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174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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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무신

임금이 온천 물로 훈세(薰洗)하고 숙고(肅考)의 온양(溫陽)에 행행(行幸)한 일을 추억하여 온천 감회시(溫泉感懷詩)를 지었다.

 

11월 5일 경술

원경하(元景夏)를 형조 판서로, 민우수(閔遇洙)를 집의로, 조명건(趙明健)을 사간으로, 이수관(李壽觀)·안정인(安正仁)을 장령으로, 김상구(金尙耉)를 헌납으로, 안치택(安致宅)을 지평으로, 박사눌(朴師訥)을 정언으로, 이게(李垍)를 부교리로 삼았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과 부사(副使) 황정(黃晸)과 서장관(書狀官) 유언술(兪彦述)을 보내어 연경(燕京)에 가게 하였다.

 

정언 이명희(李命熙)가 상서하여 말하기를,
"과장(科場)이 엄하지 못하여 교위(巧僞)가 날로 늘어만 갑니다. 금년 가을 생진(生進)의 감시(監試) 때에 함부로 들어왔다가 잡힌 자가 있었고 회시(會試) 때에도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왔다가 발각된 자도 있었으며, 정시(庭試)의 과거에서는 한 사람이 지은 글을 열 사람이 옮기어 베껴 납권(納券)하여 기묘하게 합격을 바라기도 하였으니, 청컨대 전시(殿試)나 정시에 면시(面試)하는 법을 정하여 거짓을 무릅쓰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명경과(明經科)의 옛 제도는 초시(初試)에서 그 글을 살피고 회시에서 그 강(講)을 시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시 때에 각각 방외(方外)에서 문장에 능한 자를 데려다가 그로 하여금 대작(代作)하게 하는데, 이를 원병(援兵)이라고 이름합니다. 청컨대 그 법을 서로 바꾸어 초시에서 강을 시험하고 회시에서 글을 고시하게 하여 간악한 폐단을 막게 하소서. 근자에 사치하는 풍조가 날로 성하여 귀척(貴戚)과 경재(卿宰)들이 다투어 제택(第宅)을 일으키어 높은 용마루와 거대한 들보들이 거리와 언덕을 가로 걸쳐 있습니다. 탐욕 많은 무변(武弁)이나 교활한 음관(蔭官)이 한번 풍부한 고을살이를 겪고 나면 문득 큰 제택을 세우는데, 이렇게 한 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전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이를 본 자는 다투어 서로 부러워하고 본뜨곤 합니다. 이 한가지 일로써 민력(民力)이 여기에 탕진되는 것을 족히 상상할 수 있으니, 마땅히 간가(間架)의 법을 정하여 그 가운데에서 참람함이 지나친 자는 즉시 훼철시켜야 합니다. 수령(守令)으로서 탐묵(貪墨)한 자는 남의 것을 박할(剝割)하여 제 몸을 살찌우고, 교활한 데 능한 자는 윗사람을 잘 섬겨서 명예를 구하며, 혼용(昏庸)한 자는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곤 하는데, 세 가지 폐단이 정황은 같지 않지마는 해가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마땅히 자주 어사(御史)를 보내되 반드시 온 도(道)를 살피지는 않더라도 한두 고을을 추생(抽栍)하여 기한을 절박하게 하지 말고 종용히 염찰(廉察)하게 한다면 팔로(八路)의 군현(郡縣)이 항상 어사가 그 지경을 출몰(出沒)하는 것같이 되어 소심(小心)하고 외탄(畏憚)하여 징집(懲戢)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대동미(大同米)를 태안(泰安) 땅에서 취재(臭載)184)  하였으니, 청컨대 사목(事目)을 분명히 밝혀 때늦게 배를 출발하지 못하게 하소서. 선조(船漕)로 6백 석(石)을 초과하게 싣고 세선(稅船)으로 천 석을 초과하게 실은 자는 일일이 조사하고 점검하여 죄주게 할 것이며, 3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는 차원(差員)을 포구(浦口) 가에 앉혀 두어 만약 8월을 지나면 발선(發船)을 허락하지 말게 해서 늦게 출발하여 곡식이 썩게 되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북백(北伯)185)  이 남쪽의 곡식을 옮겨다가 북쪽 백성을 먹일 것을 청했습니다만, 풍도(風濤) 수천 리에 진실로 헤아리지 못할 실수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만 석을 취재하는 것은 비록 족히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 지아비의 익사(溺死)는 구렁 속으로 밀어 넣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만석의 곡식으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북쪽 사람은 오직 백성을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남쪽 사람은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두려워하니, 죽음을 싫어하는 바는 같다. 나는 그윽이 이를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그 교제창(交濟倉)의 곡식을 가지고서 그대로 구제하게 하고 창고에 유치(留置)해 둔 환곡(還穀)의 3분의 2를 취대(取貸)하게 하며, 또 공명첩(空名帖)186)   8백 본(本)을 나누어 주어 납속(納粟)하여 구제하는 자료를 돕게 하라."
하였다.

