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2월

싸라리리 2025. 9. 30. 15:41
반응형

2월 2일 병진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또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2월 3일 정사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행행하였는데,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대가(大駕)가 출궁(出宮)할 때 왕세자가 지송(祗送)하였다.

 

좌부승지 이종적(李宗迪)을 보내어 대왕 대비전에 문안하였다.

 

왕세자가 궁관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임금이 이날부터 창덕궁(昌德宮)에 임어하였는데, 궁장(宮墻) 밖 각영(各營)의 입직하는 군병과 매일 순라하는 등의 일은 시어소(時御所)의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영정을 봉안하고 이어 작헌례를 행하였으며, 화사(畵師)에게 명하여 초본(草本)을 내어 놓도록 하였다. 저녁이 되자 임금이 전문(殿門) 밖으로 나아가 도청(都廳)029)  에 명하여 전문의 자물쇠를 내리고 서명한 신하가 근봉(謹封)하게 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서명하고 물러갔다. 이날부터 항상 이렇게 하였다.

 

2월 4일 무오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에게 자물쇠를 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봉심(奉審)을 마치고 나자, 제조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신에게 말하기를, ‘조영석(趙榮祏)의 그림은 곧 당대의 묘필(妙筆)이다. 일찍이 그의 스승 이희조(李喜朝)의 화상(畵像)을 이미 작고한 뒤에 그렸는데도 황연(怳然)히 생기가 돌았는데, 이제 이 영정 1본을 조영석에게 집필(執筆)하게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석이 경에게 익히 보였다. 나 또한 조영석이 그의 형의 모습을 그린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과연 실물과 너무도 흡사했었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그대가 붓을 잡고 모사하겠는가?"
하니, 조영석이 대답하기를,
"이미 집필하지 말 것을 허락한 성교(聖敎)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날마다 감동(監董)하면서 식견이 닿는 데까지는 감히 극진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중신(重臣)이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이런 하교가 있으시니 신은 깜짝 놀라 당황하여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비록 하찮은 말단의 천품(賤品)이기는 하지만,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효를 바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머리에서부터 발뒤꿈치까지 가루가 되더라고 의리에 있어 사양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붓을 들고 모사한 뒤에야 비로소 신하의 분의를 극진히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대저 기예(技藝)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士類)의 반열에 끼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이 용렬하고 비루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어찌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각기 마땅한 것이 있는 것으로 도화서(圖畵署)를 설치한 것은 장차 이런 등등의 일에 쓰기 위한 것이니, 하찮은 신에게 집필하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이 잘못되었다."
하였다. 우승지 이성중(李成中)이 조영석이 외람스럽다는 것으로 중추(重推)할 것을 청하였으나, 추문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경당(寶慶堂)은 곧 내가 탄생한 당(堂)이다. 나를 낳아서 애써 길러 준 은혜를 받은 것이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내가 이 당에서 재계하면서 임어하셨던 전(殿)에서 영정을 배시(陪侍)하게 되니 슬픈 감회가 한층 새롭다."
하였다.

 

2월 5일 기미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봉심하고 나서 도감의 당상과 낭청을 입시하게 하여 선찬(宣饌)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는 바로 동조(東朝)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하니,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화사(畵師)들에게 나누어 먹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하였다.

 

왕세자가 궁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겸하여 진현(進見)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산당(山堂)에서 글을 읽을 적에 집에서 온 서신에 하나의 ‘편안하다.[安]’는 글자를 보고서는 그 서신을 물에 던져 버렸다. 자신의 한 몸을 위한 공부도 오히려 이렇게 하는데 더구나 소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 내가 자성(慈聖)을 생각하는 마음이 네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은데, 지금은 간절한 마음이 단지 모사하는 데에만 있으니,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잘 모사한다면 자전(慈殿)의 마음이 의당 기뻐하실 것이니, 이를 어찌 정성(定省)에 견줄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것은 네가 어리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나를 대신해서 자성을 받드는 것을 어찌 한때 와서 문안하는 것에 견줄 수 있겠는가?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위로는 모사를 위한 것이고 아래로는 군민(軍民)을 생각한 것으로 그 기간이 약간의 날짜에 불과하니, 모쪼록 정을 억누르고 나를 대신하여 자성을 받들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이세진(李世璡)을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이세진의 자급(資級)은 경재(卿宰)의 반열이었지만, 실직(實職)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기사(耆社)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연신(筵臣)이 우러러 아뢴 것이었다.

 

2월 8일 임술

달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달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고, 관 위에는 배(背)가 있었다.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었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선찬(宣饌)하고 하교하기를,
"이는 동조(東朝)께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하였다.

