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병자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해보면 결전(結錢)의 폐해는 호전(戶錢)보다 심합니다. 6도(道)의 전결(田結)은 각종 면세전을 제하고 수세하는 실결(實結)이 풍년인 경우 7, 80만 결이고 흉년인 경우 5, 60만 결인데, 양역(良役)의 2필을 혁파하고 모두를 결에서 거둔다면 1결에 결전이 4, 5백 전이 되고, 양역에서 1필을 감하고 반절을 결에서 거둔다면 1결에 결전이 2, 3백 전이 됩니다. 전결의 원납(元納)에는 세미(稅米)와 대동미(大同米)가 있고 삼수량미(三手糧米)와 별수미(別需米)가 있으며 또 치계(雉鷄)와 시탄(柴炭)의 역이 있으니 결공(結供)이 참으로 많은데, 이제 또 결에서 돈을 거두면 원납 외의 별납(別納)만도 돈을 쌀로 환산한다면 많게는 22, 3두이며 적게는 11, 2두인데, 혹 흉년을 만나 곡식은 귀하고 돈이 헐하면 쌀값은 등귀하지만 푸른 싹이라고는 없고 집안이 텅 비어 있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삼대(三代)102) 의 조(助)103) 와 철(徹)104) 은 모두 십일(什一)105) 인데, 우리 나라의 결역(結役)은 조와 철에 비하여 몇 갑절만 될 뿐만이 아닙니다. 정세(正稅)도 어려운 처지에 더구나 첨가하여 부과한단 말입니까? 또 토색(討索)당하는 돈을 말하자면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에 면역수전법(免役輸錢法)106) 을 설시하였는데, 사마광(司馬光)이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곡식이나 베는 백성이 농사짓고 길쌈을 해서 얻을 수 있으나 돈에 있어서는 현관(顯官)이 주조한 것으로 백성이 사사로이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유사(有司)가 법을 세우면서 오직 돈으로만 받게 하니 풍년이 들면 백성들은 곡식을 헐하게 내고 흉년이 들면 누에고치와 과일 및 짐승을 팔고 심지어 전답까지 팔아 돈을 만들어 실어다 바쳐야 하니, 백성이 어떻게 살아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오늘날 온갖 물건이 비싼 것은 돈이 귀해진 때문이니 일을 맡은 신료는 돈의 주조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 잉여를 계산하면 그 수량이 영성(零星)이고 공장(工匠)의 노임이나 잡비도 적지 않습니다. 감관(監官)을 두고 돈을 만드는 어려움이 이와 같은데, 결전을 재촉해 징수하고서야 백성에게 괴롭고 고달픔이 없게 하고자 한들 될 법이나 하겠습니까? 시기를 헤아림에 어두울 때에는 치란(治亂)이 관계되기 마련입니다. 청묘(靑苗)107) 와 보갑(保甲)108) 은 주관(周官)109) 에서 본받아 송나라와 명나라에서 시행하였으나, 하나는 다스려지고 하나는 어지러웠던 것은 시세(時勢)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긴급치 않은 비용은 줄이고 중요치 않은 관원은 감하며 누락된 군정은 수괄(搜括)하고 간교한 구멍을 막아서 일을 꾀함에 질실을 힘쓰면 거의 비운(否運)을 태운(泰運)으로 돌이킬 가망이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사간 임상로(林象老)가 상서하기를,
"양역(良役)을 개혁함에 있어서는 널리 일국의 민정을 수렴하여 백세 이후까지도 폐단이 없게끔 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하교가 계셨다."
하였다.
경기 감사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양역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기를,
"양역의 폐해는 수화(水火)보다도 심하니,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필경엔 백성이 없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선조(先朝) 때부터 변통할 방책을 강구하였으나 아직까지 정론(定論)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호전(戶錢)이나 결포(結布)가 모두 결점이 있어서 갑자기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호전은 모름지기 호적법이 정돈되어야만 논의해 볼 수 있는 것인데 만근 이래로 합호(合戶)와 누적(漏籍), 사사(詐死)·위망(僞亡) 등의 간계가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지금 중외의 호수(戶數)가 비록 1백 70만 호에 이르고 있으나, 이른바 대호(大戶)·중호(中戶)는 열에 한둘도 못되고 소호(小戶)와 잔호(殘戶)가 거의 반절을 넘고 있습니다. 경기로 말하더라도 총 14만 7백여 호에서 대호·중호라고 할 만한 호수는 1만여에 불과한데, 경기가 이러하니 다른 도는 알 만합니다. 처지가 이러한데 돈을 거둘 경우 덜하면 국가의 경비가 아주 부족할 것이고, 무겁게 거두면 백성의 근심과 원망은 도리어 더 심해질 것이니, 이는 결코 시행해 볼 만한 방도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결포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 전세(田稅)가 대동법이 생긴 이후로 1결에서 쌀을 내는 수효가 너무 많은데, 이제 또 규정 이외의 세금을 덧붙이면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인묘조에 유사(有司)가 재정이 고갈되었다 하여 4결에 베 1필씩을 내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이는 농사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짓이라고 극언하였습니다. 비록 넉넉하다고 한 시대에도 4결에 베 1필을 가지고 오히려 어렵게 여겼는데, 하물며 지금 같은 고궁하고 위급한 때에 1결에 베 1필을 어떻게 쉽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1결을 가진 백성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열 집의 마을에서 땅을 가진 자는 두서넛도 못되고 거의가 남의 전답을 빌려 짓고 있어 거기에서 난 소출을 다해도 상세(常稅)를 충당하지 못하는 판국에 전에 없던 별징(別徵)을 또 물린다면, 끝내는 반드시 옥토를 버려 썩은 흙처럼 될 것이고 묵혀서도 부족하여 떠나게 될 것이며, 인족 침징(隣族侵徵)의 폐단은 양역보다 심하고 국가의 유정지공(惟正之貢)110) 도 또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지금에 있어서 나라의 대계를 도모하려면 수어청과 총융청을 혁파하여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넘겨주고 각사(各司)의 불필요한 관원을 도태시키며 삼군(三軍)의 둔전(屯田)을 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대변혁에 관계되니만큼 가벼이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작게 변통하면 작은 이익이 있고 크게 변통하면 크게 이익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청컨대, 작게 변통하는 도리로 전하께 아뢰려 합니다.
