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1권, 영조 26년 1750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1. 23:00
반응형

4월 1일 계유

간원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일 갑술

임금이 친림하여 서계(誓戒)를 받았으니, 태묘(太廟)의 하향(夏享) 때문이었다.

 

4월 5일 정축

장령 이수관(李壽觀)이 상서하여 장릉 참봉(章陵參奉) 홍천보(洪天普)는 비열한 행실이 많으니 태거할 것과, 충청 병사 원필규(元弼揆)는 나이 늙고 탐욕이 많아 원망과 비방이 비등하니 파직할 것과, 훈련 정(訓鍊正) 이재형(李再馨)은 우단(雩壇)의 헌관으로서 수향(受香)에도 미처 나오지 않았으므로 잡아다 처리함이 마땅함을 논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 이장하(李長夏)가 상서하여 죽산 부사(竹山府使) 전일상(田日祥)은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온 경내에 원망이 자자하고, 흥양 현감(興陽縣監) 박양신(朴良藎)은 짐바리가 줄을 이어 백성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함을 논하여 파직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6일 무인

이득종(李得宗)·여선응(呂善應)을 지평으로, 남태량(南泰良)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윤급(尹汲)을 우부빈객으로, 조재호(趙載浩)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사신의 행차가 돌아올 때 방산 만호(方山萬戶)가 맞이하다가 중강(中江)에서 파선(破船)되어 죽었는데 함께 빠져죽은 자가 9인이라 하니, 매우 놀랍고 비참한 일입니다. 중강(中江)이 비록 깊고 넓지는 않으나 배가 오래 되고 썩어서 이러한 침몰의 재난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매우 슬픈 일이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후하게 지급하도록 하라. 이는 혹 배를 튼튼히 수리하지 못했거나 한 배에 많이 실었거나 한 것이어서 인명이 사상하는 폐가 이렇게 났으니, 해당 부윤(府尹)을 추고하고 관리인은 해부로 하여금 종중 처단하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이조 참판과 참의를 장망(長望)으로 변통한 뒤에 참의는 대사성에 통망(通望)된 사람으로 의망하고, 참판은 이조 참의를 지냈거나 동경연(同經筵)에 통망된 사람으로 의망하였는데, 그 의망이 자못 길이 달라서 참의와 같지 않습니다. 이 뒤로는 다만 현재 경연에 통망된 사람으로써 의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도승지는 문벌이나 인망이 더욱 준엄하여 전에 대사간을 지내고 품계가 오른 사람을 바로 의망하였으나 고례(古例)는 아닙니다. 부제학을 지낸 사람을 도헌(都憲)에 바로 의망하는 것이나 이조 참의를 지낸 사람을 바로 빈객(賓客)에 의망하는 것도 또한 고례가 아닙니다. 그전대로 통청(通淸)한 사람으로 의망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이에 의하여 정식(定式)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출신(出身)의 부방(赴防)은 뜻이 비록 심원한 것이지만, 금년은 평년과 달라 역질과 기근으로 인하여 무과 출신이 부방하러 가다가 길에서 죽으니, 구렁 속으로 밀어넣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특별히 부방을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원(南原)의 읍호를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남원이 역적 양찬규(梁纘揆)의 고을이라 하여 강등하여 일신 현감(一新縣監)을 삼았는데, 이미 10년이 지났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4월 8일 경진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서하여 사면을 바라니, 승지를 보내서 돈유하였다.

 

4월 9일 신사

임금이 태묘에 나아가 망배(望拜)한 뒤에 제기와 희생(犧牲)을 살폈다.

 

4월 10일 임오

임금이 친히 태묘에 제사지내고 육상묘(毓祥廟)에 들러 배례하였다. 돌아와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과 병조 판서 이천보(李天輔)를 잡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어가를 수행하는 기병을 세밀하게 가리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튿날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훈련 대장을 잡아들인 것은 비록 군율을 엄히 하시려는 뜻에서 나온 일이겠으나, 자주 있어서는 안됩니다. 병조 판서를 잡아들인 것도 지나친 일입니다. 계급이 이로 말미암아 점차 무시될까 걱정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좋다."
하였다.

 

4월 11일 계미

하교하기를,
"지금은 곡식을 더욱 비축할 때이다. 제도에 신칙하여 군작미(軍作米)를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고, 경외의 낭비를 일체 엄금하며, 여름과 겨울의 궤유(餽遺) 이외의 청탁도 일체 엄금하라."
하였다.

