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병술
임금이 손수 권농(勸農)하는 전교를 써서 팔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하였다.
1월 3일 무자
하교하기를,
"내일부터 시작하여 왕세자(王世子)의 강학(講學)을 준례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엄우(嚴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떤 대례(臺隷) 하나가 혁제(赫蹄)001) 를 가지고 와서 전하면서 임지평(任持平)의 서신이라고 했는데, 신의 외척(外戚)의 지친(至親) 가운데 또한 성이 임씨로서 지평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의심 없이 뜯어 보았더니, 그 서신의 내용에 ‘새로 올린 계사(啓辭)가 높은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가 한겨울에 빼어난 것 같아 흠앙(欽仰)스럽기 그지없다. 이미 임(林)·김(金)을 논했으니, 엄우만이 유독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하단에 또 쓰기를, ‘이것은 바로 도령공(都令公)002) 의 글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장료(長僚)가 대궐 안에 있으면서 임명주(任命周)에게 보낸 글이며, 임명주가 대청(臺廳)에서 자기 집의 하례(下隷)에게 전송(轉送)시킨 것인데, 잘못 신에게 전해진 탓으로 불행하게도 이미 보았습니다.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는 가운데 온 조정이 다 알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서신은 곧 하나의 탄문(彈文)이었으니, 바라건대 신을 삭직(削職)시켜 주소서."
하니, 도승지 정언섭(鄭彦燮)도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엄우의 소장에서 신이 임명주에게 답한 사서(私書) 때문에 인혐(引嫌)하였는데, 청컨대 신이 그 사실을 대략 진달하겠습니다. 임명주가 대청에 나와 있었고 신은 약원(藥院)에 있었는데, 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임·김의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임은 곧 임상원(林象元)이고, 김은 곧 김상적(金尙迪)입니다. 그래서 신이 소지(小紙)로 답한 내용이 과연 엄우가 소장을 올려 진달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 일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한데, 《당후일기(堂後日記)》를 살펴보면 의리(義理)와 의후(議後)의 구별이 이렇듯 명백합니다. 천일(天日)이 위에 있는데도 분소(分疏)하는 말이 앞뒤로 교대로 나와서 ‘의(義)’ 자와 ‘의(議)’ 자의 음(音)이 방불하다는 것으로 함문(緘問)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려고 했으므로 신이 매우 정직하지 못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곧 엄우가 스스로 기록한 일기인 것입니다. 김상적이 연석(筵席)에서 주달했다고 운운한 것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답한 것입니다. 임명주가 발계(發啓)하고서 하마터면 형륙(刑戮)을 받을 뻔했다가 바다 가운데로 귀양가 천극(栫棘)되었으니, 한쪽 사람들의 의기(意氣)가 호건(豪健)한 것이 전보다 한 배는 더하였습니다. 이제 사찰(私札)을 가지고 임금 앞에서 들추어내어 아뢰는 것은 삼가 요신(僚臣)을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이조 참의 이덕중(李德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대료(大僚)가 대통(臺通)이 과다했다는 이유로 중추(重推)를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유신(儒臣)이 2인을 지적하여 논했는데, 이른바 ‘매와 개가 응모했다.[鷹犬應募]’는 네 글자는 그 말이 매우 상서롭지 못하고, 그 의도가 매우 비상한 것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이 아! 또한 두렵습니다. 따라서 신이 어떻게 그대로 멈칫거리면서 무릅쓰고 있음으로써 스스로 염치를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내국(內局)003) 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도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진상한 가죽신 때문에 발가락을 다쳤으므로 약방(藥房)에서 문후(問候)하고 괴화(槐花) 기름을 쓰기로 의정(議定)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은 경묘(景廟)의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고, 나도 또 한 살을 더 먹게 되었다. 옛날 악정자(樂正子)가 마루에서 내려서다가 발을 다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나는 가죽신을 신다가 발을 다쳤다."
하였다. 김 재로가 ‘권세(權勢)’라는 두 글자로 스스로 인혐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통신사(通信使)의 장계(狀啓)를 읽으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집정(執政)의 숫자를 5인의 숫자만 허락하면 되겠는가?"
