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8월

싸라리리 2025. 9. 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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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갑신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장사지냈는데, 의물(儀物)의 성대함이 국장(國葬)에 버금갈 정도였다. 분묘(墳墓)를 만드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으므로 기읍(畿邑)의 백성들이 그 때문에 농사를 폐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 옹주가 하가(下嫁)할 때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주(貴主)들의 혼인에 매양 주혼(主婚)하여 왔었다. 그런데 화순 옹주(和順翁主)가 하가할 때의 의물을 내가 관주(館主)가 되었을 때에 견주어 보면 열 배나 더 풍성하였으며, 이제 귀주의 자장(資裝)은 또 화순 옹주에 견주어보면 더할 수 없이 풍성하였다."
하였다. 옹주가 출궁(出宮)했을 처음에 임금이 이현(梨峴)에 있는 별궁(別宮)을 하사하였는데, 옹주가 사양했었다.

 

8월 4일 병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밤이 되어서야 환궁(還宮)하였다.

 

8월 5일 정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심성진(沈星鎭)을 이조 참의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조재민(趙載敏)을 사간으로, 강봉휴(姜鳳休)를 장령으로, 임집(任)·이유수(李惟秀)를 지평으로, 이이장(李彛章)·이규채(李奎采)를 부교리로, 이응협(李應協)을 부수찬으로, 조명교(曺命敎)를 호조 참판으로, 정우량(鄭羽良)을 판돈녕으로, 심계(沈瑎)를 남병사(南兵使)로, 조동진(趙東晉)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경상도 유생(儒生) 권태우(權泰佑)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통신사 홍계희(洪啓禧) 등을 소견(召見)하고 왜국(倭國)의 사정에 대해 상세히 하문하였다. 이때 왜인이 우리 배가 실화(失火)하여 삼폐(蔘幣)가 거의 다 타버렸다는 것으로 특별히 해삼(海蔘) 10궤(櫃)와 왜포(倭布) 3백 필(疋)을 보내 왔는데, 임금이 사양하기도 곤란하고 받기도 곤란하여 대신(大臣)에게 하문하니, 대신이 동래부에 주어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말한다. "춘추(春秋)의 법에 대부(大夫)가 국경을 나가서는 외교(外交)가 없는 것을 숙향(叔向)108)  과 안영(晏嬰)109)  처럼 하여야 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범수(范睢)110)  가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도 쇠고기와 술은 받았으나 선물로 준 금(金)은 되돌려 주었다. 이제 홍계희 등은 이에 사사로이 오랑캐가 선물하는 것을 받았는데, 국가의 비밀스런 일을 누설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교활한 적에게 매수된 것이 틀림없으니, 그 죄가 크다. 더구나 그들이 증여한 무늬 놓은 베는 이에 우리 나라에서 새로 금하는 물품인 것이다. 조정에서는 의당 먼저 사신이 나라에 오욕을 끼친 잘못을 밝히고, 다음에 왜인들이 보낸 것을 되돌려 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했더라면 교린(交隣)하는 도리가 올바르게 되고 재화(財貨)를 천하게 여기는 덕이 드러나며 법을 삼가는 의의가 엄하여져 왜노(倭奴)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묘당(廟堂)의 의논이 이를 물리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여분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려 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05면
【분류】외교(外交) / 역사(歷史)


[註 108] 숙향(叔向)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명신 양설힐(羊舌肸)의 자(字).[註 109] 안영(晏嬰)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명신.[註 110] 범수(范睢) : 전국 시대 진(秦)나라 대부.
사신은 말한다. "춘추(春秋)의 법에 대부(大夫)가 국경을 나가서는 외교(外交)가 없는 것을 숙향(叔向)108)  과 안영(晏嬰)109)  처럼 하여야 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범수(范睢)110)  가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도 쇠고기와 술은 받았으나 선물로 준 금(金)은 되돌려 주었다. 이제 홍계희 등은 이에 사사로이 오랑캐가 선물하는 것을 받았는데, 국가의 비밀스런 일을 누설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교활한 적에게 매수된 것이 틀림없으니, 그 죄가 크다. 더구나 그들이 증여한 무늬 놓은 베는 이에 우리 나라에서 새로 금하는 물품인 것이다. 조정에서는 의당 먼저 사신이 나라에 오욕을 끼친 잘못을 밝히고, 다음에 왜인들이 보낸 것을 되돌려 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했더라면 교린(交隣)하는 도리가 올바르게 되고 재화(財貨)를 천하게 여기는 덕이 드러나며 법을 삼가는 의의가 엄하여져 왜노(倭奴)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묘당(廟堂)의 의논이 이를 물리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여분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려 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8월 6일 무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8월 7일 기축

태백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8월 8일 경인

태백성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수위성(水位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청흑색(靑黑色)이었다.

