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1권, 영조 26년 1750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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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임인

부교리 조중회(趙重晦)를 파직하였다. 조중회가 상서하기를,
"이수봉(李壽鳳)의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사심은 폐부(肺腑)를 보는 듯 훤합니다. 그가 이미 귀양(歸養)을 바라서 윤허를 받았는데도 갑자기 뛰쳐나와 함부로 치고 받으니, 바라건대, 제재를 가하여 조정의 기상을 맑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조중회도 나의 신하이다. 원량(元良)의 초정(初政)에 빌미를 만들고자 하여 사람을 불령(不逞)의 죄과로 몰아 나의 원량을 움직이려 한단 말인가?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상훈(常訓)》이나 《대훈(大訓)》의 뜻이 어디에 있다 하겠느냐? 대신(臺臣)이 비록 호대하여 말을 했다고 하나 조중회의 용심이 협잡스러운 것은 대신과 다를 것이 없다. 그 글은 되돌려 주고 조중회는 파직하여 서용치 말라."
하였다.

 

5월 10일 신해

정언 유한소(兪漢蕭)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한권(翰圈)에서 송문재(宋文載)가 남몰래 권점을 더한 것은 후일의 폐단과도 관계가 있으니, 사판에서 삭제하는 율을 가함이 마땅합니다. 여러 사신(史臣)도 아울러 견책하고 파직해야 합니다. 동경연 남태량(南泰良)은 용렬한 사람으로 품계와 인망도 낮으니, 개정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되돌려 주라고 하령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말하기를,
"조중회(趙重晦)의 일도 놀라운데 유한소(兪漢蕭)가 또 나왔으니, 참으로 한 맥락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유신(儒臣)이 앞에서 창도하고 조중회가 중간에서 하였으며 유한소가 뒤를 잇달았는데, 오로지 남태량(南泰良)의 통청(通淸)한 일에서 나온 것이다. 남태량의 통청은 내가 고심한 일인데 저들이 기어코 꺾으려 하니, 어찌 너무 심함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옥당의 차자와 두 신하의 글이 어찌 꼭 한 맥락에서 나왔다고 하겠습니까? 각기 나름대로 아뢴 것으로 봄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면대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니, 아주 그른 일이다. 세 사람의 글이 어찌 상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각기 나름대로 아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그른 것이 아닙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씀은 참으로 지나치십니다. 어찌 지나친 성색(聲色)을 가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의 당습은 이번의 차자와 소장으로 수족(手足)이 다 드러난 셈이다. 하교가 내린 처지에서 어떻게 감히 변명(辨明)을 한단 말인가? 이익보를 체차하라."
하였다.

 

정언 유한소를 삭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자가〉 대리한 뒤로 신하된 자 뉘라서 두려워하고 꺼리지 않겠는가마는, 두려워하고 꺼림이 없는 것은 당습을 달갑게 여겨서이다. 만일 한두 사람을 특별히 제수함이 없었고 또 장망(長望)한 일과 경연의 통망(通望)이 없었더라면 비록 백 사람의 정항령(鄭恒齡)이 있었다 한들 누가 어찌 의심이나 했겠는가? 유신이 차자로 창도하고 조중회·유한소가 그 뒤를 잇달았다. 유신은 지나치게 의심하였고 조중회도 영전(令前)이라서 그랬다고 하겠으나, 지난번 엄한 하교가 내려진 마당에 유한소는 당돌하게 진소하였으니 방자하고 꺼림이 없는 것이다. 그 글을 되돌려 주라."
하고, 이어서 이 명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금년의 역질은 병란보다도 더 심하다. 만일 이대로 그치지 않는다면 백성이 다 죽어버리겠다. 두 번이나 제사를 지냈는데 일을 받든 사람이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았을까마는, 나의 비덕(否德)과 성의가 얇아 아득히 감응하는 조짐이 없는 것이다. 아! 저 적자들의 죽음이 줄을 이어도 그 임금 된 자가 구해내지 못하니 어찌 한갓 우리 적자들을 저버렸다 하지 않으랴? 이는 창창한 하늘과 오르내리는 영령을 저버림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은 임금의 부덕이라고만 말하지 말고 구원하고 진휼하여 특별히 마음을 더 기울이고 경외를 막론하고 받을 것은 가을의 추수 때까지 미루어라. 모든 공헌(貢獻)은 백성의 고혈(膏血)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대찰(大札)079)  의 해에는 임금도 먹을 것을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금년의 탄일(誕日)에는 각도의 방물과 물선(物膳)의 진상을 동조(東朝) 이외는 모두 중지하라."
하였다.

