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3월

싸라리리 2025. 9. 30. 16:18
반응형

3월 1일 을유

통신 부사 남태기(南泰耆)가 탄 배가 악포(鰐浦)에서 불에 탔다. 가지고 가던 예물인 인삼 72근, 흰 무명 20필, 부용향(赴蓉香) 3백 10매 및 그 나머지 양미(糧米)·노자(路資)·의과(衣袴)·장복(章服) 등 일행의 제반 수용품이 아울러 불에 탔는데, 죽은 사람은 2인이고 덴 사람은 10여 인이나 되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통신사의 장계(狀啓)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삼은 남아 있는 것이 있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가을에 캐기 전에는 판출하여 보낼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통신사의 사행을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힘을 다하여 준비하여 보냈으므로 지금 본조(本曹)에 저축되어 있는 것은 단지 10근뿐입니다. 성중(城中)의 제국(諸局)에 널리 구한다 하더라도 결코 이 숫자를 채울 도리가 없습니다. 인삼을 실은 배가 불에 탄 것은 저들도 눈으로 본 것이니, 이제 다른 물건으로 대신 주어야 합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대신 보냈다가 받지 않는다면 나라가 욕을 당하는 것이 큽니다."
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신구(新舊) 관백(關白)에게 증여하는 예물은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기어이 찾아내어 충당시켜야 할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가을을 기다려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병조 참판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교린(交隣)은 사대(事大)와 달라서 증회(贈賄)하는 물건이 설사 기준에 미달된다고 하더라도 본디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데, 어찌 반드시 약정한 한도를 마치 빚을 갚는 것처럼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행 가운데 인삼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있으니, 배를 조사해 보면 가져다 판비(辦備)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고, 예조 참판        윤득화(尹得和)는 말하기를,
"몰래 가져가는 것은 이미 사법(死法)에 저촉되는 것이니, 배를 조사하여 가져다 판비한다는 이야기는 번거롭게 성상에게 아뢸 것이 못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 한성 판윤        유엄(柳儼), 공조 참판        서명구(徐命九), 승지        김상복(金相福)은 모두 박문수의 의논을 따랐다. 이조 판서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인삼을 구득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힘으로 70근의 인삼을 판비할 수 없어 사신을 맨손으로 가게 하는 것은 이웃 나라에 보일 것이 못됩니다. 모름지기 평양(平壤)과 강계(江界) 등처에 두루 수괄(搜括)하여 기필코 구득하는 것이 최선의 계책입니다."
하니, 임금이 신만의 말을 옳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왜인이 인삼을 아끼는 것이 견줄 데가 없을 정도이니 주지 않으면 장차 무거운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상금을 걸고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청컨대 외방에 나아가 널리 수문(搜問)해 보겠습니다. 그러고도 결국 구득할 수 없은 연후에 가을을 기다릴 계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극력 구하여 보게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번에 큰 사면(赦免)이 있었습니다만, 법에는 절제와 한도가 있는 것입니다. 도배(島配)된 사람을 출륙(出陸)시키는 것은 양이(量移)와는 다른 것인데, 도배 죄인 가운데 출륙한 사람을 혹 멀지 않은 내지(內地)에 배정한 것은 일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해당 의금부 당상관은 추고하고 다시 배소(配所)를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구를 어느 고을에다 정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윤광천(尹光天)은 부안(扶安)에, 조징(趙徵)은 태인(泰仁)에다 정배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제주(濟州)에서 배가 떠날 순풍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작년 12월에 죄인을 압송하여 데리고 간 도사(都事)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지체되는 데 관계가 됩니다. 죄인 임명주(任命周)를 압송하여 데리고 간 도사를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일 병술

오수채(吳遂采)를 대사간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민수언(閔洙彦)을 정언으로, 이규채(李奎采)를 부교리로, 조중회(趙重晦)·이게(李垍)를 부수찬으로, 조명건(趙明健)을 보덕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문학으로, 윤광소(尹光紹)를 겸 보덕으로, 정실(鄭實)을 겸 문학으로, 신회(申晦)를 사서(司書)로, 이성중(李成中)을 승지로, 박찬신(朴纘新)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통신사의 배에 불이 나서 예단(禮單)이 많이 불에 탔습니다. 이것이 뜻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사행의 일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삼가서 검칙(檢飭)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나처(拿處)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나처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고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통신사가 되었을 때 예단을 물에 적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압령(押領)한 역관만 추고했을 뿐입니다. 전례가 이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말이 좋다."
하고, 나처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인삼에 대한 일은 나가서 널리 수소문해 보니 모두들 약간 근도 전혀 구득할 형세가 없다고 합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불에 탄 70근은 이에 사신의 사사로운 예단이고, 국서(國書)의 예단은 불에 탄 숫자가 많지 않다고 하니, 이는 모쪼록 충당시켜 보내야 합니다. 사사로운 예단은 가을에 캐서 추후 보내도 좋겠습니다. 만부득이하다면 한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내국(內局)의 어약(御藥)에 소용되는 것 이외에 강삼(江蔘) 약간 근이 있습니다만, 이는 아래에서 감히 앙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교린(交隣)의 도리는 곧 하나의 ‘성(誠)’ 자일 뿐이다. 옛날 당(唐)나라 태종이 요(遼)를 정벌할 적에 친히 흙을 담은 부대를 짊어짐으로써 삼군(三軍)을 용동시켰었으니, 내국의 인삼을 특별히 돌보아 보조한다면 도신(道臣)·수신(帥臣)·부사(府使)가 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남의 일을 보듯이 할 수 있겠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급히 제도에 독책하여 이달 안으로 모아서 보내게 하라. 사행이 불태운 다른 물건도 해조로 하여금 갖추어 주게 하라."
하였다. 우승지 이종적(李宗迪)이 말하기를,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인삼 70근을 구득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일 구득하지 못한다면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만일 계속하여 보낸다면 그저 이웃 나라에게 수모만 받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대신이 내국의 인삼을 청한 것은 또한 개연스러운 일입니다. 인삼이 귀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어공(御供)을 덜어내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承宣)의 말이 진실로 좋다. 그러나 사세가 어찌할 수 없다."
하였다.

 

3월 3일 정해

눈이 내렸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눈보라가 치는 날 추위를 무릅쓰고 동가(動駕)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전배(展拜)할 기일을 물리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명하여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군향(軍餉)을 10만 석을 한도로 하여 매년 2만 석씩 돌려 가면서 나누어주고 기타의 첨향(添餉)과 모미(耗米)도 편의에 따라 은으로 만들어 뜻밖의 수요에 대비하게 했는데,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이 청한 것이었다.

 

3월 4일 무자

눈이 내리고 지진이 발생하고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콩과 같았다.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위에서 나와 서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효장묘(孝章廟)에도 임어하여 들렀다가 환궁하였다.

