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임인
권혁(權爀)을 대사헌으로, 윤광찬(尹光纘)을 사간으로, 정광진(鄭光震)·안극효(安克孝)를 장령으로, 이만희(李萬恢)·이사조(李師祚)를 지평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헌납으로, 윤동성(尹東星)·심수(沈鏽)를 정언으로, 임집(任)을 교리로, 정실(鄭實)을 수찬으로, 윤상임(尹尙任)을 부수찬으로, 조운규(趙雲逵)를 겸 필선으로, 김문행(金文行)을 겸 문학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판돈녕으로, 조재호(趙載浩)를 지돈녕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지경연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우빈객으로, 정휘량(鄭翬良)·홍계희(洪啓禧)를 동의금으로,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황재(黃梓)를 부사로, 조운규(趙雲逵)를 서장관으로, 송명흠(宋明欽)을 종부시 주부로 삼았는데, 송명흠은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이다. 일찍이 학문으로 천거되어 자의(諮議)에 제배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을 배수한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양역 절목(良役節目)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돈을 거두는 폐단은 원경하(元景夏)와 이종성(李宗城)의 아뢴바가 옳습니다. 충분히 헤아려서 절대로 1냥이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대사성 조영국(趙榮國)도 말하기를,
"적게 거두자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신 등이 몇 달을 두고 검토해 보아도 일에 지장이 많겠습니다. 또 외간의 여론이 비등하여 혹자는 신 등더러 나라를 그르친다느니 나라를 망친다느니 한다고 합니다. 신 등이 만일 확실한 견해가 있다면 어찌 남의 말로 해서 위축이 되겠습니까마는, 이해(利害)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니 이 점이 답답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수화(水火) 가운데 있기 때문에 기어코 변통하고자 한 것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는 것인데, 여러 신하들의 정성이 부족한 것 같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양역 절목을 가져다 보았다. 절목에는 10개 조목이 있었는데, 첫째, 설청(設廳) 【옛 수어청을 균역청(均役廳)으로 이름을 바꾸어 비축하고 충급(充給)하는 장소로 삼는다.】 둘째, 결미(結米) 【서북 양도 이외의 6도 전결에 대하여 매 결에 쌀 2두 혹은 돈 5전씩을 걷기로 정한다.】 셋째, 여결(餘結) 【관북 이외의 7도에서 보고된 여결의 숫자는 총 2만여 결이 되는데, 경오조(庚午條)부터 본청에 납세하여 양포(良布)의 반절을 감한 수량에 충당한다.】 넷째, 해세(海稅) 【제도의 어염세(魚鹽稅)로 균세사(均稅使) 및 감사에게 분정(分定)한다.】 다섯째, 군관(軍官) 【양민으로 교생(校生)이나 관(官)에 투입한 자를 따로 군관으로 만들어 베를 받아 감축된 베의 수량에 충당한다.】 여섯째, 이획(移劃) 【군포를 감축한 뒤에 선혜청의 저치미(儲置米)와 해서의 상정미(詳定米) 합 1만 석을 잘라 저치하고 본청에 이획하여 감축된 베의 대상으로 보태어 준다.】 일곱째, 감혁(減革) 【군문(軍門)과 제사(諸司)의 구제(舊制)에 약간의 변통을 가하고 외방의 영읍진(營邑鎭)의 각종 명목에 형편대로 재감을 더 하여 감축된 베의 수량에 대신한다.】 여덟째, 급대(給代) 【대신해 줄 수량을 죽 나열하여 기록하고 정식(定式)하여 해마다 예(例)를 살려서 거행하게 한다.】 아홉째, 수용(需用) 【본청의 쌀과 무명은 대신 줄 것 이외에는 조금도 다른 곳에 쓸 수 없기 때문에 낭관(郞官)은 실직(實職)이 있는 사람으로 겸하게 하고 이예(吏隷)도 본료(本料)로 낮추어서 이차(移差)한다.】 열째, 회록(會錄) 【1년 동안 대신 주고 남은 수량은 각도로 하여금 받아 두게 하고 연말에 개록(開錄)하여 본청에 보고하여 흉년에 진휼의 양자(粮資)로 비축한다.】 등이었다.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일이다. 이제는 성책(成冊)이 모두 도착하였고 두서(頭緖)도 잡혔으나, 절목에 대하여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뜻이 서로 다른 바가 없지 않고 나의 뜻이 같지 않은 바가 없지 않다. 아! 이 일에 대하여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지난번 연중(筵中)에서 ‘백성에게 만일 혜택이 있게 된다면, 그 공을 경 등과 함께 나누고, 백성에게 원망이 있게 된다면 그 원망은 나 혼자 듣겠노라.’고 하교한 바가 있다. 아! 이 마음은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다. 백성을 위해서 강구하는 일을 어찌 대충할 수 있겠는가? 내일은 궐문에 임할 것이니, 우리 백료(百僚)와 서사(庶士)는 임금이 더위를 무릅쓰고 문에 임하는 뜻을 본받아 편부(便否)에 상관없이 헌의(獻議)할 사람은 모두 궐문 앞으로 나오너라."
하였다.
