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1749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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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병자

이조 참판 이천보(李天輔)의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치운(申致雲)이 어진 이를 해치고 선정(先正)을 욕한 것은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입니다. 신의 재종 조부(再從祖父) 문간공(文簡公) 이희조(李喜朝)도 그 흉계(凶啓)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신의 아비가 섬기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고 신도 또한 젊어서부터 수업(受業)하였으니 실로 양세(兩世)에 사생(師生)의 의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임인년198)  의 화(禍)에 먼 변방으로 유리(流離)되었었는데, 옛부터 있은 참해(讒害)가 어찌 신치운과 같이 참혹하고 독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대조(大朝)께서 신치운을 승지의 망(望)에 써서 내리시면서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함부로 뽑아버리지 못하게 하셨는데, 신은 유사(有司)의 신하로서 의당 감히 어기어서는 안되는 처지이지만, 임금의 명령과 사사로운 의리에도 간혹 때에 따라 경중(輕重)이 있으며 사생(師生)의 의리는 아비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것과 비등한 것입니다. 진실로 신치운의 검의(檢擬)를 신의 정사에서 나오게 한다면 신은 오직 사문(師門)에만 죄를 얻을 뿐이 아니니, 무엇을 가지고 군상을 섬기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진달한 바가 지나치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12월 3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안정인(安正仁)이 상서하여 《소학(小學)》의 글에 더 힘쓸 것을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모두 이를 가르치도록 권고해서 작흥(作興)하는 터전을 만들 것을 청하고, 말미(末尾)에는 관서(關西) 지방에 옛날 포흠(逋欠)을 독촉해 징수하여 궁민(窮民)이 사방으로 흩어진 일과 영애(嶺阨)에 화전(火田)을 금하지 아니하여 산성(山城)이 씻은 듯이 벗겨진 일과, 도적을 붙잡아서 사람을 살렸다는 것이 허실(虛實)을 서로 속이어 은자(恩資)가 지나치게 넘치는 일을 진달하여 금칙(禁飭)을 더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권면한 바는 마땅히 유념(留念)하겠으며 나머지는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이천 부사(利川府使) 이규진(李奎鎭)과 연천 현감(漣川縣監) 여광세(呂光世)를 잡아다가 신문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이 군기(軍器)를 적간(摘奸)한 바 결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4일 무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근신(近臣)을 경성(京城)과 제도(諸道)에 보내어 여제(厲祭)를 베풀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여역(癘疫)이 서로(西路)에서부터 일어나서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팔로(八路)에 만연(蔓延)되어 민간의 사망자가 거의 5, 60만이나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무신(武臣)의 당하관(堂下官)으로서 나이 40세 이하인 사람은 문신(文臣)의 예(例)에 의하여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전강(殿講)하게 하고 이에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시상하며 불통(不通)한 자는 금추(禁推)하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위보(李渭輔)는 김치량(金致良)의 간음(奸淫)한 행동을 논박하다가 죄를 얻어 문출(門黜)되었고 김치량도 또한 죄를 받아 먼 고을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노모(老母)가 있으니 너그러운 은전에 따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비로소 억지로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무릇 일에는 시비(是非)가 있는 것이어서 병립(並立)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위보와 김치량이 동시에 죄를 받은 것도 진실로 법이 아니지만 동시에 석방을 청했으니, 또 무슨 법이란 말인가? 이 또한 탕평(蕩平)의 일단(一端)으로 시비가 명백하지 못하고 형정(刑政)의 문란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당시에 모든 신하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기면서도 한마디 말로 바로잡는 사람이 없었으니 대개 김치량의 세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오래도록 대답하지 아니한 것이 어찌 그 상황을 미워한 것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56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의약(醫藥)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무릇 일에는 시비(是非)가 있는 것이어서 병립(並立)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위보와 김치량이 동시에 죄를 받은 것도 진실로 법이 아니지만 동시에 석방을 청했으니, 또 무슨 법이란 말인가? 이 또한 탕평(蕩平)의 일단(一端)으로 시비가 명백하지 못하고 형정(刑政)의 문란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당시에 모든 신하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기면서도 한마디 말로 바로잡는 사람이 없었으니 대개 김치량의 세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오래도록 대답하지 아니한 것이 어찌 그 상황을 미워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실(鄭實)을 응교로, 윤동도(尹東度)를 수찬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사간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헌납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판의금으로, 신만(申晩)을 좌참찬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서효수(徐孝修)를 문학으로, 황인검(黃仁儉)을 겸 설서로 삼았다.