 

8월 10일 임진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명릉(明陵)111)  에 행행하였는데, 융복(戎服)을 갖추고 교자(轎子)를 탔다. 금암(黔巖)에서 주정(晝停)하였고, 명릉이 있는 동구(洞口)에 이르러서는 교자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익선관에 참포(黲袍)와 오서대(烏犀帶)를 갖추었다. 홍살문 밖에 이르러 배릉위(拜陵位)로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마친 다음 이어 능상(陵上)을 봉심(奉審)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천담복(淺淡服)에 오각대(烏角帶)를 갖추고 따라 나아갔다. 임금이 곡장(曲墻)의 두 모퉁이를 돈 뒤에 도로 대왕(大王)의 능 앞에 엎드려 한참을 있다가 손으로 돌을 어루만지며 오열하면서 하교하기를,
"5년이 지난 뒤에 이제 비로소 배성(拜省)하게 되니, 슬픈 감회가 배나 더하다."
하였다. 임금이 판위(板位)에 나아가 사배례를 마치고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 다음, 판위로 물러나와 사배(四拜)하였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끝내고 나서 익릉(翼陵)·경릉(敬陵)·창릉(昌陵)의 섭행제(攝行祭)도 또한 일시에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소차(小次)로 들어가서 조금 있다가 나와 사릉위(辭陵位)로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 익릉·경릉으로 나아가서 홍살문 밖에 이르러 사배례를 행하고 능상(陵上)과 정자각(丁字閣)의 봉심을 의주(儀註)대로 하였다. 임금이 융복을 갖추고 깃을 꽂은 다음 경릉의 재실(齋室)에서 회가(回駕)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나누어 보내 창릉과 순회묘(順懷墓)를 봉심하게 하였다. 오는 길에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임어하였다가 환궁하였다.

 

처음 능행(陵行)에 관한 명이 있자 중외(中外)에서 모두들 거가(車駕)가 반드시 파주(坡州)의 옹주묘(翁主墓)로 임어할 것으로 여겨 주현(州縣)에서 길을 닦고 기다렸었는데, 임금이 기민(畿民)이 거듭 지치게 된다는 것으로 그 묘에는 임어하지 않고 집에 임어하였다.

 

8월 11일 계사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심발(沈墢)을 지평으로, 이의중(李毅中)을 교리로, 윤동도(尹東度)를 부교리로, 정실(鄭實)을 보덕으로, 이이장(李彛章)을 사서로, 정형복(鄭亨復)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기 감사와 수령을 소견(所見)하였다. 감사 홍봉한(洪鳳漢)이 청하기를,
"당하(堂下)인 별성(別星)112)  들이 교자(轎子)를 타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엄중히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그러나 연경(燕京)으로 가는 서장관(書狀官)이나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은 전대로 하게 하고 묻지 말라고 명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수원(水原)은 8천의 병마(兵馬)로 독진(獨鎭)하고 있는 부(府)이기 때문에 책응(策應)하기가 대단히 번잡하니, 청컨대 여결(餘結)113)   3백으로 군수(軍需)에 보충하여 쓰도록 하소서. 양주(楊州)는 동북(東北)의 수참(首站)에 위치하여 능(陵)이 13개소이고 묘(墓)가 14개소인데, 월봉(月俸)으로는 공급(供給)을 충당하기에 부족하니, 청컨대 여결 5백으로 희름(餼廩)의 숫자에 따라 분배(分排)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비국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김효대(金孝大)가 아뢰기를,
"외방 향교(鄕校)의 제위(祭位)가 《속대전(續大典)》과 같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신이 포천(抱川)에 부임하였을 적에 성묘(聖廟)를 살펴보았는데, 동서무(東西廡)가 없었고 12현(賢)을 정전(正殿)에 배향(配享)하고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는 사체에 있어 구간(苟簡)하다는 것으로 제도(諸道)에 하문하여 양무(兩廡)를 더 설치하게 하였다.

