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사
대궐 내외의 숙위군(宿衛軍)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라고 명하였으니, 날이 춥기 때문이었다.
12월 2일 무오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므로 진하(陳賀)를 권정(權停)하라고 명하였다.
겨울철에 납일(臘日)에 이르도록 싸락눈이 오고 눈이 오지 않았다. 예조(禮曹)에서 초4일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사직(社稷)·북교(北郊)에 기설(祈雪)할 것을 품신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도성(都城) 가까운 지역에 호랑이가 종횡하며 사람을 물어 죽이니,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포수를 내보내서 큰 호랑이를 잡도록 하였다.
12월 5일 신유
전(前)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을 특별히 서용하여 전임(前任)을 회복해 주었다.
12월 7일 계해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전라도의 가장 심한 읍(邑)에서도 해일(海溢)이 더욱 심한 면리(面里)에는 신역에 대한 미포(米布)를 완전히 감(減)해 주고, 그 다음 읍에 해일이 더욱 심한 면리에는 아울러 반을 감해 주는 일은 일찍이 이미 윤하(允下)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기보포(騎步布)에서 누락된 것을 도신(道臣)이 똑같이 견감할 뜻을 비국(備局)에 보고하였습니다. 타도(他道)의 예에 의거하여 더욱 심한 읍은 완전히 감하고 그 다음 읍은 반을 감해 줌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8일 갑자
강화(江華)에서 11월 19일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었다.
12월 10일 병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동래부(東萊府)의 장계(狀啓)·역관의 수본(手本) 및 왜인(倭人)의 수표(手標)를 읽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온 편(篇)에 가득히 교묘하게 속이는 수표와 수본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었다. 지난번 수역(首譯)이 무엄한 절목을 바치고 수신(守臣)이 방자하게 전달하였으나 다만 엄사(嚴辭)로 책유(責諭)할 것을 명하였으니, 대개 그 뜻은 깊은 것이었다. 변문(邊門)의 편의(便宜)는 오직 변신(邊臣)·임역(任譯)에게 있는데 이러한 수표는 전문(轉聞)할 수 없으니 곧 내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그 당시 사체(事體)가 조정의 도리에 있어 마땅히 엄히 처리할 것을 청해야 하였으나 오히려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내외(內外)에 저축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실로 민망하다 하겠습니다. 신이 병판(兵判)·어장(御將)과 상의하니 군문(軍門)의 연무(燕貿)는 비용이 많이 들어 막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병판은 말하기를, ‘일체 방금(防禁)하여 시장에서 바꾸게 하면 저자의 시민(市民)에게 있어 큰 혜택이 되고 국가의 용도에 보탬되는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장은 ‘면단(綿緞)으로 만든 기치(旗幟)를 쓰지 말고 면주(綿紬)로 대신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면단 깃발을 삼승포(三升布)의 깃발로 대신해도 됩니다. 면주는 연하고 얇아 힘이 없어서 그 쓰임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무는 금단(禁斷)하고, 기치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자주 바꾸지 말게 함이 옳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동적 친경전(東籍親耕田)은 8일 갈이로 하였는데, 다른 적전(籍田) 11일 갈이를 경작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정전법(井田法)267) 의 여덟 집에서 함께 공전(公田)을 돌보는 방법에 의해 그 경작한 적전의 세(稅)를 면제해 주고 친경 적전(親耕籍田)을 같이 다스리는 일로 법을 정하였습니다만, 11일 갈이 면세가 8일 갈이의 파종·수확하는 수고를 감당하기 부족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원하지 않습니다. 정전(井田)은 9분의 8이 사전(私田)이 되고 1이 공전(公田)이 되는데, 지금 이 적전은 10분의 8이 되나 사경(私耕)의 면세가 또 2, 3분이 되니,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금 만약 16일 갈이로 그 면세를 허락하고 친경전을 같이 경작하게 한다면 이것은 2분에 대한 〈면세에서〉 1분을 경작하게 하는 것이니, 비록 크게는 정전에 미치지 못하나 혹시 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를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언유(鄭彦儒)를 사간으로, 이제화(李齊華)·정권(鄭權)을 장령으로, 윤근(尹勤)·이훈(李塤)을 지평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헌납으로, 이종적(李宗迪)을 대사성으로, 한광회(韓光會)·오언유(吳彦儒)를 교리로, 김선행(金善行)·성범석(成範錫)을 부교리로, 서명빈(徐命彬)을 형조 판서로, 정이검(鄭履儉)·엄우(嚴瑀)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12일 무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前) 동래 부사(東萊府使) 김상중(金尙重)·수역(首譯) 현태익(玄泰翼)을 아울러 아주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인신(人臣)이 범한 바에서 마음이 있었다면 무겁게 하고 마음이 없었다면 가볍게 하는데, 그 공초한 것을 보니 마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국체(國體)에 있어 기강(紀綱)과 변사(邊事)를 중히 하는 도리에 엄하게 처단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윤근(尹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가만히 엿보건대 전하께서는 성덕(聖德)이 순수(純粹)하고 천자(天姿)가 도(道)에 가까워서 정사(政事)·문변(文辯)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고 만모(晩暮)에도 정치에 힘쓰시니, 더욱 성절(盛節)입니다. 