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무자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출사(出仕)하도록 면려하였다.
9월 2일 기축
임금이 침(鍼)을 맞았는데, 약방과 정원의 2품 이상이 정후(庭候)하였다.
권상일(權相一)을 사간으로, 조명채(曹命采)를 헌납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보덕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지평으로, 어석윤(魚錫胤)을 부교리로, 윤광소(尹光紹)를 수찬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응교로, 조재민(趙載敏)을 필선으로, 서효수(徐孝修)를 사서로, 박춘보(朴春普)·이정보(李鼎輔)를 승지로, 김시형(金始炯)을 판돈녕으로 삼았다.
대사간 조명겸(趙明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합사(合辭)를 거듭 발론한 것이 대각(臺閣)에서 버려 휴지가 된 지 장차 1년이 되어갑니다. 의리를 펼 수 있는 때가 없어서 여정(輿情)이 갈수록 더욱 답답해 하고 있는데, 엄중한 하교를 거듭 내려서 토죄(討罪)하자는 의논을 도리어 당습으로 돌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토죄할 만한 죄가 없는데도 색목(色目)이 다르다 하여 억지로 끌어대어 허위로 날조한다면, 진실로 당(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죄범(罪犯)이 토죄할 만한 것은 있어도 용서할 만한 것이 없을 경우 하나의 당(黨) 자로 이를 단정하는 것은 실로 신이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아! 당론(黨論)은 진실로 미워할 만한 것이지만, 시비(是非)가 없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시비의 소재를 환히 알고 계시지만, 오히려 또 최절(摧折)하고 꺾어버리시니, 죄가 있는 사람이 조사하여 토죄하고 토죄하는 사람은 도리어 죄를 얻게 됩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의논을 없애면, 세도를 안정시키고 당론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은 군강(君綱)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실추되고, 여정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우울해 할 것이며, 진실로 당심이 있는 자들은 장차 이로 인해 기세를 돋구어 더욱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게 될 듯합니다.
대신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요, 부학(副學)은 유신의 장(長)입니다. 한마디의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견파(譴罷)의 명을 잇따라 내리시며 사교(辭敎)의 사이에 재택(裁擇)이 전혀 부족하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신은 진실로 성조(聖朝)를 위해 이런 일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난번에 임상원(林象元)이 말하기를, ‘대신이 잘못이 있을 경우 회유(誨諭)하는 것은 옳지만, 견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신 지 일찍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심기를 화평하고 순화롭게 가지시고, 노여움을 잊고 이치를 살펴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파직하고 삭직하도록 한 명을 빨리 정침하신다면 세도에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군상(君上)이 되어 태아(太阿)211) 를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지금 면칙(勉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대사간 조명겸을 체차(遞差)하고, 그 소장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동부승지 박춘보(朴春普)가 아뢰기를,
"일찍이 보건대, 삼사의 여러 재신들이 올린 소장에 대해 비답을 내리지 않은 적이 많습니다. 지금 대사간 조명겸의 소장은 다른 사람들과 더욱 다르니, 성조(聖朝)에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은 마땅치 않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지난해 대신의 소장에도 역시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비답하였었는데, 어찌 유독 대간의 소장에 대해서만 돌려줄 수 없겠는가? 중의에 따라서 하는 것이니, 실로 개연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9월 3일 경인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김상적(金尙迪)을 대사간으로, 조재민(趙載敏)을 교리로, 조명채(曹命采)를 수찬으로, 유한소(兪漢蕭)를 설서로, 윤광소(尹光紹)를 부교리로, 이이장(李彛章)을 부수찬으로, 민계(閔堦)·권상일(權相一)을 승지로 삼았다.
9월 4일 신묘
동조(東朝)가 침을 맞았는데, 약방·정원·옥당의 2품 이상이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남녀가 때가 지나도록 혼례를 올리지 못하거나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 2년 간격으로 연초에 유사(有司)가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비록 큰 전염병이나 큰 흉년을 만나더라도 연차(年次)에 구애받지 말라는 뜻을 기록하여 영갑(令甲)을 삼되, 이러한 뜻으로 특별히 사륜(絲綸)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왕정(王政)에서 큰 것이나 꼭 친히 사륜을 내릴 필요는 없다. 주달한 바에 의거하여 정식을 삼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정명(洪廷命)을 사간으로, 오언유(吳彦儒)를 헌납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응교로, 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삼았다.
동돈녕 이형종(李亨宗)의 둘째 아들 이철해(李喆楷)를 이영(李泳)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낙천군(洛川君) 이온(李縕)의 후손으로 삼았다.