 

12월 5일 기묘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겨울 밤이 매우 길어서,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대학(大學)》 서문을 외우게 하고 듣는 것도 또한 족히 회포를 통창(通暢)하게 하는데, 유신(儒臣)이 이불을 끼고 앉아 혼몽하게 졸고 있으니, 유달리 개탄(慨歎)스럽다. 세도(世道)가 날로 내려가는 것이 오로지 독서(讀書)를 하지 않는 데에 연유되는 것이어서 입직(入直)하는 사람에게 내가 적간(摘奸)하여 월봉(越俸)하는 벌을 시행하려고 한다. 지난번에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글 읽는 소리가 많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사부(士夫)의 자제(子弟)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 오직 당(黨)만을 익히고 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하고, 이어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내리어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오직 성인(聖人)만이 이를 측은히 여기어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정하였다.’ 하였고,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집에는 숙(塾)이 있고 나라에는 학(學)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대(三代)199)   이후로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군현(群賢)이 배출(輩出)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다른 까닭이겠는가?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聖人)으로도 스스로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일렀는데, 오늘에 대부(大夫)와 장보(章甫)200)  가 배우지 않는 것은 유독 무슨 심사란 말인가? 세도의 변하고 경박함은 오로지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 연유하는 것이니 거울을 어둠 속에 던지고 구슬을 모래밭에 던지는 것같이 자포 자기(自暴自棄)하며, 어구(語句)만을 따다가 경박한 말로 떠드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고 학문(學問)을 보기를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의 원거리처럼 여기어 비록 겨울 밤 금직(禁直)인 때를 당하여도 대부(大夫)는 등불을 불어 끄고 잠만 자며 성균관의 제생(諸生)들은 책을 덮고 고요하기만 하니, 아! 그들의 임금이 된 자가 비록 군사(君師)의 덕(德)이 없더라도 대부와 많은 선비들은 가르침이 없다고 이르지 말고 깊이 권권(眷眷)해 하는 뜻을 본받아 모름지기 학문을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악(樂)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악학(樂學)을 비록 고증하여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금직(禁直)하거나 동서의 재(齋)에 있을 때에 등불을 돋우고 낭낭(朗朗)하게 읽는다면 이 또한 하나의 음악인 것이다. 무리를 지어 경박한 말로 떠들어대는 데에 견준다면 그 어느 것이 낫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박혁(博奕)201)  을 두는 자가 있지 아니하냐? 오히려 마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학문을 권하는 것은 그 경박한 것들을 버리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집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지 않는 것은 각각 어진 부형(父兄)이 있을 것이니, 내가 무엇을 권하겠는가? 금직하는 대부와 재에 있는 많은 선비들을 내가 마땅히 수시로 그 근만(勤慢)을 살펴서 의당 계칙(戒飭)함이 있을 것이니 이는 한갓 학문을 권면하는 것만이 아니고 세도를 깊이 근심하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 그 글을 양관(兩館)202)  과 춘방(春坊)203)  과 태학(太學)에 게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금중(禁中)의 학사(學士)들이 비로소 모두 글을 읽었고 임금이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선공감(繕工監)의 외감(外監)도 또한 9영선(九營繕)의 하나입니다. 감역(監役)을 사자(士子)로 새로 임명해 들이면 모든 것이 생소(生疏)하여 하배(下輩)들이 제멋대로 농간(弄奸)을 부려서 위로는 묘사(廟社)와 전궁(殿宮)으로부터 아래로는 학궁(學宮)과 제사(諸司)에 이르기까지 수개(修改)하고 올려서 배설(排設)할 즈음에 공인(貢人)에게 폐단을 끼치는 사례가 매우 클 것입니다. 이 뒤로는 계사(計士) 9명을 잘 가려서 각각 9영선을 맡게 하고 각처(各處)에 목물(木物)을 봉감(捧甘)할 것이 있으면 즉시 가서 계산해 살피고 거기에 수요되는 수량을 정하여 공인으로 하여금 진배케 하면 본조(本曹)는 무가(貿價)를 남비(濫費)할 근심이 없어지고 공인도 보존(保存)될 방도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6일 경진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과 화성(火星)을 둘렀다.

 

