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병자
남태기(南泰耆)를 승지로,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좌윤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집의로, 임집(任)을 교리로 삼았다.
간원 【 헌납 임순(任珣)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금직(禁直)은 법종(法從)의 진장(陳章)이 아니면 감히 마음대로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인데, 사어(司禦) 심사주(沈師周)는 춘방의 관원과 문의(文義)를 다투다가 지레 뛰쳐나가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수령이 임의로 원장(圓杖)을 쓰는 것은 조정의 금령이 지엄한데 곡산 부사(谷山府使) 변주국(邊柱國)은 형장(刑杖)이 너무도 혹독하여 이속(吏屬)의 잘못이 있으면 문득 원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러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장폐(杖斃)하는 자가 생긴다 하니, 청컨대 파직하고 다시는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달한 대로 하게 하였다.
장령 송능상(宋能相)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번에 도통(道統)의 이야기로써 저하에게 아뢴 사람이 있었는데, 의리를 무용지물로 여겨 너무나도 두려워함이 없어, 혹은 성인과 짝하여 도를 전한 현인을 빠뜨리기도 하고 혹은 명의(名義)에 죄를 지은 무리를 넣기도 하면서 공(公)을 빙자하고 사심(私心)을 이루려 하여 임의로 높이고 낮추었는데도 저하께서 한 마디도 엄중히 배척하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행여나 배척하신 일이 있는데도 신이 못들은 것입니까? 지난 병오년033) 간에 신의 스승 전 집의 한원진(韓元震)이 경연에 출입하면서 선왕조(先王朝)에서 어진 이를 존숭하고 간사(奸邪)한 자를 배척하신 유훈을 상세히 아뢰었고, 또 명을 받들어 고금의 격언(格言)을 뽑아 올리면서 동방의 현인으로서 도의(道義)로 전수(傳授)한 분을 모두 서열(序列)하여 그 연원(淵源)을 나타내니, 성상의 마음도 기뻐하셨고 군정(群情)도 협화하였습니다. 그 후 세상의 변란이 겹쳐 일어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조술(祖述)한 사람은 도통의 서열에서 빠지고 그 배척했던 자는 도리어 명현(名賢) 중에 끼이게 되었으니, 현사(賢邪)는 문란해지고 의리는 날로 그릇되어 신의 스승 한원진이 전일에 올렸던 충언(忠言)과 지론(至論)을 다시는 전송(傳誦)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옛날 윤언명(尹彦明)034) 은 정씨(程氏)035) 의 도학이 행해지지 않는다 하여 조정의 부름에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신의 스승의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이 또다시 이와 같아 갈수록 낭패스러우니, 한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는 나도 자세히 들었다. 풍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바로 올라와 나의 부족함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동방의 도통을 두루 들어 아뢰면서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을 들지 않았고 또 윤증(尹拯) 부자를 언급했기 때문에 송능상의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우상은 왜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장령 송능상의 글 중에 자못 간접적으로 배척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홍익삼(洪益三)은 말하기를,
"그 글에는 도통에서 빠뜨렸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락된 사람이 누구인가?"
하매, 김약로가 말하기를,
"소조(小朝)의 차대(次對)에서 신이 산림의 선비를 초치할 것을 아뢰었더니, 우상이 우리 나라 유현(儒賢)을 두루 들어가면서 아뢰었는데, 우상의 뜻은 연원을 말하려던 것도 아니고 빠뜨리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연(書筵)의 이야기가 거듭 전해지면서, 산림에 있는 사람이 잘못 듣고 이러한 상서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을 언급하지 않았었던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김장생을 들지 않았는데, 사실은 뜻이 있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송나라 승상 문천상(文天祥)036) 의 화상을 사당을 세우고 배향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현명(趙顯命)이 문천상의 화상을 연경에서 구하여 임금에게 바치니, 하교하기를,
"문 승상의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일찍이 들으니, 육진(六鎭)에는 황제총(皇帝塚)과 오국성(五國城)037) 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문천상과 육수부(陸秀夫)038) 두 사람을 사당을 세워 배향하여 이제(二帝)039) 로 하여금 신하가 없는 중에 신하가 있게 하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예관(禮官)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2월 4일 정축
임금이 승지 남태기(南泰耆)에게 묻기를,
"네가 북도에서 돌아왔으니, 이른바 황제총을 보았겠구나?"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으면서 그 무덤을 보았는데, 무덤은 행영(行營)의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무덤의 형태는 높고 큰데, 곁에는 허다한 무덤이 있어 배장(陪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오국성은 지금의 볼하진(乶下鎭)에 있는데 성의 사면은 천길 절벽이고 다만 동서로 통하는 한 길만이 있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들이 중원 천자(中原天子)를 사로잡아 이곳에 가두었다 합니다. 듣건대 주민들이 송나라 때의 돈을 습득했는데 돈의 이름은 지화(至和)라 하였으니 지화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입니다. 홍호(洪晧)040) 가 냉산(冷山)에 갇히었다 하는데, 냉산은 지금의 삼수(三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악무목(岳武穆)041) 이 회복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선왕조에서 특별히 영유(永柔)의 와룡사(臥龍祠)에 배향하였으니, 지금 문 승상을 배향하는 것도 온당한 일이다."
