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4월

싸라리리 2025. 9. 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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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무오

이기진(李箕鎭)을 판의금부사로, 이보혁(李普赫)을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는데, 이기진이 즉시 사진(仕進)하지 않자 금추(禁推)를 명하였다가 곧 이어 그만두고 정우량(鄭羽良)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4월 5일 무오

이형만(李衡萬)을 집의로, 이진의(李鎭儀)·최익수(崔益秀)를 장령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지평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임어하여 궐문에 투서한 죄인을 친히 국문하였다. 이에 앞서 천경졸(踐更卒)053) 팔금(八金)이란 자가 궐직(闕直)했다가 선전관이 순검(巡檢)할 때 적발되었는데, 곧 투서하던 날 밤이었다. 포청(捕廳)에 수감되었는데, 어느날 팔금의 이웃에 사는 여자가 팔금의 아내 도합(桃合)이 매우 슬피 우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도합이 말하기를,
"우리 남편이 대궐에 글을 전한 일 때문에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우는 것이다."
하였는데, 포교(捕校)가 마침 그 말을 기득(譏得)하게 되었다. 이에 포도 대장 김성응(金聖應) 등이 도합을 체포하여다가 신문하니, 말하기를,
"남편이 돈 30문(文)을 남에게서 받고 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요서(妖書)의 모양에 대해 말하였는데, 증험이 되었다. 들어와서 아뢰니, 임금이 죄인들을 친히 국문하겠으니 포청에 수감한 자들도 아울러 대궐로 올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팔금을 신문하니, 팔금이 공초하기를,
"지난 18일 조관석(趙觀錫)의 집에 갔더니, 조관석이 하나의 봉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 봉서를 선전 관청(宣傳官廳)에 전한다면 마땅히 그 노고에 보답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전하였습니다."
하고, 조관석을 신문하니 팔금과 면질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팔금의 말이 상당히 꿀렸다. 도합을 신문하니 도합 또한 우물거렸다. 흥원문(興元門) 직문군(直門軍) 이천기(李天起)를 신문하니, 이천기가 말하기를,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상세히 살피지는 못했습니다만, 봉서를 전한 사람은 갓을 썼고 수염이 있고 목소리는 쉰 것 같았습니다."
하였는데, 포청에 구류시키라고 명하였다. 병조의 조보군(朝報軍) 이광빈(李光彬)을 신문하고 나서는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으며, 박중근(朴重根)을 신문하고 나서 역시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조관석을 신문하니, 조관석이 말하기를,
"선전 관청의 봉서 내용은 한굉(韓浤)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한굉을 잡아오게 해서 신문하니 한굉 또한 자복하지 않고 조관석과 면질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둘 다 입락(立落)이 없었다. 판의금부사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죄인이 대궐에 올라올 적에 의심스런 사람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잡아다 포청으로 보내어 신문하게 하였더니, 조관석의 노예로 이름이 호랑(虎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호랑을 신문하니, 과연 그의 도노(逃奴)였는데, 공인(貢人)을 위하여 막(幕)을 지고 왔었다고 하였다. 조관석에게 도노의 유무(有無)를 신문하니, 호랑의 말과 합치되었다. 임금이 그의 의복이 남루한 것을 불쌍하게 여겨 옷을 주고 방송시키게 하였다. 도합도 방송시키게 하고 또한 한굉도 방송시키게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신문할 만한 단서가 없기 때문이었다. 팔금은 백령도(白翎島)에 도배(島配)하였으며 조관석은 미처 배소(配所)를 정하기 전에 죽었는데 아울러 모두 허탄하여 실상이 없었으므로, 다시 현상금을 걸고 구포(購捕)하게 하였다. 팔금의 초사(招辭) 내용은 자주 바뀌었고, 그가 이른바 꾀어서 봉서를 전하게 했다는 사람인 조관빈도 증험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날 친국(親鞫)하였으나 결국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비로소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대사간 이중경(李重庚), 교리 조중회(趙重晦), 승지 이익보(李益輔)를 체직시켰다. 국문(鞫問)을 파하면 대간(臺諫)이 마땅히 전계(傳啓)해야 하는데, 이중경이 시론(時論)에 참섭하려 하지 않아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피하는 말이 구차스럽다는 이유로 아뢴 대로 따랐다. 집의 이형만(李衡萬)이 또 논박하여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역시 인피하고 물러갔다. 조중회·이익보가 함께 이중경을 공박하고 대계(臺啓)를 윤허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협잡하다는 이유로 아울러 체차시켰다.