9월 6일 계사
한익모(韓翼謨)를 대사간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사간으로, 조명채(曹命采)를 헌납으로, 구윤명(具允明)을 정언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예조 판서로, 조재민(趙載敏)을 응교로 삼고, 달선군(達善君) 이영(李泳)을 단부(單付)하였다.
9월 7일 갑오
매상(味爽) 때에 서리가 내리고, 초저녁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9월 10일 정유
대사간 한익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신이 후원(喉院)에서 대죄(待罪)하였을 때 성상께서 합계(合啓)에 대해 격동하고 번뇌하셔서 사교(辭敎)가 비상(非常)하고 처분이 타당치 못한 것을 직접 보고 광구(匡救)하는 뜻을 대략 본받으려 했으나,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하께서 신을 언의(言議)의 직임에 있게 하시니, 신이 비록 끝내 묵묵히 있고자 하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저 두 사람의 죄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론(大論)이 20년 뒤에 거듭 일어났으니, 진실로 이는 온 나라의 공의(公議)인데, 대저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도리어 당론에 가깝다고 의심하여 당(黨)이라고 억압하는 것도 부족하여 거듭 최절(摧折)을 가하시는 것입니까? 한마디 말로 쟁난(爭難)하니, 평일에 위임했던 대신을 견파(譴罷)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오직 저 윤심형(尹心衡)·조명겸(趙明謙)이 서로 이어서 체직(遞職)되고 파직(罷職)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순치(馴致)시켜 그치지 않는다면 기강을 범한 무리는 장차 징계됨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비상한 하교를 도로 거두시고, 여러 신하들을 파직하고 삭직한 명을 빨리 정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몇 번 은대(銀臺)에서 직접 하교를 받았는데도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예조 당상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은 곧 우리 자성께서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고, 또 탄생하신 달을 맞게 되니 애일(愛日)하는 정성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금번 탄일에는 마땅히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하례(賀禮)를 행할 것이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참의 이덕중(李德重)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몸소 하례를 행하신 뒤에 마땅히 전(殿)에 오르시어 하례를 받고 전문(箋文)을 올리는 등의 절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받지 못할 까닭이 세 가지 있으니, 경자년212) 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의 마음과 자성의 마음에 막힘이 없다는 것이 그 첫 번째 까닭이다. 그리고 자전께서 방물(方物)을 받지 않는데, 내가 어찌 하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까닭이다. 탄신일에 만약 자성의 마음을 동요시키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까닭이다."
하였다.
병조 참의 신이진(愼爾晋)이 상소하여 경묘(景廟)에 휘호를 더하여 높힐 것을 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아직까지 앙청(仰請)하지 않았다 하여 당심(黨心)으로 배척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 우리 경묘의 지효(至孝)·성덕(盛德)이 어찌 다만 뭇 신하들의 진장(陳章)에서만 더욱 빛나겠는가? 신이진이 소장을 올려 경묘의 성덕을 칭탁하였으나, 뜻은 오로지 조정의 신하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데 있으니, 바로 계사년213) 에 향유(鄕儒)들이 영릉(寧陵)에 휘호할 것을 청했는데, 뜻이 진실로 음참(陰慘)했던 것과 같다. 그래서 그 당시 특명으로 엄히 처리했었으나, 피차를 논할 것 없이 한마디로 말해, ‘당심(黨心)’이라고 한 것은 곧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고자 한 것이다. 그 ‘전하를 섬기는 것으로써 경묘를 섬기고, 경묘를 받드는 것으로써 전하를 받든다.’고 한 것 역시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을 신하답지 못한 데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니, 뜻이 음휼(陰譎)한 데에 관계된다. 한 편의 정신이 성덕을 칭찬하는 데 있지 않고, 오로지 진신(搢紳)을 일망 타진하는 데 있다. 그 가운데 더욱 음참한 것은 먼저 조중우(趙重遇)의 일로 앞에는 ‘황형(皇兄)의 성덕’이라 청했으나, 말초(末梢)의 뜻은 곧 조중우 한 사람에 있는 것이다. 아! 비부(鄙夫)의 형태가 늙었어도 쇠잔해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엄히 제방(隄防)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이진을 원찬(遠竄)하고, 그 글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1일 무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제 탐리(貪吏)를 엄중히 핵실(覈實)하는 날을 당하여 청렴한 사람들은 포숭(褒崇)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이름을 물었다. 조현명이 고 판서 윤용(尹容),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고 수사 허정(許晶) 및 전 참의 정형복(鄭亨復), 전 부사 한덕필(韓德弼)이라고 대답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고, 정형복·한덕필은 특별히 가자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주연(胄筵)에서 강학(講學)을 매우 부지런히 하여야 하는데, 춘방(春坊)에는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천전(遷轉)시키니, 자못 권강(勸講)을 위임한 뜻이 없습니다. 청컨대 학식이 우수한 사람을 가려서 뽑아 다른 데로 천전시키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서지수(徐志修)·남유용(南有容)을 춘방에 검의(檢擬)하여, 다른 관직으로 천전시키지 못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시강하도록 명하였다.
