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7월

싸라리리 2025. 9. 3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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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기축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구식(救食)하도록 명하였다.

 

7월 2일 경인

임금이 유신을 불러 당기(唐紀)를 읽도록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문재(宋文載)를 검열로 삼았다.

 

7월 3일 신묘

함경 감사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북방[朔方]에서 나라를 일으키셨고,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서는 육진(六鎭)을 건치(建置)하였는데, 그 백성들에게는 변경을 지키는 수고로움은 있어도 조용(租庸)의 부과는 없었으며, 그 군사에게는 기갑(騎甲)이라는 칭호는 있었지만 노로(奴虜)151)  라는 비천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위군(五衛軍)은 이미 혁파하고, 속오군(束伍軍)으로 변경하여 1백 년 동안 시행해 오다가, 또 오위군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선왕의 법은 이미 을유년152)  에 변경하였는데, 지금의 성규(成規)는 오위군과 속오군을 합하여 군제(軍制)를 이루고, 세초군(歲抄軍)과 단속군(團束軍)을 섞어서 군액(軍額)을 삼는 데 불과합니다.
신이 지난번에 올린 소장에서 이른바, ‘군무(軍務)는 일정한 제도가 없고, 군사는 정해진 인원이 없다.’고 했던 것은 진실로 유비연(柳斐然)이 오위를 회복시키고 속오군을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청한 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위군은 업무가 고달프고 중하나 속오군은 가볍고 수월하며, 옛날에 군사가 된 자는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균일하였으나 지금 군사가 된 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르며, 옛날에 군대를 만들 적에는 액수(額數)가 있었지만 지금은 군대를 만들면서 액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분수(分數)는 간교함이 섞이고 폐단이 생겨 그 형세가 저절로 달아나 회피하는 데 이르러 그 거취(去就)를 마음대로 합니다. 대저 거취를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달아나 회피하는 경우를 당하면, 누가 그것을 막아서 길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천례(賤隷)로 재산이 부유한 자에 이르러서는 모두 군적(軍籍)에서 빼고, 향족(鄕族)의 빈궁한 자들을 점차 졸오(卒伍)에 보충하니, 백성들은 일정한 뜻이 없어져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날마다 자라나고, 선비들은 본분을 상실한 채 근심하여 원망하는 기운만 날로 쌓여갑니다.
신이 이른바 오위군과 속오군을 모두 혁파하고 고을마다 각기 마병(馬兵)과 보병(步兵) 몇 초(哨)를 정한 다음 평상시에는 조련(操鍊)에 나아가게 하고 난리에 임해서는 적을 막도록 활용하며, 또 영속(營屬)과 읍속(邑屬) 각기 몇 사람을 정하여 평상시에는 사환(使喚)을 삼아 공급(供給)하게 하고 난리에 임해서는 수하(手下)의 친병(親兵)으로 삼도록 하며, 각 고을의 수령은 직접 호적(戶籍)을 살펴서 지금 유청군(有廳軍) 가운데 무학(武學)을 익힌 자들로 마병을 만들고, 기병·보병·갑사(甲士)와 내시노(內寺奴)로 보병을 만들어 병영(兵營)에 소속시키고, 군청군(軍廳軍)은 각 고을에 소속시키며, 그 나머지 토병(土兵)·일수(日守)·공장(工匠)·봉군(烽軍)·해부(海夫) 등속은 각기 그 전대로 하되, 이 밖에 나머지 수는 모두 성정(城丁)을 삼는다면, 어찌 간편하면서도 행하기에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먼저 상확(商確)한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7월 4일 임진

유성(流星)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한사득(韓師得)·황재(黃梓)를 승지로 삼았다.

 

임천(林川) 등의 고을에 게[蟹]의 손상이 있었고, 결성현(結城縣)에 명충(螟蟲)의 피해가 있었다.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독하였다.