하였다.
2월 5일 무인
현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7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낙천군(洛川君) 이온(李縕)의 계자(繼子)인 달선군(達善君) 이영(李泳)을 파양(罷養)하여 본가로 돌려보냈다. 낙천군은 숙묘의 왕자 연령군(延齡君)의 계자인데, 일찍 죽고, 부인 서씨(徐氏)는 투기가 심하여 영과 그 아내 신씨(愼氏)를 괴롭히니, 영이 참다못해 약을 먹고 죽었다. 서씨가 상언(上言)하여 파양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서로 헐뜯고 이간하여 어머니는 어머니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며 며느리는 며느리답지 못하니, 엄히 사핵할 일이다. 그러나 결국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사핵하겠는가? 그 어머니가 이미 소장(訴狀)을 올렸으므로 그대로 봉사하게는 할 수 없으니,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라. 아! 왕자의 봉사는 막중한 것이니, 형망 제급(兄亡弟及)042) 의 예에 따라 봉사할 사람을 조용히 골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전 현감 성이홍(成爾鴻)은 일찍이 경연관의 선정(選定)에 들어 소견하고 강학도 하였으며 대우가 융숭하였는데, 지금 그 사람이 죽었다고 영남 방백(方伯)이 계문하였습니다. 조종조에서는 고 현감 성수침(成守琛)의 상사(喪事)에 경연관의 주달로 인하여 상장(喪葬)을 돌보아 준 일이 있었고, 몇 해 전에 고 자의(諮議) 이간(李柬)의 상사에 옥당 황재(黃梓)의 주달로 인하여 성상께서 특별히 예관을 보내서 치제(致祭)하시고 본도로 하여금 상장을 돌보아 주게 하라고 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대로 돌보아 줌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본도로 하여금 후하게 부조하여 주도록 하였다.
이조 판서 원경하(元景夏)를 파직시켰다. 원경하가 도목정(都目政)에서 응천자(應遷者)043) 를 다 쓰지 않고 복직자를 쓰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원경하의 추고를 청하였다. 이에 원경하가 상소하기를, ‘계축년044) 8월에는 10자리[窠]에 다 복직자를 쓰고 훈련 도감의 응천자는 아직까지 거론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으니, 계축년은 바로 김약로의 형 김취로(金取魯)가 정사를 맡았던 때였다. 김약로가 부형에게까지 간접적으로 배척되었다 하여 차자를 올려 인혐하고 들어가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대신이 추고를 청하였는데, 정관(政官)이 대신의 부형의 일을 끌어들인 것은 체통을 손상시킨 일이고 후폐에도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8일 신사
신만(申晩)을 이조 판서로 삼고,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세 번이나 시패(試牌)를 어겼다 하여 파직시켰다.
2월 9일 임오
이정보(李鼎輔)를 도승지로, 이천보(李天輔)를 병조 판서로, 조명채(曹命采)를 대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사간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집의로, 이진길(李晉吉)을 지평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정홍순(鄭弘淳)·권항(權抗)을 정언으로, 조재호(趙載浩)를 예조 판서로,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참판으로, 이현중(李顯重)을 겸 설서로 삼았다.
