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을사
윤지태(尹志泰)를 집의로, 윤근(尹勤)을 정언으로, 조재호(趙載浩)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북병사 구성필(具聖弼)이 온성(穩城)의 강 건너 피인(彼人)이 투서한 일로 전 부사 조태언(趙泰彦)의 죄를 청하였고, 피인 5명이 온성 성밖에 도착한 일로 현 부사 안집(安𠍱)의 죄를 청하니,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투서를 습득하여 전한 것이나 피인이 강을 건너 성밖에 도착한 것은 모두가 국경 경비가 엄밀하지 못하여 있게 된 일이니, 전후의 부사를 종중 감률(從重勘律)하고 병사는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구성필이 장계로 청하기를, ‘길주(吉州)를 독립된 진(鎭)으로 만들어 병영의 친기위(親騎衛)를 소속시키고 길주 병영은 감영의 예대로 증설하며, 병영 이외의 군관은 모두 출신(出身)의 전함(前銜)을 가진 자로 하면 난리가 있을 때에 힘이 됨은 친기위에 못지 않을 것이고, 변장(邊將)의 자리에 무예가 월등한 자를 가려서 임용하면 반드시 모든 도(道)를 고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마천령(摩天嶺) 이북 10개 고을에서 유독 명천(明川)만이 내지(內地)로 되어 있는데, 청컨대 명천까지 아울러 변방의 자리로 만들고, 관북의 배 2백여 척도 길주에서 관할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 청한 바가 모두 적당하니 아울러 그대로 시행하되, 명천을 변방의 자리로 만드는 일은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는 일이니 시행치 않음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홍임(洪霖)의 처가 죽었는데, 가난하여 시신도 가릴 수 없다고 합니다. 마땅히 돌보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상장(喪葬)의 비용을 지급하고 상여꾼과 산역(山役)할 군정(軍丁)을 내주라고 명하였다. 그 후에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아룀으로 인하여 평상시에 지급하였던 산료(散料)를 홍임의 아들이 등용될 때까지 계속 주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정에서 홍임의 충절을 잊지 않아 은졸(隱卒)052) 의 은전이 그 아내에게까지 미치니, 이는 남의 신하된 자를 권하고 격려함이 될 만하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4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052] 은졸(隱卒) :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는 일.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정에서 홍임의 충절을 잊지 않아 은졸(隱卒)052) 의 은전이 그 아내에게까지 미치니, 이는 남의 신하된 자를 권하고 격려함이 될 만하다 하겠다."
3월 5일 무신
임금이 대보단(大報壇)053) 에서 망배(望拜)를 올렸다. 열천문(冽泉門)을 경유하여 단에 올라 제기를 살피고 문밖에 나와 희생(犧牲)을 살폈다. 임금이 대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세 황제를 아울러 모신 뒤로 엄연히 옥로(玉輅)가 동방을 순수(巡狩)한 것 같아 나는 비풍(匪風)·하천(下泉)054) 의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다."
하고, ‘감황은(感皇恩)’ 30운(韻)을 지어서 내리고 우상에게 필첩에 써서 재실 안에 보관하여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숙묘께서 대보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 일은 천하 후세에 길이 칭송을 받을 일이었다.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잘 받들어 태조(太祖)와 의종(毅宗)까지 아울러 모셔 하늘에 계신 3후(后)의 영령을 한 단에서 함께 제사지내니, 대명 일월(大明日月)이 홀로 우리 동방에만 비추는 격이다. 1백 년 후에 충신과 지사가 반드시 감격하고 일어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4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053] 대보단(大報壇) : 임진 왜란 때 명(明)나라 신종(神宗)이 원병을 보내 우리 나라를 도와 준 공을 생각하여 설치한 제단. 1704 숙종 30년에 창덕궁 안에 설치하였는데, 뒤에 의종(毅宗)·태조(太祖)도 합사(合祀)하였음.[註 054] 비풍(匪風)·하천(下泉) : 멸망한 왕조(王朝)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비풍은 주실(周室)이 쇠미함을 탄식하여 현인(賢人)이 지은 시이고, 하천은 왕실(王室)이 능이(陵夷)되어 소국(小國)이 곤폐(困弊)스러운 것을 비유하여 지은 시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숙묘께서 대보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 일은 천하 후세에 길이 칭송을 받을 일이었다.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잘 받들어 태조(太祖)와 의종(毅宗)까지 아울러 모셔 하늘에 계신 3후(后)의 영령을 한 단에서 함께 제사지내니, 대명 일월(大明日月)이 홀로 우리 동방에만 비추는 격이다. 1백 년 후에 충신과 지사가 반드시 감격하고 일어날 사람이 있을 것이다."
