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174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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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자

임금이 소양(搔癢)의 증후가 있어 이날부터 약원(藥院)에서 문후(問候)하였다.

 

10월 2일 정축

헌부(憲府) 【지평 이극록(李克祿)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작년 겨울에 이증(李增)이 입대(入對)를 청했을 때의 연화(筵話)가 얼마나 엄중한 것이었는데, 이미 부자(父子) 사이일지라도 서로 전하지 말라는 성교(聖敎)가 있었다면 비록 숙질(叔姪)의 사이라 하더라도 감히 서로 전하지 아니해야 할 것인 데도 해릉군(海陵君) 이관(李爟)이 나와서 역적 권혜(權嵆)를 보고 ‘우리 집의 경사이다.’라는 말이 있기까지에 이르러서 그 사이의 수작(酬酢)이 현저하게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니, 한번의 구핵(究覈)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해릉군 관을 잡아다 국문하여 엄하게 신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4일 기묘

북도(北道)의 6진(六鎭)이 굶주림에 시달려 임금이 우의정 김약로와 호조 판서 박문수를 불러 증제(拯濟)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10월 5일 경진

장령 구윤명(具允明)이 상서하기를,
"중국의 제도에 천자(天子)는 누른빛의 옷을 입기 때문에 신하는 복색(服色)을 같지 않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는 군상(君上)이 홍곤(紅袞)을 입는데도 당하(堂下)의 조신(朝臣) 및 환시(宦寺)와 액례(掖隷)가 모두 복색이 붉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 사람들이 일찍이 상하의 구별이 없다고 기롱했다 합니다. 선묘(宣廟)임진년180)  에 비로소 금홍(禁紅)의 영을 내린 바 있었으나 그뒤에 예관(禮官) 유근(柳根)이 고사(故事)를 의주(儀註)에 잘못 끌어다 쓴 관계로 다시 홍포(紅袍)를 쓰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황조 대전(皇朝大典)의 법을 따라서 당하관은 청록포(靑綠袍)를 입게 하고 부인(婦人)의 머리 쪽 또한 명나라의 예를 따라 관식(冠飾)으로 대신토록 하며, 공사(公私)의 길흉 연제(宴祭)와 사성(使星)의 지공(支供)에도 아울러 유밀과(油蜜果)를 금하게 하소서."
하고, 또 술을 금하여 곡물을 낭비하지 않게 할 것을 거듭 상달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마땅히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신(朝臣)의 복색을 2품(二品) 이상은 구제(舊制)에 담홍(淡紅)을 쓰게 한 것은 지위가 높고 임금과 가까이 있어서 혐의하여 복색을 붉게 아니했던 것이며, 당하관의 붉은 복색은 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변경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화관(華冠)은 비록 머리 쪽을 대신할 만하나 만약 성식(盛飾)을 한다면 그 사치스러움이 머리 쪽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난번에 이의철(李宜哲)의 말이 합당하다. 유밀과를 제용(祭用)에서도 금한다면 지나치며, 술은 지난번에 이미 금한 바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금하면 백성을 침해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10월 6일 신사

신사건(申思建)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심육(沈錥)을 좨주(祭酒)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進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집의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박창윤(朴昌潤)을 장령으로, 심관(沈鑵)을 지평으로, 신회(申晦)를 헌납으로, 김시찬(金時粲)을 대사성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부수찬으로, 성범석(成範錫)과 조재민(趙載敏)을 승지로 삼았다.

 

내의원(內醫院)에서 전례에 따라 우락(牛酪)을 올렸다. 하루는 임금이 암소의 뒤에 작은 송아지가 따라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측연(惻然)히 여기며 어공(御供)에 낙죽(酪粥)을 정지토록 명하였다.

