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1749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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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정미

대리(代理)한 뒤로 전교(傳敎)가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일을 써서 동궁(東宮)에 들이도록 하라고 명하고, 이름하여 윤음초(綸音抄)라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면직하니, 임금이 조현명에게 수서(手書)를 내리기를,
"지금 만약 허부(許副)163)  하면 참소한 사람의 계략에 적중(適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 한번 해면하려 하니, 그 단침(丹忱)을 알 수 있다. 상직(相職)을 해면해 주지 않고서는 반드시 현빈(賢嬪)과 대면하여 하직하기를 즐겨 하지 않고 만리행(萬里行)을 할 것이니, 특별히 면부(勉副)한다."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을 영돈녕부사에 제배하고, 민백행(閔百行)을 대사간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지평으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우참찬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윤으로 삼았다.

 

관동(關東)·관서(關西)·관북(關北)·해서(海西)에서는 금년 탄일(誕日)에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바치지 말라고 명하니, 4도(四道)가 굶주림의 어려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부사 민응수(閔應洙)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나라를 떠나 버린 지 지금 몇 달인가? 경이 중재(重宰) 때부터 내가 익히 알고 있다. 어찌 자식을 위하여 임금을 속였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경은 등불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자기 벼의 싹이 큰 것을 모른다는 기롱은 이미 공심(公心)이 아닌 것이다. 아! 저 송형중(宋瑩中)이 또 무엇을 풀어 보겠다는 것인가? 곧 길에 올라서 나의 뜻에 부응(副應)토록 하라."
하였다.

 

9월 3일 무신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수찬 조중회(趙重晦)가 말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능히 지키는 바를 변하지 않고 그 임금을 따르는 것은 곧 양신(良臣)입니다. 윤급(尹汲)이 신치운(申致雲)을 승지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것은 곧 직책을 다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지방으로 내치신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성내어 조중회가 편당(偏黨)한다고 하여 파직시켰다.

 

9월 4일 기유

양주(楊州)의 유생(儒生) 박치신(朴致新) 등이 상서하여 효종(孝宗)과 숙종(肅宗) 양묘(兩廟)를 황단(皇壇)에 배제(配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불러 묻기를,
"제후(諸侯)를 천자(天子)에 배제하는 예(禮)는 없다. 또 황단에는 삼제(三帝)164)  를 제향하는데, 양묘를 배향하는 것은 수효가 서로 맞지 않는다. 어떠한 제도로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박치신이 능히 대답을 못하매, 퇴출(退出)을 명하고 이어 세자에게 이르기를,
"저들은 그 뜻이 오로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후일에 만약 더 배향하려는 자가 있어도 나는 배향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를 사책(史策)에 쓰라고 명하였다.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과 호조 참판 남태량(南泰良)과 서장관 신위(申暐)를 보내어 연경(燕京)으로 떠났다.

 

9월 5일 경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면직되었다. 처음에 김재로가 송형중(宋瑩中)의 소장으로 인책하여 면직을 빌었다. 임금이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언세(李彦世)가 일찍이 신을 ‘완안(完顔)165)  의 세작(細作)166)  이었던 진회(秦檜)167)  이다.’ 하였는데, 지금 송형중이 노인(虜人)을 관대(款待)하는 행동이라고 이른 말은 곧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의 종제(從弟) 김약로(金若魯)가 입상(入相)하였다는 이유로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9월 9일 갑인

유성(流星)이 북두(北斗)의 아래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9월 10일 을묘

원점 유생(圓點儒生)을 시험하여 생원(生員) 이휘중(李徽中)에게 급제를 내렸다.

