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미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목릉(穆陵)과 의릉(懿陵)의 전알(展謁)을 중순(中旬) 전후로 택일하고, 도로·교량의 보수를 간략하게 해서 민폐(民弊)를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8월 2일 경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정의 현감(旌義縣監) 홍언석(洪彦奭)을 가자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 홍감보(洪鑑輔)를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으니, 잘 다스리고 진휼(賑恤)을 잘한 때문이었다.
지평 안윤행(安允行)이 상소하기를,
"전후에 진언(進言)한 대신(臺臣)이 어찌 붕당(朋黨)을 지어 자기편을 두둔하는 데 달갑게 여기고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겠습니까? 오직 이 ‘당벌(黨伐)’ 두 글자는 언자(言者)를 꺾기 위한 큰 제목(題目)입니다. 가부(可否)의 의논이 혹 낭묘(廊廟)에 관계되거나 규경(規警)의 말이 약간 귀세(貴勢)에 저촉되면, 말한 바가 비록 공정하더라도 문득 시상(時象)이라 의심하여 너무 지나치게 진압하고, 심지어 참소와 이간질로 지목하여 노비를 꾸짖고 돼지에게 욕하듯 사기(辭氣)가 박절하며, 찬보(竄補)와 출삭(黜削)이 앞뒤로 이어져 물색(物色)하는 가운데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우충(愚忠)을 바치고자 해도 전폐(顚沛)되는 데로 귀착됨을 거의 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위로 나라에 보탬이 없고 아래로 자신에게 해로움이 있기 때문에, 한결같이 규피(規避)하고자 하고 온갖 계책으로 모면하기를 꾀하며, 차라리 거만하다는 주책(誅責)을 받을지언정 기꺼이 언지(言地)에 끼지 않으려 합니다. 진실로 그 까닭을 구해 보면, 반드시 우리 전하께서 언신(言臣)을 싫어해서 박대하여 조금도 관대하게 대하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일찍이 전에 출입하던 무리는 문득 종지(踪地)가 견디기 어려움이 있고 요사이 신통(新通)한 사람들은 실패한 전철(前轍)을 따라 밟으려 하지 않으니, 돌아보건대 그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어찌 좋아서 그리하였겠습니까? 이이(弛弛)한 기색이 비록 한때 진정시키는 데에서 나왔다 하나, 그 전해지는 폐해는 거의 대청(臺廳)을 오래도록 폐쇄시키는 데에 이를 것이니, 어찌 크게 근심하고 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널리 받아들이는 아량을 보이셔서 혹시라도 꺾어 버리는 일이 없게 하여 언관(言官)이 진신(進身)하는 길을 열어 주시고, 곡진하게 장려를 더하셔서 일에 임하여 구차하게 회피하는 습관이 크게 변화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널리 받아들이도록 면계(勉戒)한 대의(大意)는 옳다. 여기에서는 그 장점을 취하겠으나, ‘혹 낭묘(廊廟)에 관계된다.’는 등의 말은 그것이 무슨 뜻인가? 감히 공정하다고 칭하면서 어찌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것은 참으로 해괴하게 여길 만한 일이다."
하였다.
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이익보(李益輔)를 사인으로, 남덕로(南德老)를 지평으로, 구성익(具聖益)을 경기 수사로, 조덕중(趙德中)을 황해 병사로, 이장오(李章吾)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8월 3일 신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투비(投畀)176) 한 죄인 이탱(李樘)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8월 4일 임술
대신과 예조·형조의 당상, 경기 감사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허함(許涵)을 허간(許僴)의 전처 양자로 삼도록 명하였는데, 허간은 양천 부원군(陽川府院君) 허종(許琮)의 봉사손(奉祀孫)이다. 허간이 전처에게 아들이 없어 후취(後娶)했으나, 또 아들이 없어서 족질(族姪) 허함을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허간이 죽자 그의 후처가 실절(失節)하니, 허씨의 종인(宗人)들이 예조에 정소하여 허간의 적통을 폐하고 허함을 양자에서 파하여 적종(嫡宗)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허간의 후처가 실절한 것 때문에 적통을 폐하는 것은 의의가 없다 하여 허함을 전처의 아들로 삼도록 명하였다. 후에 이로 인하여 허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다시 훈부(勳府)에 정소하기를, ‘허함이 후모(後母)를 잘못 대우하여 달아나는 데 이르렀으니, 훈신(勳臣)의 제사를 주관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마침내 전에 명한 것을 정지하였다.
영덕(盈德)·신안(新安)의 영당(影堂)·영정(影幀)에 변괴를 일으킨 죄인 남용하(南龍河)를 도배(島配)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원배(遠配)했다. 남용하 등을 여러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아서 마침내 단서를 밝히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성인은 주(周)나라의 이남(二南)177) 을 《시경(詩經)》 3백 편의 첫머리로 삼았다. 아! 주남(周南)의 교화가 강한(江漢)에 미쳤으나, 오히려 강포(强暴)한 것에 더럽혀질까 두려워하였으니, 성인의 교화가 위대하였다. 예전에 선정 조광조(趙光祖)가 도헌(都憲)178) 이 되니, 남녀가 오히려 길을 달리하였다. 선정은 인신으로서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질 수 있게 하였는데, 더욱이 인군이 되어서 만약 교화할 수 있다면, 어찌 음란한 풍습과 패악한 행동이 있겠는가? 매양 한 번 들을 때마다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웠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학교(學校)의 정책이 무너져 세상에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없어졌으므로 곧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옛날의 선현(先賢)들은 그 임금을 반드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 권면하였는데, 비록 진부한 듯하나 그 근본을 구명해 보면, 이를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경외(京外)에 신칙(申飭)하되, 서울에서는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에서 동몽 교관(童蒙敎官)이 반드시 소학을 중점으로 삼아 교회(敎誨)하게 하고, 향리에서는 교원(校院)과 수령(守令)이 또한 반드시 소학을 중점으로 삼아 교회하게 하라."
하였다.
8월 5일 계해
유신을 소견하니 대사성 홍계희(洪啓禧)가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경유(京儒)들이 거재(居齋)하지 않는 까닭을 물으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재작년에 유생들이 죄를 받은 뒤 토사 호비(兎死狐悲)179) 의 뜻이 있어서 유생의 무리가 진소하려고 하였지만, 그때 성상의 하교가 엄절(嚴截)해서 사기(士氣)가 저상되어 감히 선비로서 자처하지 못했으며, 장의(掌議)가 된 자는 석채(釋菜) 때 힘써 입재(入齋)하였다가 인하여 곧 스스로 삭제(削除)하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사성은 비록 주자(胄子)를 가르치는 책임이 있으나 다만 몇몇의 향유(鄕儒)들과 더불어 강설하였으니, 그 직분을 잃은 것이 큽니다. 집예(執藝)로서 간(諫)하려고 하였으나, 구구한 혐의의 단서가 없지 않아서 함묵(含默)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특별히 소견한 것은 대개 스스로 힘쓰고자 한 뜻인데,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마땅히 아뢰지 않아야 할 일을 아뢰었으니, 사체가 관계된 바 엄중하게 방지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성 홍계희를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익모(韓翼謨)를 승지로, 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참의로, 김시찬(金時粲)을 보덕으로 삼았다.
8월 6일 갑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성후(聖候)가 오래도록 정섭(靜攝)하시는 가운데, 신료를 반드시 환경전(歡慶殿)에서 인접하시니, 중외(中外)에서 우려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요사이 성심(聖心)이 분려하셔서 무릇 문부(文簿)에 관계된 것이라도 더러 입시하여 판결하는 일이 많은데, 빈청(賓廳)은 일차(日次)로 매번 정섭 때문에 탈품(頉稟)하니, 신은 그윽이 개연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옛날의 인군(人君)은 노침(路寢)180) 이 있고 외전(外殿)이 있었습니다. 만약 병환이 있으면 와내(臥內)에서 인접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아가 정전(正殿)에 임어하여 마치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듯이 한 뒤에야 뭇 신하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후가 오래도록 위예(違豫)하신데도 오랫동안 이 궁전에 머무신 까닭에 인심(人心)이 의구(疑懼)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또 신 등이 왕래할 때 여인의 말소리가 때때로 혹 들리곤 하는데, 이것이 어찌 외인이 출입할 곳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약원의 신하에 대해서는 비록 설복(褻服)181) 으로 만나도 무방하지만, 대신을 볼 때에 혹 상의(上衣)를 입지 않는 것은 또한 미안한 듯합니다. 전하의 후손이 전하에게 배우는 것이 있을까 두려우니, 더욱 마땅히 스스로 힘쓰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중외(中外)에서 내가 다시 지나친 일을 하는 것으로 의심하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잠깐 보건대, 전하의 앞에 종이로 덮어놓은 물건이 있으니,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 등과 같이 근시하는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중외에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봉주(鳳洲)의 《강감(綱鑑)》182) 이다. 어찌 이를 가지고 의심하는가?