그러나 기질(氣質)의 병폐와 같은 것은 혹 없을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중궁(仲弓)은 남면(南面)할 만하다고 칭찬했는데, 주자(朱子)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중궁이 관홍(寬弘)·간중(簡重)하여 인군(人君)의 덕이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망령되어 말씀드리건대 전하께서는 이 네 글자에서 혹 빠진 바가 있으니, 명예(明睿)는 크게 지나치나 연응(淵凝)·후중(厚重)의 도(道)는 적으며, 인자함은 남음이 있으나 함홍(含弘)·박대(博大)한 도량은 결핍되어서, 일에 응할 때에 이르러서는 능히 확연하게 이치에 따르지 못하십니다. 위노(威怒)가 간혹 그 상도(常道)를 잃고 처분(處分)함에 그 처음을 신중히 하지 못하여 자주 반복하는 후회가 있습니다. 이는 실로 뭇 신하가 함께 근심하는 바이니, 또한 함양(涵養)의 공부가 아직 굳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종핵(縱核)의 정사 같은 자못 번세(煩細)함에 손상되고, 사령(辭令)하는 사이에 대체로 중복됨이 많으니, 한(漢)나라 선제(宣帝)의 총괄하여 살피는 정치에는 마침내 손색이 있고, 문제(文帝)의 충후(忠厚)한 과조(科條)와 반경(盤庚)268) 의 고유(誥諭)가 빈번한 것이 진실로 당우(唐虞)의 말하지 않고도 믿게 하는 데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늘날 서무(庶務)가 모두 자질구레하고 풍속이 변하여 각박해져서 혹시 거기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가만히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유의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원량(元良)을 가르쳐 이끄는 도(道)를 깊이 진념(診念)하셔서 이미 술편(述編)을 두어 이모(貽謨)를 다하시니, 능히 일찍이 깨우쳐 주는 도를 얻었다고 보겠습니다. 아! 원량의 옥질(玉質)이 순미(純美)하고 춘추가 바야흐로 넉넉하니 마땅히 바로 강학(講學)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의리를 널리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서연(書筵)에서 진강(進講)함에 수행(數行)의 글을 강독하고 끝내는 데 불과하다.’고 하니, 이것은 정자(程子)가 인선후(仁宣后)에게 고하기를, ‘사람이 어릴 때에는 지혜와 생각이 주간하는 바가 없으니, 문득 마땅히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으로 날마다 앞에 나아가서 귀에 채우고 배에 가득하게 하여 오래되면, 자연히 익히는 데에 편안하게 되어 본래 있었던 것과 같이 될 것이니, 비록 다른 말로 유혹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으니, 말한 것이 아름답구나!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강학을 권하는 신하를 밝게 조칙(詔勅)하여 아침 저녁으로 개연(開筵)할 때에 다만 문의(文義)만을 해석할 뿐만이 아니라, 의리·도덕의 말로 끌어 당기고 곡진한 증거를 끌어 대고 훈적(薰迪)을 개발(開發)하여 침함(沈涵)·훈도(薰陶)의 효험이 있게 해서, 예지(睿智)가 날로 밝아지고 예덕(睿德)이 날로 이루어지게 한다면 비론(鄙論)·속견(俗見)이 그 총명을 어지럽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전 평안 감사 이주진(李周鎭)·이종성(李宗城)·이기진(李箕鎭), 시임(時任) 감사(監司) 조영국(趙榮國), 전 평안 병사 정찬술(鄭纘述)·이일제(李日躋)를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변상(邊上)에 범월(犯越)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3일 기사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정휘량(鄭翬良)을 승지로, 신만(申晩)을 예조 판서로, 조관빈(趙觀彬)을 공조 판서로, 이응협(李應協)을 부수찬으로, 이형만(李衡萬)을 필선으로, 심육(沈錥)을 대사헌으로 삼고, 장령 정권(鄭權)을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잉임(仍任)하였다. 당시에 보령에서 굶주림을 고(告)했는데, 대신(大臣)들이 바야흐로 진휼을 베풀 때를 당하여 잘 다스리는 수재(守宰)를 바꾸는 것은 크게 민읍(民邑)의 휴척(休戚)에 관련되니, 진휼을 마치기를 기다려 이배(移拜)하자는 것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12월 15일 신미
이방(吏房)·병방(兵房) 승지(承旨)를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여 경외(京外)에서 전최(殿最)한 것을 개탁하였다.
12월 16일 임신
경현당(景賢堂)에서 관학 유생을 전강(殿講)하여, 순통(純通)한 이충국(李忠國)·문명귀(文命龜)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임금이 경사(京司)의 전최(殿最)에서 상고(上考)를 얻은 여러 사람을 불러 보고서 각각 그 이력(履歷)·직장(職掌)을 물어 보고 면칙(勉飭)하였다.