12월 7일 신사

정한규(鄭漢奎)를 장령으로, 서지수(徐志修)를 교리로, 이게(李垍)를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9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2, 3척이었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12월 10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함경 감사 정익하(鄭益河)가 묘당(廟堂)에서 영남(嶺南)의 곡식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하면서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근(饑饉)이 날로 심하여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습니다. 만약 신으로 하여금 일도(一道)의 비축을 다 기울이고 삼영(三營)에 쌓아 둔 것을 다하게 한다면 비록 곡식을 옮기지 않더라도 거의 근근이 충당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본도(本道)는 곧 조석(朝夕)으로 변란에 대비하는 지방이어서 막중(莫重)한 향곡(餉穀)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다가오는 가을이 풍년을 알릴지도 또한 미리 점치기가 어려운데, 지금 만약 목전(目前)에 급한 나머지 갖가지 곡식을 다 나누어 주었다가 불행(不幸)히도 연흉(年凶)이 들고 군사를 일으켜야 할 일이 있게 되면 신은 국가를 위하는 계책을 알지 못하겠으며 장차 무엇으로 그 뒷일을 선처(善處)하겠습니까? 관북(關北) 한 도(道)는 진실로 성조(聖祖)께서 용흥(龍興)204)  하신 땅이요 수많은 생령(生靈)은 모두 풍패(豊沛)205)  의 자제(子弟)이므로 열성조(列聖朝)에서도 넉넉하게 구휼한 것이 다른 도에 비교하여 자별(自別)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석으로 먹을 것을 기다리는 백성으로 하여금 끝내 희망을 잃고 호읍(號泣)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묘당에서는 또한 어떻게 차마 한결같이 가로막기만 하고 구제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무뢰(無賴)한 유수(遊手)의 무리들이 향민(鄕民)으로 재물을 가지고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을 유인하여 비록 채소나 닭이나 시초(柴草) 등의 작은 물건일지라도 모두 거간꾼으로 조종하여 스스로 팔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심지어는 중도(中都)206)  의 아후(兒候)·임적(林賊)이라는 칭호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세히 살피어 엄히 금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경상 병사 김형로(金亨魯)의 아우 김덕로(金德魯)는 함안(咸安)의 토병(土兵) 호적을 모사해 바꾸어 도시(都試)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습니다. 엄하게 징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김덕로는 충군(充軍)하여 변방 먼 곳으로 보내고 김형로는 나문(拿問)할 것이며 함안 군수 성석희(成錫禧)는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쓴 율(律)로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우의정 김약로가 재신(宰臣)들을 자주 소견하여 조정(朝政)을 의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형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옛날 명(明)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궁중(宮中)에서 30여 년 동안을 깊이 있다가 마침내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성상(聖上)께서 국사(國事)를 이와 같이 듣지 아니하시니, 신은 그윽이 민망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국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낱 왕(王) 자만을 싫어할 뿐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가 매달 중에 몇 차례씩 들어와서 뵙는 예(例)를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문종(文宗)이 대리(代理)를 하실 때에 여러 신하들이 문종께 입대(入對)하고 물러나 세종께 나아가서 일을 아뢰었으니, 이는 국가의 옛제도입니다."
하고, 공조 참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신 등을 속이셨습니다. 처음에 시좌(侍坐)하여 행하던 차대(次對)를 파하고는 즉시 때때로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실 것을 허락하셨는데, 끝내 즐겨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정무를 끊었는데 또 다시 이렇게 하니, 이는 명분없는 예(禮)일 뿐이다."
하였다. 김약로가 울면서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어렵게 여기시어 한갓 신들을 속이시는 것입니까?"
하고, 박문수는 말하기를,
"신 등이 다만 동궁(東宮)께만 진대(進對)하고 성상을 뵙지 않는다면 이는 그 아버지만을 뵙고 그 할아버지를 뵙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비록 동궁의 대리를 허락했으나 당시의 정제(定制)에 이미 병형(兵刑)에 관한 대사(大事)는 친림(親臨)하여 결재하는 규정이 있으니, 그렇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을 연접(延接)해 보고 다스리는 방도를 묻는 것은 진실로 이치의 부득이(不得已)한 것인데, 도리어 합문(閤門)을 닫고는 깊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 밖의 일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원경하가 명(明)나라 황제를 끌어대어 경계한 것은 족히 전률(戰慄)을 느끼게 하였거니와, 이종성(李宗城)이 ‘대내(大內)에 계시면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한 말도 또한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청한 것은 그 직분을 얻은 것이라고 이를 만하며 뒤에 가서 임금도 또한 그대로 따라서 한 달에 두 차례 들어와서 뵙는 제도를 정하였으니,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여기에 대해 또한 기롱하는 바가 있었다. 무릇 근년 이래로 임금이 정령(政令)을 거행하는 사이에 과오(過誤)를 범한 것이 모두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러한데도 여러 신하들은 가만히 아래에서 팔짱만 끼고 일찍이 한 사람이 한 마디 말도 구제한 적이 없다가 유독 이제 와서 같은 소리로 힘써 다투고 심지어는 신하를 속였다는 말로써 감히 진달하고 피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이 일이야 말로 밖으로는 임금의 뜻을 거역하는 형태가 있고 안으로는 친미(親媚)하는 마음을 본떴기 때문에 임금이 따르지 않는데도 다투기를 더욱 강력하게 하였으니 무죄(無罪)한 것만으로도 다행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일과 같지 않고 오로지 임금의 실책을 박절하게 공박하면서 스스로 아첨하는 사사로움이 없으면 격노(激怒)를 사서 취패(取敗)하기가 쉽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눈익게 보고 침묵을 지키면서 즐겨 구하지를 아니하고 이쪽에서는 힘써 다투고 용감하게 말하면서 즐겨 말려고 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간쟁한 것이란 실로 아첨하는 하나의 습성인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른바 ‘말로써 낚는다.’는 말은 참으로 이러한 무리를 두고 이른 것이니, 또한 충(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不足)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57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비록 동궁의 대리를 허락했으나 당시의 정제(定制)에 이미 병형(兵刑)에 관한 대사(大事)는 친림(親臨)하여 결재하는 규정이 있으니, 그렇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을 연접(延接)해 보고 다스리는 방도를 묻는 것은 진실로 이치의 부득이(不得已)한 것인데, 도리어 합문(閤門)을 닫고는 깊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 밖의 일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원경하가 명(明)나라 황제를 끌어대어 경계한 것은 족히 전률(戰慄)을 느끼게 하였거니와, 이종성(李宗城)이 ‘대내(大內)에 계시면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한 말도 또한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청한 것은 그 직분을 얻은 것이라고 이를 만하며 뒤에 가서 임금도 또한 그대로 따라서 한 달에 두 차례 들어와서 뵙는 제도를 정하였으니,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여기에 대해 또한 기롱하는 바가 있었다. 무릇 근년 이래로 임금이 정령(政令)을 거행하는 사이에 과오(過誤)를 범한 것이 모두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러한데도 여러 신하들은 가만히 아래에서 팔짱만 끼고 일찍이 한 사람이 한 마디 말도 구제한 적이 없다가 유독 이제 와서 같은 소리로 힘써 다투고 심지어는 신하를 속였다는 말로써 감히 진달하고 피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이 일이야 말로 밖으로는 임금의 뜻을 거역하는 형태가 있고 안으로는 친미(親媚)하는 마음을 본떴기 때문에 임금이 따르지 않는데도 다투기를 더욱 강력하게 하였으니 무죄(無罪)한 것만으로도 다행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일과 같지 않고 오로지 임금의 실책을 박절하게 공박하면서 스스로 아첨하는 사사로움이 없으면 격노(激怒)를 사서 취패(取敗)하기가 쉽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눈익게 보고 침묵을 지키면서 즐겨 구하지를 아니하고 이쪽에서는 힘써 다투고 용감하게 말하면서 즐겨 말려고 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간쟁한 것이란 실로 아첨하는 하나의 습성인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른바 ‘말로써 낚는다.’는 말은 참으로 이러한 무리를 두고 이른 것이니, 또한 충(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不足)할 것이다.

