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미
우찬성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인정을 씀에 있어서 중도(中道)를 얻는 데 귀함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분에 넘침이 있으면 곧 병패(病敗)가 생깁니다. 일반 사대부들도 그러한데 더구나 제왕가(帝王家)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번 귀주(貴主)의 상사(喪事)에 성상께서 여러 날 친림(親臨)하셨는데, 이는 진실로 정리에 있어 차마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이기는 합니다만, 고금의 사적(史籍)에 기재된 바로는 이와 같이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일동 일정은 후사(後嗣)의 본보기가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까? 이미 여러 날 정경(情境)을 풀으셨으니, 지금 즉시 환궁(還宮)하신다 하여도 조금도 미진함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즉시 회가(回駕)를 명하여 신민(臣民)들의 마음에 부합되게 하소서. 죽어가게 된 병든 몸이어서 하나도 딴 생각은 없고 뜻은 충성을 바치는 데 있지만 말을 가려서 하지 못했으니, 전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답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음(米飮) 같은 음식도 잘 넘기지 못하여 매양 답답한 때가 많다.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한 연후에야 마음이 조금 안정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였다.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한 귀주(貴主)의 상사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내용을 사책(史冊)에 기록한다면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여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孝章)077) 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마음이 항상 답답하였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자부(子婦)의 경우에는 현빈(賢嬪)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판결사(判決事) 권굉(權宏)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척연(惕然)히 분발하시어 스스로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셨습니다만, 생각건대 오늘날 많은 일 가운데 성궁(聖躬)을 보호하여 천화(天和)를 맞아들임으로써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는 근본으로 삼는 것보다 더한 일이 없는데, 그 요점은 오직 조용히 있을 때의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태극(太極)078) 은 조용함[靜]에 근본을 두었으나 조용한 다음에 움직임[動]이 있으므로 만화(萬化)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용함에 근본을 두지 않고 움직임에만 치우친다면 태극의 이치는 거의 종식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임금은 하늘을 본받아 도(道)를 행하는 것이니, 참으로 쉬지 않고 스스로 힘쓰는 것은 분수 안의 일인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어두워지면 들어가서 편안히 쉰다.’고 했는데, 정자(程子)가 해석하기를, ‘군자(君子)가 낮에는 쉬지 않고 스스로 힘쓰다가 날이 어두워지게 되면 휴식을 취해 몸을 편안하게 하여 기거(起居)를 때에 따라 알맞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대저 ‘기(起)’ 자는 움직일 때의 공부에 속하는 것이고 ‘거(居)’ 자는 조용할 때의 공부에 속하는 것이니, 성인(聖人)이 상(象)을 살펴보고 설교(說敎)한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근래 성후(聖候)가 잇달아 정섭(靜攝) 중에 계시는데도 잘 다스리기를 구하는 정성이 해이되지 않으시고 걱정하는 생각이 너무 지나치시어 신료(臣僚)들을 인접함에 있어 번번이 밤중이 되기 일쑤이고 정망(政望)을 출납함에 있어 혹 밤을 새우기도 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피로하여 지치는 조짐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의 평일 공부가 항상 움직이는 쪽에만 지나쳐서 상(象)에 따라 날이 어두워지면 휴식을 취한다는 뜻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소홀히 하는 점이 있지 않으신가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조용하게 하시어 움직임을 억제하고 간략하게 하시어 번거로움을 다스려 새벽의 청명(淸明)한 기운으로 하여금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하시며, 성궁(聖躬)의 기거를 때에 따라 알맞게 하여 일을 절제하고 건강을 보존하는 방법을 극진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7월 2일 갑신
윤광의(尹光毅)를 승지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에게 연향(宴享)을 베풀 때 무동(舞童)이 입는 관복(冠服)에 무늬 놓은 비단을 사용하지 말게 할 것을 국가의 금령(禁令)으로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대사간 이명곤(李命坤)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에 지존(至尊)이 상사(喪事)에 임어하셨을 적에 부정을 막기 위해서 도열(桃茢)과 과모(戈矛)를 잡게 함079) 을 먼저 한 것은 예의(禮意)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이제 성상께서는 고복(皋復)080) 한 장소에서 밤을 새우셨고 성빈(成殯)하는 날에 거듭 임어하시어 곡위(哭位)에서 마음 아파하셨으니, 성체(聖體)에 손상을 끼친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정섭(靜攝) 중에 계셨으므로 자성(慈聖)께서 병을 걱정하시는 생각이 있으신데, 더더욱 어떻게 스스로 성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여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면려한 내용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7월 3일 을유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하고 환궁할 때 지나다가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상(喪)에 들른다 하니, 대신과 약원(藥院)에서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수레를 탈 때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말하기를,
"경 등이 기필코 간쟁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원직(院直)하게 하겠다."