3월 8일 신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3월 9일 임자
정원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괴를 진계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에 겨울 천둥이 있었던 변괴나 요사이 봄 우박의 재해가 경악할 만한 것이 아님이 없었지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괴에 이르러 그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신들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마는, 깊은 궁중에서 한가하실 때에 천도(天道)에 호응하는 정성이 혹 부족하였습니까? 정사의 의주(擬注)에 공명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습니까? 가까운 친족을 중용하여 소원한 사람은 나아오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습속이 오염되어 염치가 모두 없어져서 그렇단 말입니까? 대신은 안일에 빠져 묘당에서는 문서의 보고만 기다리고 있으며, 언로(言路)가 막히어 대각에서는 고지(故紙)만을 등전(謄傳)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지나치신 거조나 비상한 하교를 대소 신료는 분주하게 받들기만 할 뿐 한마디도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대리하게 하신 뒤로는 대각의 인접을 윤허치 않으시고 소계(疏啓)의 길을 막으셨으며 간혹 보잘것없는 상언(上言)이 있었으나 끝내 몇 자(字)의 비답마저 아끼시고 문득 타당하지 않은 하교만 내리시니, 이러고서 임금의 잘못은 누가 바루며 관가의 부정은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정원에서 또 달사(達辭)를 올려 동궁에게 진계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이 무지개의 변괴로 인하여 상소하여 진계하고 이어서 출척(黜斥)을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위유(慰諭)하였다.
교리 임집(任) 등이 상차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또 동궁에게 상차하여 진계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무지개의 변괴로 인하여 알성시(謁聖試)를 명년 봄으로 미루어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무과는 이미 초시를 설행하였기 때문에 우선 진시(陳試)055) 하고 명년 봄의 회시(會試)에 응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시골 선비로 서울에 체류한 자들을 시권(試券)을 가지고 돌아가게 할 수는 없으니, 삼일제(三日製)를 앞서 택정한 알성일(謁聖日)에 실시하여 서울과 외방에서 각 한 사람씩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0일 계축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이 말하기를,
"천재가 중첩한 중에서도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이나 늦은 봄에 눈이 내리는 재변은 음독(陰毒)이 더욱 큰 것들입니다. 지금 국세는 위태롭고 백성은 거꾸로 매달린 듯하며 기강은 무너지고 온갖 법도가 해이하였으니, 신 등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모두가 나의 근실하지 못한 때문이지 어찌 정승들의 잘못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정우량은 말하기를,
"자고로 임금은 반드시 직간(直諫)을 받아들임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 묵은 곡식이 곳집에 쌓여 있음에도 그때에 태부(太傅) 가의(賈誼)056) 가 눈물을 흘림이 있었고, 당나라 태종(太宗) 때에 한 말의 쌀값이 3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은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의 바른 말에 힘입은 것이니, 이는 더욱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하고,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재이를 만나고도 수성(修省)할 줄을 모르면 마치 병든 사람이 치료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아 결국에는 나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조(大朝)께서는 재이를 만나 경척(警惕)하여 문묘에서의 알성시(謁聖試)도 미루어 설행하라고까지 하셨으니, 원하건대, 대조의 이러한 뜻을 본받아 더욱 수성하소서."
하였다.
정언 윤근(尹勤)·이장하(李長夏), 헌납 유언국(兪彦國), 사간 조운규(趙雲逵) 등이 상서하여 진계하니, 명심하겠다고 하답하였다.