 

10월 7일 임오

삼사(三司)와 제사(諸司)에서 동궁(東宮)에게 청대(請對)하였다. 대사헌 신사건(申思建), 대사간 조명겸(趙明謙), 집의 윤지태(尹志泰), 헌납 신회(申晦), 장령 구윤명(具允明), 지평 심관(沈鑵)·이극록(李克祿), 정언 이양천(李亮天), 응교 조운규(趙雲逵), 교리 어석윤(魚錫胤)·윤동도(尹東度), 수찬 이이장(李彛章)이 합사(合辭)하여 이증(李增)과 이관(李爟)을 설국(設鞫)하여 엄하게 문초할 것을 청하면서 매우 힘써 논쟁(論爭)을 벌이니, 이에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종친을 돈독하게 여기시는 뜻을 우러러 본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이익원(李翼元)이 이증의 상달을 논한 뒤로부터 뭇 신하들이 번갈아 처분하기를 청하였고, 조운규(趙雲逵)도 또한 일찍이 대조께 진달하기를,
"증의 죄는 셋이 있으니 요서(妖書)의 변(變)을 즉시 들어와서 고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요, 승언(承彦)과 촛불을 잡은 비녀(婢女)를 즉시 장신(杖訊)하지 아니한 것이 두 번째이며, 그가 청대(請對)한 자리에서 있었던 말을 전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갑자기 그의 서숙(庶叔)인 해릉군(海陵君) 이관에게 퍼뜨려서 역적 권혜와 더불어 서로 고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 옥사가 요탄(妖誕)하고 음비(陰秘)하여 그 단서를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여러 번 형(刑)을 가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얻어내지 못하자, 이날에 삼사에서 극력 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임금이 이를 듣고 삼사의 관원을 불러서 입시(入侍)케 하고 유시하기를,
"대신(臺臣)들은 꿈을 깨었느냐? 처음에는 어찌하여 막연(漠然)하게 있다가 지금은 어찌하여 총급하게 서두르느냐? 이증이 진실로 일을 잘 처리하지는 못하였지만, 부범(負犯)한 바가 있다고 이른다면 지나치다. 그러나 이것은 추대(推戴)와는 다른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느냐? 그 서숙 관의 경사라고 한 말은 속담에 이른바 ‘혀 밑에 도끼’인 것이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하교하기를,
"나의 종속(宗屬)들이 이러한 일로 그르친 사람이 많았는데, 증이 또 폐사(廢死)하게 된다면 어떻게 지하에 돌아가서 성조(聖祖)를 뵙겠느냐? 분명히 죽을 만한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 어떻게 나의 종친(宗親) 두어 사람을 비호(庇護)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화근(禍根)을 제거하지 않아서 숨겨진 근심이 아직도 잠복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운규의 ‘조반(朝班)에서 증을 보면 자연히 살이 떨린다.’고 이른 것은 어찌 지나치지 않는가? 한번 이익원의 수립(樹立)한 말이 있은 뒤로부터 구윤명이 계속하여 그치지 아니하고 어석윤은 이 논의를 의위(依違)181)  하는 사람을 난신(亂臣)이라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지나친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속으로 근심하는 것은 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오늘 증을 논하고 아울러 관에게까지 미친 것은 바로 소설(小說)의 ‘술취한 중’의 일과 같다. 술에 취한 중이 금강불(金剛佛)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때리고 또 장차 자기를 때릴 것이라 여기어 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고 그만두지 않는다면 종신 일문(宗臣一門)을 전부 죄주고자 하는 것이냐?"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힘써 논쟁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니,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려 물러가게 하였다.

 

10월 8일 계미

구윤명(具允明)을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고,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삼사에서 합사(合辭)하여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이미 하교하셨다."
하였다.

 