 

4월 6일 기미

객성(客星)이 실수(室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김한철(金漢喆)을 승지로 삼았다.

 

영해(寧海)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시행하였다.

 

장령 권익수(權益秀)를 삭출(削黜)시켰다. 권 익수가 말하기를,
"지평 남태회(南泰會)가 재숙(齋宿)을 칭탁하고 합계(合啓)의 간통(簡通)에 근실(謹悉)이라고 쓰지 않았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권익수가 또 말하기를,
"조중회(趙重晦) 등이 진달한 것이 사체에 맞는 것인데 처분이 모호하였으니, 세 신하를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호하다는 두 글자가 무엄하다는 것으로 삭출시킬 것을 명하였다. 정언 권기언(權基彦)이 지난해 합계(合啓) 때 엄중한 하교가 있었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임금이 그가 안면을 바꾸고 추부(趨附)하는 것을 미워하여 아뢴 대로 하겠다고 답하였다.

 

4월 7일 경신

밤 4경에 혜성(彗星)이 벽수(壁宿)의 도내(度內)인 은하수 가운데에 나타났는데, 성체(星體)는 크기가 왕량성(王良星)만 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1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고 곤방(坤方)을 가리켰다.

 

측후관(測候官)을 내라고 명하였다. 이이장(李彛章)·신회(申晦)·한광회(韓光會)·홍낙성(洪樂性)에게 돌아가면서 입직(入直)하여 성변(星變)을 측후하게 하였는데, 구례를 따른 것이었다.

 

4월 8일 신유

밤에 혜성이 벽수(壁宿)의 도내(度內)인 은하수 가운데에 나타났는데, 크기와 형색(形色), 꼬리의 길이는 처음과 같았다.

 

4월 9일 임술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참판으로, 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참의로,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민수언(閔洙彦)을 장령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정언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좌윤으로, 조중회(趙重晦)를 부교리로, 정실(鄭實)을 보덕으로, 조돈(趙暾)을 필선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사서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부사로, 민우수(閔遇洙)를 사복시 정으로, 박문수(朴文秀)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함경 감사 이정보(李鼎輔)도 함께 입시하였다. 어천(魚川)의 역촌(驛村)에 불이 나서 40호가 잇따라 불에 탔는데, 남당(南塘)의 예에 따라 각각 좁쌀 1석씩을 지급하도록 명하였으니, 도신(道臣)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양서(兩西)의 궐원(闕員)된 수령을 오늘의 정사(政事)에서 차출하여 말을 주어 내려 보내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칙사의 사행이 나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4월 10일 계해

청(淸)나라의 황후가 죽었다는 부음을 전하는 패문(牌文)이 나아왔으므로, 김상로(金尙魯)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김상로는 정지(情地)가 불안하다 하여 외방에 있은 지 오래이므로, 특별히 이 직임에 차임하였다.

 

이일제(李日躋)를 병조 참판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관반(館伴)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영접 도감 당상으로 삼았다.

 

측후관(測候官) 홍낙성(洪樂性)을 체직시키고 서효수(徐孝修)로 대신하게 하였다.

 

4월 13일 병인

홍봉한(洪鳳漢)·이형만(李衡萬)을 승지로 삼았다.

 

서명구(徐命九)를 대사헌으로, 조재덕(趙載德)을 집의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조돈(趙暾)을 교리로, 김약로(金若魯)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교정청 제조(校正廳提調)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는데, 어첩(御牒)을 완성시킨 공로 때문이었다.