2월 10일 계미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작헌례를 행하였는데, 제2실에 영정의 신본(新本)을 봉안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어가를 따랐고 저녁에야 환궁하였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나아가 승지 홍익삼(洪益三)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께서는 늘 염려를 하셨고, 영빈(寧嬪)도 매양 경계하기를, ‘자봉(自奉)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 모든 사람의 근력은 순전히 잘 입고 잘 먹는 데서 소모되는 것이다. 듣자니, 사대부 집에서는 초피(貂皮)의 이불과 이름도 모를 반찬이 많다고 한다. 사치가 어찌 이토록 심하게 되었는가?"
하니, 홍익삼이 말하기를,
"사치하는 풍조는 과연 성상의 말씀과 같으나, 초피는 전연 없고 더러 양피(羊皮)의 이불은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이 어린 사자(士子)가 말을 타는 것도 해괴하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길에서 보니 사자의 걸음걸이는 딴 사람과 달랐고, 하인들은 부복하여 지나치고는 눈여겨 보면서 말하기를, ‘양반’이라고 하였다. 국법에는 말을 타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도 지금은 걸어다니는 사자가 없다. 옛사람은 온돌에서도 자지 않으면서 ‘인생이 풀섶 사이에서 자지 않을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은 근력을 튼튼히 하여 편안하고 한가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무변(武弁)045) 으로서 수척했던 자도 병사나 수사만 지내면 비대해져서 옛날의 모습이 없어지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2월 12일 을유
헌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14일 정해
조명리(趙明履)를 이조 참판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수어사로 삼았다.
생진과(生進科) 장원의 봉함을 가만히 엿보고서 가려 뽑는 데 대한 금령(禁令)을 다시 엄칙하였다. 대체로 생진과의 장원을 극도로 엄정하게 가리는 것은 3백 년을 내려온 옛 제도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방(榜)을 내걸 때에 고관(考官)이 반드시 봉함을 뒤적거려 그 이름을 가만히 엿보고서 아무리 등급이 낮아도 장원에 두니, 정묘방(丁卯榜)부터 그 법을 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생진의 방을 이미 내걸었는데, 참고관(參考官) 신회(申晦)가 아뢰기를,
"옛 제도가 탕연(蕩然)하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탕연하다는 말은 방자하고 무엄하다. 이런 무리가 있기 때문에 공도(公道)가 탕연해진다."
하고, 신회를 먼저 파직하고 잡아다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모든 과거는 글로써 사람을 가리는 것인데 만약 봉함을 엿보고 차등을 매긴다면 이는 사람을 위하여 글을 가리는 것이 되니, 이것이 공정한 일인가 사사로운 일인가? 이 뒤로는 시관으로서 이 법을 어기면 과장(科場)에서 사사로운 정을 행한 죄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과장의 폐단은 이미 고질화되었으니, 임금이 바로잡아 고치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생진과의 장원을 뽑지 않는 데 이르러서는 3백 년 옛 제도가 탕연해졌다는 말도 심히 해괴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 국초 이래로 생진과에서 반드시 장원을 뽑았던 것은 대체로 많은 선비들을 격려하고 세상을 고무하려는 뜻이었다. 이제는 옛 제도가 다 바뀌어 관제로 말하더라도 한림의 천거나 전랑(銓郞)의 선출까지 옛 규칙을 다 바꾸었으며, 생진과의 장원을 선출하던 것까지 또 탕연해졌으니, 애석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63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과장의 폐단은 이미 고질화되었으니, 임금이 바로잡아 고치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생진과의 장원을 뽑지 않는 데 이르러서는 3백 년 옛 제도가 탕연해졌다는 말도 심히 해괴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 국초 이래로 생진과에서 반드시 장원을 뽑았던 것은 대체로 많은 선비들을 격려하고 세상을 고무하려는 뜻이었다. 이제는 옛 제도가 다 바뀌어 관제로 말하더라도 한림의 천거나 전랑(銓郞)의 선출까지 옛 규칙을 다 바꾸었으며, 생진과의 장원을 선출하던 것까지 또 탕연해졌으니, 애석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정형복(鄭亨復)을 지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비국 당상으로서 입참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파직하라고 명하자,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육조의 장관을 일시에 체파(遞罷)하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홍봉한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2월 15일 무자
김상로(金尙魯)를 이조 판서로, 남태량(南泰良)을 좌윤으로, 조명교(曺命敎)를 호조 참판으로, 권적(權𥛚)을 예조 판서로, 서명빈(徐命彬)을 형조 판서로, 김상로를 겸 지경연 우빈객으로 하고, 김문행(金文行)을 수찬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사서로 삼았다.
