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2권, 영조 26년 1750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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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계유

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4일 갑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한권인(翰圈人)을 불러 시험해 박정원(朴正源)을 뽑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어류초(語類抄)》를 강하였다. 교리 임석헌(林錫憲)이 글의 뜻으로 인해 아뢰기를,
"모든 일의 잗단 곳을 반드시 자세히 살피려고 한다면 더욱 번거롭게 되어 일에 불리하니, 오직 대체(大體)만을 지니고 잗단 일은 줄여야 합니다."
하니, 승지 어석윤(魚錫胤)이 말하기를,
"비록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잗단 절목(節目)은 넉넉하지만 대체가 부족하니, 중요한 도리는 대강(大綱)을 헤아리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임석헌이 말하기를,
"생각건대, 이 《어류(語類)》는 누에 실이나 쇠털과 다름이 없어서 실로 이해하기가 어려워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진강(進講)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 글은 이따금 펴 보시고, 긴요한 책으로써 자주 신들을 접견하여 강토(講討)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전에 《절요(節要)》165)  와 《작해(酌解)》166)  를 나에게 권하였고, 지난번 김문행(金文行)과 김선행(金善行)이 차자로 청하였으니, 임석헌이 아뢴 바가 옳다. 이후에는 《절작통편(節酌通編)》167)  을 진강하라."
하였다.

 