 

제주(濟州)의 배지인(陪持人)080)   6명이 서울에서 죽었는데, 벼슬을 구하던 출신(出身) 홍우관(洪宇寬)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임금이 탁지(度支)081)  에 명하여 상여(喪輿)를 끌 소[牛]를 내주게 하고 홍우관의 처자도 본주로 하여금 돌보아 주게 하였다.

 

대전(大錢)의 주조를 의정하였다. 이때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돈의 주조를 의논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구리[銅]가 귀하다 하여 철전(鐵錢)을 주장한 사람이 많았으나, 승지 이후(李)는 대전의 주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호조에 있을 때에 대전을 보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크기는 어떠한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한 닢[葉]이 1전[錢]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쓰기가 혹 불편하지는 않던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크게 쓸 데에는 대전을 쓰고 작게 쓸 데에는 소전(小錢)을 쓰면, 두 가지를 함께 써도 이그러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전을 주조하기로 의정하였으나, 마침내 일이 중지되었다.

 

5월 14일 을묘

정하언(鄭夏彦)·홍익삼(洪益三)을 승지로, 엄우(嚴瑀)를 대사간으로, 임순(任珣)을 사간으로, 김치인(金致仁)을 정언으로, 주형리(朱炯离)를 장령으로, 이계창(李啓昌)·박사눌(朴師訥)을 지평으로, 심관(沈鑧)을 사서로, 윤동도(尹東度)를 교리로, 김양택(金陽澤)을 부수찬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좌참찬으로, 정형복(鄭亨復)을 황해도 관찰사로, 김선행(金善行)을 수찬으로, 조재호(趙載浩)를 지경연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좌빈객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우빈객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겸 사서로 삼았다.

 

추조(秋曹)082)  의 당상에게 옥안(獄案)을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정섭하느라 계복(啓覆)083)  하지 못한 지가 이미 2년이 지났다. 아! 죽게 된 사람을 구차하게나마 시일을 연장함은 왕정(王政)이 너무나 느슨하지만 그에게는 다행이라 하겠다. 의당 살아야 할 사람이 감옥에서 1년을 부르짖게 한 것은 왕정으로는 차마 못할 일이기에 추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서 여쭈라고 하교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고, 이어서 모든 죄수 중에서 살려 줄 만한 사람은 감사(減死)하여 섬에 정배하도록 명하고 나머지 죄인들도 모두 앞으로 있을 삼복(三覆)에 부치라고 명하였다.

 

정언 김치인(金致仁)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 유한소(兪漢蕭)를 삭직하였으니, 처분의 지나치심이 어떻게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대신(臺臣)이 논한 바는 설령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만 화평한 마음으로 회유할 따름입니다. 하필 먼저 억측과 역료(逆料)를 가하여 지나치게 사기(辭氣)를 허비하실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임금의 말씀은 한 번 나오면 사방에 전파되어 모두가 장차 이르기를, ‘한 재신(宰臣)이 한 번만 작은 탄핵을 입으면 대신(臺臣)이 도리어 엄한 견벌을 받게 된다.’고 할 것이니, 성덕에 누가 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아! 근래에는 대각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습성이 되어 백관의 규정(糾正)이 적막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성상께서도 아닌게 아니라 이 점을 걱정하시면서도 혹시 한 번이라도 진언하면 죄책이 따르니, 이는 어찌 사람을 들어오게 하려 하면서 문을 닫는 것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승지가 연석(筵席)에서 솔직히 아뢴 말은 별로 딴 뜻이 없는데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유달리 그 직임을 개체하여 임금의 말에 공평을 잃고 견벌이 거듭 이어지니, 신은 더욱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의 유한소 등에 대한 처분은 대체로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굽은 사람을 내치려 함인데, 어찌 감히 변명하여 비호하려 하는가?"
하였다.