지금 인구의 증가는 번성하다 할 수 있겠으나 군액(軍額)이 그래도 부족한 것은 실로 부호(富戶)의 장정은 거의 정역(正役)을 피하려고 하여 수월한 곳으로 들어가고 정군(正軍)의 자식은 모두 도포를 입고 당혜(唐鞋)를 신으며 부오(部伍)의 천인들도 철릭[天翼]을 입고 갓을 씁니다. 여기에 교생(校生)·원생(院生)·관군관(官軍官) 등 허다한 명목이 있어, 쉽사리 양민의 피하려는 소굴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양역(良役)을 수괄(搜括)하지 못하고 노약자는 도리어 구차하게 충원됨이 많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지금의 민정(民情)은 오로지 자기의 2필 응역을 어렵게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인족(隣族)이 침징(侵徵)을 당함으로써 지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사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황구 첨정(黃口簽丁)과 백골 징포(白骨徵布)는 원기(冤氣)가 하늘을 찌르고, 한 집에서 거듭 겹쳐진 응역에 쌓인 원망이 뼈에 사무쳐 있으니, 민생의 괴로움과 고달픔은 가히 비참하다 하겠습니다. 지금의 기강과 풍속, 인심과 세도(世道)로서는 비록 주관(周官)의 제도가 있다 한들 실로 끝내 성취할 가망은 없고 혹시라도 역로(驛路)와 파발(擺撥)만을 소란하게 할 것 같은 염려만 있습니다. 신의 천박한 소견으로는 제도(諸道)의 민역을 관서의 예대로 모든 2필의 응역을 모두 1필로 바꾸면 제반 투속(投屬)이 자연히 노출되어 군액에 충당되는 도리가 있을 것이고, 각도의 장정이 전처럼 수월한 곳으로 달아나는 폐단이 없어지리라고 여겨집니다. 관서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실례로 말하더라도 1필로 책정한 뒤에는 지금까지 백성들의 원망이 없이 순조롭게 행해지고 있으니, 이는 목전의 폐단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책일 것입니다. 논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2필의 역을 1필로 줄이면 허다한 경비가 조달되지 못한다.’고 하지마는, 이점에 대해서는 신도 생각해 본 바가 있습니다. 국가의 1년 경비 중 반절이 나올 데가 없어지는데, 이는 실로 쉽사리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국내의 재정을 총괄하여 외방의 불필요한 잡비를 삭감하고 형편을 보아 옮겨 구획하여 반감된 숫자에 충당한다면, 어찌 길이야 없겠습니까? 이것이 만일 부족하다고 한다면 앞에 말했던 군액 이외의 교생의 무리를 ‘제번 교생(除番校生)’이라 명명하고, 여러 읍의 군관이나 기패관(旗牌官) 등속도 ‘수포 군관(收布軍官)’이라고 칭하여 모두 1필의 응역에 충당하면, 이 역시 경비를 보충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니,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원경하와 유복명의 소를 경들도 보았는가? 사람의 소견은 각자 다른 것을 어찌하겠는가?"
하고 하교하기를,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갑을(甲乙)의 논의가 있는 것은 나라의 좋은 일이고 중신과 재신이 소장을 올리는 것도 그 뜻만은 옳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도 고집이 있기 때문에 두 소를 되돌려 준 것이다."
하였다.
