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임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 【지평 이수덕(李壽德)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일 계축
헌부 【지평 임순(任珣)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3일 갑인
김상중(金尙重)을 대사헌으로, 조재민(趙載敏)을 교리로, 신회(申晦)·김선행(金善行)을 수찬으로, 조명채(曹命采)를 필선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설서로, 이현중(李顯重)을 겸 설서로, 조돈(趙暾)을 집의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장령으로, 이의중(李毅中)을 헌납으로, 정실(鄭實)을 겸 보덕으로, 구선복(具善復)을 황해 수사로 삼았다.
9월 4일 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9월 6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위에서 초계(抄啓)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어사(御史)를 파견했는데, 연소(年少)하여 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민간의 이해(利害)와 장리(長吏)의 능부(能否)에 대해 소루하고 어긋나게 하는 걱정이 많았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에서 경력이 있고 일에 능숙한 사람을 초계하게 하여 망(望)에 대비하여 둠으로써 뜻밖의 차견(差遣)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충청도의 전 수사(水使) 오명수(吳命修)는 이미 나치(拿致)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대로 습조(習操)를 행하였으니, 이는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책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울러 이 죄로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양산군(梁山郡)은 전토(田土)가 협소한 까닭으로 거민(居民)들이 의뢰하고 있는 것은 단지 두 곳의 대평(大坪)뿐입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연전의 큰 홍수에 모래와 자갈 더미로 변하여 버렸고, 또 하나는 수영(水營)에서 관장하는 대둔(大屯)·석장(石藏)·통도(通度) 등 세 개의 봉산(封山)119) 이 잇달아 그 가운데로 뻗어 있어 해영(該營)의 적간(摘奸)이 잦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기르는 수목(樹木)이 불에 타거나 도벌(盜伐)을 당하면 산 아래 사는 백성들의 형배(刑配)가 잇달게 되어 일체 모두 떠나 흩어진 탓으로 옛날에는 큰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 이제는 빈터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끝없이 넓은 큰 들판이 황폐하게 되어 잡초만 무성할 뿐이니, 실로 놀랍고 참담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봉산을 파기시키지 않는다면 본읍(本邑)을 파기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는 민읍(民邑)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앙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하여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 도정(都正) 어유붕(魚有鵬)은 출계(出繼)하였습니다만, 소생부(所生父)에게 추은(推恩)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7일 무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면직되었다. 박문수가 잇달아 대간(臺諫)의 공척을 받았기 때문에 체직을 허락하였으나 장차 다시 제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문수가 탁지(度支)에 부임하여 강력하게 일을 해나가면서 심력(心力)이 있게 헛된 비용을 절감했으므로 백성들에게 약간의 칭예(稱譽)를 얻었다. 근세에 권이진(權以鎭)이 판조(版曹)120) 에 있으면서 재화(財貨)를 잘 다스렸다는 것으로 최고의 칭예를 얻었는데, 박문수가 조금 그의 뒤를 잇기는 했으나 정민(精敏)하게 사무를 잘 아는 것은 권이진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승지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일찍이 외방에 있는 대간(臺諫)을 변통시킬 때를 살펴보건대, 그 가운데 초선(抄選)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위에서 ‘초선된 사람 이외에는 개차(改差)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혹 체직을 허락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또한 ‘초선된 사람은 체직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개차하라.’ 말씀하셨으니, 이로써 살펴보면 분별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일체 아울러 개차했으니,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도리에 흠결이 있습니다. 밖의 사람들이 혹 대우가 처음만 못하고 점점 소홀해지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이는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 점이 있었구나. 내가 잊고 있었다. 승지는 어찌하여 제품(提稟)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체차시킨 대간 가운데 초선된 사람은 곧 전 집의 민우수(閔遇洙)입니다. 그때 상소한 내용이 비록 사직(辭職)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만, 유신(儒臣)은 다른 사람과는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유신을 대우하는 도리에 흠결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또한 조검(照檢)을 잘못한 탓이다."
하였다. 임석헌(林錫憲)이 말하기를,
"화순 현감(和順縣監) 이양원(李養源)이 바야흐로 경저(京邸)에 있는데, 이 또한 초선한 선비이니, 의당 불러서 접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접견하려 했었다."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서 《심감(心鑑)》을 강론하게 하였다. 임금이 유신에게 마음의 체(體)와 용(用)에 대해서 진달하게 하니, 부교리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거경(居敬)이 체가 되고 독공(篤恭)이 용이 됩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병을 앓았을 적에 문인(門人)들이 손님을 사절하고 쉴 것을 청하니, 주자가 ‘그대의 게으름으로 나에게 게으름을 가르치려 하는 것인가?’ 하고 나무랐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더 스스로 깨우치는 법에 의거하고 분발하여 덕업(德業)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부수찬 임석헌(林錫憲)은 말하기를,
"심학(心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맹자(孟子)의 말에 ‘아버지도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만 하지는 못한다.’라고 했는데, 만일 동궁 저하(東宮邸下)께서 만에 하나 이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추서(鄒書)121) 에 기재된 내용과 같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자성편(自省編)》을 저술하신 본의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훌륭한 말이다. 질박하고 정직한 것이 가상하다."
하고, 이어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9월 8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화순 현감 이양원(李養源)을 소견하고 학문의 공부(工夫)에 대해 하문하니, 이양원이 사사(辭謝)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또 민폐(民弊)에 대해 하문하니, 이양원이 말하기를,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는 것이 실로 큰 폐단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읍(下邑)의 학교(學校)에 대한 정사를 함에 있어 그대는 장차 무엇을 우선으로 삼으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독서(讀書)한 고을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소학(小學)》을 토론하기를 원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좋은 생각이다."
하고, 또 하문하기를,
"간활(奸猾)들을 어떻게 종식시키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하여 임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또 하문하기를,
"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병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곧 《대학(大學)》의 사유소(四有所)122) 가운데 하나가 있어 마음을 가린 탓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병증(病症)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양원이 또 겸양(謙讓)하면서 감히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강요하니, 이에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가장 긴요한 공부가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양원이 일찍이 서울에서 벼슬을 했었는데, 고향에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사(朝士)들을 살펴보니 서로 모여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없고 그저 하루 종일 주고받는 말이 ‘아무 고을은 소출(所出)이 얼마이고 아무 직책은 소득(所得)이 얼마인가?’ 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벼슬하는 재미의 풍박(豊薄)에 대해 논평하면서 극소량의 이익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서울 사람들의 능한 일이다."
