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2일 무인
약원(藥院)에서 4차례에 걸쳐 탕제(湯劑) 올리기를 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고, 명소(名召)를 바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수(傳授)하였다. 이튿날 다시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리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6월 4일 경진
임금이 비로소 여러 신하들에게 입견(入見)하라고 명하자, 영의정 김재로·좌의정 조현명이 사례(謝禮)하기를,
"신 등이 죄가 있으면 주륙(誅戮)을 하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와 같이 격노하여 번뇌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리어 말하기를,
"지난 해에 동궁에게 명하여 계복(啓覆)의 일을 대행(代行)하게 한 적이 있었다. 세초(歲抄)는 이것에 비교하면 오히려 가벼운데 다투어 고집을 하니 역시 이상하지 아니한가?"
하니, 옥당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근래 대소 신료들의 마음이 해이함이 없기 때문에 혹시 뜻밖에 하교가 있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쟁논(爭論)을 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이장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는데, 조현명은 말하기를,
"유신의 진달한 바는 사사로운 이해가 아닙니다."
하였다. 김재로는 말하기를,
"금년부터 세초 공사(歲抄公事)는 동궁에게 들이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어찌해서 나에게 들여오고 지금 곧 변경을 하려는가? 지난번 박선(朴銑)이 안고 들어온 세초 문서(歲抄文書)는 바로 옥당에서 지휘(指揮)한 바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하니, 수찬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옥당과 승정원은 늘 서로 관섭(關涉)하니 국가의 모든 일을 왕래하며 통의(通議)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것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꾸짖고 책망하기를 심하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이 없다가 비로소 전날의 하교 중에 군부(君父)를 협박했다는 글귀는 고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이르기를,
"전날 밤에 가승지(假承旨)로 하여금 불러주고 쓰게 하던 즈음에 한림 채제공(蔡濟恭)이 두 차례나 기침소리를 내면서 아뢰려고 하다가 감히 지위를 뛰어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있었으니, 나이 젊은 신진에게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어찌 직위가 낮다고 하여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아마(兒馬) 1필을 하사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세초 및 차대는 나라의 큰 일이다. 임금이 비록 동궁에게 대리를 명하였으나, 병사(兵事)와 형벌(刑罰)의 중한 임무는 모두 임금의 결재를 취하도록 허락을 하였다면 그것은 임금에게 들어가서 품달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한데, 갑자기 위노(威怒)가 진동(震動)하여 오래도록 정사를 보지 않았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매우 크다. 저 대신인 자가 능히 바른 말로 바로잡지 못하고 사죄(謝罪)를 하면서 마음이 풀리기를 구하였으며,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진실로 베임을 면하지 못하겠으나 그 역시 경솔히 이런 말을 진달하여 인주(人主)의 모멸하는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42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세초 및 차대는 나라의 큰 일이다. 임금이 비록 동궁에게 대리를 명하였으나, 병사(兵事)와 형벌(刑罰)의 중한 임무는 모두 임금의 결재를 취하도록 허락을 하였다면 그것은 임금에게 들어가서 품달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한데, 갑자기 위노(威怒)가 진동(震動)하여 오래도록 정사를 보지 않았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매우 크다. 저 대신인 자가 능히 바른 말로 바로잡지 못하고 사죄(謝罪)를 하면서 마음이 풀리기를 구하였으며,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진실로 베임을 면하지 못하겠으나 그 역시 경솔히 이런 말을 진달하여 인주(人主)의 모멸하는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정묘년108) 에 하교한 결장(決杖)하는 법을 고쳐서 시임(時任) 시종(侍從) 이외에 일찍이 시종을 지낸 자는 장형(杖刑)을 면하도록 허락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재로의 아룀을 따른 것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조사(朝士)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은 어느 때에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하나 염치를 기르고 조정을 높이는 뜻은 아니며, 더구나 시종의 신하는 가장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 되니, 시임과 시임이 아닌 것으로서 다르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정묘년의 제도는 약간 고풍(古風)에 가까운데 김재로가 갑자기 고치도록 청하였으니, 그 역시 생각하지 않음이 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42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108] 정묘년 : 1747 영조 23년.
사신은 말한다. 조사(朝士)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은 어느 때에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하나 염치를 기르고 조정을 높이는 뜻은 아니며, 더구나 시종의 신하는 가장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 되니, 시임과 시임이 아닌 것으로서 다르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정묘년의 제도는 약간 고풍(古風)에 가까운데 김재로가 갑자기 고치도록 청하였으니, 그 역시 생각하지 않음이 심하였다.