하자, 대신이 감히 간쟁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땅에 엎드려 죄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기를,
"네가 나를 부옹(婦翁)으로 여긴다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가(大駕)가 옹주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초경(初更)에 이르러 정원(政院)·옥당(玉堂)·내국(內局)과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품계(稟啓)하자 환궁하였다.
7월 4일 병술
비변사에서 일차(日次) 때문에 품계하니, 임금이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당시 옹주의 상사가 난 이후 임금의 슬픔이 극심하여 오랫동안 정무(政務)를 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일차 때문에 품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인정을 그렇게도 모르는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피로하여 지친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다.
7월 5일 정해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죄줄 것을 청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삼간 것은 재계(齋戒)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옹주의 집에 거둥하신 것이 마침 추향(秋享)의 청재(淸齋) 때를 당하였는데, 신이 엊그제의 진연(診筵)에서 일이 있기에 앞서 진계(陳戒)하지 못한 탓으로 드디어 임금으로 하여금 더없이 큰 잘못된 거조가 있게 하였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바라건대, 사패(司敗)081) 에 내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형벌로 감단(勘斷)하소서."
하니, 임금이 차자를 열람하고 땅에다 팽개치며 말하기를,
"이 차자는 좌상의 문집(文集)에 있으면 빛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어제(御製)를 수집하였는데, 이제 좌상의 일을 보고 나니 그것을 모두 불태우고 싶다."
하였다. 조현명이 훌륭함을 뽐내고 이름 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좌참찬 권적(權𥛚)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러운 것이 곧 인륜의 대경(大經)이나, 혹시 정에 끌려 상도(常道)에 지나친 거조가 있게 되면 이는 효성이 아닌 것이고 자애가 아닌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백어(伯魚)082) 의 상(喪)을 당했을 때 단지 ‘반드시 예법대로 하고 싶다.’고만 했으며, 자하(子夏)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시력을 잃었는데, 증자(曾子)의 한마디 말을 듣고서는 절하고 받아들여 슬픔을 억제했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와 태모(太母)의 중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원량(元良)과 백료(百僚)의 소망을 생각하시어 예법에 의거하여 마음을 억제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일을 절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로 내어 주라. 위로하는 내용의 장주(章奏)도 아울러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7월 6일 무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이는 옹주(翁主)의 집과 가까운 곳을 취택해서인 것이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중궁전(中宮殿)도 함께 이어하였고 현빈궁(賢嬪宮)·왕세자(王世子)와 빈궁(嬪宮)은 초8일에 이어하였다.
7월 7일 기축
어석윤(魚錫胤)을 보덕으로, 조돈(趙暾)을 필선으로, 정홍순(鄭弘淳)을 문학으로, 임순(任珣)을 사서로, 유우기(兪宇基)를 겸 문학으로, 유언민(兪彦民)을 겸 사서로, 윤봉조(尹鳳朝)를 부제학으로, 민백창(閔百昌)을 부응교로, 황합(黃柙)을 부교리로, 안집(安𠍱)을 수찬으로, 이유수(李惟秀)·김조윤(金朝潤)을 지평으로, 어유룡(魚有龍)을 좌윤으로 삼았다.
7월 8일 경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 성심(聖心)이 슬픔에 지나쳐 사령(辭令)과 동작(動作)이 상도(常度)에 어긋나는 것이 많으며, 예법을 무시하고 정이 내키는 대로 하여 스스로 돌보아 자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심원(沁園)083) 의 슬픔만을 일국의 가장 큰 일로 여기고 있을 뿐, 그 이외의 만기(萬機)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지내고 있으니, 장차 국가를 어떠한 지경에 두려 하십니까?"
하였다. 차자를 봉입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 내용 가운데 ‘일국의 가장 큰 일로 여긴다.’고 한 것은 참으로 괴이한 말이다."
하고, 비답을 내려 이런 뜻을 알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때 대신(大臣)들의 말이 물로 돌을 치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이 임금의 마음을 격뇌(激惱)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평소 대신들의 성의가 누적되어 있지 않은 탓인 것이다. 성심을 다했는데도 감동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는 것인데, 대신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00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083] 심원(沁園)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딸인 심수 공주(沁水公主)의 원림(園林)으로, 여기서는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가리킴.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때 대신(大臣)들의 말이 물로 돌을 치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이 임금의 마음을 격뇌(激惱)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평소 대신들의 성의가 누적되어 있지 않은 탓인 것이다. 성심을 다했는데도 감동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는 것인데, 대신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이조 참판 김상성(金尙星), 장령 이섭원(李燮元)이 상소하여 사교(辭敎)가 중도에 어긋났다는 것으로 아뢰었으나, 모두 살피지 않았다.