 

5월 15일 병진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각도의 장계로 보면 역질로 사망한 사람이 12만 4천여 명에 이르고 원적지 밖에서 떠도는 사람까지 합하면 적어도 30여만 명은 될 것이라 하니, 비록 병란이 있다 한들 어찌 이럴 수야 있겠습니까? 더욱 수성(修省)하여 천재를 덜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각사(各司)에 묘유법(卯酉法)084)  을 다시 신칙하라고 하령하였다.

 

5월 17일 무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양역(良役)의 일을 널리 여러 신하에게 물어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임어(臨御)한 지 몇 해가 되었으나 하나도 이룬 것이 없으니, 나도 몰래 겸연쩍어진다. 지난번 호조 판서가 입시하였을 때에 이미 하교한 바가 있었고, 홍계희(洪啓禧)도 아뢴 바가 있어 참으로 가상하였으나, 영부사 김재로(金在魯)는 매양 법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난색을 표하였다."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지금의 양역은 실로 망국의 병폐가 되어 있으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가지 대책 중에서 결포(結布)가 나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호포(戶布)가 낫다고 여긴다. 이종성(李宗城)은 고려가 호포로 망하였다고 말하였으나, 나는 주(周)나라는 갑자(甲子)에 흥하지 않았느냐고085)   말하였다. 호전(戶錢)은 명분이라도 바르지만 구전(口錢)·유포(儒布)·결포(結布)는 시행할 수 없다. 영성(靈城)086)  은 분등하여 돈으로 걷자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5전을 원정(元定)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호구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또 우리 나라 백성은 매우 가난하고 특히 양반은 더욱 가난하니, 5전도 어려울 것이다. 앉아서나 누워서나 생각해 보아도 결국 좋은 방책이 없으나,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무제(漢武帝)가 선술(仙術)을 구하니 동방삭(東方朔)087)   등이 오직 한마음의 정성에 달렸다고 말하였는데, 나도 문밖에 나가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편부를 물어 보고 돌아와서 시임·원임 대신과 함께 의정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묵묵히 모색하고 계시니, 신민의 복입니다. 국초에 오위(五衛)를 설립하여 사대부나 상인(常人)을 막론하고 남정(男丁)이라면 모두 소속시켰습니다. 임진 병란 뒤에 유성룡(柳成龍)이 5군문(五軍門)088)  을 설치하였으나 하민(下民)만이 치우치게 그 역을 담당하였는데, 어찌 순환의 이치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호(下戶)나 잔맹(殘氓)은 5전도 어렵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결포(結布)는 신의 의향인데, 호포·구전·결포 중에서 간편한 것을 취택하여 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약로는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큰 신이나 작은 신이나 값이 같은 것처럼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5전으로 규정하면 역시 고르지 못할 듯하니, 무엇보다도 기강이 세워진 뒤라야 법령이 행해질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의지를 분발하여 좋은 규정을 굳게 지키실 수 있다면 내일이라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경(坐更)089)  의 법은 먼저 대군(大君)과 대신(大臣)으로부터 비롯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민가를 빼앗아 입주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처럼 한다면, 어찌 행해지지 않겠습니까? 유포(儒布)와 구전은 시행할 수 없으니, 결포와 호포 중에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외방에서는 혹 4, 5부자(父子)가 군역에 응역하고 있어 원호(元戶)는 1천 호인데 군역은 2천여 명이나 되어 많다고 하니, 호전(戶錢)이 나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신만(申晩)은 말하기를,
"결포는 본래 부역이 너무 무거워 더 징수할 수 없으니, 구전(口錢)이 나을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호전은 명분이 바른 것이 참으로 하교하신 바와 같으나 다만 합호(合戶)할 염려가 있으니, 이는 우선 기강을 세우기에 달렸습니다. 분등(分等)에 있어서는 아니할 수 없는데, 대호(大戶)를 1냥으로 한다면 중호(中戶)는 8, 9전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어염세(魚鹽稅)를 받아서 보태어서 쓰자고 한 것은 의의가 있는 말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몇 백년 동안의 고질적인 폐단을 갑자기 손을 댈 수 없을 듯하니, 천하를 경영함에는 백성의 적음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호포와 결포는 비록 명색(名色)의 차이는 있지만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은 같습니다. 백성의 호수(戶數)로써 군정(軍丁)의 수효를 헤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음이 많으니, 충분히 상의하여 확정한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결포는 서북에는 시행할 수 없고 삼남의 전결(田結)은 70여 만 결이 되며 내외 군정(軍丁)의 수효가 거의 97만 명에 이르니, 이 역시 시행할 수 없습니다. 호포가 가장 나을 듯하지만 그러나 사물이 고르지 아니한 것은 사물의 본성인 것입니다. 때문에 안할 도리가 없어 마땅히 분등을 하여야 하겠는데, 가난한 양반으로 한 치의 땅도 없는 사람한테는 족징(族徵)090)  의 폐단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미 호전에 뜻을 두고 계시니, 비록 이론이 있더라도 강구해 보아야 마땅할 일입니다. 다만 오로지 돈으로만 걷는다면 돈은 귀하고 무명은 천하게 되니, 역시 폐단이 있겠습니다."
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제학으로, 윤식(尹植)을 좌윤으로, 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이이장(李彛章)을 수찬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겸 문학으로 삼았다.

