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1749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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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축

유사흠(柳思欽)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8월 2일 무인

헌부 【장령 유작(柳綽)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은 곧 이증(李增)의 아우입니다. 한번 대장(臺章)에서 증을 논한 뒤로부터는 마땅히 감히 안연(晏然)하게 그 직임에 있지 못할 것인데도 이를 심상(尋常)하게 보고 자처(自處)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황간 현감(黃澗縣監) 박두익(朴斗益)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신을 살찌우면서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았고, 정산 현감(定山縣監) 윤적(尹勣)은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어 백성들이 그 해(害)를 입고 있으며 회인 현감(懷仁縣監) 이종원(李宗遠)은 성질이 본래 추패(麤悖)하여 전혀 사무를 보지 않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8월 5일 신사

대사간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숙향(叔向)134)  이 말하기를, ‘국가의 우환(憂患)은 하정(下情)이 상달(上達)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대각(臺閣)의 진언(進言)이 없다고 조회에 임하시어 탄식을 하셨습니다마는, 대리(代理)를 시키신 이래로 정신(廷臣)들이 궐실(闕失)을 광구(匡救)하려는 말을 일체 물리치시니, 전하께서 비록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가 있다 하더라도 누가 다시 직언(直言)을 드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일이 대조(大朝)에 관계되는 것을 백료(百僚)들로 하여금 스스로 진달할 수 있게 하여 낙문(樂聞)하시는 덕을 빛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금년은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동궁(東宮)에게 청하여 양전(兩殿)에 진연(進宴)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원량(元良)이 심궁(深宮)에서 생장하여 간난(艱難)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러한 일로써 인도하려 하는가? 옛부터 난망(亂亡)은 항상 연안(宴安)에서 연유하는 것이어서 나는 매우 이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거늘, 어찌 감히 이러한 거조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궁의 처지에서 말씀한다면 그렇지 아니한 것이 있고 전하의 처지에서 말씀한다 하더라도 자전(慈殿)께서 계시니, 더욱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구체(口體)를 봉양하는 것이 뜻을 잘 받드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긴다."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도 역시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원량이 만약 이를 한다면 장차 나를 와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니, 김재로 등이 이에 물러갔다.

 

윤흡(尹潝)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8월 6일 임오

임금이 친히 임문휼민의(臨門恤民儀)를 지었다. 당초 명(明)나라 태사(太史) 초횡(焦竑)이 《양정도해(養正圖解)》를 만들고 책 머리에 문왕(文王)이 사민(四民)을 구휼한 논설을 실었다. 그 책을 금중(禁中)에 간직해 오던 중 숙종(肅宗)이 찬(贊)을 만들었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뭇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임어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덕(德)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이 없는지라, 문왕의 정사에 의거하여 사민을 궐문 아래로 불러오게 하고 세자와 더불어 궐문에 나아가서 위로해 주려고 한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유신(儒臣)을 인견하고 초횡의 책을 내어 보이고는 경조(京兆)의 관원에게 명하여 궁민(窮民)을 초(抄)해서 아뢰도록 하였다. 또 말하기를,
"치평(治平)의 세상에서 그 임금은 심히 위구(危懼)스러운 것이니, 세자로 하여금 궁민들의 모습을 직접 보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드디어 친히 의주(儀註)를 지어 예조(禮曹)에 내렸는데, 의주에 이르기를,
"세자가 먼저 홍화문(弘化門) 안 막차(幕次)로 나아가고 내가 이어 소여(小輿)로 홍화문 안에 나아가서 동쪽 사닥다리로 올라 누(樓)로 나아간다. 승사(承史)135)  는 서쪽 사닥다리로 올라 누로 나아가고 영상과 좌상도 일례(一例)로 입시한다. 시위(侍衛)는 다만 병조(兵曹)와 총부(摠府)에 입직(入直)한 인원으로 하되, 당상과 낭청은 누로 오르고 나머지는 모두 문 안에서 멈추며 삼문(三門)을 활짝 연다. 세자가 지영(祗迎)136)  한 뒤에 서쪽 사닥다리로 누에 올라와 시좌(侍坐)하며, 관원 두 사람이 모시고 올라온다. 경조(京兆)의 당상과 낭청은 부관(部官)을 인솔하고 문 밖에서 차례로 선다. 전좌(殿坐)한 뒤에 앞뒤에서 사배(四拜)를 행하고 사민은 절하지 않는다. 절을 마치면 경조의 당상과 낭청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오부(五部)의 관원은 부차(部次)대로 사민을 이끌고는 고휼(顧恤)하는 것을 받는데, 선혜청(宣惠廳)의 낭관이 상(賞)을 반사하는 예(例)에 의하여 쌀을 나누어 준다. 나누어 주는 일이 끝나면 통례(通禮)가 예필(禮畢)을 청하고 대내(大內)로 되돌아온다. 이에 세자가 먼저 누에서 내려와 지영하고 뒤를 따라 대내로 돌아온다. 사민 가운데 매우 늙은 사람은 지팡이를 허락하고 친경(親耕)과 친예(親刈)의 예(禮)에 의하여 모두 상복(常服)을 입으며, 시위는 융복(戎服)으로 한다. 승사와 대신·궁료(宮僚)와 경조의 당상과 낭청 이하는 모두 시복(時服)으로 하며, 고취(鼓吹)·의장(儀仗)·협연(夾輦)은 제외한다. 단지 입직군(入直軍)만으로 궐문(闕門)을 파수(把守)하고 궐문 밖에 문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집춘영(集春營)·광지영(廣智營)·신영(新營)·훈어(訓御)137)  의 보군(步軍) 각각 1초(哨)로써 문밖에 분립(分立)케 하고 산선(繖扇)은 누 아래에 정지하게 한다. 사민 가운데 사부(士夫)의 과녀(寡女) 및 그 밖에 친히 나오지 못할 사람은 모두 대신 받게 한다."
하였다. 이어 승지 윤광의(尹光毅)에게 이르기를,
"조사(朝士)로서 파직되어 가난한 자도 마땅히 구휼하여야 할 것인데, 마땅히 스스로 와서 받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내리는 물건을 어찌 친히 받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한림(翰林) 이의철(李宜哲)이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임금이 내리시는 것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신하의 염의(廉義)도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어찌 조사(朝士)로서 쌀자루를 가지고 민오(民伍)의 사이에 끼어서 구차스럽고 천한 지경을 밟겠습니까? 자사(子思)는 임금이 내리는 음식이라도 오히려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것이겠습니까?"
하니, 윤광의가 말하기를,
"자사는 빈사(賓師)이었으니, 자처(自處)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의철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선비의 처신에 어찌 지위의 고하(高下)가 있다 하여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행동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내가 이로 인하여 조사를 욕되게 할까 두렵다."
하고, 이어 영갑(令甲)을 밝혀 전의 조관(朝官)은 종들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였다. 인하여 윤음(綸音)을 내리어 석년(昔年)에 백성을 위하던 뜻을 계술(繼述)하는 것임을 표시하였다.