 

3월 5일 기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을 끝내고 나서 시독관(侍讀官)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어제 땅이 진동하는 변과 우박의 재이가 갑자기 양화(陽和)가 발생하는 계절에 있었으니, 천지가 함께 상도(常道)를 잃은 것입니다.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한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혹시라도 안일한 마음에 젖지 말고 재변을 없앨 방도에 대해 진념하소서."
하고, 검토관(檢討官)        이규채(李奎采)는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군도(君道)이고 지도(地道)는 신도(臣道)인 것입니다. 전하의 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찌꺼기가 없다면 천도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마음을 함께 하여 화협한다면 지도를 또한 화목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번·하번이 면려한 것이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지진 때문에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실상은 나의 박덕에 연유된 것이다. 경 등의 인구는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함경 감사        이종성(李宗城)의 장계로 인하여 환자곡[還上穀] 가운데 받아들이지 못한 각곡(各穀) 7천 1백 27석을 특별히 탕감시켜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쪽과 북쪽에 흔단이 발생하여 실로 걱정스러운 것이 많아서 내가 매양 밤중이 되도록 생각에 잠기는데, 혹 하루 아침에 일이 발생할 경우 손을 놓고 앉아서 보기만 하게 될까 염려스럽다. 사람을 얻는 것이 당금의 급무인데, 사람을 얻는 방도는 조정이 화협하는 데 달려 있으니, 경 등은 힘쓸지어다."
하자,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알기 쉬운 것은 곧 문재(文才)인데, 문사(文士) 또한 잘 등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가운데 알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 낼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매양 화협하라고 면려하십니다만, 오래된 유감이 잠시 평온해지면 새로운 원망이 계속 일어나는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인의 습성은 과연 곤란하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떠도는 걸인이 매우 많아서 어린 아이가 길가에서 울부짖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나의 적자(赤子)가 되어 길가에서 애타게 호소하는데도 돌보아 구휼하지 못하니, 이 또한 나의 잘못이다.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구제해 살려 본토로 돌려보내게 하라. 이들은 반드시 외방의 유민일 것이다. 아! 백 리를 다스리는 직임인 수령에게 만백성을 맡겼는데도 잘 무휼하지 못하여 도하(都下)에서 울부짖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내가 그들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각별한 마음으로 돌보아 구휼하여 돌려보낸 뒤에도 또한 구제해 살려서 기어이 잘 살아가게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제 청대(靑臺)의 보고는 경악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진눈깨비는 동령(冬令)인 것이고 우박은 음양이 서로 부딪혀 생기는 기운인데, 봄을 당하여 동령이 행해지고 써늘한 음기가 엉기어 떨리고 음양이 서로 부딪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바로 천기(天氣)가 화목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地道)가 지진을 고하는 것이 또 이럴 즈음에 있었으니, 어찌하여 천재와 지이(地異)가 아울러 하루 안에 집결된 것이 여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심(聖心)의 근심과 두려워함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아! 양화(陽和)가 화창해져야 온갖 만물이 발육하는 것으로 성주(聖主)께서는 하늘의 마음을 본받아 때에 따라 새로운 마음가짐을 지니십니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재이가 이미 극히 두려운 것이었는데 지금의 이 경고는 더욱 비상한 것이었습니다. 재앙은 헛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반드시 부르게 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감히 일을 가리켜 징후를 말하는 것을 한유(漢儒)들처럼 부회(傅會)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덕을 닦아 재이를 없애는 것은 실로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 등이 이에 대해 어떻게 한마디도 우러러 면려하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춘추가 만년에 이르렀는데도 분발하는 뜻을 지니시어 윤음이 나아가면 뭇 신하를 감동시키시니, 한결같은 정성의 지극함이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천지가 경고를 보이는 것이 이처럼 자주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 등에게 사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도 뜻은 지니고 있으면서도 혹 간단(間斷)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말씀은 하시지만 혹 실천을 잘 하지 못하여 아직껏 한 가지 정사(政事)도 대단하게 진작시켜 긴요하게 해 나감으로써 군정(群情)에 부답하고 천심을 기쁘게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인애하는 하늘이 자상하게 경고하여 전하로 하여금 더욱 면려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말할 만한 일에 대해 신 등이 하나하나 누누이 진달할 수 없어 그 가운데 큰 것만을 뽑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흉년이 계속 잇따라 곤궁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약간의 구포(舊逋)를 견감시키는 것은 가난한 백성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없습니다.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변방의 정세가 헤아리기 어려워 걱정스런 단서가 많은데도 전례에 따라서 주사(籌司)038)                  를 인접하는 것은 근본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책이 아닌 것입니다. 음붕(淫朋)을 타파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4년 동안 걱정하고 노고하였어도 건극(建極)의 공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기강을 진작 쇄신시키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온갖 법도가 해이되어 도리어 법을 무시하는 걱정이 있게 되었으며, 언자(言者)를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간언(諫言)을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인데도 대청(臺廳)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것이 전의 투식과 같으며, 인재를 수습하는 것은 정치를 보좌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도 초야에 묻혀 있는 유일(遺逸)이 아직도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며, 문단(紋緞)을 금하는 것은 사치를 제거하기 위한 것인데도 과연 질박한 데로 되돌리는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까?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유시(酉時)에 퇴근하도록 신칙한 것은 서관(庶官)을 감독하기 위한 것인데도 과연 직사에 삼가는 효과를 보았습니까? 은수(恩數)를 왜곡되이 내려 당폐(堂陛)의 존엄이 혹 손상되기도 하고,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하는 것이 이미 풍조를 이루어 조정에서 군신(君臣)의 토론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적은 것에 이르러서는 어찌 모두 전하께서 마땅히 두려워하여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정사(政事)는 말단인 것입니다. 그 근본을 궁구한다면 실로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인데, 마음을 다스리고 이치를 밝혀 스스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은 이에 학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성학(聖學)이 비록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고, 성후(聖候)가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있을지라도 백척 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한 걸음을 더 나가는 의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 이치를 익히 알고 계실 터인데 어찌 신 등의 천루(淺陋)한 이야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초심(初心)을 회고하여 분발시킴으로써 공언으로 귀결되지 말게 하시고, 더욱 등불을 밝히는 성공(聖工)을 독실히 하심으로써 혹시라도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에 소홀함이 없게 하소서. 오늘날의 재이를 자신을 훌륭하게 완성시키고 덕을 증진시키는 기틀로 삼으시어 끝없는 아름다움을 억만년토록 전해 가게 한다면 이에서 상천(上天)이 경고한 뜻에 부합되어 천심을 기쁘게 하고 재이를 전환시켜 상서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가납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3월 6일 경인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송창명(宋昌明)·성범석(成範錫)을 승지로 삼았다.

