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7월 1일 계축
윤득화(尹得和)를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행행하여 청나라 사신에게 연향(宴享)을 베풀고 환궁(還宮)하는 길에 거가(車駕)가 종루(鐘樓)에 이르러 드디어 옹주(翁主)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임금이 소리내어 통곡하면서 그치지 않자, 대신들이 환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윤7월 1일 계축
윤득화(尹得和)를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행행하여 청나라 사신에게 연향(宴享)을 베풀고 환궁(還宮)하는 길에 거가(車駕)가 종루(鐘樓)에 이르러 드디어 옹주(翁主)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임금이 소리내어 통곡하면서 그치지 않자, 대신들이 환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윤7월 2일 갑인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는데, 임금이 병중이어서 교외(郊外)에 나아가 전송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서 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7월 3일 을묘
호조에 명하여 파주(坡州)의 사인(士人) 윤득성(尹得聖)의 가산(家山)을 사들이게 하였다. 윤씨(尹氏)의 장사(莊舍)가 파주의 마산(馬山)에 있는데, 오세(五世) 동안 서로 전수하여 왔다. 이때 옹주(翁主)가 졸서(卒逝)하자 임금이 종신(宗臣) 가운데 감여술(堪輿術)092) 을 아는 남원군(南原君) 이설(李) 등을 시켜 장지(葬地)를 살펴보게 했는데, 윤씨집 장전(莊田)의 뒤가 길지(吉地)라고 하였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은(銀)을 내어 민가(民家)에 지급하고 1백여 호(戶)를 모두 헐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옹주는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니고 있었는데 졸(卒)하였으므로 임금이 사랑하는 뜻에서 통석(痛惜)해 하여 마지 않았으니, 이는 천리(天理)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을 중도에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도에 지나치게 하면 그것은 예(禮)가 아닌 것인데, 더구나 임금의 위치에서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옹주가 졸서한 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빈대(賓對)를 허락했는데, 전후 중도에 지나친 하교는 기주(記注)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개 뭇 신하들이 위에 기탄함을 보인 자가 없어서 임금이 이런 잘못을 있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개간할 수 없는 땅에다 장사지내는 것인데, 가령 옹주가 훌륭하다면 의당 그의 뜻을 따라 그 아름다움을 완성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남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수하여 온 땅을 빼앗고 또 민가 수백 호를 헐어 내게 하였으니, 대저 임금이 백성을 위하는 덕의(德意)가 지극했는데도 오히려 가리워져서 생각하지 못한 탓인가?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01면
【분류】왕실(王室) / 사상(思想) / 역사(歷史)
[註 092] 감여술(堪輿術) : 풍수(風水)에 관한 학술.
사신(史臣)은 말한다. 옹주는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니고 있었는데 졸(卒)하였으므로 임금이 사랑하는 뜻에서 통석(痛惜)해 하여 마지 않았으니, 이는 천리(天理)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을 중도에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도에 지나치게 하면 그것은 예(禮)가 아닌 것인데, 더구나 임금의 위치에서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옹주가 졸서한 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빈대(賓對)를 허락했는데, 전후 중도에 지나친 하교는 기주(記注)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개 뭇 신하들이 위에 기탄함을 보인 자가 없어서 임금이 이런 잘못을 있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개간할 수 없는 땅에다 장사지내는 것인데, 가령 옹주가 훌륭하다면 의당 그의 뜻을 따라 그 아름다움을 완성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남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수하여 온 땅을 빼앗고 또 민가 수백 호를 헐어 내게 하였으니, 대저 임금이 백성을 위하는 덕의(德意)가 지극했는데도 오히려 가리워져서 생각하지 못한 탓인가?
윤7월 5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나서 이조 판서 신만(申晩), 참판 김상성(金尙星)을 파직시키라 명하고 병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을 면직하였다. 신만이 김상성과 공좌(公坐)에서 분을 내어 다투다가 서로의 사이가 어긋났는데, 수개월 동안 공무를 집행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아울러 파직시켰다. 정우량은 아버지의 병 때문에 사직(辭職)하여 체직되었다.
이천보(李天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남태제(南泰齊)가 부상(父喪)을 당하여 직책을 떠났으므로, 삼전(三銓)의 자리가 빈 지 또 1개월이 지났다. 신만(申晩) 등을 파직시키고 나서 대신에게 의망(擬望)하게 하여 드디어 이천보를 이 직임에 제수한 것이다.
지돈녕(知敦寧) 이성룡(李聖龍)이 졸(卒)하였다. 이성룡은 보통을 넘어서 조용(調用)하여 지위가 숭품(崇品)에 올랐으며, 나이는 70세가 넘었다. 그의 아들 이형만(李衡萬)이 남유용(南有容)과 지망(地望)에 대해 쟁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남유용이 꾸짖기를, ‘지금 세상에 관직(官職)이 천(賤)하게 되기는 했지만 무인(武人)의 손자는 끝내 제학(提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영선(瀛選)093) 되었다는 이유로 분수에 넘친 것을 바라고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성룡의 아버지가 무관(武官)으로 군수(郡守)를 지냈기 때문에 남유용이 그렇게 말한 것이나, 이성룡이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분함을 느꼈는데 얼마 안되어 졸하였다.
함경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6일 무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권일형(權一衡)을 참핵사(參覈使)로 삼았다. 이때 양전(兩銓)이 모두 궐원(闕員)되어 있었으므로, 대신들이 천망(薦望)하게 되었다. 이종성(李宗城)이 전망(前望)에 들었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빼내려 하자,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결국 천망하지 못하고 말았다. 임금이 이조 참의 이천보(李天輔)에게 하문하기를,
"천망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영상은 이종성이 막 대계(臺啓)에 거론되고 있어 의천(擬薦)하기가 곤란할 것 같다고 하고, 좌상은 천망에서 빼내서는 안된다고 하여 결국 정당하게 처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그 말을 듣고 나니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영상과 좌상이 서로 고심(苦心)하여 온 지가 몇 년이었는가? 그런데 이제 갑자기 저렇게 하고 있으니, 내가 부득이 대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이 사책(史冊)에 기록되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판서로, 김상로(金尙魯)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전망(銓望)을 의천(議薦)할 수 없게 된 지가 오래였었는데 이제 또 이 종성 때문에 번거롭게 특별히 제수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종성이 죽지 않는다면 이 뒤로는 전망을 의천하게 될 날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체통이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01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전망(銓望)을 의천(議薦)할 수 없게 된 지가 오래였었는데 이제 또 이 종성 때문에 번거롭게 특별히 제수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종성이 죽지 않는다면 이 뒤로는 전망을 의천하게 될 날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체통이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김상적(金尙迪)·김한철(金漢喆)을 승지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박춘보(朴春普)를 대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사간으로, 강봉휴(姜鳳休)를 장령으로, 심발(沈墢), 임순(任珣)을 지평으로, 이광익(李光瀷)을 정언으로, 윤광소(尹光紹)·이이장(李彛章)을 교리로, 조명채(曹命采)를 수찬으로, 이의중(李毅中)를 부수찬으로, 김시위(金始煒)를 부교리로, 김상철(金尙喆)을 보덕으로, 남태기(南泰耆)를 필선으로, 김선행(金善行)을 겸 문학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겸 사서로, 정우량(鄭羽良)을 형조 판서로, 홍상한(洪象漢)을 판윤으로 삼았다.
