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인
유건기(兪健基)를 대사헌으로, 이광세(李匡世)를 대사간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집의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지평으로, 이성억(李聖檍)을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헌납으로 삼았다.
장령 김계백(金啓白)을 삭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삼사의 합계를 오랫동안 궐하였었으므로 거의 정계(停啓)한 것과 같았었다. 김광국(金光國)·윤상임(尹尙任)이 양사(兩司)의 비원(備員)으로 입시했으면서도 아울러 전계(傳啓)한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 계백·이 성억이 참국(參鞫)한 대신(臺臣)으로 입시하게 되었는데, 김계백이 이성억에게 간통(簡通)으로 문의하였으나 이성억이 조윤제 등에게 빌붙었으므로 미루어 핑계대면서 응하지 않자, 김계백이 피혐하였다. 임금이 대노하여 삭출시킬 것을 명하였다.
6월 5일 무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전세를 견감시키는 일을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했습니다만, 전부터 의주에서는 빚을 주고 그 이식을 취해서 지용(支用)의 밑천으로 삼아왔는데 중간에 채전(債錢)이 모두 포흠(逋欠)으로 귀결되어 인족(隣族)에게 독징(督徵)하는 탓으로, 온 경내에 그 폐해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후 채부(債簿)를 일체 탕감시켰습니다. 그런데 본부(本府)의 누락된 전결이 토호와 향색(鄕色)에 의해 녹아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세금을 내게 하여 지용에 보태게 하는 것은 경솔히 견감시킬 것을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무신년070) 에 난역(亂逆)이 있은 이래 국옥(鞫獄)이 해마다 그치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이를 인연하여 적당히 조정하여 강제로 죄에 몰아넣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었다. 임금이 이를 우려하여 중외(中外)의 신료(臣僚)들에게 하유하기를,
"하늘이 우로(雨路)를 내림에 있어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리는 법이므로, 왕자(王者)는 하늘의 뜻을 본받아 삼무사(三無私)071) 를 봉행하는 것이다. 이윤(伊尹)은 한 사람이라도 제가 살 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겼는데, 더구나 임금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대저 사람은 지친이라 할지라도 형제간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고, 좌죄(坐罪)시키는 법률도 정해진 한도가 있는 것인데, 지금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반드시 이는 아무와 친한 사이라고 하면서, 정주(政注)도 이 때문에 저지시키고 천인(薦引)도 이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 족속을 가리켜 아무의 족속이라고 하고 그 당여를 가리켜 아무의 당여라고 하기 때문에 조정에 장차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아! 대소 신료들은 모두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서 정주하는 사이에 법 밖의 것으로 저지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죄인 조관석(趙觀錫)을 신리(伸理)시키라고 명하였다. 처음 조관석이 팔금(八金)에게 원인(援引)당했었는데, 이지서(李之曙)의 일이 일어남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왕자(王者)의 처분은 그 사람의 처지에 따라 의심해서도 안 되고 또한 한 가지 일 때문에 두 사람을 죄를 주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심상한 일도 오히려 그렇게 해야 되는데, 더구나 국수(鞫囚)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난번 팔금의 공초는 남쪽도 가리키고 북쪽도 가리켜 수상한 데 관계가 되었으며, 끝에 가서는 돌을 가리키면서 끌어들이려 하기에 이르렀다. 그를 참작하여 처분한 것은 이런 때문이었다. 팔금의 말대로라면 조관석이 돌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단지 그의 거조가 광잡(狂雜)스러웠고 초사(招辭)가 어긋났으며, 팔금 또한 무인(誣引)했다고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작하여 정배했던 것이다. 이는 죄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가벼운 쪽의 법전을 따라야 한다는 데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옥문(獄門)을 넘지 못하고 우연히 죽었다. 이제 이지서가 궐문에 투서했다는 공초도 착란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투서의 내용을 송고(誦告)하지 않고 장을 맞다가 죽었으니, 어찌 두 사람이 함께 범했을 리가 있겠는가? 대저 투서는 계획을 세움이 음참(陰慘)스러운 것이니, 함께 공모한 사람이 어찌 한 사람뿐이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는 팔금에게 투서를 건네 준 사람이 곧 한 사람이었는데, 앞서는 조관석이 했고 이제는 이지서가 했다는 것은 결코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조 관석이 무고당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그대로 단서(丹書)072) 에 두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를 특별히 신리시키라."