2월 18일 신묘
임금이 친히 전경 무신(專經武臣)에게 강(講)을 시험하였다.
간원 【대사간 조명채(曹命采)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금번 회시(會試)에 일소(一所)인 과장에서 책을 지니지 못하게 한 금령을 어긴 자가 있었는데, 수검관(搜檢官)이 단지 책만 빼앗고 임의로 입장을 허락하였으니, 청컨대 일소의 수검관을 잡아다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20일 계사
임금이 문신의 시사(試射)에 친림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대리하시게 된 뒤에는 동궁도 알성(謁聖)의 거조가 계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대리한 뒤에 아직까지 선성(先聖)을 전알치 못하였으니, 원량을 데리고 선성에 작헌(酌獻)하고 시사(試士)는 전례대로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겠다."
하였다.
2월 21일 갑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생진과 방방(放榜)에 친림하였다. 새로 참방(參榜)한 사람들이 즉시 들어오지 않자, 하교하기를,
"이는 필시 장원에 불만을 품은 때문일 것이다. 그 버릇이 해괴하니 불참한 사람은 빼내어 뽑아버려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시관 신회(申晦)가 ‘탕연(蕩然)’ 두 글자로 앞에서 창도(倡導)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먼저 처분을 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설 수 있겠다. 신회를 종성부(鍾城府)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또 도승지 이정보(李鼎輔)를 내쫓아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그의 아뢴 바가 생진(生進)을 변명하여 비호하였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날 생진 박지익(朴志益)·강필교(姜必敎)가 장원으로서 소회가 있다고 하여 임금 앞에서 땅에 엎드렸는데, 대체로 동방(同榜)들이 장원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임금의 마음이 매우 분노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특지로 형조 좌랑 위창조(魏昌祖)를 승지로 발탁하였다. 위창조는 관북 사람이었는데,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위창조의 발탁을 더러는 지나치다고 합니다마는, 신은 이것은 이른바 ‘내가 어찌 4천 호(四千戶)를 아깝다 하여 조(趙)나라 자제들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046) ’ 하는 것과 같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지금의 승정원은 순전(舜典)에서 이른바 ‘납언(納言)’으로, 한(漢)나라의 상서(尙書)와 당(唐)나라의 문하성(門下省)과 명(明)나라의 통정사(通政司)가 모두 그 직책이다.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증병정(曾秉正)을 통정으로 삼으면서 하유하기를, ‘명령을 신중히 하여 백사(百司)를 바루고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곳을 살펴서 서무(庶務)가 통하게 하며, 교언(巧言)으로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지 말고 헐뜯어 이간질하여 남을 속이지 말며, 공평하고 정직하여 직책에 충실하라.’고 하였으니, 그 직책의 소중함과 사람을 씀에 신중함이 어떻다 하겠는가? 우리 나라도 승정원을 설치한 의도는 고황제가 당시에 내린 훈계에 뒤지지 않았다 하겠으나, 근년 이래로는 관리가 지켜야 할 기율이 혼란하여 새로 품계가 오를 계제를 만들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막론하고 모두 수용하니, 식견 있는 사람의 탄식한 바가 오래이다. 박선(朴銑)은 아주 평범한 무부인데도 특명으로 제직되었고, 위창조는 먼 지방의 천류(賤流)인데도 졸지에 탁용되었으니, 성조(聖朝)에 누가 됨이 참으로 적지 않다 하겠다. 그런데 대신은 기껏 ‘내가 어찌 4천 호를 아깝다 하겠는가?’의 말로 임금에게 비위를 맞추는데도 삼사(三司)에서 박정(駁正)하는 논의가 없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3면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歷史)
[註 046] 내가 어찌 4천 호(四千戶)를 아깝다 하여 조(趙)나라 자제들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한(漢)나라 고조(高祖) 때 진희(陳豨)가 조(趙) 땅을 근거지로 배반하자 고조가 친정(親征)하려고 천하의 병졸을 모았지만 오지 않자, 조나라 장사 중 장수로 삼을 만한 네 사람을 선발, 각기 1천 호 씩를 내리고 조나라 장정을 모집하여 평정하였는데, 당초에 좌우에서 공도 없는데 봉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간하니, 고조가 "너희들이 알 리 없다. 진희가 배반하여 조(趙)·대(代)의 땅이 모두 진희의 것이 되었다. 내 지금 화급히 천하의 군사를 모으고 있으나 아직 아무도 다다른 자가 없으니, 지금의 계략으로서는 오직 한단(邯鄲)의 군사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어찌 사천 호를 아깝다하여 조나라 자제들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승복하였다는 고사(故事).