3월 11일 갑인
다시 조현명(趙顯命)을 영의정으로 삼고, 이응협(李應協)을 사간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헌납으로, 박치륭(朴致隆)·정한규(鄭漢奎)를 장령으로, 윤동성(尹東星)·박평(朴玶)을 지평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돈녕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판윤으로, 전일상(田日祥)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수찬 김양택(金陽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우리 춘궁께서 기무를 대리하고 계시나 삼대정(三大政)057) 같은 것은 전하께서 친히 재결하시고 계시니, 출척(黜陟)과 조치함에 있어서 널리 듣고 공평하게 보아서 오르고 내리는 가부를 내리셔야 참으로 마땅하건만, 인접하시겠다는 말씀은 드물었어도 간쟁(諫諍)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의 어사(御史)는 그 반열과 지위가 가깝지 못함을 불평했는데, 지금의 대각(臺閣)은 비록 천안(天顔)을 뵙고 싶어도 길이 없습니다. 도유 우불(都兪吁咈)058) 하는 자리에 어찌 홀로 대각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작년부터는 경연을 거두어 버리셨는데, 위(衛)나라의 무공(武公)은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탁마(琢磨)의 공부를 쉬지 않았으니, 지금 전하께서 성수(聖壽)가 비록 높으시지만 무공의 90세에 비하면 아직도 족히 스스로 면려하실 만한 때입니다. 더구나 춘궁의 진취가 하루가 급할 때인데, 면칙하는 방도는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전하께서 늙으셨다고만 하시고 분발할 도리는 생각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할 때에 충청 감사의 장계와 양역(良役) 변통의 책자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는 시행해도 유포(遊布)와 구포(口布)는 결코 시행할 수 없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결포는 논밭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래도 조금 낫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인심이 동요하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역의 폐단은 말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지난해에 특별히 교정청(矯正廳)을 설치하라고까지 명했는데도 지금까지 미루어왔으니, 모두가 나의 비덕(否德) 때문이다. 쉽사리 실시했다가 백성들이 못마땅해 하면 그 폐단이 전보다 더 심할 것이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봄철 순력할 때에 사민(士民)들에게 두루 물어서 모두가 폐단이 없다고 한 연후에 다시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3일 병진
대사헌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재(天災)란 유행하는 것이어서 옛부터 세대마다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요사이같이 거듭되고 가혹한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군강(君綱)은 약해지고 신도(臣道)는 억세어져서 그런 것입니까? 군자는 쓰이지 못하고 소인이 나섰기에 그런 것입니까? 묘당에서는 직사(職事)를 제대로 못하고 천인(賤人)이 집권해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곧은 선비는 입을 다물고 아첨하는 자가 간교한 말을 내둘러서 그런단 말입니까? 하늘에서 흉조(凶兆)를 알림이 어찌 이렇게도 정녕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사기(辭氣)가 드러나시기 쉽고 좋아하고 미워하심이 아주 치우치십니다. 관작이란 세상을 면려하는 기구인데 급작스레 진출하여 차례를 뛰어넘어서 점차적으로 승진(陞進)하는 사례가 없고, 상사(賞賜)는 공로에 보답하는 전례(典禮)인데 이름과 실상이 뒤섞입니다. 심지어 승지의 직언까지 벌하시니 혹 박절에 가깝다 하겠고, 삼사(三司)의 소를 되돌려 주기까지 하시니 또한 용납하는 도리에 흠이 된다 하겠습니다. 구경(九卿)을 일시에 파직시키니 듣고 보는 이가 모두 의아스러워 하였지만, 구중 궐내에는 일찍이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었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아! 네 개의 당목(黨目)이 이제는 여덟, 아홉으로 나뉘어 때에 따라 이합(離合)하면서 이해를 다투고 있는데, 그 본원을 거슬러 보면 실은 얻고자 하고 잃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비롯하였고 그 귀추를 상고해 보면 영화와 이권을 탐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고서도 길이 평안하고 오래 다스려질 리는 만무합니다. 아! 합사(合辭)하여 계청(啓請)한 바가 이 얼마나 중한 의리인데,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들이 임의로 정계(停啓)하여 토역(討逆)·설복(雪復)의 청이 잇달아 적막해지니, 신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하고, 말단에 백성들의 곤궁한 정상을 아뢰고 재앙을 물리치는 도리에 힘쓸 것을 청하였으며, 지평 윤동성(尹東星)도 상소하여 직언하는 길을 열어 재해를 물리치는 방편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지평 정항령(鄭恒齡)이 상서하여 시무(時務) 다섯 가지를 논하였는데, 첫째 민역을 고르게 하고, 둘째 국용을 넉넉하게 하며, 셋째 무비(武備)를 정돈하고, 넷째 관로(官路)를 공정하게 하며, 다섯째 법령을 믿게 하는 등 앞뒤로 모두 수만 마디였다. 임금이 그 글을 들이라 명하여 읽고서 말하기를,
"폐단을 늘어놓은 중에 볼 만한 것이 있다. 양역(良役)의 2필은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때부터 책정한 것으로, 그때 상번군(上番軍)이 상번 대신으로 베를 바쳤으나 백성들의 원망이 없었는데, 지금은 양민의 군병과 잡역을 막론하고 모두 2필로 정했기 때문에 백성이 더욱 곤궁해진 것이다."