7월 3일 계묘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양역의 편부를 묻고 임금이 대소 신료(臣僚)와 사서(士庶) 및 백성들에게 하유하기를,
"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태평하다.’고 성훈(聖訓)에 실려있다. 오늘날에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다고 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백성들이 편하다고 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아! 양민은 지금 도탄(塗炭)에 빠져 있다. 옛날 이윤(伊尹)145) 은 한 사람이라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하면 저자[市]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겼다. 하물며 몇십 만의 백성이 바야흐로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그 임금이 되어 구제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백성의 부모된 도리라 하겠는가? 아! 지금의 이 일은 하나는 열성조(列聖朝)의 뜻을 본받으려는 것이고, 하나는 백성을 중히 여기려는 것이며 하나는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임어(臨御)한 지 30년 동안 익히 이 폐단을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한 것은 어찌 백성을 소홀히 여겨 그랬겠는가? 법을 경장(更張)함에는 반드시 폐단이 따르게 되고 새 법은 또 묵은 법만 못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아! 창백한 얼굴 흰 수염에 나이 또한 늙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또 어느 때를 기다린단 말이며, 후일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열성조를 뵙는단 말인가? 한밤중 생각해 보면 아찔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것이다. 하나는 호포(戶布)요 하나는 결포(結布)요 하나는 유포(遊布)요 하나는 구전(口錢)이다. 그러나 유포와 구전의 불편함은 지난번 궐문에 임하였을 때에 이미 하유하였다. 한편 결포는 간편할 것 같기는 하나 세를 더 부과시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지금에 강구할 것은 호포를 호전(戶錢)으로 바꾸어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호포와 호전이 그 근원은 하나인데 경한 쪽을 택한 것이다. 무슨 법이건 처음에는 좋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삼대(三代)146) 때에 충후(忠厚)와 질실(質實)과 문채(文采)를 가감(加減)한 것도 모두 이런 뜻에서였다. 이제는 계획도 상세하게 검토되었고 두서도 이미 가려졌지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일에 다다라서는 두렵게 여기고 계책을 충분히 검토하여 성취시킨다.’고 하였으니, 두렵게 여긴다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고, 계책을 충분히 검토한다는 것은 중지(衆知)를 모은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삼복(三伏)의 더위를 맞아 또 백성 앞에 나선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아! 하늘이 굽어보고 조상들이 살피고 계시다. 내가 비록 성의가 얕고 덕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이번의 이 마음은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다. 순(舜)임금이 순임금다웠던 것은 두 끝을 절충하여 중간을 취했기 때문이다. 친히 물음에 있어서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아! 우리 경사(卿士)와 군민(軍民)은 각자 소회를 다 말하고 물러가서 허튼 말을 하지 말라. 나의 솔직한 심정을 다하여 하유하노니, 모두 모름지기 다 알지어다."
하였다. 또 유생(儒生)에게 하유하기를,
"너희들은 유생에게 호전을 부과하는 것을 불가하게 여길 것이나 위로 삼공(三公)에서부터 아래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부역은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 너희들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에는 모두가 나의 적자(赤子)인 것이다. 피차간에 어찌 애증(愛憎)이 다를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잠저(潛邸)에 있을 때라면 나도 의당 호전을 내야 하는 것이다. 한 집에서 노비나 주인이 똑같이 호전을 내는 것은 명분을 문란시키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호(戶)가 있으면 역(役)이 있는 것이 상례이다. 또 양민은 오래도록 고역(苦役)에 시달려 왔으니, 기어코 부역을 고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나의 뜻이 아니다. 이미 옛날부터 열성(列聖)의 뜻은 간절하였지만 임금의 뜻을 받드는 신하가 없어서 지금까지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변통하려고 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지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너희는 이해하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병(兵)을 버리고 먹을 것을 버릴지언정 신(信)은 못버린다. 신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미 한 필(疋)을 감하겠노라고 말을 하였는데 어떻게 백성에게 차마 실신(失信)이야 하겠는가?"
하였다. 유생 이봉령(李鳳齡)은 말하기를,
"호포와 결포가 모두 폐단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역질이 요(堯)임금 때의 홍수와 탕(湯)임금 때의 가뭄 같으니 성상께서는 의당 애처로운 마음으로 더 돌보아야 하실텐데, 도리어 온 나라의 백성을 전에 없던 새로운 역(役)으로 바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성상의 뜻은 비록 백골(白骨)의 징포(徵布)를 없애려 하시지마는 앞으로의 폐단은 자못 더 심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규응(李奎應)은 말하기를,
"호전의 폐단은 앞으로 양역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작은 폐단을 고치려다 큰 폐단을 낳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정양원(鄭陽元)은 말하기를,
"호전은 심히 불편합니다.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억제하고 쓸데없는 잡비를 없애며 제번 군관(除番軍官)을 도태하고 은결(隱結)을 찾아내는 것이 변통의 한 대책이 될 것입니다."
하고, 이세희(李世熙)는 말하기를,
"이번의 변통은 부역을 증가시키는 것을 모면하지 못합니다. 옛날 노(魯)나라의 선공(宣公)이 전묘(田畝)에 세를 부과하니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 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요순(堯舜)의 다스림을 본받으시려 하시면서 어떻게 부역을 증가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식한 선비로다. 너는 조금 머물러 기다려라. 내 조용히 다시 묻겠노라."
하였다. 이서(李恕)가 말하기를,
"송(宋)나라의 청묘법(靑苗法)147) 은 천하에 돈을 뿌렸다가 일시에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폭락하고 폭등하였는데, 이번의 호전은 폐단이 청묘법보다 더할 것입니다."
하고, 다른 유생들도 모두 호전은 시행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방민(坊民)에게 들어와서 소회를 아뢰라고 명하였다. 방민들은 호전이 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후배(李厚培)란 자가 나서서 말하기를,
"방민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불평하다가 엄위(嚴威) 아래 나서자 황공하여 편하다고 말하니, 이러한 백성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입술을 삐쭉거린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임금이 백관에게 들어와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보혁(李普赫)이 말하기를,
"호전이나 결포는 모두 시행할 수 없습니다. 어염세(魚鹽稅)와 수령의 사용(私用)으로서 감축한 베의 수량으로 충당하면 됩니다."