 

11월 7일 임자

모든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명하여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특지(特旨)로 이방수(李邦綏)를 제수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는데, 이방수가 김상로(金尙魯)를 따라서 성을 쌓고 고을을 옮기는 형편(形便)을 가서 보았기 때문이다.

 

승지 윤광의(尹光毅)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왕(聖王)의 재성(財成)187)  하는 방도는 다만 양(陽)을 붙들고 음(陰)을 누르는 데 있으니, 착한 것은 양이 되고 악한 것은 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인(善人)과 친하면 선인이 선인을 이끌어 오고 선하지 못한 사람과 가까이 하면 선하지 못한 사람이 선하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 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양역(良役)188)  이 개혁되지 않아서 생민(生民)이 고통 속에 있는데, 저하(邸下)께서는 어떻게 이를 구제하겠습니까? 당습(黨習)이 아교처럼 굳어져서 공의(公議)가 행해지지 아니하는데, 저하께서는 어떻게 이를 혁파하시겠습니까? 염치가 없어져서 염정(恬靜)한 선비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이를 면려시키겠습니까? 사치를 함부로 행하여 재용(財用)이 마르고 명기(名器)가 혼탁하여 기강(紀綱)이 해이해졌는데, 저하께서는 어떻게 이를 진작시키겠습니까? 이는 곧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계되는 것이니, 저하의 책임이 돌아보건대, 어렵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한결같은 생각이 진실로 그 선함을 얻는다면 조정(朝廷)이 선해질 것이고 백도(百度)가 선해질 것이며 풍속도 또한 선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만, 오직 저하께서 한결같이 생각하시는 사이에 부선 억악(扶善抑惡)하심이 방법을 얻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비록 청요(淸要)한 직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서 받았고 반드시 사장(辭章)을 진달하는 규례가 없었는데, 근래에는 염우(廉隅)가 너무 지나쳐서 무릇 한가한 관사(官司)의 만직(漫職)으로 전에 경력한 자리를 다시 제수 받은 자도 반드시 소장을 올리고 명패(名牌)를 어기니, 이는 명령을 업신여긴 행위이다. 이 뒤로는 정원(政院)에서 한갓 그 소장만을 받지 말 것이 아니고 조보(朝報) 속에 그 대개(大槪)가 나오게 되면 해당 승지에게는 마땅히 무거운 문책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제조(提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진장(陳章)하는 폐단을 만약 엄하게 막지 아니하면 당습(黨習)이 장차 날로 불어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풍습은 마치 서로 부딪히는 뿔과 같고 나는 그 뿔을 잡고 싸움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다. 혹시 한 번이라도 이 뿔을 놓게 되면 당촉(撞觸)의 해(害)는 이루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진실로 전하께서 굳게 지키시고 흔들림이 없다면 당(黨)에 대하여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우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들어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근근이 한가닥 묶는 끈으로써 세도(世道)를 얽을 수 있었기에 다행히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조금만 놓아서 늦추어 주면 그 해가 곧바로 이르게 될 것이니, 원컨대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다가 이내 말이 세도(世道)가 부효(浮囂)189)  하다는 데 미치자, 옥당(玉堂)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옛부터 부효하다는 말이 본시 있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묘(宣廟)께서 황랍(黃蠟)을 대내(大內)로 들여오라는 명령이 있던 때를 당하여 외인(外人)들이 불사(佛事)에 쓰는 것으로 의심하자 선정이 극단의 말로 다투었습니다. 그 뒤에 선묘께서 밤을 새워 글을 읽는 데에 납촉(蠟燭)을 사용하였음을 듣고는 외인의 말이 잘못 와전된 것을 비로소 알았다고 합니다. 인신(人臣)으로 임금을 섬기는 데는 허실(虛實)을 논하지 않고 임금의 덕(德)에 관계되는 일이면 언제나 모두 다투어 고집하는 것이 곧 그 직분인 것입니다. 선정의 다툰 것은 체통을 얻은 것이었고 선묘께서는 잘못 들었다 해서 선정에게 죄주지 아니하셨으니, 군신(君臣)이 서로 그 도리를 얻은 것입니다. 인군(人君)이 말을 듣는 방도는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힘쓸 뿐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부효한 것 때문에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말이 옳다. 고(故) 송좌상(宋左相)이 일찍이 나에게 후궁(後宮)을 뽑은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물러나가서 다시 들어 보라.’고 하였더니, 그 뒤에 들어와서 고(告)하기를, ‘과연 허전(虛傳)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현모(李顯謨)가 입시(入侍)하여 궁전 들보에 비둘기가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묻기를, ‘비둘기를 기르십니까?’라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아니다. 밖으로부터 날아온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순실(純實)하기 때문에 말도 또한 소박(素樸)하고 정직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일찍이 잊은 적이 없다."
하였다.

