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일 정미
임금이 태묘(太廟)에 배알하였다.
7월 4일 경술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야대(夜對)를 행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다가 ‘사물(事物)에 대응(對應)하여 이를 마치고 나면 나는 옛과 같다.’는 귀절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마음속에 얽어매어 두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다시 사량(思量)을 더하여 뉘우치고 깨우친다면, 이 또한 무익(無益)한 것은 아니다. 어찌 한번 지나치고 즉시 잊어버리는 것만을 잘하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대응할 때에는 마땅히 성찰(省察)하여야 할 것이지만 또한 크게 구체(拘滯)되게 해서는 옳지 않다. 그러기에 간략하게 제시(提撕)한다고 이르지 않았던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조반(早飯)을 먹지 아니하며 먹을 때를 당하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서 들이도록 한다. 지금 사람들은 이불과 요를 깔아 놓은 자리에서 죽(粥)이나 음식을 먹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원량(元良)도 이러한 습관이 있기에 내가 일찍이 이를 경계하였다."
하였다. 승지 윤광의(尹光毅)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한림(翰林)이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하지 않은 것을 특별히 포상(褒賞)하시어 뭇 신하들이 놀라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착한 말로써 직간(直諫)한다면, 전하(殿下)께서 어찌 권장하여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근자에 새로운 영갑(令甲)이 있어서 금직자(禁直者)로 하여금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아마도 태평(太平)한 때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하교(下敎)는 특별히 그 당시만 개연(慨然)히 여긴 것이 아니었으며 그 폐단을 안 것은 오래다. 그러나 또한 왕자(王者)로서 대체(大體)를 굳게 잡아가야 하는 도리에 흠이 된다. 그 진달한 바가 가상하니, 그 하교는 특별히 정침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일을 마음속에 얽어매어 두지 않는 것은 존양(存養)123) 하는 공부이며 다시 상량(商量)을 더하는 것은 성찰(省察)하는 뜻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병행(幷行)하여야 하고 편벽되게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존심(存心)의 요령을 논하면서 간략하게 제시(提撕)한다고 하였으니, 그 뜻이 정밀하다. 장자(張子)가 맹자(孟子)의 ‘과화(過化)’에 대한 글을 잘못 풀이한 후부터 사상채(謝上蔡)124) 는 이어서 ‘습망(習忘)’의 병통이 있었는데, 지금 임금의 학문을 논한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조예(造詣)가 얕지 아니함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옥조(玉藻)125) 와 조복(朝服)을 갖추고 수라를 든다.’고 한 구절 아래 정주(鄭註)에 ‘음식(飮食)이란 몸을 기르는 것이므로 공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조복을 입었다.’고 하였다. 이제 임금이 행한 바가 암암리에 이 예(禮)와 합치하는 것이니, 또한 그 자질(資質)의 고명(高明)함을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44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123] 존양(存養) : 본심을 잃지 않도록 그 착한 본성(本性)을 기름.[註 124] 사상채(謝上蔡) : 송(宋)나라 사양좌(謝良佐)를 이름.[註 125] 옥조(玉藻) : 면류관의 상하에 드리운 장식.
사신은 말한다. 일을 마음속에 얽어매어 두지 않는 것은 존양(存養)123) 하는 공부이며 다시 상량(商量)을 더하는 것은 성찰(省察)하는 뜻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병행(幷行)하여야 하고 편벽되게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존심(存心)의 요령을 논하면서 간략하게 제시(提撕)한다고 하였으니, 그 뜻이 정밀하다. 장자(張子)가 맹자(孟子)의 ‘과화(過化)’에 대한 글을 잘못 풀이한 후부터 사상채(謝上蔡)124) 는 이어서 ‘습망(習忘)’의 병통이 있었는데, 지금 임금의 학문을 논한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조예(造詣)가 얕지 아니함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옥조(玉藻)125) 와 조복(朝服)을 갖추고 수라를 든다.’고 한 구절 아래 정주(鄭註)에 ‘음식(飮食)이란 몸을 기르는 것이므로 공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조복을 입었다.’고 하였다. 이제 임금이 행한 바가 암암리에 이 예(禮)와 합치하는 것이니, 또한 그 자질(資質)의 고명(高明)함을 볼 수 있다.
