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6권, 영조 23년 1747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30. 10:15
반응형

10월 1일 무오

임금이 탕춘대(蕩春臺)에 거둥하여 총융청의 장교와 군병들이 총(銃) 쏘는 것을 몸소 시험하고, 각각 차등이 있게 시상하였다. 부로(父老)를 불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묻고서 각각 쌀을 한 말씩 지급하였다.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베껴서 게판(揭板)하라고 명하였다. 환궁할 때 육상묘(毓祥廟)에 두루 배알하였다.

 

어석윤(魚錫胤)을 장령으로, 이이장(李彝章)을 헌납으로, 이익원(李翼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2일 기미

초저녁에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도정에서 새로 임명된 수령·변장을 불러서 각각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진달하게 하였다.

 

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진달합니다. 부안(扶安)의 격포(格浦)는 곧 삼남(三南) 해로의 인후이며 심도(沁都)를 막아 지키는 땅입니다.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검영(檢營)을 특별히 설치하고 또 행궁(行宮)을 세웠는데, 곡식을 쌓아 놓고 배를 감추어 두었으니, 이는 먼 훗날을 헤아린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설의 규모가 중간에 여러 번 바뀌어 검영을 이미 파하고 다만 별장(別將)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신이 변산(邊山)에 들어와 바다를 따라 60리를 가면서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고군산(古群山)·위도(蝟島)가 아득한 대양(大洋)의 중간에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데, 양도(兩島)에 대해 바람을 타고 돛을 달면 3, 4일 지나지 않아 배를 댈 수 있습니다. 연미(燕尾)의 아래 격포는 양도와 함께 서로 기각(掎角)이 되고, 산이 항구 깊숙이 둘러져 있어 거센 바람과 심한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조선(漕船)·상박(商舶)은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무서운 파도와 큰 물결에 의해 표탕(漂蕩)되어 가끔 침몰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년 삼로(長年三老)220)  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도·군산(群山)·금모포(黔毛浦) 등 4진이 수영(水營)에 이속(移屬)된 이후로 해마다 수군을 조련할 때 전함(戰艦)이 패몰(敗沒)하거나 방졸(防卒)이 익사하는 일을 더러 요행히 면하지 못합니다. 금년 가을에는 군산에서 조련하러 갔던 병졸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 40명이나 되어 과처(寡妻)·고아(孤兒)가 물가에서 슬피 울부짖었습니다.
신은 비로소 4진은 평소 검영에 소속시켜야지 수영에 소속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심도(沁都)의 응원이 될 뿐만 아니라 또 4진에서 수영에 가려면 바람을 기다렸다가 험지를 건너야 하므로 자칫 열흘이나 보름을 넘기게 되니, 설령 뜻밖의 경보(警報)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기간 내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미처 적을 방어하기도 전에 먼저 풍이(馮夷)221)  ·해약(海若)222)  의 노여움을 만나게 될 것이니, 이 때문에 도신·어사가 전후의 소장에서 구제(舊制)를 회복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4진을 검영에 다시 소속시키고, 경진년(庚辰年)223)  의 유제(遺制)를 본받아 검영의 중군(中軍)에게 첨사를 겸임시켜 격포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봄·가을에 순력(巡歷)하여 4진의 전함·방졸(防卒)을 기회(期會)하여 항구의 앞 바다에서 조련하게 하면, 칠산에서 패선되고 익사하는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격포로 다시 해산(海山)의 관방(關防)을 삼으면, 훗날 국가가 위급할 때 반드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이 개량(改量) 때문에 나주(羅州)·영암(靈巖) 간을 왕래할 때 작설(綽楔)이 정리(井里)에서 훤히 서로 바라보이므로, 말을 멈추고 물어 보았더니, 충신의 집이 아니면 효자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손을 방문했는데 지금은 모두 쇠퇴하여 서민(庶民)으로 변하였으며, 고가(故家)의 유풍(流風)·유운(遺韻)은 다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호남은 예로부터 화려한 지방으로 일컬어졌는데, 수십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므로, 고기잡고 농사짓는 즐거움에 편안하지 못하고 헤어져 유랑하여 흩어졌으며, 옛날의 높고 큰 정자는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원유(園囿)의 흥폐(興廢)로써 낙양(洛陽)의 성쇠(盛衰)를 안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정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호남의 쓸쓸함을 슬퍼합니다.
아!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李後白)·박상(朴祥)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鄭忠信)의 공적, 김덕령(金德齡)의 용기, 임형수(林亨秀)·임제(林悌)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는 반드시 충신(忠臣) 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일개 도(道)를 수방(搜訪)한다면 ‘인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간혹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고, 간혹 행의(行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감히 그 사람의 성명을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이이정(李頣正)은 고 수찬 이상형(李尙馨)의 후손이고, 민사하(閔師夏)는 고 사인(舍人) 민덕봉(閔德鳳)의 후손이고, 임대(林薱)는 고 유수 임영(林泳)의 족자(族子)이고, 김회(金烠)는 고 참판 김상옥(金相玉)의 족자이고, 신사철(愼師喆)은 고 부학 신천익(愼天翊)의 후손이고, 최필흥(崔弼興)은 고 평사 최경창(崔慶昌)의 후손이고, 고석(高晳)은 고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고, 안황(安煌)은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이고, 정민하(鄭敏河)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후손입니다. 강진(康津)의 이의경(李毅敬), 영광(靈光)의 이중익(李重益), 무장(茂長)의 이만석(李萬錫), 장성(長城)의 유광현(柳光顯), 영암(靈巖)의 조석침(曹錫琛), 무안(務安)의 김경삼(金景森), 보성(寶城)의 김연년(金延年), 전주(全州)의 이익렬(李益烈)·정사협(鄭斯鋏)은 모두 글이나 읽고 뜻을 강논하며 곤궁한 것을 견디고 안정을 지키면서 혹은 백수(白首)에 이르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견발(甄拔)224)  하여 그를 등용하면 혹 격려하고 권장하여 홍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신(一新)을 지나다가 그 이른바 충렬사(忠烈祠)라는 곳을 두루 방문했습니다. 이복남(李福男) 등 7인의 충신(忠臣)을 여기에서 제사하는 데 의사(義士) 임박(林樸)을 배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신을 향하여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이 순국(殉國)한 절개는 진실로 모두 뛰어나지만, 의사의 죽음은 더욱 기이합니다. 정유년(丁酉年)225)   섬나라 오랑캐 적들이 쳐들어 와서 외딴 성(城)이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병사(兵使) 이공(李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는데 의사가 개연(慨然)히 그를 따르며 말하기를, 「죽으면 같이 죽을 뿐이다.」라고 하고 적진으로 이격(移檄)하며 포위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의롭게 여기고 진(陳)을 열었습니다. 병사와 의사가 갑옷을 입고 취라(吹囉)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겨 천천히 가니,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 가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성이 격파되니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성안의 사민(士民)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병사와 의사는 함께 뜨거운 불길로 들어가 죽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그 성취한 바가 그 같이 뛰어났는데도 조가(朝家)에서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이 유독 임박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그로 하여금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침울함을 억누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세(聖世)의 궐전(闕典)이며 충절(忠節)한 사람을 표양(表揚)하는 바가 아닙니다. 임박은 지위가 낮아서 여러 신하들과 견장(甄奬)의 은전(恩典)을 함께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더욱 슬퍼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빨리 높이 포상하라 명하시어 교훈(敎訓)을 수립하시고 퇴락한 풍속을 치켜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부진(附陳)한 것에서 경의 소장을 머물러 두고서 경을 보고 하교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즉시 올라와서 복명(復命)하라."
하였다.

