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5월

싸라리리 2025. 9. 3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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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을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서 친향(親享)하기 위해 6일 동안 재계(齋戒)하겠다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오례의(五禮儀)》를 인용하여 그것이 예에 지나친 것이니 산재(散齋) 2일에 치재(致齋) 1일로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진위 겸 진향 부사(陳慰兼進香副使) 민백행(閔百行)을 아비의 병 때문에 체직시키고 조명겸(趙明謙)으로 대신하였다.

 

5월 3일 병술

이산(理山)의 전 부사(府使) 노계정(盧啓禎)을 순창군(淳昌郡)으로 장류(杖流)하였는데, 변방 고을에서 돈을 쓰는 것을 금하는 법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5월 4일 정해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갔는데 단오제(端午祭)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재실에서 나아와 전(殿)의 동문 밖으로 가서 망전례(望殿禮)를 행하였다. 네 번 절하고 나서 임금이 전의 동문을 경유하여 제일실에 들어가서 차례로 봉심한 다음 재실로 돌아왔다.

 

5월 5일 무자

임금이 친제(親祭)를 행하고 나서 육상묘(毓祥廟)에 임어하여 전배한 다음 드디어 환궁하였다.

 

5월 6일 기축

이천보(李天輔)를 부제학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대사간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집의로, 서효수(徐孝修)를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응교로, 이이장(李彛章)을 교리로, 임박(任璞)을 수찬으로, 윤상임(尹尙任)을 부수찬으로, 이영복(李永福)을 필선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공조 판서로, 정익하(鄭益河)를 도승지로, 오언유(吳彦儒)·송창명(宋昌明)·김한철(金漢喆)·남유용(南有容)을 승지로 삼았다.

 

장령 민수언(閔洙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세도(世道)가 변한 것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더니, 이종성(李宗城)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오늘 합사(合辭)로 청한 것은 곧 온 나라 공공(共公)의 의논인 것인데, 저가 이에 멋대로 상소하여 역적을 비호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 내용을 구성한 것이 매우 패려스러움은 물론 전혀 꺼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합사로 토복(討復)시키자고 한 의논을 도리어 부회하는 말을 주도 면밀하게 얽어 내었다고 하고, 죄가 종사에 관계되는 사람을 도리어 나라를 자기 몸처럼 여기고 세도에 도움을 준다고 칭찬하는가 하면, 사표(師表)라고 일컬으면서 존상(尊尙)하는 뜻을 현저히 드러내어 보이기도 하고, 해를 당하였다고 일컬으면서 참소에 걸렸다는 것으로 귀결짓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친혐(親嫌)을 돌아보지 않고 국체(國體)를 무시하면서 극력 죄인 중의 괴수를 비호함으로써 스스로 난만하게 함께 귀착되는 지경으로 빠졌습니다. 이런데도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특별히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킬 것을 명함으로써 엄한 처분을 내린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살피지 않고 그 소장을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전라 감사 한익모(韓翼謨)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도정(都政)에서 차임한 수령들을 불러서 계칙 면려하였다. 임금이 한익모에게 소회가 무엇이냐고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섬들이 많기로는 호남(湖南)이 제일입니다. 먼 것은 혹 관부와의 거리가 수삼백 리나 되니, 이곳이 국가에 죄를 지은 자와 도망한 노비들의 소굴이 되고 있으므로 대낮에 사람을 죽여도 관에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른바 왕화(王化)가 닿지 않는 먼 바닷가의 땅은 처치(處置)하기가 마땅하지 않아 실로 걱정이 끝이 없습니다. 신의 의견은 섬의 대소(大小)를 살펴 관장(官長)을 두기도 하고 이정(里正)을 두기도 하는 것을 각 고을의 동임(洞任)이나 면임(面任)을 두는 것처럼 하여 기강으로 통제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서서히 사세를 살펴 조목별로 주달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내용이 참으로 옳다. 감영(監營)에 도착한 뒤에 상황을 헤아려 장계(狀啓)하되, 반드시 칼을 팔아 송아지를 사게 하는 뜻061)  으로 가르쳐 이들로 하여금 모두 조정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효릉(孝陵)의 참봉(參奉) 이녹해(李祿海)를 상주목(尙州牧)에 유배(流配)하였는데, 궐직(闕直)했기 때문이었다.

 

영해 부사(寧海府使) 정언유(鄭彦儒)가 상소하기를,
"본 고을의 군정(軍政)과 시노비(寺奴婢)의 황전(荒田)을 허복(虛卜)하여 포민(浦民)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하여 책자를 만들어 올립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평안도의 불에 타서 죽거나, 물려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시행하였다.

 

5월 8일 신묘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대가(大駕)를 타고 지나갈 때 보니 동대문 안과 광화문 밖에 모두 하나의 종이 있었는데, 종면(鍾面)에 단지 그때 감동(監董)한 신하들의 이름만 새겨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등서(謄書)를 보니 광묘(光廟)의 휘호(徽號), 내전(內殿)의 휘호가 아울러 새겨져 있었고, 또 어휘(御諱)·어제(御製)도 있었다. 동대문의 종명(鍾銘)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부처를 송축하는 말들이니, 이는 틀림없이 여말(麗末)의 풍습일 것이다. 또 단종(端宗)이 피위(避位)한 뒤 찬양하는 말이 쓰여져 있는데, 이는 모두 휘(諱)해야 되는 것이다. 친제(親製)·친필(親筆)은 이것이 얼마나 존경해야 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방치함으로써 비 바람에 씻기게 내버려 두었으니, 매우 송구스런 일이다."
하고, 지부(地部)에 명하여 각각 한 칸 집을 지어 비바람을 피하게 하였다.

 

5월 9일 임진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비국의 좌기(坐起)에 여러 재신(宰臣)들이 한가지로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아서 영(令)을 냈다가는 도로 정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엄한 칙려를 가하지 않으면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국가의 체면을 이룰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자핵(自劾)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어찌 경의 잘못이겠는가?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정사에 힘썼다면 아래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아울러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는데, 시강관(侍講官)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신이 아까 글뜻으로 인하여 재용을 절약할 것을 앙달했는데, 경비가 고갈되는 것이 비록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성지(聖志)가 강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난번 재이가 매우 극심했었는데, 신이 압록강을 건너온 뒤 조보(朝報)를 얻어 보고서는 한심스러움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바라건대 성심(聖心)을 분발하여 면려함으로써 하루 아침이라도 조금이나마 게을러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목금의 시사(時事)는 신이 떠날 때에다 견주어 보면 열에 칠팔이 감하(減下)되었을 뿐만 아니니, 이는 전하의 지기(志氣)가 스스로 힘쓰지 않는 탓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혹 내가 보색(保嗇)을 잘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대는 권근(倦勤)을 걱정하니, 이는 바로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062)  의 뜻인 것이다. 신하의 말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의풍(李義豊)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5월 10일 계사

임금이 진전(眞殿)의 작헌례(酌獻禮) 때 재계(齋戒)하는 날수의 다소에 관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하문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의견을 드리기를,
"문묘(文廟)의 작헌례에 대해 성교(聖敎)에 ‘기재되어 있는 예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신이 《오례의》를 상고하여 보니, 전하께서 문선왕(文宣王)에게 작헌하는 것과 왕세자가 문선왕에게 작헌하는 것이 모두 길례의 본문 서례(序例) 재관조(齋官條)에 보입니다. 재계하는 날수와 작헌례에 이르러서는 때에 임하여 사정에 따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 따로 마련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서례(序例) 재계조에 ‘속제(俗制)에는 배향관(陪享官)과 제위(諸衛)에서 전문(殿門)을 수위(守衛)하는 데 배속된 사람들은 각기 본사(本司)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청재(淸齋)한다.’고 한 아래의 주(註)에 ‘문선왕의 작헌례도 같다.’ 하였으니, 이는 문선왕의 작헌례 때에도 또한 하룻밤 청재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의(聖意)가 단지 하룻밤 청재만을 행하려 하신 것은 진실로 예의 뜻에 합치되어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성교(聖敎)에 ‘한결같이 문묘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내는 예(例)에 의거 하룻밤 청재한다.’라고 한 것은 혹 성명(聖明)께서 상세히 고증하는 데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례의》 재계조 소사(小祀)의 주(註)를 보건대, 모든 기고제(祈告祭)는 산재(散齋) 2일에 치재(致齋) 1일로 해야 하며 기고(祈告)할 시일이 급박할 경우에는 단지 하룻밤 청재만 하면 되는 데 여기서 가리키는 급박하다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기고제를 말하는 것이요 평상시 지내는 기고제의 상규(常規)는 아닌 것입니다. 이에 감히 참람하게 앙달하여 성감(聖鑑)에 대비합니다."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의논도 같았다. 하교하기를,
"영상의 차자에 문묘의 석채의(釋菜儀)에 대한 예문(禮文)이 모두 갖추어 있는데, 산재 3일에 치재 2일로 되어 있으며, 작헌례에는 산재 2일에 치재 1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생각건대, 진전(眞殿)의 작헌례 때에는 산재와 치재가 속절(俗節)과 같았기 때문에 하룻밤 청재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대신이 진달한 내용에 ‘더없이 예에 들어맞는 것이어서 다시 차등을 둘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또한 전문(殿門)을 수위(守衛)하는 자들과 재계하는 것을 같게 할 수는 없으니, 한결같이 속절의 예에 의거하여 산재 2일에 치재 1일로 하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참의로 삼고, 황재(黃梓)를 특별히 발탁하여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황재(黃梓)를 대사헌으로,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조재덕(趙載德)을 집의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박수(朴璲)를 헌납으로, 이영록(李永祿)을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판의금부사 김시형(金始炯),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 이조 판서 신만(申晩), 이조 참판 김상성(金尙星), 전 판서 이기진(李箕鎭)·서종급(徐宗伋), 판윤 구성임(具聖任), 전 참판 윤득화(尹得和)·윤급(尹汲) 등을 금오(金吾)에 내리게 하였다. 비국의 좌기(坐起)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은 것인데 곧 이어 석방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1일 갑오

