입니다. 성상께서 친히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하셨으니 신민(臣民)들의 슬퍼하고 사모함이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혜민서의 훈도(訓導)와 호조의 산원(算員)의 무리 6, 7인이 대궐 아래 아주 가까운 곳에 모여서 많은 창녀(娼女)를 끼고 종일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술과 고기가 낭자하였습니다. 신이 대각(臺閣)에 들어간 뒤에 그 중의 한두 사람을 잡아다 추문(推問)하였더니, 변명함이 없이 지만(遲晩)하였는데, 모였던 여러 사람들을 일일이 지명(指名)하여 현고(現告)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사모와 각대를 착용하는 낮은 벼슬아치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과 다르니, 그 죄범(罪犯)을 논하면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청컨대 그날 모였던 여러 사람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중히 처벌하여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단의 일은 요사이 대각에서 적막한 때에 대간의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다. 그 무리가 비록 식견이 없다 하나, 만약 창오(蒼梧)143) 산색(山色)의 글귀를 암송한다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가운데 앞장선 사람은 먼 변방으로 정배하고 그 나머지는 먼 곳에다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신을 명소(命召)하여 당기(唐紀)를 읽게 하였다.
권적(權𥛚)을 대사헌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대사간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집의로, 이익보(李益輔)를 부응교로, 조명정(趙明鼎)·이이장(李彛章)을 부교리로, 이응협(李應協)을 수찬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장령으로, 홍익삼(洪益三)을 헌납으로, 임상원(林象元)을 부수찬으로, 민백상(閔百祥)을 문학으로, 홍낙성(洪樂性)을 사서로, 이게(李垍)·한광회(韓光會)를 지평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좌참찬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윤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6월 24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에게 유시하기를,
"어제 영의정에게 유시한 일이 있었는데, 경이 과연 그것을 들었는가? 나의 정신과 기운이 참으로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경이 보호하는 직임에 있기 때문에 또 거듭 유시하는 것이다."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이 보호하는 지위에 있으니, 무릇 성궁(聖躬)을 보호할 만한 것이라면, 무슨 일인들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이 전교에 이르러서는 과연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상(太上)은 내가 감히 바라지 못하지만, 내가 바라는 바는 바로 그 다음이다."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옛날 숙종[肅廟] 정유년144) 에 청정(聽政)한 고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정유년에는 대조(大朝)의 성수(聖壽)가 이미 60세에 가까웠고, 동궁(東宮)의 예령(睿齡) 또한 30세에 가까웠으며, 질환(疾患)이 경인년145) 이후 8년 동안 고질이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청정하는 거사가 있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비록 조용히 조섭하는 가운데 있다 하나, 오히려 옛날의 고질과 같지 않고, 동궁이 학문에 바야흐로 부지런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처지에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하교를 내리십니까? 신축년146) 에 전하를 받들고 잠저(潛邸)에서 들어와 전하께서는 승평(昇平)하는 아름다움을 누리셨고, 소신 또한 전하의 은혜를 의뢰하여 부귀(富貴)가 극도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이런 하교를 받게 되었으니, 어찌 결연(缺然)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과연 억지로 하기가 어렵고 동궁의 예령이 더 많다면, 비록 태상(太上)이라한들 어떻게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하교는 이미 태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성궁(聖躬)에 보탬이 있다면 신이 어찌 기필코 그것을 다투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의 시세를 돌아다보면 결단코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세 건(件)의 일을 가지고 유시를 내리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번의 이 세 건에서 첫째는 성후(聖候)에 관한 것으로 신이 이미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둘째는 당(唐)나라 명황(明皇)147) 이 촉(蜀) 땅에 거둥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명황이 중년(中年) 이전에는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을 썼는데 등용했던 사람은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이었으며, 중년 이후로는 부귀(富貴)를 누리고 번화(繁華)하였는데 등용했던 사람은 양국충(楊國忠)과 이임보(李林甫)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시상(詩象)에 관한 것인데, 한광회(韓光會)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완론(緩論)이 준론(峻論)을 배척하는데, 언제나 이 때문에 이야깃거리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날의 준론은 신축년(辛丑年)이나 임인년(壬寅年)의 준절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신도 신축년과 임인년의 편당(偏黨)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한광회가 이영조(李永祚)를 지목하여 배척한 것은 괴이하지 않으니, 이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대체(大體)를 가지고 말을 한다면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20여 년이 되었으니, 어찌 지리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지금은 바로 국사(國事)를 정제하여 세자에게 물려 주어야 할 때입니다."