송익보(宋翼輔)를 대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이조 참의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윤광찬(尹光纉)을 지평으로, 오언유(吳彦儒)를 헌납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교리로, 이이장(李彛章)을 부수찬으로, 민백상(閔百祥)을 보덕으로, 이형만(李衡萬)을 문학으로 삼았다.
9월 12일 기해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금오 의장(金吾議狀)에 판하(判下)하기를,
"유동무(柳東茂)의 일은 반드시 장폐(杖斃)를 기필하였다. 염리(廉吏)가 이미 포상을 받았으면, 탐묵(貪墨)한 자는 더욱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교리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탐리(貪吏)를 엄중하게 징계하는 것은 실로 세상을 격려하는 대정(大政)이지만, 신이 어사의 별단(別單)을 보건대, 죽일 만한 죄가 하나도 없는데, 형신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장물죄(贓物罪)를 범하고도 자복하지 않으니, 형신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일찍이 수령을 거치지 않은 어사가 갑자기 아뢰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유동무가 전관(前官)의 일로 붙잡혔다 하여 하리(下吏)가 어사인(御史印)을 찍어 봉진(封進)한 것을 인적 문서(印迹文書)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김덕후(金德厚)는 월름(月廩) 가운데 남은 쌀을 팔아 쓴 것에 불과한데, 어찌 장물죄를 범했다고 하겠습니까? 예전에도 또한 수령을 거치지 않고 어사가 된 사람이 고을의 수령이 월름을 판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 논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그가 수령이 되어 장차 제수(祭需)를 경영하면서 월름을 팔고자 하였으나, 일찍이 이 일로 다른 사람을 죄주었기 때문에 감히 범하지 못하고, 비로소 돌이켜 후회하면서 탄식하기를, ‘어사는 마땅히 수령을 지낸 인물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합니다. 탐묵(貪墨)한 사람은 모두 ‘죽일 만하다.’고 한 후에야 마땅히 형신 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널리 구제한 일은 별단 가운데에도 또한 말하기를, ‘백성을 진휼(賑恤)하여 한 사람도 유망(流亡)한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진휼을 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범한 바가 급료(給料) 가운데 남은 물건에 불과하고, 공가(公家)의 전곡(錢穀)이 아닌데, 이 때문에 형을 받으면 진실로 원통할 것입니다.
경유(鯨油)에 대해 말씀드리면,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의 7촌 숙부인 서명연(徐命衍)은 본래 청백하다고 일컬어졌는데, 해읍(海邑)의 수령으로 있었을 때 경유를 팔아 시집가는 딸의 혼수를 장만했다 합니다. 서명연 같은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저 무쉬(武倅)이겠습니까? 지난번 관서 어사(關西御史)에게 들은 듯한데, ‘듣건대 이 보고를 서계(書啓)하면서 빼버린 것이 많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으면 어떻게 징계됨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문사 낭관으로 입시했는데, 신문(訊問)하는 즈음에 혹 다른 죄를 끌어대어 자복(自服)을 얻어 내는 자료로 삼았었습니다. 이제 유동무가 직초(直招)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속인 데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을 속인 것은 인신의 대죄이나, 본죄 이외에 또 이와 같은 대죄를 첨가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은 앞 부분은 충후(忠厚)하지만, 뒷 부분은 그르다."
하였다.
정언섭(鄭彦燮)을 도승지로 삼았다.
9월 13일 경자
대전(大殿)의 탄일이었다. 조정의 2품 이상이 정후(庭候)하였다.