윤7월 7일 기미
2품 관원을 보내어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으므로 우단(雩壇)에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간원 【정언 윤학동(尹學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국가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여 의리가 회색(晦塞)되고 세도(世道)가 날로 잘못되어져 변괴가 잇달아 발생하는데, 이종성(李宗城)의 패려스러운 상소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는 교만하고 방자하며 사납고 괴팍스러워 이미 길인(吉人)이 아닌데, 윤강(倫綱)의 소중함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영호(營護)할 계교를 내어 공의(公議)를 극력 배척하고 죄괴(罪魁)를 드러내 놓고 송원(訟冤)하여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났는데도 충선(忠善)하다고 추장(推奬)하고, 성토(聲討)가 바야흐로 엄한데도 이를 떠든다고 욕을 하였으니, 이것만도 더없이 통분스럽고 증오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단문(袒免)의 친속094) 인데도 혐의를 피하지 않고 감히 사표(師表)에 대한 이야기를 진달하면서 극진하게 숭봉(崇奉)하였으니, 이 하나의 글귀에서 그가 수수(授受)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이는 곧 스스로 마음을 함께 했다는 공초(供招)를 바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왕장(王章)을 피한 채 뻔뻔스럽게 그대로 있으니, 국가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임금을 잊고 사사로운 당에 빌붙어 충역(忠逆)을 현란시킨 죄를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대사헌 이종성을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소서. 이종성의 패려스러운 상소가 나왔는데도 대각(臺閣)에서는 죄를 성토하는 거조가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가 지난번 원계(院啓)가 발론되었으니, 공의(公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당을 비호하는 일종(一種)의 무리들이 멋대로 갑자기 정계(停啓)하면서 전혀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대체(臺體)의 휴손과 인심의 함닉(陷溺)이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런데도 버려 둔다면 방한(防限)이 더욱 무너져 내리고 의리가 더욱 회색될 것이니, 전 헌납 조윤제(曹允濟)의 관작을 삭탈시키소서. 박문수(朴文秀)가 올린 지난해의 상소는 흉론(凶論)을 편들어 유현(儒賢)을 모욕한 것으로 지적한 뜻이 매우 흉참스럽고 한 말이 너무도 패려스러웠습니다. 그 마음의 소재는 여러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여 숨기기 어려운 것이므로 죄를 성토하는 의논이 누차 대각에서 발론되었는데도 전혀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뜻이 없으니, 그의 두세(頭勢)를 보면 결코 탄핵으로 제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고 대의(臺議)가 조금이라도 신장되게 하려면 또한 어떻게 제 마음대로 방자하게 날뛰도록 일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흉적을 편들고 의리를 무시하는 자들은 결단코 그대로 두고서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호조 판서 박문수를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7월 8일 경신
평안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9일 신유
우찬성 박필주(朴弼周)가 졸(卒)하였다. 박필주의 자(字)는 상보(尙甫)인데,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의 증손(曾孫)이다. 곤궁해도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학문에 독실했는데,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1만 번이나 읽었다. 두어 칸 되는 왜소한 집에 살면서도 태연하였으며, 두문 불출하면서 조신(操身)하고 교유(交遊)는 넓히지 않았다. 때때로 김간(金榦)·권상하(權尙夏)·김창흡(金昌翕)에게 가서 학문에 대해 논하였는데 모두 그에게 굴복당하였으므로, 같은 동료들이 교우(交友)로 대하였다. 젊어서는 성격이 편협했었는데, 늙어서는 온화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병인년095) 의 출처(出處)에 대해서 혹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곧바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평소 유자(儒者)를 싫어하였으나 박필주는 박명원(朴明源)의 지친(至親)이라는 것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박필주 또한 이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경국 제세(經國濟世)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으나 청고(淸苦)한 지조는 더할 수 없이 훌륭했다고 한다. 이때 세 조정에서 예우(禮遇)했던 선비로서는 오직 이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그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서는 매우 차탄하고 애석해 하였다. 임금이 박필주의 상사(喪事)가 났다는 말을 듣고 애도의 뜻을 표하는 하교를 많이 내렸다. 또 동부승지 김한철(金漢喆)에게 하문하기를,
"대신의 상사에는 내가 거애(擧哀)하는 예절이 있는데, 이상(貳相)의 상사에는 거애하는 예절이 없는가?"
하니, 김한철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은 숭품(崇品)으로 졸서(卒逝)했는데도 의조(儀曹)에서 상고할 만한 법규가 없다고 하면서 오직 동궁(東宮)이 거애하는 절차가 있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해조(該曹)에서 초기(草記)를 올려 정지할 것을 청했었습니다."
하였다.
전옥서(典獄署)에 있는 죄가 가벼운 죄수를 녹방(錄放)하였다.
윤7월 10일 임술
비가 내렸다. 기우제(祈雨祭)를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윤7월 13일 을축
호조에서 아뢰기를,
"졸(卒)한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의 집에 전교(傳敎)에 따라 예장(禮葬)에 필요한 물품을 수송했습니다만, 상가(喪家)에서 감히 막대한 은전(恩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으로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사양한 물품을 다시 수송하라고 명하였다.
황재(黃梓)를 대사헌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대사간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집의로, 조진세(趙鎭世)를 사간으로, 현광우(玄光宇)·이제화(李齊華)를 장령으로, 이영조(李永祚)·정언상(鄭彦祥)을 지평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헌납으로, 이광직(李光溭)·윤광찬(尹光纘)을 정언으로, 정실(鄭實)을 응교로, 윤동도(尹東度)를 교리로, 이게(李垍)를 사서로, 홍상한(洪象漢)을 형조 판서로, 윤광의(尹光毅)를 승지로 삼았다.
정언 윤학동(尹學東)을 기장 현감(機張縣監)에 책수(責授)했는데, 박문수(朴文秀)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었다.