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다투어 이익을 도모하여 습속(習俗)이 크게 무너졌기 때문에 이양원의 말이 이러했던 것이다.
9월 9일 경신
유성(流星)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서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서울에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경상도 예천(醴泉) 등 고을과 강원도 삼척(三陟) 등 고을에도 지진이 발생했다.
《무원록(無冤錄)》을 중간(重刊)하여 팔도(八道)에 반포하였다. 처음 각도(各道) 각 고을에 모두 《무원록》이 있어 살옥(殺獄)의 검험(檢驗)에 빙고(憑考)했었는데, 자구(字句)가 어긋난 것이 많아서 중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좌의정 조현명이 건청(建請)하기를,
"《세원록(洗冤錄)》·《평원록(平冤錄)》과 《미신편(未信編)》 등의 책을 가지고 참고하고 이정(釐正)하여 제도(諸道)에 간포(刊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현명이 구택규(具宅奎)를 천거하여 그 역사(役事)를 주관하게 하였다. 조현명이 영남(嶺南)의 관찰사로 있을 때 구택규가 아사(亞使)로 따라갔었는데, 그뒤로 조현명이 누차 조정에 천거하였다. 구택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나서는 항상 조현명을 일컬을 적에 ‘나의 사야(使爺)께서, 나의 사야께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다.
9월 11일 임술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차대(次對)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지진의 재이(災異)가 발생했기 때문에 연방(延訪)한 것이었는데, 등대(登對)함에 이르러서는 연석이 끝나도록 말이 재이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옥당(玉堂)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신은 생각건대 오늘 소견하신 것은 바로 공구 수성(恐懼修省)하기 위한 뜻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연석이 끝나도록 상하가 모두 재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개연(慨然)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인구(引咎)하였다. 윤광소가 말하기를,
"천심(天心)은 의당 움직여야 하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지도(地道)는 의당 고요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진동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양강(陽剛)의 도(道)에 의거하여 분발하고 진기하고 면려한다면 지도가 저절로 고요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어면 만호(魚面萬戶) 정순검(鄭純儉)의 당시 상소한 내용은 사리에 어긋난 것이었으니, 진실로 엄중히 조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는 풍담(風痰)을 오랫동안 앓고 있으니, 북쪽 변방에 장구히 머물게 하는 것은 실로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올 우려가 있습니다."
하고, 윤광소는 말하기를,
"선묘조(宣廟朝) 때 김효원(金孝元)이 동인(東人)의 괴수로서 부령(富寧)으로 출보(出補)되었을 적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그에게 사병(死病)이 있다는 것으로 연석에서 내지(內地)로 옮겨 줄 것을 아뢰었는데, 지금까지 성덕(盛德)의 일로 일컫고 있습니다. 이제 정순검은 좌죄(坐罪)된 것이 김효원보다 가벼운데, 어면의 열악함은 부령보다 더 심합니다. 대료(大僚)의 뜻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대체(大體)를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지 어찌 하나의 정순검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정순검을 만호(萬戶)에서 체차시키게 하였다.
임금이 부수(副率) 이의경(李毅敬)이 문의(文義)를 많이 진달한다는 것으로 춘방관(春坊官)의 기척(譏斥)을 받고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하교하기를,
"계방(桂坊)123) 은 문의(文義)에 대해 진달하면 안되는 것인가?"
하니,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계방관(桂坊官)을 함께 서연(書筵)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문의에 대해 진달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올라오도록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9월 12일 계해
김상철(金尙喆)을 보덕으로, 이규채(李奎采)를 필선으로, 윤광소(尹光紹)를 겸 보덕으로, 어석윤(魚錫胤)을 겸 필선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설서로, 유언국(兪彦國)을 정언으로, 박창윤(朴昌潤)을 지평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집의로, 황경원(黃景源)을 응교로 삼았다.
9월 13일 갑자
하교하기를,
"이지억(李之億)을 과위(窠位)가 나기를 기다려 수용(收用)하라."
하였다.
9월 14일 을축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제조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역관(譯官)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어 감히 이렇게 앙달합니다. 팔포(八包)124) 에 숫자를 제대로 채우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중국에 수응(酬應)해야 할 것이 해마다 증가되어 지금은 7, 8천 냥이나 되는데, 이는 모두 팔포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연경(燕京)의 물화(物貨)가 나올 적에 만부(灣府)125) 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매년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 연경에 갔다가 오면 매우 많은 부채를 집니다. 만부에서 당초에는 상고(商賈)에게만 세금을 거두었었고 역관에게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세금을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만, 상고들을 파기시킨 뒤로는 그것을 역관들에게 옮겨 징수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관모(冠帽), 당면(唐綿)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했었는데, 지금은 온갖 물품에 모두 부과하여 한정(限定)이 없습니다. 관모, 당면 이외에는 일체 금단하도록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금을 외람되게 거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비국으로 하여금 상세히 문의하여 엄중히 신칙하게 하겠다."
하였다.
9월 15일 병인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9월 16일 정묘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게 하였다. 수찬 김선행(金善行)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고 찬성 박필주(朴弼周)의 장기(葬期)가 이미 박두하였으니, 의당 시호(諡號)를 내려야 하는데, 시장(諡狀)이 없어서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정신 이황(李滉)·송시열(宋時烈)의 경우에는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의시(議諡)한 전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산림(山林)의 유현(儒賢)으로 성상에게 예우를 받았었으니, 이제 그의 장기를 당하여 의당 특명으로 의시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찬 김선행(金善行)이 아뢰기를,
"엊그제의 유지(有旨)에서 이지억(李之億)을 녹용(錄用)하라고 하셨는데, 신은 성의(聖意)의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이지억이 죄 없이 사지(死地)로 들어간 것을 불쌍히 여겨 이런 명을 내리셨다면,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 쓸 만한 인물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명을 하게 된 것이다. 어사(御史)도 오히려 사람을 천거할 수 있는데, 임금이 되어서 사람 하나를 천거할 수 없단 말인가?"
