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9권, 영조 25년 1749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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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묘

임금이 장릉(長陵)의 가을 전알(展謁)을 2월 초10일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소령묘(昭寧墓)를 차례로 참배하되 연로비(輦路費)를 모두 면제하게 하고, 백성에게서 나온 호랑이 잡는 그물의 값을 모두 저치미(儲置米)로 지급하되 경기 감영에서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2월 2일 경진

양사(兩司)034)  의 관원을 체직시킬 것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원량의 처음 정사에 있어 학문과 정사에 부지런하기를 모두 권면함이 마땅한데 강관과 유신 외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한결같이 조용하니 한심하다. 모두 체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박상덕(朴相德)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 저하에게 여러 정사를 대리케 하심은 저하로 하여금 성상의 노고를 대신케 하려 함만이 아니요, 대개 저하로 하여금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엄숙 공경하여 대조(大朝)의 태평을 이룬 치적을 잇고 열성(列聖)의 4백 년 기업을 지키려 하신 것입니다. 원컨대 저하께서는 몸소 그 뜻을 삼가 받들어 반드시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나에게 있는 권도(權度)를 자세하고 적절하여 착오가 없게 한다면 일의 득실과 사람의 정위(情僞)가 마음과 눈에 환히 보여 결단하고 처분하는 데에 그 타당함을 쉽게 얻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밝은 임금은 반드시 어짐과 사특함을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는 나라답지 않고 사람은 사람답지 않게 됩니다. 선조(宣祖)·인조(仁祖) 이래로 당쟁이 날로 치열하여 폐해가 2백 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우리 성상께서 지성으로 조정하시어 거의 화평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신과 역적을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제방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데에 이르러서는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강경하게 논하였는데, 성상께서도 역시 그르다 하지 않으셨으니 저하께서는 깊이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 침묵이 풍습을 이루고 언로가 막혔으니 청정(聽政)하는 초두에 구언(求言)이 더욱 제일의 급선무입니다. 앞뒤로 죄를 범한 대신(臺臣)은 경중과 득실을 따지지 말고 모두 용서하시어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이십시오. 이종성(李宗城)이 작년에 올린 패역한 상소는 충신과 역적을 현혹시키고 제방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니 그가 범한 죄를 논하면 귀양보내거나 죽이는 것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이조에서 의망(擬望)을 막은 것은 실로 공의(公議)에 의거한 것인데, 비국 당상으로 차하(差下)하시는 것을 또 어찌하여 그렇게 서두십니까? 이러한 무리를 만약 엄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흉악한 주장이 날로 불어나고 사특한 의논이 마구 나돌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니, 마땅히 먼 변방에 귀양보내어 선악을 구별하여 밝히셔야 합니다. 지난날 삼사(三司)의 큰 논의로 갑자기 정계(停啓)시킨 것은 실로 이종성이 앞잡이가 된 데에 말미암은 것이며, 진실로 조진세(趙鎭世)·이영조(李永祚)·김시위(金始煒)의 무리가 임금을 망각하고 당파를 위해 헌신한 것이 아니면 어떻게 감히 몸을 던져 함부로 정계하겠습니까? 죄를 청하는 논의가 가까스로 일어났다가 이내 정침되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으니 모두 귀양보내는 율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대조의 하교에 ‘이제 정사에 근면하고 학문에 근면하기를 청하라.’고 하였지 어찌 그런 말을 하라고 하였는가?"
하고, 상서를 도로 주도록 하였다.

 

이복해(李福海)를 종성부(鍾城府)로 유배하였다.

 

2월 5일 계미

심육(沈錥)을 대사헌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대사간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평안도 관찰사로, 이응협(李應協)을 장령으로, 김선행(金善行)을 헌납으로, 홍낙성(洪樂性)을 지평으로, 유언국(兪彦國)·이만회(李萬恢)를 정언으로, 조재덕(趙載德)을 부수찬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상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을축년035)  에 전교로 인하여 어가(御駕)가 외방에 거둥하여 하룻밤을 지날 경우 대궐문을 열고 닫는 것을 대비전에 아뢰어 거행하고, 문안관(問安官)이 만약 밤에 성밖에 도착하더라도 성문을 열자고 감히 청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능행(陵幸) 때도 대궐문을 동궁전에 아뢰어 열고 닫으며 성문은 을축년의 예에 따라 열기를 청하지 말도록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거의 예에 따라 대비전에 아뢰고 성문을 열고 닫는 것은 을축년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황해 감사 엄우(嚴瑀)의 장달(狀達)에 의하면 각궁(各宮)의 세금 면제액의 많고 적음이 고을마다 같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폐해를 입고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역(驛)에 주는 복호(復戶)의 예에 따라 1결에 8냥씩으로 균등하게 정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여러 신하가 차례로 입지(立志)·강학(講學)·근정(勤政)의 요체를 진달하니 대답하기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이조 참판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사직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당시 박상덕(朴相德)이 조진세(趙鎭世) 등이 삼사(三司)의 합계를 임의로 정계하였다고 논박하면서 대각에 의망한 전관(銓官)을 함께 탄핵하려다가 그것이 이천보가 한 것임을 알고 지워 버렸는데 이 말이 전파되었던 까닭에 이천보가 스스로 인혐한 것이었다.