7월 6일 임자
화완 옹주(和緩翁主)가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下嫁)하였다.
7월 7일 계축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과 예조 판서 유엄(柳儼) 등에게 말을 내리고 도청랑(都廳郞) 조재민(趙載敏)에게 가자(加資)하였는데, 옹주혼 도감(翁主婚都監)으로 수고했기 때문이다.
윤득재(尹得載)를 승지로, 어석윤(魚錫胤)을 부교리로, 심성진(沈星鎭)을 강원도 관찰사로, 이기진(李箕鎭)을 동지 정사로, 윤득재를 부사로, 이만회(李萬恢)를 서장관으로, 이익원(李翼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11일 정사
헌부 【지평(持平) 이익원(李翼元)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에 종신(宗臣)의 집에 투서(投書)한 일은 실로 사첩(史牒)에 없는 요변(妖變)입니다. 인신(人臣)이 되어 이러한 일을 만났으면 마땅히 놀란 마음으로 뼈저린 아픔을 느껴 즉시 엄중하게 핵실하기를 청하는 것이 진실로 사람의 도리에 당연한데도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이 이를 여러 날 침묵하고 있다가 뒤늦게 발고(發告)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종신이 되어 이미 요적(妖賊)들의 삼조 설문(三條設問) 속에 들어 있으니, 법을 엄히 하고 화(禍)를 막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이증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따르지 아니하였다. 교리 이규채(李奎采)와 승지 윤광의(尹光毅)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조속히 대론(臺論)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익원(李翼元)이 오래도록 대직(臺職)을 행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 그의 말이 비록 지나쳤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가상(嘉尙)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였다. 이에 헌납 조중회(趙重晦)와 교리 신회(申晦)가 모두 상서하여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아니하였다.
7월 12일 무오
헌납 황합(黃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이 신하의 상(喪)에 임하는 것은 옛부터 그 예(禮)가 있었으니, 진실로 절도를 어기지 아니한다면 사람들이 누가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근일 귀주(貴主)의 상에 상일(祥日)이 임박하여 일곱 번이나 임하셨으니,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지수(徐志修)의 진계(陳戒)는 그 박직(樸直)함이 가상할 만하였는데도 갑자기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리시고 고신 3등(告身三等)의 율(律)을 경정(冏正)이 잡히게 되던 날에 겹쳐서 시행케 하셨습니다. 비록 성의(聖意)가 여러 신료들을 동칙(董飭)하시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중외(中外)에서는 은밀히 논의하고 있는데 전하(殿下)께서 성냄을 옮기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사람들에게 넓지 못함을 보이십니까? 박선(朴銑)은 용록(庸碌)한 한 무부(武夫)인데 가승지(假承旨)로 인연하여 진짜 승지가 되어 오래도록 승선(承宣)의 직임에 두니,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고 행로(行路)에서도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은 감히 그 잘못을 교정(矯正)하지 못하고 언관(言官)은 감히 그 실책을 바로잡지 못하니, 세도(世道)가 한심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는데, 임금이 황합의 상소를 보고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서지수는 본래 그 직책의 일로 인하여 죄를 얻은 것이니, 어찌하여 이에 유감을 품고 옮겼을 리가 있겠느냐? 그런데도 여러 신하들이 나에게 일마다 반드시 억탁(臆度)하고 굳게 지켜 변함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견디겠느냐?"
