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2권, 영조 26년 1750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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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자

승지 어석윤(魚錫胤)이 아뢰기를,
"전부터 온천에 거둥할 때에는 지나가는 길의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으레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었으니, 한강(漢江)에는 이번 9월 12일 새벽에 행하고, 과천(果川)의 관악산(冠岳山)과 직산(稷山)의 성거산(聖居山)에는 각기 대가(大駕)가 묵는 날에 제사를 설행(設行)하고, 온정제(溫井祭)는 같은 달 15일 새벽에 지내야 하는데, 정유년188)   연석(筵席)에서 결정한 바에 의해 한강과 관악 두 곳의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는 서울에서 차출해 보내고, 성거산은 수령을 제관(祭官)으로 차출해 정하며, 온정제의 헌관(獻官)은 배종(陪從)하는 관원 가운데서 차출해 정하며, 나머지 여러 집사는 역시 본도의 수령으로 차출하며, 성거산과 온정의 향축(香祝)과 폐백(幣帛) 및 제물(祭物)은 서울에서 전사관(典祀官)으로 하여금 기일 전에 예(例)대로 모시고 가게 하고, 관악산·성거산·온정 세 곳에 희생(犧牲)을 배설(排設)하는 등의 일은 각각 그 도(道)로 하여금 잘 가려 진배(進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2일 신축

황익재(黃翼再) 등 21인의 고신(告身)을 추환(追還)하였다. 승지 남태온(南泰溫)·성범석(成範錫)·어석윤(魚錫胤)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달하(達下)한 세초(歲抄) 가운데 황익재(黃翼再)·송중홍(宋重弘)·강세윤(姜世胤)·윤연(尹㝚)·목천현(睦天顯)·신정모(申正模)·황침(黃沈)·황재징(黃再澂)·이성지(李聖至)·황택(黃澤)·이식(李烒)·이형(李炯)·한환(韓桓)·조덕린(趙德隣)·허추(許錘)·이시희(李時熙)·김성탁(金聖鐸)·이관후(李觀厚)·이현필(李顯弼)·이광의(李匡誼)·송익휘(宋翼輝) 등의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주라는 명이 계시었습니다. 신들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어제 빨리 정지하라는 뜻을 동궁 저하께 아뢰니, 대조의 뜻을 받들어 하교하겠다고 하시어 신들은 더욱 걱정하고 탄식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참으로 이번 광탕(曠蕩)의 은전이 실로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시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으나, 다만 이 무리들이 범한 죄가 매우 중하여 혹 이름이 적(賊)의 초사(招辭)에 나오기도 하여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기도 하며, 혹은 흉악한 말을 터무니없이 벌리어 임금을 무함(誣陷)한 부도(不道)를 저질러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개하여 천지 사이에 용납하지 못하므로 비록 여러 차례 대사(大赦)를 거쳤으나 아직껏 직첩을 돌려 준 일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그 죄악이 가득 차서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종팽(宗祊)189)  에 경사가 있어 은혜가 나라 안에 젖어 든 것으로써 갑자기 탕척(蕩滌)의 은혜를 베풀겠습니까? 제방(隄防)을 엄히 하여 난역(亂逆)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깊이 생각하시어 황익재 등 21인에게 직첩을 돌려주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에 항상 비가 내려 볕이 든 날이 적어 열흘 동안이나 개이지 않았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나라의 경사가 이와 같음에 나의 추모하는 마음과 두려워 하는 뜻을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그러나 벼를 베기 전에 가을비가 이와 같으니, 이는 오늘날 여러 사람의 마음이 기쁜 나머지 해이하고 나태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무신년190)  에도 가을비가 많이 내림으로 인하여 감선(減膳)을 했었다. 아! 이제 비록 힘이 약해져 없어졌더라도 백성을 위하려는 마음은 가슴속에 들떠 있다. 오늘의 마음은 곧 무신년 가을의 마음과 같은데, 두려워 하는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겠는가? 오늘부터 5일 동안 감선하고 균역청(均役廳)의 여러 당상은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나의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이 결실이 있게 하고, 대소 신료들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부지런히 직무를 보도록 하라. 아! 한유(漢儒)의 설(說)191)  을 내가 비록 본받지는 못하지만 음양의 징조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궐 안의 긴요하지 않은 사람을 뽑아 내보내 왕년의 성덕(聖德)을 본받을 것이며, 이번 탄일(誕日)에는 표리(表裏)192)   이외의 정부(政府) 물선(物膳) 역시 그만두고, 경외의 용도를 절약하기를 힘써 저축을 늘려 뜻밖의 변에 대비하라."
하고, 이어서 비국에 명하기를,
"중외에 신칙하여 모든 영선(營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외에는 역시 우선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9월 3일 임인

