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大臣), 비국 당상과 경기 감사를 인견하였다. 경기 감사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난번 승지 홍계희(洪啓禧)의 주달로 인하여 순회묘(順懷墓)에 비석을 세우라는 유지가 있었으니, 신의 영(營)에서 진실로 봉행하여 지휘(指揮)하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만, 각릉(各陵)에도 미처 하지 못한 것을 먼저 순회묘부터 시작하는 것은 사체를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니라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버려 두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충청 감사 이일제(李日躋)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군작미(軍作米)에 대한 살로 만들 것을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유지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병조의 기병(騎兵), 보병(步兵)에 대한 포목(布木)과 호조, 진휼청, 금영, 어영, 평안 감영, 황해 감영과 병영(兵營)의 포목을 삼남(三南)에 분배(分排)시키고, 경기의 작미(作米) 3만여 석(石)은 구획(區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했는데,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으며,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더욱 곤란한 의논이라 고집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인종 황제(仁宗皇帝)는 양사기(楊士奇)147) 에게 ‘유사신(有司臣)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했었다. 이 또한 백성을 위하는 것인데, 어찌 조그만 비용을 아낄 수 있겠는가? 특별히 허락한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구제(舊制)에 한전(旱田)에는 급재(給災)148) 하지 않았으나 면전(綿田)에는 급재 한 적이 있었는데 은혜는 적고 비용만 많이 들었으니, 마땅히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관동(關東)의 면전에 흉황이 들어 재결(災結)을 청했기 때문에 이 말이 있게 된 것인데, 임금이 박문수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남태혁(南泰赫)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3일 갑신
민백창(閔百昌)을 사간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헌납으로, 권항(權抗)을 지평으로, 조운규(趙雲逵)를 교리로, 황재(黃梓)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고(故) 찬성 오겸(吳謙)에게 정간(貞簡)을, 증 이조 판서 최몽량(崔夢亮)에게 충의(忠毅)를, 증 병조 판서 김완(金完)에게 양무(襄武)를, 좌참찬 김광욱(金光煜)에게 문정(文貞)을, 형조 판서 윤헌주(尹憲柱)에게 익헌(翼獻)을, 증 영의정 홍만조(洪萬朝)에게 정익(貞翼)을, 증 찬성 황선(黃璿)에게 충렬(忠烈)을, 병조 판서 박사익(朴師益)에게 장효(章孝)를, 형조 판서 조정만(趙正萬)에게 효정(孝貞)을,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에게 충간(忠簡)을,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에게 문민(文敏)을, 우찬성 박필주(朴弼周)에게 문경(文敬)을 증시(贈諡)하였다.
10월 4일 을유
밤에 번갯불이 쳤다.
10월 5일 병술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은 소두(小豆)와 같았다.
10월 6일 정해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태묘(太廟)로 나아가려 하였다. 이때 날씨가 춥고 큰 바람이 불었으므로 뭇 신하들이 극력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인화문(仁化門)을 거쳐 태묘로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을 사모하는 정성은 조금 폈으나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군병(軍兵)을 위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죽을 쑤어서 잘 먹이도록 하라는 뜻으로 각 군문(軍門)에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재실(齋室)에 들어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의주(儀註)대로 봉심(奉審)하였다. 영녕전(永寧殿)을 봉심한 뒤 성생위(省牲位)에 나아갔는데 생우(牲牛)가 수척하고 작다는 것으로 전생 제조(典牲提調)를 체직시키고 낭청(廊廳)은 일이 끝난 뒤에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재실로 들어간 다음 나처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였다.
이날 밤 4경(四更)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의주(儀註)대로 친제(親祭)하고 행례(行禮)하였다. 곧이어 재실(齋室)로 들어왔다.
10월 7일 무자
감회시(感懷詩)를 지었다. 태묘(太廟)에서 환궁(還宮)하였다.