전일(前日)에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비록 이증(李增)에게 죄줄 것을 청했으나 재일(齋日)이었기 때문에 미처 합사로 율(律)을 정하지 못했다가 엄한 하교를 받고는 비로소 고쳐서 섬에 안치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명소(命召)하고 유시하기를,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대개 뜻이 있어서이다. 어제 논쟁한 바를 보고 한마디 한마디가 갈수록 깊어질 염려가 있었는데, 지금 달사(達辭)를 보니 군신(君臣)의 사이에 서로 믿음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처분하려는 것이다. 오늘의 일을 내가 어찌 듣기를 좋아했겠느냐? 내게는 다만 8촌(八寸) 두어 사람이 있는데 장차 죽음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이 처분이 있게 된 것이나, 나는 이미 마음에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한 후에도 어떻게 감히 임금을 지척(咫尺)에서 속이겠느냐? 만약 더 청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대신(臺臣)이라 하더라도 또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제신(諸臣)들은 모름지기 내가 오늘 바로 윤허하는 뜻을 짐작하라."
하였다. 대사헌 신사건과 대사간 조명겸과 응교 조운규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체(臺體)로서는 본시 차례에 의해 가율(加律)하는 것이 마땅하나, 어저께 성교(聖敎)에 ‘조금 늦추어 준다면 마땅히 윤허해 따를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에 급히 우러러 받들려는 마음에서 비록 가율하지 않았으나, 지금 또 하교가 여기에 이르시니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증(增)이 섬에 귀양가는 것은 내 마음에 창감(愴感)하여 안율(按律)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경들도 또한 안율하는 것으로써 아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어 증을 제주(濟州)에 안치할 것을 명하고 그가 경과하는 고을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도와주게 하였으며 섬에 도착한 뒤에도 의식과 약이(藥餌)를 주게 하였다. 증의 집에서 옛부터 인빈(仁嬪)의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의 아우 이학(李嶨)에게 일을 도와 받들도록 명하였다. 이때 학의 이름이 대달(臺達) 속에 있었으므로 파직(罷職)을 명하였다. 조운규가 또 권숭(權崇)과 권돈(權𡼖)을 엄하게 문초하여 그 근인(根因)을 캐기를 청하니, 권숭은 설국(設鞫)하고 이관(李爟)은 잡아와서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당초 권숭이 대죄(待罪)할 때에 그의 친교(親交)가 노차(路次)에서 위문하는 자가 있었는데, 조재호(趙載浩)가 이를 상전(上前)에 아뢰었었다. 이때 이르러 헌신(憲臣)이 그 사람을 추궁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여서 해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니, 곧 이노(李魯)와 조영익(趙榮益)이었다.

 

종실(宗室) 전춘군(全春君) 이계(李堦)가 죄가 있어 형을 받고 유배(流配)되었다. 계는 성질이 사갈(蛇蝎)과 같고 행실이 구체(狗彘)와 같아서 부모에게 불효(不孝)하고 형제에게 불선(不善)하였으며 후매(詬罵)와 투혁(鬪鬩)이 없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질녀(姪女)와 한 도포[袍]를 가지고 서로 다투다가 섶나무[祡楥]를 빼내어 크게 구타를 가하였는데, 계의 적모(嫡母)가 그의 손녀를 구하고자 몸으로 호위하여 가리니 계가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치매, 피가 줄줄 흘렀다. 그 어미가 계의 형 이돈(李墩)을 몹시 꾸짖으면서 유사(攸司)에게 급히 고하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만약 고하지 아니하면 내가 장차 너까지 아울러 조정(朝廷)에 고하겠다."
하니, 돈이 그의 죄악(罪惡)을 갖추어 쓰고 동임(洞任)으로 하여금 대신 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부(王府)에 내려 계를 국문하라고 명하니, 잘못 부딪쳤다고 공술하고 돈도 또한 모호하게 공술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단지 계만 형배(刑配)하라고 명하였다.

 