장령 민수언(閔洙彦), 헌납 박수(朴璲)를 특별히 체직시켰다. 박수는 늙어 정신이 혼미한 탓으로 일을 잘 몰랐는데, 전에 순천(順天)에 부임하였을 적에는 영장(營將) 홍하주(洪夏疇)와 서로 다투다가 홍하주가 그의 기실(記室)을 장(杖)을 치기까지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직(臺職)에 제수되자 상소에 그 일을 언급하였고 또 여러 재신(宰臣)들을 하옥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가 여러 재신들에게 아첨하는 것이고, 또 상소의 내용이 잗달다고 여겼었는데, 민수언의 상소에서 다시 전의 이야기를 거듭 말했기 때문에 아울러 체직시켰다.

 

홍정명(洪廷命)을 사간으로, 유현장(柳顯章)·안윤행(安允行)을 장령으로, 임박(任璞)을 헌납으로, 이훈(李塤)을 정언으로, 권적(權𥛚)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5월 14일 정유

심성진(沈星鎭)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5일 무술

봉조하(奉朝賀) 이병상(李秉常)이 졸하였다. 이병상은 염아(恬雅)하여 지조가 있었고 몸가짐이 간약(簡約)하였으며, 지위가 숭질(崇秩)에 올랐어도 항상 한사(寒士)처럼 지냈다.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러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그가 졸하자 조야(朝野)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5월 16일 기해

충청도 암행 어사 윤광찬(尹光纘)에게 서계(書啓)를 먼저 바치라고 명하였다.

 

귀양가 있는 사람은 석방시키고 고신(告身)을 받은 사람은 서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조현명(趙顯命)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권혁(權爀)이 말하기를,
"강도(江都)에서 병자년063)  에 절개를 지켜 죽은 이 가운데 세 충신이 가장 드러났기 때문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였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있기는 합니다만 잔약하고 한미한데, 문신 황연(黃沇)에 이르러서는 그 또한 후손입니다만 끝내 수용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인심을 용동(聳動)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관(政官)이 지금 연석(筵席)에 있으니, 황연을 우선 자리가 나는 대로 수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권혁이 또 말하기를,
"강도의 군기(軍器) 가운데 화약이 가장 긴요한 것인데, 화약을 찧어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매년 초황(硝黃) 몇 근씩을 실어다 놓게 함으로써 긴급할 때 만들어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화약은 해를 넘기면 맹렬하지 못하게 됩니다. 신이 듣건대, 초황을 유회(柳灰)에 섞어서 쓰면 좋다고 합니다. 그 법이 일본에서 나왔기 때문에 수어청(守禦廳)에서 절목을 만들어 두었다고 하니,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서 어사의 서계(書啓)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윤광찬(尹光纘)이 정권(鄭權)을 제일로 삼았으니, 여러 사람을 용동시키는 방도에 있어 준례에 따라 포상해서는 안된다. 보령 현감 정권은 특별히 가자(加資)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8일 신축

대사간 어유룡(魚有龍)이 상소하여 이종성(李宗城)이 공의(公議)와 힘껏 싸운 죄를 논하고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법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흰 머리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뜬 의논을 따를 수 있느냐고 비답하고서 따르지 않았다.

 

영해 부사(寧海府使) 정언유(鄭彦儒)가 상소하여 고을의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포장(褒奬)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정언유는 시종신(侍從臣)으로서 1백 리의 기탁을 맡아 이렇게 소장을 진달하였으니, 백성을 위하여 진실로 가상스런 일이다. 진달한 다섯 조항은 즉시 회계(回啓)하여 거행하게 하겠다. 지금 이 영해부의 백성은 정언유를 얻었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을 도달(導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제도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또 얼마인지 모를 것이니, 제도의 도신들로 하여금 널리 물어서 조목별로 열거하여 장문하게 하라. 비국에서는 무심히 보아 넘기지 말고 성심으로 시행해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춘방(春坊)의 상번(上番)·하번(下番)을 불러서 원량(元良)에게 하문하는 내용 한 편을 입으로 불러서 쓰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효경》의 수장(首章)에 ‘이름을 드날려 어버이를 드러나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왕과 사서(士庶)는 다른 것이니, 어찌 이름을 드날려 어버이를 드러나게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항상 조심하여 공경하고 삼가면서 연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는 마음으로 덕을 닦고 백성을 사랑함으로써 선열(先烈)을 유양(揄揚)하는 것이 제왕의 효도인 것이다. 무릇 사람은 아는 것은 남음이 있으나 행하는 것은 부족하고, 말은 남음이 있으나 행하는 것이 부족한 경우가 있는데, 지난번 네가 시를 지어 춘방의 요속(寮屬)에게 준 일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를 위하여 두려워하고 너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긴다. 두려워하는 것은 그 시 가운게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와 학문을 하는 소중함과 정치를 하는 근본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을 네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인데, 실천하여 힘써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네가 춘방의 요속만 속일 뿐이겠는가? 이것은 마음을 속이는 것이고 옥루(屋漏)를 속이는 것이니, 이것이 너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이유인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네가 참으로 아는 것이 없고 또 참으로 실천하여 행하는 것이 없이 문장만을 추구하여 겉보기만을 위하여 짓는다면 이는 도리어 짓지 않는 것이 나은 것만 못한 것이니, 이것이 너를 위하여 부끄러워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제 옥서(玉署)와 춘방의 신하를 불러서 너의 시 가운데의 세 가지 일에 대해 너에게 하문하고 앉아서 너의 회주(回奏)를 기다리겠으니, 너는 모쪼록 사실대로 대답하고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필선 이영복(李永福), 문학 구윤명(具允明)이 동궁에게 답을 받아 가지고 봉진(奉進)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시의 내용 가운데 세 조항에 대해 신에게 하문하셨는데, 신이 감히 이 세 조항에 대해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것을 행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는 말이 행동을 앞서는 것이 됩니다. 성의(聖意)를 준봉(遵奉)하는 것은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데 있는 것이니, 이 하교가 있은 뒤 부지런히 면계(勉戒)하여 성심(聖心)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신은 감히 간략하게 대답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열람하고 나서 말하기를,
"참으로 잘 대답하였다. 요점을 뽑아서 잘 대답했는데, 이것이 내가 원량을 어렵게 여기는 이유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동궁이 지은 시에 어버이의 마음을 어기지 않는다느니 글 읽는 것이 가장 즐겁다느니 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또 고감(古鑑)을 가지고 원량을 훈계하는 한 편의 글을 입으로 불러서 쓰게 하였다.

 

5월 19일 임인

윤광소(尹光紹)를 집의로, 민우(閔堣)·최성대(崔成大)를 장령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정언으로, 김치인(金致仁)을 사서로, 이규채(李奎采)를 수찬으로, 유엄(柳儼)을 형조 판서로, 김상로(金尙魯)를 판윤으로, 신사건(申思建)을 공조 참판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우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무제(武帝) 중 누가 더 훌륭한가?"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고조의 기상이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景帝)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니, 시독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기(氣)가 승한 것 같지만 매우 안중(安重)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촌음(寸陰)을 아끼라는 옛말이 있는데, 춘방의 여러 신하들은 매양 서연이나 소대가 있을 적마다 성심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서 원량으로 하여금 학문에 정진하게 함으로써 임금 노릇하는 방도를 알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이겠다."
하니, 이영복(李永福) 등이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5월 20일 계묘

대사헌        황재(黃梓)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삼사(三司)가 합사(合辭)한 의논은 곧 일국이 함께 토죄(討罪)하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하가 된 사람이라면, 누군들 눈을 부릅뜨고 긴장된 마음으로 윤허를 받고서야 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혈당이나 지친이라도 감히 공조(公朝)에서 드러내어 말하면서 멋대로 부호하지 못하는 것은 큰 의리가 들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여 송원(訟冤)함에 있어 말의 내용이 매우 패려스러웠으니, 이는 실로 국가가 있은 이래 하나의 큰 변괴인 것입니다. 이종성이 과연 충선(忠善)한 사람이 원통함을 품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사표(師表)를 위하여 변무(辨誣)하려 했다면, 어찌 오늘날을 기다릴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단지 전하께서 공의(公議)를 거스르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히 용서하기 때문에 헤아려 엿보면서 멋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방자하고 기탄없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귀양 보내야 한다는 청이 두 번이나 대장(臺章)에서 발론되었는데도 성의(聖意)는 아득하기만 한 채 그리하라는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안타깝고 기막힘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의 고심은 조제에 있는데, 조제는 곧 탕평인 것입니다. 이른바 탕평이란 것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것으로 한결같이 중도(中道)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정(邪正)을 논하지 않고, 각기 옛 습관을 되밟아 충역(忠逆)이 양립(兩立)하고 조론(朝論)이 길을 달리하게 된 연후에야 바야흐로 건극(建極)의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은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비록 붕당을 미워한다고 하지만 실은 붕당을 심는 것이 되고, 비록 탕평한다고 하지만 마침 화를 빚어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고심하시면서 조제한 본의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려 책하였다.