대사간 이제원(李濟遠)이 상서하기를,
"천지의 덕은 용납하여 덮어 주는 것을 위주로 하나 음악(淫惡)을 징벌하는 것 역시 그 사이에 행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허물을 모조리 씻어 주어야 하나 범죄가 매우 중하고, 관계됨이 예사롭지 않은 자는 이런 때라 하여 용서해서는 안됨이 분명합니다. 전부터 무옥(誣獄)이 뒤집어지면 그 옥사를 주장했던 사람은 요행히 면한 자가 없었습니다. 아! 임인년193)   옥사의 참혹함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무함하고 핍박한 계책은 비단 여러 신하들만 죽이려는 데 그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우리 성상께서 일찍이 그 죄악을 논하시어 ‘이것을 어찌 지난날의 국안(鞫案)에 비하겠는가? 바로 무신년194)  의 효시(嚆矢)로서 대역(大逆)의 근본이니 죄적(罪籍)이 있어 온 이래 없던 바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교가 이처럼 명백하고 엄정하셨으니, 이 옥사를 꾸며낸 사람은 마땅히 즉시 감단(勘斷)하여 바로잡는 거조가 있어야 했는데도 지금까지 몇 년이 되도록 거론한 바가 없었습니다. 지난해 대소(臺疏)에서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녹훈(錄勳)한 것으로써 단지 훈부 당상(勳府堂上)의 죄만을 논하였으니 매우 구차하다고 할 수 있으며, 훈부 당상의 집 사람이 자책한 글에 ‘한 훈부 당상이 청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고 한 말 역시 옳습니다. 대저 당시 안옥(按獄)한 신하의 그 죄의 경중은 조가(朝家)의 처분에 달려 있는데, 삭훈(削勳)하고 안(案)을 불에 태운 후에 한번 죄를 징계해야 한다는 청은 지금의 신하로서는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소홀히 한다면 새매가 새를 쫓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난번 겨울 네 사람을 소설(昭雪)할 때 불쌍히 여기신 성교(聖敎)가 감읍하기에 족하였으니, 이런 차례로 응당 거행해야 할 일을 더욱 어찌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삼사(三司)의 합사(合辭)가 재차 일어났다가 갑자기 정지되어 이미 너무도 무엄하였습니다. 또 거기에 따라서 변명하며 비호하는 말이 함부로 어지러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죄를 성토해야 한다는 말이 더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임인년 옥사를 이미 신설(伸雪)한 후에 이 한가지 처분을 하지 않으면 끝내 도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하께서는 시험삼아 이 일을 가지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그때의 옥관(獄官)에게 죄를 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고 하신다면, 마땅히 신의 말이 틀렸다고 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아! 지금 의리가 밝지 못하고 습속이 무너졌으니 오직 명분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도리에 있어서 이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으니, 마땅히 저하께서는 분명하게 구별해 통렬히 징계하여 통쾌히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초(歲抄)를 내려 죄가 악역(惡逆)에 관계되고 이름이 단서(丹書)195)  에 있는 무리를 하나같이 탕척하셨는데, 지금 삼가 듣건대, 대조(大朝)께서 정원(政院)의 복역(覆逆)196)  으로 인하여 즉시 반한(反汗)197)  을 명하셨다 하니, 실로 전환(轉環)198)  하시는 덕은 더 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 승지들이 광구(匡救)하는데 당직(當直)하던 한 원반(院伴)은 연명(聯名)에 기꺼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애석해 하는 뜻을 보였다고 하니, 이와 같이 하고도 직분을 다하였다고 말하겠습니까? 대조께서 수십 년 동안 고심한 바가 당(黨)을 제거하는 데 있었는데, 당습의 고질이 이에 이르러 신은 놀라고 탄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궁녀(宮女) 45명을 내보냈다.