 

7월 5일 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구 관백(關白)에 대한 예폐 인삼(禮幣人蔘)을 당초에 40근 마련하였는데, 듣건대 저들이 사(四) 자를 꺼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내는 물건 가운데 원래 사 자가 없다고 하니, 저군 예폐(儲君禮幣)에 의거하여 30근으로 계하(啓下)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유동무(柳東茂)·정홍제(鄭弘濟)·김덕후(金德厚) 등을 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잡아다 추문(推問)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만약 바른 대로 공초하지 않으면, 공초를 받지 말고 곧바로 초기(草記)하여 형신(刑訊)하도록 명하자 판의금부사 김약로(金若魯)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공초를 받지 않고 형신하도록 청하는 것은 전례가 아닙니다. 신 등이 법을 집행하는 지위에 욕되게 있으면서 감히 〈그 길을〉 처음으로 열지 못하겠으므로, 감히 와서 구대(求對)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곧바로 초기하게 한다면 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 윗사람은 준엄하게 하는 데 뜻을 두고 아랫사람은 따라서 그것을 받들기만 한다면, 내준신(來俊臣)153)   같은 부류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으며, ‘막수유(莫須有)’154)   세 글자의 화(禍) 역시 이루어지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 탐욕한 관리의 무리는 전후의 하교를 듣고서 감동함이 마땅한데도 끝까지 사실을 자수하지 않으니, 엄중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바른 대로 진술하면 형신을 베풀지 말고 우선 정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오늘의 빈대(賓對)는 의도한 바가 우연한 것이 아닌데, 영의정이 단지 이태중(李台重)에 대한 일을 재촉하고 조중회(趙重晦)를 조용(調用)할 것과 탐욕한 관리에 대한 형추(刑推)를 도로 거두라는 등의 일을 가지고 진달하고, 민사(民事)에 관한 일은 한마디의 언급이 없었으니, 진실로 개연(慨然)하다. 내가 기운이 성하여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해도 지금의 대신은 회계(回啓)하기를 어렵게 여겨 그대로 두는 것이 많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자리에 나아가 앉아서 강확(講確)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고각(高閣)에 묶어두면 언제 결말이 나겠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먼저 스스로 칙려(飭勵)함으로써 각사(各司)를 경계하도록 하고, 승정원 역시 그 태만(怠慢)함을 성찰하고 신칙할 것이며, 제사(諸司)의 묘유법(卯酉法)155)  을 다시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6일 갑오

경주부(慶州府)에서 윤필성(尹弼成) 등 세 사람이 일시에 벼락에 맞아 죽었다.

 

7월 7일 을미

심성진(沈星鎭)을 승지로, 이중조(李重祚)·임순(任珣)을 지평으로, 홍중효(洪重孝)를 정언으로, 조재덕(趙載德)을 헌납으로, 송능상(宋能相)을 장령으로, 송창명(宋昌明)을 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부교리로, 임상원(林象元)을 수찬으로, 신회(申晦)·어석윤(魚錫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8일 병신

유동무(柳東茂)·정홍제(鄭弘濟)를 형신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았고, 이하징(李夏徵)·김덕후(金德厚)는 모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영남의 탐욕한 관리의 무리가 형신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시험삼아 문안(文案)을 가져다 보았더니, 그 가운데 이미 진정으로 자복한 자와 조사를 행한 자에 대해서는 논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다만, 유독 정홍제(鄭弘濟)의 일에 대해서는 반복하여 조사하였지만 형신할 만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폐고(廢痼)시키는 것도 가하고 귀양보내는 것도 가하지만, 형신한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각 창고의 전재(錢財)를 서로 전대(轉貸)하는 것은 지방 고을에서 통행하는 규례입니다. 그런데 인서(印署)156)  가 있는 대하 문서(貸下文書)는 가명(假名)이라고 말하고, 단지 감관(監官)과 색리(色吏)의 무리가 구두로 공술한 것을 가지고 그가 사사로이 쓴 죄를 증성(證成)한다면, 이는 구두로 공술한 것은 믿고 인서가 있는 문서는 믿지 않은 것이니, 법리(法理)에 찾아보더라도 과연 진실로 마땅하겠습니까? 형벌이란 사생(死生)에 관계되므로 진실로 경솔하게 시행할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일찍이 시종(侍從)을 거친 2품의 관직을 가진 자이겠습니까?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람의 생명이고, 신중히 해야 할 것은 형벌의 집행이며, 염려해야 할 것은 뒷날의 폐단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노(威怒)를 조금 푸시고 다시 더 상세히 조사하여 살펴서 처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다시 헤아려 하교하겠다."
하였다.