 

특별히 최상호(崔尙浩)를 동지중추부사로 제수하고 돈목(敦睦)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내렸다. 최상호는 의주(義州) 사람인데, 오대(五代)가 밥을 따로 짓지 않고 종족 1백여 인이 한 집에 같이 살았다. 이에 앞서 곽산(郭山)의 김영준(金永俊)이 돈목함으로 칭송이 드러났는데, 최상호가 김영준과 함께 서로 일도(一道)에서 명망을 얻었다.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기고는 장공예(張公藝)064)  의 풍도가 있다 하여 드디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가 사는 모양을 그려서 올리게 하고, 또 본고을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내리고 돌보아 위문하게 하였다. 대개 그의 아들 최진섬(崔震贍)이 방금 주서(注書)로 입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5월 21일 갑진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호서(湖西)의 요적(妖賊) 이지서(李之曙)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궐에 투서한 적은 끝내 추포(追捕)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청주(淸州)·문의(文義)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하여 몇 고을에 계속 소요가 일었으므로 짐을 싸서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려(州閭)가 모두 텅 비었다. 이지서가 감영(監營)에 의해 기포(譏捕)되었는데, 그 집의 문적(文迹)을 수색하니 이지서의 시 내용에, ‘고사리를 캐 먹던 백이(伯夷)·숙제(叔齊)가 되어 은(殷)나라 백성들을 보호하고 싶다.[欲作採薇保殷民]’는 말이 있었으며, 또 비기(秘記)의 순(順)자를 아조(我朝)의 역수(曆數)로 만들어 그 글자를 공교하게 해석하여 3백 80년이라고 하는 등 말의 뜻이 흉참스러웠다. 감사 이창의(李昌誼)가 장문(狀聞)하였으므로 금오랑을 보내어 체포하였다. 이지서는 곧 무신년065)  의 역적 이지시(李之時)의 재종(再從)이고, 이지경(李之璟)의 삼종(三從)이며 이만춘(李萬春)의 조카였다.

 

윤광의(尹光毅)를 대사간으로, 이기덕(李基德)·나순(羅㶷)을 지평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집의로, 조재덕(趙載德)을 사간으로, 이응협(李應協)을 헌납으로, 송덕중(宋德中)·여선응(呂善應)을 정언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판의금부사로, 이성중(李成中)을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5월 23일 병오