 

경기 어사 조명정(趙明鼎)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불러 보고서 수령(守令)의 잘 다스리는지의 여부와 민막(民瘼)과 읍폐(邑弊)를 부순(俯詢)하였다.

 

10월 3일 경신

유신을 불러서 《자치통감》을 강하게 하였다. 동궁(東宮)에게 시강(侍講)을 명하니 동궁의 글 읽는 소리가 점점 낮아 적어졌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의 소리가 작은 것은 내 앞에 있는 것을 꺼려해서이다. 서연(書筵)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어떠하였는가?"
하니, 보덕(輔德) 김상철(金尙喆)이 대답하기를,
"서연에서는 예음(睿音)이 홍대(弘大)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12시 안에 네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 정도 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1, 2시입니다."
하였다. 응교(應敎) 조재민(趙載敏)이 말하기를,
"12시를 아마 깨닫지 못한 듯 합니다."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정직한 대답이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겠다."
하였다. 당(唐)나라 우(牛)·이(李)226)  의 사건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우·이는 한쪽에 놓아 둘 수는 없다. 만약 일에 따라 집중(執中)한다면 그 사(邪)·정(正)은 거울을 가지고 사물(事物)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그 병용(倂用)한 폐단은 상호간에 있다. 집중의 도(道)는 거경 궁리(居敬窮理)에 불과하니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피차(彼此)에 균용(均用)하는 것을 집중으로 삼았다면 잘못이다. 한 사람의 아들 가운데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지만 어찌 10인 가운데 다섯 사람이 선하다고 해서 다섯 사람은 선하지 않게 되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하였다.

 

전(前) 평안 병사 이일제(李日躋)를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림(東林)에 축성(築城)하지 않고 서림(西林)에 먼저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니, 이일제가 말하기를,
"동림은 국세(局勢)가 활대(濶大)하여 축성의 논의가 이미 백년이 되었는데, 사람마다 각각 이설(異說)이 있습니다. 신이 만약 일을 시작하여 일이 절반도 되지 않아 이론(異論)이 일어나면, 몸에 해가 있고 나라에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또 모름지기 재력(財力)을 광축(廣蓄)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일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일찍이 서림이 비록 작지만 그 수로(首路)의 요해(要害)가 되니 동림보다 긴요하고, 주위가 심히 광활하지는 않으므로 재력이 쉽게 마련된다고 여겼습니다. 또 조정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의론이 이곳에 미치는 일이 드물므로 3삭(朔) 안에 급급하게 마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성(城) 이외에 경이 건설한 것은 또 어떤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항상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사가 풍족한 연후에 온갖 일이 가능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안주(安州)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 한 축통처(築筒處)를 얻었으나 미처 시작하지 못했는데, 을축년(乙丑年)227)   심리(審理)의 행사에서 다행히 조가(朝家)의 위령(威靈)을 입어 비로소 축조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병영(兵營)에 임명된 뒤에 처음 경파(耕播)하였으며, 이어 4부군(部軍)으로 하여금 대략 둔전제(屯田制)를 본받아 그들로 하여금 자경 자식(自耕自食)하게 하니 군심(軍心)이 약간 믿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4부의 5천 군사를 수정(修整)했으나, 1개 영(營)의 병사가 1만을 채울 수 없어 위급한 일에 족히 힘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새로이 난후제(攔後制)를 창설하여 2천 7백 명을 모았습니다. 만약 조가(朝家)에서 매번 도정(都政) 때 1명의 변장(邊將)을 허차(許差)해 준다면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서 부임할 것이며, 오래지 않아서 장차 1만 명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 부령(部領)의 급료(給料)는 이미 영중(營中)의 불급(不急)한 요과(料窠)를 가지고 신이 스스로 구획(區劃)해 두었으며, 또 정주(定州)의 1개 통처(筒處)를 얻어 재물을 내어 축조할 것을 모집했는데 그 수(數)가 장차 백여 석(石)의 종자(種子)를 심을 만한 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확한 것은 얼마쯤인가?"
하니, 이일제가 말하기를,
"해일(海溢)을 겪고부터 소출이 절반 줄어서 수확한 것이 2천여 석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또한 많은 것이다."
하니, 이일제가 말하기를,
"2천여 석 가운데 그 절반은 둔전의 예(例)에 의해 경작자에게 지급하고, 1천여 석은 5천의 군사에게 두루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3년을 기한으로 증축(增築)·증간(增墾)하게 하는데, 반드시 1천 석 촌락을 이루기를 한정한 연후에 가히 재할(裁割)하여 법제(法制)로 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군정(軍政)을 물으니, 이일제가 대답하기를,
"피잔(疲殘)하여 가긍(可矜)함은 서토(西土)의 군민(軍民)과 같음이 없습니다. 백성이 약간 1경(頃)의 밭과 두어 칸의 집을 가지고 있으면 문득 팔아 뇌물로 바쳐서 향임(鄕任)·장관(將官)에 오르기도 합니다. 가장 피잔한 자들은 평민이 되어 군적(軍籍)에 편재(編在)되니, 이로써 향유(鄕儒)의 권세가 더욱 성하기 때문에 군민의 고통이 더욱 심합니다. 만약 조가로부터 이를 변통(變通)해 줌이 있지 않으면, 서관(西關)의 전 지역은 아마도 조정의 은위(恩威)가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피중(彼中)의 일과 변정(邊情)의 득실(得失)에 대해서 묻자, 이일제가 대답하기를,
"심양장(瀋陽將) 이하 사람들이 퇴책(退柵)하고 둔전을 설치한 것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바야흐로 우리에게 감심(甘心)하고 있으니, 틈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서변(西邊)에는 공사(公私)의 개장(蓋藏)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재물 축적한 것이 넉넉한 도(道)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한편 구제(舊制)에 서로(西路)에 금선(禁船)을 설치한 것은 대개 서쪽 쌀이 조상(漕上)되는 길을 끊고자 해서이지만 지금은 육지로 조상에 이어졌으니 특히 민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특별히 파견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4일 신유