충청도 유학(幼學) 박통원(朴通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종 대왕 왕비(文宗大王王妃) 현덕 왕후(顯德王后)께서 승하(昇遐)하신 후 12년간 곤위(壼位)가 오래 비어 있었습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명사(明史)》 열전(列傳)에 문종 왕후에게 고명(誥命)의 말을 내린 것이 있는데, 그 연월(年月)을 고찰하면 문종조(文宗朝)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고양(高陽) 땅에 한 고묘(古墓)가 있는데, 비석이 잘려서 고찰할 수가 없습니다만,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공빈(恭嬪) 최씨(崔氏)의 묘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씨 집 족보 가운데 역시 공빈 최씨가 있습니다. 연대(年代)를 미루어 보면 역시 문종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반드시 그 사이에 계빈(繼嬪) 최씨(崔氏)가 있었던 듯하나, 문헌으로는 징거할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문적(文蹟)을 널리 고찰하여 이를 정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중대한데다 의심이 없지 않다. 여러 신하들은 각각 소견을 진술함이 옳겠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정언섭(鄭彦燮)이 말하기를,
"신 역시 일찍이 들었습니다. 현덕 왕후(顯德王后)께서 승하하신 뒤 10년 동안 빈위(嬪位)가 없었고, 또 등극하신 후 2년 동안 곤위(坤位)가 있지 않았습니다. 사리(事理)로 헤아려 보면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거(考據)하는 바가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수백 년 발견되지 않았던 일이 지금 비로소 단서를 열게 되니 기다리고 있다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서평균(西平君) 이요(李橈)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하순(下詢)하기를,
"유소(儒疏)의 사의(辭意)를 일찍이 들어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 역시 일찍이 들었습니다. 또 고양에 공빈의 묘가 있다는 것을 듣고 상달(上達)하려고 하니 중대하고, 사사로이 찾아 보려고 하니 외월(猥越)되어 잠자코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2년 동안 곤위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이러한 이치가 없으니 지극히 의심할 만하다. 그러나 단지 《보략(譜略)》에 실려 있지 않다면 마땅히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겠으나, 만약 《실록》에 나타나 보이지 않으면 신빙할 수 없다. 유소를 보고부터 내 마음이 근심스럽고 두렵다. 지금 이렇게 널리 묻고 널리 캐어 봄은 대개 명확한 문자(文字)를 얻고자 함이다. 종시 의심스럽고 어두우니 《실록》에서 상고해 내지 않을 수 없으나, 역시 중대함에 관계되므로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하는 것이다."
하니, 대신들이 모두 문종이 잠저에 있던 신유년269) 에 현덕 왕후가 훙서(薨逝)하고 문종이 승하한 것이 임신년270) 이었으니 그 사이 12년 동안 곤위가 없었다는 것은 이치 밖의 일이므로 《실록》을 상고해 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으로 앙대(仰對)하였다.
12월 17일 계유
약방(藥房)에 명하여 입진(入診)하게 하니, 춘추관(春秋館) 당상(堂上)이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이 최씨 봉릉(封陵)의 일로써 진장(陳章)이 있으므로 종당에는 《실록》에서 상고해 내게 되었는데, 조야(朝野)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도제조(都提調)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알 듯합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북경 사행(北京使行) 때에 영상(領相)의 말을 들었는데, ‘권씨(權氏)는 곧 최씨인데, 최씨는 최도일(崔道一)의 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빈(恭嬪)의 아버지는 임영 대군(臨瀛大君) 부인(夫人)의 동생일 뿐이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최씨의 능은 고양 대자산(大慈山)에 있으며, 권씨의 묘는 용인(龍仁)에 있는데, 형체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황조인(皇朝人)의 문자(文字)를 익히 보고 상세히 찾아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경오년271) 6월 문종께서 즉위하여 신미년272) 정월에 현덕 왕후(顯德王后)를 추증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최씨인가 의심하고 또 권씨인가 의심하니, 일정한 도(道)가 없어 마음이 매우 복잡하다."
하였다. 조현명이 《단종의궤(端宗儀軌)》를 열람하고 말하기를,
"경오년에 문종께서 즉위하였으나 공빈은 고거(考據)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지춘추(知春秋) 김시형(金始炯), 검열(檢閱) 심관(沈鑧)을 보내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속히 강화(江華)에 가서 역사를 상고하되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조사하여 상세히 알아 오라. 내가 바야흐로 조선(祖先)의 사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실록》을 상고하여 아뢰기 전에는 나는 건복(巾服)을 벗지 않고 앉아서 기다릴 것이다. 마땅히 속히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김종태(金宗台)를 집의로, 임명주(任命周)·이중조(李重祚)를 지평으로, 이규채(李奎采)를 헌납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갑술
입직 금군장(入直禁軍將) 조재언(趙載彦)을 불러 금군 가운데 부지런한 사람을 뽑아 말을 달려 강화에 가도록 하여, 밤중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상고할 《실록》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명하였다.
평안도에서 월경죄(越境罪)를 범한 삼례(參禮)·소업(小業) 등 두 여자를 경사(京師)로 보냈다. 두 여자는 모두 경흥(慶興)의 여종인데, 남의 유혹과 협박을 받아 같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홍기가(紅旗街)를 거쳐 등등기(登登磯)에 들어가 남해(南海) 섬 가운데서 14년을 살았다. 아들·딸을 낳아 기르다가 순병(巡兵)에게 잡혀 영고탑(寧古塔)을 경유하여 선창(船廠)으로 보내졌다가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자문(咨文)을 보내어 데리고 돌아온 것이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등등성(登登城)으로 근심하고 있었는데, 여자가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살았으므로 사정을 구문(究問)하고자 하여 해도(該道)에 명하여 형조(刑曹)로 압부(押付)하게 하였는데, 온 것을 〈보니〉 우둔하고 비루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임금이 형조의 여러 당상에게 명하여 해당 법률을 여러 모로 의논하도록 하였다. 참판(參判) 정형복(鄭亨復)이 말하기를,
"몇 년 전에 동래부(東萊府)의 여자가 몰래 왜관(倭館)으로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면해 주고 도배(島配)했는데, 대계(臺啓)가 쟁집(爭執)하기를 오래 하다가 그쳤습니다. 왜관은 월경죄를 범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또한 이와 같이 하였는데, 하물며 이 여자이겠습니까? 마땅히 법률에 의해 처리해야 할까 합니다."
하니, 판서(判書) 서명빈(徐命彬)·참의(參議)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죄수를 감싸 주는 도(道)는 마땅히 정법(情法)을 참구(參究)해야 합니다. 이 여자는 본래 겁협법(劫脅法)을 당한 것이니 비록 마땅히 죽여야 하지만, 인정상 용서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을 미루어 살려준다 하더라도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마는, 단지 변방의 금령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해이해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뒤에 가서 마침내 죽음을 감해 주어 도배하였다.