 

11월 8일 계축

간원(諫院)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10일 을묘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정언 이명희(李命熙)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에 청주(淸州)의 기맥(歧麥)190)  을 목사(牧使) 김원택(金元澤)이 함(函)에 담아서 관찰영(觀察營)으로 보내고 장문(狀聞)할 것을 요구하여 도신(道臣)이 마침내 이 때문에 탄핵을 당했습니다. 김원택도 의리로 보아 마땅히 그 거취(去就)를 같이해야 할 것인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쭈그리고 있으니 염우(廉隅)를 손상함이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케 하소서. 그리고 선혜랑(宣惠郞) 이식(李埴)이 한번 풍요한 고을살이를 지나고 나더니 크게 갑제(甲第)를 일으켜서 궁가(宮家)에 비길만 합니다. 청컨대 도태시켜 버리어 탐습(貪習)을 징계토록 하소서."
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11월 11일 병진

대제학 조관빈(趙觀彬)에게 명하여 반궁(泮宮)191)  에 가서 시사(試士)에게 감귤을 나누어 주게 하고 대궐에 나아가서 과차(科次)를 매기게 하여 수석을 차지한 한명여(韓命輿)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11월 13일 무오

간원(諫院) 【정언 박사눌(朴師訥)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호남백(湖南伯)이 봄과 여름의 전최(殿最)를 아직도 봉진(封進)하지 아니하여 국체(國體)에 손상이 있고 민폐(民弊)가 갈수록 심해지게 하였으니,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라 감사 한익모(韓翼謨)를 파직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4일 기미

월식(月食)이 있었다.

 

11월 16일 신유

전라도 유생 정근(鄭根)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9일 갑자

임금이 유신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교리 이게(李垍)가 말하기를,
"대리(代理)한 이후로 강연(講筵)을 아울러 정지하였으니, 다시 예전대로 회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정하언(鄭夏彦)이 말하기를,
"옛날에 유신을 이끌고 와내(臥內)에 들어가서 청강(聽講)을 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이에 의거하여 강관(講官)을 불러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월 20일 을축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이때에 교리 윤동도(尹東度)가 상서하기를,
"지난번 겨울에 천둥이 있은 이래로 저하(邸下)와 조정(朝廷)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바가 처음에는 근신했다가 종말에는 태만해진 실책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고 한결같이 두려워한다는 것도 아울러 빈말이 되고 들리지 않으니, 신은 그윽이 묘당(廟堂)을 위하여 개연(慨然)하게 여기는 바이고, 저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시는 정성도 아직 다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약로가 사죄하며 말하기를,
"신이 지위가 재상(宰相)의 자리에 갖추어져 있으면서 일을 꾀한 바가 없었으니 윤동도의 말은 진실로 지론(至論)이며 또한 다행한 일입니다. 원컨대 가납(嘉納)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고, 이어 윤동도에게 답을 내리어 가납의 뜻을 유시하였다.