9월 14일 신축
임금이 승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인군(人君)이 권장하고 징계하는 것은 염리(廉吏)와 탐관(貪官)에게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염리를 권장하면 많은 백성들이 이를 의뢰하여 편해질 것이고, 한 사람의 탐리를 징계하면 많은 백성들의 원한이 풀릴 것이니, 권장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징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법(贓法)이 엄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탐리들이 모두 풀려나고 적흑자(翟黑子)가 임금을 속여도 도신이 사사로운 생각에 견제되어 한 번 거듭 조사하지만 모두 백탈(白脫)되니, 이와 같으면 장차 어사를 어디에 쓰겠는가? 이 때문에 어사가 염문(廉問)한 것은 저절로 실속이 없는 과목에 돌아가니,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만년에 힘써 조금이나마 권면하려 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것이요 왕세자를 위한 것이다. 지난번에 유신(儒臣)이 먼저 중도에 지나치다고 말한 후 또 말하기를, ‘이와 같으면 이후에 어사가 장차 탐관을 성상께 계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진달한 바가 비록 숨김이 없는 데에서 나왔다 하나, 어찌하여 한결같이 그릇되게 말하는 것인가? 관서 어사는 이 탐리를 처분했다는 것을 듣고도 감히 서계에서 빼버렸다고 하니, 임박(任璞)이 한 밤중에 불러서 유시한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돌아다보고 묵묵히 있었던 것은 바로 나를 저버린 것이다. 아뢴 것이 비록 마음을 놀라게 하였으나, 다른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또한 참작함이 마땅하다. 서지수(徐志修)를 파직하도록 하라. 이미 계문한 뒤에 어사를 중히 여기고 기강을 엄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암담한 데 버려 둔 채 어사에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임박을 나문(拿問)하여 처분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대신들이 임박은 병이 위중하다 하여 나문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박치문(朴致文)을 헌납으로, 민백창(閔百昌)을 부응교로, 오언유(吳彦儒)·김상철(金尙喆)을 교리로, 임상원(林象元)·한광회(韓光會)를 수찬으로, 김시위(金始煒)를 부수찬으로, 남유용(南有容)을 필선으로, 조명채(曺命采)를 문학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6일 계묘
이종적(李宗迪)·엄우(嚴㻦)를 승지로, 이중조(李重祚)를 지평으로, 이응협(李應恊)을 교리로 삼았다.
도승지 정언섭(鄭彦燮)이 청대(請對)하였는데, 우승지 김상적(金尙迪)이 함께 입시하였다. 정언섭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진계(陳戒)하고, 또 말하기를,
"원의계(院議啓)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문구(文具)이므로, 장차 하늘을 감응시키는 데 성실하게 하는 방도를 군부(君父)에게 앙달(仰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구에 응하여 숫자나 채우는 계사(啓辭)를 조지(朝紙)에 싣지 않으려는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바로 내가 덕이 부족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듣건대, ‘성실하게 한다[以實]’는 두 글자로 경계하였는데, ‘실’이란 ‘성(誠)’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실정(實政)을 행하라는 말이니, 이 밖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기전(圻甸)의 여러 능침은 도신이 봄·가을로 봉심(奉審)한 뒤에 장문(狀聞)하므로, 재랑(齋郞)들이 비록 첩보(牒報)하더라도 인순(因循)하여 버려 두고 있다가, 간혹 능에 배알할 일이 있으면 비로소 그때에 이르러 개수(改修)하곤 한다. 기전이 이와 같은데, 동북도(東北道)의 여러 능침은 마땅히 개수해야 하는데도 인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자(王者)의 효(孝)는 봉선(奉先)이 큰 것인데, 어찌 그 임금이 배알하고 배알하지 않는 것으로써 근만(勤慢)이 따라서 다르단 말인가? 한밤중에 일어나 생각하면 마음이 오싹하다. 마땅히 이 뜻을 본받아 유의하여 거행하라는 뜻을 동북의 도신에게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전대(前代)의 능(陵)을 수축(修築)하는 것은 예로부터 제왕의 성절(盛節)인데, 우리 나라에서 전조(前朝)의 능을 대우함에는 더욱 중한 바가 있다. 관에 명하여 잘 살피게 하되, 군사를 배치하여 능을 지키는 것 또한 성사(盛事)이다. 지금 서계를 보건대, 범장(犯葬)·범경(犯耕)이 많으니, 진실로 한심하다. 아울러 즉시 파내도록 하되, 그 범인들은 해도(該道)와 해부(該府)로 하여금 종중 과죄(從重科罪)하고, 기록하여 법령을 삼도록 하라. 또 본관(本官)이 된 자가 만약 매달 보고하고 신칙했다면 어찌 감히 범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마땅히 해도의 도신과 유수(留守)를 추고(推考)해야 할 것이니, 수령을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차후로 서계를 살펴보다가 다시 범금(犯禁)하는 자가 있으면, 다만 범인 뿐만 아니라 유수·도신·수령을 마땅히 중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여조(麗朝) 이전의 여러 능에 이런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더구나 송도(松都)는 전조 때의 구도(舊都)로서 사체(事體)가 더욱 중하니, 유수의 직책이 이보다 더 앞서는 것은 없다. 석물(石物)이 허물어지고 사초(莎草)가 말랐는데도 즉시 계문하지 않은 것은 칙려(飭勵)한 뜻이 아니다. 유수는 종중 추고하고, 수호군(守護軍)으로 첩역(疊役)한 자 또한 본도로 하여금 즉시 탈면(頉免)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9월 17일 갑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영상과 좌상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재이(災異)로 척퇴(斥退)해 줄 것을 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를 보임은 나의 부덕(否德)에 말미암은 것이니, 경 등은 더욱 마음을 다해 협보(協輔)함이 마땅하다. 한조(漢朝) 때에 재앙으로 인하여 정승을 면직시킨 것을 나는 문구(文具)로 여긴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난해는 중묘(中廟)께서 중흥(中興)하신 해이고, 금년은 곧 선묘(宣廟)께서 용비(龍飛)하신 해이다. 나는 한 가지 일도 한 것이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 내일 내가 선묘께서 띠었던 옥대(玉帶)를 띠고 구궁(舊宮)에 가서 시사(試士)하고자 하니, 이 마음이 바야흐로 설레인다."