6월 9일 경진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경원(黃景源)이 동래에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할 것을 장계로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과 중재(重宰)에게 두루 물으니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제위는 신설하지 않더라도 우선 성정(城丁)을 두어 왜적을 막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황경원이 또 장계를 올려 더욱 간절하게 청하였다. 대체로 효종께서 중원(中原)을 회복하고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자제위를 두기로 의논한 바가 있었는데, 황경원의 장계는 사실은 문정공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그 조목이 열두 가지였는데, 유림 자제위(儒林子弟衛)·무사 자제위(武士子弟衛)·향족 자제위(鄕族子弟衛)·서얼 자제위(庶孽子弟衛)·중인 자제위(中人子弟衛)·공장 자제위(工匠子弟衛)·교원 자제위(校院子弟衛)·상고 자제위(商賈子弟衛)·포인 자제위(浦人子弟衛)·인리 자제위(人吏子弟衛)·노비 자제위(奴婢子弟衛)·보오 자제위(保伍子弟衛) 등이었다. 황경원이 체차되자 그 의논은 중지되고 말았다.
6월 12일 계미
이극록(李克祿)·이명희(李命熙)를 지평으로, 김양택(金陽澤)을 헌납으로, 이양천(李亮天)을 정언으로, 서지수(徐志修)를 겸 사서로, 조관빈(趙觀彬)을 좌빈객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윤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동경연으로, 원경하(元景夏)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6월 14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북도 어사 서지수(徐志修)가 복명하였다. 임금이 서지수에게 도신과 수령의 치적에 대하여 물으니, 서지수가 대답하기를,
"명천 부사(明川府使) 심영(沈坽)·이성 현감(利城縣監) 신윤광(申胤光)·북청 부사(北靑府使) 이택징(李澤徵)이 일도에서 치적이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도신 정익하(鄭益河)는 교제창(交濟倉)을 관리하면서 돈이 1만 관(貫)에 이르렀는데,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초피(貂皮)·인삼(人蔘)과 육진(六鎭)의 세포(細布)를 진자(賑資)에 보탠다고 핑계대고 모두 서울로 보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심영 등을 포상하라고 명하고 정익하는 잡아다 심문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해서(海西) 기사(騎士)의 일은 참으로 민망합니다. 그들은 본토의 양반으로서 자산을 기울여 옷과 행장을 꾸려 상번하였다가 소망은 크게 어긋나고 오히려 원망과 후회만 생기니, 실로 바람 앞에 풀이 쓰러지듯 할 염려가 있습니다. 본도의 토속은 향안(鄕案)에 들어야 비로소 양반으로 행세하게 되는데, 상번한 기사는 번을 치루어야만 향안에 넣어주기로 영갑(令甲)111) 에 규정하면 저들은 즐겨 응하고 원망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승지 이응협(李應協)이 말하기를,
"향안은 그 지방 토속이니 조정에서 간섭할 바는 아니나, 그들의 장령(將領)은 파총(把摠)이나 초관(哨官)의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그들이 동등하게 보아 문득 절욕(折辱)을 당하기 때문에 분노와 원망을 안게 됩니다. 만일 일찍이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으로 장령을 삼으면 저들은 필시 두렵게 여길 것이며, 또 내삼청(內三廳)112) 에서 일할 길이 열리면 원망은 사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6월 19일 경인
관각(館閣)113) 에 명하여 한림(翰林)의 회권(會圈)을 하게 하여 박정원(朴正源)·이의로(李宜老)·김시묵(金時默)·이헌묵(李憲默) 등 4인을 뽑았다. 임금이 회권한 대신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뽑힌 사람이 너무 적으니, 자못 널리 취하는 뜻이 없어졌다."
하니,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 등도 널리 취하려 하였으나, 각자의 권점이 흩어지니 자연히 이렇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간소하고 엄정하면 폐단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필을 감한 것을 여러 신하들은 큰 혜택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전부를 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항상 서운하다."