 

4월 12일 갑신

헌납 이창유(李昌儒)가 상서하여, 무산 부사(茂山府使) 이정현(李鼎賢)이 변방 수령에 적합지 않은 점과, 덕산 현감(德山縣監) 송징상(宋徵相)이 전혀 검칙함이 없는 점을 논하여 파직을 청하였으며, 과장(科場)에서 글을 판 일로 임계(林溎)·장취오(張聚五)·장달성(張達星)을 정배하기를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지평 이득종(李得宗)이 상서하여, 대사성 홍봉조(洪鳳祚)가 논척을 당하고도 반열에 입참함을 논하여 파직을 청하였으며, 또 이복해(李福海)를 이배(移配)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상단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말단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처분이 계셨다."
하였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파직시켰다. 김성응을 잡아들일 때에 훈련 도감의 군졸들이 작문(作門)067)  을 밀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비변사에서 파직을 계청한 것이었다.

 

4월 13일 을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왕 대비께서 8역(八域)에 국모로 임어하신 지 이제 5기(紀)068)  가 되셨으니 실로 건국 이래 드물게 보는 경사요, 대조(大朝)의 보령(寶齡)이 연장(延長)되어 이미 육순(六旬)에 가까우시며, 황단(皇壇)을 개축하여 3제(三帝)069)  를 합사(合祀)하셨으니 성덕에 더욱 광영이 있는 일이므로, 동조(東朝)와 대조에 존호를 올림이 마땅합니다. 또 중전(中殿)의 회갑도 멀지 않아 있으니, 미앙궁(未央宮)070)  의 수주(壽酒)를 마련한 일을 추상하며 축수와 진하(進賀)의 의식을 행하면 3전(三殿)의 노경(老境)을 위안하며 즐겁게 해드리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거의 조종께서 은연중에 도우시는 아름다움에 우러러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하교가 계셨지만 자전(慈殿)의 뜻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이 일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동지사(冬至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피국(彼國)의 소식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른바 화친왕(和親王)은 청나라 황제의 아우인데, 특별히 대우를 더해 주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평악(太平樂)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역군들 소리 같은데, 아악(雅樂)은 우리 나라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단은 엄하게 금하고 있던가?"
하니, 부사 황정(黃晸)이 대답하기를,
"비단은 이제는 염려할 것이 없어서 서울과 시골 사람들이 모두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탱이 말하기를,
"영유(永柔)의 이화정(梨花亭)은 선묘께서 주필(駐蹕)하신 곳입니다. 손수 심으신 배나무가 있는데, 이화라는 정자의 명칭도 선묘께서 명명하신 것입니다. 주필하신 지 석달 만에 처음으로 첩보(捷報)를 들으셨고 계사년071)   2월에 강서(江西)로 옮기셨으며 강서에서 해주(海州)로 옮기셨습니다. 또 효종께서도 심양(瀋陽)에 왕래하실 때에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이 정자에서 주필하시다가 돌아오셨는데, 본고을 백성들이 지경 밖에까지 나와서 환영하고 환송하였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몹시 서글퍼진다."
하였다.

 

4월 14일 병술

한림 회권(翰林會圈)을 행하여 이명조(李明祚) 등 14인을 뽑았다.

 

승지 남태기(南泰耆)를 참핵사(參覈使)로 삼았는데, 이때에 금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변고가 생겨서였다. 임금이 피국(彼國)의 자문(咨文)을 읽으라 명하고 말하기를,
"지방관을 봉황성(鳳凰城)에 모아서 사문(査問)하겠다고 하였다."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의당 가야 하지만, 도신은 다만 와서 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회자(回咨)를 빨리 지어야 하겠습니다. 죄인 김인술(金仁述)은 함경 감영으로 하여금 즉시 압송하라고 해야겠으며, 참핵사도 잘 가려서 보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 남태기는 사람됨이 꾸밈이 없고 진실하다."
하고, 드디어 남태기로 차정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죄인은 비록 북도의 감옥에 있지마는 지방관은 아직 구인되지 않았으니, 사문관(査問官)이 봉황성에 도착하기 전에 다다르기는 결코 어려울 것입니다. 지연되는 곡절을 미리 자문으로 보내야 하겠는데, 지난 신유년072)  과 경오년073)  에는 모두 관인(官人)의 죄는 아니라고 변명하였습니다."
하고, 김약로는 말하기를,
"자문 가운데 봉황성에서 회동하겠으니 국왕을 내보내어 죄를 논의하자고 운운하였는데, 이는 바로 옹정(雍正) 12년074)  과 강희(康熙) 49년075)  의 전례를 원용하려 함입니다."
하였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죄인이 만일 먼저의 초사(招辭)와 다름이 없으면 죄인의 부모 처자를 죽이겠다고 엄히 분부하여 말을 바꾸는 폐단을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현중(李顯重)을 정언으로, 유엄(柳儼)을 형조 판서로, 김상적(金尙迪)을 형조 참판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판의금으로, 임정(任珽)을 대사성으로, 임집(任)을 겸 필선으로, 이후(李)를 승지로, 황인검(黃仁儉)을 겸 설서로, 이철보(李喆輔)를 함경도 관찰사로, 유복명(柳復明)을 경기 관찰사로, 조재호(趙載浩)를 판윤으로 삼았다.