윤7월 14일 병인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러쌌다.
윤7월 16일 무진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헌릉(獻陵)의 정자각(丁字閣)을 고치고 다시 상량(上樑)해야 하는데, 길일(吉日)이 언제인가?"
하니, 제조(提調)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오늘 사시(巳時)와 내일 묘시(卯時)이니, 추이(推移)하여 거행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영희전(永禧殿)에 상량할 때 전의 상량문(上樑文)은 앞에다 놓고 나중의 상량문은 뒤에다 놓았었으니, 이번에도 전례에 의하여 하라."
하였다.
사간 조진세(趙鎭世)·지평 이영조(李永祚)·수찬 김시위(金始煒) 등이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는 계사(啓辭)를 정지하였다. 합계(合啓)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전후 3년인데, 연계(聯啓)한 것은 겨우 4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외람되고 의심스러워 감히 갑자기 정계하지 못했고 또 한편으로는 누차 엄한 하교를 받았으므로 의기(意氣)가 위축되어 또한 다시 쟁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서로 버티면서 한 사람도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합계에 대해 수습할 방책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양쪽의 준론(峻論)을 서로 합치자는 의논이 대단했는데, 한쪽은 정계(停啓)하자 하고 한쪽은 연계(連啓)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리하여 조진세 등이 나와서 정계한 것이다.
윤7월 18일 경오
헌부 【장령 현광우(玄光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종성(李宗城)과 조윤제(曹允濟)의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지난번 삼사(三司)의 합계는 곧 군부(君父)를 위하여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는 대의(大義)로서 일국의 공통된 의논인 것입니다. 전하의 신하가 된 사람이 진실로 조금이라도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누군들 감히 그 사이에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진세(趙鎭世) 등 3인이 윤강(倫綱)의 소중함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영호(營護)할 마음을 내어 몸을 빼내어 돌입하여 멋대로 갑자기 정계(停啓)시켰습니다. 아! 의리가 회색(晦塞)되고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세도(世道)의 변괴가 있지 않은 때가 없었는데, 사사로운 당을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방자하고 무엄한 것이 이들에게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런데도 버려 둔다면 반드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게 될 것이니, 앞으로 닥쳐 올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청컨대 조진세·김시위(金始煒)·이영조(李永祚)를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들은 처음 이 직(職)에 올랐다. 특교(特敎)를 내렸는데도 이에 감히 당심(黨心)을 드러내고 있어 세도가 이러하니, 임금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장령 현광우(玄光宇)를 장기 현감(長鬐縣監)에, 이조 참의 이천보(李天輔)를 고부 군수(古阜郡守)에 책수(責授)하였다. 현광우가 대직(臺職)으로 들어간 것은 이천보가 의망(擬望)한 것이었는데, 현광우가 조진세 등에 대해 발계(發啓)하자, 임금이 조정(調停)하려고 힘썼다. 또 처음 전지(銓地)에 들어가서 당신(黨臣)을 끌어들여 등용했다는 것으로 아울러 출보(黜補)시키라고 명하였다.
윤7월 19일 신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삼사(三司)가 합사(合辭)한 의논은 곧 《춘추(春秋)》의 반드시 토죄해야 된다는 의리로 거듭 발론된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공의(公議)는 지엄한 것이어서 혈당(血黨)이나 사우(死友)가 혹 공교한 방법으로 피하여 죄에 해당되지 않거나 혹 급박한 지경에 임하여 도주(逃走)했을 경우라도 감히 멋대로 용호(容護)할 수 없는 것인데, 조진세 등이 암암리에 계획을 세워 두었다가 기회를 이용하여 돌입해서 갑자기 대론(大論)을 정지시키면서도 전혀 돌아보고 꺼리는 기색이 없으니, 국가의 기강이 이로 말미암아 실추되었으므로 여정(輿情)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헌계(憲啓)에서 죄주기를 청한 것은 진실로 윤기(倫紀)를 부지하고 방비를 엄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꺾어 누르고 핍박을 가하여 축출시켰으니, 신 등은 그윽이 경악스럽고도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전관(銓官)을 특별히 외직에 보임시킨 것은 더욱 천만 뜻밖의 일인 것이니, 갑(甲)에 대한 노여움을 을(乙)로 옮기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외람되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시위 소찬(尸位素餐)096) 하고 있는 채 간신(諫臣)이 멀리 쫓겨나가도 이미 준례에 의거하여 왕명(王命)을 작환(繳還)시키지 못하였고 대론(大論)이 곧바로 정지되어도 또 망설이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한편으로는 직책을 저버렸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저버렸으니, 반복하여 반성함에 부끄러워 죽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의 중도(中道)에 지나친 거조를 보고서 또 말하지 않는다면 신 등의 죄가 더욱더 커지겠기에 사사로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붙여 감히 초초(草草)하게 한 말씀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차분히 따져보신 다음 대신(臺臣)과 전신(銓臣)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시어 세도(世道)를 진정시키고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는 도승지 윤득화(尹得和), 동부승지 김한철(金漢喆)이 아뢴 것이다.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려 꾸짖었다.
초토신(草土臣) 박사근(朴師近)이 상소하여 부증(賻贈)을 사양하고 이어 자기 아버지 박필주(朴弼周)의 유소(遺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한번 병들어 3년 동안 지루하게 앓고 있으면서도 죽지 않고 있으니, 털끝만한 은혜도 모두 성은(聖恩)인 것이어서 감축(感祝)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이 한계에 이미 박두하여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대가 없게 되었으니, 신극(宸極)097) 을 우러러봄에 어찌 슬픔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인신(人臣)이 영결(永訣)할 즈음에는 반드시 가장 절실하고도 요점이 되는 말을 군상(君上)에게 들리도록 함이 있어야 할 것이니, 오늘날의 국사는 대개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자제(子弟)들은 여러가지 완호물(玩好物)에 대해 모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인 것으로 비록 여항(閭巷)의 사부(士夫)들도 또한 그러한데, 더구나 제왕(帝王)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 이치를 깊이 유념하시어 반드시 올바른 선비를 친근(親近)하게 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하게 하여 날마다 올바른 일과 올바른 말로 훈도(薰陶)해 습관이 되게 해서 빛나는 서업(緖業)을 끝없이 이어가게 할 기반을 다지게 하소서. 그리고 제왕이 국정을 강론하는 방법은 기미가 보일 때 기반을 다지게 하소서. 그리고 제왕이 국정을 강론하는 방법은 기미가 보일 때 방지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먼 옛날의 일을 인용할 것 없이 단지 전하께서 경력(經歷)하신 것으로 증험하여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삼가지 않았다가 나중에 대란(大亂)을 초치시킨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의지하여 장래의 일을 미루어 본다면 또한 다시 그런 일이 없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며칠 동안 유중(留中)시켰다가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경의 유장(遺章)을 보니 지난날 입시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한번 열람하니 경의 얼굴을 본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원량(元良)을 위하여 잊지 못해 하면서 간절하게 면려한 데 대해서는 그 충심(忠心)에 감탄했고 그 마음을 매우 가상스럽게 여긴다. 지금 이 유장을 열람하니 구원(九原)이 어찌 멀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손수 답서를 썼는데 글자마다 눈물에 젖었다. 특별히 승지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선독(宣讀)하게 하였다.