8월 5일 을해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이수관(李壽觀)을 헌납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수찬으로, 서지수(徐志修)를 겸보덕(兼輔德)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겸사서(兼司書)로, 김약로(金若魯)를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로, 정익하(鄭益河)를 병조 참판으로, 이성중(李成中)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혜청 당상(惠廳堂上) 및 균세사(均稅使)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혜청 당상 원경하(元景夏)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균세사란 호칭이 어떠한가?"
하니, 원경하가 대답하기를,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물으실 때 균역사(均役使)로 호칭을 정하라고 앙달하였는데, 지금의 균세사란 호칭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세사 이후(李)가 연석(筵席)에 처음으로 등대하였으니, 그의 소견을 듣고자 한다."
하니, 이후가 대답하기를,
"이는 성상께서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신이 전후의 연석에서 여러 차례 성교(聖敎)를 받들었습니다. 이제 이 균세사란 호칭이 실로 성덕(聖德)을 빛나게 할 것이며, 만약 어염사(魚鹽使)라 부른다면 사책(史冊)에 쓰기가 매우 좋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비록 사기(史記)에 쓰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어염(魚鹽)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오늘 신들을 명하여 보내는 것은 오로지 해민(海民)을 구제해 주려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인데, 바닷가의 어리석은 백성들과 초야(草野)의 오활한 선비들이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모르고 반드시 거짓말로 인심을 선동해 당송(唐宋) 시대의 염철사(鹽鐵使)에 비교해 말하면 소란스러울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신들이 내려가면 마땅히 먼저 덕의(德意)를 선포해 해민(海民)을 위하여 폐해를 없애려는 뜻이요 세(稅)를 거두려는 정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좋다."
하였다. 균세사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해민들이 반드시 신들에게 세금을 각박하게 거두러 왔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均)’ 자는 바로 ‘경(輕)’ 자의 뜻이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세를 가볍게 하라는 전교(傳敎)는 이른바 ‘법을 가볍게 해야 천명(天命)을 맞이해 이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연명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성상의 밝은 명(命)을 받들어 양역(良役)의 절목 및 별단(別單)을 구별 조치해 베껴서 바쳐 삼가 을람(乙覽)168)  에 대비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양역이 편중됨이 실로 양민의 뼈를 깎아 지탱하지 못하는 폐단이 됩니다. 우리 성상께서 불쌍하게 여기시어 마음속으로 결단하시어 2필(疋)의 역을 특별히 1필로 감하였으니, 이는 천지와 같은 큰 은덕이요, 죽은 사람을 살려 주는 은혜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산동(山東)의 부로(父老)들이 성대한 덕화(德化) 보기를 생각하였는데, 이제 우리 나라 백성들이 도탄에서 벗어나 몸소 은택으로 적셔 주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고금에 비교해 보면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겠습니까? 이 법이 행해져 오래도록 폐단이 없다면 백성들에게 만세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포(布)를 감했으니 마땅히 그 대신을 보충해야 하는데, 일국(一國)의 재곡(財穀)의 근원은 한정이 있고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은 매우 많아서, 옮겨서 조치하는 즈음에 끌어 보태고 모아야 함을 면치 못할 것이, 비록 그 사세가 그러하나 일정한 규칙으로 여겨서 원도(遠圖)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한데, 더군다나 아직도 부족함이 없지 않음이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눈앞의 한때 일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깊이 강구해 반드시 오래도록 이어지게 하겠습니다. 대개 어염세(魚鹽稅)가 한 문(門)에서 나오면 해민이 어깨를 쉴 수 있고, 묵은 전답을 개간하면 백징(白徵)의 억울함이 없게 되며, 누락된 결(結)을 찾아내면 호조의 상부(常賦)가 여유가 있게 되며, 정역(丁役)이 고르면 백성들에게 이쪽은 괴롭고 저쪽은 가벼움에 다름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된 뒤라야 거의 근기(根基)가 서게 되고 은혜로운 교화가 행해지게 되는데, 그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신들의 지혜로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니요, 또 어찌 감히 기필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논하면 오늘날 먼저 필요한 절목을 대략 만든 것은 기뻐할 것이 못되며 아직도 일이 바로 군신 상하가 걱정하고 생각해 강구(講究)·경획(經劃)하는 데 달려 있어서 감히 겨를이 없어야 할 날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보건대, 어제의 전교 가운데 ‘원만하게 마쳤다.’라는 등의 하교는 신들은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비록 요순(堯舜)의 다스림에서도 일찍이 ‘내 다스림이 이미 족하다.’라고 하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오늘날은 정포(丁布)를 비록 감하였지만 중외의 재곡(財穀)을 찾아 모아 거의 다하게 되어, 만일 불행하게 수 천리 지방에 홍수나 가뭄이 들거나 변방에 경급(警急)이 있게 되면 나라 일이 장차 어느 곳에서 쉬게 될지 모릅니다. 신들의 생각이 이에 이르러 밤중에도 한심하니,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혹시라도 자만하지 마시고 더욱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8월 8일 무인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헌부에서 【장령 안극효(安克孝)이다.】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 대소(臺疏) 가운데 ‘일명관(一名官)169)  이 해서(海西)의 수령이 되어 영문(營門)의 체면이 손상되었다.’는 일을 논열(論列)하였습니다. 그후 대신(臺臣)이 ‘지금의 호조 참의 정이검(鄭履儉)이다.’라고 지명해 말하였는데도 못들은 척하고 아무렇지 않게 공무를 보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전 지평 정언상(鄭彦祥)은 목불식정(目不識丁)인데 외람되이 대선(臺選)에 통하여 양사의 예속(隷屬)을 오래 기다리도록 독령(督令)해 하례들이 지탱하지 못해 원성이 자자하니, 청컨대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지워버리소서. 전 목사 이협(李埉)은 맛이 좋은 음식으로 날마다 명관(名官)을 맞이하고 부봉 별록(副封別錄)170)  을 밤에 권문(權門)에 보냈으며, 다섯 번이나 크고 기름진 고을을 맡아 널리 전장(田庄)을 차지하였으니, 청컨대 영원히 사적에서 지워버리소서. 서흥 현감(瑞興縣監) 박대원(朴大源)은 아전들이 조곡(糶穀)을 농락하고 백성들의 첩소(牒訴)가 지체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8월 9일 기묘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10일 경진

도정(都政)171)  을 행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동의금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장령으로, 신위(申暐)를 응교로, 이양천(李亮天)을 정언으로, 정옥(鄭玉)을 지평으로, 정실(鄭實)을 보덕으로, 윤구연(尹九淵)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와 병조 판서 이천보(李天輔)의 정사였다.