하였다. 조관석은 한미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죽고 난 뒤에 다시 신백(伸白)시킬 것을 명하였으므로, 모두 임금의 어질고 밝음에 감복하였다.
6월 7일 경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 뜰에서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6월 9일 임술
유성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예조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산릉(山陵)의 속절(俗節)과 기신(忌辰)에 관한 의식이 《오례의(五禮儀)》의 본판(本板)과 착오가 나는 것을 다시 고증하여 도식(圖式)을 이정(釐正)하기 위해서였다.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응교로, 이이장(李彛章)을 교리 겸 필선으로, 황경원(黃景源)을 부교리 겸 보덕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수찬으로, 이세사(李世師)를 부수찬으로, 유현장(柳顯章)을 장령으로, 이영조(李永祚)·정언상(鄭彦祥)을 지평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6월 10일 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전 대사헌 서명구(徐命九)와 전 수찬 한광회(韓光會)를 석방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1일 갑자
장령 유현장(柳顯章)이 상소하여 다시 이항연(李恒延)·오명후(吳命垕)·박민추(朴敏樞)를 추국할 것을 청하고, 정언 정언상(鄭彦祥)도 상소하여 다시 팔금(八金)과 이항연을 추국할 것을 청하였으나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지평 이영조(李永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욕하고 비난하는 풍조는 진실로 말속(末俗)의 폐습(弊習)인 것인데, 어찌 한광회처럼 멋대로 증오에 찬 말을 마구 하는 것을 이처럼 가리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대각에 들어간 처음에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져 염치와 부끄러움이 완전히 없어진 것을 목견하고서 마음속으로 놀랍고 개탄스러워한 끝에 한두 사람의 명검(名檢)에 대해 대략 논한 것뿐이었습니다. 한광회 집안의 본래 언의(言議)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등제(登第)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광찬(李匡贊)을 뽑아서 방색(榜色)으로 삼았으니, 지론(持論)의 소재를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그의 말이 이러하니, 어찌 천하의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시세에 빌붙고 이로움만을 추구하여 안면을 바꾸고 영달을 노려 처지에 따라 이마를 조아리는 색태(色態)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짓입니다. 이런 풍습은 참으로 진신(縉紳) 세가(世家)의 일대 변괴인 것이므로 이것이 신이 이관섭(李觀燮)과 아울러 논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이들에 대해 어찌 한 터럭인들 사사로운 호오(好惡)가 있어 그리하였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등등의 습관은 정신이 희미한 사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은미한 일을 들추어내어 대거(對擧)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대개 지난해 양쪽의 준렬한 의논을 서로 화합시키자는 의논이 바야흐로 성대했었는데, 이영조가 미련하고 아는 것이 없어 제류(儕流)에 가담하여 드디어 한광회를 탄핵함으로써 탕평론을 동요시키려 하자, 한광회가 신축년073) ·임인년074) 의 여론(餘論)이라고 지목하여 대소(對疏)에서 거론, 탄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영조가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변해(辨解)하고 다시 한광회를 비난하였다.
6월 12일 을축
소대(召對)를 행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광무제(光武帝)는 삼대(三代) 때의 임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는 또한 어렵게 여기고 있다. 지금 나는 마음을 삼대에 두고 있지만 실효가 없으니, 걸주(桀紂)가 될까 두렵다."