정언 유한소(兪漢蕭)가 상서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도록 힘쓰고, 실상을 힘쓰도록 하라는 것으로 끝을 맺었으며, 중간에 말하기를,
"징토(懲討)를 행하지 않아 군무(君誣)를 설욕할 수 없으므로 삼사(三司)가 합사(合辭)하여 청한 것은 공의(公議)임을 볼 수 있는데, 일종의 임금을 잊어버리고 역적을 두호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감히 번갈아 나와서 공론을 정지시켰으니, 모두 엄히 배척함을 더해야 마땅합니다."
하였고, 또 논하기를,
"삼전(三銓)이 탄핵을 만나고도 공무를 집행하는 것은 스스로 염치를 잃었고, 옥당이 미치광이[狂疾]라는 논박을 당하고도 염연(恬然)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있으면서 남들의 비웃음과 꾸짖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니 풍습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만약 완급(緩急)이 있으면 앞으로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였는데, 대개 심성진(沈星鎭)·이응협(李應恊)을 지목한 것이었다. 하답하기를,
"진달하여 경계함이 매우 간절하나, 말단의 일은 곧 시끄러움을 일으킬 단서가 되니 내가 깨닫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세자에게 말하기를,
"너의 하답은 역시 잘한 것이지만 엄숙하게 지켜서 잃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마침내 유한소의 직을 체임하도록 하였다.
6월 5일 신사
승지 박선(朴銑)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를 본받겠다는 하교는 내가 어찌 침환(枕宦)109) 을 본받아 뭇 신하를 거절함이겠는가? 다만 복약(服藥)을 하지 않겠다고 일렀을 뿐이다. 대신이 잘못 인식하고 고치기를 청하여 임금의 허물을 가리고자 하다가 도리어 드러냈으니, 속담에 이른바 ‘남의 눈물을 닦으려 하다가 도리어 코를 상한다.’는 격이다. 한나라 고조를 본받겠다는 하교는 대신은 이미 들어서 알지만 궁밖에 사람들이야 어찌 능히 모두 알겠는가? 세도(世道)가 경박[澆澆]하여 내가 한 마디 말을 하면 문득 잘못 인식하여 전파하고, 세상에서는 역시 말을 만드는 자가 있으니, 모름지기 소정묘(少正卯)110) 에게 쓴 형률을 적용하여야 곧 나라꼴이 될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은 모든 백성의 표본[極]이다. 한번 말을 내면 사방이 전송(傳誦)하니 다만 나에게 있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말하고 침묵(沈默)함에 있어 그 마땅함을 얻으려고 할 뿐이다. 비록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어긋나더라도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더 힘써야 할 뿐인데, 어찌 잗달게 스스로 변명하듯 할 필요가 있겠으며, 중률(重律)을 써서 남을 제어하려 하는가? 더구나 일이 대신들의 잘못 들은 데서 일어나 격노하게 되었는데도 또한 한 마디도 그 본래의 일을 개진(開陳)함이 없으니, 그것이 과연 어리석고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묵묵히 용납함을 취해서 그런 것인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다.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43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109] 침환(枕宦) : 환자(宦者)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는 말로,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병으로 금중(禁中)에 누워서 외부 인사의 출입을 일체 막았으므로 신하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다가 번쾌(樊噲)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고조가 환자를 베고 누워 있으므로 번쾌와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임. 여기서는 임금이 환자를 베고 누운 그런 것을 본받아 여러 신하들의 입시를 거절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 말임.[註 110] 소정묘(少正卯) :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의 이름. 소정묘가 천하의 5대악(大惡), 즉 마음이 거슬러서 위험하고, 간사함을 행하며 고체(固滯)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변명하고, 추악한 것을 기억하며, 박식하다하고, 그른 것을 쫓아서 번드르하게 함을 겸유(兼有)하여 나라 정치를 어지럽히므로 공자가 섭정(攝政)할 당시 주살(誅殺)했음.
사신은 말한다. 임금은 모든 백성의 표본[極]이다. 한번 말을 내면 사방이 전송(傳誦)하니 다만 나에게 있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말하고 침묵(沈默)함에 있어 그 마땅함을 얻으려고 할 뿐이다. 비록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어긋나더라도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더 힘써야 할 뿐인데, 어찌 잗달게 스스로 변명하듯 할 필요가 있겠으며, 중률(重律)을 써서 남을 제어하려 하는가? 더구나 일이 대신들의 잘못 들은 데서 일어나 격노하게 되었는데도 또한 한 마디도 그 본래의 일을 개진(開陳)함이 없으니, 그것이 과연 어리석고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묵묵히 용납함을 취해서 그런 것인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다.