하매, 조 현명이 말하기를,
"비록 2필을 다 감하였다 해도 금위영과 어영청의 상번은 폐할 수 없고 상번군이 있으면 자장보(資裝保)114) 는 자연히 1필로 하여야 하니, 2필을 다 감해주고 다시 1필의 응역으로 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반절을 감해 주고 1필만 남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나의 마음이 풀린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신의 임금 속임이 참으로 심하도다. 호포·결포·어염세를 막론하고 이것으로 보포(保布)를 받는 것을 대신하려 하였다면 어찌 유독 상번군에만 급대(給代)하지 않고 신포(身布)의 보를 따로 정할 수 있겠는가? 말을 잘 꾸며 임금의 마음을 편안케 하여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즐겨 이러한 투령(偸鈴)115) 의 습관을 하니, 슬프도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71면
【분류】인사(人事) / 군사(軍事) / 역사(歷史)
[註 113] 관각(館閣) : 홍문관과 예문관.[註 114] 자장보(資裝保) : 어영청에 딸린 군보(軍保)의 하나.[註 115] 투령(偸鈴) : 엄이 투령(掩耳偸鈴). 곧 귀를 가리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나쁜 짓을 행하고 남의 비난하는 말을 듣기 싫어서 자기의 귀를 막아도 아무 소용이 없음의 비유. 엄이 도령(掩耳盜鈴)·엄이 도종(掩耳盜鍾)과 같은 말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신의 임금 속임이 참으로 심하도다. 호포·결포·어염세를 막론하고 이것으로 보포(保布)를 받는 것을 대신하려 하였다면 어찌 유독 상번군에만 급대(給代)하지 않고 신포(身布)의 보를 따로 정할 수 있겠는가? 말을 잘 꾸며 임금의 마음을 편안케 하여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즐겨 이러한 투령(偸鈴)115) 의 습관을 하니, 슬프도다."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권항(權抗)을 지평으로, 이수관(李壽觀)·이택징(李澤徵)을 정언으로, 어석윤(魚錫胤)을 부수찬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문학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도승지로, 조덕중(趙德中)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좌참찬 권적(權𥛚)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논자들은 호전(戶錢)과 결포(結布) 두 가지 방책을 말하고 있으나, 호전의 행하기 어려운 폐단은 여러 신하들이 이미 말하였습니다. 대저 결포로써 말하면 대동세(大同稅)의 쌀과 콩 및 유정지공(惟正之供)이 모두 전결(田結)에서 나오고, 기타 저치미(儲置米)·삼수량(三手糧) 제반 잡역(雜役)이 또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합계하면 삼남은 1결에서 내는 것이 거의 쌀 30여 두를 넘고, 기타 갖가지 징납도 이루 셀 수가 없는데, 지금 또 결포를 더 징수 한다면 이는 거듭 겹쳐진 역 위에 역을 거듭 더하는 것이니, 이것은 시행할 수 없는 점입니다. 대체로 경외의 1년 경비는 60만 4천 필인데 얼마나 가감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이 일찍이 경외의 군안(軍案)을 계산해 보니 5군문(五軍門)의 보포(保布)가 45만 6천 5백 43필이고 경각사(京各司)의 보포가 4만 6천 1백 16필이었는데 이는 모두 2필의 응역이고, 운임 반 필이 이 밖에 또 있으니 이는 양역 중에서 가장 무거운 예입니다. 또 제도(諸道)의 경비로써 말하면 영남의 감영·병영에서 쓰이는 비용이 4만 3천 12필이며, 호남의 감영·병영·수영에서 쓰이는 비용이 4만 6천 2백 7필이며, 호서의 감영·병영·수영에서 쓰이는 비용이 1만 5천 9백 52필이며, 기영(畿營)에서 쓰이는 비용이 3천 6백 64필이며, 해서(海西)에서 쓰이는 비용이 2만 2천 2백 14필인데, 그 중에는 혹 1필의 응역도 있고 혹 운임이 없는 곳도 있으니, 이는 양역 중 조금은 헐한 예입니다. 대충 이와 같으니 경외를 합산하면 1년 경비가 63만 3천 7백 8필이지만 지금의 경비는 전보다 몇만 필은 증가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그 필수(疋數)가 이토록 많으니 조정의 변통도 반드시 비상한 조치가 있어야만 조금이라도 민폐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재정이 나오는 곳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연해 어염(魚鹽)의 소득과 각도(各道) 은철(銀鐵)의 세이고, 하나는 각도 환자곡[還上穀]의 비축이 많음입니다. 이 밖에 이른바 양전(養田)이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각도의 영문에서 백성이 파는 전답을 사들여서 작인(作人)에게 맡기어 한결같이 사가(私家)의 예대로 혹은 반분(半分) 타작하거나 혹은 도지(賭地)로 주어 군수(軍需)를 마련함을 이름입니다. 만일 이 제도를 시행한다면 이득의 한 가지는 백성에게 농사에 힘쓰도록 권할 수 있는 것이고, 한 가지는 백성에게서 베를 걷는 것을 대신할 수 있음이고, 한 가지는 유정지공도 회감(會減)할 수 있음인데, 농사로써 군병을 기르고 병정(兵政) 때문에 농사를 해치지 않게 되니 이야말로 완전한 방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도의 환자곡 수량이 많은 곳은 그 폐단도 극심하여 원망의 소리는 양역과 일반이라 합니다. 관서와 영남 두 도의 환자곡 중에서 각각 50만 석을 덜어서 1석에 1냥씩 돈으로 만들면 1백 만여 냥을 앉아서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 돈으로 전답을 사면 1년의 소출이 12만 6백 28냥은 넉넉히 될 것입니다. 옛날 선조 말 임인년(壬寅年)116) 에 옹주에게 사패(賜牌)117) 하였으나 실제 수입이 없자 어염의 세수(稅收)를 나누어 주어 전토(田土)의 수입에 대신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일시 편의적인 조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궁가(宮家)에서 으레 받은 것이 그와 비준(比準)되는데 해수(海水)의 절수(折受)가 점차 증가하고, 궁가의 절수 외에도 지방관의 관세(官稅)가 있으며, 입안(立案)한 터주[基主]의 세가 있고, 경아문에 소속된 세가 있으며, 감영·수영에 내는 세가 있어 한 어부(漁父)의 신상에 5, 6가지나 거듭 겹치게 세가 부과되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이러한 거듭 겹치게 징수하는 폐단을 전부 제거하고 국가의 정세(定稅)만 받기로 한다면, 어민들은 필시 즐겨 따르고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눈앞의 소소한 폐단에 있어서는 예컨대, 각사(各司)의 불필요한 관원을 줄일 것이요, 각조(各曹)의 긴요치 않은 이속을 감할 것이며, 사가(私家)에서 품삯을 주고 세운 졸개를 파할 것입니다. 내수사(內需司)에서 노비를 많이 두는 것과 무예 별감(武藝別監)의 가설(加設)은 감히 곧바로 삭제나 감축을 청할 수는 없으니, 오직 대조(大朝)께서 성충(聖衷)으로 재단하셔서 알맞게 처리하시는 여하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신이 또 《대전(大典)》을 상고해 보니, 사전(賜田)은 대(代)가 다하면 나라에 환속(還屬)하고 사패(賜牌)는 본인이 죽은 뒤에는 국가에 환속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선왕(先王)의 정법(定法)이니 일일이 가려내어 보태쓰는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고(故) 징사(徵士) 유형원(柳馨遠)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삼대(三代) 이후에 제일 가는 경국책(經國策)이라 하고 간행하여 중외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조께 여쭈어 보겠다."