하고, 조명채(曹命采)는 말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은 허튼 말 하기를 좋아하니,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조정에서 행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김상적(金尙迪)은 말하기를,
"호전은 행할 수 없으니, 결전(結錢)으로 바꾸어 주소서."
하고, 부제학 조명리(趙明履), 교리 김선행(金善行)·김문행(金文行) 등의 아뢴 바도 모두 같았으나, 유독 사간 윤광찬(尹光纘)만이 내수사를 혁파하고 불필요한 군병이 무위 도식(無爲徒食)함을 없애며 주현의 합병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현을 합친다는 말은 충후(忠厚)하고 신실(信實)하며 관록을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니, 행할 수 없다."
하였다. 다시 이세희(李世熙)에게 물으니, 다만 은결을 찾아내고 제번 군관을 줄이자고만 말하고 별다른 소견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광찬이 내수사의 혁파를 청하였는데, 내가 무엇을 아끼랴마는 난처한 바가 있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소청을 대신(大臣)은 마땅히 시행하자고 청하여야 하겠으나, 이 한 관사(官司)가 없어지면 거기에 소속되었던 사람이 갈 곳이 없어지므로 반드시 다른 구멍을 뚫을 염려가 있으니, 이 점이 민망합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재차 궐문에 임하여 폐단을 바룰 대책을 널리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묘책을 내어 임금의 걱정을 덜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윤광찬만이 내탕(內帑)의 혁파를 청하였다. 내탕이라는 것은 대내(大內)의 사사로운 비용을 맡은 곳이다. 이렇듯 크게 변통할 때를 당하여 과연 이 일을 유사(有司)에게 내맡기면 성덕의 사심 없음을 보일 수 있을 텐데, 대신된 사람이 혁파를 청하지도 못했으면서 도리어 소속된 자들의 돌아갈 곳이 없음을 말하니, 그렇다면 이문성(李文成)148) 이 선묘(宣廟)에게 혁파하기를 청한 것은 과연 오늘날의 대신만 못해서 그랬겠는가? 대신이 이러하니, 어떻게 나라 일을 도모하겠는가? 균역(均役)이란 동쪽에서 쪼개서 서쪽에 보태주는 것인데 근본은 버리고 끝만 취하니 경장(更張)의 이름만 있고 경장의 실속이 없어 돌아서기도 전에 폐단만이 매우 컸으니, 슬픈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73면
【분류】정론(政論)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금융(金融)
[註 145] 이윤(伊尹) : 은(殷)나라의 현상(賢相).[註 146] 삼대(三代) : 하·은·주.[註 147] 청묘법(靑苗法) :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의 한 가지. 싹이 파랄 때에 관(官)에서 돈 1백 문(文)을 대여하고 추수한 뒤에 이자 20문을 붙여 상환(償還)하게 한 것임.[註 148] 이문성(李文成) : 문성은 이이(李珥)의 시호.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재차 궐문에 임하여 폐단을 바룰 대책을 널리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묘책을 내어 임금의 걱정을 덜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윤광찬만이 내탕(內帑)의 혁파를 청하였다. 내탕이라는 것은 대내(大內)의 사사로운 비용을 맡은 곳이다. 이렇듯 크게 변통할 때를 당하여 과연 이 일을 유사(有司)에게 내맡기면 성덕의 사심 없음을 보일 수 있을 텐데, 대신된 사람이 혁파를 청하지도 못했으면서 도리어 소속된 자들의 돌아갈 곳이 없음을 말하니, 그렇다면 이문성(李文成)148) 이 선묘(宣廟)에게 혁파하기를 청한 것은 과연 오늘날의 대신만 못해서 그랬겠는가? 대신이 이러하니, 어떻게 나라 일을 도모하겠는가? 균역(均役)이란 동쪽에서 쪼개서 서쪽에 보태주는 것인데 근본은 버리고 끝만 취하니 경장(更張)의 이름만 있고 경장의 실속이 없어 돌아서기도 전에 폐단만이 매우 컸으니, 슬픈 일이다."