 

9월 11일 병진

우의정 김약로가 네 번이나 사직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9월 12일 정사

우의정 김약로가 배명(拜命)하니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대리(代理)하게 하신 뒤에 군국 대사(軍國大事)를 전하께서 비록 총람(摠攬)하신다고 하나 점점 전과 같지 않으시고, 차대(次對)도 폐각(廢閣)하시어 신료(臣僚)들이 진대(進對)할 길이 없어지고 소장의 봉입(捧入)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저 송형중(宋瑩中)이 소장으로 삼대신(三大臣)을 배척한 것은 큰 소장이라고 이를 수 있는데도, 승지의 진달(陳達)이 아니었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또 연설(筵說)의 금지가 근래에 와서 매우 엄하기 때문에 연중(筵中)에서 수작한 것을 방외(方外)에서는 전혀 들어서 알 길이 없고 심지어 대신(大臣)까지도 알지 못하게 하시니, 되겠습니까?"
하고, 강화 유수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러한 법은 혼조(昏朝)168)  에서 비롯된 것이요 옛적에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원경하가 이어 존호(尊號)에 대한 일을 논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이 일찍이 이견(異見)을 세웠습니다마는, 김재로(金在魯)는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고 근일에는 종신(宗臣)도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를 따르신다 해서 무슨 해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원경하가 일찍이 존호를 받지 말 것을 청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전설(前說)을 변경하니,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려 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원경하가 오래도록 외방으로 배척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용(進用)되기를 희도(希圖)하여 이러한 말을 해서 위에 곱게 보이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여러 도(道)에서 우역(牛疫)으로 소가 거의 다 죽어서 사람을 써서 밭을 갈기에 이르렀는데, 원경하가 옛날 마조(馬祖)에게 기도한 사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마련하여 재앙을 물리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각 고을에서는 중앙에 단(壇)을 만들게 하고 서울에서는 마단(馬壇) 가운데에 함께 목신(牧神)을 설치하게 하자’고 하여, 드디어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도재(屠宰)를 금하게 하고 서울의 현방(懸房)169)  은 한 달을 한정하여 파하게 하였다.

 

9월 14일 기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서울 밖의 아문(衙門)에서 급채(給債)하는 것을 금지하고 사채(私債)는 10분의 2의 이식을 취하는 이외에 수(數)를 더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약로가 전시(廛市)의 각리(榷利)170)   및 동임(洞任)이 백성을 침해하는 폐단을 아뢰니, 비국 당상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외읍(外邑) 토호(土豪)들의 침학(侵虐)이 더욱 심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하게 신칙하도록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창의가 조금 전에 도신(道臣)을 지내고 왔는데 이러한 폐단을 금하지 못한 듯하니, 그를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물자의 낭비는 모두 사치하는 길이다. 각도(各道)에서 봉상(封上)한 부채[扇子]가 몸통이 전에 비교하여 크고 간폭(簡幅)도 또한 그러하다. 옛말에 이르기를, ‘궁중(宮中)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니 사방(四方)에서 높이를 한 자[尺]로 한다.’고 하였다. 어공(御供)도 이미 간략한 것을 따르는데 하물며 밑에 있는 자이겠느냐?"
하고, 비국에 명하여 구제(舊制)를 회복하도록 엄하게 신칙하였다.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윤광찬(尹光纘)·이극록(李克祿)을 지평으로, 윤동도(尹東度)를 교리로, 이게(李垍)를 부교리로, 김양택(金陽澤)을 겸 사서로, 홍봉한(洪鳳漢)을 예조 참판으로, 황정(黃晸)을 호조 참판으로, 이창수(李昌壽)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조신(朝臣)에게 명하여 말미를 받고 기한이 지난 자 중에서 중재(重宰)는 추고(推考)하고 3품 이하는 금추(禁推)171)  하도록 하였다.

 

충청우도의 감시 도사(監試都事) 민수언(閔洙彦)과 참시관(參試官) 남혜로(南惠老)·민광우(閔光遇)를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호우(湖右)의 시방(試榜)에 대하여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니, 마땅히 죄를 논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수언이 공초(供招)를 바쳐 스스로 변명하기에 이르러서 정우량이 또 소를 올려 말하기를,
"주시관(主試官)의 동내(洞內)에 있는 선비가 경기 지방의 사람으로서 호우의 시방에 참여하였는데도 즐겨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신은 실로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형조(刑曹)에 명하여 그 시방에 참여한 자를 추문(推問)토록 하였다.