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헌신(憲臣) 정항령의 글을 보니, 널리 듣고 폐단에 대해 늘어놓은 것은 채택하여 쓸 만한 것이 없지도 않다. 비국에서 소상히 품의하여 처리하고 추밀원(樞密院)의 휴지가 되게는 하지 말라."
하였다.
3월 16일 기미
송나라 신국공(信國公) 문천상(文天祥)을 영유(永柔)의 와룡사(臥龍祠)에 배향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예관에게 명하여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와룡사는 선묘(宣廟)께서 용만(龍灣)059) 에 나아가 계실 때에 감회가 있어 창건하게 하신 것이다. 악무목(岳武穆)을 추배(追配)한 것도 지난해 크게 느끼신 성의(聖意)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신국공을 추배하려는 것도 계술하는 뜻에서이다. 아! 와룡(臥龍)060) 은 한실(漢室)을 회복코자 하였고, 무목은 이제(二帝)061) 를 맞아오려 하였으며, 신국은 송조(宋祚)를 보존하려 하였으니, 현신(賢臣)의 충성은 한결같다고 하겠다. 당초 문의할 때에 육수부(陸秀夫)를 거론한 것은 오국성(五國城)에다 사당을 세우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오국성에 짓지 않고 영유에 모시는데 육상(陸相)을 추배하는 것은 일을 확대하려는 것 같아 신국공만 와룡사에 배향한 것이다."
하고, 친히 글을 지어 근신을 보내서 치제(致祭)하였다. 그 뒤에 비를 세우라고 명하고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술하게 하였다.
3월 17일 경신
헌부 【지평 정항령(鄭恒齡)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성상께서 친히 황단(皇壇)062) 에 제사를 올렸으나 경재(卿宰)의 반행(班行)이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까닭없이 불참한 사람은 모두 파직하소서.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길은 마땅히 실정(實政)에 힘써야 하는 것인데도 입대한 비국 당상 가운데 하나도 건의한 사람이 없으니, 모두 종중 추고하소서. 한 달에 세 번 조련하는 것은 군정 중에서도 큰 일인데, 근자에는 군문의 조련이 한 해에도 몇 차례 되지 못하니, 3군문(三軍門)063) 의 장신(將臣)을 종중 추고하소서."
하니, 상달한 대로 모두 따랐다. 간원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명륜당(明倫堂)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와 표(表)의 글제를 내고 경향에서 각각 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존중(李存中)과 민재문(閔在汶)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3월 18일 신유
환경전(歡慶殿)에서 전시(殿試)를 설행하여 이존중 등 51인을 뽑았다.
3월 21일 갑자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상차하기를,
"헌장(憲長)의 소는 형체를 감추고 은연히 빗대어 말이 혹 떳떳치 못한 것 같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일례로 되돌려 주셨으니, 어떻게 시끄러움을 그치고 세상 인심을 진정시키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도헌(都憲)의 소 1편 의사는 임금에게 협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자 하는 고심작(苦心作)이었으니 도헌을 위해서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도 또한 상차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유복명이 대거(對擧)의 소를 올려 말하기를,
"시정(時政)의 하자와 조정의 분열에 대하여 대략 대체만을 들어 평이(平易)한 말로 드러내어 말하였는데, 어찌 일찍이 비상(非常)함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비춘 데에 근사하겠습니까? 그런데 대신의 차자에서 지나치게 의심과 노여움을 가하였으며, 시끄러움을 그치고 세상 인심을 진정시킨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뜻을 둔 바가 있으니, 아! 또한 두렵습니다."
하니, 동궁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김약로와 정우량이 또 상차하여 인혐하니, 동궁이 답하기를,
"잘못을 고집하고 잡된 생각이 끼인 글을 개의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대사헌이 장황하게 소를 올렸으니, 매우 한심하다 하겠다. 특별히 그 직을 체차하라."
하였다.
3월 22일 을축
사간 이응협(李應協), 정언 박평(朴玶)이 상서하여 천재에 대하여 진계하고 이어서 학문에 힘쓰고 정사에 부지런하기를 권면하니, 동궁이 좋게 받아들였다.
