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일 경술
팔도와 양도(兩都)에 유시를 내려 모든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게 하였다.
1월 2일 신해
병조에서 아뢰기를,
"초하룻날 돈의문(敦義門)·소의문(昭義門)·흥인문(興仁門) 세 성문을 파루가 치기 전에 앞질러 열었으니, 청컨대 문을 지키는 장졸을 곤장을 치고 태거(汰去)하여 징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부사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도사(都事) 심수(沈鑐)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돈을 보내 준 문서를 감추어 둔 자는 바로 동지의금부사 윤득화(尹得和)입니다. 자수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아뢸 길이 없습니다.’ 하니, 심수를 잡아 가두어 공초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계문이 들어오자 윤득화가 비로소 자수하여 말하기를,
"이태(李泰)의 문서에서 돈에 관한 기록 가운데 정동(貞洞)·한동(翰洞)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한동은 바로 민백창(閔百昌)이 사는 곳인 까닭에 신이 과연 민백창에게 전해 주었더니 민백창이 이를 소매 속에 넣고 갔습니다."
하고, 민백창이 자수하여 말하기를,
"윤득화가 찢어진 종이 한 조각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별로 긴요하지 않으니 자네가 이것을 찢어 버리라.’고 하기에 엉겁결에 그의 말대로 손 가는 대로 모조리 찢어 버렸습니다. 그 찢어진 조각을 다시 보니 과연 그것은 이태의 매일 쓴 돈의 하기(下記)였는데, 그 수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았으나 종이가 찢어져 돈이 많은지 적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태가 지금 한동에서 살고 있으므로 일찍이 한동이라는 글자에 의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1월 4일 계축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맥하였다. 제조(提調) 이주진(李周鎭)이 영양과 맛이 있는 반찬을 드시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평상시에도 내가 먹는 것에 영양과 맛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가난한 백성의 굶주림을 생각하면 지금 먹는 것만으로도 역시 과하다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새해의 해일(亥日)·자일(子日)의 공물을 으레 관솔을 바치면 궁중에서 돼지와 쥐의 신(神)을 태우고 삶는데, 대개 민간에서 들쥐와 멧돼지가 곡식을 해치는 것을 증오하여 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장강(張綱)이 말하기를, ‘큰 도둑이 요로를 차지하여 권세를 떨치는데, 좀도둑을 물어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 백성을 갉아먹는 탐관 오리는 하나도 삶아 죽이지 못하고 한갓 죄없는 돼지와 쥐의 신만 태운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올해의 관솔 공물을 없애라고 명하였으니 이 역시 장강의 매륜(埋輪)하는 뜻001) 이다. 그러나 탐관 오리는 어사(御史) 한 사람이면 충분하지만, 오늘날 인간 호랑이가 조정에서 날뛰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 어사가 없앨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부제조 유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
"서명빈(徐命彬)이 바야흐로 외직으로 경주(慶州)에 보임되었는데, 서명빈은 일찍이 도백(道伯)을 역임하였으니 부임할 수 없고, 또 경주 영장(慶州營將) 이윤성(李潤成)은 곧 서 명빈의 옛 비장(裨將)이었는데 지금은 상관이 되었으니, 체모상 역시 견제받는 바가 있습니다. 다른 도로 옮겨 보임하심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한낱 승지가 아뢸 말이겠는가? 유복명을 추고(推考)하고, 서명빈은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옮겨 제수하라."
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차자를 보니, 아! 대료(大僚)의 평소 뜻한 바와 행한 업적을 돌이켜보건대 조제(調劑)에 있지 않았습니까? 고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은 일찍이 ‘백 번 참는다.[百忍]’라는 글자로써 붕당을 없애는 방법을 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대료는 반드시 조정을 맑게 하고 국체(鞫體)를 엄격히 하려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그 멀리 내다보면서도 뒤를 돌아봄을 흠탄하지만 또한 범연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둑이 헐면 무너지고 그릇이 금가면 깨어지는 것은 필연의 추세입니다. 신의 상소가 만약 지나치게 염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하겠지만 서로 의심했다고 생각한다면 진실로 생각 밖의 일입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즉시 도성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평생 소신은 ‘파당(破黨)’ 두 글자였는데, 이제 짐짓 없는 일을 만들어 당파를 격동시켜 중신(重臣)들에게 근심을 끼치는 바가 되어 마음과 말이 다르고 두뇌(頭腦)가 크게 어그러졌으니, 살아서는 밝은 조정에서 얼굴을 들 수 없고 죽어서는 신의 형을 저승에서 볼 낯이 없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부끄러우니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시골로 물러나게 하기를 비니, 임금이 위로하고 격려하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에 총재(冢宰)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이종성(李宗城)이 전망(前望)에 있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버리고 싶었으나 임금의 마음이 불편할 것을 염려하였고, 좌의정 조현명은 비의(備擬)하고 싶었으나 노론(老論)에서 말을 할 것을 걱정하여 서로 미루어 천망(薦望)을 들이지 못하였다. 조현명이 또 인입(引入)하니, 하교하기를,
"천망이 들어와야만 잠자리에 들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마침내 천망을 들였으나 이종성은 천망에 들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해가 바뀌어도 보상(輔相)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는가?"
하고, 다시 천망하기를 명하였다. 대개 이종성은 소론(少論)의 준론(峻論)으로서 일찍이 이광좌(李光佐)를 위하여 상소하면서 사표(師表)라고 이르니 노론에서 바야흐로 죄를 성토하는 소리가 낭자하였었다. 김재로는 노론으로서 탕평(蕩平)을 주장하면서도 오히려 그를 기색하려 하였고, 조현명은 소론으로서 탕평을 주장하면서 그를 기색하지 않으려 하였으니, 임금이 두 상신이 각각 파당적 습성을 잊어버리지 않음을 노여워하였다.
임금이 종묘(宗廟) 및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종묘에서부터 영녕전에 이르기까지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왔는데, 약원의 여러 신하들이 보련(步輦)을 타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고(聖考)께서는 임진년002) 이후부터는 편찮으셔서 전알하지 못하셨다. 나도 늙었으니 비록 걸어서 태묘(太廟)를 알현하고자 하여도 어떻게 매양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실로 중유(仲由)가 쌀을 진 것003) 을 생각하는 뜻이다."
하였다. 이날 밤은 곧 춘향(春享)이니 임금이 판위(版位)로 나아가 몸소 희생(犧牲)을 살폈는데, 대축(大祝)이 희생의 살짐을 고함이 성실치 않았기 때문에 행사가 끝난 후 멀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연초의 전알에 대신이 한 사람도 어가(御駕)를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이 이미 늙었는데, 그가 세상에 살 날이 얼마이기에 과거의 습관대로 하려 하는가?"
하였는데, 임금의 음성이 매우 평온하지 않았다. 종묘의 문을 나와 연(輦)을 멈추고 어제시(御製詩)를 내렸으니, 이르기를,
"세도(世道)의 진정됨을 알고자 하면
동반에 대신다운 자가 있는가를 물어보라."
하였다. 이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새로 그린 세조(世祖)의 어용(御容)을 뵙고 이어 숙종(肅宗)의 어용 앞에 꿇어앉아 울었는데, 날이 저물도록 차마 일어나지 않으니 배종하던 신하들이 감동하여 비감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어저께 전장(銓長)을 천망(薦望)함에 있어서 이종성(李宗城)에 대해 대각(臺閣)의 의논이 아직도 격렬하고 전조(銓曹)에서 오랫동안 기색하였으며, 묘당(廟堂)에서도 역시 한번도 정망(停望)한 적이 없었던 까닭에 우선 의망(擬望)하지 말자는 뜻을 요상(僚相)에게 서면으로 상의하였더니 요상이 인입(引入)하겠다고 하면서 전혀 가부(可否)에 대한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결국 다시 상의하였더니 요상이 말하기를, ‘이것은 의견이 달라서 다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에게 곧바로 거행하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망(薦望)이 들어와야만〉 잠자리에 들겠다는 하교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하는 수 없이 논의한 바를 써서 올렸으니, 이것은 어리석은 소견을 굳이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번 공의(公議)를 보여 진정하는 방도를 삼으려고 한 것인데, 성상의 하교가 또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망하는 일을 맡겠으며, 성상께서도 또한 어떻게 다시 천망하라고 신에게 굳이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새해가 되었으니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이종성의 일에 대해 영의정과 서로 버틴 것은 적흑자(翟黑子)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 건건 이기기를 다투고 분쟁을 일으켜 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은 신의 본의가 아닙니다. 그 일을 정망(停望)하고 정망하지 않고 간에 당초부터 큰 관심을 둔 적도 없었고, 더구나 면직시켜 주기를 비는 가운데에서 간섭하는 것은 부당한 까닭에 서면으로 문의해 왔을 때 혼자서 천망하기를 권했던 것입니다. 수상(首相)의 의도 역시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고종(高宗)이 있지 않았더라면 부열(傅說)004) 이 어떻게 〈고종을 도와〉 선정을 베풀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지금 덕이 없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하였다.