이천보(李天輔)를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을 도로 중지시키고 발탁하여 이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소보(小報)를 접견해 보니, 이조 참의 이천보는 당인(黨人)을 먼저 기용했다고 하여 특별히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이 있습니다. 아! 지금 사람 치고서 당인이 아닌 사람이 누구입니까? 전관(銓官)이 당인을 기용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사람을 구해 오겠습니까? 만일 이천보가 현광우(玄光宇)를 의망(擬望)한 것이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조진세(趙鎭世)·이영조(李永祚)는 유독 이천보가 의망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먹은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삼으니,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이천보가 행한 몇 차례의 정사(政事)는 자못 널리 탕평(蕩平)하게 하여 근래의 면목(面目)과는 상당히 같지 않은 점이 있어 신은 그윽이 훌륭하게 여겼었습니다. 이런 때에 이같은 전관을 잃는 것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도 또한 아뢰기를,
"이천보가 해서(海西)에서 조정으로 돌아와 세도(世道)를 매우 걱정하면서 이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지금 이 이조 참의의 자리는 적격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광우·조진세가 모두 그의 손에 의해 기용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비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지금 외직에 보임시키는 것은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은 말하기를,
"이천보의 정사는 신도 또한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갑자기 말하기를,
"이는 내가 미처 몰랐던 일이다."
하였다. 이때 이천보가 아직 한강(漢江)을 건너지 않고 막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는데, 달려가서 부르자 이천보가 달려 들어왔다. 임금이 인견하고 갖추 위유(慰諭)하고 나서 이조 참판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앞서 이천보는 문망(文望)이 있고 제우(儕友)가 매우 번성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구실로 조상(朝象)을 진정시키려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를 꺾었다가 곧이어 발탁하여 승진시킨 것이다. 이천보가 원경하(元景夏)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는데, 이날 이천보가 전에 없던 총명(寵命)을 받고서 받들어 응하려 하였으나 제우들이 비난할까 우려하여 머뭇거리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원경하가 이러하다는 말을 듣고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나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대신해서 이천보에게 말하여 주라. 그가 어떻게 조정을 탕평시킬 수 있겠는가? 탕평하게 하려면 반드시 나에게 와서 배워야 한다."
하였다.
윤7월 20일 임신
대사헌 황재(黃梓)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사(三司)에서 합사(合辭)로 아뢴 것을 갑자기 어제 멋대로 정계(停啓)시킨 자가 있었기에 신은 이에 있어서 가슴이 불끈함을 금할 수 없음은 물론, 더욱 종적이 걱정스러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일국의 공통된 의논은 이것이 어떠한 대의(大義)이며 관계되는 것이 어떠합니까? 거듭 발론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한번의 윤허를 끝내 아끼고 있는 가운데 조진세(趙鎭世)의 무리가 하루아침에 일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폐각(廢閣)시킴에 있어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없이 몸을 떨쳐 일어나 스스로 정성을 다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천하의 온갖 일에 대해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격입니다. 본성(本性)을 지키려는 마음은 사람이 다 같이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충역(忠逆)의 분변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고 화심(禍心)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돌아보고 머뭇거리면서 감히 괴란(壞亂)시킬 계교를 획책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군신(君臣)의 의리가 지극히 엄하고 춘추(春秋)의 법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손발을 바삐 서둘러 멋대로 무너뜨리고 농락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에서입니까? 참으로 성의(聖意)가 치우치게 조정(調停)에만 주안점을 둔 탓으로 방비함이 점점 해이하여지고 엄교(嚴敎)가 누차 격뇌(激惱)하는 가운데서 내려져 꺾어 누르는 것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종성(李宗城)의 패려스러운 상소에 대해 끝내 엄하게 조처하는 명이 없었으며 윤학동(尹學東)의 출보(出補)는 매우 너그러이 용납하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감히 임금의 마음을 엿보고 시세(時勢)를 헤아려 가늠하여 곧바로 이렇게 날뛰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세도는 파도처럼 들끓는 걱정이 있게 되고 국사는 안정되기를 바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통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간(世間)에는 절로 참다운 시비(是非)가 있는 것이므로 한때에 정론(停論)시켰다고 해서 백세(百世)의 공안(公案)을 덮어 숨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필코 합계(合啓)에서 거론된 사람들을 죄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이른바 의리라는 것을 부식(扶植)시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워서 반드시 이기려는 계획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심장(心腸)을 궁구하여 보면 장차 하지 못할 짓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는 지금의 변괴일 뿐만이 아니라, 그윽이 뒷날의 끝없는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 매양 징토(懲討)하는 의리에 대해 번번이 싫어하는 뜻을 보여 왔기 때문에 이것이 한번 전환되어 이종성 같은 자가 있게 되었고 두 번 전환되어 조윤제(曹允濟) 같은 자가 있게 되었으며 또 조진세(趙鎭世) 등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먼 앞날을 우려하여 깊이 생각하시어 죄가 있을 경우 반드시 토죄하였다면 의리가 더욱 회색되어 당여(黨與)들의 자꾸 번성하는 것이 또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이를 개연(慨然)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당여를 비호한 데 대해서는 본래의 율(律)이 있는 것이어서 토죄를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 정론(停論)시킨 사람들을 아울러 먼 변방으로 쫓아내는 형전을 시행하여 그들로 하여금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게 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신이 수십 년 동안 지켜 행하여 온 의리는 토복(討復) 한 가지 일에 불과한데 어긋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코 하루라도 염치를 무릅쓰고서 헛되이 대함(臺銜)을 띠고 있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삭직(削職)시켜 주소서."
하였으나, 답보(答報)하지 않았다.
윤7월 21일 계유
헌부 【지평 정언상(鄭彦祥)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진세(趙鎭世)·이영조(李永祚)·김시위(金始煒)와 이종성(李宗城) 등을 원찬(遠竄)시키라는 계사(啓辭)를 정지하였다.