 

11월 21일 병인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한사득(韓師得)을 대사간으로, 김광세(金光世)를 강화 유수로, 이창의(李昌誼)를 전라 감사로, 윤광소(尹光紹)를 승지로,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김한로(金漢老)를 지평으로, 송능상(宋能相)을 장령으로, 윤동도(尹東度)를 헌납으로, 이현조(李顯祚)와 이만회(李萬恢)를 정언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응교로, 신회(申晦)를 교리로, 정순검(鄭純儉)을 수찬으로 삼았다.

 

11월 22일 정묘

유성(流星)이 낭성(狼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길이는 2, 3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1월 23일 무진

하교(下敎)하기를,
"상의원(尙衣院)에서 무릇 오례(五禮)의 대소(大小)로 진공(進供)하는 것을 법의(法衣)와 장복(章服) 이외에는 옛날의 능단(綾緞)을 주면(紬綿)으로 대신하고 옛날의 사라(紗羅)를 저견(紵絹)으로 대신케 하라."
하고, 이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국혼(國婚)의 정례(定例)를 논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분(脂粉)은 곧 용모를 돕는 물건이니, 이것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정례 가운데서 없애도록 하라. 내가 비록 없앤다고 하더라도 만약 사왕(嗣王)이 사치를 한다면 어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숙의 가례편(淑儀嘉禮編)을 취하여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있었다 하더라도 숙의와 왕후(王后)는 매우 요절(遼絶)192)  함이 없어서 적첩(嫡妾)이 서로 참람하는 폐단을 쉽게 열어 놓을 것이다. 나는 후왕(後王)이 이 편(編)이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거행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이것은 마땅히 살피고 삼가야 할 곳이다."
하였다. 임금이 언제나 정례(定例)의 일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다른 날에 미칠 것을 염려하여 항상 말하기를, ‘정례가 무슨 유익함이 되겠느냐? 상아(象牙) 젓가락이나 옥 술잔이 어찌 정례가 있어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숙의의 폐단에 대한 임금의 하교는 진실로 심원(深遠)하나, 만약 당시의 왕이 호색(好色)한다면 비록 숙의를 맞아 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궁인(宮人)들을 불시(不時)로 진어(進御)하는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양한(兩漢)193)  에서 후궁(後宮)을 채택한 그 법이 자세히 후지(後志)194)  에 나타나 있는데, 무제(武帝)의 궁녀(宮女)는 4만여 인이나 되었다. 국조(國朝)의 초기에는 양가(良家)의 자녀를 뽑았으니, 진실로 아름답고 좋은 사람이 많았을 것은 의당한 일이다. 그런데 근일의 정제(定制)에는 다만 내사(內司)의 비해(婢奚)195)   중에서 취하여 충당하였으니, 그 선택은 점점 좁아졌지만 법은 또한 좋은 데가 있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친근히 하고 가까이 하면서 절제하는 법이 없다면 그 폐해는 숙의를 한두 사람 드리는 데 그칠 뿐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주관(周官)의 태재(太宰)가 궁정(宮政)을 관장하던 법을 대략 본떠서 모든 규정(閨庭)에서의 연호(燕好)하는 일을 대신(大臣)이 얻어 들을 수 있게 한다면 인주(人主)로 구제(拘制)되는 바가 있어서 거의 그 욕망을 함부로 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5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註 192] 요절(遼絶) : 매우 먼 것.[註 193] 양한(兩漢) : 서한과 동한.[註 194] 후지(後志) : 후한서를 가리킴.[註 195] 비해(婢奚) : 계집종.
사신은 말한다. "숙의의 폐단에 대한 임금의 하교는 진실로 심원(深遠)하나, 만약 당시의 왕이 호색(好色)한다면 비록 숙의를 맞아 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궁인(宮人)들을 불시(不時)로 진어(進御)하는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양한(兩漢)193)  에서 후궁(後宮)을 채택한 그 법이 자세히 후지(後志)194)  에 나타나 있는데, 무제(武帝)의 궁녀(宮女)는 4만여 인이나 되었다. 국조(國朝)의 초기에는 양가(良家)의 자녀를 뽑았으니, 진실로 아름답고 좋은 사람이 많았을 것은 의당한 일이다. 그런데 근일의 정제(定制)에는 다만 내사(內司)의 비해(婢奚)195)   중에서 취하여 충당하였으니, 그 선택은 점점 좁아졌지만 법은 또한 좋은 데가 있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친근히 하고 가까이 하면서 절제하는 법이 없다면 그 폐해는 숙의를 한두 사람 드리는 데 그칠 뿐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주관(周官)의 태재(太宰)가 궁정(宮政)을 관장하던 법을 대략 본떠서 모든 규정(閨庭)에서의 연호(燕好)하는 일을 대신(大臣)이 얻어 들을 수 있게 한다면 인주(人主)로 구제(拘制)되는 바가 있어서 거의 그 욕망을 함부로 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11월 25일 경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서학 교수(西學敎授)        이게(李垍)가 말하기를,
"사학(四學)에 전부터 도세(島稅)를 절수(折受)한 것이 있어서 재유(齋儒)에게 숙식(宿食) 등을 제공하여 왔는데, 지금 들으니 어떤 한 궁가(宮家)에서 장차 억지로 빼앗으려고 한다 하니 마땅히 금단(禁斷)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이는 곧 신광수(申光綏)의 집을 가리킨 것이다. 왕세자가 옳게 여겼다. 이때에 신광수의 아비 신만(申晩)이 바야흐로 입대(入對)하였다가 나와서 공회(公會)에서 말하기를,
"이게가 비록 말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시행되겠는가?"
하였다.