하니,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부터 왜인(倭人)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먼저 따르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강청(强請)하면서 반응을 살펴 왔습니다. 지금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바로 그들의 계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6인의 집정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들의 계교가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는데 이를 허락한다면 바로 그들의 계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마땅히 집정을 5인으로 하자는 것까지도 아울러 허락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이 이미 조선(朝鮮)의 원역(員役)은 증감(增減)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집정(執政)인 종실(宗室)의 숫자를 증가시키려 하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하고, 김 재로는 말하기를,
"기해년004) 에는 종실이 2인이었는데, 이제 또 1인을 증가시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4원(員) 이외에 1원도 더 증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서 저들의 동정을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덕중(李德重)의 소장을 읽으라고 명하고서 임금이 말하기를,
"‘매와 개가 응모했다.’ 한 것은 누구의 말인가?"
하니, 김 재로가 말하기를,
"홍우한(洪羽漢)의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홍우한의 말을 옳게 여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를 이렇게 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엄우의 소장을 읽으라고 명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괴이하다."
하였다. 또 정언섭(鄭彦燮)의 소장을 읽으라고 명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노성(老成)한 사람이 아니다. 옛날 어떤 무변(武弁)이 최첨지(崔僉知)의 집에서 말을 빌려 오게 했는데, 그의 종이 잘못하여 병판(兵判) 최석정(崔錫鼎)의 집에 가서 말을 빌려 달라고 하니 최석정이 빌려 주었다. 그 후에 그 무변이 사실을 알고서 가서 사과하니, 최석정이 ‘마음쓸 것 없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도량이 큰 것을 칭송하였는데 이 일과 바로 비슷하다. 이번에 임명주가 범한 것은 중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작처(酌處)하였는데,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있고 귀밑머리 또한 허연 사람이 또 요석(僚席) 사이에서 계속 말할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익보(李益普)의 일을 연석(筵席)에서 무상(無狀)하다고 공척한 것이다. 아! 지난날에는 그에 대해 칭찬하더니 오늘날에는 임금 앞에서 성대히 공척하였다. 아! 저 당심(黨心)을 꿈에서 깨듯이 아울러 깰 수는 없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습성이 또한 아름답지 못한 것이요, 사람을 촉탁했다가 또 사람을 공척하는 것은 그 마음이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건도(乾道)가 환히 밝은데, 남에게 잘못 보인 사서(私書)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위에 아뢸 수 있겠는가? 비록 경중의 구별은 있으나 거조가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 정언섭과 엄우는 아울러 파직시키라."
하였다.
상의원(尙衣院)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절수(折受)한 황해도 해주(海州) 주통(注筒)의 땅을 논으로 만들어 수세(收稅)하여 용도에 보태게 하여 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상방(尙方)005) 에서는 옷을 공상(供上)하고 내옹(內饔)에서는 찬선(餐膳)을 공상하게 되어 있는 것이 곧 주관(周官)의 제도이다. 옷의 공상과 찬선의 공상에 드는 비용은 본디 정공(正供)이 있는 것인데, 제언(堤堰)에 의지하여 공상하게 하는 것은 사체가 구차스럽다. 이 계사(啓辭)는 도로 내어 주고 제조(提調)는 모두 파직시켜라."
하였는데, 조관빈(趙觀彬)·원경하(元景夏)·정언섭(鄭彦燮)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김우태(金遇兌)처럼 산을 가리켜 바다라고 하고 바다를 가리켜 산이라 하는 자들이 많으니, 진고(陳告)한 사람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한 형신(刑訊)을 가하고 나서 조율(照律)하게 하라."
하였다.
경기의 도신(道臣)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으니, 수원(水原) 쌍부창(雙阜倉)을 조사하는 일을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성진(沈星鎭)·이창수(李昌壽)·이종적(李宗迪)·권상일(權相一)·한억증(韓億增)을 승지로 삼았다.
1월 5일 경인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참판으로, 황재(黃梓)를 이조 참의로 삼았는데, 대신(大臣)의 천망(薦望)에 의한 것이었다. 참판 김상로(金尙魯)는 수원(水原)을 조사하는 일 때문에 체직(遞職)을 허락하였으며, 참의 이덕중(李德重)은 패초(牌招)를 어긴 것에 좌죄(坐罪)되어 파직시켰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이 평안 병사(平安兵使) 구성익(具聖益)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강변(江邊) 각진(各鎭)의 군기(軍器)는 그 군병의 액수(額數)를 계산하여 남겨 두어야 하며, 그 나머지 군병이 없는 기계(器械)는 구적(寇賊)을 도와 주는 자료가 되기에 족할 뿐이라는 이유로 일체 아울러 읍성(邑城)으로 옮겨다 둘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수원(水原)의 사장(査狀)을 읽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임명주(任命周)에 대한 일은 그 마음을 알 수가 있다. 재신(宰臣)이 장사지낸 것은 곧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기와 같은 것이니, 뒤숭숭한 세상에 남을 경알시키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타고 농간을 부리려 하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이제 사장을 열람하여 보니,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계사(啓辭)에서 공교하게 중상한 것은 해당 지방관 정휘량(鄭 翬良)이다. 이는 한 번 쏘아서 둘을 맞추려는 의도인 것인데 이미 통찰하였고, 사장이 또 매우 상세하니 재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엄히 계칙하여 다시 고집하면서 버티지 말게 하라."