하고, 잠시 물러가라고 명하였다가 다시 불러 하교하기를,
"남면(南面)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나의 본심이다. 다만 자성(慈聖)과 삼종(三宗)183) 의 혈맥 때문에 도망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다. 나는 50세 전부터 이미 늙었다고 일컫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쇠로(衰老)함이 심하다. 선조(先朝)께서는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신료를 인접하실 때에는 항상 배자(褙子)를 입으셨다. 지금 나는 천의(𧟆衣)를 자리 오른쪽에 놓아 두었으니, 곧 조복(朝服)에 띠를 띠는 의미이다. 약원 신하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실로 개연스럽다. 그러나 내가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에 헤아려 용서하는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불민(不敏)하여 생각이 있으면 우러러 진달하였는데, 이러한 하교를 받으니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지나치게 쓰지 마시고 항상 보색(保嗇)의 도(道)에 진념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동궁(東宮)이 직접 쓴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기를 흐르는 물과 같이 하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미치게 하라.[納諫如流 恕己及人]’는 여덟 글자를 내 보이니, 승지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와 같은 덕(德)이 있는 까닭에 동궁(東宮)이 이를 본받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종적(李宗迪)이 말하기를,
"인군의 성덕은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먼저 해야 하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는 자기를 용서하듯이 하는 것을 오로지 귀하게 여겨야 하니, 성인의 학문이 자연히 도리에 합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고, 교리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예학(睿學)184) 에서 알아야 할 일이 매우 많지만, 반드시 간언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용서하듯 하는 마음을 중하게 여겨야 하니, 선후(先後)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첩(帖)을 만들어 춘방(春坊)에 두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사성 홍계희(洪啓禧)를 잉임(仍任)시키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재임(齋任)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어제의 처분(處分)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있어서였다. 지금 듣건대, 대사성이 관학(館學)에서 마음을 다하였고, 8세에 소학(小學)을 익히는 법이 폐추(廢墜)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또 능히 이 책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진실로 기쁘다. 상소한 유생의 일은 벌(罰)이 그 아비에게 마치는 것은 지나치니, 이른바 ‘토사 호비(兔死狐悲)’라고 한 것이 옳다. 이미 그것이 지나친 것을 알았으면 다시 다른 유생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본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현관(賢關)185) 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른바 장삼 이사(張三李四)186) 를 청금(靑衿)이라 이름하는 격이다. 또 역옥(逆獄)에 관계되지 않았는데, 그 아비를 국문한다면 어찌 나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덕제(李德濟)를 위해 인구(引咎)187) 한 것이 아니라, 곧 현관을 위하고 많은 선비를 위해 인구한 것이었다.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미 인구하였는데, 어찌 다시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장의(掌議) 홍정유(洪鼎猷)가 말하기를,
"상소한 유생을 방출(放黜)한 것을 감히 혐의하는 것은 아니나, 상소한 유생의 부형(父兄)을 한번 형신한 뒤부터 유생의 무리가 혹 이후로 또 좋지 못한 일이 있어 부형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려워한 까닭에, 반궁(泮宮)에 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마치 일월(日月)이 바뀌듯 밝게 인구하신다면, 신이 마땅히 나가서 그것을 전하겠습니다. 저 무리들이 굳게 지키는 것이 ‘존주(尊周)’ 두 글자인데, 전하께서는 매번 무상 부도(誣下不道)하다는 것으로 하교하시니, 신은 일찍이 개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울러 이를 앙달(仰達)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의는 나가서 이를 말하도록 하라. 내가 이미 인구하였다. 너희들이 그 상소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반드시 그 거취를 함께 하는가?"
하였다.
8월 7일 을축
임금이 유신들을 불러 보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도록 명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나에게 응하였으나, 나는 옛날과 같이 하겠다.[事應旣己 我則如故]’고 하였으며, 정자(程子)는 ‘회심(悔心)이 비록 좋지만, 역시 흉중에 오래 남겨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사기(辭氣) 사이에 자주 불평(不平)함을 드러내시므로, 때로 차마 듣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촉격(觸激)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어제 원임 대신이 편복(便服)으로 대신을 보는 것은 미안(未安)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신이 일찍이 진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너그럽게 용납하여 채납(採納)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하루가 지났지만, 성상께서는 아직도 석연치 않게 여기시니, 전하에게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유생이 상소한 일에 이르러서는 가령 다시 있다 하더라도 그 시비(是非)를 살펴보고 처분하심이 옳을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미리 오뇌(懊惱)하십니까? 전하께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아직 그 요체를 얻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뭇 신하들이 정섭(靜攝)을 믿지 않는다고 개연하게 여기시는데, 이 또한 아마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요사이 부서(簿書)를 수응(酬應)하고 신료를 인접하시면서 거의 헛되게 보낸 날이 없었습니다. 태묘(太廟)에 배알하고 싶으면 태묘에 배알하고, 능침(陵寢)에 배알하고 싶으면 능침에 배알하셨습니다. 따라서 신관(神觀)을 우러러봄에 역시 손감(損減)이 없었는데, 오히려 정섭을 구실로 삼으니 뭇 신하들의 치아(致訝)함이 얼마나 괴이합니까? 신은 원하건대, 지금부터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은 사륜(絲綸)에 드러내지 마시고, 또한 마음에도 품지 마실 것이며, 그 마음을 일에 대응하는 요체는 한결같이, ‘일이 이미 나에게 응하였으나, 나는 옛날과 같이 하겠다.[事應旣己 我則如故]’는 여덟 글자에 부합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다 좋다. 지금 만약 나의 보색(保嗇)을 허여한다면 적게는 2년이요, 많게는 5년이다. 편안히 있으며 정섭하며 지팡이 짚고 행보(行步)하고, 꽃피는 봄이 되고 낙엽지는 가을이 되는 때에 한가하게 일이 없이 지낸다면, 어찌 병을 치료하는 데 보탬이 없겠는가?"
하였다.
8월 8일 병인
이보다 앞서 대사성 홍계희(洪啓禧)가 세 조목을 아뢰었는데, 그 하나는 문묘의 위판을 개제(改題)하여 문선왕(文宣王)을 지성(至聖)의 선사(先師)로 삼자는 것이고, 하나는 석채(釋菜)의 축문에 청(淸)나라 연호를 쓰지 말자는 것이고, 하나는 계성묘(啓聖廟)에 정태중(程太中)을 배향(配享)하자는 것이었다. 임금이 번거롭게 고치는 것을 싫어하여 이때에 이르러 글을 내려서 뜻을 보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나라의 전헌(典憲)도 고칠 수 없는데, 하물며 일이 침묘(寢廟)와 학사(學社)에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비록 혹 의문(儀文)이 미안(未安)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왔고, 선현(先賢)이 찬정(撰定)한 것인데, 어찌 한 사람의 뜻으로 경솔하게 먼저 손을 대겠는가? 아! 후왕(後王)이 복응(服膺)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홍중효(洪重孝)를 장령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홍정명(洪廷命)을 헌납으로, 유건(柳謇)을 장령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정언으로, 구윤명(具允明)을 지평으로, 이익보(李益輔)를 필선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교리로 삼았다.
8월 11일 기사
임금이 도해 역관(渡海譯官) 현태익(玄泰翼)을 불러 다녀온 사정을 하문(下問)하니, 현태익이 대답하기를,
"예폐(禮幣) 가운데 문단(紋緞)이 있었는데, 신이 우리 임금께서는 검덕(儉德)을 숭상하여 나라안에서 쓰지 않으므로 교린(交隣)에 사용할 수 없다는 뜻으로 효유(曉諭)하였더니, 도주(島主)가 처음에는 매우 지난해 하였으나, 마침내 이에 감동하여 허락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혜청 당상(惠廳堂上)으로 삼았다.
8월 12일 경오
장태소(張泰紹)를 통제사로, 정하언(鄭夏彦)을 의주 부사로, 유건기(兪健基)를 대사간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집의로, 송창명(宋昌明)을 사간으로, 홍서(洪曙)·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어석윤(魚錫胤)을 헌납으로, 이수봉(李壽鳳)을 지평으로, 민백상(閔百祥)을 필선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제학으로, 김상복(金相福)을 부응교로 삼았다.
대왕 대비전에서 침을 맞았는데,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연신(筵臣)에게 내보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전알(展謁)할 날을 이미 택하니, 이 마음이 불안하여 멀리 서교(西郊)를 바라보게 된다. 또 휘일(諱日)을 만나니 나의 감회가 갑절 더하다. 다만 대압(代押)하게 하였으나 어떻게 감회를 참겠는가? 친압(親押)과 대압을 어찌 그 글에 구애받겠는가? 마땅히 친히 향(香)을 전하여 조금이나마 작은 정성을 펴고자 한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전교(傳敎)는 어제책(御製冊)에 싣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13일 신미
임금이 빈양문(賓陽門)에 나아가 친히 명릉(明陵)에 쓸 향(香)을 전하였다.