 

2월 9일 계해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2월 13일 정묘

어진(御眞)의 개본(改本)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봉심을 마치고 나서 시임·원임 대신과 도감의 당상과 낭청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여 함께 우러러 보게 하였다. 이어 선정전에 봉안하고 나서 전사(殿司)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의 개폐를 관장하고 입직한 도감 당상이 서명하게 하였다. 정사일(丁巳日)에서부터 임금이 연일 재전(齋殿)에 임어하여 날마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직접 공역(工役)을 감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임금이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몇 년이 지난 뒤 어진이 다시 이 전(殿)에 임어하게 되니 마치 평일에 아침저녁으로 배봉(陪奉)하는 것만 같았는데, 이미 10일이 지나서 이제 진전(眞殿)으로 환봉(還奉)하게 되었으니, 이 마음이 슬프고도 서운한 것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오열하느라 말을 이루지 못하니, 연신(筵臣)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먼저 화사(畵師) 이하에게 상전(常典)을 내리고, 이어 환궁하였는데, 이때가 이미 2고(鼓)였다. 왕세자가 지영(祗迎)하였다.

 

정원에서 무지개의 변(變) 때문에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킬 즈음이어서 마음이 절로 두려워지는데, 이처럼 면계(勉戒)하니 더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2월 14일 무진

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참의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지평으로, 황재(黃梓)를 부제학으로, 김상철(金尙喆)·한광회(韓光會)를 교리로, 이게(李垍)·이응협(李應協)을 수찬으로, 홍우한(洪羽漢)을 부수찬으로, 윤광소(尹光紹)를 교리로, 서효수(徐孝修)를 사서로, 김상성(金尙星)을 동지의금부사로, 원중회(元重會)를 황해 수사로 삼았다.

 

충청도 유학(幼學) 윤득형(尹得亨)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이 선정을 향모(嚮慕)하는 마음이 있다면 물러가 학업을 연마하라."
하였다.

 

장령 김주(金霔)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연덕(李延德)은 나이들어 노쇠하고 귀먹고 어리석어 백성들이 그로 인한 폐단을 받고 있으며, 여주 목사 조동하(趙東夏)는 병을 칭탁하고 아무(衙務)를 폐기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하며, 장련 현감(長連縣監) 김익신(金翼臣)은 관원으로서 불법한 짓을 저질렀고 뻔뻔스레 교자(轎子)를 탔으니, 아울러 파척(罷斥)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에 대한 일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이다. 김익신에 대한 일은 풍문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예학(睿學)이 날로 진취될 때를 당하여 궁관이 잠깐 입직했다가 곧이어 나가기 때문에, 실지로 강마(講磨)하고 보도(輔導)하는 유익함이 없습니다. 일찍이 남유용(南有容)·서지수(徐志修)를 구임(久任)시키자고 계청(啓請)하였는데, 남유용은 지금 자급을 승진시키려 하고 있고, 서지수는 일을 당하여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문학이 있는 선비를 5, 6인을 더 뽑아서 교대로 입직하여 진강(進講)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 6인이 누구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빈객(賓客) 정우량(鄭羽良)·신만(申晩)과 상의하였는데 정실(鄭實)·윤광소(尹光紹)·이이장(李彛章)·황경원(黃景源)·이형만(李衡萬)·구윤명(具允明)이 모두 문학이 있으니, 이 6인을 모두 구임(久任)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에게 강학할 적에 강관이 약생(略栍)을 자주 내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훈도하는 방법은 점차로 젖어들어가게 하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이렇게 한 뒤에야 공효를 책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제 동궁께서 직접 성경설(誠敬說)을 지어 궁료들에게 보이자 궁료들이 친필을 얻기 위해 동궁의 앞에서 서로 다투었으므로 동궁께서 또 한 구(句)의 시를 써서 내렸다고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흠탄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경설을 들여오라고 명하여 조현명에게 독주(讀奏)하게 하였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명(命) 자의 뜻이 매우 좋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판의금부사 정우량(鄭羽良), 약방 제조 서명빈(徐命彬)에게 아울러 체직을 허락하고 나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부사로, 이기진(李箕鎭)을 약방 제조로 삼았다.

 

2월 15일 기사

달이 헌원(軒轅)의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2월 18일 임신

수찬 홍우한(洪羽漢)이 다시 소장을 올려 서종급(徐宗伋)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전 이조 판서가 여러 번 전권(銓權)을 잡고 있었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평하였으니 무슨 놀랄 만한 일이 있겠는가? 그대의 처음 소장을 마음 속으로 공평하게 여겼었는데, 이제 두 번째의 소장을 보니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성(孔聖)이 재여(宰予)에게 한 말030)  을 다시 그대에게 외어 준다."
하였다.