하였다.
1월 8일 계사
좌참찬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어영 대장 박문수(朴文秀)가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1월 10일 을미
신만(申晩)을 이조 판서로,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집의로, 박필간(朴弼幹)을 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장령으로, 홍우한(洪羽漢)을 헌납으로, 이세사(李世師)·이기덕(李基德)을 지평으로, 심발(沈墢)을 정언으로, 이기진(李箕鎭)을 공조 판서로, 홍봉한(洪鳳漢)을 대사성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남유용(南有容)을 보덕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수찬으로, 조명건(趙明健)을 필선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설서로, 이주진(李周鎭)을 예조 판서로, 이광덕(李匡德)을 좌윤으로, 김약로(金若魯)·정우량(鄭羽良)·신만(申晩)을 빈객으로 삼았다.
김상로(金尙魯)를 탁용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1월 10일 을미
심성진(沈星鎭)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는 언제 배를 타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초아흐렛날 배를 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통신사의 원역(員役)은 기해년의 전례에 따라 일체 증감(增減)하지 않았는데, 종실(宗室) 집정(執政)은 이렇게 증가했으니, 매우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평안 병사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남의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조습(操習)시키는 것은 사등(四等)006) 의 도시(都試)와 함께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난번 향(香)을 받을 적에 여러 집사(執事)들이 지영(祗迎)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하교가 있으셨으니, 지영할 처소(處所)를 품정(稟定)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섭행(攝行)할 때에는 당상(堂上) 집사(執事)들은 궐문(闕門) 안에서 지영하고, 당하(堂下) 집사들은 궐문 밖에서 지영하게 하라. 친향(親享)할 때에는 아헌관(亞獻官) 이하가 먼저 나아가게 하고, 친히 향을 전할 때에는 당상 집사와 감찰(監察)은 전정(殿庭)의 문 안에서 지영하고, 당하 집사는 전정의 문 밖에서 지영하게 하며, 대향(大享)에 섭행으로 향을 전할 때는 의장(儀仗)은 궐문 밖에서 대령(待令)하고, 친히 향을 전할 때에는 전정의 문 안에서 대령하게 하라. 이를 항식(恒式)으로 정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월경법(越境法)을 범한 여인(女人) 삼례(三禮)·소업(小業) 등을 이미 추문(推問)하여 처결(處決)하였으니, 괴원(槐院)007) 으로 하여금 회자(回咨)를 찬출(撰出)하게 한 다음 재자관(齎咨官)을 정하여 심양(瀋陽)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초(供招)에 인원(引援)된 정범(正犯) 죄인을 아직도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먼저 회자(回咨)하는 것이 온편치 못할 것 같지 않은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도주한 죄인을 다 체포하지는 못했으나 운길(雲吉)을 이미 잡아 가두었고, 지금 마땅히 정범(正犯)으로 정법(正法)에 따라 처형하게 되어 있으며, 삼례·소업은 협박을 받아서 한 것이기 때문에 사형(死刑)을 감하고 도배(島配)하겠다는 내용으로 회자하소서."
하니, 임금이 조현명에게 하문하였는데, 조현명의 대답도 또한 같으니, 이를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옛날의 무변(武弁)들은 배고파도 점심을 먹지 않았고 추워도 병풍을 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편안한 것이 습성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지난번 수상(首相)의 진달로 인하여 무신(武臣)도 문신(文臣)의 전강(殿講)하는 예(例)에 따라 병서(兵書)를 강하게 했었는데, 그 후에 정지되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잊었었다."
하고, 비국으로 하여금 내삼청(內三廳)008) 의 당하 무신을 초계(抄啓)하게 하고 책명(冊名)도 또한 계하(啓下)하였다.