1월 7일 병진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1월 8일 정사
이종성(李宗城)을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판서로 삼고, 하교하기를,
"내 어찌 구차스럽게 대신의 손을 빌리겠는가?"
하였다.
문경 어사(聞慶御史) 김치인(金致仁)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김치인을 인견하니, 문경 현감 이복해(李福海)의 불법 문서를 올렸다. 임금이 친히 열람하고 말하기를,
"이복해는 수령으로서 조정의 귀척(貴戚)에게 돈을 먹였으니, 이러한 일은 왕위에 오른 후 처음 본다. 돈을 먹인 곳을 내가 말하지 않겠지만 7, 80민(緡)에 이르도록 심히 많으니 문경에 어찌 그리도 돈이 많은가?"
하니, 옥당(玉堂) 윤상임(尹尙任)이 말하기를,
"이것을 탐욕이나 더럽다는 말로 할 수 없으니 바로 도적의 행위입니다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수령의 개인 장부를 성상께서 친히 열람하시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말은 사리에 맞으나 탐관(貪官)을 징계하고자 한 까닭에 친히 보았다."
하고, 이어 윤득화(尹得和)와 민백창(閔百昌)이 자수한 문안(文案)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백창의 무리가 만약 죄를 저지른 것이 없다면 사건의 기록 가운데 비록 한동(翰洞)이라고 쓰여 있더라도 한동에 사는 사대부가 꼭 민백창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윤득화가 하필 한동이라는 글자로써 죄를 민백창에게 돌리고 민백창 역시 어찌하여 받아 찢어 버려서 그 형적을 감추었는가? 윤득화는 재신(宰臣)으로서 하교가 있은 뒤에도 끝내 자수하지 않다가 심수(沈鑐)가 나타나자 비로소 부득이 자수하였으며, 민백창이 자수한 공술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엉겁결에 찢어 버렸다가 비로소 그 찢은 조각을 살펴 보았더니 과연 그것이 전하기(錢下記)였다고 하는 것이 어찌 교묘하게 꾸민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 윤득화·민백창·이복해를 모조리 붙잡아다 처분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민백창은 자복하여 멀리 정배하고, 윤득화는 관직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다.
1월 9일 무오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판의금부사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장령으로, 이익원(李翼元)을 정언으로, 김선행(金善行)·이응협(李應協)을 교리로, 신회(申晦)를 수찬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고 참판 오광운(吳光運)은 무신년005) 의 난을 당하여 공이 사직(社稷)을 지탱하였던 까닭에 처음에는 철권(鐵券)을 내리려 했는데, 직접 나가 적을 쳐부순 공훈이 없었으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들으니 그의 두 아들이 모두 요절하여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다고 한다. 훈신(勳臣)의 봉사(奉祀)는 규례상 국가에서 정급(定給)하니, 오광운의 봉사손(奉祀孫)을 훈신의 예에 의하여 예조에서 즉시 정급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사직 단자를 올리니, 임금의 위로와 격려가 매우 간절하였다. 사직 단자를 받아 봉하여 어압(御押)한 다음 승지에게 돌려주고 함께 들어오기를 명하였다.
1월 10일 기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김상복(金相福)을 승지로, 임집(任)을 헌납으로 삼았다.
1월 11일 경신
동지의금부사 신사건(申思建)이 상소하기를,
"딸의 혼인 때 이복해(李福海)에게서 면포와 돗자리 따위를 받았으므로 이복해를 조사하는 일을 담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사하는 것은 돈 먹인 것에 대한 것이니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고, 인하여 연신(筵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옛사람은 감서(甘誓)006) 의 서약으로서 세도(世道)를 볼 수 있다 하였는데, 나는 비지(批旨)에 ‘돈[錢]’이라는 글자를 쓰니 이것이 세도에 과연 어떠한 것인가?"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슬픕니다. 인심과 세도가 어찌 이처럼 극에 달하였습니까? 당파 싸움은 불과 같고 윤리와 기강은 크게 허물어졌습니다. 사람이 타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역적이다. 너는 역적을 감싸준다.’라고 하여, 말하는 사람도 쉽게 하고 듣는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으니 장차 짐승이 된 뒤에야 말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임금과 신하의 큰 윤리가 장차 여기서부터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신이 연전에 올린 상소 한 장에 한 글자와 반 구절도 여러 신하를 구제해 달라는 말이 없었으니 한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익성(沈益聖), 이진의(李鎭儀), 이형만(李衡萬), 윤학동(尹學東) 같은 무리들이 신을 근거 없이 얽어 넣어 못하는 짓이 없음은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이기경(李基敬)이 신을 무고한 것은 절대로 연관되지 않았고 절대로 간여하지 않은 일이니 한갓 스스로 패륜(悖倫)과 무엄(無嚴)한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않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법인데, 변함없는 충성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이기경의 참소하는 습성에 대하여서는 처분을 이미 엄하게 내렸고 나의 뜻이 굳게 정하여졌으니, 경은 지나친 사양을 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4일 계해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또 동궁(東宮)을 곁에 앉게 하였으며, 《시경(詩經)》의 관저장(關雎章)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오매사복(寤寐思服)’이란 구절에서 같은 행동에 마음은 다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른 것이냐?"
하니, 동궁이 대답하기를,
"현숙한 후비(后妃)를 얻어야 내조가 된다고 마음 먹으면 옳은 것이요, 사특한 정에 끌려가면 그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사(太姒)와 같은 덕이 있으나 용모가 추하여 못생겼어도 배필로 구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덕(德)으로써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하고도 만약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식양재피(息壤在彼)007) ’라고 하였으니, 오늘 진술한 글의 의미를 글로 써서 벽에 걸어 두고, 만약 마음의 동요가 있을 때 이것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부적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평안 감사 권혁(權爀)과 어사(御史) 김치인(金致仁)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권혁은 자기의 이름이 이복해의 돈 장부에 들어 있으므로 소장을 올려 스스로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김 치인을 불러 꾸짖기를,
"봉진(封進)하는 문서를 의금부에서 개좌(開坐)하여 뜯어 보기도 전에 어찌 먼저 권혁에게 누설시켰느냐?"
하며, 모두 파직시켰다. 권혁은 여러 번 변방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청백(淸白)으로써 자신의 본분을 지켰으니 비록 이름이 이복해의 장부에 들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가 결코 오염된 것이 없음을 알았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입시케 하여 출사(出仕)하기를 권면하는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올린 한 장의 상소문은 단지 선왕(先王)의 병환을 드러내어 알릴 수가 없다는 뜻을 논했을 뿐이니, 사람들이 감히 ‘호역(護逆)’ 두 글자를 덧붙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기경(李基敬)은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두 글자의 지목을 가하였으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자는 남의 아들을 해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출사를 권면하는 하교를 감히 받들 수 없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날로 쇠약해지고 피곤하니, 경이 나를 섬기는 날이 짧을 것이다. 경이 어버이를 공양하지 못한 것으로서 한(恨)을 삼는데 뒷날 반드시 한이 될 것이다. 호조의 일을 만약 바로잡아 공효(功效)를 이룩하게 된다면 내가 경으로 하여금 염우(廉隅)를 펴게 할 것이다."