 

판의금 권적(權𥛚)이 이복해(李福海)를 의율(擬律)하여 성주(星州)에 귀양보내니 성주는 이복해의 본향(本鄕)인 선산(善山)의 이웃 고을이다. 장령 유작(柳綽)이 상서하여 이를 논(論)하니, 임금이 듣고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하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계미

임금이 대신과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충청 감사 홍계희(洪啓禧)가 소매 속에서 책자(冊子)를 올렸는데, 대개 홍계희가 임금이 양역(良役) 때문에 근심하는 것을 보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로써 제도의 변경을 논한 초본(草本)이었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양역의 폐단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말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심(人心)이란 편안한 데로 익숙해지는 것이어서 모두 말하기를, ‘백년 전에도 이와 같았는데 오히려 무사(無事)하였고 10년 전에도 또 이와 같았는데 아직도 무사하였으니, 끌어다가 보충하고 새어나가는 것을 얽어매기도 하여 시일(時日)을 보낼 수 있는데, 오늘날의 인재(人才)와 오늘날의 기강(紀綱)으로써 경장(更張)을 하고자 한다면 또 반드시 패망을 재촉하고 말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말이 옳은 듯하지마는 진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민폐(民弊)는 비유하건대, 마치 오랫동안 병을 앓는 사람이 전월(前月)·전세(前歲)에도 이미 약을 쓰지 않았으니, 내세(來歲)·내월(來月)에도 지탱하여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만 믿고 있다가 달마다 더해가고 해마다 심해져서 그 죽음을 서서도 기다릴 수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취하여 보았다. 그가 과거 제도를 말한 조목에 이르기를,
"초시(初試)에서 3천 인을 취하되 합격하지 못한 자는 납포(納布)하게 하고, 회시(會試)에서 3백 인을 취하고 전시(殿試)에서 90인을 취하되 3분의 2는 제술(製述)로 취하고 나머지 1은 명경(明經)으로 취하며, 그 밖의 모든 과거는 아울러 혁파한다. 그리고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옥사(屋舍)를 설치하여 선비를 시험하고 소과(小科)를 개혁하여 한 방(榜)으로써 진사(進士)를 나누어 만든다."
하였으며, 그가 관제(官制)를 말한 조목에는 이르기를,
"한천 소시(翰薦召試)를 파하고 대각(臺閣)에 들어온 지 십순(十旬)이 되도록 장소(章疏)가 없으면 송(宋)나라의 제도에 의하여 대각을 욕되게 한 벌을 시행하되, 극언(極言)하는 자는 초천(招遷)토록 하고 암묵(暗默)하는 자는 자급(資級)을 깎아 내리게 한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조정(朝廷)에 평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소시(召試)의 의논은 또한 파천(罷薦)하기 전에 저술한 것이었던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가 군제(軍制)를 말한 조목에는 이르기를,
"5군문(五軍門)을 혁파하여 다만 훈어(訓御)의 두 영(營)만을 두어 정군(正軍)을 개작(改作)하고 그 액수(額數)를 더한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기록한 바를 기필코 행하여야 하겠으나, 민원(民怨)이 없겠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원망하는 자가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기뻐할 자도 또한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가 균역(均役)을 말한 조목에 호포(戶布)에 대한 의논이 있었는데,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결포(結布)의 제도가 약간 낫다’고 말하자, 홍계희가 도리어 그 말을 따르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처음에는 호포를 주장했었는데, 어찌하여 전의 의견을 고치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호포도 또한 행할 만한 법입니다마는, 다만 대소(大小)를 구별하지 아니하면 문득 크고 작은 신[屨]이 동일 가격으로 되는 혐의가 있으며, 또 당(唐)나라 송(宋)나라에서도 재물의 다과(多寡)로써 호(戶)의 대소(大小)를 정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인구(人口)의 다과로써 정했으나, 사람이 많은 것이 반드시 부유하고 사람이 적은 것이 반드시 빈핍한 것은 아닙니다. 결포는 전지(田地)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전지는 숨길 수도 없고 변경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호포의 제도가 약간 나을 것으로 여긴다."
하매, 조현명이 말하기를,
"고려(高麗)에서 호포법을 시행하다가 망했으므로 아조(我朝)의 태종(太宗)께서 이를 고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갑자(甲子)에 망했지마는 무왕(武王)은 어찌 갑자에 일어나지138)   아니했는가?"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위의 성명(聖明)으로부터 아래의 상신(相臣)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오직 마땅히 널리 묻고 넓게 논란하여 그 이롭고 해로움을 안 연후에 결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어 책자를 두 대신에게 내리어 자세히 보게 하였다. 처음 홍계희가 장차 양역 변통법(良役變通法)을 올리려고 할 때 그 법이 양민(良民)의 수역(受役)이 치우치게 괴로웠기 때문에 유포(儒布)의 제도를 제정할 것을 행하면서 과거를 설치하여 널리 3천여 인을 취하게 하고 그 중에서 합격하지 못한 자에게는 출포(出布)의 책임을 지워 양역에 충당케 하자는 것이었는데, 초안(草案)이 이루어지자 사사로이 사관(史官) 이의철(李宜哲)에게 이를 보인 바 이의철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라를 망하게 할 술책이다. 어디로부터 이러한 의견이 나왔는가? 지금 국가가 유지해가는 것은 오직 명분(名分)을 정하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데에 힘입고 있는 것인데,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명분이 무너지고 수치스러움과 원망을 부르는 결과가 될 것이니 진실로 행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유생이 빈궁한 자가 많은데, 베를 바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가두어서 하민(下民)과 같이 형벌을 가하겠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베 천만 필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유교(儒敎)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명맥을 해치는 화(禍)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홍계희가 이에 조금 저상(沮喪)이 되었었는데, 입대(入對)함에 이르러 임금이 과연 어렵게 여겼으므로, 홍계희가 드디어 억지로 청하지 못하여 그 일이 정침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홍계희가 감영(監營)으로 가서 다시 결포법(結布法)을 올렸으나, 이도 또한 시행되지 못하였다.

 