호조 참판 윤급(尹汲)이 이종성(李宗城)의 소장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면서 이 종성이 목숨을 걸고 사당(私黨)을 비호한 죄를 논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인빈(仁嬪)의 사우(祠宇)를 중수(重修)하는 일이 끝났다 하여 종신(宗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호서(湖西)의 죄인을 친국(親鞫)하였다. 이지서(李之曙)를 신문하기를,
"호서의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고사리를 캐면서 은(殷)나라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시는 음험하고 참혹하고 망측한 것이어서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기타 수상하여 의심스러운 자취가 한둘이 아니다. 비기(秘記)의 글자를 가지고 연한(年限)을 손가락을 꼽아서 가리켰으며, 도신(道臣)이 추문할 때 혀를 깨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더욱 음험한 데 관계된다.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하는 마당에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부(父)·조(祖) 이래 문자를 알지 못합니다. 집에서 수색하여 가지고 온 책에는 여서(女婿) 신치(申㴛)의 책이 있는데, 이 책의 하단에 기재된 잡기(雜記)에는 음험한 말이 없습니다. 고사리를 캔다는 시는,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망발한 것이지 어찌 역심이 있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뜻을 펼 수 있다.[意可伸]’는 말은 과거에 급제하여 의기(意氣)를 펴고 싶다는 뜻입니다. 초구(初句)는 과연 망발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로 귀의하겠는가? [斯世吾安歸]’ 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에 고친 것입니다. 나무꾼과 목동들도 모두 시비가 있기 때문에 시비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는 모두 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숨기겠습니까? 성상께서 삼색(三色)을 공통으로 기용하고 계신데, 신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신은 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장(科場)에 출입한 적이 없었고, 아들이 다섯이므로 과거를 관광(觀光)하기 위해 왕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의 아들들도 아직 경과(京科)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지시(李之時)가 참수된 뒤에 있었던 토역과(討逆科)를 신 또한 어찌 보지 않았겠습니까?"
하자, 우선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박철택(朴哲澤)을 신문하기를,
"본도(本道)에서 추문할 때 일절(一節)에 대해서는 직초(直招)했지만 지금 친문(親問)하는 마당에 상세히 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일일이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어미가 지난해 3월 사망했기 때문에 금년 소상(小祥)에 신이 제수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조탄(鳥灘)의 시장으로 가는 길에 형강(荊江)을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고파 요기하는 즈음에 갑자기 박민추(朴敏樞)를 만났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도선(道詵)의 비기(秘記)가 있는데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에 대해 운운한 것이 있다. 용두는 곧 무진년 정월(正月)이고, 사미는 곧 기사년 12월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인(倭人)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오는데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궁궁(弓弓)이 이롭다고 했다. 그러나 이른바 궁궁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신이 그에게 들은 것은 이것뿐이었으며, 이를 본 고을의 이청(吏廳)에 전하였습니다. 그 뒤에 괘서의 변이 있었으므로 본 고을의 이방과 감영의 군관 이필관(李必寬)이 기찰하기 위해 박민추에게 가서 물어 보았습니다만, 그 뒤 이방이 관령(官令)에 의해 신을 불러 관가로 데리고 들어갔었으며 또 박민추도 불러서 공초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이 시장에 갔더니, 박민추가 신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조탄에서 말한 것은 옛날 이야기인데, 네가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과연 이청(吏廳)에 전하였다.’ 하니, 박민추가 두려운 빛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앞으로는 다시 말하지 말라.’고 운운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박험백(朴驗白)에게 신문하기를,
"너는 관계되는 것이 없으니, 한결같이 들은대로 직고(直告)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오래도록 병을 앓았는데, 조금 차도가 있어 읍내로 들어갈 즈음 나무꾼의 말이 익명서가 뒷들판에 버려져 있다고 하자, 이름을 모르는 어떤 통인(通引)이 홍세재(洪世在)를 시켜 가 보게 하였는데, 그가 박철택에게 전하였으므로 읍내에 전파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이청(吏廳)으로 입송(入送)하게 된 것이요 신의 형 박민추는 원래 신과 함께 비기의 일에 대해 수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김재형(金再炯)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관리입니다. 이방(吏房) 홍천범(洪天範)이 괘서(掛書)를 가지고 와서 보였는데, 그때가 곧 4월 18일이었습니다. 신이 병방·이방과 함께 같이 보았는데, 그 글에 ‘문의 고을의 백성들이 내달 15일에 의당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알아서 피하라.’는 내용이 있었고, 또 ‘회덕(懷德)도 그들의 당여이고 회인(懷仁)도 그들의 당여이며 병사(兵使)도 그들의 당여이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궁궁(弓弓)이 이롭다. 이 고을에 대인(大人)과 명장(名將)이 있다.’고 운운하고서 ‘여기에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글은 5, 6행이었는데, 신이 박철택에게 비기(秘記)에 대해 장의(掌議) 박민추에게서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순세재(順世才)에게 신문하기를,
"오명후(吳命垕)는 어떤 사람인가? 좌수(座首)의 아들이 어찌 역노(驛奴)의 처남이 될 수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좌수 오수만(吳遂萬)이 첩을 얻어 딸을 낳았는데, 두 남자를 거쳐 신에게 시집왔습니다."
하였다. 신문하기를,
"이사정(李思正)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고을에 사는 이진사(李進士)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괘서의 일에 대해 신문하기를,
"너는 오명후에게서 들었다고 하고, 오명후는 너에게서 들었다고 하니, 네가 전파한 것이 아닌가? 이 일절(一節)에 대해 직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문의의 역노(驛奴)이고, 오명후는 곧 신의 처남입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4월 사이에 오명후가 이사정의 대상(大祥)에 갔다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근래 괘서의 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어떠했는가?’ 하기에, 신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오수만을 신문하기를,
"박민추가 너에게 ‘남방의 봉화(烽火)가 제대로 올려지지 않고, 북쪽 변방의 성책(城柵)을 물렸으니, 오래지 않아 난(亂)이 일어날 것이다. 좌수는 어디로 피할 것인가?’라는 등등의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과연 있었습니다. 신이 박민추의 말을 듣고 답하기를, ‘무신년 난리에도 내가 피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디로 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방(榜)을 내건 일에 대해 들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관가에서 방을 내건 일이 있기는 하지만 양반이 어떻게 방을 내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궁궁(弓弓)이 이롭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궁궁은 활의 허리[弓腰]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구부러진 곳[劣處]에 숨으라는 말이다. 【궁요(弓腰)는 속음(俗音)이 열(劣) 자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다.】 ’ 하였고, 봉화에 대한 일은, ‘청주(淸州)의 봉화는 사천(泗川)에서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문의(文義)의 동쪽은 전토가 좋고 회인(懷仁)의 북쪽은 산수가 좋아 그리로 옮겨가 살려고 한다.’ 하였으며, 신의 아들 오명후가 비기를 등서(謄書)한 것을 비치한 것이 있었는데, 이지서(李之曙)의 아들 이항연(李恒延)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은 신의 아들이 일찍이 그의 처남인 박세렴(朴世濂)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습니다. 이지서가 또 신에게 이르기를,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인데 노인은 어떻게 피할 터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피하여 갈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오명후를 신문하기를,
"박민추와 수작한 말을 이미 본도(本道)에서 추문(推問)할 적에 직초(直招)하였다. 친문하는 것은 사체가 중한 것이니, 다시 하나 둘 숨김없이 말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근일 날씨가 청명한데도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들의 말에 흉흉한 것이 많아서 어떤 사람은 왜인이 온다고 하기도 하지만, 실은 왜인이 아니고 거짓 왜인의 모양을 꾸며가지고 오는데 이들은 무신년066)  의 여당(餘黨)들로서 해도(海島)에 가 있던 자들이다.’ 하므로, 신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줄 알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단지 결과만 살펴보면 된다.’ 하였습니다. 4월 초에 이지서가 또 와서 말하기를, ‘봉화를 지금까지 들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일이 났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3월에 서로 만났을 적에는 이지서가 말하기를, ‘만일 난리가 일어나면 일찍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뒤에 신이 또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변란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며, 그 뒤에 이지서가 또 용두(龍頭)와 사미(蛇尾) 등의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궁궁은 무슨 뜻인가?’ 하니, 말하기를, ‘광활하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뒤에 신이 또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신사(信使)도 또한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지금의 소식도 자못 소요스러우니, 난리가 일어나려면 속히 일어나는 것이 시원하겠다.’ 하고, 이항연(李恒延)은 말하기를, ‘비기에 이르기를, 「무진년의 일은 알 수 있고, 경오년에는 즐거움이 당당하다.」고 하였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말하기를, ‘사(事) 자는 난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고, 낙(樂) 자는 즐거운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비기책을 이 항연이 가지고 가서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구어(句語)가 있었습니다. 박민추가 수감된 뒤 신이 들어가서 물어 보니, 답하기를, ‘일찍이 박철택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는데, 그 때문에 수감된 것이다.’ 했습니다. 금년 3월 이지서가 와서 도정(都政)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이런 하늘 밑에서 남인(南人)이 어떻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이어 투서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지난번 어떤 사람이 선전 관청(宣傳官廳)에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고 북쪽은 호(胡)와 접해 있다.」고 했으며, 투서한 사람은 방금 체포하여 수감하였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자, 형추(刑推)하라고 명하여 다섯 대를 친 다음 형장을 정지시키고 막에 내렸다. 박민추를 신문하기를,
"국년(國年)을 손가락을 꼽아서 가리킨 것은 그 의도가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가 된다.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왜인이 오는 것 같고 북쪽 또한 위태로워 지금 막 성책(城柵)을 물리고 나자 칙사(勅使)가 나왔다.’고 한 말은 더욱 망측한 것으로, 무슨 심장을 지녔기에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함께 난만하게 주무(綢繆)하였는가? 일일이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교생(校生)으로 서얼(庶孽) 동생 박험백(朴驗白)이 있는데, 본도에 전후 납초(納招)한 것이 모두 이미 올라왔을 것이니, 참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기(秘記)에 대한 일은 이지서의 아들 이영손(李榮孫)을 길가의 나무 밑에서 만났는데, 이영손이 말하기를,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에 대한 말은 용은 곧 진(辰)이고 사는 곧 사(巳)이며, 두(頭)는 정월(正月)이고 미(尾)는 곧 납월(臘月)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괘서가 나온 뒤에 신이 마음속으로 이지서가 했는가 의심하여 가서 이지서를 만났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네가 와서 나를 만나는 것이 수상하다. 전일 네가 괘서의 글씨가 잘 써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잘 써져 있다.’ 하였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더욱 이지서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이영손이 전에 한 말을 가지고 물어 보았더니, 이지서가 사미(蛇尾)라는 글자를 사반(蛇盤)으로 고쳐 말하였고, 궁궁(弓弓)은 광활하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말이 어느 책에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비기에 있는데 그 책이 오명후의 집에 있다.’고 하기에, 신이 오명후의 집에 갔었습니다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달 초닷샛날 또 가서 보게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명후가 끝내 내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년(歷年)에 대한 일은 오수만이 신에게 말하여 주었는데, 신은 명을 재촉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영손을 신문하기를,
"너의 형이 비기를 등서하여 비치했다는 이야기를 오명후가 이미 말하였다. 본도(本道)에서 추문할 때 네가 박민추에게서 들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오명후에게 들었다고 핑계 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네가 과연 오명후에게 듣고서 박민추에게 말하였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3월에 오명후가 신의 형에게 말하기를, ‘비기에 운운했다.’고 했으므로, 신이 박민추에게 전했는데, 본도에서 추문할 때에는 안정(顔情)에 구애되어 오명후가 와서 고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자, 형추(刑推)하라고 명하여 두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항연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박민추가 와서 말하기를, ‘근일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전일 정진하(鄭震夏)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비기에 용두(龍頭)·사미(蛇尾)·궁궁(弓弓) 등의 글이 있는데, 용사(龍蛇)는 진사(辰巳)를 가리킨 것이고 궁궁은 활활(闊闊)을 가리킨 것 같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절대 낭설을 하지 말라. 만일 진실한 이야기가 있으면 모쪼록 상세히 알려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오명후의 죄에 대해서 청컨대 신이 아뢰겠습니다. 그의 아비가 여러 해 동안 문의에서 좌수를 지냈으므로 권세가 한 고을을 뒤흔들었는데, 소요스런 이야기를 만들어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양반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라. 의당 귀한 자가 천하게 되고 천한 자가 귀하게 되는 세상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금년 정월에 오명후의 아비가 술을 따라 신에게 권하면서 말하기를, ‘양반의 교만한 기세를 부리는 짓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4월에 신이 처조부의 회장(會葬)에 갔다가 두루 거쳐 오명후의 아비를 만나 보았는데, 말하기를, ‘읍내의 괘서에 무슨 말이 쓰여 있던가? 나의 사위 순세재(順世才)가 와서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이 낚시를 하고 돌아가다가 오명후를 만났는데, 말하기를,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 괘서에 5월 15일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수감된 뒤 오명후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박민추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영옥(營獄)에 갇혔다고 들었는데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 지 모른다고 한다.’ 하니, 오명후가 말하기를, ‘박민추가 비기 때문에 수감되었는데 괘서도 비기와 같다고 한다. 잘 말하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다. 비기를 보관하고 있는 자는 반드시 이 괘서의 죄를 받게 될 것이니, 비기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오명후와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항연의 말이 많이 굽혔으므로, 오명후를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항연을 신문하기를,