 

12월 13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유언국(兪彦國)을 헌납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교리로, 임석헌(林錫憲)을 수찬으로, 이응협(李應協)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을 제배하여 우의정으로 삼고, 우의정 김약로를 좌의정으로 승배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김약로를 불러서 복상(卜相)할 것을 명하니, 김약로가 여러 옛 정승의 이름을 열거해 써서 올렸다. 임금이 또 가복(加卜)할 것을 명하니, 김약로가 이어서 청대(請對)하여 들어와 뵙고 임금의 뜻을 탐지한 다음에 이에 정 우량으로 복상해 들이니, 드디어 정승을 제배하였다. 김약로가 임금 앞에서 칭찬하기를,
"여망(輿望)이 돌아간 바이니, 현상(賢相)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세도(世道)를 조제(調劑)하는 것은 오로지 이판(吏判)207)  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재호(趙載浩)와 이천보(李天輔)는 이를 맡길 만하며 탕평(蕩平)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만약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다면 세도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원컨대 수시로 살피시고 조절하시기를 엄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궤렬(潰裂)의 현상이 사방에서 나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마땅히 새 정승과 더불어 더욱 힘쓰도록 하라. 만약 세도가 이에서 더함이 있다면 마땅히 선정전(宣政殿)에 앉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대개 정아(正衙)에 임어하여 당인(黨人)을 베어 버린다는 것을 이름이었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신이 전하를 받들어 국사(國事)를 위하고자 한다면 늙음이 장차 닥치는 줄도 모를 것입니다."
하였다.

 

원경하(元景夏)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원경하는 윤봉오(尹鳳五)의 탄핵(彈劾)을 받고부터 서울과 시골로 출입(出入)하면서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다가 이에 이르러 이 직임에 임명되었다.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이장(李彛章)이 김포(金浦)와 남양(南陽)에 암행(暗行)하고 돌아와서 민간(民間)에서 역질(疫疾)로 사망한 상황을 말하니, 임금이 이를 민망히 여기고는 제도(諸道)에 하교하여 조세와 포적(逋糴)을 면제하게 하고 전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지태(尹志泰)와 전 김포 군수(金浦郡守) 이광진(李光進)은 모두 잡아다가 처리하게 하였다.

 

12월 14일 무자

어사(御史) 이이장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목자(牧子)208)  가 그릇되게 양역(良役)에 이름이 들어 있거나 양민(良民)을 목자에 투속(投屬)하는 것은 법으로 매우 엄하게 금하고 있는데도, 목관(牧官)209)  과 부사(府使)가 언제나 서로 다툽니다. 목관은 사복시(司僕寺)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고가 있으면 도제조(都提調)가 매양 계달하여 부사를 파직시키곤 하는데, 선생안(先生案)210)  을 취하여 상고한즉 이 때문에 파직에 걸린 자가 열 명에 두세 명이나 됩니다. 목자에 투속하는 일이 날로 늘어나서 목관과 부사로 하여금 호적을 상고하여 조사해보니, 목자로 거짓 일컫는 자가 75호나 되었습니다. 남양(南陽)은 흔히 문지(門地)와 인망(人望)이 있는 자로 차견(差遣)하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을진대, 하물며 피잔(疲殘)한 수령(守令)이야 어찌 뜻밖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는 비록 서로 다툼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시(本寺)에서 바로 파직시키지 못하게 하고 다만 핵실(覈實)을 청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에서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5일 기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6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7일 신묘