10월 9일 경인
유성(流星)이 장성(張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좌의정 조현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계하(啓下)한 거조(擧條)를 보았는데,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로(諸路)의 목화(木花)에 대한 재손(災損)을 일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호조의 금년 연분(年分)의 비총(比摠)149) 이 모두 86만 결(結)입니다만, 그 가운데 한전(旱田)이 반이나 되는데 이는 팔로(八路)를 통틀어 수확한 곳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장차 40만 결에서 나는 수확으로 80만 결의 부역(賦役)에 응하여야 하니, 그 사이에 백징(白徵)하는 억울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목화전(木花田)에 이르러서는 양경(兩耕)하지 않는 경우에는 전부터 급재(給災)하여 온 전례가 있으니, 백성들이 어진 임금에게 다행스럽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반드시 어린아이가 젖을 구하는 것보다 더 극심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박문수의 말은 목화전이 재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 것이 아니고 급재가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사소하여 혜택이 되기에 부족하므로 차라리 급재하지 않음으로써 국계(國計)에 감손이 없게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것이 사소하여 혜택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넉넉히 지급하여 실제로 혜택이 되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도리어 아울러 사소한 그것까지 깎아버리려 하는 것은 무슨 마음입니까? 금년의 실결(實結)은 이미 상풍년(上豊年)에 맞먹고 있으니, 그 가운데서 6천의 재결을 깎아낸다고 해도 감손되는 것은 박문수가 이른바 구우 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 것입니다. 삼가 선처가 있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마땅히 영상에게 하교하겠다고 하유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0일 신묘
경기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유생(儒生) 정상후(鄭相垕)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1일 임진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민응수(閔應洙)를 내국 도제조로, 윤동도(尹東度)를 수찬으로, 조돈(趙暾)을 겸 교서 교리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으로, 안극효(安克孝)를 지평으로, 정실(鄭實)을 필선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겸 사서로, 이응협(李應協)을 부교리로, 조명채(曹命采)를 승지로, 임집(任)을 장령으로, 신명상(申命相)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일전에 제도(諸道)의 면전(綿田)을 급재(給災)하는 일 때문에 수상(首相)에게 문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의 의견에는 면재(綿災)를 준다면 실결(實結) 이 크게 모자랄 것이니, 특별히 신칙하여 과람(過濫)한 짓이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양산군(梁山郡)의 봉산(封山)을 파기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도신(道臣)이 폐단이 있다고 장문(狀聞)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의 일군색 낭청(一軍色郞廳)을 이군색(二軍色)의 예(例)에 의거 자벽(自辟)150) 하여 구임(久任)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의 말을 따른 것이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함흥(咸興)에 사는 어떤 여인이 한 번에 남아(男兒) 세 쌍둥이를 낳았다.
유신(儒臣)을 불러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10월 12일 계사
부수찬 이세사(李世師)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탕평이란 것이 명칭은 아름다우나 그 효험을 상고해 보건대, 도리어 한쪽이 나오면 한쪽이 물러갈 때만도 못하게 되어 염우(廉遇)가 이미 무너졌고 명절(名節)이 땅을 쓴듯이 없어졌습니다. 신이 듣건대 고 상신(相臣) 송인명(宋寅明)이 임종(臨終)하기 전 연주(筵奏)하기를, ‘무신년151) 이후 붕당(朋黨)의 화(禍)를 깊이 경계하여 제일 먼저 탕평책을 창도한 것은 국가를 위하여 붕당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만, 행한 지 10여 년이 지났으나 붕당은 제거하지 못한 채 사색(四色) 이외에 다른 당(黨)이 또 나오게 되어 당초의 붕당을 제거하려는 의도와 상반됨은 물론 한갓 연소배(年小輩)들의 이익을 노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에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나뉘었을 적에는 4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살육(殺戮)하는 일이 나왔는데, 이 당이 또 경알(傾軋)하게 되면 그 화가 더 크고도 빨리 올 것이어서 전일의 노론·소론에 견줄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했는데, 상신(相臣)은 탕평책을 주장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몸을 옮겨 도리어 탕평을 타파시키려 하였으니, 어찌 소견이 없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에 줄지어 늘어선 신하들 가운데 어찌 염퇴(恬退)하고 청직(淸直)한 선비가 없겠으며 엄체(淹滯)되고 폐기된 사람들 가운데 어찌 뛰어난 인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전하께서 탕평에 국한되어 잘 거용(擧用)하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신은 영남(嶺南) 사람입니다. 영남의 인사(人士)들은 예로부터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등과(登科)한 사람이 핍절되지 않았으나, 홍패(紅牌)·각패(角牌)를 메워 채우는 것이 단지 조곡(糶穀)을 청하는 소장만을 충당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어떻게 화기(和氣)가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소장을 열람하고 나서 미워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은밀한 가운데 일진 일퇴(一進一退)시키려는 자가 있어 잘못 녹용(錄用)되었기 때문에 서로 말하여 사주한 것일 것이다."
