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9권, 영조 25년 1749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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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신

형조에서 아뢰기를,
"액례(掖隷) 김여주(金麗胄)가 술에 취한 채 본조(本曹)에서 소란을 피워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청컨대 가두어서 치죄(治罪)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일 기유

충청 감사 이일제(李日躋)가 서맥(瑞麥)을 올렸으나 물리쳤다. 처음에 청주(淸州) 어느 보리밭에 두어 줄기의 보리가 있었는데, 옆에 있는 이삭과 어울어져서 혹 두 갈래 같기도 하고 혹은 세 이삭 같기도 하였으므로 목사 김원택(金元澤)과 도신(道臣) 이일제가 특이한 상서라고 여겨 궤짝에 넣어서 올리면서 또 말하기를, "홍무 3년(洪武三年)093)  에 섬서성(陝西省) 보계현(寶鷄縣)에 보리 이삭이 두 갈래로 익은 상서로움이 있었는데,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고 홀연히 이를 우리 성상의 올해 오늘에 효험을 나타냈으니, 천시와 인사의 감응이 우연이 아님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대개 이해에 임금이 고황제(高皇帝)를 함께 대보단(大報壇)에 제향하였기 때문에, 이 일제가 이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아양을 부려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었다. 이에 승지 김시찬(金時粲)이 말하기를,
"설령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상서라 하더라도 성명(聖明)의 세대에 귀중하게 여길 바가 아니니, 물리치고 받지 않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이어서 이일제를 추고하고, 보리 이삭과 장문(狀聞)은 도로 내려 보내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판결사 이연덕(李延德)이 글로써 덕을 밝히고, 검소함을 숭상하며, 인재를 등용하는 등의 도리를 진달하자, 왕세자가 예사 하답을 하였다.

 

임금이 약방(藥房)에 입진(入診)하기를 명하고, 의관(醫官) 김수규(金壽煃)에게 맥의 증후를 물었으나 김수규가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김수규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함이 부럽다."
하니, 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 무슨 하교입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세도(世道)는 변괴가 너무 많아 내가 듣지 않으려고 한다."
하고, 인하여 탄식하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인재를 수용하겠는가?"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비록 의관으로 말할지라도 그중에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마는, 전조(銓曹)에서 목민(牧民)하는 관원으로는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관으로서 읍재(邑宰)로 나간 자가 과연 한 경내의 백성들의 질병을 모두 치료하겠는가?"
하자, 김상로가 대답이 없었다. 아! 대신(大臣)이 사람으로서 임금을 섬길 적에 임금이 물음이 있으면 일찍이 문학과 재유(才猷)가 있는 자를 하나도 추천하지는 못하고 전조에서 의관을 수용하지 못한 것으로 책임을 지우고자 하였다. 수령의 임무는 그 선임이 매우 중대하니 애당초 도규(刀圭)094)  의 천한 자에게 공로로서 상을 주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이런 재상으로서 이런 정치를 행하니 인재가 세상에 쓰임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땅하다.

 

태묘(太廟)에 제기장(祭器欌)을 만들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사전(祀典)의 중요함이 제기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태묘에 제기를 간수하는 곳이 매우 불경하였다. 금번 황단의 제기장은 진실로 사리에 합당하였으니 한결같이 이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4일 신해

묘시(卯時)에 해 아래 좌편에 극(戟)이 있었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갔는데, 장차 단오제를 행하고자 함이었다. 전알(展謁)과 봉심(奉審)을 마치고 숙묘(肅廟)의 영정 앞에 이르러 엎드려서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5월 5일 임자

임금이 빠른 걸음으로 전내(殿內)에 나아가 단오제 행하기를 의식대로 거행하고, 돌아올 때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제택(第宅)을 지나며 들렸다.