동부승지 한억증(韓億增)을 입시하게 하고, 제주(濟州)의 민속(民俗)과 토산(土産)에 대해 하문하였는데, 한억증이 방금 제주에서 체직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祖)의 국휼(國恤) 때 산릉(山陵)의 흙을 나르는 역사(役事)에 달려갈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동조(東朝)께서 쌀·장을 내렸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연전에 제주에서 지실(枳實)을 진공(進貢)하였는데, 내가 한 번 맛보고 그 맛이 좋다고 하면 그대로 진공하게 되는 전례를 이룰까 염려하여 애당초 맛을 보지 않고 되돌려보냈다. 듣건대 감귤(柑橘)의 진공 또한 폐단이 있어 여항(閭巷) 사이에 이 나무가 나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하니, 사실이 그런가?"
하니, 한억증이 대답하기를,
"과연 이런 폐단이 있습니다. 민가(民家)에 이 나무가 나면 관(官)에서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나서 열매를 따서 바치게 합니다. 지실을 도로 돌려보낸 것은 실로 이물(異物)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다만 성덕(聖德)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도민(島民)을 위한 혜택이 큰 것입니다."
하였다. 또 전복을 캐는 폐단에 대해 하문하고 전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소반의 밥이 낱알 하나하나가 모두 신고(辛苦)의 결집인줄 누가 알랴?’ 하였는데, 소반의 전복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1월 11일 병신
정이검(鄭履儉)을 승지로, 정우량(鄭羽良)을 지경연사로, 이종성(李宗城)·신만(申晩)을 빈객으로, 박문수(朴文秀)를 동지성균관사로, 서명구(徐命九)를 공조 참판으로, 정우량(鄭羽良)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응협(李應協)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우부승지 권상일(權相一)이 상소(上疏)하여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쉬게 해줄 것을 청하면서 끝에 함양(涵養)할 것으로 진계(陳戒)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2일 정유
사정(査正) 당상과 낭청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했는데, 왕세자(王世子)도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빈풍(豳風)009) 으로 농사짓는 것을 가르치려는 뜻은 원량(元良)010) 으로 하여금 먼저 양역(良役)의 고통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개 양역의 고통은 열조(列朝)로부터 이미 그러했는데 수령들이 누혈(漏穴)을 만들어 징렴(徵斂)하여 사용(私用)하고 있으니 이는 극히 무상(無狀)한 처사이다. 민진후(閔鎭厚)는 단지 줄이기만을 힘썼을 뿐이어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지금 이 하교가 있은 뒤에 진실로 숨기거나 빠뜨리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률(重律)로 감처(勘處)하겠다. 그러나 나는 엄히 계칙하지만 경 등은 힘써 너그러운 쪽을 따른 연후에야 뒷날의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번에 사정(査正)하는 것은 그 의도가 백성을 위하는 데 있는 것이니, 경외(京外)를 어찌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왕명(王命)은 마땅히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파급되는 법인데, 도성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이 외방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사정을 외방에만 행하는 것이 어찌 왕정(王政)에 있어 마땅한 것이겠는가? 서울의 사정안(査正案)도 본청(本廳)으로 하여금 똑같이 거행하게 하라. 아! 백성들의 큰 폐단은 양역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과거 열조(列朝) 때에는 강구(講究)한 것은 많았으나 좋은 방책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적막하기만 하다. 지금의 이 거조에 대해서는 앞서의 전교에서 이미 하유하였는데 대정령(大政令)이 잘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제거해야 될 폐단 또한 작지 않을 것이다. 아! 전결(田結)을 숨겨 사용(私用)한 데 대한 율(律)은 무거운 것인데, 더구나 사사로이 국민을 사역(使役)시킨 것이겠는가? 이번에 사정한 뒤 혹 추후에 출현한 것을 보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것이고 또한 그 임금의 적자(赤子)를 사용(私用)한 것이 된다. 어찌 아 대부(阿大夫)011) 가 전야(田野)를 개간하지 않은 정도일 뿐이겠는가? 의당 드러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겠다. 위에 있는 사람이 법을 적용함에 있어 어찌 사람의 귀천 때문에 높이거나 낮출 수가 있겠는가? 각도(各道)의 성책(成冊)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하교하는 것은 이 또한 먼저 명령을 내리고 뒤에 다스린다는 뜻이니, 삼가 이 뜻을 본받아 방헌(邦憲)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서인수(徐仁修)에게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금오(金吾)의 의언(議讞)으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한 다음 이 전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서로(西路)의 제번전(除番錢)012) 을 비국의 회록(會錄)에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비국에 묘유법(卯酉法)013) 을 신칙시키라고 명하였다.