천둥하였다.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10월 5일 임술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도록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의 말을 들으니, ‘어영청(御營廳)이 1년에 받아들이는 무명은 거의 6백 동(同)이 된다고 하나 응당 내려줄 것은 4백여 동이 되니 남는 숫자가 많게는 혹 1백 8, 90 동입니다. 금영 역시 그러하니 양영(兩營)의 무명을 매년 1백 동을 한도로 저축하여 비국(備局)에 알려 임시 보관하게 하면 10년을 넘기지 않아 족히 넉넉한 재산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좋습니다. 또 박문수가 병판(兵判)이 되었을 때 저축해 둔 돈이 15만 냥(兩)입니다. 군문(軍門)의 전화(錢貨) 또한 절반을 은(銀)과 바꾸면 또한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밤에 어제(御製) 1편을 지어 유신(儒臣)을 불러 보여 주었다. 감개당기(感慨唐紀)를 제목으로 삼았는데 우(牛)·이(李)가 편당(偏黨)한 것과 조제(調劑)가 마땅함을 잃은 것을 갖추어 기록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날 밤에 우레가 요란하고 풍색(風色)이 매우 급했는데, 수성(收聲) 이후로 이제 이미 세 번 일어났습니다. 재앙을 그치게 하는 대책에 신의 몸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으니, 구구한 저의 정성으로서 앙면(仰勉)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요사이 옥후(玉候)가 연이어 정섭(靜攝)에 계셨으나, 매일 세 번씩 진접(晉接)하고 한밤중에 잠자는 것을 잊으시니 우근(憂勤)·여정(勵精)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간혹 작은 것에 빠져 큰 것을 잃게 됨을 면치 못하십니다. 당습(黨習)을 깊이 미워하여 반드시 혁거(革去)하고자 하나, 출척(黜陟)이 서서히 참혹해져서 때로는 실륜(失倫)하기도 하십니다. 검덕(儉德)이 백왕(百王)보다 높이 뛰어났으나 미려(尾閭)의 새는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되었으니, 국계(國計)에 뇌치(罍恥)228)  의 근심이 있습니다. 말을 들으니 육지(陸贄)의 교훈을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미리 예측하는 생각’이 ‘모두 받아 들여 헤아리는 것’보다 먼저 자리잡고 있어서 언로(言路)가 넓어지지 못하여 두색(杜塞)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 근본은 모두 성심(聖心)을 지나치게 쓴 데서 나왔다고 하나, 능히 명경 지수(明鏡止水)와 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혁연(赫然)히 생각을 돌리시어 본원(本源)의 땅에 생각을 더하시고, 강건(剛健)·독실(篤實)하고, 마음을 곧고 굳게 지키기를 쉬지 말아서 알묘(揠苗)229)  의 비근한 공(功)을 기대하지 마시고 스스로 언초(偃草)230)  의 아름다움에 이르게 하소서. 전후(前後)에 말한 것으로써 죄를 얻은 무리를 차례로 풀어 주시면 아마도 재앙을 줄이는데 일조(一助)가 될까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가운데 그 말미암은 바를 궁구하여 보니 진실로 부덕(否德)에 말미암은 것이다. 고굉(股肱)의 신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면진(勉陳)함이 절실(切實)함을 띠고 있으니 복응(服膺)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6일 계해

유신(儒臣)을 불러 어제(御製) 1편을 읽게 하고 소발(小跋)을 첨서(忝書)하여 이로써 동궁(東宮)에게 힘쓰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것을 지은 것이 무익(無益)한 듯 하지만 나는 고심(苦心)하였다. 어제 지어 원량(元良)에게 보여 준 것은 자못 소략(疏略)한 듯하였으므로 이제 학문에 힘쓰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7일 갑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정언(正言) 임상원(林象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해서(海西)의 기병(騎兵)이 새로 창설되었으니 곧 군제(軍制)의 좋은 것입니다. 품관(品官) 가운데 부실(富實)하고 무예(武藝)가 있는 자를 기사(騎士)에 택정(擇定)하고, 별효위(別驍衛)를 혁파하여 납포(納布)의 역(役)에 이정(移定)해야 합니다. 이 황구(黃口)231)  ·백골(白骨)232)  에게 징포(徵布)하는 때를 당하여 이런 장정(壯丁)을 얻은 것이 이미 다행한 일인데, 하물며 기사의 장용(壯勇)이 별효위보다 1백 배나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가(朝家)에서 숙위 기사(宿衛騎士)로 이름을 바꾸니 품관으로서 발신(拔身)하려고 하는 자가 앞을 다투어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그가 상번(上番)하기에 미쳐서는 해영(該營)의 이속(吏屬)들이 욕하며 거만하게 꾸짖어서 조금도 돌봐 주고 아낌이 없으니 그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은 말씀드리건대 기사가 상번할 때에 그 재주를 시험보아 취하는데, 여러번 우두머리가 되는 자가 급료를 받는 자리에 임명되니, 거의 모두가 격려·권장되어 무예를 익힙니다. 그러나 조가에서는 양정(良丁)의 폐단을 염려하여 사정청(査正廳)을 특설(特設)하고 긴요하지 않은 명호(名號)는 혹 줄이고 혹 깎아 버려 간행하여 책으로 만들었으나, 간혹 명색을 빠뜨린 것이 많이 있으니, 군총(軍摠)을 바로잡겠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삼남(三南)의 수군(水軍)을 조련(操鍊)할 때 돌풍이 불고 물결이 크게 일어 눈앞에 위험과 공포가 가득했는데, 수령(守令)·변장(邊將)은 모두가 싫어하여 피하고 다만 수군의 관속(官屬)으로 하여금 배를 타고 가도록 하고 자신들은 육로로 갔습니다. 그런데 관속들도 배타는 것을 싫어해 피하기를 역시 관장(官長)과 같이 하여 다만 노군(櫓軍)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가게 했으니, 이는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진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법령(法令)을 펴서 수사(水使)로 하여금 하나하나 적발(摘發)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가사(騎士)의 일은 전에 요과(料窠)가 없었으니 창설할 수 없다. 군민(軍民)은 경향(京鄕)이 어찌 다르겠는가? 그 감히 능답(凌踏)하니 군문(軍門)에 엄히 신칙하겠다. 사정(査正)의 일은 연어(淵魚)233)  의 〈눈치〉를 살피지 말 것이며, 왕자(王者)의 도(道)를 이미 들은 뒤에도 그 〈위법이〉 많은 듯하니,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조사해 처리하게 하라."
하고, 원소(原疏)는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경기 감사 이명곤(李命坤)이 해일(海溢)의 재해가 3천여 결(結)이라고 계청(啓請)한 것을 앙주(仰奏)하기를,
"당초에 조가(朝家)에서 해일의 재해에 별급(別給)하는 것을 수효(數爻)로 정하지 않았던 것은 뜻을 둔 데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충분히 상세하게 조사하도록 하여 그 어쩔 수 없는 곳에 실수(實數)에 따라 급재(給災)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8일 을축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을 강(講)하게 하였다. 부수찬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삼가 어제(御製)를 보건대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의 일로 인하여 동궁(東宮)을 면계(勉戒)한 것은 역시 성려(聖慮)가 미친 곳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로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몸으로 가르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학문이 아니면 어떻게 군자(君子)·소인(小人)을 판별하겠는가? 다만 그것을 판별하는 것의 요체는 ‘거경 궁리(居敬窮理)’ 네 글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규채가 말하기를,
"소인은 밖으로는 마치 공변된 듯 하지만 안으로는 사실 사심을 끼고 있는 자이니, 이는 더욱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거경 궁리의 가르침은 진실로 판별하고 살피는 요도(要道)를 얻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왕안석(王安石)234)  이 공손홍(公孫弘)235)  의 베옷을 입은 것을 따라 한 것은 자취는 곧 이와 비슷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이같은 곳에는 쉽게 엿보아 얻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규채가 말하기를,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데는 명절(名節)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명리(名利)를 어지러히 다투는 것에서부터 염치(廉恥)가 상실되고, 명절이 무너지게 됩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 폐단을 깊이 아시어 만약 먼저 명절을 숭상하신다면 사람들이 각자 갈고 닦아 자연히 풍속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장려하라는 말은 대체(大體)가 옳다. 세인(世人)은 암지(暗地)에서 당(黨)을 빚어냄이 거의 우(牛)·이(李)보다 더 심함이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원량(元良)이 학문을 잘하여 더욱 이와 같은 도리(道理)를 보고 난 뒤에야 뒷날의 이와 같은 폐단을 구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제술한 것에 원량에게 진심을 털어 놓았으니 만약 이 마음을 능히 체득할 수 있다면 거의 희망이 있으리라."
하였다. 이규채가 말하기를,
"동궁의 예학(睿學)이 날로 나아지니 만약 중단하지만 않는다면 자연히 덕업(德業)이 점차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이를 힘쓸 뿐이니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주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참의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조재민(趙載敏)을 집의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이게(李垍)를 지평으로, 임명주(林命周)·이광직(李光溭)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9일 병인