하였는데, 좌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양조(兩朝)에서 중흥하신 해를 헛되이 보낸 것으로써 하교하시니, 성상께서는 실로 중흥의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세도(世道)가 날로 저하되어서 삼가 중흥의 업적이 곧바로 쇠퇴해질까 두렵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는 말하기를,
"‘태평 무상(太平無象)’은 옛 말입니다. 오늘날 중흥의 다스림에서도 또한 그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가 어렵다. 만약 세도를 만회시킬 수 있다면 나 또한 중흥의 임금으로 자처할 것이나, 그 다스림이 뜻한 바를 기다려 주지 않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종부시에 명하여 대왕의 성손(姓孫)은 대수(代數)를 따지지 말고 모두 군오(軍伍)에 편성하지 말 것이며, 각능의 수호군이 된 사람들은 예조에서 본시에 물어서 상고해 내어 해면을 허락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9일 병오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에 선묘(宣廟)의 옛 옥대(玉帶)를 착용하고 광화문(光化門) 안의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거둥하여 친히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임어하고, 이유수(李惟秀) 등 15인을 뽑았다. 임금이 친히 한 구절의 시를 짓기를,
"창업과 중흥은 만세의 법이요,
청룡과 백호가 걸터앉은 한양성이다."
하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시에 화답하라 하였다. 회가(回駕) 때에 특별히 성내(城內)에 명하여 상언(上言)을 바치게 하였으니, 대개 지난해 가뭄을 근심하여 기우제를 지낼 때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었다.
서지수(徐志修)를 교리로, 한광조(韓光肇)를 정언으로, 홍우한(洪羽漢)을 수찬으로, 이일제(李日躋)를 대사간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집의로, 신회(申晦)를 헌납으로 삼았다. 전적(典籍) 이유수(李惟秀)와 사포 별제(司圃別提) 정시좌(丁時佐)는 문과·무과에서 장원(壯元)한 사람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사를 따라 친히 구궐(舊闕)에 친림하여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니, 갑절이나 마음이 아프다. 아! 우리 성조(聖祖)의 매우 어진 혜택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고, 우리 열조(列朝)와 우리 성고(聖考)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구제하신 정치가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 있다. 그러나 덕이 없는 내가 임어한 지 거의 24년이 되어 가는데, 백성에게 미친 혜택이 하나도 없고, 사람을 감화시킨 일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속으로 항상 부끄러워하였더니, 이제 구궐에 이르러 이런 마음이 갑절이나 된다. 아! 문왕(文王)의 정사는 사민(四民)을 먼저 하였는데, 구궐의 흥감(興感)에서 이를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중외(中外)의 사민 가운데 고(告)할 데 없는 더욱 심한 사람들을 특별히 보살펴 주도록 하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말하기를, ‘늙은이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고, 비단이 아니면 따습지 않다.’고 하였다. 이제 성조(聖祖)께서 용흥(龍興)하신 시기와 자성(慈聖)의 주갑(周甲)의 해를 당하여 중묘(中廟)의 고사를 이어 도하(都下)의 서민 중에 나이가 90세 이상인 사람에게 해조로 하여금 세찬(歲饌)의 예에 의거해서 특별히 쌀과 비단을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오·추조에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9월 20일 정미