 

교리 김상철(金尙喆)이 소장을 진달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어버이의 병 때문에 소장을 진달하고 교외(郊外)로 나가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2월 20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선혜청 당상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총융청(摠戎廳)의 옛터에 바야흐로 선혜청을 새로 건조하고 있는데 재목은 가까스로 준비하였으나 초석은 준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도성을 개축할 때 남은 돌이 성밖에 많이 있으니,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돌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토목 공사를 바야흐로 일으키고 있는 이것을 삼가기 때문이다. 탕춘대(蕩春臺)의 역사는 진실로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지만, 선혜청에 이르러서는 창사(倉舍)가 많다고 들었으니 가을을 기다려서 하라."
하였다.

 

2월 21일 을해

달이 방성(房星)의 제삼성(第三星)을 범하였으며,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감쌌다.

 

2월 22일 병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달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고, 어제시 6수를 써서 내렸다. 그 가운데 하나에 이르기를,
"모사하고 중수하는 일이 끝났으니
진전에 봉안하고 뜰에서 전배(展拜)하네.
오늘 면복을 입고 예를 행한 뒤
다른 날 이 옷 입고 탑상(榻狀) 동쪽에 모시리."
하였다.

 

2월 24일 무인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자가 수가(隨駕)하였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영정의 장축(粧軸)을 봉심하였다. 왕세자는 환궁하였고, 임금은 재전(齋殿)에 나아가 머물렀다.

 

2월 25일 기묘

임금이 먼저 선정전에서 동가 고유제(動駕告由祭)를 행하고 영정 1본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였다. 또 영정 1본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 이어 영희전(永禧殿)으로 따라 나아가 태조(太祖)·세조(世祖)·원종(元宗)의 어용(御容)을 제일실·제이실·제삼실에 도로 봉안하였으며, 숙묘(肅廟)의 어용은 제사실에 봉안하고 작현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이어서 환궁하였다. 양 도감의 당상·낭청과 신련을 시위한 승지·사관을 입사하게 하고, 당하(堂下)에서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또 선온(宣醞)하였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임금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삼가 영정을 받듦이여
전중에 편안히 모셨도다.
회가(回駕)하여 경하(慶賀)함이여
우리 동방에 만세토록 전해가리.
어떻게 계술하여 갈 것인가?
백성과 함께 즐겨야 하느니."
하고, 어필(御筆)로 써서 내린 다음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즉석에서 뒤이어 지어 올리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취하여 어필을 서로 잡으려 다투었다. 임금이 제조 정우량(鄭羽良)에게 내리면서 말하기를,
"경이 중수 상량문(重修上樑文)을 지었으니, 특별히 윤필(潤筆)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이를 증정한다."
하니, 정우량이 일어나 사례하였다.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오늘의 응제(應製)에는 신이 제일 먼저 올렸으니 마땅히 신이 하사받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병조 판서가 상량문을 지은 것이 또한 경보다 먼저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노래하기를,
"일락(逸樂)이라고 말하지 말라.
실은 추모하기 때문이로다.
지금의 즐거움이 없으면,
어떻게 후세에 전하겠는가?
수성에 대해 문의함이여
우러러 창업을 생각하도다
오십 오세가 됨이여
한 마음으로 연못가에 임한 것 같네.
경계하고 또 경계함이여
너무 지나치게 즐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네."
하고, 경외(京外)의 가장 오래된 유재(遺在)031)                  와 가장 오래된 포흠(逋欠)을 견면(蠲免)하도록 명하였다. 금오와 추조의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하였다.

 

환궁할 때 사전(辭殿)하는 예의(禮儀)는 이러하다. 그날 영정에 채색(彩色)을 입히고 배접(褙接)한 뒤 전하가 안으로 들어간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전하의 사전례(辭殿禮)의 판위(版位)를 선정전(宣政殿) 정도(庭道)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하고, 소차(小次)는 동쪽 계단 아래에 설치한다. 옛 영정은 안에서 내다가 도로 진전(眞殿)에 봉안한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전하는 도로 나아가 소차로 들어가는데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며, 산선(繖扇)·시위(侍衛)는 돈례문(敦禮門) 밖에 벌려 선다. 환궁하기 전 사전례를 행할 때가 이르게 되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청하면, 전하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나아온다. 좌통례와 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사전례의 판위에 이르러 서쪽을 향하여 서면 좌통례가 꿇어않아 몸을 굽혀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平身)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몸을 굽혀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한다. 【찬의(贊儀)도 또한 백관(百官)은 참여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사전례를 마친 다음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전하가 환궁할 때에도 의주(儀註)대로 한다. 【환궁의(還宮儀)에 기재되어 있다.】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80면
【분류】왕실-경연(經筵)

 

