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신사
한림(翰林)에 피권(被圈)된 사람들에게 소시(召試)를 보여 채제공(蔡濟恭) 등 6인을 뽑았다.
수찬 김선행(金善行)이 일전에 이기경(李基敬)에 대한 처분이 있을 적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가 많이 있었다는 것으로 환수(還收)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일전 친국(親鞫) 때 권집(權䌖)에게는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한다는 뜻으로 즉시 형신(刑訊)을 시행하지 않았고, 권혜(權嵆)에게는 날마다 가형(加刑)하였습니다. 옥체(獄體)가 곧 그렇게 해야 하는데도 또한 신문하지 않았으니, 크게 옥체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하고, 지춘추(知春秋) 정우량(鄭羽良)은 화기(禍機)에 대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앙주(仰奏)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너무 심각하다."
하였다.
12월 2일 임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권혜(權嵆)와 권집(權䌖) 등을 친국하고, 세분(世分)을 다시 잡아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신문하기를,
"네가 권혜와 모의를 하지도 않았고 권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그 여종이 가진 물건을 어찌하여 그렇게 안타깝도록 열심히 구색(求索)했는가? 너를 방송시킨 지 이미 오래이니 너의 집 사람들이 반드시 곡절을 물어 보았을 것인데, 말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 당시에도 또한 여천(驪川)의 집에 사환(使喚)으로서 왕래한 일이 있었는가? 만약 전처럼 공교히 꾸민다면 엄한 형신을 가하여 철저히 추문할 것이다."
하니, 세분이 공초하기를,
"큰 상전(上典)이 죽은 뒤 신은 궁가(宮家)에 왕래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방송되어 나간 뒤 신의 상전이 곡절을 묻기에 신이 여차여차 했다고 말하였더니, 상전이 말하기를, ‘너는 범연히 보았기 때문에 풀이 마른 것인 줄 몰랐지만, 권혜는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풀이 말라 있었던 것을 상세히 안 것이다’ 했습니다. 그것을 습득할 적에 저군(杵軍)185) 2인이 앞에 있었는데 누구의 손에서 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니, 세분이 공초하기를,
"결박을 풀어준다면 그 글을 추출(推出)한 길을 가리켜 고하여 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신이 반비(班婢)가운데 영매(英梅)의 소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전의 말에 의하면 ‘서학동(西學洞)에서 초2일 변을 일으킨 것은 나인(內人) 귀정(貴貞)·태정(太貞)의 소행이다. 초2일 시제(時祭)를 지낼 적에 사당(祠堂)에서 봉출(奉出)할 때는 변이 생긴 일이 없었는데, 봉환(奉還) 때 이런 변이 있었으며 나인들이 여천을 미워하여 이런 변을 일으킨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권혜의 어미도 손바닥을 치면서 통곡하기를, ‘이 변은 나인 태정의 무리가 한 짓인데 우리 아들은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닌가?’ 하니, 권혜의 아내가 ‘어떻게 그런 글인 줄을 분명히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자, 권혜의 어미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의 상전이 신을 구류(拘留)한 것은 조가(朝家)에서 다시 추문하는 거조가 있을까 우려해서였는데, 권혜의 어미가 신에게 ‘네가 다시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태정의 소행이라고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글이 영매의 소매에서 떨어지는 것을 신이 목견했습니다. 만일 영매와 면질하여 말이 군색할 경우에는 신이 마땅히 죽겠습니다."
하였다. 영매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세분이 글을 습득했을 적에는 보지 못했으나 뜯어 볼 때는 보았습니다만, 권혜가 세분과 서로 다툴 적에는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세분이 방송되어 나온 뒤 안상전이 그 곡절에 대해 물으니, 세분이 말하기를, ‘나는 풀이 마르지 않았었다고 하고 권혜는 풀이 이미 말랐었다고 했다.’ 하자, 상전이 말하기를, ‘이 물건은 너와 세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소매에서 떨어진 것이 틀림없다.’ 했습니다. 신의 사촌인 북실(北實)은 궁노(宮奴)이기 때문에 때로 가서 만났습니다. 상전이 말하기를, ‘이 일은 궁노가 변을 일으킨 것이다.’했습니다만, 또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한 것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영매와 세분을 면질시키라고 명하니, 세분이 영매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 글이 너의 소매에서 떨어지지 않았는가?"
하니, 영매가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안상전이 엄히 질책할 때 어찌하여 이런 사실을 직고(直告)하지 않았는가?"
하자, 세분이 말하기를,
"그때는 안면과 정에 구애되어 고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매가 말하기를,
"내 소매에서 떨어질 적에 네가 분명히 보았는가?"
하니 세분이 말하기를,
"너의 왼쪽 소매에서 떨어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것을 습득한 뒤 네가 그것을 탈취하려 했으나 내가 주지 않았다."
하였다. 다시 영매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본디 여천의 궁가에서 생장하지 않았습니다. 13세 이전에는 유진사(兪進士)의 집에 있었고, 그뒤 권가(權家)로 왔다가 권가에서 향교동(鄕校洞)의 나인 수열(秀烈)에게 팔려갔었는데, 작년에 권가에서 도로 물렸습니다. 태정의 이름은 전혀 잊고 있었는데, 이제 세분의 말을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다시 세분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권혜가 영매를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도 또한 처음에 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친국을 우선 파하라고 명하였다. 그뒤 갑신일(甲申日)186) 에 임금이 포장(捕將)에게 들은 것이 있느냐고 하문하니, 포장 조동점(趙東漸)이 말하기를,
"여천의 가노(家奴)인 공승언(孔承彦)이 평상시 사당을 수호하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불러서 물어보니, 제사지낼 때의 사실을 상세히 진달했습니다. 나인인 차열(次烈)·찬업(贊業)이 촛불을 들었고 태열(太烈)이 분합문(分閤門)을 닫는 것을 관장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뒤에 떨어져서 분합문을 닫은 것이 수상하다."
하니, 포장 구선행(具善行)이 말하기를,
"공승언의 말에 의하면 묘우(廟宇)가 매우 깊숙하고 으슥하기 때문에 나인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하여 대낮에도 혼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그때 태열은 즉시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관(祭官) 가운데는 누가 뒤에 쳐져 있었는가?"
하니, 조동점이 말하기를,
"권혜가 맨 뒤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또 친국을 하였다. 세분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글이 떨어졌다는 말을 처음 상전에게 직고(直告)했다면 영매가 반드시 도주할 것이기 때문에 상전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신장(訊杖) 13대를 쳤다. 영매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세분이 글을 습득하는 상황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이 만일 신의 소매에서 떨어졌다면 반드시 전급(傳給)해 준 사람이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직고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공승언을 체포하여 오라고 명하였다. 공승언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주인과 동년생(同年生)이었기 때문에 7세 때부터 같이 거처하면서 후한 은혜를 많이 받았으므로 반드시 보답하려고 했었습니다. 여천 집 나인의 작부(作夫)데 대한 유무(有無)는 권혜의 여종과 대면하면 분변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영매가 말하기를,
"신문(新門) 밖에 살면서 작부한 나인이 있었습니다."
하니, 공승언이 말하기를,
"작부했다는 것으로 방출(放出)시킨 것이 아닙니다. 상전이 사사로이 좋아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방출시켰는데 그가 스스로 작부를 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연빙(燕聘)이고 그 남편은 박성(朴姓)을 가진 사람으로 교서관의 서리(書吏)입니다. 또 나인으로서 종부시의 서리인 박치번(朴致蕃)을 작부했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언책(諺冊)을 잘 읽었기 때문에 다시 불러다가 집에 두었는데, 그 이름은 귀정(貴貞)입니다. 그의 아우 귀대(貴代)는 여선군(驪善君)187) 이 돌보았는데 지금은 글씨를 잘 쓰는 이태(李泰)를 작부하였습니다. 신의 여서(女壻)는 곧 전 전악(典樂)의 아들 김서해(金恕海)인데, 그가 바로 연빙의 오라비입니다."