"고사리를 캔다는 시는 무슨 뜻인가? 삼부자가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슨 의리인가? 너희 부자가 오래도록 나라를 원망하는 것을 일삼으면서 왜(倭)와 호(胡)가 오기를 기다리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무슨 심장이란 말인가? 본도에 수감될 때 너의 손바닥에 너의 아비가 무슨 글자를 써서 보여 주었는가? 소요스러운 괘서의 근본은 곧 이 비기인데 이것이 모두 너에게 있으니, 소요스런 괘서를 낸 것이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대궐에 투서한 것이 문의에서의 괘서와 같은 맥락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간증(看證)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문서를 압수했으니, 어떻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고, 형추하여 세 대를 치니, 공초하기를,
"신의 삼부자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것은 글을 하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소요스런 말을 듣기를 즐겨한 것은 노부모를 데리고 피란할 계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자, 형추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오명후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가 항상 말하기를, ‘울릉도 건너편에 황진기(黃鎭紀) 등 무신년의 여당(餘黨)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황진기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나올 것이다.’ 했기 때문에, 신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아는가?’ 하니, 이지서가 언근(言根)은 말하지 않고 단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단지 말초(末梢)를 살펴볼 뿐이다.’ 하였습니다. 이지서가 묵정동(墨井洞)에 가서 투서에 대한 일을 듣고 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선전관 관소(官所)에 투서하고 도망갔는데, 그 물색(物色)을 본 사람이 수염이 있고 얼굴이 검다고 했기 때문에 포청(捕廳)의 군사가 어떤 고개에서 만나서 체포했다고 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근래 일고 있는 소요스러운 일이 어찌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겠는가? 청주(淸州) 우규장(禹圭章)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자기 첩의 아우의 혼사를 속히 이루게 하기 위하여 그가 돈 10냥을 받아 먹었는데 혼사가 오래되면 이루어지지 않게 생겼기 때문에 이렇게 소요스러운 일을 일으켜 공연히 전파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신문하기를,
"황적(黃賊)이 아직도 영남의 큰 섬에 둔취(屯聚)해 있으니 의당 한 번 소동을 일으키기 위해 나올 것이라고 했으며, 곧 대궐에서의 익명서 내용의 한 가지 일인 이른바 큰 섬이라는 것은 곧 울릉도 건너편의 큰 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적과 마음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투서의 내용은 조사(朝士)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데, 네가 이른바 남쪽의 왜(倭), 북쪽의 호(胡), 서쪽의 달(韃)이라고 한 말은 또한 투서 내용의 어의(語意)와 똑같다. 왜복(倭服)을 입고 일을 일으킨다고 한 것도 또한 그런 뜻이다. 대궐에 투서한 것, 청주에서 소요를 일으킨 것, 문의에서의 괘서가 여지없이 탄로가 났으며, 또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할 때의 한두 구어(句語)는 부도하다고 이를 만하다. 더구나 시구 가운데 한두 구어는 음험하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이항연의 팔뚝에 써 준 것 또한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되는 것이다. 이른바 스스로 맹세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은밀히 현착(現捉)되기를 기다려 스스로 부도스런 말을 한 여러가지 증거가 갖추어졌는데 이런 등등의 음모는 결단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니, 공모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른바 해도(海島)라는 것은 그 이름이 또한 무엇인가? 서로 내통하지 않았으면 결단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신년의 여당 가운데 둔취해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먼저 대궐에 투서하고 나서 비기의 내용을 창언하였으며, 또 소요를 일으켰고 끝에 가서는 괘서를 냈으니, 반드시 경영하여 배포한 경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초엿샛날 이른 아침에 박민추가 찾아와서 ‘봉화를 들지 않고 있는데 전의 사서(史書)에도 이런 예가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전의 사서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손바닥에 써서 보인 일은, 신의 뜻은 이 일을 발명(發明)하지 못하면 죽어도 더러운 귀신이 되어 버릴 것이니 아비의 분묘옆에 묻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울릉도에 대한 이야기는 만일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가서 의뢰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은 반드시 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 같은 자들과 손을 잡은 연후에야 거사할 수 있는 것인데, 사자(士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박민추에 대해서는 또 한가지 일이 있는데, 그의 사촌 박취문(朴就文)과 처남 이태위(李泰渭)는 모두 무신년 역적에 들었다가 도망한 사람들입니다."
하자, 형문하여 일곱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시킨 다음 막에 내리게 하였다. 다시 박민추를 신문하기를,
"소요스런 내용으로 괘서를 내기 전에 먼저 박철택(朴哲澤) 등에게 전포(傳布)한 것은 이미 수상한 일에 관계가 된다. 비기의 내용을 이지서에게 듣고 오명후에게서도 들었는데, 사람을 만날 적마다 뜻을 알려고 한 것은 더욱 음험하고 참혹한 데에 관계가 된다. 비기 안의 3백 80년이라는 이야기를 손가락을 꼽아 연수(年數)를 계산하여 오수만과 오명후에게 말하고서도 이제 체포된 것을 인하여는 이지서에게 미루기도 하고 오명후에게 미루기도 하여 마치 가리켜 고발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또한 음휼한 데 관계가 된다. 너와 이지서·오명후는 똑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더구나 이지서의 공초에 너의 사촌과 처남이 무신년 역적에 들었다가 도망한 자들이라고 했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사이의 사상(事狀)을 숨김없이 직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가 혼자서 하였고 신은 본디 함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자, 형문하여 열한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친국(親鞫)을 우선 파하고 내일 아침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5월 24일 정미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죄인들을 친국(親鞫)하였다. 죄인 박철택(朴哲澤)·김재형(金再炯)·순세재(順世才)는 아울러 방송(放送)시키라고 명하고, 박험백(朴驗白)은 추조(秋曹)로 이송(移送)시키게 하였다. 죄인 우규장(禹圭章)을 신문하기를,
"이번 호서에서 나라를 원망하는 역적들이 뜬말을 만들어 괘서(掛書)하여 인심을 공동(恐動)시켰다. 너는 호서에 살고 있으니 역적을 체포하여 관가에 바치는 것이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인데, 이렇게는 못할망정 소요스런 말에 현혹되어 말을 타고 두루 돌아다니면서 왜인이 온다는 이야기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공동시켰으니, 네가 소요스런 말을 만들어 괘서를 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사주를 받아 이런 음험한 일을 한 것이다.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괘서에 대한 말은 병영(兵營)의 옥중(獄中)에 있을 적에 대략 들었습니다만, 그 전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비기에 대한 것은 당초 몰랐었으며, 서울에서 투서가 있었던 것을 누가 신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4월에 마침 문의(文義)의 노곡(蘆谷)에 갔었는데 보(洑)를 쌓던 역군(役軍)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박취림(朴就林)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가지 말라. 문의에 지금 적이 진을 치고 있어서 이렇게 흩어져 달아나는 사람들이 있게 된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망령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전하여 문의의 무릉정(茂陵亭)에 갔는데, 또 이신(李愼)의 집 앞뒷산에 피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내외(內外) 송곡(松谷)의 5, 6촌락이 소요스러웠던 일이 과연 있었습니다. 병영(兵營)에서 신을 체포한 것은 신이 이 말을 전한 것을 인한 것 같은데, 이는 너무도 원통한 일입니다. 신은 박취림에게서 들었습니다만, 언근(言根)은 12인을 거쳤습니다."
하였다. 형추하라고 명하여 열다섯 대를 치니, 공초하기를,
"신이 겁을 먹고 전파한 일은 과연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의 첩의 아우의 혼사를 기필코 민제수(閔濟洙)와 맺게 하려고 하여 17일로 날짜를 정하였는데, 장대진(張大鎭)이 자기와 친한 사람과 약혼시키기 위해 신이 민가(閔哥)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했으므로 혼사를 속히 이루게 한 것은 과연 신이 지휘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경윤(金景潤)이 말하기를, ‘신사(信使)가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사를 급히 행해야 한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봉화를 들지 않고 있고 신사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문의(文義)와 옥천(沃川) 사이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서원을 중수하는 역사와 전세곡(田稅穀)을 나루로 옮겨내는 일을 모두 정지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처음의 공초에서 박취림이라고 운운한 것은 거짓이고 김경윤에게 들은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직초합니다."
하자, 형추를 정지하라고 명하고 막에 내리게 하였다. 다시 오명후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뜻을 같이했다면 어떻게 감히 숨기겠습니까? 실정을 알고서도 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감히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형문(刑問)하여 열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시킨 다음 이지서와 면질시켰다. 이지서가 오명후를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 청주(淸州)의 병사(兵使)가 반드시 모사(謀事)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의·청주·진천(鎭川) 세 고을의 봉화 가운데 청주와 문의 두 고을만 봉화를 들지 않고 있으며, 병사가 우후(虞候)·목사(牧使)가 산성(山城)에서 꽃놀이를 하고 있는데, 양반도 아니고 상한도 아닌 자가 종일 말을 타고 왕래하였으나 어디로 향하여 갔는지 모른다고 운운하였다. 그 뒤에 내가 너의 아비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들이 허황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장오(李章吾)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놈이 반드시 일을 낼 것이다.’ 하니, 너의 아비가 땅을 치면서 말하기를, ‘이 놈이 반드시 나를 죽이겠다.’ 하였다."
하니, 오명후가 이지서에게 말하기를,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니라는 말을 네가 처음 발론하였다. 그때 내가 고변(告變)하겠다고 하니, 네가 말하기를, ‘고변한 공신(功臣)은 기용되지 않는 것이다. 대저 고변은 곡절을 상세히 안 뒤에 바야흐로 할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풍문으로 전해진 것에 의거하여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천의 봉화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과연 하였다. 그러나 네가 무신년의 적도들은 우리 나라의 복색을 했기 때문에 패배당하였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왜인의 모양으로 꾸며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실로 꽃놀이했다는 말과 양반이 아닌 자가 왕래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너의 말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였는데, 오명후를 막에 내리라고 하였다. 이지서를 다시 박민추와 면질시켰다. 이지서가 박민추를 향하여 말하기를,
"초엿샛날 네가 와서 말하기를, ‘근래 봉화를 들지 않는 데 대해 사람들이 운운하는 말이 많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는 구름이 끼어 어둡기 때문인 것이니 의심할 것이 못된다.’ 하니, 네가 말하기를,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또 비기(秘記)를 보여 줄 것을 요구했었지 않았는가?"
하니, 박민추가 말하기를,
"괘서의 내용이 나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과연 겁을 내어 너의 집에 가서 비기를 보여달라고 요구했을 때 네가 말하기를, ‘근래 괘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대가 들었는가?’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과연 들었다.’ 하였다. 네가 말하기를, ‘문필(文筆)이 어떻다고 하던가? ’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박철택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문필이 졸렬했다고 하였다. 지난번 이영손(李榮孫)이 전한 용두(龍頭)·사미(蛇尾)는 곧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미(尾)가 아니고 이에 반(盤)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어떤 반(盤) 자라고 하는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반반(班班)하다는 반(班)인 것 같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소반(小盤)이라는 반(盤)인 것 같다. 반자를 일부러 미(尾) 자로 말한 것이니, 왜인 같으면서도 왜인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알 수 있다. 그런데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다고 운운한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산협(山峽)으로 피할 수도 없고 섬으로 피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하였다. 궁궁(弓弓)은 이영손이 고문(古文)의 유자(留字)라고 했는데, 너는 광활한 뜻이라고 운운했다."
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이는 절절이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니, 아울러 막에 내리게 하였다. 오수만(吳遂萬)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는 원래 신에게 한 말이 없었는데 신의 아들이 언어에 관한 일을 삼가지 않은 탓입니다. 이지서의 육촌(六寸)이 무신년에 죽었기 때문에 고장 사람들이 그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는데, 신이 매양 신의 아들이 그와 교유하는 것 때문에 질책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지서와 면질시키니, 이지서가 오수만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말하기를, ‘오 명후가 병사에 대해 운운하였고 말을 타고 왕래한 일에 대해 운운하였고 봉화에 대해 운운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연고인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언어를 삼가지 않는 것이 이러하니, 장차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운운하지 않았는가?"
하니, 오수만이 말하기를,
"나는 병사에 대해 운운했다는 등등의 말을 듣지 못했다. 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하자, 이지서가 말하기를,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너의 아들이 어찌 고하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형문하라고 명하여 형장 아홉 대를 치니 기절하였으므로, 금부(禁府)에 내리게 하였다. 다시 오명후를 신문하니 공초가 전과 같았으므로, 형추하여 열 대를 친 다음 형장을 정지하고 금부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박민추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비기를 가지고 여러 곳에 탐문한 것은 적인(賊人)을 잡아서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형추하여 서른 대를 쳤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친국은 우선 파하고 본부(本府)에서 하라."
하였다.