영정의 장축(粧軸)에 표제(標題)한 뒤 첨배(瞻拜)하는 의주(儀註)는 이러하다. 하루 전에 액정서에서 전하의 소차(小次)를 선정전 동쪽 계단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게 설치한다. 왕세자의 소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한다. 또 전하의 판위(版位)를 전정(殿庭)의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이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양 도감(都監)의 당상(堂上)과 종친(宗親)·의빈(儀賓)·문무(文武) 정2품 이상의 배위(拜位)를 선정문(宣政門) 밖에 설치한다.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며, 모두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하는데 입위(立位)를 선정전 전정(殿庭) 길 서쪽에다 북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또 외위(外位)는 연영문(延英門) 밖에 설치하는데 또한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영정을 장축할 때에 이르러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아오면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 동협(東夾)을 거쳐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전내(殿內)로 들어간다. 【통례는 뜰 아래에 멈춘다.】  승지 【예방(禮房).】 이다. 사관과 도감 당상 및 도청(都廳)은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입시(入侍)한다. 영정의 장축을 끝내고 표제(標題)의 첩부(貼付)를 마치면 대축(大祝)이 흑단령을 갖추고 영정을 펴서 받들어 신탑(神榻) 위에 봉안하며 전사(殿司)는 흑단령을 갖추고 선개(扇盖)와 상탁(床卓)을 받들고 들어와 전내(殿內)에 설치한 다음 좌우(左右)로 물러가 서쪽 계단 아래에 선다. 도감 당상 이하는 외위(外位)로 나아간다.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전정(殿庭)의 소차로 들어가고, 인의(引儀)가 양 도감 당상과 종친·의빈·문무관 정2품 이상을 나누어 인도하여 흑단령으로 위차에 나아가며,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들어가 위차로 나아간다.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소차에서 나아온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판위(版位)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혀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平身)할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몸을 굽혀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한다. 왕세자도 몸을 굽혀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며, 양 도감 당상과 종친·의빈·문무관 정2품 이상도 같다. 【찬의(贊儀)가 또한 창한다.】  끝마치고 나면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는데 왕세자도 전하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승지(承旨)·사관(史官)과 궁관(宮官)·내시(內侍)·도감 당상 각 1원(員)이 모시고 들어간다. 【통례와 상례는 뜰아래에 멈춘다.】  봉심(奉審)을 끝내면 전하는 그대로 전내(殿內)의 동쪽 가까이에서 서쪽을 향하여 서고 왕세자는 뒤따라 서쪽을 향하여 서며, 인의가 양 도감 당상과 종친·의빈·문무관 정2품 이상을 나누어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서협(西夾)을 거쳐 전(殿)의 서쪽 뜰에 있는 이위(異位)로 나아가 겹줄로 북쪽을 향하여 선다. 인의가 양 도감 당상과 종친·의빈·문무관 정2품 이상 2원씩을 인도하여 서쪽 계단을 거쳐 전(殿)으로 올라가 차례로 봉심한다. 【앞 사람이 내려오기를 기다린 뒤에 올라간다.】  끝마치고 물러 나오면 전하는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창덕궁(昌德宮)의 재전(齋殿)에 머물고, 왕세자는 당일 먼저 환궁하는데, 의식대로 한다.

 