8월 14일 임신
임금이 종묘와 각릉(各陵)의 추석 제향에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이날은 곧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忌辰)이었다. 임금이 재복(齋服)으로 나오니, 도승지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예(禮)에 눌려 정(情)이 굽혀지는 바가 있으니, 지금 재복으로 예를 행하심은 미안(未安)한데 관계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곤복(袞服)으로 고쳐 입고 향을 전하는 예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향을 전할 때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흉배(胷褙)를 제거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예가 그렇지 않다. 이후로는 제거하지 말게 함이 옳겠다."
하였다. 예를 마치자,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금일 친히 향을 전하신 것은 곧 열성조(列聖朝)에는 아직 없었던 일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명덕(明德)이 오직 향기롭다.’ 하였으니, 인군으로서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은 유독 사전(祀典)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닙니다. 성덕(聖德)을 날로 새롭게 하고, 유위(有爲)에 분려(奮勵)하고, 독공(篤恭)에 순치(馴致)하셔서 천하가 평안해지면, 그 효(孝)됨이 이보다 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면계의 말인데, 대개 또한 뜻한 바가 있어서 발론한 것이다. 내가 지금 쇠모하여 달리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다하여 선조를 받들고자 한다."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성인(聖人)입니다. 중신(中身)188) 이후에는 해가 질 때까지 한가하게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성산(聖算)이 비록 오순을 넘겼지만, 지기(志氣)가 쇠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유위(有爲)에 분려할 때입니다.
하였는데, 승지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병판이 아뢴 바는 뜻이 비록 좋으나 성상께서 바야흐로 교자에 타고 계시니, 이는 전내(殿內)에서 인접하실 때가 아닌데, 이처럼 번거롭게 주달하니 자못 어떠한 데 관계되는 것입니까?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말이 만약 절실하다면 불가(不可)한 곳이 없다. 어찌 반드시 전내에서 인접할 때에만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홍봉한의 말은 ‘힘써 따르는 의리[惟允之義]’를 크게 잃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56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 역사-사학(史學)
[註 188] 중신(中身) : 중년(中年).
사신은 말한다 "말이 만약 절실하다면 불가(不可)한 곳이 없다. 어찌 반드시 전내에서 인접할 때에만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홍봉한의 말은 ‘힘써 따르는 의리[惟允之義]’를 크게 잃은 것이다."
8월 16일 갑술
동조(東朝)가 침을 맞았다. 임금이 차비문(差備門) 안 행각에 나아가 약방의 세 제조를 소견하였다.
권혁(權爀)을 강화 유수로, 조재호(趙載浩)를 개성 유수로, 구성익(具聖益)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향을 전할 때의 복색(服色)과 향을 전하는 차서(次序)를 대신과 예관(禮官)에게 의논하고, 하교하기를,
"이후로 평소 제향(祭享)에 향을 전할 때에는 비록 기신(忌辰)·재일(齋日)을 만나더라도 곤포(袞袍)로 거행하도록 한다. 기신에 향을 전할 때에는 모두 흉배(胸背)가 없는 흑단령포(黑團領袍)로 거행하되 향을 전하는 차서는 경외(京外)에 마땅히 분부하여 먼저 태묘(太廟)·영녕전(永寧殿)·영희전(永禧殿) 및 각전(各殿)에 전한 다음 능침(陵寢)에 전하는 일을 글로 써서 법규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수봉(李壽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모년(暮年)의 정사에서 선조를 본받는 효성과 후손에게 끼치는 교훈에 더욱 분발하시니, 누군들 흠송(欽誦)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씀이 너무 고달프고 정신을 수고롭게 함이 그치지 않아서 아침에 사대(賜對)하면 밤이 되도록 쉬지 않고, 저녁에 사대하면 새벽이 되어 파하니, 궐문의 유문(留門)189) 이 거의 거르는 날이 없습니다. 옛날 제왕 가운데 다스리는 데 부지런한 자는 성탕(成湯)·문왕(文王)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이윤(伊尹)이 성탕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동틀 무렵 크게 그 덕을 밝히고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다.’ 하였고, 주공(周公)은 문왕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했다.’라고 했지만, 우리 전하와 같이 밤부터 날이 샐 때까지 하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혈기(血氣)의 동식(動息)은 낮과 밤이 다르기 때문에 옛사람이 저녁이 되면 편히 쉰다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공경을 아는 사람은 때의 의리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함양(涵養)하시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데, 일이 오늘날에 와서 만약 참으며 살지 못하면, 내일의 기상(氣像)은 혹 관유(寬裕)하는 데 손상되고 사령(辭令)은 매양 번거롭고 촉박하게 하는 병통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화기를 해치는 날이 있더라도 또한 정복(貞復)의 경계를 소홀히 하시면 신료들이 근심하고 고민하는 것이 마땅히 어떻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동정(動靜)을 신중히 하시어 혹 몸을 보양하는 혈기를 노폐(勞弊)시키지 마시고 말씀을 간략히 하시어 정신을 지나치게 손상시키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소서. 합사(合辭)한 지 2년이 되었으나, 끝내 처리한 것이 없으니, 천백 가지 교활함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속풍(俗風)이 날로 변하여 서로 다투는 데 뜻을 두고 있으니, 국가의 당화(黨禍)는 아마도 그칠 때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뜻은 비록 임금을 아끼는 것이지만, 이 어찌 정신을 가다듬을 때인가? 연중(筵中)에서 이미 효유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삼사(三司)에서 함께 입시하였다. 장령 이홍직(李弘稷)·홍서(洪曙), 지평 남덕로(南德老)·어석윤(魚錫胤), 교리 조명정(趙明鼎), 응교 김상복(金相福), 정언 송덕중(宋德中)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신축년190) ·임인년191) 이 있었고, 무신년192) 이후로 흉역(凶逆)의 무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크게 마음속에 간직한 것과 지극히 음흉한 것을 논하면, 분변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고, 토죄(討罪)하여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광좌(李光佐)만한 자가 없습니다. 대개 병신년193) 에 처분하였을 때부터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다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바라던 일이 성취되자, 몰래 흉모(凶謀)를 주장하여 감히 대리(代理)의 명을 내리던 날에 방자하게, ‘나라는 반드시 신하의 절의가 없는 데에서 망한다.’라는 말로 조당(朝堂)에서 포효(咆哮)하였습니다. 대저 대리는 본래 선조(先朝)의 구전(舊典)이 있었는데, 그것을 ‘나라는 반드시 신하의 절의가 없는 데에서 망한다.’고 한 것은 어찌 매우 흉패(凶悖)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는 오로지 성궁을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조금도 경동(驚動)함이 없이 마음을 다하여 단련(鍛鍊)하여 점차 연급(延及)할 계책을 삼았으니, 그 주무(綢繆)하여 꾸며낸 실상이 백망(白望)의 공초에서 죄다 드러났었습니다. 또 김일경(金一鏡)이 추국(推鞫)받던 날에 이르러서는 억지로 목호룡이 절통(絶痛)하다는 말을 했으나 목호룡이 어찌 절통할 뿐이었겠습니까? 또한 그 절통함을 참으로 알았다면, 어찌해서 상변(上變)하였을 때 토죄할 것을 청하지 않고, 진장(眞贓)이 죄다 드러나고 와굴(窩窟)이 장차 깨뜨려지는 날에 비로소 말한단 말입니까?
역적 김일경의 교문(敎文)에 역절(逆節)이 이미 드러나서 징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본병(本兵)에 발탁해서 주의하여 마치 공로에 대해 상주어 보답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광좌가 김일경과 동일한 마음이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또 정미년194) 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는 온통 도리어 무옥(誣獄)하여 심지어 건저 대리(建儲代理)하게 한 것을 역안(逆案)에 둠으로써 역적 목호룡이 무고(誣告)한 말과 맞추어 놓았습니다. 또 끌어다 등용하여 기른 자는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이명언(李明彦)·권익관(權益寬)·정사효(鄭思孝)·홍계일(洪啓一)·이유익(李有翼)의 무리인데,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부렸을 때 모두 별인(別人)이 아니면 거괴(渠魁)라는 지칭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10년 동안에 경영하고 배포(排布)한 것은 나라를 흉(凶)하게 하려는 꾀가 아닌 것이 없었는데, 마침내 하늘을 뒤덮을 듯한 화기(禍機)를 빚어내어 종국(宗國)이 뒤집혀 망하게 하였으니, 신축년과 임인년의 원악(元惡)일 뿐만 아니라, 실로 무신년의 괴수(魁首)입니다. 그 죄범(罪犯)이 이와 같은데도 특히 음비(陰秘)한 무리를 한데 모으고 숨어서 엎드려 있는 무리와 규결(糾結)하였으며, 또 곧바로 수세(手勢)를 범하지 아니하여 김일경·박필몽(朴弼夢)·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한 것처럼 하였으니, 비록 전하의 명성(明聖)으로도 또한 간흉(奸凶)의 실상을 다 통촉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분변(分辨)은 명백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토죄(討罪)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륙(顯戮)이 미처 행하지 않았는데 음주(陰誅)가 먼저 가해지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노하고 여정(輿情)이 더욱 답답해 하였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는 관작(官爵)을 추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그치는가? 또 다른 계사(啓辭)가 있으면 읽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홍직 등이 또 아뢰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의 뭇 흉적(凶賊)들이 흉언(凶言)과 패설(悖說)을 문자에 드러낸 것은 김일경(金一鏡)이 우두머리인데,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교문(敎文)은 그 지의(旨意)가 음참(陰慘)하여 김일경의 흉언과 서로 표리(表裏)가 됩니다. 정책 국로(定策國老)와 문생 천자(門生天子)195) 등의 설에 이르러서는 이에 당(唐)나라 조정의 환관(宦官)들이 어리석은 황제를 옹립했던 일을 방자하게 조금도 거리낌없이 비의(比擬)한 것이었으니, 다만 이 여덟 글자는 족히 조태억의 단안(斷案)을 삼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또 김일경의 교문에 대한 일을 논하건대, 그때 조태억이 바야흐로 문형(文衡)을 맡고 있었으므로, 무릇 관각(館閣)에서 응제(應製)한 글은 반드시 문형에게 교감(校勘)을 거친 뒤에야 사용되는 것이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접혈(蹀血)196) 이니 행배(行杯)197) 니 하는 등의 말을 보고서도 당연하게 여겨 조금도 경동(驚動)하지 않고 베껴서 중외에 퍼뜨리게 버려 두었으니, 가령 그 손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하나 실제로 스스로 지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애초에 이미 그것을 고치게 하지 않았고, 또 즉시 그 죄를 성토(聲討)하지 않았는데, 이에 둔사(遁辭)로써 김일경이 복법(伏法)되던 날 스스로 해명하려고 하였으나, ‘사구(沙丘)’198) 두 글자는 이미 삭제(削除)하게 하였으니, 그 난만(爛漫)하게 상확(商確)한 자취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당일에 실형(失刑)한 것도 이미 신인(神人)으로 하여금 울분을 머금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르도록 관질(官秩)이 그대로 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고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은 관작을 추탈(追奪)하소서."