3월 23일 병인
구윤명(具允明)·이응협(李應協)을 승지로,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참판으로, 윤광의(尹光毅)을 참의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홍익삼(洪益三)을 대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집의로, 윤광찬(尹光纘)을 장령으로, 홍낙성(洪樂性)을 부교리로, 김양택(金陽澤)을 수찬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수찬으로, 정실(鄭實)을 보덕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문학으로, 이현중(李顯重)을 설서로, 유엄(柳儼)을 판윤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예조 참판으로, 이창의(李昌誼)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시임·원임 대신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육아편(蓼莪篇)064) 을 읽고 있다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효자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을가마는, 이 시처럼 사람을 감발케 하는 것은 있지 않다. 옛날 선묘조 때에도 척강(陟降)하시는 선령들의 구로지은(劬勞之恩)에 대한 하교가 계셨다. 나의 근력을 헤아려보면 달마다 다르고 때마다 다르다. 이번의 대제(大祭)를 반드시 친히 행하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등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정성스러우시니 신 등이 어찌 감히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성상의 안후(安候)가 바야흐로 정섭 중에 계시고 또 역질이 날로 치성한데 밤을 지새워 제사일을 받드시다가 혹시 손상이라도 입으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누누이 만류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출입할 때에 철릭[天翼]을 입지 않은 것은 아주 그릇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여철(申汝哲)은 항상 철릭을 입었었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근래에 무신이 처신을 문신처럼 하는 것은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이러고서 어떻게 다른 날에 힘을 쓸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무변이 직령(直領)을 입는 것을 엄히 신칙하고 범한 자는 병조 판서와 대장이 적발되는 대로 곤장으로 다스려라."
하였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국가의 재력을 선공감에서 낭비하는 것이 심히 많으나, 호조에서 그 진위를 핵실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선공감의〉 제조 자리 하나를 호조 판서로 예겸(例兼)하게 하면 전처럼 낭비하는 폐단이 없어질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도에 여제(癘祭)를 설행하였다. 이때에 역질이 크게 치성하여 사망자가 10여 만 인이나 되니, 중신을 보내서 제사를 설행하라고 명하고 또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8도에 두루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이었다.
3월 25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참찬 이기진(李箕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재앙을 만나서 경계하고 삼가시느라 종묘에 배알하려고 거듭하려다가 그만두셨습니다. 저하께서도 만기(萬機)를 대리하고 계시니, 수성(修省)하는 방도라면 의당 빠짐없이 다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하늘의 뜻에 부응하는 도리는 하나의 ‘실(實)’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갓 수성한다는 말은 하고 실정(實政)을 행함이 없다면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결과가 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저하께서 경전을 강하실 때에는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지만 마시고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시며, 신하를 대하실 때에는 겉치레를 하지 마시고 성심으로 강론하고 상확하시면 일마다 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하늘도 재앙을 거두고 상서를 내릴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가 옳으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섭원(李燮元)을 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이천보(李天輔)를 좌빈객으로, 신만(申晩)을 동경연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부응교로, 어석윤(魚錫胤)을 수찬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수찬으로, 신위(申暐)를 겸 필선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겸 문학으로, 김문행(金文行)을 겸 사서로, 윤동도(尹東度)·김선행(金善行)을 겸 교서관 교리로, 노계정(盧啓禎)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에게 시호를 내렸다. 임진년에 왜구가 진주(晉州)를 함락시켰을 때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충청 병사 황진(黃進) 및 최경회가 함께 죽었다. 삼충(三忠) 중에서도 최경회가 수립한 공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김천일과 황진은 모두 찬성에 증직되고 시호를 내렸으나, 최경회는 그 자손이 미약한 탓으로 미처 시호를 청하지 못하였는데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그를 위하여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사간원 【대사간 홍익삼(洪益三)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각 능침의 별검(別檢)은 승문원의 참하관 중에서 가려서 차출하기로 조례가 정해졌는데도 목릉(穆陵)의 별검 이경조(李景祚)는 괴원(槐院)065) 의 권점(圈點)에서도 떨어졌는데 외람하게 이 직에 제수되어 태연히 행공(行公)하고 있으므로 여정이 심히 해괴하게 여기니, 청컨대 태거하소서.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숭상함은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한번 비단을 금한 뒤로는 명주옷도 하나의 문채를 나타내는 상복(上服)인데 귀천과 노소가 뒤섞여 착용하여 분별이 없으니, 청컨대 법사(法司)로 하여금 영갑(令甲)으로 정하여 장복(章服) 이외에는 사서인(士庶人)의 50세 이상에도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3월 26일 기사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문과 급제자를 소견하고 각자 지은 글 몇 구절씩을 외우게 하였다. 또 무과 갑과·을과 합격자를 소견하였는데, 전득우(田得雨) 차례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명나라 병부 상서의 증손이다. 전득우의 아버지 전만추(田萬秋)는 끝내 도총 도사(都摠都事)를 하지 못하였다."
