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9권, 영조 25년 1749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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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기유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응교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신이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을 보니, 숭정(崇禎) 10년042)   정월에 조선이 급변(急變)을 고하자, 황제가 총병(摠兵) 진홍범(陳洪範)에게 각진(各鎭)의 주사(舟師)를 조발하여 나아가 구원하도록 명하였는데, 3월에 진홍범이 아뢰기를, ‘군사가 바다로 향해 나아간 지 수일 만에 산동 순무사(山東巡撫使) 안계조(顔繼祖)의 보고에 의하면, 「속국(屬國)이 패전하여 강화도가 벌써 함락되었고 세자가 사로잡혔으며, 국왕이 나아가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황제가 안계조에게 협력을 도모하여 구원하지 못하였음을 통렬히 책망하였습니다. 만일 남한 산성에서 몇 달 동안을 지탱하였다면 진홍범의 군대가 반드시 성(城) 아래에 이르렀을 것인데, 그 이르고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다만 본국의 다행과 불행에 달려 있다고 하겠으나, 은혜는 의종(毅宗)과 신종(神宗)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종은 우리가 능히 성을 지키지 못한 것은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안계조에게 잘 구원하지 못하였음을 책망하였으니, 그 속국을 불쌍히 여기고 염려한 은혜는 우리 의종 같은 이가 없었습니다. 본국의 힘이 비록 관문을 닫고 맹약(盟約)을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이른바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는 절박함은 어찌 할 수 없었다.[忍痛含冤 迫不得已]’는 여덟 글자를 항상 마음속에 가진 연후에야 명나라를 잊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황단(皇壇)에서는 의종을 제사지내지 않으니 신은 적이 마음이 상합니다. 지난날 우리 숙고(肅考)께서 갑신년043)  에 의종이 죽은 달이 다시 돌아오자 원중(苑中)에서 의종에게 망제(望祭)를 지냈으니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추배(追配)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듣기를 다하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였다. 선조(先朝)에서 제단을 설치하여 신종을 제사지낼 때에 정사(正史)가 미처 나오지 않았으므로 숭정(崇禎)의 망극한 은혜를 알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의종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지 않았겠는가? 매번 《남한일기》를 읽을 때마다 포위된 산성에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한 자는 모두 의(義)로 일어난 공신이었지만 하나의 계책으로 돕거나 하나의 묘책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으니, 설령 오늘날 조정에서 완급(緩急)을 당하였다면 더욱 무엇을 족히 말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바로 장저(長沮)·걸익(桀溺)044)   같은 무리들을 부추겨 기용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이니, 오직 인재를 선택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사졸(士卒)의 가장 하급자라도 그가 쓸 만한 인재인지를 또한 살펴 본다."
하였다. 황경원이 말하기를,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의 병사를 이끌고 의주(義州)에 이르렀는데, 국왕이 바야흐로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縣光)·정경세(鄭經世) 세 신하를 등용하여 의지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군사를 퇴진하여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세 신하를 등용하여 능히 10만의 오랑캐의 병사를 물리친 셈이니 나라에서 인재를 얻는 효과가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 효종(孝宗)이 철장(鐵杖)·목마(木馬)045)  로 뜻을 품은 채 죽었다. 나 역시 앞으로 초목과 함께 썩을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3월 2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황단(皇壇)을 설치한 것은 임진년046)  에 재조(再造)해 주신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의종 황제 때에는 천하의 형세가 어떠하였는데, 장수에게 출사(出師)를 명하여 외방의 번국(藩國)을 구원하게 하였고, 또 조선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만 그 장수가 잘 협력하여 구원을 도모하지 못했다고 꾸짖었으니, 그 감동하여 눈물을 흘림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실로 임진년의 은혜와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 신종과 함께 제사지내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3월 19일은 곧 의종 황제께서 사직을 위해 돌아가신 날입니다. 선조(先朝) 갑신년은 옛날 갑신년이 거듭 돌아오는 해이므로 이날 서총대(瑞葱臺)에서 의종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을 뿐이며, 대보단(大報壇)에 이르러서는 단지 신종만을 위해 설치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대대로 황조(皇朝)의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 황조가 망함에 있어서 특별히 고황제(高皇帝)로부터 제사를 지내더라도 어찌 그 정례(情禮)를 다 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종께서 천하의 힘을 다하여 망하여가는 나라를 재조시켜 주었으니, 이것은 실로 유사 이래 전혀 없었던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신종 황제를 위해 단을 설치하였고, 의종 황제는 함께 제사지내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갑신년047)  에 명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의종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고, 대보단의 경우는 신종 황제만을 제사지냈으니, 일이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신종은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국(東國)을 재조시켰고, 의종은 군사를 보냈다가 즉시 거두었으니, 덕의(德意)의 경중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나 아들이 받은 은혜의 두텁고 얇은 것을 가지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섬긴다면 이런 신하와 아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시험삼아 숭정(崇禎)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건대, 청나라 병사가 요양(遼陽)에 가득하고 유적(流賊)이 중원(中原)에 두루 널려 있었다. 그런 중에도 오히려 바다를 건너 멀리 군사를 보내어 속국을 구원하려 하였으니, 밤중에 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의종의 덕의(德意)가 신종과 다를 것이 없는데, 갑신년 뒤로 한번도 제사의 전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 칸의 사당에 소왕(昭王)을 제사지내는 일048)  이 어찌 청구(靑丘)에 있지 않은가? 만약 선조(先朝)께서 이 《명사》를 보셨다면 함께 제사지내는 전례는 응당 조정 신하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슬프고 간절합니다. 대저 동방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대명(大明)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데, 동토(東土)의 신민이 대명을 섬김에 어찌 감히 몸과 살을 아끼겠습니까? 그러나 대보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은혜를 보답하는 것입니다. 임금과 어버이를 섬길 적에 은혜의 두텁고 얇은 것으로써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러합니다만, 조공 종덕(祖功宗德)049)   역시 제사의 전례상 높고 낮은 절차가 있는 것이며, 또 정사(正史)에서 말한 것 역시 사실과 어긋나는 구절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의리의 지극히 정밀한 곳이므로 널리 유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정월에 황제가 친정(親征)하니 조선에서 급박함을 고했다는 등의 구절이 그러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널리 지방에 있는 유신들에게 묻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3월 3일 신해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사간으로, 이광익(李光瀷)을 장령으로, 임상로(林象老)를 헌납으로, 윤광찬(尹光纘)·이수봉(李壽鳳)을 지평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정언으로, 원경하(元景夏)를 홍문관 제학으로, 황인검(黃仁儉)을 겸 설서로, 김약로(金若魯)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3월 4일 임자

화완 옹주(和緩翁主)가 정치달(鄭致達)과 혼인을 정하니, 위호(尉號)는 일성(日城)이었다. 정치달은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의 아들이다.

 

이주진(李周鎭)을 예조 판서로, 박기채(朴起采)를 정언으로 삼았다.

 

3월 5일 계축

팔도의 유생(儒生) 박휘진(朴徽鎭) 등이 상서하여 고 참찬 이재(李縡)의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이런 등속의 근거없이 과장된 글을 어찌 받아들였는가? 처음 시작하는 정사에 근거없이 꾸민 것이 이와 같으니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 서원이 온 나라에 가득할 것이다."
하였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예조에서 고 상신 노수신(盧守愼) 및 이집(李㙫)의 예를 들면서 승지를 보내어 조문과 부의를 하고 본도에서 역부(役夫)를 지급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7일 을묘

함경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장계를 올려 덕릉(德陵)에 옛 비석이 마모되고 문드러져서 새 돌로 고쳐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옛날 그대로 두고 고치지 말도록 명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사치하고 방대하게 함을 경계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고적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함이었다.