헌납 박치문(朴致文)이 상소하여 지난날 승지와 옥당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였음을 바로잡으려고 하니, 임금이 그의 직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6월 7일 계미
임금이 친히 향(香)을 선정전(宣政殿) 월대(月臺)에 전하고, 승지를 보내어 명릉(明陵)111) 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내일이 바로 숙고(肅考)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매년 이날에 임금이 선정전 행랑 아래에 앉아 밤을 지새웠는데, 치재(致齋)하는 뜻이었다.
6월 9일 을유
임금이 진연(診筵)에 나아가 약원 제조 김상로(金尙魯)에게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이르기를, ‘만방(萬方)의 보양(補養)이 모두 거짓이니, 단지 마음을 맑게 함에 있으며 이것이 긴요한 법칙이다.’ 하였는데 지금 조정의 형상이 화평하여 다툼이 없다면 이것은 나의 몸을 보호하는 큰 요결(要訣)이다. 내가 세도(世道)에 상하여 거의 발광(發狂)할 지경인데 꾹 참고서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하니,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원컨대, 임금께서는 세도를 진압(鎭壓)하소서."
하였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오직 임금께서 진압을 하기 때문에 세도가 오히려 이만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박문수에게 말하기를,
"동궁이 유한소(兪漢蕭)에게 하답한 글은 잘하였다."
하니, 대답하기를,
"동궁은 나이 아직 어리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그 강령(綱領)을 총람(總攬)하시고 나이 장성하기를 기다려서 완전히 맡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당습이 곪아서 금방 터질 것 같으니 조리하여 보호하는 도리를 내가 제조에게 바란다.
하자, 김상로는 말하기를,
"터지지 않고서 스스로 편안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도승지로, 신위(申暐)를 헌납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지평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정언으로, 조중회(趙重晦)를 교리로, 유우기(兪宇基)를 수찬으로, 정실(鄭實)을 보덕으로, 안윤행(安允行)을 필선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좌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늦게야 비로소 지난날 경연에서의 하교를 들은즉 ‘신 등을 꾸짖은 이유는 잠시 명을 기다리는 것 같이 하다가 도리어 다시 코를 어루만지고[抆鼻] 등연(登筵)을 하였다는 것으로 하교하였다.’고 운운하니 이와 같은 데도 오히려 얼굴을 내밀고 반열(班列)에 나선다면 코를 어루만지고 등연한 실수는 거듭 방자한 죄가 됩니다."
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대개 박선(朴銑)이 ‘콧물을 씻다가 코를 상한다.’는 하교를 잘못 전달하여 대신이 코를 어루만지고[抆鼻] 등연했다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속담에 이른바 ‘부끄러움을 모르고 함부로 나아간다.’는 것은 코를 어루만진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김재로 등이 이로부터 집에 들어 앉아 나오지 않은지 달포가 되었다.
6월 12일 무자
청나라 사신 부도통(副都統) 소호제(蘇呼濟)와 내각 학사(內閣學士) 숭수(嵩壽)가 와서 그를 태후(太后)를 존숭(尊崇)하고, 후궁(後宮)을 귀비(貴妃)로 봉하며, 노후(魯后)를 쫓아가서 잡고 남만(南蠻)을 평정한 공을 통보하자,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서(勅書)를 맞이하고 먼저 궁궐로 돌아와 두 사신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는데, 임금이 은근(慇懃)히 위문하고 한참 있다가 파하였다. 처음에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완악하고 거만하여 칙서를 따라 궁전 뜰에 올라와서 두루 보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였다. 부사(副使) 숭수는 더욱 패만(悖慢)하여 계속 주목(注目)하며 몰래 임금의 위의(威儀)를 보다가 얼마 뒤에 얼굴을 붉히고 기가 꺾여 스스로 차츰 그쳤는데, 임금의 천자(天姿)가 영특(英特)하고 동지(動止)가 엄중하여 저절로 오랑캐의 절복(折服)한 바가 된 것이 이와 같음이 있었다.
6월 13일 기축
청나라 칙서를 나라 안에 반교(頒敎)하였다.