하였다.
6월 22일 계사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선왕조(先王朝) 때에 고 상신 김석주(金錫胄)가 호포(戶布)를 발의하여 먼저 관서에 시험하여 이해를 관망해 보자고 하였으나, 당시 조정 신하의 갑론 을박과 여염 백성의 놀라고 소요하는 여정(輿情)을 막을 수가 없자 우리 성고(聖考)께서 행하기 어려움을 살피시고 호포 절목(戶布節目)을 신유년118) 12월에 반강(頒降)하셨다가 임술년119) 2월에 정지하셨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께서도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비록 군수(軍需)라 하더라도 까닭없이 백성에게서 취하는 것은 잘못된 법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더라도 호포는 가볍게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또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도 ‘호포는 백성을 놀라게 하고 시끄럽고 원망스럽게 하여 반드시 큰 변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호포도 이러한데 하물며 호전(戶錢)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혼자서 호전의 액수를 계산해 보니 54만여 냥인데, 전에는 민간에서 쌀·베·돈 세 가지 중에서 소원대로 내도록 허가하였어도 오히려 거두기가 어려웠는데 하루아침에 순전히 돈으로 54만 냥을 죽어가는 궁핍한 백성에게 몹시 재촉하면 거두어들임은 급하고 근심과 괴로움은 더하여, 양역의 폐단을 바루려 하다가 도리어 호징(戶徵)의 폐단만 낳게 될 것입니다.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호구를 수괄하여 돈을 재촉함을 신은 그윽이 슬프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하교가 계셨다."
하였다.
지돈녕(知敦寧)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전(戶錢)을 시행할 수 없는 논거(論據)가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모자라는 것이며, 셋째는 전결(田結)의 역(役)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넷째는 사부(士夫)의 마음을 잃는 것입니다. 무엇을 고르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역대로 백성에게 염출하던 제도가 사책(史策)에 소상히 기재되어 있는데, 옛날에 호별(戶別)로 역을 내게 할 때에는 다만 빈부만 따지고 가구수(家口數)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당(唐)나라·송(宋)나라 이래의 9등(九等)의 법도 도성에는 물력(物力)으로, 시골에는 전답으로 셈하여 부유한 자를 상호(上戶)라 칭하고 빈잔(貧殘)한 자는 하호(下戶)라 칭하였으며, 9등의 분등도 빈부의 차이를 참작하여 역을 내는 다소를 정하였을 뿐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대(大)·중(中)·소(小)·잔(殘)의 인구만 헤아려 이름붙인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대호(大戶)·중호(中戶)로 자손은 많지만 지극히 가난한 자가 돈 내는 것은 특히 많고, 소호(小戶)·잔호(殘戶)로 사람은 적은데 매우 부유한 사람이 돈 내는 것은 가장 적으니, 천하에 고르지 못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가히 구전(口錢)이지 호전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구전이라고 할 것 같으면 1구(口)·2구에서 10구, 1백구에 이르기까지 그 차등이 얼마나 되는데 대·중·소·잔의 4, 5등으로 묶을 수 있겠습니까? 호전도 아니고 구전도 아니며 공평하지도 않고 고르지도 못하니, 이것이 시행하지 못할 첫번째입니다.