유신을 명소하여 당기(唐紀)를 읽도록 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김상복(金相福)을 수찬으로, 유주기(兪胄基)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6월 25일 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원경하(元景夏)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동평위(東平尉)148) 의 《문견록(聞見錄)》을 보았더니, 효종께서 일찍이 여러 부마들에게 감귤을 내리시고, 그 자손에게 편당을 만들지 말도록 경계하셨다고 한다. 효종의 외손[外裔]으로 좌의정과 경이 있는데, 김양택(金陽澤)은 말할 것이 못되고 조명리(趙明履) 또한 그르다."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아무리 현명한 이라 하더라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매번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이에 정도에 지나친 하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일이 닥치면 따르고 적응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미 죄를 주었으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요즈음 장주가 황홀한 때문에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교하셨는데, 신은 살펴보는 것이 한갓 성상의 심려만 허비할 뿐이라고 여깁니다. 대체로 하늘은 바로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큰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나는 새나 헤엄치는 물고기나 동물과 식물 가운데, 나는 새를 뛰는 짐승이 되게 할 수 없고 뛰는 짐승을 나는 새가 되게 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만물은 각기 만물을 의뢰하여 각기 그 본성을 이룬 후에야 바야흐로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큰 존재의 도(道)가 되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나는 새로 하여금 뛰는 짐승이 되게 하고, 뛰는 짐승으로 하여금 나는 새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살피려고 한 것이었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의 진실과 허위는 전하께서 벌써 통촉하시니, 하문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가운데 속한 사람으로, 혹 언자(言者)와 같기도 하고 혹은 논박받는 자와 같기도 한데, 가까운 연석(筵席)에서 진실로 감히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지는 못하겠지만, 친숙하면 옳게 여기고 소원하면 그르게 여기는 것이니, 이런 마음으로 진달하기 때문에 모두 공정한 말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진달한 바는 대체로 옳다."
하였다.
내사(內司)의 차인(差人)으로 금법을 어기고 강원도의 황장목(黃腸木)을 벤 자가 있었는데, 특별히 해도(該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율(律)에 의거하여 과단(科斷)하도록 하였다.
6월 26일 을유
유성(流星)이 수녀성(須女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6월 28일 정해
임금이 재계(齋戒)하는 밤에 감회가 일어남으로 인하여 원량(元良)에게 글로 유시하기를,
"아! 내가 의릉(懿陵)149) 에게 신축년150) 이전에는 단지 군신(君臣)의 분수와 수숙(嫂叔)의 의리만 있었는데, 신축년 이후로는 자식의 도리도 겸하였었다. 세상에 어찌 형제(兄弟)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날에 내가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황형(皇兄)이 내려준 것이고, 황수(皇嫂)의 은혜이다. 지금 10년을 받들어 모셨지만 빠르게 지나간 것이 꿈만 같다. 그래서 언제나 휘일(諱日)이 되면, 감회가 더욱 절실하다. 내가 비록 형을 공손히 섬기지 못했지만, 어찌 차마 한갓 너에게 권면하기 위해서 억지로 이 글을 짓는 것일 뿐이겠는가? 아! 요순(堯舜)의 도리도 효제(孝悌)일 뿐이었으니, 뒷날 종묘(宗廟)와 능에서 나를 섬기는 마음으로 황형과 황수를 섬긴다면, 어찌 한갓 네가 어버이의 마음을 본받는 것일 뿐이겠는가? 이는 네가 효제를 다하지 못한 나의 한탄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 아! 만약 혹시라도 정성이 부족하면 종고(鍾鼓)를 뜰에다 설치하고 옥백(玉帛)을 앞에 진열할망정, 내가 만약 알게 되면 어찌 마음에 근심하여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네가 올린 제물(祭物)에 기꺼이 흠향하겠는가?
밤중에 감회가 일어나 참지 못하고 승선(承宣)을 불러 부르는 대로 적게 하였는데, 바로 제사지내는 시각을 맞아 멀리 동교(東郊)를 바라보니 심장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또 〈황형의〉 병세가 위독하였을 때 나를 위하여 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게 하라고 하신 자상하신 뜻을 생각하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비록 찌는 듯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어떻게 문을 열라는 하교를 듣겠는가? 생각의 일어남이 여기에 미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덮는다. 아! 원량은 마음에 잊지 말고 새겨 두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9일 무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영종(英宗)이 번저(藩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그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집을 잘 지켜 달라.’ 하고, 인해서 책 몇 상자를 싸가지고 들어갔었다. 나도 잠저(潛邸)에서 들어올 때에 단지 몇 권의 책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도제조가 바로 그 당시 춘방(春坊)의 관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고 좌상 송인명(宋寅明)에게도 말을 하였었다. 옛날 우리 명종 대왕(明宗大王)이 일찍이 하교하기를, ‘내가 명(明)자를 얻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하셨는데, 나는 송나라 영종의 자질과 성품이 매우 높다는 것으로 희망하는 바가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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