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1748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3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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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갑인

우부승지 윤광의(尹光毅)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감히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뜻을 부연하여 근폭(芹曝)의 정성161)  을 우러러 본받고자 합니다. 복괘는 바로 11월의 괘(卦)인데, 이것이 한 번 변전하여 임괘(臨卦)가 되고 두 번 변전하여 태괘(泰卦)가 된 것으로, 삼양(三陽)이 교태(交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천지의 성대한 운수인 것입니다만, 그 요점은 미약한 양(陽)을 배양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양이 미약할 때 이를 잘 배양하지 못하면 여러 음(陰)에게 가리워지게 되니, 어떻게 교태될 수 있겠습니까? 보상(輔相)을 재량하여 성취하는 공효(功效)는 단지 임금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매양 연석(筵席)에서 춘추(春秋)가 높아 지기(志氣)가 소저(消沮)되고 있다는 것으로 하교하십니다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복괘를 돈독히 하는 것을 스스로 면려하시고 복괘를 자주 어기는 것을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유의하여 면려하겠다."
하였다.

 

전라도 유학(幼學) 유춘항(柳春恒)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으니, 학업이나 잘 연마토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대내(大內)로 진공(進供)한 온갖 물품에 대하여 호조에서 지난 각 년(各年)에 지불한 비용의 다소(多小)를 조목별로 기록하여 입대(入對)해 아뢰었는데, 대체로 모람(冒濫)된 것이 과반이나 되었다. 임금이 이를 열람하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부기(簿記)가 명백하여 나로 하여금 알기 쉽게 만들었다."
하고, 드디어 어묵(御墨)으로 그대로 둘 것은 두고 삭제시킬 것은 삭제시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1부(部)의 《주례(周禮)》를 이루었으니, 내가 영성(靈城)162)  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영성도 나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역시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여 경외(京外)의 제사(諸司)에 신칙해서 이미 어공(御供)을 감하였으니, 감히 부비(浮費)가 없게 하라는 뜻으로 수서(手書)를 내리고, 박문수를 표창하였다. 승지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재변(災變)을 만난 끝에 성상께서 절약하고 감손시키는 정사가 참으로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실상을 얻었습니다. 박문수의 이번 일에 대하여 신의 생각으로는 그 공이 무신년163)  에 역적을 토죄한 것보다 더 낫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11월 5일 을묘

병조에 하교하여 무신(武臣)들 가운데 강(講)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초계(抄啓)하게 하고, 또 군문(軍門)에 신칙하여 초관(哨官) 이상은 대장(大將)이 직접 진법(陣法)을 시험하여 그 공능(功能)을 고핵(考覈)하게 하되 매년 상례(常例)로 행하게 하였다.

 

구제(舊制)에 도성(都城)의 사표(四標) 안에는 전지(田地)를 개간하여 농사짓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임금이 민가(民家)에서 대대로 농사지어 온 전지에 대하여 혼동시켜 금지함으로써 실업(失業)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땅한 조처가 아니라고 하여 경조(京兆)164)  에 명하여 신전(新田)만 금하고 전부터 경작해 오던 것은 금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명하여 사행(使行)이 가져오는 능단(綾緞)에 대해 전에는 무늬가 있는 것만 금했는데 이제는 무늬가 없는 것도 일체 무늬가 있는 것을 금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엄금하라고 신칙하였다. 무늬가 있는 능단을 금하면서부터 연경(燕京)에 가는 상역배(象譯輩)165)  들이 무늬가 있는 것은 사지 않고 무늬가 없는 것만을 다투어 구매하자, 상호(商胡)들이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람들은 곧 무늬가 있는 것은 싫어한다."
하고, 이에 모두 무늬를 제거하고서 팔았으므로 각색(各色)의 단물(緞物)은 전과 같게 되었다. 진위사(陳慰使) 서장관(書狀官)인 심관(沈鑧)이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는 날에 이르러 그런 사실을 갖추 아뢰었는데, 부수찬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과연 심관의 말과 같습니다. 이는 무늬만 금한 것일 뿐으로 성상께서 검소함을 밝히신 뜻이 아닙니다."
하니,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예로부터 무늬가 없는 것은 그래도 구별하여 금하지 않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유감스럽게 여겼다.

 

각도(各道)의 감목관(監牧官)에 필요한 인원을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중서(中庶) 가운데 시사자(時仕者)로 자벽(自辟)하여 조용(調用)해 보내도록 명하였다. 조현명이 일찍이 차자를 올려 감목관이 자벽하는 법규를 파기시키게 하였는데, 본시(本寺)의 제조(提調)인 정석오(鄭錫五)가 또 차자를 올리기를,
"이렇게 하면 차견하는 즈음에 반드시 사람을 잘 가리지 못하게 되고 폐단은 반드시 백성이 폐해를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재로(金在魯)에게 하문하니, 김재로가 정석오의 말을 옳게 여겼으므로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홍중일(洪重一)을 대사간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홍우한(洪羽漢)을 헌납으로, 이훈(李壎)을 정언으로, 임순(任珣)을 지평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부제학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교리로, 조운규(趙雲逵)를 부교리로, 이의중(李毅中)을 문학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예문 제학으로, 윤광의(尹光毅)·조명채(曹命采)·이태중(李台重)을 승지로 삼았다.

 

강원도의 불에 타서 죽은 사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김성응(金聖應)을 훈련 대장으로, 구성임(具聖任)을 총융사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포도 대장에서 좌죄되어 파직되었었다.

 

간원 【정언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임순(任珣)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죽산(竹山)의 경내(境內)에서 적도(賊徒)들이 말을 타고 일산을 펴서 받고서 멋대로 겁략(劫掠)하여 인명(人命)을 살상하고 있습니다. 본부(本府)는 바로 토포영(討捕營)인데, 이로 미루어 보면 평상시 위엄있게 금즙(禁戢)시키지 못한 정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어청(守禦廳)의 둔곡(屯穀) 가운데 마전군(麻田郡)에 있는 것도 또한 적도들에게 겁략 당하였으니, 이는 공곡(公穀)에 관계된 것이어서 여리(閭里)의 좀도둑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청컨대 두 고을의 지방관을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참핵사(參覈使) 권일형(權一衡)은 인품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명망과 논의가 본디 가벼워서 사행을 검칙하고 풍속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존경 받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제목(除目)이 내려오자 공의(公議)가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다. 이날 답보(答報)가 있지 않자 임순이 대청(臺廳)에 있으면서 물러가지 않고 비답을 기다렸다. 다음날 늦은 아침이 된 뒤에야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권일형의 일은 지나치다. 2건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임순이 두세 조항을 열거하여 진달했는데, 이는 적막하던 끝에 들은 간언(諫言)이다."
하고, 특별히 상현궁(上弦弓)을 하사하였다. 해당 중관(中官)이 잘 제품(提稟)하지 못한 탓으로 즉시 비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여 중관에게 월봉(越俸) 3등166)  을 명하였다.

 

11월 7일 정사

토성(土星)이 저성(氐星)의 성좌로 들어갔다.

 

유신(儒臣)을 불러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세자를 불러 《중용(中庸)》의 구경장(九經章)을 강하게 하고 춘방(春坊)·계방(桂坊)에게 토론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전에 받은 음강(音講)의 강독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으로 춘방·계방을 추고(推考)하여 신칙하였다.

 

춘추관에서 한림(翰林) 후보자를 다시 권점(圈點)하여 황인검(黃仁儉) 등 15인을 뽑았는데, 승지에게 명하여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골 사람들이 적기는 하지만 7인이나 가권(加圈)되었으니, 널리 뽑았다고 할 수 있다."
하고, 본관(本館)에서 올라오도록 신칙하여 즉시 소시(召試)를 행하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이번에는 다시 한 것이니, 응당 요행히 참여된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전라도 유생(儒生) 박중후(朴重后)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8일 무오

대신(大臣)에게 하교하여 인재를 찾아서 천거하라고 하였다.