하였다. 응교 황경원(黃景源)도 또한 말하기를,
"지난 봄에 이미 국수(鞫囚) 가운데서 한 사람을 발탁하여 벼슬에 제배하였는데, 이제 또 이 지억을 벼슬에 제수하는 것은 국체에 손상됨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7일 무진
차대를 행하였다.
남태기(南泰耆)를 동부승지로 삼았다.
감제(柑製)126) 를 설행하여 시사(試士)했는데, 이후(李)를 뽑아 직부 전시(直赴殿試)127) 하게 하였다. 또 이지억(李之億)에게도 급제를 내렸는데, 이지억은 감제에 초선(抄選)되어 그 이름이 다섯 번째에 있었다. 옛 제도에는 으뜸을 차지한 사람에게만 급제를 내리고 그 나머지는 참여시키지 않았었는데, 임금이 어필(御筆)로 두 번째에 발탁하여 두고는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재주를 취하는 것이다."
하고, 이후와 함께 전시(殿試)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9월 19일 경오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유복명(柳復明)을 대사헌으로, 민백창(閔百昌)을 부응교로, 조명채(曹命采)를 승지로, 이응협(李應協)·남덕로(南德老)를 지평으로, 나순(羅旬)을 정언으로 삼았다.
유신(儒臣)을 불러서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9월 20일 신미
밤에 천둥하였다.
9월 21일 임신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와 같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입동(立冬)의 절후가 이미 지나갔는데, 갑자기 천둥하는 재이가 있었습니다. 재이는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위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걱정하고 힘쓰면서 일념(一念)이 해이해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방법이 혹 요점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강대(剛大)하고 엄명(嚴明)한 것에 혹 미진함이 있고, 고식적이고 주편(周便)하게 하는 것이 혹 너무 지나쳐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도덕과 의리에 대한 이야기를 혹 오활하게 여기고 유속(流俗)의 범상한 견해를 혹 긴절(緊切)하게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방직(方直)하고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를 혹 싫어하여 박대한 일이 없지 않았고 뜻만 맞추는 아첨하는 무리들을 혹 포장(褒奬)한 일이 없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매양 사람을 얻어서 위임(委任)하려 하지만 혹 용사(用捨)에 있어 마땅함을 잃은 탄식이 있었고 항상 법을 밝히고 기강을 진기시키려 힘쓰고 계시지만 혹 작은 것은 살피면서 큰 것은 빠뜨리는 폐단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까? 아랫사람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온갖 관직에 관원이 갖추어져 사공(事功)을 성취하기 위하여 분주히 힘쓰지만 임금의 덕화를 돕는 방법에 있어 그 법을 어긴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세세한 문부(文簿)에만 정신을 쏟고 절실한 근본이 되는 것에는 깜깜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진작시키려는 노력이 적어서 기강이 무너져 내려 이완되었으므로 수습되기를 기대할 수 없어 그런 것은 아닙니까? 권세 있는 이에게 빌붙고 조급하게 나가려는 습관이 더욱 치열해지고 예의와 염치를 지키려는 풍조가 없어져 그런 것은 아닙니까? 공무가 중하다는 것을 빙자하고 가탁하여 그 사이에 은밀히 사의(私意)를 행하여 근거없는 일을 조작하고 선동하는데도 곁에서 듣기만 하고 진위(眞僞)를 분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상하(上下) 사이에 이와 같은 몇 가지의 잘못이 있다면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왕세자도 시좌(侍坐)하였는데, 《중용(中庸)》의 서문(序文)을 읽으라고 명하고 문의(文義)에 대해 하문하였다. 하교하기를,
"《중용》은 성리(性理)에 관한 책이고 원량(元良)이 처음 읽었기 때문에 지난번 외어 보게 했었는데, 공부가 독실하지 못했었다. 오늘 다시 강하여 보니 전보다는 상당히 나아졌다. 이는 바로 춘방관(春坊官)이 잘 시강(侍講)한 효험인 것이다."
하고, 각각 현궁(弦弓) 1장(張)씩을 하사하고 나서 이어 왕세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춘방관을 추고(推考)하게 되면 너에게 있어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니, 너는 더욱 힘써 이런 수치를 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박문수(朴文秀)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9월 22일 계유
태백성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9월 23일 갑술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9월 24일 을해
밤에 번개가 쳤다. 유성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유신(儒臣)을 불러서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오수채(吳遂采)를 대사성으로, 홍우한(洪羽漢)을 부교리로, 남태혁(南泰赫)을 장령으로, 이익원(李翼元)을 지평으로, 민백창(民百昌)을 검상으로, 임집(任)을 겸 문학으로, 윤급(尹汲)을 동의금으로, 이창의(李昌誼)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헌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을사년128) 사이에 외람되이 헌직(憲職)에 있으면서 그윽이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고사129) 를 본받았었는데, 이는 평일 신이 굳게 지켜온 의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론(大論)이 이미 발론되었는데도 곧이어 정지시켰으므로 여정(輿情)이 오랠수록 더욱 울분을 품게 되었으며, 국시(國是)가 결정되지 않음에 따라 이륜(彝倫)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당초 계사(啓辭)에 참여했던 사람이니, 이 의리가 펴지지 않으면 대단(臺端)에 한걸음도 무릅쓰고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27일 무인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유신을 불러서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원경순(元景淳)을 대사간으로, 남언욱(南彦彧)을 장령으로, 정언충(鄭彦忠)을 지평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좌참찬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정언 박성원(朴盛源)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이종성(李宗城)의 패려스러운 상소가 한번 나오자 죄를 성토하는 소장이 삼사(三司)에서 교대로 발론되었습니다. 비록 물러가 있던 도헌(都憲)과 연로(年老)한 간장(諫長)까지도 모두 일어나서 서로 잇달아 토죄한 것은 대개 시비(是非)를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때 견파(遣罷)시키는 형전을 내린 것에서 성의(聖意)의 소재를 상상할 수 있는데, 오직 저 당여를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하는 무리들은 단지 처분이 엄하지 않은 것만 보고서 돌보아 꺼리는 것이 없이 기회를 포착하여 느닷없이 불쑥 발론하여 마침내 멋대로 대론(大論)을 정지시킨 데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합사(合辭)로 올린 계사(啓辭)가 발론된 지 이미 오랩니다. 