 

장령 이진의(李鎭儀)가 상소하여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공척하기를,
"대의를 저버리고 극력 대론(大論)을 주장한 훈재(勳宰)들을 비난하였는데, 잠시 삭출당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진용(進用)되었으므로, 저가 이에 총애를 믿고 기세를 부리고 또 감히 유자(儒者)들 또한 근래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장주(章奏)에 올렸는데도 전하께서는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등지고 당여(黨與)를 비호한 죄와 유현(儒賢)을 업신여겨 비난하는 습성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견출(譴黜)시키는 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려 책한 다음 체직시켰다.

 

대사헌 서명구(徐命九), 부교리 조중회(趙重晦)를 삭직(削職)시키고, 정언 임사하(任師夏)는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게 하고, 수찬 한광회(韓光會)는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대간(臺諫)에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어 오랫동안 합계(合啓)를 빠뜨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명구 등이 다시 신광좌(申光佐) 등을 추탈하라는 계사를 올리자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서명구가 인피(引避)한 내용에 이르기를,
"신축년054)  ·임인년055)   일이 무신년056)   일의 근본인데, 지금 이 투서의 변은 또한 무신년 무리들의 지류의 소행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미 죽은 자들이 서로 지사(指使)하여 투서했다는 말인가? 말은 범연히 논하였으나 의도는 일망 타진하려는 것이니, 아뢴 대로 체직시키라."
하자, 서명구가 총총 걸음으로 빨리 나갔다. 임사하도 묵묵히 물러가니, 거조가 구차스럽다는 것으로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또 서명구는 다른 사람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어서 엄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드디어 삭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한광회는 합계할 때 아무런 기복(起伏)이 없다가 비답이 내린 뒤에야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합계의 상관(上款)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았습니다만, 하관(下款)의 일에 대해서는 삼가 이미 그 구어(句語)를 산거(刪去)했기 때문에 율명(律名)이 부실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의 소위를 놀랍게 여겨 사판에서 삭제시키라고 명하였다. 조중회는 한광회의 말을 옳다고 했다는 이유로 또한 삭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합계하는 일 때문에 하교하여 뭇 신하들을 통렬히 징계하였다.

 

4월 14일 정묘

밤에 혜성(彗星)이 규수(奎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왕량성(王良星)의 서쪽으로 옮겨 나타났다. 성체(星體)는 크기가 왕량성만 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1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다.

 

임금이 승지 김한철(金漢喆)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합계를 처음 발계(發啓)했을 때 내가 하교한 것이 있었는데, 그 하교를 환수하기 전에는 신하가 된 사람은 마땅히 감히 다시는 전의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감히 또 발계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분의이겠는가?"
하니, 김한철이 말하기를,
"외방에 있은 지 오래여서 실은 승문(承聞)하지 못했는데, 감히 묻습니다만 어떤 하교였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때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사제로 돌아가겠다고 한 말이 있었다."
하였다. 김한철이 이에 그 하교를 환수할 것을 굳게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을 하지 않았다. 김한철이 즉시 총총 걸음으로 빨리 전상(殿上)에서 내려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쪼아 피가 흐르니, 임금이 중관(中官)을 시켜 재촉하여 올라오게 하였다. 수서(手書)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힘써 따른다.[嘉其意勉從焉]’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4월 15일 무진

3경에서 5경까지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감쌌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동지사(冬至使)의 장문(狀聞)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당상과 역관을 그들이 어떻게 감히 구류하여 수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니, 승지 이형만(李衡萬)이 말하기를,
"호인(胡人)들은 예의가 없어서 단지 기율에 의해 유지하여 가는데, 기율이 해이해졌으니,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피국(彼國)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도 기강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였다.

 

4월 16일 기사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감쌌다.

