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9권, 영조 25년 1749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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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무인

수찬 이게(李垍)가 상서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원대한 뜻을 가지며, 여러 관원을 예우하고, 언로를 넓히며, 현사(賢邪)를 분변하고, 궁위를 엄하게 하여야 한다는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세자가 시좌(侍坐)하는 차대(次對)를 한 차례 줄이도록 명하였다. 하루 전에 시좌 차대를 행하였는데, 비국 당상들이 많이 불참을 하였고, 들어와서 참여한 자도 역시 건의하여 아뢴 바가 없으니, 임금이 그 직무를 게을리함을 깊이 개탄하고 마침내 이 명을 내렸는데,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상소하여 간쟁하였고, 대신(大臣)과 옥당(玉堂)에서 연장(連章)을 올려 취소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런 후에 2일을 지내고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입시하여 눈물을 흘리며 극력 말하기를,
"한 달에 두 차례 하는 것도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오히려 간격이 넓다고 여기는데 또 어찌 줄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동궁(東宮)께서 이미 밝게 정사를 익혔다고 여겨서 이러한 하교가 있었다고 한다면, 전하께서 동궁에게 바라는 기대가 너무 얕은 것이고, 만약 뭇 신하들에게 격노함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하셨다면 속담에 ‘이른바 화를 내어 발로 바위를 차는 격’입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
"곧도다. 영성(靈城)074)  이여! 나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내가 원량(元良)이 대리하던 날에 황제(皇帝)처럼 귀해진 마음이 약간 있었으나 그 뒤로는 점점 재미가 없었고, 나라의 기무(機務)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한 번도 건의해 아뢴 적이 없었으니 원량이 무엇을 볼 것이 있어서 습득하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극력 간쟁하기를 마지 아니하자, 임금이 앞서의 하교를 정침하도록 명하였다.

 

4월 2일 기묘

황해도 황주(黃州)·배천(白川)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4월 3일 경진

흙비가 내렸다.

 

사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호조 당상·예조 당상을 인견하고 황단(皇壇)의 악장(樂章) 가운데 성후(聖后)의 ‘성(聖)’자를 ‘삼(三)’ 자로 고치도록 하고, 희생은 태묘(太廟)의 예에 의거하여 소 한 마리를 각위(各位)에 쓰고 돼지와 양은 친행(親行)이나 섭행(攝行)을 물론하고 신위(神位)마다 각각 한 마리씩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4월 4일 신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들에게 서계(誓戒)하게 하였으니, 장차 대보단(大報壇)에 친향(親享)하기 때문이었다.

 

4월 5일 임오

밤에 유성(流星)이 기성(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가 세자를 불러 유시하기를,
"이른바 차대라는 것이 본래 재미가 없다. 특별히 하교하여 신칙한 뒤에야 대신 이하가 진실로 마땅히 옛 버릇을 세척하고 새벽에 대궐 밖에 나아와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이고, 너의 스스로 힘쓰는 도리에 있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마음을 고치고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며 빨리 입대하라는 하령을 내렸어야 마땅한데, 대신과 비국 당상이 이미 늦게 들어왔고 너도 또한 해가 저물어도 인접하지 않았으니, 오늘날 임금과 신하가 모두 그 도리를 잃었다. 너는 안일(安逸)한 데서 태어나 내가 늘 불쌍하게 여겼는데, 좌상(左相)도 너에게 청정(淸淨)을 권하였으니, 가히 마땅함을 잃었다고 이를 만하다. 네가 잘 명령을 내려 시행을 한 뒤에야 여러 신하들이 직무를 게을리 함을 신칙하여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참석하지 아니한 비국 당상은 모두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매사를 반드시 대조(大朝)께 품의하여 아뢴 뒤에 재결하시어 사람의 자식이 되어 감히 스스로 하지 않는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간교한 백성들 가운데 전토와 노비를 다투는 자가 이치에 꿀리면 갑자기 가짜 문권을 만들어 헐값으로 궁방(宮房)에 팔고, 궁방에서는 내수사(內需司)에 보고하여 재가를 받아 행관(行關)하며, 곧바로 추쇄하여 타량(打量)하고, 그렇지 않으면 잡아 가두어 엄하게 처벌하여 반드시 빼앗고야 마니, 지방의 잔약한 백성들은 원통함이 뼈에 사무쳐 위로 천화(天和)를 범하기에 충분합니다. 대조(大朝)께서 깊이 이 폐단을 알고 진고(陳告)한 자는 형배(刑配)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런 폐단이 전과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송사(訟事)가 판결되지 않았는데, 먼저 사들이는 자는 해당 궁방의 직임을 맡은 자와 내수사의 관원을 종중 감처(從重勘處)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여러 신하들이 생각한 바를 간략하게 진달하고 곧 물러가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대조께서 해가 저물기 전에는 파하지 말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만약에 물으실 일이 있으면 신 등이 마땅히 우러러 대답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민간의 질고를 내가 비록 대략은 알지만 그 상세한 것은 모르니, 경 등은 나를 위하여 말해 주시오."
하니, 김재로가 먼저 경작의 괴로움과 양역의 폐단을 진달하였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임금에게 백성이 있는 것은 산에 흙이 있는 것과 같아서 흙이 쌓여 산이 되는데 그 밑을 파면 산은 저절로 무너지고, 백성이 모여 나라가 되는데 그 백성을 학대하면 나라는 곧 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사랑할 자가 어찌 백성이 아니며, 두려워할 자가 역시 어찌 백성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옳다."
하였다. 대신이 또 물러나기를 청하자, 왕세자가 한참 있다가 이에 허락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불러 묻기를,
"오늘 동궁이 차대를 어찌 일찍 파하였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대신들이 물러가기를 요구하자, 동궁이 우물쭈물 미루며 오랫동안 있다가 억지로 허락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이 대신들의 퇴조(退朝)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 또 물어본 일이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동궁이 민간의 질고를 대신들에게 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질문이 매우 좋다."
하고, 이어서 동궁에게 시좌를 명하니, 대신들이 따라서 들어왔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 차대에서 네가 민간의 질고를 물었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만 이 말이 과연 성심에서 나온 것이냐? 대신들이 간략하게 진달한 것은 책임 막이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실로 개연하게 여긴다. 그중에서 혹시 아름다운 말이 있었다면 나를 위하여 외우도록 하라."
하니, 세자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좌상(左相)이 임금은 산과 같고 백성은 흙과 같다는 말이 다소 좋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사부(師傅)가 모두 들어와 있는데, 단지 좌상만 칭찬하니 유독 영상(領相)의 무료(無聊)함을 생각지 않느냐? 내가 일찍이 가의(賈誼)를 너무 날카롭다고 여겼는데, 만약 가의로 하여금 지금의 세상을 당하게 하였다면 가슴을 두드리고 통곡하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 어찌 가의가 없을까마는, 아직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나의 이 수치스러움을 씻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또 세자에게 말하기를,
"민간의 질고는 양역이 가장 심하고 부세가 다음이 되는데, 곡식 한 낟알 낟알이 모두 신고(辛苦) 가운데에서 생산되며, 실 한 올 한 올이 또한 가난한 여자의 손에서 나왔으니 어찌 잔인하지 않겠는가? 네가 만약 우리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기한을 면하지 못하게 한다면 백성이 장차 오막살이 아래에서 서로 울면서 너를 원망하고 너를 꾸짖을 것이니, 생각이 이에 이르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서 어복(御服)을 헤쳐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옷은 세 번 빨았을 뿐이 아니나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모두 우리 백성의 고택(膏澤) 중에서 나온 것이니 너는 그것을 생각하라. 나의 이 가르침이 다만 구구한 한 집의 계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끼는 바는 3백년 종사(宗社)이고, 오직 저 여러 신하들 역시 우리 조종(祖宗)께서 애휼하던 바이니, 네가 만약 상해를 입히면 어찌 나만을 저버리는 것이겠느냐? 위로는 오르내리는 선조의 영혼마저 저버리게 되는 것이니 지금 나의 이 말을 명심하고 본받아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너의 천성이 본래 통달하고 투철하여서 기품이 조금 준수한 곳이 있으니 혹시 밖으로 치달릴까 두렵다."
하고, 다시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밖으로 치닫는 마음이 아님이 없으니, 다른 날에 원량이 하나라도 이런 것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은 오늘 하교한 말로 정성을 다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네가 경직도(耕織圖)를 보고 농사짓는 공(功)을, 글을 읽는 것에 비교하여 힘들고 편안함이 과연 어떠하다고 여기느냐?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면 백성은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우리들을 잊어 버렸다.’ 할 것이니, 백성이 비록 원망하지 않을지라도 저 푸른 하늘이 어찌 사랑할 이치가 있겠느냐?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 같으나 도리어 신령스러워서 한 정사 한 명령의 잘하고 잘못함을 백성이 반드시 알고 있으니, 너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권혁(權爀)·홍봉한(洪鳳漢)·홍계희(洪啓禧)·이창의(李昌誼)를 새로 비국 당상에 차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6일 계미