하고, 이에 이세사를 불러들여 준절히 나무라기를,
"내가 그대를 체직시켜 축출하지 않겠으니, 그대는 도산 서원(陶山書院)으로 잘 돌아가서 글을 읽으라."
하니, 이세사가 부끄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음날 즉시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사(進士) 윤득관(尹得觀) 등이 상소하여 그들의 스승 박필주(朴弼周)에게 내린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물의(物議)에 윤합(允合)하지 않으니 경(敬) 자를 정(正) 자로 고쳐달라고 청하였다. 임금이 또 불러서 책망하기를,
"주야로 경계(儆戒)한다는 뜻의 경(敬) 자여서 지극히 아름다운 시호인데, 그대가 고치려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대가 그대의 스승에 대해 덕(德)으로써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조정의 시전(諡典)은 그대들이 감히 간여하여 의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러가라."
하였는데, 윤득관이 그래도 다시 누누이 말하여 마지않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감히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그대의 스승에게 제고(祭告)하여 정거(停擧)시키겠다. 그대는 명륜당(明倫堂)의 처치(處置)를 기다리라."
하니, 윤득관이 이에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정원에 신칙하여 이런 등의 상소는 봉입(捧入)하지 말게 하였다.
10월 13일 갑오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춘추관의 권점(圈點)에서 한림(翰林)에 해당된 사람 8인을 뽑아서 아뢰었다. 3점을 받은 사람은 황인검(黃仁儉)·윤득양(尹得養)이고, 2점을 받은 사람은 황성(黃)·이제현(李齊顯)·이의엄(李宜馣)·이상윤(李尙允)·조종렴(趙宗濂)·이의철(李宜哲)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뽑은 것이 너무 정밀하여 모두가 서울 사람들이다."
하고, 본감(本監)의 영사(領事) 이하에게 개권(改圈)하게 하였다.
10월 14일 을미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호조에는 일정한 준례가 없어 판서가 사리를 환히 알지 못할 경우에는 비용(費用)이 절제가 없게 되니, 원컨대 품지(稟旨)하여 재작(裁酌)해서 정제(定制)를 만든 다음 이에 의거하여 행하게 한다면 중간에서 소실(消失)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경계를 전하는 글을 지어 세자(世子)를 훈계하였는데, 모두 세 조항으로 계색(戒色)과 추성(推誠)과 애인(愛人)이었다.
10월 15일 병신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0월 16일 정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정원과 옥당에서 진계(陳戒)하였는데, 모두 고사를 본받았을 뿐이었다.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7일 무술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재이(災異) 때문에 연방(延訪)한 것이었다. 자신을 책하는 하교를 내리고 3일 동안 감선(減膳)하게 하였으며, 비국과 각사(各司)의 문부(文簿) 가운데 아직 회계(回啓)하지 않은 것은 즉시 회계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남태혁(南泰赫)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조운규(趙雲逵)가, 장령 남태혁이 전계를 거듭 아뢴 뒤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또 말하기를,
"재변을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때에 묘당(廟堂)의 모유(謨猷)에 하나도 실사(實事)가 없으니, 한심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한심이라는 두 글자는 보통으로 규책(規責)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으로 즉시 인혐하여 사직(辭職)하고 물러가서 또, 차자를 올려 스스로를 다스리니, 임금이 위로하여 이해시켰다.
궁녀(宮女) 혜영(惠永)을 단천부(端川府)에 정배(定配)시켰다. 임금이 불량(不良)하다고 하면서 특교(特敎)를 내려 출배(出配)시켰는데, 밖의 사람들은 끝내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몰랐다.