하고, 이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만약 이렇게 하여 마지 않는다면 신하의 형세가 날로 더욱 커질 것이다. 황합은 시골에 있는데 반드시 말을 만들어서 교사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그 소장을 되돌려 주고 관직을 체차하게 하였다. 부제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어제 대각(臺閣)의 상달에 대해 사경(四更)이 되어서야 비로소 답을 내렸으니, 품재(稟裁)로 연유하여 계체(稽滯)된 듯합니다. 이 뒤로는 마땅히 즉시 재유(裁諭)하시어 동궁(東宮)에게 대각을 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덕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념(留念)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영상(領相)이 올린 단자(單子)는 무엇 때문이냐고 물으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외간에서 전하는 말은 〈‘남의 눈물을 닦다가 도리어 코를 다친다[拭人涕而反傷鼻].’고 하신〉 문식(抆拭)의 하교에 연유된 것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오전(誤傳)인 듯하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제술(製述)하는 유생을 시험하고,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유생을 시민당(時敏堂)에서 시험하게 하였다. 강경(講經)에서 이의로(李宜老)를 취하고, 제술에서는 홍양한(洪亮漢)을 취하여,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7월 13일 기미
조재민(趙載敏)을 승지로, 이천보(李天輔)를 형조 참판으로, 신회(申晦)를 부교리로, 김선행(金善行)을 수찬으로, 조중회(趙重晦)를 헌납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7월 14일 경신
헌납 조중회가 상서하기를,
"이증(李增)의 죄(罪)는 연곡(輦轂)126) 의 아래에 둘 수가 없습니다."
하고, 교리 신회가 또 말했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내가 비록 쇠모(衰耗)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대신에게〉 ‘코를 닦으며[抆鼻]127) 등연(登筵)했다.’는 하교야 했겠는가?"
하였다.
7월 15일 신유
‘코를 어루만지며 등연하였다.’는 하교로 꾸며대어 남을 속였다 하여 그날 입시한 사관(史官)을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계해
약원(藥院)에서 입진하였다. 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검열 이의철(李宜哲)은 평소에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이제현(李齊顯)도 또한 말을 꾸미는 자가 아니니, 이들이 잘못 듣고 오전(誤傳)한 것으로 돌리는 것은 옳겠지만, 만약 꾸며대어 남을 속였다고 하게 되면 일이 극히 중대하고 어렵게 됩니다.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을 마땅히 정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부제조 홍봉한(洪鳳漢)도 또한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시좌 차대(侍坐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함경 감사 정익하(鄭益河)의 계본(啓本) 가운데에 ‘범월인(犯越人) 운길(雲吉) 등 다섯 사람이 체수(滯囚)된 지가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운길의 아비 후원(後元)이 딸 삼례(三禮)를 호인(胡人)에게 시집보냈고 지금은 후원이 이미 죽어 운길이 자식으로서 아비의 일에 증언(證言)하는 혐의가 있게 되었으며, 운경(雲京)은 당시 14세의 아이어서 뜻을 같이하였을 리가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운길이 이미 흉절(凶節)을 함께 행했다고 한다면 정 익하가 인용한 법문(法文)은 긴착하게 부합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운길은 그대로 가두어서 취복(取服)케 하고, 운경은 방송시킬 것이며, 그 밖에 나머지는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전라 감사 한익모(韓翼謨)와 충청 감사 이일제(李日躋)는 모두 탄핵을 만난 바가 있었으니, 변통(變通)케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일제는 강박(强迫)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체임을 허락하고, 한익모는 종중 추고하여 다시 직임을 살펴 맡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복해(李福海)가 자복(自服)한 공술(供述)에 대하여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으니, 즉시 처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하다."
하였다. 강화 유수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복해의 아비가 죽은 지 다섯 달이 되도록 장사를 지내지 못했는데, 형제 6인이 모두 분상(奔喪)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 대부(阿大夫)128) 도 본래 탐리(貪吏)가 아니었으니, 이복해로써 견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정리(情理)가 가긍(可矜)하니, 그의 형 전 참봉(參奉) 이녹해(李祿海)는 특별히 귀양살이에서 방면토록 하라."
하고, 인하여 이복해에 대한 의율(擬律)을 여러 신하에게 묻자, 원경하가 장률(贓律)로써 고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극력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뭇 신하들이 이복해를 위하여 종일토록 염불(念佛)을 하고 있다. 곧 판하할 것이다."
하였다.