10월 9일 갑신

임금이 승문원(承文院)에 임어하여 권숭(權崇)을 친국(親鞫)하였다. 묻기를,
"권혜(權嵆)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흉참(凶慘)한 글을 제집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아비 권집(權䌖)에게 가서 보였다고 말하였는데, 권혜가 가서 보인 익명서(匿名書)가 얼마나 음참(陰慘)한 것이였는데도 네가 그 곁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엄한 말로 준절하게 물리치지 아니했느냐? 설혹 권집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네 아비의 ‘삼조 설문(三條設問)’이란 또 얼마나 음참한 것이었더냐? 그런데도 너의 도리로서는 읍간(泣諫)하며 만류하여 그치도록 해야 옳았겠느냐 심상(尋常)한 것같이 듣고만 있어야 옳았겠느냐? 이렇게 하지 않고 난만(爛漫)하게 동참(同參)했으니, 그 마음이 있는 바를 어찌 감히 가려 숨길 수 있겠느냐? 하물며 너의 아비가 과연 범한 바가 없는데도 권혜가 만약 무함(誣陷)을 했다면 국체(鞫體)가 비록 엄하다고 하더라도 인자(人子)된 도리로서 어찌 실상을 고백하여 자명(自明)하는 방도가 없었겠느냐? 그런데 오히려 지금까지 적연(寂然)히 있었으니, 이는 주무(綢繆)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니, 권숭이 공술하기를,
"동짓달 초나흗날 신이 거처하는 방 안으로부터 신의 아비를 보기 위하여 나와서 대청 앞에 이르러 신의 아비가 질탄(叱歎)하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만약 죽으려 거든 임의대로 해라.’ 하기에 신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즉시 들어갔더니, 권혜가 그 곁에 있었습니다. 신이 신의 아비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질탄하십니까?’ 하니, 신의 아비가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괴상한 아이가 있느냐? 어저께 권혜가 제집으로부터 와서 어떤 물건을 보이기에 내가 그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서학동(西學洞) 숙부 여천군(驪川君)에 해당되는 일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이냐? 네가 어디에서 이러한 것을 얻어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느냐?」고 했더니, 권혜가 말하기를, 「동짓날에 서학동 시사(時祀)에 참예하기 위하여 갔는데, 사우(祠宇)에 봉안(奉安)한 뒤에 여천군이 나오더니 다만 숙질과 형제만 남겨 두고 다른 사람은 모두 물리치기 때문에 의아(疑訝)하고 괴이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왔었고, 그의 여자종[婢]에 세분(世分)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도 또한 한 괴이한 물건을 얻었기에 그것을 빼앗아 보았는데, 그 가운데에 여천군의 이름자가 있어서 일이 매우 괴이하니 여천군에 해당되는 것 같다.」고 이르기에, 내가 말하기를, 「익명서는 국법(國法)에 부자(父子)의 사이라도 서로 전하지 않는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찢어버리지 않고 나에게 와서 보이느냐?」고 하였더니, 권혜는 인하여 곧 돌아갔다가 오늘 아침에 또 와서 말하기를, 「일이 진실로 괴이합니다」라 하고 서학동에 가서 말하려고 한다 하기에 조금 전에 과연 질타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듣고 꾸짖기를, ‘네가 비록 아이라 하더라도 어찌하여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냐?’ 하고 이어 권혜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게 하고 신의 아비에게 말하기를, ‘권혜의 말이 매우 괴악(怪惡)스러우니 청대(請對)하여 진달(陳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신의 아비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하기를, ‘요서(妖書)에 말한 것이 만약 부도(不道)를 범하였다면 어찌 하루인들 엄류(淹留)하겠느냐? 그렇지만 이는 요황(妖謊)할 따름인데,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들어가서 아뢰겠느냐? 사람들이 어찌 나를 허황한 사람이라 하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신도 또한 신의 아비의 말을 옳게 여겨서 힘써 청대를 권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실로 신에게는 죽도록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뒤 몇 날이 지나고 신의 서종숙(庶從叔) 권선(權繕)이 와서 신의 아비에게 말하기를, ‘어저께 여선군(驪善君)의 집에서 잤더니, 여선군이 말하기를, ‘동짓날 우리 집에 괴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단서를 알 수가 없다. 너의 조카가 와서 말하기를, 「제집에도 괴이한 물건이 있었다.」고 하면서 너의 사촌 권집도 또한 안다고 하기에 오늘 형님에게 입대를 청하도록 하였다.’고 하자, 신의 아비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일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내가 힘써 만류하였는데도 기어이 여천에게는 가서 말하고 나에게는 와서 고하지 아니했으니, 그 아이가 하는 일은 실로 괴악(怪惡)하다.’고 했습니다.
신이 아는 사실은 이와 같은 데 불과(不過)할 뿐입니다. 전교(傳敎) 가운데에 신의 아비가 세 가지 조목을 가지고 권혜로 하여금 가서 묻게 했다는 것은 신은 실로 이 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신이 만일 그 요서를 만들어 낸 사람을 알았다면 비록 동생(同生)의 소위라 하더라도 마땅히 바로 고할 것입니다. 하물며 권혜가 만들어 낸 것을 적실히 알았다면 어찌 바로 고하지 아니했겠습니까? 이미 적실히 알지 못하였다면 또한 어찌 권혜를 신의 원수로 삼아서 바로 권혜의 소행으로 상고(上告)하겠습니까? 신의 아비도 처음에 권혜가 얻어가지고 왔을 때에 꾸짖었고 또 여천군에게 가서 말하고자 하던 날에도 꾸짖었으니, 어찌 난만하게 주무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두 번째의 공초도 전과 같아서 권숭을 형벌하여도 실상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권선·권규(權糾), 권혜의 형 권돈(權𡼖) 및 증(增)의 문객(門客) 문기주(文起周)와 여러 노비(奴婢)들을 체포하여 구문(鉤問)하였으나, 끝내 단서가 없었다. 뒤에 권숭은 장폐(杖斃)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며, 관(爟)은 말을 조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작(官爵)이 박탈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옥사는 양단(兩端)이 있다. 처음에 권집이 권혜를 부추겨 요서를 만들어서 증의 집에 보냈으나 증이 보고 듣지 아니하자, 권혜가 또 그의 집에서 흉서(凶書)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증과 권혜를 미워하여 이것을 만들고는 권혜와 권집이 세 가지 조목으로 물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했을 것이다. 요컨대 요악(妖惡)은 밝힐 수가 없다."
하였다.