선산부(善山府)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4월 10일 정해

임금이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하였다. 고황제(高皇帝)를 제향하는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상제(上帝)께서 성인을 간택하시어 크게 원(元)나라를 바로잡았도다. 황제께서 육룡(六龍)을 타고 손으로 천지를 붙드셨도다. 문왕(文王)의 계책과 무왕(武王)의 공열로서 육합(六合)075)  을 뜰로 삼으셨도다. 이에 동방(東邦)을 돌아보시고 우리로 하여금 편안히 살도록 하셨도다. 이때에 신의 선조(先祖)께서 삼가 명나라의 지시를 받들어 이 동토(東土)를 다스렸으니 신인(神人)의 비호하는 바가 되었도다. 황제께서 벌써 반서(班瑞)076)  를 하시고 아름다운 국호를 내리셨도다. 은사(殷師)077)  의 옛 봉강(封疆)을 이에 다시 받도록 명하셨도다. 만 가지 이치를 밝게 살피니 비금(斐錦)078)  이 세상에 행해질 수 없도다.
부모의 나라가 매우 가까우니 우로(雨露)의 은택을 고루 받았도다. 아무리 작은 것도 모두 황제가 주신 것이니, 왕기(王畿) 밖의 요전(要甸)079)  이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 신종(神宗)께서는 임진 왜란의 병화(兵火)를 구원해 주셨고, 의종(毅宗)께서는 병자 호란의 액운을 불쌍하게 여기셨도다.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곧 황조(皇祖)께서 주신 교훈이로다. 3백 년 왕조[瑤圖]의 천록(天祿)이 영원히 끊어졌도다. 능원(陵園)과 묘사(廟社)가 폐허가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뒤바뀌었도다. 비풍(匪風)·하천(下泉)080)  으로 가슴이 무너지고 뼛골이 싸늘하도다. 초옥(楚屋)을 모방하여 영단(靈壇)으로 짝을 삼았고, 선고(先考)께서 설치한 바는 신종에게 제향을 받들었도다. 근원을 거슬러 고황제에게 보답을 하고자 이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며, 성왕(聖王)을 받들어 차례로 향사를 올리니 예에 매우 합당하도다. 그 위대하신 분을 모아 두 황제를 배향하였도다. 생각을 이루어 우리를 편안히 하시니 양양하게 계신 듯하고, 신성한 공덕을 어찌 보답한다고 이르겠습니까? 향기가 오르거든 이에 흠향하소서. 축문을 지어 삼가 고합니다."
하였고, 신종 황제를 제향하는 축문에 이르기를,
"아! 혁혁하신 성후(聖后)께서 큰 계책과 공렬을 이으셨고, 4기(四紀)081)   동안 광림(光臨)하시어 지극한 교화를 널리 펴셨도다. 우리 동번(東藩)을 돌아보시어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게 하셨도다. 지난날 임진 왜란 때에 섬 오랑캐가 방자하고 포학하여 팔로(八路)가 탕잔(蕩殘)하고 만 백성이 도탄에 빠졌는데, 황제께서 이때에 혁연히 분노하시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도록 명하셨도다. 요사한 기운을 단번에 쓸어버리어 나라의 종사(宗社)가 다시 혈식(血食)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 덕을 갚고자 하여도 하늘과 같아 다함이 없도다. 세상 운수가 변하여 관상(冠裳)이 거꾸로 되었으니, 종거(鍾簴)가 이미 옮겨졌고 사당의 형체가 따라서 불타 버렸도다. 운향(雲鄕)이 멀고도 머니 취한 저 하늘은 어느 때에 깰 것인가? 비풍(匪風)의 생각이 나에게 서쪽을 향해 슬퍼하는 마음을 한층 더하게 하도다. 명나라를 섬기는 마음 비록 은근하고 간절하나 어느 곳에 조공(朝貢)을 바칠 것인가? 이에 영단(靈壇)을 쌓고 추모(追慕)의 마음 붙였도다. 보잘것없는 제수(祭需)와 간략한 폐백이 어찌 정례(情禮)에 맞을까마는, 삼가 밝은 정성을 가지고 영원히 게을리하지 않기를 기약하노라. 황제의 영혼이 하늘에 계시어 좌우로 오르내리시면서 느낌이 있으면 통하여 멀어도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저 중주(中州)를 바라보니 오랑캐의 노린내가 온 땅에 가득하도다. 이 경건하고 청결한 정성을 생각하시어 나를 멀리 버리지 마소서. 좋은 날을 받아 몸소 재계하고 의식에 따라 생례(牲禮)를 올렸노라. 의장(儀仗)과 장막도 매우 엄숙하니, 황홀히 모시어 호위함과 같으며 용(龍)의 깃발 펄럭이니 동으로 순수(巡狩)함과 방불하도다. 이 진실된 정성을 살피시어 흠향하소서."
하였으며, 의종 황제를 제향하는 축문에 이르기를,
"굳세고 열렬하신 임금이시여, 전고(前古)에 유례없는 광채가 있도다. 의(義)를 실천하여 사직을 위해 순국하시니, 천경(天經)이 밝게 게시되었도다. 동방을 보기를 내복(內服)082)  과 같이 하여 재조(再造)의 은혜를 신종께서 생각하셨도다. 하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 또 병자년과 정묘년의 난리를 만났도다. 미치광이같이 휘두르는 칼날이 창궐하여 우리의 문정(門庭)을 짓밟으니 황제께서 돌아보고 탄식하며 군사를 징발하여 떠나기를 독촉하였도다. 하수(河水)에 이르러 군사가 지쳐 구원하는 일에 미치지 못하니, 황제께서 그 게으름을 책망하고 혁연(赫然)히 노하여 꾸짖었도다. 바다를 건너 조회하는 길이 끊어졌는데, 창칼은 눈앞에 가득하여 땅이 막히고 일이 숨겨졌으니 누가 은지(恩旨)를 전할 것인가? 세상이 상전 벽해(桑田碧海)와 같이 변했으니 원통함이 갑신년083)  에 얽혔도다. 고택(膏澤)이 그치지 않았으니 사책(史策)이 이를 증거하였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두 황제께서 주신 것이니, 그 은혜 하해(河海)같이 양양하도다.