1월 13일 무술
수찬 이세사(李世師)가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월 14일 기해
사간 박필간(朴弼幹)이 상소하여 조적(糶糴)의 폐단을 진달하면서 환상(還上)을 고쳐 상평(常平)으로 만들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청묘법(靑苗法)에 견준 것은 지나쳤다. 그러나 백성을 위하는 부지런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녕전(永寧殿)의 유증(鍮甑) 각 1좌(坐), 구정(具鼎)을 더 만들 것을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건의한 것이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장도(獐島)에서 기르는 말은 4필에 불과합니다. 임술년014) 부터 얼마 안 되는 마필(馬匹)을 방목한 것은 한 섬을 독점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목관(牧官)의 소행이 무상(無狀)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목장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마필은 다른 목장으로 옮겨 방목하게 함으로써 민폐를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월 15일 경자
홍상한(洪象漢)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16일 신축
월식(月食)이 있었다. 달이 헌원성(軒轅星) 남쪽에 있는 작은 별을 범하였다.
박필간(朴弼幹)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7일 임인
종묘(宗廟) 삭망제(朔望祭)의 대축(大祝)을 한 사람 더 차출하라고 명하였는데, 좌승지 정이검(鄭履儉)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었다. 한 사람의 대축이 12실(室)의 신주(神主)를 출납(出納)하는 것은 비록 근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피로하여 지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데, 그렇게 되면 공경심이 흐트러질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태실(太室)에 관지통(灌地筒)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영의정 김재로가 아뢴 것이었다.
1월 17일 임인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한 어용(御容)의 면부(面部)에 점흔(點痕)이 있어 점점 안광(眼光)을 먹어 들어가고 있으므로 어제 다시 그려야 되겠다는 내용으로 동조(東朝)께 앙품(仰稟)하였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니 다시 그려서 영희전(永禧殿)으로 이봉(移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좌상(左相)이 나에게 화상(畵像)을 그려 자손들이 우러러보게 하도록 권하였는데, 사가(私家)의 경우에는 1백 개의 화상이 있더라도 받들어 저장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제왕가(帝王家)의 사체(事體)는 그렇지가 않아서 실로 후세에 큰 폐단이 된다. 내가 옛날에 은사(恩賜)받은 화본(畵本)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의 일은 이를 계술(繼述)로 여기기 십상이어서 차차 계승하여 그리게 된다면 진전(眞殿)이 곧 하나의 태묘(太廟)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나의 뜻은 황희(黃喜)가 반찬을 간소하게 한 뜻과 같다."
하고, 인하여 어제(御製)인 수후문(垂後文)을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화상을 그리는 것은 열명(說命)015) 에서 시작된 것인데, 말세에 점점 치성하여졌다. 아조(我朝)에서는 영희전(永禧殿) 삼실(三室)에다 어용(御容)을 보관하고 있는데, 열조(列朝)에서는 진정(眞幀)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아! 그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 옛날 무진년016) 우리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모사(模寫)하였고, 7년 뒤 우리 성고(聖考)의 어용(御容)을 그렸었다. 내가 사위(嗣位)한 지 9년 만에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장대(張大)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인 갑오년017) 에 은사(恩賜)받은 도본(圖本)이 있었는데, 지난날 은사받은 것을 없앨 수 없어 다시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뒷날 자손된 사람이 대대로 그린다면 그리기는 쉽지만 그 폐단은 곤란한 점이 있게 되어 진전(眞殿)의 실수(室數)가 장차 태묘(太廟)와 같게 되고야 말 것이다. 이제 진전을 중건(重建)하는 일로 인하여 나의 깊은 뜻을 보인다. 아! 뒷날 임금이 되고 신하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이 하교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번의 이 거조는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더 건조하는 일로 인하여 뒷날 장대하게 하는 폐단을 연다면, 이는 위로 나의 성고(聖考)의 겸억(謙抑)하는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되므로 특별히 징계하는 뜻을 보여 의궤(儀軌)에 붙일 것을 명한다. 아! 사왕(嗣王)들은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영희전(永禧殿)에 처음 광묘(光廟)018) 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에 또 원묘(元廟)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무진년에는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어진을 모사(模寫)하여 함께 봉안하였으므로 그대로 일전 삼실(一殿三室)의 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진전이 있으면 열성(列聖)의 영정도 똑같이 함께 봉안하는 것이 예(禮)에 있어 당연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근 30년 동안 봉안하여 오던 어용을 갑자기 이봉(移奉)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데, 자성(慈聖)께서 대체(大體)를 돌아보고 원대한 앞날을 생각하여 함께 봉안하려 하신 것이다. 계사년019) 에 도사(圖寫)한 궐전(闕殿)과 심도(沁都)020) 에 봉안했던 영정이 근래 탈이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해마다 점점 가중되고 있어 제때에 다시 모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모사하였으면 신본(新本)을 함께 진전에 봉안하는 것이 진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하겠기에 먼저 자성(慈聖)에게 여쭈어 윤허를 받았다. 오늘 진전에 전알할 때 친히 고유(告由)했는데 고유하고 난 뒤에는 날을 넘길 수가 없기에 오늘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한 것이다. 선조(先朝)의 어용과 삼성(三聖)의 어용을 모사하는 것, 진전을 중수하는 것은 사체가 모두 중한 것이니, 어용 모사 도감(御容模寫都監)의 당상과 낭청, 진전 중수 도감(眞殿重修都監)의 당상과 낭청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서계(書啓)하게 하라. 여러 가지 등등의 일도 이달 안으로 거행하라. 도제조에게 두 도감을 겸하여 맡기겠으니 그 망(望)에는 모사 중수 도감 도제조라고 써서 들이라.