임금이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규채(李奎采)를 불러 지나갔던 곳의 농사의 형편과 백성들의 고통 및 수령(守令)의 잘 다스리고 잘 다스리지 못함을 물으니, 이규채가 지나갔던 곳의 군현(郡縣)들을 두루 열거하여 대답하였는데, 안성(安城)에 이르러 말하기를,
"군수(郡守) 구식(具侙)은 정치하는 것이 자못 선(善)하고, 도둑을 다스리는 것도 역시 현명한데, 자못 엄맹(嚴猛)을 숭상하므로 백성들이 간혹 원망합니다. 본 군의 시장은 도하(都下)의 시장보다 커서 물화(物貨)가 모이는 곳에 도둑떼가 모이니, 안성을 도둑 소굴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군수에 일찍이 곤수(閫帥)를 거친 사람으로 차송(差送)함은 그 도둑을 다스리려고 하였던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오로지 위맹(威猛)을 숭상하여 보민(保民)의 정치는 문득 제2의 의리로 삼았던 것인데, 역시 폐단의 단서입니다."
하였다. 이규채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9일 을해
임박(任璞)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0일 병자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왔다.
수찬 홍우한(洪羽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통청(通淸)이 외잡(猥雜)하여 경박하고 천망(賤妄)한 김조윤(金朝潤)과 어리석고 용렬한 이조망(李朝望) 같은 사람이 지헌(持憲)에 의망되는 데 이르렀으니, 대간(臺諫)을 가려서 뽑고 언로(言路)를 열겠다는 하교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두 사람은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고 전관(銓官)에게 마땅히 중추(重推)를 명하여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대신(臺臣)과 전관을 추고하는 일은 아울러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정복(正服)으로 밤을 새우신다고 하니 비록 추모(追慕)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나 날이 춥고 밤이 기니 손상의 절차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의 상소를 본 뒤 놀라고 의혹됨이 진정되지 않아서 비록 잠자리에 들려고 하나 할 수가 없다. 3백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선조(先朝) 곤위(壼位)의 유무에 전혀 어두우니 나의 마음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간택(揀擇)의 법규는 매우 간소하여 근래와는 같지 않았다.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애초에 봉해져 소훈(昭訓)이 되었고 품계(品階)가 올라가 승휘(承徽)가 되었다가 후에 곧 책빈(冊嬪)되었으니 이는 마황후(馬皇后)273) 의 덕이 여러 비 중에 으뜸으로 품계가 올라가 황후가 된 것과 바로 유사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유생의 상소에서 근거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근거할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최씨(崔氏)에게 장복(章服)을 내렸다는 단서 하나를 증거로 삼았다. 경이 지난번에 연행(燕行)할 때 ‘최(崔)’ 자를 잘못된 것으로 여겨 ‘권(權)’ 자로 바꿨다고 했으니 이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경은 어찌해서 그렇게 하였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왕홍서(王鴻緖)가 편찬한 역사를 보니, 세종께서 시호(諡號)를 하사한 것과 문묘(文廟)의 왕후 최씨라는 것과 인조(仁祖)께서 변무(卞誣)한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잘못 쓴 것이었습니다. 신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놀라 과연 바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실록》에 밝게 실린 뒤에야 결정할 수 있으니, 왕홍서의 역사는 믿을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정찬술(鄭纘述)이 장계(狀啓)하여 말하기를,
"마군(馬軍)에 내려가 장포(壯砲)가 된 자 및 전에 있던 보군(步軍)은 합이 모두 50초(哨)가 되는데, 초를 계산하여 제(除)해 보면 이미 총을 받은 자는 20초입니다. 신의 병영에서 총을 나누어 줄 것은 원군(元軍) 포수(砲手)가 1천 8백 명이고 아병(牙兵) 포수가 2백 40명으로 합하여 2천 40명이 되나, 군기소(軍器所)에 있는 총은 다만 1천 3백 47자루입니다. 포수에 비교해서 그 부족한 숫자가 6백 93자루가 됩니다. 형편상 장차 전례(前例)에 의거해 비국(備局)으로부터 하송(下送)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도는 평소 궁마(弓馬)로 일컬어집니다. 지금 이 보군으로 내려간 무리는 모두 사예(射藝)를 학습합니다. 병법(兵法)으로 논하면 살수(殺手)가 4초에 조총(鳥銃)이 1초이나 지금은 완전히 총수(銃手)로 되었으니, 전혀 아울러 갖추는 방도가 아닙니다. 보군으로 내려간 10초 중에 2초가 포수에 속하면 현존하는 총수를 마땅하게 배치할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 8초는 그 장기(長技)에 따라서 옛 법에 의해 사수(射手)가 되게 하고 그것을 이름하여 ‘보무학(步武學)’이라 한다면, 잔영(殘營)에 있어서는 약설(藥屑)을 더 내려보내는 비용이 없게 될 것이고 비국에 있어서는 조총을 내려보내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지금 이 군제의 변통은 이미 도신(道臣)에게서 나온 것이니,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헤아려 확정하고 논열(論列)하여 품처(稟處)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2월 21일 정축
임금이 연산(燕山)·광해(光海)의 묘(墓)의 무덤이 무너진 것을 관(官)으로 하여금 보수하도록 명하고, 묘군(墓軍)이 부실한 데에는 또한 보충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수묘군(守墓軍)을 배치하고 외손(外孫)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니, 열조(列朝)의 성덕(聖德)을 볼 수 있다. 그 성덕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 어찌 민멸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춘추관(春秋館) 당상과 낭청을 인견하니 비국 당상이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역사에서 상고한 등본(謄本)을 보건대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빈궁(嬪宮)에 있다가 승하(昇遐)한 뒤 그 해 비록 문씨(文氏)·권씨(權氏)를 뽑아 승휘(承徽)로 삼았으나 책빈(冊嬪)한 일은 없다. 병인년274) 소헌 왕후(昭憲王后)275) 의 국휼(國恤) 때에 다만 왕세자(王世子)·승휘 등의 복제(服制)는 있었으나 빈궁의 복제를 마련한 것은 없었으니, 빈위(嬪位)가 책봉(冊封)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임신년276) 문종(文宗)의 국휼 때에도 역시 다만 단묘(端廟) 및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3년 복제는 있으나 중궁전(中宮殿)의 3년 복제는 없다. 거기에 ‘명부(命婦)는 귀인(貴人)·소용(昭容)을 일컫는다.’라고 하였으니,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명부를 상세하게 썼는데 하물며 곤위(壼位)이겠는가? 이 역시 증명될 수 있다. 문종께서 잠저에 계실 때와 등극한 뒤에 공빈 최씨(恭嬪崔氏)라는 호가 모두 재록(載錄)된 것이 없으나 역시 한번 보고서 판단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있다.