 

2월 7일 을유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영의정 김재로가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능행(陵幸) 때 왕세자가 지영(祗迎)·지송(祗送)의 예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과거의 제도에는 능(陵)에 참배할 경우 대궐문 밖에서 영송(迎送)하였으나 임금은 동궁이 나이가 어리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2월 8일 병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2월 10일 무자

임금이 장릉(長陵)에 나아갔다. 4경에 임금이 융복(戎服)을 입고 궁을 나와 신원(新院) 주정소(晝停所)의 막차(幕次)에 들어가니 동이 아직 트지 않았다. 또 봉일천(奉日川)의 막차에 주필(駐蹕)하고 오시(午時)가 되기 전에 능소에 도착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능을 봉심하였다. 임금이 동북쪽 한 기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곳은 나를 위한 땅이니, 대신과 예조 판서는 알아 두라."
하였다.

 

2월 11일 기축

4경에 임금이 익선관·참포·오서대를 갖추고 의식대로 제사를 지냈다. 제례를 마친 뒤 마산(馬山)을 거쳐 가니 이곳은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묘였다. 낮에 파주(坡州)에서 머무른 뒤 해질 무렵 소령묘(昭寧墓)에 이르렀다.

 

2월 12일 경인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환궁하였다. 임금이 주정소에서 경기 감사와 각종의 임무를 띤 차사원(差使員)을 인견하고 농사를 권장하라고 칙유(勅諭)함과 아울러 수륙(水陸)의 봄철 조련(操鍊)을 정지시켜 농민을 쉬게 하였다.

 

임금이 길가에 있는 헤어진 옷을 입은 어린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하교하기를,
"이윤(伊尹)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실로 부끄럽다. 지방의 수령이 백성을 구휼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우리 백성을 보호하게 하라."
하고, 잇달아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의복과 양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사간        유언술(兪彦述)이 상서하여 문학(問學)·역행(力行)의 요체를 진달하고, 정언        유언국(兪彦國)이 욕망을 끊고 학문에 근면하는 방도 및 양역(良役)의 곤궁한 폐단을 진달하니 동궁이 모두 우답(優答)을 내렸다.

 

2월 13일 신묘

하교하기를,
"관무재(觀武才)·별시재(別試才)를 과거에는 군병을 고무하는 뜻에서 하였지만 작년 정월 이후부터는 달마다 어가(御駕)가 거둥하였고 지금 또 성밖으로 거둥하였으니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다. 일체 계사년036)  의 예에 따라 별시재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 홍봉한(洪鳳漢)을 불러 민간의 괴로움을 물었고, 또 유신(儒臣)을 불러 《심감(心鑑)》과 《정훈(政訓)》을 읽게 하였다.

 