임금이 임인년211)  에 연좌되어 죽은 사람인 김성행(金省行)·백망(白望)·장세상(張世相)·묵세(墨世) 등에게 관직(官職)을 추증하여 설원(雪冤)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원경하(元景夏)가 김성행 등에게 민휼(憫恤)하는 은전(恩典)을 베풀 것을 청하여 임금이 장차 따르려 하다가 조현명(趙顯命)이 따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므로 정침했던 것이다. 그 뒤에 원경하가 또 이를 청하자, 우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이는 천고(千古)의 무안(誣案)이니 특별히 설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날 김약로와 판부사 민응수(閔應洙)·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도승지 서명형(徐命珩)이 입시하여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하의 이 청원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고심(苦心)인 것이다. 원경하가 일찍이 말하기를, ‘김성행이 국문을 받으러 나갈 때에 그 두발(頭髮)을 단단하게 매어 두어 움직일 수 없게 해주기를 원했으니, 이는 대개 머리가 조금이라도 동요되면 승관(承款)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고 하였고, 영빈(寧嬪)도 일찍이 일컫기를, ‘김성행은 그 모습이 약한데 매질을 가하여도 불복(不服)한 것은 가상(嘉尙)하게 여길 만하다.’고 하였다. 백망이란 자는 효장(孝章)212)  의 외속(外屬)이고 묵세는 곧 동궁(東宮) 때의 나인(內人)이다. 그때에 백망의 친속(親屬)인 이성(李姓)의 나인을 체포하려던 일이 있었는데, 묵세는 백망의 친척이요 성이 이씨였기 때문에 느닷없이 잡혀 들었으니 그는 이미 지극히 억울한 터이라 비록 거짓 자복코자 하여도 또한 어쩔 도리가 없어서 즉시 함구(緘口)하고 죽었으니 진실로 애민(哀憫)하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른바 이성의 나인은 그 지목한 바를 알 만한데 그 뜻이 오로지 그 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였던 것이다. 경들이 이미 그 사단(事端)을 발설하니, 나의 마음이 더욱 편치 못하다. 장세상은 중관(中官)으로써 무변(武弁)들을 뒤따라 다녔으니 그 사람됨이 또한 외람된 데가 있지만 그의 죽음은 매우 억울하다. 그러나 당시에 자복하지 아니하고 또 어떻게 하겠는가? 초당(貂璫)213)  의 폐단을 내가 마땅히 말해야겠다. 박상검(朴尙儉)은 본래 문장에 능하였기에 나도 처음에는 좋아하였으나 그 뒤에 그가 홍수(紅袖)214)  의 무리와 더불어 고약한 일의 단서를 만들어 내므로 내가 경묘(景廟)께 아뢰어 그 이름을 내시(內侍)의 적(籍)에서 빼어 버렸었다. 그 뒤에 마음대로 하라고 한 하교(下敎)를 과연 만들어 냈는데, 이때 중관(中官)이 청휘문(靑暉門)을 닫고 내가 문침(問寢)하는 길을 막아 버려서 내가 문에 이르렀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일은 이미 끝났다.’고 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나를 불러서 들어가 뵙자, 경묘께서 내게 온 함원 국구(咸原國舅)의 글을 찾으시기에, 내가 그 글을 드리고 청하기를, ‘신이 이것을 드리는 것은 다른 뜻이 없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뿐이니 청컨대 되돌려 내려 주소서.’ 하였더니, 홍수가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무엇을 하려고 억지로 찾소? 즉시 물러가오.’ 하였었다. 옛부터 형제의 사이란 어려운 것이다. 내가 황형(皇兄)의 지극한 은혜가 아니였다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겠느냐?"
하고, 이내 눈물을 흘리고 오열(嗚咽)하면서 말하기를,
"황형께서 나의 처소로 내림(來臨)코자 하셨으나 중관이 반드시 중지시켰을 것이다. 이에 동조(東朝)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때에 형세로 보아 장차 도로 왕자(王子)가 될 것이다. 비록 왕자가 된다 하여도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이는 곧 신의 지극한 소원이나 국사(國事)를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였다. 나의 이 말은 내 한 몸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국사를 위해서였다. 이에 동조께서 언교(諺敎)를 내리셨는데, 조태구(趙泰耉)가 이를 받지 않고 봉납(封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었다. 경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이 고변(告變)했을 때에 옥관(獄官)이 마땅히 나의 일을 직접 물어야 하는데, 다만 말하기를, ‘일이 동궁(東宮)에 관계되는 것은 묻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관이 외인(外人)과 교결(交結)하는 폐단은 마땅히 엄하게 막아야 한다. 이번 이 휼전(恤典) 중에서 장세상은 빼어 버리고자 한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결한 죄는 마땅히 따로 논해야 하고 그 억울한 것은 마땅히 신원되어야 합니다. 이미 무안(誣案)이라고 이른다면 이와 같이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장세상의 죽음은 외인과 교결한 것 때문이 아니고 원옥(冤獄)에 죽은 것이며 또 그 교결한 바가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진년215)  에 상(上)께서 세제(世弟)를 부르시고 또 종이와 붓을 들이라고 명하셨으니, 장차 무슨 말씀을 쓰시려는지 알지 못했으나 중관들이 버티고 들이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을 알 만하다. 지금 그 남은 무리로서 살아 있는 자가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날의 처분에 승복하겠는가? 민휼하는 은전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중관은 관직을 회복시키고 김성행에게는 증직(贈職)을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한 지어미가 억울함을 부르짖어도 오월에 서리가 날린다.’고 했으니 이러한 부류를 이른 말이다. 김성행이 만약 그때에 승관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가 승관하지 아니한 것은 진실로 기이하다. 이로써 본다면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백망에 대한 휼전은 혹시 내게 사사로움이 있다고 하겠는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어찌 감히 그렇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러한 말을 만들어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역신(逆臣)입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밖에도 또 있다. 그러나 이루 다 설원하지는 못하겠고 지금은 다만 그 큰 것만을 거론한 것이다."
하였다. 민응수가 말하기를,
"그 큰 것을 거론하면 작은 것은 저절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기를,
"원통하고 억울한 줄을 알고도 막혀 있는 것을 소통시키지 아니한다면 어찌 왕정(王政)의 차마 할 바이겠는가? 그 가운데 묵세의 잔인(殘忍)함과 김성행의 수립(樹立)함과 백망의 원통함을 안고 죽은 것은 한갓 하교(下敎)가 아니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묵세의 휼전은 후하게 거행하고 백망에게도 또한 휼전을 내리며 김성행은 증직(贈職)하라. 그리고 장세상은 그가 만약 근칙(謹飭)했다면 환시(宦寺)의 이름이 어찌 여기에 오르겠는가? 마땅히 엄히 제방(隄防)하여야 할 것이지만, 죽은 것은 억울한 것이니, 같은 예로 신설(伸雪)토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국체(國體)가 비로소 원만해지고 군신(君臣)의 의리가 바르게 될 것이다. 내가 마땅히 할 바를 지금에야 다했다."
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이를 사책(史策)에 자세히 기록하도록 하였다.