하니, 신장 15대를 쳤다. 또 을유일(乙酉日)188) 에 친국하였다. 다시 공승언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태의 사람됨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다만 그가 글씨에 능하며 지혜가 많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였다. 공승언과 영매를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세분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영매가 글을 떨어뜨린 것은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귀정과 태정에 관한 이야기는 권혜의 형이 그 어미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영매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권혜의 어미가 울부짖어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나인 태정·태열의 무리는 혹 알 수 있을 것이다. 초3일 전갈(傳喝)한 사람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공승언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투서한 연유를 전연 모르겠습니다. 신주(神主)를 받들어 도로 봉안(奉安)한 것은 상전이 혼자서 했습니다."
하였다. 권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형이 풍양(豊壤)으로 나갔다 와서야 비로소 여천의 집에 투서한 변괴를 전하였는데, 신의 어미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나인들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만, 태정·귀정에 대한 이야기는 애당초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권혜와 세분을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다. 권혜가 세분을 향하여 말하기를,
"귀정·태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의 입에서 나왔는가?"
하니, 세분이 말하기를,
"서동(西洞)에 변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네가 안상전에게 종용히 말하였고 안상전이 너의 형에게 말했기 때문에 내가 과연 들었다. 안상전이 말하기를, ‘권혜가 형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형이 경솔하기 때문에 혹시 누설시킬까 염려해서이다. 그래서 나를 향하여 귀엣말로 말하기를 「태정·귀정의 소행인데 서울에 분요로움이 일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풍양으로 나온 뒤에야 이런 귀엣말을 한 것이다.’ 했습니다. 그때 돈례(敦禮)·귀단(貴丹)이 곁에 있었으니, 돈례와 면질시키면 어찌 말이 군색함을 당할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권혜가 말하기를,
"신의 어미가 그 일을 세분에게 물으려 했기 때문에 신이 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는 뜻으로 거듭 어미와 세분에게 부탁했습니다. 신의 어미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신의 서삼촌(庶三寸)이 와서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신장 다섯 대를 쳤으며, 세분에게는 신장 13대를 치게 하였다. 귀정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귀정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여천은 신의 부모와 같은데 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권 참봉(權參奉)의 아들이 항상 왕래하여 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의 외모가 흉참(凶慘)스러웠으니, 틀림없이 그 사람의 소행일 것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은 그의 집에도 투서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의심이 모두 권혜에게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권 참봉의 아내는 익히 보아왔는데 그의 인품은 양선(良善)합니다. 귀대는 곧 신의 동생인데 이태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영매는 임신되어 있었으므로 형장을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권돈(權墩)을 잡아 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여기로 들어오게 되면 결단코 다시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부녀들의 음비(陰秘)스러운 일을 가지고 그 아들에게까지 신문하게 되면 뒷 폐단을 예방하기 어려울 것이니, 결단코 길을 열어 놓을 수 없다."
하였다. 병술일(丙戌日)189) 에 이르러 또 친국하였다. 다시 귀정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권 참봉의 아내에게 의심을 받고 있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신 또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권 참봉의 아내에게 이야기를 전한 사람과 면질시켜 주십시오."
하였다. 이태를 잡아 오라고 명했는데, 그는 곧 이태해(李泰海)이다. 이태해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아이 때에 한림(翰林)을 배종(陪從)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신역(身役)이 없습니다. 귀대는 신의 어미가 병이 위중하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내려보냈는데, 그때가 10월 27일이었습니다. 귀대가 귀정에게 왕래한 것에 대해서는 신은 실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신이 비천하기는 합니다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일찍이 무신년190) 에 의병(義兵)을 일으켰었는데 이로 인하여 귀양에서 풀려났었습니다. 신은 조금 필재(筆才)가 있어 장옥(場屋)191) 을 출입했었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많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잡류(雜類)들을 많이 사귀었고 또 부채(負債)가 많은 탓으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권선(權繕) 【권혜의 서숙(庶叔)이다.】 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권선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적모(嫡母)에게 의지하여 있었는데, 적모가 죽은 뒤에는 여천 형제가 신을 애호(愛護)하였습니다. 초9일 여선이 자기 형의 집에서 와서 연대(筵對)에 관한 일을 전하였고 파루(罷漏) 때 해은군(海恩君)192) 이 와서 경사로운 일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그 이유를 물어보니, 말하기를, ‘우리 집에 투서한 일이 있었는데 너의 집에도 투서가 있었다. 그러나 연대의 처분이 모두 무사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어 권혜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권혜가 말하기를, ‘세분과 영매가 방앗간에서 오다가 세분이 봉서(封書)를 습득하였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보았다. 이어 안국동(安國洞)으로 가서 그 봉서를 보였고 며칠이 지난 뒤에 불태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국동에서 「이는 매우 괴이한 일이니, 너는 이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서학동(西學洞)에 알려야 한다.」 했다’고 했는데, 권혜가 전한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신이 이어 권혜에게 묻기를, ‘무슨 일 때문인가?’ 하니, 권혜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이로부터 서학동에는 자취를 끊어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네가 마땅히 서학동에 가서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네가 매우 잘못하였다.’ 했습니다. 신이 또 안국동으로 가서 연석(筵席)에서 주달한 이유를 권집에게 전하니, 권집이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불에 태우게 했고 가서 물어보게 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서 알리게만 하였다.’ 했습니다. 신이 또 권혜에게 묻기를, ‘가서 알리게 하려 한 것은 무슨 의도에서였는가?’ 하니, 권혜가 말하기를, ‘가서 여천에게 물어보아서 여천이 놀라면 내가 자취를 끊어야 하겠다는 의도였다.’ 했습니다. 그뒤 여선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의 망극한 변괴이니 네가 잘 기찰(譏察)하여 가지고 오라.’ 했습니다."
하였는데, 권선을 방송시키라고 명하고, 옥랑(玉娘)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이태의 형적(形跡)이 수상하였는데, 그의 아내 귀대가 시골로 내려간 날짜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포도청에서 널리 규포(窺捕)하였다. 옥랑도 거기에 관련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옥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태의 아내가 초2일에는 미처 출발하지 못했고, 초3일에야 비로소 출발한 상황을 신이 과연 보았습니다."
하였다. 옥랑을 이태와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이태가 말하기를,
"10월에 출발하였습니다."
하고, 옥랑은 말하기를,
"11월 초3일에 출발하였습니다."
하였다. 옥랑과 귀정을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귀정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잘못 알았습니다."
하였다. 옥랑을 방송시키라고 명하였다. 또 정해일(丁亥日)193) 에 친국하였다. 다시 권혜를 신문하니, 공초한 내용은 권선의 말과 같았다. 다시 권선을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권선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여천의 집에 투서가 있었던 일을 과연 권혜에게 말하였습니다만, 권혜가 먼저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권혜와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다. 권혜가 권선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말하기를, ‘여천의 집에 투서의 변이 있었기 때문에 놀라서 걱정하고 있는 즈음에 네가 또 가서 물어보았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여천의 집에 투서한 일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하니, 권선이 말하기를,
"그 말은 옳다. 네가 나에게 말하기를, ‘네가 서학동에 가서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여선의 집에 갔더니 여선이 「서학동에 투서한 변괴가 있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던 즈음에 권혜가 와서 자기 집에 천서(天書)가 있는데, 이 일을 형과 숙부에게는 말하지 않고 오촌 숙부에게 말했다고 하니, 매우 괴이하다.」고 하더라.’ 하니, 네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담장이 있는 곳으로 나가서 너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 봉서를 습득했으면 당연히 서학동으로 가져가서 보여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수상한 짓을 했는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여천에게 물어보아서 놀라면 자취를 끊으려고 했다.’고 하였다."