임금이 어가(御駕)로 관소(館所)에 나아가서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청나라 사신들이 잔치를 대접 받고 기뻐하였으며 또 처음으로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가 저들에게 어찌 잔치를 열어 대접할 뜻이 있겠는가? 다만 거짓으로 대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옛날 숙묘(肅廟)께서도 항상 풍우를 피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교외(郊外)에 나아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여 능히 그 환심을 샀으니,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만 그것을 할 뿐이다."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관저(館邸)에 머무른지 5일 만에 사례(謝禮)하고 돌아가자, 임금이 다시 교외에 나아가 전송을 하였는데, 장전(帳殿)에 임어(臨御)하여 큰 잔치를 베푸니 청나라 사신들이 다시 감동하며 기뻐하였다. 좌의정 조 현명이 말하기를,
"옛날에 청나라 사신은 위의(威儀)를 갖추지 않아 심지어는 교자(轎子)위에서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자도 있었는데 요즈음에는 자못 가다듬고 경계를 합니다. 다만 재물을 탐하여 토색(討索)이 한정 없으며 그들의 벼슬은 모두 가짜 직함(職啣)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 사신이 탐학하여 마침내 나라를 망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당시에 응접(應接)하던 의절(儀節)이 보존된 것이 있는가?"
하니,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지금은 모두 없습니다. 신은 호조의 지칙은(支勅銀)112) 으로 4, 5천냥을 헤아려서 쓰면 일을 마칠 수 있는데, 구례(舊例)에는 반드시 1만 냥을 썼으니 모두 중간에서 소모되어 없어졌습니다."
하였다.
6월 14일 경인
임금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소견하였는데, 박문수가 문신 한제(韓濟)의 쌀 구걸하는 일을 우러러 진달하자, 임금이 불쌍히 여겼다. 부제조 홍봉한(洪鳳漢)이 인하여 강경과(講經科) 문신 및 무과(武科)의 헛되이 늙는 폐단을 아뢰자,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각별히 조용(調用)하도록 하고, 호조·형조·공조 세조의 낭관(郞官) 1원을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문과(文窠)로 만들도록 정식(定式)을 삼게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 조정에서 인재를 쓰는 것이 과목(科目)으로서 해마다 문과 몇 10명과 무과 여러 백명을 취하여, 한정된 수가 있는 빈자리로 한정이 없이 요구하는 사람에게 응하고, 더 나아가 벼슬을 제수함에 있어 재능으로서 아니하고 오로지 지벌(地閥)로만 국한하니 더욱 어찌 균등함을 얻어서 원망이 없겠습니까? 요(要)는 과거(科擧)를 드물게 보이고 쓰기를 오직 그 재능으로써 하는 데 있으니, 과거를 드물게 보이면 사람이 적고 재능으로 등용하면 재능이 없는 자는 감히 희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책이 이에서 나오지 않고 한갓 양전(兩銓)에서 조용(調用)하기를 신칙하고 세조의 낭관 한 자리로서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자료를 삼으니 1천·1백의 홍패(紅牌)를 가진 자를 세 자리로서 다 메꿀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재상이 나라를 운영하는 계책의 좋지 못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을 진하 겸 사은사로, 이창의(李昌誼)를 부사로, 신위(申暐)를 서장관으로, 이천보(李天輔)를 예문관 제학으로, 조돈(趙暾)을 응교로, 신회(申晦)·김상철(金尙喆)을 부교리로, 조운규(趙雲逵)를 수찬으로, 김선행(金善行)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17일 계사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木星)을 둘렀다.
윤근(尹勤)을 지평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교리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제학으로, 황합(黃柙)을 헌납으로, 임석헌(林錫憲)을 부교리로, 김양택(金陽澤)을 겸 사서로, 송영중(宋瑩中)을 설서로 삼았다.
6월 19일 을미
임금이 유신을 불러서 《성학집요(聖學輯要)》와 태극도(太極圖)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당론(黨論)이 성한가 성하지 아니한가?"
하니, 옥당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당론은 본래 조정의 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 책려(策勵)하여 통렬히 금지하지 아니한다면 다른 날의 걱정은 오늘날의 걱정보다 더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양택(金陽澤)·이이장(李彛章)을 부교리로 삼았다.
6월 23일 기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처음으로 정사(呈辭)를 올렸는데,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하답(下答)을 지제교로 하여금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임금이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소상(小祥)이었다. 임금이 그 대문에 이르러 남여(藍輿)에서 내려와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배종(陪從)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오륜(五倫)도 없는가? 모름지기 나에게 하루의 여가라도 허락하라."