하니, 임금이 한참동안 묵묵히 있다가 주서에게 쓰도록 명하기를,
"임금의 하교가 있으나 신하가 감동함이 없으면 이는 신하의 절의가 없는 것이요, 임금의 하교가 있는데도 신하가 믿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대신이 되어 신하의 절의가 없어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 한법(漢法)으로 논한면 크게 불경(不敬)한 것이다. 옛날 장강(張綱)은 수레바퀴를 묻으며 말하기를, ‘시랑(豺狼)이 길을 막고 있는데, 어찌 호리(狐狸)를 신문(訊問)하겠는가?’199) 라고 했다. 오늘 만약 엄한 징계를 행하려면, 마땅히 신하의 절의가 없어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신하에게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다시 구습(舊習)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 유봉휘·조태구를 처분(處分)하기 이전에 인심이 불울(拂鬱)한 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일필(一筆)로 뒤섞어 거론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미 처분하였고, 한밤중의 비지(批旨)와 진연(診筵) 때의 하교는 돼지나 물고기를 감동시켰다고 할 만한데, 그후 대신(臺臣)들이 비록 하교한 것에 감동했다 하나, 차마 당심(黨心)을 버리지 못한 채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는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옛사람은 혹 역적이라고 사람을 논하거나 혹은 중론(衆論)이라고 하여 그를 보호해 줄 경우 그 진달함이 같지 않고 뜻이 같지 않을 것 같으면, 혹 연명(連名)하거나 혹은 합계할 때 피혐(避嫌)하여 참여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분의에 있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그렇지 않아 가슴에 당심(黨心)이 가득 찬 자들은 머뭇거리며 망설이고 있고, 저 당심으로 인하여 의견이 다른 자들은 저들과 맞지 않음으로 인하여 도리어 역적을 보호한 데로 귀착될까 두려워하여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 역시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그 중에 형세를 좇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무리들은 따로 서서 방관하여 이쪽을 좇을까 저쪽을 좇을까 하며 시세(時勢)를 따르려고 하니, 이 역시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유봉휘와 조태구를 처분한 뒤에 하교가 측달(惻怛)하였으니, 옳고 그른 것과 혹 윤허하거나 혹은 윤허하지 않거나 그 완급(緩急)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게 되었다. 처분이 정해졌으면, 그 밖에 정계(停啓)는 곧 순간에 정할 일인데, 그 임금을 믿지 않고 당심에 끌려서 망설여 온 지 반년이 되었다. 지난날의 하교로 인하여 또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이는 무슨 분의(分義)인가? 더구나 금년 봄의 하교 가운데에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인신이 되어 과연 그 하교를 믿었다면, 오늘날 무슨 얼굴로 또 이러한 일을 하여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의지할 데 없는 임금으로 만들려 하는 것인가? 그때 하교한 것이 만약, ‘여러 신하들을 공동(恐動)시키려고 그랬다.’고 한다면, 이는 내가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만약, ‘속이지 않았는데도 이런 일을 하여 그 임금으로 하여금 지나친 거조를 하게 하고, 상하(上下)가 얽혀서 경신년200) 과 같게 한 뒤에야 또 기괄(機括)을 삼아 미봉(彌縫)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이 또한 신하의 절의가 없는 것이다.
아! 그 임금이 바야흐로 정섭(靜攝)하고 있을 때에는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인데, 더욱이 동가(動駕)할 때가 멀지 않으니, 이 마음이 불안하여 달리 세상 일을 생각할 수 없는데, 이러한 지리하고도 번거로운 일을 가지고 그 임금으로 하여금 미침(微忱)을 펴지 못하게 하니, 당시에 불충(不忠)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척강(陟降)하는 선왕의 영혼에도 불충한 것이다. 이외에 달리 효유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김상복을 먼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너는 인묘(仁廟)의 외손이 아닌가? 네가 어찌 여기에 들어올 사람인가? 속히 나가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지금 논한 바는 진실로 당심(黨心)이 아닙니다. 이광좌를 신은 역적으로 여기는데, 전하께서는 공이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나 공은 작아서 드러나지 않지만, 죄는 드러나서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김일경의 역절(逆節)이 이미 환하게 드러났는데, 본병(本兵)의 장(長)으로 발탁하여 주의한 것은 역심이 아니겠습니까? 목호룡(睦虎龍)이 무고(誣告)한 것으로 복법(伏法)되었는데도 정미년201) 에 정승을 삼고, 또 무고(誣告)당한 사람을 역안(逆案)에 두었으니, 역심(逆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이 두 가지 일로 그의 역심을 아는 까닭에 이끌고 와서 아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당습(黨習)을 달갑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고, 어석윤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전날의 하교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앙문(仰聞)하고, 진실로 즉일로 멸사(滅死)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삼사(三司)의 습관이 이와 같고서야 나라가 나라다워질 수 있겠습니까? 발계(發啓)한 지 이제 이미 1년이 되었는데, 유최기(兪最基)가 겨우 한번 연계(連啓)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정계(停啓)와 연계를 모두 한 자가 없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옥계(玉階)의 얼마 안되는 곳을 기정(機穽)처럼 보고 있습니다."
하자,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옳다."
하였다. 어석윤이 말하기를,
"지금의 뭇 신하들 가운데 도피(圖避)를 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옛사람 중에 시간(屍諫)202) 한 자가 있었으니 지금 신 등은 차라리 망언의 주벌을 받더라도 뒷날의 삼사(三司)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는다면 신 등은 다행이겠습니다. 또 역적 김일경의 교문에 네 글자의 흉언은 누가 반역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전하를 위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심지어 몰래 엎고 도망간다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었는데, 나라를 담당한 재상이 어찌 그것을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때에 본병(本兵)에 발탁하여 주의하였으니,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방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과 대화했더라도 반드시 저절로 밝혀진 것이 없었겠지만, 전하께서 ‘허락한다.’는 한 글자만 내리셨다면, 의리가 약간은 펴지고 삼사의 쌓였던 폐단도 역시 약간은 제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폐단은 다 말했다. 정계하였거나 연계하였거나 출장(出場)하는 것이 옳다. 조명정이 말한 양건(兩件)은 과연 옳으니, 이는 이광좌가 과연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모든 잘못을 이광좌에게 돌리려고 하는가?"
하니, 어석윤이 말하기를,
"금번에 합계(合啓)하여 논죄(論罪)한 것은 전보다 줄어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줄었다면 줄었다 하겠으나, 백망(白望)이 공초한 것을 끌어댄 것은 매우 구차한 것이었다. 조명정이 말한 바는 과연 명백하니, 애초에 만약 이것을 가지고 말했다면, 내가 비록 들어주지 않더라도 반드시 네 말이 옳다고 하교했을 것이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았던 일을 이번에 말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 일률(一律)을 적용한다면 유봉휘·조태구에게 어찌 그 법을 가하겠는가? 지난 봄 귀와(歸臥)하였을 때 번저(藩邸)에서 하교한 후에도 다시 감히 이렇게 계달(啓達)할 수 있겠느냐?"