 

9월 5일 갑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요즈음 장맛비가 곡식을 상하게 해 전하께서 깊은 정성으로 대월(對越)199)  하시어 궁녀를 뽑아 내보내셨으니, 참으로 성덕(聖德)의 일입니다. 이미 계속 오던 비가 갑자기 개었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다 비유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그 사이에 반드시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었을 것인데도 건단(乾斷)을 흔쾌히 발휘하시어 성덕이 이와 같은데도 신들이 받들어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에 내가 누워서 비 오는 소리를 듣고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 한유(漢儒)가 부회(傅會)한 바를 내가 취하지 않았으나, 〈《상훈(常訓)》〉 술편(述篇)에도 역시 이르기를, ‘조사(操舍)하는 사이에 영향(影響)보다 빠르다.’라고 하였다. 그날은 바야흐로 하교를 써 내렸을 뿐인데도 날씨가 개려는 뜻이 있는 듯하기에 음(陰)이 성(盛)한 징조를 이미 자성(慈聖)께 아뢰었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즉위한〉 처음에 3천 명을 내보내고, 〈정관(貞觀)〉 2년(628)에 다시 3천 명을 내보냈었다."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이번 이 45명은 족히 3천 명에 해당될 것이니, 우리 나라는 인구 수가 본디 적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족히 강(剛)이 되겠는가? 소용(所用)되는 집물(什物)을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부리던 자들을 갑작스레 버리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여러 곳에서 모두 사환(使喚)이 모자란다고 하였으나 자성께서 하교하신 이외에는 한 번 호령에 모두 내보냈는데, 지금 역시 음기(陰氣)가 약해지지 않고 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여서 감응(感應)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니, 김약로는 말하기를,
"전하의 마음이 이와 같으시니, 그 숫자의 다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삼공(三公)과 중재(重宰)가 모두 입시하였으니, 내가 한 가지 유시하겠다. 원손(元孫)이 탄생한 후에 배나 더 슬픈 마음이 드는데, 천지와 조종(祖宗)께서 돌보아 주심이 이와 같음은 나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백성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원손을 본 후 더욱 쇠로(衰老)함을 깨달아 원손을 교도(敎導)할 수가 없으니, 원손은 네가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 나에게 큰 허물이 없었던 것은 학문의 힘인데 《소학(小學)》 1부(部)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네가 부지런히 읽은 뒤라야 후일 원손이 부지런히 읽게 된다. 옛사람 가운데 너무 부지런히 읽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금지했더니, 휘장으로 가리고 읽기까지 하였다. 지금 이후에는 모름지기 착실히 독서해야 한다. 네가 처음에 ‘치(侈)’ 자를 써서 경계하였는데 그러나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우니, 모름지기 그 말을 실천해야 한다. 내가 우재(雨災) 때문에 궁녀를 뽑아 내보내면서 너를 모시는 사람 역시 내가 뽑아 내보내려 했으나 이는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모든 일은 인(仁)이 아니면 하지 않고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성현(聖賢)이 되는 근본이 된다. 나는 평생 동안 일찍이 옳지 않은 일을 하여 너에게 보이지 않았으니, 너 역시 일을 행하는 사이에 항상 원손의 본받음이 거기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보양관(輔養官)을 기다리지 않고도 잘 가르칠 수 있다."
하였다.

 

9월 7일 병오

정홍순(鄭弘淳)·이현중(李顯重)을 부교리로, 박상덕(朴相德)을 수찬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수찬으로, 심육(沈錥)을 대사헌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사간으로, 김선행(金善行)을 헌납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장령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지평으로, 이현조(李顯祚)·김문행(金文行)을 정언으로, 김치인(金致仁)을 겸 문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겸 사서로, 원경하(元景夏)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원경하(元景夏)에게 숭정(崇政)을, 신만(申晩)에게 정헌(正憲)을, 이익정(李益炡)에게 자헌(資憲)을 가하였는데, 산실청(産室廳)의 노고 때문이었다.