윤7월 23일 을해
부수찬 이세사(李世師)가 예안(禮安)에 있으면서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여항(閭巷)의 사람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늙은 나이에 감정을 상하는 슬픈 일을 닥치게 되면 정서(情緖)가 흔들리기 쉬워 영위(榮衛)098) 가 점점 시들어져 그만 큰 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춘추(春秋)가 점점 높아가시는 데 따라 자애(慈愛)하는 마음이 더욱 성하여져 세 번 상차(喪次)에 임어하셨을 적에는 슬퍼하는 것이 예절(禮節)을 어겼고 누차 신하들을 질책하실 적에는 사지(辭旨)가 중도에 벗어났습니다. 이러하니 노년(老年)의 천화(天和)가 어찌 손상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3백 년 종사(宗社)의 위탁이 성명께 달려 있고 수많은 생령(生靈)들의 목숨이 성명께 달려 있으니, 성명의 한 몸을 이에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보내 주신 것이어서 성명께서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어찌 한때의 슬픔 때문에 부탁받은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고서 성심(聖心)을 슬픔에 젖게 하여 성궁(聖躬)을 손상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노쇠하신 동조(東朝)께 반드시 큰 걱정을 끼쳐드리게 될 것은 물론, 어리신 춘궁(春宮)의 효심(孝心)이 애태우게 된다면, 우리 성명께서 뜻을 봉양하는 정성과 따뜻하게 감싸주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반드시 척연(惕然)히 깨달아서 사리로 보아 이런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보통 사람의 상정(常情)은 일하는 것이 있으면 생각하는 것을 잊는 법인데, 이제 우리 성명께서는 지극한 정이 상처를 받아 만사에 마음이 없으신 상태에 있습니다. 시험삼아 편전(便殿)에서 자주 신료(臣僚)들을 인접하시어 주당(籌堂)099) 이 반열에 있고 간사(諫史)100) 가 제자리에 나와 있게 한다면, 아뢰는 것은 백성에 대한 걱정이고 진달하는 것은 국가의 계책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명께서 평소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시는 마음과 항상 백성을 위하여 애쓰시는 덕의(德意)에 있어 동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일에 따라 유의하게 되고 좌우로 결재를 내리면서 업무에 따라 정신을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슬프고 답답한 마음이 이에 누그러지고 가슴을 에이는 회포가 때로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하며 또 그 다음날도 그렇게 하여 신료들을 접견하여 강론하는 때가 많아지고 조용히 있으면서 수심에 잠기는 때가 적어지면, 세월이 흐를수록 남은 슬픔을 잊기 쉬운 것은 물론, 성체(聖體)도 자연히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중용(中庸)》의 수장(首章)을 상고하건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발동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화(中和)는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달도(達道)인 것이다.’ 했는데, 자신의 성정(性情)이 발동하는 것에서부터 멀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고요한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대중(大中)과 극화(克和)의 공효가 천지를 제자리에 위치하게 하고 만물이 제대로 자라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한 마음의 법을 조심하여 중도에 맞지 않는 일이 없게 하고 만화(萬化)의 근원을 바루어 화락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면, 희로애락이 이를 따라 중도에 맞게 되고 동정 운위(動靜云爲)가 이를 따라 화락하게 되어 우리 성세(盛世)의 큰 아름다움을 영구히 전해 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상의 심정이 비탄과 번뇌 속에 계시는데 신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마음에서 바치려고 하는 충심이기 때문에 감히 규침(葵忱)을 다하여 삼가 요택(蕘擇)에 대비하는101) 바입니다.
신이 그윽이 살펴보건대, 성조(聖朝)에서 정사를 하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남(嶺南) 한 지방에 한재(旱災)가 극심하여 하늘에서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은 지가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어 백곡(百穀)이 모두 병들었으니, 큰 흉년이 들 것은 이미 가름이 났습니다. 도내(道內)의 인민(人民)들이 일찍이 해마다 잇달은 기근에 시달려 병든 몸이 아직 소생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신사(信使)의 접대(接待)에 지쳐 재력(財力)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의 보리 흉년도 이미 참혹했는데, 금년 가을의 농사가 또 잘못되게 되면 고할 데 없는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다 죽어 없어지게 생겼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구황(救荒)하는 정사를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요역(徭役)을 견감시키고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곡(田穀)에 대한 재탈(災頉)은 비록 전례가 없습니다만, 여름과 가을에 모두 흉년이 들었으니 재탈이 없을 수 없습니다. 군포(軍布)는 완전히 탕감시키기 어렵지만, 반을 절감하게도 하고 가을을 기다리게도 하도록 미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편리한 대로 구획(區劃)하게 한다면 남쪽 지방의 많은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어깨를 쉴 수 있는 효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성조(聖朝)에서 사람을 뽑는 것을 살펴보건대, 오로지 과목(科目)에만 의존하고 있습니다만, 식년(式年)과 명경(明經)은 실로 폐단이 지대합니다. 유생(儒生)들이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함에 있어 두 가지 길로 나뉘어 있는데, 강송(講誦)을 일삼는 사람은 제술(製述)에 어둡고 제술을 일삼는 사람은 강송에 어둡습니다. 때문에 명경에 의하여 발신(發身)한 사람은 귀로 듣고 입으로 전하는 강송에만 능할 뿐 사장(詞章)에 대하여는 전혀 아는 것이 없어 어로(魚魯)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래가지고 어떻게 조정에 벼슬하면서 임금을 섬길 수 있겠으며, 어떻게 백성 위에 일하며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도 또 한 중년(中年)부터 강독(講讀)에 힘을 기울여 결과(決科)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글도 못하고 무식한 것이 아직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저 어릴 때부터 곧바로 경사(經史)를 강송만 한 사람이야 더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니, 명색은 문신(文臣)이지만 또한 당세의 선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국조(國朝)에서 법을 설치한 것이 경술(經術)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니,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 액수(額數)를 나누어 두 가지 다 시험보여 반은 강송의 점수를 취하고 반은 제술의 점수를 취한다면 강송과 제술이 모두 갖추어지게 됨은 물론 과규(科規)가 고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청명한 시대의 간선(揀選)에 일호나마 도움이 되는 효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려한 내용에 대해서는 마땅히 힘쓰도록 하겠다. 진달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하순(下詢)하여 하교하였다."
하였다.