 

5월 19일 경신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사서인(士庶人)을 불러서 양역(良役)에 대하여 물었다. 임금이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에게 말하기를,
"이윤(伊尹)이 이른바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내가 밀쳐서 구렁에 떨어뜨린 것과 같다.’ 하였는데, 바로 내 마음을 이른 말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너희들의 고질적인 폐단은 양역보다 더함이 없기 때문에 궐문에 임하여 묻게 된 것이다. 유포(遊布)와 구포(口布)는 당초에 논하고도 싶지 않으니, 호포와 결포로써 너희들의 소원 여부를 듣고자 한다. 반경(盤庚)091)                   세 편은 모두 백성에게 하유하는 글이다. 나도 지금 백성들에게 하유하노니, 각자 소견을 말하라."
하고, 윤음을 받아 적으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아! 이번에 궐문에 임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한 연유에서이다. 우리 사서(士庶)들은 모두 이 하유를 들으라. 생각해보면, 지금의 민폐는 양역 같음이 없으니, 지금에 이르러 고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지경에 이르러 탈가(稅駕)092)                  될 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 성고(聖考)께서는 깊이 이 폐단을 진념하여 여러 차례 사륜(絲綸)을 내리셨고 그 뜻이 또한 간측하셨으나, 잘 받들어 모시지 못하여 한갓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만 있었을 뿐이 아니었으니, 사왕(嗣王)이 된 자 그 일을 추모할 때 통탄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아! 오늘의 신민은 열성조께서 애휼(愛恤)하셨던 자들이다. 모든 부형(父兄)이 항상 아끼던 세간을 아들이나 아우에게 주면 아들과 아우된 자는 아끼고 보호하여 혹시 상하기라도 할까 항상 걱정하는 것인데, 하물며 억조(億兆) 사서(士庶)를 어찌 아끼고 보호하는 세간에 비교하겠는가? 부르짖고 원망하여 바야흐로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그러나 경장(更張)이 잘못되면 그대로 둔 옛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내가 임어한 지 2기(紀)093)                  가 되었으나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다. 뜻이 비록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역시 선령과 신민을 저버림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일을 경영하면서도 자식에게 하유(下諭)하지 않으면, 이 어찌 부모의 도리라고 하겠는가? 한더위를 정양(靜養)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병을 무릅쓰고 문에 임하여 사서(士庶)를 불러 물어보는 것이다. 옛부터 폐단을 구하려 하는 자는 호포(戶布)니 결포(結布)니 유포(遊布)니 구전(口錢)이니 하고 말하는데, 구전은 일이 매우 보잘것없고, 유포 역시 매우 불편하니, 이 두 가지는 나의 뜻이 결코 시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지금 묻고 있는 것은 호포와 결포 및 이 밖에 좋게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인 것이다. 