 

4월 15일 정해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비록 선물을 하더라도 온 조정에 두루 했는데, 지금은 당로자(當路者)에게만 계속하여 바치니, 그 폐단이 더욱 큽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이조 판서가 고치[繭]로 뇌물을 받았는데 정사에 임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려 고치로써 망(望)을 불렀다 한다."
하였다. 수찬 어석윤(魚錫胤)이 말하기를,
"명나라에 어떤 한 각로(閣老)가 있었는데, 집안 사람에게 금년에는 선물이 들어온 것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유독 아무 지현(知縣)만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각로가 그 사람을 어질게 여겨 그를 천거하여 포정사(布政使)를 삼았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조정에서 능히 이렇게만 한다면 선물은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인수(徐仁修)가 해주 판관(海州判官)이 되었을 때에 내가 그곳의 별도 진상(進上)을 금하고, 그것을 백성을 돌보는 데에 옮겨 쓰라고 하였다."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성종조에 까마귀가 종이를 물어다가 땅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이에 수령이 선물을 바친 기록이었습니다. 성종께서 조정 신하들에게 물으시니 모두 받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유독 한 승지가 말하기를, ‘집안이 가난하므로 딸의 혼사에 즈음하여 사실 자청해서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니, 성종께서는 가상히 여기시고 그 사람을 발탁하여 쓰셨다고 합니다. 만일 선물을 받은 폐단을 논한다면, 신이 맨 먼저 그 문책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4월 18일 경인

간원 【정언 이장하(李長夏)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경상 좌병사 노계정(盧啓禎)은 상관(上官)에게 아첨함으로써 발신(發身)하여 가는 곳마다 탐학을 일삼았고, 성을 쌓고 관사를 수리했다고 조정을 속여 외람되이 은자(恩資)를 받았으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영흥 부사(永興府使) 조재언(趙載彦)은 오로지 탐학만을 일삼아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9일 신묘

우박이 내렸다.

 

한성부의 아전이 송금(松禁)을 범한 죄인을 잡고보니 종실 하청수(河淸守) 이호(李濠)의 종이었다. 호가 그 아전을 구타하였으므로 한성부에서 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2일 갑오

조영국(趙榮國)을 대사간으로, 신경(申暻)을 집의로, 윤광찬(尹光纘)을 헌납으로, 이수봉(李壽鳳)을 정언으로, 김문행(金文行)을 부수찬으로, 신위(申暐)를 보덕으로, 정실(鄭實)을 겸 보덕으로, 이이장(李彛章)을 필선으로, 김문행(金文行)을 겸 사서로, 이준휘(李儁徽)를 설서로, 조중회(趙重晦)를 겸 교서관 교리로,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 이현중(李顯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참핵사(參覈使)로 남태기(南泰耆)를 차송하게 된 것은 대조(大朝)에서 특별히 발탁한 데서 나온 것이나, 혹 얼굴만 보고 사람을 고른 실수가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남태기는 이미 시험해 본 사람입니다. 남쪽의 배가 불에 탄 것은 비록 예기치 않았던 화재로 인한 것이라고 핑계댈 수 있지만, 역시 아랫사람을 삼가 단속하지 않은 실수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국경 밖에서 임기 응변하는 데에 혼자 맡기는 것은 어려울 듯하니, 원하건대, 대조께 여쭈어 따로 감당할 만한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협잡이라고 답하였다.