아! 어진을 봉안하고 나서는 털끝만큼도 흠탈(欠頉)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곧 자식의 상정(常情)인 것이고, 또 한 전(殿)에 함께 봉안하여 몸소 청작(淸酌)을 올리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자식된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위로 과거에 비용을 아낀 성대한 뜻을 본받아 힘써 절약하는 쪽을 따르게 한 것은 자성의 하교에도 언급하였고,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다. 자성께서 제기(祭器) 가운데 전부터 써 오던 것이 있는 경우에는 새로 준비하지 말고 그것을 쓰라는 것으로 하교가 있으셨다. 자성의 하교가 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감히 조금이나마 경비(經費)를 도와 내가 단지 선왕을 위한 것일뿐, 장대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혜청(宣惠廳)의 선미(膳米) 1백 석을 탁지(度支)021) 로 보내어 그 비용을 보태게 하라. 도감의 여러 신하들도 이런 뜻을 본받아서 위로 우리 성고(聖考)께서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 성덕(盛德)에 부합하게 하라."
하였다.
1월 18일 계묘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전내(殿內)를 봉심(奉審)한 다음 이어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봉심하였다. 대가(大駕)가 궁궐을 나가고 돌아올 때 왕세자가 지송(祗送)하고 지영(祗迎)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용(御容)을 모사하여 이봉(移奉)한 뒤에 나는 가서 전배(展拜)하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시봉(侍奉)하시던 나머지에 동조(東朝)께서 어찌 서운한 마음이 없으시겠는가? 신본(新本)은 영희전(永禧殿)에 이안(移安)하더라도 소본(小本)은 처음에는 구전(舊殿)에 머물러 봉안해 둠으로써 자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릴 수 있게 하라."
하였다.
1월 19일 갑진
김재로(金在魯)를 모사 중수 도감 도제조(模寫重修都監都提調)로, 김약로(金若魯)·박문수(朴文秀)·이주진(李周鎭)을 중수 도감 제조로, 이태중(李台重)·송창명(宋昌明)·이명중(李明中)·박징좌(朴徵佐)를 낭청으로, 이기진(李箕鎭)·정우량(鄭羽良)·권적(權𥛚)을 모사 도감 제조로, 남유용(南有容)·윤광소(尹光紹)·이창원(李昌元)·김종수(金宗洙)를 낭청으로 삼았다.
1월 20일 을사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입시하였다. 중수 도감 당상 이주진과 모사 도감 당상 정우량을 서로 바꾸었고, 조관빈(趙觀彬)으로 이기진을 대신하고, 이익보(李益輔)로 이태중을 대신하고, 오언유(吳彦儒)로 윤광소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또한 김상복(金相福)으로 이익보를 대신하게 하였다.
화원(畵員) 장경주(張敬周)가 붓을 잡고 주관하였고, 장득만(張得萬)·진응회(秦應會)·김희성(金喜誠)·함세휘(咸世輝)·정홍채(鄭弘采)·박태환(朴泰煥)이 동참하였으며, 유생(儒生)들 가운데 그림에 능한 조영석(趙榮祏)·윤덕희(尹德熙)·심사정(沈師正)에게도 감동(監董)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병오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희전(永禧殿) 제일실·제이실·제삼실을 봉안할 때의 절목에 대해 의조(儀曹)022) 에 전거할 만한 문자가 없으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을 고증하게 하라."