2월 14일 임진

임금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보았으니 《정례(定例)》가 바야흐로 두서(頭緖)를 갖춘 때문이었다. 이때에 평화로운 기간이 오래 계속되어 재부(財部)를 소모하고 좀먹는 것이 수없이 많이 나왔는데, 임금이 그중 교묘하게 속여 명목을 만들어 중간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 많음을 보고 친히 지워 없애 버리니 삭감한 것이 연간 거의 10만 냥이었다. 하교하기를,
"지금 탁지(度支)를 바로잡음으로 인하여 국가의 경비가 낭비되는 것을 크게 깨달았으니 한갓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나를 비웃을 뿐만 아니라, 그 폐해가 소민(小民)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지금부터 궐내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전교를 들은 뒤에 계하 단자(啓下單子)가 있을 것이니, 전교는 있으면서 단자가 없는 것은 탁지로 하여금 조사하여 상주하게 하고, 대궐 안에 수선(修繕) 등의 일에는 전교가 있으면 낭청(郞廳)이 계사(計士)를 거느리고 살펴보고 직접 중관(中官)의 말을 들어 거행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절약하는 것을 이미 대궐 안에서부터 시작하였으니 각사(各司)에서 어찌 감히 아까워하고 애석하게 여기겠느냐? 저지난 무신년037)   이후에 증가한 것은 일체 모두 줄여 없애라."
하였다. 또 《정례(定例)》의 책머리에 특별히 쓰기를,
"뒤에 만약 다시 낭비하는 자가 있으면 탁지에서는 이 전교에 의하여 곧바로 금추(禁推)038)  를 청하고, 제서 유위(制書有違)의 율(律)로써 시행하라. 이것은 나의 나라를 위한 심원한 계책이니 왕위를 이어받은 자가 이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명채(曹命采)를 승지로, 황경원(黃景源)을 응교로, 김선행(金善行)·임집(任)을 교리로, 이응협(李應協)을 부교리로, 정실(鄭實)을 문학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지평으로, 이익정(李益炡)을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교리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지난번 능행(陵幸)에서 돌아오실 때에 대신(臺臣)의 과오를 기록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동궁의 모든 언행은 전하를 본받기 마련이니 만약 그렇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한다면 뒷날의 폐단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때 대신(臺臣)이라 하지 않고 헌부관(憲府官)이라 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임금이 능행에서 돌아올 때 예 도감(禮都監)의 서리(書吏)가 유독 홍의우립(紅衣羽笠)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헌부의 배종 관원(陪從官員)을 먼저 체차한 뒤에 과오를 기록하라고 명하였는데, 헌신(憲臣)의 과오를 기록한 것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므로 옥당(玉堂)에서 이에 이르러 권면하려고 진달한 것이었다.

 