사신(史臣)은 말한다. "지금의 승정원은 순전(舜典)에서 이른바 ‘납언(納言)’으로, 한(漢)나라의 상서(尙書)와 당(唐)나라의 문하성(門下省)과 명(明)나라의 통정사(通政司)가 모두 그 직책이다.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증병정(曾秉正)을 통정으로 삼으면서 하유하기를, ‘명령을 신중히 하여 백사(百司)를 바루고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곳을 살펴서 서무(庶務)가 통하게 하며, 교언(巧言)으로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지 말고 헐뜯어 이간질하여 남을 속이지 말며, 공평하고 정직하여 직책에 충실하라.’고 하였으니, 그 직책의 소중함과 사람을 씀에 신중함이 어떻다 하겠는가? 우리 나라도 승정원을 설치한 의도는 고황제가 당시에 내린 훈계에 뒤지지 않았다 하겠으나, 근년 이래로는 관리가 지켜야 할 기율이 혼란하여 새로 품계가 오를 계제를 만들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막론하고 모두 수용하니, 식견 있는 사람의 탄식한 바가 오래이다. 박선(朴銑)은 아주 평범한 무부인데도 특명으로 제직되었고, 위창조는 먼 지방의 천류(賤流)인데도 졸지에 탁용되었으니, 성조(聖朝)에 누가 됨이 참으로 적지 않다 하겠다. 그런데 대신은 기껏 ‘내가 어찌 4천 호를 아깝다 하겠는가?’의 말로 임금에게 비위를 맞추는데도 삼사(三司)에서 박정(駁正)하는 논의가 없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2월 22일 을미
대사간 조명채(曹命采)가 상소하여 신회(申晦)를 변방에 귀양보내고 이정보(李鼎輔)를 외방에 내쫓아 보직(輔職)한 잘못을 논하였으며, 옥당 김양택(金陽澤)과 조중회(趙重晦)가 또 입시한 자리에서 계속하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보도 반드시 장원에 불만을 품은 마음이 있으니, 신회와 더불어 똑같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번 처분은 일시의 사교(辭敎)가 아니다. 신회를 엄히 처분하지 아니하면 밀봉을 엿보는 습관이 되살아날 것이다. 자신이 미원(薇垣)047) 의 장관이 되어 규정(糾正)하려고는 생각지도 않고 감히 변명하여 비호하고 나서니, 대사간 조명채를 체차하라. 유신(儒臣)이 아뢴 바도 변명하여 비호함에 가까운데, 이와 같이 하면 임금이 어떻게 명령 한마디인들 내리겠는가? 유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신회의 귀양과 이정보의 외방으로 내쫓아 전보하는 명령을 거두었는데,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상차(上箚)하여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23일 병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생진과(生進科) 합격자 전원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전에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러한 폐단이 있음을 들었는데, 이번에 안중욱(安重昱)의 일로써 무과의 대사(代射)도 오히려 규율이 엄중함을 알게 되었다. 문과의 환수(換手)048) 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번에는 비록 참작하여 방(榜)에서 뽑아버리기는 하였으나, 이 뒤에도 만일 글도 못하면서 합격한 자가 있으면 한결같이 대사(代射)의 예에 따라 시행하겠다. 기왕 환수를 금하였다면 글은 잘해도 글씨를 못쓰는 사람은 합격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 후로는 글만 취하고 글씨는 취하지 말라고 시소(試所)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대개 찌[栍]를 뽑아 외우기를 시험할 때에 안중욱이 자기가 지은 글을 외우지 못하여 추궁하니, 환수했음을 자복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2월 24일 정유
조관빈(趙觀彬)을 지경연(知經筵)으로, 홍호인(洪好人)을 판윤으로, 이명곤(李命坤)을 대사헌으로, 홍봉조(洪鳳祚)를 대사성으로,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5일 무술