 

7월 9일 정유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7월 10일 무술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졸(卒)하였다. 박필성은 효묘의 도위(都尉)로 두루 다섯 조정을 섬겼는데, 나이 90세가 넘었으므로 은총과 대우가 융숭하고 지극하였었다. 임금이 직접 가서 조문하려고 하였는데, 약원에서 간하여 중지하였다.

 

7월 11일 기해

임금이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7월 13일 신축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황합(黃柙)의 상소 가운데 ‘외람되고 잡스럽다.[猥雜]’는 두 글자는 그가 스스로 말을 하고서 그가 스스로 담당하게 되었다. 신록(新錄)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은 끌어댈 만한 단서가 없으니, 이것을 시애(撕捱)하는 자에 대해서는 후원(喉院)에서 그 소장을 받아들이지 말고, 엄중히 신칙하여 공무를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王世子)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춘방(春坊)의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의 관원을 불러다 《자치통감》을 강하게 하였다. 〈한(漢)나라의〉 괴철(蒯徹)이 한신(漢信)을 상술(相術)로 유세하는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동궁(東宮)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덕(德)을 닦지 않으면 관상이 비록 아름답다 하더라도 패몰(敗沒)하는 데에서 구원할 수 없지만, 덕을 닦으면 관상이 비록 나쁘더라도 흥기(興起)하는 데 방해되지 않는다.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반드시 앞으로 네가 숙성(夙成)하다고 칭찬하겠지만, 너는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훌륭한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경계하여 그 덕(德)을 잘 닦아 끊임없이 힘쓰면서 진취하기를 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한현모(韓顯謨)를 대사헌으로, 어석윤(魚錫胤)·한광회(韓光會)를 부교리로, 신만(申晩)을 우부빈객으로, 김상철(金尙喆)을 헌납으로, 이이장(李彝章)·이세사(李世師)를 지평으로, 이응협(李應協)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4일 임인

병조 판서 이주진(李周鎭)·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을 파직하였는데, 일찍이 평안 감사를 맡았을 적에 범월(犯越)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덕후(金德厚)를 양산(梁山)으로, 이하징(李夏徵)을 동래(東萊)로, 정홍제(鄭弘濟)를 하동(河東)으로 귀양 보냈다. 임금이 대신의 차자 내용에 의견이 없지 않지만, 이미 형신하고 다시 조사하는 것은 너무 심한 데 가깝다 하여 아울러 종신 동안 금고(禁錮)하게 하고, 금오(金吾)로 하여금 공의(功議)157)  를 적용하지 말고 계장(計贓)하여 형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수령의 10고(考)에서 5고(考)에 상등을 차지한 뒤에 만약 다른 고을에서 하등을 차지할 경우 앞서 상등의 고과는 삭제하게 하고, 하등으로 고과한 뒤에 다시 상등을 차지하여야 승천(升遷)을 허락하도록 하라."
하였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한 달 전에 동교(東郊)의 정안동(靜安洞)에 집을 지었었습니다. 그런데 영의정이 신의 아비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어느 지사(地師)가 그대가 집을 지은 곳은 바로 국릉(國陵)으로 봉표(封標)한 지역이라고 말했다.’고 하며 훼철(毁撤)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묘당(廟堂)에서 듣고 놀라 의심하는 것은 사리로 보아 진실로 당연하고, 훼철하도록 권유하는 것도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단지 그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말이 전해지면서 잘못된 점이 있으니, 지금 만약 아무 까닭 없이 훼철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뒷날에 또한 점차 더욱 잘못 전해져서 신의 죄를 얽는 자가 앞으로 어떠한 지경에 이를는지 모르겠기에 이렇게 헐기 전에 사실을 들어 우러러 호소합니다. 감히 사실(私室)에서 누워 있을 수 없어서 금오(金吾)에 달려가 엎드려 공손히 부월(鈇鉞)을 기다리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경조(京兆)의 관원과 운대(雲臺)의 관원을 내보내어 그 곳을 적간(摘奸)하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조와 운대로 하여금 적간하게 할 것이니,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다. 적간한 뒤에 김한신이 다시 상소하여 적간한 것이 소략하고 누락되었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적간한 서계(書啓) 및 도형(圖形)과 지사가 말한 것을 보았다. 비록 얻은 것은 없다 하더라도 원근(遠近)을 논할 것 없이 벌써 시끄러운 단서가 발생하였으면, 다른 신하들과 비교하여 구별이 있으니 스스로 철거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또 상소하였으니, 경계가 없을 수 없다. 그 상소는 돌려주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5일 계묘