 

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이이장(李彛章)을 교리로, 이응협(李應協)을 부교리로, 윤동도(尹東度)를 수찬으로, 정휘량(鄭翬良)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신미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다가 이게(李垍)에게 이르기를,
"이른바 사람이 욕심을 막고 극기(克己)하는 공(功)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능히 이를 끊어서 제거한다면 대용(大勇)이라고 이를 수 있다. 여색(女色)은 더욱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비록 항우(項羽)와 한나라 고조(高祖) 같은 영웅으로도 오히려 이를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이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에 대한 공부는 이미 힘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쇠약하고 늙은 뒤에 여색에 빠지게 되면 더욱 어려운 것이다."
하니, 이게가 말하기를,
"나이가 쇠로하면 스스로 여색을 경계하는 의사가 있게 마련이지만, 쇠모(衰耗)한 때에는 참소를 믿는 것이 가장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27일 임신

영부사(領府事) 김흥경(金興慶)이 치사(致仕)할 것을 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 권현(權賢)이 상소하기를,
"형조(刑曹)에서 도류(徒流)196)  에 처한 죄인(罪人)이 장차 2천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율관(律官)이 뇌물을 탐내어 저앙(低昻)한 소치입니다. 바라건대 심복(審覆)을 더하시어 소석(疏釋)시키소서. 권상일(權相一)은 곧 자호(自好)197)  하는 선비라서 나이 젊었을 때에도 본시 눈을 부릅뜨고 보는 자리를 견디지 못했는데, 지금은 70세를 넘었으니 결코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전형(銓衡)하는 직임에 헛되게 매어 둘 수 없으니, 체개(遞改)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영백(嶺伯)이 장계(狀啓)를 올려 진주 목사(晉州牧使) 강필신(姜必愼)을 파직시키게 한 것은 체통을 얻은 것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통제사(統制使)가 비록 상관(上官)이라고 하더라도 목사도 또한 명리(命吏)이니, 은미하게 혐의(嫌疑)하는 뜻을 보여서 스스로 처신(處身)토록 하는 것이 옳은데, 하필이면 괴패(乖悖)한 거조로 즉일(卽日)로 쳐서 내쫓는단 말입니까? 강필신이 이미 파직되었으니 정찬술(鄭纘述)도 또한 홀로 안연(晏然)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의당 일체로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서가 들어온 것을 임금이 듣고는 승지에게 명하여 가지고 들어와 읽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도류의 폐단이 과연 그 소장과 같이 신축(伸縮)함이 율관에게 연유되어 돈의 다소(多少)를 보아 경중(輕重)이 현격하게 달라진다 하니, 추조(秋曹)로 하여금 관계가 무거운 자 외에 돈으로 속죄를 받을 만한 자와 형률이 여기에 이르지 않는 자를 대신(大臣)에게 문의하고 초(抄)하여 알리게 하라. 그리고 강필신의 일은 이미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을 옳다고 하였으니 나라가 나라의 체통을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등분(等分)에 있는 것이다. 그 형률을 수신(帥臣)에게 동일하게 청하는 것은 사체가 그렇지 않다. 권상일의 일은 이러한 것으로 체개를 청하는 것은 스스로 대신(大臣)이 있는데, 그 일이 월직(越職)에 가깝다."