 

9월 8일 정미

전교하기를,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도리는 사부(師傅)를 우선으로 해야 하므로 동몽(童蒙)에게는 역시 교관(敎官)이 있는데 더군다나 나라의 원손(元孫)이랴? 보양관(輔養官)은 아이 때에 보도(輔導)하는 데 불과한 자이다. 마땅히 강정(講定)해야 하는데, 고례(古例)를 비록 빙거(憑據)할 수 없으나 이제부터 마땅히 예(例)를 정해야 한다. 춘추관(春秋館)의 당상관과 낭관으로 하여금 심도(沁都)200)  로 내려가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의 보양관은 처음에 상고할 만한 곳이 없었으나 세조조(世祖朝) 때 성삼문(成三問)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말하기를, ‘너는 집현전(集賢殿) 달밤에 임금께서 원손201)  을 안으신 채 하교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하였고,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원손으로 하여금 칙서(勅書)를 맞이하게 할 때 익선(翊善)·찬독(贊讀)의 이름이 있었으나 인원 숫자가 없다. 사관(史官)과 춘추관 당상이 함께 강도(江都)로 가서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상고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원자의 보양관을 으레 숭품(崇品)으로 가려 차임하였으나, 원손의 보양관은 마땅히 등급의 구분이 있어야 하니, 정종(正從) 2품 당상이나 3품 중에서 융통(融通)하여 차출하라."
하였다.

 

9월 10일 기유

임금이 문묘(文廟)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왕세자가 배위(配位)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명륜당(明倫堂)에서 시사(試士)하여 이인원(李仁源) 등 6인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이번 온천에 거둥하는데, 옛날을 추억하건대, 그때 어가(御駕)를 따른 무신이 셋이었는데 한 사람은 외임(外任)이며, 한 사람은 방금 총관(摠管)의 직임을 띠고 있어 어가를 따르도록 특명하였으나, 그중 한 사람은 남태적(南泰績)이다. 윤수(尹邃)와 남태적은 같은 날의 계사(啓辭)였는데, 이하(李河)와 윤수는 이미 감옥에서 나왔고 남태적은 정계(停啓)할 기약이 없어 그것을 항상 서운하게 여겨 온 것이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 여러 신하들은 생각건대 이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때 이하의 초사(招辭)에 말하기를, ‘남태징(南泰徵)은 어리석은 자여서 들어갔고, 남태적은 속여서 반드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하에게 비교하면 남태적에 대한 계사를 마땅히 먼저 정지해야 했다. 그런데도 하나는 방송(放送)에 이르렀고, 한 사람은 감옥 속에서 늙어가니, 경중이 어찌 거꾸로 되지 않았는가? 지금은 내가 이러한 일에 간여하고 싶지 않지만 오직 옛날을 생각하니 슬퍼져 묵묵히 있을 수가 없다. 아! 이목(耳目)의 신하들이 기록되어 전해 오는 것에 어둡지 않을 것이니, 임금의 슬픈 마음을 생각하라."
하니, 승지 조명채(曹命采)가 말하기를,
"남태적은 남태징의 사촌(四寸)으로 그 이름이 중요한 공초(供招)에서 나왔는데 왕법(王法)을 시행하지 않아 아직껏 살아 있는 것도 이미 옥체(獄體)를 잃었으니, 대신(臺臣)이 어찌 갑자기 정달(停達)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태적과 이하는 각기 다르다. 비록 남태징의 가까운 일가이기는 하나 유하혜(柳下惠)도 있기 마련이고 도척(盜跖)도 있기 마련이다202)  . 지난번 합계(合啓)로 말하더라도 조진세(趙鎭世)와 김시위(金始煒)가 한 계사에 나왔으나, 정지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승지가 그르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니, 조명채가 말하기를,
"무신년203)   흉역(凶逆)은 과거 역사에 없던 바인데 왕법으로 따져 보면 오히려 관전(寬典)이니, 어찌 정달(停達)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전지(傳旨)를 쓰기는 하지만 결코 반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하교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가?"
하고, 조명채의 체직을 명하였다.