경오년277) 고부(告訃)한 뒤에 세습(世襲)을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감(太監) 윤봉재(尹鳳齎)가 국왕과 왕비의 면복(冕服)을 받들고 왔다. 그때 내전(內殿)에 영접하는 예의 유무(有無)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예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이제 왕후가 이미 훙서(薨逝)한 것이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이는 곧 현덕 황후가 면복해서 황제(皇制) 가운데 권씨라고 일컬은 것이니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에 현덕 황후 성씨를 재록한 것은 이미 의심할 수가 없다.
임신년 7월 강맹경(姜孟卿) 등이 단묘(端廟)에게 아뢰기를, ‘내전(內殿)은 지극히 소중한데, 오랫동안 모후(母后)가 없으니 선조(先朝)의 귀인(貴人) 홍씨(洪氏)로써 내정(內政)을 총괄하게 하소서.’라고 청했으니, 이는 문묘(文廟)에게 곤위(壼位)가 없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될 수 있다. 계유년278) 12월 광묘(光廟)279) 께서 잠저에 계실 때 정인지(鄭麟趾) 등을 데리고 근정문(勤政門)에 서서 ‘위로 모후가 보호해 주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현비(賢妃)가 경계해 주는 도움이 없으니, 납비(納妃)하여 후사(後嗣)를 구하고 선왕의 혈통을 이어 만세(萬世)의 터를 여소서.’라고 청하였으니, 이는 문묘의 곤위(坤位)가 없다는 두 번째 증거이다. 다음 해 정부(政府)·6조(六曹)·집현전(集賢殿)의 2품 이상이 의논을 드려 현덕 왕후의 존호(尊號) 여섯 글자를 더했으니 문종 왕후는 다만 현덕 왕후만이 있었음이 환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10년 동안 빈위가 비었고 2년 동안 곤위가 없었던 것은 왕홍서의 사기(史紀) 가운데 성씨를 잘못 쓴 것이고, 전주(全州) 최씨의 족보 중에 공빈을 재록한 것은 견강부회해서 의심스러운데도 기록한 것이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명쾌하게 알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왕홍서가 잘못 기록했고 새로 간행한 《명사(明史)》가 믿을 만한 본(本)이 되는 것을 곧 판단할 수 있으며, 근정문에서 우리 광묘께서 종사(宗社)를 위하여 건청(建請)하였으니 단묘의 성덕이 이로 인하여 더욱 밝아지며 소자(小子)가 선조를 추모하는 작은 정성도 역시 이로 인하여 거의 펴질 수 있을 것이다.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다 듣고 알도록 하고, 호서(湖西) 유생의 소장은 이제 다시 논의할 것이 없으니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베껴 온 설화(說話) 이외에 또 들을 만한 것이 있는가?"
하니, 김시형(金始炯)이 대답하기를,
"병진년280) 연간에 현덕 왕후에게 태기(胎氣)가 있자 세종 대왕께서 이에 봉씨(奉氏)를 폐하고 권씨를 승휘로 삼아 빈궁에 들였는데, 단종을 탄생하고 다음날 승하하였습니다. 정사년281) 이후로 다시 책빈(冊嬪)한 일이 없으므로 마음에 매우 의아하여 약방(藥房)에서 문후(問候)한 것을 받들어 상고하니, 각전(各殿)에 모두 문후하였는데 유독 빈궁에 문후한 것이 없었고, 또 문묘께서 등극한 이후를 상고하여도 중궁의 문후가 없으며, 또 무진년282) 연간에 대신(大臣)이 자주 계빈(繼嬪)을 책립(冊立)하는 일을 가지고 영묘(英廟)에게 진청(陳請)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문묘께서 등극하신 뒤의 일로 말하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어 처음부터 논할 수가 없었으니, 이 두어 가지 일에서도 중곤(中壼)이 궐위(闕位)되었던 것의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씨(金氏)·봉씨(奉氏)도 모두 폐해졌고 현덕 왕후도 역시 나이가 젊어서 승하했으나, 영묘께서 책빈의 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원손(元孫)이 이미 탄생하여 국가의 근본이 이미 굳어졌으니, 다시 사속(嗣續)의 근심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12월 22일 무인
헌부(憲府) 【지평(持平) 임명주(任命周)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며칠 전의 천둥은 예전에는 드물었던 바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시어 언로를 크게 열고 10행의 사륜(絲綸)을 내린 것은 뭇 신하들을 감동시키기에 족합니다. 그러나 고요히 응지(應旨)의 말이 없으니 이는 망국의 징조입니다. 그 변이(變異)가 어찌 천재(天災)보다 심함이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말하지 않은 삼사(三司)로서 외지에 있으면서 미처 오지 못한 자는 묻지 말고, 그 이외는 한결같이 아울러 파직하소서.