 

5월 9일 병진

유성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 동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릿대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문화현(文化縣)에 누리가 발생하여 밀·보리를 모두 갉아먹었다.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정훈(政訓)》을 읽도록 명하고 세자로 하여금 시좌(侍坐)하여 듣도록 하였는데, 증자(曾子)의 어머니가 북을 내던졌다는 일을 강론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능히 다른 날에 참소하는 말로 북을 내던지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감히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어서 두루 여러 조목을 묻고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인군의 마음을 잃는 것이 오로지 분화(紛華)와 근습(近習)에 있으니 다른 날에 내가 내려다 볼 것이다."
하였다.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간책(簡策)에 쓰게 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다른 날에 원량이 오늘의 말을 하나하나 실천하지 못하거든 나이 젊은 여러 신하들은 내가 오늘 하교한 것으로 간하고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문수(朴文秀)가 어영 대장의 직위를 체임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세 번 어영 대장의 직임을 겸대(兼帶)하여 여섯 차례 고변(告變)을 당했으니 신의 정세가 진실로 또한 슬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이 나에게 훈장(勳將)을 체임하여 척신에게 주라고 권유하였으니, 경의 사면은 이것이 괴이한 일은 아니나 내가 실로 대신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임금에게 박문수의 어영 대장 직임을 바꾸어 홍봉한(洪鳳漢)에게 이수(移授)하라고 권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박문수가 스스로 편하지 못하여 사면하려던 것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다.

 

5월 10일 정사

경상도 창원(昌原)에 우박이 내렸고, 영덕(盈德) 등 열네 고을에 누리가 발생하였다.

 

5월 11일 무오

사헌부 【지평 김한로(金漢老)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일제(李日躋)가 서맥(瑞麥)을 부회(傅會)한 죄는 후원(喉院)의 가벼운 경계로써 그칠 수는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북병사 이의익(李義翼)은 일찍이 회령(會寧)에 부임하여 역얼(逆孼)로 정배(定配)된 이흥인(李興仁)과 정분이 친밀하여 데려다 관아에 두었으니 변방 사람들의 이목을 크게 놀랍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임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12일 기미

서종급(徐宗伋)을 형조 판서로, 정실(鄭實)을 응교로, 신위(申暐)를 필선으로, 서지수(徐志修)를 겸 보덕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보덕으로, 임순(任珣)을 문학으로, 이게(李垍)를 겸 문학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사서로, 원필규(元弼揆)를 충청 병사로, 이경철(李景喆)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5월 13일 경신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근일 소대(召對)에서 유신으로 하여금 《여사제강(麗史提綱)》을 읽도록 하였기 때문에 동궁 역시 보았다고 하는데, 사사로이 보는 것과 강론을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여사제강》을 보는 가운데 이단을 숭상한 곳과 기타 예가 아닌 일을 보고도 경계할 줄을 몰랐으니 진실로 민망하게 여길 만하다. 나는 이 책을 강론하지 않고 선정신(先正臣)의 《성학집요(聖學輯要)》와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진강(進講)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여사제강》 말편 별록(別錄)에 주자의 말을 잘못 기록한 것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는 송(宋)나라 사람인데, 어떻게 미리 고려가 망할 것을 알았겠는가? 이것은 곧 중국 사람이 고구려(高句麗)를 고려라고 일컬었으므로 여기에 잘못 기록한 것이다."
하고, 판본(版本)을 삭제해 버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의금부 당상을 인견하고 전 경성 판관 채경승(蔡慶承)을 충군(充軍)하고, 북병사 이의익(李義翼)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동국(東國)의 풍속이 4월 초8일에 관등(觀燈)을 하는데, 이날 밤에 이의익이 북병영(北兵營)에 있으면서 명령하여 마군·보군을 불러서 횃불을 들어 군사 조련을 행하니, 채경승이 때가 아니라고 여겨 도백(道伯)에게 논보(論報)하자, 이의익이 스스로 해명하고자 하여 채경승이 사사로운 감정을 갚으려 한다고 이르고 역마를 달려 신문(申聞)하였고, 또 당로(當路)에 가서 풀려나기를 빌어 도리어 채경승을 파직하도록 하였다. 김한로(金漢老)가 이의익을 파직하도록 청하기에 이르러 임금이 그가 채경승에게 편당을 들어 주장(主將)을 무함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채경승을 변경 먼 곳에 충군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의익 역시 잡아다 국문하여 조사하고 분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이제화(李齊華)·이유수(李惟秀)를 방면(放免)하도록 명하였으니, 일찍이 제향할 때의 집사(執事)로서 특별히 귀양간 자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는데, 교리 서지수(徐志修)가 아뢰기를,
"지난날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제택에 거둥하시어 밤 늦게 궁궐로 돌아오는 실수를 범하셨습니다."
하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리자, 서지수가 두려워 중지하였고 부교리 이응협(李應恊)은 곁에 있으면서 겁이 나서 떨 뿐이었다. 이어서 형조 참판 홍계희(洪啓禧)에게 살옥수(殺獄囚) 3인을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定配)하도록 처결하라고 명하였다.