하니, 시강관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아무런 모유(謨猷)를 세운 것이 없이 이제 노년에 이르렀다. 늙은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한 일이 없어 초목(草木)과 함께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하니, 시독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걸주가 될까 두렵다는 하교를 하셨는데, 항상 이런 마음을 지니고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잊지 않고 노력한다면, 저절로 점점 요순(堯舜)의 경지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6월 13일 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장령 유현장(柳顯章)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동몽선습》의 끝 장(章)에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왕요(王瑤)라고 그 이름을 척서(斥書)한 것을 열람하고서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우리 태조께서 일찍이 북면(北面)하여 공양왕을 섬겼었다. 이는 열조(列朝)에서 전조(前朝)를 대우한 뜻이 아닌 것이니, 운관(芸館)으로 하여금 구판(舊板)을 세보(洗補)한 다음 그의 묘호(廟號)를 쓰게 하라."
하였다.
밤에 소대를 행하였다.
이명곤(李命坤)을 대사헌으로, 이섭원(李爕元)을 장령으로, 김치인(金致仁)을 정언으로, 이게(李垍)를 부교리로, 임석헌(林錫憲)을 수찬으로, 이규채(李奎采)를 필선으로, 심성진(沈星鎭)·오언유(吳彦儒)·김한철(金漢喆)·민광우(閔光遇)·정권(鄭權)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4일 정묘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강희(康熙) 때의 일을 인용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어 훈융진(訓戎鎭) 건너편에 집을 짓는 일을 철회하도록 청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피인(彼人)이 훈융진 건너편에 집을 지었는데, 점차 증가되는 형세가 있었으므로, 변방의 신하가 갑오년075) 의 일을 인용하여 강가에서 격리시키라고 책하고 나서 또 자문을 보내겠다는 뜻을 말하며 철거하게 하였으나, 자기들의 수령(首領)이 이미 황제에게 품하였으니 끝내 움직일 뜻이 없다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6월 15일 무진
승지가 전최(殿最)를 가지고 입시하였는데, 경상 좌병사 유주기(兪胄基)를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오게 하였다. 전최법에 수령(守令)과 각진(各鎭)의 제목을 관찰사는 도사(都事)가 쓰고, 병사는 우후(虞候)가 쓰게 되어 있었는데, 임금이 유주기의 폄장(貶狀)이 모두 이필(吏筆)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노하여 이르기를,
"이는 무장(武將)이 교만하고 건방진 소치인 것이다. 엄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고적법(考績法)이 또한 반드시 다 없어져 버리게 될 것이다."
하고, 이 명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6월 17일 경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양역 사정 책자(良役査正冊子)를 올렸다. 양역에 대한 폐단은 그것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므로 조현명이 건의하여 경외(京外) 각 고을의 명목을 가져다가 이정(釐正)하면서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태게 했는데, 모두 10책으로 되어 있었다. 수미(首尾)가 6, 7년이나 걸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양역의 폐단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조 현명의 건의는 듣기에는 기쁜 것 같았지만, 폐단의 근원은 막지 못하고 단지 말단만 바로잡았을 뿐이다. 경외의 간민(奸民)들 가운데 교묘하게 양역에서 피하여 누락되었던 자들로서 명목에 들어간 자가 겨우 열에 한둘뿐이었다. 여러 해 동안 청(廳)을 설치하여 실속없는 법을 만들어 일분의 이익을 추구하였으니, 계획을 세운 것이 또한 허술했다. 같이 일을 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완성시킬 수 없다고 했는데도 조 현명이 더욱 극력 버티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었으나 백성들의 곤고는 그대로였다."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8면
【분류】재정(財政)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양역의 폐단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조 현명의 건의는 듣기에는 기쁜 것 같았지만, 폐단의 근원은 막지 못하고 단지 말단만 바로잡았을 뿐이다. 경외의 간민(奸民)들 가운데 교묘하게 양역에서 피하여 누락되었던 자들로서 명목에 들어간 자가 겨우 열에 한둘뿐이었다. 여러 해 동안 청(廳)을 설치하여 실속없는 법을 만들어 일분의 이익을 추구하였으니, 계획을 세운 것이 또한 허술했다. 같이 일을 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완성시킬 수 없다고 했는데도 조 현명이 더욱 극력 버티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었으나 백성들의 곤고는 그대로였다."