10월 18일 기해
장령 임집(任)이 상소하기를,
"대궐 문에 투서(投書)한 변이 발생한 지 이미 반년이 지났는데도 죄인을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전후 포도 대장을 아울러 견파(譴罷)시키시고 종사관 이하는 무겁게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제주(濟州)의 오성(吳姓)을 가진 삼부자(三父子)가 나란히 함께 운명한 것에 대해서는 그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령이 외람되이 혹독한 형장을 가하여 죄없이 장폐(杖斃)되었다면 법에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로 민심(民心)이 선하지 않아서 관장(官長)을 무함한 것이라면 또한 해당되는 율(律)이 있을 것입니다. 해당 목사(牧使)를 잡아다 국문하여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북병사(北兵使) 오덕중(吳德中)은 조정에 품하지도 않고 곧바로 조련(操鍊)을 행하였으며, 충청 수사 오명수(吳命修)는 본곤(本閫)으로 부임하여 갈 적에 도중에 나처(拿處)하게 한 명을 듣고서도 이에 각 고을을 지휘하여 군병들을 모아놓고서 뻔뻔스레 수군 대장(水軍大將)으로 자처하여 누선(樓船)에 웅거하고 앉아 융정(戎政)을 주관하였으니, 아울러 편배(編配)시키는 법전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제주 목사는 한억증(韓億增)이다.
부수찬 신위(申暐)가 상소하여 다시 홍상한(洪象漢)에 대해 논하기를,
"돌아보건대, 저 사람이 평생토록 수치(羞恥)와 염칙(廉飭)을 모른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질책할 겨를이 없습니다. 참으로 전지(銓地)에서 뇌물을 초치하게 한 것은 맑은 조정에 오욕을 끼친 것에 크게 관계되기 때문에 관료(館僚)들이 상소하여 논한 것으로 조금 여정(輿情)을 통쾌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견체(譴遞)시킨 것은 실로 공론(公論)을 숭상하고 세도(世道)를 면려하는 정사에 어긋나는 조처였으므로, 간략히 광구(匡救)하는 정성을 다하다가 인하여 떠들썩하게 전하는 일에까지 언급하게 되었으니, 이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곧 진신 대부(搢紳大夫)들의 말인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결국 실정을 숨긴 공초(供招)에 대해 끝까지 추구(推究)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한 초사(招辭)를 곧바로 단안(斷案)으로 귀착시켰기 때문에 그 나간 자리는 거의 피로 피를 씻은 것과 다름이 없이 깨끗이 씻겨진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홍상한은 멋대로 날뛰면서 장황한 내용의 대장(對章)을 올려 완전히 혐의를 벗은 듯이 자처하는가 하면 상대를 간사하게 참소하고 흉칙하게 무함했다고 꾸짖으면서 도리어 제멋대로 마구 욕하며 떠들고 있으니, 그의 교만 방자함과 무엄함이 한결같이 이토록 극도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는 것으로 엄한 비답을 내려 꾸짖었다.
유신(儒臣)을 불러서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게 하였다.
지평 정언충(鄭彦忠)이 상소하여 온 세상이 붕당(朋黨)에 휘말린 폐단에 대해 성대하게 진달하고 나서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근식(根植)이 외롭고 단약하며 언의(言議)가 나약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두려워하고 꺼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통렬하게 진달하고 극단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그에 대한 폐단을 알았으면 공심(公心)에 의거하여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
하였다.
진위사(陳慰使)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 등이 돌아왔으므로 불러서 중국의 사정에 관해 하문하였다.
조동점(趙東漸)·구선행(具善行)을 좌우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10월 20일 신축
달이 헌원 우각성(軒轅右角星)을 범하였다. 유성(流星)이 괴성(鬼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10월 22일 계묘
좌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려 일곱 가지 조항을 진달하기를,
"1.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데 관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수라는 매양 때를 어기는 경우가 많고, 왕왕 밤새도록 주무시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이번 대향(大享)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또 극심한 추위를 당하였는데도 효성에 핍박되어 군정(群情)을 어기고 기필코 행하시었습니다.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전하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을 이와 같이 하십니까? 또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태묘(太廟)에서 환궁(還宮)하실 때 눈물을 마구 흘리시어 좌우가 슬픔을 느끼게 하였다고 하는데, 신은 성효(聖孝)가 하늘에서 낸 것임을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위로 동조(東朝)를 받들고 아래로는 원량(元良)이 있어 만운(晩運)이 바야흐로 형통하여 즐거움은 있어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스스로 슬퍼하시어 천화(天和)를 손상시키십니까?