 

3월 8일 병진

임금이 대보단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는데, 위판 앞에 깔린 황룡석(黃龍席)을 보고, 임금이 압존(壓尊)해야 하는 곳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빨리 걷게 하였다. 단상에 올라가 봉심한 뒤에 희생을 살피고 제기를 살피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3월 10일 무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화순 옹주(和順翁主) 제택에 들렀다.

 

헌납 임상로(林象老)가 근학(勤學)·호문(好問)·무실(務實)의 세 조목으로 상서하여 우러러 힘쓰도록 하고 그 끝 부분에 기강을 세우고 사치를 혁파하며 붕당을 제거하여 대조(大朝)의 고심하는 마음을 본받기를 진달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월 12일 경신

정언 박기채(朴起采)가 상서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대의를 밝히며, 이륜을 바로잡는 등의 세 가지의 일을 논하였는데, 이륜을 바로잡으라는 조항에는 간략하게 징토를 말하였고, 대의를 밝히라는 조항에는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을 효종의 묘정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자, 왕세자가 답하기를,
"추배(追配)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마땅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입시하도록 하고, 다시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정례(定例)를 바로잡는 일을 의논하다가 밤이 이미 깊었다. 유신들이 장차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려 하자, 박문수가 나아가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온 종일 응대하다가 밤이 깊어가는데 내일이나 모레에 밝은 낮 시간이 어찌 없어서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교리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유신들이 이미 책을 끼고 연석에 올랐는데, 어찌 밤이 깊었다고 강독을 하지 않고 물러가겠습니까? 박문수를 추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유신의 체모를 얻었다 하고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장려하였으며,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을 동궁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드디어 유신에게 명하여 강독을 하게 한 후 파하였다.

 

3월 13일 신유

진선 윤봉구(尹鳳九)가 상서하기를,
"첫째는 뜻을 세움에 요순(堯舜)으로 법을 삼을 것이니, 사람이 아무리 선(善)을 향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본래 뜻을 세우기를 고상하게 하거나 견고하게 하지 아니하면, 비근한 데에 편안히 여기고 일상적인 데에 젖어서 몸과 마음을 수습할 수 없고 향상해 가는 의사를 거두어 쇠퇴한 데로 나아가기 쉬워서 일을 제어함에 굳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윤(伊尹)은 유신씨(有莘氏)의 들에서 밭을 갈던 필부이면서도 오히려 그 임금을 요순같은 임금이 되게 하려고 마음을 썼는데, 더구나 저하께서는 만물보다 뛰어나셨고 위육(位育)050)  의 책임을 맡고서 어찌 요순으로 법을 삼지 않겠습니까? 요임금은 집중(執中)을 하였고, 순임금은 용중(用中)을 하였습니다. 이 마음이 발하여 음식과 여색을 좋아하면 지나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중도에 지나칠 것이고, 이 마음이 발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면 늘 중도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입니다. 오직 저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여 그 중도에 지나친 것을 억제하고 그 중도에 못 미친 것을 힘써서 요순의 말씀을 말하고 요순의 행동을 행하여 이 세상으로 하여금 요순의 세상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하여금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둘째는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의리를 밝히는 것입니다. 임금이 된 자가 자질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만약 학문을 바탕으로 그 총명을 열어 넓히고 의리를 통달하여 꿰뚫은 바가 없으면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은 혹 우연히 합치되는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한 몸 전체가 마침내 세속적인 구덩이에서 떠나지 않아서 조그만한 지혜를 스스로 사용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자기를 다스리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구차할 뿐입니다. 오직 저하께서는 학문에 뜻을 둘 나이에 이르렀으니, 정례로 강학하는 이외에 자주 빈료(賓僚)를 인접하여 경사(經史)의 의리를 극도로 연구하여 빠뜨림이 없게 하시고 크게는 치란과 흥망이며 작게는 인정과 물태(物態)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소상하게 다 이해하여 좌우로 도의 근원을 찾아 덕(德)에 나아가고 업적을 닦는다면 어찌 그 근본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셋째는 기욕(嗜慾)을 끊고 기혈(氣血)을 기르는 것이니, 사람이 태어나면 형체와 기운이 갖추어지고 기욕이 그를 따르는 것이나, 한번 혹 정(情)대로 따르면 기혈이 쉽게 소모됩니다. 임금의 처지는 보통 사람과 달라서 입에 맛있고 살찌는 음식과 몸에 가볍고 따뜻한 옷과 좌우에 사랑하는 신하를 구하고자 하면 얻을 수 있고 하고자 하면 이룰 수 있으나, 이것은 곧 인생을 상하게 하는 독약과 같은 것이고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못된 귀신과 같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인욕을 막고 도리를 따르며 절도있게 성찰하여 작은 허물에도 이르지 마시고 금절(禁絶)하여 앞에 가까이 말며 의리를 위주로 하여 물욕을 물리치도록 하소서.
넷째는 덕량(德量)을 넓혀서 직언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도(道)가 있는 세대에는 직언이 많이 들리고, 도가 없는 세대에는 직언이 날로 없어지니, 이것은 위에 있는 자가 덕량이 좁아서 사람들의 말을 다 받아들이지 못한 데 연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나에게 있는 것만 옳다고 하고 나와 다른 것은 번번이 어기고 거절하여 꺾어 버리니, 마침내 나라에는 간쟁하는 신하가 없고 임금의 뜻이 날로 거만한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대저 의리는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위에 있는 자라고 해서 꼭 다 옳은 것이 아니며,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해서 꼭 다 그른 것도 아닙니다. 요순의 세대에도 오히려 ‘나의 어그러짐을 네가 바로잡으라.’는 말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 아래인 자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도량을 따라 지식이 자란다.’라고 하였으니, 저하께서 진실로 지언(知言)·양기(養氣)의 공부에 힘써서 사사로운 뜻을 용납할 곳이 없게 하고 천지와 도량을 같이 한다면, 뜻을 거스르며 조정에서 간쟁을 하는 것이 자기의 병폐에 절실히 맞을 것이니, 대저 무슨 혐오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섯째는 사사로운 뜻을 버리고 기강을 세우는 것입니다. 무릇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은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이 도리어 공도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인주(人主)는 신하와 서민을 자식으로 삼고 온 나라를 집안으로 삼아야 하는데, 신하와 서민을 자식으로 삼지 못하여 사사로운 신하를 두고 온 나라를 집안으로 삼지 못하여 사사로운 재산을 둔다면, 온갖 일의 폐단이 항상 이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주자(朱子)는 사사로운 뜻이 정사를 해침을 논하여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은 비유하건대 장차 기울어질 집에 곱게 단청을 하여 건물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것과 같으니, 비록 변란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나 재목의 속은 모두 이미 좀먹고 썩어서 다시 지탱할 수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중원(中原)의 오랑캐는 내쫓기 쉬우나 한 마음의 사사로운 뜻은 떨쳐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저하께서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있으니, 요순같이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知]이 아니면 기욕과 잡된 생각들이 안팎에서 서로 침공하여 사사로운 뜻의 싹이 종자를 심으면 종묘가 나듯이 치우치게 좋아하는 해로움에 이를 것이니, 기강의 서지 않음을 더욱 먼저 알아서 일찍이 경계하여야 마땅합니다.
여섯째는 계술(繼述)을 잘하여 전대의 공렬(功烈)을 빛내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폭정(暴政)을 대신하여 인정(仁政)으로 하였으며, 선조(宣祖)께서는 명나라가 재조(再造)시켜 준 은혜를 입고 물굽이가 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 간다는 의리를 돈독히 하였으며, 병자년051)  ·정축년052)  의 변에는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일이 권도(權度)의 적의(適宜)함에서 나왔으나 포빙 악화(抱氷握火)053)  하여 10년을 하루같이 한 것은 우리 효묘(孝廟)의 뜻이었는데, 중도에 붕조(崩殂)하여 큰 계획을 이루지 못했으나, 오히려 의로운 소리가 열열하여 옛과 지금에 떨쳐 빛났습니다. 그리고 현묘(顯廟)께서는 의리 때문에 죽은 사람을 포창하였고, 숙고(肅考)께서는 단(壇)을 쌓아서 제사로 공로에 보답하였으니, 모두 천리를 밝히고 대의를 편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도 역시 일찍이 이를 항상 마음속에 잊지 않고 있다가 성심으로 열성(列聖)의 은밀히 전한 심법으로써 위로 태조가 일으키신 밝은 의리를 이어서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게 하셨으니, 이것이 저하께서 대대로 이을 의리이며, 마땅히 밝게 강론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나라는 작고 힘은 약하니 비록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백성을 보호하고 안을 다스려서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면 어찌 열조(列祖)의 융성한 공렬에 광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순(任珣)·유건(柳健)을 지평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부응교로, 이게(李垍)를 수찬으로, 임집(任)을 필선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문학으로, 이천보(李天輔)를 우부빈객으로, 조재호(趙載浩)를 대사성으로 삼고, 전 목사 서명형(徐命珩)을 가선 대부로 가자(加資)하였으니 잘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3월 14일 임술