6월 18일 신미
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임순(任珣)을 지평으로, 나순(羅㶷)을 정언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사서로 삼았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6월 20일 계유
황해 감사 엄우(嚴瑀)가 상소하여 송화 현감(松禾縣監) 윤희복(尹熙復)을 잉임시키게 해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해서의 민속이 사납고 모질어서 송사를 즐기고 용맹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향곡에서 사납게 무단(武斷)을 부리는 부류들이 관장(官長)을 능력(陵轢)하였으므로, 명분이 크게 무너졌다. 그런데 윤희복이 송화현에 부임하여 강엄(剛嚴)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면서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 때문에 어사의 마음을 거스려 장차 파직되게 되었으므로, 엄우가 상소하여 송원(訟冤)하고 이어 그의 치적을 진달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신사(信使)는 삼로(三路)를 나누어 출발하게 하는 것이 본래의 구규(舊規)인데, 중간에 회동(會同)하여 연회를 베푸는 곳에 구애되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갈 때는 좌로(左路)로 가고 올 때는 우로(右路)로 경유하도록 변통시켜 규례를 고쳤던 것으로, 《통문관지(通文館志)》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삼사신(三使臣)은 일행이 매우 많아서 거의 1천 명이 넘는데, 이들이 한 역참에 같이 모이게 되면 그 폐단이 매우 혹심하게 됩니다. 각 고을에서 나누어 공궤(供饋)함에 있어 먼 경우에는 4, 5일 길이 되고, 가까운 경우에도 2, 3일 길이 되어 왕래하는 데 드는 부비(浮費) 또한 한정이 없습니다. 당초 변통할 때 이미 중로(中路)를 경유하여 연향을 베풀게 되어 있는데, 중로에서 연향하는 것을 이미 정파(停罷)했으니, 지금부터는 돌아올 때 삼로(三路)로 나누어 정사(正使)는 중로를 거쳐 조령(鳥嶺)으로 오게 하고, 부사(副使)는 좌로를 취택하여 죽령(竹嶺)으로 오게 하고, 종사관(從事官)은 우로를 취택하여 추풍령(秋風嶺)으로 오게 하는 것을 항식으로 정하게 하소서. 지금 사신이 돌아올 날이 머지 않았으니, 마땅히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삼도(三道)에 분부해야 합니다."
하고, 좌윤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먼저 이에 대한 편부(便否)를 본도의 감사에게 하문하여 본 연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다시 번거롭게 두루 하문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끝내 홍 상한의 의논을 따라 삼도(三道)에 하문하게 하였다. 정언 나순(羅㶷)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궐문에 투서한 것은 전사(前史)에 없던 변이며, 요망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은 곧 무신년076) 흉역의 잔당들 짓인 것입니다. 지난번 팔금(八金)이 이미 그 죄를 자복했으며, 이항연·오명후·박민추 등이 요악스러운 부도를 저지른 정상과 긴밀하게 왕래한 자취가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할 때 다 드러났으니, 엄히 핵실하여 철저히 따지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갑자기 내렸으니, 옥사(獄事)가 소루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정(輿情)이 오랠수록 더욱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속히 팔금·이항연·오명후·박민추를 작처하라는 명을 정지시키고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가 김주(金霔) 등이 궐계(闕啓)한 뒤부터 정계(停啓)하지 않고 연계(連啓)하지도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 순이 대각(臺閣)에 나아가 우선 정지시키고 나서는 비로소 정원(政院)에 호망(呼望)하였다. 이에 앞서 나 순이 정계하는 쪽으로 붙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에 호망(呼望)과 고정(姑停)으로 발계(發啓)한 쪽에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공조 참판 구택규(具宅奎)가 양역 실총(良役實摠)의 공역(工役)이 끝났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묘당(廟堂)에 내려 다시 교검(校檢)하게 한 다음 기궐(剞厥)에 붙이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6월 21일 갑술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신만(申晩),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나아왔다. 