 

정언 김한로(金漢老)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군부(君父)를 위하여 엄하게 징토(懲討)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의리인데,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공(公)을 등지고 당(黨)에 죽는 무리들이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혹은 의리의 설(說)로써 연중(筵中)에서 진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앞장서서 논의를 창도(倡導)하여 멋대로 혼자서 계달(啓達)해 오는 것을 정지하게 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범(負犯)이 있는데도 엄히 주토하는 데에서 도망해 면하였으니 이는 방정(邦政)이 너무 너그러운 것이었습니다. 지난번에 한두 사람의 유신(儒臣)은 일이 몰려 온 것을 인연으로 삼아 사연(肆然)히 진달하였으니, 이는 한갓 당습(黨習)만을 알고 명의(名義)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으로서 그 방자하고 무엄(無嚴)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를 버려 두면 제방이 점점 무너져서 후폐(後弊)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날의 유신에게 무거운 견벌(譴罰)을 가하시어 다시는 논사(論思)의 직임에 검거(檢擧)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상원(林象元)이, 소론(小論)이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정지시킨 것을 의리(義理)라고 주장했다 하여 엄교(嚴敎)로 인하여 좌폐(坐廢) 되었는데, 서지수(徐志修)가 논계를 창도하여 합계를 정지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옥당(玉堂) 이이장(李彛章)·윤동도(尹東度)·조운규(趙雲逵) 등이 임상원을 구원하여 수용(收用)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김한로의 상서에 이를 언급한 것이다. 임금이 취하여 보고 하교하기를,
"임상원이 연석에서 아뢴 것은 잘못이며 윤동도 등이 그 재주를 칭찬한 것은 그 일이 무엄함에 관계된다. 그리고 김한로는 그 뜻은 비록 바른 방향으로 권계(勸戒)하는 것 같지만 실상인즉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니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게 하였다. 이게(李垍)가 말하기를,
"근래에 말로 인해 죄를 얻은 자가 많습니다. 저 임명주(任命周)와 윤광천(尹光天) 등을 마땅히 관용하시어 석방시켜야 합니다. 또 이익보(李益普)는 이정열(李挺說)의 지친(至親)인 까닭으로 지색(枳塞)을 당했는데 오늘날 세상에서 이러한 사람들이 진실로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광천은 대훈(大訓)을 가리켜 숙특(淑慝)216)  을 분별하지 못한 것으로 말하였고, 임명주는 첩(牒)을 바친 적수(賊帥)의 이정열을 반역(叛逆)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 두 사람은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해 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인데 어찌 가볍게 논의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게가 또 말하기를,
"박성원(朴聖源)과 이언세(李彦世)도 말로 인해 오래도록 폐치(廢置)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언세는 남을 참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또한 어렵다. 만약 쓸 곳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쓸 것이다. 박성원은 조용하지 못한 사람이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여 이게를 무엄(無嚴)하다 하고 그 직임을 체개하게 하였다.

 

12월 18일 임진

관학 유생(館學儒生) 어유형(魚有珩) 등이 상서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2월 21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과 장신(將臣)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조령(鳥嶺) 밑의 7읍(邑)에서 세미(稅米)를 싣고 조령을 넘어 충주(忠州)의 강창(江倉)에 납입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매우 큽니다. 청컨대 돈으로 대신하여 강창에 납입하게 하소서. 그리고 노비(奴婢)의 윤삭포(閏朔布)도 또한 감제(減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의 말이 군문(軍門)의 모재(耗財)에 미치자,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 등의 다투어 사대부(士大夫)의 출회(秫灰)217)  와 약물(藥物)을 구하는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부형(父兄)의 병이 있어서 약이(藥餌)를 구하는 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이는 윤이(倫彛)에 관계되는 일이니, 차라리 군문의 재물을 잃더라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옛적에 선조(先朝)께서 하교하시기를, ‘만약 푸른 큰 대나무를 주지 않으면 사대부가 어디서 죽력(竹瀝)218)  을 얻겠는가?’ 하셨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도 당재(唐材)를 내국(內局)에서 구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느냐? 군문(軍門)에는 없어도 되지만 이것은 그만두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일국(一國)의 재부(財賦) 절반이 군문으로 들어가서 기계(器械)를 갖추고 군병(軍兵)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관장(管掌)하는 신하를 선택하지 않아서 소모(消耗)되는 사단(事端)이 많은데도 일찍이 스스로 돌이켜 살피지 않고는 이에 출회와 약물 등의 작은 소비만을 가지고 망령되게 천청(天聽)에 아뢰어 자신의 허물은 가리고 당시의 풍속만 박(薄)하게 만들려고 하였는데, ‘군문에는 없어도 되지만 이것은 그만두게 할 수 없다.’는 하교는 참으로 대성인(大聖人)의 규모(規模)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58면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 / 역사(歷史)