2월 15일 계사

부수찬 조재덕(趙載德)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의 책임이 지난날에는 잠자리를 보살피고 입에 맞는 음식으로 봉양하며 서연(書筵)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부터는 군국(軍國)을 보살피는 임무와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으니, 장차 어떻게 맡은 일을 실천하고 크나큰 기대에 부응하시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서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봄철의 초목이 사랑스럽다.’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는데, 그 마음을 미루어 새로 돋아나는 어린 잎새에 혹시 발을 들어 걸음을 옮기다가 상하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 나라는 장래가 밝을 것입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깊은 사랑으로 진계(陳戒)하니,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2월 16일 갑오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갔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고 차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원량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하고, 이어 동궁에게 이르기를,
"무릇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에 대하여 만약 ‘그렇게 하라.[依爲之]’라는 세 글자로써 미봉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함경 감사의 장달(狀達)에 의하여 아뢰기를,
"성진 방영(城津防營)은 도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육진(六鎭)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아홉 갈래가 있는데, 길주는 요충에 해당하지만 성진은 단지 세 갈래 길만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말하기를,
"방영을 비록 길주에 도로 소속시키더라도 성진에 역시 군졸이 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진졸(鎭卒)이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옳겠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나에게도 품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동궁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더니 어떤 사람은 옳다 하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는지라 이를 대조(大朝)에게 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길주와 성진의 방어 형편을 비국 당상을 보내어 보고 정하는 것이 마땅한데, 누가 갈만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필 대신을 보내어 그 일을 하게 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대신이 변방을 순시하는 것이 일상사와 다름없었는데, 지금이라고 하필 그것만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가겠다고 자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왔을 때 호조에서 빌린 수어청(守禦廳)의 은자(銀子)를 미처 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수어청의 쌀 3백 석을 호조에 보내기로 품달하여 정한 적이 있는데 은자와 바꾼 것이라고 핑계대고 끝내 내어주지 않으니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호조에서 쓰는 비용이 비록 중대하지만 수어청의 불의의 변관에 대비한 은자를 아직껏 돌려주지도 아니하고 또 세미(稅米)를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하나는 유정지공(惟正之供)이요, 하나는 유사시에 필요한 것이니 네가 마땅히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세미는 호조로 보내고, 은자는 호조에서 준비하여 상환하는 것이 옳다."
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처리가 옳다."
하였다. 조관빈이 말하기를,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거지가 많이 있으니 마땅히 경조(京兆)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고향에 돌아가 편히 살게 하소서."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유시하기를,
"너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자랐으니 어떻게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겠느냐? 지금 길주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보니 손쉽게 처리해 버리는 병통이 없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명령도 감히 방심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고 조제에 고심하여 머리와 수염이 모두 허옇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서로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너는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킴이 마땅하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분리해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저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선대를 따져 보면 모두 혼인으로 맺어진 서로 좋은 사이지만 당론이 한번 나오게 되자 문득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져 각기 서로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고집스럽게 조제에 힘쓴 것은 단연코 옳은 것이다. 지금 진언하는 자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당파 하나를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편협하다.’ 하며, 혹자는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그 말하는 바가 천만 갈래로 나뉘었다. 비록 감히 서로 살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오늘부터 네가 만약 신하들이 아뢰는 대로 듣고 믿어서 시원스럽게 그 말에 따르기를 지금 길주의 일과 같이 한다면 그 결과 종묘 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쪽은 나아가고 한쪽은 물러남이 겉으로는 시원스럽게 보이지만 살육의 폐단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이니, 네가 이 명을 지키지 않으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느냐? 4백 년 조종(祖宗)의 기업과 한 나라의 억만 백성을 너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출사하였다. 정우량은 일찍이 전장(銓長)을 지내다가 중대한 논박을 받아 체직되었는데, 다시 제수되자 고집하여 버티면서 감히 출사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불러 보고 위로하였다. 또 손수 글을 써서 주었는데, 이르기를,
"원량의 처음 정사에 이 직임을 가려 뽑으려 한다면 경을 버려두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지나간 일은 말할 것도 없다. 경은 어찌하여 고집하여 버티는가? 오늘 즉시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니, 정우량이 명을 받들고 나왔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천관(天官)의 장관은 백관을 나아가게도 물러나게도 하니, 그 지위와 책임의 소중함이 하급 관료에 비길 바가 아닌데, 임금의 은례(恩禮)에 핍박을 받아 그 염우를 스스로 펴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켜 출척(黜陟)의 정사를 행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를 두둔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일을 담당하고자 할 것 같으면 탄핵과 논박으로 말미암아 거취를 결정하여 그들이 모함으로 몰아내려는 꾀에 빠져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아!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이로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자를 곧게 하기 위해 여덟 자를 굽히더라도 이롭다면 그래도 또한 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가 염치를 무릅쓰고 출사한 것은 여덟 자를 굽힐 뿐만이 아니요, 정사를 행하는 데에 이르러 한 자도 곧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래도 또한 할 만한 것인가? 세상이 모두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으나, 식자층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과 한 가지 일 때문만이 아니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0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천관(天官)의 장관은 백관을 나아가게도 물러나게도 하니, 그 지위와 책임의 소중함이 하급 관료에 비길 바가 아닌데, 임금의 은례(恩禮)에 핍박을 받아 그 염우를 스스로 펴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켜 출척(黜陟)의 정사를 행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를 두둔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일을 담당하고자 할 것 같으면 탄핵과 논박으로 말미암아 거취를 결정하여 그들이 모함으로 몰아내려는 꾀에 빠져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아!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이로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자를 곧게 하기 위해 여덟 자를 굽히더라도 이롭다면 그래도 또한 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가 염치를 무릅쓰고 출사한 것은 여덟 자를 굽힐 뿐만이 아니요, 정사를 행하는 데에 이르러 한 자도 곧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래도 또한 할 만한 것인가? 세상이 모두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으나, 식자층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과 한 가지 일 때문만이 아니다.

 