7월 18일 갑자
권적(權𥛚)을 판의금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예조 참판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대사간으로, 심수(沈鏽)를 지평으로, 이응협(李應協)을 부수찬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동경연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7월 19일 을축
이복해(李福海)에게 일률(一律)129) 을 감하고 차율(次律)에 비추어 종신토록 금고(禁錮)할 것을 명하고는 하교하기를,
"이복해가 비록 일률에서 감면되었으나, 만약 다시 사대부의 반열에 끼이게 한다면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7월 20일 병인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철산(鐵山)의 서림성(西林城)에 새로 첨사(僉使)를 설치하여 바야흐로 성 안에 기계(機械)를 비치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천수진(天水鎭)의 군졸로 바꾸어 정한 2백 명에게 매년 징포(徵布)토록 한다면 아마도 뒷날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이 조항은 마땅히 절목(節目) 가운데서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해진(該鎭)의 용도를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니, 감영(監營)의 어전(漁箭)·염부(鹽釜) 다섯 곳을 옮겨 떼어 주어서 그 진(鎭)의 용도에 보충토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임피(臨陂)의 나리포(羅里鋪)는 제주(濟州)의 백성을 위하여 설치하고 입죽(笠竹)과 어곽(魚藿)으로 미곡(米穀)과 교역하여 구황(救荒)을 대비토록 한 것인데, 별장(別將)들의 간사한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고군산 첨사(古群山僉使)로 하여금 구관(句管)토록 하였습니다마는, 폐단은 다시 전과 같다고 합니다. 청컨대 본관(本官) 및 인근의 관원으로 하여금 합동하여 조검(照檢)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7월 23일 기사
시좌 차대(侍坐次對)를 파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왕세자가 대리(代理)할 때 한 달에 여섯 번의 차대를 함에 있어 네 번의 차대는 동궁(東宮)에서 행하고, 두 번의 차대는 시좌하여 대조(大朝)가 참결(參決)토록 하라고 명하였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구례(舊例)에도 없고 또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대리하는 뜻도 아니라 하여 폐지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윤광의(尹光毅)·윤득재(尹得載)와 옥당(玉堂) 윤동도(尹東度) 등이 폐지할 수 없다고 다투었으나 뜻을 얻지 못하였고, 대신이 청대(請對)하여 밤새도록 환수(還收)할 것을 빌었으나 임금의 하교가 더욱 엄하였으며, 빈청(賓廳)에서도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아니하였다.
7월 24일 경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난밤에 감히 듣지 못할 하교를 받드니 다시 회천(回天)130) 할 가망이 없는데, 비록 차대를 지난(持難)하시는 것이지만, 여러 신하들이 진현(進見)할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항상 소견하면 뭇 신하들의 소망을 거의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신 등이 전하를 섬긴 지도 30년이 지나 군신(君臣)이 함께 늙었으니, 어찌 천안(天顔)을 뵙고자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신 등이 진현할 길을 끓으시고 이에 마음이 괴롭다고 하교하시니, 억눌려 막혀서 매우 절박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대를 요구하면 응당 소견할 것인데, 어찌 진현할 길이 없겠는가? 만약 변방에 일이 있다고 하면 내가 비록 몸져누워 있더라도 마땅히 몸을 분발하여 말을 타고 갈 것인데, 어찌 동궁(東宮)에게만 위임하겠는가? 또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내가 마땅히 처결할 것이니, 경 등이 어찌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이어 묻기를,
"문비(抆鼻)의 하교를 경은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박선(朴銑)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박선의 관직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이철보(李喆輔)를 대사간으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을 동지 겸 사은 정사로, 황정(黃晸)을 부사로, 정실(鄭實)을 서장관으로, 정찬술(鄭纘述)을 통제사로, 윤광소(尹光紹)를 승지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이응협(李應協)을 사간으로, 김도(金䆃)·유작(柳綽)을 장령으로, 이육(李堉)을 지평으로, 안윤행(安允行)을 헌납으로, 박사눌(朴師訥)·남운로(南雲老)를 정언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판돈녕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증직(贈職) 및 관방(官方)이 지나치게 넘치고 있습니다. 의당 인재와 문벌을 관찰하여 구별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야 하며 백도(白徒)131) 에게는 음자(蔭資)나 돈녕 도정(敦寧都正)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고 적법(籍法)을 밝게 하여 서울의 유생(儒生)이 본관(本貫)의 향적(鄕籍)으로 향시(鄕試)에 함부로 응하는 것을 금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7일 계유
화성(火星)이 남두성(南斗星)의 괴중(魁中)으로 들어갔다.