하고, 이어서 전만추의 아들 전창우(田昌雨)를 별군직(別軍職)에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이태중(李台重)을 좌천시켜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삼았다. 이때에 이태중을 전라 감사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명에 따르지 않자 가두었다가 바로 사면하여 즉일로 사조(辭朝)하고 밤낮으로 달려가서 부임하라 하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태중이 직언하다가 섬으로 귀양갔었는데 풀려나자 조정에서 쓰고자 하여 여러 차례 청요직(淸要職)을 내렸으나 극력 사양하니, 이때에 이르러 또 외방에 보직(補職)하였다. 이태중이 정언(正言)이 되어 상소하여 임금의 무함당하였음을 변명하고 나라의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취지를 논하니, 임금이 그에게 당심(黨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심히 노하여 꾸짖고 욕을 보인 것이다. 뒤에 경연관의 조언으로 하교의 온당치 못한 점은 거두어 들였다. 이태중은 생각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말을 하였다가 써주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 마땅하고 차라리 외진 곳에서 굶주려 죽을지언정 수치를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가 임금이 신하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엄한 신칙과 면려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더욱 굳게 뜻을 세워 넉넉하게 옛 군자의 풍도를 간직하니, 일시의 사류(士類)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5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태중이 직언하다가 섬으로 귀양갔었는데 풀려나자 조정에서 쓰고자 하여 여러 차례 청요직(淸要職)을 내렸으나 극력 사양하니, 이때에 이르러 또 외방에 보직(補職)하였다. 이태중이 정언(正言)이 되어 상소하여 임금의 무함당하였음을 변명하고 나라의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취지를 논하니, 임금이 그에게 당심(黨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심히 노하여 꾸짖고 욕을 보인 것이다. 뒤에 경연관의 조언으로 하교의 온당치 못한 점은 거두어 들였다. 이태중은 생각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말을 하였다가 써주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 마땅하고 차라리 외진 곳에서 굶주려 죽을지언정 수치를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가 임금이 신하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엄한 신칙과 면려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더욱 굳게 뜻을 세워 넉넉하게 옛 군자의 풍도를 간직하니, 일시의 사류(士類)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김흥경(金興慶)이 졸(卒)하였다. 김흥경은 본성이 근실 검약하여 벼슬이 삼공에 이르렀으나 혁혁한 명성은 없었다. 아들 김한신(金漢藎)이 화순 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든 뒤로는 더욱 조심하여 도민(都民)들이 그 집안에 부마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자못 칭찬하였다.
사간원 【정언 박평(朴玶)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정전(正殿)에서 방방(放榜)할 때에 동반(東班)·서반(西班)의 불참한 관원은 모두 중추(重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9일 임신
어떤 별이 패과성(敗瓜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는 주먹과 같았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이익정(李益炡)을 대사간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집의로, 이수관(李壽觀)을 장령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밤에 역군들의 소리가 동촌(東村)에서 자자하였는데 이목(耳目)의 관원이 텅 비어 있으니, 매우 개탄스럽다. 이러한 때에는 모든 일을 절제함이 마땅하여 알성(謁聖)의 명도 취소시켰고 거리에서 노니는 것도 금하였는데, 어떠한 사람이 집을 짓길래 소리가 대궐에까지 미친단 말이냐? 무식한 천민도 참작할 만한데 사대부가 이러하니,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이다. 한성부의 당상을 추고하고, 해당 부(部)066) 의 관원은 잡아다 처리하며, 모든 건축과 수리는 일체 중지하고 외방의 연호군(煙戶軍)도 금년에 한하여 징발(徵發)해 쓰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달에 여러 도에서 역질로 사망한 자가 3만 7천 5백 8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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