이기진(李箕鎭)을 예문관 제학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좌부빈객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동지의금부사로, 민백창(閔百昌)을 겸 문학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사로, 이이장(李彛章)을 서장관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대사성으로, 구성필(具聖弼)을 우윤으로, 이익원(李翼元)·윤학동(尹學東)을 정언으로, 이태상(李泰祥)을 경상 좌병사로, 김선행(金善行)을 교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준렬한 양쪽을 화합시키자는 의논이 성대했었는데, 신만(申晩)·김상성(金尙星)이 이를 주관하였다. 신만과 김상성은 다정하게 사귀었고 함께 전지(銓地)에 있었는데, 김상성이 수삼차 정사(政事)를 하면서 이종성(李宗城)·서지수(徐志修)를 잇따라 의망하여 소론(少論)의 기세가 상당히 증폭되자, 신만이 좋지 않게 여겼다. 신만과 김상성이 폄좌(貶坐)에 나아갔는데, 김상성이 제의하여 심국현(沈國賢)·김범갑(金範甲) 등을 대망(臺望)에 신통(新通)시키고, 이종성·이광덕(李匡德)을 다시 제학에 의망하고, 이철보(李喆輔)를 새로 도헌(都憲)과 경연(經筵)에 통망(通望)하고, 오명신(吳命新)을 다시 옛 자리에 의망하려 하자, 신만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혼자 있다면 불가할 것이 없겠으나, 내가 전지(銓地)에 있는 한 결코 따를 수 없다. 그리고 심국현은 심유현(沈維賢)의 종제인데, 어떻게 대망(臺望)에 주의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상성이 노하여 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김상성이 병이라 핑계대고 출사하지 않았다. 신만이 그가 출사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서 개정(開政)하면서 말하기를,
"참판이 출사하지 않는다고 혼자서 도정을 할 수 없을 것 같은가?"
하였다. 신만과 김상성이 이를 연유하여 갈라서게 되었다.
사신은 말한다. "김상성은 기민하고 재주가 있어 신만과 좋은 친교를 맺었었으나, 신만이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일일이 그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르겠는가? 이렇게 사리에 어긋나는 계교를 부림으로써 성공시키지 못하고 말았으니, 매우 슬기롭지 못한 사람이다."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8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김상성은 기민하고 재주가 있어 신만과 좋은 친교를 맺었었으나, 신만이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일일이 그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르겠는가? 이렇게 사리에 어긋나는 계교를 부림으로써 성공시키지 못하고 말았으니, 매우 슬기롭지 못한 사람이다."
전 응교 이태중(李台重)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이태중은 청준(淸峻)하고 의논을 좋아하여 누차 엄교(嚴敎)를 받았으므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귀양다니면서 하위(下位)를 면하지 못하였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태중이 본디 벼슬하지 않으려는 뜻이 없었습니다만, 단지 과거에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무릅쓰고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그가 상소하여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지난 일은 지나치게 혐의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개석(開釋)하신다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의 하교는 내가 과연 실언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문자로 드러내어 진걸(陳乞)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용하라는 명이 내렸고 승지에 초배(招拜)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태중을 끝내 버릴 수 없어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천인(薦引)한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신하 하나를 나오게 하는 길을 만들기 위해 감히 임금에게 비답을 내리라고 청하였으니, 대신이 이에 있어서 실언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8면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이태중을 끝내 버릴 수 없어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천인(薦引)한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신하 하나를 나오게 하는 길을 만들기 위해 감히 임금에게 비답을 내리라고 청하였으니, 대신이 이에 있어서 실언한 것이다."