 

오언유(吳彦儒)·황경원(黃景源)을 승지로, 이이장(李彛章)을 부응교로, 이중조(李重祚)를 교리로, 이유수(李惟秀)를 수찬으로 삼았다.

 

9월 12일 신해

임금이 온천(溫泉)에 거둥하여 과천현(果川縣)에서 묵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패영(貝纓)에다 견영(絹纓)을 함께 맨 것은 지난날 온양(溫陽)에 거둥할 때 처음 하기 시작한 것으로, 대개 끊어질까 근심해서였는데, 그 후에도 이 때문에 풍습이 되고 말았다."
하니, 승지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듣건대, 호수(虎鬚)204)   역시 그때에 처음으로 시작되어 백관들이 보리 이삭을 갓 위에 꽂았던 것인데, 그 후에 그대로 호수를 꾸미는 법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 임사하(任師夏)가 상서하기를,
"간장(諫長) 이제원(李濟遠)이 진달해 청한 바에 대하여 한마디도 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 신축년205)  ·임인년206)  의 무옥(誣獄)은 생각할수록 한심스러웠는데, 이제 이미 옥사(獄事)가 뒤집어졌으니, 안옥(按獄)했던 사람들이 어찌 반좌율(反坐律)207)  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의논이 나온 것도 또한 늦었고 그 말이 옳으니, 삼가 원하건대, 흔쾌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공연히 소란을 부리니, 나는 실로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9월 13일 임자

대가(大駕)가 수원부에 머물렀다. 칠언 절구 한 수(首)를 지어 내리고, 또 ‘계석행(繼昔幸)’이란 세 자를 친히 써서 새겨 어목헌(禦牧軒)에 걸도록 명하였다.

 

충청도 사서인(士庶人)으로 80세 이상인 사람에게 가자하고 과천(果川)·광주(廣州)·수원(水原)·진위(振威)·양성(陽城)도 일체로 거행하게 하였는데, 정유년208)  의 예를 쓴 것이었다.

 

대가가 여러 고을을 지나면서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수원 부사 윤흡(尹潝)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부(府) 안으로 들어가 윤흡에게 마군(馬軍)·보군(步軍)을 거느리고 기고(旗鼓)로 영접하라고 명하였는데, 윤흡이 군사를 거느리고 찰주(札住)·언기(偃旗)·납함(吶喊)을 잘하고 기치(旗幟)가 선명하고 기계(器械)가 정예(精銳)하였으며, 군용(軍容)이 익숙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웅부(雄府)·대진(大鎭)이란 이름이 헛되지 않다. 선조(先祖)에서 일찍이 외도감(外都監)이라고 일컬었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또 윤흡에게 군례(軍禮)를 행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씩씩하구나."
하고, 이어서 이 말을 하사한 것이다. 또 명하기를,
"본부의 교련관(敎鍊官)을 변장(邊將)에 제수하라."
하고, 또 윤흡에게 명하여 오늘 영접한 군교(軍校)를 초계(抄啓)하게 하여 부교리 정홍순(鄭弘淳)으로 하여금 시재(試才)하게 하였다.

 

9월 14일 계축

대가가 진위현(振威縣)에서 머물렀다. 수찬 이유수(李惟秀)에게 명하여 군중(軍中)의 폐단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황후 책봉(皇后冊封) 칙사(勅使)의 패문(牌文)209)  이 들어와 조재호(趙載浩)를 원접사(遠接使)로, 이익정(李益炡)을 관반(館伴)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연접 도감 제조(延接都監提調)로 삼았다.