 

윤상임(尹尙任)을 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동의금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사서로, 이광세(李匡世)를 호조 참판으로, 민백상(閔百祥)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홍경보(洪景輔)·오광운(吳光運)·이병태(李秉泰)·조태만(趙泰萬)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홍경보·오광운은 무신년167)  의 공이 있고 이병태는 청렴 강직하며 조태만은 지우(知遇)를 받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정언 강필신(姜必愼)이 상소하기를,
"부계(府啓)168)  에 대해 하룻밤을 경유한 뒤에 비답을 내린 것은 실로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후사(喉司)의 신하는 품하지 않은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품하지 않은 승지를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경기의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篇)》을 읽게 하였다.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유생(儒生) 신광조(申光朝)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9일 기미

밤에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이 청대(請對)하여 들어와서 아뢰기를,
"신의 집에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동지제(冬至祭)를 지낸 뒤 묘사(廟祠)의 감실(龕室) 속을 보니 투서(投書)의 변이 있었는데, 붉은 글씨로 써서 봉(封)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열면 만인(萬人)이 화열(和悅)하게 되고 열지 않으면 일인(一人)이 자정(自靜)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말이 매우 요사스럽고도 흉참했습니다. 신의 세 숙질(叔姪)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즉시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권혜(權嵆)라는 자는 신의 집 외손(外孫)입니다.
신이 그가 일찍 부모를 여의어 어리고 어리석은 것을 딱하게 여겨 아들처럼 대우했었는데, 동지(冬至) 다음날 왔다 간 뒤 2일이 지나 또 와서는 갑자기 묻기를 ‘여기에 옛날 훈계(訓戒)한 내용의 글이 있는가?’ 하기에 없다고 했습니다. 또 묻기를, ‘꿈을 꾼 적이 있는가?’ 하기에 없다고 했습니다. 또 묻기를, ‘천리(天理)를 거스른 일이 있는가?’ 하기에 없다고 했습니다. 권혜가 말하기를, ‘우리 집의 뜰에서 여종이 봉서(封書) 하나를 습득하였다.’ 하므로, 신이 비로소 의심스럽고 괴이하게 여겨 굳이 묻기를 마지 않으니 한참 있다가 그 내용을 고하기를, ‘하늘은 말로 훈계하고 조상은 훈계를 전하는 것이 매우 길(吉)한 것인데 사람도 거스르고 손자도 거스르면 길한 것이 변하여 흉한 것이 된다. 아! 나의 신(神)이 장차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장차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그 내용을 증(增)에게 탐색하여 삼가 하늘에 바치되 붉은 색의 목면(木綿)에다 쓰라고 했다.’고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이 또 매우 요사스럽고도 흉참스러웠습니다.
신이 묻기를, ‘네가 혼자서 보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나의 종숙(從叔)인 권집(權䌖)·권숭(權崇)이 또한 같이 보았는데, 권집의 말에 「글의 내용에 증(增) 자는 바로 여천군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하였으며, 권집이 권혜에게 ‘네가 여천군의 집으로 가서 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물어보고 일이 없었다고 하면 이 글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신은 이 일을 당하고서부터 낮에는 밥을 먹을 수가 없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근친(近親) 가운데에는 오직 경이 있을 뿐인데, 또 이런 일이 있으니, 세도(世道)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대궐 문에다 투서한 것과는 다르나, 여천의 선조가 한 것으로 말을 만들었으니 그 지의(志意)가 음험하고 흉악하다. 두 집에다 일관(一貫)된 짓을 하였으니, 한 사람이 한 짓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체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 좌우 포장(左右捕將)에게 신칙하여 야금(夜禁)을 더욱 철저히 하게 하고 입시하였던 승지와 사관에게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전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시켰다.

 

11월 11일 신유

좌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려 조덕중(趙德中)에 대해 송변(訟辯)하기를,
"지난 가을에 조덕중이 신에게 인사차 들러서 역로(歷路)에서 조련(操練)을 행한 전례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신이 전례에 의거하여 행하라고 답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위에 진달하고 관문(關文)을 발송했어야 당연했을 것인데, 병들고 혼미하여 잊고 있었습니다. 조덕중은 곧 신의 말을 묘당(廟堂)의 지휘(指揮)로 여기고 드디어 노중(路中)에서 조련을 행하였던 것이니, 조덕중을 그르치게 한 것은 신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죄에는 원정(原情)이 있는 것이고 경서(經書)에도 과오로 인한 죄는 사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덕중은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만, 실상은 본의 아니게 그러한 것이니, 견파(譴罷)시키면 족한 것입니다. 찬배(竄配)시키는 것은 또한 과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비록 들었다고 하더라도 비국(備局)에서는 분부(分付)가 없었는데, 어떻게 감히 곧바로 먼저 습조(習操)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듣지 않았다.

 

판부사 민응수(閔應洙)가 시골에 있으면서 오지 않자, 임금이 누차 하유(下誘)하여 불렀다. 약방에서 진찰하기를 요구하면 그때마다 도제거(都提擧)가 올라와 입시하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민응수가 그래도 잇따라 상소하면서 명을 받들지 않자, 약방 제조 이주진(李周鎭)이 그를 위하여 병이 있다고 아뢰면서 다시 돈면(敦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임금이 병이 있으면 약을 맛보는 것이 신하의 의리인 것이다. 대신의 일은 참으로 개연스럽다. 가령 내가 병이 심하다면 여주(驪州)에 있는 도제조가 입시할 수 있겠는가?"
하고, 아뢰는 말을 살펴서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주진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는데, 민응수가 이 소식을 듣고는 황공하여 즉시 와서 대명(待命)하고 드디어 출사(出仕)하였다.

 

11월 12일 임술

김상적(金尙迪)을 참핵사(參覈使)로 삼았다.

 

11월 13일 계해

정희보(鄭熙普)를 승지로 삼았다.

 

11월 14일 갑자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으로 나아갔다. 참핵사 김상적(金尙迪)이 구대(求對)하여 아뢰기를,
"금번 사행(使行)에 이윤방(李允芳)이 잃어버린 은자(銀子) 4백 50냥에 대한 진범인을 잡지 못하고 정충(鄭忠)에게 의심을 두고 지레 먼저 정문(呈文)했다가 도리어 갈등만 발생시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홍만운(洪萬運)·이윤방은 매우 근거 없는 짓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산골짝 같은 욕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매양 은자를 가지고 미봉했기 때문에 폐단이 끝이 없게 되었으니, 신은 이번 사행에는 감히 은(銀)을 가지고 가지 않고 단지 사리로서 비유하여 깨우치다가 불행히 차질을 빚게 되면 죽음도 또한 달갑게 받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간증인(干證人)을 체포하여 청(淸)나라로 보내어 사감(査勘)을 듣게 하라고 명하였다. 호조로 하여금 그의 옷과 양식을 지급하게 하고 그의 부형(父兄)과 처자(妻子)는 그 고을에서 돌보아 구휼하게 했는데, 조현명의 말을 따른 것이다.

 

남태량(南泰良)을 대사헌으로, 심악(沈)을 대사간으로, 이응협(李應協)을 헌납으로, 정옥(鄭玉)·이기덕(李基德)을 정언으로, 유복명(柳復明)을 도승지로, 신만(申晩)을 형조 판서로, 이종백(李宗白)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유신을 불러 《숙흥야매잠》을 강하게 하였다.

 

11월 15일 을축

김우철(金遇喆)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11월 16일 병인

충청도 유생(儒生) 김양래(金陽來)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7일 정묘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유최기(兪最基)·김한철(金漢喆)을 승지로 삼았다.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참핵사(參覈使) 김상적(金尙迪)이 일을 우려하여 한 말은 과긍(夸矜)에 가까운 것으로 치밀하게 하는 데 있어 큰 흠이 되는 것입니다. 양국(兩國) 사람이 서로 변론하는 즈음에 그 임기 응변하는 바가 만에 하나 차질이 있게 되면 오만 무례한 글이 나오게 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반드시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처음 김상적이 사행(使行)의 일 때문에 입대(入對)했을 적에 역관(譯官) 이정희(李廷禧) 등의 죄상을 아뢰어 바야흐로 형조에서 합사(合査)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조관빈의 상소가 이정희 등이 비방하는 말에 연유된 것으로 여겨 노하여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듣건대 김상적이 이정희를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하므로 반드시 흔단을 야기시켜 이간하는 말이 있을 것을 우려했었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 인재를 기용하려 하는데 저지시키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김상적을 보내지 않으면 이는 나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정희의 무리는 마땅히 만상(灣上)169)  에서 정법(正法)에 처한 뒤에야 인심을 열복시킬 수 있고 사사(査事)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하고, 드디어 책망하는 비답을 내리고 따르지 않았다. 김상적이 인피(引避)하고 나오지 않으니, 또 나처(拿處)하라고 독칙(督飭)하여 결국은 임무를 맡겼다.

 