 

5월 16일 계해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도록 명하였으니, 날씨가 몹시 더웠기 때문이었다.

 

해주(海州)의 선비 유태오(柳泰五)의 처 강씨(康氏)가 남편의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회보가 없었다. 유태오의 백부(伯父)가 읍교(邑校)에게 무고(誣告)를 입었고 판관(判官) 김광우(金光遇)가 그 사건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유태오가 백부에게 가서 안후를 살펴보았더니 김광우가 노여움을 옮겨 유태오를 장살(杖殺)하였다. 이에 강씨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면서 감사 엄우(嚴瑀)에게 호소하였는데, 엄우가 김광우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불문에 붙여두고 도리어 울부짖은 것으로 죄를 삼았으며, 인하여 유태오의 아비마저 가두었으므로 강씨가 하늘에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어찌할까? 여자란 남편을 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대궐 아래에 나아가 통곡하여 10일 밤낮을 그치지 않으니 보는 자들도 슬프게 여겼다. 이에 등문고(登聞鼓)를 두드려 진달하자 그것을 형조에 내렸는데, 판서 서종급(徐宗伋)이 아뢰기를,
"수령(守令)이 태(笞) 50대로 스스로 처단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법전인데, 사핵(査覈)을 행하여 상명(償命)을 하게 하면 크게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니 그만둠이 마땅합니다."
하고, 읍교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 다스리게 하니, 일이 마침내 정침되었다. 해서의 백성들이 강씨를 훌륭하게 여기고 서종급을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홍낙성(洪樂性)을 헌납으로 윤광찬(尹光纘)·송덕중(宋德中)을 지평으로, 이이장(李彛章)을 교리로, 황합(黃柙)을 겸 사서로, 신만(申晩)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5월 18일 을축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장령으로, 유건(柳謇)을 정언으로, 구성임(具聖任)을 한성 판윤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보덕으로 삼았다.

 