서묘(黍苗)084)  를 생각하며, 비풍(匪風)을 추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공경함은 오직 신의 부조(父祖)였노라. 영유(靈壝)가 엄숙하니 처음 제사가 밝고 아름다우며, 차례로 제향을 받들었으니 옛 전례를 계승하였도다. 흐느끼며 서쪽을 향해 슬퍼했으니 엄숙하게 교제(郊祭)의 의식을 행하였네. 세 황제의 융성한 공렬로 편안하게 하셨는데, 구묘(九廟)085)  는 빈터가 되었고 만국(萬國)은 오랑캐의 판국으로 변했도다. 인향(禋享)을 싫어하지 아니하여 하국(下國)에서 향사를 올리니 구름 깃발은 펄럭이며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네. 보잘것없는 정성을 돌보시고 밝게 흠향하여 어김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우량(鄭羽良)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8면
【분류】왕실(王室) / 외교(外交) / 어문학(語文學)


[註 075] 육합(六合) : 천지와 사방.[註 076] 반서(班瑞) :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조현(朝見)을 하였을 때 서옥(瑞玉)을 천자에게 바치고 뒤에 이것을 제후에게 되돌려 주는 일.[註 077] 은사(殷師) : 은(殷)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가리킴.[註 078] 비금(斐錦) :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편(巷伯篇)의 "얼룩덜룩 아름답게 조개 무늬 비단이 짜였네. 저 남을 참소한 자여, 너무 심하게 하였네.[斐兮斐兮 成是貝錦 彼譖人者 亦巳大甚]"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로, 듣기에 번드르한 말로 간사하게 남을 참소하는 것을 풍자한 것임.[註 079] 요전(要甸) : 요복(要服)과 전복(甸服)으로 오복(五服)에 속한 것. 오복은 서울을 중심으로 주위를 5백 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으로,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편(禹貢篇)에 의하면, 서울을 중심으로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었음. 여기서는 멀고 가까운 지역을 대표하는 말로 쓰였음.[註 080] 비풍(匪風)·하천(下泉) : 멸망한 왕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비풍은 주실(周室)이 쇠미함을 탄식하여 현인(賢人)이 지은 시이고, 하천은 왕실이 능이(陵夷)되어 소국(小國)이 곤폐스러운 것을 비유하여 지은 시임.[註 081] 4기(四紀) : 1기가 12년임.[註 082] 내복(內服) : 천자의 기내.[註 083] 갑신년 : 1644 인조 22년.[註 084] 서묘(黍苗) : 《시경(詩經)》 왕풍(王風) 서리편(黍離篇)의 "메기장은 더북더북 피싹도 돋았구나.[彼黍離離 彼稷之苗]"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로, 주(周)나라가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 주(周)나라의 대부가 옛 도읍인 호경(鎬京)에 가서 옛날의 종묘(宗廟)와 궁실이 간데없이 그 땅에 기장과 피만이 수북히 자라고 있는 것을 한탄한 것임.[註 085] 구묘(九廟) : 명나라 조종(祖宗)의 사당.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서 배종(陪從)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황조(皇朝)의 능묘(陵廟)에 혈식(血食)을 못한 것이 1백년이 지났는데, 이제 장차 세 황제를 한 제단에 함께 제향을 올리게 되었으니 열성조(列聖祖)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이때에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이 배종하여 제사지내기를 청하였는데, 대신이 전례가 없다고 허락하지 아니하자, 지관사(知館事) 박문수(朴文秀)가 그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탄식하기를,
"다른 곳의 모범이 되는 곳에서 이와 같이 의리로써 창설한 예의가 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갑신년086) 집춘문(集春門) 밖에서 이미 있었던 전례에 의하여 공북문(拱北門) 밖에서 참제(參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망례(望禮)하는 자리에 나아가서 네 번 절하기를 마치고 제단에 올라가 봉심하였다. 제단의 높이는 4척이었고, 사방의 넓이는 2장(丈) 5척이었으며, 네모난 벽돌로 쌓았고, 네 곳으로 나가 아홉 계단을 올라가는데, 단상에는 흰 장막을 쳐서 전(殿)을 만들었고, 전 안에는 황색 장막을 쳐서 3개의 방을 만들었으며, 방안 북쪽 벽에 남쪽을 향하여 서쪽을 위로하여 대명 태조 개천 행도 조기 입극 대성 지신 인문 의무 준덕 성공 고황제 신위(大明太祖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峻德成功高皇帝神位)를 제1방에, 신종 범천 합도 철숙 돈간 광문 장무 안인 지효 현황제 신위(神宗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神位)를 제2방에, 의종 소천 역도 강명 각검 규문 분무 돈인 무효 열황제 신위(毅宗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神位)를 제3방에 설치하였는데, 황문석(黃文席)은 황순(黃純)이었다. 임금이 남쪽 섬돌로부터 내려와 제기와 희생을 살펴보았는데, 태조·신종·의종에게 붉은 소 한 마리, 양 세 마리·돼지 세 마리를 쓰도록 하였으며, 이날 밤에 임금이 영화당(暎花堂)에서 재숙(齋宿)하고 황조 사람의 후예를 황단의 수복(守僕)으로 차임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4월 11일 무자