6월 23일 병자
평안도의 물려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시행하였다.
6월 24일 정축
조명정(趙明鼎)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다. 옹주는 곧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暎嬪) 이씨(李氏)의 소생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했으므로, 가인(家人)을 시켜 아뢰기를,
"병이 위독하여 다시 천안(天顔)을 모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갑자기 행행하였다. 일이 갑작스러운 데에서 나왔으므로 백관(百官)이 미처 다 모이지 못한 탓으로 여위(輿衛)가 미비하여 의장(儀仗)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옹주가 곧 이어 졸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빈소(殯所)에 임어하여서는 통곡하면서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날씨가 매우 무더웠는데 밤새도록 환궁하지 않자, 대신과 여러 신하들, 정원(政院)이 누차 접견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인대(引對)를 허락하지 않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염습(殮襲)할 때 친림(親臨)하였으며, 일등(一等)으로 호상(護喪)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화평 옹주의 계후(繼後)는 진사(進士) 박흥원(朴興源)의 제3자(第三子) 박수현(朴壽賢)으로 정하라는 내용으로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행행하여 임어했을 때의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살피지 않았다.
교리 김선행(金善行), 수찬 윤상임(尹尙任)이 상소하여 옹주의 집에 동가(動駕)했을 때의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아울러 비답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하유하였다."
하였다.
6월 25일 무인
임금이 화평 옹주의 집에 있으면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차(移次)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 있을 적에 비가 심하게 내렸으므로 백관과 군병들이 하루 종일 비를 맞았다. 오후에 창덕궁으로 이차하게 하자 뭇 신하들이 간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는 장차 다시 염빈(殮殯)에 임어하기 위해서였다.
사신은 말한다. "왕자(王者)가 상(喪)에 임어하는 데에는 본래 전례(典禮)가 있는 것으로, 열조 이래 왕자나 옹주의 상에 간혹 나아가 임어하기도 했었으나 곧 이어 즉시 환궁하였다. 따라서 빈렴(殯殮)에 친림(親臨)한 일은 예로부터 들은 적이 없던 일이다.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간쟁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끝내 감동시켜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20년 동안 뜻을 봉행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구차스럽게 따르기만 하는 신하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겼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가 있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바로잡으려 했었으나, 그 또한 늦은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98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왕자(王者)가 상(喪)에 임어하는 데에는 본래 전례(典禮)가 있는 것으로, 열조 이래 왕자나 옹주의 상에 간혹 나아가 임어하기도 했었으나 곧 이어 즉시 환궁하였다. 따라서 빈렴(殯殮)에 친림(親臨)한 일은 예로부터 들은 적이 없던 일이다.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간쟁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끝내 감동시켜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20년 동안 뜻을 봉행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구차스럽게 따르기만 하는 신하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겼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가 있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바로잡으려 했었으나, 그 또한 늦은 것이었다."
6월 26일 기묘
임금이 또 화평 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대신(大臣)이 간쟁하였어도 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진달해도 비답하지 않은 채 도로 내어 주었다. 이때 대관(臺官)들은 모두 나오지 않았으므로, 한마디도 간쟁한 사람이 있지 않았다. 단지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 호조 참의 윤광의(尹光毅)가 상소하여 간쟁했으나 정원에서 직분을 넘어선 말이라는 것으로 입계(入啓)하려 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조정에 대신(臺臣)이 없는데, 임금에게 지나친 거조가 있을 경우에는 관(官)에 있는 자는 누구든 모두 간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원에서 두 상소를 봉입(捧入)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98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조정에 대신(臺臣)이 없는데, 임금에게 지나친 거조가 있을 경우에는 관(官)에 있는 자는 누구든 모두 간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원에서 두 상소를 봉입(捧入)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6월 27일 경진
임금이 옹주의 집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6월 29일 임오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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