하니, 박문수가 이에 분부를 받들었다. 임금이 황해도 기사(騎士)의 폐해를 물으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비국 당상 정익하(鄭益河) 역시 그래야 한다고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충분히 검토한 뒤에 변통의 방도를 논의해야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탐욕스러운 관리는 감옥에서 먹고 쉬며, 임금의 명령은 해부(該府)에서 적체되니, 삶아 죽이는 가마솥의 기름은 어느 때 불을 붙일 것이며 임금을 속이는 무리는 어느 때 징계할 것인가? 판의금부사 김시형(金始炯)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패초(牌招)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7일 병인
임금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에게 여러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대개 호조의 경비가 해마다 증가하여 국고가 거의 지탱할 수 없었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박문수에게 제도를 개정하게 하였으므로 불러서 개정된 제도를 물었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나라가 비상시에는 재상이 가는 곳마다 쓰이지 않는 곳이 없는데, 만약 민심을 거스른다면 뒷날 협력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각사(各司)의 범람(汎濫)한 것은 비록 덜고 절약할 수 있으나 역시 도하(都下)의 민심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몸소 각사의 등록(謄錄)을 열람하고 말하기를,
"당(唐)나라 문종(文宗)이 ‘이 옷을 세 번 빨았다008) [此衣三澣]’는 말이 비록 비루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 전각에 기거한 지 이미 4년인데도 아직 전각 안의 돗자리를 갈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각사에서 낭비함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팔도의 고혈(膏血)이 모두 그 가운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신(大臣)이 반드시 청렴 결백하게 몸가짐을 조심하였던 까닭에 자연히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유정지공(惟正之供)009) 을 남용하거나 좀먹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신하된 무리들이 모두 무상(無狀)하여 나라가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대내(大內)에 들어오는 것을 일일이 뽑아내어 단자(單子)에 써서 올리면 내가 그 가운데 낭비하는 것은 지울 것이니, 그런 뒤에 차례로 각사(各司)에 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다섯 낭청(郞廳)을 앞으로 나오게 한 뒤에 하교하기를,
"외면상으로 보면 이런 일이 너무 잗달게 살피는 것 같으나 공자도 역시 ‘쓰는 것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남용한 적이 없는데, 뭇 신하들은 내가 남용한다고 말하니 마음에 그윽이 개연스러웠다. 지금 등록을 보고 대내에 들어오는 것이 중간에서 소멸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이처럼 남용이 많은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뭇 신하들이 나를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진실한 마음으로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이어서 말하기를,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세자(世子)는 나이 어리니 뒷날 반드시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은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단지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할 뿐이니, 그들에게 어찌 진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 있겠습니까? 과거라는 것은 사대부가 입신하는 디딤돌입니다. 근래 재상가의 자제들은 다만 살진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을 뿐이요, 글 한 자 읽은 적이 없는데도 재상들은 도리어 세력으로써 먼 지방의 글 잘하는 사람을 불러들여 그의 자제로 하여금 차술(借述)케 하여 등제(登第)시킨 뒤에 한림(翰林)·교리(校理) 등 좋은 자리를 역임(歷臨)하지 않음이 없으니, 비루합니다. 발신(發身)이 이와 같으니 다른 것이야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새 급제자의 방목(榜目)이 나오면 여러 사람을 전하의 앞에 불러 면전에서 표(表)·부(賦)·책(策) 세 과목을 시험하여 만약 능히 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임금을 속인 율로 다스려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이 점차 글을 읽게 될 것이며 근본이 바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뭇 신하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동궁(東宮)에 계실 때부터 성품이 나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근래에는 연세가 높아지면서 더욱 나약하십니다. 한결같이 허물을 쓸어 덮어 둔다면 어찌 임금이 세상을 독려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또 이 무리들이 연석에서의 말씀을 구해 보고 백방으로 생각을 굴린 다음 경연에 올라와서 아뢰기를, ‘지난날 이런 하교는 좋습니다, 옳습니다.’라고 하면, 성상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말을 너무 쉽게 한다. 내가 어찌 그런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기뻐하겠는가?"
하였다.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게 하였다. 끝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의 사직 단자를 이미 몸소 봉하여 내려보냈는데, 재차 사직 단자를 올렸으니, 이것은 필시 어압(御押)을 뜯어 보고 그런 것이다. 의리상 과연 어떠한가? 나는 대신의 거취를 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의리에 타당한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니, 각자 의견을 개진하라."
하였는데, 교리 이규채(李奎采)는 모호한 대답을 하였고, 수찬 이응협(李應協)은 갑자기 말하기를,
"예(禮)로써 진퇴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의 속마음은 좌상과 달리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의 공론에 위배될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좌상 역시 명백한 말을 하지 않고 병을 핑계하니, 이는 모두 내가 개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물러나와서 이응협은 예(禮)로써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 대신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여 자기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승지가 잘못 전했다고 하고, 또 사관(史官)에게는 누설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응협은 본래 미치고 실성(失性)한 자로서 족히 탓할 것도 없지마는 명색이 경악(經幄)의 유신(儒臣)으로서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어찌 비웃음과 침뱉고 욕먹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1월 18일 정묘
임금이 좌참찬 원경하(元景夏)를 소견(召見)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요옥(妖獄)을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장옥(贓獄)이 잇달아 일어나니, 원컨대 진정시키는 방책을 생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정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삼윤(三尹)의 말을 아뢰었더니, ‘적절하지 않다.’라는 비답의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재호(趙載浩)는 경의 상소문을 두고 엉뚱하다고 하였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매부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반성할 따름입니다. 동(東)·서(西)의 당파가 처음에는 자취만 있었을 뿐인데, 한번 삼윤(三尹)의 장옥(贓獄)이 이루어지고부터 비로소 문호가 갈라져 검붉은 피가 지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어찌 이 옥사를 무안(誣案)에 견주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좌의정의 차자는 신의 생각에는 없는 일을 만들어 내어 조정 신하들이 의구심을 갖고 기가 꺾이어 거의 반은 비게 하였다고 여깁니다. 옛날 광무제(光武帝)가 이민(吏民)들이 왕랑(王郞)010) 과 주고받은 편지를 불태워 버리자 선유(先儒)들은 도량이 넓다고 칭송하였습니다. 한 장의 문서를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성상에게까지 들리게 하여 조정의 분위기가 아름답지 않게 할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조정이 반이 비는 데에 이르기야 했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은 전하께서 수십년 동안 조정(調停)에 애쓰신 공이 마무리를 못짓고 허물어짐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후부터는 연석(筵席)에서 본심을 감추고 하는 말은 반드시 통찰하셔야 합니다."
하니, 이것은 대개 지난날 조재호(趙載浩)의 용사 호표(龍蛇虎豹)의 상주(上奏)를 암암리에 지적한 것이었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현절사(顯節祠)에 토지를 지키는 노복을 지급하라고 명하니, 필선(弼善) 정실(鄭實)이 청원한 상소에 의한 것이었다.
정우량(鄭羽良)을 판의금부사로, 이철보(李喆輔)를 동지의금부사로, 이창수(李昌壽)·김상복(金相福)·박필재(朴弼載)를 승지로 삼았다.
1월 19일 무진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원경하(元景夏)가 연석에서 아뢴 말로 인하여 명소(命召)를 반납하고 도성을 나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듣건대, 중신 원경하가 어제 연대(筵對)에서 신의 지난날의 차자에서 논한 바를 아뢴 것이 있다 하는데, 연석에서의 비밀스러운 말을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그 대략의 뜻은 알 만합니다. 그가 말한 ‘좌상의 차자는 없는 일을 만들어 내었다.’라든가, 또 ‘조정의 반은 이미 비었다.’라든가 또 ‘수십 년 동안 조정에 애쓰신 공이 마무리를 못짓고 허물어졌다.’라고 한 뜻은 대개 신이 허무맹랑한 사실을 얽고 날조하여 조정을 기울게 하고 전하께서 지성으로 행하시는 건극(建極)의 정치를 저지하여 실패케 했다는 것입니다. 중신의 앞서 두 상소는 말의 뜻이 은연중 위협하고 겁을 주었는데, 신의 뜻은 이미 인의(引義)로 자처하고자 하였습니다. 인친(姻親) 사이의 일은 형적을 지나치게 드러낼 수 없으므로 깊이 변명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실을 지적하여 다시 남김없이 곧바로 진달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대저 신과 중신은 본래 서로 사이가 나쁜 일은 없었는데, 중간에 불행한 사단을 만나 다른 사람에게 할 화풀이를 신에게 끊임없이 하여 수년 이래로 뒤에서 헐뜯고 드러나게 배척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더니 지금은 그가 신에 대해 지닌 마음이 더욱 심합니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 그대로 머물러 있어 떠나지 않으면 담종(湛宗)의 화가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신이 어떻게 감히 잠시라도 도성에서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어찌 평소 경들에게 기대한 것이겠는가? 모름지기 30년 동안의 지우(知遇)의 뜻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생각하여 즉시 서울로 들어와 우리 세자를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0일 기사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군문(三軍門)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을 시사(試射)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기를,
"대료(大僚)가 도성을 나가며 올린 차자는 지극히 두렵고 황공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아래 부분의 차자 내용은 천만 뜻밖의 일이니 답답하고 당황하여 문을 닫고 숨어 엎드려 삼가 부월(鈇鉞)의 형벌을 기다립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21일 경오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분위기가 이와 같지만 나는 태연하다."