신종(神宗)·의종(毅宗) 두 황제를 함께 대보단(大報壇)에 제향(祭享)하는 의식을 정하였다. 이때에 함께 제향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모은 것이 모두 이르렀는데, 진선 윤봉구(尹鳳九)는 의논하기를,
"우리 동토(東土)에서 혈기를 지니고 사는 것은 모두 대명(大明)이 남겨 준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누가 성대한 예(禮)를 잘 거행하는 것을 찬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을 보건대 의종 황제께서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염려한 것은 만력(萬曆)에 재조(再造)시켜 준 은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상의 뜻이 함께 제사하여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은 대의를 따져 보아도 그만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전 부사 박필부(朴弼傅)는 의논하기를,
"며칠 전 동궁께 상서하여 간략하게 대의를 밝히도록 진달하였는데, 지난번 하문한 것이 마침 이 무렵이었습니다. 신이 비록 질병으로 생명이 다해가고 있지만 죽기 전에 만약 두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본다면 장차 조금 남은 기운이라도 기뻐 뛰며 춤을 출 것입니다."
하였으며, 자의(諮議) 송명흠(宋明欽)은 의논하기를,
"의종 황제의 나라가 망하자 임금이 죽은 정의는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니 이 한 가지 절차를 미루어 보아도 영원히 혈식(血食)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미 기(杞)·송(宋)054)  을 제향(祭享)할 곳이 없으니 옛날 신하가 옛날 임금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진실로 한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합당합니다. 더구나 이것은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이니 그 작은 나라를 사랑한 은혜는 신종과 같은데, 어찌 미처 구원하지 못한 것으로써 차이를 두겠습니까? 성고(聖考) 갑신년055)  의 거조가 이미 징조가 되고 선정신(先正臣)의 만동묘(萬東廟)에서 향사한 것도 또한 방증이 되기에 족합니다. 삼가 보건대 성상의 뜻이 높이 뛰어나시니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여러 의논이 모두 같으니 아! 우리 의종의 은혜를 앞으로는 갚을 날이 있겠다. 황단(皇壇)을 우러러 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의조(儀曹)로 하여금 날을 가려 거행하도록 하라. 모든 일은 일체 갑신년의 예에 의하여 할 것이며, 호조·예조·공조의 판서가 검사하여 살피고 낭청이 공역(工役)을 감독하는 것도 또한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공역이 끝나면 마땅히 몸소 제향을 올릴 것이니, 제기(祭器)를 더 만들고 악장(樂章)도 추후하여 짓도록 할 것이며, 의종 신위에 친사(親祀) 및 섭행(攝行)할 때의 제문은 일체 신종 신위 제문의 예에 의하여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 거조는 존주(尊周)의 대의를 계술하는 것이니, 충렬의 신하를 추사(追思)함이 마땅하다. 황단(皇壇)에 친히 제사한 후에는 예관을 보내어 선무사(宣武祠) 및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남한 산성의 현절사(顯節祠)에 제사를 올리고 봉사손(奉祀孫)은 지손과 적손을 논할 것 없이 조정에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녹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일찍이 황단에 종향(從享)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니, 마땅히 동방으로 정벌나온 장사(將士) 및 혹은 우리 나라에서 병자 호란에 순절한 사람을 종향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배신(陪臣)을 종향하도록 하겠는가?"
하였다.

 

3월 15일 계해

유성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정언 박기채(朴起采)가 상서하여 논핵하기를,
"평안 병사 조동하(趙東夏)는 미치광스럽고 방자하며 당론(黨論)에 몰두하였습니다. 서곤(西閫)056)  에서는 윤광신(尹光莘)의 광폭한 행동을 겪음으로부터 인심이 두려워서 떠는데, 서곤을 다스리는 책임을 또 이 사람에게 맡기게 되니 물의가 시끄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삭직하여 파면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영흥 부사 이창수(李昌壽)는 파격적인 은혜를 입어 웅부(雄府)를 다스리는 직책을 제수받는 데 이르렀으니 진실로 감축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관서(關西)의 이름난 고을을 얻지 못한 것으로써 전관(銓官)에게 성내는 말을 발하였으니 그를 파직하여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갑자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집춘문(集春門)을 거쳐서 문묘(文廟)에 나아가 면복(冕服) 차림으로 작헌례(酌獻禮)를 의식대로 행하고, 여러 위판(位版)을 봉심하였다. 이어서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알성 문무과(謁聖文武科)를 설시하여 문과에는 이양천(李亮天) 등 5인을 뽑았고 무과에는 조행정(趙行禎) 등 28인을 뽑았다. 당시에 과거장 안이 혼잡하고 요란하였으며,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서 재숙(齋宿)하다가 밤에 말뚝을 박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곧 유생들이 과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우구(雨具)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또 액례(掖隷)들이 전식(傳食)하는 자가 있음으로 인하여 대사성이 아뢰자 임금이 병조의 낭관을 잡아다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교리 어석윤(魚錫胤)이 우구를 가지고 과장에 먼저 들어갔다고 자수하자,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튿날 지평 임순(任珣)이 상서하여 죄를 범한 거자(擧子)를 하나 하나 자수하게 하여 해당하는 율을 시행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르고, 유생 몇 사람을 정배(定配)하였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과장(科場)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자세히 살피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대소 과장의 우구 이외에 장막(帳幕) 등 여러 도구와 책을 끼고 따라온 자는 10년을 한정하여 충군(充軍)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성 조재호(趙載浩)가 그의 동생 조재홍(趙載洪)이 먼저 우구를 가지고 들어간 것으로써 상서하여 자수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그 자수한 자만 다스리고 나머지는 모두 심문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조재홍은 어석윤의 예에 의거하여 고신을 빼앗는 율을 시행하고 조재호는 중추(重推)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과장에 함부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 그에 해당하는 율이 있는데, 조재홍과 같은 무리를 가볍게 처분하는 데 그쳤으니 이것은 척리(戚里)에게 사정을 둔 것이다. 비록 두세 명의 유생이 귀양 가게 되었으나 이것으로 어찌 백성들의 뜻을 복종하게 하고 과장을 엄하게 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4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의생활(衣生活)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과장에 함부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 그에 해당하는 율이 있는데, 조재홍과 같은 무리를 가볍게 처분하는 데 그쳤으니 이것은 척리(戚里)에게 사정을 둔 것이다. 비록 두세 명의 유생이 귀양 가게 되었으나 이것으로 어찌 백성들의 뜻을 복종하게 하고 과장을 엄하게 하겠는가?