축시(丑時) 정 5각(刻)에 대보단(大報壇)에서 친히 명나라 세 황제에게 제향을 올렸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輿)를 타고 영화당에서 나오니 승지와 사관이 제복을 입고 배종하였다. 중문 밖에 이르러 【지금의 열천문(冽泉門)이다.】  임금이 여에서 내려 동쪽 협문(夾門)을 거쳐 소차(小次)에 들어가 장차 제향을 행할 즈음에 전악(典樂)이 공인(工人) 이무(二舞)087)  와 육일(六佾)을 거느리고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니, 감찰(監察)·전사관(典祀官) 그리고 여러 집사(執事)들이 모두 먼저 네 번 절하였다. 진폐 찬작관(進幣瓚爵官)·천조관(薦俎官)·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이 들어와 남쪽 유문(壝門) 밖으로 나아가고 대축(大祝)은 단(壇)에 올라와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서 장막을 걷고 통례(通禮)가 외판(外辦)을 아뢰자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소차에 나아간다. 예의사(禮儀使)가 임금을 인도하여 동쪽 문으로부터 들어와 판위(版位)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고 인하여 행사(行事)하도록 청하자 털과 피[毛血]를 땅에 묻게 하고 헌가(軒架)는 경안지악(景安之樂)과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연주하였으며, 음악이 8장(章)에서 끝이 나자 임금이 네 번 절하고 위차에 있는 자도 또한 절을 하였는데 승지와 사관은 예에 따라 절하지 않았으며, 절이 끝나자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관세(盥洗)를 행하고 제 1위(位)의 준소(尊所)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니 등가(登歌)가 숙안지악(肅安之樂)과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연주하였다. 임금이 남쪽 섬돌로부터 올라와서 태조 고황제의 신위 앞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신관례(晨祼禮)를 행하고 엎드렸다 일어났다. 그리고 남쪽 섬돌로부터 내려와 제 2위의 준소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처음의 예와 같이 하였고, 제 3위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임금이 위차로 돌아오자 찬(饌)을 올리고 헌가는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연주하였다. 음악이 그치자 임금이 제 1위의 준소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니 등가가 수안지악(壽安之樂)과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연주하였다. 임금이 섬돌에 올라와 태조의 신위 앞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고 근시(近侍)가 술잔을 드리니 임금이 세 번 모래 땅에 지우고 술잔을 올리니 악사(樂師)가 음악을 그쳤다. 대축이 제문을 읽으니 임금은 엎드려 있다가 제문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내려가 위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의사가 인하여 임금을 인도하여 제 2의 신위에 나아가 초헌례를 처음과 같이 거행하고 대축이 제문을 읽었으며, 제 3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대축이 제문을 읽고 읽기를 마치자 문무(文舞)는 물러나고 무무(武舞)가 나아갔으며 헌가는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하였다. 음악이 그치자 임금이 아헌례를 행하기를 처음의 예와 같이 하였고 춤은 소무(昭武)를 썼으며, 임금이 종헌례를 역시 이와 같이 행하였다. 임금이 남쪽 섬돌로부터 올라와서 의종의 신위 앞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음복을 하고 위차에 돌아와 네 번 절하였다. 대축은 변두(籩豆)를 거두고 등가는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연주하였으며 음악이 그치자, 헌가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임금이 네 번 절을 하였으며 절을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망요위(望燎位)에 나아가니 승지는 지방(紙牓)을 받들고 대축은 축폐(祝幣)를 받들어 불살랐으며, 예의사는 임금을 인도하여 소차에 돌아왔다. 이날 밤에 임금이 신관례를 행하고 내려와서 위차에 돌아오자 한 떼의 검은 구름이 북쪽으로부터 일어나 신령스러운 비가 잠시 내렸고 슬픈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동산의 나무에서 소리가 나고 황색 장막이 휘날렸는데, 이미 네 번 절하고 돌아오자 바람에 구름이 걷히었고 북두 칠성이 찬란하게 빛났으니, 종사관(從事官)과 뜰아래 있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황제 악장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국호를 내려주시니,
간교로운 말을 밝게 통촉하도다.
아! 원대함이여!
만세의 은혜로다.
검은 구름에 깃발 나부끼는데,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어 망망하구나.
찬란한 옥술잔에 울창주(鬱鬯酒) 가득하니,
신명의 보호하에 바로잡아 주소서."
하였고, 신종 황제 악장에 이르기를,
"황제께서 우리 나라를 재생시켜
뛰어난 무덕을 이룩하셨도다.
우리의 종묘와 사직을 회복시켰고,
우리의 강토를 안정시켰도다.
보답하는 제사에 무엇으로 하겠는가?
기장과 누른 숫소로다.
밝게 이 자리에 강림하시어,
흠향하시고 도우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으며, 의종 황제 악장에 이르기를,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공혈이며,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돌보신 은혜로다.
요동의 바다 아득히 넓고 넓은데,
어떻게 잘 건넌다고 하겠는가?
맑은 술 이미 올렸으니
밝은 횃불도 빛나도다.
공경하기를 싫어함이 없으니,
우리 황제께서 도움을 주소서."
하였다. 신(神)을 맞이하는 악사(樂詞)에 이르기를,
"밝고 밝으신 세 황제시여!
만방의 임금이시로다.
황제의 위대하신 업적이
우리 동방에 남아 있도다.
새로이 삼황의 제단을 쌓았으니,
엄숙하신 신이 강림하시도다.
광주리에 소박한 제물을 담아서
처음으로 정결하게 제사를 지내도다."
하고, 신을 보내는 악사에 이르기를,
"제물은 질서 있게 진열되었고,
풍악 소리는 조화있게 울리도다.
공덕을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정을 다함이로다.
예의를 이미 갖추었으니,
환하게 통달되어 어김이 없도다.
천추 만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싫어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충청도 공주목(公州牧)에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해서 지나간 곳에는 보리가 쓰러져 문드러지지 않음이 없었고,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경기 삭녕군(朔寧郡)과 황해도 해주(海州)에는 서리가 내렸고, 천안(天安)·직산(稷山)·양지(陽智)·은율(殷栗)·문화(文化)·재령(載寧)·수안(遂安)·신계(新溪) 등의 고을에도 역시 우박이 내렸다.