홍상한(洪象漢)·원경하(元景夏)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승지 정희보(鄭熙普)를 파직시켰다. 정희보가 일찍이 원경하(元景夏)를 논하였다가 오광운(吳光運)에게 공척(功斥)을 당하였는데, 승지에 제수되기에 이르러서는 소장을 올리어 전의 일을 인용하여 원경하에게 도리어 모욕을 당했다고 하면서 인하여 오광운이 시세(時勢)가 있는 자에게 아부하여 사람을 밀어내려 했다고 추후에 비난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정원에 의해 퇴각당했는데도 정희보가 출사(出仕)하였다. 원경하가 대소(對疏)를 올려 공척하기를,
"정희보가 재신(宰臣)과 서로 원수가 된 것은 역시(逆屍)를 거두어 매장한 데에 있습니다만, 재신은 무신년170)  에 공을 세웠는데 어떻게 시세가 있는 자들에게 아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정희보가 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오광운과 서로 원수가 진 것이 역시를 거두어 매장한 데에 있다는 말은 실로 전혀 근거가 없는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오광운이 신을 공척하는 상소를 하였을 적에 구차스레 다른 대관(臺官)이 처치(處置)한 바 재물을 다툰 일을 가지고 신을 밀어내려는 대병(大柄)으로 삼았겠습니까? 더구나 이 일은 재물을 다툰 한 가지 일에 견주어 볼 적에 그 경중이 어떠한데, 기필코 이를 누락시키고 저것을 거론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신에게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은 변해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절로 간파(看破)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을 비난하는 그런 풍습(風習)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정희보를 파직시켰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세분(世分)·권집(權䌖)·권숭(權崇)을 친국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기를,
"종신(宗臣)이 구대(求對)한 것을 승지·사관이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중외(中外)가 당황하고 의혹하여 인심이 흉흉한데, 반드시 요악(妖惡)스러운 불령(不逞)한 자가 은밀히 잠복해 있으면서 괴변(怪變)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어서 생각할수록 몸이 오싹해지는데도, 포청(捕廳)에서는 보통으로 여기고 정신(廷臣)들도 진청(陳請)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그윽이 그 느른함을 애석히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미 연석(筵席)에서의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도록 계칙했으므로 대신(大臣) 이하가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 대략을 조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석에 참석함에 이르러서는 엄중히 핵실할 것을 청하였는데, 원경하의 상소가 또 들어왔다. 이리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같은 말로 다투어 청하자, 금오(金吾)에 명하여 세 사람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권혜(權嵆)는 풍양(豊壤)에 가 있어 미처 오지 못하였으므로 먼저 세분과 권집을 체포하라는 명이 드디어 있게 된 것이다. 세분에게 묻기를,
"네가 어느 달 어느 날에 어떤 글을 어느 곳에서 얻었기에 너의 상전(上典)이 어떻게 그 글을 가져다 보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양상의 물건에 썼으며 색깔은 무슨 색깔이었고 그 길이와 너비는 얼마쯤 되었는가? 너의 상전이 이미 상세히 말하였으니, 하나 하나 정직하게 고하라."
하니, 세분이 공초(供招)하기를,
"이달 초3일 저녁 무렵에 쌀을 찧는 방앗간에서 사랑으로 가는 길의 도석(導石)을 보니 붉은 색으로 된 나무가 있었는데, 길이는 3촌(寸)이 좀 모자라고 너비는 1촌 반쯤 되었으며 곁에 눈이 있었으나 젖지 않았었습니다. 신이 선명하게 붉은 것을 사랑하여 주워서 가졌는데, 마침 작은 상전(上典)이 와서 빼앗아 보고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쓰여져 있는 글자의 모양은 큰 오이 모양으로 생겼는데, 가는 글씨로 서너 줄을 썼습니다. 신이 도로 달라고 하니, 작은 상전이 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 괴이하다고 하였습니다만, 경동(警動)하는 기색은 없이 그대로 방에 들어갔습니다. 작은 상전은 어머니를 모시고 풍양으로 갔습니다. 당초 작은 상전이 굳이 그 글을 요구했기 때문에 바친 것이었는데, 신이 서너 차례 도로 돌려달라고 하였어도 끝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색깔이 붉어서 바로 진홍첩(眞紅帖)이었으며 모양은 소첩(梳帖)과 같이 생겼는데, 풀로 새로 붙여서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 붉은 나무의 빛깔은 집에서 늘 보던 것인데 상전 집 아이들의 의조(衣組)도 또한 이렇게 생긴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신이 이런 내용을 안상전[內上典]에게 말하였더니 안상전이 작은 상전에게 물었으나 끝내 이렇다저렇다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왕래하는 곳은 안국동(安國洞)의 권지평(權持平)의 집과 관동(館洞)의 이성(李姓)인 처가(妻家)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권집에게 묻기를,
"어느 달 어느 날 너의 종질(從侄) 권혜가 어떠한 모양의 글을 가지고 왔으며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은 어떻게 생긴 물건이었으며 그 색깔은 무슨 색깔이고 글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네가 그 글을 보고 무슨 말을 권혜에게 하였으며 그를 시켜 누구에게 묻게 하였는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으니, 일일이 정직하게 공초하라."
하니, 권집이 공초하기를,
"신의 종질인 권혜와는 거주하는 곳이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찾아와서 괴이한 물건을 보이면서 경동하기에 망령스럽다는 것으로 나무랐습니다. 그 글의 외면(外面)에는 ‘천사(天辭)’라는 두 글자를 썼고 그 붉은 나무의 너비는 3촌, 길이는 5촌쯤 되었는데, 그 글은 ‘하늘은 말로 훈계하고 조상은 훈계를 전하는 것이 매우 길(吉)한 것인데, 사람들이 어기고 자손이 어기면 길한 것이 변하여 흉한 것이 된다. 아! 나의 신(神)이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아!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그 말을 이증(李增)에게 물어서 삼가 하늘에 바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은 모두 석 줄로 되어 있는데 둘째 줄 첫머리의 글자는 길(吉) 자이고 셋째 줄 첫머리의 글자는 색(索) 자인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글씨는 잘 쓴 글씨가 아니었는데 촉체(蜀體)의 모양과 근사하여 활자(活字)로 된 《통감(通鑑)》의 글자와 같았습니다.
세분(世分)은 곧 권혜의 삼촌(三寸)인 권광(權絖)의 여종이며, 권광은 권국형(權國衡)의 아들입니다. 신의 삼촌인 권도형(權道衡)의 아들 권강(權絳)이 본종(本宗)으로 출계(出繼)했기 때문에 권강을 양자(養子)로 삼은 것입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런 요악스러운 말은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고 하니, 권혜가 말하기를, ‘동짓날 여천(驪川)의 집에 가서 시사(時祀)를 지내고 나올 때 무슨 물건을 습득했는지 모르겠으나 여천이 그의 숙부(叔父)를 불러 함께 서서 약간의 말을 주고받는 다음 그대로 나왔는데, 경동하는 빛이 있었다. 여천이 나에게 삼촌처럼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도 또한 정이 깊었는데, 그 일이 알고 싶어져서 하루는 찾아가서 묻기를, 「동짓날 어떤 일이 있었는가? 우리 집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나, 이미 불에 태워 버렸다. 두 곳에 이런 일이 있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했습니다.
이 한 가닥의 일은 권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권혜는 이에 아동(兒童)이어서 그가 스스로 물어본 것이지 신은 실로 권혜에게 이에 대해 여천에게 물어보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권혜는 아동이라서 조상의 훈계가 있었는가 의심했습니다만, 조금쯤 인사(人事)에 대해 아는 사람이면 어찌 있고 없는 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위조(僞造)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문의할 수 있겠습니다만, 애당초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데 어찌 물어 보게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무슨 훈사(訓辭)가 있었는지, 무슨 선훈(先訓)을 준수하지 않고 천리(天理)를 어긴 일이 있었는지, 이런 내용으로 여천에게 문의하여 본다기에 신이 이는 의심하여 물어 볼 만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동짓날에 이미 여천의 집에 수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문의하였다고 했습니다.
여천의 집에서 습득한 글은 붉은 글씨로 써서 사당(祠堂)의 문틈에 꽂았다고 했습니다. 초8, 9일 사이에 서학동(西學洞)에 가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곧바로 신에게 와서 말하지 않았고 여천군이 청대(請對)한 뒤 권혜가 와서 말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가 하는 말이 중하지 않을까 해서 신의 말이라고 가차하여 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권혜는 인품이 경망(輕妄)하지도 않고 광패(狂悖)스럽지도 않습니다만, 그의 아비가 일찍 죽었고 또 담병(痰病)이 있어서 인물(人物)이 부실합니다. 그의 문필(文筆)은 아직 과유(科儒)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문리(文理)는 그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권혜에게 말하기를, ‘너의 형이라 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전파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국을 우선 정지하고 내일 아침 다시 국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안극효(安克孝)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이응협(李應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8일 무진