하니, 이는 성상의 하교에 선위(禪位)할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승지 오수채(吳遂采)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감히 망령되이 헤아릴 수는 없으나 답답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갔다.
교리 김선행(金善行)이 상소하여 이종성(李宗城)에게 이조 판서를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을 빨리 정침하기를 청하니 환급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빌자 힘써 출사하라는 비답을 내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경들은 어둠 속에서 진흙길을 가고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선위할 뜻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임금이 밤에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 어영 대장 박문수(朴文秀),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소견하고 인재를 얻어 일을 맡기라는 것으로 누누이 신칙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좌의정의 차자에서 화를 다른 데로 옮겨 푼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와 조재호(趙載浩)는 처남·매부간으로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이 바깥에 퍼져 있는데, 신 역시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대관(大官)이 억누름이 마땅한데, 좌의정의 차자가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원경하의 ‘조정의 반은 이미 비었다.’는 말은 너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니 좌의정의 처사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였다. 윤득화(尹得和)·민백창(閔百昌)·이복해(李福海)의 공사(供辭)를 읽기를 명하였는데, 윤득화는 죄를 모두 민백창에게 돌리고 민백창은 모두 자복하니, 윤득화는 삭출(削黜)할 것을 명하고 민백창은 멀리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어사(御史)의 서계(書啓) 가운데 ‘탐오(貪汚)하고 불법을 저질렀으니 다시 이복해를 엄중히 심문하라.’고 하였으니, 대개 돈 먹인 것은 덮어 두고 깊이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승지 김상복(金相福)이 자못 윤득화와 민백창을 구원하기 위해 신원하였는데, 박문수가 말하기를,
"민백창은 대신의 아들로서 이태(李泰)와 매우 친하여 산보형(山甫兄)011) 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수치스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윤득화는 자수하지 않았으니 또한 인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체통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무거운데 벌은 가볍습니다."
하니, 임금이 원경하의 말에 동요되어 바야흐로 그 사건을 해제시키려다가 박문수의 말을 듣고는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1월 22일 신미
임금이 밤에 봉서(封書)를 승정원에 내렸다. 입직 승지 박필재(朴弼載)와 김상복(金相福)이 받들어 뜯어 보니 첫머리에 ‘중옹(仲雍)·백이(伯夷)012) ’라는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 등록(乙酉謄錄)013) 을 상고해 보라.[乙酉謄錄考出]’는 글자가 있었으니 이는 대개 선위(禪位)하려는 것이었다. 박필재 등이 몇 줄을 잠깐 보고 즉시 봉함하여 입직 옥당(玉堂)과 함께 급히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였다. 오경(五更)에 비로소 인견하였는데, 이때 비가 억수처럼 내렸다. 덕성합(德成閤)을 지나갈 때 동궁(東宮)이 바야흐로 촛불을 밝히고 급히 춘방(春坊)의 관원을 인접하니, 이는 대개 내전(內殿)으로부터 선위의 전교를 받고 황급히 궁료(宮僚)를 불러 상의하는 것이었다. 승지와 옥당이 임금 앞으로 달려나가 봉서를 올리며 급히 거둘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감히 삼종 혈맥(三宗血脈)의 하교014) 를 어기지 못하여 비록 이 자리에 있었지만 남면(南面)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마음은 25년이 하루 같아서 날마다 원량(元良)이 나이 들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스럽게도 열다섯 살이 되었다. 오늘 이 일은 하나는 저승에 가 황형(皇兄)의 용안을 뵐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요, 하나는 남면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고자 함이며, 하나는 갑자년015) 이후 병이 더하여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려움을 두려워한 때문에 일에서 벗어나 정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으나, 박필재 등이 거듭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날이 밝아 오자 잠시 물러나라고 명하고, 다만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만 추후에 입시하되 그 밖의 여러 신하는 입시하는 것을 일체 허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1월 23일 임신
임금이 왕세자에게 대리 기무(代理機務)를 명하였다. 이때에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 여러 승지(承旨)와 옥당(玉堂), 양사(兩司)에서 청대(請對)하여 환경전(歡慶殿)에 입시하고 봉서(封書)를 거둘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반드시 본심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상훈(常訓)》의 술편(述編)에 이르기를, ‘자신을 한사(寒士)·포의(布衣)에 견준 까닭에 전후에 시를 지으면서 자주 부운(浮雲) 자를 썼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내 마음을 말한 것이다. 나에게 형제가 있었다면 어찌 중옹(仲雍)·백이(伯夷)가 되지 않았겠는가? 둘째, 세제(世弟)의 책봉을 받고 나서 문득 갑진년016) 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의 괴로운 마음을 이룬 뒤라야 저승에 가서 황형(皇兄)을 뵐 면목이 있다. 셋째, 마음 속의 병이 해가 갈수록 점점 심하여 온갖 정무를 보살필 수 없다. 넷째,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보고자 한다. 다섯째, 비록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타인이 그 자제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인데, 원량이 어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오늘 기반을 세우고자 한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내가 나라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나, 나이가 들고 병이 심한 것이 또한 제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동궁의 강학(講學)이 하루가 급한데, 어찌 차마 번거로운 국사를 맡겨 촌음을 아끼는 공력에 방해가 되도록 하십니까?"
하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되어 늙었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데, 지금 전하께서 나이가 늙었다고 하여 짐을 벗으신다면 동조(東朝)의 마음이 과연 어떠하시겠습니까? 비록 동궁의 강학으로 말하더라도 해와 같이 오르고 촌각마다 전진하는데, 지금 이렇게 온갖 정무를 돌보게 하여 그 시간을 빼앗기게 하시니, 이것이 어찌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뜻이며 종묘 사직을 위한 장구한 계책이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나아가 힘써 간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때 빗줄기가 한층 사나웠는데 왕세자가 갑자기 비를 무릅쓰고 달려와 헌함(軒檻) 밖에 엎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마음으로 맹세했다."
하였다. 왕세자가 엎드려 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는 앞으로 오라."
하였으나, 세자가 울며 일어나지 아니하자, 임금이 또 말하기를,
"세자는 앞으로 오라."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 5차례 한 뒤에야 왕세자가 헌함 안으로 들어와 엎드려 우니, 임금이 묻기를,
"왜 울기까지 하느냐?"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울음을 삼키며 우니, 임금 역시 눈물을 흘렸다. 여러 신하가 또 입이 닳도록 힘써 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하고, 한참 뒤에 하교하기를,
"부득이하다면 대리 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것 역시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모두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라. 나는 결코 임금 노릇을 하지 않겠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천하의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천하의 큰 일을 시행하면서 이처럼 고성과 노기를 띠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리 청정의 하교를 듣고는 선위의 전교를 거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 재빨리 말하기를,
"뜻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 세자로 하여금 아득히 국사(國事)를 모르는 상태에 두었다가 뒷날 만약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일어나 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대리 청정의 전교를 받아 쓰기를 명하고 말하기를,
"선위(禪位)는 고심하여 결정한 것이지만 원량이 울며 사양하는 데 감동하여 지난밤의 전교는 특별히 정침하겠다. 그리고 세자로 하여금 기무를 대리케 하니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모든 것을 정유년017) 의 고사를 따르게 하라. 아! 대소 신료들은 묵은 습성을 씻고 정백(精白)한 한마음으로써 우리 원량의 대리의 정사를 도와 국정을 일신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남태온(南泰溫)이 말하기를,
"신 등이 하루 종일 고집스럽게 간쟁하여도 끝내 거두지 않으니 민망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대감(待勘) 중인 까닭에 감히 전례(前例)대로 연계(連啓)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장령 이창유(李昌儒)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밤에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을 불렀다. 대신이 진전(進箋)과 진하(陳賀)를 모두 을유년018) 과 기미년019) 의 예에 의하여 거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춘방(春坊)의 관원을 불러 묻기를,
"듣건대 네가 동궁을 만나고자 하였다 하니 아뢰고자 한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정유년의 대리 청정 당시 경묘(景廟)께서 진장(陳章)하신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춘방에서 대찬(代撰)한 전례가 있는가 상고해 보라고 명하였는데, 그런 사실이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이 필시 자기 힘으로 글을 지을 수는 없고 춘방에서 대찬한 전례 역시 없다. 원량이 만약 혹시라도 중관(仲官)으로 하여금 돕게 한다면 중관에게 딴마음이 생겨날 뿐만 아니라 또한 원량이 중관에게 일을 맡기는 조짐을 열어 놓을까 두려우니 그것은 아주 옳지 않다."