 

3월 7일 신묘

이춘제(李春躋)를 대사헌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집의로, 조재덕(趙載德)을 사간으로, 이광익(李光瀷)·남태혁(南泰赫)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정언충(鄭彦忠)을 지평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이태중(李台重)을 부응교로 삼았다.

 

이수홍(李壽弘)을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시켰다. 이수홍은 경성(京城)의 무뢰한인데, 밤에 그의 무리 3인을 따라 함께 술을 마시고서 길에서 여자를 만나 겁간하였다. 포청(捕廳)에서 추조(秋曹)로 이송(移送)하였는데, 여자가 처음 공초(供招)하기를,
"3인이 교대로 음간(淫奸)했습니다."
했다가, 다시 공초하기를,
"음간한 사람은 이수홍 1인입니다."
하여, 공초가 서로 틀렸다. 이수홍이 10여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니, 모두 사면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법대로 할 것을 청하였으나,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유독 죽이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 대사(大赦)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다.

 

종묘 도제조 김재로가 아뢰기를,
"태실(太室)의 지의(地衣)를 쥐가 쏟았으니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뒤에 봉심(奉審)하고 나서 이안(移安)하소서."
하니, 임금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먼저 김재로에게 봉심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가 봉심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제일실의 신탑 뒤 지의, 제오실의 신탑 뒤 지의, 제칠실의 신탑 뒤 지의, 제팔실의 신탑 뒤 동쪽 구석의 지의, 보장(寶欌) 아래의 지의, 제구실의 신탑 뒤의 지의, 제십일실의 책장 아래 지의는 모두 쥐가 쏟은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십일실 신장(神欌) 위의 격첩(隔帖), 제십이실 신장 위의 격첩은 모두 탈이 있어 마치 빗물에 젖은 흔적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묘 안에 흠결(欠潔)스런 일이 있는 것은 나의 성효(誠孝)가 두텁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하고, 11일에 고유제를 행하고 책보(冊寶)를 서행각(西行閣)에 봉안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3월 8일 임진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고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았다. 이어 육상묘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3월 10일 갑오

이형만(李衡萬)을 헌납으로, 심관(沈鑧)을 정언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설서로 삼았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단(禮單)의 인삼을 가을을 기다려 나중에 보내기로 한 것은 만부득이 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당한 천승의 나라로서 이런 구차스러운 일을 하는 것은 이웃 나라에 졸렬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국가에 수모를 끼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근래 비로소 상세히 들었는데 도하(都下)에도 삼을 저장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공가(公家)의 매매는 으레 값을 깎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것이 두려워서 감히 내어 놓지 않고 있는 것인데, 만일 한결같이 시가대로 준급(準給)한다면 소문을 듣고 마구 모여들게 되어 있어 70근이라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호조에 분부하여 시가에 따라 값을 정하게 해야 합니다. 일이 궁박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례에 구애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추후에 내려 보내는 것은 끝내 구차스러운 데 관계되는 것인데, 어떻게 상례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차자에서 청한 바에 따라 즉시 준매(準買)하여 내려 보내게 하라."
하였다.

 

사서(司書) 서효수(徐孝修)가 상소하여 동궁(東宮)을 보도하는 일의 마땅함을 진달하고서 산림에서 덕을 배양한 선비를 초청하여 맞이해서 덕성을 훈도하는 공효를 책임지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린 일039)  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 그 위에다 숙묘 어제시(肅廟御製詩)를 써서 들여오게 하여 간하기 좋아하는 정성을 개발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한 일은 내가 부덕한 탓으로 암혈에 은거하고 있는 선비들을 초치하여 나의 원량(元良)을 보도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마땅히 더욱 더 유의하도록 하겠다. 주 운의 일을 그리는 일에 대해서는 어제가 이미 본문에 기재되어 있으니 원량이 마땅히 봉람하고서 마음에 새겨 행할 것인데, 용면(龍眠)040)  을 꾸밀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어제를 쓴 그림이 아직도 그대로 있지만 그 그림을 보이지 않는 것은 또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흰 바탕이 있은 뒤의 일이라는 뜻에서인 것이다."
하였다.

 