 

9월 15일 경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9월 17일 임술

이제원(李濟遠)을 승지로, 김상철(金尙喆)을 응교로, 어석윤(魚錫胤)을 교리로, 김치인(金致仁)을 문학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조운규(趙雲逵)를 겸 보덕으로 삼았다.

 

9월 18일 계해

선목단(先牧壇)에 제사하는 의식을 수거(修擧)하도록 명하였다. 《오례의(五禮儀)》에, ‘중하(仲夏)172)  의 두 번째 절후 다음 강일(剛日)173)  에 선목에게 제사하되 마사(馬社)와 마보(馬步)로써 배향하며, 단은 동교(東郊)에 있다. 축판(祝版)에는 조선왕(朝鮮王)이라 일컬으며, 생뢰(牲牢)는 돼지 한 마리로 하고 사관(祀官)은 3품으로 하며 4배(四拜)에 3헌(三獻)으로 한다. 음복(飮福)하고 수조(受胙)174)  하며 축문과 폐백을 묻는다. 그 나머지는 영성(靈星)에 제사하는 의절과 같다.’ 하였다. 오사(五祀)에서는 소사(小祀)에 속하는데, 중간에 폐지하고 시행하지 아니하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이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받아들여 장차 우역(牛疫)을 빌려고 이 제도를 다듬고 대신에게 물으니, 다른 말이 없었다. 예조에서 길한 날을 가리어 단을 살곶이[箭串] 마장(馬場) 안에 쌓고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위판(位版)을 만들었는데, 오방(五方)의 신위(神位)는 동방(東方)에 6위(六位)와 서쪽·남쪽·북쪽·중앙에 모두 7위(七位)로 선목위(先牧位)는 동방에 있고 천사위(天駟位)는 아래이다.
신이 살펴보건대, 마사·선목·마보 등의 단은 고려조의 의종(毅宗) 때에 시작되었는데, 단의 너비는 9보(步)요 높이는 3척이며, 사방(四方) 섬돌[陛]이 나오게 하고 제단의 토담[壝]은 아울러 15보이다. 축문과 폐백을 묻는 구덩이는 모두 신단(神壇)의 임방(壬方)에 있는데, 남쪽으로 섬돌을 내고 모가 나고 깊어서 물건을 용납하기에 족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비록 소사이기는 하나 또한 볼 만한 것이 있었으며, 이때 비록 우역으로 인하여 수복(修復)하였으나 그 뒤에는 마침내 아뢰는 것이 없었으니, 아! 예(禮)를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 수복하여 밝힐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 사전(祀典)뿐이겠는가?

 