형조 참판 구택규(具宅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택(田宅)과 노비(奴婢) 등에 관한 송사(訟事)는 각각 나누어 관장하는 데가 있는데, 송자(訟者)가 한때의 편의를 취택하여 외람되이 타사(他司)에다 정소(呈訴)하면 타사에서 또한 이를 받아들여 청리하니, 관직을 설치하여 나누어 놓은 의의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속대전(續大典)》 청리조(聽理條)에 ‘송사를 청리하는 데는 각각 담당하여 관장하는 부서가 있어, 한성부에서는 전택에 관한 것이 관장하고, 장례원에서는 노비에 관한 것을 관장하고, 형조에서는 전택과 노비를 아울러 관장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법률의 의의는 대개 본조(本曹)에서 법률을 통관(統管)하여 전민(田民)은 물론, 일체 법률에 관계되는 것을 추감(推勘)하도록 함을 말한 것이지, 전택과 노비의 송사를 치우치게 본조에 계류시킨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통관하고 있는 까닭으로 무릇 전민들 가운데에 재송(再訟)하는 사람은 으레 본조에 신소(申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전(大典)》에서 이른바 타사로 계이(啓移)한다는 것이 경조(京兆)102) 와 장례원에서 단지 한 가지 일만 관장하여 서로 외람되이 관섭(管攝)하지 않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 법이 신명(申明)되지 않은 탓으로 모든 송민(訟民)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나아가 소속된 의의를 전혀 무시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경조에서도 노비의 송사를 청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전후 여러 신하들이 나누어 관장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진달하면서 조항을 거론하여 신칙하게 한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대헌(臺憲)에서 찰핵(察劾)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만일 나누어서 다스리는 것이 없게 되면 결국 봉행(奉行)하는 데 혼선을 빚게 될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전택과 노비의 초송(初訟)은 반드시 담당하고 있는 관사에서 거행하게 하되, 만일 억울해서 재송(再訟)하는 경우에는 비로소 본조에서 청리하게 하여 두 《대전》의 본의를 천명(闡明)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법을 어긴 것으로 논하여 획일적으로 시행하게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확정시킬 수 있고 율법의 기강을 신명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근래 법망(法網)이 해이해져 옥송(獄訟)이 날로 번창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간범하는 자들은 태반이 상사(上司)인 군문(軍門)에 소속된 자들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으레 반드시 관문(關文)이 본 아문(本衙門)을 경유한 뒤에야 비로소 추치(推治)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진래 공사(進來公事)103) 에 대해서는 거의 조처할 겨를이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좌기(坐起)하는 날이 아니거나 날이 저문 경우를 당하여 미루어 지체한다면, 간범한 자가 혹 곧바로 그 아문(衙門)에다 고알(告訐)하기도 하고 혹 도망하여 숨고서 현신(現身)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은 처치(處置)하지 못하는 사례가 왕왕 있으니, 이는 실로 더없이 큰 고질적인 폐단인 것입니다. 대개 이 진래(進來)에 관한 법규는 본래 법전(法典)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특별히 형세에 압도되어 결국은 이렇게 외람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사리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파기시켜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시행해 온 지가 이미 오래여서 갑자기 다 혁파하기가 곤란하다면 수금(囚禁)할 사람 가운데 형배(刑配)에 처할 사람만 전대로 진래하게 할 것이요, 즉시 태장(笞杖)으로 처결해야 하는 데 관계된 자들은 본조에서 곧바로 결단하게 해서, 다시는 관문의 경유를 기다리지 않게 하여 법조(法曹)로 하여금 법을 집행할 수 있게 하고 간민(奸民)으로 하여금 징계되어 두려워할 줄 알게 한다면 형정(刑政)을 정칙(整勅)하는 방도에 있어 도움되는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니, 분명한 유지를 내려 항식(恒式)으로 정해서 시행할 수 있게 하소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할 적에 승지가 명을 봉행하기에 급급하여 죄범(罪犯)이 어떠한가를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중이 전도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이세(理勢)에 있어 의당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사부(士夫)의 부녀(婦女)를 핍박하여 욕보인 죄인에 대해 대신(大臣)이 입시했을 때 품처(稟處)하라고 명했는데도 곧바로 석방되었고, 정리(情理)가 매우 도리에 어긋나 유(流) 3천 리로 조율(照律)하여 아직 배소(配所)로 출발하지 않고 있었던 사람도 또한 석방되었으며, 백성들을 침학(侵虐)하여 정상이 절통(絶痛)하기 때문에 비국(備局)에서 감결(甘結)104) 을 받아 엄히 조사하게 되어 있는 자들도 아울러 모두 석방되었는데, 종전에는 이런 부류들에 대해 본조에서 도로 가두어 두고 끝까지 조사했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특명(特命)으로 소결(疏決)하여 석방시킨 것이어서 사체가 지극히 중한데, 옥관(獄官)이 사사로이 도로 가두는 것은 도리에 있어 미안한 일이므로 신이 감히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난처한 점은 극심합니다. 이에 감히 그런 사실을 간략히 거론하여 품재(稟裁)에 대비합니다. 이른바 구류간(拘留間)이라고 하는 것은 사옥(私獄)입니다. 범죄자 가운데 응당 가두어야 할 사람은 전옥(典獄)에 가두면 되는 것인데, 이런 사옥을 설치한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인 것입니다. 《속대전》의 수금조(囚禁條)에 의하면 각 아문에서 사람을 구류시키는 폐단을 일체 방금(防禁)시키며 대단한 공사(公事)가 아니면 형조·경조(京兆)에서도 또한 구류시키지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대죄인(大罪人)을 즉시 추핵(抽覈)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지 하루 이틀 정도 구류시키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형관(刑官)의 진달로 인하여 다시 설치하게 되어 비록 하찮은 죄과를 범해도 또한 번번이 구류시켜 열흘이나 한 달을 넘는 경우까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히 본조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사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고 있으니, 개연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종류의 구금자들은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는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본조의 당상(堂上)들도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침학으로 인한 원망이 도리어 전옥보다 심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싫어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것이 제일 큰 것이 되니,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속대전》에 의거하여 엄금하게 하고 이 뒤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당상(堂上)·낭청을 논할 것 없이 왕법(枉法)의 율로 논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처음에 거론한 사건에 대해서는 본래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으니, 규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경조(京兆)·추조에 이르러서는 선후를 정할 필요가 없다. 대저 세 번 처결했으면 청리하지 않는 것이 또한 구례(舊例)인 것인데, 한성부나 추조에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을 어찌 사심(私心)을 품지 않고서 그런 것임을 알 수 있겠는가? 경조에서 처결한 것이 만일 공평했다면 다시 추조에서 처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추조에서 다시 처결한 것이 만일 공평하지 않았다면 또한 어찌 경조에서 처음 처결한 것이 공평하지 못한 것과 견주어 나을 것이 뭐 있겠는가? 이는 오직 송사의 청리를 공평하게 하느냐 공평하지 않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항식(恒式)을 정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진래(進來)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이미 하교하였다.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할 때 잘못 석방한 자 가운데 가두어야 될 자는 다시 가두고 의율(擬律)해야 될 자는 율(律)에 따라 거행하면 된다. 반드시 다시 가둘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판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이어 말하기를,