종전에 저들 가운데 대각(臺閣)으로 들어가 있는 자들이 또한 많았습니다만, 그때에는 일찍이 감히 갑자기 정지시키려 한 자들이 없었으니, 이는 하늘에서 품부(稟賦)한 본성(本性)이 그래도 없어지지 않아서 역적을 비호하는 죄과에 차마 스스로 빠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종성이 앞에서 창도하고 나섰을 적에 가볍게 파직만 시켰다가 되돌려 서용하고서 그 죄만큼 죄주지 않았으니, 저 기회를 엿보면서 날뛰는 무리들이 과연 무엇을 꺼려서 하지 못하는 짓이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버려둔다면 장래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이종성에게 멀리 귀양보내는 형전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근일의 정주(政注)를 가지고 논하여 본다면 이종성을 서용하라고 한 뒤에 서둘러 검용(檢用)하여 마치 공이 있는 이에게 상을 주고 노고가 있는 이에게 보답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제거(提擧)에 의망(擬望)하고 다음으로는 빈객(賓客)에 주의(注擬)하는 등 차례로 상응(相應)하여 숭장(崇奬)하는 뜻을 드러내어 보였으며, 기타 간범(干犯)한 부류들도 모두 혹여 누락될세라 수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망(政望)이 한번 나가게 되면 공의(公議)가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겼으니, 일이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후의 해당 전관(銓官)도 또한 견벌(譴罰)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겨울 통신사의 사행(使行)이 있을 때 하솔(下率)들이 부린 폐단은 전고에 없었던 것으로 징구(徵求)를 절제없이 마구 하여 매질이 낭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잔학(殘虐)을 부리고 지나간 곳은 마치 난리를 겪은 것과 같았습니다. 봉사(奉使)한 신하가 염아(恬雅)하여 스스로 조심한 것은 가상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아랫사람을 잘 검속하지 못한 잘못은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조정에서 사람을 가려 보낸 본의가 어디 있습니까? 부선(副船)이 실화(失火)한 데 이르러서는 진실로 이것이 뜻밖의 재변이었는데, 80근의 삼료(蔘料)를 다시 준비하였으며 기타의 물건도 수송(輸送)하느라고 위로는 성상에게 걱정을 끼치게 하였고 아래로는 중외(中外)의 재화(財貨)를 바닥나게 했으니, 주관(主管)한 신하에게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복명(復命)하는 날 상이 있었고 벌은 없었는가 하면 자급(資級)을 건너뛰어 직질(職秩)을 올려서 총애로운 은전이 융숭하였으니, 이러고도 형정(刑政)이 공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차지(次知)와 역관(譯官)에게는 가벼운 감죄(勘罪)도 없이 후한 은전을 내린 것은 더더욱 부당한 데 관계되는 것으로 또한 상은 신중히 하고 벌은 반드시 내린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본보기로 후세에 전하여 뒷사람을 징계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세 사신(使臣) 이하를 죄의 경중에 따라 감단(勘斷)함으로써 봉사한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대저 곤임(閫任)과 수령의 관계는 도백(道伯)의 경우와 견주어보면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 또한 한 도(道)의 원수(元帥)인 것입니다. 지난번 평안 병사 구성익(具聖益)의 상사(喪事)에 시신(屍身)이 빈소에 있는 채 반구(返柩)하지 않았을 적에 도내(道內)의 두셋의 수재(守宰)들이 안주(安州)의 객관(客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는데, 풍악을 크게 벌여 놓았었고 영기(營妓) 가운데 흰옷을 입은 자들도 또한 그 가운데 참여했었다고 하니, 듣기에 놀라운 것은 물론이고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한 가지 사단인 것입니다. 그때 모여 참석한 수령들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책벌(責罰)을 시행하게 하소서. 이춘제(李春躋)가 지난번 당한 일은 그에게 있어서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비록 그 본사(本事)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의 서제(庶弟)가 그때의 일 때문에 치도곤(治盜棍)의 형을 받다가 죽기에 이른 것은 참으로 이른바 ‘나 때문에 죽었다[由我而死]’130) 고 한 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연회에 갔다가 죽은 사람이 이미 한두 집이 아니었으니, 그들의 부형이나 자제가 된 사람들의 입장은 인정으로 참작하여 보더라도 어찌 이춘제와 함께 조신(朝紳)들 사이에서 함께 행동하려 하겠습니까?
이춘제가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진실로 문을 닫고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서 사람들과의 교접(交接)을 드물게 했어야 하는데, 이에 도리어 그 수치를 참아내고 평인(平人)처럼 스스로 조신들이 주행(周行)하는 사이에 서서 경재(卿宰)의 반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으니, 남들은 말을 않고 있지만 어찌 속으로 반성하여 볼 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염방(廉防)이 크게 무너져 다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청컨대 이춘제를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시키소서. 여름 사이에 괴원 분관(槐院分館)131) 한 뒤 외람되고 난잡했다는 이야기가 온 세상에 전파되어 물론(物論)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경조(李景祚)·오언빈(吳彦賓)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난잡하고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것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오언빈이 당초 복과(復科)되었을 적에 이미 비난하는 의논이 많았으니 이는 5점(點)에 분방(分榜)하는 제방이 크게 무너졌으며, 이경조가 어로(魚魯)를 분변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등제(登第)한 처음에 전파되었습니다만, 그의 숙부인 이태령(李泰齡)이 혹시라도 누락될세라 멋대로 가점(加點)했으므로 권점(圈點) 가운데 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청컨대 회권(會圈)을 주관한 사람들을 아울러 삭직(削職)시키소서. 이태령은 사심을 품고 가점하는 죄를 범했으니, 각별히 엄중히 조처하고 다시 분관하게 하소서. 승문원의 제거(提擧)와 주사(籌司)의 당상은 지위와 명망이 자별하고 직임이 긴중하기 때문에 진실로 글이 훌륭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경솔히 제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경재(卿宰)들이 으레 겸하게 되어 명망과 실상이 드러나지 않은 유엄(柳儼)·유복명(柳復明)도 아울러 그 선발에 참여되었으니, 이는 실로 벼슬자리를 위하여 사람을 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울러 개정(改正)하소서.