추조(秋曹)·경조(京兆)에 좌이(佐貳)283) 를 설치하여 일에 따라 나누어 처리하는 것은 법의 뜻이 목적한 바가 있는 것인데, 지난번 대신(大臣)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무릇 여러 공사(公事)를 모두 수당(首堂)으로 하여금 처단토록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좌이는 문득 쓸모없는 관원이 되는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대신의 뜻은 대개 그 각각 친한 바를 따라 사사로움을 좇는 폐단이 없지나 않을까 염려한 것이지만, 이는 자못 목멜 것을 경계하여 먹는 것을 그만 두는 것입니다. 삼당(三堂)284) 이 나누어 처리하면 소송하는 자가 용이하게 스스로 강명(剛明)한 도(道)로 나아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오로지 장관(長官)에게 소속시켜서 혹시 그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장차 어디에 하소연하겠습니까? 그 폐단됨은 장차 나누어 처리하는 때보다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경조·추조의 장관이 총괄하여 결단하고 아당(亞堂)이 천단할 수 없도록 한 명령을 멈추소서.
근래 기강이 해이하여 백성이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일찍이 대신(大臣)·대신(臺臣)이 진달(陳達)한 것으로 인하여 특별히 전교(傳敎)를 내려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역에 복무하도록 하였으나, 강상(江上)의 백성은 강성(强盛)한 것을 믿고 서리와 부동하여 멈추고 행하지 않으니 여기에서 기강이 떨치지 못한 일단(一端)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을 어지럽힌 백성들은 엄히 징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강민(江民)으로 우두머리가 되어 작란(作亂)한 자와 서리로 부동한 자를 하나하나 적발하여 법률에 의거해 죄주소서.
지난번 삼복(三覆)하던 날에 삼사(三司)의 신하가 함께 들어와서 합사(合辭)의 논의로 마땅히 쟁집(爭執)하여야 할 것인데, 엄교(嚴敎)의 아래에서 두려워서 움추려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유신(儒臣)은 인용하는 데 마땅치 않은 혐의를 인용하고, 헌신(憲臣)은 말도 되지 않는 계사(啓辭)를 끄집어내며, 간신(諫臣)의 인혐은 또한 매우 모호하여 구차하게 미봉(彌縫)하다가 연계(連啓)하지 못하고 물러나니, 직기(直氣)가 사라져 없어짐에, 듣는 이가 모두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청컨대 그날 입시한 삼사를 한결같이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삼사의 합계는 곧 온 나라의 공의(公議)인데, 한 종류 사당(死黨)의 무리가 오히려 뉘우칠 줄은 알지 못하고서 규피(規避)를 능사로 삼으며, 이론을 세우는 것을 대절(大節)로 삼으니, 유건기(兪健基)·서지수(徐志修)의 정계(停啓)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 군부(君父)를 망각하고 흉역(凶逆)을 옹호한 죄를 이루 다 벌줄 수 있겠습니까? 전(前) 대사간 유건기와 전 응교 서지수를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분관(分館)의 법(法)은 인재를 조용(調用)하는 것이기 때문에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움을 따를 수 없는 것인데, 근래에는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고 공법(公法)이 점점 어긋나서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 저앙(低仰)을 임의대로 합니다. 갑자년285) 식년과(式年科)의 분관으로 말하면, 유주 남우(遺珠濫竽)286) 의 탄식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그 당시 상박사(上博士)와 장무관(掌務官)은 아울러 파직을 명하소서.
금년 우역(牛疫)이 극성을 부려 농우(農牛)가 열에 여덟·아홉이 없어졌으니 내년 경작이 진실로 염려됩니다. 그러나 매번 세시(歲時)를 당하여 여러 날 금령(禁令)이 느슨해지면 도살(屠殺)이 수도 없습니다. 올해 만약 다시 이와 같이 한다면 백성들은 장차 농사를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일체 금단(禁斷)토록 하소서.
수원(水原)의 쌍부창(雙阜倉)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승지(勝地)로 이름났기 때문에 종전에 권귀(權貴)의 집에서 군침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으나, 국초부터 창고를 설치한 땅을 감히 옮기지 못한 것은 진실로 국법을 두려워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이조 참판 김상로(金尙魯)가 스스로 권세를 믿고 감히 점유할 계책을 내어 은밀하게 지방 수령에게 부탁하고 이익으로 시골 백성을 꼬드겨서 민원(民願)을 가탁(假托)하여 억지로 하소연하도록 하였습니다. 60여 칸의 창해(倉廨)를 하루 아침에 허물어 버리고 이어서 입장(入葬)하니, 무릇 몇백 년 동안 설치된 창사(倉舍)가 지금까지 폐해가 없이 거듭 새롭게 하였다고 귀로 들어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김상로가 산을 점유할 즈음에야 민폐가 된단 말입니까? 관의 명령이 이미 엄하고 부민(富民)이 협조하여 턱으로 지시하고 눈으로 시킴에 위풍에 쏠려 옮겨졌으니, 경영함이 교밀(巧密)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낭자하니 해괴하여 탄식하고 분하여 꾸짖는 이가 없지 않으나 대세에 눌려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 사람도 감히 위에 알리는 자가 없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사심을 부려 법을 능멸하고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는 죄는 진실로 논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수재(守宰)가 되어 가지고 그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고 공기(公基)를 가벼이 허락하기를 마치 사물(私物)을 빌리듯이 하는 자가 또한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조 참판 김상로와 그 지방관을 아울러 나문(拿問)하여 핵처(覈處)하도록 명하소서.