공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진연(診筵)에서 삼가 성상께서 직접 하사하신 어시(御詩)를 받았는데, 은하수가 밝게 빛나듯 용한(龍翰)이 찬란하여 총광(寵光)을 한 몸에 입으니, 보고 듣는 이가 모두 용동(聳動)되었습니다. 천의(天意)가 애연(藹然)한 가운데 옥음이 부드럽고도 자상하였는데, 성상께서 신을 돌보고 신을 면려하신 것이 어찌 신을 선조(先朝)의 구물(舊物)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이 회포가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구신(舊臣)으로서의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성상의 성효(誠孝)와 지덕(至德)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 신서(臣庶)들만 흠복(欽服)할 뿐만이 아니라, 실로 천지의 신기(神祇)가 함께 감림(監臨)하신 바입니다. 무릇 봉선(奉先)하는 일과 추원(追遠)하는 예에 대해 마땅히 아름다움에 부합되어 감동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도 지난번에 음산한 무지개가 달을 가로질렀고, 근래에는 눈·우박·지진의 변이가 마침 재전(齋殿)에 임어하기 위해 대가(大駕)가 행행하던 날에 있었으니,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정신이 혼동되어 의혹에 젖은 것이 여러 날이었으나,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서경(書經)》을 상고하건대, 고종(高宗)이 융제(肜祭)를 지내는 날에 꿩이 울자 그 신하 조기(祖己)가 임금을 훈계하여 〈백성들이〉 덕을 따르지 않고 죄를 승복하지 않게 됩니다.’고 경계하고, 끝에 가서는 ‘예묘(禰廟)041)  에만 풍성하게 제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고종과 같은 임금은 은(殷)나라의 현성(賢聖)한 임금입니다. 3년 동안 양음(亮陰)한 것은 천고에 한 번 있었던 일이었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도를 생각하였던 탓으로 천제가 훌륭한 보필을 내려 주었으니, 효도에 돈독한 행실과 하늘을 섬기는 정성을 곧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융(肜)은 예제(禰祭)042)   인 것으로 다음날 또 지내는 제사 이름인데, 조금 풍성하게 하는 것이 있자 재이가 곧 뒤따랐으니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하는 기미가 메아리보다도 더 빠른 것입니다.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해석하기를, ‘훌륭한 임금은 본디 하늘과 통하는 것이므로 재이가 응하는 것이 항상 빠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종은 후하게 하는 데 지나쳤지만 그 또한 잘못한 것입니다. 잘못이 조금 드러나자마자 하늘이 갑자기 경고하였으니,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고종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이 점에 대해 수성(修省)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조기가 이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은, 임금이 때마침 우연한 것으로 여겨 스스로를 용서하여 재앙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경우 하늘이 반드시 멸절시키게 될 것을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지만 그러나 조기로 하여금 이처럼 심각하고 절실하게 끝까지 숨김없이 다 말하게 한 점이 바로 고종이 고종다운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영고(寧考)의 어정(御幀)을 진전(眞殿)에 제봉(躋奉)한 것은 이것이 더할 수 없는 성전(盛典)이요, 욕의(縟儀)인 것입니다. 그러나 태묘(太廟)에 부묘(附廟)하는 예(禮)에 견준다면 사체가 조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대사례(大祀禮)를 하루에 두 번 행하는 것은 이미 고종(高宗)의 융제(肜祭)보다 더한 점이 있는데, 더구나 봉안한 뒤에 음악을 연주하면서 연회를 즐겼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것은 부묘례(附廟禮) 가운데에서 특별히 삭제시키라고 명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묘알(廟謁)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는 효성이 극진하여 수시로 정(情)을 펴는 것이 예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만, 길일이 세 번이나 있어 물리거나 앞당기는 것에 대비할 수 있으니, 조금 더디게 하고 조금 빠르게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병을 삼가라는 경계를 소홀히 여겨 여러 신하들이 걱정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거스르면서 눈보라를 무릅쓰고 기필코 행하고야 마셨습니다. 이것이 성덕(聖德)에 있어서는 돈후하게 하는 데 잘못된 것에 불과하지만 하늘이 우리 임금을 인애하는 것이 본래 지극하였으니, 어찌 일에 따라 견고(譴告)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고하고 또 경고하여 간절히 하기를 마지 않는 것에서 성상께서 하늘을 감동시킨 덕이 고종과 부합된 점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독 한스러운 것은 전하의 조정 신하 가운데 조기처럼 임금을 간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그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뭇 신하들의 죄인 것입니다만,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기의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였는데, 우리 성상의 덕행이 혹 고종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을 신은 또한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효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자(天子)·국군(國君)·대부(大夫)·사서(士庶)의 효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공성(孔聖)이 대순(大舜)의 대효(大孝)를 일컬으면서 반드시 ‘성인(聖人)의 덕을 지녔다.’고 하였고, 무왕(武王)의 달효(達孝)를 찬송하면서 ‘잘 계술(繼述)하였다.’고 한 말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효도를 행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려 하신다면 반드시 선왕(先王)의 지사(志事)를 잘 준수하고 선왕의 헌장(憲章)을 잘 따르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고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어 무궁하게 전하여 가게 함과 동시에 후손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남겨 줌으로써 천하 후세로 하여금 선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추모하는 것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이 실상은 성효(聖孝)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구구하게 기원하는 것입니다.
신이 소장을 완성한 후 삼가 듣건대 성가(聖駕)가 황단(皇壇)에서 환궁하는 길에 또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였다고 합니다. 성상께서 일생 동안 끝없이 사모하는 마음에 있어 날마다 전성(展省)한다고 해도 어찌 흡족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정(情)은 무궁하지만 예(禮)에는 절한(節限)이 있다는 것이 옛사람의 훈계인 것입니다. 혹 성상께서 이 점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보필하는 지위와 근밀한 반열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경계하고 일깨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신은 더욱 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고칠 수가 있으니, 아울러 성명(聖明)께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소장을 봉입(奉入)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불효하기는 하지만 공판(工判)이 차마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영정(影幀)을 봉안할 때 제사지내는 예를 고종이 융제를 지낸 것에 견주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닌가? 황단(皇壇)에서 돌아올 때 사묘(私廟)에 들러 배알한 것은 진실로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그 다음날은 곧 나의 사친(私親)의 기신(忌辰)이니, 잠시 전알하는 것이 어찌 방해됨이 있겠는가? 이 기진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기해년043)   시위 때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난번 선정전(宣政殿)에서 ‘강주(江州) 사마(司馬)의 청삼(靑衫)이 젖었다.’는 하교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제사지냈다는 이야기를 하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그날 음악을 진설한 일은 곧 상하가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곧 이어 너무 즐기는 데 대한 경계를 하였었다. 그리고 옥당(玉堂)의 차자도 있었는데, 그치지 않고 중언 부언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와 옥당이 이기진(李箕鎭)의 소장 때문에 상소하여 진달하고 곧바로 나아가니,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3월 11일 을미

하교하기를,
"동가(動駕)할 때 약방 제조(藥房提調)는 참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미를 받은 제조는 체차시키라."
하였는데, 제조는 곧 이기진(李箕鎭)이었다. 신만(申晩)으로 대신하였다.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여 다시 이 기진의 소장을 읽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용염(龍髥)044)  을 잡을 수 없어 한스러웠는데, 오늘날 다시 영정(影幀)을 우러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뭇 신하가 추모하는 마음이 배나 증진될 때인데, 더구나 옛날의 신하이겠는가? 그의 소장 내용의 상관(上款)과 하관(下款)이 은연중 하나로 일관되게 고종(高宗)의 융일(肜日)에 견주고 있는데, 그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어떻게 감히 선조의 영정을 도로 봉안할 때 제사 하는 예를 기척(譏斥)하여 융제에 견줄 수 있겠는가? 내가 사묘(私廟)라는 두 글자를 들을 적마다 나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내가 지난번 선조의 구신(舊臣)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특별히 어제(御製)를 내리고 면유(面諭)했었다. 은수(恩數)가 너무 설월(屑越)하여 하루에 두 번 제사지낸다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하니, 이기진이 황공하여 명을 기다렸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고유제(告由祭)는 곧 친향(親享)하는 뜻이었다. 문을 연 뒤에 곧 헌관(獻官)의 단자(單子)를 아뢰게 하는 것은 이것이 국법에 있는 것이니, 해당 이조 당상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대신 가운데 나이가 많고 실지로 병이 들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신(宗臣)으로 대차(代差)하는 것은 이미 개연스러운 데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혹 대신으로 자처하지 않던 자가 반행에서는 모두 대신으로 행세하고 있는데 제향이 어떤 일인데 감히 겸양한단 말인가? 여러 집사들 가운데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 모두 귀양 보내는 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유제(告由祭)·환안제(還安祭)를 설행하는 것은 본디 상례(常禮)인 것인데, 이 기진이 하루에 두 번 제사지냈다고 비난하였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기진은 본디 고집스럽고 편협한 병통이 있기 때문에 말이 뜻을 통달시키지 못한 탓으로 성교를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른바 정(情)은 무궁하지만 예에는 절한(節限)이 있다고 한 것은 그의 직책이 성궁(聖躬)의 보호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성체(聖體)에 해로움이 있을까 우려해서 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신은 범염(犯染)한 것이 있어 감히 헌관(獻官)으로 나아가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영돈녕부사 정석오(鄭錫五)도 집에서 범염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돈녕부사는 원래 대신으로 자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에 하교하였다."
하고, 이어 정석오가 분황(焚黃)할 적에 말미를 주고 말과 요전상(澆奠床)045)  을 주라고 명하였다. 정 석오가 황공하여 명을 기다리니,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태실(太室)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봉심(奉審)한 뒤 재실(齋室)에 임어하여 하교하기를,
"본서(本署)의 관원이 출입할 때 노대석(路臺石) 안에서 하마(下馬)하는 자는 중률로 다스리겠다."
하였다.