 

4월 17일 경오

임금이 대궐 안팎 제사(諸司)에 입직(入直)한 관원 70여 인을 불러서 접견하고서 각각 직장(職掌)과 소회를 하문하고 나서 면려하도록 계칙하였다. 군자감 직장 왕정원(王鼎元)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고려 태조의 몇 대 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24대 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왕의 능침(陵寢)을 그대가 모두 봉알(奉謁)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봉알했습니다만 풀이 다 벗겨져 쓸쓸하였고, 용호(龍虎)의 아주 가까이에 여러 분묘(墳墓)가 총총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예조 낭청이 서계(書啓)했을 때도 이미 하교했었다. 전조(前朝)의 여러 능침의 용호 안에 범장(犯葬)한 자가 많은 것은 한심스러운 데 관계되니, 도신(道臣)과 유수(留守)로 하여금 특별히 엄히 계칙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청나라 황후의 부음을 전하러 오는 칙사를 영송(迎送)할 때 임금이 입을 어복(御服)의 색깔에 관한 일 때문에 앙품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였는데, 천담복(淺淡服)으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고(故) 종신(宗臣)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의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 주진(李周鎭)이 직의 효행에 대해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는 것이니, 특별히 작설(綽楔)057)  하는 은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4월 18일 신미

전라도 관찰사 조영로(趙榮魯)가 졸하였다.

 

집의 조재덕(趙載德)이 상소하기를,
"팔금(八金)이 이미 봉서를 전했다고 자복하였고, 조관석(趙觀錫)과의 면질에서도 말이 꿀렸는데, 어떻게 갑자기 석방시킬 수 있습니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친정(親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신만(申晩),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도 나아왔다. 이종성(李宗城)을 대사헌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홍중일(洪重一)을 대사간으로, 정광진(鄭光震)을 정언으로, 민백창(閔百昌)을 교리로, 조명정(趙明鼎)을 부교리로, 김시위(金始煒)를 부수찬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우참찬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전라도 관찰사로, 엄우(嚴瑀)를 황해도 관찰사로,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을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민백행(閔百行)을 부사(副使)로, 심관(沈鑧)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고, 특별히 박필주(朴弼周)를 우찬성으로, 심악(沈)을 공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임금이 청백(淸白)한 사람을 묻자 정우량이 심악으로 대답했기 때문에 이러한 제수가 있게 되었다. 심육(沈錥)을 찬선으로 삼았다.

 

다시 김성응(金聖應)을 훈련 대장에 제수하고, 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0일 계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중(湖中)에 한 괴인이 있어 요망스런 말을 창도하기를, ‘왜구가 곧 쳐들어 온다.’ 하여, 인심이 소동되는 것은 물론 가족을 이끌고 피하여 달아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하고, 좌윤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하의 인원들이 모두 짐을 꾸려 메고서 서 있는가 하면, 산골짝으로 숨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호중만 그럴 뿐이 아니라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하다고 하니, 마땅히 기포(譏捕)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익명서와 마찬가지이니, 엄히 방지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기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양부(平壤府)의 민가 1백 90여 호가 불에 탔는데, 감사(監司)가 장문(狀聞)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4월 21일 갑술