하자, 어석윤이 말하기를,
"신은 실로 이런 하교를 듣지 못했습니다. 일개 상신(相臣)에 대한 일을 만일 들어줄 수 없을 경우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인데, 어찌 이렇게 하교하시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개탄할 만한 것은 그때 여러 신하들이 이 하교를 도로 거두실 것을 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계달을 하려고 했으면 마땅히 먼저 이러한 하교를 도로 거둘 것을 청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신하를 공동(恐動)시키는 하교라 생각하여 이러한 계달을 하였다면 잘못이다."
하였다. 어석윤이 말하기를,
"어찌 성교(聖敎)로 독촉한다 해서 갑자기 계사를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정계(停啓)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말했을 따름이다. 홍서·남덕로가 만약 본 바가 이와 같았다면, 어찌하여 일찍 진소(陳疏)하지 않고 이제야 비로소 와서 아뢴단 말이냐?"
하고,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이홍직이 말하기를,
"오늘 삼사(三司)의 의논은 곧 온 나라의 공공(共公)의 의논입니다. 공공의 의논으로써 반드시 토죄(討罪)해야 할 적(賊)을 토죄하는 것은 천지가 다하도록 만고에 뻗쳐 있는 의리입니다. 인신의 죄는 분의를 범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춘추(春秋)의 법은 징토하는 것보다 더 엄중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 양적(兩賊)을 토죄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기강이 실추되고 사람의 도리가 멸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군신의 분의에 관계된다 하여 이홍직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어석윤 역시 작년 겨울 이후로 한 번도 연계(連啓)하지 않았으니, 의리가 회색(晦塞)되고 대각(臺閣)의 기풍이 무너질까 두렵다고 말하며 피혐(避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시 전에 진달한 것에서 충간(忠懇)을 볼 수 있었고, 지금 인피하며 한 말에서 또한 대간(臺諫)의 체모를 얻었다."
하였다. 송덕중 역시 사피(辭避)하니, 아울러 체자하도록 명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이 품계에서 하나를 내린다면 다시 진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진달하겠습니다. 전계에서 도로 거두기를 청하지 않은 것은 만번 죽어도 합당한 죄이지만, 이미 경악(經幄)에 있으니 감히 도로 거두라는 청을 진달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사체를 얻었다. 유봉휘에게는 어떻게 법을 가해야 하겠느냐고 한 하교가 어찌 옳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조명정이 말하기를,
"만약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경중(輕重)을 나누어 죄를 정할 수 있겠으나 이미 죽은 사람은 일례로 삭직(削職)하는 외에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죄가 무거운 자를 구별해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 최석항(崔錫恒)은 내 생각에 단점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때 제거(提擧)로서 죄주었던 것이다."
하고, 이어서 김상복·조명정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승지 한익모(韓翼謨)가 언로(言路)를 열 것을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민백상(閔百祥)이 한 것이다."
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민백상이 전에 비록 발계(發啓)했지만, 연소한 사람이 어떻게 언론(言論)을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백상의 언론은 곧 세전(世傳)한 것이니 장차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지난 봄의 하교는 이미 이를 듣고 난 뒤에 도로 거두기를 다시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심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도로 거둘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금번 하교하신 것 역시 평범한 것이 아니니, 도로 거두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처분(處分)하지 않았더라도 어찌 아울러 하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심기가 피곤하니,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밤 승지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능행(陵幸)한 뒤에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대소 신료들을 모아 승묵(繩墨)을 높이 매달아 놓고 피차 대소 신료들이 내 승묵에 들어오지 않으면 모두 처분하겠다. 이광좌(李光佐)는 정미년203) 이후로 지나치게 알선(斡旋)하여 민진원(閔鎭遠) 또한 투비(投畀) 하는 데 이르렀는데, 이는 곧 이광좌가 잘못한 것이요 최석항(崔錫恒)의 만절(晩節)도 잘못된 것이므로, 대훈(大訓)을 내린 뒤에 마땅히 처분함이 있어야 했으나, 내가 하지 않았다. 조태구(趙泰耉)는 최석항에 비해 더욱 잘못하였다. 이광좌의 일은 내가 진실로 이를 알고 있었지만, 어찌 사람을 따라서 죄를 가할 수 있겠는가? 유봉휘(柳鳳輝)를 처치하는 것은 《감란록(勘亂錄)》의 근본이 되고, 최석항·조태구는 대훈의 근본이 된다. 내가 어찌 다만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임금이 될 뿐이겠느냐? 마음속에는 또한 현위(弦韋)가 있다. 고 상신 조태채(趙泰采)는 의논할 만한 것이 없으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은 그 사이 현위가 없을 수 없다. 이이명은 몇 해 동안 약방에 있었으니, 그 공이 적지 않은데, 잘못된 처분을 또한 어찌 모르겠느냐? 내가 솔직이 말하건대, 유봉휘를 안치(安置)하면, 조태구는 부처(付處)하고 이광좌는 파직(罷職)하는 데 불과해야 한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선후의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이광좌·조태억을 씹으려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또 다시 소란을 부리면 내가 승묵으로 처분할 것이니, 피차 가엾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金尙喆)을 필선으로, 이형만(李衡萬)을 문학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권상일(權相一)을 집의로, 서지수(徐志修)를 교리로, 신경(申暻)·박첨(朴)을 장령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헌납으로, 이세사(李世師)를 정언으로, 이익보(李益輔)를 교리로, 이제화(李齊華)를 지평으로 삼았다.
8월 17일 을해
승지에게 명하여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해 보게 하였는데, 조태억(趙泰億)이 김일경(金一鏡)을 국문할 때를 당하여 ‘사구(沙丘)’ 두 글자를 문목(問目)에 첨가해 넣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구’ 두 글자를 고 상신이 보고서 고치게 한 줄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지금 이것을 보건대, 고 상신이 어찌 그것을 고치게 하였을 리 있겠는가? 지금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다. 고 상신이 어찌 그것을 고치게 하였을 리 있겠는가? 지금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다. 고 상신은 언의(言議)가 비록 엄준(嚴峻)하지만 또한 김일경·박필몽(朴弼夢)의 무리와는 같지 않으며, 또 김일경을 국문하였을 때 구대(求對)하여 친히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는 등 깊이 헤아린 바가 있었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접혈(蹀血)·행배(行杯)·사구(沙丘) 등의 말은 역적 김일경이 지금도 아직 있으니, 징토(懲討)하는 도리에 있어 마음으로는 비록 차마 하지 못할 것이지만 말은 상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신하들은 고 상신 조태억을 얽어 넣고자 하여 그가 문형(文衡)을 지낼 때의 일이라고 말하고, 감히 차마 이러한 문자를 대훈(大訓)을 편술한 뒤에 다시 제기하였다. 아! 이러한 문자는 비록 꿈속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마음이 떨리고 뼈가 오싹해질 것인데, 나의 신하가 된 자들이 한 대신(大臣)을 논함에 있어 무엇을 구할 수 없어서 어찌 차마 이러한 문자를 문득 제기하여 위로 방촌(方寸)이 이미 차가워진 임금을 슬프게 하고 아래로 중외(中外)의 뭇 신민들의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인가? 작년 여름에 제술한 뒤에 다시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시켜야 한다는 등의 말로 만약 진달했다면 이는 임금도 없고 윤리도 없는 처사이다. 왕장(王章)이 있고부터 또 지금 상세히 유시한 뒤에도 다시 여섯 글자로 앞에서 진달하니, 이는 스스로 윗사람을 무함하는 일을 범한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역률(逆律)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아! 동가(動駕)가 멀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가? 이 여섯 글자를 수습하기 전에는 의릉(懿陵)의 안전(顔前)에 배알할 수 없어서 차마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밤을 새워 고람(考覽)하고 새벽에 이르러 불러서 베끼게 하였으니, 아! 나의 군민(軍民)들은 모두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 아! 여러 신하들 또한 나의 뜻을 체득하라. 아! 저 군민들은 곧 나의 열조(列祖)께서 무애(撫愛)한 사람들이므로, 이러한 생각을 거듭 유시하는 것이다. 아! 오늘날 조정에 ‘신하가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8월 18일 병자
임금이 이후에 친히 향(香)을 전할 때에는 강관(講官)이 시기가 닥치면 시각(時刻)의 선후(先後)를 미리 동궁에게 미품(微稟)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임금이 뜰에 있는데, 왕세자가 당(堂)에 앉아 서연을 여는 것은 도리상 편치 않기 때문이었다.
8월 19일 정축
달이 묘성(昴星)을 범했다.
임금이 목릉(穆陵)에 나아가 전알(展謁)의 예(禮)를 행하고, 이어서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휘릉(徽陵)·숭릉(崇陵)·혜릉(惠陵)을 배알하였다. 또 의릉(懿陵)을 두루 배알하고 돌아오다가 석관현(石串峴)에 이르러 호가(扈駕)하는 금군(禁軍)과 훈국(訓局)의 선상(先廂)에게 명하여 습전(習戰)을 회진(回陳)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참 되어 2경에 환궁(還宮)하였다.