9월 19일 갑자

탁지(度支)의 정제(定制)가 이루어졌다. 처음에 임금이 궁중(宮中)의 일용(日用) 및 국혼(國婚)의 모든 수용(需用)이 지나치게 넘치기도 하고 새어나가 빠지기도 한 것이 많다고 하여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에게 명하여 그 해에 적합하게 돈 3만 관 이상을 줄일 것을 작정케 하였다. 또 제사(諸司)의 부비(浮費) 및 상공(上供)하는 숫자를 회감(會減)할 것을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서책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박문수를 인견하고 어필(御筆)로 또 ‘쓸데없는 비용을 삭감했다[剋減冗費]’라는 글자를 써서 그 글을 사각(史閣)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지돈녕(知敦寧) 이종성(李宗城)이 부름을 받고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종성이 소를 올려 이광좌(李光佐)를 구원한 이후로 전리(田里)에 물러가 살면서 전후의 제명(除命)에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김약로(金若魯)가 불러들일 것을 굳이 청하여 임금이 약원 제조(藥院提調)를 제수하니, 이종성이 드디어 명을 받들었던 것이다. 임금이 불러 보니, 이종성이 풍(風)을 앓고 있다고 일컬으며 포복(匍伏)하여 어전(御殿)에 오르매, 부액(扶腋)하여 들어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을 보지 못한 지가 5년이나 되었다. 경의 아비를 생각하니, 슬픔이 심하다."
하니, 이종성이 눈물을 흘리며 진사(陳謝)하고 인하여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이미 차대(次對)를 파하셨고 또 뭇 신하들의 장주(章奏)하는 길을 막으셨는데, 그러고서도 성상께서 크나큰 책무를 동궁(東宮)에게 맡기신 것은 어찌 수응(酬應)의 수고로움을 간편히 하고 이색(頤嗇)의 편안함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저하(邸下)께서 예질(睿質)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니, 비록 몽양(蒙養)하는 때는 아닐지라도 모든 일에 숙습(熟習)하면 쉽게 알고 경력(經歷)하면 쉽게 행하지마는, 숙습함에 미치지 못하고 경력이 부족한데도 반드시 알아서 행하게 하려고 하게 되면 자연히 정신이 피로하게 되고 외면에서 피로하게 되면 내면에 손상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무릇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서 30년 동안 신고(辛苦)하며 수응하시던 것을 하루아침에 이를 동궁에게 책임지워 독려(督勵)하시니, 어찌 크게 피로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유독 관대하게 대처하시는 그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러 신하들의 진주(陳奏)를 전하께서는 한번 그 단서만 들으셔도 벌써 그 지의(旨意)를 깨닫고 뭇 신하들의 소계(疏啓)도 잠깐 줄거리만 보시면 벌써 그 수미(首尾)를 살피시는데도 오히려 한가한 때가 없음을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궁께서는 인정과 물태(物態), 그리고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획을 아직 두루 살피고 두루 알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내리는 답과 판하(判下)하는 비답에 긴요하거나 한만(閒漫)함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사려를 소비해야 할 것이니, 어찌 신기(神氣)가 손상(損傷)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언제나 이러한 청에 반드시 이이(訑訑)한 안색을 보이시고는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자주 내리시면서 도리어 꺾고 막곤 하시니, 신(臣)은 그윽이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 자제(子弟)는 반드시 그 부형을 본받는 것인지라 전하께서 비록 주색(酒色)의 실수나 유전(遊畋)175)  의 오락은 없다 하더라도 홀로 깊숙한 궁궐 안에 계시면서 만일이라도 연안(宴安)과 일예(逸豫)로써 만년의 낙을 삼으신다면 동궁께서도 장차 이를 본받을 것이니, 옳지 못함이 없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비록 따르지는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이를 꺼려하였다. 이내 하교하기를,
"근래에 와서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옛말에 ‘궁중(宮中)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그 높이가 한 자나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와 반대다. 원량(元良)은 나이가 아직 어리니, 혹 마음이 사치의 풍조로 옮겨질까 두렵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 유악(帷幄)에 들어와서 성상께서 입으신 의복이 소박하고 검소하여 거의 사치하는 사부(士夫)에게도 미치지 못함을 보았습니다마는, 그윽이 궁성(宮省) 안이 반드시 성상의 절검(節儉)하심과 같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윤음(綸音)을 내리어 중외(中外)의 사치하는 풍습을 금하니〈그 글이〉 무려 백천언(百千言)이나 되었다. 드디어 그 윤음을 이종성에게 보이니, 이종성이 대답하기를,
"이는 곧 전하께서 몸소 행하여 인도하심이 미진하여 그런 것입니다. 민간의 사치는 반드시 궁양(宮樣)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묵묵히 말이 없었다. 이종성이 잇달아 군포(軍布)를 작미(作米)로 한 폐단을 아뢰니, 임금이 그 두량(斗量)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이종성에게 머물러 있기를 권하니, 이종성이 병상(病狀)을 아뢰고 물러갈 것을 매우 힘써 구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서명형(徐命珩)으로 도승지를 삼았다.

 