8월 9일 을유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조금만 읽고 토론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승지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이 문단(文段)에서 논한 바는 곧 정심(正心)의 요체가 되니, 원컨대 체청(體聽)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체청한다는 말은 그 뜻이 부념(浮念)이란 구절에 있는 것이다."
하니, 윤광소가 말하기를,
"구구(區區)한 성의(誠意)가 과연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수찬 임석헌(林錫憲)이 말하기를,
"부념이란 한 문단이 마음의 병을 논하는 데 아주 절실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학(講學)할 때에 비록 관천(祼薦)139)  하는 향례(享禮)의 일이라 하더라도 혹 생각이 이에 미친다면 부념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광소가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만약 그때가 아니면 비록 정(正)한 생각이라 하더라도 사(邪)한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강학을 하면 마음이 강학에 있어야 할 것이요, 관천을 하면 마음이 관천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정념(正念)이라고 이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일찍이 이를 걱정하면서도 제어하지 못했으니, 이는 내가 학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석헌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학문에 유념하셨기 때문에 부념이 병통이 되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부념을 아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은 지나치다.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윤광소가 말하기를,
"배우지 아니한 사람은 방심(放心)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배운 사람은 정좌(靜坐)하여 마음을 수습하기 때문에 곧 부념이 어지러운 단서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과 승선(承宣)은 그 부념을 제어하는 공부가 어느 정도인가? 나는 부념이 점점 그전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쇠모(衰耗)하여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하였다. 임석헌이 말하기를,
"이는 사마 온공(司馬溫公)도 제어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하물며 신 등과 같은 자이겠습니까?"
하고, 윤광소는 말하기를,
"이 문단에 이르기를, ‘간혹 민울(悶鬱)하거나 무료(無聊)한 때가 있거든 모름지기 정신을 분발하고 마음을 세탁(洗濯)하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학문을 하시는 데에 이미 득력(得力)을 못하셨고 또 정치를 하심에 있어서도 오늘의 현상을 매우 미워하시어 세도(世道)를 조제(調劑)하심에 있어서 마침내 뜻을 기다리는 효험이 없기 때문에, 도리어 ‘나의 용심(用心)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그 효험이 없는가?’라고 여기시고는 나른히 스스로 꺾이시고 번민하며 견디지 못하신 나머지 사령(辭令)이나 시조(施措)에 나타낸 것이 그 중정을 얻지 못하심이 많았으니, 총괄하여 말씀드린다면 오로지 민울함과 무료함에서 나와서 그 지나친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정(任珽)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10일 병술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가서 도정(都政)에 친림하였는데, 이조 판서는 곧 정우량(鄭羽良)이고 병조 판서는 곧 김상로(金尙魯)였었다. 처음으로 이조(吏曹)의 참판과 참의를 승지의 예(例)에 의거하여 장망(長望)으로 주의(注擬)하도록 명하였는데, 참판은 일찍이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이나 혹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의망(擬望)했던 자를 썼고 참의는 전에 대사성이나 혹은 부제학, 또는 승문원(承文院)·비국(備局)의 부제조에 의망했던 자를 썼으니, 이는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찬정(贊定)한 것이었다. 조명건(趙明健)을 부응교로, 윤동성(尹東星)을 사서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집의로, 송형중(宋瑩中)을 정언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설서로, 박필원(朴弼遠)을 지평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수찬으로, 최성대(崔成大)를 필선으로, 조중회(趙重晦)를 문학으로, 유언술(兪彦述)을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이창수(李昌壽)를 경상 우병사로, 조동진(趙東晉)을 전라 병사로, 신사언(申思彦)을 충청 수사로 삼았으며, 특별히 제수하여 이정보(李鼎輔)를 좌윤으로, 홍중징(洪重徵)을 우윤으로, 북관인(北關人) 이격(李格)을 판결사(判決事)로, 신치운(申致雲)을 승지로, 권상일(權相一)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권상일은 영남(嶺南) 사람으로 김상로 등이 탕평(蕩平)의 논을 주장하여 일찍이 임금께 천거한 바 있었는데, 이날에 정우량(鄭羽良)이 대사간에 의망(擬望)하자, 임금이 이조(吏曹)의 청환(淸宦)을 당시 사람들이 다툰다고 하여 어필(御筆)로 특별히 권상일에게 제수하고 하교하기를,
"나도 또한 직접 이조의 귀관(貴官)에 손을 쓴 것이다."
하니, 김상로와 정우량이 찬성하기를,
"영남 사람으로 이조 참의가 된 것은 이에서 비롯되었으니, 이는 실로 탕평의 극진한 공입니다."
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어 권상일은 병을 핑계하여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신치운은 박필몽(朴弼夢)의 당으로서 일찍이 상소하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를 헐뜯었다가 10년여 동안 좌폐(坐廢)되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우량이 끌어 주어 이러한 제수가 있게 되었다.

 

8월 13일 기축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친히 광릉(光陵)과 장릉(長陵)의 추석제(秋夕祭) 때 쓸 향(香)을 전하고, 흑원포(黑圓袍)로 고쳐 입고서 친히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전하였다. 이때에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여 신치운(申致雲)을 탄핵하니, 임금이 듣고는 성내어 박치문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 소장을 돌려주었으며, 신치운도 또한 좌체(坐遞)되고, 유우기(兪宇基)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8월 14일 경인

임금이 친히 각릉(各陵)의 추석제 때 쓸 향을 선정전(宣政殿)의 월랑(月廊)에서 전하였다.

 

《양정도해(養正圖解)》를 간행(刊行)하라고 명하였다.

 