대간(臺諫)의 직책은 위로 임금과 시비를 다투고 아래로 대신(大臣)과 가부(可否)를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 직책에 대해 어렵게 여기고 신중을 기해서 경솔히 제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장통(掌通)132) 을 특교(特敎)로 영구히 파기시킨 데에서 대개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하는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는데도, 용렬하고 나약한 무리들이 그 사이에 구차스럽게 충차(充差)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선부(選部)에 신칙하여 특별히 신중하게 가리도록 하소서. 전 헌납 박수(朴璲)는 향임(鄕任)을 탄핵함에 있어 느른하고 번뇌한 것이 더없이 극심하였는데, ‘세력이 백배(百倍)나 되어 감히 손을 댈 수 없다.’는 등의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대풍(臺風)을 무너뜨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수치를 느끼게 하니, 대선(臺選)에서 삭제시키도록 명하소서.
전 군수 정광운(鄭廣運)은 그가 대지(臺地)에 있었을 적에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도신(道臣)의 장계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가 정사를 제대로 행하지 않고 형벌을 혹독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파출(罷黜)만 시키고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조적(朝籍)에서 영구히 삭제시키고 다시는 검의(檢擬)하지 말게 하소서.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근일보다 더 심한 적이 없어서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을 고치(高致)로 여기고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상책(上策)으로 삼고 있으므로 강직한 풍도와 충간(忠諫)하는 절개를 귀를 기울여도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관사(官師)133) 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도 없어져버린 상태인데, 더구나 임금이 도리를 어긴 것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른 실수의 중대함에 대해 누가 감히 얼굴을 들고 기휘(忌諱)를 촉범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直諫)하려 하겠습니까? 언로가 막혔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를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찌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개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꺼리지 않는 문을 활짝 열어 간언(諫言)이 오는 길을 넓히소서. 양역(良役)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는데, 만일 제때에 변통시키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망(危亡)은 서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대개 한 집에서 3정(丁)이 입역(立役)하는 것과 잡비까지 아울러 통틀어 말한다면 거의 15, 6냥이 넘는데,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은 또한 그 숫자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 사정법은 진실로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몇 년이 지나게 되면 또한 전과 같이 되는 폐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경외(京外)를 물론하고 위로 경상(卿相)의 집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례(一例)로 식구의 숫자를 계산하고 또 그 사이에서 남녀·장약(壯弱)을 나누어 10세에서 60세에 이르기까지 그 구전(口錢)을 받는다면, 위로는 군국(軍國)의 경용(經用)을 충족시킬 수 있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풀게 할 수 있겠습니다. 대저 지금 세상에서 이야기해야 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결포(結布)·호포(戶布)·구전(口錢)이 그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대개 결역(結役)의 번중(煩重)함이 지금 세상에 있어 하나의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비록 풍년이 든 해를 당하더라도 묵혀서 황폐하게 되어 버려 둔 곳에도 오히려 아무 이유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걱정이 있으니, 이러고도 백성들이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슬기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호포법(戶布法)은 행해도 폐단이 없기는 하지만, 또한 사소하게 고르지 못한 단서가 있기 때문에 십분 폐단이 없는 구전(口錢)만 못합니다. 신이 일찍이 이 구전에 관한 한 조항을 가지고 진신(搢紳)·사우(士友)에게 질의하여 보고 향곡(鄕曲)의 식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순문(詢問)하여 보니,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이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은 그 말이 ‘일단 구전법을 행하면서 상하의 구분이 없게 되면 명분(名分)이 이로부터 문란해질 것이다.’라는 것에 불과했으니,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대개 그 근본을 궁구하지 않고 단지 그 말단만 논한 것입니다.
하늘이 백성을 탄생시킬 적에는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었는데, 오직 수고로운 사람은 늘 수고롭고 편안한 사람은 늘 편안하게 하는 정사만이 유독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이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었는데도 구휼(救恤)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옛 성인(聖人)이 이른바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밀어붙이어 도랑으로 빠지게 한 것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구전법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명분에 있어서는 서로 문란하게 될 이치가 반드시 없을 것이니, 성명께서는 동요되어 의심하지 마시고 쾌히 건단(乾斷)을 내려 속히 행하소서. 이는 또한 이미 시행한 것이어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방민(坊民)들이 좌경(坐更)134) 하는 법은 일찍이 연품(筵稟)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가좌(家座)135) 의 차례에 따르되 관위(官位)가 있거나 범민(凡民)이거나를 막론하고 돌려가면서 고르게 입역(立役)하게 했었습니다. 