하자, 권혜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또 권선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권강(權絳)의 집으로 가서 상교(上敎)로써 적수(嫡嫂)에게 물어 보았더니 적수가 말하기를, ‘서학동의 나인들이 한 짓이 틀림없다. 권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는가? 이런 내용을 세분이 곁에서 듣고 있는 곳에서 과연 말하였다. 그러나 원래 지적하여 나인의 이름을 말한 적은 없었다. 단지 애통스런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적형수(嫡兄嫂)의 인품은 본디 마음이 넓지 못합니다만, 귀정·태정에 대해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아들 권돈이 아직 있으니, 상언(上言)하여 원통함을 호소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비천한 비자(婢子)들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분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무고(誣告)한 것이 아니라 직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권선을 방송시키라고 명하였다. 어제 친국 하고 나서 갑자기 권선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권선에게 하교하기를,
"듣건대 권혜의 어미가 여천의 집에 투서한 것은 곧 그집 나인들의 소행인 것이지 내 아들이 무슨 참여한 것이 있느냐? 고 했다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권혜가 억울한 것이 된다. 부녀(婦女)를 체포하여 신문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가엾이 여기고 답답해 한다."
하였다. 오늘 또 갑자기 권선을 체포하라고 명하니, 대신(大臣) 이하가 임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권선이 체포되어 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가서 권혜의 어미를 만나 말하는 사이에 반드시 어제의 하교 내용을 언급하여 전하였을 것이다."
하니, 권선이 말하기를,
"과연 언급했는데 권혜의 어미가 말하기를, ‘너무나 원통하다 보니 과연 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그것이 사실인 줄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고 이어 권선을 방송시켰다. 임금의 의도는 반드시 부녀를 나치(拿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권선을 방송시켜 그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했던 것이고, 권선을 체포하여 다시 신문함으로써 대신이 권혜의 어미를 잡아 오기를 청한 의심을 타파시킨 것인데, 이에 신하들이 비로소 열복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권선을 풀어주었다가 다시 또 체포한 것은 권모 술수에 가깝고 또한 권선을 속인 것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직접 십행(十行)의 글을 지어 신하들에게 권모 술수를 쓰지 말라고 경계시켰으며, 이를 문랑(問郞)으로 하여금 읽어서 유시하게 하였는데, 형벌을 신중히 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이 말하는 표면에 넘쳐흘렀다. 다시 세분을 신문하고 신장 23대를 쳤다. 다시 권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그 글이 천작(天作)인지 인작(人作)인지를 모르겠었습니다. 여천에게 가서 물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심동(心動)이란 말은 과연 신의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권혜가 사체(四體)가 모두 떨려 착명(着名)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보고서 하교하기를,
"심동이란 두 글자만으로도 죽이기에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미 착명을 할 수 없으니, 시형(施刑)할 수 없다."
하고, 금부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선왕(先王)의 정치는 인(仁)보다 더 앞세운 것이 없고, 국가에서 신중히 할 것은 형(刑)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그윽이 성상께서 죄수를 국문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장(杖) 한 대라도 잘못 사람에게 가하여질까 두려워하여 단서가 이미 드러나고 죄악이 다 밝혀졌어도 또한 반드시 분명하게 순문(詢問)하고 반복하여 상량(商量)하였으며, 형틀에 비끄러매고 매질을 가함에 있어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여겼으므로, 형을 받아 죽는 사람도 반드시 유감이 없었다. 뒷날 국맥(國脈)이 장구히 이어가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를 힘입은 것일 것이니, 이것이 어찌 후사왕(後嗣王)이 감계(監戒)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이태(李泰)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여천(驪川)에게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투서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풍운(風雲)·변화(變化)라는 네 글자는 신이 과연 사람에게 써서 주었습니다."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심동(心動)’이라는 말은 전연 깨닫지 못했습니다. 권혜의 문필(文筆)로는 이를 판출하기에 부족합니다. 따라서 신에게 의심을 귀결시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만일 권혜를 시켜 이런 일을 하게 했다면 어찌하여 권혜가 서울에 있을 때 하지 않았겠습니까? 권혜가 풍양(豊壤)으로부터 잠시 서울로 들어간 것은 신이 처음부터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 글을 보고 그것이 음참(陰慘)스럽다는 것을 알고서 불에 태우게 했었습니다만, 권혜는 나이가 어리고 무식한 탓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신은 잔약하고 병든 몸으로 나이 이미 67세인데,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니, 공초하기를, "‘심동’이라는 두 글자는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권혜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조선(祖先)의 훈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그것은 결단코 신어(神語)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조훈(祖訓) 등의 일을 물은 것은 권혜도 또한 그것이 음참스러운 것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세분(世分)을 신문하고 신장(訊仗) 8대를 쳤다. 또 무자일(戊子日)194) 에 추국(推鞫)하였는데, 신장 21대를 치자 기절하였으므로 형을 정지하였다. 세분이 물고(物故)되었다. 의계(議啓)하기를, "죄인 권혜가 반은 실토하고 반은 숨기면서 모질게 참고 자복(自服)하지 않으므로 신장 21대를 치니, 기절하였습니다. 청컨대 조금 기다리게 하여 주소서. 권집은 그 정적(情跡)이 점차 드러나고 있으니, 다시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하였다. 기축일(己丑日)195) 에 이르러 추국하였다. 권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권혜는 병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음참한 그 글을 다 해설하지 못했던 탓으로, 단지 여천을 향한 욕설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신이 그 문세(文勢)를 살펴보건대, 증(增)자는 결단코 인명(人名)이었기 때문에 과연 여천으로 여기게 되어 망령되고 경솔하게 입밖에 냈던 것입니다. 권혜는 심병(心病)이 있어 조금만 놀라운 일을 들어도 반드시 두려워 걱정하는 것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세하게 말하여 준다면 그의 본병(本病)이 다시 발작될까 염려스러웠으나, 이런 말을 가는 곳마다 항상 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고 여겼기 때문에 그에게 상세히 말하여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먹은 뜻이 용의 주도했다는 등의 일은 천만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에게 가형하려고 했습니다만,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여서 도로 하옥(下獄)시켰습니다. 권집은 말이 군색하여 감추기도 하고 실토하기도 하면서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으니, 청컨대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우선 파하라고 명하였다. 경인일(庚寅日)196) 에 또 권집을 친국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서 과연 망발을 했습니다. 석금갑(射琴匣)의 글을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만, 깨달아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가형하라고 명하니, 공초하기를, "가사(家事)는 가장(家長)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권혜를 살리고 신을 죽인다면 신은 달갑게 받겠습니다."하니, 신장 30대를 쳤다. 권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여천을 욕한 말은 신이 못들었으며 ‘심동’이라는 말은 곧 신이 한 말이요 권집이 시킨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권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원범(元犯)을 잡지 못하고 권혜가 어리다는 것으로 신에게 의심을 두고 있으나, 끝에 가서는 반드시 죄인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신장 30대를 쳤다. 귀대(貴代)를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귀대가 공초하기를, "10월 23일이나 24일 사이에 시골로 내려간 것 같은데, 6일 반 만에야 비로소 청주(淸州)에 도착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귀정(貴貞)·귀대(貴代)는 혐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으니, 영매(英梅)와 아울러 방송시키라. 이태는 추조(秋曹)로 이송(移送)시키라." 하고, 하교하기를, "이태가 석방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서울에 숨어 있었던 것은 통분스럽고 놀라운 데 관계된다. 이번 일로 미루어 본다면 그의 행동이 교사스럽고 궤휼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추조로 하여금 일차(日次)에 구애없이 3차의 엄형(嚴刑)을 가한 뒤에 진도군(珍島郡)에 도배(徒配)하게 하였다. 임진일(任辰日)197) 에 이르러 추국하였는데, 권혜의 공초는 전과 같았으므로 신장 30대를 쳤다. 권집에게도 신장 30대를 쳤다. 또 권혜를 신문하고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권집은 말이 군색하여 파탄(破綻)이 나고 있으니, 아울러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고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권집이 모질게 참으면서 자복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아울러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으나 내일 아침 입시(入侍)하기를 기다려서 하게 하였다. 갑오일(甲午日)198) 에 이르러 권집이 물고되었다. 정유일(丁酉日)199) 에 이르러 추국하였는데, 다시 권혜를 신문하고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가 전처럼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으니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세(病勢)가 위급하다는 것으로 가형하지 않았는데, 다음날 권혜가 물고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18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185] 저군(杵軍) : 방아 찧는 사람.[註 186] 갑신일(甲申日) : 12월 4일.[註 187] 여선군(驪善君) : 이학(李壆).[註 188] 을유일(乙酉日) : 12월 5일.[註 189] 병술일(丙戌日) : 12월 6일.[註 190]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91] 장옥(場屋) : 시장(試場).[註 192] 해은군(海恩君) : 이당(李爣).[註 193] 정해일(丁亥日) : 12월 7일.[註 194] 무자일(戊子日) : 12월 8일.[註 195] 기축일(己丑日) : 12월 9일.[註 196] 경인일(庚寅日) : 12월 10일.[註 197] 임진일(任辰日) : 12월 12일.[註 198] 갑오일(甲午日) : 12월 14일.[註 199] 정유일(丁酉日) : 12월 17일.