하고, 임금이 화평 옹주를 생각하는 슬픔이 심하여 자주 그 집에 거둥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밤이 깊어 문을 닫았을 것이니 군병(軍兵)이 더러 끼니를 거르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밥을 전달하도록 하고, 그 성(城) 밖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군문에서 밥을 먹인 뒤에 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5일 신축
박문수(朴文秀)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6월 26일 임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6월 27일 계묘
비로소 종묘(宗廟)의 제기장(祭器欌)을 만들어 협실(夾室)에 두고 제기를 간직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제기를 간직하는 곳이 깨끗하지 못하므로 황단(皇壇) 및 사직(社稷)에 장롱을 만들어 제기를 간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종묘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으니, 임금이 선조(先祖) 받들기에 정성을 다하여 일마다 공경을 이룸이 이와 같았다. 이 때에 호조 판서 박문수가 아뢰기를,
"궁전(宮殿) 뜰에 옛날에 깔았던 벽돌이 없어진 것이 많으므로 지금 수보(修補)해야 마땅한데, 전중(殿中)에는 감히 사람을 시켜서 계적(計摘)113)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 제도에 아무리 시어전(時御殿)이라 할지라도 역시 계적(計摘)하여 수리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벽돌이 없어진 것은 훔쳐간 자가 있을 것인데, 형률에 궁전의 벽돌을 훔쳐간 자에 대해서는 일률(一律)을 적용한다 하였기 때문에 찾아 내고자 하지 않는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승지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의 습진 단자(習陣單子) 및 각도의 습조 장문(習操狀聞)은 일이 군사를 동원(動員)하는데에 관계가 되는데, 관습에 젖어 왕세자(王世子)에게 입달(入達)하니, 실로 사체(事體)를 소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무릇 군정(軍政)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입계(入啓)하도록 하고, 내외의 중일(中日)도 또한 상(賞)을 주는 것과 급제(及第)를 내리는 데에 관계되며, 각 군문의 중군(中軍)·장관(將官)·종사관과 포도청 종사관과 각사(各司) 관원의 단부(單付)114) 및 군함 단자(軍啣單子)도 또한 관직의 제수에 관계되니 입계(入啓)함이 마땅합니다. 군문 대장(軍門大將)의 인입(引入)한 자에 대하여 청패(請牌)115) 하는 계사(啓辭)도 역시 융정(戎政)에 관계되며, 한림 소시(翰林召試)도 일이 시장(試場)에 관계 되니 대조(大朝)께 품의하여 재결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정품(政稟)116) 도 으레 대조께 입계해야 하는데 혹 급할 때에 임하여 변통해서 차출하게 되면 의망 단자(擬望單子)를 곧바로 동궁에게 들이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변통할 일은 비록 동궁께 청하지마는 차출하는 것은 대조께 품달해야 마땅합니다. 서울과 외방의 관원을 더러는 체파(遞罷)를 청하고, 더러는 차대(差代)를 청하며, 더러는 환차(換差)를 청하는 것은 달하(達下)117) 한 후에 차출하는 1관(款)을 본원(本院)으로부터 단거(單擧)118) 로 계품(啓稟)하는 일로 규식을 정하여 시기를 당하여 착오를 저지르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28일 갑진
임금이 친히 의릉(懿陵)119) 기신(忌辰)에 쓸 향(香)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전하였다.
6월 29일 을사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선의 왕후(宣懿王后)120) 에게 의리로서는 비록 수숙(嫂叔)이나 은혜는 모자(母子)와 같다. 지난날 명릉(明陵) 기신(忌辰) 때에 밤을 지새우며 진전(眞殿)에서 재거(齋居)하였는데, 지금 재거하는 당(堂)은 곧 예로부터 여러 왕후의 신위(神位)를 받들어 모신 곳이며, 경술년121) 대상(大喪)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서 재거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들이 단지 당론만 좋아하고 독서할 줄은 모른다. 윤동도(尹東度)가 일찍이 나에게 학교를 일으키도록 권하였는데, 나는 이미 노쇠하였으니 이 일은 역시 원량(元良)에게 희망을 가진다."
하고, 이어서 훈계(訓誡) 수백 마디를 쓰도록 명하여 동궁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다른 날 이 글을 보면 반드시 흥기하여 감동하고 분발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6월 30일 병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세 차례나 정고한 뒤에 연이어 사단(辭單)을 올리니,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고 들어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무예 별감(武藝別監)이 본조(本曹)에서 소란을 일으킨 일을 초기(草記)하여 형배(刑配)하도록 하였는데, 일전에 별감의 무리들이 차비(差備)122) 내의 분부라고 일컬으며 한 서리(胥吏)를 붙잡아다가 사사로이 발을 묶고 거꾸로 매달아 방자하게 마구 때렸으니, 이것을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당 별감(別監)을 이름을 물어서 잡아 가두고 죄를 처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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