 

3월 12일 병신

임금이 친히 고유제를 지내고 나서 이안(移安)한 각실(各室)을 직접 봉심하고 개수한 뒤 임금이 또 친히 환안제(還安祭)를 지내고 밤이 되어서야 환궁하였다.

 

3월 13일 정유

하교하기를,
"이번에 직접 봉심하고 한 번 수개함에 있어 민폐를 알 수 있었다. 봄·가을로 봉심할 때 탈이 난 곳이 있으면 서계(書啓)하고, 탈이 난 곳이 없으면 탈이 없다고 아뢰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 것이다. 장석(帳席)이 조금 젖은 것을 탈이 난 것으로 일을 만들 경우, 이를 수개하는 것은 촌주(寸紬)와 척석(尺席)에 불과한 것인데 사람을 부리느라 떠들썩한 불경스런 일이 있게 된다. 이 뒤로는 탈이 났을 경우 반드시 정밀하게 하여 억지로 탈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잡란(雜亂)스러운 폐단이 없게 하라."
하고, 신탑(神榻)의 욕석(縟席) 내공(內供)은 이 뒤로는 명주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수복(守僕)들의 의자(衣資)는 봄·가을로 마련하여 더 지급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아뢴 것이었다.

 

3월 14일 무술

이중경(李重慶)을 대사간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사간으로, 이진의(李鎭儀)·유현장(柳顯章)을 장령으로, 안상휘(安相徽)를 보덕으로, 김종태(金宗台)를 필선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교리로, 김상성(金尙星)을 병조 참판으로, 이광세(李匡世)를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암행 어사 윤광찬(尹光纘)·임위(任瑋)·권숭(權崇)을 호서(湖西)·해서(海西)·경기(京畿)에 나누어 파견하였다. 그들을 불러서 접견하고 하유하기를,
"지난번 굶주린 아이가 길가에서 울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매우 불쌍하고 딱한 마음이 들었다. 이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에 지쳐 자식을 보호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대들을 보내는 것은 곧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여 살리자는 의도인 것이니 모쪼록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그리고 반드시 불법에 관계된 문서를 얻은 연후에야 봉고(封庫)해야 된다."
하였다.

 

도중(都中) 사대부(士大夫)의 문밖에 존위(尊位)를 설치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고, 뒤에 범하는 자가 있으면 경조(京兆)로 하여금 형추(刑推)한 다음 원배(遠配)하게 했는데 사정 당상(査正堂上) 구택규(具宅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유언민(兪彦民)을 태인현(泰仁縣)에, 안집(安𠍱)을 안동부(安東府)에, 이게(李垍)를 순안현(順安縣)에, 김양택(金陽澤)을 숙천부(肅川府)에, 윤봉오(尹鳳五)를 함종부(咸從府)에, 이창유(李昌儒)를 중화부(中和府)에, 송영중(宋瑩中)을 성주목(星州牧)에 투배(投配)하였으니, 모두 친제(親祭) 때의 집사로서 진참(進參)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간혹 시골에 있어서 자신이 집사가 된 줄도 모른 사람도 있었는데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혀 온 사람이 25인이었으며, 모두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3월 16일 경자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권항(權抗)을 정언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승지로 삼았다.

 