8월 15일 신묘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의 누(樓)에 나아가 왕세자를 거느리고 사민(四民)에게 진휼을 시행하였다. 파리한 늙은이를 보면 부지(扶持)하여 오가게 하고 전대가 없는 것을 보면 빈 섬을 나누어 주게 하였으며, 떠돌이로 걸식하는 자를 보고 말하기를,
"비록 사민(四民) 밖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나의 백성이다."
하고, 창관(倉官)으로 하여금 쌀을 주게 하였다.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나의 부덕(否德)으로 열조(列祖)의 부탁을 받고 임어(臨御)한 지 2기(二紀)가 되었는데, 한 가지 정사도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여 부탁을 저버리고 백성을 등졌으니, 먹는 것이 어찌 달며 잠을 잔들 어찌 편하겠느냐? 이에 석년(昔年)의 명에 따르고 문왕(文王)의 시인(施仁)을 몸소 본받아 행하고자 문루(門樓)에 나아가 진휼을 시행하고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시좌(侍坐)케 하였다. 아! 창창(蒼蒼)한 하늘이 나에게 부탁한 것도 백성이요 척강(陟降)하시는 조종(祖宗)께서 나에게 의탁한 것도 또한 백성이다. 지금 초기(抄記)한 바를 보니 그 수효가 아주 많고, 문루에 나아가서 보니 마음에 더욱 긍측(矜惻)하다. 옛적에 이윤(伊尹)140)  은 한 사람도 안정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수렁 속에 빠져 있는 것같이 여겼다. 다섯 걸음 밖에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백성이 이와 같이 많은데도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어 오늘날 처음 보게 되니, 어찌 백성의 부모된 도리라고 하겠느냐? 저 창창한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임금이 되게 한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한 것이다.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민심(民心)의 향배(向背)는 오로지 이 백성을 구제하고 구제하지 못하는 데에 연유될 것인데, 백성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구제하지 아니하면 민심은 원망할 것이요 천명도 떠날 것이니, 비록 임금이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곧 독부(獨夫)일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어찌 늠연(凛然)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원량으로 하여금 시좌케 한 뜻은 항상 생각을 여기에 두어 나의 부덕함을 본뜨지 말고 문왕이 사민에게 은혜를 먼저 한 것을 좇아서 중외(中外)의 곤궁한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성세(盛世)의 가운데로 모이게 하려는 것이니, 대소(大小) 신료들도 또한 한때의 의문(儀文)으로 나의 원량을 인도하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경하고 협찬하여 나의 백성을 구제하면, 척강하시는 선왕의 혼령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며 나 또한 자식이 있고 신하가 있다고 조종께 배주(拜奏)할 것이니, 모름지기 공경히 본받기 바란다. 왕자(王者)의 시정(施政)이란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까지 미치게 하는 법이니, 양도(兩都)와 팔도(八道)의 수신(守臣)은 각각 사민을 초기하여 진휼을 시행한 뒤에 계문(啓聞)할 것이며 수령(守令)들에게 신칙하여 보민(保民)을 제일 먼저 할 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송형중(宋瑩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자(王者)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명의(名義)를 바르게 하지 않고도 공경하고 협동함을 성취한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경탈(傾奪)과 장함(戕陷)141)  의 화를 깊이 징계하시어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만 생각하시고 오직 명의(名義)의 큰 관건(關鍵)을 분명히 바로잡지 못하기 때문에 사사로운 생각으로 교계(較計)하여 기회(機會)를 타고 잡으려는 자가 무리를 지어 겉으로는 탕평(蕩平)의 명분을 가탁(假托)하고 속으로는 진취(進取)의 계획을 성취하였습니다. 이른바 마음을 깨끗이 씻었다는 자들은 아직도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심장(心腸)을 깊이 싸서 간직하고 중도(中道)를 잡고 공평을 견지한다는 자는 모두 노인(虜人)을 관대(款待)하는 행동을 희롱하면서, 편안하게 물러나 스스로 절조를 지키는 자에게는 당인(黨人)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이익을 탐하여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에게는 공심(公心)이 있다 하여 승진시켜, 일종(一種)의 의리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는 무리들을 몰아서 이렇게 혼돈(混沌)하고 골동(汨董)한 세계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는 전각(殿閣)에 올라 일을 의논하게 되면 화협(和協)의 실마리가 잡히고 탕평(蕩平)이 거의 이루어진 것같이 성대하게 말하다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역시 한번 궤열(潰裂)된 것은 다시 합칠 수 없고 따라서 그 초책(誚責)을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는 도리어 스스로 길게 탄식하면서 본래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든 것같이 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孤立)해 계시면서 아득하게 깨닫지 못하시고 한갓 이러한 무리들의 파롱(簸弄)만을 받으시니, 이것이 비록 뭇 신하들의 죄이나 또한 전하께서도 그 방도를 잃으신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여기에 그 근원을 깨뜨리어 면모를 바꾸는 길을 열어 줄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다만 가려서 덮어 주어 포용하려 하시면서 말이 시론(時論)에 관섭하게 되면 시비(是非)를 논하는 바도 없이 문득 당습(黨習)으로 의심하여 배척(排斥)하시고는, 더욱 굳게 지지하여 철안(鐵案)처럼 보시어서 마침내는 또 하나의 색목(色目)을 더하는 데 족하여 한갓 목전(目前)의 이익만을 엿보는 자들의 와굴(窩窟)이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징토(懲討)를 가하시어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로 하여금 환연(煥然)히 다시 밝게 하신다면,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는 정치의 실현이 족히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지금 기강(紀綱)이 밝지 못하고 신하의 직분이 점점 타락해져서 조현명(趙顯命)이 ‘횡일(橫逸)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로써 망령되게 이군(貳君)142)  을 군부(君父) 앞에서 논했으니, 그 뜻이 혹 성취(成就)를 경계하고 권면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실은 일호(一毫)도 저하(邸下)에게 근사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전대(前代)의 역사를 두루 보셨겠지만, 일찍이 이러한 제목(題目)으로써 오군(吾君)의 저부(儲副)143)  에게 가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는 곧 기강이 해이하여 임금을 섬기는 체통에 완전히 어두워서 이러한 망발을 사방에서 목을 빼어 기대하고 있는 이때에 지어낸단 말입니까?
대신이 체국(體國)함에 있어서 마땅히 명백하고 정직함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인데, 민응수(閔應洙)는 그의 아들 민백창(閔百昌)의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고 온 나라에서 타매(唾罵)하는데도 끝까지 자수(自首)하지 않다가 그것이 여지없이 탄로되어 막을 수 없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어물어물 핑계대며 대충대충 미봉(彌縫)했으며, 이복해(李福海)는 장오(贓汚)에 걸리어 마땅히 형을 시행하여야 했는데도 마침내 이를 면하고 나왔으니, 정홍제(鄭弘濟)와 유동무(柳東茂)의 무리들이 홀로 신장(訊杖) 아래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홍낙성(洪樂性)은 어버이의 병을 칭탁하고 북막(北幕)에의 부임을 모면할 것을 꾀하였는데, 그의 아비 홍상한(洪象漢)은 일찍이 어미가 늙었는데도 청나라 사신을 인도하려고 천리 밖으로 나갔으니, 이것이 그 도리를 잃은 것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홍낙성은 다만 가벼운 죄로 처분함에 그쳤으니, 이는 또 형정(刑政)의 문란한 것이었습니다.
대간(臺諫)은 비록 낮다고 하더라도 대신(大臣) 등과 더불어 대등(對等)하게 한 것은 일에 따라 규핵(糾劾)하여 그 무거운 권세를 나누어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혹 권위(權位)가 조금 높거나 혹 일이 악역(惡逆)에 관계되는 것이 대간의 입에서 말이 나오게 되면 반드시 물리쳐 막고 꾸짖어 쫓곤 하니, 대개 권위가 대단한 자는 그 미워하는 바가 자신과 알력(軋轢)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으며 대간이 된 자로서 어려워하는 것은 거실(巨室)과 원한을 맺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또 낭패(狼狽)하고 육욕(戮辱)만 되어 필경에는 나라에 도움되는 일도 없고 자기 몸에 해(害)만 있으니, 스스로 지극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서는 누가 즐겨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각(臺閣)의 한 자리는 문득 사부(士夫)의 기정(機穽)으로 되어 있는지라,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이를 담당하려고 하지 아니하여 오직 시골의 피열(疲劣)한 무리만으로 충당해 갖추고는 다시 윗사람의 지주(指嗾)를 받아 사사로운 일로 서로 보복을 일삼으니, 말이 무겁지 못하고 벼슬도 더욱 가벼워졌습니다. 더구나 말로 인해 죄를 얻은 자는 손가락으로 이루 헤일 수 없으니, 김굉(金硡)은 이주진(李周鎭)을 논했다가 10년 동안 폐고(廢錮)되었고, 이석신(李碩臣)은 유엄(柳儼)을 논했다가 종신토록 말살(抹摋)되었으며, 이위보(李渭輔)는 한번 김치량(金致良)을 논했다가 범한 자와 말한 자가 죄를 균일하게 입었고, 박성원(朴聖源)과 이언세(李彦世)는 다행히 은서(恩敍)를 입었었는데 다른 소(疏)에 부딪쳐서 사적(仕籍)을 깎아버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다면 비록 대간(大奸)·거특(巨慝)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한마디 말을 즐겨 내어 논척(論斥)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마땅히 꺼리지 않고 직간(直諫)하는 문을 열어서 죄의 경중을 논하지 말고 무릇 말로써 죄를 얻은 자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모두 소석(疏釋)하고 포용(褒用)하여 널리 탕척(蕩滌)하시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
인주(人主)가 세상을 권장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관방(官方)을 중히 여기고 명기(名器)를 아껴야 하는 것인데, 한번 천섬(薦剡)144)  의 제도를 혁파한 뒤로부터 사필(史筆)이 잡류(雜流)에게 무너지고 통색(通塞)의 권한을 빼앗기고부터 전랑(銓郞)이 도리어 용관(冗官)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청탁(淸濁)이 서로 섞이고 귀천(貴賤)의 분별이 없어서, 후진(後進)이 된 자는 돌아보며 꺼리는 바가 없어서, 명예와 검속(檢束)은 근심하지 아니하고 명관(名官)이 된 자는 한계도 없이 오직 서둘러 승진하기만을 일삼아서 염치가 날로 상실되고 조급하게 다투어 진출하려 함이 더욱 심하였는데, 이태(李泰)와 교결(交結)하는 데에 이르러 극도에 도달했습니다. 오직 구규(舊規)로서 남아 있는 것은 유독 전조(銓曹)의 좌이(佐貳)145)  뿐이었는데 또 장망(長望)으로 제도를 정했으니, 이는 곧 일국(一國)의 공의(公議)와 중권(重權)을 모두 대신(大臣)과 총재(冢宰)146)  의 손에 쥐어 준 것이어서, 그 소임이 편중(偏重)되고 권세가 더욱 신장되어 장차는 사부(士夫)를 속박하고 붙좇아 따르는 자들을 양육하게 될 것이니, 바야흐로 닥쳐올 근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염치가 무너지고 조급히 진출하려 함이 치성하여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아래로는 가난한 선비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기가 미친 것 같고 여기에 강포(强暴)한 자까지 섞이어 나와 방백(方伯)·연수(連帥)147)  를 선임할 때이면 헌초(軒軺)148)  가 끊이지 아니하고 청촉(請囑)이 몰려와서 묘당(廟堂)에서는 취사(取捨)에 눈이 어지러워 완전하게 천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옥서(玉署)149)  의 논사(論思)하는 직임에는 말 안장이 다 해어지도록 어두운 밤에도 애걸하는 정황이어서, 천거를 맡은 자가 수응(酬應)에 피곤하여 가매(假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합니다.
수령(守令)으로 처음 나가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어사(御史)의 천섬(薦剡)과 도신(道臣)의 세거(歲擧)에 갖은 계략으로 간알(干謁)하여 반드시 얻어내고야 맙니다. 저 구택규(具宅奎)가 재서(才諝)로 칭송받은 것이나 구성필(具聖弼)의 격식을 깨뜨리고 장용(將用)된 것은 문을 닫고 고요히 몸을 지키는 자로서야 어떻게 이를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전법(銓法)을 폐지하고 침체된 자를 소통시켰다는 것이 바로 용잔(庸孱)한 권상일(權相一)을 구차하게 자리에 충당한 것인데, 심지어 선정(先正)을 후욕(詬辱)한 신치운(申致雲)과 권익관(權益寬)과 체결(締結)한 이격(李格)을 총애하고 발탁하여 수용(收用)하시매 물정(物情)이 놀라고 의혹하고 있어 신은 그윽이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소(疏)는 들여오고 임금이 미처 보지 못한 채 바야흐로 사민(四民)을 구휼하다가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금오(金吾)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까닭이냐?"
하니, 승지 정필녕(鄭必寧)이 말하기를,
"정언 송형중이 전일의 상차(相箚)에서 ‘횡일(橫逸)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한 것을 지적하여 좌상(左相)을 탄핵했습니다."
하고, 승지 윤광소(尹光紹)는 말하기를,
"‘횡일’이란 주서(朱書)에서 나온 것이고 ‘난제(難制)’란 두 글자는 상차(相箚)에 없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송형중의 소를 되돌려 주도록 명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효유하기를,
"경이 명령을 기다리는 그 대략을 들었다. 경의 지난번 차자는 진심에서 나온 정성으로 원량(元良)을 옥성(玉成)시키려는 뜻이었는데, 어찌하여 지나치게 인혐(引嫌)하는가? 이미 그 소장을 돌려주었으니, 경이 만약 차자를 진달하려거든 마땅히 원량에게 진달하고 나에게는 관유(關由)하지 말라. 즉시 정사를 보아 나의 원량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이르기를,
"송형중의 소장에 권상일을 논하였다고 이르는데, 이조 참의의 벼슬을 조령(鳥嶺) 넘어 사람에게 주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놀랍도록 괴이한가?"
하매, 도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특히 좌상과 권상일뿐만이 아니고 민백창·홍낙성·구성필·구택규·이복해·이태 등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소장은 한가한 골동(汨董)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복해 및 이태에 이르러서는 죽은 중에게 매질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대개 안으로는 당습(黨習)을 행하여 밖으로는 의현(疑眩)케 하려는 계책이다."
하였다. 다음날 송형중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소장을 돌려주었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왕세자가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월 17일 계사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거적을 깔고[席藁] 엎드려 명소(命召)를 환납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전수(傳授)하였다.