권혜가 체포되었는데, 임금이 아울러 대궐로 올려보내게 하였다. 다시 세분(世分)을 신문하니, 세분이 공초하기를,
"붉은 나무에 붙인 풀은 쌀로 만든 풀이었는데, 빛깔은 청색(靑色)이었으며 얼지 않았었습니다."
하였다. 권혜를 신문하니, 권혜가 공초하기를,
"신의 나이는 18세입니다. 초3일 저녁에 변소에 갈 적에 세분이 물을 길어 가지고 오다가 하인청(下人廳) 곁에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글을 주워 보면서 가기에 신이 그 서면(書面)을 보니 천(天) 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을 가져다 보니 글씨가 석 줄 반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신의 숙부인 권집에게 보이니, 권집이 말하기를, ‘이것이 천서(天書)인가, 인서(人書)인가? 이는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매우 이상한 일이다. 문리로 보면 증(增) 자는 여천(驪川)을 가리킨 것 같다.’ 하였습니다.
신은 처음에는 증 자가 여천에 속하는 것인 줄 몰랐었습니다만, 신의 숙부의 말을 듣고서 알았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여천의 집에 만일 이런 등의 훈사(訓辭)가 있으면 참으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초3일부터 권집의 집에 유숙하다가 초6일에 여천의 집으로 갔었는데, 초3일 저녁 권집에게 보였을 적에 권집이 말하기를, ‘네가 알기로는 이 글이 천작(天作)인 것 같은가, 인작(人作)인 것 같은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하늘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으며 붉은 나무가 또한 어떻게 하늘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권집이 말하기를, ‘나의 의견도 그러하다.’ 했습니다.
신이 여천의 집에 갈 적에 권집이 말하기를, ‘이 말은 부디 입밖으로 내지 말라.’ 했습니다. 신이 여천에게 묻기를, ‘선훈(先訓)이 있는가?’ 하니 없다고 했으며, 또 묻기를, ‘무슨 꿈을 꾼 것이 있는가?’ 하니 없다고 했으며, 또 묻기를, ‘무슨 이상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없었다고 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초3일 저녁 우리집 여종 세분이 문득 이상한 글을 습득했는데, 그 글이 붉은 나무에 쓰여져 있었으며 사의(辭意)가 이상하였다. 이곳에 별다른 증거할 만한 일이 없다면 이 집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하니, 여천이 손을 잡으면서 묻기를, ‘내가 너를 친자제(親子弟)처럼 여겼는데 네가 나를 부형(父兄)처럼 여기지 않으니 개탄스럽다. 네게 품은 생각이 있으면 말하여 보라.’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 아비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감동하여 이어 글에서 본 내용을 고하였으며, 돌아와 권집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권집의 아들 권숭(權崇)에게 말하였습니다. 권집이 묻기를, ‘네가 여천의 집에 가서 글을 습득한 일을 말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의 집이 분잡하고 소란하여 미처 말하지 못했다.’ 하니, 권집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기필코 물어볼 것이 없고 조용한 때를 기다려 말해도 된다.’ 했습니다.
신의 숙부인 권광(權絖)에게는 신이 말하지 않았는데, 신의 서숙(庶叔)이 여선(驪善)의 집에서 유숙하고 돌아와서 여천이 청대(請對)했다는 일에 대해 듣고는 신을 찾아와 신에게 물었습니다. 신이 여천의 집으로 가서 청대하게 된 곡절을 문의하니, 여천은 안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았으며, 해릉군(海陵君)171)  이 말하기를, ‘두 집의 일이 편안하게 될 수 있으니 이는 경사(慶事)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그 글을 보건대, 천사(天辭)라는 글자가 있었고 또 인역(人逆)·손역(孫逆)이라는 글자가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말로 훈계했다고 한 것은 이것이 인역에 해당이 되고 선조(先祖)가 훈계를 전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손역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신이 과연 천리(天理)를 거스른 일이 있느냐는 등의 말로 여천에게 물었었습니다. 따라서 권집의 공초는 옳습니다. 신이 세 가지 조항으로 설문(設問)하겠다는 뜻으로 권집에게 문의하였더니, 권집이 말하기를, ‘네가 묻고 싶으면 물어 보는 것은 마음대로 하라. 대저 남과 이야기할 적에 비록 공동(恐動)시키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정직하게 고하도록 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네가 먼저 발론하게 되기가 반드시 쉬울 것이다.’ 했습니다.
신의 집에서 습득한 글은 신의 생각에는 익명서(匿名書)가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만, 혹 참으로 천서(天書)일 수는 있다고도 여겼습니다. 여천과 말을 주고받을 적에 붓으로 써서 보이고서는 이어 쓴 것을 찢어서 화로에 넣어 태워버렸습니다. 신이 여천에게 묻기를, ‘지난번 시사(時祀)를 지낸 뒤 무슨 글을 보았기에 나를 꺼리는가?’ 했는데, 신은 여천이 나를 꺼리는 것이라고 한 말이 아니고 여천이 나를 내보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신이 권집에게 전하기를, ‘여천의 집에서 무슨 글을 습득했는지 매우 나를 꺼렸다.’ 했습니다. 제사를 지낼 적에 여천군이 신주(神主)를 받들고 왔는데 신은 사당(祠堂)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은 7인이었습니다. 세분(世分)이 습득한 글은 풀을 바른 곳이 희미했었고 마른지 이미 오래 된 것이었습니다. 세분의 공초에서 새로 붙였는데 젖어 있었다고 한 것은 바로 무함한 말입니다."
하였다. 다시 세분에게 권혜가 공초한 쌀로 만든 풀과 마르고 젖은 것이 같지 않다는 것으로 신문하니, 세분이 공초하기를,
"그 풀은 청색이고 얼지 않았으니, 새로 붙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풀이 붉은 나무 밖으로 흘러 나와서 신의 손바닥에 묻은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새로 붙인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니, 권집이 공초하기를,
"권혜가 과연 세 조항으로 문의하여 보겠다는 이야기를 찾아와서 말하였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일임을 모르지 않았습니다만, 권혜는 본래 담병(痰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어서 매사에 참고 견디어 내지를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갑자기 질책을 가하면 병이 생길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달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하여 지나치게 동요하는 일이 없게 했습니다. 초5일 사이에 신이 권혜에게 묻기를, ‘네가 여천군을 만나서 글을 습득한 일에 대해 말하였는가?’ 하니, 조용하지 못하여 미처 말하지 못했다고 했기 때문에 신이 ‘말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이 뒤로도 부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증(增) 자의 뜻은 권혜가 과연 몰랐었는데 신이 말한 것입니다. 신이 권혜에게 말하기를," ‘너는 신어(神語)인 줄 알지만 결단코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했는데, 신이 지금 전송(傳誦)할 수 있는 것은 반복하여 익히 익힌 것이 아니고 대강 잘 기억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한번 보면 욀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권집을 권혜와 면질(面質)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착오나는 것이 없었다. 권혜를 세분과 면질시키니, 세분이 말하기를,
"풀이 빛깔은 청색이었고 분명히 젖어 있었습니다."
하고, 권혜는 말하기를,
"천사(天辭)라고 쓰여 있는 글자가 젖어 있었으니 눈 위에 내린 이슬 때문에 젖은 것이 분명합니다만, 풀은 말라 있었습니다."
하였다. 세분은 젖어 있었다고 하고 권혜는 말라 있었다고 하여 둘이 서로 굽히지 않았다. 다시 권혜를 신문하니, 권혜가 공초하기를,
"신의 나이 14세 때 신의 아비가 양주(楊州)에서 객사(客死)하였는데, 신도 이어 담병이 생겨 세상 일에 마음이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을 보내었으며 다시는 연음(宴飮)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병의 근원이 점점 깊어져 갔는데 의원의 말이 마음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일부러 부실한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을 여천(驪川)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분이 습득한 글을 빼앗아 보고서 세 가지 조항으로 설문(設問)했던 것도 또한 부실한 짓을 하던 습관에 연유된 것인데, 어떤 양상(樣狀)의 것이 익명서가 되는 줄은 모르고 단지 남을 욕하는 것만을 익명서가 되는 것으로 여겼을 뿐, 이런 것이 익명서인 줄은 몰랐습니다. 여천·해릉(海陵)과 서로 만났을 적에 이미 그 글을 봉한 풀이 말라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해가 되는 것인 줄 알았다면 어찌 앙달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니 권집이 공초하기를,
"신이 변변찮기는 합니다만, 나라를 섬겨 온 지 오래이니 어찌 법문(法文)이 중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에게 발설하지 말게 했는데도 권혜가 잘 참지를 못하고 이에 남에게 말하였습니다만, 그 글을 불에 태우지 못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하였는데, 아울러 금부에 내렸다. 지평 안극효(安克孝)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이응협(李應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9일 기사

임금이 친국(親鞫)하였다. 다시 권혜를 신문하니, 권혜가 공초하기를,
"신이 스스로 한 일이거나 다른 사람의 지휘를 받고서 했다면 어찌 직고(直告)하지 않겠습니까? 풀이 마르거나 젖은 것이 신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신이 기필코 말라있었다는 것으로 주달겠습니까? 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세분(世分)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지평 안극효(安克孝)가 말하기를,
"세분을 풀어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국체(國體)로써 논한다면 곧바로 풀어주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리고 풀이 마르고 마르지 않은 것과 빛깔이 푸르고 푸르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신문해야 할 단서가 있으니, 구류(拘留)시켜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헌납 이응협(李應協)은 말하기를,
"세분에게는 아직 신문해야 할 단서가 있으니, 곧바로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 구류시켜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者)가 이미 풀어주고 나서 어떻게 다시 구류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권집을 참작하여 처리했다면 대신(臺臣)이 간쟁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번의 옥사(獄事)는 매우 요악(妖惡)스러운 것입니다. 명(明)나라 때 초국(楚國)의 요서(妖書)에 대한 옥사(獄事)가 있었으니 《명사(明史)》를 들여오게 하여 열람해 보시고 조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을 어떻게 경솔하게 혼자서 주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경솔히 말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니, 권집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임금이 신문할 것인지의 당부(當否)에 대해 하문하니,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익명서의 경우는 친국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만, 세 조항의 설문(設問)은 이것이 바로 흉역(凶逆)입니다. 그리고 이는 혼자서 한 일이 아니고 반드시 지휘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신문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논도 모두 같았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처음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할 것으로 앙달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신문하는 이외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습니다. 풀이 말랐었는지의 여부가 가장 긴요한 관건인 것이고 세 조항으로 설문한 것은 매우 음참(陰慘)스러운 것이니,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은 역적이라고 했습니다만, 신은 끝까지 추구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야 바야흐로 역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세 조항으로 설문한 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였다. 죄인을 금부에 내리라고 명하고 친국을 우선 파하였다. 권집은 그대로 가두어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게 하고, 권혜는 내일 아침 본부(本部)에서 가형(加刑)하여 정직하게 공초할 경우 친문(親問)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11월 20일 경오

의금부에서 권혜를 추국하자 그의 병이 중한 상태라는 것으로 대신(大臣)이 추국을 정지하도록 의계(議啓)하였다.