유성(流星)이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세운 뜻은 이미 어제(御製)에 보였다. 다만 원량(元良)에게 드리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경 등에게도 역시 마땅히 약석(藥石)이 될 것이다. 오직 재능으로써 등용함을 정격(定格)으로 삼겠으니 피차간에 당(黨)이란 글자를 단지 나만 다시 말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신하들 역시 전석(前席)에서 다시 꺼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풍릉(豊陵)에게 말하기를 ‘조제(調劑)의 논의가 필경에는 당이 되지 않는다고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나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성의(聖意)의 있는 바를 신 등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갑(甲)이란 사람은 다만 갑이란 사람을 등용하고, 을(乙)이란 사람은 다만 을이란 사람을 등용하나, 스스로 말하기를 ‘재능으로 등용했다.’라고 하면, 전하께서는 그를 어떻게 판별하시겠습니까? 성교(聖敎)가 크지만 마땅함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경의 말과 같다면 장차 당(黨)이 없을 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인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백성의 실덕(失德)은 음식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등용하고 버릴 때에 피차가 편중되게 등용한다는 한탄이 있다면, 이는 다투게 되는 단서가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조제(調劑)를 세우시고 적실하게 이 의론을 주장하는 자로 하여금 그 광용(廣用)할 것을 책임지도록 하시는 것이 혹 구시(救時)의 도(道)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당(黨)이 없으며 병판(兵判)과 같은 여러 사람들은 협용(狹用)하는 병폐가 없지 않으므로 매번 서로 마주하면 그를 책망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신이 당론(黨論)에 대해서 다만 잊은 지가 오래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신의 자질(子姪) 역시 모두 당심(黨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원량(元良)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데 경은 어떻게 자질들의 심정을 아는가? 당을 좋아하는 것은 잡기(雜技)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자제(子弟)가 잡기를 좋아하는 것을 부형(父兄)이 금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잡기의 장소를 만나면 기량(伎倆)의 시키는 바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의금 정우량(鄭羽良)이 전라 감사 조영로(趙榮魯)가 죄인을 석방하거나, 석방하지 않아야 할 계본(啓本)과 품질(稟秩) 가운데 김원재(金遠材)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 것으로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원재는 이미 중요한 것에 관계되었으니 가볍게 의론할 수 없다. 도신(道臣)이 품질 가운데 놓아 둔 것은 잘못이다. 도신을 추고(推考)하고 김원재의 일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후에 익릉(翼陵)에 전향(傳香)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국구(國舅)의 후손이 영락(零落)한 것을 느끼고 특별히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기(唐紀)를 지금 거의 다 보았는데 목종(穆宗)·경종(敬宗) 이하의 임금들은 숫자를 채운 것에 불과할 뿐이다. 훗날 동사(東史)를 지을 것을 생각하니 늠연(凛然)해짐을 깨닫지 못하겠다."
하니, 승지 이종적(李宗迪)이 말하기를,
"항상 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한(漢)·당(唐)을 어찌 족히 말하겠습니까? 요(堯)·순(舜)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 오언유(吳彦儒)는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마땅히 실심(實心)으로 일을 해야 하며, 또한 마땅히 요·순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부수찬 이규채(李奎采)는 말하기를,
"지금의 말하는 자가 모두 조제(調劑)를 목표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쇠세(衰世)의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 임금이 요·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는데, 오늘날 우리 임금에게 권(勸)하는 자들은 다만 마땅히 요·순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조제를 목표로 삼는 것입니까? 만약 요·순을 목표로 삼으면 저절로 탕평(蕩平)의 지경에 이를 것이요, 만약 조제를 목표로 삼으면 미치는 바가 협소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뭇 신하들이 만약 ‘당(黨)’이란 글자를 잊는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는가? 내가 비록 지기(志氣)가 쇠모(衰耗)되었으나 스스로 기대함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성(慈聖)의 회갑(回甲)의 해를 만남에 마땅히 온 나라가 기뻐할 때이니, 어찌 세초(歲抄)를 아끼겠는가? 매우 중죄에 관계되어 이름이 장오(贓汚)에 있는 경우 이외는 하나같이 다 탕척하여 기뻐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전 우의정 민응수(閔應洙)를 특별히 서용(叙用)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이름이 대신(大臣)에 있기 때문에 세초(歲抄)에서 의례적으로 서용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형(刑)은 대부(大夫)에게 미치지 않는다.’ 하였다. 장오(贓汚)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아침에 시종(侍從)하던 사람을 저녁에 장형(杖刑)을 당하게 하는 것은 심히 불가하다. 지금 이후로 일찍이 시종을 지낸 자가 무릇 공죄(公罪)를 저질러서 법률에 의해 장형을 받게 되면 속전(贖錢)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임명주(任命周)가 상소하여 대각(臺閣)이 말을 꺼려하는 것으로 규피(規避)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직기(直氣)는 소색(消索)하고 경상(景像)이 수저(愁沮)함은 역시 윗사람이 그것을 계도함이 있는 데에서 말미암는 것이었다고 상세히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차자에 대한 비답은 전후(前後)로 사건을 말한 신하를 재앙을 부르는 데 일조(一助)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대신(臺臣)이 말하지 않는 것이 근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가히 위로 하늘의 노여움을 범했다 하겠으나, 도리어 재이로써 일을 말한 신하에게 허물을 돌리고자 하니, 재앙을 만났을 때 하늘을 감응시키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춘궁(春宮)의 영자(英姿)가 숙성(夙成)하나 혈기(血氣)는 오히려 아직 굳게 정해지지 않았고, 예학(睿學)이 날로 향상되고 있으나 의리(義理)는 오히려 융관(融貫)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이와 같이 대우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필시 장차 언관(言官)을 가벼이 보고서 물리치고 귀양보낼 것입니다. 견문(見聞)이 이미 익숙하여 선입견이 위주가 된다면 훗날의 염려가 어찌 작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어찌 대신(臺臣)의 허물이겠는가? 이는 나의 허물이다. 그러나 진 시황(秦始皇)은 성품이 포악하여 정확(鼎鑊)을 앞에 두었는데 모초(茅焦)는 옷을 걷고 솥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신들은 교목 세신(喬木世臣)인데도 한때의 엄교(嚴敎)로 머뭇거리며 뒤돌아보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명리(名利)의 마음을 능히 극복할 수 없어서이다. 너는 어찌하여 말하지 않았으면서 수미(首尾)로 장황(張皇)하게 하고 있으니, 마음이 과연 공변된 것인가, 사사로운 것인가? 이러한 세도(世道)는 아침 저녁으로 민망해 하던 것이니, 혹은 원량(元良)이 공(公)을 사(私)로 여기고 사를 공으로 여길까 두렵다."
하였다.