사신(史臣)은 말한다. 선왕(先王)의 정치는 인(仁)보다 더 앞세운 것이 없고, 국가에서 신중히 할 것은 형(刑)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그윽이 성상께서 죄수를 국문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장(杖) 한 대라도 잘못 사람에게 가하여질까 두려워하여 단서가 이미 드러나고 죄악이 다 밝혀졌어도 또한 반드시 분명하게 순문(詢問)하고 반복하여 상량(商量)하였으며, 형틀에 비끄러매고 매질을 가함에 있어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여겼으므로, 형을 받아 죽는 사람도 반드시 유감이 없었다. 뒷날 국맥(國脈)이 장구히 이어가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를 힘입은 것일 것이니, 이것이 어찌 후사왕(後嗣王)이 감계(監戒)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이태(李泰)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여천(驪川)에게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투서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풍운(風雲)·변화(變化)라는 네 글자는 신이 과연 사람에게 써서 주었습니다."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심동(心動)’이라는 말은 전연 깨닫지 못했습니다. 권혜의 문필(文筆)로는 이를 판출하기에 부족합니다. 따라서 신에게 의심을 귀결시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만일 권혜를 시켜 이런 일을 하게 했다면 어찌하여 권혜가 서울에 있을 때 하지 않았겠습니까? 권혜가 풍양(豊壤)으로부터 잠시 서울로 들어간 것은 신이 처음부터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 글을 보고 그것이 음참(陰慘)스럽다는 것을 알고서 불에 태우게 했었습니다만, 권혜는 나이가 어리고 무식한 탓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신은 잔약하고 병든 몸으로 나이 이미 67세인데,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니, 공초하기를,
"‘심동’이라는 두 글자는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권혜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조선(祖先)의 훈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그것은 결단코 신어(神語)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조훈(祖訓) 등의 일을 물은 것은 권혜도 또한 그것이 음참스러운 것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세분(世分)을 신문하고 신장(訊仗) 8대를 쳤다. 또 무자일(戊子日)194) 에 추국(推鞫)하였는데, 신장 21대를 치자 기절하였으므로 형을 정지하였다. 세분이 물고(物故)되었다. 의계(議啓)하기를,
"죄인 권혜가 반은 실토하고 반은 숨기면서 모질게 참고 자복(自服)하지 않으므로 신장 21대를 치니, 기절하였습니다. 청컨대 조금 기다리게 하여 주소서. 권집은 그 정적(情跡)이 점차 드러나고 있으니, 다시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하였다. 기축일(己丑日)195) 에 이르러 추국하였다. 권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권혜는 병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음참한 그 글을 다 해설하지 못했던 탓으로, 단지 여천을 향한 욕설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신이 그 문세(文勢)를 살펴보건대, 증(增)자는 결단코 인명(人名)이었기 때문에 과연 여천으로 여기게 되어 망령되고 경솔하게 입밖에 냈던 것입니다. 권혜는 심병(心病)이 있어 조금만 놀라운 일을 들어도 반드시 두려워 걱정하는 것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세하게 말하여 준다면 그의 본병(本病)이 다시 발작될까 염려스러웠으나, 이런 말을 가는 곳마다 항상 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고 여겼기 때문에 그에게 상세히 말하여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먹은 뜻이 용의 주도했다는 등의 일은 천만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에게 가형하려고 했습니다만,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여서 도로 하옥(下獄)시켰습니다. 권집은 말이 군색하여 감추기도 하고 실토하기도 하면서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으니, 청컨대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우선 파하라고 명하였다. 경인일(庚寅日)196) 에 또 권집을 친국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서 과연 망발을 했습니다. 석금갑(射琴匣)의 글을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만, 깨달아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가형하라고 명하니, 공초하기를,
"가사(家事)는 가장(家長)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권혜를 살리고 신을 죽인다면 신은 달갑게 받겠습니다."하니, 신장 30대를 쳤다. 권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여천을 욕한 말은 신이 못들었으며 ‘심동’이라는 말은 곧 신이 한 말이요 권집이 시킨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권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원범(元犯)을 잡지 못하고 권혜가 어리다는 것으로 신에게 의심을 두고 있으나, 끝에 가서는 반드시 죄인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신장 30대를 쳤다. 귀대(貴代)를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귀대가 공초하기를,
"10월 23일이나 24일 사이에 시골로 내려간 것 같은데, 6일 반 만에야 비로소 청주(淸州)에 도착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귀정(貴貞)·귀대(貴代)는 혐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으니, 영매(英梅)와 아울러 방송시키라. 이태는 추조(秋曹)로 이송(移送)시키라."
하고, 하교하기를,
"이태가 석방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서울에 숨어 있었던 것은 통분스럽고 놀라운 데 관계된다. 이번 일로 미루어 본다면 그의 행동이 교사스럽고 궤휼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추조로 하여금 일차(日次)에 구애없이 3차의 엄형(嚴刑)을 가한 뒤에 진도군(珍島郡)에 도배(徒配)하게 하였다. 임진일(任辰日)197) 에 이르러 추국하였는데, 권혜의 공초는 전과 같았으므로 신장 30대를 쳤다. 권집에게도 신장 30대를 쳤다. 또 권혜를 신문하고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권집은 말이 군색하여 파탄(破綻)이 나고 있으니, 아울러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다시 권집을 신문하고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권집이 모질게 참으면서 자복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아울러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으나 내일 아침 입시(入侍)하기를 기다려서 하게 하였다. 갑오일(甲午日)198) 에 이르러 권집이 물고되었다. 정유일(丁酉日)199) 에 이르러 추국하였는데, 다시 권혜를 신문하고 신장 30대를 쳤다. 의계하기를,
"권혜가 전처럼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으니 가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세(病勢)가 위급하다는 것으로 가형하지 않았는데, 다음날 권혜가 물고 되었다.