하교하기를,
"정섭(靜攝)중에 재차 궐문에 임한 것이 그 성의는 비록 보잘것없지만 그 뜻만은 백성을 위해서였다. 당초의 뜻은 양민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싶어 대동(大同)의 정사를 행하려던 것이었으나 구애(拘碍)됨으로 인하여 감필(減疋)에 그치고 말았다. 아! 옛날의 성의(聖意)를 받들어 양민을 구제하려 하였는데, 이도 또한 중지하면 이는 백성을 속인 것이다. 어찌 백성뿐이랴? 나의 마음도 속이는 것이다. 창백한 얼굴로 늙은 만년에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으랴? 후일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왕을 뵐 수 있겠는가? 이번 이 일은 나라의 대사(大事)이었다. 당초의 하교를 여러 신하 이하 모두가 수수 방관(袖手傍觀)하였으니,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다. 비변사로 하여금 날마다 본사(本司)에서 회합하고 전심으로 강구하여 어공(御供)에서부터 경외의 긴요치 않은 지출에 이르기까지 민역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함께 자세히 검토하여 만년에 백성을 위하려는 나의 뜻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상서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양역(良役)의 폐단은 하늘에 사무쳤으니, 어찌 소소한 경장(更張)과 추이(推移)로 구제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당초에 신이 양역의 혁파를 제안한 것은 전부를 제감하자는 것이었지 1필만 감하자는 것이 아니었으며, 크게 변통하자는 것이었지 조금만 추이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용관(冗官)149) 을 줄이고 주현(州縣)을 합치며, 진보(鎭堡)를 감하고 불급한 군병을 도태시키며, 그 위에 어염세를 더 증설하여 부족한 양만을 헤아려서 아주 가볍게 호구마다 거두고 2필의 양역은 혁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용관을 줄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관원이 잡다하면 정사만 방대하여집니다. 지금의 각사(各司)로 말하더라도 전혀 맡은 바 직무가 없는 곳이 있으니, 이는 전부를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직사를 나누어 맡은 곳이 있으니, 이것은 합쳐야 하는 것입니다. 인원은 많고 일은 없는 곳이 있으니, 이것은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현을 합친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고을이 적으면 부역은 많아져서 백성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전에도 묘당에 호소하여 고을을 혁파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한 일이 있으니, 그 정상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6도 내에서 작은 고을 5, 60곳을 큰 고을과 합치면 백성의 힘도 풀리고 나라의 비용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유사(有司)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관청을 늘려 관리를 둔 것은 백성을 위하려는 것인데 지금은 호구는 줄어들고 관리가 오히려 많으니, 관리를 감축하고 주현을 줄여라.’ 하였습니다. 이에 모두 4백여 고을을 줄이고 관리도 감축하여 열에 하나만 두었습니다. 이는 한 번 호령함에 불과하였지만 조치의 정당함이 이와 같았으니, 중흥(中興)의 영주(令主)임에 손색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진보를 감하자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진보는 매우 많아서 삼남으로 말하더라도 5리, 10리, 20리에 소소한 진보가 겹겹이 잇대어 있으나 있고 없고가 완급에는 별 상관도 없이 앉아서 호령하고 병졸만 못살게 굴며 제 욕심만 채워 백성에게 폐만 끼치는 것이 모두 그러합니다. 설치한 본의를 생각해 보면 임진년150) 에 병란을 겪은 땅이라 하여 대비하려고 함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적의 출몰은 본래 정해진 형적이 없어 신라와 고려 때에는 왜구의 침략이 관동에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동 9군(郡)에 다만 월송(越松)의 쇠잔한 진보 하나만이 있으니, 대비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 곳에는 듬성듬성하고 한 곳에는 빽빽한 것은 화살을 따라다니며 과녁을 세우는 것과 비숫하지 않겠습니까? 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통영도 이러한데 소소한 진보는 말할 것이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순신 당시에도 이렇듯 허다한 진보가 있어서 힘이 되어 주었습니까? 이제는 그 중 긴요치 않은 진보 4, 50곳을 혁파하고 가장 요해처에 대진(大鎭)을 두어 방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용병을 도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름이겠습니까? 국고를 탕갈시킴은 쓸데없는 군병보다 더함이 없습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군문으로 말하더라도 군영의 이름이 너무 많고 쓸데없는 비용도 심히 많아 식자의 깊은 걱정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금위영의 설치는 다른 영문보다 가장 늦어서 전후로 여러 신하들이 혁파를 청한 것만도 한두 번에 걸쳐 그친 것이 아니므로 공의를 알 수 있겠습니다. 지금 양역에 폐가 생겨 장차 나라가 망하게 되는 데에 이르게 될 판국이니, 군문을 그대로 두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과 군문을 혁파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과는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그러나 오위(五衛)에서 번을 세우던 제도를 지금 갑자기 회복하기도 어렵고, 사직을 보위하고 적을 방어하는 도리를 조금도 늦출 수는 없으니, 오래 된 훈련 도감과 어영청은 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실시한 금위영마저 파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금위영를 파하면 두 군영만이 남는데 서울[輦下]의 친병(親兵)을 온전히 훈련 도감에 소속시키면 그 권한이 무거워지고, 어영청은 평상시에 거느릴 칠색 표하병(七色標下兵)과 오초(五哨)의 향군(鄕軍)뿐이니 그 권한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일국 내에 다만 이 두 군문만이 있게 되어 병권(兵權)을 편파적으로 중하고 경하게 할 수는 없으므로, 훈련 도감의 친병을 반으로 나눠 어영청에 이속시키고 어영청의 향군을 1만 명으로 감하여 그 절반을 훈련 도감에 이속시켜 위세가 고르고 힘이 대등하기를 한(漢)나라남북군(南北軍)151) 의 제도와 같이 한다면 실로 장수도 어거하고 군병도 절제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이 밖에 수군(水軍)으로 말하자면 전선(戰船)은 따로 연해(沿海)에 두고 수군은 산군(山郡)에 흩어져 있으므로 산군의 무명을 거두어다가 토병(土兵)을 대신 세운 값으로 주니, 육번(六番)은 기왕 고용(雇傭)에서 나오는데 번포(番布)는 달마다 진영에 실어 보내지고 있습니다. 또 바다에 일이 없은 지가 1백여 년이 되었으니, 변장(邊將)이 된 자가 한 달에 받은 것을 삭감하지 않고 제대로 대립자(代立者)에게 줄 리가 있겠습니까? 연해의 전선에는 병졸 하나 없이 허다한 번포(番布)는 모두 변장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당초에 조정에서 설치한 의도만은 참으로 좋았지만 이제는 유명 무실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변통하는 때가 아니더라도 의당 빨리 고쳤어야 했는데, 하물며 이렇듯 크게 경장(更張)하는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제는 마땅히 베만 내는 수군은 혁파하여 연해의 각 고을을 전선이 있는 진영에 전속시켜 모두 수군을 만들고 봄가을로 조련을 시켜, 만에 하나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여 아침에 영을 내리면 아침에 모이고 저녁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모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바람이 잔잔한 6개월간만 실시한다고 하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의 이른바 육번(六番)은 병졸 하나의 입번자(立番者)도 없지를 않습니까? 비록 전선이 있는 각 고을로 말하더라도 베를 내는 수군도 없이 다만 조련에 나가는 속오군(束伍軍)만 있으니, 이번에 전속시키면 어찌 전보다는 크게 낫지 않겠습니까? 양역을 혁파하면 각 진영, 각 고을에서 사사로이 모집하던 것도 파하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파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일국의 양정(良丁)이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될 것이므로 양정마다 쌀 몇 말씩을 받아 정미(丁米)라고 이름하면 2필, 1필의 고역은 쌀 몇 말로 내려져서 백성의 힘이 펴질 것이며, 칠반 군보(七般軍保)라는 천한 이름도 바뀌어 정(丁)이 되니, 민심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감축된 것을 말하자면 용관이 줄고, 주현이 합쳐지며, 진보가 감소되고, 금위영이 혁파되며, 수군(水軍)이 폐지되고 양역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얻어지는 것으로 말하면 용관이 줄어지니 소득이 있고, 주현이 합쳐지니 소득이 있으며, 진보가 감소하니 소득이 있고, 금위영이 혁파되니 소득이 있으며, 수군이 혁파되니 소득이 있고, 양역이 없어지니 소득이 있으며, 어염세가 생기니 소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득을 가지고 아주 가볍게 호구마다 고루 부과하는 것이 신의 본뜻이었습니다."