2월 17일 을미

임금이 동궁을 시좌(侍坐)하게 하고 유신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너는 안락한 데서 태어나서 안락하게 자라났다. 대리 청정한 후에 만약 의심스럽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물어 시행하라. 동해왕(東海王) 유강(劉彊)은 능히 광무제(光武帝)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렸으니, 내가 잘못한 것을 네가 만약 경계하는 말로 아뢴다면 세상 사는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자성편》을 읽게 하고 장구(章句)마다 동궁에게 훈계하기를,
"천리(天理)는 멀리 있지 않고 다만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천리가 비록 높고 멀리 있는 것 같으나 힘써 실천하면 합치할 수 있을 것이요, 힘써 실천하지 않으면 물욕(物欲)에 가리는 것이다. 용군(庸君)과 명주(明主)의 판별은 오로지 천리냐 물욕이냐, 공(公)이냐 사(私)냐로 구분되는 것을 너 역시 어찌 모르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생각없이 미친 짓을 한다.[罔念作狂]’의 ‘광(狂)’ 자는 광분하여 질주(疾走)하는 것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천리에 위배되면 그 모두가 광(狂)이다. 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거나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 광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13세에 비로소 사부(師傅)를 만나 늦게 배운 까닭에 몸소 행하고 실천하지 못하였고, 또 나의 기품이 심하게 용렬하고, 저급하지는 않아 자신을 믿는 병폐가 있기 때문에 너는 나보다 낫다. 그러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초목에 물을 주는 것과 같으니 지금 연소할 때에 힘쓰지 않을 수 있느냐? 진실로 이 시기를 잃으면 비록 후회한다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 있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방벽 사치(放僻奢侈)는 모두 쾌심(快心)에서 연유한 것으로 임금이 착한 일을 하면 백성들이 칭송하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모두 비웃으니, 이른바 ‘종로(鐘路) 거리의 사람이 그 임금을 꾸짖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쾌(快)’ 자 한 자가 너에게는 병통이니 경계하고 경계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천명(天命)의 거취는 단지 임금이 착하냐, 악하냐를 보는 것이요, 수많은 백성은 바로 상천(上天)의 적자(赤子)이다. 하늘이 임금의 자리를 백성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겠느냐,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주겠느냐? 걸(桀)·주(紂)가 망한 것과 탕(湯)·무(武)가 흥한 것은 모두 공경하느냐, 불경하느냐에 연유한 것이다. 곤충·초목도 모두 나의 물건이니 네가 만약 뽑거나 밟는다면 그것은 나를 망각한 것이다. 미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우리 세록(世祿)을 받는 신하이겠느냐?"
하였다. 세기무형제장(世豈無兄弟章)에 이르러서 임금이 또 말하기를,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현명함으로도 소년 천자(少年天子)라 일컫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짐(朕)은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말하였고, 증자(曾子) 어머니의 현명함으로도 오히려 투저(投杼)039)  하는 일이 있었다. 임금은 지극히 어려운 자리에 처해 있어 심각한 참소가 많은 것이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황형(皇兄)께서 만약 증자의 어머니가 투저하듯 하셨다면 내게 어찌 오늘날이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나를 섬기는 마음으로 나의 황형을 섬겨 신축년040)   겨울 이후의 일은 넓은 안목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태묘(太廟)에 들어갈 때는 번번이 송구스러운 듯 ‘몸을 굽힌다.[鞠躬如也]’라는 구절을 외우는데 기(氣)를 펴고도 피곤함을 모르니 성인의 교훈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전(慈殿)에 입시할 때는 너 역시 이 구절을 외우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 밖에 삼신 두 켤레가 있을 때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들어가지 말 것이니 이것은 범절에 관한 하찮은 일이지만 이러한 것들에서 성찰하여 미루어 나가면 역시 큰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음식은 한때의 영양과 맛이요, 학문은 일생의 영양과 맛인데, 배부르고도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학문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보통 때 반드시 꿇어앉아 감히 다리를 쭉 펴고 앉지 않는다. 이는 비단 학문을 해서가 아니라 곧 우리의 가법(家法)이 그러한 까닭이다. 네가 바야흐로 대리 청정하여 팔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춘대(春臺) 위의 동산에서 모두 놀게 한다면 풍우(風雩)의 기상이라 할만 하지만, 만약 내시와 더불어 후원에서 노닐면서 욕기(欲沂)라고 한다면 이는 걸주(桀紂)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041)  ."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과거 공물로 바친 것 가운데 산 것은 번번이 후원에 놓아 주었더니 지금 춘당대의 못 속에는 한 자 넘는 잉어가 많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개미가 줄지어 가는 것을 보면 차마 밟지 못하고 파리나 모기가 장 단지에 빠져 있으면 모두 건져 날려 보냈다. 비록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이랴? 만약 형옥(刑獄)을 경솔하고 안이하게 처리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니 신중히 하고 신중히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불나방이 날아와 등불에 부딪치는 것을 보면 도랑과 골짜기에서 이리저리 뒨구는 백성을 생각하여 구휼하는 정사를 베풀었다. 너는 비록 한참 즐겁게 놀 때라도 항상 오막살이의 미천한 백성과 더불어 그 즐거움을 함께할 마음을 가져라. 사람이 자식 하나를 남에게 맡겨도 사랑하기를 힘써 당부하거늘 하물며 억만 백성을 너에게 맡김이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치를 몰아내는 한 가지 절목은 곧 임금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나도 즉위초에 역시 사치를 금한 일이 있으니, 먼저 농사의 어려움을 알고 난 뒤라야 물자를 아껴쓰고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 네가 만약 양 한 마리를 삶으라고 한다면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는 것 역시 크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이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하면 신민에게 베푸는 은혜가 시들해지는 것이 니, 주(紂)의 신민들이 임금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것은 주색에 빠진 데 연유한 것이다.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모두 너를 위해서이다. 한(漢)나라 성제(成帝)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신(神)과 같았으나 한가하게 있을 때는 비연(飛燕)과 더불어 황음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이 점을 깊이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문을 닫으면 언로(言路)가 열리고 성문을 열면 언로가 닫힌다고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말이다. 언로를 열어 놓은 것은 바로 우리 조종조의 아름다운 일이니 너는 모름지기 공경하게 본받으라. 네가 엄숙하고 굳세기가 남보다 지나치므로 신하들이 감히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니 너는 마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만 가지 정무의 번거로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리한 뒤라야 실수가 없을 것이니, 어느 날 어떤 일을 어느 신하가 어떤 계(啓)를 올렸는지 반드시 기록하여 곁에 두고 의심스러우면 뒷날 다시 물어 보는 것이 좋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은 어렵다. 처음에 비록 온갖 고생을 겪었더라도 끝에 가서는 오히려 태만해지는 한탄이 있는데, 수성하여 편안을 누리는 임금이야 어떻게 처음과 끝이 같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섭이중(攝夷中)의 춘종시(春種詩)는 실로 간절하니, 저들 농사짓는 사내와 양잠하는 부녀의 노력과 고생이 이와 같지만 그들 자신은 입거나 먹지 못하고 이를 나와 너에게 바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어찌 차마 호의호식하여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조제에 고심한 것은 붕당은 반드시 나라를 망치게 되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의 진퇴 역시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강(講)을 마친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훈계하고 신칙한 것은 바로 나라를 위한 고뇌에서이다. 너는 대리 청정 초에 ‘입기강(立紀綱)’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역시 쉽게 생각하여 나온 것이다. 시 한 수를 짓고 갑자기 기강을 세우고자 한다면 그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대리한 뒤부터는 체모가 전과 다르니 역시 글을 많이 지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2월 18일 병신