너희들도 상상컨대 칠실(漆室)의 한탄094)                  이 있을 것이니, 각기 면전에서 소회를 말하고 모름지기 물러나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오부(五部)의 방민(坊民)과 금군(禁軍) 등 50여 인이 모두 호포가 편하다고 말하고, 결포가 편하다고 말한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에서는 불필요한 관원을 도태시켰는데, 지금은 만민의 고혈(膏血)을 혹 제조 한 사람이 붓 한번 휘두르는 사이에 써버리게 되니, 어찌 해괴하지 않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여야만 경비를 써나갈 수 있으니, 안으로는 부질없는 관사에서 밖으로 주현(州縣)까지 적당히 줄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어(臨御)한 지가 이미 2기(紀)에 가깝지만 해놓은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때문에 생민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려고 한다마는 주현(州縣)을 줄이는 것은 곤란하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도성 안으로만 말하더라도 호전(戶錢)의 총계가 약 4만여 냥이 됩니다. 대호(大戶)·중호(中戶)를 막론하고 1냥을 넘지 않아야 하므로 4필의 무명을 내던 사람이 단지 1냥만을 내게 되는데, 어찌 혜택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궐문에 임하여 백성에게 하소한 것은 그 편부를 물어서 하정(下情)이 상달(上達)케 하려 함이었다. 이날 박문수는 먼저 사람을 시켜 방민에게 신칙하기를, ‘호포의 논의는 임금의 뜻이니, 자기 소견을 말하지 말고 호포로 대답하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있으리라.’ 하였다. 박문수는 호조 판서로 경장(更張)의 일을 맡고 있으니 임금의 신임이 매우 두터웁다 하겠는데, 그가 먼저 임금의 뜻에 아부하여 속이고 가릴 계획을 꾸몄다. 아! 도하(都下)의 백성은 양역과는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한번의 효유에 쉽사리 감동되어 시골 백성을 대신하여 호포를 내기를 소원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박문수가 시켜서 그러한 것이다. 이러고서 설사 달리 폐단을 바로잡을 좋은 방책이 있다 하더라도 하정이 어떻게 해서 상달될 수 있겠는가? 조현명·홍계희(洪啓禧)가 그들의 의욕을 펴려 한 것도 오로지 박문수가 우익(羽翼)이 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양역의 폐단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겠으나 임사(任使)하는 신하들이 모두 이러하니, 발을 돌리기도 전에 무한한 부작용과 실패가 뒤따랐음은 괴이하지 않도다. 위에는 성군이 있으나 나라를 모유(謨猷)하는 신하의 불성실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8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금융(金融) / 역사(歷史)