 

8월 11일 신사

임금이 균역(均役) 제당(諸堂)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미곡은 땅에서 나오고 베는 백성들에게서 나옵니다. 베를 감한 대신에 이 두 가지 가운데서 구한 뒤라야 거의 실효가 있게 됩니다. 신의 홀기(笏記) 가운데 진전(陳田) 등의 일은 바야흐로 봉행(奉行)하고 있으나, 좌상(左相)이 청한 바 제번 군관(除番軍官)의 일은 명백한 성명(成命)이 없습니다."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어염(魚鹽)·진전(陳田)·은결(隱結)은 땅에서 취(取)하는 것이요, 군관은 사람에게서 취하는 것이어서, 이를 버리면 실로 계책이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신들이 차자(箚子)로 진달한 네 가지 일 가운데 어염·진전·은결 세 조목은 시비가 없는 듯한데, 유독 군관에 대해서는 의논이 한결같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균역(均役)에 이르러서는 근본 바탕이 오로지 은결과 군관의 일에 달려 있으나 군관이 가장 긴요하니, 성상께서 반드시 성의(聖意)를 굳게 정하시어 혹시라도 뜬 의논에 흔들리지 않은 뒤라야 신들이 성상의 결단에 의지해 손을 써서 계획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가지 일 가운데 끝의 두 가지 일은 균역의 근본이 되며, 군관의 긴요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참으로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비록 뜬 의논이 있더라도 굳게 지키겠다."
하고, 네 조항을 전벽(殿壁)에 써 붙이도록 명하였다.

 

지돈녕 조재호(趙載浩)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천성이 성급하고 막혀서 거슬리는 일을 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양역(良役)의 일을 주관하는 중신(重臣)에게 중한 죄를 얻어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과 중신은 언의(言議)와 취미가 본래부터 같지 않았으니, 한때 일을 의논함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가 있는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연인(連姻)한 까닭에 동맹(同盟)의 의(義)가 있어서 중신이 매양 신에게 말하기를, ‘말과 의논이 비록 다르더라도 서로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라 하여 신 역시 그 말을 옳게 여겨 피차의 정분이 후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갑자기 중신의 비난을 좁은 길에서 만나, 맑은 하늘에서 벼락과 우박이 갑자기 치는 것과 같아 미처 피하지를 못하여 사단이 엇갈려 생기니, 매우 불행합니다. 아! 신의 구구한 행실이지만 조금은 법도가 있어 굶주리고 배부른 것과 춥고 더운 것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하였는데, 이제 중신이 까닭없이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반드시 거취를 함께 할 것은 없으나, 신은 그윽이 스스로 몸을 어루만지며 탄식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은 본디 둔하고 어리석어 외람되이 큰 은혜를 입어, 손을 써서 임금을 섬기는 데 스스로 방도가 있어 선신(先臣)의 지업(志業)을 잇고 조금이나마 성조(聖朝)의 은우(恩遇)에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회고하건대, 수년 이래로 여러 가지 기괴한 일이 좌우에서 엇갈려 나오고 당모(黨謀)가 날로 뒤바뀌어 놀라운 일이 교묘히 펼쳐져서 때때로 제멋대로 횡행해서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범하고172)  ,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해 이른바 탕평(蕩平)이 거의 다 무너져 다시는 본래의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세로 미루어서 이치상 구차스레 남의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조만간 물러갈 뜻을 대조(大朝)께 앙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작년 봄 대리(代理)하는 처음에 분의(分義)를 펴 억지로 성교(聖敎)를 받들어 우선은 힘을 써 분주히 노력함을 본받고자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채 대열(隊列)을 따르며, 청탁(淸濁)이 뒤섞인 가운데서 부침(浮沈)하고, 음양이 뒤섞인 길에서 부앙(俯仰)한 것 역시 오래 되었습니다. 이번에 대조께서 민폐를 근심하시어 양역(良役)을 강구하는 날을 당해서 지식과 생각이 모자라고 또 재주와 꾀가 없어서, 처음에는 한 마디도 진달하지 못하였고, 끝에 가서도 보탬이 될 만한 계책 하나도 앙달하지 못하고, 한갓 당당한 조정에 일만 일으켜 한 세상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의 죄이며 운명이 다함을 볼 수 있으므로, 마땅히 일찌감치 전리(田里)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조재호가 박문수(朴文秀)와 서로 공좌(公座)에서 다투어 패악한 말까지 했기 때문에 그 글이 이와 같았다.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는데, 나중에 임금이 명하기를,
"일기(日記)에 기록하지 말고 내려 보내라."
하였다.