지금 이 구전법은 실로 만백성의 균역(均役)인 것이니, 좌경법(坐更法)에 견주어 볼 때 그 중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시행하기 쉬운 것은 좌경법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대저 법(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통상적인 이치인 것입니다만, 법에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 또한 성왕(聖王)이 법으로 다스려 온 성대한 일인 것입니다. 삼대(三代) 때 법을 변혁시키기도 하고 손익(損益)시키기도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양법(良法)이라 하여 유독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첨정(簽丁)의 폐단은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닌데, 신은 단지 그 가운데서 양정(良丁)이 감손되는 폐단만을 거론하여 진달하겠습니다. 교원(校院)136) 을 가탁하여 면하고 각소(各所)에 예속되어 면한 자들은 그 숫자가 본래 많지 않고 또 수시로 태정(汰定)하기 때문에 절로 영원히 잊어버리는 일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부가(富家)·세족(世族)의 묘하(墓下)에 자취를 의탁하고서 이름을 고쳐 사노(私奴)가 된 자들은 향곡(鄕曲)에서 무단(武斷)하는 자들의 울 밑에서 살게 되는데, 솔호(率戶)에 모록(冒錄)된 부류들이 각양각색으로 모면하기를 도모함에 있어서는 본래 그 술책이 많습니다. 이리하여 자손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인연하여 노예가 되니, 이러한데 양액(良額)이 어찌 감손되어 모자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전법이 시행되면 이런 등의 폐단은 저절로 소멸될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속오(束伍)는 곧 국가에서 긴급할 때 쓸 군졸인데도 오로지 군포(軍布)를 거두는 정사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는 부류들만으로 편성되어 입적(入籍)된 상태이니, 만일 뜻밖의 걱정이 있게 되면 국가의 쓰임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모두 흩어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구전법을 행하고 양역(良役)을 파한 다음 모두 부실(富實)한 백성들로 속오에 충정(充定)하며 또 장비(裝備)를 돕게 하기 위해 보인(保人) 10명씩을 주되, 보전(保錢)을 한결같이 구전(口錢)의 예(例)에 따라 시행한다면 또한 한쪽만 고통을 당하는 탄식을 면하게 할 수 있음은 물론 국가의 융정(戎政)에도 반드시 실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두 조항을 가지고 정신(廷臣)들에게 널리 문의하여 상세히 강론한 다음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종성(李宗城)에 대한 일은 이미 하교했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이러는가? 처음 대각(臺閣)에 올라와서 먼저 구습(舊習)을 부리고 있으니, 내가 노쇠하기는 했지만 진실로 놀랍다. 중신(重臣)에 대해 자정(自靖)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그대가 스스로 말한 것이다. 통신사(通信使)의 사행에 과연 하배(下輩)들이 폐단을 부린 것이 있다면 계칙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세 사신(使臣)을 아울러 추고(推考)하여 무겁게 다스릴 것이고 세 수령에 관한 일은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예풍(禮風)에 관계되니 비국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사문(査問)하게 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승문원의 분관(分館)에 관한 일은 그것이 불공(不公)에 관계가 되었다면 해당 권인(圈人)은 아울러 파직시키고 이태령은 삭직(削職)시키겠다. 이경조는, 이태령이 승문원에 재직하고 있다면 회권(會圈)에 참여한 것이 어찌 외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불공(不公)했다면 그대로 시행할 수 없으니, 회권에서 발거(拔去)시키라. 오언빈은, 작은 허물은 덮어 감싸주는 것이 왕정(王政)에 있어 중대한 일인데, 더구나 본사(本事)의 단서에서 이미 벗어났으니, 성균관의 분관을 어찌 외람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논한 것이 지나친 것에 관계가 된다. 이미 처분을 내려 그 사람을 개정(改正)했으면 되었지 원권(原圈)을 개정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청하는 것은 특별히 개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외람된 짓이다. 원권을 혼란시키려는 그 의도가 무엇인가? 어찌 권점(圈點)한 사람이 없는데, 다시 개권(改圈)하는 도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이른바 혼란시킨다는 것이다. 비국과 승문원의 제조(提調)를 개정하는 일은 지나친 데 관계되는 일이다. 이 중재(重宰)는 거기에 선발된 것이 오히려 늦었다. 이춘제의 일은, 아! 지난날 그가 당한 일을 돌이켜보면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신하를 위하여 딱하게 여기고 있다. 서제(庶弟)를 위하여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의리는 이것이 어느 글에 보이는가?
나는 일찍이 왕첩(往牒)을 열람한 적이 있었지만 유하혜(柳下惠)137) 가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겠다. 이런 등의 풍습(風習)은 참으로 돈후(敦厚)히 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두서너 신하에 대해 논한 것은 나약한 것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찌 경직(勁直)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박수의 일은 과연 진달한 바와 같은데, 비록 대풍(臺風)을 실추시켰다고는 하지만 지난번 이미 특별히 체차시켰다. 지난일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성인(聖人)이 훈계하신 것이다. 정광운을 잡아다 국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잡아다 국문하면 절로 해당되는 율(律)이 있게 될 것인데, 일의 결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겸하여 영구히 간삭시키기를 청하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대선(臺選)의 일에 대해 특별히 신중을 더하라는 말은 그 청이 옳으니, 전조(銓曹)를 신칙하겠다. 양역(良役)에 대한 일은, 깊숙한 궁중에 있으면서 곤궁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밤낮으로 어찌 해이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청한 것이 의도인즉슨 옳다. 호포(戶布)·구전(口錢)·결포(結布) 이 세 조항에 대한 의논은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이는 경솔히 먼저 강구(講求)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강구한다는 이름만 있고 실효가 없다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대풍(臺風)으로 임금을 면려한 말은 절실한 것에 관계되니, 마땅히 스스로 면려하겠다."
하였다.