12월 5일 을유
사간 이구령(李耉齡)이 아뢰기를,
"지금 이 국옥(鞫獄)은 더없이 요악(妖惡)스러운 것인데도 단서가 정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국청(鞫廳)에서 있었던 귀정(貴貞)의 일은 매우 의심스러운 데 관계가 되는 것으로 성의(聖意)의 소재가 있어 이렇게 순문(詢問)하는 윤음(綸音)을 내리신 것입니다. 권돈(權墩)이 이미 귀정의 일을 긴요하게 내놓았으니 옥체(獄體)에 있어 다방면으로 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돈을 속히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내가 고집하는 것이 있어서 윤허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12월 7일 정해
하교하기를,
"신문(訊問)하는 법규는 신문하기 전에 수본(手本)을 바치는 일이 없는 것인데, 이는 그들이 모르고서 형신하는 것으로, 형벌을 신중히 하는 도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뒤로도 수본을 바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기에 이를 항식(恒式)으로 정하는 것이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알게 하라. 또한 추조(秋曹)에도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12월 8일 무자
유엄(柳儼)을 대사헌으로, 박춘보(朴春普)를 대사간으로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심관(沈鑧)·임순(任珣)을 지평으로, 구윤명(具允明)을 정언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제학으로, 민백창(閔百昌)을 보덕으로, 황인검(黃仁儉)을 겸 설서로 삼았다.
12월 9일 기축
하교하기를,
"무릇 가형(加刑)할 때 초사(招辭)에서 억울하다고 일컫는 일이 있어, 승복하지 않을 경우에라도 전초(前招)의 내용과 가감(加減)이 없다고 쓰는 것은 내가 형벌을 신중히 하는 뜻을 위하는 방도가 아니다. 이 뒤로는 억울하다고 일컬으면서 다른 긴요한 말이 없을 경우에는 전례에 의하여 가형하게 하기를 기다리되, 공사(供辭)에는 반드시 기재하라는 내용으로 해부(該府)와 추조(秋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12월 10일 경인
박필재(朴弼載)를 승지로, 홍계희(洪啓禧)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동지 김진상(金鎭商)이 상소하여 5품으로 물러갔다가 2품으로 나오는 것은, 실로 낮은 벼슬을 사양하고 높은 벼슬에 거처한다는 혐의가 있다는 것으로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박필재(朴弼載)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11일 신묘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판의금으로, 정우량(鄭羽良)을 판윤으로, 조재민(趙載敏)을 사간으로, 권혁(權爀)을 평안 감사로, 한덕필(韓德弼)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12월 12일 임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조명리(趙明履)·이창의(李昌誼)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신사건(申思建)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12월 14일 갑오
대신(大臣)과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여천(驪川)이 청대(請對)했을 때의 일기(日記)를 마땅히 뒤에 상고해야 하니,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베껴 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구윤명(具允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외(京外)에 도둑이 발호하는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으니, 해당 대장(大將)을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부 【지평 심관(沈鑧)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 관서(關西)를 제도(諸道)에 견주어 더욱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강(江)가가 모두 보장(保障)의 직로(直路)여서 관방(關防)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니, 제곤(制閫)의 직임과 자목(字牧)의 직책을 신중히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도의 새 병사 조호신(趙虎臣)은 사람됨이 광패스러워 행사(行事)가 전도되고 망령되기 때문에 누차 곤임(閫任)을 맡았었으나 하나도 잘한 실적이 없습니다. 강계(江界)의 새 부사(府使) 남태기(南泰耆)는 영로(嶺路)에서의 비방이 이미 대장(臺章)에 올라 있는데, 다시 변방의 중임을 제수하였기 때문에 물정(物情)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산 부사(理山府使) 김서(金溆)는 사람됨이 잔열(殘劣)하여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변방의 중지(重地)를 결단코 그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일체 아울러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태기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간(臺諫)의 공척이 이미 지나친 것임을 알고 있다. 어찌 이 때문에 경솔히 변방의 직임을 체차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이목(耳目)의 관원이 요료(廖廖)하기만 하던 때에 이런 계청(啓請)이 있었으니, 아울러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경(燕京)에 가는 우졸(郵卒)은 모두 대동역(大同驛)의 소속입니다. 신이 금년 봉사(奉使) 때 역관(驛館)에 유숙할 적에 역졸들이 원통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았더니, 본역(本驛)의 찰방(察訪) 유건(柳謇)이 연화(燕貨)를 나열하여 기록해서 그들에게 출부(出付)시킨 다음 그들로 하여금 생판으로 사서 바치게 하기 때문에 원망과 비방이 낭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법종(法從)이 되어 이런 비루한 짓을 하였으니, 대동 찰방 유 건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한 어떻게 준신(準信)할 수 있겠는가? 우선 나문(拿問)하라."
하였다.
특별히 선혜청(宣惠廳)을 삼청동(三淸洞)의 총융청(摠戎廳)의 터에다 지었다.
12월 15일 을미
황재(黃梓)를 개성 유수로 삼았다.
12월 17일 정유
영돈녕부사 정석오(鄭錫五)가 연경(燕京)에 사신갔다가 중도에서 졸(卒)하였다. 정석오는 조정에 벼슬한 연륜이 오래었으나 소심(小心)하여 근신(謹愼)하였으므로 건명(建明)한 일이 없었다. 정승에 제배되기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공의(公議)가 허여하지 않을 줄 알고 누차 상소하여 체면(遞免)시켜 주기를 청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십리보(十里堡)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
12월 18일 무술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을 소견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한(漢)나라의 임금 가운데 경계해야 될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환제(桓帝)·영제(靈帝)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환제·영제는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다. 가장 경계해야 될 사람은 성제(成帝)이다. 성제는 조정에 임어할 때는 목목(穆穆)한 기상이 마치 신(神) 같았으나 비연(飛燕)과 음란한 짓을 할 때 이르러서는 어찌 다시 목목한 자용(姿容)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하문하기를,
"빈료(賓僚)들 가운데 간절하게 진계(陳戒)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빈객(賓客) 정우량(鄭羽良)이 구용(九容)200) 과 구사(九思)201) 에 대해 진달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족용(足容)을 무겁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하니, ‘예’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족용을 무겁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식색(食色)에 대해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쌀밥과 진수 성찬이 앞에 차려져 있고 화려하고 사치스런 물건들이 눈을 현란시키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네가 신료(臣僚)들을 대하여 ‘나는 여기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더구나 색욕(色慾)은 식욕(食慾)보다 더한 것이니 말해 뭐하겠는가? 좀전에 한나라 성제를 경계하라고 한 뜻은 의미가 깊은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너를 경계시켰다만 신료들은 반드시 이런 등의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21일 신축