[註 217] 출회(秫灰) : 차조[粘粟]의 짚을 불에 태운 재로, 관(棺)의 밑바닥에 까는 데 씀.[註 218] 죽력(竹瀝) :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
사신(史臣)은 말한다. 일국(一國)의 재부(財賦) 절반이 군문으로 들어가서 기계(器械)를 갖추고 군병(軍兵)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관장(管掌)하는 신하를 선택하지 않아서 소모(消耗)되는 사단(事端)이 많은데도 일찍이 스스로 돌이켜 살피지 않고는 이에 출회와 약물 등의 작은 소비만을 가지고 망령되게 천청(天聽)에 아뢰어 자신의 허물은 가리고 당시의 풍속만 박(薄)하게 만들려고 하였는데, ‘군문에는 없어도 되지만 이것은 그만두게 할 수 없다.’는 하교는 참으로 대성인(大聖人)의 규모(規模)라 하겠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최진해(崔鎭海)와 최수강(崔壽岡)에게 어찌하여 관직을 제수하지 않느냐?"
하니, 김상로가 사죄하기를,
"우미(愚迷)하여 깨닫지 못했다가 지금 하교를 듣고는 비로소 크게 깨달아서 감읍(感泣)합니다."
하고, 드디어 무직(武職)을 제수하였다. 최(崔)는 곧 육상궁(毓祥宮)의 본가(本家)이다. 임금이 용잠지(龍潛池)의 깊이와 너비를 구윤명(具允明)에게 묻기를,
"성조(聖祖)께서 어린 시절에 못에서 목욕을 하신 것이냐? 못에 떨어져서 잠기신 것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린 시절 유희(遊戱)하실 때에 실족(失足)하여 떨어지셨다고 합니다. 성조께서 어린 시절 신의 7대조 대사성 신 구성(具宬)에게 수학(受學)을 하셨는데 신의 할아비는 집이 가난하여 밥 짓는 계집 한 사람만 있었고 국을 만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문도(門徒) 들이 윤번으로 돌아가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조께서 친히 국을 만드시고 그릇에 담아서 나누려고 할 즈음에 손님이 와서 문으로 들어오다가 잘못하여 한 발을 국 속에 빠뜨렸다고 합니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으나 성조께서는 애써 만든 국을 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또 버선 신은 발로 잠깐 적신 것이 무엇이 더러울게 있느냐 하시고 이연(怡然)히 국을 진어(進御)하시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기 때문에 감히 상문(上聞)합니다."
하였다.

 

12월 23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생원(生員) 유언옥(兪彦玉) 등이 다시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을 종향(從享)하자는 청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일찍이 전에 소계(疏啓)한 것을 비국에 내리고는 정침해두고 답하지 않은 10여 조항을 대략 거론하고 다시 품처(稟處)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국에 10년 동안 쌓여 온 티끌을 경을 기다려서 오늘에야 다 쓸어 버렸다."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제조(提調) 김상로가 다시 온천(溫泉) 물을 길어 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지토록 하라. 내가 온양(溫陽)의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히 세시(歲時)를 지내게 하련다."
하였다.

 

12월 25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諫院)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2월 26일 경자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세 번 사직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때 이르러 명을 받들었다.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내가 수십 년을 고심(苦心)하는 것이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당론(黨論)이 2백 년을 내려오다 보니 그 사이에 국가의 위태로움이 자주 있었습니다. 정미년219)   이후로 다행히 한두 신하가 함께 조제(調劑)할 계책을 강구해온 데 힘입어 지금에 와서는 당을 하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을 취하는 방도는 피차(彼此)를 논하지 말고 그 중에서 훌륭한 자를 가려서 쓰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옛 법규를 변경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천보(李天輔)는 어떤가?"
하매, 정우량이 말하기를,
"이천보와 조재호(趙載浩)는 함께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길 만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재호는 남을 이기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이 세계가 청명(淸明)해진 연후(然後)에야 나갈 수 있다.’고 했으니, 어찌 지나치지 아니한가?"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기는 하나 조재호는 고 좌상(左相)의 아들이요 풍원군(豊原君)의 조카이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 내지 못하겠습니까? 성인(聖人)도 사람을 관직에 인용함에 있어서는 그의 장점(長點)을 가려서 썼습니다. 잘 조제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면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옛것을 고치지 아니하셔야 합니다. 마치 저 불가(佛家)의 십층탑(十層塔)과 같이 9층은 거의 이루어졌는데 진실로 한 삼태기의 흙을 부족하게 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진현(進見)하는 날이 이미 정한 날짜가 있으니, 원컨대 자주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시어 국사(國事)를 묻도록 하소서."
하였다.