8월 20일 무인
동조(東朝)가 침을 맞으니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8월 21일 기묘
《존주록(尊周錄)》을 가지고 내전으로 들라고 명하였다가 곧바로 정침(停寢)하였다. 임금이 경기의 수령을 소견하였다. 금천 현감(衿川縣監) 이수이(李壽頣)에게 명하여 《존주록》의 대의(大義)를 진술하게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스승 고 자의(諮議) 신(臣) 이태수(李泰壽)가 이 책을 지어서 국가로 하여금 길이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하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병이 깊어져 신으로 하여금 일을 마치게 하였으므로, 신은 마음을 다하여 닦고 윤색(潤色)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내편(內篇)에는 그 의리를 말했고, 외편(外篇)에는 그 사업을 말한 것입니다. 내편은 5권인데, 첫 번째는 봉삭(奉朔)204) 에 대한 종시(終始)이니 위로 위화도 회군(回軍)에서부터 아래로 당저(當宁)에 이르기까지 숭정(崇禎)의 일을 기록한 것이고, 두 번째는 재조(再造)하신 홍은(鴻恩)이니 곧 선무(先誣)를 소설(昭雪)하여 국가를 광복(光復)한 것이고, 셋째는 척화(斥和)이니, 광해군(光海君)의 비(妃) 유씨(柳氏)의 소(疏)로 시작하여 제현(諸賢)의 말과 행동을 이어 실은 것이고, 넷째는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대의(大義)이니 인묘(仁廟)께서 친정(親征)한 것과, 효묘(孝廟)께서 독대(獨對)한 일과, 숙묘(肅廟)께서 대보단(大報壇)을 세운 일과, 당저(當宁)께서 지은 황단의서(皇壇儀序)이며, 다섯째는 사한가영(思漢歌詠)이니 전후의 지사(志士)들이 구음(謳吟)한 것입니다. 외편은 입대지(立大志)·명대의(明大義)·화조정(和朝廷)·균부역(均賦役)·연사졸(鍊士卒)·수성지(修城池)·팔로 제치(八路制置) 등에 관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고자 하니 한 질을 들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사가(私家)의 문자를 가져다 보면, 훗날의 폐단을 열어 놓게 될까 두렵다고 아뢰니, 마침내 정침하였다.
어사 원경하(元景夏)를 보내어 호남을 양전(量田)하게 하였다.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거듭 내고 있는 대론(大論)은 위벌(威罰)이 아니라도 막을 수 있으니, 다만 마땅히 이치를 살펴서 순응해야 합니다. 어찌 성려(聖慮)를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여 이와 같이 가볍게 최절(摧折)을 가할 수 있습니까? 근래에 말로 죄를 얻은 자가 전후에 서로 이어지고 있으니 이미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한 번 합계(合啓)하여 다시 발론하고부터 이제 1주년이 되었는데, 엄교(嚴敎)를 두려워하여 규피(規避)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대청(臺廳)이 오래도록 닫혀 있으니, 이는 진실로 상하가 함께 애석해 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일맥(一脈)의 정론(正論)은 아직 완전히 민멸되지 아니하여 마치 돌에 눌려도 죽순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조금이나마 상세히 구명해 보지 않고 갑자기 위엄을 떨쳐 노하시면 한 번 계사(啓辭)가 겨우 이어지면서 많은 대신(臺臣)들이 아울러 체차(遞差)될 것이니, 이것이 무슨 경상(景像)이겠습니까? 지난날 유최기(兪最基)를 핍박하여 정계(停啓)하게 한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이 처분 또한 지극히 비상(非常)한 것이니, 신은 더욱 개연(慨然)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홍서(洪曙)·남덕로(南德老) 두 대신(臺臣)이 특별히 삭직(削職)된 데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시비(是非)의 본원(本源)을 묻지 않은 채 다만 색목(色目)만 구별하려 하셨으니, 실제로는 당습(黨習)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습을 인도하여 이루게 한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성의(聖意)가 비록 시폐(時弊)를 몹시 개탄하는 데에서 나왔다 하나, 군부가 되어 역적을 징토(懲討)함에 있어서 진실로 영호(營護)하는 무리가 아니라면 대저 어찌 남북(南北)의 다름이 있단 말입니까? 《경신일기(庚申日記)》를 지금까지 계판(啓板)에 항상 놓아 두고 있습니다. 아! 그때의 일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일찍이 돌이켜 후회하지 않은 까닭에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놀라 미처 안정되지 않은 실상입니다. 신 또한 일전에 연중에서 대략 진달했습니다만, 바라건대 오직 현명하게 잘 살펴서 생각하면 반드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뒤좇아 제기하여 뭇사람들이 더욱 의혹되게 한다면, 스스로 반성하는 글을 편술한 본의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처분은 옹용(雍容)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 엄교(嚴敎)를 내렸을 때 정침할 것을 청하지 않았고, 또 감히 등전(謄傳)하였으나, 그 칙려(飭勵)한 바가 어찌 체차하는 데 이르겠는가? 이 또한 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한 실상을 통촉하고 그 또한 참작한 것인데, 이른바 ‘중도에 지나치다는 것에 대해 경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홍서·남덕로의 일은 바로 공성(孔聖)의 조왕(措枉)205) 한 뜻이며, 《경신일기》를 계판에 둔 것도 뜻이 또한 깊다. 아! 여섯 자의 차마 볼 수 없는 것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낙담이 되는 듯하니, 지금 하교하는 것 또한 늦은 것이다. 하교가 비록 엄중해도 뜻은 또한 옹용한데, 경이 정침을 청한 것은 또한 무슨 생각에서인가? 그렇다면 임금은 비록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을 하전(廈氈)에서 날마다 진달한 후에야 그것이 과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다는 분의가 있다는 것인가? 한번 대배(大拜)하고부터 경에게 바란 것은 시상(時象)을 고르게 하고 중도에 지나친 것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니, 이러한 차자를 올리는 것은 진실로 바라던 바가 아니다."
하였다.
교리 이익보(李益輔)가 상소하여 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체차하도록 한 명을 도로 정침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금 이 대론(大論)에 대해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누군들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마는, 간통(簡通)206) 하여 돌아가며 보고서 삼사에서 아무 탈 없이 행공(行公)하고 있는 자들이 삼가 갖출 것을 쓰지 않은 채 교묘히 면하려는 짓만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지극히 해괴합니다. 따라서 엄중히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수봉(李壽鳳)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동참하겠다고 말하고 갑자기 한 번 상소하였는데, 말을 황홀(怳惚)하게 하여 마음씀이 아름답지 못하니, 신은 견삭(譴削)의 형전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우규(右揆)에게 내린 비답에 효유(曉諭)하였는데, 일편(一篇)이 오로지 당심(黨心)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밤을 새워 면칙(勉飭)한 뒤에 어찌 감히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교리 이익보를 체차하고 그 소장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우참찬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사람이 태어나 외부(外傅)에게 나아가면서부터 약관(弱冠)에 이르기까지 모두 힘써 면학(勉學)할 때이니, 바로 부지런히 힘써서 일각이라도 한가하게 노는 일이 있으면 안됩니다. 대현(大賢)은 대강(大綱)의 표준을 이러한 때에 두었으니, 정명도(程明道)가 14, 5세부터 문득 성인(聖人)을 배웠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 동궁 전하께서는 보령(寶齡)이 한창 때여서 또한 이미 여기에 미치고 있으니, 학문이 나아갈 바를 살피지 않고 과연 어떠한 지위에 나아가겠습니까? 반드시 제 2등(二等)에 떨어지지 않아야 성인의 경지에 반드시 이를 수 있고 기필할 것이 지치(至治)를 반드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큰 뜻을 세워 얻고, 또 다소나마 공부(工夫)를 하여 이를 실천해야 할 것인데, 이는 진실로 예지(睿智)·자강(自强)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곁에서 도와 주어 의취(意趣)가 발현되게 하려면, 어진 관료들에게 의뢰함이 없을 수 없으니, 전후에 성교(聖敎)를 부지런히 내리신 것은 대개 또한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중차대한 데 관계되는 것인데, 그 가운데 찬선(賛善)의 직분은 더욱 다른 관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찌 한결같이 신으로 하여금 헛되이 얽매이게 하여 거의 10년이란 오랜 세월에 이르게 하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니, 마치 경을 대하는 듯하다. 지척에 있는 강교(江郊)에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점점 생기는데, 경은 모름지기 소자(小子)의 은근한 뜻을 본받고, 전날에 면유(面諭)했던 뜻을 돌아보아 사직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어 이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박첨(朴)이 상소하기를,
"어제 삼사에서 연계(連啓)한 것은 여러 해 동안 망설이던 나머지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천천히 구명해 보지도 않은 채 한결같이 아울러 최절(摧折)하시니, 신은 세도(世道)를 진압하는 방도가 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대성인이 언관(言官)을 용납하는 도량이 부족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귀착되는 바가 없이 말이 모호하다 하여 체직시켰다.