1. 동궁(東宮)을 교유(敎諭)하는 데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타고난 기운이 성대하여 특이하게 숙성한 탓으로 침착하고 말이 없이 조용한 가운데도 횡일(橫逸)한 기운이 발로되면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혈기가 점점 장대하여져 가는 때를 당하여 한번 차실(差失)이 있게 되면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성유(聖諭)의 첫 조항에 우려가 언급되었던 것도 같았습니다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늘상 조관(照管)하시고 자주 계칙(戒飭)하는 것을 어릴 때에 견주어 더욱 상세하고 조밀하게 하소서. 말로는 감히 다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묵묵히 이해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1. 민폐(民弊)를 바로잡아 고치는 데 관한 것입니다. 청컨대 수의(繡衣)152) 를 파견하여 황구(黃口)와 백골(白骨)의 폐단을 살피게 하여 이를 범한 경우 도신(道臣) 이하는 중률(重律)에 의거 감죄(勘罪)하소서. 시민(市民)의 폐막(弊瘼)에 대해서는 일찍이 홍상한(洪象漢)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개혁하게 했었습니다만, 이제 홍상한은 거듭 당한 일이 있으니, 다시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와 해서(該署)의 제조(提調) 서명빈(徐命彬)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변통시키게 하소서.
1. 작상(爵賞)을 신중히 해야 하는 데 관계된 일입니다. 상을 더하는 것과 특별히 발탁하는 것은 금년이 제일 많았습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더욱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여 무신(武臣)을 승진 발탁하는 조짐이 없게 하소서. 변방의 방어(防禦)를 맡고 있는 사람 가운데 기한을 채우는 사람이 없어 영송(迎送)이 분분한 탓으로 폐단이 되는 단서가 많습니다. 출신(出身)한 지 얼마 안되어 곤수(閫帥)의 직임을 맡아 나가기 때문에 생소하고 혼란스러워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음직(蔭職)의 사로(仕路) 가운데 광주(光州)·나주(羅州)·충주(忠州)·상주(尙州) 등 큰 주목(州牧)은 반드시 여러 번 군읍(郡邑)을 역임하여 성대한 성적(聲績)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제수하는 것인데, 지금은 신음(新蔭)으로서 자력(資歷)이 없는 자들도 극력 도모하여 멋대로 부당하게 점유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관리가 잘 다스리지 못하면 백성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니, 의당 양전(兩銓)을 엄히 신칙하여 전처럼 외람되게 갑자기 승진시키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한림 소시(翰林召試)153) 에서 떨어진 사람은 곧 춘방(春坊)의 설서(說書) 두 자리로 귀착되어 드디어 승륙(陞六)될 수 있는 지름길인 참하(參下)의 극선(極選)에 오르게 되는 반면 한림은 곧 용관(冗官)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겸설서(兼說書)는 본래 한림의 겸함(兼銜)이니, 이 뒤로는 한림이 아니면 외람되게 주의(注擬)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설서는 구애 없이 통의(通擬)하되 소시(召試)에서 떨어진 자는 새로 권점(圈點)을 받아 소시를 거친 뒤에 비로소 의망(擬望)하도록 허락하소서. 전랑(銓郞)을 변통시킨 뒤에 3품으로 승의(陞擬)하는 등 절한(節限)이 없어서 도리어 명관(名官)에도 조급히 나아가려는 계제(階梯)가 되고 있으니, 이 뒤로는 경악(經幄)의 신진(新進)들일지라도 신록(新錄)하기 전에는 승의를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묘천(廟薦)의 경우는 중서(中庶) 6품에 구애함이 없게 해야 합니다만, 사만(仕滿)이 된 사람은 약간의 우역(郵驛) 빈자리에 조용(調用)하여 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입사(入仕)하는 길은 많고 소통시키는 길은 좁기 때문에 각사(各司)의 관원 가운데 이런 부류가 반이나 되어 관방(官方)의 난잡스러움이 진실로 이미 극심합니다. 따라서 여러 해 동안 사진(仕進)하다가 아무 까닭 없이 작산(作散)된 자도 왕왕 있으니, 이 또한 딱한 일입니다. 각도(各道)의 감목관(監牧官)에 대해서는 자벽(自辟)하는 법규를 파기시키고 중서(中庶) 가운데 사만된 사람을 차견(差遣)하게 하소서. 만일 자벽하는 법규를 다 폐기시킬 수 없다면 한산(閑散)인 사람은 쓰지 말고 현재 사진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벽을 허락하게 하는 것이 양쪽 다 온편하게 될 것 같습니다.