 

헌부 【장령(掌令) 유작(柳綽)이다.】 에서 상달하기를,
"정언 송형중(宋瑩中)은 밖으로 공평(公平)을 가장하고 안으로는 당심(黨心)을 자행하여 여론이 다 함께 놀라고 있으니,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상달한 대로 따랐다.

 

임금이 친히 숭릉(崇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선정전(宣政殿)의 남계(南階)에서 전하였다.

 

8월 18일 갑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금 비로소 송형중의 소장을 보니, 그 첫머리에 탕평(蕩平)의 폐해를 논하여 이르기를, ‘중도(中道)를 잡고 공평을 견지한다는 자는 모두 노인(虜人)을 관대(款待)하는 행동을 희롱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러나서는 우탄(憂歎)하기를 본래 자신의 뜻이 아닌 것같이 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 지의(旨意)와 어법(語法)이 자못 전년에 이언세(李彦世)의 소장과 서로 유사했습니다. 인하여 또 결론짓기를 ‘이 판국을 과연 누가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감히 귀를 가리고 방울을 도적질하는 계책을 하고 있느냐?’고 하였으니, 비록 신의 이름을 지적하지는 아니했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을 쏟은 바는 저절로 엿볼 수 있습니다. 신이 수보(首輔)로 있으면서 어떻게 이를 범연히 논한 것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소장에 이언세를 포용(褒用)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가 쌓이고 비방이 넘치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논의하지 못하는 것을 이언세가 감히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읽고서 놀라고 떨려서 심담(心膽)이 무너지고 떨어집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나이가 젊고 협잡(挾雜)의 뜻이 있는 것을 어찌 인혐(引嫌)한단 말인가? 안심(安心)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도성밖으로 나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그윽이 삼가 보건대, 저하(邸下)께서는 덕기(德器)가 침후(沈厚)하신 중에 영기(英氣)가 엽연(燁然)히 사람을 경동(驚動)시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감히 보양(保養)하여 성취(成就)하게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대조(大朝)께 우러러 권면한 것이고 앞뒤의 연중(筵中)에서도 일찍이 저하께 얼굴을 대하고 말씀드린 적이 한두 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으니, 대조께 진달한 것이 곧 저하께 진달한 것이고 저하께 진달한 것이 곧 대조께 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 본의(本意)를 추구한다면 다만 스스로 충애(忠愛)의 정성을 다하려는 것뿐이었는데, 뜻밖에 이번 대신(臺臣)의 지적한 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난제(難制)’란 두 글자는 신의 차자에는 없는 것이었고 ‘횡일(橫逸)’이란 두 글자는 ‘발월(發越)’과 동일한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드디어 ‘발월 횡일(發越橫逸)’이란 네 개의 글자로써 영발(英發)하신 기상을 형용(形容)하는 데에 중복(重複)해 말씀드린 것이 찬탄(讚歎)하고 기망(期望)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었고, 문자(文字)의 내력도 또한 근거가 없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이 위에는 ‘발월’이란 글자를 없애 버리고 아래에는 ‘난제’란 글자를 첨가하여 날합(捏合)해 말을 만들었으니, 그 의도가 신을 어떠한 지경에 두려고 한 것입니까? 아! 진실로 천하(天下)의 지극히 억울한 일입니다. 신이 10년 동안 규지(揆地)150)  에 앉아 떠나지 않다가 중간에 무한한 기괴(奇怪)함을 겪었었고 필경(畢境)에 재화를 당하여 또 이러한 일이 있으니, 살아서는 불충(不忠)한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되겠습니다. 지금 결별(訣別)을 고하는 즈음에서 글을 쓰려고 하매,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입시(入侍)하여 하교를 듣고서 경이 나를 위하는 충성된 마음에 감탄하였고, 협잡하여 축출하고자 하는 그들의 계략을 이미 알았다. 경은 어찌하여 이러한 거조를 하여 성심(聖心)을 우울하게 하며, 더구나 내가 처음으로 정사를 대리(代理)하는 때이겠는가? 모름지기 소자(小子)의 뜻을 헤아려서 즉시 입성(入城)토록 하라."
하였다.

 

8월 20일 병신

임금이 문신(文臣)들의 제술(製述)에 친림하였다.