정우량(鄭羽良)을 병조 판서로, 김약로(金若魯)를 호조 판서로, 조명건(趙明健)을 헌납으로, 조명정(趙明鼎)을 교리로, 홍우한(洪羽漢)을 부수찬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정언으로, 권혁(權爀)을 이조 참의로 삼았고,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조명교(曺命敎)를 부사로, 조명정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7월 16일 갑진

원점 유생(圓點儒生)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생원 정술조(鄭述祚)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7월 17일 을사

어영 대장 구성임(具聖任)을 파직하였다. 당시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문에서 창고를 지으며 남산(南山)에서 돌을 주웠는데, 감역(監役) 송학상(宋學相)이 경조(京兆)에 보낸 첩정(牒呈)에 몹시 패악(悖惡)한 말이 많았다. 병조 판서와 어영 대장이 모두 인입(引入)하였으므로 송학상을 잡아다 조처하고, 임금이 도성(都城)에서 돌을 떠내는 것은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런 명이 있었는데, 금위영에서는 돌을 줍기만 하고 돌을 떠내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논하지 않았다.

 

전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다시 전임에 제배(除拜)하였는데, 동가(動駕)가 하루 남았기 때문이었다.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7월 18일 병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대궐로 돌아올 때에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금군 별장(禁軍別將) 조덕중(趙德中)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착용한 갑옷에 덮개만 있고 쇠로 댄 부분이 없어 다른 군사들이 착용한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7월 19일 정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도성(都城)을 나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수상(首相)이 도위(都尉)와 서로 겨루니, 장차 어떻게 그 자리에 나가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잇따라 또 차자를 올리고 또 도성을 나갔는데, 연석(筵席)에서 무상(無狀)한 지사(地師)에게 대신이 속았다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유시하면서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이언상(李彦祥)을 파직하고 하교하기를,
"일찍이 군기(軍器)를 새로 갖추었다 하여 신금(申禁)에게 상을 주도록 청하였는데, 이언상의 계문 가운데 군관(軍官)이 군기를 수보(修補)한 것을 성대하게 칭찬하였다. 그런데 이른바 수보했다는 것은 4건의 풍석(風席)158)  에 불과하였으니, 아마도 그 상을 준 것이 알맞지 못한 듯하다. 삼도(三道)의 통제사가 되어 이와 같이 구차스러우니, 어떻게 수륙(水陸)의 군민(軍民)을 통솔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다.