 

11월 21일 신미

헌부 【지평 안극효(安克孝)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금 이 요역(妖逆)은 전고에 없던 일인데, 권집(權䌖)과 권혜(權嵇)가 용의 주도하게 모의한 정상이 이미 장전의 친문(親問)에서 드러났으니, 권혜가 직초(直招)하기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정상이 탄로된 것입니다. 세 조항의 설문(設問)은 그것이 얼마나 흉참스러운 것입니까? 권혜가 임의(任意)로 했다면 이것이 신문할 만한 것 가운데 첫 번째 입니다. 요서(妖書) 가운데 글자 하나를 집어 내어 지적한 것이 있다고 하면서 세 조항의 설문을 하게 된 장본(張本)으로 삼았으니, 두 번째 심문할 만한 것이 됩니다. 권혜가 가슴을 앓는 병이 있다고 하면서 그 자취를 숨기려 하고 있으나 말이 궁하게 된 데 이르러서는 도리어 그 병이 간간이 발작한다고 공초했으니, 세 번째 신문할 만한 것입니다. 그의 정절(情節)의 음흉함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니, 권집을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속히 엄형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세분(世分)의 정적은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기는 합니다만, 국사(鞫事)를 끝마치기 전에는 또한 신문해야 할 만한 일이 있는 것이니, 그를 풀어주도록 하신 것은 경솔히 한 것에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세분을 풀어주라는 명을 환수(還收)하고 전처럼 엄히 가두어 국사(鞫事)가 수쇄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장전에서 친문할 때 지의금(知義禁) 원경하가 옥사(獄事)를 늦추게 할 계획을 획책하기 위하여 역적이 아니라는 말을 감히 임금이 순문(詢問)하는 자리에서 진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번 종신(宗臣)이 청대(請對)했을 적에 입시했던 승선(承宣)172)  은 이미 그 요서(妖書)가 음참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당연히 놀란 마음으로 통분스러움을 느껴 토죄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하는데도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 【 헌납 이응협(李應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집과 권혜가 함께 유숙하면서 난만하게 모의하고 주도 면밀한 정절(情節)은 더없이 망칙한 것이었습니다. 글자의 뜻을 공교하게 해석한 지의(旨意)가 음참스러운 것이었는데, 면질(面質)시켰을 때 말이 군색하였으니, 정적(情迹)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실정을 숨기고 자백하기도 전에 갑자기 그대로 왕부(王府)에 가두어 두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만일 권혜가 버티다가 곧바로 죽어버린다면 버려두고 구핵(究覈)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권혜와 권집을 똑같이 엄중히 형신(刑訊)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11월 22일 임신

윤득화(尹得和)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11월 23일 계유

화성(火星)이 저성(氐星) 아래로 들어갔다.

 

오명수(吳命修)를 금산군(錦山郡)에 편배(編配)하였다. 오명수는 앞서 종성 부사(鐘城府使)에서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외람되이 역마(驛馬)를 이용했고 또 잡아 오라는 명이 있은 뒤에 습조(習操)를 행하였다는 것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이 있었는데, 이 두 죄가 갖추어졌으므로 찬배(竄配)시킨 것이다.

 

참핵사(參覈使)가 중국으로 들어갈 때 쓸 반전(盤纏)은 심양(瀋陽)에 사신을 보낼 때의 예(例)에 의거하여 하라고 명하였다. 참핵사 김상적(金尙迪)이 원역(員役)에 팔포(八包)가 없다는 것으로 청하였기 때문이다.

 

의금부에서 추국(推鞫)하였다. 다시 권혜를 신문하여 형문(刑問)이 다만 아홉 차례에 이르렀는데, 기절하였으므로 형신을 정지하였다. 의계(議啓)하기를,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려 다시 가형(加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 등이 품달할 일이 있습니다."
하고, 합문(閤門)으로 나아와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등이 말하기를,
"지금 구핵(鉤覈)할 단서가 매우 많습니다만, 여러 의논이 모두들 권혜가 곧바로 죽을 경우에는 권집을 형신하지 않을 수 없는데 권집은 권혜를 감싸고 권혜는 권집을 감싸면서 서로 숨기고 있습니다. 세 조항의 설문(設問)에 대해 전연 몰랐던 것이 아닌데 수삼일 밤을 같이 유숙했으니, 권집에게 악역(惡逆)을 통분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꾸짖어 금하지 않았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권혜는 어리고 미숙하여 반드시 혼자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권집을 형문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체(鞫體)에 있어 크게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천질(賤疾)이 결단코 사환(仕宦)에 종사할 가망이 없습니다. 오늘 입시한 뒤에 어느 날 또 입시하게 될는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걱정스러운 우충(禹衷)에서 우러러 진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현재 하고많은 일 가운데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고 동궁(東宮)을 보양(保養)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의 차자(箚子)에 한두 조항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입니다만, 전하께서 성궁을 보호함에 있어 실로 소홀히 하시는 점이 많습니다. 목전의 친국(親鞫)하는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모든 국옥(鞫獄)에 대해 그때마다 친림(親臨)하시는데, 이는 모두 세신(世臣)을 위한 걱정에서인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기는 합니다만, 어찌 덕의(德意)가 하늘과 같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세신이 중합니까, 아니면 성궁이 중합니까?
찌는 듯한 무더위도 피하지 않고 엄동 설한도 돌아보지 않으시는데, 온갖 신령들이 부지(扶持)하여 주니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이 없으실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만에 하나 큰 질병이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이 여항(閭巷)의 말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노친(老親)을 봉양할 독자(獨者)가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스스로 경솔히 하기를 이렇게 하십니까? 이 뒤로는 성궁을 보호하는 방도에 십분 유의하소서. 신이 가만히 전하께서 보호를 소홀히 하는 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동궁을 보양하는 것도 또한 소홀히 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신이 더욱 이를 우려하여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우러러 진달하기를, ‘천지(天地)와 조종(祖宗)께서 성자(聖子)를 전하께 내려주셨는데 전하께서 만일 잘 보양하여 성취(成就)시키지 못하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천지와 조정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라고 했었는데, 신의 이 말을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실로 성인(聖人)의 자질을 타고나셨습니다. 《시경(詩經)》에서 후직(后稷)을 찬미하기를, ‘실로 잘 자라고 실로 잘 컸다.’라고 했는데, 자라고 컸다는 것은 숙성하고 석대(碩大)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하께서도 숙성하고 석대하여 이와 부합되는 점이 있으니, 품부받은 것이 바로 천지의 성대한 기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강연(講筵)이 있을 때마다 영걸스런 자태를 우러러보면 깊고 중후한 가운데 신채(神采)와 영기(英氣)가 얼굴에 발로되어 흘러 넘치는 것이 자연히 좌우(左右)에 반영이 되고 있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자질인 것입니다. 이런 자질과 이런 기상을 배양하여 올바른 법규 안에서 성취시킨다면 덕업(德業)의 성대함은 요순과 문무(文武)처럼 될 수 있고 복록(福祿)의 융성함은 화봉인(華封人)이 수(壽)·부(富) 다남자(多男子)로 축원하는 것173)  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양하여 성취시킬 책임은 오직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저하께서는 어린 나이가 아니고 바로 성장(盛壯)한 때이나, 이것이 어떠한 시기입니까? 바로 십분 신중을 기해야 할 때인데 만에 하나 차질이 있게 되면 어찌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성유(聖諭) 가운데 제1조(第一條)는 참으로 일이 있기 전의 경계인 것으로 또한 때를 맞추어 내린 비와 같은 성인(聖人)의 하교이십니다. 삼가 바라건대 십분 유념하시어 무릇 〈동궁을〉 보양하는 방법에 관계되는 것은 항상 조관(照管)하여 혹시라도 소루함이 없게 하소서. 이것이 신이 앞서 올린 차자(箚子)의 제2조(第二條)의 이야기가 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文字)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환히 진달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좌상의 차자에 말로 감히 다 이를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한 것은 지향(指向)한 것이 있는 것으로 범연히 논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위에서 혹 굽어살펴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곧 어제(御製) 계훈(戒訓) 가운데 있는 첫째 조항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찌 몰랐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러시면 전하께서 또한 지나치게 구속하여 뛰어난 기상을 손상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학문하는 공부는 잊지 말고 억지로 돕게 하지도 말면서 완급(緩急)과 질서(疾徐)가 교차하는 사이에 묵묵히 생각하고 잘 교유(敎諭)하여 과불급(過不及)의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성궁(聖躬)이 강녕하시고 예학(睿學)이 성취되면 인심과 세도에 천만 가지의 괴악(怪惡)이 발생해도 모두 우려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11월 24일 갑술

이기덕(李基德)·박창윤(朴昌潤)을 지평으로, 어석윤(魚錫胤)을 교리로, 신위(申暐)를 부교리로, 박상덕(朴相德)을 사서로, 오수채(吳遂采)를 승지로, 이만유(李萬囿)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이만유는 자급(資級)과 이력(履歷)이 일천(日淺)하였으나 대려(帶礪)174)  의 훈신(勳臣)이라는 것으로 특별히 명하여 초승(超陞)시킨 것이다.