2월 25일 기묘

선정전(宣政殿)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안(移安)할 때 전하가 수가(隨駕)하여 출궁(出宮)·환궁(還宮)하는 의식은 이러하다. 【선정전 망전례(望殿禮)와 봉심(奉審) 및 영희전 망전례와 봉심에 대한 의주(儀註)도 아울러 붙인다.】  기일에 앞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선정전 동쪽 뜰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소차(小次)를 설치한다. 왕세자의 위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망전례(望殿禮) 위차는 전정(殿庭)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운 데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선정문 밖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고, 모두 매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전하의 소차를 영희전 대문 안에 설치하고, 망전례의 위차는 재전(齋殿) 정문 안에다 동쪽에 가깝게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재전의 문밖에 설치하는데, 동서(東西)로 나누어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영정을 임시로 봉안할 대차(大次)를 영희전 신문(神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악차(幄次)는 대차 안에 설치한다. 【신탑(神榻)을 설치한다.】  전하의 입위(立位)는 대차 앞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는 위차는 흥화문(興化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초엄(初嚴)을 치면 병조에서 제위(諸衛)를 정돈하여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의주(儀註)대로 진설하며, 장악원(掌樂院)에서 경현당(景賢堂) 뜰 남쪽 가까이에 북쪽을 향하여 헌현(軒懸)한다. 【출궁(出宮)할 때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으며, 환궁(還宮)할 때는 음악을 연주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방(朝房)에 모여서 각기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숭현문(崇賢門) 밖에다 대고 여(輿)를 합문(閤門) 밖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왕세자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 밖으로 나아가 위차로 들어가면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기 해당되는 옷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기다린다. 좌통례가 합문 밖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이 되었음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內外)의 문을 열며 좌통례가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가며 산선(산扇)·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 【연(輦)에 타기를 기다려 보(寶)를 말에다 싣는다.】  어가(御駕)가 숭현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 【고취(鼓吹)는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찬의(贊儀) 2인이 통례의 앞에 있는데,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보통의 의례와 같다. 어가가 흥화문 밖에 이르면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고 이어 연(輦)을 타고 어가를 따른다. 어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上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할 것을 계청하고 뒤이어 시신들에게 말을 타라고 외친다. 찬의가 전창(傳唱)하여 시신들이 모두 말을 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가 움직이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몸을 굽혀 지영(祗迎)하고, 왕세자가 이를 적에도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며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는 시신의 하마소(下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할 것을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들어간다. 어가가 숙장문(肅章門)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선정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 【시신은 이에 물러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가면 【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협(東夾)을 경유하는데, 이 뒤도 이와 같다.】  산선과 시위는 선정문 밖에 정지한다. 왕세자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서협(西夾)을 거쳐 들어가는데, 연영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 【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서협(西夾)을 경유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할 것을 계청하면, 병조에서 전교(傳敎)를 받들어 의장(儀仗)을 푼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는데, 그대로 흑단령을 갖추고 선정문 밖 위차로 들어간다.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오면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망전례(望殿禮)의 위차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할 것을 아뢰면, 전하가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하고, 왕세자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 【찬의도 같다.】  끝나고 나면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온다.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왕세자도 따라 들어가는데, 영정을 봉심할 때에는 승지·사관·궁관과 도감 당상 각 1원(員)이 시입(侍入)한다. 【통례와 상례는 계단 아래에 정지한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도 따라 나와서 소차로 들어간다. 영정을 장축(粧軸)할 때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승지·사관과 도감의 당상(堂上)·도청(都廳)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시입(侍入)하는데, 장축을 봉심하고 표제(標題)를 첩부(貼付)하고서 끝낸다. 첨배(瞻拜)할 때에는 도감 당상과 종친·의빈·문무관 정2품 이상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선정문 밖의 위차로 들어가며 전하와 왕세자도 이어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전정(殿庭)의 판위(版位)로 나아가는데, 의주(儀註)대로 행례(行禮)한다. 【첨배의(瞻拜儀)에 기재되어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면 전하는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그날로 환궁하는데, 의주대로 한다. 【왕세자 환궁의에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이 먼저 위차로 나아가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로 들어가 의주대로 행례(行禮)한다.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영정 1본을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한 뒤에 전하가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선정전의 영정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에는 초엄(初嚴)이 치면 병조에서 장위(仗衛)·노부(鹵簿)를 진선문(進善門) 밖에 진설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진선문 밖에다 대고 여(輿)를 인정전(仁政殿) 동쪽 뜰 아래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각기 조복(朝服)을 입고, 【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이하는 흑단령을 입는다.】  