헌부 【지평 한광조(韓光肇)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저하께서 어린 나이에 청정하시니 뭇 신하들은 충직한 말을 올려 빠뜨린 것은 보충해야 마땅한데, 칭송하는 말은 번갈아 나오고 바르고 엄절한 말은 듣지 못하겠으니, 견책하고 벌을 내려 충성으로 간하는 길을 열어 놓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질과 재주에서 문학은 잘 하지만 정사는 잘 못하며 혹은 간쟁에는 능하면서 일 처리는 서툰 경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능하지 못한데도 억지로 적합하지 않은 자리에 앉혀 요행으로 이력을 쌓아 모든 면에 통달한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니, 청컨대 묘당(廟堂)과 선부(選部)에 신칙하여 이러한 폐단을 고치도록 하소서. 교화를 두터이하고 형옥을 밝힘은 제왕의 중대사입니다. 도성안에 살옥(殺獄)이 30여 건이 되는데,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며느리가 시어미를 모함하며 종이 상전을 무고하였는데도 급히 파헤쳐 조사하지 않고 세월만 질질 끌고 있으니, 마땅히 형관(刑官)에게 신칙하시어 속히 죄상을 심문하여 처단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상달하기를,
"전 수찬 이세사(李世師)는 상소를 남에게 대신 짓게 하였으니 도리에 어그러졌으며, 정언 민우(閔堣)는 고루하고 용렬한데도 외람되게 제수되었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경상 좌수사 이언섭(李彦燮)은 전날 친상(親喪)을 당했던 진영에 다시 임명되었는데도 거리낌없이 부임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은 씀씀이를 절제하지 않으니 중추(重推)하여야 하며, 형조 판서 구성임(具聖任)은 무신(武臣)으로서 자리를 채웠으니, 마땅히 체차하여야 하며, 상참(常參)할 때에 종신(宗臣) 가운데 절목을 어기고 당(堂)에 오른 사람은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大朝)께 품하였더니 ‘종신의 건은 지나치니 추고하라. 이세사와 이언섭에 관한 일은 처분한 것이 또한 뜻한 바가 있는데 어찌 감히 청정의 초기에 다시 청하는가? 형조 판서의 건은 청한 것이 비록 지나치지만 가려서 임명한 때에 어찌 〈윤허를〉 아끼겠는가?’라고 하교하셨다. 민우와 훈련 도감의 일 및 사람을 쓰고 언로를 여는 문제는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 【정언 유언국(兪彦國)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하고 화전(火田)을 막아 산림을 기르게 하소서. 공조 참의 김정윤(金廷潤)은 3년 동안 벼슬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많이 불러일으켰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문학 정실(鄭實)이 상서하여 네 조목으로서 힘쓸 것을 아뢰기를,
"과정(課程)은 반드시 엄격하게 하고, 송독(誦讀)은 반드시 입에 익게 하며, 남에게 묻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하니, 동궁이 가납하였다.