 

4월 12일 기축

경기 양지(陽智)·포천(抱川)에 우박이 내렸고, 황해도 신천(信川)·해주(海州)에도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였으며, 서흥(瑞興) 등 네 고을에는 서리가 내렸고, 평안도 영원군(寧遠郡)에는 눈이 내렸다.

 

이이장(李彛章)을 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필선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수찬으로, 조중회(趙重晦)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이주진(李周鎭)·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숭정 대부로, 도승지 남태량(南泰良)을 가의 대부로, 우승지 정휘량(鄭翬良)을 가선 대부로 각각 가자(加資)하였으니, 황단(皇壇)을 개축한 공로 때문이었다. 원경하(元景夏)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황단(皇壇)의 의절(儀節)을 편집하라고 명하였다.

 

대리(代理) 후에 경연(經筵)에서 상참(常參)할 것을 승지가 품고(稟告)하지 아니하고 곧 정유년088)  의 전례를 따라 단지 ‘정(停)’자만 우사(右史)의 기록에 썼으니, 대개 정유년의 경우는 약원(藥院)에서 함께 당직을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정지된 것이었다. 이날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하교하기를,
"지금의 경우는 내가 더욱 쇠잔하여 실로 법강(法講)을 하기가 어려우므로 영원히 정지하고 싶지만 그래도 소대하도록 명한 것은 강한 바 글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서 경연과 상참을 대리하기 때문에 정지한다는 것을 일기 속에 쓰라고 명하였다.

 

4월 13일 경인

유생 조재후(趙載厚)·김시묵(金時默)에게 급제를 내리도록 명하였는데, 몸소 세 황제에게 제향하면서 유생을 배제(陪祭)하도록 하고 특별히 시사(試士)하게 명한 것이었다. 당시 숭문당에서 과차(科次)를 매기도록 명하였는데, 제학 원경하(元景夏)가 바야흐로 시권(試券)을 상고할 즈음 갑자기 말을 하려고 하다가 눈물이 먼저 떨어지자, 임금이 놀랍게 여겨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원경하가 목이 메어 울면서 말하기를,
"세 황제를 함께 제향하는 것은 실로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데서 나온 것인데, 한 종신(宗臣)이 그 아름다움을 성상의 몸에 돌리도록 청하는 자가 있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매우 크므로 이 때문에 울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내가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자 해서 이 일을 하였다면, 어찌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지어 주실(周室)을 높이는 뜻이겠는가?"
하였다. 대개 전일에 종신 능안군(綾安君) 이식(李植)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이미 세 황제를 제향했으니 효묘(孝廟)의 휘호(徽號)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동조(東朝) 및 대조(大朝)의 휘호도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후원(喉院)에서 이를 물리쳤고, 뒤에 여러 종신들이 연속하여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간신(諫臣) 이익원(李翼元)이 상소하여 그것을 배척했다가 체직되었고, 영상 조현명(趙顯命)은 이익원을 신구(伸救)하다가 견책을 당하였다. 원경하가 그 말을 듣고 곧 도성에 들어와 하루에 두 번이나 상소하여 동조에 휘호를 올릴 것을 청하자, 조반(朝班)에서 원경하가 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서로 눈짓하여 비웃으면서, ‘채택(蔡澤)이 서쪽으로 진(秦)나라에 들어갔다089)  고 말하였다.

 