하였다. 박문수는 또 소에서 스스로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조재호(趙載浩)와 조당(朝堂)에서 다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재촉하여 나와서 기다리라고 하였으나 끝내 명에 응하지 않자, 정리(廷吏)152) 에게 내렸다가 이어 폄(貶)하여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삼고 삼남의 어염(魚鹽)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7월 4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필을 감하고 호전(戶錢)을 걷는 것이 마음에 몹시 불쾌하다."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신은 어제 어공(御供)을 줄이겠다는 하교를 듣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1필을 감하고 호전으로 걷게 되니 성상의 마음이 불쾌하심은 당연한 일이나, 신도 구폐(舊弊)를 나누어 신폐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였다.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충신의 장자는 충찬위(忠贊衛)가 되어 병조에 속하고 차자는 충익위(忠翊衛)가 되어 충훈부에 속하여 베를 거둔 것이 50여 동이나 됩니다. 충훈부는 무신년153) 이후로 적몰한 재물이 또한 많으니, 충익위의 베는 덜어내어 군수(軍需)에 보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충익위를 얻어서 다행이고 나는 경을 얻어서 다행이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삼수량(三手糧)은 임진란 이후로 국가에서 삼남에서 빌려 썼으며, 해서의 별수미(別需米)는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있을 때에 그를 접대한 것이고, 관서의 상정미(詳定米)는 선혜청에서 주관하여 칙사 행차의 수요와 공물로 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별수미는 이제는 쓸 곳이 없으니 호조에 보태주고, 상정미는 급대(給代)하는 것에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만 신 등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군제(軍制)에 있어서는 끝내 변통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신만(申晩)이 빈궁(嬪宮)의 산실청(産室廳)을 배설하는 일로 아뢰니, 임금이 택일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은 나라의 근본이다. 만일 원손(元孫)을 얻는다면 얼마나 기쁘겠느냐?"
하고, 동궁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원손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백성이 있어야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임금도 만들고 스승도 만들었다.’고, 이르지 않았느냐? 이것은 백성을 위하여 말을 한 것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임금과 스승이 된 자가 행여나 침요(侵擾)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이니, 두려운 것은 백성이 아니겠느냐? 너는 《맹자(孟子)》를 읽었으니, 거기에 이른바 독부(獨夫)라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夏)나라 뒤에 은(殷)나라가 있고 은(殷)나라 뒤에 주(周)나라가 있었는데, 걸주(桀紂)가 걸주가 된 것은 오로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며 탕무(湯武)가 탕무가 된 것은 오직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탕무에게 사정을 두고 고의로 걸주를 멀리한 것이 아니다. 비록 원손(元孫)과 중자(衆子)가 있다 한들 백성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내가 백성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반드시 민심을 진정시켜 너에게 주려는 것이다. 너는 편안하게 태어나서 편안하게 자랐으나 나는 이처럼 노심 초사(勞心焦思)하고 있으니 장래의 편안을 너는 받을 것이다."
하였다.
7월 5일 을사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양역(良役)에 대한 일 때문이었다.
7월 6일 병오
조명채(曹命采)·윤광소(尹光紹)를 승지로, 이제원(李濟遠)을 대사간으로, 유작(柳綽)을 장령으로, 박필원(朴弼遠)을 지평으로, 정실(鄭實)을 교리로, 김양택(金陽澤)을 부교리로, 윤동도(尹東度)를 겸 사서로 삼았다.