 

남태량(南泰良)을 도승지로, 정휘량(鄭翬良)을 승지로, 윤동준(尹東浚)을 대사간으로, 임집(任)을 수찬으로, 정익하(鄭益河)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17일 을축

헌부 【지평 유건(柳健)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친림한 과장이 시끄러운 것은 오로지 수종(隨從)을 많이 데리고 가는 데에 연유하였고, 무과의 간교를 부리는 것은 더욱 징계되어 두려워함이 없으니, 청컨대 모두 조사하여 처단하시고, 사옹원 봉사 안취범(安取範)은 위인이 비루한데 사적(仕籍)에 함부로 통하였으니, 청컨대 태거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간원 【정언 이극록(李克祿)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박수(朴璲)·한덕량(韓德良)은 위인이 용렬하고 주장하는 의논이 비루하여 더러는 사사로운 유감으로 인해서 의논이 외읍(外邑)의 공조(功曹)에까지 미쳤으며, 혹은 진실하지 않은 말로 장옥(贓獄)의 조사한 일을 변명하여 한 세대 진신(搢紳)들의 수치가 되었으니 청컨대 모두 개정하시고, 또 청컨대 유사흠(柳思欽)의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삭탈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9일 정묘

간원 【정언 박기채(朴起采)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새로 급제한 심필(沈鉍)은 심유현(沈維賢)의 양자인데 나이가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행스럽게도 무신년057)  의 수사(收司)에 누락되었고, 그 뒤에 명부(命婦)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특별히 파양(罷養)을 허락하였으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종신토록 영원히 폐고(廢錮)해야 마땅한데, 함부로 과장에 나아가 스스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벌써 사람의 윤리가 없어졌습니다. 당후(堂后)의 초망(初望)에 급급하게 검의(檢擬)하였으니 제방(隄防)이 점점 해이해지고, 사람의 기강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망한 주서(注書)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하령하기를,
"대조(大朝)께서 몇 년 동안이나 조제하였는데, 명을 받들고 대리(代理)하는 처음에 어찌 감히 이와같이 하는가? 정언 박기채(朴起采)는 체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수채(吳遂采)·권일형(權一衡)·송창명(宋昌明)·김상신(金相紳)을 승지로 삼았다.

 

3월 20일 무진

밤 삼경(三更)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에 들어갔고 양이(兩珥)는 화성(火星)을 돌았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해서(海西)에 황당선(荒唐船)058)  이 침입하여 약탈해 가는 근심으로 인하여 연해의 요해처에 추포 무사(追捕武士)를 창설하여 도합 6백 90인입니다. 포민(浦民)과 힘을 함께하여 방어하게 하였는데, 농사와 고기잡이도 폐하면서 포역(浦役)과 신포(身布)를 더 받으니 백성들이 모두 지탱하기 어려습니다. 마땅히 정해진 수를 경감하고 역사를 헐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도(松都) 청교(靑郊)의 민가에 불이 나서 남자와 여자가 죽은 사람이 무려 90인이나 되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령하였다.

 

3월 21일 기사

황단(皇壇)에 병향(幷享)하는 의식을 다시 문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황단의 제도는 실로 원구단(園丘壇)과 교사(郊祀)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고, 명칭을 대보(大報)라고 한 것은 오직 황조(皇朝)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 신종(神宗)께서 나라를 재조시켜 준 공은 밝게 백세에 게시되고 깊은 은혜와 성대한 덕은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성고(聖考)께서 제단을 쌓아 풍호(豊鎬)가 국초(鞠草)로 변한059)   후에 황제를 향사하여 천리가 밝아지고 인심이 바르게 되었으니, 천하 후세에 찬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 병자년060)  의 변란을 오히려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숭정 열황제(崇禎烈皇帝)께서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 등에게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속국(屬國)의 변란을 구원하도록 명하였으니, 황조의 잊지 않고 돌보는 은혜는 전후가 한 법규인데, 백 년의 더러운 노린내를 오히려 확연히 맑게 할 기약이 없으니, 동토(東土)의 신민이 누가 북쪽을 향하여 눈물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성상께서 삼가 의종(毅宗)을 받들어 함께 황단에 제향을 올리려 하시니 매우 성대한 거조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돌아보건대 황단의 제향에 함께 배향하는 예에 의혹이 없지 않으므로 감히 황조의 사전(祀典)을 이끌어 그 내용을 밝히고자 합니다.
태조와 태종을 함께 원구단과 대보사(大報祀)에 배향한 것에 대하여 급사중(給事中) 하언(夏言)이 상소하기를, ‘부자를 같은 반열에 모시는 것은 경전을 상고해 보면 의심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예신(禮臣)이 이를 논박하여 말하기를, ‘태묘의 제사는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소목(昭穆)이 적용되어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향하여 있으므로 병열(幷列)의 혐의는 없으며, 더구나 태조와 태종의 공덕은 모두 높아서 하늘과 짝이 되니 하나라도 빠뜨리면 마땅하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종황제보(世宗皇帝報)》에 이르기를, ‘예신이 태묘에는 한 당(堂)에 모셔도 협의스럽지 않음을 이끌어 대었는데, 대저 소(昭)는 남쪽으로, 목(穆)은 북쪽으로 하여 부자가 함께 앉지 아니하고 손자는 대부(大父)를 따르는 것이 곧 삼대(三代)를 함께 제사지내는[褅祫] 예(禮)인데, 체(禘)라고 하는 말은 함께 제사 지낸다는 말이며, 이것이 소와 목의 높고 낮은 뜻이니, 이러므로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부(祔)하는 것이다. 희조(僖祖)는 동향(東向)하게 하고 태조는 오른쪽에 배향하였으니 그 출자를 높히는 뜻이며, 자신을 낮추고 할아버지를 높히는 것이 예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손자 때문에 높아지고 손자는 할아버지 때문에 낮아지는 것이니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에 구하여 보아도 역시 순편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두 황제를 제사함에 있어서 황조의 전례(典禮)를 따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약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함께 동향하면 이것은 조위(祖位)의 높음이 낮아져서 자손의 소목의 항렬이 앞으로 폐지될 것이니, 급사중 하언으로 하여금 이 거조를 보게 한다면 예에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신종을 동향의 자리에 모시고 의종은 소목의 항렬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그렇게 한 뒤에야 할아버지는 손자보다 높아지고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부(祔)하는 것입니다. 홍광(弘光) 2년061)   3월 의종의 휘신(諱辰)에 백관들이 제단을 설치하고 태평문(太平門) 밖에서 멀리 제사를 지냈으니 태평문은 종남산(鍾南山) 음지에 있습니다. 이곳 방구(方丘)라는 땅에 제사지내는 단이 있는데, 땅에 제사지내는 예로써 의종을 제향한다면 이 역시 목(穆)은 북쪽으로 한다는 뜻이니, 당시 사가법(史可法)·강왈광(姜曰廣) 등 여러 군자들이 의논한 바입니다. 예가 변하여 예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니, 오늘날 본받을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이 지극히 중차대한 것이니 한 중신(重臣)의 의논으로써 결단할 수 없다. 대신과 유신들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논박하기를,
"그윽이 중신의 뜻을 헤아려 보니 《예경(禮經)》 중에 ‘크게 하늘에 보답함에 그 해를 존경한다.’는 글이 있기 때문에 황단의 이름을 정할 처음에 교천(郊天)의 예를 사용했는가 의심됩니다. 신은 아직도 갑신년062)  에 고 판서 신 송상기(宋相琦)가 대제학으로서 황단의 이름을 지어 올릴 때에 상소한 대의를 기억합니다. 이르기를, ‘신종 황제의 은덕은 하늘과 같이 크니 제천(祭天)의 이름을 써도 방해롭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예절을 정하여 밝힌 것이 원래 제천의 예를 바로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가정(嘉靖) 연간에 하언(夏言)이 의논하기를, ‘태조와 태종은 함께 황천 상제(皇天上帝)에게 배향을 할 수 없으니 두 교(郊)에 태조를 받들어 배향하고 기곡제(祈穀祭)에는 태종을 받들어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제천(祭天)에 양조(兩祖)를 함께 제사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가정 10년063)  에 의논하여 칠묘(七廟)의 소목 제도를 회복할 적에 하언이 두루 옛 제도를 들면서 동당 이실(同堂異室)하면 예를 잃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논하였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고, 옛 사당을 철거하고 다시 새로 세웠으며, 24년에 이르러 다시 동당 이실의 제도를 회복하여 모두 남향(南向)을 하였으니, 황조 묘당의 제도 역시 열성조(列聖祖)를 한 반열에 모신 것이 혐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중신이 신종 황제를 상제의 자리에 당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대단히 미안함이 있으며, 두 황제를 같은 반열에 모시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더욱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비록 옛 규례의 소목 제도로써 말하더라도 조손(祖孫)을 매양 같은 반열에 함께 제향하였으며, 동당 이실의 제도로써 말하더라도 부자와 조손은 같은 반열에 함께 제향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찌 유독 단사(壇祀)의 조손 병향(幷享)에만 이런 의심을 일으키는 단서가 있겠습니까? 가령 말하자면 신종 황제의 제사는 곧 이것이 하늘이며 의종 황제도 같이 하늘이니, 천자를 하늘에 배향하는 것과는 다름이 있는데, 더욱 어찌 한 임금은 높이고 한 임금은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병향하는 예를 거행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그 예를 거행한다면 도리어 의종 황제를 배향의 자리에 받드는 것은 결코 번국(藩國)이 감히 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의 헌의가 내용이 엄중하고 뜻이 바르니 바로 나의 뜻과 합당한데, 의견을 묻는 것이 다. 이른 뒤에 마땅히 하교할 것이다."
하였다.