임금이 영접 도감 당상을 경현당(景賢堂)에서 불러서 접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26일에 당도하여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모두 화복(華服)을 입고 홍영자(紅纓子)를 제거하지 않았다고 하니, 천담복(淺淡服)으로 접견하는 것은 끝내 곤란한 데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화복을 입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면 천담복으로 접견하는 것은 사체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칙사를 맞이하는 날 천담복을 입는 것은 예입니다. 칙사를 보내는 날 상복(常服)을 입는 것은 예에 있어 또한 마땅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 번 칙사를 맞이한 뒤에는 상복으로 접견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 것이다. 연향(宴享)할 때 다례(茶禮)를 행하는 것은 매우 매몰스러우니, 연향에 견주어 품수(品數)를 줄이고 음악을 제거하는 것이 또한 예에 맞는 것이다."
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 성요(星妖)와 지진의 견고(譴告)가 서로 잇따랐으니, 지금이 바로 군신 상하가 공구 수성(恐懼修省)할 때인데도 조정에서는 게으름에 젖어 있으니 개연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묘모(廟謨)가 까다롭고도 세밀하며, 국법(國法)이 분란스럽게 불어나서 바둑을 두는 것에 견주면 둘 때마다 잘못 두는 격이니, 결국은 반드시 패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도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멀리 걱정하는 사람이 없는 채, 새는 배에서 술에 취하여 노래 부르고 불이 붙은 섶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으니,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의 갑신년058)   상소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르기를, ‘신은 주의(周顗)가 눈물을 흘린 것을 왕도(王導)가 큰 소리친 것에 견준다면 슬픈 것이고, 환충(桓沖)이 깊이 걱정한 것을 사안(謝安)의 교정(矯情)에 견준다면 슬기로운 것이고, 변곤(卞壼)이 고집스러운 것이 유양(庾亮)의 허광(虛曠)에 견준다면 충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때문에 신이 차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는데, 신은 옛일을 생각하고 현재를 슬퍼하면서 세 번 반복하여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일에 임하여 간혹 박절하게 하는 변통이 있고 다스려지기를 구하면서도 간혹 급급히 서두는 탄식이 있으며, 인자함이 너무 지나쳐 혹 유약한 데 가깝기도 하고 밝게 살피는 것이 지나쳐 혹 번거롭게 되는 흠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방법과 정체(政體)에 있어서도 그 요령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견마(犬馬)같이 우직한 정성에 있어 성명(聖明)께 유감스러움이 없을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간요(簡要)함에 의거 정령(政令)을 내시어 반드시 요순(堯舜)이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른 것을 본받으시고, 관대함으로 인재를 배양하여 반드시 요순이 백성이 원하는 데 따라 다스린 것을 본받으시며, 충후(忠厚)함으로 국맥(國脈)을 배양하여 삼왕(三王)이 정사를 발하여 인(仁)을 시행한 것을 아울러 본받아 흩어진 천하의 인심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려한 것이 옳다.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4월 22일 을해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위에서 나와서 건방(乾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수형(宋秀衡)을 체포하여 하옥하고, 통진(通津)의 전 부사 이은춘(李殷春)에게 말을 내려 주었는데, 암행 어사 권숭(權崇)의 회주(回奏)로 인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다.

 

4월 23일 병자

장령 민수언(閔洙彦)이 재이로 인하여 상소하고, 병민(兵民)의 폐단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민폐에 대해 말하기를,
"청컨대 불쌍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려 각 고을 수령에게 파고(播告)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마하게 하소서. 조사(朝士)들이 군읍(郡邑)을 다투는 것이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인데, 이 때문에 수령을 잘 가리지 못하게 됩니다. 무릇 전문(銓門)에 청탁을 넣는 사람은 연수(年數)를 한정하여 의망하지 못하게 하고, 선부(選部)를 독책하여 지극히 공정하게 간택하게 하소서."
하였고, 병폐(兵弊)에 대해 말하기를,
"청컨대 장재(將材)를 가려 아울러 제도(諸道)의 곤임(閫任)에 선임(選任)하여 마음을 다하여 강무(講武)하게 하소서. 그러나 향병(鄕兵)의 초관(哨官)들은 모두 평범한 백성으로 무식한 사람들이어서 그 부하를 교도할 수가 없으니, 양반 가운데 재주와 식견이 있고 졸오(卒伍)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을 1초(哨)의 초관으로 삼고, 초졸(哨卒)은 이오법(里伍法)을 정하여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같은 마을에서 출입하면서 서로 강무(講武)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건극(建極)의 근본에 대해서는 힘을 쓰지 않고 탕평의 공효만을 급급히 서둘러 억지로 제목을 정하여 하나의 표방을 만든 다음, 따르는 사람은 그 마음의 진실성은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총애하여 권장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 말의 타당성은 살피지도 않은 채 척벌(斥罰)을 가하니, 이것이 인정이 더욱 격렬해져 물론(物論)이 끝내 평안하지 못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지경에 서 있으면서 탕평(蕩平)이나 무당(無黨) 등의 글자를 다시 마음속에 머물러 두지 말으시어, 오직 장부(臧否)만을 분변할 것이요, 그 사람의 취미와 신함(辛醎)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며, 오직 시비만을 분명히 밝힐 것이요 그 마음의 협잡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면, 일마다 모두 합당하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홍서(洪曙)·남덕로(南德老)를 신구(伸救)하고, 또 말하기를,
"온릉(溫陵)059)  을 복위시킨 뒤에는 당시 내칠 것을 청했던 신하는 이치상 묘정(廟庭)에 편안히 있을 수 없으니, 속히 박원종(朴元宗) 등 세 신하의 정향(庭享)을 내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아! 저 세 신하의 배향은 중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때를 당하여 임금을 모시고 큰 공을 이루었으며 종사를 태산 반석처럼 공고하게 하였으니, 이 세 신하를 버린다면 중흥한 임금을 세실(世室)에 배향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온릉의 일은 종묘 사직의 하자를 깨끗이 씻으신 성덕(盛德)으로 어찌 세 신하에 대해 개의하는 것이 있겠는가? 이제 그대가 진달한 것은 소인의 마음으로 성인의 도량을 헤아린 것에 가깝지 않은가? 홍서·남덕로를 비호하였으니, 이런 등등의 습관은 또한 비루하지 않은가?"
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를 인견하였는데, 옥당도 함께 입시하였다. 영칙(迎勅)에 대한 의주(儀註)를 읽게 했는데, 왕세자의 영칙하는 일은 정지시켰다. 임금이 수찬 김시위(金始煒)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새로 북관(北關)에서 왔는데, 북도(北道)의 연사(年事)가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금 풍년이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제(軍制)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도신(道臣)이 과연 잘 변통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북도 사람들이 질실(質實)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교위(巧僞)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질실하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교위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인물을 살펴보건대, 모두 경성(京城)의 시장을 열 때와 같아서 매우 교위한 점이 많았습니다. 육진(六鎭)의 수령을 각별히 가려서 보낸 연후에야 인심을 수습할 방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을 가려야 한다[擇守令]’는 세 글자는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4월 24일 정축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맞이하였다. 임금이 막차(幕次)에 들어가 있다가 칙서(勅書)가 도착하니, 다시 임금이 익선관에 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의주(儀註)와 같이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돈의문(敦義門)을 거쳐 환궁하였다. 숭정전(崇政殿)에 이르러 칙서가 도착하자, 임금이 의주와 같이 지영하였다. 선칙관(宣勅官)이 칙서를 선독(宣讀)하기를 끝마치니, 임금이 곡하고 네 번 절하였다. 이어 전내(殿內)로 들어와 칙사와 더불어 의주와 같이 서로 접견하였다.