1. 대풍(臺風)을 진기 면려시키는 데 관한 일입니다. 언관(言官) 가운데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유죄(有罪)이거나 무죄(無罪)이거나를 물론하고 일체 아울러 소석(疏釋)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누차 대각(臺閣)에 들어갔었어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은 변방 고을로 출보(出補)시킴으로써 권면하고 징계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1. 인재(人才)를 등진(登進)시키는 데 관한 일입니다. 지난 겨울 신이 별천(別薦)하는 일 때문에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그뒤 또 천목(薦目)을 품정(稟定)하여 알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만, 지금까지 천진(薦進)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또한 국가의 기강을 살펴보기에 충분합니다. 원컨대, 여러 신하들을 신칙하여, 정밀하게 아뢰고 공정하게 거론해서 그 가운데에 훌륭한 사람을 선발하여 기용하게 하소서. 지난번 수상(首相)이 장재(將才)를 미리 배양해야 한다는 일로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지금까지 3, 4년이 되도록 끝내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원컨대, 각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을 엄중히 신칙하여 무신(武臣)의 참상(參上)·참하(參下) 가운데 신수(身手)가 좋고 기력이 있는 사람을 공정하게 선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서사(書史)와 기사(騎射)를 익히게 하고 도략(韜略)과 모유(謨猷)를 가르쳐 주어 날마다 조사하고 달마다 고과(考課)해서 재능의 여부를 분별한 다음 출척(黜陟)시키는 것을 황조(皇朝)의 왕수인(王守仁)154) 이 말한 것처럼 한다면 반드시 성취되는 효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1. 기미와 조짐을 미리 방지하는 데 관한 일입니다. 정미년155) 이후 탕평(蕩平)을 공척(攻斥)하는 사람들의 논의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만, 곧바로 도리어 일진일퇴(一進一退)할 때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를 방자하게 진달한 것은 실로 이세사(李世師)가 창도한 것입니다. 교령(敎令)을 봉승(奉承)하는 관원이 잘 대양(對揚)하지 못하여 주조(注措)하는 즈음에 병폐가 없지 않았습니다만, 국사를 위하여 힘쓰는 의리에 있어 의당 일에 따라 규계(規戒)하고 면려하여 치우침을 바로잡고 잘못된 것을 보좌함으로써 함께 대도(大道)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필코 탕평을 타파시켜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정국(政局)을 만들어 진신(搢紳)들이 피를 흘리고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 신축년156) ·임인년157) ·무신년158) 의 전철을 답습하게 한 뒤에야 마음에 통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반드시 일종(一種)의 음사(陰邪)스런 부류가 있어 먼 고장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자를 속여 고 상신(相臣)의 말을 잘못 인용하여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봄으로써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칠 계책을 세우고 있는 것이니,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 천진(天津)의 두견새159) 와 척촉(躑躅)하는 돼지160) 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성지(聖志)를 굳게 지니시어 더욱 성총(聖聰)을 넓히심으로써 귀역(鬼蜮) 같은 무리들로 하여금 계교를 부릴 수 없게 하고, 전신(銓臣)을 엄히 신칙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을 크게 열어서 이런 무리들로 하여금 구실 삼을 것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깊이 받아들여서 채용(採用)한 것이 많았다.