하며, 이어서 진장의 전례를 시행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절목을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1. 처소는 정유년의 전례대로 시민당(時敏堂)으로 정하고 조하 및 인접 등의 행사는 모두 이 시민당에서 거행한다.
1. 청정(聽政) 때 좌향(坐向)은 정유년의 전례대로 형편에 따르되 동향(東向)으로 한다.
1. 첫 청정 때에는 조참(朝參)은 한 차례로 하고 상참(常參)은 전례에 따라 날마다 품달한다. 뭇 신하들의 배례는 정유년의 전례대로 종친 및 문무 뭇 신하들 일품 이하가 뜰 아래에서 재배하면 세자는 답배(答拜)하지 않고, 오직 종실의 백부·숙부 및 사부(師傅)가 먼저 당(堂)에 올라와 재배하면 세자가 답배한다. 대신은 비록 사부가 아니더라도 모두 먼저 당에 올라와 재배하고, 빈객(賓客)은 조하할 때 뜰 아래에서 절하며 서연(書筵)할 때에는 구례(舊例)대로 한다.
1. 조참 및 무릇 진하(陳賀)를 받을 때의 동악(動樂)은 정유년에는 시탕(侍湯)하느라 정지하였지만, 이것은 예문(禮文)에 있어 중요한 것이니 예문대로 거행한다.
1. 모든 일은 일체 정유년의 전례대로 거행하되, 사전(祀典)은 어떻게 한 가지 예로만 하겠는가? 섭행하는 일로 하교하였으니, 모든 제향(祭享)은 전례에 따라 계품하여 거행한다.
1. 무릇 경외(京外)의 전알(展謁)·전배(展拜)는 한결같이 전례대로 품의할 일로써 하교하였으니, 이에 따라 계품하여 거행하라.
1. 대제(大祭)의 헌관 단자(獻官單子)와 능전(陵殿)의 헌관 단자는 입계(入啓)하고, 모든 제관 단자(祭官單子)는 입달(入達)하며 축문(祝文) 역시 이 예에 따른다.
1. 5일 비국(備局)의 일차(日次) 역시 정유년의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되, 이러한 때에 이미 그 자리에 있으니 어떻게 나라의 일을 무관심하게 볼 수 있겠는가? 매달 15일, 30일 2차에 걸쳐 원량이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재결(裁決)을 받되, 바야흐로 정양 중에 있으니 그 진퇴는 때에 따라 하라. 만약 구대(求對)하여 품달할 일이 있으면 시기에 관계없이 소견할 볼 것이니, 이것은 제한이 없다. 대조(大朝)에 품정(稟定)하는 것은 한결같이 정유년의 절목에 따르되 사람을 쓰는 것과 군사를 동원하는 것, 사형에 관련된 것 등 세 건의 일 및 변방의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 국한하고, 모든 상소·차자 및 계사, 번곤(藩閫)의 장문, 각사의 계사 역시 정유년의 절목에 따라 동궁에게 입달하라. 장문 및 각사의 초기(草記) 가운데 혹 일이 중대하여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대조에 계품하여 재결을 받는 일로서 승정원에 영을 내리라. 입계(入啓)한 소계(疏啓) 가운데 계품하여 재결을 받을 것이 있으면 정유년의 고사에 따라 대내(大內)에서 아뢰도록 하라. 양전(兩銓)의 제배와 금오(金吾)·추조(秋曹)의 사형 집행 및 병조 군병의 상번(上番), 경외(京外)의 전최(殿最)와 연습 조련, 양전의 세초(歲抄)와 숙위군(宿衛軍)의 교대와 군호와 생기(省記) 및 궁문·도성문의 열고 닫는 것 등은 모두 정유년의 전례에 의하여 입계할 일로써 하교하였으니, 이대로 거행하라.
1. 매월 여섯 차례씩 대신과 비국 당상은 시민당(時敏堂)에 입대(入對)하되, 해방(該房) 승지(承旨)는 따라가 참석하고, 서연(書筵) 이외에 무릇 청정·인접에 관련되는 것은 승지가 또한 나아가 참석하며, 한림(翰林)·주서(注書)가 각 1인씩 따라 들어가며 춘방관(春坊官)은 모두 춘추관(春秋館)의 관직을 겸하여 청정하는 날에는 당직하는 관원 역시 입시하여 사실을 기록할 것이니 정유년의 예대로 거행하라.
1. 명령을 출납하는 것은 승정원에서 주관하고, 시강원(侍講院)에서 과거부터 거행하던 것은 시강원에서 거행하라. 전지(傳旨)는 휘지(徽旨)라 칭하고, 계의윤(啓依允)은 달의준(達依準)이라 칭하며, 계사(啓辭)는 달사(達辭)라 칭하고, 계본(啓本)은 신본(申本)이라 칭하며, 장계(狀啓)는 장달(狀達)이라 칭하고, 계목(啓目)은 신목(申目)이라 칭하며, 상소(上疏)는 상서(上書)라 칭하고, 백배(百拜)는 재배(再拜)라 칭하며, 상전 개탁(上前開拆)은 세자궁 개탁(世子宮開拆)이라 칭하고, 근계(謹啓)는 근장(謹狀)이라 칭하며, 계문(啓聞)은 신문(申聞)이라 칭하고, 복후교지(伏候敎旨)는 복후휘지(伏候徽旨)라 칭하며, 품지(稟旨)는 품령(稟令)이라 칭하고, 상재(上裁)는 휘재(徽裁)라 칭하며, 상소나 차자의 끝 부분 양식은 과거의 예대로 하라.
1. 영패(令牌)는 청패(靑牌)를 사용하라.
1. 조하(朝賀) 등의 의주(儀註)는 예조로 하여금 정유년의 전례에 의해 참작하여 규칙을 정하고 의장(儀仗) 및 숙위 군사 역시 병조로 하여금 정유년의 전례대로 숫자를 증가하여 거행하라.
1. 미진한 조목은 추후에 마련하라."
하였다. 쓰기를 마친 뒤에 조현명(趙顯命)이 삼사(三司)의 상소와 차자는 대조(大朝)께 입계(入啓)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재삼 다투어 주장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머리가 허옇게 된 것은 모두 편벽된 주장과 괴상한 상소문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지금 어찌 그것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꼭 이것으로 다투어 주장한다면 어젯밤 봉서(封書)를 다시 내려야 하겠다."
하였는데, 임금의 음성이 매우 날카로웠고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여러 차례 내렸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국가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데, 성상의 노여움이 어찌 이에 이르십니까?"
하며 우니,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좌상이 이번에 도성을 나간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잃어버린 문서로 인하여 윤득화(尹得和)와 민백창(閔百昌)은 자복하여 죄를 받았고, 묘당(廟堂)의 천망(薦望)을 청탁한 것은 민백창과 이형만(李衡萬)에게 해당됩니다. 돈을 먹인 것은 비록 관대한 은전을 입어 철저히 구핵하지 않았으나 민백창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처분이 이미 명백하였으니 신의 상소가 잠꼬대가 아님을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말할 만한 정세가 없으므로 합문 밖에서 원경하(元景夏)를 만나 웃음을 머금고 모든 것을 설파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복해(李福海)의 공사(供辭)를 읽게 한 후 엄중한 하교를 내려 먼저 형구를 갖추어 놓고 엄중하게 심문하게 하였다.