4월 14일 신묘

평안도 창성(昌城) 등 여섯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소견하였는데, 김재로가 평안도 병마 절도사 조동하(趙東夏)를 체임하도록 청하며 말하기를,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당론(黨論)에 지나치다.’고 하였으니 곤임(閫任)을 맡기는 것은 결단코 불가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조동하가 대간의 언쟁을 만나 부임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긴급하지도 않은데, 수어사가 백수(白首)의 나이에 어찌해서 이런 말을 하였는가?"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동하가 과연 당론을 하였다면 조관빈의 말이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조동하로 하여금 수어사의 당에 들어가게 했다면 반드시 이런 말은 없었을 것이다. 무신의 편당하는 습관을 문신이 인도하니 마음이 늘 개연하였다. 아! 고심하며 조제한 것이 지금 몇해였는가? 설혹 그 말과 같을지라도 내가 무신에게는 이것으로 그를 의심하지는 아니할 것이니, 만약 의심을 한다면 이것은 무신을 인도하여 편당을 만드는 것이다. 조동하가 만일 부임을 하지 아니한다면 그가 앞으로 당을 더욱 당으로 만들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니, 결단코 한결같이 그 만건(慢蹇)한 버릇에 맡겨두어 당심(黨心)을 권장하게 할 수는 없다. 조동하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항례(享禮)에 모혈(毛血)과 축폐(祝幣)를 구덩이에 묻는 의식을 정하고 하교하기를,
"모혈을 함께 불태워 구덩이에 묻는 것은 마음에 두려운 바가 있기 때문에 유신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도록 하였으나 의거할 만한 예가 없고 대신의 뜻이 나의 뜻과 같으니, 태묘(太廟)에서 함께 구덩이에 묻게 하지 않았다면 이것이 참조할 만한 증거에 족하다. 이 후로는 황단의 제사 때에 모혈은 의주(儀註)에 의거하여 대축(大祝)이 먼저 북쪽 유문(壝門) 안에서 불태우는데, 모혈을 불태우는 곳과 축폐를 불태우는 곳은 앞서 정한 규식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할 것이며, 사단의 모혈은 창(唱)에 따라서 먼저 구덩이에 묻고 축폐의 경우는 제사를 마친 뒤에 구덩이에 묻는 일로 규식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대저 모혈은 먼저 구덩이에 묻는 것인데, 과오로 인하여 오류를 이어받아 묻으라고 창한 뒤에도 바로 묻지 않고 구덩이 옆에 두었다가 제사를 마치기를 기다려 망료(望燎)와 망예(望瘞)를 일시에 함께 시행하니, 이는 제례(制禮)의 뜻이 아니다. 이 뒤로는 향사의 전례대로 묻으라고 창한 뒤에 곧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제복은 춘당대(春塘臺)에 묻었는데, 만약 시사(試士)할 때를 만나면 불결한 일이 많으니 이 뒤로는 옛날 묻은 곳을 사용하지 말고 어원(御苑) 중에 반드시 깊숙하고 정결한 땅을 골라서 묻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6일 계사

이제원(李濟遠)을 대사간으로, 이춘제(李春躋)를 형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좌빈객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우빈객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참찬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부제학으로, 황합(黃柚)을 헌납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지평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수찬으로 삼았다.

 

4월 17일 갑오

사간원 【사간 이이장(李彛章)·정언 박성원(朴盛源)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혜(權嵆)·권집(權䌖)의 옥사(獄事)는 대단히 요악한데, 종신(宗臣)이 불행하게도 그것을 당하고 면대를 청하여 울면서 고하니, 그의 마음이 다른 뜻이 없음을 질정할 수 있으나 대간의 진달이 출장(出場)하기 이전에는 석고 대명(席藁待命)하는 날이 아님이 없는데, 이에 감히 스스로 평인과 같이 편안히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인심이 놀라서 오래도록 그치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18일 을미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였다.

 

하교하기를,
"백골을 찾아 묻어 주는 정사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급선무로 삼은 바이니, 유사(有司)에게 신칙하여 널리 경외(京外)의 시체를 찾아서 묻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동지 정사 정석오(鄭錫五)가 도중(道中)에서 졸(卒)하였으므로, 부사 정형복(鄭亨復)·서장관 이이장(李彛章)이 복명(復命)하였다. 이이장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피국(彼國)이 정사(正使)에게 상으로 하사한 것을 신 등이 그가 죽었으므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예부(禮部)에서 끝내 허락하지 않으므로, 가져와서 그 집에 전해 주었더니 그 집에서도 역시 받지 않으므로 어찌할 수 없어서 우러러 품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역원(譯院)에 명하여 원역(員役)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이이장이 또 아뢰기를,
"정석오는 시호를 내려야 합당합니다. 더구나 국경 밖에서 운명을 하였으니 가엾게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더욱 자별해야 마땅합니다. 들으니 그의 가법(家法)이 겸손하고 자제하여 시호를 청하지 아니하니 조정에서 재촉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피인(彼人)의 조의(朝儀)를 묻자, 정형복이 말하기를,
"동서 반열이 스스로 자리를 가지고 좌우 협문으로 나누어 들어와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데도 조금도 시끄러움이 없었습니다."
하였고, 임금이 태학(太學)의 제도가 어떠하였는지를 묻자, 이이장이 말하기를,
"넓이가 9간(間)이고 길이가 6간으로 우리 나라의 규모와 다름이 없었으며, 위판은 주홍색을 칠하고 금박(金箔)으로 쓰기를, ‘지성 선사 공자 신위(至聖先師孔子神位)’라 하였고, 십철(十哲) 역시 이름을 휘(諱)하고 자(子)를 일컬었으며, 주자(朱子)를 전내(殿內)에 올려 배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심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강희제(康熙帝) 때에는 병권을 청나라 사람에게 맡겼고 백성을 다스림은 한(漢)나라 사람에게 맡겼으며 유밀(宥密)의 임무는 청나라와 한나라 사람이 절반씩 참여하였는데, 지금의 경우는 병권과 유밀을 모두 청나라 사람이 맡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직무는 한나라 사람이 겨우 그 절반만 참여하게 하여 손님과도 같고 종과도 같으니, 이러므로 근심과 원망이 매우 심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건륭제(乾隆帝)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청나라와 한나라 사람을 분별하였는가? 나는 탕평(蕩平)에 고심하였어도 오히려 조제(調劑)하지 못하고 있다."
하자, 이이장이 말하기를,
"묘만(苗蠻)이 섬서성(陝西省)과 사천성(四川省) 사이에 두루 분포되어 있으나 부락이 생숙(生熟)의 구별이 있어서 숙만(熟蠻)은 대대로 중국에 복속이 되었고 생만(生蠻)은 형체는 비록 사람과 같으나 성품이 뱀이나 전갈과 같기 때문에 강희제 때에 자주 복속하기도 하고 자주 배반하기도 하였지만 병혁(兵革)을 쓰지 않고 이익으로 달래어 얽매여 둘 뿐이었습니다. 건륭제 때에는 그 배반하였음을 듣고 장수로 하여금 그들을 정벌하여 반드시 종자를 멸절시키고자 하였으나 생만이란 원래 정착해서 사는 곳이 없어 모이면 군사가 되고 흩어지면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으니 어떻게 마음대로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갓 재력만 허비하고 한번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이장이 또 말하기를,
"대리(代理)를 한 뒤에는 조신(朝臣)들이 대조(大朝)에 진장(陳章)할 수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일이란 당연히 대조께 진달하고 소조(小朝)께 진달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과실이 있으면 이것을 어찌 감히 소조에 진달하겠습니까? 상소하여 호소할 길이 끊어지면 성궁(聖躬)의 과실은 따라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장주(章奏)가 기기 괴괴하여 내가 보고자 하지 않았으나, 일이 나의 과실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또한 어찌 그 진소를 금지시킬 수 있겠는가? 지난날에 이미 중신(重臣)들에게 유시하였다."
하였다.