정언 나순(羅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대사(臺司)를 살펴보건대, 하나의 허과(虛窠)가 되어 있어 마치 지옥(地獄)처럼 여기고 함정을 피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패초(牌招)가 있어도 나아가지 않는 것을 강자(强者)가 상책(上策)으로 삼고 외방에 나가 있다고 핑계대는 것을 나약한 자들이 기이한 계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간혹 억지로 나아가 행공(行公)하기도 하지만 금방 나갔다가 곧이어 들어오고 금방 제수되었다가 갑자기 체직되기 때문에 드디어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하룻밤 묵어가는 여관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 군덕(君德)에 잘못이 있어도 누가 보좌하겠으며, 조정이 깨끗하지 못하여도 누가 맑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기강이 정제(整齊)되지 않아도 누가 정제하겠으며, 관사(官邪)를 누가 탄핵하고 불법(不法)을 누가 탄박하겠습니까? 이리하여 인정이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게 되고 법전(法典)이 다 없어져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직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졌고 사욕(私慾)을 멋대로 부리면서 조급하게 다투어 벼슬로 나가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는데, 거의 대낮에 겁박하는 일이 있어도 감히 따지지 못하는 세태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집이 있다는 것은 알면서 국가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권세는 두려워할 줄 알면서 대간(臺諫)은 두려워할 줄 모르며, 추고(推考)하는 계사(啓辭)가 혹 발론되게 되면 사람마다 노여움을 품게 되고 서로 규계(規戒) 하는 말이 한번 나오면 대대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신은 언관(言官)을 구임(久任)시키고 대각(臺閣)의 권세가 중했던 세대에도 이런 폐단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의견은 개월 수를 한정하여 놓고서 영갑(令甲)을 정하여 만들어 특별히 강정(剛正)하고 공명(公明)한 사람을 가려서 임명한 다음 큰 죄려(罪戾)나 실병(實病)의 연고가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한 안에 체직시키는 것은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규피(規避)하여 사면되기를 도모하는 자는 금고(禁錮)의 율을 시행하게 하며 귀에 거스르는 말로 직간(直諫)하는 자는 너그러이 용납하는 뜻을 내어 직기(直氣)를 배양시키고 오래도록 체직시키지 말게 한다면, 이 또한 폐추(廢墜)된 것을 수거(修擧)하고 천견(天譴)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오로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전하께서 탐장(貪贓)을 징계한 명령이 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신 현령(一新縣令) 이식(李埴)은 본디 간사하고 교활하여 윗사람을 잘 섬기는 것으로 일세(一世)에 이름이 나 있는 사람이어서 탐학스럽고 불법을 저지른 정상은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습니다. 수백여 명의 양정(良丁)들을 수괄(授括)하여 모두 산행 보인(山行保人)에 예속시켰는데, 이른바 산보(山保)라는 것은 조정의 군총(軍總)이 아니고 이에 본관(本官)에서 스스로 사용하는 포(布)인데, 각박하고 혹독하게 징수하여 받아들이는가 하면 인족까지 침독(侵督)하고 있습니다. 본고을에는 본디 수백의 은결(隱結)이 있어 그것을 가지고 기유년138) 이후 지금까지의 묵은 역가(役價)를 대납(代納)했는데, 이것이 모두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가 버리고 한 줌의 곡식도 민간에게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적곡(糶穀) 수천 석(石)을 멋대로 발매(發賣)하여 1석에 돈 3냥씩을 만들었는데, 1냥 8전(錢)씩을 민간에게 흩어주고서 가을이 된 뒤에 1석씩을 책봉(責捧)하여 도로 본수(本數)를 충당시키고 그 나머지 2천 2백여 냥은 모두 사용(私用)으로 돌렸으니, 신의 생각에는 일신 현감 이 식을 파직시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풍덕 부사(豊德府使), 이달(李鐽)은 본성이 흉악하고 사나워 오로지 탐학만을 일삼고 있으며 행실이 비루하고 패려스러워 풍화(風化)에 죄를 졌습니다. 지난번의 대소(臺疏)는 한때 탄핵하는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갑자기 기부(畿府), 자목(字牧)의 직임을 제수했으니, 신은 풍덕 부사이 달을 태거(汰去)시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병조 정랑 이성운(李聖運)은 그의 아비가 목호룡(睦虎龍)을 위하여 교서(敎書)를 서사(書寫)하면서 남에게 차필(借筆)하고서도 공로는 자신에게 돌렸으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또 현관(賢關)139) 에 자취를 의탁하고 있으면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친아우와 함께 흉론(凶論)을 창도하여 사대신(四大臣)의 이름을 묵삭(墨削)시켰기 때문에 통적(通籍)한 지 10년이나 되었어도 그의 혈당(血黨)들이 전지(銓地)에 있었지만 공의(公議)가 두려워 감히 낭서(郞署)에 주의(注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기성(騎省)140) 의 정랑에 수의(首擬)하였습니다만, 그 제목(題目)이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고 의혹스러워하고 있으니, 신은 병조 정랑 이성운을 태거시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전적(典籍) 이우화(李宇和)는 그 아비의 좌죄(坐罪)가 지극히 중합니다. 지난번 한권(翰圈)141) 이 있었을 적에 참여되어 1점(點)을 얻었는데, 성상께서 특명으로 주권(主圈)한 자를 죄주라고 명하셨었으니, 제방을 엄히 한 것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따라서 전관(銓官)이 된 자가 어떻게 감히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멋대로 수의(首擬)하였으므로 물의(物議)가 시끄럽게 일어나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전적 이우화를 태거시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전관이 서둘러 검의(檢擬)하면서 혹시라도 뒤질세라 염려했는데, 세도(世道)에 대한 걱정에 있어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으니, 신은 해당 전관에게 특별히 견벌(譴罰)을 시행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전관은 곧 서명빈(徐命彬)이다. 상소를 봉입(捧入)하였으나, 답하지 않았고, 이윽고 삭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식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옥당(玉堂) 윤광소(尹光紹)가, 정형복(鄭亨復)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몸가짐을 청간(淸簡)하게 하였고 치적(治績)이 탁이한 것에 대해 성대하게 주달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고 좌상(左相)이 정형복을 청간하다고 일컬었었는데, 지난번 윤광소의 말을 듣건대, 호남에서의 치적이 탁이했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므로, 응교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정형복은 가정에서의 생활은 염정(恬靜)했고 직임에 나가서는 사심(私心)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과 고구(故舊)가 감히 간청(干請)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의 처사를 한결같이 규모에 알맞게 하였기 때문에 감사로 나아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형위(刑威)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어도 이민(吏民)들이 존경하고 꺼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청엄(淸嚴)하고 입심(立心)에 사사로움이 없었던 효험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응교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시법(諡法)을 만든 것은 덕(德)을 숭상하고 공에 보답하고 명의(名義)를 장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 부제학 윤문거(尹文擧)·김경여(金慶餘)는 모두 경학(經學)을 연구한 선비로서 효묘(孝廟)의 지우(知遇)를 받아 경악(經幄)에 출입하며 장차 대의(大義)를 천하에 펴게 되었었는데, 일이 크게 어긋나게 되자 물러나 구원(丘園)으로 돌아가 일생토록 나오지 않았으니, 천길 절벽처럼 우뚝한 지조가 있습니다. 윤문거는 반역(叛逆)을 발고하고도 상자(賞資)를 극력 사양하였으니, 더더욱 가상합니다. 효묘 때의 경악신(經幄臣)들에게는 거의 모두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유독 이 두 신하에게만 아직 절혜(節惠)142) 의 은전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의(公議)가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신(大臣)들에게 하문하여 특별히 시호를 내리도록 명하는 것이 또한 명절(名節)을 부식(扶植)시키는 일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니, 대신이 등대(登對)할 때 하문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윤문거는 윤광소의 종고조(從高祖)이다. 그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그 두 신하는 2품의 실직(實職)을 지내지 않았으므로 모두 격외(格外)에 관계됩니다. 하나의 유신(儒臣) 때문에 잇달아 격외의 시호를 청한 것이 3인에 이른 것은 사체에 있어 미안한 일입니다. 청컨대 김선행(金善行)·황경원은 아울러 중추(重推)하소서."