 

밤에 임금이 동궁(東宮)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우의정 정우량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원량(元良)을 경에게 부탁하니, 경은 마땅히 이 마음을 알라."
하고, 이어 세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염매(鹽梅)220)  의 뜻을 아느냐? 하나는 짜고 또 하나는 신 것이니, 조제(調劑)하는 책임을 좌상과 우상에게 부탁한다. 병조 판서는 이 형(兄)이 있고 이 아우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이 사람은 국가가 의장(倚仗)할 만한 신하이니, 좌상과 우상을 이을 사람은 곧 병조 판서이다."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양쪽이 서로 다투어서 저쪽에서는 이쪽을 역적이라 이르고 이쪽에서는 저쪽을 역적이라 이르는데, 그 사이에 있으면서 조제하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일에 언급하여 박성원(朴聖源)에 대한 처분은 너무 지나치다 하고 서지수(徐志修)·황합(黃柙)·유언민(兪彦民)에 대한 근점(靳點)221)  은 옳지 못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언세(李彦世)는 함께 거론하지 않느냐? 왕자(王者)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하는[一視同仁] 정사에 이동(異同)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12월 27일 신축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왔는데, 꼬리의 길이는 2, 3척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2월 28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9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호남 어사(湖南御史) 김치인(金致仁)이 복명(復命)하고 임금께 아뢰기를,
"각 고을에 속오군(束伍軍)을 온전히 사천(私賤)과 의탁할 데가 없는 자만으로 충정(充定)하여 습조(習操)할 때에는 문득 도망하여 흩어지는지라, 장교(將校)들이 걸개(乞丐)하는 무리들을 몰아다가 임시로 구차하게 충당시키고 있으니, 완급(緩急)이 있을 때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과 수신(帥臣) 및 영장(營將)을 중추(重推)하고 아울러 각도(各道)에도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김치인이 또 아뢰기를,
"정읍 현감(井邑縣監) 윤동함(尹東涵)의 치적(治績)이 제일이었습니다."
하니, 준직(準職)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춘방(春坊) 관원에 월름 일등(越廩一等)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글을 보는 것은 글을 읽는 것만 같지 못하고 글을 읽는 것은 외어서 읽는 것만 같지 못하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는 자는 혹 글을 보고 스스로 얻는 수도 있겠지마는 어찌 글을 읽어서 관통(貫通)하는 것과 같겠는가? 비록 글을 읽어 관통했다고 하더라도 한번 책을 덮어 두매 글과 내가 판이(判異)하게 둘이 될 것 같으면 어찌 외어서 읽어 융회(融會)하여 글과 내가 일체(一體)가 되는 것과 같겠는가? 지난번 글을 읽는 데에 대하여 계칙(戒飭)한 것도 그 뜻이 대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저께 춘방을 적간(摘奸)할 때는 두 사람이 모두 등불을 켜고 책을 펴 놓은 채 앉아 있기에 그때는 직분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뒤에 생각해보니 비록 밤이 새도록 등불을 켜고서 책을 펴놓고 있다 하더라도 외어서 읽지 않으면 어떻게 관통하고 융회하는 효험이 있겠느냐? 춘방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원량(元良)에게 권하겠느냐? 그날 입직(入直)한 자는 아울어 월봉(越俸)토록 하라."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참판으로, 권항(權抗)을 지평으로, 정홍순(鄭弘淳)과 송덕중(宋德中)을 정언으로, 조운규(趙雲逵)와 한광회(韓光會)를 교리로, 홍중효(洪重孝)를 수찬으로, 유엄(柳儼)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언세(李彦世)·박성원(朴聖源)을 전과 같이 검의(檢擬)하라고 명하였다. 또 모든 궁가(宮家)에서 해양(海洋)에 절수(折受)하는 것을 금하고 진고(陳告)한 사람은 비국에서 초기(草記)하여 형배(刑配)토록 하는 것을 드러나게 법식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대신의 주청에 따른 것이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등이 제신(諸臣)의 진현(進見)을 한 달에 두 차례로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달에 세 차례는 옛날 빈대(賓對)의 제도이다.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가 말하기를,
"만일 세 차례가 싫으시다면 네 차례로 정하더라도 무슨 방해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무식(無識)하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이 일에는 유식(有識)합니다. 한 달 동안에 여러 번 모든 신하들을 접견해 보시고 군국(軍國)에 관한 일을 재결(裁決)하시면 어찌 국가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어 한 달에 두 차례 진현할 것을 허락하면서 보름 이전에 1일, 보름 이후에 1일로 하되, 무고(無故)한 날에 입시하여 군국의 중요한 일을 품결(稟決)토록 하고 불시(不時)에 소견하거나 무시(無時)로 구대(求對)하는 것은 이 규례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우의정 정우량이 말하기를,
"북평사(北評事) 조돈(趙暾)이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니, 정배(定配)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30일 갑진

진곡(賑穀) 3천 석을 바다에 띄워 제주(濟州)의 백성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는데, 목사(牧使) 정언유(鄭彦儒)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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