유복명(柳復明)을 대사헌으로,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사간 김상구(金尙耉)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시험삼아 전하께서 요사이에 하신 일을 보면, 어찌 그리도 ‘평일에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으로 기대했던 마음’과 동떨어지십니까? 조종조 3백 년 신인(神人)의 부탁은 모두가 전하의 일신상에 모아져 있어, 말이 바로 법률이고 행실이 바로 법도여서 세자가 본받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하나의 정령 하나의 동작이 하늘의 뜻에 합하고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지 않는 것이 없어야만 국세는 튼튼해지고 세상은 안정될 것인데, 근래의 처분은 아마도 형평을 얻지 못한 듯합니다. 도리어 ‘내 말은 어기지 못한다.’ 하는 아집에 가까운 듯합니다. 위압과 형벌과 꾸지람 등 자못 예(禮)로 부리는 체모를 잃고 노예나 개·돼지를 꾸짖듯 하여도 한 사람도 광구(匡救)하는 이가 없으니, 신은 그윽이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생원과 진사들이 땅에 엎드린 것은 3백 년 동안에 처음 있는 해괴스러운 일이었는데, 전하께서는 신회(申晦)에게 노여움을 돌려 이미 파직하고 또 잡아다 심문하였으며, 잡아다 심문하고 또 찬축(竄逐)하는 등 처분이 갈수록 격렬하여 결국 여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고, 이어서 또 말하기를,
"한 번 격뇌(激惱)하면 박선(朴銑)을 승지로 삼고, 두 번 격뇌하면 위창조(魏昌祖)를 승지로 삼아, 매번 격뇌하실 때마다 번번이 특명으로 제수하시니, 신은 그윽이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를 되돌려 주게 하였다.
다시 서지수(徐志修)를 안핵사로 보냈는데, 유원진(柔遠鎭)의 〈피인(彼人)을 살해한〉 김인술(金仁述) 사건을 다시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임상로(林象老)를 집의로, 이득종(李得宗)·정항령(鄭恒齡)을 지평으로, 박필균(朴弼均)을 호조 참판으로, 유건(柳謇)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28일 신축
밤에 어떤 별이 각성(角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였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조운규(趙雲逵)를 사간으로, 신만(申晩)을 예조 판서로, 조재호(趙載浩)를 판윤으로, 원경하(元景夏)를 형조 판서로, 서지수(徐志修)를 겸 보덕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사서로 삼았다.
임금이 유생의 강에 친림하여 아울러 제술을 설행하였는데, 강에서 유생 백상우(白尙右)·노정원(盧廷元)을, 제술에서 유생 이언림(李彦霖)을 취하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2월 29일 임인
임금이 친림하여 서계(誓戒)049) 를 받았는데, 황단(皇壇)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여러 신하가 아침에는 강제(講製)에 임하고 저녁에는 서계에 임하는 것은 정섭(靜攝)에 해롭다 하여 힘써 섭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형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이 신을 죄로 돌리는 것은 신이 윤기(倫紀)를 손상했다느니 체통을 무너뜨렸다느니 하면서, 일이 있고 없고와 말이 공경스러웠는지 거만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오직 이는 대신의 형의 일이니까 하며 계축년050) 8월만 입에서 내면 윤기를 손상시키고 체통을 무너뜨린 죄과로 몰아붙이니, 고금 천하에 이러한 법률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총재(冢宰)051) 가 옛날 총재의 정주(政注)를 말하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습니까? 체통을 무너뜨렸다는 말은 또한 무슨 일을 말함이겠습니까? 그윽이 대신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두 대신이 함께 대거(對擧)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임금이 그 일을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성미와 버릇을 내가 누르지 않으면 누가 누를 것인가?"
하고, 원경하의 직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역질로 사망한 자가 경기에서 3천 4백 87명, 강도에서 3백 49명, 영남에서 1천 9백 33명, 해서에서 4백 6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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