1월 25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나라에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기강과 체통이 실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모양을 갖추어 지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신 등은 지극히 용렬하고 동궁은 나이가 어리니 앞으로의 나라의 형세가 현재와 같이 하고자 하여도 오히려 불가능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제갈 양(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리던 법으로 다스리시되 먼저 비국의 여러 재신부터 시작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이 잘 해낼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금 일초(一初)의 정사에 즈음하여 삼공(三公)020) 을 정비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만약 재상을 선택한다면 그 요체는 충후 장덕(忠厚長德)하고 청명(淸名)과 아망(雅望)이 있으며, 지절(志節)이 엄확(嚴確)하고 기국(器局)이 통달한 사람 중에서 뽑아야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유의하겠다고 답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이미 복상(卜相)을 우러러 아뢰었으니, 장신(將臣)도 또한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동궁께서 정사를 돌보는 초기는 일의 체모가 더욱 특수하니 폐부지신(肺腑之臣)을 지방에 둘 수 없습니다. 영의정에게 하문하시어 장수의 임무를 맡기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폐부지신이란 홍봉한(洪鳳漢)을 가리킨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체통이 꼭 이와 같은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백면서생(白面書生)과 다름이 없으므로 어렵게 여기지마는 그 사람으로 말한다면 장수의 임무를 맡길 만합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비록 일을 맡을 만하더라도 공연히 어영 대장을 갈아 폐부지친(肺腑之親)에게 옮겨 제수하면 나라의 체통이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렵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한 것은 비록 성상께서 형세에 따라 처리하시는 고유의 권한이지만,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로 보면 헛되이 얽매어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체직(遞職)을 허락하심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종성은 재주가 통달하고 명망이 높아 한결같이 외방에 둘 수 없으니, 궁료의 직책을 주어 주연(胄筵)의 임무를 전적으로 책임지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조 참판 이천보(李天輔)가 근일 청탁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대신에게 원망을 돌리며 말하기를, ‘대신이 만약 세도(世道)를 드높였으면 반드시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다섯 번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맡았어도 한번도 청탁하는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은 순전히 전관(銓官)이 어떠냐에 있지 하필 대신에게 원망을 돌리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근래에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말을 엄중히 방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칙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천보가 대신에게 원망을 돌린 것도 역시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것을 듣지 않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지난번에 말하는 일로 죄를 입은 여러 신하를 모두 풀어 주고, 무신년021) 이후 벼슬길이 막힌 사람은 경중을 구분하여 가려쓰며,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갈 대상자를 즉시 초계(抄啓)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용동시키고, 양역(良役)의 실수(實數)를 이미 발표했으니 어사(御史)를 보내어 살피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경청하였다. 조현명이 또 참핵사(參覈使) 김상적(金尙迪)이 두루 통달하고 재주 있음과 음관(蔭官) 윤흡(尹潝)의 치적과 집안에서의 행실에 대해 아뢰니 임금이 윤흡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관례대로 회계(回啓)하여 아뢰니 비국 당상 김상성(金尙星)이 나아와 말하기를,
"오늘 차대(次對)에서 생각건대 혹시 치국의 큰 규모를 언급하는 것이 있는가 하였더니 수상은 호위청(扈衛廳)의 일을 논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여러 신하들은 월과미(月課米) 같은 일을 말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요, 장구한 방책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대각에서 탑전(榻前)에서 실수한 것을 내가 업신여기지 않고 마음으로 실상 가엾게 여겼다. 만약 원량의 첫 정사(政事)에 또다시 이와 같이 한다면 원량이 신하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길까 두려우니, 대관(臺官)을 가려서 이목(耳目)을 일신하게 하라."
하였다.
정휘량(鄭翬良)을 대사간으로, 윤동도(尹東度)·어석윤(魚錫胤)을 수찬으로, 조재민(趙載敏)을 필선으로, 조중회(趙重晦)를 헌납으로, 임집(任)을 장령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정언으로, 이세진(李世璡)을 판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밤에 원경하(元景夏)와 조명리(趙明履)를 불러 《정훈(政訓)》을 불러 쓰게 하였으니, 이것은 동궁의 처음 정사이므로 정치의 요체를 동궁에게 훈계한 것이었다. 그 항목은 여덟 가지가 있으니 대개 《중용(中庸)》구경(九經)022) 의 장의(章義)에서 취하여 장(章)마다 반드시 세 번씩 뜻을 되풀이하여 밝혔다.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1월 27일 병자
왕세자의 대리 청정(大理聽政)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팔도에 전교를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옛날 선왕께서 세자를 세워 종묘 사직의 소중함을 받들고 군병을 어루만지며 나라를 보살피게 하였음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연원이 길다. 우리 선조(先朝)께서 정유년023) 에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정양(靜養)하는 중에 계시면서 멀리는 과거의 사적(史籍)을 상고하고 가까이는 선대의 법전을 찾아서 나의 황형(皇兄)에게 대리 청정을 명하신 것도 그러한 뜻이었다. 이는 곧 천지(天地)에 세우고 삼왕(三王)에 상고하더라도 오류가 없는 것이니 비록 자손 만대에 준행할 법전을 삼는다 하더라도 옳을 것이다. 세상이 변한 이후부터 간혹 우매하여 밝히지 못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황고(皇考)와 황형(皇兄)께서 부탁하신 바를 받들어 신하와 백성들의 윗자리에 오른 지 이제 25년이 되었으나, 덕이 없어 상제(上帝)와 신명(神明)을 섬길 수 없을까 두려워 깊은 연못 가에 선 듯 엷은 얼음을 밟는 듯 밤낮으로 두려워하여 감히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리고 어려운 난관을 겪고 몹쓸 병에 걸린데다가 우리 경사(卿士)들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붕당을 좋아하여 훈계하거나 단련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거나 기뻐하기도 하였으나, 하늘에서 주신 복을 누리지 못했으니 근심과 걱정이 안으로 침범하고 총명과 혈기가 밖에서 날로 줄어들어 비록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스스로 힘쓰려 하여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천지와 조종(祖宗)의 신령(神靈)의 도움으로 을묘년024) 에 동궁(東宮)을 갖는 기쁨을 누려 그 이후부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라기만을 날마다 기대하였다. 지금은 저궁(儲宮)의 나이가 이미 공자(孔子)가 학문에 뜻을 둘 나이에 들어 천인(天人)의 모습을 엄연히 갖추었다. 예지는 점점 고명해지고 습성은 자연에서 우러나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 경사(經史)의 학문을 닦아, 만백성이 받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종묘 사직의 한량없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나의 즐거움 또한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30년 동안 이 자리를 벗어나려 고심하던 중에 쌓인 병이 겹쳐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밤 봉함한 문서를 내렸는데, 저궁이 울며 간곡히 만류하니 내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고 뭇 신하들의 혈성과 당황하는 것을 내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앞서의 교지를 환수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정유년의 고사를 상고하여 좋은 날을 택해 거행하게 하였다. 의장(儀章)과 예절은 약간씩 고쳐 시행하되, 관작과 병사(兵事)·형옥(刑獄) 이외에는 모두 맡아 전결하도록 한다.
이미 이달 27일 새벽에 이 사유를 태묘(太廟)에 삼가 고하였고, 세자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였으니, 조참(朝參)은 의식대로 하라. 아! 이 거조(擧措)는 세 가지 좋은 점이 있다. 내가 평소 먹은 마음을 이루게 되는 것이 첫 번째 좋은 점이요, 군국(軍國)의 일이 정체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좋은 점이며, 저궁에게 정사를 밝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 세 번째 좋은 점이니, 한 가지 일로 세 가지 좋은 점을 갖추었다. 오직 그대 대소 신료는 밤낮없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몸을 공손히 하여 나의 미치지 못함을 도우고 우리의 어린 사람을 섬겨 어려운 시국을 널리 구제하라. 이에 교시하니 모두들 상세히 알아야 마땅하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우량(鄭羽良)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27면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註 023] 정유년 : 1717 숙종 43년.[註 024] 을묘년 : 1735 영조 11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조참(朝參)을 받을 때에 고취(鼓吹)는 참작하여 줄이고, 궁을 나갈 때에는 당악(唐樂)의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와 미후사(尾後詞)를 쓰며, 뭇 신하들이 절을 할 때는 수룡음(水龍吟)을 연주하고, 궁으로 들어올 때는 낙양춘(洛陽春)을 연주하며, 방향(方響)·당비파·퉁소·아쟁은 각각 둘이니 모두 구례(舊禮)에 의한 것이며, 필률(觱栗) 여섯에서 둘을 줄이고, 당적(唐笛) 넷에서 둘을 줄이며, 대금(大琴)도 또한 넷에서 둘을 줄이고, 장고 여덟에서 넷을 줄이며, 북은 하나이니 구례에 의한 것입니다. 공인(工人)은 사용하는 악기 수대로 21인을 쓰고, 복색도 또한 구례에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종친과 문무 백관의 조참(朝參)을 받았는데, 임금이 시민당의 협실(挾室)에 나아가 바라보았다. 왕세자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었다. 왕세자의 사부(師傅)와 대신(大臣)이 북쪽 계단을 거쳐 당(堂)에 오르자 필선 조재민(趙載敏)이 왕세자에게 배위(拜位)에 나아가기를 찬청(贊請)하였다. 사부 대신이 재배하니 왕세자가 답배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1품의 종신(宗臣)이 대신을 따라 당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옛날 법도로는 오직 정1품 이사(貳師) 및 왕자(王子)·대군(大君)으로 백부·숙부되는 사람만 올랐다. 처음부터 조정의식의 예모(禮貌)가 정돈되지 않았으니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을 체직시키도록 하라."