 

2월 20일 무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좌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저하께서는 일을 당할 때마다 쉽고 어려운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대조(大朝)께 품하시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적은데, 신은 저하의 마음이 신중하게 살피자는 데서 나온 줄은 잘 알지만 역시 너무 지나친 것은 옳지 않습니다. 스스로 결정할 것은 결정하고 품할 것은 품해야지 어떻게 모든 것을 번거롭게 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이르기를, ‘일할 때는 천균(千勻)의 활을 당기는 것같이 하고, 연마할 때는 쇠를 백 번 단련하듯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활쏘는 자는 시위를 당길 때에 신중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되고, 대장장이는 주금(鑄金)할 때에 단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으로 이 이치를 궁구한다면 무릇 모든 일을 신중히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언 이만회(李萬恢)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전최(殿最)를 엄격히 하여 서울과 외방의 차이가 없게 하시고, 회자(回刺)를 신칙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규칙을 복구하게 하소서. 무신 박찬신(朴纘新)은 저자 가운데서 여(輿)를 타고 드나들었으니 파직하고, 판윤 이세진(李世璡)은 나이가 이제 쇠진하여 격무를 맡기기 어려우니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대조께 품한 뒤에 모두 시행하겠다."
하였다.

 

2월 22일 경자

전 부사 박필부(朴弼傅)가 상서하여 다섯 조목으로 경계하여 진달하기를,
"효도를 두터이하시고, 큰 뜻을 분발하시며, 기강을 세우시고, 대의를 밝히시며, 어질고 사악함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뜻으로 답하였다.

 

조재덕(趙載德)을 사간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장령으로, 안집(安𠍱)을 헌납으로, 김치인(金致仁)을 지평으로, 구윤명(具允明)을 정언으로, 김양택(金陽澤)을 부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부수찬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겸 문학으로, 유엄(柳儼)을 형조 판서로, 김상중(金尙重)·윤광소(尹光紹)를 승지로 삼았다.

 

2월 23일 신축

임금이 대신을 인견하고, 잇달아 봉성 참핵사(鳳城參覈使) 김상적(金尙迪)에게 유시(諭示)를 내렸다. 처음에 역관 이윤방(李允芳)이라는 자가 은(銀)을 잃고 항주(炕主)인 정충(鄭忠)이라는 자를 의심하여 결박한 뒤 형부(刑部)에 정문(呈文)을 올려 참사(參査)하기에 이르렀는데, 피인(彼人)들이 이윤방은 심문하지 않고 오직 정충만 고문하였으나 정충이 복죄(服罪)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꾸짖는 유시를 내리기를,
"이윤방은 애초에 증거를 잡은 것도 없이 경솔하게 먼저 대국(大國) 사람을 결박하였고, 또한 감히 임의로 형부에 정문을 내어 이런 사소한 일로 회사(會査)하는 괴로움을 겪게 하였다. 내가 본시 이윤방을 엄중하게 심문하고 싶었으나 참사(參査)를 청한 것은 곧 일의 처리를 엄격하게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죄없는 대국 백성에게만 편벽되이 형벌을 받게 하겠는가? 참핵사를 먼저 중추하고 일깨워 신칙하라."
하였다.