 

8월 15일 을유

왕세자빈에게 아픈 곳이 있자 임금이 명하기를,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는 본원(本院)에 직숙(直宿)하라."
하였다.

 

지평        박필원(朴弼遠)이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서 부름을 받고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에 합몰(合沒)한 호(戶)의 환곡(還穀)을 견감하라는 명은 본디 대조(大朝)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돌보는 지극한 뜻에서였습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조세를 감한 것이나 당나라 태종(太宗)이 세금을 감한 것이 어찌 이보다 낫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신유년173)                  ·임술년174)                   두 해 동안 북로(北路)의 흉황(凶荒)과 여역(癘疫)이 금년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에도 나라에서 역시 합몰한 호의 환곡을 감하라고 명하였는데, 영문(營門)에서 말하기를, ‘어린애가 아직은 있다.’라고 하여 모조리 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아들일 곳이 없어 매양 환곡을 받아들일 때면 인리(隣里)에서 두루 징수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 대조께 아뢰어 즉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부(帳簿)를 자세히 조사하여 신유년·임술년의 합몰한 호의 환곡을 한결같이 금년의 예에 의해 영원히 탕감하게 하소서. 북관(北關)은 우리 성조(聖祖)께서 용흥(龍興)하신 땅이니, 바로 한나라의 풍패(豊沛)175)                  나 당나라의 진양(晉陽)176)                  과 같습니다. 본도가 영외(嶺外)에 치우쳐 있어 호지(胡地)와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인심이 거칠고 풍속이 사나워서 만약 별도로 무휼(撫恤)하지 않는다면, 그곳 힘을 얻고 그들 마음을 묶을 수가 없습니다. 인재(人才)로 말하자면 선비에는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문예(文藝)에 능한 자가 있고, 무인(武人) 가운데는 기사(騎射)를 잘하고 도략(韜略)177)                  에 통한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한 고을에 있으면 한 고을의 영수(領袖)가 되고, 한 도(道)에 있으면 한 도의 뛰어난 인물이 되니, 나라에서 격려하는 방도로는 마땅히 이들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이미 통적(通籍)한 자를 조정에서 각별히 조용(調用)하고, 발신(拔身)하지 못한 자는 즉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사시(四時)마다 기예(技藝)를 시험해 후한 상을 주고, 그 가운데서 풍부한 재능으로 무리에 뛰어난 자는 실제대로 계문하게 해 재능에 따라 탁용(擢用)하여 한 도의 바람에 부응하는 방도를 삼아야 합니다. 또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방수(防戍)가 허술할 염려가 있습니다. 봉수(烽燧)로 말하자면, 나라에서 봉수대를 설치하여 후졸(候卒)을 후히 복(復)178)                  한 것은 급한 경보(警報)를 하게 한 까닭인데, 북로는 그렇지가 못하여 구름이 끼어 어둡다고 일컬으며 혹 하루가 이르지 않거나 혹은 이틀 동안이나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변방의 소식을 전하는 방도는 오로지 봉화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처럼 조심하지 않는다면 비록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두만강(豆滿江) 이남에 가득하더라도 조정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본도의 수신에게 마땅한 경책(警責)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끝에서 고산 찰방(高山察訪)을 가려 차출하여 불법을 규찰하도록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6일 병술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20일 경인