5월 19일 병인

능안군(綾安君) 이전(李槇)이 상서하여 효종과 숙종 양묘(兩廟)에 존호를 추상(追上)하도록 청하였는데, 대개 황단(皇壇)에 세 황제를 병향(幷享)한 일의 아름다움을 열성조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 끝에 동조(東朝)께서 48년을 모림(母臨)하셨으니 존호를 더하고 빨리 수상(壽觴)을 거행함이 마땅하다고 진달하자, 임금이 그 글을 들여오라고 하여 보고, 하교하기를,
"경신년095)  에 시호를 더 올려 융성한 덕을 빛나게 하였고, 계해년096)  에 두 글자 존호를 또한 이미 유양(揄揚)하였으니, 오늘의 일은 지난해의 일을 계술(繼述)하는 것이다.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어찌 다시 또 중한 예를 거행하겠는가? 자식된 자는 어버이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거늘 또 어찌 감히 우리 자성(慈聖)의 마음을 슬프게 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그 그림자를 살피기 원한다.’고 하였으니, 제방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 글을 도로 돌려주고 이 뒤로는 올리지 말라고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존호를 올리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聖人)도 방훈(放勛)·중화(重華)라고 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신원평(新垣平)이 아첨을 떨어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처음으로 중원(中元)이라고 고쳐서 일컬었고, 천보(天寶) 연간에 더욱 사치하여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마침내 존호의 잘못된 인습(因習)을 열었으니, 이로부터 밝은 임금과 현철한 임금도 이것을 면하는 이가 드물었다. 능안군이 글을 올려 존호를 청하자 임금이 이미 그 그림자를 살피고 제방을 엄하게 하라는 뜻을 밝게 보여 주었으니 매우 융성한 덕이었다. 종신(宗臣)은 책망할 것이 없으나 얼마 안되어서 중신(重臣) 원경하(元景夏)가 여러 번 상소하여 청하자, 대료(大僚)가 그것을 본받아 많은 관료를 거느리고 정청(庭請)에 이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능히 그 뜻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42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註 095] 경신년 : 1740 영조 16년.[註 096] 계해년 : 1743 영조 19년.
사신은 말한다. 존호를 올리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聖人)도 방훈(放勛)·중화(重華)라고 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신원평(新垣平)이 아첨을 떨어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처음으로 중원(中元)이라고 고쳐서 일컬었고, 천보(天寶) 연간에 더욱 사치하여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마침내 존호의 잘못된 인습(因習)을 열었으니, 이로부터 밝은 임금과 현철한 임금도 이것을 면하는 이가 드물었다. 능안군이 글을 올려 존호를 청하자 임금이 이미 그 그림자를 살피고 제방을 엄하게 하라는 뜻을 밝게 보여 주었으니 매우 융성한 덕이었다. 종신(宗臣)은 책망할 것이 없으나 얼마 안되어서 중신(重臣) 원경하(元景夏)가 여러 번 상소하여 청하자, 대료(大僚)가 그것을 본받아 많은 관료를 거느리고 정청(庭請)에 이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능히 그 뜻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고, 《여사제강(麗史提綱)》을 강하다가 공양왕(恭讓王) 조(朝)에 이르러서 강을 중지하고, 《여사제강》에 공양왕 이하의 판본(板本)을 태백산(太白山) 사고(史庫)에 보관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무릇 사초(史草)는 비록 제왕(帝王)의 높음으로도 감히 취해 보지 못하게 하여 그 한계를 지극히 엄하게 한 것은, 대체로 당시에 당연히 휘(諱)해야 할 바로써 후세의 사필(史筆)을 엄하게 하려는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강목(綱目)》은 종훈(宗訓)097)  이 즉위(卽位)하는 데에 그쳤고, 온공(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도 또한 공제(恭帝)에서 그쳤으며, 한통(韓通)098)  의 일은 후사(後史)로 부쳤으니, 선유(先儒)와 대현(大賢)의 그 뜻은 모두 일반이었다. 《여사제강》은 곧 유계(兪棨)가 지은 것인데,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고 운운한 것은 송사(宋史)의 뜻과 다름이 있다. 고치고자 하면 아마도 춘추 필법(春秋筆法)이 아닌 듯하고, 그냥 두고자 하면 후대(後代)의 왕이 된 자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것은 대의(大義)가 옛날에 드러났고, 정창(定昌)099)  을 서립(書立)한 것은 윤리(倫理)가 전조(前朝)에서 바루어졌으니, 비록 유계가 다시 태어나서라도 나의 말은 바꾸지 못할 것이다. 앞서 간행한 책은 지워 버릴 수 없고, 사고(史庫)에 간직해 둔 이미 인쇄된 것은 거두어 모아 세초(洗草)하면 이는 사체(史體)를 바루는 것에 불과하니 꼭 숨길 일도 아니며 꼭 금지할 것도 아니다. 사실(私室)에 있는 것을 다시 인쇄하도록 허락하여 그 전함을 넓히도록 하라."
하였고, 또 명하여 《여사제강》 서문(序文) 중에 ‘이적 금수(夷狄禽獸)’ 4글자를 고쳐 ‘윤강 부정(倫綱不正)’으로 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승조(勝朝)100)  를 말한 것이었다.

 

안변(安邊)의 전패(殿牌)101)  에 변고(變故)를 저지른 죄인 상인(尙仁)·찬적(贊迪)을 본도에 내려 보내어 정법(正法)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상위(象魏)102)  에 다는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알고 범하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다. 백성들이 만약 수령(守令)에게 피해가 없고 저들 무리가 일률(一律)에 빠지게 됨을 알았다면 아무리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 하더라도 어찌 이익이 없는 일을 해서 몸소 대벽(大辟)103)  을 범하겠는가? 지금 본도(本道)에서 정법(正法)하도록 한 것은, 이런 등속의 일은 관장(官長)에게 묻지 않고 단지 그 범인만 주벌(註罰)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아무리 권할 지라도 반드시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임금된 자가 백성을 위해 형벌을 그치게 하는 도리이다."
하였다. 뒤에 상인 등을 본도 노적(孥籍)하고 파가 저택(破家豬澤)104)  하는 형률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5월 20일 정묘