 

집의 조재민(趙載敏)이 아비의 병으로서 진소(陳疏)하니, 임금이 먼저 입시(入侍)했다가 뒤에 구호하라고 명하였다. 조재민이 말하기를,
"요사이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 연차(聯箚)를 논하여 도리어 역안(逆案)의 사건에 두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일찍이 정미년(丁未年)236)  에 있어 대신(臺臣)으로서 역시 일찍이 이 일을 논급했었습니다. 신의 사사로운 의(義)에 있어 참섭(參涉)할 수 없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번 패초(牌招)하자 비로소 들어와서는 즉시 인피(引避)하지 않다가 끝내는 혐의를 하니, 그 신칙하고자 함에는 마땅히 대신에게 먼저 하겠다."
하고,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전 경상 좌수사 신만(申漫)을 김해부(金海府)로 유배하였다. 어사(御史) 한광조(韓光肇)의 서계(書啓)에서 탐묵(貪墨)하다고 한 것으로 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10월 11일 무진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사간 이위보(李渭輔)가 상소하기를,
"동료 대관이 소어(疏語)로서 자핵(自劾)을 하고 또 처치(處置)를 함부로 담당할 수 없다는 의(義)를 끌어대어 어제 상참(常參)에서 갖추어 논하면서, 밖에 있어 규피(規避)하는 것으로 핑계를 댔으니, 불참한 여러 대관들은 파직으로써 그 해괴한 습관을 징계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견삭(譴削)의 법을 시행하소서. 전 지평 이게(李垍)는 그의 생각이 대개 대론(大論)을 규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동료 대관이 비록 이미 파직을 청하였으나, 이와 같은 풍습은 삭출(削黜)을 더하기에 합당합니다. 조재민(趙載敏)은 감히 연차(聯箚)가 도리어 역안(逆案)에 두었다는 말로 방자하게도 지척(咫尺)의 임금 앞에서 인피(引避)하였습니다. 그 불경한 짓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폄출(貶黜)의 벌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부진(附陳)한 것이 옳다. 아울러 아뢴 대로 시행하라. 조재민은 그 하어(下語)한 바는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네가 어찌 그 계어(啓語)에 모골(毛骨)을 송연(竦然)히 하지는 않고 등송(謄誦)하기를 이와 같이 하느냐? 앞뒤가 도치되고 뜻이 공평치 못하다고 말할 만하다.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재민이 피사(避辭)한 구어(句語)는 합계(合啓)한 가운데의 말인 듯하다."
하니, 승지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정미년(丁未年)237)  에 처분(處分)할 때에 소주(疏奏)가 어지러히 이 일을 논하였는데, 조재민의 아비 조적명(趙迪命) 역시 두어 줄의 글로 언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하어(下語)가 비록 경중(輕重)·천심(淺深)이 있지만, 그 일은 서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를 성토하려 할 때 조재민이 참섭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사리(事理)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를 혐의한다면 사람이 누군들 혐오하지 않겠느냐? 내가 사대신(四大臣)의 일을 생각해 보니, 그의 아비의 상소에 그것을 말한 듯하다."
하였다.

 

10월 13일 경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당(辛讜)238)  이 임협(任俠)을 오로지 한 것이 조적(祖逖)239)  이 닭 울음을 듣고 일어나 춤춘 것만 못하다."
하니, 부수찬 임상원(林象元)이 말하기를,
"조적과 같은 사람이 평상시 임사(任使)를 잘하였다면 난(亂)에 임했을 때에도 역시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 김시위(金始煒)는 말하기를,
"사람의 전포(展布)란 때를 만나는데 달려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이 임진년(壬辰年)240)  을 만나지 않았다면 일개 고을의 읍재(邑宰)에 머무는 데 불과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戊申年)241) 남연년(南延年)의 사건도 역시 ‘질풍 경초(疾風勁草)’라고 말할 만하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알지 못하는데, 누가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느냐? 홍임(洪霖)이 그 당시 처했던 일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하니, 김시위가 말하기를,
"일찍이 남연년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완실(完實)했고, 홍임은 다만 유복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조명교(曺命敎)를 대사간으로, 한원진(韓元震)을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司諫)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유한소(兪漢蕭)·이기덕(李基德)을 지평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헌납으로, 김광국(金光國)·이응협(李應協)을 정언으로, 이익보(李益輔)를 문학으로, 서효수(徐孝修)를 사서로, 민응수(閔應洙)를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10월 14일 신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신이 남방(南方)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에 무과(武科) 출신자들이 해마다 출과(出科)하나 하나도 수용됨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신(文臣)이 벼슬을 얻지 못하여도 오히려 억울해 하는데, 하물며 이 무리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출신자를 별도로 1개 청(廳)을 만들어서 각각 그 도(道)에서 무예를 시험하여 올려 보내게 하되 수석을 차지한 자를 채용한다면, 평상시에는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가 있고 위급함에 임하여 역시 귀속(歸屬)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절목(節目)을 이루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입궐하여 비로소 세초(歲抄)를 보니 이러한 문서(文書)에도 성상(聖上)께서 역시 수고롭게 정신을 쓰셨습니다. 전에는 황첨(黃籤)을 붙이면 급첩(給牒)하였는데 금번에는 점을 찍어 친히 쓰셨습니다."
하였다. 호판(戶判)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무릇 한 가지 사건에서 먼저 중죄(重罪)를 입고 나중에 또 경죄(輕罪)를 입은 자가 있으니, 이미 중죄를 입었다면 경죄는 자연히 논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중죄가 이미 풀어진 뒤에도 또 경죄에서 풀려나지 않은 자가 있으니, 이는 법례(法例)로 말하여 한 가지 사건에 거듭 죄주는 것이 어떠한가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박규수(朴奎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검열(檢閱) 정항령(鄭恒齡)이 예원(藝苑)에 들어온 뒤로 대부분 비쇄(鄙瑣)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에게 말썽을 많이 초래하였으며 또 지난번 행차 때 유연(鍮硯)을 잃어 버리고 빈 손으로 왔다갔다 하였습니다. 행동이 전도(顚倒)되어 듣는 사람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이 말처럼 사관(史官)이 되어 유연이 없었다면 자연히 열록(列錄)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체(國體)에 관계되는 일이니 여기서 그칠 수가 없다."
하고,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광의(李匡誼)·송익휘(宋翼輝)를 죄적(罪籍)에서 이름을 깎으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사람을 특별히 방송(放送)하는 것은 대개 물고(物故)로 인하여 오히려 급첩(給牒)하지 않았다. 방송하는 것을 거두기를 청한다면 옳거니와, ‘이름을 깎는다.’는 이하의 말은 특히 결말을 지을 수가 없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재민(趙載敏)의 아비는 애초에 모반한 문안(文案)의 사건에는 간여함이 없는데, 조재민이 스스로 벗어나기에 급했던 것은 아비를 속이고 임금을 속인 것으로 불효 불충합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깎아 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 일을 의심하여 조재민을 나문(拿問)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이윽고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정미일기(丁未日記)》를 고주(考奏)하라고 하니, 과연 조적명(趙迪命)의 소(疏)가 있었다. 임금이 정직하지 못하다 하여 박규수를 사적(仕籍)에서 영원히 깎아 버리고 조재민의 나처를 멈추라고 하였다.