 

11월 25일 을해

이태중(李台重)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권집(權䌖)도 똑같이 함께 엄히 형신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잇따라 이 때문에 진청(陳請)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태학(太學)에 감귤(柑橘)을 반하하고 시사(試士)하였다. 으뜸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진국(李鎭國)을 직부 전시하게 하였다.

 

11월 26일 병자

의금부에서 추국(推鞫)하였다. 위관(委官)인 의금부 당상과 승지·문랑(問郞)·간원(諫院)이 함께 앞에 있었고 헌부의 지평 이기경(李基敬)이 진참(進參)하였다. 다시 권혜(權嵆)를 신문하여 열 다섯 차례 형을 가하자 기절하였으므로 형신을 정지하였다. 의계(議啓)하기를,
"죄인 권혜는 한결같이 모질게 참아내고 있으므로 열 다섯 차례 엄중히 형문하였는데 기절했기 때문에 정지했습니다. 청컨대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가형(加刑)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특별히 전 참의 김진상(金鎭商)을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김진상의 염퇴(恬退)를 가상히 여겨 소견(召見)하여 관직을 강요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였고 또 포의(布衣)를 연석(筵席)에 입시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한림(翰林)의 권지(圈紙)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특별히 채제공(蔡濟恭)에게 두 개의 어점(御點)을 치고 소시(召試)에 응하라고 명하였다. 채제공은 권점이 없었는데 바야흐로 기주관(記注官)으로 입시했으므로 그의 재능을 아까워해서였다.

 

11월 27일 정축

해에 양이(兩珥)와 일훈(日暈)이 있었는데 훈(暈) 위에는 관(冠)이 있고 관 위에 배(背)가 있었으며 훈 아래에는 이(履)가 있고 그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다. 빛깔은 모두 안쪽은 적색(赤色)이고 바깥쪽은 청색(靑色)이었다. 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정원에서 무지개의 변괴 때문에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참핵사(參覈使) 김상적(金尙迪)이 봉황성(鳳凰城)에 가서 회사(會査)하였다.

 

11월 28일 무인

달선군(達善君) 이영(李泳)이 졸(卒)하였다.

 

11월 29일 기묘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지평 이기경(李基敬)을 사적에서 삭제시키고 향리(鄕里)로 방출(放黜)시켰다가 곧이어 특별히 해남현(海南縣)에 정배(定配)하였다. 이기경이 상소하여 중비(中批)175)  로 제수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것을 말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충역(忠逆)에 대한 분별과 시비(是非)의 변별에 있어 왕왕 역적을 자식처럼 여겨 사갈(蛇蝎)을 보호하며 배양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조현명(趙顯命)이 역적의 지친(至親) 가운데 응당 좌죄(坐罪)될 사람 이외에는 구금하지 말라는 것으로 진품(陳稟)했다는 것을 이유로 공척(攻斥)하였다. 일진일퇴(一進一退)의 폐단에 대해 논한 차자에 이르러서는 이를 신축년176)  ·임인년177)  ·무신년178)  에 해당시켰으며 또 박문수(朴文秀)·이종성(李宗城)·조진세(趙鎭世) 등을 공척하면서 이르기를,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자에게는 의당 그런 자들과 나라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보여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랫동안 적료(寂廖)하던 가운데 나온 임순(任珣)의 소장을 지나치게 추장(推奬)하여 충간(忠諫)을 듣기 싫어 합니다."
하였다. 또 탕평을 극력 공척하였고 또 임명주(任命周)를 영구(營救)하였으며 기타 풍자하여 논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상소를 열람하고는 크게 노하여 창문으로 내던지고 한숨쉬며 말하기를,
"이는 이기경의 소위가 아니다. 내가 비록 한(漢)나라 소제(昭帝)처럼 거짓을 분변한 데179)   미치지는 못하지만 또한 이 소장은 지휘하여 교사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기경은 글을 잘 짓는데,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본디 한번 상소할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소장은 하루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기경이 대각(臺閣)에 들어온 지 겨우 며칠이 되었으며 그 사이 또 국문(鞫問)에 참여했었으니, 만일 스스로 지었다면 반드시 미리 준비하고서 기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비부(鄙夫)인 것이다."
하고, 사교(辭敎)가 갈수록 격하여지자, 김재로와 판의금 김시형(金始炯)이 성기(聲氣)를 지나치게 쓰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낙점(落點)을 잘못하였다. 그러나 전관(銓官)이 이런 무리들을 통청(通淸)시킨 것은 그 의도가 당여를 심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반드시 사람을 다 잡아먹어야 그만둘 것이다. 근래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이 인호(人虎)에는 어찌할 것인가?"
하고, 먹물로 그의 소장을 지워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그가 《대학(大學)》을 인용하였으니, 나도 또한 《대학》을 적용하겠다."
하고, 드디어 이름을 사적(仕籍)에서 삭제시키고 향리(鄕里)로 방출시켜 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또 이기경으로 하여금 성문(城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성문이 열리는 즉시 나가게 하였으며, 다음날 또 하교하기를,
"이기경은 이세사(李世師)가 척촉(躑蠋)할 조짐이 있던 것에 견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그로 하여금 향리에 거처하게 한다면 이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것이 된다. 해남현(海南縣)으로 귀양보내어 이틀에 갈 길을 걷게 하며 압송(押送)할 것은 물론 배소(配所)에 도착하는 날 도신(道臣)은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들이 이렇게 날뛰는 것은 오로지 임금의 마음이 이장(弛張)되었는가를 염탐하는 것에 연유되어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이언세(李彦世)·박성원(朴聖源)의 대통(臺通)을 개정(改正)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정원에 계칙하여 이기경 때문에 상소하여 항거하는 것을 엄금하게 하였다. 이기경의 상소 내용은 무려 1천여 말에 달하였는데, 임금이 먹으로 지우라고 명하였고 또 기록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소가 드디어 세상에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전혀 당심(黨心)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간간이 긴절하여 채택할 만한 의논이 있기도 하였는데, 특별히 임금의 붕당을 미워하는 마음이 극심하여 위노(威怒)가 너무 지나쳤던 탓으로 채택할 만한 것까지도 아울러 살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관계가 없는 이 언세 등까지 좌죄(坐罪)되었다. 아! 이기경은 방출시켜도 되고 귀양보내도 되지만 먹으로 대장(臺章)을 지워버리고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 데 이르러서는 도리어 성덕(聖德)에 누를 끼친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대신(大臣)·삼사(三司)가 일찍이 한마디도 구제하여 바로잡는 이가 없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유작(柳綽)을 정언으로, 이광직(李光溭)·김조윤(金朝潤)을 지평으로, 황재(黃梓)를 지의금으로 삼았다.

 