정원에서 천둥의 이변으로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바야흐로 절실하게 두려워할 때이니 면계함이 옳다. 마땅히 깊이 반성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문과·무과의 신은(新恩)들을 선정전(宣政殿)에 불러 당습(黨習)을 경계시키고, 먼 지방의 무과의 여러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물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에 국내의 농사 형편은 대개 흉년이 들었고, 연해(沿海)의 고을은 해일이 몹시 참혹하게 일어서 바닷물이 넘쳐서 적지(赤地)가 되었습니다. 만약 홍수·가뭄이 아니었으면 오히려 남은 이삭이라도 먹을 수 있었겠지만, 백성들은 한 톨의 낟알도 거두어들일 것이 없는데 그들로 하여금 속미(粟米)·마사(麻絲)를 내게 한다면 장차 어디에서 마련하겠습니까? 아! 고혈(膏血)은 오히려 빼앗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고혈도 또한 다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금년 비총(比摠)214) 이외에 따로 해일에 의한 재앙의 명목으로 지급하되, 그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은 고을의 정공(正供) 및 신미포(身米布)를 백성에게 내게 하는 것을 특별히 견감시켜 주어 약간이라도 안보(安保)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상평법(常平法)은 곡가(穀價)를 공평하게 하여 백성이 먹는 것을 여유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경진청(京賑廳)의 곡물을 보건대, 거의 7, 8만 석에 이르는데, 들어오는 것은 있어도 나가는 것이 없어서 대체로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3만 석을 한도로 획출(劃出)하여 2만 석은 충청도에 지급하고, 1만 석은 경기도에 지급해서 그들로 하여금 추위에 얼지 않게 해야 하며, 배를 마련해 실어 날라 연읍(沿邑)에 나누어 보내어 봄에 진휼(賑恤)할 때까지 한정해서 값을 감하여 발매하게 해서 백성의 위급함을 구제하고, 그 본전(本錢)은 가을 쌀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본청에 다시 쌓아 두어 훗날 불시에 쓸 것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유사(有司)가 진휼하는 비용에 대해 그 힘을 논하나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하는 혜택이 두루 미치지 못하고, 묘당(廟堂)에서 진정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을 논하나 불에 타는 듯한 위급을 구제하는 일은 항상 느슨하니, 선왕께서 백성을 다친 사람을 보듯이 하는 인정(仁政)에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항상 대명(大明)의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탁지(度支)로 하여금 그것을 알지 말게 하라는 가르침에 유의하소서.
진휼은 백급(白給)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절동(浙東)을 진휼하고, 부필(富弼)이 청주(靑州)를 진휼하였을 때 모두 죽을 마련했었습니다. 두 현인이 어찌 백급하는 것이 죽보다 나음을 알지 못했겠습니까마는, 백급은 잇대어 주기가 어려우므로 부득이 죽으로 했던 것입니다. 근래에 각도에서 진휼을 베풀 때 오로지 백급을 위주로 하고 있으므로, 간위(奸僞)가 날로 늘어나고 비용은 절제가 없습니다. 만약 거듭 흉년을 만나게 되면 국력이 장차 고갈되고 말 것이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급이 부족하면 설식(設食)·설찬(設饌)하고, 심한 경우 간혹 소를 잡아 먹이는 것은 명예를 구하고 상(賞)을 기대하는 습관이니, 마땅히 선조(先朝) 병진년(丙辰年)215) 의 예에 의거해서 엄중하게 금지시키고, 2월 30일 이전에는 죽을 마련하고 3월 초하루 이후부터는 급량(給糧)하는 것을 기록하여 법령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충청 감사 이창의(李昌誼)가 해일로 계문(啓聞)하였는데, 이때 기내(畿內)의 통진(通津)·남양(南陽) 등 연해의 여러 곳에 해일로 입은 피해가 더욱 심했으므로, 조현명이 차자에서 언급한 것이었다.
9월 21일 무신
사간 조경(趙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주 목사 우하형(禹夏亨)이 일찍이 북읍(北邑)에 임명되었을 때 책방(冊房)에 장호(藏胡)했다는 말을 청문(淸問) 아래에서 그가 이미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강도(江都)의 축성하던 일을 마쳤을 때 축성에 소용되었던 철(鐵)·나무·기계 등을 남김없이 여러 척의 배에 실어 그의 집에 가져갔으므로 지금까지 강도의 백성들이 욕하고 꾸짖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그의 살을 먹고 싶어 합니다. 더욱이 제주(濟州)는 바다를 방어하는 대진(大鎭)으로 오랑캐 선박들이 왕래하는 곳이며 역노(逆孥)가 편배(編配)되는 곳이니, 어찌 우하형에게 줄 수 있는 땅이겠습니까? 빨리 체개(遞改)하고 인하여 사적(仕籍)에서 깎아 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지나치다."
하였다.