 

4월 19일 병신

참핵사(參覈使) 김상적(金尙迪)이 돌아왔다. 처음에 안주 군뢰(安州軍牢) 이이정(李二貞)은 일명 고노자(古魯子)라고도 하는데, 사신의 행렬을 따라가서 낭자산(狼子山)에서 유숙하였고, 역관 이윤방(李允芳)은 십리하(十里河)에 있는 정충(鄭忠)의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연이어 은자를 잃어버렸으므로 보고서를 올려서 영송 통관(迎送通官)에게 추문하도록 청하였다. 예부에서 우리 나라에 자문을 보내어 이이정 및 증인을 잡아 묶어서 봉황성(鳳凰城)에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도록 청하자, 조정에서는 형조 참의 김상적을 보내어 조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피인(彼人)이 정충의 죄명을 벗겨 주고 내국인(內國人)을 무고하였다는 것으로 이이정 등을 죄줌으로써 김상적이 그것을 논변하였는데, 피인이 두 쪽 다 풀려나도록 꾀를 내어 고노자 등은 논단(論斷)하여 충군(充軍)하였고 다시 그 죄범이 은조(恩詔) 전에 있었다는 것으로 장도(杖徒)를 결정하여 출송(出送)하였으므로 김상적이 5개월 만에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위유하고 묻기를,
"저들이 조사를 행할 때에 어떤 형벌을 썼는가?"
하니, 김상적이 말하기를,
"귀를 당기고 뺨을 치고, 주리를 트는 형벌이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어라. 내가 원량(元良)이 그 형벌한 말을 들을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시좌(侍坐)한 자리에서 차대를 행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남태량(南泰良)이 일찍이 영남을 안찰하고 돌아와서 경자년090)  의 양전(量田)이 잘못되어 백성에게 백징(白徵)이 많으며, 그 중에도 인동(仁同) 등 큰 고을이 가장 심하니, 개량(改量)을 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자,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권관(權管) 이성상(李晟相)을 미세한 일로 진소(鎭所)로부터 잡아 왔는데, 압송해 오는 금오(金吾)의 나졸이 징색(徵索)이 욕심에 차지 않아 강제로 머리에 주머니를 씌우고 큰 칼을 채웠다가 그가 탄 말을 허락함에 미쳐서 벗겨 주었다고 합니다. 국문할 죄수가 아닌데 주머니와 칼을 씌운 일은 이전에 없었던 바이니, 엄중히 징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세 차례 엄하게 형벌을 가한 뒤에 먼 곳에다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정언 박성원(朴盛源)에게 묻기를,
"대신(臺臣)이 새로 진달한 것은 종신(宗臣)으로 하여금 어떻게 자처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는가?"
하니, 박성원이 말하기를,
"종신들의 깊은 정성을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나라의 체모가 달려 있는 바이니, 삭출하는 것이 합당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깊은 정성이라 칭찬하고 다시 삭출하도록 청하니, 진실로 괴이하다."
하자, 박성원이 인피(引避)하여 물러갔다. 김재로가 박성원이 전라 감사 한익모(韓翼謨)와 더불어 편지로서 서로 힐난한 정상을 아뢰고, 한익모의 문객 박지창(朴枝昌)을 사핵(査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진신(搢紳)을 위하여 이런 등속의 일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자, 김재로가 억지로 권하므로 사핵을 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당시에 박성원이 그의 아버지의 임소인 금산(錦山)으로부터 돌아오다가 박지창이 전라 감영으로부터 오는 것을 길에서 만나 그가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에 화를 내어 끌어내려 매를 때리고, 이어서 박지창이 행낭 속에 넣어 싣고 가던 돈을 찾아내어 감사가 전대를 윤택하게 해준 바라고 말하고 이것으로 박지창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에 한익모가 상소하여 변론하였기 때문에 김재로가 이런 아룀이 있게 되었다. 임금이 사관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동궁에게 유시하기를,
"인군(人君)의 하교는 실같이 나와 밧줄과 같이 커지는 법091)  인데, 더구나 원량(元良)에게 신칙하고 힘쓰게 하는 것이겠는가? 사람이 지혜롭거나 어리석고, 훌륭하고 불초함이 있는 것은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네가 대리를 한 뒤에 지금 박성원(朴盛源)의 놀랄만한 못된 거조가 있었으니, 혹시라도 네가 이로 말미암아 뭇 신하들을 경시할까 두렵다. 얼마 전에 어루만져 기용하라고 하교를 내렸는데 다시 생각하니 나의 이 하교 역시 폐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곽공(郭公)092)  이 곽공이 된 이유는 어진 이를 보고도 능히 들어 쓰지 못하였고 착하지 못함을 보고도 능히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학(大學)》에 이르지 않았는가?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능히 남을 사랑하며 능히 남을 미워한다.’ 하였고, 공자가 또 말하기를,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두면 굽은 사람도 곧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하였으니, 대개 사람을 쓰는 도리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자와 어질고 불초한 자를 섞어서 쓸 수 없기 때문에 벼슬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제갈양(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도 이르기를, ‘현명한 신하와 친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의 흥하고 융성한 이유이며, 소인과 친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後漢)의 기울고 쇠퇴한 이유이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한 명의 소인이 능히 1백 명의 현명한 신하를 제거할 수 있지만, 1백 명의 현명한 신하가 능히 한 명의 소인을 제거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소인은 음(陰)과 같고 군자(君子)는 양(陽)과 같은 것이니, 선왕께서 양을 붙들고 음을 억제한 뜻이 어찌 깊고 중하지 아니한가? 비록 그러하나 내가 이르는 바의 군자와 소인은 오늘날 세대에서 편당을 논하는 자가 각기 일컫는 군자·소인이 아니다. 아무리 한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어진 이가 있고 불초한 이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한 당의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모두가 군자가 되고 모두가 소인이 되라는 이치가 있겠는가? 이 당 가운데에도 혹은 군자가 있고 혹은 소인도 있으며, 저 당 가운데에도 혹은 소인이 있고 혹은 군자도 있는 것이니, 그대의 경우는 다만 그 중에서 정대하고 그대를 속이지 않는 자를 선택하여 성심껏 등용하는 것이 옳다.
박성원·한익모의 조사할 일을 나에게 계달하게 한 것은 그대로 하여금 아름답지 못한 일을 담당시키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사사로운 일을 들추어내는 것은 역시 소인의 태도이니, 만약 이런 등의 습관으로 오늘 한 사람을 쫓아내고 내일 한 사람을 쫓아내면 조정에 남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대는 모름지기 명찰(明察)을 더해야 할 터인데, 그 명찰하는 도리는 경(敬)에 거하는 것을 크게 여기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만약 바로 한익모를 그르다 하고 박성원을 옳다고 한다면 현위(弦韋)가 서로 뒤집힐 것이니 이것이 어찌 나의 본래의 뜻이겠는가? 얼마 전에 어루만지며 기용하라는 하교는 모든 신하를 경시하지 않는 자료로 삼게 한 것이며, 사람을 등용함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지혜롭고 어리석은 자와 어질고 불초한 사람을 혼동해 등용하여 등한한 잡동사니를 이루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대저 예(禮)로써 신하를 대우하는 중에 먼저 나의 지혜롭고 어리석음과 어질고 불초한 자를 분별하는 지감(知鑑)이 갖추어진 뒤라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이 젊은 여러 신하들이 앞에 있는데 근래에 서로들 홍범(洪範)의 황극(皇極)을 이끌어 황극으로 하여금 나누어 2, 3 가지를 만드니, 이 뒤로 혹시라도 서로 군자·소인을 일컬을 것 같으면 단지 너를 저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은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감히 제복(祭服)을 입고 태묘(太廟)에 들어가겠는가?"
하였다.