 

4월 23일 을미

여러 한림(翰林)을 하옥하였다가 곧 풀어주고 봉교 송문재(宋文載)를 삭직하였다. 한권(翰圈)076)  이 이루어졌는데, 이휘중(李徽中)·이현급(李賢汲)이 모두 권점에 뽑혔다. 대교 황인검(黃仁儉)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성지(李聖至)의 이름은 감란록(勘亂錄)에 올라 있고 이현장(李顯章)은 흉소(凶疏)로 섬에 유배된 자인데, 그들의 아들과 조카가 모두 권점에 뽑혀 3점이나 받기에 이르렀으니, 그들 두세 사람은 신 등이 권점한 것이 아닙니다. 사신(史臣)의 권점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일을 그르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정언 이장하(李長夏)도 말하기를,
"한림을 남몰래 도권(盜圈)한 것은 3백 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변괴입니다. 청컨대 권점에 참여한 사신은 모두 잡아 심문하여 엄중히 핵실하고 도권한 사람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며, 다시 세밀하게 권점하여 사관(史官)의 선출을 중히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에 봉교 송문재가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자, 황인검 등이 납공(納供)하니, 송문재가 결국 그릇되고 망령된 생각으로 일을 그르쳤다고 자복하였다. 대개 이명조(李明祚)·이휘중(李徽中)·이헌묵(李憲默) 3인은 송문재가 권점 2점씩을 더 준 사람들이었다. 하교하기를,
"한림의 권점에 갈등이 생긴 것은 오로지 당습(黨習)에서 연유한 것이다. 도권으로 지목한 것은 비록 지나치다 하더라도 권점을 더하는 폐단은 엄히 막지 않을 수 없으니, 송문재는 삭직하고 그 밖의 한림은 풀어주며, 《속대전(續大典)》의 예대로 한림의 권점은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4일 병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상서하여 존호의 계청을 다시 아뢰었는데, 동궁이 대조께 여쭈니, 하교하기를,
"자식이 애일(愛日)077)  하는 정성은 어찌 남의 말을 기다릴 겨를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골자가 오로지 동조(東朝)의 존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그 글을 되돌려주라."
하였다.

 

4월 25일 정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사간원 【정언 이수봉(李壽鳳)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 대가(大駕)가 종각(鍾閣)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반열에서 뛰어나와 큰 소리로 벽제(辟除)078)  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행 사직 이일제(李日躋)에게 특별히 평안 병사를 맡긴 것은 격식 밖의 은전에서 나온 것인데도 서림(西林)에 성을 쌓을 때에 백성의 고혈(膏血)을 다 거두어들여 반절을 사사로이 쓰고 성은 몇 자[尺]도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실소(失笑)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헌릉(獻陵)의 회목(檜木)으로 판자를 켰으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청컨대 수릉관(守陵官)을 잡아 심문하여 엄히 처단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상달하기를,
"비국 당상의 책임은 자별한 것인데 근래에는 관례를 따르는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청컨대 서명빈(徐明彬)·이익정(李益炡)·신사건(申思健)·서명구(徐命九) 등을 개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 여쭌 뒤에 하교하겠다."
하였다.

 

4월 27일 기해

교리 김선행(金善行)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수봉(李壽鳳)이 조관빈(趙觀彬)을 논하기를, ‘반열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나, 실은 중도에서 병이 발작하여 대신에게 말을 전하고 공해(公廨)로 돌아가서 쉬었다 합니다. 중신이 위태로운 종적으로서 차마 떠나지 못하고 도성에서 배회하고 있는데도 기어코 물리쳐 쫓아 안심하고 조정에 있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비국 당상과 여러 재신(宰臣)들을 논함에도 개별적으로 거론하고 호대(互對)하여 예람(睿覽)을 현혹시키려 하니, 그 속셈과 행태가 교묘하고 주밀하여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정항령(鄭恒齡)이 여러 재신들의 파직을 청한 것도 사실은 전조(銓曹)를 흔들어 보려는 데에 있었고 이수봉의 논한 바는 신록(新錄)이 새로 만들어진 뒤에 나왔으니, 계획한 바가 더욱 깊고 배포함이 더욱 급하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정항령과 이수봉을 파직하여 참소를 근절하는 뜻을 밝히셔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4월 29일 신축

유한소(兪漢蕭)·이사조(李師祚)를 정언으로, 조중회(趙重晦)를 부교리로, 유언민(兪彦民)을 사서로, 이기진(李箕鎭)을 판돈녕으로, 서종급(徐宗伋)을 공조 판서로, 박문수(朴文秀)를 판의금으로, 구선복(具善復)을 충청 병사로, 박태신(朴泰新)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이달에 제도에서 역질로 사망한 자가 2만 5천 5백 47명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