대신과 금오 당상이 구대(求對)하였는데, 하교 하기를,
"내가 현기증이 있어서 상접(相接)하기 어려우니, 알고자 하는 것을 물어서 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아뢰기를,
"국문을 한 죄수로서 이미 결안(結案)이 된 자가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이미 형벌의 도리를 잃었고, 본도에 보내서 정형(正刑)하도록 하는 것은 경중의 질서를 잃은 것입니다. 상헌(常憲)을 지키는 것이 합당한데 어찌 종전에 없었던 규식을 처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왕부(王府)로 하여금 즉시 형률을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오로지 백성을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하교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또 손수 쓰신 하교를 봉하여 내리면서 이르기를,
"원량(元良)이 나이 어리나 그가 하는 바를 보니 두루 깨달아 환희 알게 된 것이 많다. 내가 마음이 번거롭고 열기가 오르며 현기증이 일어남이 그치지 않으니, 지금 만약 조용히 조섭하지 않으면 앞으로 의원도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비국(備局)의 차대(次對)는 처음 하교에 의거하여 나에게 품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신과 유신이 구대(求對)하여 분부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5월 23일 경오

유학(幼學) 이붕해(李鵬海)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효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간으로, 신경(申暻)을 장령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지평으로, 조중회(趙重晦)를 겸 사서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가서 동궁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유시(諭示)하기를,
"너에게 대리를 명한 것이 너의 일신을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고(勞苦)를 나누고자 함인데, 어찌하여 매사를 반드시 나에게 품의하는가? 좌상이 너의 사부(師傅)인데 근자에 매사를 반드시 품의할 것으로 너에게 권유한다고 하니 이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대리를 한 뒤에 대신(大臣)의 도리는 나를 보면 규모를 세워 동궁에게 편안함을 주라고 권유하고, 너를 보면 표저(表著)한 정사를 행하여 대조(大朝)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라는 것으로 고한다면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너를 보면 반드시 대조께 품의하라고 이르고, 나를 보면 어찌해서 큰 일을 동궁에게 맡겨 주어 구속(拘束)하려 드냐고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너는 앞으로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대신이 너를 구속하는 것이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5월 25일 임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일찍이 안변(安邊)의 영풍(永豊)에 사(社)를 따로 한 고을에 설치하고 삼방(三防) 땅에 성(成)을 쌓는 의논이 있었는데, 함경 감사 이정보(李鼎輔)가 안변부(安邊府)는 치소(治所) 앞에 큰 시내가 있어 장차 무너지고 잠길 우려가 있으므로 군영(軍營)에 옮겨 설치하도록 신청하였으나, 이 지역이 과연 영풍·삼방을 제어할 수 있을지 그 적실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안변부를 옮겨야 할 형편을 다시 새로온 방백(方伯)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니, 김재로가 다시 말하기를,
"안변 고을을 옮기는 것과 영풍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의 편리 여부(與否)를 모두 다시 살펴 장문(狀聞)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판돈녕부사 이주진(李周鎭)이 졸(卒)하였다. 이주진은 고 좌상 이집(李㙫)의 아들인데, 사람됨이 충후(忠厚)하고 주장하는 의논이 화평(和平)하므로, 임금이 그 때문에 믿고 맡겼으며, 임종(臨終)에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는 경계를 남겼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슬퍼하기를 마지 않았고 특별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조회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이주진과 같이 당심(黨心)이 없는 자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5월 26일 계유

박치문(朴致文)을 헌납으로, 유건(柳健)을 정언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수찬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지평으로 삼았다.

 

옹주(翁主)의 혼인에 자초(紫草)105)  로 물들인 화촉(華燭)을 쓰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주홍(唐朱紅)으로 물들인 것을 사용하여 공가(貢價)가 몇배나 되었으므로, 임금이 이는 외면 치레[浮文]라고 하여 고쳐서 규식을 만들었다.

 

5월 29일 병자

임금이 지금부터 세초 세초 문서(歲抄文書)106)  를 동궁에 들이라고 명하니, 승지 남태온(南泰溫)이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므로, 옥당 서지수(徐志修)가 도로 거두기를 권유하자,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노하여 남태온·서지수를 체직(遞職)하고, 오위 장(五衛將) 박선(朴銑)으로 가승지(假承旨)를 삼도록 명하였으며, 마침내 조회를 보지 않았다. 이 때에 임금이 횟배[蛔蟲]를 앓아 복약(服藥)하던 중이었는데, 이것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내가 한나라 고조(高祖)를 본받고자107)   한다."
하고, 다시 박선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엄한 하교를 내렸는데, 군부(君父)를 협박한다는 등의 하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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