 

심필(沈鉍)의 과거 합격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교리 김선행(金善行)이 상서하기를,
"근년 이래로 제방이 점점 무너져서 무신년의 흉악한 역적의 잔당들이 감히 평인의 부류에 나란히 끼이고자 하여 심지어는 과장(科場)에까지 드나들며 함부로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있으니,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인심이 방자하여 두렵게도 세도(世道)의 근심이 됩니다. 지난번 심성연(沈成衍)의 동생과 서종하(徐宗厦)의 아들이 발해(發解)064)  에 참여함을 얻었으나, 대조(大朝)께서 특명으로 빼 버렸으니 처분의 엄하고 바름을 누가 흠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심필은 이미 역적 괴수의 양아들이었는데, 비록 파양(罷養)함으로 인하여 요행히 왕법(王法)을 면하였지만, 어찌 감히 스스로 평인들과 같이 방자히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방문(榜文)이 한 번 나오니 여론이 놀라고 분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당후(堂后)에 있는 자가 기주관(記注官)의 초망(初望)에 급급하게 의망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방자하고 무엄한데, 승지가 이를 보기를 심상한 것같이 하여 갑자기 받아들였으니 그 역시 살피지 않음이 심하였습니다. 간신(諫臣)들의 진달한 말이 말을 극진히 해야 하는 체모에 손상은 있었으나 당초에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리어 꾸짖어 체차시켰으니 어찌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혐의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대리(代理)하는 처음을 당하여 더욱 말을 넉넉히 용납하여 숨기지 않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심필을 방문 중에서 빼 버려 제방을 엄하게 하시고, 박기채(朴起采)를 체차하라는 하령을 도로 거두며 받아들인 승지는 마땅히 중추(重推)를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처분하셨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하교하기를,
"지금 김선행의 상서를 보니 내용이 엄하고 뜻이 바르다. 심필의 자처하는 도리가 한심하니 상서한 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심유현(沈維賢)을 정법(正法)에 처단한 뒤에 심필이 비로소 파양(罷養)을 했다고 하니, 과거는 처음부터 논할 것도 없으며 온 세상의 의논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고,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방문에서 버리기를 청하지 아니하고 다만 주서(注書)의 파직만 청하였으니 경중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신은 일찍이 오언빈(吳彦賓)을 방문에서 버리기를 청하였는데, 대저 제방이 점점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사신은 말한다. 부자와 형제를 천속(天屬)이라고 이르는데, 실제로 낳은 자는 부모이지마는 낳게 한 바는 하늘이다.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데, 반드시 예조(禮曹)에 보고하고 입안(立案)을 하는 것은 실로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살게 함이니 오직 인군(人君)이 하는 것이지 부모 형제가 사사로이 얻어 할 바가 아니다. 심필은 부부인(府夫人)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심유현의 아들로 정해졌는데 임금이 특별히 그의 생부 심수현(沈壽賢)에게 하교하기를, ‘상신(相臣)이 입시하는 날은 곧 하늘의 명한 바인데, 어찌 입안을 기다려서 심 유현의 아들이 되겠는가?’ 하였다. 심유현이 정법에 처단된 뒤에 비로소 파양(罷養)하여 노륙(孥戮)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일종의 심필의 편을 드는 의논이 입안이 없었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아! 역시 윤리가 없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34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외교(外交) / 풍속(風俗)


[註 064] 발해(發解) : 과거의 초시에 합격함.
사신은 말한다. 부자와 형제를 천속(天屬)이라고 이르는데, 실제로 낳은 자는 부모이지마는 낳게 한 바는 하늘이다.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데, 반드시 예조(禮曹)에 보고하고 입안(立案)을 하는 것은 실로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살게 함이니 오직 인군(人君)이 하는 것이지 부모 형제가 사사로이 얻어 할 바가 아니다. 심필은 부부인(府夫人)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심유현의 아들로 정해졌는데 임금이 특별히 그의 생부 심수현(沈壽賢)에게 하교하기를, ‘상신(相臣)이 입시하는 날은 곧 하늘의 명한 바인데, 어찌 입안을 기다려서 심 유현의 아들이 되겠는가?’ 하였다. 심유현이 정법에 처단된 뒤에 비로소 파양(罷養)하여 노륙(孥戮)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일종의 심필의 편을 드는 의논이 입안이 없었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아! 역시 윤리가 없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동래 부사 정권(鄭權)의 첩보에 이르기를, ‘왜관(倭館)을 지키는 왜인의 말에 ‘기해년065)                  에 통신사와 상치(相値)되어 팔송사(八送使)를 정지하였고, 이듬해 제일선 송사 왜처(第一船送使倭處)에 해조(該曹)에서 회답한 서계(書契) 중에 전례대로 치사(致謝)한 말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승문원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첨입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3일 신미