 

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이익보(李益輔)를 대사간으로, 구윤명(具允明)을 장령으로, 유한소(兪漢蕭)·심관(沈鑧)을 지평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정언으로, 윤급(尹汲)을 이조 참판으로, 유엄(柳儼)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회계법(會計法)을 오군문(五軍門) 및 선혜청(宣惠廳)에 시행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이미 부유하고 또 백성이 번성하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부유하다는 것이 아니라 곧 백성이 부유함을 이르는 것이다."
하고, 또 절용(節用)에 대하여 말하기를,
"절용이란 저축을 넓히는 근본이다. 아! 저축을 넓히는 것은 임금을 위하는 바가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하는 바이니, 어찌해서 백성을 위함이라 이르는가?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고 군려(軍旅)를 갖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홍수와 가뭄이 있을 때에 어떻게 백성을 구제하고, 또 군례가 있을 때에 장차 백성에게 부세를 더하게 될 것이니, 백성을 구제할 수 없고 백성에게 부세를 더 거두면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지금 경비를 돌아보면 애통하다고 이를 만하다. 《주례(周禮)》에 일컫기를, ‘왕(王)에게는 회계가 없고 유사(有司)에게 회계가 있다.’ 하였는데, 중앙에는 탁지(度支)와 기조(騎曹), 지방에는 각도(各道)에 모두 회계가 있는데, 오직 오군문(五軍門)은 중간에 창설하였기 때문에 이런 전례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호조와 병조의 예에 따라 회계안(會計案)을 마련하여 들이도록 하고, 선혜청은 나라의 중요한 곳인데, 그 회계한 바가 몇 장의 단자를 가지고 들어와 계달하는 데 불과하여 곧 휴지가 되니, 이 뒤로는 역시 호조와 병조의 예에 의거하여 회안을 마련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1일 무술

김시찬(金時粲)을 승지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권적(權𥛚)을 판의금부사로, 홍봉한(洪鳳漢)을 병조 참판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교리로, 윤동성(尹東星)을 설서로, 이유신(李裕身)을 대사간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지평으로, 권항(權抗)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경자

박사창(朴師昌)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의금부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이때에 죄수의 국문을 살피는 일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김상적(金尙迪)을 동의금부사로 제수하였다. 박지창(朴枝昌)의 공사(供辭)를 들여오도록 명하였는데, 그의 공초(供招) 내용이 노여움과 감정이 있어 질투심으로 남을 모함했다고 하였으니, 박성원(朴盛源)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때에 박성원이 차대할 때에 아뢴 ‘휼침(恤忱)’ 두 글자를 숨기고자 하여 ‘고침(苦忱)’으로 고쳐서 기주관(記注官)에게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영의정 김재로가 이를 주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아뢴 바를 비록 한 마디나 반 글자라도 어찌 감히 사사로이 고치겠는가? 아뢴 말이 눈에 거슬리는 것을 사람마다 모두 고치려고 생각할 터인데, 사관 또한 머리를 숙여 그것을 따른단 말인가? 주서(注書)는 잡아다 처분하고 승지는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임인

맹산(孟山)·삼수(三水)·갑산(甲山)에 눈이 내렸고, 구성(龜城)·강계(江界)·용천(龍川)에는 서리가 내렸다.

 

교리 김선행(金善行)이 상서하여 여덟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큰 효도를 주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예지(睿志)를 넓히는 것이며, 셋째는 기호(嗜好)를 버리는 것이고, 넷째는 용지(容止)를 삼가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강독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근습(近習)을 엄하게 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현덕(賢德)을 높이는 것이고, 여덟째는 천위(天位)를 어렵게 여기는 것이니, 후하게 비답을 내리고 원서(原書)는 궁중에 머물러 두도록 하였다.

 

4월 27일 갑진

정언 권항(權抗)이 상서하여 큰 뜻을 세우는 것과 민은(民隱)을 살피는 것과 현명한 신하를 친근히 할 것 등의 세 가지 일을 진달하니, 우익한 비답을 내렸다.

 

4월 29일 병오

서종급(徐宗伋)을 홍문관 제학으로, 조명채(曹命采)를 대사간으로, 권적(權𥛚)을 좌참찬으로, 이수덕(李壽德)을 장령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이수관(李壽觀)·김한로(金漢老)를 지평으로, 이득종(李得宗)·유한소(兪漢蕭)를 정언으로, 이규채(李奎采)를 수찬으로 삼았다.

 

황단(皇壇)의 의궤(儀軌)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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