 

교리 이의중(李毅中)이 한림(翰林)으로 거상(居喪)하고 있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임금에게 아뢰어 승륙(陞六)114)  시키고 곧이어 영선(瀛選)에 기록하였다. 이의중이 거상 중에 승륙하고 이어 관록(館錄)115)  에 참여한 것은 근세(近世)에 없었던 일이었다. 황합(黃柚)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이의중을 곧바로 남상(南床)116)  에 차임하는 것은 가합니다만, 승륙시켜 6품직을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영관(瀛館)에 제수했다는 것은 아직 그런 전례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고(故)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승지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지난번 용인의 유생(儒生)들이 와서 한 소장(疏章)을 올려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을 이종(移宗)시키는 일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종손(宗孫)을 입후(立後)시키는 일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조광조의 봉사손인 조문보(趙文普)가 무신년117)  에 죽었으니 의당 정온(鄭蘊)의 봉사손에 대한 전례를 적용하여 이종시켜야 하는데, 이를 진달할 사람이 없어 아직도 그대로 두고 있었던 것이니, 이는 조정에서 시행하도록 허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몽주의 종손에 대해서는 이미 특교(特敎)에 의한 처분이 있었으므로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때문에 그 상소를 퇴각시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광조의 봉사손은 정온의 전례에 따라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의 상(喪)이 임진 왜란 이전에 있었는데, 임시로 대궐(大闕) 안에다 폄장(窆葬)했다가 그대로 소재처(所在處)를 잃어버린 탓으로 곧 허장(虛葬)한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만일 비석을 세울 경우에는 이런 일을 또한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시의 일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 앞면에는 대자(大字)를 새기고 뒷면에는 단지 비석을 세운 월일(月日)만 쓰면 된다."
하였다.

 

8월 13일 을미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 전하께서 옹주(翁主)의 집에 행행하여 임어한 것이 대저 몇 번이었습니까? 위로 진신(搢紳)·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 여대(輿儓)·하천(下賤)에 이르기까지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은 모두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일호(一毫)라도 비방하고 헐뜯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발인(發靷)하고 반우(返虞)했을 때 재차 임어하여 곡(哭)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말이 있었는데, 신은 감히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건강을 손상시키는 것으로는 슬픔이 가장 극심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이 의탁하고 있는 몸으로 이렇게 하시고서도 질환(疾患)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단지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신은 또한 알 수 없는 점이 있는데, 전하께서 수차에 걸쳐 임어하셨을 적에는 여러 신하들이 떼 지어 일어나 아뢰었는데 지금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니, 이는 전하의 거조가 정당한 것이어서 말할 만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또 전하에게는 간할 수 없다고 여겨 드디어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 가운데 반드시 하나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오직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를 뿐 아무도 어기는 사람이 없으면 말 한마디가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했는데, 아! 불행하게도 지금의 일이 여기에 가깝습니다. 일이 지나간 뒤에는 말하여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구구하게 이렇게 아뢰는 것은 끝내 성심(聖心)의 한 번 깨우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어서입니다."
하였다. 차자를 봉입(捧入)하니, 가납(嘉納)하였다.

 

8월 16일 무술

유우기(兪宇基)를 보덕으로, 구윤명(具允明)을 문학으로, 권숭(權崇)을 사서로, 김상철(金尙喆)을 겸 필선으로, 윤동도(尹東度)를 겸 문학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겸 사서로, 임석헌(林錫憲)을 부수찬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충청 감사로 삼았다.

 