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수어사(守禦使)에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동궁(東宮)의 독법(讀法)이 근래 어떠한가?"
하니, 남유용(南有容)이 대답하기를,
"아주 빨리 진보하는 효험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남유용이 궁함(宮銜)을 띠고 있었다.
1월 22일 정미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려 왜인(倭人) 집정(執政) 5원(員)의 예단(禮單)을 특별히 시행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사행이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3일 무신
도감 당상에게 명하여 여러 화사(畵師)를 데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본(新本)과 구본(舊本)의 영정이 서로 비슷하게 된 연후에야 회가(回駕)할 수 있다. 모발(毛髮) 하나라도 같지 않게 된다면 이는 화사(畵師)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나의 불효 탓인 것이다."
하였다. 이때 도감에서 조영석(趙榮祏)을 낭청으로 계하(啓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차스럽다."
하고, 낭청을 체차시킨 다음 유화(儒畵)로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조영석에게 하유하기를,
"그대가 그림을 배워서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더구나 그대는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 아니던가?"
하니, 조영석이 대답하기를,
"성교(聖敎)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감히 봉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월 24일 기유
민백행(閔百行)을 대사간으로, 이응협(李應協)을 헌납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으로, 권숭(權崇)을 지평으로, 김주(金霔)를 장령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응교로, 홍우한(洪羽漢)·이규채(李奎采)를 부수찬으로, 이형만(李衡萬)을 필선으로, 이익보(李益輔)를 겸 보덕으로, 오언유(吳彦儒)를 겸 필선으로, 임박(任璞)을 수찬으로, 신회(申晦)를 겸 문학으로, 이이장(李彛章)을 겸 사서로, 서종급(徐宗伋)을 예문관 제학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동지성균관사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승지로, 이정보(李鼎輔)를 함경 감사로 삼았다.
좌윤(佐尹) 이광덕(李匡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 가을에 다행히 고금에 인신(人臣)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특이한 은전을 받았는데 십행(十行)의 윤음이 환히 내려지니, 선덕(先德)을 추념(追念)하게 됩니다. 자성(子姓)이 영락한 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숙(魚菽)023) 이 부족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제수를 넉넉하게 지급하였으며, 잠리(簪履)024) 를 수습하라는 뜻이 또한 죄많은 천물(賤物)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따라서 사방에서 이를 보고 들은 사람은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더구나 당사자의 마음이야 천지로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신이 젊은 날에는 실로 일을 알지 못하여 망령되이 조정에서 신의 집을 대하는 것이 이미 상격(常格)이 아니었으니, 신의 집에서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것 또한 세속의 상정(常情)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무릇 세상의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공손함과 시키는 대로만 따르는 충성 및 말을 하면서도 기휘(忌諱)를 두려워하여 실정을 극진히 하지 못하는 것과 일을 하면서도 환해(患害)를 피하느라 사리를 극진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모두 적심(赤心)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또 일찍이 옛사람은 어려운 일은 급급해 하였지만 쉬운 일은 사양했다는 의리에 대해 대강 들었습니다만, 태평한 세상에 영명(榮名)의 이로움을 누리는 것은 우·이(牛李)025) 가 경탈(傾奪)하는 가운데에서 오리와 기러기처럼 한가롭게 왕래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 이것도 국가에 보답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오직 태평할 때에는 물러가서 염치를 닦고 일이 있으면 나아가 있는 힘을 다 바치는 것이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선신(先臣)이 일찍이 후손에게 모범을 보인 것도 이러하였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평생의 언어와 사위(事爲)에 대해 수없이 망령되고 괴이한 인물이라는 지목을 받았습니다만, 끝내 감히 스스로 후회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전야에 숨어 있으면서 감히 영달을 추구하는 길로 무릅쓰고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나라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이렇게 한 연후에야 세속의 상정을 면할 수 있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연래(年來)에 죄가 이미 용서받기 어렵게 되었고 몸 또한 이미 노쇠하여 사상(死喪)의 비애가 가슴을 아프게 하여 신혼(神魂)이 녹아 없어지게 되었으며, 질병과 우환이 뼛골까지 침투하여 근골이 쇠잔해졌으므로, 병을 앓으면서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죽을 날이 곧 닥쳤습니다. 따라서 처음 이른바 세속의 상정으로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또 장차 묵묵히 뜻만 가지고 지하로 돌아가게 되어 드디어 선신의 국가에 대한 정성을 세상에 표출시킬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 조정의 망극한 은혜도 결국 헛되이 베푼 것으로 귀결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주야로 통곡하면서 천지를 저버리게 된 것이 부끄러워 죽음이 빨리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의 이 직임은 경을 만나 보고 싶은 뜻에서인 것이니, 경은 올라오라."