다시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 세 황제를 대보단(大報壇)에 병향(幷享)하는 의식을 정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좌참찬 원경하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김재로에게 이르기를,
"경(卿)의 헌의(獻議)가 나의 의견과 서로 합치되나, 들으니 원경하가 들어왔다고 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고자 한다."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할아버지와 손자를 병렬(幷列)하는 것이 옛 예를 상고해 보아서 마침내 어떠할지 감히 헌의합니다. 대신이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와 소목(昭穆)의 예를 이끌어서 신의 할아버지와 손자를 병사(幷祀)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는 말을 배척하였으나, 신도 역시 변명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동당(同堂)이라고 하나 그 실(室)이 이미 다르니, 아마도 두 황제를 한 제단에 모시는 것의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역시 제단은 함께 했으나 그 자리가 다르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소목(昭穆)의 제도는 희조(僖祖)가 중앙에 자리하여 동향을 하였기 때문에 비록 할아버지와 손자를 병렬해도 압존(壓尊)이 될 혐의는 없습니다. 지금의 경우는 신종이 주위(主位)가 되고 의종을 병렬할 것 같으면 이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자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니 실로 옛 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주공(周公)이 세 임금을 세 제단(祭壇)의 같은 터에서 고(告)한 글로 본다면 한 제단에서 병렬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희조(僖祖)를 동향(東向)으로 했다는 글을 보고 나의 마음에 감동됨이 있으며, 밤중에 그것을 생각하니 두렵고 근심스러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두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비록 크게 은혜에 보답하는 뜻이나 고황제(高皇帝)가 우리 동방을 돌보아 봉(封)해주고 국호(國號)를 하사한 은혜를 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한 모퉁이 청구(靑丘)에서 세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면 어찌 엄연하지 않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예는 너무 번거로운 데에 관계되고 일은 신중함이 귀한 것이니 갑자기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널리 묻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 대왕께서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삼가 제후의 법도를 닦았는데, 태조 황제께서 특별히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하사하시고 면복(冕服)을 내리셨으니 조선은 곧 기자(箕子)의 옛 칭호입니다. 이 칭호를 주신 것이 어찌 백세에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공으로 태조의 휘호를 올려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또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예를 거행한다면 이는 전하께서 성조(聖祖)와 성고(聖考)의 지업(志業)을 계술하는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함께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김재로는 말하기를,
"황조의 여러 황제를 이미 모두 제향할 수 없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하여 임진년의 은혜에 보답하였고, 지금 의종을 추향(追享)하는 것은 병자년에 구원한 일에 보답하기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데에까지 이른다면 마침내 제례(祭禮)에 거듭 어려운 바가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두 황제만 제사지내면 실제로 제사지내지 않는 것과 같은 탄식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승지와 사관에게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니, 모두 세 황제를 함께 제사함이 실로 존주(尊周)의 의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나 유독 기사관(記事官) 채제공(蔡濟恭)만이 ‘정(情)은 비록 무궁하나 예는 한정이 있으니,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있는 승지와 입직한 옥당의 관원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순하자, 승지 김상신(金相紳)은 단연코 행하여야 한다고 청하였고, 응교 황경원(黃景源)은 ‘본조(本朝)가 대명(大明)에 대하여는 자식이 부모에 대한 것과 같으니, 대명이 이미 망한 후에는 기(杞)·송(宋)의 고사에 의거하여 태조(太祖)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 진실로 불가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또 좌의정·원임 대신·비국 당상과 여러 유신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잠이 안 오는 날 밤에 고요히 생각을 해보니 황단에 단지 두 황제만 제향을 받든다면 두렵고 근심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신종(神宗)의 혼령이 장차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중주(中州)가 이적의 판국으로 변하였고 예의가 청구(靑丘)에만 유독 남아 있으니, 이는 바로 뜻 있는 선비가 통탄하며 울어야 할 처지이다. 세 황제를 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이 사체에 합당한 듯하니 경 등의 뜻은 어떠한가? 고황제가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로 우리의 국호를 내렸으니 그 은혜와 분의를 어찌 차마 잊어버리겠는가?"
하고, 임금이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좌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중국[神州]이 망하여 종묘와 사직이 빈터가 되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은혜를 갚는 도리에 있어서는 비록 열성조를 모두 제향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으나, 경전(經傳)을 상고하건대 옛날 이런 예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조(先朝)에서 제단을 설치하고 이름을 대보(大報)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진년 우리 나라를 재조시킨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사(正史)가 나옴으로 인하여 의종을 병향하였는데, 지금 또 한층 더 미루어 올려서 고황제를 병향한다면 아마도 한정된 절차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황제는 대조(大造)의 은혜가 있었고, 신종(神宗)은 재조(再造)의 은혜가 있는데, 그 큰 근본을 잊어버리는 것이 미안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밤중에 두려워하며 슬퍼하는 바이다."
하였다.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병자년에 동쪽으로 구원하신 은혜에 깊이 감동하고 선조(先朝)에서 대보(大報)한 뜻을 미루어 넓히시어 의종(毅宗)을 병향한다면, 두 황제의 출자인 태조 황제를 어찌 함께 제단에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조는 황조의 시작이고 의종은 황조의 마지막이며, 신종은 중간으로 우리 나라에 큰 은혜가 있으니 세 황제를 함께 제향한다면 존주(尊周)의 의리에 더욱 광채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로 하여금 이런 순문을 받게 하였다면 그는 반드시 힘껏 찬동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이런 등속의 의논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 것이 방해롭지 않으니, 반드시 널리 묻고 반복하여 논란하게 하소서."
하고, 판돈녕부사 이기진(李箕鎭)은 말하기를,
"오늘의 하교는 전에 없었던 예(禮)입니다. 처음에는 의종을 병향하는 것으로 일이 시작되어 지금 갑자기 고황제를 함께 제향하려 하니 도리가 마침내 어떠할지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예가 비록 인정에서 연유되기는 하나, 중도에서 절충하는 것이 귀한 바이니, 고황제를 병향하는 것은 아마도 대보(大報)의 뜻에 합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성(箕聖)의 조선(朝鮮)이란 칭호를 어떻게 준 것인데, 이 은혜를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황제의 은혜가 진실로 큽니다. 그러나 만약에 신종과 의종의 일이 없었다면 고황제를 위하여 단을 설치하였겠습니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사가(私家)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원조(遠祖)를 어찌 다 제사지내겠습니까?"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런 의논은 없었으니,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며, 원경하는 말하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았던 전례를 후세에 거행하는 바가 많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우참찬 서종급(徐宗伋)·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사직 윤급(尹汲)은 모두 어렵게 여기고 삼가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였고, 응교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막중한 전례를 가볍게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한데, 전하께서는 늘 한 가지 일을 만나면 번번이 한 마음으로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시니 이것이 전하의 병통입니다."
하였으며, 교리 김선행(金善行)은 말하기를,
"애당초 만약 황조가 멸망한 것으로써 혈제(血祭)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면 태조를 함께 제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선조(先朝)에서 단을 설치한 것으로 인하여 우리를 재조시켜 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고, 의종의 사직을 위하여 죽은 절개와 주사(舟師)를 보내 구원하려 한 것은 동토(東土)의 인민들이 지금껏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성상께서 함께 제사지내는 뜻을 하교하신 것은 모두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황제를 함께 향사하고자 하는 것은 대보(大報)의 뜻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전례(典禮)를 욕되게 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수찬 윤동도(尹東度)는 말하기를,
"태조(太朝)의 존엄함으로 낮추어 신손(神孫)의 제단에 나아가는 것은 예의 뜻에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이규채(李奎采)는 말하기를,
"하교가 대보의 칭호를 일컬은 뜻과 다름이 있으니 혹시 경솔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식을 낳음에 으레 ‘그 덕을 갚고자 하면 하늘이 다함이 없도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 구석에 치우쳐 있는 나라에 칭호를 준 것이 아무리 의례적인 전례라고 하나 대보(大報)의 뜻에 가깝지 않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규채가 말하기를,
"덕을 갚고자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쓰는 것이지, 군상(君上)에게 쓰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고, 임집(任)도 또한 다른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원경하가 말하기를,
"윤동도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나아가는 격이라는 의논에 대하여 신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으나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건대 오히려 근거할 바가 있고, 김선행의 욕되게 하는 데 가깝다는 말은 매우 잘못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조에 향화(香火)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세 황제를 제단에 향사하려는 것이다. 혹시라도 중흥(中興)을 할 것 같으면 우리 나라에서 어찌 다시 제사지낼 필요가 있겠는가? 향화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세 황제를 향사한다면 과연 이것은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여러 옥당 관원의 의논이 모두 다투기를 매우 힘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신은 동쪽 번국(藩國)의 한낱 배신(陪臣)인데도 두 황제에게 제사하였는데, 나는 동쪽 번국의 왕으로서 세 황제를 함께 제사함에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조금 물러나라고 명하였다. 2경(更)쯤에 임금이 집서문(集瑞門) 밖에 나와 앉아서 다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정침(正寢)에서 불안하여 이 문에 나와 앉으니, 선조(先朝)의 영혼이 오르내리면서 혹시 나에게로 다가오신 듯하다."
하였다. 인하여 김선행에게 숙묘(肅廟) 어제시(御製詩) 4수(首)를 읽도록 명하였다. 그 셋째 시에 이르기를,
"고황제가 우리에게 조선 국호를 내려 주셨네.
임진년 참담할 때 누가 재조시켰던가.
제후의 법도를 3백 년 동안 삼가 지켰지만,
하늘과 같은 성덕을 어찌 다 갚으리."
하고, 그 넷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성이 적군에 포위되었던 해를 어찌 차마 말하랴?
이로부터 다시 천자에게 조회하지 못하였네.
슬프다. 갑신년의 주갑(周甲)이 벌써 돌아오니,
고국에 향사 받들 사람이 전혀 없구나."
하였다. 임금이 손을 모으고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나도 불충하고 불효한 사람이고, 여러 신하들 역시 잘못되었다. 선조(先朝)의 어제(御製) 가운데 ‘보(報)’ 자는 곧 대보(大報)의 뜻이고, 변두(邊豆)는 곧 향사(享祀)의 뜻이다. 어제를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신을 시켜 그것을 읽게 한 뒤에야 비로소 옛날의 성의(聖意)를 알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효이다. 고황제와 신종 황제의 공덕과 은의(恩義)를 연중(筵中)에서 비교하여 헤아린 바가 있었으니, 이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뿐이다. 이것이 나의 불충이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고황제를 대보단에 함께 제사하는 것을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3백 년 황조의 은혜를 망각한다면 어찌 그르지 아니한가? 나의 뜻이 벌써 정하여졌으니 각자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조의 어제에 이미 ‘보(報)’ 자의 뜻이 있었으니, 성상의 계술(繼述)하는 도리로서는 뜻을 결단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 가운데 네 글자는 신의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말하겠습니까?"
하였으며, 황경원은 말하기를,
"성상의 제술(製述)에서 선조(先朝)의 남긴 뜻을 볼 수 있으니, 기(杞)·송(宋)의 고사에 의거하여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김선행은 또 다른 의논이 없다는 것으로 우러러 대답하였으며, 원경하는 말하기를,
"의종(毅宗)의 휘호(徽號)는 《명사(明史)》를 상고해보니 갑신년066)   6월 무오일(戊午日)에 대행 황제(大行皇帝)의 시호를 올리기를, 소천 역도 강명 각검 규문 분무 돈인 무효 열황제(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라 하였고, 묘호는 사종(思宗)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로써 신위(神位)에 쓰는 것이 마땅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죄주는 것도 《춘추(春秋)》를 통해서이며 나를 아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이다.’ 하였듯이 나 역시 나를 안다거나 나를 넘친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 거사에 있다고 여긴다. 중화(中華)에서 태조를 역대 제왕의 묘당에서 제사를 받들었으나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즐거이 흠향(歆饗)하겠는가? 오늘의 단사(壇祀)로 황명(皇明)의 이미 끊어졌던 향화(香火)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아! 우리 나라가 고황제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특별히 봉전(封典)을 허락하였고 국호(國號)를 내렸으니 외번(外藩)의 작은 나라를 예로써 융성하게 대우함은 천고에 뛰어났으며, 다시 신종 황제의 재조시켜 준 망극한 은혜와 병자년의 난리에는 의종 황제가 장수에게 동국(東國)을 구원하도록 명하셨으니, 황제의 은혜를 돌이켜 생각함에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신다. 그 은덕을 갚고자 하면 하늘과 같아 다함이 없으며, 멀리 중주(中州)를 바라보니 황조의 향화가 끊긴 지 벌써 오래되었다. 지금 의종 황제를 뒤좇아 향사할 때에 세 황제를 함께 제사함은 예(禮)에 진실로 당연하니 한 제단에서 황제를 모시면 황조의 해와 달이 앞으로 다시 조종(朝宗)의 나라에 비칠 것이다. 이 즈음에 옛날 어제시(御製詩)를 생각하고 세 황제를 추모하는 융성한 뜻이 두 편의 시 가운데 애연하며 어제시의 미묘한 뜻이 소자의 마음과 은연중에 부합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소자의 마음에 슬픈 감회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개도(開導)해 주신 것이니 그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다시 묻기를 기다리겠는가? 의조(儀曹)로 하여금 세 황제를 함께 향사하는 일을 곧 거행하도록 하고 제문(祭文)과 악장(樂章)을 뒤좇아 짓는 것도 역시 지난날의 하교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 황제의 서열, 곧 신종의 자리는 전대로 함이 마땅하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황조의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를 적용한다면 태조가 중앙에 위치하고 신종과 의종은 좌우로 나누어 배열하는 것이 합당하며, 금등(金縢)067)  의 제도를 적용하면 세 황제를 위해 각각 제단을 만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원경하는 말하기를,
"두 제도가 모두 의거할 바가 있으니 대신의 진달한 바가 진실로 예제(禮制)에 합당합니다."
하였으며, 황경원은 말하기를,
"천자가 제후의 나라에 가면 꼭 단궁(壇宮)을 하는데, 궁(宮)이란 것은 제단 주위에 쌓은 담을 뜻합니다. 지금 이 단궁의 제도를 형상하여 세 제단을 만들고 차례대로 세 황제를 향사할 것인데 단은 12척(尺)이 되고 담은 3백 보가 됩니다."
하였다. 김재로는 말하기를,
"단궁의 제도는 척수(尺數)가 너무 넓어 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몸소 단(壇)의 그림을 그려서 내렸는데, 그 제도는 한 제단에 세 단을 나눈 것이었다.