 

평안 감사 조영국(趙榮國)이 사폐(辭陛)하였는데, 입시하여 아뢰기를,
"병자년159)   뒤로 노인(虜人)에게 핍박되어 성(城)을 쌓을 수 없었는데, 강희(康熙)160)   이후로 조금씩 쌓아 지금 요해처(要害處)에는 거의 모두 성을 쌓았으니, 참으로 훌륭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서(關西)의 백성들이 실제로 쉬지 못하고 있고, 장마가 이와 같아서 농사가 흉년이 들 것이니, 이러한 시기에 성 쌓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태량(南泰良)이 시행한 이번 영남의 전최(殿最)에서 수령 가운데 하등(下等)을 차지한 자가 많아서 10여 명에 이르렀으니, 그가 마음을 다해 공무를 받든 것을 가상히 여길 만하다. 관서는 재력(財力)이 넉넉하여 더욱 부정한 이익을 구하려 하기가 쉬울 것이니, 경은 마땅히 과단성 있게 통할하도록 하라."
하자, 조영국이 아뢰기를,
"신이 호서를 맡아 다스렸을 적에 조금이라도 자중(自重)함이 없으면, 비록 작은 과실이라도 번번이 파출(罷黜)시켰었는데, 그 뒤에 경력을 거치고 나서 비로소 그 잘못을 알게 되었으니, 대체로 새로 부임해 온 자가 반드시 전임자 보다 현명하지 못하여 이로움은 없고 해로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7월 20일 무신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태중(李台重)이 여러 차례 재촉하였지만 끝내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바로 그 지역에다 정배(定配)하였다.

 

7월 21일 기유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보았다. 수찬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이태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명을 어겼으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미 삼사(三司)에서 공무를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자급이 승진되어 웅주(雄州)에 부임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싫어하여 회피한 율로 시행한다면 지나칩니다. 세도(世道)가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사대부가 작록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소치에 연유한 것인데, 이태중은 작록에 대해 구차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와 같은 신하가 크게 힘을 얻을 곳이 없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비록 한때 책망하고 처벌하더라도 원하건대 멀리 버리지 마소서."
하였다.

 