"전하께서 20년 동안 고심(苦心)하여 온 것은 당(黨)을 제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맡은 사람이 혹 오늘날 사람을 기용하는 방법에 있어 차라리 좁게 할지언정 넓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혹 차라리 넓게 할지언정 좁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넓게 할 경우에는 그 폐단이 아울러 제방(隄防)까지 무너뜨려 지박(止泊)할 데가 없이 깨끗이 쓸어버리게 되고 이른바 좁게 할 경우에는 사의(私意)가 성하여지고 공도(公道)가 폐기되게 되니, 이 두 가지는 모두 전하께서 표준을 확립시킨 성대한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 점에 대해 개연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처음 전지(銓地)에 들어가서 겨우 두 번의 정사(政事)를 행하였습니다만, 오직 가하다는 것도 없고 불가하다는 것도 없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진실로 간범(干犯)한 것이 없는 사람이면 한결같이 모두 거의(擧擬)했습니다. 정목(政目)이 나가자 사람들이 모두들 너무 주장(主張)이 없다는 것으로 놀리고 비웃는 말들이 사방에서 답지했습니다. 대망(臺望)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대론(大論)을 멋대로 정지시킨 조진세(趙鎭世)·이영조(李永祚)와 공의(公議)를 극력 부지시킨 현광우(玄光宇) 같은 사람들이 모두 마침 신의 정사에서 나왔습니다만, 신이 어찌 그 사이에 먹은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사람의 기용을 반드시 좁게 하지도 않고 반드시 넓게 하지도 않으면서 지극히 공정하게 하기만을 힘쓰는 것이 진실로 신의 본의인 것입니다. 의리에 관계되는 것과 시비의 분별에 이르러서는 평일에 굳게 마음먹은 것이 있었는데, 만일 신으로 하여금 하루 아침에 지켜온 것을 고쳐 구차스럽게 세상과 영합하게 한다면, 이는 신이 차마 할 수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전하께서 신에게 기대하는 것도 또한 어찌 여기에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하문하기를,
"통신사(通信使)에 대해 길을 나누도록 허락했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연로(沿路)에서 공궤하는 폐단을 우려하여 길을 나누게 하도록 주청(奏請)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은 사체가 가볍지 않고 뜻밖의 병고(病故)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고 하여 이 뒤로는 길을 나누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24일 병자
조명리(趙明履)를 도승지로, 이창수(李昌壽)를 우승지로,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수찬으로, 민백창(閔百昌)을 필선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판윤으로, 정우량(鄭羽良)을 판의금으로, 윤동형(尹東衡)을 지돈녕으로, 윤급(尹汲)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윤7월 25일 정축
지평 정언상(鄭彦祥)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정언상이 대관(臺官)으로 들어가서 이종성(李宗城)·조진세(趙鎭世)·이영조(李永祚)·김시위(金始煒) 등에 대한 계사(啓辭)를 정지시켰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정언상은 글도 못하는데 요행히 급제되었기 때문에 등과했을 적에 말이 매우 많았었습니다. 이번 일은 그가 스스로 판별할 일이 아니었으니, 의당 파출시키는 벌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을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연소한 무리들이 혹시 서로 다투더라도 노성인(老成人)은 눈감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윤학동(尹學東)·현광우(玄光宇)와 같다면 누가 정계(停啓)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언상이 상소하기를,
"대계(臺啓)를 정지시키는 것과 정지시키지 않는 것이 애당초 글을 잘하고 못하는 것에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글을 못하면서 요행히 급제된 사람이 신 한 사람뿐만이 아닌데도, 대료(大僚)가 신에 대해서 계속 거론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드디어 체직시켰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언상이 글을 못하면서도 외람되이 급제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니,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정계(停啓)한 뒤에 비로소 글을 못한다고 공척하는 말을 발론한 것은 대신의 체통이 아닌 것이니, 연소한 무리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04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언상이 글을 못하면서도 외람되이 급제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니,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정계(停啓)한 뒤에 비로소 글을 못한다고 공척하는 말을 발론한 것은 대신의 체통이 아닌 것이니, 연소한 무리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윤7월 26일 무인
큰 비가 내렸다.
김상복(金相福)을 승지로 삼았다.
윤7월 28일 경진
유성(流星)이 필성(畢星)의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윤7월 29일 신사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으로 행행하였다. 이때 옹주의 장일(葬日)이 앞으로 닥쳐오기 때문에 한번 결별(訣別)하려고 드디어 그 집에 임하였으니, 전후 곡림(哭臨)한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
윤7월 30일 임오
통신사(通信使) 홍계희(洪啓禧)·부사(副使) 남태기(南泰耆)·서장관(書狀官) 조명채(曹命采)가 돌아왔다. 홍계희 등이 지난해 겨울 11월에 사폐(辭陛)하고 3월에 배를 타고 출발하였으며 5월에 왜도(倭都)에 도착하여 예폐(禮幣)를 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復命)하였다. 통신사의 일행이 모두 5백여 인이었고 대동한 편비(褊裨)들은 모두 문벌이 있는 이름난 무관(武官)들을 선발하였으며 기예(技藝)를 지닌 백공(百工)들이 다 따라갔는데, 홍계희가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또 만리(萬里) 먼 길을 수행한다 하여 차마 법으로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관들이 교만 방자하여 멋대로 행동하였고 또 주장(主將)이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믿고서 도착하는 곳마다 횡포를 부림에 있어 돌아보아 꺼리는 것이 없었다. 홍계희 등이 부산(釜山)에서 4개월 동안 머물고 있었는데, 70고을에서 돌려가며 이들을 지공(支供)하느라 온 도내(道內)가 말할 수 없이 피폐되었고 열읍(列邑)이 거의 몇 해 동안 소복(蘇復)되지 못하였다.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세 사신이 육지에 올랐으나 예폐와 반전(盤纏)105) 은 모두 배에 있었는데, 부선(副船)에서 실화(失火)하여 모두 다 타버렸고 죽은 사람도 3인이나 되었다. 이런 사실이 보고되자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건의하여 삼폐(蔘幣)와 희자(餼資)를 다시 준비하여 보냈는데, 이 때문에 국가의 저축이 탕진되었으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배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은 이에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인데 조정을 속인 것이다.’ 했다.