돈화문 밖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가며,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도 함께 인화문(仁和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는데,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의 문을 여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을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그 규를 잡는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대축(大祝)이 영정궤(影幀櫃)를 신여(神輿)에 봉안하고서 인화문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걸어서 신여를 따라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 이르러 대축이 영정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 【고취(鼓吹)를 울린다.】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인정전 동쪽 뜰 밑에 있는 승여소(乘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圭)를 놓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그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타며, 인정문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진선문 동협 밖 승련소(乘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고 산선(繖扇)·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대가(大駕)가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나아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은 신련(神輦)이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하고, 대가가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한 다음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대가가 영희전(永禧殿) 대문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에서 내려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동쪽 편문(偏門)을 거쳐 들어가 【먼저 들어간 향관(享官)이 대문 안 길 왼쪽에 서서 몸을 굽히고 지영(祗迎)하는 것을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하며, 노부(鹵簿)는 대문 밖에 정지하게 한다.】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릴 것을 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며 전하가 규를 잡는다.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신련(神輦)을 따라 신문(神門) 밖에 이르러 영정궤(影幀櫃)를 대차(大次) 안에 임시 봉안한다. 【신탑(神榻) 위이다.】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소차 앞에 이르러 좌통례가 규(圭)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는데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소차로 들어가는데, 산선·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입는다.】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소차에서 나오면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재실(齋室)의 정문을 거쳐 망전례(望殿禮)의 위차로 들어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혀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平身)할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몸을 굽혀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 【찬의가 또한 외친다.】  망전례를 마치고 나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신전(新殿)을 봉심할 것을 계청한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재전(齋殿)의 문을 경유하여 나와서 신문(神門)의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정전(正殿)으로 들어간다. 봉심할 때에는 승지·사관과 중수 도감(重修都監)의 당상이 시입(侍入)한다. 【통례는 문밖에 정지하는데, 뒤에도 이와 같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동협문(東夾門)으로 나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소차로 들어가는데 산선·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삼실(三室)의 영정을 도로 봉안하는 것과 새 영정을 봉안할 때가 이르면 좌통례가 소차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소차에서 나온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재전(齋殿)의 정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는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재전의 정문을 거쳐 전내로 들어가 봉심할 때에는 승지·사관과 중수 도감의 당상 각 1원이 시입(侍入)한다. 삼실(三室)의 영정을 배봉(陪奉)하여 정전(正殿)의 각실(各室)에 도로 봉안하는 것을 끝내면 전하가 도로 나온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신문(神門)의 동협을 경유하여 나와 영정을 임시 봉안한 대차로 나아가서 전하가 영정을 배봉(陪奉)한다. 제4실에 봉안하는 것도 모두 보통의 의례와 같다. 【환안(還安) 및 봉안(奉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다.】  이를 마치고 나면 전하가 도로 나오는데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동문(東門) 밖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전하가 재실(齋室)로 들어가 【동궁(東宮)의 재실이다.】  고안제(告安祭)를 지낼 때가 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위차로 나아가며 전하는 이어서 면복(冕服)을 갖추고 의식대로 예식을 행한다. 【고안제를 친행할 때의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다.】  이를 끝마치면 전하가 재실(齋室)로 돌아가 면복(冕服)을 벗는다. 초엄(初嚴)을 알리는 북을 치면 병조에서 장위·노부를 돌아가는 길로 돌려 놓는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그대로 조복(朝服)을 입고 동구(洞口)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환궁하기 전에 이엄(二嚴)을 치면 필선(弼善)이 꿇어앉아 외비(外備)하였음을 아뢰고, 왕세자가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降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흥화문(興化門) 밖으로 나아가 소차로 들어가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치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다시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고 나아오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탄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대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가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대가(大駕)가 움직인다. 【고취(鼓吹)를 울린다.】  대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대가를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하라고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하기를 계청하면 대가가 움직이는데, 종친과 문무백관이 몸을 굽히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여 순차로 시위한다. 경덕궁 흥화문 밖에 이르러 대가가 도착하면 왕세자가 소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고, 지나가고 나면 평신한다. 환궁할 때의 의주는 올 때의 의주와 같다. 왕세자가 여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할 것을 아뢰며 병조에서 전교를 받들어 의장을 푼다.