7월 22일 경술

시임과 원임의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함께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오직 고굉지신(股肱之臣)이다. 내가 고심하여 유시하는데도 고굉지신이 기꺼이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월성위(月城尉)를 잘 교회(敎誨)하지 못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나의 수치이다. 경 등이 나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기강(紀綱)을 세우려고 하는가, 기강을 무너뜨리려고 하는가?"
하였는데,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기강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기강을 세우려면 마땅히 대신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므로, 조현명이 말하기를,
"만약 죄가 있다면 어찌 대신이라고 하여 꺼려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수상(首相)이 도위(都尉)와 서로 겨루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때에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사(地師)가 무상(無狀)하다는 등의 말은 사관(史官)이 잘못 전달한 소치에 불과한데, 영의정이 처음에는 비록 잘못 듣고 도성을 나갔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미 극진하게 개석(開釋)하였으니, 즉시 황공하게 여기며 명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끝내 들어오지 않으니, 인신이 되어 어떻게 감히 그 임금이 하지 않은 말을 가지고 이 같이 인혐(引嫌)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은 그 명을 기다린다는 것이 할 만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머리가 하얗게 센 원보(元輔)의 거취(去就)는 경솔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제 도성을 나갔다가 오늘 들어온다면 어찌 대신의 거취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경 등이 치우치게 영의정만 비호하고 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 때문에 영의정을 처분(處分)하신다면 장차 도위(都尉)를 어느 지경에 두려 하십니까?"
하고, 수찬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좌우에 보필(輔弼)하는 신하를 두신 것은 장차 그들의 말을 쓰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어찌 모두 영의정을 사사롭게 좋아하여 똑같이 말하겠습니까? 그들이 충성하기를 바라는 뜻을 알 만한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말이 옳다. 내가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조금 전에 나의 사기(辭氣)는 중도에 지나친 것이었다. 승지가 일찍이 《자성편(自省編)》을 가지고 와서 간(諫)하라는 하교를 받고서도 끝내 한 마디 말이 없었으니, 경계하고 면려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신도 이 하교를 함께 받들었으니 처벌받기를 원합니다."
하자, 임금이 김상로(金尙魯)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경도 《자성편》을 만들 때에 입시하였었는가?"
하고,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의빈(儀賓)의 일 때문에 비국 당상을 모이게 하고, 명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신의 죄를 처분(處分)하기 위해 하문하였으니, 마침내 온당함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유신(儒臣)이 한 마디 말로 바로잡아 구원하자 문득 받아들였으니, 아! 허물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고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이 흐르듯이 한 대성인의 성덕이 크다."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5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주생활-택지(宅地)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의빈(儀賓)의 일 때문에 비국 당상을 모이게 하고, 명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신의 죄를 처분(處分)하기 위해 하문하였으니, 마침내 온당함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유신(儒臣)이 한 마디 말로 바로잡아 구원하자 문득 받아들였으니, 아! 허물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고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이 흐르듯이 한 대성인의 성덕이 크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권면하여 오직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장려하고 의열(義烈)을 포창하여 숭상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양조(兩朝)의 세대에는 찰방 신 곽시징(郭始徵), 정랑 신 이지렴(李之濂)과 같은 이가 있어 사우(師友) 사이에 종사(從事)하였는데, 어렸을 적에 도(道)를 강론하여 당세의 유현(儒賢)들이 모두 큰 유학자와 존경하는 벗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곽시징의 공은 성학(聖學)을 돕고 인도하여 오늘의 태평을 열게 한 데 있고, 이지렴의 뜻은 세 차례의 봉사(封事)에서 나타났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책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지당한 의논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정미년161)  의 봉사에 이르러 대의(大義)를 밝히고 삼강(三綱)을 부지하게 한 뜻은 《춘추(春秋)》의 의리에서 깊이 얻어진 것이었는데, 융성한 때를 만나 늙어서 죽을 때까지 위포(韋布)로 있었던 것은 진실로 옛사람이 이른바 원우 제현(元祐諸賢)162)  을 불러들였으나 우연히 한없이 빠진 경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진년163)  과 계사년164)  의 난리에 진양(晋陽)165)  의 위급함이 삼판(三版)166)  과 다름이 없었는데, 사천(泗川)의 지방관 정득열(鄭得說)은 병사 유숭인(柳崇仁)의 선봉(先鋒)이 되어 번번이 맨 먼저 적의 성벽에 올랐으며, 병사가 전사(戰死)하자 흩어진 군졸을 잘 수습하여 필마(匹馬)로 적과 충돌하여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도 끝내 후퇴하지 않고 강개(慷慨)하게 자신을 잊고 죽어도 후회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정택뢰(鄭澤雷)는 김용(金墉)의 변고를 당하여 당시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자기 혼자 글을 올려 항거하다가 먼 섬으로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특이합니다. 충성스럽고 용맹스런 정기(正氣)가 사람에게 집중된 것이 어찌 정씨 집안의 부자(父子)에게만 치우치게 후합니까? 신이 감히 몇 사람을 위하여 이미 백골이 된 후에 은혜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충절을 수립하고 도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모든 임금이 급선무로 삼아야 하며 착한 일을 드러내고 아름다운 일을 포창하는 것은 태평한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니, 빨리 넉넉하고 특이한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대각(臺閣)에서 조용히 있는 때에 이제 이렇게 덧붙여 진달한 것이 두세 가지 은혜를 구하고 그치는 데 불과하였는데, 이는 내가 〈정교(政敎)를〉 크게 넓히지 못한 소치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고 판서 이진망(李眞望)은 감반(甘盤)167)  과 같은 옛 정의가 있는데, 다시 원량의 보양관(輔養官)이 되었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성품이 정직하고 조용하면서도 단단했었음을 마음에 늘 높이 여기고 있다. 그의 아들이 지금 한 사람 있는데, 조단(朝端)과 뜻이 서로 맞지 않으니, 제사를 어찌 뜻에 맞출 수 있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돌보아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3일 신해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수찬 임상원(林象元)이 말하기를,
"어제 성상의 하교는 신의 생각에는 아마도 분수에 지나친 듯합니다. 한(漢)나라의 법이 비록 엄중하였으나, 대신(大臣)을 예대(禮待)함이 매우 극진하여 비록 더러 탐오(貪汚)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보궤불식(簠簋不飾)168)  이라고 말하며 일찍이 배척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죄가 용서하기 어려운데 이른 후에야 비로소 왕명을 받들어 면직(免職)시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유신(儒臣)의 진달을 듣고 문득 중도에 지나쳤음을 깨닫게 되었다. 육지(陸贄)169)  가 말하기를, ‘총명이 내게 있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유신이 또한 나의 귀를 열게 하였으니, 가상히 여기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특별히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다. 임상원이 말하기를,
"소신이 진달한 바 무엇이 포상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성심(聖心)이 바야흐로 개오(開悟)하는 단서가 있었으므로 신의 말이 저절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무릇 말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혹시라도 주재(主宰)에 먼저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들으면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저절로 쉽게 드러날 것이니, 감히 더욱 힘쓰시라는 뜻으로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도 주재에 먼저 집착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착오을 저지르는 데 이르렀으니, 더욱 힘쓰는 것이 옳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대사간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집의로, 윤광소(尹光紹)를 사간으로, 조재덕(趙載德)을 장령으로, 신회(申晦)를 헌납으로, 권숭(權崇)·최성대(崔成大)를 지평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부수찬으로, 유엄(柳儼)을 판윤으로, 이응협(李應協)을 정언으로, 홍익삼(洪益三)을 필선으로, 낙풍군(洛豐君) 이무(李楙)를 동지 정사로 삼았다.