 

4월 25일 무인

임금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악차(幄次)로 들어가서 다시 익선관·참포·오서대를 갖추고 칙사를 접견하였다. 그런 다음 도로 악차로 들어가 다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장령 민수언(閔洙彦)이 박원종(朴元宗)을 출향(黜享)시키는 일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그 내용에,
"대저 그 세 신하의 공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모후(母后)를 폐출시킬 것을 청한 것은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한 것이어서 이것으로 저것을 덮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온릉(溫陵)을 복위(復位)시키기 전에는 세 신하를 배식(配食)하게 하는 것이 사세상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만, 온릉을 이미 복위시킨 뒤에는 세 신하를 출향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리에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후(先后)의 사원(私怨)에 대한 여부는 논할 겨를이 없는 것으로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다른 것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의견을 함께 하는 여론(輿論)에 따라 논열(論列)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청컨대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으나,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26일 기묘

이명곤(李命坤)을 대사간으로, 김조윤(金朝潤)을 정언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집의로, 홍봉한(洪鳳漢)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4월 27일 경진

칙사가 돌아갔다. 임금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모화관에 나아가서 막차(幕次)로 들어가 다시 익선관·참포·오서대를 갖추고 의주(儀註)대로 칙사를 전송하였다. 그런 다음 도로 막차로 들어가 익선관·곤룡포로 갈아 입고 숭례문(崇禮門)을 거쳐 환궁하였다.