 

5월 25일 무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황해 감사 엄우(嚴瑀)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칙려(飭勵)하여 보냈다. 지평 이중조(李重祚)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조재덕(趙載德), 장령 최성대(崔成大), 정언 여선응(呂善應)을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본부에서 추국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신(臺臣)들이 모두 규피(規避)하여 합계(合啓)하였으며, 이른 아침에 출사(出仕)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조 재덕 등이 모두 패초(牌招)를 어기자, 임금이 노하여 찬배(竄配)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드디어 정지하고, 아울러 삭직시키라고 명한 것이었다. 특별히 심발(沈墢)을 정언에, 이중조(李重祚)를 지평에 제수하여 국문(鞫問)에 참여하게 하였다.

 

원경순(元景淳)을 대사간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사간으로, 김계백(金啓白)·유만추(柳萬樞)를 장령으로, 김시위(金始煒)를 지평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교리로, 박필주(朴弼周)를 좨주(祭酒)로 삼았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원경하(元景夏)가 칙사(勅使)의 사행에 대한 일과 피중(彼中)의 사정 및 관서(關西) 백성들의 폐단에 대해 성대하게 진달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등대(登對)할 때에 품처하게 하였다.

 

의금부에서 추국하였다. 이지서를 신문하여 형장 세 대를 치니, 공초하기를,
"신은 비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신의 육촌 이지목(李之穆)을 지난 봄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신에게 말하기를, ‘국가에 반드시 변란이 있게 될 것이다. 비기에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자(父子) 사이에도 전할 이야기가 아니니 절대로 전하지 말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세상에 혹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자, 이지목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아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가?’ 하니, 이지목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였는데 그 이름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지목의 형 이지양(李之陽)이 문의(文義)에 사는데 일찍이 무신년 난리 전에 안엽(安熀)과 속리산을 왕래한 일이 있습니다. 안엽은 곧 이지양 외당(外黨)의 지친입니다. 박민추의 말에 의하면 괘서가 나오기 전후하여 자주 이지양·이지목의 거소(居所)에 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단오에 묘하(墓下)에 가서 이지양과 함께 같이 제사를 지냈는데, 말이 괘서의 일에 언급되자 신이 말하기를, ‘본 고을에서 즉시 불에 태워 버렸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는데, 그 내용이 어떠했는가?’ 하니, 이지양이 말하기를, ‘서울에서의 투서는 이지억(李之億)이 하였고, 문의의 괘서는 나와 박민추가 함께 하였다.’ 하였는데, 이지억은 곧 이지양의 아우로 청파(靑坡)에 살고 있습니다. 신이 그날 먼저 말하기를, ‘천변이 이러하고 인심과 세도가 또 이러하여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니,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다.’ 하니, 이지양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도선(道詵)의 비기에 3백 6년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 과연 6년에 가까웠다. 무신년 때의 사람들은 곧 진승(陳勝)·오광(吳廣)067)  의 무리에 불과하다.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올 것인데, 너 같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너야말로 사람을 통하여야 일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진인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금산(金山) 봉계(鳳溪)에 사는 정가(鄭哥)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침에 땅에 떨어져 태어나서 저녁에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장대하여 삼척 동자가 되었으므로,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밤에 그를 데리고 도망을 갔는데, 이것이 재작년의 일이다. 지금은 거처를 알 수 없지만 앞으로는 절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그가 누구와 함께 일을 할 것인가? 반드시 장재(將才)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과연 누구인가?’ 하니, 이지양이 말하기를, ‘너 같은 사람이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단지 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하고 나서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병조 판서를 해야 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한스러운 것은 전라 감사가 죽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네가 무엇 때문에 알려고 하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죄인 이지서에게 2차 가형(加刑)하니, 직고(直告)할 일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결박을 풀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이의 정절이 매우 흉참스러웠습니다. 그가 고한 이지양·이지목·이지억을 아울러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죄인은 즉시 체포하게 하고 친국을 거행하겠다고 명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였다. 이지서를 신문하니, 이지서가 공초하기를,
"당초에 진고(進告)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지난 봄 신의 육촌인 이지목과 길에서 만났는데, 이지목이 말하기를, ‘천변이 이러한데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지목이 말하기를, ‘비기에 왜인 같으면서도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似倭非倭自南而來]고 한 여덟 글자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단오에 이지양과 묘하에서 만났는데, 이지양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일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무리에 불과한 것이다. 서울에서 투서한 것은 그것을 한 사람이 있다. 이 근처에도 오래지 않아 또 의당 알 수 있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금년을 편안히 넘긴다면 또 3백 년이 지나게 될 것이다. 임금과 가까이에 있는 신하 가운데 반신(叛臣)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전라 감사가 죽은 것이 매우 애석하다. 만일 살아 있었다면 한쪽을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의 아비인 이중경(李重庚)이 무주 부사(茂朱府使)로 있을 적에 짐바리로 싣고 온 것이 거의 1천 바리에 이르는데, 선자봉(扇子封) 같았지만 어떤 이는 조총(鳥銃)인가 의심하였다.’ 했는데, 어제 진달하지 못했던 것은 곧 이 말입니다. 소요스러운 일이 크게 일 적에 영장(營將)이 마침 이형곤(李衡坤)의 집에 가 있었는데, 병사(兵使)가 급히 불러서 들어갔다가 갑자기 나아왔으므로 마치 군사를 모으는 상황과 같았습니자. 이지양이 또 봉계(鳳溪)의 일을 말하였고, 이지억이 궐문에 투서한 일, 문의(文義)의 괘서에 대한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지양은 글에 능한 선비이어서 역모를 하려 했다면 지려(智慮)가 있습니다. 무신년의 적도들이 모두 그를 제갈 양(諸葛亮)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중경 부자는 얼굴을 모르고 또 세수(世讎)도 아닙니다. 이 일은 박민추·오명후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만, 신은 일가에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죽게 된 가운데서 살기를 도모하여 만든 계교가 아니고 장(杖)을 참지 못하여 직초(直招)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월 이후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타고서 양남(兩南)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1백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는데, 관인 같기도 하고 무사 같기도 하여 하나도 유생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또 어떤 거사(居士)들이 무수히 왕래했는데, 신의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옷은 소매가 좁은 것 같았는데, 면(綿)으로 만든 것도 있고 포(布)로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거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에는 나이가 모두 5, 60이었는데, 지금 왕래하는 자들은 인물이 준수하여 병사나 수사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그 복색을 보면 화사스러웠으며 미녀를 데리고 있었고 각기 하나의 학동(學僮)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이지양이 말하기를, ‘너는 남을 통하여 일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다. 내가 병조 판서를 잃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역모의 당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일가붙이와 친구들이 모두들 버렸기 때문에 당(堂)의 이름을 기재(棄齋)라고 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일가붙이로는 단지 이지억이 있을 뿐인데, 글도 능하고 힘도 있어서 그는 이지양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지양은 위인이 조금 치밀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 감사에 대해 애석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바로 충청 병사입니다. 지난번 이인좌(李麟佐)의 무리가 어찌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과 일가붙이였겠습니까? 역적을 모의하는 자들은 으레 통지(通知)하는 방법이 있는데, ‘애석하다.’는 말을 어찌 공연히 했겠습니까? 신의 육촌이 전라 감사와 평소 서로 친하게 지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 없습니다. 박민추의 소위뿐만 아니라 오명후도 반드시 괘서의 일에 동참한 것이 틀림없는데, 이는 신이 이지양과 초사흗날 함께 유숙할 때 이런 수작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지억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형 이지양은 문의(文義)에 살고, 이지목은 정산(定山)에 삽니다. 신의 양가(養家)에는 편모(偏母)가 있는데,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이지서와는 육촌이었는데, 이지서가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팔촌이 되었습니다. 이지서는 별로 좋지 않은 짓을 한 것이 없으나, 글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부의 사망일이 10월에 있기 때문에 해마다 왕래했습니다만, 이지서가 너무 가난하여 매양 도망간 노비를 추쇄하러 갔기 때문에 만날 때도 있고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한 지가 3, 4년이 되었습니다. 무신년 겨울에 신이 생부의 상을 당하여 문의에 갔다가 3년이 지난 다음 돌아왔는데, 이지서와 친근하게 왕래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서로 만났었습니다. 이른바 오가(吳哥)는 천동(泉洞)에 살고 있었는데, 상세히 생각하여 보니 이름이 수만(遂萬)이었으며, 오래도록 좌수(座首)를 지냈습니다. 신의 형이 매우 가난하여 조곡(糶穀)을 얻기 위해 간혹 통정(通情)을 했었기 때문에 신도 또한 만났었는데, 오가의 아들 가운데 연소한 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신이 군부의 앞에서 어떻게 감히 속이겠습니까? 신은 대략 문자를 알고 이지서는 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길이 같지 않게 되었는데, 신은 누차 발해(發解)068)  했었기 때문에 이지서가 교만한 기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만나면 신이 그때마다 아들을 놓아 보내어 걸식하게 하는 일을 질책하였으므로, 이지서가 유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은 평생 글을 읽어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선업(先業)을 계승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지서가 반드시 생존해 있을 것이니, 면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형이 이지서와 쌓인 유감이 있는데, 그것은 신의 형이 전래(傳來)해 오던 여종 하나를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지서가 그것을 나누어 쓰자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항상 노여움을 품고 있었고 많은 욕설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신이 해명하기가 어렵겠습니다만, 동생이 언근(言根)이니, 이는 신의 다행인 것입니다. 쉽게 분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지난해 9월 이후 신은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원래 서로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의 형이 어디에서 들었단 말입니까?
신의 둘째 숙부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이지서의 아들을 취하여 양자를 삼으려 했는데, 신이 저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원망을 맺게 된 단서인 것입니다. 만일 폐족(廢族)으로서 혹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투서하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신이야 무슨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이 궐문에 투서한 일이 있고 신의 형이 괘서한 일이 있다면, 이지서의 표독한 마음에 이미 반드시 고변(告變)했을 것입니다. 이지서가 남과 산송(山訟)을 하면서 묘도(墓道)에 흉측한 물건을 묻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와 절교했습니다. 이른바 병조 판서라는 말은 거의 아동(兒童)의 말에 가까운 것입니다. 궐문에 투서하는 것이 무슨 이로움이 있겠으며, 병조 판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팔다리가 매우 가는데 무슨 여력(膂力)이 있겠습니까?"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양자(養子)에 대한 일은 이지양이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려 했었습니다만, 후취(後娶)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3년 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기운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들을 놓아 보내어 걸식하게 했다는 일은 본래 듣지 못했던 일이고, 여종을 속량(贖良)시킨 일에 대해서는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이지억의 숙부가 후사가 없자 이종연(李宗延)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으나 또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종연이 신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려 했는데, 이지억이 임시로 그 제사를 주관하면서 그 물건을 다 팔아버리고는 후사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흉한 물건을 묻었다는 일은 권가(權哥)가 선산(先山)과 마주 보는 곳에 묘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신의 노가(奴家)에서 버드나무를 깎아서 신(神)의 이름을 쓴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지서와 이지억을 면질시키게 하였다. 이지억이 이지서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궐문에 투서한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네가 누구의 말을 듣고 고했는가?"
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너의 형이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종당에는 알게 된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의심한 것이다."
하였다. 이지억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떠한 일인데 나의 형이 말하지 않은 것을 네가 장전(帳殿)에서 질언(質言)했단 말인가?"
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나도 모르게 너라고 대답했다. 무신년 초봄에 네가 속리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왕래할 때 문의의 수재(守宰)가 논하여 보고하려 하자 애걸하여 겨우 면하였었다. 너의 형 이지양은 적보(賊報)를 듣고서 기뻐하면서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어찌 광주(光州)나 나주(羅州)의 목사(牧使)가 될 수 없겠는가?’ 하였다."
하자, 이지억이 말하기를,
"네가 지금 죽을 지경에 빠져 살아나려고 이런 말을 하는데, 내가 무신년 2월에 회시(會試)의 강(講) 때문에 보은(報恩)의 절에 가 있으면서 보름 동안 글을 읽었었다. 3월 초6일에는 절이 텅 비고 사자(士子)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하였다. 죄인을 잡아 오는 사이에 우선 친국을 정지한다고 명하였다. 지평 이중조(李重祚)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다시 친국하였다. 이지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이지서와 팔촌 형제가 됩니다만, 본생(本生)으로는 육촌입니다. 그러나 원래 찾아다닌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사(人事)가 평인(平人)과 같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했기 때문에 신과는 서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안엽(安熀)과 한두 번 만났었는데, 외가(外家)의 원족(遠族)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정(安𤊟)은 안엽의 아우인데 갑진년069)  에 신과 함께 속리산에 갔었습니다. 박민추는 금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3월에 이지서가 한 번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왜변(倭變)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므로, 신이 책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집이 길가에 있어서 매우 두렵다.’ 하였습니다. 그의 여섯 아들은 모두 개·돼지 같은데, 장자는 이승연(李升延)이고, 차자는 이항연(李恒延)입니다. 금산(金山)의 정가(鄭哥)에 관한 일은 이지서가 말하기를, ‘금산에 봉황이 있어 알을 낳았는데 하루는 그것이 저절로 터졌으니, 이는 실로 재변이다.’ 하였습니다."
하자, 형추(刑推)를 시행하여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였는데, 공초하기를,
"전라 감사 이중경(李重庚)과 병판(兵判)에 대한 이야기는 허망한 말입니다."
하였다. 또 이지양과 이지서를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서로 쟁변(爭辨)하면서 굴하지 않았으므로, 막(幕)에 내리게 하였다. 이지목을 신문하고 다시 이지서와 면질시키니, 또 서로 힐난하는 것이 이지양과 하는 것과 같았다. 이지목을 막에 내리게 한 뒤에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억의 일은 신이 과연 면질할 때 꿀렸었습니다만, 금산(金山) 정가(鄭哥)의 이야기는 이지양에게서 들었습니다. 충청 병사·전라 감사는 모두 국가에 이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이 과연 무고하였습니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니라는 말은 신이 했습니다. 황진기(黃鎭紀)에 대한 이야기도 신이 그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여겨 한 말이고, 울릉도 곁의 섬이라는 이야기는 신이 과연 인심을 광혹(誑惑)시킬 계책에서 한 말입니다. 이는 속으로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倭)가 온다느니 호(胡)가 온다느니 금산의 봉계라느니 한 등등의 이야기는 모두 신이 지어낸 말입니다. 이지양·이지억은 신이 과연 무인(誣引)한 것이고, 문의(文義)의 괘서는 신이 과연 한 것이므로, 이는 모두 지만(遲晩)합니다만 궐문에 투서했다고 한 일절(一節)은 과연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네 번 형문하고 난 다음 형장을 정지하였다. 이지양·이지억·이지목은 방송(放送)하고 친국은 정지하되, 추국(推鞫)을 당일 거행하라고 명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지서가 나라를 원망하여 부도한 짓을 하고 말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은 이미 지만(遲晩)했으나, 가슴속의 역심을 다 실토하지는 않았다. 우규장(禹圭章)은 첩의 아우의 혼사를 위하여 소요스런 말을 전파한 것을 이미 자복하였다. 그러나 국체(鞫體)에 있어 곧바로 먼저 처단할 수는 없으니, 다시 엄형을 가하여 기어이 취복(取服)하도록 하라."
하였다.