임금이 의릉(懿陵)에 거둥하였는데, 돌곶이 고개[石串峙]를 지나갈 때 한 어린아이가 길가에서 호소하여 금오(金吾)가 붙잡았다. 임금이 승지 조명채(曹命采)에게 유시하기를,
"그의 근파(根派)를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어가(御駕)가 능 아래에 이르자, 조명채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자세히 물었더니, 말하기를,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7대손으로 본디 금천(金川)에 살았는데 걸식을 하며 양천(陽川) 땅에 이르러 부모가 모두 죽어 초빈(草殯)만 하고 장사하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길가의 한 어린아이가 금지(金枝)의 후예라 하는데, 이는 바로 사민(四民) 가운데서 고(告)할 곳이 없는 사람이다. 양천 현감(陽川縣監)은 지난번 신칙한 후에 잘 받들어 거행하지 못해 현 안의 고할 곳이 없는 아이로 하여금 관(官)에 호소하지 못하게 하여 길가에서 슬피 울부짖게 했으니, 단속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해당 도신(道臣)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며, 그 고아는 해청에서 식물(食物)을 넉넉히 제급(題給)할 것이며, 그 부모 역시 본현으로 하여금 돌보아 묻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돌아오면서 관왕묘(關王廟)를 거쳐 왔다. 승지 조명채가 말하기를,
"신이 통신사(通信使)로 돌아올 때 성주(星州)를 거쳤는데, 성주에도 관왕묘가 있었으나 소상(塑像)과 사당(祠堂)이 모두 매우 헐어서 보기에 매우 민망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도신에게 분부하여 즉시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1일 신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홍록(弘錄)179)  을 즉시 거행하지 않은 것으로써 전교하기를,
"한림(翰林) 천거의 권점(圈點)과 소과(小科)의 신칙은, 이는 호대(互對)를 신칙하는 것이며 서로 이기기를 힘쓴 것을 신칙한 것인데, 이번에 다투는 것은 반드시 호대를 말미암아서 그런 것이다. 아! 홍록은 단지 그 사람만 뽑으면 되고 상대방은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억지로 호대하려 하니, 이는 남잡한 일이다. 호대하고자 하면 이는 억지로 줄이는 것이니, 인재를 빠뜨리는 것이다. 아! 과거(科擧)를 설치해 사람을 뽑으면서 이미 호대를 하지 않고 뽑는데, 홍록만은 어찌 서로 동등하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홍록은 유신의 손바닥 안에 든 일이 아니요 바로 나라의 공록(公錄)이니, 신칙한 후에 공당(公堂)에 거처하면서 공록을 만들어야지 어찌 감히 그 사(私)에 맡기랴? 오늘 안으로 거행하라."
하였다.

 

관록(館錄)을 행하여 권기언(權基彦) 등 17인을 뽑았다.

 

8월 22일 임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번 신록(新錄)은 잘 만들어졌습니다. ‘호대(互對)’란 두 글자는 신이 신의 형에게서 전해 받아 이로써 전하를 섬겨 왔으니, 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이제 전하께서 그르다고 하시니, 신은 묘천(廟薦)도 감히 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승지를 혹 순전히 한편 사람만 쓸 때도 있었는데, 이것도 잘못인가? 묘천으로 말하자면 단지 세 자리뿐인데 장차 어떻게 호대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말이 지나칩니다."
하고,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옳습니다. 인재의 우열을 논하지 않고 단지 사람 숫자만 서로 다투면, 피차가 모두 잘못되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문재(宋文載)에게 권점을 찍은 일 역시 서로 이기기를 힘써서 그런 것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은 권점의 일을 논한 것이 아니라, 대체(大體)를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하우씨(夏禹氏)의 저울을 얻어 비국(備局)에 매달아 놓고 헤아려야 하며 이밖에는 계책이 없다."
하니, 좌참찬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호대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고, 김약로는 말하기를,
"만약 참으로 호대로 한다면 이는 끝내 편벽된 논의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정우량은 말하기를,
"이는 대개 물러나 지키는 부득이한 논의입니다. 각기 인재에 따라 임용하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만, 공(公)을 빙자하여 사(私)를 영위하는 폐단이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갑(甲)은 이 인재가 쓸 만하다고 말하고, 을(乙)은 저 인재가 쓸 만하다고 말하면 장차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공심(公心)으로만 하면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호조 판서의 망(望)에 반드시 두 사람을 의망(擬望)하여 넣으려는 것 역시 호대의 뜻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은 이 두 글자가 아니면 임금 섬기는 도리를 잃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均)’ 자가 좋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균’ 자 역시 호대와 같습니다. 신은 이 두 글자로 30년 동안 임금을 섬겨 왔는데, 이제 어찌 중도에서 길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제학(提學)이 되었는데, 신이 만약 도당록(都堂錄)180)  을 하게 되면 호대로 하면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당록은 호대로 해서는 안된다. 이는 약재(藥材)가 적지만 중요한 것이 있고 많지만 가벼운 것이 있음과 같으니, 어찌 같게 하겠는가? 내가 처음에는 호대로 하여 서로 만나 예(禮)를 하게 하였으나, 피차가 다 온 후에는 단지 인재만 임용하면 마땅하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인사(人事)가 더욱 잘되기를 기다린 후에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지금은 인사가 아직 진보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이른바 1백 년 동안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어서 요원하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아까 진달한 갑·을의 설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깊이 계시어 모조리 통촉하지는 못하십니다. 호대하는 가운데서 인재를 구하는 것이 실로 신의 명맥(命脈)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대하는 가운데 인재가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나 나의 앞서 한 말은 단지 이번 홍록을 가리켜 한 말인데, 경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8월 23일 계사