하였다.

 

11월 28일 계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료(臣僚)들을 인접하시고 밤이 깊어도 파하지 아니하시는데, 지금 창호(窓戶)를 바른 것을 보니 종이가 많이 뚫어지고 해져서 찬 기운이 스며들고 있으니 고쳐 바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고쳐 바른다고 하더라도 창(窓)이 문틀에 맞지 않아서 저절로 벌어진 틈이 많다."
하였다. 처음에 진하사(陳賀使)가 장차 출발하려고 할 때에 재자관(齎咨官) 김태서(金兌瑞)를 보내어 저들 속에 들어가 미리 탐문(探問)케 한 바가 있었는데, 정사(正使) 조현명(趙顯命)이 길에서 김태서를 만나 그가 완만히 지체하였다는 이유로 곤장을 치고 계문(啓聞)하였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김태서에게 비록 죄를 질책할 만하나 아직 돌아오기 전에는 군명(君命)이 그 몸에 있는데, 곤장은 지나치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의관(衣冠)을 한 사람을 다른 지경에서 죄를 결단한 것은 진실로 경솔합니다. 그러나 봉명(奉命)도 또한 허다(許多)한 계층이 있는 것입니다. 김태서가 지체해 머무른 죄는 엄하게 징벌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태서를 변방 먼 곳에 정배(定配)하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비록 역설(譯舌)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저들의 지경 안에서 곤장으로 다스리지 말라는 것이 이미 속전(續典)에 실려 있으니 이를 거듭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9일 갑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정언 이현조(李顯祚)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동옥(凍獄)에 지체되어 갇혀있는 죄수 때문에 대조(大朝)께서 여러 번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판의금 이기진(李箕鎭)이 시골에 있으면서 오지 아니하였으니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일전에 아간(亞諫)의 상서는 그 해괴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회유(誨諭)가 내렸는데도 즉시 인피(引避)하지 않고 단지 소패(召牌)만 어기고 있으니 의(義)에 대처함이 혼유(昏謬)합니다.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상달하기를,
"교동 수사(喬桐水使)는 본래 삼도(三道)를 통어(統禦)하는 중책입니다. 그런데 이경기(李景琦)는 인망이 가볍고 경력도 얕으니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 계품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이경기는 일찍이 양도(兩道)의 병사(兵使)를 지냈으니 대신(臺臣)의 말이 지나칩니다."
하고, 우의정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권현(權賢)의 상서는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강필신(姜必愼)은 정찬술(鄭纘述)에게 연명(延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략히 그 하리(下吏)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현조가 정우량의 말로 인하여 인피(引避)하니, 전례대로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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