9월 21일 병인

임금이 대신과 호조 판서를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사대부(士大夫)들이 혼인하는 날에 납폐(納幣)하고 또 친영(親迎)을 하지 아니하며 관례(冠禮)도 또한 흔히 폐지하고 거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우의정 김약로(金若魯)와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가난하고 군색하여 예(禮)를 갖출 수 없고 또 부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행하기를 즐겨 하지 아니함이니, 이 또한 사치하는 폐단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친영은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기일 전에 납폐하는 것을 왜 꺼려하고 행하지 아니하느냐?"
하고, 이에 신칙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또 국혼(國婚)의 동뢰연(同牢宴)176)  에는 다만 다과(茶菓) 두어 그릇만을 쓰고 유밀과(油蜜果)의 잔치상은 모두 제거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탁지(度支)의 정제(定制)가 비록 이루어졌지만, 이 밖에 혹 궁중(宮中)으로부터 취용(取用)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이것은 별례(別例)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한번 취용하면 이로 인하여 규례가 되어 혹시 그 안에 작간(作奸)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따로 정제를 만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하교하기를,
"무릇 대내(大內)로부터 취용할 경우에는 중관(中官)이 반드시 전교(傳敎)의 계하 단자(啓下單子)를 들은 연후에 비로소 취용을 허락토록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탁지의 신하가 집행하고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국초(國初)에 대사헌 남재(南在)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대내(大內)에 쓸 재화(財貨)가 있으면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승지에게 전하고 승지가 복계(覆啓)하여 임금 앞에서 왕패(王牌)를 써서 내린 다음에 시행했는데, 고려 말에 와서는 내시가 직접 왕패를 내리고 승지에게 관여시키지 아니하여 속이고 거짓으로 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대내에 쓸 것이 있으면 승지가 친히 계품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지금의 의정부이다.】 에 내리어 그 폐단을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다. 근세(近世)에 오면서 이 법이 폐지되고 해이해져서 무릇 각사(各司)에 취용할 것이 있으면 중관이 조각 종이에 물명(物名)을 써서 그 조(曹)의 하리(下吏)를 불러서 보이고 상납할 것을 책임지웠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속이는 폐단이 날로 불어나서 거짓으로 원각(苑閣)을 개수한다고 일컫고 중관이 이례(吏隷)와 더불어 서로 짜고 2천 민(緡) 이상을 도취(盜取)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종류가 한 가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문수가 청하여 정제를 만들었던 것이니, 진실로 그 직책을 잘 수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정례(定例)가 있는데도 또 별례(別例)를 두고 혁파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대내로부터의 비용을 함부로 취하던 법을 옛 그대로 두고 제거치 않는 것이어서 정례는 특히 하나의 헛된 문서일 뿐이니, 어디에 그 삭감한 뜻이 있다고 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51면
【분류】풍속(風俗) / 역사(歷史)


[註 176] 동뢰연(同牢宴) : 신랑과 신부가 교배례(交拜禮)를 마치고 서로 술잔을 나누는 잔치.
사신(史臣)은 말한다. 국초(國初)에 대사헌 남재(南在)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대내(大內)에 쓸 재화(財貨)가 있으면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승지에게 전하고 승지가 복계(覆啓)하여 임금 앞에서 왕패(王牌)를 써서 내린 다음에 시행했는데, 고려 말에 와서는 내시가 직접 왕패를 내리고 승지에게 관여시키지 아니하여 속이고 거짓으로 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대내에 쓸 것이 있으면 승지가 친히 계품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지금의 의정부이다.】 에 내리어 그 폐단을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다. 근세(近世)에 오면서 이 법이 폐지되고 해이해져서 무릇 각사(各司)에 취용할 것이 있으면 중관이 조각 종이에 물명(物名)을 써서 그 조(曹)의 하리(下吏)를 불러서 보이고 상납할 것을 책임지웠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속이는 폐단이 날로 불어나서 거짓으로 원각(苑閣)을 개수한다고 일컫고 중관이 이례(吏隷)와 더불어 서로 짜고 2천 민(緡) 이상을 도취(盜取)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종류가 한 가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문수가 청하여 정제를 만들었던 것이니, 진실로 그 직책을 잘 수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정례(定例)가 있는데도 또 별례(別例)를 두고 혁파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대내로부터의 비용을 함부로 취하던 법을 옛 그대로 두고 제거치 않는 것이어서 정례는 특히 하나의 헛된 문서일 뿐이니, 어디에 그 삭감한 뜻이 있다고 하겠는가?