충청도의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30일 경진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권집(權䌖) 등 여러 죄인을 친국(親鞫)하였다. 다시 권집에게 신문하기를,
"네가 지휘한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권혜(權嵆)는 도리어 스스로 감당하면서 누차의 엄한 형신에도 끝내 실토하지 않고 있다. 그가 만일 스스로 만든 일이라면 어떻게 장(杖)을 참을 수 있겠는가? 너는 권혜에 대해 곧 부자(父子)와 같은 처지인데 네가 미루는 것으로 인하여 그가 계속 형신을 받게 된다면 너는 요행히 죄를 피할 수 있겠으나 이는 병이(秉彝)의 마음이 없는 짓인 것이다."
하니, 권집이 공초하기를,
"저 푸른 하늘이 있는데 어떻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권혜가 만일 장폐(杖斃) 된다면 이는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실로 그의 말이 사죄(死罪)가 되는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어찌 일호인들 지휘한 일이 있겠습니까? 가사(家事)는 가장(家長)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니, 신의 죄가 사죄(死罪)에 해당이 됩니다."
하였다. 다시 권혜를 신문하니, 권혜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권혜는 본부(本府)에서 가형(加刑)하게 하고 권집은 그대로 가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윤광리(尹光履)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이미 팔금(八金)의 일이 실상이 없는 것임을 알고 누차 포청(捕廳)에 계칙하여 진짜 적도(賊徒)를 체포하라고 독촉하였으므로 포도 대장 구선행(具善行) 등이 주야로 염탐하여 찾았었다. 무변(武弁) 윤용리(尹用履)라는 자가 선전관(宣傳官)의 천망(薦望)에 저지당하자 분노와 유감을 품고 있다가 구선행에게 가서 스스로 호소한 적이 있었는데, 구선행이 저지시킨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윤용리가 성야(成野)·정내백(鄭來伯)을 두루 열거하고 인하여 이택(李澤)을 언급하였다. 이택은 윤용리의 이름을 천안(薦案)에서 먹으로 지운 자로서 이른바 투서(投書)를 습득한 이선전(李宣傳) 이라는 사람이다. 구선행이 마음속으로 의심을 두고 사람을 보내어 은밀히 살피게 하였는데 윤용리의 집 벽에 붙어있던 소찰(小札)을 베어 가지고 왔다. 그것을 보니 바로 윤용리가 그의 형에게 보내는 서찰이었는데 서찰의 내용이 과연 황당(荒唐)스러웠다. 처음 투서가 있었을 때 궐문을 지켰던 군졸인 신천(信川)의 군인 이천기(李千起)란 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지금도 그자의 상모(狀貌)를 기억하고 있는데, 수염이 많고 소리가 쉬어 있었다."
하였다. 이리하여 구선행이 이천기를 불러서 몰래 보내어 윤용리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돌아와서 크게 놀란 목소리로 ‘이 사람이 진범입니다. 이 사람이 진범입니다.’ 하고 나서는 또 크게 기뻐하면서 ‘오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상모를 살펴보고 나서 다행스런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구선행이 이로써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윤용리와 그의 형 윤택리(尹宅履)를 아울러 수금(收禁)하게 하였다. 그의 집에 있는 서찰을 찾아 보니 패악(悖惡)스러운 말이 많았고 글자의 모양도 투서의 것과 서로 비슷하였다. 개(槪) 자의 경우 모두 목(木) 자를 버리고 대(大) 자를 따르고 있었다. 구선행 등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고 포청에서 안문(按問)하니, 자복하지 않고 말하기를,
"3월에 형제(兄弟)가 함께 중형(仲兄) 윤광리(尹光履)가 있는 평해(平海)의 아문(衙門)에 있었는데, 어떻게 투서가 있는 줄을 알았겠습니까?"
하고, 또 정녀(鄭女)란 자가 있어 증언(證言)하기를,
"윤용리가 3월 13일에 우리 집에 왔었습니다."
하였다. 구선행 등이 드디어 입대(入對)하여 갖추어 아뢰니, 즉시 관련된 여러 죄인들을 나치(拿致)하여 아울러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윤택리에게 신문하기를,
"궐문의 투서가 만약 나라를 위해서 고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찌하여 포장(捕將)에게 말하지 않고 궐문이 이미 닫힌 뒤에 몸을 숨기고 던져 넣었는가? 선전관이 한 사람만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독 이선전(李宣傳)을 지적하였는가? 이는 반드시 이 사람에게 유감을 품고서 음해(陰害)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니, 네가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너의 아우 윤용리가 한 짓이다. 이천기가 지적하며 고한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고 정녀의 공초에서 또 탄로가 났으니, 하나 하나 숨김없이 고하라."
하니, 윤택리가 공초하기를,
"신은 곧 양대(兩代) 국구(國舅)의 후손으로 신과 두 아우 윤광리·윤용리는 모두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무슨 부족한 마음이 있어 흉칙스런 일을 했겠습니까? 선전관의 천망에 오르고 오르지 못하는 것은 공의(公議)에 관계된 것입니다. 문벌(門閥)이 합당하다 하더라도 신의 인품이 합당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인데 무슨 한을 품을 것이 있겠습니까? 신의 아우가 윤면항(尹勉恒)에게 저지당한 뒤로 천망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신은 반은 시골에 가 있고 반은 서울에 있기 때문에 남들과 추축(追逐)하지 않고 있습니다. 윤용리는 정월초에 윤광리의 임소(任所)로 내려갔었는데 윤광리가 중병(重病)을 얻었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구료(救療)하다가 이달에야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신이 정월 22일 강릉(江陵)에 갈 때 감사(監司)에게 들러 만나보았고 4월 초에 돌아왔습니다. 궐문에 투서한 것과 이선전(李宣傳)에 대한 이야기는 또한 듣기는 했습니다만,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하였다. 윤용리에게 신문하기를,
"네가 이선전에게 일찍이 유감을 품고 있다가 그에게 화(禍)를 전가시키기 위해 그가 입직(入直)한다는 것을 알고 이런 투서를 한 것이다. 이천기가 매우 상세하게 지적하며 고하였고 정녀가 고한 것이 네가 상경(上京)한 월일(月日)과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너의 글씨와 투서에 쓰여진 글씨가 곧 같은 모양인데 대개(大槪)라고 쓴 개(槪) 자로 보더라도 또한 숨기기 어렵다. 투서에 엄연일(嚴延日) 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네가 또한 엄연일 이라는 세 글자를 알고 있다. 너의 투서에 처음에는 해서(楷書)로 공교하게 글자 모양을 만들었으나 끝에 가서는 총총히 서둘러 쓴 것은 이선전의 입직 날짜를 넘기게 될까 걱정해서인 것이다. 궐문이 닫힌 것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 투서한 다음 몰래 내려간 것은 너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듯이 환히 알고 있다. 포청에서 체포하여 신문할 때 날짜를 변동시켜 농간을 부려서 두루 숨기려 하였으나, 정녀와의 면질(面質)에서 말이 군색해진 뒤에는 정녀를 때리려 하였으니, 모두가 음참스럽다. 그리고 조관석(趙觀錫)이 너 때문에 죄없이 장폐(杖斃)되었는데, 이는 원망을 품은 사람이 지적하여 알려준 것과 같으니, 어떻게 감히 공교하게 꾸밀 수 있겠는가? 숨김 없이 정직하게 고하라."
하니, 윤용리가 공초하기를,
"신의 가세(家世)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선전관의 천망에서 저지당하였으므로 마음 속으로 매우 원통하고 통분스럽게 여겼습니다. 선전관의 천망에서 저지시켜 막은 사람들은 곧 정내백(鄭來伯)·이택주(李宅周)·이택(李澤)입니다만, 뒤에 다시 들은 바에 의하면 정내백·이택주가 아니라 바로 이택이었다고 합니다. 선전관 가운데 이주해(李柱海)는 인품이 순량(純良)하고 새로 청중(廳中)으로 들어왔고 주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의심하지 않았었습니다. 신은 정월 초순에 신의 형이 가 있는 평해의 임소(任所)로 내려가 있다가 5월에 출발하여 7월에야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정녀를 면질시켜 주시면 그 말의 허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녀가 3월에 신을 만났다고 한 것과 이천기가 수염이 비슷하다고 한 것은 신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기 위한 말입니다.
투서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신의 육촌 매부(妹夫)가 서울에서 내려와 ‘서울에 소요스러운 일이 많아 국청(鞫廳)을 열었다.’고 전하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신은 먼 도(道)에 와 있고 또한 노부(老父)가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우려하여 이 서찰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양식(粮食)을 합치고, 강약(强弱)을 점치고 천지(天地)를 살피라.’는 등의 말은 투서에 이런 말이 있었는지의 유무를 막론하고 신은 《삼략(三略)》을 읽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신의 종 말라(末羅)가 포청에 공초를 올리기를, ‘큰 상전(上典)이 지난 3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올라왔었다.’고 했는데, 신이 반드시 이렇게 말을 한 연후에야 서로 말이 틀리는 걱정이 없고 또 속히 석방될 수 있겠다고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에 신이 미열하여 과연 그의 말대로 써서 바치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윤용리와 이천기를 면질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천기가 윤용리를 향하여 말하기를,
"저 자가 과연 그놈입니다. 그놈의 상모는 수염이 많이 났는데 얼굴은 날이 어두워서 분변할 수 없었습니다만, 목소리는 쉰 것 같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사람을 부를 적에 목소리가 급하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목소리가 조금 늘어져서 양반(兩班)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팔금은 신이 일찍이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고 또 수염이 없기 때문에 전에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니, 윤용리가 이천기를 향하여 말하기를,
"세상에는 수염난 사람이 많은데 어찌하여 수염이 많다는 것으로 나라고 하는가?"
하였다. 이천기가 말하기를,
"수염도 비슷하고 말소리도 비슷하다."
하니 윤용리가 말하기를,
"죽을 기한이 임박했기 때문에 저놈이 보는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녀와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정녀가 윤용리를 향하여 말하기를,
"3월 13일 네가 오지 않았었는가? 나는 네가 왔기 때문에 행랑(行廊)에 나가 거처하다가 15일 해산(解産)하였다."
하니, 윤용리가 말하기를,
"포청에서 면질할 때 네가 처권(妻眷)을 데리고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자, 정녀가 말하기를,
"나의 형(兄)의 여종인 석례(石禮)가 민이(民伊) 어멈과 함께 또한 3월에 너를 보았다고 했다."
하였다. 석례와 민이 어멈을 아울러 포졸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석례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정녀와 같이 윤선달(尹先達)의 집으로 들어갔었는데, 신은 행랑채에 있었고 정녀는 안방에 있었습니다. 신은 윤선달이 올라오기 전에 먼저 갔었는데, 올라올 때는 3, 4월 사이로 상세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윤선달의 처가 먼저 올라왔고 선달은 평해로 갔기 때문에 함께 같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석례와 정녀를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정녀가 석례를 향하여 말하기를,
"윤선달이 그의 아내를 데리고 같이 왔던 일을 너도 알고 있는데 어리석고 미열하게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석례가 말하기를,