 

2경에 의금부에서 추국(推鞫)하였다. 이지서를 신문하면서 형추(刑推)를 가하고 위엄을 보이니, 이지서가 공초하기를,
"문의(文義)의 괘서는 신이 아들 이항연과 함께 했는데, 그 글은 신이 읽었고 이항연이 썼으므로, 다른 사람은 실로 동참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은 첫째는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라에 해를 끼치게 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인심을 동요시켜 피란하게 되면 부자들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얻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우규장을 신문하였는데, 형장 서른 대를 치면서 추국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첩의 아우의 혼인을 속히 이루게 하려 했기 때문에 소요스런 이야기를 첩의 어미에게 말하였는데, 이로 인하려 소요가 크게 일게 되었으니, 이를 신의 죄로 삼는다면 죽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두루 돌아다녔다고 한 말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하였다.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지서가 괘서한 정절을 하나하나 직초하였으니, 아울러 전의 공초에서 자복한 나라를 원망하여 부도한 짓을 한 것, 요망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 남을 악역으로 무고한 것 등등의 죄와 함께 다시 지만 취초(遲晩取招)하겠습니다. 이항연이 괘서한 정형(情形)에 대해서는 철저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우규장은 형추하는 차수(次數)가 찼습니다만, 말을 타고 두루 돌아다닌 이야기에 대해서는 끝내 자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법(情法)에 의해 헤아려 보면 의논할 만한 점이 있으니,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지서에게 가형(加刑)하라고 명한 것은 문의의 괘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궐문에 투서한 내용을 송고(誦告)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심상하게 하지 말고 엄한 형신을 가하라. 이항연은 그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비가 시킨 것이니, 아울러 아비와 함께 사형을 받게 하는 것은 왕자(王者)가 흠휼(欽恤)하는 의의가 아님은 물론, 아비의 죄를 증거하게 하는 데 가까운 것이니, 가형하지 말고 이지서의 일이 결말나기를 기다려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 29일에 추국하면서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궐문의 투서는 3월 13일 신이 이항연을 서울로 보내어 돈 10냥을 가지고 사람을 사서 선전 관청(宣傳官廳)에 투입시켰는데, 그 사람의 아름은 거묵(巨墨)이었고, 전립(氈笠)에 군복을 입었으며, 거주하는 곳은 상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투서의 내용은 신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썼는데, 황진기(黃鎭紀)와 남쪽은 왜와 접하고 북쪽은 호와 접하고 서쪽은 가달(假韃)과 접했다고 운운했습니다. 이 외의 것은 이 항연이 첨가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지서는 엄형을 가하여 차수가 찼는데도 착란하게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끝내 직초하지 않고 있으니,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상하게 다루지 말고 각별히 엄히 형신하여 기어이 송대(誦對)하게 하라."
하였다. 이지서를 형문(刑問)하여 스물여덟 대에 이르니, 기절하였으므로, 형장을 정지하였다. 공초한 것은 전과 같았다.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지서를 각별히 엄하게 형신하였습니다만, 말한 것은 전과 같았는데 그대로 기절하였으니, 그가 회생(回甦)하기를 기다려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추국은 우선 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규장은 참작하여 먼 변방에 정배(定配)시키라고 명하였다. 6월 초2일에 다시 추국을 행하였는데, 이지서의 공초는 전과 같았으므로, 추국을 우선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초3일 다시 추국을 행하였는데, 이지서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지서에게 엄형을 가하여 차수가 찼는데도 끝내 직초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죄인 이지서가 물고(物故)되었다. 이항연은 참작하여 도배(島配)시키라고 명하고, 오명후·박민추는 아울러 엄형 1차를 가한 뒤에 먼 변방에 정배하고, 이영손(李榮孫)·오수만(吳遂萬)은 아울러 방송(放送)하고, 박험백(朴驗白)은 추조(秋曹)에서 방송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본도에 수계(囚繫)된 자들도 아울러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기유