정원에서 여러 신하들이 광구(匡救)하는 상소를 모두 되돌려 주게 하고 또 사지(辭旨)가 미안하다는 것으로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준절히 질책하였다.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옹주의 상사를 1등의 장례(葬禮)로 하게 한 것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녹봉(祿俸)이 1등이면 장례도 1등으로 하는 것이 전례인데, 어찌 외람되다고 하는가? 왕희(王姬)를 중히 여기기 위한 것인데,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함경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11일 계사
승지를 입시(入侍)하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른바 오륜(五倫)과 《대학(大學)》에 이른바 지선(至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할 수 없으면 그것을 오륜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애(慈愛)의 의의를 모르면 《대학》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윤리를 어긴 것이고 이런 마음을 모르는 사람도 그 또한 윤리를 어기는 것이 된다. 내가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통곡하다가 그대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 신하들이 울부짖으면서 간하고 부축하여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 당연한 조처이겠으나, 이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옛날에도 임금이 신하의 상사에 임어하는 예(禮)가 있는데, 더구나 응당 임어해야 할 자리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임금이 사사로이 신하를 총애하여 상사에 임어해서 슬퍼한다면 이는 지나친 거조이니 간쟁하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내가 이미 십분 슬픔을 억제하여 편의에 따라 거둥하는데, 무슨 간쟁할 것이 있겠는가? 아!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에게 충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2일 갑오
여러 승지들을 아울러 체파(遞罷)시켰다. 이때 임금의 격뇌(激惱)가 수시로 발작하여 바야흐로 한진(汗疹)084) 으로 고생하였는데도 정원에서 문후(問候)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정필녕(鄭必寧)·이창수(李昌壽)·윤동준(尹東浚)·민계(閔堦)·이형만(李衡萬)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3일 을미
봉조하(奉朝賀) 김유경(金有慶)이 졸(卒)하였다. 김유경은 글에 능하고 기지(機智)가 있었으며, 최석항(崔錫恒)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서로 친했었기 때문에 요행히 신축년085) ·임인년086) 의 화(禍)를 면하였는데, 을사년087) 에 이르러서는 탕평(蕩平)을 풍자하여 논하였다.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거쳤으며 나이가 늙어서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었으므로 죽은 그 해를 당하여는 최질(衰絰)의 상복(喪服)을 갖추어 입고 추후 상례(喪禮)를 행하였다. 때문에 예(禮)를 아는 사람들의 결점으로 여기는 바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7월 14일 병신
조명리(趙明履)를 도승지로 삼았다.
7월 16일 무술
전 참판 이광덕(李匡德)이 졸(卒)하였다. 이광덕은 이진망(李眞望)의 아들로서, 문예(文藝)가 공교롭고 치밀하여 사무를 잘 해결하였다. 임인년에 급제하여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 등과 완론(緩論)을 창도하여서 동료들이 기꺼이 추복(推服)하였던 탓으로, 준론(峻論)을 주장하는 당여들의 극심한 미움을 받았다. 무신년088) 이후 조현명·송인명 두 사람은 현직(顯職)에 등용되어 권위(權位)가 융숭하고 혁혁하게 된 데 반하여, 자신은 도리어 그들의 아래가 되었으므로 드디어 뜻을 얻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물러가 과천(果川)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농사에 힘써 부자가 되었으며 사환(仕宦)을 즐기지 않다가 다시 준론을 주장하는 당여로 귀의하였으나, 끝내 불행하게도 뜻이 합치되지 못한 채 졸하였다.
7월 17일 기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옹주(翁主)의 상사가 있은 이후 뭇 신하들을 접견하는 때가 드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청(淸)나라 사신(使臣)이 우리 나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 이 명이 있은 것이다.
정휘량(鄭翬良)·송창명(宋昌明)·남유용(南有容)을 승지로 삼았다.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 전 참판 이철보(李喆輔), 승지 조명정(趙明鼎)을 아울러 중도 부처(中途付處)089) 하게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입시했을 적에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의 자문(咨文)에서 해국왕(該國王)에게 신칙하라는 등의 말에 대해 뭇 신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리가 있어야 했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사신이 들어갔을 적에 잃어버린 은(銀)에 대해 추탐(推探)하려 했기 때문에 피국(彼國)에서 사환(士還)을 위협하여 공초(供招)를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고, 우참찬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이 일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합니다. 모욕적인 자문이 나왔으니, 사신에게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환의 죄일 뿐만이 아니라 윤창리(尹昌履)가 돌아오기에 급급하여 무복(誣服)하게 한 소치인 것이니, 윤창리의 죄는 더욱더 무겁다. 세 사신(使臣)은 속히 부처(付處)하는 율(律)을 시행하고, 윤창리는 원배(遠配)시키며 사환은 도배(島配)시키라."