7월 7일 정미
원점과(圓點科)를 설행(設行)하였다. 으뜸을 차지한 진사 변치명(邊致明)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7월 8일 무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왕세자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날로 쇠하니, 주야로 불안스러운 것은 이 일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다. 비록 2필을 다 감한다 해도 어찌 토계 모자(土階茅茨)154) 에 이르겠느냐? 매번 태묘(太廟)에 들어가면 나의 마음은 불안하다. 단청과 포진(鋪陳)이 대내(大內)만 못하니, 이는 자신에게 후하고 선조(先祖)에게 박한 것이다. 비록 2필을 다 그대로 두더라도 후세에 지극히 사치스러우면 이 역시 부족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9일 기유
양역(良役)의 절반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 및 육조 당상, 양사 제신을 불러 두루 양역의 변통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전(口錢)은 한 집안에서 거두는 것이니 주인과 노비의 명분이 문란하며, 결포(結布)는 이미 정해진 세율이 있으니 결코 더 부과하기가 어렵고, 호포(戶布)가 조금 나을 것 같아 1필을 감하고 호전(戶錢)을 걷기로 하였으나 마음은 매우 불쾌하다. 영상은 비록 경하게 걷는 것이 옳다고 하나 절목(節目)을 보면 이 역시 호구를 수괄(搜括)하는 것이다. 백성의 뜻을 알고 싶어서 재차 궐문에 임하였더니, 몇 사람의 유생이 ‘전하께서는 백성을 해친 일이 없는데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을 신은 실로 마음아프게 여깁니다.’라고 말하고, 방민(坊民)들은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불평하고 있다고 말하니, 비록 강구(康衢)155) 에 노닌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군포(軍布)는 나라의 반쪽이 원망하고 호포는 일국이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민심은 진정을 시켜야지 선동을 해서는 안된다. 지금 내가 어탑에 앉지 않는 것은 마음에 겸연(歉然)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경 등은 알겠는가? 호포나 결포나 모두 구애되는 사단은 있기 마련이다. 이제는 1필은 감하는 정사로 온전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1필을 감한 대체를 경 등은 잘 강구하라."
하였다.
제도 감사의 권솔(眷率)156) 의 규례를 2주년을 한정하여 없애고 수어사 겸 남한 유수는 권솔을 1주년을 한정하여 없애라고 명하였다. 부윤은 경력 겸 종사관(經歷兼從事官)으로 고치고, 총융사는 경기 병마 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영원히 양역 1필을 감하기로 한 정사는 지난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던 뜻을 본받아 생민을 도탄 속에서 구해보려고 한 것이다."
하고, 의정부로 하여금 제도에 포유(布諭)하게 하였다.
특별히 장령 유작(柳綽)을 병조 참지로 올렸다. 유작이 해서의 6, 7변장(邊將) 및 혜민서의 혁파와 8도 감사의 권솔을 없애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장령 유작이 지난번에 궐문에 임하였을 때 백성을 위하여 진달한 말이 매우 솔직하더니, 오늘의 입시에서 전후로 아뢰는 말도 모두 대간(臺諫)의 체통을 갖추었다 하겠다.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참지를 제수하라."
하였다.
박문수(朴文秀)를 이미 충주(忠州)로 보직(補職)하고서 입시를 명하고, 박문수에게 말하기를,
"경이 지금 백수(白首)로 조당에서 서로 다툰 것은 둘 다 잘못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조례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미처 새 당상과 상의하여 품정하지 못하였으니, 수년을 두고 기획한 것이 허사가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십 일 더 머물면서 일을 끝내고 사조(辭朝)하는 것이 좋겠다. 경을 충주 목사로 삼고 또 삼남의 어염(魚鹽)을 맡겼는데, 어염의 소득이 대략 얼마나 되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10여 만 냥은 거의 될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목사(牧使)는 하관(下官)이 되고 어염사(魚鹽使)는 별성(別星)이 되니,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주에 도착한 후 다시 처분하겠다. 호조 판서는 누가 했으면 좋겠는가?"
하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조위(曹瑋)가 촉(蜀)의 절도사로 있은 지 7년 만에 왕조(王朝)157) 가 이급(李及)으로 교체시켰는데 이급은 질직하기만 하였지 재주가 없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니, 왕조가 이르기를, ‘조위가 7년이나 경영하여 규모가 이미 잡혀졌는데 만일 재능이 있을 사람으로 교체하면 변경하기가 쉽다. 재주 없고 질직한 사람이라야 그 성규(成規)를 지킬 수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박문수가 호조를 맡아 고치고 변통하여 이미 정제(定制)를 이루어 놓았으니, 마땅히 청렴하고 꼼꼼하고 자세한 사람을 구하여 대신 시켜야만 변경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정형복(鄭亨復)과 김상성(金尙星)을 천거하니, 임금이 두 사람을 가망(加望)158) 하라고 명하였다.
7월 11일 신해
전의감(典醫監)에 청(廳)을 만들어 균역청(均役廳)이라 이름하고, 예조 판서 신만(申晩),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 사직 조영국(趙榮國)·홍계희(洪啓禧)를 당상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대신과 비국 당상을 아울러 소견하고 원경하(元景夏)를 왕세자빈의 산실청(産室廳)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교서관의 겸교리를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겸교리는 명관(名官)의 극선(極選)인데, 이조의 낭관(郞官)을 이미 혁파하였기 때문에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임시로 감축하기를 청한 것이었다.
7월 16일 병진
서종급(徐宗伋)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7월 17일 정사
김상성(金尙星)을 호조 판서로, 어석윤(魚錫胤)을 승지로 권항(權抗)을 장령으로, 윤동도(尹東度)를 헌납으로, 이제암(李齊嵒)을 정언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수찬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수찬으로, 임상로(林象老)를 필선으로 삼았다.
7월 18일 무오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하루 전에 하교하기를,
"어제 저녁에는 꿈속에서 모시고 기쁨을 나누었는데 오늘 저녁에 또 소명(召命)을 받았으니, 낮에 생각했던 바는 밤에 꼭 꿈을 꾼다.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즉일로 능침(陵寢)에 전배하였는데, 부모를 위한 정성(定省)에 어찌 택일을 하랴? 내일은 전배하여야겠다."
하고, 새벽녘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자도 어가를 따라 전배하고 돌아왔다.