모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고 상신 김석주(金錫胄)가 호포를 발의한 것이 정사년120) 이었는데, 그때 경외의 경비는 합계 60여만 필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묘년121)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할 때에 이르러서는 2필의 역과 그에 상당하는 쌀을 내는 자가 모두 45만 9천 영이었으니, 필 수로 계산하면 91만 8천 필이 되고 1필을 내는 자까지 합하면 1백만 필이 훨씬 넘었습니다. 지금 양계(兩界)와 양도(兩都)·제주 3읍(濟州三邑)122) 을 제하고 6도(道)의 현 호수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대충 1백만 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호마다 2관(貫)을 재촉해 거둔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낄 터인데, 더구나 분등하여 체감(遞減)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한 대호와 중호는 지극히 적고 거의가 소호와 잔호이지 않습니까? 대충 셈하여 보아도 태반이 부족하니, 이는 행하지 못할 두 번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전결의 역만을 증가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의 민역(民役)은 전결과 호구 둘뿐입니다. 전부(田賦)는 정제(定制)가 있으나 연호(煙戶)의 역은 명목이 지극히 많아 해서와 관동에 있어서는 한 집에서 내는 것이 거의 전부(田賦)보다 많고 경기에 있어서는 치계(雉鷄)·시초(柴草)·빙정(氷丁)123) 외에도 별성(別星)124) 이 있으면 솥과 그릇을 장만한다고 돈을 걷고 전배(前排)를 맞이한다고 하여 돈을 받으며, 상장(喪葬)에는 담지군(擔持軍)125) ·잡색군(雜色軍)이 있어야 한다고 돈을 걷고 묘를 조성할 군과 사초꾼[莎草軍]이 필요하다고 하여 돈을 거두니, 제도(諸道)를 통틀어 말하자면 아무리 가장 헐하다고 한 곳도 1년에 거둔 것이 돈으로 셈하면 호당 4, 50문(文)은 넘습니다. 이제 만일 호전을 시행한다면 옛날에 호별로 내던 역을 모두 일체로 쓸어 없애야 하니 아무리 탐관 오리라도 절대로 거듭 겹쳐 받지는 못할 것이고, 옛날에 쓰던 것으로 지금 폐하지 못할 것들은 연호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자연히 전결로 돌려질 것입니다. 이제는 그대로 한결같이 호전을 시행한다 하고 전결의 역만을 아울러 늘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행하지 못하는 세 번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사대부의 마음을 잃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서울이나 외방의 사서(士庶)는 큰 부자나 녹을 먹는 사람 이외에는 대체로 궁핍한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양반이 가장 많고 또 가장 가난합니다. 사부(士夫)의 공경(公卿) 자손과 향인(鄕人)의 교생(校生) 이상을 통칭 양반이라고 하는데, 그 수효는 거의 모든 백성의 반절이 넘습니다. 조선(朝鮮)의 양반은 한번 공장이나 상인이 되면 당장에 상놈이 되니 공장이나 상인이 될 수 없고 살아갈 길은 단지 농사밖에는 없는데, 만일 몸소 농사를 짓고 아내는 들에 밥 나르기를 농부가 하는 것처럼 하면 한정(閑丁)이나 권농(勸農)의 직첩이 바로 나오니 이 짓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상·농업은 모두 할 수 없어 겉으로는 관복을 입고 혼상(婚喪)에는 양반의 체모를 잃지 않으려하니, 어떻게 가장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서울에서 밖으로 8도에 이르기까지 오두막집이 찌그러지고 쑥대에 파묻혀 눈바람치는 혹한에도 연화(煙火)가 끊긴 곳은 물어보지 않아도 가난한 선비의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녀로 나이 많아도 시집가지 못한 자는 대개 양반의 딸들이니, 세상에서 궁하게 사는 것은 사실 이들과 비교할 만한 데가 없습니다. 양역(良役)을 지는 백성은 비록 극히 애처롭기는 해도 힘써 농사를 짓고 땔감을 져 나르고 해서 그래도 마련할 길이라도 있지만, 만일 이들 양반들에게 돈이나 베를 내라고 하면 한 푼, 한 실오라기인들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그러나 입에는 지게미와 쌀겨도 흡족하지 못하고 몸에는 누더기도 걸치지 못하면서도 평일에는 손바닥을 치며 조정을 논하고 수령을 평판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타고난 습성으로 참으로 가증스럽지만 무엇이든 오래되면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은 성인(聖人)의 훈계에도 나와 있습니다. 우리 나라 풍습은 중국과는 너무 달라 멀리는 신라·고려 때부터 명분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니, 하루아침에 개혁할 수 없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자들은 우리 나라 양반을 옛날의 봉건(封建)126) 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민심을 유지하여 변란이 생기지 못하게 함에 있어서는 국가에 도움이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환자곡에 있어서도 오히려 포탈하고자 하는데 더구나 호전을 서민과 차별도 없이 재촉하여 징수하려 한다면 즐겨 명령에 따라 즉시 내려 하겠습니까? 