화성(火星)이 방성(房星)의 제1성(第一星)을 범하였고,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특별히 대동미(大同米) 2백 석(石)씩을 양주(楊州)와 수원(水原)에 각각 획급(劃給)하여 관용(官用)에 보태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두 고을에서 모두 은결(隱結)을 사실대로 자백하여서 관용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청하여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세도(世道)의 폐단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기강(紀綱)이 퇴폐되고, 탐묵(貪墨)이 풍조를 이루었고, 조경(躁競)이 습관으로 굳어졌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의 말이 대체로 이와 같으나, 이는 모두 범범하게 논한 것으로, 일을 지적하고 사실을 드러내어 말하는 사람은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 깊은 곳에 거처하고 계시니, 무엇을 통하여 기강이 참으로 퇴폐되었고, 탐묵이 참으로 풍조를 이루었고, 조경이 참으로 습관으로 굳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진장(眞贓)의 분명한 증거가 천위(天威)의 지척에서 현발(現發)되었는데, 뭇 신하들이 만약 또 마음대로 비호하여 감싸고 덮어둔 채 전하께 아뢰지 않는다면, 이는 뭇 신하들이 떼 지어 속이는 것이고, 따라서 전하는 위에서 고립(孤立)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폐기되어 있으므로 다시 일푼이나마 세상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만, 너무도 통분스러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태(李泰)가 국문받고 난 다음날 신이 명을 받들어 그 문서를 다시 고열(考閱)하고 있을 적에 판의금 김시형(金始炯)이 와서 말하기를, ‘아무아무 문서가 어제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대저 친국(親鞫)은 사체가 지극히 엄중한 것이므로, 죄인에 관한 문서는 긴헐(緊歇)을 막론하고 이미 수탐(搜探)한 속에 들어 있으면 대신 이하가 전하의 앞에서 직접 고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몰래 발거(拔去)하여 버렸으니, 이는 실로 국청(鞫廳)이 있은 이래 있지 않았던 변괴인 것임은 물론, 오늘날 국가의 기강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즉시 그자리에서 김시형에게 책임을 따지고 말하기를, ‘문서 도사(文書都事)를 엄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만, 김시형이 얼마 안되어 병 때문에 체직되었습니다. 이런데도 버려둔다면 장차 무너진 기강을 진기시킬 수 없게 되고 뒷폐단에 관계되는 것도 끝이 없게 될 것이니, 신은 해당 도사를 나문(拿問)해 엄히 추구하여 기어이 실정을 알아내어서 판의금 김시형은 파직시키고 여러 당상(堂上)들은 아울러 종중 추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어떤 수령(守令) 하나가 전화(錢貨)를 이태의 집으로 태송(駄送)하여, 그로 하여금 각처(各處)에 나누어 선물하게 한 물건을 나열하여 기록한 건기(件記)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가운데서 현출(現出)되었는데, 신이 다시 고열할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발거되어 버렸습니다. 문서는 잃었다고 하더라도 의금부 당상·문랑(問郞)과 시위(侍衞)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근래 외방에서 돈을 진봉(進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항(閭巷)에 성대히 유행되고 있습니다만, 신은 뜬 소문으로 여기고 참으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기필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이 망령된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 무신(武臣)은 목숨을 아끼고 문신(文臣)은 돈을 아낀다는 말은 이것이 악무목(岳武穆)202) 이 송(宋)나라 말운(末運)의 폐단에 대해 마음 아파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참으로 성명(聖明)한 세상, 청평(淸平)한 조정에 또한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런데도 버려둔다면 장차 탐묵을 징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일대(一代)의 진신(搢紳)들이 모두 암매(暗昧)한 데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태가 배소(配所)로 출발하기 전에 다시 엄한 국문을 가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하나 현고(現告)하게 해야 하며 준 자와 받은 자를 아울러 해당되는 율(聿)로 감죄(勘罪)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부정(不靖)한 것에 열중하는 무리들이 공명(功名)에 급급하여 묘염(廟剡)203) 에 의해 승진 발탁되는 즈음에 분주히 뛰어다니는가 하면 조론(朝論)이 이합(離合)되는 기미를 헤아리는데, 그들이 서찰(書札)을 교통(交通)시킴에 있어서는 모두 이태를 연수(淵藪)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대신을 원망하여 비난하고 동대(同隊)를 배격하여 넘어뜨리는 등 그 말이 놀랍고 수치스러워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막고 달아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도가 능이(凌夷)되었다고는 하지만, 참으로 청명한 조정의 금신(衿紳)의 반열에 이렇게 똥파리처럼 쏘다니고 개처럼 구차스러운 행동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데도 버려둔다면 장차 조경을 억제하고 염치를 면려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성대한 때에도 이런 등의 일에 대해 엄히 조처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간혹 일생 동안 폐고(廢錮)시킨 경우가 있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조정이 청명해지고 예양(禮讓)이 흥행(興行)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이 일의 일체를 이태에게 캐어물어 그 사람을 적발하여 조적(朝籍)에서 삭제시켜 조정의 수치를 씻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이 일이 있은 이래로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말하고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으니,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반드시 전하에게 아뢰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수십일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적연(寂然)하기만 한 채 들림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목(耳目)을 대각에 의탁하고 있는데 대각에서 전하를 저버린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은 또 대신이 중후(重厚)하여야 하는 체통을 자처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들추어 내는 것을 혐의하여 그대로 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이 또한 전하를 저버린 것인 반면 윤광리(尹光履)가 남을 웃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태의 일이 있은 이후 행공(行公)한 대신(臺臣)은 일체 먼 변방의 주군(州郡)으로 출보시켜 대풍(臺風)을 면려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신의 천질(賤疾)은 이미 다시 봉직(奉職) 할 수 있기를 바랄 수 없는 상황이고 이상의 진달한 몇 가지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대신(大臣)이 되어 무상(無狀)하여 세도를 진정시키고 조정을 존엄하게 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신을 퇴척(退斥)시키고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다시 복상(卜相)하여 시대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경의 차자를 열람하여 보건대 부끄러워 면목이 없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어찌 보상(輔相)만이 인구(引咎)할 일인가? 하나는 내가 부덕한 소치이고, 또 하나는 잘 인도하여 이끌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문서 도사는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으니 차자에서 청한 대로 잡아다 국문하여 신문하라. 문서를 사출(査出)한 뒤 무겁게 감처(勘處)하겠다. 판금오의 당상(堂上)들도 또한 아뢴 대로 시행하라. 대신(臺臣)들이 당당하게 바른말을 하는 풍도가 있다면 경이 어찌 이런 차자를 올렸겠는가? 이태의 일이 있은 뒤 서울에 있었던 대신(臺臣)들은 아울러 파삭(罷削)시키고 서용하지 않는 법전을 시행하라. 그러나 이태의 일을 사문(査問)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내가 이제 이미 노쇠했으니, 후손을 위하여 좋은 모유(謨猷)를 남겨주는 방도에 대해 바로 양지(諒知)해야 될 때이다.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 것이 본디 나의 마음일 뿐만이 아니라 바른 군자의 도리인 것이다. 그는 애석할 것이 없으나 애석한 것은 진신(搢紳)들이다. 따라서 조사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는데, 뜻이 깊은 조처였다.
임금이 순문(詢問)하기를,
"전화(錢貨)를 바리로 실어다가 서울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게 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승지 박필재(朴弼載)가 말하기를,
"모릅니다."
하고, 수찬 김선행(金善行)은 말하기를,
"문경(聞慶)의 원[倅]인 이복해(李福海)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랫 조항의 일은 무엇인가? 이것이 좌상(左相)이 웃음을 받을 일인가?"