 

유복명(柳復明)을 지의금으로, 어석윤(魚錫胤)과 김상철(金尙喆)을 응교로, 조중회(趙重晦)와 이이장(李彛章)을 부교리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사간으로, 이양천(李亮天)을 정언으로, 권일형(權一衡)과 정하언(鄭夏彦)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수서(手書)를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경의 나라를 위하는 충심(忠心)과 나를 돕는 성의는 대단히 근면하고 간곡하여 내가 깊이 감탄한다. 경의 말한 바는 지극히 정대(正大)하여 조그만큼의 사의(私意)도 없는 성심에서 나온 것인데, 살을 찌르는 듯하게 통절(痛切)한 참소가 갑자기 경의 몸에 미쳐서 향촌(鄕村)으로 나가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대단히 민울(悶鬱)하게 여기는 바이다. 소자(小子)가 배운 것이 없고 민첩하지도 못한 처지로 대리의 초정(初政)을 당하여 성심(聖心)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는데, 경이 또 이와 같으니 마음에 매우 아득함을 느끼고 있다. 경의 형이 옛적에 말한 바를 지금 대조(大朝)에게서 듣고 나라를 위하는 그 단심(丹心)에 더욱 감탄하였다. 경이 만약 지나치게 고집한다면 대조께서 다년간 의장(倚仗)하던 마음을 위하여 몸소 가기를 뭐 어렵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고관(考官)을 사직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비록 쇠약해졌다고 하더라도 몇 해 동안 조제(調劑)하던 그 마음은 전후(前後)가 동일하다. 원량(元良)이 대리하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협잡이 서로 맞서서 구습(舊習)을 즐기는 자들이 흔히 그 임금의 쇠모(衰耗)함을 이용해 그 직책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요행스럽게 여긴 것이니, 그 마음인즉 경을 기롱한 것이 아니고 실은 임금과 신하를 기롱한 것이고, 좌규(左揆)151)  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의 계책이 더욱 참혹하고 교묘하다. 경은 즉시 함께 들어와서 나의 한가지 묻는 말을 들으라."
하였다.

 

강화 유수 원경하(元景夏)가 상서하여 예전에 왕식(王式)이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를 위하여 나무를 설책(設柵)했던 법에 의거하여 해안(海岸)을 따라 나무를 심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고관(考官) 김재로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의 ‘횡일(橫逸)’이란 두 글자는 과연 앞날의 기관(機關)이 될 것이다. 세도(世道)가 어렵지만 경과 좌상이 이번의 소척(疏斥)을 당하였으니, 어찌 개연(慨然)해 하지 않겠는가? 원량(元良)은 이 일을 조제(調劑)코자 밤마다 잠을 자지 않았고 나도 또한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한권(翰圈)의 일로 많은 사람을 암담한 속에 둘 수 없다. 마땅히 송형중(宋瑩中)을 함문(緘問)하여야 할 터인데, 그 소장을 보지도 않고 먼저 함문하는 것은 종핵(綜覈)하는 정사가 아니고 또 대략 이를 들으니 그 배포(排布)한 뜻이 깊다. 내가 비록 쇠모하였으나 이러한 세상에 이러한 사람은 결코 불치(不治)하는 것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그 소장을 대교(待敎)가 가지고 들어오라."
하였다.

 

이조 참판 윤급(尹汲)을 폄체(貶遞)하여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삼았다. 처음에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그의 당인 이창수(李昌壽)를 끌어다가 이조 참의를 삼고자 하였으나, 윤급이 듣지 아니하였다. 이창수가 일찍이 옥당(玉堂)으로서 임금이 모든 유생(儒生)의 부형(父兄)을 친국(親鞫)할 때에 모셨었는데, 그들을 작처(酌處)하여 감사(減死)하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사간 김상복(金相福)이 다투어 고집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삭직(削職)을 청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창수가 사론(士論)에서 죄를 얻었던 것인데, 윤급도 그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의 청관(淸貫)의 길을 막더니 이때에 이르러 윤급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또 신치운(申致雲)을 승지의 망단(望單)에서 뽑아버리자, 임금이 크게 성내어 특별히 비의(備擬)케 하였으나 윤급이 고집하며 즐겨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에 임금이 하교하여 엄절히 꾸짖고 드디어 외보(外補)를 명하였다.

 

8월 21일 정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하교하여 정제(定制)하였는데, 무릇 ‘장망(長望)으로 주의(注擬)152)  한 것은 그 이름이 단서(丹書)153)  와 장오(贓汚)에 들어 있지 아니한 자는 자신의 뜻으로 빼버리지 못하며 아래로부터 외보(外補)하는 법은 일체 이를 금지한다.’ 하였다.

 