하였다. 황경원이 또 말하기를,
"국조(國朝)의 법제에 봉상 정(奉常正)의 직책이 시호를 의논하는 것을 맡고 있습니다만, 혹 공평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응교(應敎) 이상으로 하여금 반박하는 의견을 말하게 한 것입니다. 근자에는 응교가 시호를 의논하는 것을 맡고 있는데, 봉상 정이 가부(可否)를 말하는 바가 없으니, 이는 국제(國制)의 본연의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봉상 정으로 하여금 협의(協議)하여 시호를 정하게 함으로써 옛 규례를 회복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뒤로 시호를 의논할 때에는 옥당(玉堂)을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을 봉상 정으로 차출하여 함께 시호를 의논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29일 경진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5, 6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30일 신사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강필신(姜必愼)을 정언으로, 윤광소(尹光紹)를 부응교로, 홍낙성(洪樂性)을 교리로, 홍우한(洪羽漢)을 부교리로, 김선행(金善行)을 겸 사서로, 오수채(吳遂采)·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대향(大享)을 섭행(攝行)하게 하도록 청한 것이 지금까지 몇 차례였습니까? 그런데도 끝내 윤허를 받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섭(靜攝)하는 때를 당하여 이런 한랭(寒冷)한 기운을 무릅쓰게 되면 신민(臣民)들이 초조하고 안타까워하여 온 나라가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되니, 다시 한번 생각하소서."
하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중지할 것을 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조 정랑 이성운(李聖運)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순(羅㶷)의 추악한 무함에 대해서 말하자니 마음이 아픕니다.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교서(敎書)는 신의 서종숙(庶從叔)인 이억수(李檍秀)가 실제로 그 글을 베꼈습니다. 이억수는 신분이 이미 비천합니다만, 약간의 필재(筆才)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 과연 이 일에 차역(差役)했었습니다. 소문이 전해짐에 있어서는 와전되기 쉬운 법인데 원수진 집으로 유감을 품고 있던 대신(臺臣) 이중관(李重觀)이 신의 백부(伯父)인 전 군수 신 이형수(李衡秀)를 논핵(論劾)하기를, ‘중제(仲弟)인 이덕수(李德秀)에게 교문(敎文)을 베끼게 했다.’고 했는데, 이 덕수는 곧 신의 중부(仲父)입니다. 그때의 간신(諫臣) 윤회(尹會)가 상소하여 사실과 어긋났다고 공척했었는데, 이중관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였고 끝내 낙과(落科)되었습니다. 본래의 사상(事狀)은 이와 같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순의 상소에서 곧바로 ‘신의 아비가 베꼈다.’고 억지 말을 하고, 또 ‘남에게 차필(借筆)하고서 공은 자신에게 돌렸다.’고 했습니다만, 이른바 글을 베낀 것을 가지고 애당초 무슨 공을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설사 그의 말대로 참으로 기록할 만한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글씨는 이미 이억수가 썼으니, 신의 집과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에 차필·귀공(歸功) 등의 문자를 가지고 은연중 반사시키는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료로 삼는다는 말입니까? 당초 이 중관이 신의 중부를 거론하여 말한 것이 이미 헛된 날조로 귀결되었는데도, 나순이 또 이를 인연해 변환(變幻)시켜 신의 아비를 거론한 것은 기필코 신의 몸을 긴박하게 다그쳐 오욕을 가하려는 것이니, 아! 그 용의(用意)가 또한 공교하고도 참담합니다. 거기다가 또 따라서 말을 만들기를, 신의 사로(仕路)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지당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무오년143) 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오랫동안 벼슬하였으며 계해년144) 에 승륙(陞六)되어 외방 고을에 대죄(待罪)하고 있었습니다. 그뒤 기성(騎省)·외대(外臺)145) ·분사(分司)146) 의 망(望)에 또한 누차 의망(擬望)되었었고 간간이 천점(天點)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비록 근식(根植)이 외롭고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여 환도(宦途)의 진취(進取)가 다른 사람과 같지 못했습니다만, 실로 죄루(罪累) 때문에 저지당한 것이 나순의 이야기와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른바 ‘혈당(血黨)들도 두려워하여 낭서(郞署)에 의망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더욱이 없는 사실을 날조한 한 단서가 아니겠습니까? 묵삭(墨削)시켰다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많은 변론을 할 것도 없습니다. 대저 반궁(泮宮)에서 묵삭시키는 법규는 오직 재임(齎任)이 사람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서 혼자 묵삭을 시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범유(凡儒)들은 감히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이 재임을 역임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아는 일이니, 그 누구를 묵삭시킬 수 있겠습니까?
태학 일기(太學日記)를 한번 조사하여 보면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이 감히 말을 낭비하면서 떠들 것이 없는 일입니다. 신이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은 김일경(金一鏡)·목호룡이 어떠한 악역(惡逆)인데 사람을 무함하려 하는 자들이 반드시 이러한 실상이 없는 것으로 가리우고는 애매 모호하게 말을 하고 있으니, 이런 등의 기량(伎倆)은 해처럼 밝으신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통촉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송원(訟冤)하는 소장을 열람하여 보았다. 사람들이 공교하게 참소하여 무함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세도(世道)가 한심스럽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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