하니, 김선행이 말하기를,
"이태의 문서 가운데 한 장의 서찰이 있었는데, 그 내용에 ‘천섬(薦剡)에 대한 일은 좌(左)가 진실로 통분스럽고 또한 걱정스럽다.’라고 했으니, 좌는 좌상(左相)을 가리킨 것입니다. 좌상이 그때 말하기를, ‘걱정하는 것이 깊으면 말하는 것이 긴절한 것인데, 장차 뺨을 칠 걱정이 있으니 문서를 착치(捉置)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매, 영상(領相)이 말하기를, ‘이는 국사(鞫事)에 관련된 것이 아니니 문서를 착치해서는 안된다. 이미 현출(現出)되었는데 무슨 뺨을 칠 걱정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 웃으면서 파하였습니다. 그때의 서찰을 의금부 당상과 여러 낭청들이 보고서 전 승지 이형만(李衡萬)의 필법(筆法)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이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묘천(廟薦)되기를 도모하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외의(外議)가 모두 그르게 여겼습니다. 정승의 차자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만, 차자의 끝에 진달한 것은 마치 옥사(獄事)를 일으키려는 것 같은 점이 있습니다. 이를 조정의 의논에 올리는 것이 어떠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의견도 그러하다. 이형만의 일은 홍익삼(洪益三)이 진달했는데 나는 들추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런 등의 일이 있으니 인심이 나의 마음 같지는 않다. 나는 늘 세신(世臣)을 사랑하여 보호하라는 것으로 원량(元良)에게 유시했는데, 원량이 이 말을 듣게 되면 어찌 조신(朝臣)을 경시하지 않겠는가? 수령이 돈을 뇌물로 준 것을 사책(史冊)에 기재한다면 후세에서 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 때문에 조사하게 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복해(李福海)는 곧 이수해(李壽海)의 아우이고 이덕해(李德海)의 형인데 모두 무뢰배들로 불의스런 일을 멋대로 행하였다. 그리하여 전화(錢貨)를 바리로 보내어 이태로 하여금 명관(名官)들에게 후한 뇌물을 주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말하기에도 비루하다. 돌아보건대, 무슨 꾸짖을 가치가 있겠는가? 민백창(閔百昌) 같은 사람은 대신의 아들로서 행실이 비루하고 패려스러워 이태에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가친(家親)이 오래지 않아 다시 복상(卜相)되면 나의 묘천(廟薦)에 구애가 될 것 같으니, 모름지기 지금 내부(萊府)의 자리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태가 이형만에게 도모한 것이니, 이형만은 영상과 인친(姻親)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형만의 답서에 ‘좌(左)가 진실로 통분스럽고 또한 우려스럽다.’고 했는데, 그 뜻은 좌상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서찰이 모두 수탐(搜探)하는 속에 들어 있었으므로 대신 이하가 돌려가며 보게 되었는데, 이때 민백창도 문랑(問郞)으로 또한 곁에 있었다. 동의금(同義禁) 윤득화(尹得和)가 이를 민백창에게 전하여 주니 민백창이 즉시 찢어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민백창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좌상의 이번 차자가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의 염치와 명절(名節)이 거의 진기될 수 없을 뻔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21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복해(李福海)는 곧 이수해(李壽海)의 아우이고 이덕해(李德海)의 형인데 모두 무뢰배들로 불의스런 일을 멋대로 행하였다. 그리하여 전화(錢貨)를 바리로 보내어 이태로 하여금 명관(名官)들에게 후한 뇌물을 주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말하기에도 비루하다. 돌아보건대, 무슨 꾸짖을 가치가 있겠는가? 민백창(閔百昌) 같은 사람은 대신의 아들로서 행실이 비루하고 패려스러워 이태에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가친(家親)이 오래지 않아 다시 복상(卜相)되면 나의 묘천(廟薦)에 구애가 될 것 같으니, 모름지기 지금 내부(萊府)의 자리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태가 이형만에게 도모한 것이니, 이형만은 영상과 인친(姻親)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형만의 답서에 ‘좌(左)가 진실로 통분스럽고 또한 우려스럽다.’고 했는데, 그 뜻은 좌상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서찰이 모두 수탐(搜探)하는 속에 들어 있었으므로 대신 이하가 돌려가며 보게 되었는데, 이때 민백창도 문랑(問郞)으로 또한 곁에 있었다. 동의금(同義禁) 윤득화(尹得和)가 이를 민백창에게 전하여 주니 민백창이 즉시 찢어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민백창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좌상의 이번 차자가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의 염치와 명절(名節)이 거의 진기될 수 없을 뻔하였다.
경기의 유생(儒生) 심빈(沈䚔) 등이 상소하여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민우수(閔遇洙)를 불러 맞이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배척하였다.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어석윤(魚錫尹)을 사간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장령으로, 권항(權抗)을 지평으로, 심발(沈墢)·한덕량(韓德良)을 정언으로, 이규채(李奎采)를 부교리로, 조중회(趙重晦)를 수찬으로, 구성임(具聖任)을 형조 판서로, 황재(黃梓)를 개성 유수로, 심악(沈)을 강화 유수로, 정권(鄭權)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12월 23일 계묘
조재호(趙載浩)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교리 임집(任), 사간 어석윤(魚錫胤), 정언 심발(沈墢), 지평 권항(權抗)이 모두 상소하여 이태(李泰)의 일을 엄히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이번 요서(妖書)의 변은 매우 음참(陰慘)스러운 것이었는데, 권혜(權嵆)·권집(權䌖)이 곧바로 죽어버린 탓으로 빙핵(憑覈)할 수 있는 계제가 없어 왕장(王章)을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듣건대 죄인 공승언(孔承彦)에 대해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있다고 하는데, 어제의 연석(筵席)에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이미 신문해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으니, 국체(鞫體)를 엄히 하는 방도에 있어 갑자기 작처해서는 안됩니다. 의당 작처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시키고 이어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사간 어석윤(魚錫胤)은 아뢰기를,
"권혜·권집의 옥사(獄事)는 매우 음흉한 것인데, 죄인이 갑자기 죽어버려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여정(輿情)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공승언에 이르러서는 신문할 만한 정절(情節)이 없지 않아 제신들이 엄히 핵실할 것을 청하고 있으니, 국체를 엄히 하는 방도에 있어 갑자기 작처하라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작처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고 속히 국청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종백이 또 말하기를,
"이태의 죄상에 관해서는 대신의 차자와 대신(臺臣)·유신(儒臣)의 상소에서 남김없이 논렬하였습니다. 그런데 차자에 대한 비답에 의하면 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경우 말단의 폐단이 우려된다는 것으로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독후(篤厚)하게 하는 정사이기는 합니다만, 관계되는 것이 이미 중하니 속히 대신의 청을 윤허하여 철저히 국문한 다음 엄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탐하여 온 문서 가운데에는 돈을 실어다가 나누어 준 이복해(李福海)와, 묘천(廟薦)을 주선한 이형만(李衡萬)에 대해 유신이 이름을 열거하여 연석에서 아뢰었으니, 국체(國體)에 있어 또한 잡아다 국문해야 합니다."
하고, 어석윤은 말하기를,
"대신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세도(世道)가 한심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사서(私書)를 가지고 옥사(獄事)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이라는 하교는 성려(聖麗)가 깊고도 원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는 합니다만, 대신이 차자를 올려 진달한 뒤에도 일체 애매 모호한 상태로 버려두는 것은 사리에 있어 당연한 조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금오(金吾)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엄히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좌상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하유하였다. 이태를 신문하여 일을 만연시키는 것은 사찰(私札)로 인하여 조사를 벌이는 것이 되므로 이에 관해서는 마땅히 처음의 뜻을 지키겠다. 이형만의 일은 조정을 청명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라. 이복해의 일은 백성들의 피땀을 긁어내어 진신(搢紳)들에게 선물을 보냈으니, 이는 곧 하나의 아 대부(阿大夫)204) 이다. 청한 것은 아뢴 대로 하라.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판의금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돈을 선물로 준 일은 또한 장래에 난처한 사단(事端)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의 말이 놀랍습니다. 목목(穆穆)히 청명한 조정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이에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묘섬(廟剡)과 돈을 선물로 준 일은 이를 철저히 신문하는 것이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묘섬에 만일 이태의 일과 관련된 것이 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신문하지 않아도 되겠으나 돈을 선물로 준 일에 이르러서는 의논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탄로가 난 것이 한때의 풍문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닌데도 정우량이 이에 이완(弛緩)시키는 논의를 주장하고 있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치인(金致仁)에게 명하여 문경(聞慶)에 가서 불법과 탐오를 저지른 일에 대해 염탐하여 오게 하였다.
12월 25일 을사
유성(流星)이 천강성(天江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이광직(李光溭)을 지평으로, 어석윤(魚錫胤)을 교리로, 유한소(兪韓蕭)를 문학으로, 이현중(李顯重)을 설서로, 홍계희(洪啓禧)를 형조 참판으로, 이응협(李應協)을 헌납으로 삼았다.