이기진에게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위보(李渭輔)를 삭출시키고, 사복시 주부 김치량(金致良)을 하옥시켰다. 이위보가 상소하기를,
"나라의 멸망이 목전에 닥쳐 있어 담이 써늘하고 몸이 떨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이에 감히 경개(梗槪)를 대략 진달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마음을 밝혀 반성하여 혁연(赫然)히 분발함으로써 신민(臣民)을 경숙(警肅)시키고 기강을 진기 쇄신 시키는 것이 더없는 큰 소원입니다.
경사(京師)는 곧 사방의 수선(首先)이 되는 곳인데도 풍교의 괴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근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권세가에서 여항 사람의 처첩을 잡아다가 간음하고 속이고 모함하는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추악한 작태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의 원망과 분노가 들끓고 파란이 일어나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위로 진신(搢紳)에서부터 아래로 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역적 허견(許堅)이 다시 오늘날의 세상에 태어났는데도 아직껏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두가 권세가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모두 귀머거리인데 신만이 유독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지금 세상의 역적 허견이라고 한 것은 곧 사복시 주부 김치량입니다. 그는 본디 거칠고 패려스러운 성품을 지닌데다가 음란하고 사특한 행실을 겸하였으며 멋대로 불법한 짓을 행하였는가 하면 엽색 행위가 낭자했습니다. 그가 평시서(平市署)에 있을 적에 하리(下吏)들에게 미색을 징구(徵求)하였기 때문에 하리가 자기의 종매(從妹)를 바치기까지 하였으며, 장흥고(長興庫)에 있을 적에는 공해(公廨)에서 여인을 끼고 음란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성명을 큰 소리로 마구 부르면서 온갖 후욕(詬辱)을 당했습니다만, 김치량은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여색을 탐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지난해 12월에 김치량이 왜역(倭譯) 박상순(朴尙淳) 첩의 자색이 매우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서 추조(秋曹)의 풍문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무뢰배 10여 인을 보내어 밤을 틈타 박상순의 집에 돌입, 결박하여 오게 한 다음 태복시의 공해(公廨)에서 강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박상순이 그 여자를 데리고 산 지가 지금까지 10여 년이 되었고, 수삼 인의 자녀까지 낳았는데, 김치량이 협박하여 잡아다가 겁간하였으니, 이로부터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장차 처첩과 부녀들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풍기를 크게 손상시켜 무너뜨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적 허견이 여항의 부녀들을 겁탈하여 그의 탐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그것이 은감(殷鑑)이 되고 있으니, 어찌 더더욱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여항의 가정집 것을 빼앗아 가져오는 것을 범한 경우, 당률(當律)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여항의 부녀들을 빼앗아 간음한 것에 대해서는 유독 정해진 형률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김치량이 포청(捕廳)에 사람을 보내어 말을 하면 포청에서는 그의 풍지(風旨)를 받들어 사실과 틀린 문권을 꾸며내는데 이것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밝히는 계책으로 삼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의 말을 막는 계책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의 계교는 공교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된 것입니다.
저 이수홍(李壽弘)은 김치량에 견주면 그래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수홍은 깊은 밤 길에서 여인을 만난 것으로 당초 사람을 보내어 겁략하여 오게 한 일이 없는데도 일년이 넘도록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차 현신을 받았고, 이제 대사면으로 인하여 성상께서 살리려는 의논에 붙이기 위하여 순문(詢問)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묘당(廟堂)의 의논은 법대로 용서하지 말고 집행해야 된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 김치량의 음악(淫惡)스런 거조에 대해서는 혹 듣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신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김치량을 속히 왕부(王府)에 내려 이수홍의 예에 따라 엄히 신문한 다음 법을 바루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신의 이 한마디가 입에 나가면 몸뚱이가 가루가 되는 화가 금방 이를 것입니다만, 신은 3백 년 동안 세록(世祿)을 받은 집안의 신하로서 항상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한다는 의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하늘을 흔드는 권세의 기염을 돌아보지 않고 망령되이 범촉하면서 감히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소장을 열람하고 나서 기꺼워하지 않으면서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그 소장의 서두 내용은 마치 큰 일을 말할 것 같았는데 결국 하나의 김치량을 논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단지 김치량의 일만 논하면 족할 것을 그렇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그의 제족(諸族)들을 아울러 죄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다. 도척(盜跖)과 유하혜(柳下惠)046)  , 왕돈(王敦)과 왕도(王導)047)  는 서로 간섭되는 것이 없는 것이니, 김치량에게 설사 패려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어(措語)를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미안스러운 것이다. 역적 허견이 다시 태어났다든가 하늘을 뒤흔드는 권세의 기염이라든가 하는 등등의 이야기는 모두 지나친 말인 것이다. 이른 바 묘당의 의논이 용서하지 말자고 했다는 것은 또한 영상(領相)을 가리킨 것이니 세도(世道)를 살필 수 있다."
하고, 이위보를 삭출시켰다. 김치량을 해부(該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는데, 이위보의 소장을 가지고 엄히 형문하여 그의 구초(口招)에 관련된 사람들도 형조로 하여금 옥에 가두고 신문하게 하였다. 임금이 김치량의 일에 대해 조현명(趙顯命)에게 하문하니,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김치량은 본디 가르침을 따르지 않던 자제인데, 이제 그 일에 대해서는 과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진실로 안치(按治)하여 기강을 면려시켜야 합니다만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그의 집을 보전시키는 방도에 대해 생각하소서. 김씨(金氏)는 실로 수십 년 동안 나라를 위한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겨 초연(愀然)히 말하기를,
"나는 많은 세상을 열력하였으므로 인정과 세태에 대해 대강 살펴 알 수 있다. 뒷날 사람을 구타하여 구덩이에 넣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운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오랫동안 걱정하면서 탄식하였다. 김재로가 그 말을 듣고 즉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조현명이 물러가서 또 차자를 올리기를,
"김재로가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이미 결단하였으니, 위에서 지성으로 힘껏 만류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부르기를 마지 않자 김재로가 이에 출사하였다. 김치량은 김취로(金取魯)의 아들이었다.

 

부수찬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조중회가 일찍이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었는데 임금이 노여운 바람에 그의 아버지 조영복(趙榮福)이 일찍이 엄시(閹寺)를 통하여 벼슬을 구했던 일을 폭로하여 드러내어 꾸짖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조중회의 소장을 보고 깊이 뉘우치면서 이르기를,
"주서(注書)가 일을 기록함에 있어 착오를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 내가 마땅히 그를 부르겠다. 지난번 그 아들의 놀라운 거조로 인하여 말이 그의 아비에게 언급된 것에 대해 스스로 잘못임을 깨달았다. 대저 환시(宦寺)의 무리는 거짓으로 뜬말을 만들어 아무는 이러하니 마땅히 이렇게 조처해야 하고, 아무는 이러하니 마땅히 이렇게 조처해야 한다고 말하여 서로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만드는데, 이는 바로 저들의 놀랍고 패려스런 말인 것이니, 그 사람에 대해 노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개연스런 마음으로 인하여 하교하였으나 그뒤 생각해 보니 스스로 잘못임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논하지 않으면 그 아들이 무엇을 연유하여 아비의 억울함을 신리(伸理)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비답을 내리기를,
"말단에 부진(附陳)한 것은 연교(筵敎)에서 개석(開釋)하였고 이미 나의 잘못임을 알고 있으니 그대의 아비에게 무슨 누가 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조중휘가 즉시 나아와서 사례하고 입직(入直)하였다. 임금이 또 그를 불러서 접견하였다.

 

3월 17일 신축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스스로 진달하기를,
"녹위(祿位)가 너무 융성하여 이치에 있어 재앙을 부르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들의 말이 위태롭고 두려워 형체는 있지만 마음은 죽었으니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여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가 날로 괴리되어 전에는 조(趙)·송(宋)의 건곤(乾坤)이라는 말이 있더니, 지금은 경이 임금을 보좌하는 정승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기와 노여움이 오로지 경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심하여 왔는데 어떻게 동요될 수 있겠는가? 나와 경은 함께 늙었다. 두 노인이 서로 도와서 힘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릴 뿐이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김재로가 간곡히 재삼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성묘하러 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만일 허락을 받지 못하면 신은 장차 곧바로 돌아가는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허락하고서 기일을 정하여 갔다가 오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경을 버리지 않는데 경이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18일 임인

대사성과 태학(太學)의 장의(掌議)·색장(色掌) 3인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치량의 공사(供辭)에 연소할 때 두서너 명의 벗을 따라서 여색에 대한 경계를 범한 적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서 선비들이 글을 읽지 않고 외도(外道)로 달리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관(賢關)에 탁류(濁流)를 쳐내고 청류(淸流)가 일게 하듯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이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니, 대사성 홍봉한(洪鳳漢)이 3인 등과 함께 차례로 진달하기를,
"지난번 소유(疏儒)의 죄가 그의 아비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규피(規避)하면서 반궁(泮宮)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어 사기(士氣)가 날로 저상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기가 어찌 나 때문에 최절(摧折)되겠는가? 진 시황(秦始皇)은 큰 솥을 설치해 놓고 27인을 삶고서 침을 흘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모초(茅焦)048)  는 당초 세록신(世祿臣)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나아와 과감하게 말하였다. 가령 내가 진 시황처럼 난폭하다고 하더라도 사기가 이러한 것은 부당한 일이다. 황조(皇朝) 말에 절의를 세운 사람이 제일 많았는데 나는 이를 슬프게 여기고 있다. 평시에 어찌 간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한 사람도 말한 사람이 없었다가 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서 목숨을 바쳐 절의를 세웠는데 비록 목숨을 바쳤어도 그것이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이는 쓸데없는 절의인 것이다. 위징(魏徵)이 ‘양신(良臣)이 되기를 원하지 충신(忠臣)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 고 한 이야기가 좋다. 소유(疏儒)들이 잘못 듣고서 상서한 것은 참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비를 죄준 일에 대해서는 내가 과연 추후 후회하고 있다. 따라서 어찌 정거(停擧)를 풀어 주는 것을 아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정거를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또 동몽 교관(童蒙敎官) 3인을 나오게 하여 마음을 다져 먹고 교훈하라고 면려하였다.