 

2월 25일 계묘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별시재(別試才)를 친히 살피며 화병(花餠)을 지져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어제시(御製詩) 한 구절을 내리고 화답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동궁이 시좌(侍坐)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필 동궁에게 이런 무사(武事)를 보기를 권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좌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발양(發揚)하는 기운을 구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상을 내리는 날 시좌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때 모두 3일만에 마쳤는데, 임금이 향군(鄕軍)의 위사(衛士) 가운데 최하급자들을 불러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물으니, 향군들은 각각 기사(騎士)의 군포(軍布)와 양정(良丁)을 황구(黃口)와 백골(白骨)에게 침징하는 폐단을 나아와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묻고나서 또다시 방치하는 것은 곧 문구(文具)이다."
하고, 이에 폐단을 시정하는 정치에 유의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은 비록 별시재를 관람하는 한가한 짬이라도 역시 멀리 떨어진 민간의 어려운 사정에 마음이 불안하여 향군을 대궐 섬돌의 지척에 불러들여 조용히 순문하였다. 마침내 이로써 기사(騎士)의 규정을 고쳐 해서(海西)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을 없앴고, 또 양정의 군포 한 필을 감하여 팔도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도록 했으니, 《시전(詩傳)》에서 이른바 ‘영원히 잊을 수 없다.[沒世不忘]’라고 한 것을 여기에서도 역시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32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은 비록 별시재를 관람하는 한가한 짬이라도 역시 멀리 떨어진 민간의 어려운 사정에 마음이 불안하여 향군을 대궐 섬돌의 지척에 불러들여 조용히 순문하였다. 마침내 이로써 기사(騎士)의 규정을 고쳐 해서(海西)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을 없앴고, 또 양정의 군포 한 필을 감하여 팔도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도록 했으니, 《시전(詩傳)》에서 이른바 ‘영원히 잊을 수 없다.[沒世不忘]’라고 한 것을 여기에서도 역시 볼 수 있다.

 

팔도와 양도(兩都)에 유시를 내려 농사를 권장하게 하였다.

 

2월 27일 을사

하교하기를,
"마땅히 문묘(文廟)를 배알한 뒤에 춘당대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야겠다."
하였으니, 이는 무사를 시험보여 기쁘게 하였으므로 또한 유생에게도 미친 것이었다.

 

형조에서 상달하기를,
"남부(南部) 살곶이동[箭串洞] 존위(尊位) 이민철(李敏哲)의 보고에 의하면, 전춘수(全春守) 이계(李堦)가 그의 적모(嫡母)를 때려 이마가 깨져 피를 흘리게 하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변고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민철은 그 상황을 계의 형인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 의금부로 이송하여 처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어미를 때리고 형으로서 아우의 죄를 입증한 것은 모두 강상을 범한 것이니 함께 엄히 다스리라."
하였다.

 

2월 28일 병오

간원 【정언 구윤명(具允明)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대각의 경중은 나라의 융성과 쇠퇴에 관계됩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초기(草記)에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런 일을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으며, 경연관은 강연(講筵)이 아닌데도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니, 역시 고례(古例)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청컨대 앞으로는 고사를 밝혀 경솔하게 논의하지 말게 하소서. 이복해(李福海)는 뇌물을 받은 형적이 낭자한데도 도신(道臣)이 적발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자책하는 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며칠전 경연에서 변명한 적이 있었으니, 청컨대 전 감사 남태량(南泰良)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동료 관원의 인혐(引嫌)은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한 사람은 체직되고 다른 한 사람은 유독 공무를 보고 있는 것은 염치와 부끄러움에 관계되는 문제이니, 청컨대 도승지 유복명(柳福明)을 체차하소서. 포도청(捕盜廳)은 도둑을 잡는 것을 전적으로 관장하는데, 도둑의 증거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혹독한 형벌로써 조사하고 다스리며 빚을 받아주고 싸움을 금하는 것도 또한 번갈아 주관하는 일이 많으니, 청컨대 이런 폐단을 금지하고 범한 자는 잡아들여 처단하소서. 이언세(李彦世)·박성원(朴聖源)의 개차(改差)는 비록 성상의 억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견책을 받은 지 이미 오래이니 우러러 품하여 도로 정침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첫째와 둘째 건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지신사(知申事)는 비록 지나치다 하더라도 승지는 갖추지 않을 수 없으니 아뢴 대로 하라. 포도 대장 및 이언세 등의 일은 모두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윤동도(尹東度)를 교리로, 정실(鄭實)을 보덕으로, 신면(申勉)을 판윤으로, 이응협(李應協)을 필선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홍우한(洪羽漢)을 헌납으로, 어석윤(魚錫胤)을 부교리로 삼았다. 조관빈(趙觀彬)에게 보국 숭록 대부를 가자(加資)하고 구성임(具聖任)에게 정헌 대부를 가자하니, 시사(試射)에서 과녁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2월 29일 정미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시사(試射)한 군병에게 친히 상을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와 좌의정 조현명이 알성(謁聖)할 때에 동궁에게 어가(御駕)를 모시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은 독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군복의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것에 대해 신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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