 

죄인의 문서로 국사(鞫事)에 관계되는 일 이외에는 취하여 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하는 바는 필서(匹庶)에 비교하여 절연(截然)한 바가 있다. 하물며 국문(鞫問)의 사례(事例)이겠느냐? 문서 가운데 국옥(鞫獄)에 관계되거나 그 밖의 부도(不道)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 비록 그 일이 당습(黨習)이나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것일지라도 국문에 참여한 모든 신하는 감히 가져다가 묻지 못하며, 또한 감히 전파(傳播)하지 못한다. 이를 혹시 범하는 자에게는 한갓 묻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본사(本事)는 마땅히 바로 제서(制書)를 어긴 형률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10월 11일 병술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이훈(李塤)을 장령으로, 유언국(兪彦國)을 헌납으로, 윤광찬(尹光纘)과 권항(權抗)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2일 정해

황해 병사 신덕하(申德夏)가 관(官)에서 졸(卒)하여 이의익(李義翼)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민백창(閔百昌)과 시관(試官)으로서 투비(投畀)되었던 홍봉조(洪鳳祚) 등 4인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3일 무자

권익흥(權益興)의 계자(繼子) 권의형(權義衡)을 파양(罷養)시켰다. 권의형은 역신(逆臣) 권집(權䌖)의 아비를 양자(養子)로 취했는데, 권익흥은 곧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여서(女婿)이다. 권집이 죽음에 이르자, 의조(儀曹)에 명하기를,
"권집은 성후(聖后)의 지친(至親)으로 둘 수가 없다. 권의형이 계후(繼後)한 문안(文案)을 지워 버리고 다시 입후(立後)토록 하라."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계후하는 법이 이미 주(周)나라가 융성하던 때에 나타났는데, 양가(兩家)의 부모가 감히 사사롭게 주고받지 못하고 반드시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명하기를 기다렸다가 하며 한번 부자가 되면 변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식에게 대죄(大罪)가 있어서 아비가 임금에게 고하여 파계(罷繼)한 문헌이 있으나, 이 또한 쇠세(衰世)의 변례(變例)이다. 어떻게 아비와 아들이 모두 죽었는데 손자와 증손자의 부도(不道)에 연좌(緣坐)시켜 그 계후된 것을 뒤따라 파양하여 주고 빼앗는 것을 천륜(天倫)에 맡길 수 있겠는가? 당시 여러 신하들의 식견이 이에 이르지 못하여 이를 광정(匡正)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지난번에 심상운(沈翔雲)의 무리가 그의 증조 심익창(沈益昌)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다는 이유로 그 일신의 누를 벗으려고 상신(相臣) 홍봉한(洪鳳漢)과 김상복(金相福)을 종용하여 여러 번 임금께 그의 할아버지 심사순(沈師淳)의 계후를 파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만고(萬古)에 강상(綱常)의 변고를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의리(義理)가 한번 어긋나매 사변(事變)이 겹쳐 생겨나게 되었으니, 군자(君子)는 기미(機微)가 나타날 때 더욱 계신(戒愼)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10월 16일 신묘