 

은산현(殷山縣)의 화재를 당한 사람들에게 병인년049)  의 전례에 따라 회계(會計)에 붙인 좁쌀 각 1석씩을 지급하여 돕게 하고, 불에 타서 죽은 사람에게는 휼전을 거행하게 했는데 도신(道臣)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경상좌도 전 병사(兵使) 유동무(柳東茂)를 기장현(機張縣)에 장류(杖流)시키고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였다. 유동무는 장죄(贓罪)로 어사에 의해 주달되어 잇따라 고신(拷訊)을 당하였으며 두 번이나 본도에 조사하느라 1년이 넘도록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감출(勘出)되었다.

 

어떤 도둑이 궐문에 투서(投書)하였다. 초혼(初昏)에 어떤 사람이 궐문 밖에서 흥원문(興元門)의 수졸(守卒)을 부르면서 문틈으로 하나의 봉서를 던져 넣고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이선전(李宣傳)에게 전하라."
했는데, 선전관 이택(李澤)이 과연 바야흐로 입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뜯어 보니 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 수졸을 포박한 다음 글을 가지고 가서 정원(政院)에 고하였다. 입직 승지 김상복(金相福)·남유용(南有容)이 청대(請對)하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으로 나아와 승지를 불러서 접견하니, 승지가 그 봉서를 아뢰었다. 임금이 즉시 병조의 입직 당상을 불러 다시 그 수졸을 힐문하게 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궁성을 두루 살피게 하였으며 좌우 포청(左右捕廳)에 신칙하여 즉각 기찰하여 체포하게 하였다.

 

3월 19일 계묘

달무리가 지고 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투서의 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아침 일찍 대궐에 나아와 청대하고 비국의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에 모였다. 조현명이 구성임(具聖任)에게 말하기를,
"투서한 도적을 잡지 못하면 내가 장차 포장(捕將)을 죄줄 것을 청할 터인데 공(公)이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구성임이 불쾌한 안색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도적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죄를 받을 뿐이요 결단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자, 조현명이 잠자코 있었다. 입견(入見)하여서는 드디어 좌우 포장 박찬신(朴纘新)·정수송(鄭壽松)을 파직시킬 것을 아뢰고 나서 이어 아뢰기를,
"구성임이 포장의 대임(代任)이 될 수 있는 데도 조금 전에 조당(朝堂)에서 실언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고, 그의 이야기를 아뢰니, 임금이 놀랍게 여겨 또한 파직시켰다. 그리고 양 포장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 오게 하고 해청(該廳)의 종사관(從事官) 등은 원배(遠配)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조현명에게 하문하기를,
"경은 이번 투서한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두 가지 단서가 있는데 하나는 무신년050)   잔당들의 소행일 수 있고, 또 하나는 간인(奸人)들이 조정을 놀라게 하여 옥사를 빚어 내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외면 상으로는 허탄한 일인 것 같지만 지금 재이가 매우 혹독한 것을 감안하면 그 의도가 심상한 것이 아닙니다. 신은 국가가 무사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성응(金聖應)·이의풍(李義豊)을 좌우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3월 20일 갑진

햇무리가 지고 좌이(左珥)가 있었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임금이 국조 어첩(國朝御牒)에 봉고(奉考)할 것이 있으니 채여(彩輿)에 실어 전례에 따라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갖추게 하였다. 숭현문(崇賢門)에 이르자 구관 당상이 받들고 입시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전상(殿上)에서 지영(祗迎)하고, 승지 이하는 계하(階下)에서 지영하였다. 임금이 봉람(奉覽)하고 나서는 지송(祗送)하는 것을 올 때와 같이 하였다. 다시 석음각(惜陰閣)에 나아가 교정 당상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을 불러서 접견하고 나서 승지에게 명하여 어용(御容)을 도사(圖寫)한 해와 봉안(奉安)한 전명(殿名)을 쓰게 하고 어첩(御牒)에 주를 달게 하였다.

 

지평 정언충(鄭彦忠), 정언 권항(權抗)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정시(庭試)의 무과 초시(武科初試)에는 삼기(三技)에 이기(二技)만 입격되면 뽑는데도 단지 59인뿐이어서 원액 1백 50인의 숫자에는 태반이 부족한 형편이므로 사세가 장차 단기(單技)로 승부(陞付)시켜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관의 의견은 육량전(六兩箭) 세 대를 쏘아 맞히는 것으로 승부시키려 하기 때문에 유엽전(柳葉箭)을 세 번 맞힌 사람은 하나도 참여되지 못했습니다. 전례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면 유엽전을 육량전보다 우선하게 한 규례가 많이 있었으므로 신 등이 이에 따라 쟁집 하였습니다만, 시관의 의견은 육량전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하여 끝내 의견이 귀일되지 않은 탓으로 곧바로 사차(私次)로 돌아왔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시소(試所)에 하유하였고 초기(草記)도 점하(點下)하였으니, 차서를 자신의 의견에 따라 억지로 쟁집할 필요가 없다. 하교한 것에 따라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3월 21일 을사

이익보(李益輔)를 승지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형조 판서로, 이주진(李周鎭)을 동지의금부사로, 조중회(趙重晦)를 부교리로, 이의풍(李義豊)을 도총관(都摠管)으로, 이보혁(李普赫)을 부총관으로 삼았다.

 

3월 22일 병오

공주(公州)의 기병(騎兵) 김태갑(金泰甲) 등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휼전을 시행하였다.

 

3월 23일 정미

햇무리가 졌다.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아래에는 이(履)가 있고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는데, 빛깔이 안은 붉은 색이었고 밖은 푸른 색이었다.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집의 이구령(李耉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기강이 해이하여져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도 또한 물러 나기도 하며 문제(文宰)로서 무시(武試)에 의망된 경우에는 한 사람도 패초를 받드는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너무 미안스럽습니다. 그리고 대신(臺臣)으로 낙점을 받은 사람 가운데 또한 밖에 있는 자가 많아서 정원을 채울 길이 없어 밤이 되도록 번거롭게 품달하기에 이르니, 사체에 있어 한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시관으로서 패초를 어기거나 대신으로서 밖에 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하여 칙려하는 방도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라 아울러 파직시켰다.