10월 23일 갑진
임금이 세자(世子)를 불러서 《중용(中庸)》의 ‘문왕(文王)은 걱정이 없다.’ 장(章)을 강하게 하였는데, 춘방(春坊), 계방(桂坊)의 여러 신하들이 문의(文義)를 논하여 진달하였다. 이어 전수(傳授)하여 준 세 조항의 훈사(訓辭)를 가지고 면려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하문하기를,
"네가 사서(史書)를 살펴보건대 한(漢)·당(唐)·송(宋) 세 왕조(王朝) 가운데 어느 나라가 가장 나은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한나라가 제일 위이고 송나라가 그 다음이며 당나라가 가장 하위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무엇 때문에 가장 하위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제가(齊家)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좋다고 칭찬하고 매우 기뻐하였다.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조운규(趙雲逵)를 헌납 겸문학으로, 이유수(李惟秀)를 정언으로, 송능상(宋能相)·이창유(李昌儒)를 장령으로, 임집(任)을 교리로, 신회(申晦)를 수찬으로, 김선행(金善行)을 부수찬 겸 사서로, 정익하(鄭益河)를 대사성으로, 이의중(李毅中)을 사서로, 황인검(黃仁儉)을 설서로 삼았다.
개성 유수 조재호(趙載浩)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부(府)에는 양역(良役)이 고르지 않고 군오(軍伍)가 소루한데 서로(西路)의 요충지(要衝地)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아병(牙兵)의 단속은 곧 조석(朝夕)의 변에 대비하기 위한 군졸인데, 편오(編伍)가 부실하여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향교(鄕校)에 유안(儒案)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유안에 참여된 사람을 안내생(案內生)이라고 하고 유안에 참여되지 않은 사람을 안외생(案外生)이라고 하여 본래 간격(間隔)을 두고 있었습니다. 신이 안외생의 경우 10세(世) 동안 음로(蔭勞)가 없는 자와 또 시강(試講)하여 낙강(落講)된 사람은 충정(充丁)시켰으며, 안내생의 경우에는 낙강된 사람을 유안에서 출척시켰습니다. 유안에 참여된 3천여 인 가운데 출척시킨 자가 1천 6백여 인이었으며, 유안에 참여되지 않은 3천여 인 가운데 충정시킨 자가 1천 4백여 인이었습니다. 신의 묘노(墓奴)가 와서 산변(山變)이 있었다고 고하였는데, 이는 바로 낙강되어 유안에서 출척된 자들의 소행입니다. 신의 부(府)에서 참핵(參覈)하여 엄중히 다스렸습니다만, 신의 성품이 본디 날카롭게 하지 못하고 명(命)이 또 기궁(奇窮)한 탓으로 내직(內職)에 있으면서는 침묵만 지키고 있음으로써 나라를 저버려 이미 불충(不忠)의 죄과를 범하였으며 외직에 나가서는 망령되이 변사(變事)를 야기시켜 또, 불효(不孝)의 죄를 가중시켰습니다. 불충과 불효를 범하고서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니 인심이 망측하기 짝이 없다. 이미 원범(元犯)을 다스렸으니, 민속(民俗)을 바루고 풍교(風敎)를 엄중히 하는 방도에 있어 어떻게 체직을 허락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7일 무신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0월 28일 기유
동지사 영돈녕(領敦寧) 정석오(鄭錫五) 등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부사 정형복(鄭亨復)에게 말하기를,
"좌상(左相)에게 듣건대 경이 방백(方伯)으로 있을 적에 청렴 결백한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고 하였고, 지난번 황경원(黃景源)도 또한 경에 대해서 말을 하였는데 잘 모르겠다. 어떻게 다스렸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법을 지켰을 뿐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말은 간략하지만 뜻은 다 들어 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부르자, 모두 빈청(賓廳)으로 나아갔는데 미처 면대하기도 전에 대신이 병이 나서 나갔으므로 일을 품할 당상(堂上)만 불러서 접견하였다.
간원 【정언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12월 (0) | 2025.09.30 |
|---|---|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11월 (1) | 2025.09.30 |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9월 (1) | 2025.09.30 |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8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윤7월 (0) | 2025.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