 

2월 26일 경진

명하여 모사 도감 도제조 김재로(金在魯)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제조인 사직(司直) 조관빈(趙觀彬), 좌참찬(左參贊) 권적(權𥛚), 판서(判書) 이주진(李周鎭), 도청(都廳)인 보덕 남유용(南有容), 정랑(正郞) 오언유(吳彦儒)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낭청(郞廳)인 정랑(正郞) 박징좌(朴徵佐), 좌랑 조영진(趙榮進)은 아울러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감조관(監造官) 유언현(兪彦鉉), 감역관(監役官) 조영석(趙榮晳)은 아울러 승륙(陞六)하게 하였다. 중수 도감 도제조 김재로에게는 안구마 1필을 면급하게 하고, 제조인 판서 김약로(金若魯)·정우량(鄭羽良)·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 도청인 부사과(副司果) 송창명(宋昌明)·이익보(李益輔)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낭청인 좌랑 이명중(李明中)·유선양(柳善養), 정랑 이창원(李昌元)은 아울러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감조관 박명양(朴鳴陽)·윤득경(尹得庚)·서명응(徐命膺), 감역 성진석(成晋錫)은 아울러 승륙(陞六)하게 하고, 원역(員役)과 공장(工匠) 등에게는 쌀·베를 등급을 나누어 후한 쪽으로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예방 승지 이성중(李成中), 대축(大祝)인 부사과 김상복(金相福)·성범석(成範錫)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신련(神輦)을 시위(侍衛)한 승지 한사득(韓師得), 도총관(都摠管)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에게는 각각 길든 말 1필을, 병조 참지 엄우(嚴瑀), 가주서(假注書) 박상덕(朴相德)·박기채(朴起采), 사관(史官) 정희보(鄭熙普)·김종수(金宗洙)·윤동성(尹東星), 권안전(權安殿)의 입직령(入直令) 주형질(朱炯質)에게는 각각 반쯤 길든 말 1필을 내렸다. 선정전(宣政殿) 입직 참봉(入直參奉) 어유림(魚有霖)은 승륙(陞六)하게 하고, 정랑(正郞) 김조윤(金朝潤), 경력(經歷) 이은석(李殷錫), 상량문(上樑文) 선독관(宣讀官) 구윤명(具允明)에게는 각각 길들지 않은 말 1필을 사급(賜給)하였다. 섭통례(攝通禮) 정관유(鄭觀由)·이희석(李喜石), 섭사복시 정(攝司僕寺正) 조상강(趙尙綱), 각실(各室)의 대축(大祝)인 이이장(李彛章)·신회(申晦)·이게(李垍)·홍낙성(洪樂性)·한광회(韓光會)·구윤명(具允明)·이중조(李重祚)·한광조(韓光肇)에게는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게 하였다. 찬의(贊儀) 이하에게는 상현궁(上弦弓) 1장(張)씩을 사급(賜給)하고, 상방(尙方)의 광초(廣綃)의 직조(織造) 감조관(監造官) 이윤언(李胤彦)은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용상(龍床)의 감조관 서명택(徐命宅)은 승륙(陞六)하게 하고, 부사용(副司勇) 조영석(趙榮祏)은 승서하고, 윤덕희(尹德熙)는 승륙하게 하였다. 주관(主管) 화사(畵師) 장경주(張敬周)는 가자하여 첨사(僉使)에 제수하고, 김희성(金喜誠)은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함도홍(咸道弘)은 상당한 직(職)에 제수하고, 정홍래(鄭弘來)·김덕하(金德夏)는 동반직(東班職)에 제수하게 하였다. 진응회(秦應會)에게는 반쯤 길든 말 1필을, 박태환(朴泰煥)에게는 길들지 않은 말 1필을 사급하고, 장득만(張得萬)은 가자하게 하였다.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이섭원(李燮元)을 장령으로, 이규채(李奎采)를 헌납으로, 이만회(李萬恢)를 정언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어제시(御製詩) 두 수(首)를 써서 도제조 조현명(趙顯命)과 제조 이기진(李箕鎭)에게 내렸다. 하교하기를,
"아랫 구절은 중신(重臣)에 대해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곧 정문 일침(頂門一針)인 것이다. 당심(黨心)을 씻어 버려야 한다는 ‘당(黨)’ 자는 중신들이 반드시 듣기 싫어 할 것이기 때문에 ‘구(舊)’ 자로 고쳤다. 어제 처음에는 시임·원임 대신(大臣)과 2품 이상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함께 즐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장대(張大)하게 해서는 안되겠기에 단지 도감의 여러 신하들과 대신만을 불러서 향응한 것이다. 천리와 인정이 그 가운데 함께 행해져서 한 전내에서 같이 즐겼으니, 곧 옛사람이 이른바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이다. 여러 신하들이 한 당(堂)에서 주선한 것은 매우 성대한 거조였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조정의 기상이 반드시 어제의 연회 때 같지는 않았을 터인데, 근래에는 점차 전보다 나아지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이러하지만 말초의 인심과 세도(世道)를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우윤(右尹) 이광덕(李匡德)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만, 실로 병이 바야흐로 중한 상태이어서 사송(辭訟)을 다루는 중한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체직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판부사 민응수(閔應洙), 봉조하 이병상(李秉常)은 함께 병 때문에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상소하여 견책을 내릴 것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진이 길하여 큰 일이 순조롭게 완성되었는데, 단지 우려스러운 것은 뒷날의 임금들이 이를 계승하여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계속 있게 될까 하는 그것이다. 어제(御製)에서 운운한 것이 있었으나 경 등은 이미 노쇠했다. 연소한 신하가 여기에서 이 하교를 들었으면 뒷날 이 일을 계승하려 하는 경우에는 극력 간해야 한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여기에까지 언급되었으니 참으로 깊고도 원대하신 생각이십니다."
하였다.

 