 

7월 24일 임자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승지 이철보(李喆輔)를 보내어 영의정에게 유시를 전달하고 함께 오게 하였다.

 

박사창(朴師昌)을 녹양역(綠楊驛)에 귀양 보냈는데, 앞서 의주(義州)를 맡았을 적에 백성으로 범월(犯越)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25일 계축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왔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도성에 들어오자, 입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나이가 젊어서 기질이 조급한 의빈(儀賓)을 잘 교회(敎誨)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경을 보기가 부끄럽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소하(蕭何)에게 말하기를, ‘승상(丞相)은 어진 재상이 되었고 나는 걸(桀)·주(紂)가 되었다.’ 하였는데, 그 말은 오히려 농락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김상복(金相福)·임상원(林象元)이 진달한 것을 듣고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월성위(月城尉)와 어찌 겨루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늙고 쇠약하여 사관(史官)의 말을 잘못 듣고 이렇게 도망하는 행동을 저지르게 되었는데, 성상의 하교를 듣게 되니 더욱 황송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이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있다. 경은 진실로 잘못이 없고, 나에게 잘못이 있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미 파직(罷職)하였다가 도로 그전대로 있게 하는 것은 소신(小臣)도 오히려 불가한데 더구나 대신이겠습니까? 신이 파직된 명은 예대(隷儓)들도 모두 들었으니, 오늘 대궐에 나온 것 또한 반드시 ‘어제 파직되었다가 오늘 다시 들어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석(前席)에서 간절히 진달하여 체임하라는 명을 받고서 물러난다면, 신이 다른 사람을 대할 낯이 있을 것이며, 성상께서 예(禮)로 신하를 부리는 도리 또한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뉘우치고 있는데, 어찌 이것을 지나치게 혐의스러워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경조(京兆)의 아윤(亞尹)170)  이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거친 사람 이외는 감히 초헌(軺軒)을 타지 말도록 명하고 대려(帶礪)171)  한 훈관(勳官)·음관(蔭官) 및 특별한 예로 조용(調用)한 자로서 반드시 일찍이 정(正)을 거친 자를 판결사(判決事)와 아윤에 통의(通擬)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명기(名器)에 모람됨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심악(沈)을 승지로, 권적(權𥛚)을 우참찬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부제학으로, 홍중효(洪重孝)를 지평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집의로, 조재민(趙載敏)을 헌납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정언으로, 이규채(李奎采)를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6일 갑인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승지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신칙하려고 하는데,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저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난번에 현빈궁(賢嬪宮)과 빈궁(嬪宮)의 별감(別監)의 삭포(朔布)로 경자년172)   이후에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형조 판서가 아뢴 바로 인하여 특별히 일체 감하여 없애도록 명했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외람되게 상언(上言)하며, 해조(該曹)에서 시행하지 말게 하면 또 감히 승전색(承傳色)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것의 이장(弛張)은 위에서 하기에 달려 있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수창(首唱)한 해당 별감을 과죄(科罪)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승전색과 내관(內官) 또한 어떻게 감히 상문(上聞)할 수 있는가? 그들도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분하도록 하라. 승정원에서 조치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하였다.