천하의 이치는 하나일 따름입니다. 천지의 기운으로 말하면 음과 양인데 그것을 통솔하는 것은 태극(太極)이고, 천하의 일로 말하면 옳고 그름이 있는데 그것을 주재하는 것은 황극(皇極)입니다. 전하께서 지성으로 탕평(蕩平)하게 한 것이 20년을 하루같이 하셨으니, 탕평이란 황왕(皇王)이 건극(建極)하는 정치입니다. 진실로 그 도를 얻으면 어찌 효험이 없겠습니까마는, 명절(名節)이 날로 더욱 떨어지고 조정의 기상이 날로 더욱 무너져서 일분의 효험도 말할 것이 없으니, 실로 시행함이 그 도를 얻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난날 홍서(洪曙)·남덕로(南德老)가 그 능히 뭇사람들이 떠드는 가운데에서 초연히 스스로 벗어나 오랫동안 굽혀져 펴지 못했던 논의로 대항하였으니, 만약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두 신하가 한 것처럼 능히 하게 한다면 옳고 그름이 절로 밝혀지고 의리가 하나로 될 수 있을 것이니, 탕평의 다스림이 날로 성공되리라 믿을 수 있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선(善)을 따를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인데도 도리어 최절·견책하고 사기(辭氣)가 박절하여 조금도 되돌아 보지 않으셨습니다. 전하께서 평소에 매번 뭇 신하들에게 당심(黨心)을 경계시키면서도 또 본색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셨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장차 나라 절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남은 논의를 굳게 지켜서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도록 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이치이겠습니까?
훈유(薰蕕)287) ·빙탄(氷炭)288) 이 한 조정에 섞여 있는데도 양쪽이 옳고 쌍방이 그르다고 양쪽을 대립해 거론하여 눈앞의 미봉책으로 삼으시니, 이로써 탕평의 다스림을 구한다는 것은 바로 맹자께서 말한 바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더라도 뒤에 반드시 재앙이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 사람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 지극한 데로 모이고 지극한 데로 돌아가서 흔연히 하나가 되어 다시 동서 남북으로 함이 없는 상태에서 참으로 탕탕 평평의 아름다움을 보게끔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그 두 신하가 이미 견서(甄敍)289) 되었는데도 방치한 채 논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으니 청컨대 홍서·남덕로를 삭직할 때 내렸던 전교를 거두소서.
임상원(林象元)의 ‘의리(義理)’ 두 글자는 곧 그 무리들이 서로 전하는 같은 맥락의 흉론(凶論)인데, 뱃속에 꽉 버티고 있던 것이 부딪히는 곳마다 드러내다 보니 지척의 연석(筵席)에서 발설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비록 아직도 귓속에 있다는 하교로 관찰해 보더라도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니, 누군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전 승지 김상적(金尙迪)은 가리고 덮은 계책을 빚어내어 글자의 음이 서로 비슷하여 어렴풋이 의심되고 어지러웠으므로 성상께서 듣는 것이 밝은 데도 살피지 못한 것처럼 함이 있으니 당을 비호하고 무엄하여 교묘하게 농락하고 허물을 꾸며댄 죄는 자못 임상원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근밀한 곳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전 승지 김상적을 사판에서 삭제해 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를 불러 비답을 쓰도록하고, 임명주(任命周)를 입시(入侍)하여 비답을 듣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부리는 일을 물으니, 임명주가 말하기를,
"창고 밑에 사는 사람은 신역(身役)이 있으므로 짐을 질 수 없었고 10리 밖에 살고 있는 사람이 와서 짐을 지게 되니 백성의 원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하고, 또 분관(分館)의 일을 읽는데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유주(遺珠)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니, 임명주가 말하기를,
"이익보(李益普)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익보가 누구인가?"
하니, 임명주가 말하기를,
"이익보는 이정휘(李梃徽)의 종질(從姪)입니다. 그의 형이 이정휘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이로써 막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휘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임명주가 말하기를,
"모르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이인좌(李麟佐)가 대원수(大元帥)라고 칭하고 첩보(牒報)를 도와준 이정휘이다. 네가 어찌 모르느냐?"
하니, 임명주가 말하기를,
"신이 그때에 나이가 어려서 그 본래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이정휘를 모르겠는가? 그런데 너는 감히 ‘모른다.’고 하느냐?"
하고, 김상로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지방관이 누구인가?"
하니, 임명주가 말하기를,
"정휘량(鄭翬良)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매우 교밀(巧密)하다. 정휘량이라고 일컫지 않고 다만 지방관이라고 하니 너는 누구를 속이려 하는가?"