 

구윤명(具允明)·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조돈(趙暾)을 수찬으로, 조재호(趙載浩)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3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황해 병사 신덕하(申德夏)의 장계(狀啓)에 ‘토산(免山)을 이구촌(梨丘村)으로 옮기어 백치진(白峙鎭)과 보거(輔車)177)  의 형세로 만들고 금천(金川)을 청석령(靑石嶺)과 여현(礪峴)의 양로(兩路) 교차점으로 옮기어 후영(後營)을 겸하여 관할토록 하며, 평산(平山)을 독진(獨鎭)으로 만들어 태백 산성(太白山城)을 전관(專管)케 하고 극성(蕀城)을 쌓을 것과 영(營)을 옮길 것’을 청했습니다. 곤궁한 시기에 늘어나는 일을 비록 가볍게 논의할 수 없으나 관도(官道)를 옮기고 영애(嶺隘)를 끊는 일만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부인(婦人)들의 계제(髻制)178)  를 논하니, 이조 참판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머리 쪽의 다리는 본래 고례(古禮)가 아닙니다."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다리는 다른 사람의 머리털을 취하여 머리를 꾸미는 것이니, 더욱 예가 아닙니다. 금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다리의 비용이 많게는 백금(百金)에까지 이르고 있어 사람들이 모두 파산(破産)한다고 합니다. 만약 금한다면 사치를 제거하는 일단(一端)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리를 없애고 대신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금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 사관(史官) 이의철(李宜哲)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다리는 곧 주례(周禮) 부편차(副編次)의 유제(遺制)이니, 예가 아니라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머리털을 취하는 것은 의례(儀禮)의 정주(鄭註)에 ‘형인(刑人)이나 천한 자의 머리털을 취하여 만든다.’고 일렀습니다. 대개 옛사람이 신체 발부(身體髮膚)는 감히 훼상(毁傷)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모름지기 형인의 머리털을 취하여 왕후로부터 그 이하 모두 쓸 수 있었으니, 지금 또 여기에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다만 사치를 금하고자 이를 없앤다면 사치의 근본이 다리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비록 다른 물건으로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또 장차 그 물건에 대하여도 사치를 할 것이니 무슨 이익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은 말이다. 여러 신하들이 자기 집안 사람들의 사치스런 다리를 금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금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의 혼구(婚媾)도 또한 각각 그 동류(同類)를 따르는 것인데, 만약 지금 피차(彼此)의 두 당(黨)이 서로 혼인을 맺는다면 또한 좋지 않겠느냐?"
하니, 판부사(判府事) 김재로(金在魯)와 강화 유수(江華留守) 원경하(元景夏)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신데 어찌 감동하여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각각 그 당을 좋아하여 비록 항우(項羽)가 임금이 되어 힘으로 제어하더라도 능히 막지 못할 것이다."
하매, 승지 윤광의(尹光毅)가 말하기를,
"금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스스로 요순(堯舜)의 도(道)를 행하고 있다고 여기는데, 누가 능히 금하겠느냐?"
하였다.

 

9월 25일 경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 김약로가 백성을 사랑하고 사치를 물리치며 재용(財用)을 줄일 것을 상달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장령 구윤명(具允明)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고, 헌납 이창유(李昌儒)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구윤명이 이증(李增)의 일로 상달한 것을 빨리 청종(聽從)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아뢰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성의(聖意)를 따를 것이다."
하였다.

 

9월 26일 신미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9월 27일 임신

조중회(趙重晦)를 헌납으로, 조돈(趙暾)을 부교리로, 서명구(徐命九)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9월 29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혜당(惠堂)을 인견하고 공인(貢人)179)  에게 순전(純錢)을 주도록 명하니, 재화가 귀하기 때문이었다. 강화 유수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권혜(權嵆)·권집(權䌖)의 옥사는 아직도 그 뿌리를 뽑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만약 담당해 다스린다면 사정을 캐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면 반드시 만연(蔓延)하기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9월 30일 을해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장령 구윤명(具允明)과 지평 이극록(李克祿)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구윤명·이극록과 여러 신하들이 또 이관(李爟)·권숭(權崇)·권돈(權𡼖)이 이증(李增)과 더불어 안팎으로 서로 호응한 정상(情狀)을 힘써 말하고 이어 빨리 대신의 상달에 따를 것을 청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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