"윤선달의 아내가 먼저 올라왔는데 배행(陪行)은 선달이 아니고 다른 모르는 양반이었다."
하였다.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고 다시 석례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윤선달 내외(內外)가 함께 왔다는 말은 실로 허망한 말이었습니다."
하였다. 민이 어멈인 서덕(鋤德)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윤선달과 대문을 마주하여 살고 있는데 그가 올라온 것이 3월인지 4월인지는 진실로 분변할 수 없습니다. 정녀가 아들을 낳을 적에는 내월방(內越房)에서 낳았는데 그때 윤선달은 올라오지 않았었습니다. 양주(楊州)로 갔다고 했는데 간혹 왕래하기도 하여 10일에 한번 오기도 하고 한 달에 한번 오기도 했습니다만,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뒤 임오일(壬午日)180)  에 또 친국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윤용리가 2, 3월 사이에 상경(上京)했을 때 선전관 김천보(金天普)가 만났었다고 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포장(捕將)의 말을 듣건대 김천보가, ‘윤용리는 2월 20일 뒤에 찾아와서 만났다’고 했다 합니다."
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글씨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면질할 때 말이 군색했으니, 신의 죄가 사죄(死罪)에 해당됩니다. 3월에 평해에 있으면서 예죽(刈竹)하는 것을 보았고 또 형의 아들이 낙상(落傷)하여 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2월에 서울에서 신을 만난 사람이 있으면 그와 면질시켜 주십시오. 그리하여 말이 군색하게 되면 투서(投書)에 관한 한 한 가지 일을 마땅히 지만(遲晩)하겠습니다."
하였다. 김천보를 잡아오라고 명하여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작년 12월 사이에 윤용리가 찾아와 만나서 선전관의 천망에 관한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뒤 2월 그믐과 3월 초순 사이에 또 와서 잘 주선하여 주지 않아 선전관의 천망에서 저지당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자못 화를 내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택이 나를 저지시켰는데 네가 잘 주선하여 다시 천망되게 하여 달라.’ 했으며, 5월에 또 찾아와서 이택에게 해벌(解罰)시키게 해 줄 내용으로 거듭 부탁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초한 것이 매우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다시 신문할 단서가 없다."
하고, 김천보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별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위엄을 보이고 다시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계속 평해에 있었습니다."
하고, 다른 말은 없었다. 친국을 우선 파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계묘일(癸卯日)에 【12월 23일이다.】 윤덕희(尹德喜)·강만수(姜萬秀)를 포청에서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강만수를 신문하기를,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서찰을 전하여 주었고 그 서찰의 크기는 어떠했으며 글씨는 진서(眞書)인가 언서(諺書)인가? 문틈으로 전해 줄 때 누가 받았으며 그 사람의 나이는 얼마쯤 되었는가? 포청에서 공초한 것을 이미 보았지만 그 사이의 사상(事狀)을 다시 일일이 정직하게 공초하라."
하니, 강만수가 공초하기를,
"신은 경주인(京主人)181)  으로서 대역(代役)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고 있습니다. 금년 3월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을 철물전(鐵物廛) 다리에서 만났는데, 이 사람이 바로 평해의 실주인(實主人)이었습니다. 술을 사서 마실 것을 권하고는 이어 선전 관청(宣傳官廳)의 이선전(李宣傳) 직소(直所)에 서찰을 전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전하게 되었습니다. 문틈으로 흥원문(興元門)의 군사를 불렀으나 날이 이미 어두워진 탓으로 그 얼굴은 알 수 없습니다. 신은 집이 멀어 즉시 되돌아갔는데 그뒤 2, 3일 있다가 이성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신이 포청에 구류되었다가 방송되던 날 이성의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니, 뒤에 조용히 말하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위엄을 보이고 다시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전해 주라고 했기 때문에 과연 전해주었습니다만, 그 속에 든 내용은 모릅니다. 실주인의 말이 이는 바로 자기 고을 관원의 급보(急報)를 알리는 서찰이라고 하였고 피봉(皮封)에는 단지 한 줄을 썼을 뿐인데, 날이 저물어서 글자의 모양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윤덕희를 신문하니, 윤덕희가 공초하기를,
"신은 2월에 올라왔다가 한식(寒食)이 지난 다음 내려갔습니다. 포청에 있을 때 주리[周牢]를 견디지 못하여 3월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고하였습니다만, 실은 3월에 양주(楊州)에 있는 신의 집에 있었습니다. 신이 양주에서 평해로 갔는데, 신은 윤택리와 사촌(四寸) 사이가 됩니다. 윤용리는 3월에 평해의 내책방(內冊房)에 있었으며 윤택리는 정월에 내려가 외책방(外冊房)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위엄을 보이고 다시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올라온 길에 유숙(留宿)했던 주인(主人)들이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감히 속이겠습니까? 평해에 있을 적에 마안갑(馬鞍匣)의 일 때문에 윤택리에게 거슬림을 당했으므로 윤택리가 신을 쫓아보내라는 서찰을 보낸 탓으로 본쉬(本倅)가 신을 꾸짖어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신장(訊杖) 여섯 대만 치고 정형하였다. 다시 윤택리를 신문하니, 윤택리가 공초하기를,
"윤덕희는 곧 신의 서얼(庶孽) 사촌입니다. 윤용리가 윤덕희와 서로 격분하여 다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정시키기 위해 과연 아우에게 서찰을 보낸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원래 남에게 패역(悖逆)스러운 말을 한 것은 없습니다. 윤용리는 인품이 괴악(怪惡)스러워 그 형을 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엄연일(嚴延日)은 신이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만, 엄택주(嚴宅周)를 가리킨 것 같기에 포도청에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포도청에 있었을 적에 한 장의 서찰이 있었기 때문에 윤용리의 서찰이라고 고했었습니다만, 당초 윤용리의 글씨라고 고한 일은 없었습니다. 신과 윤광리·윤용리의 글씨가 모두 있으니 상세히 상고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니, 윤용리가 공초하기를,
"신의 서찰을 남에게 붙여 전하게 한 일이 있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신은 마땅히 죽겠습니다. 정말 신은 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신장 30대를 쳤다. 다시 강만수를 신문하니, 강만수가 공초하기를,
"신이 거짓말로 꾸며서 고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포청에 체포되어 있을 때 포교가 신에게 말하기를, ‘윤용리가 바야흐로 국청에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너를 체포한 것이니, 너는 반드시 정직하게 공초해야 한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내가 저인(邸人)인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니, 윤용리가 공초하기를,
"신이 만일 했다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떻게 감히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신장 30대를 쳤다. 다시 강만수를 신문하니, 강만수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강만수는 신문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으로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그뒤 을사일(乙巳日)182)  에 이르러 의금부에서 추국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기를,
"네가 몰래 올라와 서울에서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익년(益年)으로 하여금 대신 바치게 한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익년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여 스스로 죽었겠는가? 익년의 아내에게 물어보니, 울면서 ‘저의 남편이 두려워서 스스로 죽었으니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씻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익년이 죽을 때에 임하여 그 아내에게 말하면서 억울하다고 한 것은 듣기에 매우 불쌍하고 딱하다. 너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조관석이 공적으로 죽게 되었고 익년은 너로 인하여 스스로 죽었다. 한 사람 때문에 두 사람을 죽게 했으니, 더더욱 절통한 일이다. 사실대로 정직하게 고하라."
하였으나, 윤용리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신장 30대를 치고 의계(議啓)하여, 가형(加刑)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였는데, 윤용리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신장 30대를 치고 의계하기를,
"윤용리가 전처럼 곤장을 참고 끝내 정직하게 공초하지 않고 있으니,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다시 병오일(丙午日)183)  에 또 윤용리를 신문하니, 윤용리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신장 30대를 치고 의계하기를, "윤용리가 한결같이 모질게 참고 있으니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다시 윤용리를 신문하니, 윤용리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신장 30대를 치고 의계하기를,
"윤용리가 한결같이 완강하게 참고 있으니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추국(推鞫)을 파하라고 명하였는데, 무신일(戊申日)184)  에 윤용리가 물고(物故)되었다. 하교하기를,
"윤용리는 물고되었으나 강만수의 공초와 익년이 스스로 죽은 것은 십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물론 원범(元犯)임이 귀일되었다. 윤택리는 지금 신문할 만한 것이 없으니, 특별히 풀어주도록 하라. 윤덕리(尹德履)는 익년에게 글을 전하여 주었으니, 윤용리가 아니면 그인 것이다. 그가 과연 받아서 전하였다 해도 곧 하나의 미련한 무식자의 부류이니, 신문하다가 혹 장폐되면 이는 형벌을 삼가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대(供對)에 거짓이 있었으니, 백방(白放)시킬 수는 없다. 참작하여 먼 곳에 정배(定配)시키라."
하고, 또 조관석은 이미 억울하게 죽었고 윤용리가 투서한 원범임을 알았으니, 더더욱 불쌍하고 딱하다는 것으로 특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임상로(林象老)에게 명하여 윤용리 등이 3월에 평해에서 머물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하였는데 임상로가 복명(復命)하는 데 이르러서는 조사한 것이 매우 분명하지 않았고 단지 평해를 봉고(封庫)하였을 뿐 불법스런 문서를 획득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간원 【사간 이구령(李耉齡)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김조윤(金朝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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