[註 091]          반경(盤庚) : 《서전》의 편명.[註 092]          탈가(稅駕) : 이사(李斯)가 진(秦)의 재상(宰相)이 되어 부귀가 극도에 이르자 "내가 탈가할 곳을 알지 못하겠노라."고 한 데서 나온 말. 탈가란 곧 해가(解駕)로, 수레를 풀고 편안하게 휴식하고자 하는 뜻임. 즉 이사가 부귀가 극도에 달하였으나, 향후의 길흉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으로 한 말임. 전하여 장래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으로 쓰임.[註 093]          기(紀) : 1기는 12년임.[註 094]          칠실(漆室)의 한탄 : 국가의 정치가 잘못되는 것을 탄식한다는 뜻. 옛날 노(魯)나라 칠실이라는 고을에 살던 과년(過年)한 처녀가 국가의 정치가 잘못되면 그 영향이 아녀자에게까지 파급되어 고통을 겪게 된다는 말을 한 데서 온 말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궐문에 임하여 백성에게 하소한 것은 그 편부를 물어서 하정(下情)이 상달(上達)케 하려 함이었다. 이날 박문수는 먼저 사람을 시켜 방민에게 신칙하기를, ‘호포의 논의는 임금의 뜻이니, 자기 소견을 말하지 말고 호포로 대답하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있으리라.’ 하였다. 박문수는 호조 판서로 경장(更張)의 일을 맡고 있으니 임금의 신임이 매우 두터웁다 하겠는데, 그가 먼저 임금의 뜻에 아부하여 속이고 가릴 계획을 꾸몄다. 아! 도하(都下)의 백성은 양역과는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한번의 효유에 쉽사리 감동되어 시골 백성을 대신하여 호포를 내기를 소원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박문수가 시켜서 그러한 것이다. 이러고서 설사 달리 폐단을 바로잡을 좋은 방책이 있다 하더라도 하정이 어떻게 해서 상달될 수 있겠는가? 조현명·홍계희(洪啓禧)가 그들의 의욕을 펴려 한 것도 오로지 박문수가 우익(羽翼)이 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양역의 폐단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겠으나 임사(任使)하는 신하들이 모두 이러하니, 발을 돌리기도 전에 무한한 부작용과 실패가 뒤따랐음은 괴이하지 않도다. 위에는 성군이 있으나 나라를 모유(謨猷)하는 신하의 불성실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균역(均役)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대사이나, 만일 깊이 생각하고 조심성 있게 하지 않는다면 뒷 폐단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만 착오가 있어도 국가의 존망이 판가름날 것이다. 그러나 맹자(孟子)가 말했듯이 백성을 보호하면서 왕 노릇을 하면 막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군포·호포·어염세를 사정하여 마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 호당 얼마면 되겠는가?"
하니,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대호(大戶)는 1냥 5전으로 정하고 중호는 1냥 2, 3전, 소호는 1냥이 좋을 듯합니다. 호조 판서의 의사도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전에는 5전을 말하더니, 어떻게 이리도 많아졌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의 당초 의사는 불필요한 관원을 도태시키고 주현을 합하여 군수(軍需)의 부족에 보충하려 하였기에 5전을 말하였으나, 성상께서 윤허치 않으셨기 때문에 아니할 수 없어서 증가시킨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어염세(魚鹽稅)도 이미 윤허하였다. 이 일만 잘 된다면 경 등은 안국 공신(安國功臣)이 될 것이다. 왕자(王子)나 대군(大君)이 호역(戶役)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호법(戶法)이 정해지면 내가 각 궁방(宮房)에 하교하여 먼저 호전을 내게 하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로가 말하기를,
"본궁(本宮)은 사체(事體)로 보아 세를 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나에게는 후하게 하면서 나의 조상에게는 박하게 한다. 기왕 어의궁(於義宮)에 세를 거두는데 본궁만 면제될 수 없다. 지금 나의 이러한 일은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보게 하려 함이다."
하였다.