2월 27일 신사

교리 윤광소(尹光紹)·김상철(金尙喆)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저녁 환궁한 뒤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들을 특별히 불러 제준(祭餕)을 베푸시고 관약(管籥)을 누리게 하셨으며, 계속해서 어제 문자를 보건대 태평에 대한 경계와 절제 없는 데 대한 우려가 정녕(丁寧)하고도 간절하여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신 등이 매우 어리석고 미열하기는 하지만 어찌 이 일을 일푼이나마 풍형(豊亨)032)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우리 조정에서 음악을 쓰는 절차가 조하(朝賀)나 진연(進宴)의 예가 아니면 궁정(宮庭) 안에서 연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제의 음악은 조하도 아니고 진연도 아닌 것은 물론 또 임금을 간하는 치각(徵角)033)  의 음악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미 지나갔지만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더구나 지금 동궁 저하께서는 아직도 어린 나이이시니 보고 감동하게 하고 인도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은 오직 몸소 가르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이번에 음악을 사용하면서 또한 그만둘 수 있지만 그만두지 않은 것은 없었습니까?
《오례의(五禮儀)》에 의하면 태묘(太廟)에 부묘(袝廟)하고 환궁한 뒤 음복(飮福)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가 있습니다만, 지난번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할 때를 당하여 성교에 이르기를, ‘이에 열조(列朝)에서는 권정(權停)으로 하였는데, 나는 후사왕(後嗣王)이 곧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으로 번번이 행하게 될까 우려된다.’ 하시고 특별히 영구히 파할 것을 명하셨으므로 이를 《속오례의》에 기록했으니, 매우 성대하고 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미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는 것도 오히려 후사왕을 우려하여 특명으로 파기시키기에 이르렀는데, 어제의 일은 전일의 하교와 너무도 틀린 처사가 아닙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에 깊이 유념하여 유추해서 성찰함으로써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하여 닥친 일을 소홀히 하지 마소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삼후(三后)034)  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임금님이 이 호경(鎬京)에서 그 분들 뜻을 계승하였다.’ 했고, 또 이르기를, ‘무왕이 어찌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자손을 감싸 편안하게 할 계책을 남겼다.’ 하였으니, 신 등이 감히 전하를 위하여 욉니다."
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다시 모사하는 일을 끝마치고 전봉(展奉)하는 예가 이루어져 10일 동안 시탑(侍榻)하니, 마치 옛날처럼 느껴졌다. 진전(眞殿)에 수가(隨駕)하여 또 다시 봉안하니, 기쁜 마음과 새로운 회포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일에 따라 바로잡아 면려하는 것이 유신(儒臣)의 체통에 맞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부묘(袝廟)한 뒤 연회를 베푸는 것을 속전(續典)에서 빼라고 명한 것은 장릉(長陵)035)  을 다시 모실 수 없음을 한하는 성회(聖懷)를 본받은 것으로, 예제(禮制)를 막 끝내고 나서 연회를 베풀고 노래를 연주하게 하는 것은 성심(聖心)에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은 일이 이와 달라 녹명장(鹿鳴章)036)  을 모방하여 이미 헌현(軒懸)을 진설하여 기쁜 마음을 드러내었는데, 음악이 연주되자 절로 눈물이 흘렀고 술은 석 잔에 이르렀으니,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어버이를 위하여 법을 굽힌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이 일은 진실로 내가 등극한 지 24년 만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원량(元良)을 시좌(侍坐)하지 않게 한 것은 그 의도가 그대들의 마음과 같아서인 것이다. 순(舜)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이를 간하는 신하가 10인이었다는 것으로 이미 미의(微意)를 보여 어제(御製)에 기재하도록 명하였다. 면려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여 깊이 임금을 훌륭하게 만들려는 뜻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상번(上番)·하번(下番)에게 길든 말 1필을 하사한다."
하고, 광달문(廣達門) 밖에서 직접 받으라고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주례(周禮)》의 태사 유사장(太師有師章)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수(獸)와 금(禽)이 다른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다릅니다. ‘반금(頒禽)’이라고 한 것은 또한 대포(大庖)는 가득 채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윤광소가 또 말하기를,
"은혜로운 윤음이 정중하고 총애하여 내린 하사품이 많았으니, 신 등은 황공하고 부끄러워 진실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성께서 간언을 오게 하는 덕으로 말한다면 이는 곧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죽은 말의 뼈를 산 뜻037)  이니, 이렇게 꺼리지 않는 문을 열어놓는다면 반드시 정직한 말로 과감히 간하는 선비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답하여 가며 시를 짓는 것은 당우(唐虞) 시대에 있었던 성대한 일입니다만, 그때에도 관약(管籥)의 연주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정(禁庭)에서 그 때가 아닌 시기에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갑자기 들리니 어찌 놀랍고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차자의 말단에 붙여 진달하게 된 이유인 것인데, 은혜로운 비답과 총애로운 하사가 이처럼 전에 없이 성대하니 신 등은 서로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용납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임금이 신중히 해야 할 것은 상이 참람되게 하지 않고 형(刑)이 외람되게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인데, 신 등이 지금 분수에 넘친 상을 받았으니,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종적(李宗迪)은 말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이미 지나치게 즐기는 것에 대한 하교가 있으셨는데, 유신(儒臣)이 차자를 올려 진달한 것은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느냐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고, 성상께서 포상(褒賞)하신 것은 정직을 권장하고 선(善)한 말에 절을 하는 덕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상하가 모두 그 도리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좋다고 칭찬하였다.

 

2월 28일 임오

조윤제(曹允濟)를 헌납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부수찬으로, 이규채(李奎采)·임집(任)을 수찬으로, 정순검(鄭純儉)을 부교리로, 이태중(李台重)을 보덕으로, 정실(鄭實)을 겸 보덕으로, 윤광소(尹光紹)를 겸 필선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좌윤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오언유(吳彦儒)·김상복(金相福)을 승지로 삼았다.

 

우부승지 권상일(權相一)이 상소하여 늙고 병들어서 직무의 수행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진달하고, 이어서 천재 때문에 진계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체직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제도(諸道)의 구포(舊逋)를 10년을 기한으로 탕척하게 하고, 한년(限年)에 참여되지 않은 고을들은 가장 오래된 것 1년조를 탕감시키게 하였으며, 여러 가지 공물 가운데 구유재(舊遺在)는 20년을 기한으로 절반을 탕감하게 하고, 형조의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임금이 어진(御眞)이 완성되어 진전(眞殿)에 모셨다는 것으로 상사(賞賜)가 너무 지나치고 혜택이 널리 유포됨에 따라, 점점 민심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바라게 되고 재용이 날로 허비되었으므로 식자들이 더욱 우려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