 

3월 24일 임신

임금이 친히 대보단의 역사하는 곳을 살펴보았다.

 

3월 25일 계유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윤광소(尹光紹)를 승지로, 윤득재(尹得載)를 대사간으로, 허휘(許彙)·한광협(韓光協)을 지평으로, 최성대(崔成大)를 헌납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박성원(朴盛源)을 정언으로, 정희신(丁喜愼)을 장령으로, 임상로(林象老)를 필선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부수찬으로, 임석헌(林錫憲)을 부교리로, 김양택(金陽澤)을 사서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의 정사였다.

 

3월 26일 갑술

유사(有司)에서 황단(皇壇) 친제(親祭) 때의 삼헌(三獻)의 의식 절차를 품의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삼헌을 모두 배신(陪臣)이 겸행(兼行)하도록 하였는데, 비록 대신이라 할지라도 감히 못할 바가 있으며, 세자가 비록 제향에 참여할지라도 역시 감히 종헌(終獻)을 못할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여러 집사(執事)들의 위차가 앞서는 유문(壝門) 안에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황조의 구례를 따라서 위차를 유문 밖으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7일 을해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숭정(崇禎)의 묘호를 혹은 회종(懷宗), 혹은 의종(毅宗), 혹은 사종(思宗), 혹은 위종(威宗)이라고 하니, 지금 이 황단의 신위를 정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신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응교 황경원(黃景源)이 드디어 상고하여 아뢰기를,
"숭정 17년068)   3월 정미일(丁未日)에 대행 황제(大行皇帝)께서 붕(崩)하시니, 5월에 청(淸)나라 사람이 묘호를 올리기를 ‘회종’이라 하였고, 6월에 남도(南都)에서 묘호를 올리기를 ‘사종(思宗)’이라 하였으며, 홍광(弘光) 원년069)   2월 병자일(丙子日)에 남도에서 묘호를 고쳐서 올리기를 ‘의종(毅宗)’이라 하였기 때문에 대행 황제의 묘효가 세 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호를 정하는 법에는 임금이 왕위를 잃고 죽은 것을 ‘회(懷)’라고 하니 초(楚)나라의 회왕(懷王)과 제(齊)나라 회왕 같은 이가 이런 경우이고, 앞서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사(思)’라고 하니, 동평 사왕(東平思王)과 광양 사왕(廣陽思王) 같은 이가 이런 경우이며, 강직하게 잘 결단하는 것을 ‘의(毅)’라고 하니 황명(皇明)의 의종 황제 같은 이가 이런 경우입니다. 남도에서 올린 대행 황제의 시호가 비록 능비(陵碑)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중원(中原)의 현명한 사대부인 사가법(史可法)·장신언(張愼言)·여대기(呂大器) 같은 이가 의논하여 정한 바입니다."
하였다.