간원 【사간 조중직(趙重稷)이다.】 에서 상달하기를,
"역적 권혜(權嵆)가 세 가지 조목으로 설문(設問)한 것은 지극히 흉참(凶慘)한 것입니다. 이증(李增)의 가인(家人)이 된 자로서 마땅히 통절(痛絶)할 겨를조차도 없어야 할 것인데, 증이 파대(罷對)한 뒤에 권혜가 비록 와서 묻는다 하더라도 그의 도리에 있어 어떻게 감히 ‘너는 아직 무사(無事)하냐?’는 등의 말로써 방자하게 수작하였고 더구나 ‘양가(兩家)의 경사(慶事)이다.’라는 말이 역적 권혜의 공초(供招)에 나왔었다면 제 스스로 변명한 것을 어떻게 취신(取信)할 수 있겠습니까? 국법(國法)을 엄중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고신(告身)의 가벼운 감죄(勘罪)에 그치는 것은 옳치 못합니다. 청컨대 이관(李爟)을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0월 17일 임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0월 18일 계사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북관(北關)을 순행하여 시찰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진(城津)은 항아리에 들어앉은 듯하여 외부의 사정을 모를 걱정이 있고, 길주(吉州)는 대나무를 쪼개는 듯하게 막을 수 없는 근심이 있어서 모두 관방(關防)으로 의뢰할 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길주의 읍치(邑治)를 고을 남쪽 10여 리 지점인 전에 의의(擬議)한 바 있던 창덕(倉德)이라고 명칭하는 곳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어서 방어사(防禦使)를 길주로 옮겨 주면 성진과 같이 벽우(僻隅)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완급(緩急)할 때 힘을 얻기가 쉽지 못한 곳보다는 나을 것 같고 민정(民情)도 모두 옮겨 설치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그 형세를 인하여 잘 인도하면 더욱 편리하고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길주의 성을 새로 쌓아야 하겠는가?"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구성(舊城)에서 거리가 10리에 지나지 않아서 나무 하나나 돌 한덩이도 모두 실어다가 쓸 수가 있어서 민력(民力)은 심한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창덕에 고을을 설치하는 일은 바야흐로 흉년을 만났으니 명년 가을을 기다려서 거행토록 하며, 방어사는 길주로 옮겨 주고 성진 첨사(城津僉使)를 방수장(防守將)으로 삼아서 변지(邊地)의 과(窠)182)  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무산(茂山)과 부령(富寧)의 사이에는 차유령(車踰嶺)이 있고 회령(會寧)과 부령(富寧)의 사이에는 무산령(茂山嶺)이 있으며 회령과 종성(鍾城)의 사이에는 가파령(茄坡嶺)이 있는데, 모두 요해(要害)의 땅입니다. 그 근처에 있는 승군(僧軍)을 단합시켜서 이 세 영(嶺)을 막아서 지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북녘 땅은 요험(嶢險)하여 군량미의 운반이 바다를 경유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니, 온 도내(道內)의 선척(船隻)을 모아서 길주와 덕원(德源)으로 하여금 남북(南北)의 주선(舟船)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이를 징발하여 군량을 조운(漕運)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장백산(長白山)의 북쪽은 곧 천평(天坪)으로 번호(蕃胡)183)  가 살던 곳인데, 근래에 호인(胡人)의 부락이 철수해 버려서 드디어 중간에 있었던 봉홧불을 폐지하여 북쪽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종전대로 중간에 봉화를 설치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진(鎭)하나를 감평(甘坪)에 설치하여 완항령(緩項嶺)을 지키어 적로(賊路)를 끊도록 해야 하며, 홍원(洪原)에 새로 설치한 봉대(烽臺)는 백성이 많이 불편해 하니 옛 봉대를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친기위(親騎衛)는 모두 효용(驍勇)하고 활을 잘 쏘며 갑옷과 말도 정비되고 건장합니다. 청컨대 천인(千人) 이상을 더 두어 그 남관·북관의 권관(權管)을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에게 예속시켜 각각 친기위(親騎衛)의 출신으로 도시(都試)에 합격한 자를 권관에 충당하여 무사(武士)를 권장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뒤에 길주에서 고을을 창덕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 땅에는 끝내 우물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여 옮기는 일을 시행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이관(李爟)을 변방 먼 곳으로 정배(定配)케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0월 19일 갑오

정필녕(鄭必寧)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의금으로 삼았다.

 

10월 20일 을미

무지개가 서쪽에 나타났다.

 

10월 21일 병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0월 22일 정유

정원(政院)에서 천둥의 이변(異變)으로써 대조(大朝)와 소조(小朝)께 경계할 것을 진달하니,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우의정 김약로와 옥당(玉堂) 조운규(趙雲逵)와 정언 윤광찬(尹光纘) 등이 차자를 올려 힘쓸 것을 아뢰니, 동궁(東宮)이 가상하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10월 23일 무술

대사헌 신사건(申思建)이 상차를 올려 동궁을 면려할 것을 아뢰었는데, 상이 가상하다고 답하였다.