사신은 말한다. 나라에 기강이 없어지고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다. 이때를 당하여 왕명을 받고 국경을 나감에 있어 수백 인을 대동하고서 교활한 나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비록 군법(軍法)으로 한결같이 제재하여도 오히려 난잡하게 될까 두려워했어야 할 것인데, 홍계희 등은 태연히 느긋한 마음으로 길에 올라 스스로 ‘대체로 벌써 조치하였는데 내가 무엇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여겼으므로, 유폐(流弊)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어도 어떻게 함이 없었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04면
【분류】외교(外交) / 군사(軍事) / 역사(歷史)
[註 105] 반전(盤纏) : 노자.
사신은 말한다. 나라에 기강이 없어지고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다. 이때를 당하여 왕명을 받고 국경을 나감에 있어 수백 인을 대동하고서 교활한 나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비록 군법(軍法)으로 한결같이 제재하여도 오히려 난잡하게 될까 두려워했어야 할 것인데, 홍계희 등은 태연히 느긋한 마음으로 길에 올라 스스로 ‘대체로 벌써 조치하였는데 내가 무엇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여겼으므로, 유폐(流弊)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어도 어떻게 함이 없었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행(使行)이 바다를 건너 모두 세 번 육지에 오르고 수천 리를 가서야 비로소 강호(江戶)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곧 관백(關白)이 거처하는 곳으로 지리(地理)가 매우 험하였고 경유한 곳의 성호(城濠)는 견고하고 완벽하여 포석(砲石)으로 분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호에는 모두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었으며, 성문에는 조교(弔橋)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가에는 전사(廛肆)가 벌려 있었고 여리(閭里)는 모두 조리 있게 구획되어 문란하지 않았다. 3보(步)가 1칸[間]이고 60간이 정(町)이 되는데, 정에는 중문(重門)을 설치하여 가는 데마다 모두 이와 같았다. 문호(門戶)에 자리를 깐 척도까지도 모두 같아서 조금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여염(閭閻)의 성대함은 중국(中國)보다 더 나았다. 대체로 모두 군법(軍法)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워 법도를 수명(修明)하였으므로 의복(衣服)과 포설(鋪設)에도 모두 법제가 있고 민졸(民卒)의 장물(章物)에도 아울러 표지(標識)가 있어서 향리(鄕里)의 문지기에게 묻지 않더라도 무슨 고을인지 알 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사행이 도착하는 곳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일이 없었고 희궤(餼饋)를 빠뜨리는 일이 없어 우리 나라와 견주어 보면 규모와 법령이 정칙(整勅)되었을 뿐만이 아니었으며, 이 나라에는 과거(科擧)로 인재를 선발하는 일이 없고 모두 세습(世襲)하고 있었다.
나라에는 모두 70개의 주(州)가 있는데, 주에는 모두 태수(太守)가 있고 태수에게는 모두 부수(副守)가 있다. 태수의 가속(家屬)은 모두 강호에 유치(留置)되어 있는데, 각주(各州)의 태수들은 한 해에 반년은 강제로 강호에 머물게 하며 그 부수로 하여금 머물러서 주(州)의 일을 다스리게 하고 있다. 백성들은 사송(詞訟)이 없고 문학(文學)을 숭상하지 않는데, 대개 글을 쓸 데가 없기 때문이고 오직 승도(僧徒)들은 간간이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사신(使臣)이 오면 반드시 국(局)을 설치하고 개인(開印)하는데, 대저 수창(酬唱)한 것은 빠짐없이 수집하여 화한수창록(和韓酬唱錄)이라고 호칭하였으니, 이는 왜인(倭人)이 스스로를 화림(和林)이라 일컫고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이라는 호칭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수창록에 오르게 되면 그 영광이 등영(登瀛)106) 에 비견될 정도이다.
관백(關白)이 새로 서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다 사신을 보내 줄 것을 청하는데, 사신이 그 나라에 도착하게 되면 제도(諸島)에 호령하는 패문(牌文)에 ‘조선(朝鮮)에서 조공을 바치러 들어온다.’고 하기에까지 이르러 국가의 수욕(羞辱)이 막심하였다. 그러나 사명을 받들고 간 사람은 매양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대로 두고 못들은 체하기 일쑤였다. 홍계희 등이 강호에서 7일 동안 머물고 돌아왔는데, 왕복한 노정(路程)에 소요된 날수가 모두 5개월이었고 사폐(辭陛)한 때부터는 모두 9개월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기강이 해이한 탓으로 데리고 간 임역(任譯)들이 재화(財貨)를 탐하여 사생(死生)을 잊고 설치느라고 저들의 사정은 전혀 탐지하지 못한 채 우리 나라에 대한 말은 이미 여지없이 죄다 누설하였으니, 저들 가운데 만일 인물이 있었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이적(夷狄)의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이 중화(中華)의 나라에 임금이 없는 경우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제도(制度)는 번번이 중화를 본받고 있는데도 이제 정형(政刑)과 법령(法令)이 도리어 오랑캐만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사(信使)가 가서 오랑캐들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한 것은 물론, 사적으로 뇌물을 받으면서도 사양할 줄을 몰랐으니, 수모를 받는 것이 그칠 기한이 없게 되었다. 저들 가운데 우리 나라의 사정을 엿보는 사람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여겼겠는가? 임진년107) 에 귤강광(橘康廣)이 부기(府妓)가 향물(香物)을 움켜쥔 것을 보고서 ‘너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국세(國勢)를 임진년에 견주어 보면 그때에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04면
【분류】외교(外交) / 역사(歷史)
[註 106] 등영(登瀛) : 영주산(瀛洲山)에 오름. 영주산은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기에 오르면 영광스럽다 하여 영예로운 지위에 오름을 비유한 것임.[註 107]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사신은 말한다. 이적(夷狄)의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이 중화(中華)의 나라에 임금이 없는 경우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제도(制度)는 번번이 중화를 본받고 있는데도 이제 정형(政刑)과 법령(法令)이 도리어 오랑캐만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사(信使)가 가서 오랑캐들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한 것은 물론, 사적으로 뇌물을 받으면서도 사양할 줄을 몰랐으니, 수모를 받는 것이 그칠 기한이 없게 되었다. 저들 가운데 우리 나라의 사정을 엿보는 사람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여겼겠는가? 임진년107) 에 귤강광(橘康廣)이 부기(府妓)가 향물(香物)을 움켜쥔 것을 보고서 ‘너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국세(國勢)를 임진년에 견주어 보면 그때에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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