 

수찬 임상원(林象元)을 삭출(削黜)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들과 함께 조재민(趙載敏)이 합계(合啓)를 인피(引避)한 일을 논하다가, 임상원이 조재민을 위하여 아뢴 바가 있었는데, 임금이 《정미일기(丁未日記)》의 조적명(趙迪命)의 소(疏)를 보게 됨으로 인하여 임상원이 감히 대훈(大訓)의 뒤에 ‘의리(義理)’ 두 글자로 임금에게 아뢰었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이 명령이 있었다. 조현명(趙顯命)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임상원의 무리가 합계를 멈출 수 없자 다만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무릇 어찌 의리에 집착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의리’라는 글자를 가리킨 것을 추구하건대 자못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성청(聖聽)에 혹시 어긋남이 있는가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태중(李台重)이 귀양에서 석방되었으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의 병이 위중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이태중을 조선(朝鮮)의 일개 괴물(怪物)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장관(書狀官)이 되었을 때에 그를 보니, 외모는 작으나 사람은 괜찮았다. 윤양래(尹陽來)가 일찍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태수(太守)에 대해 약간 사나우면 악(惡)하다고 여기고, 잠깐 느슨하게 하면 유(柔)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했는데 대개 그러하다. 권영(權瑩)이 일찍이 대간(臺諫)으로 입시(入侍)하였을 때 치켜뜨는 눈동자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 눈길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승지(承旨)로 입시했을 때에 그 눈동자를 보니 유선(柔善)함이 지나쳤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그 친하여 사랑하는 것에 편벽되며, 그 천하게 여겨 미워하는 것에 편벽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한 마음으로 한 사람을 봄에 전후(前後)에 강(剛)·유(柔), 선·악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어찌 편벽된 것의 병폐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더 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옳다. 이는 모두 나의 마음이 향하는 바를 따라 겉에 나타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였다.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집의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이영록(李永祿)·임순(任珣)을 지평으로, 김한철(金漢喆)을 대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이형만(李衡萬)·이유수(李惟秀)를 정언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응교로, 김선행(金善行)을 교리로, 정언유(鄭彦儒)를 필선으로, 남태회(南泰會)를 문학으로 삼았다.

 

10월 15일 임신

호서 암행 어사(湖西暗行御史) 민백상(閔百祥)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불러서 연로(沿路) 수령(守令)의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은 것을 묻고, 이어서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지금 어사를 불러 아뢰는 것을 듣고 계사(啓辭)를 봄에 깊이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든다. 옥식(玉食)이 어찌 달갑겠는가? 이때 이미 유민(流民)이 생겼으니 내년 봄의 일을 알 만하다. 이 하전(厦氈)에서 소의간식(宵衣旰食)하는 뜻을 체득하여 열읍(列邑)에 신칙(申飭)하되, 주의하여 무마(撫摩)·안집(安集)하라. 그리고 지난번에 해일(海溢)이 있었던 곳에 고휼(顧恤)·견감의 정사를 어사가 듣지 못하고 왔으니 이는 민심을 위로함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유산(流散)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수령이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은 마땅히 안렴(按廉)의 방도에 달려 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6일 계유

밤에 유신을 불러 《지치통감》을 강하게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上疏)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사직하니,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으로 용서하고, 그날로 입성(入城)하라고 칙령(飭令)하였다.

 

10월 17일 갑술

천둥하였다.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을 강하게 하였다. 교리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는 수령(守令)을 가려 뽑아야 한다는 것으로 하교하셨는데, 만약 가려 뽑고자 할 것 같으면 마땅히 처음 입사(入仕)했을 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능관(陵官)의 치적(治績)으로써 관리가 유능한지 않은지를 점칠 수 있다. 내가 소시적에 여러 번 능소(陵所)에 가서 능관을 보니, 곧 작은 수령이었다. 수호군(守護軍)에게 침학(侵虐)하는 마음을 백성에 임하는 데 옮긴다면, 백성은 명(命)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수찬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매양 명예를 바라는 것이 탐람(貪濫)보다 심하다는 것으로 하교하셨는데, 지극한 말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예를 바라는 것의 폐해는 그 흐름이 나라에 미치게 된다."
하였다. 이규채가 말하기를,
"탐람한 사람은 그 몸에 그치지만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그 폐해가 진실로 끝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세속에서 명예를 바라는 것을 힘쓰는 것이 다만 수령 뿐만이 아니다. 조정(朝廷) 역시 그러하다. 장수가 군졸에게 혹 명예를 바람이 많다면 나 역시 속마음으론 용서할 것이나, 이는 나 역시 명예를 바람을 면치 못한 것이다. 대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비방을 면하려는 계책인데, 도도(淘淘)함이 이와 같으니 이상하다."
하였다.

 

10월 18일 을해

임금이 승지(承旨)와 옥당(玉堂)을 불러서 재앙을 그치게 하는 대책을 묻고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두려워하여 수성(修省)하는 뜻을 보였다. 이어서 3일간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경은 춘방(春坊)이 되었다. 내가 스스로 기대하고 경이 스스로 기대한 것이 어떠했던가? 내가 보위에 오르자 경 역시 재상으로 들어왔다. 상하(上下)가 기대한 것이 모두 어긋나는 바가 있다. 나는 평범한 임금이 된 데 불과하고 경도 역시 말한 바에 부응하지 않으니, 담당하고 있는 자들이 혼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귀밑머리가 서리처럼 희니 나와 경이 모두 부끄러워 할 바이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를 나처(拿處)하라 명했다. 칙교(飭敎)한 뒤에 곧 응명(膺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남(湖南) 양전사(量田使) 원경하(元景夏)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원경하를 불러 보니, 말하기를,
"신이 호남에 내려가니 개량(改量)이 작년 봄에 시역(始役)되었으므로 양사(量事)가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새로 일으켜 얻은 바가 6백여 결(結)이 되어 백징(白徵)의 숫자에 채워 보태고도, 남은 바가 오히려 1백여 결이 되었습니다. 신이 우리 성상께서 위에 있는 것을 덜어 아래에 보태주려 하시는 성덕(盛德)을 민간에 선양(宣揚)하고, 전주(全州)는 정탈(定奪)242)  에 의거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농사를 보니 들은 바와는 달랐습니다. 해일(海溢)에 이르러서는 신이 격포(格浦)에서 길을 떠나 두루 살폈더니 재해를 입은 곳에는 모두 백모(白茅)의 마당이 이루어져 신이 보기에 해일이 아니라 바다에 씻긴 듯 하였습니다. 여산(礪山)에서부터 순천(順天) 등에 이르기까지 25읍(邑)이 일시에 씻겨져 도정(道程)으로 말하면 거의 6, 7백 리가 되니, 이는 진실로 전에 있지 않았던 바입니다. 이것이 비록 근심스럽다고 하나 우역(牛疫)이 크게 극성하여 농우(農牛)가 다 죽어서 내년 봄에 장차 경작할 희망이 없는 것 역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시 시기(時氣)가 도리어 어긋난 데서 온 것이다. 경이 천거한 사람이 대다수 18명에 이르는데 어떻게 다 등용하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호남은 옛날에 명공(名公)·거경(巨卿)이 많았습니다. 진주(晉州) 3장사(壯士)는 모두 호남 사람이고, 일신(一新)의 7충신 역시 모두 호남 사람입니다. 신이 인망(人望)을 채탐(採探)하여 지난번에 이미 소진(疏陳)했으나, 그 전에 이미 입천(入薦)되어 관직에 제수된 사람이 많았고,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혹은 출사(出仕)하지 않은 사람도 역시 많습니다."
하고, 이어 여러 사람들의 성명 및 행의(行誼)를 두루 열거하고서 말하기를,
"18인은 신이 이미 천진(薦進)하였으니 조가(朝家)에서 견용(甄用)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문구(文具)인 듯하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호남에 좌도(左道)가 많은 것을 민망해 하셨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문학(文學)·행의의 선비를 거두시어 조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시면, 한 도(道)의 풍속이 혹시 크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고석(高晳) 및 안황(安煌)·정사협(鄭斯鋏)은 대정(大政)을 기다릴 수 없으니, 자리에 따라 녹용(錄用)하고, 다른 사람들 중에 이미 녹용한 사람 이외는 일체를 조용(調用)할 것이며, 정유년(丁酉年)243)  에 순절한 사람 임박(任樸)에게 증직(贈職)하라."
하였다.