8월 17일 기해

통신사(通信使)가 돌아올 때 일본(日本)에서 답례로 보내 온 채릉단(彩綾緞) 2백 필(疋)을 불태우라고 명했다가 곧이어 정지시켰다. 임금이 바야흐로 문단(文緞)을 금하고 있다는 것으로 불태우려 했는데,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이는 천물(天物)을 아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맡겨 검은 물을 들이게 하여 군병들의 전투복을 만드는 데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종신(宗臣)에게 요전상(澆奠床)118)  을 갖추어 지급하게 한 것은 그의 상소에서 빈(嬪)과 왕자군(王子君)의 묘(墓)를 두루 살핀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성상께서 특별히 모묘(某墓)를 성소(省掃)할 때 요전상을 갖추어 지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엊그제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소분(掃墳)하기 위해 정사(呈辭)한 내용에는 단지 친산(親山)만 거론하였으니, 요전상을 갖추어 지급하라는 명은 전례에 어긋나는 조처인 것 같습니다."
하니, 그 하교를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8월 18일 경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8월 19일 신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형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추조(秋曹)의 신장(訊杖)에는 법장(法杖)이 있고 별장(別杖)이 있습니다. 이른바 법장은 형혈(刑穴)에 의거 교정(較正)한 것인데, 그 제도가 《대전(大典)》에 기재된 내용과 합치되지 않습니다. 대개 《대전》에는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형혈은 주척(周尺)을 적용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서리(胥吏)들이 농간을 부린 소치인 것입니다. 별장은 《대전》의 척도(尺度)와 비슷한데 별장이란 명칭을 붙인 것은 매우 불가하니, 의당 제거해야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한 조(曹)에서 두 가지 신장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이웃 나라에 소문나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외방의 원장(圓杖)을 거듭 금하고 있는 때이겠는가? 이 뒤로 경외(京外)의 장(杖)은 일체 《대전》의 내용에 따라 이정(釐正)하여 그 하나를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도의 불에 타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신만(申晩)을 대사헌으로, 이창의(李昌誼)를 대사간으로, 안집(安𠍱)을 집의로, 황경원(黃景源)을 사간으로, 이광익(李光瀷)·조운규(趙雲逵)를 장령으로, 이수해(李壽海)·임순(任珣)을 지평으로, 이게(李垍)를 헌납으로, 박성원(朴盛源)·김선행(金善行)을 정언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응교로, 윤동도(尹東度)를 부교리 겸 문학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판돈녕으로 삼았다.

 

장령 이제화(李齊華)가 상소하기를,
"귀주(貴主)의 상사에 장우(葬虞)를 이미 끝마쳤는데도 7일 동안 다시 임어하시면서 신하들의 간언을 굳게 거절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곧바로 행하셨으니, 이는 슬픔과 기쁨을 절도에 맞게 하는 데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대신(臺臣)은 자식이 없는가?"
하고,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8월 20일 임인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1일 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통신 정사(通信正使) 홍계희(洪啓禧), 부사(副使) 남태기(南泰耆)에게는 아울러 가계(加階)하고, 종사관(從事官) 조명채(曹命采)는 승서(陞敍)하게 했는데,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다. 조명채에게는 곧이어 또 가자(加資)하였다.

 

8월 23일 을사

부교리 이이장(李彛章)이 위창조(魏昌祖)의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를 올렸다. 임금이 옥당(玉堂)을 불러 어제(御製)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는데 말이 능침(陵寢)의 일에 이르자, 이이장이 아뢰기를,
"북도는 곧 우리 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곳으로 8능(八陵)을 봉사(奉祀)하고 있는 곳입니다만, 오늘날의 신민(臣民)들이 가까운 것에는 상세히 알면서 먼 데 있는 것은 소홀히 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전 정랑(正郞) 위창조가 《북도능전지》를 수집하여 엮었으니, 의당 예람(睿覽)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여 펴보고 나서 옥당에 명하여 교정(校正)하여 가지고 들여오게 하였다.

 

8월 26일 무신

승지와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어제(御製) 《심감(心鑑)》을 가지고 와서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자성편》을 강하였으므로 오늘 《심감》을 진강하게 하는 것이다."
하니, 부교리 이이장이 말하기를,
"옛부터 제왕(帝王)의 저술(著述)로는 《자성편》과 《심감》처럼 그 내용이 지극히 정일(精一)하고도 상세한 것은 아직 없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이를 살펴보고 효험이 있게 된다면, 어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8월 27일 기유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밤에는 번갯불이 쳤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승지 윤광의(尹光毅)가 아뢰기를,
"신은 해장(該掌)의 상언(上言) 내용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는데 또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됨이 있을 것입니다. 제주(濟州) 사람들이 살인(殺人)한 일을 가지고 목사(牧使)의 죄상을 논열(論列)한 것이 열 조항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허리를 베어야 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목사는 곧 한억증(韓億增)이니, 이는 전례에 따라 발거(拔去)할 수 없으며, 위에서 조처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문하기를,
"유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부교리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신의 의견은 한억증을 나처(拿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 원정(原情)을 보건대, 그가 두 아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이 입시할 때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8월 28일 경술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천측성(天厠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8월 29일 신해

유성이 낭성(狼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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