하였다.
7월 20일 임인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경기 암행 어사 권숭(權崇)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통진(通津)·교하(交河)·양성(陽城) 세 고을에서는 군보(軍保)를 어린아이로 충정(充定)시켰는가 하면 도망한 사람에 대한 기한이 넘었는데도 보충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도 노제(老除)090)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이 법 밖에 관계되는 것이니, 전후 수령들을 아울러 논죄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有司)가 《속대전(續大典)》의 감등률(減等律)을 모방하여 이미 체직된 사람은 의금부에서 결장(決杖)하게 하고 직임에 있는 사람은 영문(營門)에서 결장하게 하였는데, 일에 좌죄(坐罪)되어 방태(榜笞)당한 사람이 13인이었다.
7월 21일 계묘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칙사(勅使)의 사행이 곧 도착하게 되어 있는데 국가의 저축이 탕갈되었습니다.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은 하나도 믿을 데가 없으므로 신민(臣民)들이 우러러 바라는 것은 단지 전하의 한 몸뿐인데, 전하께서는 깊숙한 구중 궁궐에 계시면서 신료(臣僚)들을 인접하지 않으신 채 국사를 물리치고 마음을 붙이려 하지 않으시니, 장차 국가를 어떤 지경에 두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훈신(勳臣) 이귀(李貴)가 청대(請對)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간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영성(靈城)091) 을 보니, 그런 일이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겠다."
하였다.
7월 23일 을사
좌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사환(士還)을 감률(勘律)한 일 때문에 자관(咨官)을 보냈는데, 경원(慶源)의 일에 대해서는 역자(曆咨)의 사행(使行)에 부송(付送)한다고 하니, 신은 그윽이 불가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환의 경우는 저들이 떠들썩하게 질책한 말이 마음 아픈 노릇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쟁변(爭辨)이 없었고 형지(形止)를 탐지(探知)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간략하게 부끄럽다는 사과의 말을 진술하면 되는 것입니다. 경원의 일에 이르러서는 저들이 집을 짓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전지(田地)를 개간한 것이 점점 넓어진 뒤에는 그 형세가 동요시키기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청하는 것의 급함이 시일(時日)을 다투어야 하는 것이니, 전후의 사의를 어긋나게 한 것이 너무도 심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과 영상이 함께 입시하도록 하라.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7월 25일 정미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게 했는데, 한더위에 흠휼(欽恤)하는 뜻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문에 관한 일은 어떻게 결정해야 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금 이 경원(慶源)에서 집을 짓고 있는 일은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는 매우 긴요한 것인데, 저들은 사환(士還)의 일을 큰 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환의 일을 부송(付送)할 경우 저들이 혹 탈을 잡을 우려도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회자(回咨)에는 사환을 감죄(勘罪)하는 일에 대해 삼가 반하(頒下)를 기다린다는 말을 하여, 사환의 감죄에 대한 자문이 나온 뒤에 함께 말을 만들어 넣어 역자(曆咨)의 사행(使行)에 추부(追付)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강원도·충청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 대해 아울러 휼전(恤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7월 26일 무신
전라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7월 27일 기유
청(淸)나라에서 두등(頭等) 공서(公舒)·영아(靈阿)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종음(鍾音)을 보내어 와서 황후(皇后)의 시호(諡號)를 반하하였는데, 대가(大駕)가 모화관에 나아가 의식대로 맞이하였다. 회가(回駕)하여 인정전(仁政殿) 뜰에 이르러 칙서(勅書)에 대한 배례(拜禮)를 의식대로 거행하고 준례에 따라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7월 28일 경술
임금이 도감 당상(都監堂上) 박문수(朴文秀) 등을 인견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날씨가 매우 무더워 늘 정섭(靜攝) 중에 계시니, 내일에 있을 관소(館所)의 동가(動駕)는 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거둥하려 하였으나 늘 병상(病床)에 있기 때문에 하지 못했으니,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를 어긴 것이 심하게 되었다."
하고, 대신을 보내어 접위(接慰)한 다음 머물기를 청하게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8월 (0) | 2025.09.30 |
|---|---|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윤7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6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5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1748년 4월 (0) | 2025.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