충청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민응수(閔應洙)가 자기의 아들 민백창(閔百昌)이 사찰(私札)의 이름을 지적한 가운데 들어가 있다고 하여 황공해 하면서 인구(引咎)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의 아들이 다행히 국은(國恩)을 받아 이미 아장(亞長)에까지 올라와 있으니, 청탁하여 도모하지 않더라도 혹 묘천(廟薦)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이미 노쇠하여 변읍(邊邑)에 발탁 제수된다고 하더라도 또한 부임하여 갈 수 없는 처지인데, 어찌 촉탁을 넣어 도모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문랑(問郞)으로서 자신의 이름이 문서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과 분함을 견딜 수 없어 손으로 찢어버렸으니, 민백창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 자식을 잘못 가르친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민응수가 자기 아들이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임금 앞에서 분소(分疏)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무엄하단 말인가?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22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민응수가 자기 아들이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임금 앞에서 분소(分疏)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무엄하단 말인가?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로부터 붕당(朋黨)은 탐장(貪贓)을 조사하여 다스리는 옥사(獄事)에서 격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명(明)나라의 동림(東林)205) 은 웅정필(熊廷弼)에게서 그 화(禍)가 빚어졌고, 우리 나라의 동인(東人)·서인(西人)은 이수(李銖)에게서 양쪽이 뒤섞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대저 양좌(楊左)206) 와 삼윤(三尹)207) 은 진실로 일대(一代)의 중망(重望)을 받았습니다만, 은(銀)을 뇌물로 주고 쌀을 선물로 보낸 것은 실로 백세(百世)의 의안(疑案)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옥사(獄事)를 더없이 다그쳤으나 탐장을 징계하지 못한 채 피만 낭자하게 흐르게 되었으므로 지금까지도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정승의 차자는 아무 문서(文書)가 현착(現捉)되는 즈음에 올린 것이 아닌데 그 좌권(左券)이 이제 이미 어디 있습니까? 국수(鞫囚)를 구핵(鉤覈)하게 되면 연좌(連坐)되는 상황이 만연될 우려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세 번 호치당(胡致堂)208) 의 논의를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담벽을 따라 돌며 걱정하고 탄식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동의금 조재호(趙載浩)에게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인유(引諭)가 정당성을 상실했습니다. 누가 이복해(李福海)의 당여가 되려 하기를 양좌(楊左)인 삼윤(三尹) 때처럼 하려 하겠습니까? 원경하가 곁에 있어 신이 일마다 열거하여 거론한다면 그가 감히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의견은 아름다우나 비유(比諭)는 핍근하지 못하다는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조재호가 이어 나아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때 성인(聖人)들은 용사(龍蛇)와 호표(虎豹)에 대해 모두 구처(區處)한 바가 있어 백성들에게 화(禍)를 입히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단지 용사와 호표를 다 제거할 수 없다는 의리만 알고 계실 뿐, 실로 구처하는 요점은 파악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대저 용사와 호표에 대해 그 굴을 충동하여 잠을 깨워 구내(區內)가 소요스럽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만, 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경우에는 반드시 죽여서 종자를 남기게 하지 말아야만이 이에 그들이 몰려와서 사람을 잡아먹는 걱정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권집(權䌖)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요역(妖逆)인데, 일종(一種)의 사람들은 권집을 역적이라 하지 않고는 도리어 용사와 호표를 불러들여 조정에 벌려 세우려 하고 있으니, 신은 성명(聖明)께서 정밀하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신의 이 말은 남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무런 탈이 없는 사람이라면 동서 남북(東西南北)을 막론하고 모두 대화(大化) 가운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요점이 되는 방법은 단지 그 자신의 원기(元氣)를 충만시키게 할 뿐이니, 그렇게 하면 사기(邪氣)가 저절로 간범(干犯)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재호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이어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면서 효고(曉鼓)가 울려서야 파하였다. 조재호는 본디 소론(少論)으로서 탕평(蕩平)을 주장했기 때문에 용사와 호표는 소론 가운데 준론(峻論)을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킨 것이고, 원기는 탕평을 주장하는 당(黨)을 가리킨 것이다.
12월 28일 무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일전에 올린 차자는 단지 조정을 청명하게 하고 국체(國體)를 엄하게 하려 한 것뿐으로, 이 마음이 환하여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신(重臣) 원경하(元景夏)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황조(皇朝)와 본조(本朝)의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이 어쩌면 그리도 분명하지 못합니까? 양좌(楊左)가 은을 뇌물로 받은 것과 삼윤(三尹)이 쌀을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해서는, 신은 그것이 백세(百世)의 무안(誣案)이라고 알고 있을 뿐인데, 중신은 이를 의안(疑案)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의안이라고 하는 것은 일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상황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신이 양좌·삼윤 등 제현(諸賢)들을 처우한 것이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돈을 선물로 보낸 것도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또한 어떻게 곧바로 의안(疑案)으로 귀결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상소에서 ‘좌상의 차자는 아무 문서가 현착(現捉)될 즈음에 올린 것이 아닌데 좌권(左券)이 이제 이미 어디에 있는가?’ 했는데, 그 뜻이 마치 신이 고의로 의도를 품고서 현착되었을 즈음에는 말하지 않고 있다가, 이미 잃어버린 뒤에 추론(追論)하면서 잇달아 연좌(連坐)시켜 만연되게 할 계획을 세우고서 그렇게 한 것처럼 했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과 중신은 서로 조정에서 주선(周旋)한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도 의심하지 않을 것을 그가 의심하고 있으니, 신이 여기에 이르러 이는 내력(來歷)이 있는 것으로 증좌(證左)가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문서(文書)를 잃어버렸다 해도 이는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은 것인데, 잇달아 연좌되어 만연될 걱정을 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신은 평생 기구(崎嶇)한 행실과 음암(陰暗)한 일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중신에게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러고서 다시 무슨 낯으로 정승의 자리에 염치를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면(遞免)시켜 주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정언 심발(沈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엊그제의 진연(診筵)에서 대신이 자기 아들이 범한 것을 이미 수실(首實)했다고 하는데 연석(筵席)에서의 말은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상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 개략(槪略)을 듣건대 그가 한 말은 마치 분소(分疏)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는 평소 사랑에 빠져 자기 자식의 악을 모른 데서 온 소치인 것으로 신은 삼가 대신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아! 은밀히 비류(非類)들과 교결하여 묘선(廟選)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이미 진신(搢紳)들 사이의 하나의 큰 수치스런 일로서 더욱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국옥(鞫獄)의 문서는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그 서찰(書札) 가운데 일이 자기에게 관계된 것을 몰래 가져다가 멋대로 발거(拔去)하여 평상시 교결한 자취를 숨기고 이어 뒷날 빙열(憑閱)할 자료를 끊어 버렸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일인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민백창(閔百昌)에 대해 먼저 선부(選部)로 하여금 영구히 사적(仕籍)에서 간삭(刊削)시키게 하고 또한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엄히 단죄하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날 문서를 잃어버렸을 적에 의금부 당상이 미처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고, 그뒤 그 사실을 앙대(仰對)할 적에 유신(儒臣)이 끝까지 말하지 않았으니,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켜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한덕량(韓德良)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명관(明官)이 되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공공연히 남의 전화(錢貨)를 받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태(李泰)가 거짓 건기(件記)를 만들어 아무 아무의 집에 수납(輸納)했다고 하면서 돈을 낸 사람을 나타낸 것은, 자신의 공로를 드러낼 계책을 세우고나서 돈은 그가 스스로 착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의당 분명히 조사하여 적발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신(搢紳)들을 위해 이렇게 곡진하게 설문(說問)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핵(査覈)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한덕량이 어찌하여 이렇게 발명(發明)하는가? 뒷날 이태가 공사(供辭)할 적에 이 무리들이 반드시 이 말로써 자복(自服)케 할 것이다."
하자, 판의금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한덕량의 상소는 그 내용이 줏대가 없고 구차스러웠으니, 의당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어 민백창에 대한 일을 대신에게 하문하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미 대신(臺臣)의 탄핵이 있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민백창을 사적(仕籍)에서 영구히 간삭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익하(鄭益河)가 전화(錢貨)에 관한 적기(籍記)를 조사해 내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경이 의금부 당상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면 또한 전기(錢記)를 숨기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
하자, 정익하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이조 판서 서명빈(徐命彬)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책수(責授)하였다. 서명빈이 대간의 말 때문에 인입(引入)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누차 소명(召命)을 어겼으므로 이에 출보(黜補)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12월 29일 기유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세제(歲除)가 닥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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