 

자책하는 하교를 내려 구언(求言)하고, 정시(庭試)에서 급제한 사람들의 유가(遊街)를 금하게 하였는데, 흰 무지개의 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동지사(冬至使)가 들어갈 적에 심양(瀋陽)으로 가는 도중에 따라가던 원역(員役) 가운데 은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는데 길가의 인가를 수색하여 찾았다. 이에 앞서 우리 나라 사행을 따라 연경으로 들어가던 원역들이 누차 은을 잃어버리는 걱정이 있었는데, 드디어 적호(賊胡)를 포박하여 심양의 형부(刑部)에 정문(呈文)해서 징계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심양의 장수가 이미 망우초(蟒牛哨)의 일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 않던 차이어서 매우 불평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에 ‘조선인이 스스로 간사한 짓을 행하고서 대국(大國) 사람을 속여 무함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사행이 다시 심양에 도착하자 은을 잃어버린 사람, 여러 간증인(干證人) 및 정문(呈文)한 역관 등을 구금시키고서 협박하여 자복하게 하느라 결방(決放)할 뜻이 없었다. 사행이 이 때문에 심양에 억류되어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주 부윤이 치계(馳啓)하여 아뢰었는데, 임금이 운대(雲臺)에서 재이를 보고한 것 때문에 승지를 불러 전교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던 차에 의주의 장계가 마침 도착하였다. 임금이 열람하고 나서 걱정하며 말하기를,
"이 일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 나라 안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국경에 대한 걱정이 또 이러하니, 재이는 헛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치량(金致良)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고 영암군에 정배(定配)하였다. 김치량이 누차 공초하여 대략 승복하였는데 단지 말하기를,
"한진(漢眞)을 불러오게 하였으나 즉시 돌려보내었을 뿐 그와 사통(私通)하지 않았으니, 한진과 대질시켜 주소서."
했는데, 한진은 대소(臺疏)에서 이른바 강간당했다는 여자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가 시킨 사람들의 공초에는 모두 겁간했다고 증언하였다. 임금이 ‘그 일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공해(公廨)에서 강간한 데 대한 율문(律文)이 없으며 또 한진은 본디 창기이다. 처음에는 협박을 당하였으나 끝내는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니, 강간으로 논할 수 없다. 이는 바로 율문에 이른바 강제로 끌려 여기에 왔으나 화응한 것에 해당되니, 죄를 마땅히 감등시켜야 한다.’고 여기고, 이에 김치량은 그 이름을 사판에서 삭제한 다음 먼 변방에 정배시키게 하였으며, 그의 지시를 받고서 겁박한 사람들은 도배(島配)하기도 하고 원배(遠配)하기도 하였다. 한진은 형추(刑推)한 다음 동래부(東萊府)로 쇄환시켰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치량은 이에 그의 숙부가 임명주(任命周)에게 공박당하여 창황히 대명(待命)할 때 차마 이런 마음을 먹었으니, 참으로 무상한 자이다. 이는 보통 귀양 보내는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지도를 상고하여 먼 변방으로 내쳐야 한다. 하지만 관서·관북은 장차 그의 음란을 도울 우려가 있으니, 호남이나 영남으로 보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영암에 정배하였다.

 

3월 24일 무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시험의 기일을 조금 물림으로써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다는 뜻을 보여 하늘의 견고(譴告)에 답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과장(科場)의 사체가 중하고 춘궁기에 시골 선비들이 식량을 싸 가지고 올라왔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는데, 재이 때문에 연방(延訪)한 것이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임금이 먼저 보색(保嗇)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조정이 처음에는 서로 경알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살육하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탕평책으로 조제하여 온 수십 년 이래에는 다행히 살육의 화는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이려는 마음이 상당히 움직여져 이언세(李彦世)가 영상에 대해서와 김굉(金硡)이 이주진(李周鎭)에 대해서 모두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당(黨) 가운데에서도 각기 완만한 쪽과 준급한 쪽으로 나뉘어 있으니 이는 조정의 복이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더 살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을 가리려면 마땅히 먼저 초사자(初仕者)를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승전(承傳)에 의한 것이 너무 많은데, 이것이 사도(仕道)가 난잡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하고,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당론이 종식되지 않는 것은 환득 환실(患得患失)051)  의 마음에서 연유된 것으로 완만한 쪽과 준급한 쪽은 피차 다 같이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장무동(將無同)052)  인 것입니다. 그러나 공심(公心)으로 살피고 공정하게 절충하여 치우치는 것이 없게 한다면 저절로 화평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차례로 진언하게 하니,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많은 수령을 전조(銓曹)에서 또한 일일이 잘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어사가 양리(良吏)라고 아뢴 자는 대신과 전조에 하문하며 그 실상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름을 기록하여 향안(香案)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수령이 모자라면 정관(政官)에게 주어 보임 시키게 하기도 하고, 어묵(御墨)으로 직접 제수하기도 하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하늘에 응하는 도리는 실지로써 해야 하는 것이요 겉치레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더욱 면려하소서. 조상(朝象)이 화평하지 못한 흠결은 있습니다만 죽이려는 마음과 환득 환실의 마음이 있다고 한 것은 그 말이 어찌 일세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급(尹汲)은 말하기를,
"대신이 수령을 잘 가려야 한다는 것을 앙달했는데 어찌 조정은 버려두고 사방을 먼저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산림의 여러 사람들과 향외(鄕外)에서 인망을 지니고 있는 선비를 진용(進用)해야 합니다."
하였다.

 

3월 25일 기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시사(試士)했는데 김치인(金致仁) 등 5인을 뽑았다.

 

박필균(朴弼均)을 예조 참판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헌납으로, 이제화(李齊華)를 장령으로, 이세진(李世璡)을 동지의금부사로, 김치인(金致仁)을 전적으로, 김윤장(金潤章)을 선공감 주부로 삼았는데, 위의 두 사람은 문무과(文武科)의 장원이었다.

 

3월 26일 경술

양주(楊州) 등 고을의 물려 죽거나 불에 타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시행하였다.

 

3월 27일 신해

해 위에 관(冠)이 있었고 왼쪽에는 극(戟)이 있었다.

 

3월 28일 임자

영중추부사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치사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3월 29일 계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심성진(沈星鎭)을 이조 참의로, 정익하(鄭益河)를 대사성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집의로, 박수(朴璲)를 헌납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조재덕(趙載德)을 교리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수찬으로, 이형만(李衡萬)을 필선(弼善)으로, 이태중(李台重)을 겸보덕(兼輔德)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