사간원 【정언 송덕중(宋德中)이다.】 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의리가 회색(晦塞)됨에 따라 변괴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저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는 천지 사이에 세워 놓고 만고에 이르도록 바꿀 수 없는 대론(大論)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조제(調劑)에 지나쳐 오랫동안 유음(兪音)을 아끼시고 있으며, 격뇌(激惱)에 의한 하교를 누차 전석(前席)에서 발하였습니다. 지난번 이종성(李宗城)이 임금의 마음을 엿보아 살피고 시세에 따라 부앙(俯仰)하면서 패려스러운 소장을 올려 혈당을 위하여 드러내 놓고 송원(訟怨)하였습니다. 죄가 종사에 관계가 되는데도 태양을 꿰는 충성이 있다고 장려하였고, 역적의 와주(窩主)인데도 세상을 도울 만한 선(善)이 있다고 포장(褒奬)하였으며, 그의 역절을 밝히는 말은 견강 부회하는 것으로 몰아붙이고, 토죄(討罪)하는 거조가 있어야 한다고 성언(聲言)하는 것은 비난하는 것이라고 욕하면서 무엄하고 방자한 짓을 끝없이 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의리로는 사표(師表)와 같다고 한 말에서 더더욱 수수(授受)한 실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곧 스스로 뜻을 함께 했었다는 공초를 바친 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 종성에게 일분이나마 국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임금을 무시하고 역적을 편드는 마음이 창자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감히 전하의 앞에서 충역(忠逆)을 현란시키면서 배치(背馳)하기를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이런데도 베지 않는다면 장차 음사(陰邪)가 날로 치성하여져도 난적(亂賊)을 징계할 길이 없게 됩니다. 청컨대 전 대사헌 이종성을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7일 경술

주강을 행하였다.

 

교리 정순검(鄭純儉)을 폄척(貶斥)하여 어면 만호(魚面萬戶)로 삼았다. 이에 앞서 송덕중(宋德中)이 대각(臺閣)에 나아가다가 길에서 대신(大臣)을 만났는데 즉시 서로 읍(揖)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리(下吏)를 가두었다. 송덕중이 대각에 나아갔으나 발계(發啓)할 수 없어 인혐(引嫌)하고서 물러갔다. 수찬 이규채(李奎采)가 처치(處置)했는데 송덕중을 입과(立科)로 귀착시켰으므로, 송덕중이 즉시 직(職)에 나아가 드디어 이종성에 대한 계사(啓辭)를 올렸다. 정순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중신(重臣)의 상소는 임금을 섬김에 있어 숨기는 것이 없고 의리에 의거 자정(自靖)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일종의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의논을 시세에 따라 엿보아 발론하였는데 앞에서 창을 들고 창언(倡言)하니, 독봉(毒鋒)이 뒤를 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필코 조정을 괴란시켜 곧 무기를 휘두르는 싸움터로 만든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지붕을 바라보면서 탄식하게 됩니다. 어제 있었던 대신(臺臣)의 처치(處置)에 이르러서는 법례에 있어 의당 낙과(落科)에 두어야 하는데도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서 출사시키라고 청한 것은 너무도 구간(句簡)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간계(諫啓)를 무릅쓰고 발한 것은 크게 대체(臺體)를 손상시킨 것이니, 거조가 패려스럽고 수각(手脚)이 황란했다는 것을 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공법(公法)을 하찮게 여기고 당습을 달게 여긴 죄에 대해 아울러 견파(譴罷)하는 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힘써 진정시키려고 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간에서 이종성을 논한 말을 따르지 않았었으나, 정순검의 상소가 나온 데 이르러서는 그가 자기의 당여에 대해 우단(右袒)한 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의 죄를 드러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하교하기를,
"정순검은 유신(儒臣)으로 자처하면서도 문신 전강(文臣殿講) 때에 이에 불통(不通)을 받았다. 내가 그에게 글을 읽게 하고 싶다."
하고, 드디어 출보(黜補)시키라고 명하였다. 송덕중·이중조(李重祚)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게 하였으며, 이규채는 특별히 체직시켰는데, 이중조는 처치(處置)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권항(權杭)을 정언으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민백행(閔百行)을 대사간으로, 이수덕(李壽德)을 지평으로, 권현(權賢)을 집의로, 김주(金霔)를 장령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헌납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정언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부제학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응교로, 윤광소(尹光紹)를 부응교로, 어석윤(魚錫胤)을 수찬으로, 김시위(金始煒)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28일 신해

장령 김주, 헌납 조윤제를 아울러 파직시켰다. 이때 합계가 그대로 있었는데,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아울러 규피(規避)하였으며, 친국(親鞫)할 때 양사(兩司)는 으레 인원을 갖추게 되어 있었는데도 정언 심발(沈墢)이 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국좌(鞫坐)에 참석은 했었으나 전계(傳啓)를 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주·조윤제는 실로 피혐해야 할 단서가 없었다. 대저 전계(傳啓)하는 규례는 만일 합계가 있으면 먼저 합계를 발한 뒤에 부계(府啓)나 원계(院啓)를 발하게 되어 있는데, 김주가 일부러 조처를 잘못한 것처럼 하여 먼저 부계를 발하였고 조윤제는 또 원계를 발하여 준례에 따라 비답을 받들었으나, 삼사의 합계는 끝내 연계(連啓)하지 않았다. 응교 황경원(黃景源)이 아뢰기를,
"삼사의 합계는 사체가 엄중한 것입니다. 삼사가 함께 회좌(會坐)한 경우에는 반드시 서로 문의하여 의논이 합치되면 연계하고 합치되지 않으면 각자 인혐(引嫌)하는 것이 준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합계는 수십 년 동안 일국의 공의(公議)가 거기에 연유되어 발론되었던 것인데, 헌신(憲臣)은 간신(諫臣)에게 문의하지 않았고 또한 신에게 문의하지 않았습니다. 조윤제는 감히 정론(停論)하자는 말을 발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연계하지 않았으니, 오늘날 양사의 거조는 대각이 있은 이래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주·조윤제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지금 신자(臣子)가 된 사람은 유봉휘(柳鳳輝) 등의 처분이 있은 뒤에는 이런 계사를 정지했어야 하는 것이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조윤제가 의기 양양하게 물러나가서 자신의 하례(下隷)를 시켜 합계를 정지시켰다는 것으로 정원에 호망(呼望)하려 했는데 김주에게 견제되어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박문수(朴文秀)에게 가서 만나 보고 말하기를,
"오늘 내가 합계를 정지시켰소이다."
하였다.

 

전 대사헌 이종성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송덕중이 이종성에 대한 계사(啓辭)를 발하였다가 곧이어 조윤제 등에 의해 정지되었기 때문에, 임금이 그들의 각승(角勝)을 증오하였고, 또 피차 양쪽을 진정시키기 위해 드디어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5월 29일 임자

지평 이수덕(李壽德)이 상소하여 패초를 어긴 여러 신하들을 귀양 보내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금번의 처분은 국체(國體)를 높이기 위한 것인데,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미 참작하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이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되어 가지고 도리어 그들을 영호(營護)하니,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금오 당상(金吾堂上)도 같이 입시하였다. 장령 김광국(金光國)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지양(李之陽)이 이지서(李之曙)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요망한 말로 수작한 이야기는 장전(帳殿)에서의 친문(親問)에서 스스로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가 이웃 고을에 있으면서도 지명을 모른다고 한 이야기는 속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인 것입니다. 말초의 처분을 내린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인자함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갑자가 완전히 석방시키는 것은 옥체(獄體)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청컨대 이지양을 먼 곳에 정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속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마음을 따져 보면 다른 뜻이 없었다. 다시 귀양 보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종성의 상소는 매우 패려스러운 것이었는데, 대계(臺啓)에서 죄를 청한 것에서 공론(公論)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납 조윤제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아첨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갑자기 정계(停啓)시켰으니, 삭직(削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가 풍파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체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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