8월 22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구(沙丘)’ 두 글자를 어찌 차마 다시 제기하는 것인가? 옛사람은 그 스승에게 차마 들을 수 없다 하여 육아편(蓼莪篇)을 폐하였는데207) , 오늘날의 뭇 신하들은 이런 마음이 없으니, 비록 중률(重律)로 처분한들 또한 어찌 애석하겠는가? 다만 조태억(趙泰億)을 공격하고자 하며 혼몽하여 깨닫지 못한 때문에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우상은 사람됨이 허약하기 때문에 세속의 논의에 동요되어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익보(李益輔)의 일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된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지금 이 합계는 군신의 대의(大義)를 밝혀서 오랫동안 울적했던 공론(公論)을 편 것입니다. 비록 당심(黨心)이 없는 자라 하더라도 또한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공론이라면 비록 도거(刀鋸)라도 피하지 않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익보의 소장은 우상과 대략 같은데, 우상에게 내린 비답에 이미 효유하였다고 하교하시고 이에 체차시키도록 명하셨으니, 처분이 지나칩니다. 성의(聖意)가 만약 우상에게 의임(倚任)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자에 대한 비답 가운데 중도에 지나친 것은 고쳐서 내리시고, 이익보를 체차하도록 한 명도 도로 거두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이 만약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경 역시 그와 함께 연차(聯箚)하도록 하라."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우상은 바야흐로 멀리 떠나는 때를 당한 까닭에 먼저 한 것인데, 신 또한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의 ‘대론(大論)’ 두 글자는 내가 일찍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것인데, 경 또한 대론이라고 말하니, 경을 위해 개연스럽게 여긴다. 우상이 백수(白首)의 나이에 소미(消弭)하지 못하고 도리어 조장하고 있는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면서 연소배에게 맡긴단 말인가? 부형(父兄)이 만약 남에게 욕을 당하면, 그 자제가 된 자는 마땅히 그것을 숨기고 감히 전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는 곧 토죄(討罪)하는 것입니다. 2년 동안 겨우 두 번 연계(連啓)하였으니 이것 역시 국가가 인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현재 이목(耳目)의 관원을 가리지 못한 것은 오로지 장통(掌通)에 말미암는 것이니, 어찌 대각(臺閣)을 엄중히 하는 도리인가? 지금 대신이 장통에 대한 폐단을 제거할 것을 진달하였으니, 전조에 엄중히 신칙하여 특별히 청선(淸選)을 더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김재로의 진달로 인하여 이 교시가 있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글을 읽은 선비를 초치(招致)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큰일이니, 그 선택이 더욱 중대하다. 이후로 경연관(經筵官)을 새로 뽑을 때에는 대신과 이조 당상들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공의에 따라 간선(揀選)하되, 한 전관의 뜻으로 남대(南臺)208) 에 통하지 않게 함으로써 유림(儒林)을 중시하는 뜻을 보이고, 기록하여 규식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정문(旌門)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진신(搢紳)·사림(士林)들이 박필성의 효행을 합사(合辭)하여 예조에 알렸으나, 수당(首堂)이 혐의하여 부당하게 여긴 까닭에 정부(政府)에 알릴 수 없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를 아뢰자 이러한 명이 있게 되었다.
임금이 이조 참판 김상로(金尙魯)에게 말하기를,
"이미 대신들에게 유시하였는데, 경은 오늘날의 세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황홀(怳惚)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홍서(洪曙)·남덕로(南德老)의 일뿐만이 아니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지난번 윤광소(尹光紹)가 연주(筵奏)한 뒤로 신 또한 하문받고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돌아보건대 오늘날의 세도는 그때에 견주어 더한 것도 없고 나은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합계한 일로 살펴 보건대, 당습이 점점 깊어지고 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금번의 합계는 바로 의리이지 당심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매번 억제를 가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며, 의리로 재단(載斷)함이 마땅합니다. 징토하고 회복시키자는 의논을 흔쾌하게 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당습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조제(調劑)하였으나, 끝내 색목(色目)을 혁거(革去)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완준(緩峻)의 지목이 있으니, 별도로 일목(一目)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완준의 지목은 오늘날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풍릉 부원군 조문명(趙文明)이 조제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는데, 그때 이미 이러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요사이 현저해진 듯한데, 이는 곧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천하의 일은 작은 것을 살피다 보면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니, 혹 전하께서는 이에 가까운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세도를 전에 견주어 더함이 없다고 여긴다고 했으나, 돌아보건대 오늘날의 세도가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나은 듯하지만 그 속은 도리어 심한 바가 있다. 한편에서 이런 일이 있으면, 한편에서 반드시 사대신(四大臣)으로써 대거(對擧)하려고 하므로 내가 승묵(繩墨)을 매달아 처분하겠다고 하교한 것이다. 대훈(大訓)을 지은 뒤에도 나의 뜻을 본받지 않고 있으니, 엄중히 처분하지 않고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3일 신사
임금이 동궁에게 시좌(侍坐)하라고 명하고, 궁관(宮官)을 불러 《논어(論語)》를 강(講)하도록 하였다.
송수형(宋秀衡)을 수원 부사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홍익삼(洪益三)을 사간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장령으로, 이중조(李重祚)를 지평으로, 임위(任瑋)를 정언으로, 홍봉조(洪鳳祚)를 강원도 관찰사로, 신회(申晦)를 교리로, 이이장(李彛章)을 부수찬으로, 김상복(金相福)을 보덕으로, 남태기(南泰耆)를 필선으로, 조명채(趙命采)를 문학으로, 김시위(金始煒)를 수찬으로, 홍상한(洪象漢)을 대사성으로, 정휘량(鄭翬良)·이유신(李裕身)을 승지로 삼았다.
8월 24일 임오
임금이 의릉(懿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8월 25일 계미
임금이 휘릉(徽陵)의 기신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8월 27일 을유
좌의정 정석오(鄭錫五)를 면직시켰다. 정석오가 진소하여 상직(相職)을 해면(解免)시켜 줄 것을 원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사직을 허락하였다.
지평 이제화(李齊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가만히 듣건대, 근래에 전하께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다가 당(唐)나라 덕종(德宗)의 일에 이르러 매번 일찍이 반복하여 통한(痛恨)해 하시며 취하여 경계를 삼으신다 하니, 아! 성대하십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덕종이 육지(陸贄)에게 말하기를, ‘강공보(姜公輔)는 매직 취명(賣直取名)했으니, 이에 근거해서 마음을 쓰면 어찌 어질고 착해지겠는가?’ 하자, 육지가 대답하기를, ‘신하가 헌언(獻言)하는 것은 임금을 도와 다스리는 것이고, 임금이 간언에 나오는 것은 임금의 어긋난 점을 신하가 의리로 보필하기 때문입니다. 말한 것이 진실로 도와서 다스리는 것이라면 어찌 반드시 사람 때문에 말을 폐(廢)할 것이며, 간하는 것이 진실로 임금이 어긋난 점을 보필하는 것이라면 어찌 반드시 뜻을 책망하여 간언을 거절하겠습니까? 만약 말한 것에 족히 쓸 만한 것이 없다면, 뜻이 비록 좋더라도 어찌 받아들이며, 간하는 말에 따를 만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어찌 버리겠습니까?’ 하였으니, 육지의 말이 좋습니다. 이는 즉시 상하가 의심하는 마음을 해소시켜 군신(君臣)이 서로 미더워하는 아름다움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은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서 조정의 의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으니, 인군(人君)이 간언에 나오고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오직 마땅히 심기를 평온하게 가져 잡념을 없애고, 그 말의 시비 득실(是非得失)을 살펴서 취사 종위(取捨從違)를 결정해야 할 따름입니다. 어찌하여 반드시 본래 일의 밖에서 거꾸로 헤아려 갑자기 의심하고 미워하는 뜻을 보이며, 또 어찌하여 반드시 언의(言議)의 겉에 대하여 마음을 논하고서 가볍게 죄벌(罪罰)을 더하시는 것입니까? 그 불선(不善)함을 들추어내어 그 선(善)을 채택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을 살펴보고 아울러 그 옳은 것을 폐지한다면,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일찍이 이러한 이치에 대해 강구하심이 반드시 정밀하시나, 혹 조정의 신하들이 장주(章奏)하는 사이에 그 일의 옳고 그름은 묻지 않은 채 먼저 협잡(挾雜)이 있는가 의심하시고, 그 말의 득실을 구명해 보지 않은 채 먼저 심술(心術)이 있는가 책망하시니, 비록 연감(淵鑑)이 십분 어긋남이 없어서 진장(眞贓)의 실정을 일일이 간파(看破)하신다 하나, 이미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물을 대응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총명으로 천만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살피려고 하시는데, 또한 어찌 확실한 가운데 허술함이 생겨 실수가 없을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신료들은 모두 의심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죄를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에 임해서는 규피(規避)하고, 말할 때를 당해서는 머뭇거리고 있으니, 정직하게 계문하는 일이 없이 함묵(含默)이 풍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어찌 두려워하고 탄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글은 공정(公正)하지만, 마음 또한 공정한지 내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인용한 일은 곧 옛날 명신(名臣)의 말이니, 이는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기타 마음속에 감추어 참으며 협잡하는 뜻은 나의 고집하는 바가 있으니, 어찌 흔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들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와서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 병사 유동무(柳東茂)는 일찍이 청렴한 관리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탐수(貪帥)가 되었으니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도신이 조사해서 아뢴 것을 보니, 털끝만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이 계사(啓辭)를 금오에 다시 내려 보내어 전례에 의거해서 엄중히 형신하게 하되, 구초(口招)는 기필코 직초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민응수(閔應洙)를 파직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을 제배(除拜)하여 좌의정으로 삼고, 하교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여 크게 효유하였는데, 이제 어찌 더 첨가하겠는가? 