 

헌부 【지평 허휘(許彙)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된 윤득상(尹得相)은 곧 무신년070)  의 역적 안엽(安熀)의 생질입니다. 그의 형 윤귀상(尹龜相)이 국자감(國子監)의 진출이 막혀 있는데, 그 동생인 윤득상이 외람되게 괴선(槐選)에 참여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하니, 권점(圈點)을 삭제하고 그 권점을 주장한 사람은 파직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목릉 참봉(穆陵參奉) 한명량(韓命良)은 본래 모리배의 무리로서 선비의 부류에 끼이지 못하고, 또 남부 봉사(南部奉事) 윤창은(尹昌殷)은 외람되이 사적(仕籍)에 통하여 듣는 사람마다 놀라워함이 있으니 모두 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경산 현령(慶山縣令) 정석장(鄭錫長)은 아전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원망하여 비방하는 말이 떼 지어 일어나며, 유약하다는 지목이 심지어 폄제(貶題)071)  에 올랐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성 현령(固城縣令) 이희춘(李熙春)은 앞서 전중시(殿中寺)의 임무를 맡았으나 여러 번 서경(署經)을 넘겼으니, 사람과 지망이 맞지 않음을 이에 의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개차(改差)함이 마땅합니다. 지난날 이태(李泰)의 문서가 나온 것은 유언민(兪彦民)이 손수 쓴 서찰인데, 심지어 심형(心兄)·심제(心第)라고 일컬었으니 그 잡류들과 체결(締結)하여 행실이 이미 삼가하지 않은 정상은 이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옥서(玉署)에 끼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데, 전조(銓曹)에서는 전례를 따라 검의(檢擬)하면서 아무런 사고가 없는 사람과 같이 하였으니, 유언민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은 중추(重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으나, 추고하는 일은 따르지 않았다.

 

3월 28일 병자

강화 유수 심악(沈)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심악이 상서하여 그의 동생 심필(沈鉍)을 위해 분소(分疏)072)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의 괴수 심유현(沈維賢)이 불행하게도 단문(袒免)의 친족이 되므로, 영원 부부인(靈原府夫人)이 상언(上言)하여 신의 동생으로 뒤를 이으려고 의논하기에 이르자, 선신(先臣)이 말하기를, ‘심유현의 나이가 겨우 30세를 넘었고 또 후취(後娶)한 지 두어 해 만에 갑자기 입후(立後)를 의논함은 일이 매우 경솔하며, 지금 어리고 잔약한 아들의 일로 번거롭게 대신들과 의논하는 데 이르렀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대조(大朝)께서 하교하기를, ‘부부인이 생전에 후계를 보고자 함이니 진실로 그만둘 수 없다.’라고 하셨으며, 이듬해 선신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역적의 괴수가 연이어 담양(潭陽)의 임소(任所)에 있었으므로 일찍이 예조에 입안(立案)을 하지 않았고, 역적의 괴수가 잡혀 가는 데 미쳐서 신의 어미가 상언하여 하교를 환수하기를 청하자, 대조(大朝)께서 하교하기를, ‘안씨(安氏)의 아들 광금(廣金)이 아직 예사(禮斜)073)  를 하지 아니했다.’고 하면서 전일의 하교를 환수하셨으니, 광금은 바로 심필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인가(人家)에 후사(後嗣)를 계승하는 일이 합쳐지면 천속(天屬)이 되고 분리되면 길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분리되고 합쳐지는 즈음에 그 사이가 털끝만큼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신의 동생이 여러 번 도과(道科)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는데, 요행히 급제를 한 뒤에 갑자기 명예를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글을 들여오라고 명하고 연신(筵臣)에게 물었다. 교리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비록 그의 상소 가운데 ‘청파(請罷)’ 두 글자로만 보더라도 그가 심유현의 양아들이 되었음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는데, 감히 번거롭게 문자를 올리기를 이와 같이 방자하게 하니, 이런 길을 한번 열어 주면 나라의 제방이 이를 따라서 더욱 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고, 수찬 임집(任)은 말하기를,
"이미 조정의 금령이 없었으니, 과방(科榜)에서 뽑아 버리는 여부에 대하여 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심필이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잘못되었습니다."
하였는데, 승지 오수채(吳遂采)는 말하기를,
"신이 사람들을 만나면 번번이 심필이 처신하는 분의에 있어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를 물었으나 마침내 확실한 의논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심필이 자폐(自廢)를 한다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심유현의 아들로서 자폐하였다.’고 할 터이니 인정으로 헤아려 봄에 어찌 대단히 궁박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임집은 말하기를,
"승지의 인정이 박절하다는 말은 역시 그럴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두 신하의 말이 의리에 밝지 못하며 오로지 붕비(朋比)한 데서 나왔다고 해서 하교하여 크게 꾸짖었으며, 마침내 오수채는 파직하고 임집은 체차하였으며 심악은 삭직하도록 하였다.

 

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이광직(李光溭)을 장령으로 삼았다.

 

3월 29일 정축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여 차대(次對)를 행하고, 하령하기를,
"혼취(婚娶)의 때를 놓친 자와 매장할 시기를 놓친 자를 돌보아 주고 구휼하라는 일은 대조(大朝)께서 일찍이 하교가 계셨으니, 비록 정해진 기한 안이라 하더라도 새로 대리를 맡게 되었으니 경외(京外)로 하여금 전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리를 한 뒤에 무릇 입계(入啓)와 입달(入達)을 승지의 뜻대로 더러는 입계를 하고 더러는 입달을 하니 도무지 반박(斑駁)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대리하는 뜻이 아니다. 이 뒤로는 융정(戎政)의 경우 관계가 대단하여 경장(更張)할 것과 변방에 일이 있는 것 및 형벌이 일률(一律)에 관계되는 것 그리고 일률로서 품의하여 재결(裁決)·감률(減律)할 것은 모두 입계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입달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청나라 사람 예부의 자문에 이르기를, ‘산해관(山海關)에 들어오는 해삼(海蔘)이 봉성(鳳城)에서 검사 도장을 찍은 숫자보다 많이 불어나는데, 금년에는 비록 면세를 하지마는 뒤로는 규식을 정하여 세금을 거둠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단지 세금을 거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일을 빙자하여 아울러 수색과 검사를 행하기를 한결같이 봉성의 예와 같이 하고자 함이니, 앞으로의 염려가 적지 않습니다. 또 더구나 표문(表文)을 올리는 것은 기일이 있는데, 오래 끌어 많은 날짜를 허비하면 반드시 기일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여 말썽을 부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신(使臣)을 신칙하여 책문(柵門)에 들어갈 때 짐바리의 물건 숫자의 목록과 근량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혹시라도 서로 틀림이 없도록 하고,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관관(關官)에게 글을 올려서 방물과 표문이 기일내에 미치지 못할 뜻을 갖추어 진술하면, 저들도 그 소중함을 생각하여 반드시 여러 날을 허비하면서 까다롭게 검사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고, 좌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사신 역시 스스로 예부에 정문(呈文)하더라도 분의에 불가함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임금이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에게 비국 당상의 겸대(兼帶)를 푸는 것을 허락하라고 명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비국 당상은 곧 밤낮으로 일하는 소임인데, 기사의 신하로서 대리 때에 분주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것은, 원량(元良)이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여 혜양(惠養)하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겸대를 풀어주어 그 혜양에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이 황발(黃髮)에게 물으라.’ 하였는데, 대리를 할 초두에 이것을 곧 먼저 힘써야 할 바이니, 차대(次對)를 할 때에 평상적인 전례에 구애되지 말고 원량으로 하여금 때때로 기사의 신하를 불러서 함께 국사(國事)를 물어 보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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