 

7월 27일 을묘

임금이 승지 이종적(李宗迪)에게 말하기를,
"포루(鋪壘)가 이미 완성되었고 창사(倉舍)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니, 이장(弛張)의 도리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 뒤로는 민력(民力)을 쉬게 하여 점차로 하게 하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라 하고 학대하면 원수라 한다는 경전(經傳)의 교훈이 분명하다."
하자, 이종적이 말하기를,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먼저 교화(敎化)를 펴서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은 후에야 체용(體用)과 본말(本末)이 갖추어집니다."
하였다.

 

7월 29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실추된 기강(紀綱)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바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이른바 ‘먹는 것은 적은데 일은 번잡하다.’는 것과 같다."
하자,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정치에 힘쓰심이 비록 이와 같다 하나, 국계(國計)는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인재로는 신같이 보잘것 없는 자가 외람되게 중임을 맡고 있는데, 초야(草野)에 인재가 없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단지 왕성(王城) 안에서만 인재를 뽑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재를 수습(收拾)하는 것을 오늘날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옛날 이광필(李光弼)173)                  은 성중(城中)에서 돈 만드는 자를 땅을 파도록 시켰으며, 한황(漢滉)174)                  은 다른 사람의 한 가지 재능이라도 취하려 창고 문을 지키도록 하였으니, 비록 부오(部伍) 가운데에도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유념하도록 하라. 이종성(李宗城)이 사람을 죽인 자 가운데도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身手]가 훌륭한 경우도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그럴 듯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부인(婦人)의 체발(髢髮)175)                  을 없애려고 하였었는데, 계(䯻)는 김진상(金鎭商)의 집안에서 사용하고 있고, 봉조하        민진원(閔鎭遠)의 집안에서도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우의정의 집안에서도 가지고 있는가?"
하자,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신의 종조부(從祖父)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서 화관(花冠)을 얻어 왔으며,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집안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윤급(尹汲)이 말하기를,
"계(䯻) 한 건은 신이 금번 사행(使行)에서도 얻어 왔습니다만, 제도가 화관(花冠)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민응수가 말하기를,
"신이 북경에 갔을 적에 명(明)나라의 옛날 제도를 보려고 구하여 보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희자당(戱子堂)에 있었지만, 선왕(先王)의 옛날 제도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봉관(九鳳冠)과 오봉관(五鳳冠)은 붉은 자개와 순금(純金)으로 되어 있어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판중추부사가 대궐 안의 제도를 따르려고 했었지만, 내부의 모양이 다른 사람과 구별이 없었으니, 문장(文章)과 제도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7월 30일 무오

송창명(宋昌明)을 집의로, 조중직(趙重稷)·박필간(朴弼幹)을 장령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지평으로, 이수덕(李壽德)을 정언으로, 이익보(李益輔)를 검상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동지 부사로, 정우량(鄭羽良)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부교리 이규채(李奎采)를 먼저 파직(罷職)한 뒤에 잡아오도록 하였는데, 이규채가 어사(御史)로서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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