 

4월 29일 임오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와 황해도 암행 어사 임위(任瑋)가 돌아왔다. 임금이 아울러 불러서 접견하고 무 등에게 연경(燕京)의 일에 대해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청나라 황제가 주색에 빠져 순유(巡遊)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위에는 가혹한 정치가 없고 아래에는 원망하는 말이 없어 아직은 위망의 조짐이 드러난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옥천(玉泉)·창춘(暢春) 등지를 모두 보았는가?"
하니, 서장관 조명정(趙明鼎)이 대답하기를,
"신이 가서 보았는데 옥천산은 우리 나라의 삼각산과 비슷하였고, 창춘원은 옥천산 아래 있는데,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꽃나무들을 줄지어 심어 놓아서 경치가 매우 좋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강은 어떠하던가?"
하니, 부사 이철보(李喆輔)가 대답하기를,
"하나하나의 정령이 모두 황상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으니, 기강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위에게 일로(一路) 수령들의 장부(臧否)에 대해 하문하였다. 서장관 조명정이 바야흐로 옥당(玉堂)을 겸대(兼帶)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소대(召對)할 책자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는 으레 대신을 만나 보게 되어 있는데도 조명정이 국경을 나가면서도 신을 만나 보지 않은 채 갔으니, 체통에 손상이 됩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30일 계미

대사헌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사(三司)에서 바야흐로 두 대신을 추탈하자는 계사(啓辭)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두 대신이 나라를 자기 몸처럼 여긴 정성과 임금을 섬긴 절개의 본말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도 부회하는 말을 주도 면밀하게 얽어 내어 망극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충성은 해를 꿸 수가 있는데도 극죄(極罪)에 몰아넣고 착한 것은 세상을 도울 수 있는데도 중률에 의죄(擬罪)했으니, 아! 또한 지나치게 심합니다. 더구나 신은 고 영상 이광좌(李光佐)와는 단문친(袒免親)입니다만, 의리는 사표(師表)와 같습니다. 그가 해를 당하여 죽고 난 뒤에 곧이어 번기(藩寄)의 명을 받았으므로, 아직 한 번도 그의 억울함에 대해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봉록을 생각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신이 자정(自靖)하는 의리에 있어 하루도 대청(臺廳)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성 밖에서 북번(北藩)의 밀부(密符)를 체납(遞納)하였다. 승지 남유용(南有容)·이형만(李衡萬)이 계사(啓辭)를 진달하여 공척(攻斥)하고 엄한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종성의 소장은 국체(國體)가 아니라고 여겨 물리치고 답하지 않았다. 또한 정원의 계사에 대해 비답을 내려 책하기를,
"이런 등등의 습관은 오늘날 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학유(學諭) 전의채(全義采)가 상소하여 시의(時宜) 아홉 조항을 진달했는데, 첫째는 균전(均田)이고, 둘째는 권농(勸農)이고, 셋째는 금주(禁酒)이고, 넷째는 남초(南草)를 금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수령을 가리는 것이고, 여섯째는 사치를 금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어진 인재를 임용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사채를 금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군정(軍政)을 정리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소장을 봉입(捧入)하자 임금이 불러서 접견했는데, 응대(應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았으므로,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겨 권장하고 우관(郵官)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성천(成川) 사람이었다.

 

정언 김조윤(金朝潤)을 체차시켰다. 김조윤이 상소하여 홍우한(洪羽漢)을 비난하기를,
"조정의 권귀에게 아첨하고 빌붙어 분수에 맞지 않는 직책을 희구(希求)했으며, 풍지(風旨)를 받들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는 사대부들의 풍습이 아니라고 여겨 체직시켰다.

 

부수찬 김시위(金始煒)를 체직시켰다. 장령 민수언(閔洙彦)이 상소에 대한 비답 내용이 미안스럽다는 것으로 인피하였을 적에 김시위가 출사시키도록 처치(處置)하고서 아뢰기를,
"성비(聖批)의 회칙(誨飭)이 있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면려해야 합니다."
했는데, 민수언이 ‘스스로 면려해야 한다.[自勉]’라는 글자는 곧 탄핵하는 글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 또 상소하여 인피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임금이 김시위를 그르게 여겨 특별히 체차시켰다.

 

고금도(古今島)에 정배한 죄인 이희철(李希哲)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이희철의 아내 조씨(趙氏)가 상언(上言)하여 자신의 몸으로 남편을 대신하여 속바치게 해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제영(緹縈)060)  에게 부러울 것이 없다고 여겨 이 명이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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