비록 즉시 납입하고자 하여도 돈을 구할 길이 없고 처자식까지 가두게 되면, 그 원망과 저주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말하기를, ‘나라에서는 차라리 소민(小民)의 마음은 잃을지언정 사부(士夫)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릉(長陵)127) 의 시대에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점이 절대 시행할 수 없는 네 번째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일은 다만 호전(戶錢)의 대체에 대해서만 논한 것이니, 오늘날의 사세에 있어서는 더구나 행하지 못할 일이 또 있습니다. 유사(有司)의 신하가 절목에 의거하여 마련하려고 한 것은 장적(帳籍)입니다. 그러나 장적의 문란함은 여지가 없어 거짓 잔호(殘戶)와 거짓 독호(獨戶) 등, 그 나누고 합치고 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지금 만일 원적(原籍)에 의거하여 돈을 거두려 한다면 이는 양역의 폐단을 전국에 퍼뜨리는 격이 될 것이니, 어찌 가하겠습니까? 호포를 호전으로 바꾸는 일에 있어서는 신은 그윽이 불가한 중에서도 더욱 불가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대(三代)128) 로부터 우리 조정에 이르도록 한 번도 돈으로 백성에게 부과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의 근본을 소중히 여기고 농사를 손상시킴을 경계한 까닭입니다. 군포(軍布)를 돈과 베로 반반씩 받게 된 것은 최근에 나온 일인데, 법 제정의 본의를 한번 잃게 되자 점차 돈을 중하게 여기는 폐단이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전국을 통틀어 호구마다 돈으로 내게 한다면 돈은 어디서 다 나오겠습니까? 상고해 보면 호포의 제도는 일찍이 숙고(肅考)께서 재유(在宥)129) 하실 때에도 강구하고 시행하였으나, 며칠이 못가서 중지되었습니다. 그때는 경신년130) 의 개기(改紀)한 뒤라서 국세가 한창 형통하기가 해가 중천(中天)에 있는 것 같고 조정 신하들의 일 추진이 별이 북극성을 감싼 것과 같아 기강은 족히 변경에까지 미치고 법령은 족히 강포자(强暴者)도 위압할 만하였으나, 먼저 관서 일로에만 시험해 보다가 끝내 행하지 못한 것은 단적으로 백성의 비방이 덩달아 일어나고 이의가 번갈아 아뢰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이 또 추후로 항간의 소문을 들어 보니, 묘당의 뜻은 다분히 결포(結布)에 있으니 호역(戶役)이 앞으로 결역(結役)으로 바꾸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제도에 전분 6등(田分六等)131) 은 땅의 좋고 나쁨으로 나눈 것이고 세액을 9등으로 나눈 것은 절후(節候)까지 아울러 참작한 것이니, 가히 지극히 세밀하다고 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연분(年分)132) 의 법이 폐지되자 전역(田役)이 가장 헐하다고는 하지만 그 지방에서 나는 공물(貢物)도 모두 전답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기 전에도 전결의 역이 이미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토공(土貢)이 대동(大同)으로 바뀌게 된 뒤에는 1결에서 정상적으로 내는 쌀에 가승(加升)133) 을 아울러 계산하니 삼수량(三手糧)이 총 18두가 되나, 소민(小民)이 내는 세는 20두가 아니면 관에 납입할 수 없습니다. 설사 국초의 제도로 말하더라도 하지하(下之下)의 밭에서 상지상(上之上)의 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니, 결포의 수량은 몇 필로 정하였기에 적어도 1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는지를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동법에 쌀을 무명으로 바꾸는 규정은 베는 오승포(五升布) 35자[尺]에 쌀은 호남이 8두, 영남이 7두, 호서가 6두인데, 지금 비록 호서의 예로 말하더라도 전결 20두와 합하면 벌써 26두가 됩니다. 지금 결포를 더 부과하려는 것은 대체로 군포를 대신하려는 까닭인데, 지금 오승포 35자로써 훈련 도감의 포보(砲保)와 여러 군문(軍門) 및 각아문(各衙門)의 쓰이는 비용에 대신 낼 수 있겠습니까? 칠승포(七升布) 40자가 되지 않으면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쌀 6두로써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 사세가 앞으로 2냥의 돈을 재촉해 징수할 모양인데, 그렇다면 중년(中年)134) 의 쌀 10두가 아니면 마련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1결에서 내는 것이 꼭 30두가 됩니다. 백성의 힘이 감당할 만한 지의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왕자(王者)의 정사에서 어찌 차마 이를 행하겠습니까? 논자들은 더러 ‘주(周)나라의 병거(兵車)와 당(唐)나라의 용조(庸調)135) 가 다 밭에서 나왔으니, 지금의 전역(田役)은 고제(古制)에 비하면 그래도 헐한 편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주나라의 백묘(百畝)136) 와 당나라의 영업전(永業田)137) 이 모두 공전(公田)이고 백성의 사유(私有)가 아님을 자못 몰랐던 소치입니다. 그 명의(名義)의 바르지 못함은 호전보다도 지나친 것이었으니, 이 한 대목만 가지고도 그것이 시행하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절목(節目)에 대하여 말해 보렵니다. 6도(道)에서 기경(起耕)하고 있는 전결의 수량은 최근 50년 이래로는 경술년138) 의 75만 결이 가장 많았고, 각종 면세전(免稅田) 12만 결까지 합하면 86만 결이 되었습니다. 매 결에 베 1필씩을 내면 86만 필이 되지만 경외의 경비 1백 만 필보다 부족한 것만도 이미 14만 필이나 됩니다. 