 

5월 20일 신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양역(良役)의 폐단은 생민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초에는 다만 갑사(甲士)와 정병(正兵)만이 있었는데, 임진년095)   이후로는 병제(兵制)가 크게 바뀌어 양병(養兵)하기가 심히 어려웠기 때문에 쌀과 베를 받아 군대를 양성하여 군포(軍布)가 혹은 2필 혹은 1필, 보미(保米)가 혹은 6두 혹은 12두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가장 무거운 경우는 12두 이외에 5전의 가징금(加徵金)이 또 있었습니다. 상번군(上番軍)이 번에 응하기가 어려워 쌀과 베를 내고 사람을 사서 번을 세우다 보니, 드디어 양역의 제도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백골(白骨)에게도 징수하고 인족(隣族)에게도 재촉해 징수하게까지 되어 목을 매거나 물에 빠져 죽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대조(大朝)께서 이 일을 깊이 걱정하여 궐문에 임하여 널리 물으시고 반드시 경장하여 우리 저하에게 물려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여러 신료(臣僚)와 사서(士庶)들이 모두 호포(戶布)가 편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조께서는 신 등으로 하여금 상세하게 강구하여 이 폐단을 바로잡게 하신 것입니다. 또 어염세(魚鹽稅)를 받아 경비에 충당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실로 생민의 다행입니다. 옛날 제(齊)나라는 어염으로 부강을 이루었는데, 우리 나라도 3면이 바다이니, 그 혜택은 제나라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마는, 각 군문과 각 영진(營鎭)에 분속(分屬)되고 혹은 여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096)  한 바 되어 각처에서 거두어 들이는 포학함이 양역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조의 이번 조치는 단지 육지에 사는 백성의 다급함을 풀어주신 것일 뿐 아니라 해변 백성의 괴로움까지도 풀어주게 될 것이니, 이는 참으로 성덕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저하께서도 이러한 뜻을 본받으신다면, 어찌 하늘의 영명(永命)을 비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5월 22일 계해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역(良役)은 수백 년 동안 생민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왔습니다. 듣건대, 성상의 단안(斷案)으로써 호전(戶錢)으로 정하였다 합니다. 일을 맡은 신하가 참으로 잘만 봉행한다면 나라를 위하여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마는, 호전은 사실은 절절이 불편하여 도리어 결포(結布)를 시험해 본 것만도 못합니다. 또 호포와 결포의 이해와 편부는 고사하고 현재 역질이 전에 없이 번져서 백성들이 다 죽어가게 되어 호구가 크게 감축하였으니, 이러한 큰 경장(更張)은 결코 그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상세하고 신중한 검토를 더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5월 23일 갑자

임금이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김재로의 차자를 읽으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나의 뜻도 원임(原任)과 같은데,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다. 만약 호포와 결포로 한다면 단지 1필만 감하게 되는데 너무 적지 않은가?"
하니, 이조 참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이 일은 잘하면 종사(宗社)에 만년(萬年)의 복이요 잘못하면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의 소견도 원임과 다름이 없습니다만, 단지 결포는 모두 호우(豪右)가 내게 되고 잔민(殘民)은 병작(幷作)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크게 경장(更張)을 하려 한다면, 작은 폐단이야 어찌 면하겠는가?"
하였다.

 

황단(皇壇)의 삼황(三皇)097)  의 휘일(諱日)에는 풍악을 울리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5월 25일 병인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학문의 공정(工程)은 선후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리대전(性理大全)》에는 이기 심성(理氣心性)의 학설과 풍속 시비(風俗是非)의 분변 등이 빠짐없이 실려 있으니, 이 책을 보면 지려(智慮)도 늘고 식견도 통달해지며 성정(誠正)098)  ·치평(治平)099)  이 모두 이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또 《주자어류(朱子語類)》는 처음에는 어려운 듯하지만 점차 읽어 가노라면 쉬워집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오자(五子)100)  의 《근사록(近思錄)》은 더욱 도움이 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마땅히 아뢴 대로 할 뿐이다."
하였다.