예조 판서 유엄(柳儼)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의릉(懿陵)의 상탁(床卓)이 대왕위(大王位)는 칠홍(漆紅)인데 왕비위(王妃位)는 칠흑(漆黑)입니다. 그리고 창릉(昌陵)의 상탁은 체양(體樣)이 협소하여 모두 다른 능의 제도와 다르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좌 차대(侍坐次對)는 비록 정지하였다 하더라도 청대를 요구하는 것은 허락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청대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국사(國事)에 만약 실제로 성사(成事)되는 일이 없다면 이는 모년(暮年)에 여러 신하들을 우대(優待)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내가 먼저 스스로 소견하여 원량(元良)의 정사(政事)를 물어서 흡당(洽當)한 곳은 저절로 흔연(欣然)히 여기고 그렇지 못하면 이정(釐正)하여 힘써 경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동궁이 차대(次對)할 때에 대신과 비당(備堂)·육조(六曹)와 경조 당상(京兆堂上)은 원량에게 품(稟)하여 재결하는 가운데서 중대한 것은 가지고 들어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종실(宗室) 여원군(礪原君) 이매(李梅)가 또 상서하여 말하기를,
"황단(皇壇)에 함께 제향(祭享)하는 것은 실로 선조(先朝)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일이니, 의당 대조(大朝)께도 존호(尊號)를 올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이를 물리쳤다. 수찬 김선행(金善行)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존주(尊周)132) 를 계술하는 대의는 온 나라 사람이 흠앙(欽仰)하는 바이니, 종신(宗臣)의 청(請)을 막고 억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이 일을 하고 존호를 받는 것이 옳겠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겸손하시는 덕은 비록 아름다우나, 누르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존주하였다 하여 미명(美名)을 탐내어 구해서야 되겠느냐?"
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존호(尊號)의 시초는 대개 후세 소인(小人)의 아첨하는 자가 허과(虛夸)한 글을 새로 만들어서 임금을 불의(不義)에 빠지게 하고는 스스로 그의 총록(寵祿)을 보전하려고 하는 데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군자(士君子)는 이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고 상신 이유(李濡)와 조태채(趙泰采)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이런 논의를 세우니 당세(當世)에서 임금의 뜻에 봉영(逢迎)한다고 기롱하였다. 지금 김재로(金在魯)가 그 의논을 이어서 기술하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금도 바른 말을 하여 저지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심하도다! 습속(習俗)이 날로 저하됨이여. 그러나 공의(公議)가 아직 민멸(泯滅)되지 않고 인심(人心)도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논의를 하는 자는 종신(宗臣)과 같은 무리로부터 발의(發議)되니, 이는 대개 배우지 못하고 염치가 없어서 사류(士類)로서 스스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윗사람에게 아첨코자 하는 자가 앞에서 치켜드는 것을 핑계하여 이어서 성취하려 하면서도 감히 임금 앞에서 현송(顯誦)하지 못하고 마치 김선행의 행위와 같이 하는 자가 있었으니, 김선행이 청의(請議)에 죄를 얻음이 크다.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45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외교(外交) / 역사(歷史)
[註 132] 존주(尊周) : 명나라를 높이는 뜻.
사신(史臣)은 말한다. 존호(尊號)의 시초는 대개 후세 소인(小人)의 아첨하는 자가 허과(虛夸)한 글을 새로 만들어서 임금을 불의(不義)에 빠지게 하고는 스스로 그의 총록(寵祿)을 보전하려고 하는 데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군자(士君子)는 이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고 상신 이유(李濡)와 조태채(趙泰采)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이런 논의를 세우니 당세(當世)에서 임금의 뜻에 봉영(逢迎)한다고 기롱하였다. 지금 김재로(金在魯)가 그 의논을 이어서 기술하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금도 바른 말을 하여 저지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심하도다! 습속(習俗)이 날로 저하됨이여. 그러나 공의(公議)가 아직 민멸(泯滅)되지 않고 인심(人心)도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논의를 하는 자는 종신(宗臣)과 같은 무리로부터 발의(發議)되니, 이는 대개 배우지 못하고 염치가 없어서 사류(士類)로서 스스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윗사람에게 아첨코자 하는 자가 앞에서 치켜드는 것을 핑계하여 이어서 성취하려 하면서도 감히 임금 앞에서 현송(顯誦)하지 못하고 마치 김선행의 행위와 같이 하는 자가 있었으니, 김선행이 청의(請議)에 죄를 얻음이 크다.