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고 불언삼사의 일은 윤허하였고, 추조·경조가 총괄해 결정하는 일은 장관으로 하여금 총괄해서 결정하는 것이 대체로 그 직분을 금하는 것이 아니니 결단코 정침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람을 부리는 일에 서로 다투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니니 치우치게 그 형률을 시행할 수 없으므로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품처토록 하고 그 다른 뱃속에 가득한 당심(黨心)으로 몰래 인용하여 붙좇은 것은 이 대부분 불경하여 예에 따라 비답을 내릴 수가 없으니, 그 계사(啓辭)는 이광의(李匡誼)의 예에 의거해 돌려 주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의리가 사라진 것이 이와 같으니, 만약 엄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기강이 있는 바 난역(亂逆)을 징토(懲討)함에 엄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임명주를 마땅히 친문(親問)하여 방헌(邦憲)을 명쾌하게 시행하되 왕부(王府)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뒤에 승지 엄우(嚴瑀)가 대계(臺啓)를 되돌려 주는 것이 뒷날의 폐단과 관계됨이 있다고 아뢰자 임금이 되돌려 주게 한 부분을 멈추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곧 삼가 듣건대 임명주(任命周)를 친국(親鞫)하라는 명이 있다 하니, 어찌 전하께서는 전날에 통유(洞諭)·명계(銘戒)한 뜻을 생각하지 못하시고 또 이러한 비상(非常)한 일이 있습니까? 신은 이에 경악하고 탄식해 혀를 차며 다만 가만히 있고 싶습니다. 임명주의 계(啓) 가운데 한 가지 일은 또한 신이 문을 닫고 두려워할 단서가 됩니다. 신은 마땅히 함께 논하지 않았으나 성교(聖敎)에서 난역(亂逆)으로 지목하시는 것은 크게 가까이 갖다붙인 일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대신(臺臣)을 국문함을 전후에 몇 번 만나니 전하께서 역시 일찍이 크게 깨닫고 현저하게 정법(定法)하시고 《속전(續典)》으로 간행하여 다시는 반역이 아니면 설국(設鞫)하지 말하는 것으로 정녕히 이연(貽燕)한 교훈은 금석(金石)처럼 굳고 사시(四時)처럼 미덥게 하였는데 지금 곧 한번 격뇌(激惱)됨으로 인하여 앞의 가르침을 갑자기 잊으시니, 이것이 어찌 전하에게 과감하게 고치시는데 성스러움을 바라던 바이겠습니다. 빨리 친국의 하교를 그치시어 뭇 신하가 바라는 바에 부응하소서."
하고, 영부사(領府事) 김흥경(金興慶)도 역시 차자를 올려 그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아울러 비답을 내리고 개납(開納)하였다.
12월 23일 기묘
임금이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를 불러 보았다. 대신 및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이 청대(請對)하고 함께 들어 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생각하니, 임명주가 다만 이정휘를 용호(容護)한 것이 아니라 이익보를 구제하고자 하여 스스로 그것이 이정휘를 용호함이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이것은 한갖 호역(護逆)한 것과는 다르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정휘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비록 형상할 수 없으나 다만 이정휘를 구제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이익보를 구제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친국의 명은 비록 환침(還寢)했으나 막중한 데에 관계되니,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속인 것이며 역적을 호도한 것이다. 죄인 임명주를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하되 배도 압거(倍道押去)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김상로(金尙魯)의 일은 사람을 암매(黯昧)한 데에 버려둘 수 없으니 청컨대 조사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금 이정휘의 5촌 조카이므로 이러한 처분이 있었으니 검의(檢擬)할 때에 조정에서 친조카라고 말한 전관(銓官)에게 마땅히 책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정언유(鄭彦儒)가 ‘불언삼사(不言三司)’로써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26일 임오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 명하고 외방(外方)의 등문(登聞)되지 않은 자는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그로 하여금 일체 거행하게 하였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나의 백성이 굶주림 가운데 거듭 해진 옷으로 이런 엄동 설한을 만나니 더더욱 어찌 살 수 있겠는가? 한밤중에 일어나 생각하고 난간에 나와 하유(下諭)하노니, 아! 도신·수령은 나의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동포(同胞)를 보호하듯 하되 마음써서 구제하고 내가 한밤중에 당부하는 효유를 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이 사문(査問)을 진달한 것은 국체(國體)에 지나지 않으니 그 동생으로 인하여 승강이 하는 것은 잘못이다.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은 본직을 겸대(兼帶)하고 있으니 모두 긴요한 임무이다. 문을 열 때를 기다려 다시 패초(牌招)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
하니, 승지 정이검(鄭履儉)이 말하기를,
"정우량에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거든 하물며 김재로(金在魯)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같이 하교하면 수규(首揆)도 역시 포괄된다."
하였다.
12월 28일 갑신
약방 제조(藥房提調)를 청한당(淸閑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며칠 전 신을 신다가 발가락에 상처가 났다. 동조(東朝)를 배알하는 데 걷기가 매우 어려워서 중도에 그쳤으니, 당(堂)에 앉아서 경 등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나은 듯하니, 입진(入診)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악정자(樂正子)의 말290) 을 회상하니 나도 모르게 감화가 일어난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일전의 대계(臺啓) 가운데 조어(措語)가 끝내 안연(晏然)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권세의 귀중함이니, 대세(大勢)에 억압된 것이란 등의 말은 오로지 저 한 사람의 몸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거(居)함에 항상 두려워서 떨었거늘, 하물며 지금 사람이 경발(驚發)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신의 직명(職名)을 해면시키지 않으면 진실로 이러한 제목(題目)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이는 질통(疾痛)의 부르짖음으로 인하여 대략 긍외(兢畏)의 심정을 붙이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올해 서울 5부의 원호(元戶)가 3만 4천 1백 53이고 인구는 18만 2천 5백 84명 【남자 8만 9천 4백 53명 여자 9만 3천 1백 31명이다.】 이었다. 8도의 원호는 1백 72만 5천 5백 38이고, 인구는 7백 34만 3백 18명 【남자 3백 53만 9천 1백 7명, 여자 3백 80만 1천 2백 11명이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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