하였다.
도감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시기를, ‘모사를 끝마친 뒤에 첨배(瞻拜)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셨으니, 봉승해야 할 것 같은데, 예절에는 미안한 점이 있다. 각전(各殿)의 허다한 여시(女侍)들이 번잡함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으니, 1본(本)을 우선 진전(眞殿)에 봉안한다면 뒷날 환어(還御)한 뒤에 첨배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예관에게 명하여 시임·원임 대신에게 의견을 모으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경자년026) 에 선정전(宣政殿)에다 임시로 봉안했던 것은 마음에 차마 못할 점이 있었는데, 대개 차마 아버지의 책을 읽을 수 없던 것은 거기에 수택(手澤)이 남아 있기 때문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또 선정전에 봉안하고 모시게 되니 마음이 더욱 슬프고 감회롭다. 그러나 마땅히 선정전으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시임·원임 대신에게 의견을 물은 뒤에 입시하였다. 이 주진이 말하기를,
"영부사 김흥경(金興慶)은 ‘자전(慈殿)께서 친림하시는 것은 사체에 관계될 듯하니, 어찌하겠습니까? 1본은 영희전(永禧殿)에 이안(移安)하고 1본은 그대로 진전(眞殿)에 봉안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진실로 합당하겠습니다.’ 하였으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선정전과 외전(外殿)은 차이가 있으니, 자전께서 친림하시는 데 있어 무슨 곤란한 점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묘정(廟庭) 안에는 여시(女侍)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사한 어용(御容)을 처음에는 양지당(養志堂)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구애되는 단서가 많았기 때문에 선정전으로 거행하게 한 것이다. 작헌례(酌獻禮)를 할 때에는 백관이 선정문 밖에서 배제(陪祭)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5일 경술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027) 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는데, 안의 빛깔은 붉은 색이고 밖은 푸른 색이었다.
헌부 【장령 김주(金霔)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명주(任命周)에 대한 10개의 계사(啓辭) 가운데 유건기(兪健基)·서지수(徐志修)의 일은 연계(連啓)하고 그 나머지 8개의 계사는 모두 정지하였다.
도감 당상이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도감을 중히 여기고 경비를 돌보시어 선미(膳米) 2백 석을 가져다 쓰라는 하교가 있으셨으니, 해청(該廳)에서는 이를 알고 거행하라."
하였다.
사직(司直)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여 심사정(沈師正)은 곧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이니 이런 중대한 역사(役事)에 참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으로 발거(拔去)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도감으로 하여금 발거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6일 신해
이조 판서 신만(申晩)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27일 임자
유성(流星)이 자성(觜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끝나고 나서 각실(各室)의 영정을 이안(移安)하였다. 환궁할 때 경운궁(慶運宮)에 임어했는데, 선묘(宣廟)가 일찍이 임어했던 곳이었다. 어제(御製)를 써서 내려 게판(揭板)하도록 명하였다.
1월 28일 계축
형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29일 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신라 경순왕의 능도 고려의 여러 왕릉의 예에 따라 수총군(守塚軍) 5인을 두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뢴 것이었다. 경기 감사 이명곤(李命坤)에게 명하여 보리가을 전까지 잉임(仍任)하게 하였는데, 진구(賑救)를 설행할 때 임기가 찼다고 체직시킬 수 없다는 것으로써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 있어서였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군병에게 내어 줄 요미(料米)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혜청(宣惠廳)의 쌀 5천 석을 획급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한 다음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경운궁에 임어했었는데 경운궁을 이 전(殿)에 견준다면 이 전(殿)은 광하(廣廈)이다. 이는 성조(聖祖)께서 거(莒)에 있을 때028) 를 잊지 않은 성대한 뜻인 것이다. ‘영복 경서동(寧復更西東)’이라고 한 글귀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지금 국세가 날로 비하되어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돌아가 배알할 면목이 없다. 경 등 또한 세록(世祿)의 신하이니 마땅히 서로 면려해야 한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이 우러러 성화(聖化)를 잘 돕지 못한 탓으로 세도가 이러하고 백성의 고통이 이러하니, 이는 모두 신 등의 죄입니다. 현재의 급선무는 재용을 저축하고 인재를 수습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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