임금이 혜청 당상(惠廳堂上)을 소견하였다. 우참찬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개량사(改量使)로 명을 받들고 호남을 왕래하면서 연변(沿邊)에서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신축년181)  ·임인년182)  의 무옥(誣獄)에 걸렸던 자가, 요행히 살아나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섬 가운데서 죽어 반장(返葬)하지도 못하고 바닷가에 묻혔는데, 제주 사람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슬퍼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제주 사람이 혹 서울에서 죽으면 위에서 특별히 반장해 주도록 명하여 섬 백성들이 모두 성덕(聖德)을 기린다고 합니다. 제주 사람은 고향 땅으로 반장하는데 무옥으로 귀양가 죽은 자는 마침내 섬의 떠도는 혼(魂)이 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본도로 하여금 돌보아 반장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반(兩班)인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양반은 아니며 김성(金姓)인데,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불쌍하다. 반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6일 병신

임금이 장차 온천에 거둥하려고 하는데, 피부에 가려움증이 있어 목욕을 하고자 해서였다. 일관(日官)에게 명하기를,
"다음달 보름 사이로 택일(擇日)하고, 외방의 어선(御膳)은 일체 감생(減省)하며, 도과(道科)를 친행(親行)하겠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수원은 기보(畿輔)의 큰 진(鎭)이어서 지난해에 외도감(外都監)을 두라고 하교하였으나, 일찍이 무신년183)  에 듣건대, 허술하여 기병(騎兵)이 새끼줄로 굴레를 하고 있다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편안함에 익숙해진 것이 풍습을 이루어 군무(軍務)를 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근년 이래로는 연달아 문음(文蔭)184)  이 병을 치료하며 한가히 지내는 곳이 되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근본을 튼튼히 하는 뜻에서 이처럼 해서는 안되니, 이번 거둥 후에 무신 가운데서 장수(將帥)의 망(望)에 드나드는 사람을 의망(擬望)하여 갖추어 군제(軍制)가 수거(修擧)되기 전에는 체직시키지 말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번에 양조(兩朝)에서 거둥하시던 곳으로 목욕을 하러 가니, 추모하는 마음이 배나 된다. 도배(塗褙)하는 이외에는 절대 단장(丹粧)을 하지 말라는 일을 비록 이미 하교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행궁(行宮) 및 온실(溫室)에 만약 옛날에 한 도배와 까는 자리가 있으면 내 마음이 다행스럽겠다. 비록 낡았더라도 그대로 두게 하라."
하였다.

 

8월 27일 정유

왕세자빈이 원손(元孫)185)  을 낳았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아들을 길러 보아야 부모의 은혜를 알 수 있다는 귀절을 대조(大朝)께서 항상 외셨습니다. 이제 저하(邸下)께서도 부도(父道)가 있게 되셨으니, 저하께서 원손(元孫)을 사랑하는 마음은 반드시 질병(疾病)이 없고 반드시 덕업(德業)의 성취가 요순(堯舜)·문무(文武)처럼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저하께서는 이런 마음을 미루어서 대조께서 저하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그러함을 아실 것입니다. 무릇 학문에 부지런하시는 도리가 전일에 비해 반드시 자연히 더 힘쓰실 것이니, 이는 원손의 탄생이 저하의 덕업을 진수(進修)하는 공(功)에 도움이 있을 것이며, 신들의 기쁨이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8월 28일 무술

권일형(權一衡)을 승지로, 김치인(金値仁)을 부수찬으로, 윤광찬(尹光纘)을 교리로, 신위(申暐)를 겸 필선으로, 조재호(趙載浩)를 판윤으로, 윤급(尹汲)을 좌윤으로 삼았다.