송형중(宋瑩中)의 관작을 삭탈하고 방귀 전리(放歸田里)케 하였다. 임금이 송형중에게 소장을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여 읽게 하였는데, 송형중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스스로 자신의 소장을 읽는 것은 체모(體貌)를 손상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이미 체직(遞職)이 되었거늘, 대각(臺閣)으로 자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내가 읽기를 명하는데도 어찌하여 감히 사양하느냐?"
하였다. 송형중이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묻기를,
"홍록(弘錄)이 다 무너지고 한림(翰林)이 잡류(雜流)라고 한 말은 네가 반드시 지적한 것이 있을 것이다. 말 안장이 다 해어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누구를 지적한 것이냐?"
하니, 송형중이 말하기를,
"말 안장이 다 해어졌다는 것은 조진(躁進)·걸애(乞哀)하는 무리들을 가리킨 데에 지나지 않고, 한림 잡류라는 것은 곧 이환(李渙)·정항령(鄭恒齡)·유사흠(柳思欽)·채제공(蔡濟恭)입니다. 채제공은 그 사한(詞翰)이 비록 가상(可尙)하다 하더라도 그 아비가 일찍이 국청(鞫廳) 죄수에게 원인(援引)된 바 되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빨리 물러가라."
하고, 이어 그 소장을 내어 주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몇 해를 고심(苦心)하여도 다스림이 뜻에 맞지 않았으니, 원량(元良)이 대리한 뒤에는 더욱 정백(精白)하여야 하거늘, 송형중이 글로 소장을 만들어 올렸으나 대략 가리킨 뜻이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에 보지 아니했었고 오늘에야 그 글을 읽도록 명령한 것이다. 아! 임금의 고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구습(舊習)만을 자행하고자 하니, 이 무슨 심사란 말인가? 장황한 그 글은 오로지 협잡에만 뜻을 두었는데, 하나는 교묘한 뜻으로 말해 가면서 원보(元輔)154)  를 그 임금에게서 현혹(眩惑)되게 하려고 한 것이었고, 하나는 기관(機關)을 만들어서 좌규(左揆)를 원량에게 참소하여 이간시키고자 한 것이며, 또 하나는 마음을 같이하여 조제(調劑)하는 사람을 기롱하고 무고하여 틈을 타서 공격한 것이니, 한마디로 단정해 말하면, 당습(黨習)을 탐하고 즐겨서 조정의 안온하지 못한 풍습을 배제한 것은 외면상 그 공정함을 가장한 것이다. 아! 민 판부사(閔判府事)의 염아(恬雅)하고 정상(精詳)함을 내가 익숙히 보았거늘, 송형중은 무슨 마음으로 들추어서 호소하는지 그 마음의 소재는 간폐(肝肺)를 보는 것과 같다. 홍낙성(洪樂性)은 아들 때문에 기롱이 아비에게까지 미친 것이니, 불인(不仁)함이 심하다고 이를 만하다. 송형중이 양면으로 이석신(李碩臣)과 김굉(金硡)을 관련짓는 것은 김굉 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뜻이 오로지 옛 중신(重臣)에게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한권 잡류’라는 것은 소시(召試)를 막으려는 계획으로 지극히 통해(痛駭)스런 데 관계되는 일이니, 이름을 지적하여 아뢴 것은 그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다. 채제공에게는 비록 사한을 칭찬하면서도 억지로 다른 일을 끌어대서 한원(翰苑)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그 일의 진위(眞僞)에 대하여는 자연히 억울함을 호소할 자가 있을 것이니 사문(査問)할 필요가 없으나, 그 뜻은 또한 아름답지 못하다.
권상일(權相一)을 특별히 제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헐뜯어 배척하는 것은 그 마음이 더욱 놀라우며, 신치운(申致雲)의 일은 이격(李格)이 권익관(權益寬)과 교결(交結)한 것을 편들었다고 이를 수 있으나 이미 그 증거가 없다면 원방인(遠方人)을 특별히 제수한 자에게 이 연유로 권점(圈點)을 가한 것은 용의(用意)가 착하지 못하다. 구택규(具宅奎)는 곧 좌규가 진달(陳達)한 것이고 구성필(具聖弼)도 또한 고 상신(相臣)이 추천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투(一套)로 함께 기롱하였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 또한 교묘하다. 이랑(吏郞)의 소시와 장망(長望)에 대하여 헐뜯고 비방한 것은 세도(世道)를 기롱한 것이 아니라 곧 처분을 기롱한 것이니, 내가 비록 창안(蒼顔)의 모년(暮年)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러한 황구(黃口)의 연소(年少)한 무리에게 속임을 받겠느냐? 무엄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 포용(褒用)하기를 청한 데 이르러서도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이언세(李彦世)와 송형중은 곧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니, 그 마음의 소재가 이로 인하여 더욱 드러났다. 이위보(李渭輔)의 처분은 김치량(金致良)을 위한 것이 아니었거늘, 그 사어(辭語)가 놀랄 만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도 이를 일컫는 것은 이 또한 하나의 이위보인 것이다. 원보는 암담하다고 헐뜯어 배척했고 좌상(左相)에게는 문자(文字)를 들추어서 지적하였으니, 아! 옛사람이 ‘승냥이와 호랑이를 던지려고 한다.’고 이른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만약 엄하게 물리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속(末俗)을 가다듬고 후곤(後昆)에게 좋은 법을 전해 주겠는가? 송형중은 그 관직을 삭탈하고 방귀 전리(放歸田里)시키어 내가 당인(黨人)을 멀리하고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며 참간(讒間)을 막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송형중을 방귀 전리하는 것은 그에게는 다행한 일이라고 이를 만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윤급(尹汲)의 외보(外補)를 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작(柳綽)의 계달에 ‘밖으로는 공평을 가장하고 안으로는 당습(黨習)을 수행했다.’고 한 구절이 송형중을 잘 형용했다고 이를 만하다. 윤급은 홍원(洪原)에 출보(出補)된 것이 그에게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
하였다. 송형중은 뒷날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주무(綢繆)할 것으로 인하여 절도(絶島)에 천극(栫棘)되었다.

 

이천보(李天輔)를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때 조현명(趙顯命)이 도성 밖에 있었는데, 임금이 동궁(東宮)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좌상(左相)을 불러 이르게 하지 못하면, 나에게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하니, 동궁이 황공하고 민망하여 손수 조현명에게 글을 써서 명령에 따르기를 힘쓰라고 하고는, 그대로 덕성합(德成閤)에 앉아 저녁밥을 들지 않고 승지를 보내어 들어오기를 재촉하였다. 조현명이 부득이하여 들어와 뜰 아래에서 관(冠)을 벗으니, 관을 쓰고 올라오게 하였다. 세자가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이는 내가 불초(不肖)하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나이 어리다고 하더라도 어찌 참소하는 말을 믿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체읍(涕泣)하여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는 춘추(春秋)가 바야흐로 성장(盛壯)하신지라 쉽게 생명을 손상케 하실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숙묘(肅廟)께서 홀로 계셨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신이 또 대조(大朝)께 들으니, 일찍이 저하를 칭찬하시기를, ‘태산(泰山)을 끼고 북해(北海)를 뛰어넘는 기운을 가졌다.’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발월 횡일(發越橫逸)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등의 말로써 차자(箚子) 가운데에 진달했던 것입니다. 횡일이라는 글은 본래 주서(朱書)에서 나왔기 때문에 신이 이끌어 쓴 것이었는데, 이게 송형중(宋瑩中)에게 무함당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만약 저군(儲君)의 과실을 가지고 가만히 군부(君父)의 앞에서 진달하였다고 하면 이는 곧 참적(讒賊)이요 난신(亂臣)인 것입니다. 그 소장의 지향한 뜻이 또한 음험(陰險)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세자가 더불어 함께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니, 조현명이 또 울면서 말하기를,
"신은 다만 이로써 저하의 기질을 찬송(贊頌)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또 직책이 사부(師傅)의 처지에 있기 때문에 진실로 저하의 기질에 병통이 있음을 안다면 즉시 진계(陳戒)한다 해도 의리에 옳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르기를, ‘인신이 저군을 성상 앞에서 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신이 명백히 이해하지 못하는 바이며, 또 ‘난제(難制)’란 두 글자는 신이 올린 차자에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횡일’이란 두 글자는 무슨 책에서 나온 것인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나온 것입니다. 곧 주자(朱子)가 그의 손자를 과장해 허여(許與)한 글입니다. 만약 주자가 그 수하(手下) 사람에게 쓴 것을 동궁(東宮)에게 썼다고 하여 신의 죄로 삼는다면 신은 당연히 말없이 받겠습니다마는, 그것이 찬미(贊美)한 말이란 것은 주서를 상고하여 보면 알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진실로 어렵구나. 이 무리들이 경에게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는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정미년155)   이후로 고 상신 이광좌(李光佐)의 일대(一隊)가 나랏일을 담당하였는데 그들의 논의(論議)가 신 등과는 완급(緩急)과 심천(深淺)의 분별이 없지 아니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 일변(一邊)의 사람들이 저쪽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힘을 쏟느라고 신 등에게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광좌 일대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신 등이 홀로 뭇 화살의 표적(標的)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할 것이다."
하고는, 위유(慰諭)하기를 오래도록 하고 파하였다.

 

8월 23일 기해

서종급(徐宗伋)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강화 유수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강도(江都)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천여 마리나 됩니다. 제(祭)를 베풀어 비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를 위하여 제를 지낸 것이 문헌에 있는가?"
하매, 제조(提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소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문헌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는데 사례(事例)가 없어 이제 중지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전에 ‘시소(試所)의 금란관(禁亂官)은 범유(犯儒)156)  와 더불어 죄를 같이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자(擧子)가 입장하다가 금란관에게 붙잡히게 되어 그 부조(父祖)의 이름을 묻고 범유는 심지어 도둑을 매어 두는 붉은 노끈으로 허리를 매어 두기 때문에 부거(赴擧)하지 못하는 자가 많았고, 향유(鄕儒)들은 심지어 강두(江頭)에서 울고 가버리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혼잡을 경계코자 하여 녹명(錄名)한 단자(單子)를 올리도록 한 것뿐이다. 혼잡하여 수종(隨從)을 돌려보내는 것이 어찌 법을 제정한 본의이겠는가? 녹명관(錄名官)에게 고신률(告身律)을 시행케 하라."
하였다.