 

능주 목사(綾州牧使) 이하징(李夏徵)에게 새서 숙마(璽書熟馬)를, 나주 목사(羅州牧使) 서명형(徐命珩)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염백 강명(廉白剛明)하고 치적(治績)을 숭상할 만한 곳으로 능주가 최고이고, 스스로 진휼할 곡식을 갖추고 군기(軍器)를 보수(補修)함은 나주가 많다고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승지로, 심익성(沈益聖)을 장령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제학으로, 남유용(南有容)을 부응교로, 서지수(徐志修)를 교리로, 어석윤(魚錫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19일 병자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을 강하게 하였다.

 

정언(正言) 이형만(李衡萬)이 천둥의 이변으로써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기를,
"무릇 재이(災異)가 일어나면 반드시 곧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이를 만나고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나 수성(修省)하는 실체가 없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전하께서는 근자에 재앙을 만났으나 말을 구한다는 하교가 없으시니, 온 나라의 사람에게 취할 만한 말이 없다고 생각해서입니까? 아니면 말이 지나치게 정직하면 곧 다시 처리하기 곤란해서입니까? 지금의 급무(急務)는 오직 어진 이를 얻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지금의 풍습을 보건대 경영하는 바는 가사(家事)이고 다투는 바는 작록(爵祿)이니, 곧 청명(淸明)한 지식과 뇌락(磊落)한 견해가 없음을 분명히 알겠으며, 달려가는 곳은 권리(權利)이고 심는 바는 당우(黨友)이니, 결코 그 정직(正直)한 기운과 공평(公平)한 마음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묘당(廟堂) 위에서 때를 근심하고 임금을 바루는 계책이 없으니 훗날 의(義)를 잡고 간난(艱難)을 구제할 재목이 없음을 결단코 알겠으며, 법종(法從)의 반열에서 범안(犯顔)하고 과감히 간쟁(諫爭)하는 선비가 없으니 곧 훗날 절의를 지켜 의에 죽을 신하가 없음을 결단코 알겠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얻으려고 하시면 먼저 풍습을 바로잡고, 풍습을 바로잡으려 하시면 먼저 그 의리(義理)를 밝히소서. 나라가 의뢰하여 유지되는 것은 오직 이 의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께서는 건극(建極)의 뜻을 두었으나 건극하는 도(道)를 잃었으니, 의리를 극(極)으로 삼지 않고서 다만 사람을 감싸주는 것을 극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전하의 극이 홍범(洪範)의 극과 다른 까닭입니다. 전하께 바라건대 빨리 나에게 있는 의리를 밝히시어 이것으로 건극하고 이것으로 온 나라의 사람을 바르게 하시면 진실로 어진 사람들을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얻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며, 천심(天心) 역시 기쁘게 되어 여러 복록도 또한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힘써 아뢴 것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언 직간(求言直諫)하는 것이 어찌 한(漢)·당(唐)만을 이르겠는가? 우리 나라에서도 융성하게 했던 일이다. 내가 비록 부덕(否德)하나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곧 유(幽)·여(厲)·걸(桀)·주(紂)의 일이다. 또한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청구(靑丘)에서는 참으로 시비(是非)를 없게 하여야겠다. 피차 그 의리(義理)의 공사(公私)를 말하나 그 마음을 궁구해 보면 사(私)요,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이와는 반대이다. 그러나 밖으로 보면 너희가 나를 비방하는 말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재호(趙載浩)를 함께 들라고 명하고, 관동(關東) 백성들의 풍속 및 개량(改量)의 가부(可否)를 물었다. 하교하기를,
"송도(松都) 상고(商賈)는 그 죄가 아니다. 조가(朝家)에서 수용(收用)하지 않아서 도도(滔滔)하게 말리(末利)를 따르는 결과가 된 것이니, 그 사정이 불쌍하다 하겠다. 경은 인재(人才)를 수방(搜訪)하여 알려라."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만약 들은 바가 있으면 마땅히 성교(聖敎)에 의거해 봉행하겠습니다."
하였다.

 

10월 23일 경진

전라 감사 조영로(趙榮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 백년(百年)의 가장 고질적인 폐단은 양역(良役)이니, 호포(戶布)·구전(口錢)·유포(遊布)·결포(結布)의 말이 어지러히 번갈아 나왔으나 적절히 따를 바가 없습니다. 백성은 더욱 날로 곤란해지고 폐해는 날로 더욱 심해져 간혹 한 집에서 부자(父子)·조손(祖孫)이 군적(軍籍)에 이름이 편입되기도 하고, 간혹 한 집에서 3, 4형제가 직접 군포(軍布)에 응하기도 합니다. 또 이웃의 이웃이기 때문에 책임을 당하고 일가의 일가이기 때문에 징수(徵收)를 당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는 유하(乳下)에서 포함되고, 죽은 사람은 지하에서 징수를 당하며, 한 사람이 달아나면 열 가구가 보존되지 못하니, 비록 양재(良宰)·현수(賢守)가 있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직 신이 한 가지 얻은 것을 망령되이 말씀드리건대, 변통(變通)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각읍의 잡역(雜役)의 대가로 바치는 쌀을 임시 변통으로 상량(商量)하여 크게 억제를 가하면 대체로 남는 수량이 있게 됩니다. 각군(各軍) 2필(疋)의 역(役)에 대하여 그 1필을 남겨 두고 그 감하여 준 대가를 잡역 가미(雜役價米)의 남는 숫자로 옮겨 채우면 각읍에 있어서는 심하게 손해보는 것이 없고 양역(良役)에 있어서도 역시 약간 헐해지지 않겠습니까?
호남(湖南)으로 말씀드리자면 당년(當年)의 재앙으로 탈이 난 2만 7천의 실결(實結)을 제외하면 나머지 결수(結數)는 20만 결(結)입니다. 1결에서 내야하는 세액은 대동미(大同米)·삼수량(三手糧), 잡비와 아울러 모두 20두(斗)가 되는데 경납(京納)되고, 영(營)·읍(邑)의 월름(月廩) 및 손님에게 지출되는 것은 그 가운데에서 상쇄(相殺)하여 회계해야 됩니다. 또 잡역미(雜役米)는 적게는 5, 6두를 바치고 많게는 간혹 10여 두에 이르며, 모두 합하면 1결에서 바치는 것은 많게는 30여 두가 되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1개 도(道)를 통하여 그 많고 적음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특별히 28두로 정하면 실제로 균부(均賦)의 도(道)가 될 것입니다. 20두는 이미 원세(元稅)가 되므로 남은 8두 이내에서 3두를 치계(雉鷄)·시탄(柴炭)을 바꾸어 쓰는 비용으로 삼아도 남는 것이 있는데, 실제 남은 5두는 평년(平年)의 쌀값으로 1관(貫)의 돈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는 1결이 1관의 돈을 얻는 것이니 20만 결로 20만 관의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내(道內) 경외(京外)에서 군포를 바치는 사람의 총 합계는 9만 3천 1백 38명이니, 바치는 군포는 통계가 18만 6천 2백 76필이 됩니다. 이제 그 쌀을 감하여 20만 관의 돈으로 하되 매양 포 1필은 운반비로 절산(折算)하여야 합니다. 잡역으로 말씀드리자면, 옛날에는 5두·10두로 다과부적(多寡不敵)한 것을 지금 한결같이 8두로 한다면, 부역이 고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정(良丁)으로 말씀드리자면 옛날에는 2필을 바치던 것을 지금은 변경하여 1필로 한다면, 양역이 가볍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먼저 연충(淵衷)을 결정하시고 다음으로 여러 신하에게 물어 보셔서 신으로 하여금 우선 본도(本道)에서 그 편부(便否)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양역(良役)의 폐단이 오늘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아픔이 내 자신에 있는 듯하니 식식(食息)을 어찌 느슨히 할 수 있겠느냐? 수령(守令)을 제대로 가려 뽑지 못하여 황구(黃口)에게 첨정(簽丁)하고 인족(隣族)에게 징포(徵布)하며, 남자가 아닌데도 충원을 대신해야 하고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성책(成冊)되어 한 집안에 10여 필이 밑돌지 않으니, 이런 폐단을 막지 않고 다만 그 필수(疋數)만을 줄인다면 날이 오래되고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10필이 넘게 되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는가? 경과 여러 수령들은 힘쓰고 힘쓰라. 그 가운데 민(民)이 많고 군(軍)이 적거나, 군이 많고 민이 적은 곳을 상세히 살펴 그 상황을 알리고 상량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을 강(講)하게 하였다.