 

9월 15일 갑인

대가(大駕)가 직산현(稷山縣)에서 머물렀다. 칠언 절구 세 수(首)를 지어 내렸는데, 그중 한 수는 선조(先朝)의 운(韻)에 차운(次韻)한 것인데, 시에 이르기를,
"삼가 어시를 영소정에서 읽노라니
정유년 추억하여 눈물이 먼저 흐르네.
아! 천지처럼 큰 성덕을
소자의 붓으로 어찌 감히 형용하리."
하였다. 또 ‘옛날을 추억하는 감흥[憶昔興感]’이란 네 자를 친히 써서, 새겨 화축관(華祝館)에 걸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소사(素沙)를 지나면서 교남(橋南) 들판의 풀을 바라보며 전교하기를,
"이곳이 명(明)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왜적(倭賊)을 격파한 곳인가?"
하니, 승지 황경원(黃景源)이 대답하기를,
"경리가 몰래 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해생(解生)·파귀(頗貴) 등을 보내 이곳에서 왜노(倭奴)를 격파하고, 또 파새(擺賽)에게 2천 기병(騎兵)을 거느려 보내 잇달아 후원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을 세우고 오랫동안 강개(慷慨)해 하였다.

 

연(輦)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현(儒賢)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정유년210)  의 예를 따른 것이다. 아울러 청해백(靑海伯)의 사당 및 청주(淸州)의 충렬사(忠烈祠)와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묘에도 제사하였다. 전교하기를,
"비록 연(輦)이 지나가는 길은 아니지만 함께 배종(陪從)했던 옛날을 생각하니 감회가 배나 일어난다. 회가(回駕)한 후에 승지를 보내 연령군(延齡君)의 묘에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헌납 김선행(金善行)에게 명하여 수원의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수원부를 지날 때 때아닌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9월 16일 을묘

대가가 온양(溫陽)의 행궁(行宮)에 머물렀다.

 

임금이 천안군(天安郡)을 지나면서 관찰사 이익보(李益輔)에게 말하기를,
"임어(臨御)한 지 26년 만에 다시 옛길을 보게 되었는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단지 취타성(吹打聲)만 들을 뿐 임금을 보지 못하니, 어찌 상심하지 않겠는가?"
하니, 승지 남태기(南泰耆)가 말하기를,
"지금 옥의 죄수들이 모두 감옥 위에 올라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백성을 감싸주는 덕이 없는데, 그 말을 들으니 매우 불쌍하다."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옥에 갇힌 죄수들이 감옥 위에 올라가 억울함을 호소함이 매우 시끄러우니, 해당 군수를 잡아다가 심문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따르지 않고서 즉시 석방하게 하여 회가(回駕)할 때 임금을 볼 수 있게끔 하라고 하였다.

 

9월 17일 병진

어떤 별이 누성(婁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온궁(溫宮)에 나아갔다. 사옹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어공(御供)이 3일 간격으로 서울에서 내려오니 실로 썩을 염려가 있어 사체(事體)가 미안하고, 신들의 마음 역시 어떻겠습니까? 날마다의 감선(監膳) 물자는 비록 감제(減除)하였더라도 본도 백성들의 마음 역시 모른체해서는 안 되니, 그들의 도리를 펴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한번의 거둥에 폐를 끼침이 많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행행(幸行)’의 ‘행(幸)’ 자는 윗사람이 행차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뜻인데, 어찌 폐단이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은혜를 베푼 덕이 없는데, 백성들이 어찌 다행으로 여기겠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민(臣民)의 도리를 전부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영보정(永保亭)의 생복(生鰒) 등속은 지공(支供)하더라도 조금도 방해됨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온수(溫水)만 먹을 뿐 결코 토산품(土産品)을 먹지 않겠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하교가 이에 이르니, 덕음(德音)이 반드시 멀리 입혀질 것이나, 상하의 정리(情理)를 펴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김약로는 말하기를,
"성덕은 지극하나, 도리에 있어서는 서운합니다."
하였다.