 

8월 24일 경자

임금이 친히 의릉(懿陵) 기신(忌辰)에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전하였다.

 

특지(特旨)로 경기 관찰사 김약로(金若魯)를 제배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때에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불러 복상(卜相)하라 명하고 또 가복(加卜)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의 뜻이 김약로에게 있는데도 김재로가 친혐(親嫌)을 이유로 다만 전 판서 이기진(李箕鎭)을 가복하여 들이자, 이에 특지로 김약로를 우상(右相)에 제배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판돈녕으로, 김광세(金光世)를 형조 참판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교리로, 정항령(鄭恒齡)을 지평으로, 박문수(朴文秀)를 판의금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부응교로, 조중회(趙重晦)를 수찬으로, 안윤행(安允行)을 헌납으로, 윤광찬(尹光纘)을 문학으로, 이철보(李喆輔)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에게 명하여 북관(北關)의 영애(嶺隘)를 가서 시찰케 하니, 대개 성진(城津)과 길주(吉州)의 방영(防營)이 편리한가 아니한가를 위한 것이었다. 가기에 이르러 본직(本職) 및 겸 금위 대장(兼禁衛大將)의 명소패(命召牌)를 와서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상(將相)은 같은 것이다. 상신(相臣)이 지경을 나갈 때도 명소패를 반납하지 않는 법인데, 장신(將臣)이 밖에 있다가 만약 징소(徵召)할 일이 있으면 무슨 물건으로 부절(符節)을 맞추어 보겠는가?"
하고, 그대로 몸에 차고서 왕래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참판 윤급(尹汲)이 이미 죄를 입고 외직에 출보(黜補)되어 이천보(李天輔)가 이를 대신하였다. 신치운(申致雲)은 일찍이 승지를 지낸 사람으로서 마땅히 전례에 의거 전망(前望)에 주의(注擬)되어야 하나 이천보가 이를 어렵게 여기고 이에 장전(長銓)157) 정우량(鄭羽良)을 풍자하니 신치운을 출보하여 괴산 군수(槐山郡守)로 삼았는데, 신치운이 성내어 부임하지 않았다. 정우량이 뒤에 또 신치운을 철원(鐵原)에 출보하여 그가 다시 승선(承宣)으로 들어오는 길을 끊어버렸다.

 

8월 27일 계묘

헌납 안윤행(安允行)이 상소하여 윤급(尹汲)과 송형중(宋瑩中)을 소석(疏釋)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가 당(黨)을 두호한다고 꾸짖고 체파(遞罷)하였다.

 

8월 28일 갑진

대사간 조명채(趙命采)가 상서하여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이어서 박성원(朴盛源)의 계달에 종신(宗臣)을 혈침(血忱)으로 허여한 것과 안윤행(安允行)이 조어(措語)를 고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의리에 대처함에 있어 놀랠 만한 것이 있어 모두 대간(臺諫)의 체모를 이루지 못했으니, 박 성원은 삭출(削黜)하는 것이 마땅하며 안윤행은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재(卿宰)를 외읍(外邑)의 수령으로 내보내는 일은 옛부터 이런 예가 없었으니, 안변 부사(安邊府使) 이춘제(李春躋)는 체개(遞改)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종신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하교하셨으며, 이춘제는 일찍이 구례(舊例)가 있다. 나머지는 말한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전 대교(待敎) 채제공(蔡濟恭)이 송형중(宋瑩中)의 연주(筵奏)에서 무고(誣告)한 것을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 대신(臺臣)은 신의 아비의 이름이 국초(鞫招)에 나왔다고 말했는데,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어떤 역적의 초사(招辭)에 어떤 모양의 말로 끌어댔으며 조가(朝家)에서는 어떤 모양으로 처리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신의 아비가 알지 못하고 신은 신의 아비의 자식으로서 알지 못하며 일세(一世)이 이목(耳目)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모두 알지 못하는데, 저 대신(臺臣)이 과연 목격(目擊)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해 들었다는 것입니까? 만일 목격했다면 반드시 문안(文案)이 있을 것이요 만일 전해 들었다면 반드시 전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악명(惡名)인데 홀지(忽地)에 남의 부형을 무함하여 군부(君父)께 기만하기를 용이하게 하니, 사해(四海)의 사람들이 무릇 나를 시기하여 미워함이 있으면 모두 이러한 것으로써 그 부형을 지목하고도 어려워하는 바가 없을 것이니 불가할 것이 없겠습니까? 신의 아비는 무신년158)   뒤로부터 서사(筮仕)하여 교관(敎官)과 금오랑(金吾郞)을 지내고 남쪽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나갔으니, 대신의 말이 천만번 허설(虛說)임을 스스로 용이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통한(痛恨)하며 슬피 우는 것은 지나치게 홍조(洪造)를 입고서 보답을 꾀한 것이 조금도 없는데, 근거 없고 망측(罔測)한 욕이 백수(白首)의 노부(老父)에게 깊이 미치게 하였으니, 하루라도 드러내지 아니하면 이는 하루라도 하늘 아래에 설 낯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사패(司敗)159)  에게 내리시어 송형중과 더불어 분별하고 대질하게 하여 천만번 원통하고 억울한 이 무함을 씻게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글의 말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하교하셨다."
하였다.

 

임금이 탁지(度支)160)  의 여러 낭관(郞官)을 인견하고 공주(公主)·옹주(翁主)의 출합 등록(出閤謄錄)을 이정케 하였으며, 어제(御製)한 임문휼사민(臨門恤四民)의 30운(韻)의 칠언 고시(七言古詩)를 내리고 이를 홍화문(弘化門)에 게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승지 윤광소(尹光紹)에게 채제공의 글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억울함을 호소할 길을 열어 주겠다. 이 말을 승선(承宣)은 일찍이 들었느냐?"
하니, 윤광소가 말하기를,
"단지 신만 홀로 듣지 못한 것이 아니고 정신(廷臣)들 모두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로는 군부(君父)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신하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들어 아는 자가 없으니, 송형중(宋瑩中)이 거짓을 꾸민 것이 저절로 남김없이 탄로되었다. 채제공이 무슨 원통해 할 사단(事端)이 있겠느냐?"
하니, 윤광소가 말하기를,
"요즘 세상 사람들이 다만 구기(口氣)만을 부려서 남을 반역(叛逆)으로 몰고 가기를 마치 다반사(茶飯事)처럼 하니, 세도(世道)의 근심이 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을 이름이 승모(勝母)161)  라 하여 증자(曾子)는 들어가지도 아니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악명(惡名)으로써 남의 부형에게 가하기를 그렇게 용이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채제공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뜻은 다하였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송형중이 ‘국변(國邊)·모변(某邊)’ 등의 말로 반이나 되는 정신(廷臣)을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몰아넣고자 하니, 아! 오늘날의 정신은 모두 세록지신(世祿之臣)인데, 만약 그 사이에서 피차(彼此)를 나누고 망측한 것으로 지목한다면 어찌 대훈(大訓)의 본의라 하겠는가?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채제공이 당한 바는 곧 그 중에 한 가지 일이다. 소시(召試)에 불만을 품고 또 이미 협잡하였다고 굳이 제함(擠陷)코자 하였으니, 그 간폐(肝肺)를 보는 것 같다. 지금 올린 글을 보니 송형중이 거짓을 얽은 것이 스스로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니, 채 체공의 무함을 입은 것이 눈과 같이 소멸되었다. 그 임금을 엄하게 여기고 아비를 위하는 도리에 있어 인사(引辭)162)  할 수 없다. 이로써 신칙(申飭)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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