 

5월 29일 경오

조관빈(趙觀彬)을 형조 판서로, 성범석(成範錫)을 승지로, 유언국(兪彦國)을 사간으로, 이중조(李重祚)·윤근(尹勤)을 지평으로, 윤동성(尹東星)·심수(沈鏽)를 정언으로, 윤지태(尹志泰)를 필선으로, 유언민(兪彦民)을 겸 사서로, 홍봉한(洪鳳漢)을 호조 참판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좌윤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대사성으로, 이익보(李益輔)를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때에 임금이 온종일 편전에 임하여 양역(良役)에 대하여 강구하였는데, 약방 제조 조재호(趙載浩)에게 말하기를,
"영상의 말은 우리 나라의 어염(魚鹽)이 제(齊)나라와 초(楚)나라보다도 낫다고 하였는데, 경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였으니 무슨 뜻인가?"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구법(舊法)은 비록 폐단이 있었지만 심히 괴롭지는 않았는데, 신법(新法)은 비록 좋기는 하나 폐단이 없다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경장(更張)하는 일은 비유하자면 집을 고치는 것과 같아 파손되는 데에 따라 수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영부사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임술년101)  에 이 논의가 있어 장소(章疏)가 수레에 가득했으므로 곧 유포(遊布)와 구포(口布)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고 상신(相臣) 조상우(趙相愚)가 사인(士人)은 반드시 붕괴하는 형편이 될 것이라 하여 일이 중단되었는데, 호포나 결포도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이조 판서 김상로가 말하기를,
"1필로 정하면 작은 변통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으나, 그것도 제사(諸司)의 각종 명목을 다 혁파한 뒤에라야 행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때에 백성들은 2필의 응역에 괴로워하였기 때문에 유포·구포·호포·결포의 네 가지 논의가 있어 그 폐단을 줄이려 하였으나,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1필을 감하고 어(漁)·염(鹽)·선(船)에 세를 거두어 그 감액을 보충하려 한 것이다. 아! 옛부터 민역(民役)을 줄이는 방도는 경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보다 나은 방도가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70만 군정에게 2필씩 거둔 것이 태반은 명목도 없는 잡비로 나가버리는데, 그 용도는 줄이려 하지 않고 되려 동으로 침해하고 서에서 깎아 그 감량을 보충하려 하였다. 그런데 구징(舊徵)이 줄어든 것은 비록 다행한 일이지마는 신징의 원망은 갑절로 나타날 것이니, 심장을 도려내서 종기를 치료하려는 것과 가깝지 않겠는가? 탄식할 따름이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9면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 / 역사(歷史)


[註 101] 임술년 : 1682 숙종 8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때에 백성들은 2필의 응역에 괴로워하였기 때문에 유포·구포·호포·결포의 네 가지 논의가 있어 그 폐단을 줄이려 하였으나,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1필을 감하고 어(漁)·염(鹽)·선(船)에 세를 거두어 그 감액을 보충하려 한 것이다. 아! 옛부터 민역(民役)을 줄이는 방도는 경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보다 나은 방도가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70만 군정에게 2필씩 거둔 것이 태반은 명목도 없는 잡비로 나가버리는데, 그 용도는 줄이려 하지 않고 되려 동으로 침해하고 서에서 깎아 그 감량을 보충하려 하였다. 그런데 구징(舊徵)이 줄어든 것은 비록 다행한 일이지마는 신징의 원망은 갑절로 나타날 것이니, 심장을 도려내서 종기를 치료하려는 것과 가깝지 않겠는가? 탄식할 따름이다."

 

수어사를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고치고 총융사를 경기 병사로 고쳤다. 임금이 두 영장(營將)은 도성 안에 있고 군병은 외방에 있어서 변란이 일어날 때에 쓰이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군교(軍校)는 금위영과 어영청에 분속시켰다.

 

이달에 제도(諸道)에서 역질로 사망한 자는 1만 9천 8백 4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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