 

사관(史官)을 특별히 보내 진선(進善) 윤봉구(尹鳳九)를 돈소(敦召)하고, 이어서 함께 오도록 하였다. 이때 윤봉구가 가까운 곳에서 지영(祗迎)하니, 도승지 조명리(趙明履)가 아뢰기를,
"윤봉구는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으로 실천하는 바가 독실하고 학식이 고명합니다. 선조(先朝) 정유년211)   온천에 행행하셨을 때 그의 스승을 소견하였으니, 지금 역시 윤봉구를 소견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상하의 문인(門人)이면 귀(貴)하다."
하고,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조명리가 또 말하기를,
"듣건대, 한원진(韓元震)이 홍주(洪州)에 살고 있는데 노병(老病)으로 지영(祗迎)하지 못했다고 하니, 역시 일체로 돈소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길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7, 80리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시 권상하의 문인인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전유(傳諭)할 때 주전(廚傳)212)  하는 폐단이 있게 된다."
하였다.

 

진선(進善) 윤봉구(尹鳳九)가 사관과 함께 와서 서계(書啓)하기를,
"직명(職名)이 체직되지 않아 명을 따라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대우하는 도리는 정성스럽고 진실해야만이 귀해지는 법이다."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특별히 해직(解職)을 허락하여 네 마음을 편하게 하니, 너는 모름지기 내 뜻을 본받아 즉시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라.’는 뜻으로 다시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9월 18일 정사

천둥하였다.

 

임금이 행궁(行宮)에 나아가 소대(召對)를 행하여, 부사과(副司果) 윤봉구(尹鳳九)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선(進善)이 한가로이 지내면서 강학(講學)한다고 하니, 좋은 말을 듣고자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소신은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아 공부가 모자라는데 무슨 말과 의논으로써 성덕을 돕겠습니까? 옛날에 신의 스승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숙묘(肅廟)를 진대(進對)할 때 정일(精一)의 심법(心法)과 성정(誠正)의 공부(工夫)를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또 주자(朱子)의 ‘직(直)’ 자의 가르침을 부연하여 설명하니, 숙묘께서 하나하나를 가납(嘉納)하셨으니, 성문(聖門)에 서로 전해오는 학문은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사(先師)는 선정의 적통(嫡統)을 전해 받았는데, 진달한 바 역시 이에 그쳤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신이 오늘 전하 앞에서 이 말을 외어 진달하는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도 숙묘께서 가납하신 뜻을 본받아 다시 구설(舊說)을 취해 하나하나 몸소 행하시면, 어찌 계술하는 도리가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말이 좋다."
하였다. 윤봉구가 말하기를,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선사(先師)213)  에게 말하기를, ‘학문(學問)은 주자를 본받고, 사업(事業)은 효묘(孝廟)214)  의 뜻과 일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주자의 학문은 여러 현인(賢人)을 집대성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는 공자(孔子) 이후 일인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자는 거경(居敬)·궁리(窮理)·실천(實踐) 세 가지 일을 학문으로 하였는데, 소학(小學)·대학(大學)의 공부는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또 주자의 책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포함하고 있어서 천만 가지로 갈래진 의리가 분명치 않음이 없고, 치평(治平)의 도리와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의 방책 역시 자세히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 우리 나라와 세대(世代)가 가장 가깝고 시세(時勢)가 서로 비슷하여 그의 말과 강론(講論) 역시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 같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끝까지 법도를 삼으소서. 효묘(孝廟)의 뜻과 사업에 이르러서는 바로 오늘날의 큰 의리로 선사 역시 일찍이 이를 숙묘께 진달해 면려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역시 숙묘께서 은밀히 마음속으로 전한 것을 받으신 줄을 본디 알고 있었으며, 작년에 이르러서는 대보단(大報壇)215)  의 제사를 늘리셨으니, 전하의 이 의리가 더욱 크고 환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의리는 천지 사이에 없어서는 안되고, 또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됨을 알아서 비록 하루아침에 분연(奮然)히 효묘의 큰 뜻을 펴지는 못하더라도 주자가 이른바 ‘통분함을 견디고 억울함을 머금은 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두어야 한다.’ 한 마음을 항상 가슴속에 두어 천경 지의(天經地義)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인기(人紀)를 세우는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 정미(精微)하고 꼭 들어맞는다. 또 춘추(春秋)의 의리를 내가 마음속에 잊지 않고 항상 행여 떨어뜨릴까 걱정하고 있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참으로 이런 말을 한번 원량(元良)에게 들려주고자 하니, 진선(進善)은 나를 따라가서 원량을 만나보라."
하니, 윤봉구가 말하기를,
"신이 매양 목을 뽑고 한번 뵙고자 하는 뜻을 두었으나, 다만 띠고 있는 직함(職銜)이 천만 부당하여 감히 한번 나가 뵙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어서 물러 나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윤봉구를 보니 모양이 한아(閑雅)하고 하는 말이 매우 정미하다."
하니, 승지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진선은 집에 있으면서 실천하는 바가 독실하고 학문의 공부가 전배(前輩)들보다 탁월하며, 효우(孝友)가 충후(忠厚)하여 향리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니, 황경원이 말하기를,
"현묘(顯廟)께서 온궁(溫宮)에 거둥하셨을 때 선정신 송시열이 들어와 배알하였고, 숙묘(肅廟)께서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에는 선정신 권상하가 와서 배알하였는데, 전하의 오늘 온천 거둥에는 윤봉구가 권상하의 고제(高弟)로서 와 배알하니,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하였다. 판의금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한원진(韓元震)은 나이가 이미 70이고 병 또한 위독하여 올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선정신 권상하가 먼 앞날을 기대하여 한 도의 사람들이 산림(山林)의 경제인(經濟人)이라고 일컬었으며, 일찍이 한 번 연석(筵席)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는데, 비단 학식이 고명(高明)할 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산천(山川)의 도수(度數)를 모르는 것이 없는데, 나이가 많고 병이 깊어 애석합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니, 성상께서 고문(顧問)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며 한번 하교하시면 한 도가 격려될 것입니다."
하였다.