더구나 5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큰 풍년을 매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쓸 데는 많고 수입은 적어 맞추지 못하는 것은 호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양역의 군포 2필에서 반을 감하여 1필로 하고 1필의 대신은 전결에 돌리면, 이는 더 부과함이 되지 않는다. 제도(諸道)에서 통용되고 있는 조례에서 만일 1결의 전(田)에서 벼 1백 두나 혹 80두를 호수(戶首)에게 세부(稅賦)나 정공(正供) 제반 잡역을 모두 그 속에 포함시키면 상납미 18두를 제하고서도 남은 잡역가(雜役價)로써 족히 베 1필을 마련할 수 있는데, 잡역을 연호(煙戶)에게 떠맡기게 되니 애당초 농민을 착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지금의 논자들도 다분히 이 논의를 찬성하고 있지만 신의 의혹은 더욱 심해지기만 합니다. 농민이 곡식을 내는 것은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데, 많고 적고를 따지지 않고 넉넉히 호수에게 내주는 것은 다만 불려다니고 매맞고 하는 괴로움을 면해보려는 것입니다. 만일 1필 값을 제하고 호수에게 돌아갈 남은 이익이 없다면 전세(田稅)나 대동미를 자신이 내야 하게 될 형편이고, 이를 모면하고자 하면 또 전의 예대로 하여 더 주어야 할 터이니, 어떻게 농민을 착취함이 아니고 더 부과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잡역가를 연호에게 넘긴다 해도 결포를 내는 데에는 또 어떻게 정채(情債)139) 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조삼 모사(朝三暮四)140) 의 꾀이니, 하민(下民)들에게 베풀 것은 못됩니다. 논자는 말하기를 ‘조종하여 받는 정채는 다시 통렬하게 금하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토공(土貢)이 대동으로 바뀐 것은 정채가 끊이지 않고 방납(防納)에까지 이르게 된 까닭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열성조의 한창 융성했을 때에도 금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 명령 한 번으로 다 혁파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연호에게 잡역을 부과시키는 일은 전에는 없었던 것을 오늘날에야 창시한 것인데, 이제 양역의 군포 1필을 감하기 위하여 온 나라의 결(結)과 호(戶)의 역을 모두 증가시키는 것이니, 그 폐단과 원망의 대소 경중이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송(宋)나라 때의 응역 면제는 일시를 구하는 좋은 법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논자들은 특히 하호(下戶)에게 역전(役錢)을 아울러 내게 하는 것을 들어 백성을 병들게 하는 법이라고 극력 반대하였습니다. 《시경》에 ‘잘 사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지만 외롭고 고단한 사람이 불쌍하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 공물의 폐단이 아주 없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좋은 변통이라고 하였지만, 당시의 식자들은 그래도 측은해 하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각박(刻薄)하게 법을 만들어도 그 폐단이 오히려 탐욕에 치닫는데, 지출을 헤아려 수입을 늘리는 것부터가 선왕(先王)의 법제에 어긋나는 일이니, 만일 이 뒤로 이번 일을 예(例)로 끌어들여 백성에게 더 부과시키려 든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 말이 징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이 두 제도의 행해지지 못할 연유를 힘써 논하는 것은 실로 태괘(泰卦)141) 의 구이(九二)와 전(傳)142) 에 이른바, ‘오래 된 폐단은 없애지도 못하고 새로운 걱정만 생겨났다.’고 한 대목에 깊이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 김양택(金陽澤)이 또 상서하여 양역(良役)의 절목은 새해를 기다려 반포하자고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임금은 균역(均役)에 심력을 경주하고 있었는데,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힘써 찬성하고 홍계희(洪啓禧)가 그 일을 주관하였다. 홍계희가 충청 감사에서 소환된 뒤로는 간하는 사람이 날마다 줄을 이었으나, 다시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6월 24일 을미
임금이 옹주(翁主)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였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이었다.
6월 25일 병신
임집(任)을 사간으로, 채제공(蔡濟恭)을 지평으로, 이유수(李惟秀)를 정언으로, 임석헌(林錫憲)을 수찬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대사성으로, 정여직(鄭汝稷)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6월 27일 무술
이종성(李宗城)을 개성 유수로, 박문수(朴文秀)를 수어사로, 이익정(李益炡)을 도승지로 삼았다.
6월 28일 기해
임금이 친히 선의 왕후(宣懿王后)143) 기신(忌辰)의 제향(祭香)을 전하였다. 국구(國舅)144) 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도록 명하고, 어석윤(魚錫胤)의 품계를 올리게 하였는데, 왕후의 지친이기 때문이었다.
이달에 제도에서 역질로 사망한 자는 3만 3백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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