헌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19일 기미
임금이 균역청 당상(均役廳堂上)을 소견하였다. 사직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신이 작년에 사조(辭朝)할 때에 양역(良役)의 일로 앙달할 바가 있었으며, 내려간 뒤에 도내의 수령들과 반복하여 상의하고 백성의 여정을 수렴하여 상소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올라올 때에도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이번에 조정으로 돌아가면 우리들을 살릴 길을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하기에, 신이 성상께서 특별히 한 필씩을 감해 주라고 선유(宣諭)하셨다고 답하니, 모두가 이 뒤로는 살 수 있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옥서(玉署)159) 에 있을 때에 선정신 이이(李珥)의 말을 인용하여 군액을 감하고 용관(冗官)을 줄여야 한다는 등의 말로 앙달한 바 있었고, 작년에 책자를 올릴 때에도 이러한 말로 아뢴 바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용관을 감축하면 내외의 관직에 자리가 좁아져서 벼슬할 사람을 다 구분하여 처리하지 못한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관직(官職)을 만들어 나누어 갖는 것은 장차 일을 다스리자는 것이지 사람을 먹여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선정의 이 논의도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관원 한 사람 먹는 것이면 수십 명의 군졸을 먹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이조 판서에게 하유하였으니, 이것은 옛 체제를 그대로 둔다[存羊之義]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언 심수(沈鏽)가 상서하여 먼저 균역의 시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이 일전에 홀기(笏記)를 여러 비국 당상들에게는 알려 주지도 않았다 합니다. 대신의 뜻은 비록 여러 갈래의 허튼 말을 막고 독자적으로 처단하시려는 성상의 뜻에 찬동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겠지마는 일이란 널리 묻는 것이 좋은 것인데, 대신이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음이 애석합니다."
하고, 다시 밖에 있는 노성한 신하와 산림에서 글을 읽는 선비에게 널리 물을 것을 청하였으며, 말단에 논하기를,
"전 감사 엄우(嚴瑀)는 특별히 별천(別薦)으로 인하여 외람되이 지방의 중임(重任)을 제수받아 오로지 이익을 일삼으니, 사민(士民)들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는 청백한 가문의 자손으로 반생을 가난속에서 지내다가 한 번 부요한 지방을 맡게 되자 전에 살던 오막살이가 천금 갑제(千金甲第)로 변하였으니, 벼슬자리에서 정사가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쯤은 특히 그 필요치 않은 일에 불과합니다. 청컨대 우선 삭판(削版)의 율을 시행하소서. 박창윤(朴昌潤)은 좀스럽고 지극히 용렬한데도 과람하게 납언(納言)에 의망되었고, 이택징(李澤徵)은 간사스럽고 비루한데도 또한 미원(薇垣)160) 에 발탁되었으니, 여론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아울러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되돌려 주라고 하령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포(身布)를 감하라는 명을 내린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심수가 뒤늦게 소장을 올렸으나 끝말이 모호하니 특별히 그의 직을 체차하고, 엄우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7월 20일 경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7월 22일 임술
하교하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폄보(貶補)하여 사체(事體)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어염(魚鹽)에 관한 일을 생소한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충주 목사 박문수(朴文秀)를 체차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직무를 맡겨 바로 삼남에 내려가서 어염의 편부(便否)를 살피고 오게 하라."
하였다.
7월 23일 계해
판돈녕 이기진(李箕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는 고르지 못하여 경한 자는 너무나 경하고 중한 자는 지나치게 중합니다. 지금 만일 국내의 제반 신역을 다 받기로 한다면 경외의 어떤 아문의 소속임을 막론하고 베와 쌀, 돈을 내는 자는 모두 한결같이 고르게 정하여 그가 내는 것이 후하고 박함이 없게 하여 편중된 고역을 치르는 원망이 없게 하고 교묘하게 기피하는 길을 잘라버리면, 양정(良丁)은 저절로 도망치고 숨는 일이 없어질 것이므로 양정을 뽑아서 보충하기에 여유가 생기고 혜택도 널리 미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검소함을 숭상하시는 덕은 지극하십니다마는, 국가의 경상 비용이 조종조에 비하면 배로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정 절용하고 싶으시면, 반드시 먼저 외신(外臣)은 알 수도 없고 조정의 의논도 미칠 수 없는 궁중의 깊고 엄한 곳에서부터 크게 삭감하여야 합니다. 안으로는 궁첩(宮妾)에서 밖으로는 군례(軍隷)에 이르기까지 1백 수십 년 이래로 명목을 증설하여 국고만 소모하는 것을 일체 삭감하고 백사(百司)의 공역(供役) 총수(總數)를 조종조의 구전(舊典)과 똑같이 한 뒤에 경외의 대소 여러 신료들에게 전래해 온 사치의 풍조를 따르지 말도록 엄칙하면, 누가 감히 성상의 교화를 받들어 모두 검소한 데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재정은 저절로 위에 풍부해지고 혜택은 자연히 아래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조(大朝)께 여쭈어 보겠다고 답하였다.
전 정언 심수(沈鏽)가 상서하여, 엄우(嚴瑀)가 공사(供辭)에서 속이고 숨기고 있음을 논하고 사핵하여 단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글을 보고 하교하기를,
"심수는 마음이 비록 바르지는 못하나, 엄우에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추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정언으로, 정실(鄭實)을 겸 필선으로, 유엄(柳儼)을 공조 판서로, 이성중(李成中)을 동의금으로, 윤급(尹汲)을 동경연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참판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부응교로 삼았다.