함경도의 유학(幼學) 한여두(韓汝斗) 등이, 고 상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고 장신(將臣) 김응하(金應河)를 제사하는 사당이 북관 행영(北關行營)의 곁에 있음을 상소하고, 성대하게 진달하기를,
"황보인·김종서는 간혹 곤외지임(閫外之任)을 받아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이적(夷狄)·중국과 경계를 구분하였고, 혹은 체찰지임(體察之任)을 받아 옛 강토를 넓히어 육진(六鎭)을 개척하였으므로, 북쪽 사람들이 그 은혜를 받은 것이 많습니다. 김응하는 일찍이 본도의 우후(虞候)를 지내면서 사졸(士卒)을 무휼(撫恤)하고 장교(將校)를 교회(敎誨)하여 마침내 천지보다 높고 일월보다 밝은 공을 세워서 북방 사람들이 그 의리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빨리 예관(禮官)에게 명하시어 아름다운 편액(扁額)을 베풀어 백대에 풍성(風聲)을 수립하게 하고, 외진 지방에서 크게 바라는 것을 위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원(祠院)의 폐단이 지금 심한데, 이 도에서 다시 열면 훗날의 폐단을 어떻게 막겠는가? 내가 이 사람들의 대공(大功)·대충(大忠)을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현(先賢)을 사모하는 고을 사람들의 마음을 돌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그 사원을 공경히 지키고, 다시는 삼자(三字)를 청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으니, 좌상이 차자를 올려 진달한 바는 아울러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상평청·진휼청의 쌀과 상정미(詳定米)는 비국으로 하여금 구획하도록 하고, 도신에게 분부하여 연해의 더욱 심한 고을에는 가격을 감해서 팔도록 허락하라. 그리고 도신과 수령이 된 자들은 모름지기 마음을 써서 봉행할 것이며, 만약 허실(虛實)을 가지고 서로 속이는 일이 있어서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면, 어사가 염탐할 때 마땅히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추궁할 것이다."
하고, 또 호남의 해일로 재해를 입은 곳에도 특별히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해일의 재해를 입은 곳에 특별히 지급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다른 재앙에 가급(加給)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분배(分配)하는 이외에 수천 결(結)로 한정하고, 청컨대 도신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남상(濫觴)에 이르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언 한광조(韓光肇)가 상소하여 재이(災異)에 대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하고, 대신이 세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겨 마침내 명관(命官)이 없는 것은 시체(試體)가 구간(苟簡)하다고 배척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22일 기유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왕세자를 입시하라고 명하고, 춘방(春坊)·계방(桂坊)을 불러 《맹자(孟子)》를 강하도록 하고, 어려운 부분의 문의(文義)를 질문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천둥소리를 네가 반드시 들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수장(收藏)할 절기인데, 인애(仁愛)로 이와 같이 경고하니, 진실로 치란(治亂)할 기회이다. 이는 내가 덕이 없어서 이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으니, 너는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 저 옛날에 상황(上皇)께서 제천정(濟川亭)에서 일어나 춤추시자 상(上)께서 또한 일어나 춤추셨다고 《보감(寶鑑)》에 그 일이 실려 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네가 만약 나의 뜻을 이루면 나 역시 일어나 춤추어 고사(故事)를 따르겠다. 내가 마땅히 몸소 읽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반드시 백 번 읽어야 옳을 것이다."
하고, 몸소 열 번 읽었다.
임금이 연해의 수재(守宰)로서 부거(赴擧)하려고 올라온 자를 불러 보고 농사의 재해에 대해 묻고, 이어 하교하기를,
"현재의 정치는 휼민(恤民)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니 상례를 구애하지 않고 시험을 보기 위해 휴가중인 수령을 불러 보는 것이다. 듣건대 연해의 재앙을 입은 백성들이 부담이 되어 매우 어려워하고 있다고 하므로, 이미 면칙(勉飭)하였다. 들리는 것이 이와 같으면,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이미 견감하도록 명하고 도와서 진휼하게 하였다. 아! 저 많은 백성들은 곧 열조(列朝)에서 애휼(愛恤)하신 적자(赤子)들이니, 그들이 만약 어려워하고 있으면 어찌 한갓 옥식(玉食)이 달지 않을 뿐이겠는가? 이는 위로 엄중한 부탁을 저버리는 것이다. 아! 도신들은 내가 백성을 위하는 뜻을 본받아 위무하고 구휼할 것이며, 안집(安集)하는 데 유의하도록 하라."
하고, 비국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분부하게 하였다.