 

10월 24일 신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종성(李宗城)이 사조(辭朝)할 때에 청하여 얻은 요군목(遼軍木) 30동(同)을 이제 거의 다 쓰고는 지금 이 5개 초소 병영(兵營)의 기치(旗幟) 등의 물건을 새로 단속(團束)하는데, 마련해 갖출 수가 없다는 것으로 다시 얻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북도(北道)는 다른 도와는 달라서 기개(氣槪)를 좋아하고 한번 승락한 것을 꼭 지키는 것을 중히 여기니, 그 풍습이 그러합니다. 이런 까닭에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남구만(南九萬)·이광좌(李光佐)가 도신(道臣)이 되어서는 재력(財力)을 넉넉히 얻어서 대체로 격식 이외의 상(賞)을 시행하여 그 마음을 격발시켰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북쪽 백성들은 모두 그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이는 실로 상를 아끼지 않은 소치입니다. 이러한 때에 약간의 경비를 덜어내어 북로(北路)의 인심(人心)을 결속(結束)시킨다면 아까워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청컨대 다시 30동을 지급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삼가 호남백(湖南伯)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실로 성교(聖敎)의 지당함을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다만 2필(疋)의 포(布)만을 바치게 한다면 어찌 징수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겠습니까? 인족(隣族)에게 침징(侵徵)하므로 지탱하여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별도로 도신을 문책하면 반드시 그 효험이 있을 것이며 때로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직접 가서 하소연하게 하면 역시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주진(李周鎭)은 말하기를,
"오로지 도신을 문책하라고 아뢴 것은 진실로 옳습니다. 이는 오로지 수령과 도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니, 만약 그 능부(能否)를 보아서 독책(督責)하면 어찌 실효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평창(平昌)·삼척(三陟)의 지석(誌石)을 살펴본 본조(本曹) 낭청(郞廳)의 장계(狀啓)를 보니, 평창에 이른바 지석(誌石)을 파서 보았다는 사건인데, 이세좌(李世佐) 등이 상언(上言)한 사연이 지극히 허황하고, 이어서 삼척 겸관(兼官)과 함께 대박산(大朴山) 아래 세합동(世合洞)에 가서 먼저 구기(舊基)를 보고 다음 이세좌가 지적한 곳을 보니 모형을 잡아 시험해 볼 만한 자취가 없었습니다. 이세좌 등이 능(陵)을 찾는다고 가탁(假托)하여 터무니없는 말로 상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세좌가 경자년(庚子年)244)  에 만약 눈으로 보았다면 어째서 즉시 말하지 않다가 이제 비로소 알리며, 석곽(石槨)을 보았다는 말은 더욱 터무니없다. 죄주어야 마당하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허술함이 이와 같으니 예랑(禮郞)의 청대로 그를 돌아오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주진이 말하기를,
"그의 사람됨을 보니 매우 우미(遇迷)하였습니다. 원배(遠配)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현명의 청대로 이세좌를 강원도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간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응교로, 홍낙성(洪樂性)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5일 임오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밤 2경(更)에 중궁(中宮) 차비(差備)가 실화(失火)하여 불길이 인정전(仁政殿)의 행각(行閣)에까지 미쳤다. 임금이 선정문(宣政門)에 나아가 병조(兵曹) 입직 당랑(入直堂郞)과 금군장(禁軍將)을 불러 불을 끄게 하였다.

 

임금이 빈양문(賓陽門)에 나아가 익릉(翼陵)의 기신(忌辰)에 향을 친히 전했다.

 

장령(掌令) 심익성(沈益聖)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가 유지되는 까닭은 오직 의리(義理) 때문입니다. 제방(隄防)이 약간 소홀하면 나라가 나라의 모양이 될 수 없을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비록 근래의 일로 말씀드리더라도 박문수(朴文秀)는 작년 하나의 상소에서 쓴 글이 광패(狂悖)하고 생각해 낸 것이 음험(陰險)하여 윤강(倫綱)의 엄(嚴)함을 돌아보지 않아서 의리의 올바름을 현혹시키고 흉론(凶論)을 힘써 유지하고자 하였으니, 시비(是非)를 의심하고 어지럽힌 형상을 진실로 이미 전하께서 깊이 미워하여 엄히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이 얼마 되지 않아 옛날 그대로 거두어 서용하고 대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내리셨으니, 인심(人心)이 놀라 의혹스러워하고 공의(公議)가 억울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말 중에 전혀 깨달아 깊이 사죄하는 뜻이 없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더구나 한번 이대(吏對)를 거치고는 양양(揚揚)하게 무릅쓰고 나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방자하고 무엄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신이 말씀드리건대,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에게 빨리 삭출(削黜)의 법도를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상소문을 돌려 주고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6일 계미

대내(大內)에 불이 난 것으로 조정(朝廷)에서 문후(問候)하였다.

 

신회(申晦)를 사서로, 조명채(曹命采)를 교리로, 유언국(兪彦國)을 지평으로, 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7일 갑신

유성(流星)이 천창성(天槍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소리가 있었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고 각전(各殿)이 같은 날에 이어하였다.

 

10월 28일 을유

유성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함경도 고원(高原) 등의 읍(邑)에 천둥소리가 울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