아! 인자하고 어진 마음은 넉넉하지만, 중확(重確)한 도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었다. 지난번 정승에 제배하였을 때 임금과 정승에 대해 또한 이미 논했었는데, 어찌 정승에 제배하여 귀를 귀울였던 사람이 연소배를 도와서 풍랑을 떨치게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차자 가운데 정침하기를 청한 것은 여섯 자의 엄중한 제방(隄防)을 혼동한 것이니,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는가? 아! 이러한 제방은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만약 엄중히 하고자 할 경우 대관(大官)을 놓아두고 어디에서 먼저 하겠는가? 애석하도다. 대신은 어찌하여 나의 뜻을 본받지 않고 백수(白首)의 나이로 도리어 연소배를 돕는 것인가? 내가 비록 정신이 혼모하나, 어찌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는가? 우의정 민응수를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마지못해 따른 것은 염우(廉隅)를 펴게 한 것에 불과하였다.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에 옛날 임금을 보필하던 대관이 몇 사람 있는가? 그가 만약 나라를 위한다면 어찌 그 뜻을 굽혀 따르겠는가? 영돈녕부사 조현명을 좌상(左相)에 제배한다."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대사헌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집의로, 김주(金霔)·이광익(李光瀷)을 장령으로, 이응협(李應協)·이기덕(李基德)을 지평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부수찬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수찬으로, 이광세(李匡世)를 예조 참판으로, 정휘량(鄭翬良)을 이조 참의로, 홍익삼(洪益三)을 승지로, 정석오(鄭錫五)를 영돈녕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유(大諭)를 부르며 베껴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다스리는 것은 위에서 혼자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삼공(三公)이 있고 육경(六卿)이 있고 이목(耳目)의 관원이 있었는데, 아래로 온갖 일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거용(擧用)하여 조치하게 하였으니, 만약 면려(勉勵)한다면 이들을 버려두고 누구에게 먼저 하겠는가? 아! 당습(黨習)이 심하다. 전 좌상이 화평하고 단아하며 삼가고 경계하여 공정하게 법을 지킨 것은 상하가 함께 아는 것이다. 다만 기꺼이 국사를 담당하려 하지 않으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도리어 해괴한 기괄을 그에게 가하고 한결같이 얽어매려 하였으니, 어찌 성실한 도리라고 하겠는가?
교목 세신(喬木世臣)들로 하여금 당습을 버리고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뜻을 펴게 하려 하였는데, 나의 덕이 부족함으로 인해 다만 언교(言敎)하고부터 온갖 괴이한 일이 겹쳐 발생하고 있다. 중재(重宰)를 경알(傾軋)하는 기괄이 위로 고굉(股肱)의 신하에게 미치고, 옛날에 조제하던 세 신하가 날로 구덩이에 몰리게 되었다. 몇 년 간 잠잠하던 논의가 또 다시 전과 같아졌는데, 그 가운데 더욱 해괴한 것은 3인의 처분을 《감란록(勘亂錄)》과 대훈(大訓)에 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정계(停啓)하였으니,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교문(敎文)에 대해서는 차마 제기하여 말할 수 없을 것인데, 다시 어찌하여 등사(謄寫)한 것인가?
이번의 하교는 늦었다고 할 만하다. 지위가 대관(大官)에 있으면서 비록 조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차마 도리어 조장하는 것인가? 대관이 이와 같은데, 연소배들이야 어찌 기를 돋구지 않겠는가? 대체(大體)는 이미 수규(首揆)에게 유시하였는데, 오히려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대개 또한 소중하게 여기는 바가 있어서였지만, 이제 장차 처분을 하려 한다. 아! 군신 백관(群臣百官)들은 열조(列朝)께서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도록 신칙하신 성의(盛意)를 돌이켜 생각하고, 의릉(懿陵)의 송백(松柏)을 우러러보아 소란을 부려서 나의 조정을 어지럽히거나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당습을 씻어 버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나의 부족한 덕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8일 병술
천둥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고 영상 홍치중(洪致中), 고 좌상 이집(李㙫)·송인명(宋寅明), 고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明)에게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세도(世道)를 돌아보건대, 어진 정승이 필요한데, 나는 비록 남아 있건만 그 정승은 이미 가버렸으니, 비록 만회하고자 한들 내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한밤중에 생각이 일어나서 마음이 창감(愴感)하니, 네 신하들이 탕평(蕩平)을 힘써 주장하며 스스로 조제를 임무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우상을 견파한 명에 놀라 두려워하고 근심하여 탄식하며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지금 합사(合辭)한 논의는 진실로 여러 해 동안 펴지 못했던 의리(義理)인데, 이미 저지당했던 것을 도로 발론하였다가 문득 모두 낭패한 것입니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한결같이 아울러 체차해 버리고, 두 대신(臺臣)을 특별히 삭직(削職)시킨 것은 성인(聖人)의 사기(辭氣)에 더욱 손상됨이 있습니다. 여섯 자의 엄중한 제방(隄防)에 대한 하교를 정침하도록 청한 것에 이르러서는 더욱 뜻밖입니다. 신은 전석(前席)에서 이미 계속 그렇지 않다고 단단히 보증했습니다만, 오히려 굽어 믿지 않으시고 이를 고집하여 문제삼으시니, 신의 마음이 황송하고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라, 저 당사자는 어찌 번민하며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아! 동료 정승은 전하께서 임용하신 지 오래 되었습니다. 단량(端良)하고 간중(簡重)하여 모든 일을 환히 익혔으므로, 전하께서 이미 간발(簡拔)하셔서 삼사(三事)에 두셨었는데, 지금 한마디 말이 합당치 않다 하여 뚜렷이 미워하여 냉대함을 보이시고 등용한 지 오래지 않아 버리듯이 물리치셨으니, 아마도 맹자(孟子)가 말한바 ‘옛날에 등용한 자로 오늘에 와서 없애야 할 자임을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에 가깝습니다. 신은 또한 탄식과 애석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부제학 윤심형(尹心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외람되게도 삼사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여러번 목욕 토죄(沐浴討罪)209) 하자는 청을 진달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어 세도가 바뀌고 변하니 이 의리가 회식(晦蝕)되어 거의 시휘(時諱)가 되었습니다. 근래에 다행스럽게 대론(大論)이 이미 일어나서 천토(天討)가 비로소 펼쳐졌으나, 전하께서는 아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에 대한 두 번의 계사(啓辭)에 대해 오히려 윤유(允兪)하시지 않았습니다. 지난 겨울의 처분은 이미 뭇 신하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고, 일전의 엄중한 하교는 더욱 여정(輿情) 밖에서 나왔으므로, 한 가닥의 사기(士氣)가 남김없이 꺾이고 깎여서 이제부터 이후로 다시 진작(振作)시킬 길이 없어졌습니다. 아! 신이 비록 전간(田間)에 늙어 엎드려 있을 지언정 폐장(肺膓)·면목(面目)은 을사년210) 옛날과 같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배회하여 근심하고 탄식하며 심회를 스스로 그칠 수 없었는데, 무릅쓰고 나갈 수 없는 의리 때문에 오늘에 와서야 소장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살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세상에서 비록 청백(淸白)한 조수(操守)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만약 당심이 있으면 나는 등용하지 않겠으며, 세상에서 비록 세상을 구제할 재주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만약 당심이 있으면 나는 등용하지 않겠다. 지난번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판서로 삼았을 때 그 사람을 크게 칭찬했었는데, 이제 그 소장을 보건대, 그가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은 품고 있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니, 이종성에 대해 사람을 잘못 알았던 것이 애석하다. 대훈(大訓)을 내렸으나, 아직도 구심(舊心)을 품어 잊지 않고 있다. 아! 백이(伯夷)의 좁은 소견은 성인(聖人)의 좁은 소견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윤심형의 좁은 소견은, ‘온 몸에 당심이 가득 찼다.’고 할 수 있는데 불과하다. 조정에 비록 사람이 없더라도 나는 결코 이런 사람을 등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석하게 지난번 이조 참의가 의망을 고쳤을 때 오늘날 세도를 위해서는 이 사람을 수망(首望)에 주의했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내 마음을 본받지 않는 것인가? 하물며 비록 그 사람을 미워하더라도 윤허를 따르기 전에는 관질(官秩)이 전과 같은 것인데, 이광좌와 조태억을 지칭하고 있으니, 곧 무뢰한 자의 말이다. 장차 어떻게 이런 자를 부제학(副提學)에 임용하겠는가? 윤심형을 먼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고, 그 글은 내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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