9월 25일 임자
유성(流星)이 우성(牛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왕세자가 입시하니 춘방(春坊)을 불러 《맹자(孟子)》를 강하도록 명하였다. 제조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신이 예조의 일로 앙달(仰達)할 것이 있습니다. 함흥(咸興)의 유학(幼學) 이세좌(李世佐)·이경석(李景錫) 등이 상언하기를, ‘저희는 목조 대왕(穆祖大王)의 13대손으로서, 삼척(三陟)·평창(平昌) 두 능의 표석(表石)·지석(誌石)을 우리들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하므로 불러 물어 보았더니,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됨이 몽매하여 대답하는 바가 매우 분명하지 못하였습니다. 혹 말하기를, ‘표석이 깨진 채 묻혀 있습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지석을 직접 보았으나 글자는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다만 ‘적간(摘奸)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일을 소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전례에 따라 회계(回啓)할 수 없으니, 청컨대 낭청(郞廳)을 보내어 살펴 조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해조에 명하여 화의군(和義君)216) 에게 연시(延諡)217) 할 때 연수(宴需)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왕자(王子)의 연시에 가까운 종실은 선온(宣醞)하고 먼 종실은 연수를 도와주게 하였으니, 대개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9월 26일 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처음 정치할 때에는 영명(英明)한 임금이라고 말 할 수 있었지만, 뒤에는 처음만 못하여 나라가 드디어 크게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일의 끝을 잘 마무리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육지(陸贄)·배도(裵度)를 등용한 것은 바로 그 영명한 처사이나, 능히 끝을 잘 마무리짓지 못하여 거의 패망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강건하게 공부(工夫)하여 스스로 힘쓰신다면 성덕(聖德)이 날로 성취되어 우리 나라가 희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그러나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하교하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는 이미 관직을 회복시켰으니, 어찌 우리 영묘(英廟)218) 의 금지(金枝)가 아직도 단서(丹書)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또 나의 성고(聖考)께서 그 글을 사랑하고 그 글씨를 보시며 반드시 그 작호(爵號)로 칭하셨다. 비록 관직을 회복하기 전이지만 그 관직은 본래 있었던 것이니, 김종서·황보인의 예에 의거해 관직을 회복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태상시(太常寺)에서 아뢴 바로 인하여 영녕전(永寧殿)에 1실(室)을 새로 올리고, 또 공신 6원을 배향하는 제물(祭物)을 마련하는 일에 대해 하교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원공(元貢) 가운데에서는 다만 1년 제향(祭享)에 쓸 것도 부족하니, 각종을 더 정하여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이조 참의로, 윤광소(尹光紹)·이제화(李齊華)를 장령으로, 조명건(趙明健)을 헌납으로, 이세사(李世師)를 지평으로, 이게(李垍)를 정언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교리로, 한광회(韓光會)를 사서로 삼았다.
9월 27일 갑인
유성(流星)이 천선성(天船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 갔다.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2일 만에 마쳤다. 이위보(李渭輔)를 사간으로, 김시위(金始煒)를 부교리로, 이세사(李世師)를 수찬으로, 송덕중(宋德中)을 지평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응교로, 이세태(李世泰)를 지평으로, 오언유(吳彦儒)를 부교리로, 임상원(林象元)을 정언으로, 이규채(李奎采)를 부수찬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보덕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지경연으로, 박성원(朴盛源)을 설서로, 임상원(林象元)을 부수찬으로 삼고, 조동제(趙東濟)를 전라 병사로, 김형로(金亨魯)를 경상 우병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서종급(徐宗伋)과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정사하였다.
9월 28일 을묘
유신을 불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도록 하였다.
9월 29일 병진
임금이 왕세자를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에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탄일의 하례를 몸소 행하였다.
9월 30일 정사
하교하기를,
"탕춘대(蕩春臺)는 곧 도성의 인후(咽喉)이므로, 총융청(摠戎廳)에 특별히 옮겨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장교(將校) 무리들이 편안함을 도모하여 지체하고 있다. 그래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세류(細柳)에 임(臨)했던 뜻219) 을 본받아 시사(試士)에 친림(親臨)할 것을 특별히 명한 것이지,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장이 된 자들은 직접 그곳에 나아가서 한편으로 동역(董役)하고 한편으로 정제(整齊)하여 어가(御駕)가 거둥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곧 신하의 본분에 마땅한 것인데, 사실(私室)에 누워서 다만 막교(幕校)로 살펴보게 하였으니, 기강이 있는 바 총융사 박찬신(朴纘新)을 파직한다.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악양(樂羊)을 등용하여 중산(中山)을 차지했고, 당(唐)나라 헌종(憲宗)이 배도(裵度)를 얻고서 회서(淮西)를 평정하였으니, 신하가 있고 난 후에야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는데, 협찬(夾贊)할 사람은 오직 구성임(具聖任) 한 사람일 따름이다. 어영 대장 구성임에게 총융사를 제수하도록 하라. 지금의 급무는 사람을 얻는 것이 우선이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지난번 일은 비록 해괴하다 할 수 있으나, 마음에는 다른 뜻이 없었던 것이니, 어찌 이 때문에 그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어영 대장에 특차(特差)하고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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