7월 25일 을축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저하께서는 《시전(詩傳)》의 강(講)을 마치고 이어 《서전(書傳)》을 강하시는데, 《시전》은 여항(閭巷)의 가요여서 징계하고 감발케 하는 것에 불과하지마는 《서전》은 요순(堯舜)이 천하를 다스리던 대경 대법(大經大法)으로 그 근본은 정일(精一)에 있습니다. 또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며 문장이 밖으로 빛나고 생각이 깊으며, 진실로 공손하고 잘 사양한다.[欽明文思 允恭克謙]’는 여덟 자로써 머리말에 실렸으니, 치법(治法)과 규모가 모두 마음의 공부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하고,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요전(堯典)에서는 맨 먼저 천시(天時)를 말하고 중간에는 민사(民事)를 말하였으며 끝으로는 치란(治亂)을 말하였으니, 제왕이 정사를 행하는 큰 강령이 오직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요순은 인재를 얻어 씀으로써 팔짱만 끼고 있어도 다스려졌으니, 이것은 모두 심학(心學)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간사함을 잘 분별하여 쓰고 버리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였다.
간원 【사간 윤광찬(尹光纘)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제주(濟州)에 안치된 죄인 이증(李增)161) 이 지은 죄가 지극히 무거우나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실로 대조(大朝)의 지극히 어진 성덕 때문인데도 권속(眷屬)을 끌어들인 것부터가 지극히 방자한 일입니다. 그런데 본 목사의 장계로 보면 관청을 책임 추궁하고 백성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다 합니다. 이런 일을 통렬하게 금하지 아니하면 무엇으로 법이 있다는 것을 멀리 떨어진 섬 중에 보이겠습니까? 청컨대 증에게 엄중히 천극(栫棘)162) 을 더하소서. 시수 죄인(時囚罪人) 이당(李爣)163) 은 증의 지친으로서 제멋대로 바다를 건너가서 섬 중에서 행패를 부리니,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 【지평 이사증(李師曾)이다.】 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고 또 이증과 이당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옥당(玉堂)과 승지가 대간의 주청에 따르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6일 병인
판부사 민응수(閔應洙)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근칙(勤飭)하고 자량(慈諒)하여 항상 의지하고 맡겨 왔는데, 이러한 기별이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매우 슬프다. 관재(棺材)를 가려서 보내고 월름(月廩)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주라."
하였다. 민응수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고 등과 후에는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붕당을 타파하고 조정(調停)을 하고자 하였는데 민응수가 지론(持論)을 평이하게 하여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과 서로 맞부딪힘이 없자 임금이 드디어 현저하게 탁용하여 병조와 이조를 맡은 지 오래지 않아 의정에 올랐다. 마침 그때 삼사에서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의 추탈(追奪)을 논하자 임금이 진노하여 모두를 내치니 민응수가 전상(殿上)에 올라가 힘써 만류하다가 뜻을 거슬러 사면(辭免)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한 것이었다.
임금이 장차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친히 기사(騎士)를 시재(試才)하려 하자, 정원에서 아뢰기를,
"오늘 친림(親臨)하여 시재하려 하심은 성상께서 군민(軍民)을 중히 여기시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속거(屬車)가 곧 출발하려 할 때 대신의 상을 새로 당하였는데, 이럴 때에 거둥하심은 지장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중지하라고 답하였다.
7월 28일 무진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친히 기사의 시재(試才)를 행하고 옹주의 사제(私第)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당초에 해서(海西) 기사의 노비[資費]가 외람되게 많이 들어 살림을 파산하고도 부족하니, 왕왕 목을 매어 자살하는 일까지 생겼다. 관찰사 정형복(鄭亨復)이 장계를 올려 그 폐단을 힘써 진달하고 향기사(鄕騎士)는 감영·병영에 분속시키며 서울 출신을 가려서 충정하여 후한 요(料)를 주어 대신 번을 세우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임금이 친림하여 취재(取才)하고 어영청과 금위영에 명하여 각각 1백 50명씩 충정하게 하여 3번으로 돌려가며 서게 하되 양반과 중인·서인, 경외의 업무(業武)를 막론하고 모두 응시하게 하였으며, 도정(都政)마다 두 군영에서 각 1인씩을 초사(初仕)에 승부(陞付)하게 하였다.
환궁할 때에 공조 판서 유엄(柳儼)이 별초마(別抄馬)에게 짓밟혀서 머리가 깨지고 기절하였다. 승지 이익정(李益炡)이 그 일을 아뢰고 별초마를 놓친 죄를 무겁게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병조 판서와 육승지(六承旨)164) 가 힘써 간하기를,
"군중(軍中)에서 말을 놓친 것은 율문(律文)에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추고를 명하였다가 이윽고 탕척(蕩滌)을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말이 길들여지지 않은 것은 군중에서도 꺼리는 바다. 더구나 중신(重臣)이 군마에게 짓밟혀 크게 다쳤는데도 말의 주인을 죄주지 않은 것은 다만 조정에 등위(等威)가 엄하지 못한 풍조가 번질 뿐 아니라 교만하고 사나운 병졸의 발호(跋扈)를 끝내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임금의 처분이 이런 점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76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164] 육승지(六承旨) : 승정원(承政院)의 육방(六房)에 딸린 여섯 승지. 곧 도승지(都承旨)·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임. 육방 승지(六房承旨).
사신(史臣)은 말한다. "말이 길들여지지 않은 것은 군중에서도 꺼리는 바다. 더구나 중신(重臣)이 군마에게 짓밟혀 크게 다쳤는데도 말의 주인을 죄주지 않은 것은 다만 조정에 등위(等威)가 엄하지 못한 풍조가 번질 뿐 아니라 교만하고 사나운 병졸의 발호(跋扈)를 끝내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임금의 처분이 이런 점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다."
7월 30일 경오
헌부에서 전달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달에 제도에서 역질로 사망한 자는 2만 2천 2백 6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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