7월 28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환경전(歡慶殿)에서 인견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뜻에 미치지 못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탄식하니, 선조(先朝)의 뜻과 사업을 계승함과 당론(黨論)을 조정함과 백성을 구제함이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근일에 당습(黨習)의 폐단이 아직도 그 근과(根窠)를 다 제거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한림(翰林)과 이랑(吏郞)의 두 청관(淸貫)은 당론이 그로부터 생기는 두 구멍이 되고 있습니다. 한림이 천거를 고쳐서 회권(會圈)으로 만든 뒤에 남태회(南泰會)와 채제공(蔡濟恭) 같은 사람을 얻었으니, 만약 구제(舊制)와 같이 하였다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관리가 되겠습니까? 한림의 천거 제도를 새로이 파하면 이조 참의와 옥당 신록(玉堂新錄)은 또 이 사람들이 머리가 터지게 다투는 곳이 될 것이니, 만약 이 두 구멍을 막아버린다면 당론은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방도를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조(吏曹)는 삼망(三望)을 고쳐서 장망(長望)으로 하고 옥당은 한림 소시(翰林召試)의 제도와 같이 한다면, 다투는 사단이 종식되고 당론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행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영남 사람 권상일(權相一)과 정권(鄭權)·정옥(鄭玉)은 모두 인망(人望)이 무거워서 수용(收用)할 만하다고 천거하고,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한림 황인검(黃仁儉)은 사람됨이 원숙(圓熟)하고 공평하여 쓸 만하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모두 받아들였다.
군기시(軍器寺)에 명하여 썩고 상한 각궁(角弓)을 모두 대나무로 대신토록 하였다. 대개 각궁이 비록 평시(平時)에는 좋으나 완급(緩急)할 즈음에는 화피(樺皮)가 떨어져 나가고 아교가 풀리어 비를 이기기에는 마땅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깊이 그 폐단을 알고 대나무로 바꿀 것을 명한 것인데, 이는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주청에 의한 것이었다.
7월 30일 병자
정언 박사눌(朴師訥)이 상서하여 근학(勤學)하고 근정(勤政)할 것을 권면하고, 이어 연묵(淵默)함이 너무 지나쳐서 정지(情志)가 서로 막히어 연대(筵對)하는 것이 한갓 수(數)나 채우고 형식에만 대응하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면치 못한다고 논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숙묘(肅廟)께서는 14세에 즉위(卽位)하셨습니다. 일찍이 주강(晝講)에서 갑자기 구토(嘔吐)를 하셨으므로 대신이 문후(問候)하니, ‘지난밤에 글을 읽다가 오경(五更)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기운이 편치 못하다.’고 답하셨습니다. 충년(冲年)에 슬프고 괴로우신 가운데서도 근학(勤學)함을 이와 같이 하셨으니, 어찌 성명(聖明)하신 군주(君主)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 무오년133) 에는 정월(正月)부터 혼자 거처하시어 거의 1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춘추(春秋)를 헤아려 보니 18세 때였습니다. 보색(保嗇)을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에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고 혈기(血氣)도 충장(充壯)하셨으니, 40년 동안 치평(治平)의 그 효험이 실로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신은 감히 숙묘의 두 가지 일로써 저하(邸下)를 위하여 말씀드립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감히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장령 유작(柳綽)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종성 부사(鍾城府使) 김우철(金遇喆)은 변읍(邊邑)을 싫어하여 피하다가 그 곳에 정배(定配)되었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방면되어서 국체(國體)를 손상시킴이 있으니, 청컨대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헌납 안윤행(安允行)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사간 이응협(李應協)이 그의 집에 누워 있으면서 밖에 있다고 칭탁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달한 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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