하자, 도승지 유복명(柳復明)이 임금의 하교를 전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그렇다. 종신은 계단을 도로 내려가도록 하라."
이때에 종친과 문무 2품 이상이 시민당의 뜰로 들어와 재배하였다. 조재민이 의식이 끝났음을 고하자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상달(上達)하기를,
"승지와 사관이 먼저 재배하지 않았으니 추고해야 마땅하고, 당하관은 꿇어앉아 절하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않았으니, 압반 감찰(押班監察)은 붙잡아다 처분해야 합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왕세자는 당시 나이 15세였는데,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앉아 있으니 뭇 신하들이 눈여겨 보았다.
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간원에서도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 좌참찬 원경하(元景夏), 사직 조명리(趙明履)를 불러 이정하는 문서를 얼마나 뽑아내었는가를 묻고, 잇달아 동궁에게 대신의 연명 차자를 가지고 입시하기를 명하였다. 잠시 후 동궁이 나아가 부복하자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동궁의 앞에서 《정훈(政訓)》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훈》 가운데 ‘아들이 돌아와 아뢴다.[有子歸奏]’라는 말이 있는데, 네가 이것을 보고도 만약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 《정훈》 가운데 여덟 조목은 어느 책에서 나왔느냐?"
하니, 동궁이 대답하기를,
"《중용(中庸)》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25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56세의 수명을 누렸으니 나에게는 과분하다. 네가 만약 나의 뒤를 잘 잇는다면 25년 동안의 허물을 덮을 수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25년 동안 조금 평안했던 일도 또한 반드시 너로 말미암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근습(近習)을 엄격히 한다.[嚴近習]’는 말에 이르러서는 곧 근습을 온전케 하는 것이니 처음에 예방하지 않아 국법에 빠지게 한다면 비록 그들을 온전토록 하고자 하여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엄격히 한다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위엄과 처벌로써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다. 감히 우리의 정령(政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곧 엄격히 하는 것이다. ‘분화(紛華)’라는 것은 여색을 가리킨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날마다 손과 발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여 세 《보감(寶鑑)》을 읽어서 이러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나는 이 책들이 곁에 있을 때에는 감히 기대거나 눕지 못하였다. 이틀밤을 자지 않고 너에게 주기 위해 《정훈》을 지었으니 네가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느냐?"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조현명이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읽게 하였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어린 나이에 어렵고 큰 임무를 이어받으셨으니 저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조(大朝)께서 부탁하신 지극한 뜻에 보답하시겠습니까? 신들이 저하를 위해 구구한 근심과 염려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경사스러운 일을 당하여 감히 다섯 조목의 말씀을 올리니 좌우명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저하께서는 큰 뜻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큰 뜻이란 대인(大人)의 뜻입니다. 저하께서는 비록 어린 나이에 계시나 국정을 처결하시니 대인의 일을 실제로 행하고 계십니다. 진실로 어린 사람의 뜻을 버리고 대인의 뜻을 세우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큰 책임을 맡아 대인의 일을 행하시겠습니까? 대인이란 요(堯)·순(舜)·문왕(文王)·무왕(武王)과 같은 분이 바로 그것이니 참으로 요·순·문왕·무왕의 사업을 행하시려는 뜻을 갖고자 하신다면 요·순·문왕·무왕과 같은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저하께서는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효제란 부모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기의 자녀가 착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으며, 또 자기의 자녀가 악한 일을 하지 말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습니다. 대조께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저하께서는 반드시 행하시고, 대조께서 행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을 저하께서는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오로지 대조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서 비록 궁중의 하찮은 일이라도 한결같이 모두 여쭈어 행하시고 주무시는 잠자리와 잡수시는 음식을 보살펴 드리거나 용안을 뵙고 하교를 받들 때에 더욱 삼가고 두려워하며 정성과 예의를 다 하십시오.
셋째, 저하께서는 학문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학문이란 요·순·문왕·무왕의 사업을 배우는 것이니 독서 궁리(讀書窮理)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독서하지 않고 어떻게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온갖 일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를 응대함이 번거롭고 잦다고 하여 중간에 끊지 마시고 하루 두 번의 연석(筵席)을 혹시라도 중지하거나 폐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야흐로 봄날이 되어 낮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전각 끝에 화풍(和風)이 감도니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면 대조께서 들으시고 반드시 기쁘고 즐거워하시어 근심을 잊으실 것이니 이것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한 방도입니다.
넷째, 저하께서는 완호(玩好)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완호란 진기한 보물, 성악(聲樂), 화초, 새와 짐승이니 무릇 귀와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번 애호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장차 즐겨 갖고 싶은 욕망은 커지고 뜻과 생각은 황폐하게 되어 그 폐해는 단지 공부를 방해하고 정치를 해치는데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주지 육림(酒池肉林)과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경궁 요대(瓊宮瑤臺)가 모두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섯째, 저하께서는 근습(近習)을 엄격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근습이란 환관·궁첩(宮妾) 따위가 그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좌우에 있어 허물없이 대하기 쉬우니 저하께서는 모름지기 장중하게 몸가짐을 가지시어 이들 무리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게 하시고, 청소와 심부름 외에는 감히 털끝만큼도 분수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 가운데 경망되고 말이 많은 자는 반드시 멀리 내치십시오. 이 일은 나라의 치평(治平)과 혼란에 관계되며 과거의 실패한 자취를 여러 곳에서 상고할 수 있으니 오늘날에 있어서 엄중한 자세로 예방함이 마땅합니다.
이 다섯 가지 조목은 대조께서 태평한 세상을 이루시어 수복(壽福)을 누리시는 것들이므로 신들이 지금 저하께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저하께서 마땅히 이어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 오로지 공경하면 마음이 방자하여지지 아니하고 오로지 성실하면 일마다 모두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공경은 구용(九容)025) 에서 시작되고 성실은 속이지 않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오직 저하께서는 이를 생각하시고 이를 마음에 두소서."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상신의 차자가 곡진하고 조리가 있으니 너는 승지로 하여금 붓을 들어 비답을 부르는 대로 쓰게 하라. 내가 마땅히 지켜보겠다. 비답의 내용이 비록 능숙하지 않더라도 중외(中外)에서는 반드시 귀하게 여길 것이다."
하니, 동궁이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처녀가 처음 시집갈 때 어찌 부끄러움이 없으리요만, 그래도 배례(拜禮)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비답을 불러 쓰게 하는 것이 어찌 처녀가 처음 시집가는 부끄러움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동궁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하기를,
"차자를 보니 경들의 간절한 뜻이 두루 갖추어 있었다. 뜻밖에 대리 청정의 하교가 계시었으나, 나의 성의가 천박하여 끝내 명을 거두어들이게 하지 못하였으니, 천심(天心)과 정리(情理)에 초조하다. 이 다섯 조목을 어찌 감히 잠시라도 소홀히 하겠는가? 명심하여 잊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령하기를,
"사관(史官)이 가서 유시(諭示)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한 번 읽고 승정원에 버려 둘 것이겠는가?"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베껴 낸 뒤에 다시 들이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심하여 잊지 않겠다.[銘心服膺]’라는 글자는 네 자신이 생각해서 쓴 것이냐, 아니면 다른 데서 보고 쓴 것이냐?"
하니, 동궁이 대답하기를,
"정유년의 기초(記草)를 보고 썼습니다."
하자,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유년에 경묘(景廟)께서 비답을 내리시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는데, 오늘 네가 다시 옮겨 쓰리라는 것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느냐? 일찍이 소설(小說)을 보니, ‘산동(山東)의 부로(父老)들이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즉위조(卽位詔)를 보고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기뻐하며 술에 취했다.’는 것을 보고 내가 늘 눈으로 본 듯이 상상하였다. 오늘은 너의 처음 정사인데 어찌 백관을 신칙하고 군민(軍民)을 위안하는 한 마디 말이 없느냐?"