 

10월 24일 기해

지금부터 이후로는 곤장을 사용하는 아문(衙門)에서는 군무(軍務) 및 난입(攔入)이 아니면 곤장을 쓸 수 없으며, 수령은 원장(圓杖)을 쓸 수가 없고, 윤상(倫常) 및 살인(殺人)과 백성을 침해한 일 외에는 비록 중재(重宰)와 시종신(侍從臣)이라고 하더라도 법 밖의 남형(濫刑)은 하지 못하며, 이를 범한 자는 도신(道臣)이 나타나는 대로 엄하게 다스릴 것이요 덮어 두고 묻지 않은 도신도 똑같은 예(例)로써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5일 경자

임금이 친히 익릉(翼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香)을 선정전(宣政殿) 뜰 위에서 전하였다.

 

10월 26일 신축

어떤 별이 북두(北斗) 아래로 흘러갔는데, 모양은 바리때[鉢]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5, 6척쯤이었으며 빛깔은 청색이었다.

 

10월 27일 임인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초선(抄選)한 선비를 불러서 오게 하여 서연(書筵)에 출입케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전라 감사 한익모(韓翼謨)가 장계(狀啓)를 올려 말하기를, ‘병사(兵使) 조동제(趙東濟)는 군무(軍務)가 아닌데도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시영(金始煐)을 장계를 올려 파직케 하였습니다.’ 했으니, 조동제를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혼인과 장사의 시기를 넘긴 자는 도와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지금 북도(北道)의 성책(成冊)을 보매 혹 소미(小米) 한 말과 당미(糖米) 세 말을 주었으니, 감사 정익하(鄭益河)는 마땅히 중추(重推)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윤지태(尹志泰)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병비(兵裨)를 추론(推論)하는 것은 체례(體例)에 지나지 아니하는 일인데 방백(方伯)의 절제(節制)를 어기고 거부했으니, 청컨대 조동제를 삭직(削職)하고, 영해 부사(寧海府使) 민우(閔堣)는 쇠잔하여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허휘(許彙)를 지평(持平)으로, 황합(黃柙)을 헌납으로, 이명희(李命熙)와 이육(李堉)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29일 갑진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여 사직(辭職)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평 허휘는 사람됨이 피잔(疲殘)하니, 의당 개정(改正)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에 허휘가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봄 사이에 유언민(兪彦民)을 삭판(削版)하자는 논의를 발설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등문(登聞)하여 스스로 밝히면서 신이 기무(欺誣)한 것으로 돌렸기 때문에 신이 새로 제수됨을 당하여 사실을 폭로코자 하였더니, 과연 영격(迎擊)하는 참혹하게 날카로운 변론이 은밀히 어울린 혈당(血黨)에서 나왔습니다."하니, 상례(常例)의 답을 내렸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를 소견하였다. 이때에 성궁(聖躬)의 가려움 증세가 가시지 아니하여 여러 신하들이 온천(溫泉)의 물을 길어다가 훈세(薰洗)할 것을 청하였다. 온양(溫陽)은 서울에서 거리가 3일의 노정(路程)이 되어 임금이 민폐(民弊)를 염려하여 어렵게 여겼는데, 강청(强請)한 연후에 단지 두 번만 길어 올 것을 허락하였다.

 

10월 30일 을사

임금이 대신과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전 함경 감사 이정보(李鼎輔)를 인견하고 북관(北關)의 일을 물었다. 임금이 동궁(東宮)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비록 대리(代理)를 명하였지만 어떻게 국사(國事)를 완전히 잊겠느냐? 지기(志氣)가 쉽게 쇠약해지고 진작(振作)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을 보지 않으면 또한 창연(悵然)한 마음이 없지 않다. 또 북로(北路)의 일 때문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는데, 내가 친결(親決)하지 아니하면 조정(朝廷)의 일에 있어 백성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병든 몸을 강작(强作)하여 신하들을 접견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 대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노병(老病)을 칭탁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지 말라."
하니, 우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이미 신 등을 부르시고 또 동궁에게 시좌(侍坐)를 명하시어 북관을 수비하여 자손에게 안락(安樂)을 끼쳐 줄 계책을 두루 물으시니, 신은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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