 

8월 29일 기해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 탄생에 대한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大赦)하고 교서를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거듭 아름다운 천명(天命)이 일어나 하늘의 돌보심을 기대하였는데, 앞서 나타난 상서(祥瑞)에 이어 또 원손의 출생을 보게 되었다. 이에 온 세상에 알려 기쁜 마음을 밝히노라. 덕이 없는 내가 제왕(帝王)의 기업(基業)을 계승한 이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항상 서업(緖業)을 실추시키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다행히 열조(列朝)께서 오르내리시며 말없이 도와주심으로 본손(本孫)이 다시 번창할 수 있게 되었다. 태자(太子)를 늙은 나이에 얻어 어린이일 때 책봉했었는데, 일찍부터 총명한 자질이 있어 대섭(代攝)하는 초기부터 훌륭한 이름이 나타났다. 후손을 넉넉하게 해줄 계책을 염려하던 터에 다시 손자를 안아보는 길사(吉事)를 보게 되었는데, 영고(寧考)186)                  께서 탄생하신 달과 같은 달에 태어나서 하늘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며, 동조(東朝)께서 기대하던 마음을 위로해 주었으니, 참으로 내 기쁨이 갑절이나 더하다. 지난 시절의 빛나는 발자취를 더욱 빛내 훌륭한 손자를 보고, 늘그막에 손자를 안는 기쁨이 있으니, 우리 아들이 가상하다. 초저녁에 첫울음 소리를 들은 뒤 만년을 이어 살 것을 기대하였다. 태자가 태어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열성조(列聖朝)에서도 드물었던 경사를 오늘에 보게 되었다. 앞서는 외로운 내 한 몸이어서 종사(宗社)의 서업(緖業)을 실추시킬까 염려했었는데, 지금은 온 백성이 순종하여 국가의 형세가 반석(盤石)에 얹어 놓은 듯 튼튼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하례를 받고 다시 온 누리에 이 경사를 반포하노니, 뇌우(雷雨)의 은택이 두루 미쳐 더러운 것들을 모두 씻어 주고, 천지의 조화가 운행하여 만물이 크게 소생하였다. 아! 순수한 복록(福祿)을 맞이함에 있어 어찌 조심하는 마음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하늘의 명(命)이 새로우니, 보답하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 제학            이천보(李天輔)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79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註 186]          영고(寧考) : 숙종(肅宗).

 

전교하기를,
"이번의 나라 경사는 실로 전에 없던 바인데, 모든 일이 기쁜 가운데 너무 지나친 것이 없지 않다. 나는 추모하는 마음과 슬픈 마음이 전보다 배나 되니, 아! 대소 신료(臣僚)들은 기쁘다고 해서 마음을 해이하게 갖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해서 동료들과 협력해 우리 나라를 보필하라. 아! 이번의 나라 경사가 어찌 덕이 없는 내가 이르게 한 것이랴? 높고 높은 하늘에 열조(列朝)께서 오르내리시며 우리 나라를 돌보아 주고 우리 백성을 위로해 준 소치인데, 어떻게 보답하랴? 백성들을 돌보아 주고 구제하는 것이 지금의 급선무이니, 균역(均役) 제신(諸臣)은 더욱 마음을 써서 균세(均稅) 제사(諸使)로 하여금 더욱 힘쓰도록 하여 우리 해민(海民)이 실제 혜택을 입도록 하라. 팔도의 도신(道臣)과 삼부(三府)187)  의 유수(留守)는 내가 전(殿)에 임해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본받아 백성들을 보호하고 은혜를 입혀 하늘에서 오르내리며 돌보아 주시는 뜻에 우러러 보답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서명빈(徐命彬)을 지돈녕으로 삼았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여 정홍순(鄭弘淳) 등 17인을 뽑았다.

 

이달에 여러 도에 여역(癘疫)이 돌아 2천 2백 46명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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