하니, 동궁이 불러서 받아쓰게 하기를,
"오늘 성상의 훈계를 받들어 정사에 참여하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은 한 마음으로 나라를 도와 소민(小民)에게 털끝만치라도 고통을 주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가 15세된 원량의 ‘한 마음으로 나라를 도우라.’는 말을 보고도 오히려 당습(黨習)을 일삼으며, 수령이 15세된 원량의 ‘털끝만치라도 고통을 주지 말라.’는 신칙을 보고도 오히려 혹시라도 백성을 침해한다면, 우리 동방은 반드시 오랑캐나 짐승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며, 잇달아 유신(儒臣)에게 《자성편(自省編)》을 읽도록 명하고 끝마쳤다.
하교하기를,
"대조(大朝)와 소조(小朝)의 명령을 승정원에서 모두 거행하게 하면 시강원은 홍문관과 같음에 지나지 않게 되니, 비록 예에 따라 춘추관의 직책을 겸임하더라도 입대(入對)하여 사초(史草)를 실사관(實史官)에게 봉해 보내는 것으로 규식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8일 정축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재로와 좌의정 조현명이 모두 강학에 힘쓸 것을 청하니 가납하였다. 김재로가 영해읍(寧海邑)의 환곡(還穀)으로 허위로 기재된 1년 조(條)를 탕감해 줄 것을 아뢰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국가의 경용이 궁핍함으로 평안 감영의 돈 1만 냥을 얻기를 청하였으나, 감사가 장부에 기록하기 전에 올려 보내면 혹시 사사로이 바치는 것 같은 혐의를 받으므로 장청(狀請)하기를, ‘별향고(別餉庫)의 이미 장부에 기록된 것을 먼저 보내고 뒤좇아 보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시행을 허락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처음에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별향고의 장부에 기록된 것은 가져다 쓸 수 없다고 아뢴 것으로 인하여 감영에서 올려 보내는 돈으로 쓰라고 고쳐 하령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공천(公賤)·사천(私賤)으로서 양인(良人)인 아내를 맞은 자의 소생은 아비의 신역(身役)을 따랐으나 경술년026) 의 새 정식(定式)에는 어미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도록 하였는데도 작년에 장례원(掌隷院)에서 제도(諸道)에 영을 내려 양인이 된 자를 책으로 만들어 보고하여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되 보충대(補充隊)의 속전(贖錢)을 또한 독촉해 받아 올려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보충대란 속량(贖良)한 자의 이름입니다. 남자 종과 양인 아내와의 소생은 나라에서 이미 어미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으라고 명령했으니 땅에 떨어질 때부터 자연히 양인이 되었으므로 애당초 보충대의 의리가 없습니다. 속전은 제도로 하여금 징수를 면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장례원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시민(市民)의 피폐함이 참으로 가엾습니다. 지난날 비국(備局)에서 조사해 보니 장시(場市)에서 부담하는 역의 1년 부담액이 수만 냥에 이르니 시민들이 어떻게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를 키우겠습니까? 김상로(金尙魯)·박문수(朴文秀)로 하여금 가름하여 곧 바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대사간 정휘량(鄭翬良)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산림(山林)의 선비를 불러 들여 서연(書筵)의 강학(講學)에 출입하도록 하소서. 또 청컨대 각사(各司)에 엄중히 신칙하여 반드시 묘사 유파(卯仕酉罷)027) 의 법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또 청컨대 어제 조참(朝參)에 헌납 조중회(趙重晦)가 나오지 않았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시고, 오늘 차대(次對)에 불참한 대사헌 조명교(曺命敎)를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장령 임집(任)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경외(京外)의 초기(草記)를 비국에서 접수하는 대로 즉시 회달하여 적체되지 말게 하시고, 외방의 적체된 옥안(獄案)을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친히 옥사(獄事)의 문안을 조사하여 즉시 처결케 하시고, 수령으로 백성에게 역을 지워 농사를 방해하는 자는 도신에게 신칙하여 장달(狀達)해서 치죄(治罪)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김상로가 경연관으로서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은 곧 대리 청정 후 처음 신료들을 접견하셔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자문하시는 날입니다. 논란해야 할 정법(政法)과 쇄신해야 할 기강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헌신(憲臣)이 새로 아뢰는 것은 조용하여 책임만 모면하는 것이니 장령 임집을 체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경연관이 경연에 입시하여 글의 뜻으로 인하여 대간을 논하는 것은 옛날에도 더러 있었지만 빈대(賓對)할 때에 벼슬이 경연관이면서 논의가 대각에까지 미친 것은 고례(古例)에 없었습니다. 대간의 파직은 비록 대신이라도 오히려 쉽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바로 처음 정사를 여는 날이니 이러한 사례는 저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대신에게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고례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고례를 신 역시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대간은 논박하여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동궁은 이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여러 신하들은 모두 움추리고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하여 대조(大朝)에 입시할 때에 비해 더욱 엄숙하고 공손하였으니 대개 동궁이 과묵하고 위엄이 있어 얼굴빛과 말솜씨로써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1월 29일 무인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원량이 오늘 서연(書筵)을 빠뜨렸다 하니 춘방(春坊)의 관원을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어석윤(魚錫胤)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고 지극히 현명하시며 국사에 밝고 익숙하시면서도 오히려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셨는데, 어찌하여 부탁할 사람을 얻었다 하여 국사에 마음을 놓으실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유년028) 을 회상하니 감회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조금 전에 조용히 누워 조는 듯 마는 듯하다가 갑자기 유신을 부르라 명하였다. 나에게도 뜻이 있으니 어찌 대리 청정한다고 하여 국사를 소홀히 하겠느냐?"
하였다. 어석윤이 말하기를,
"신들이 옥당(玉堂)에서 석양이 비추인 창을 바라보며 슬프게 서로 말하기를, ‘대조(大朝)께 입시하는 것도 이제부터는 드물 것이다.’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부르시는 명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자못 감동하였다. 교리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대신을 인접하시고 신들을 불러 보시어 국사를 의논하시며 고사(故事)를 강론하시면 동궁의 첫 정사에 도움되는 것이 또한 많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주 유신들을 불러 경사(經史)를 선택하여 읽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였다. 어석윤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강론을 마치어 상유지공(桑楡之功)029) 을 거둘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어제 동궁이 차대(次對)한 거조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승지로 하여금 하나하나 읽어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이 ‘이와 같은 대간은 논박하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원량에게 대신(臺臣)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열어 놓을까 두렵다. 좌상은 끝내 ‘쾌(快)’ 자 한 글자가 병통이 되었다. 영상이 기영(箕營)030) 의 돈 등에 대한 말을 원량에게 개진한 것도 역시 매우 유감스럽다.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나이 어린 임금에게 반드시 수한 도적(水旱盜賊)031) 으로써 아뢰는 뜻과 같지 않는가? 원량이 말하기를, ‘소민(小民)에게 떨끝만치라도 고통을 주지 말라.’고 하였지만 백성이 고통스럽고 고통스럽지 않는 것은 실상 그 자신에 달려 있다."
하며, 이윽고 앞에 놓인 촛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역시 백성의 노고로 된 것인데도 원량은 촛대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백성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원량이 차대할 때 20여 명의 여러 재신(宰臣)들 가운데 진달한 사람이 겨우 두세 사람뿐이며, 그 또한 하찮은 부서(簿書)032) 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생각한 바가 있었으나 날이 저무는 것이 혐의스러워 아무 말없이 물러갔다면 이것은 원량을 보좌하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리 청정의 초기를 맞이하여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홀(笏)에 하고 싶은 말을 써서 임금에게 아뢰는 뜻을 생각하지 않는가? 발언하지 아니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중추하라. 장례원의 일은 비록 부서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것은 백성에 관계되는 일이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파직시키는 것은 오히려 가벼우니 모두 삭직(削職)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자의 강학(講學)에 양사(兩司)가 비록 입시하지만 이미 승지와 사관이 없으니 전달할 수가 없다. 강학이 끝난 뒤에 대청(臺廳)에 나와 전달하도록 하라. 비록 서연(書筵)과 소대(召對)를 할 때라도 춘방은 홍문관과 다르니 감히 글의 뜻을 인용하여 정치를 논하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이 든 사람을 나이 든 사람답게 대접하는 것은 혈구지도(絜矩之道)033) 이니 사서인(士庶人)으로서 90세 이상 되는 사람을 경외(京外)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여 우리 원량으로 하여금 경로(敬老)의 의미를 알게 하고 우리의 부로들로 하여금 원량의 첫 정사를 알게 하라."
하였다. 또 찬선 심육(沈錥)은 즉시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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