 

무신년216)  의 절사인(節死人) 홍임(洪霖)의 묘(墓)에 치제(致祭)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순(舜)이 설(契)에게 말하기를, ‘오품(五品)이 불손(不遜)하다217)  .’라고 하였다. 아! 순임금 때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나처럼 덕이 없는 사람이겠는가? 옛날 영묘(英廟)218)  께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수찬(修撰)하셨고, 그후에 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가 있었는데, 그것이 비록 도서(圖書)이지만 삼강(三綱)을 세우고 말세(末世)를 권칙(勸飭)하는 데 도움이 적지 않았다. 예조로 하여금 경외(京外)에서 널리 모아서 품지(稟旨)해 속성(續成)하게 하라."
하였다.

 

9월 19일 무오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雨雹)이 내렸다.

 

정원에서 천둥의 이변을 진계(陳啓)하고, 옥당(玉堂)·간원(諫院)·춘방(春坊) 역시 상서하여 진계하니, 왕세자가 모두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전 진선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일전(日前)에 치제(致祭)하라는 명이 뒤섞여 고 상신 윤증(尹拯)에게도 미쳤다고 하는데, 이번 일이 유현(儒賢)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명의(名義)에 용납되지 않으니 유현으로 대우해서는 안 되며, 상신이기 때문이라면 선왕께서 죄를 주어 삭출(削黜)하였으니 상신으로 대우해서도 안 되는데, 성의(聖意)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거둥은 선대왕의 고사(故事)를 따르는 것인데 선왕께서 항상 배척한 바이니, 비록 드러나게 엄히 정토하지는 못하더라도 도리어 치우치게 사제(賜祭)하는 은혜를 입은 것은 실로 전하를 위해 이 거조가 애석합니다. 신은 송시열을 사숙(私淑)한 사람인데, 선정의 도는 혼효(渾淆)를 깨뜨리는 것임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윤화정(尹和靖)219)  을 정씨(程氏)의 무리들이 배척한 데 따라서 감히 물리치는 은혜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즉위 처음에 이미 하교하였는데 이제 비록 늙었지만 그 마음은 하나이다. 이는 너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9월 20일 기미

천둥하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호서(湖西) 여러 유생을 친시(親試)하여 조시겸(趙時謙) 등 7인을 뽑았다.

 

임금이 좌의정 김약로에게 말하기를,
"병신년220) 사문(斯文)의 일221)  이 있은 후 환후(患候)가 더 심해져 온천에 거둥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는데, 지금 어찌 감히 이런 글을 올려 또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키는가? 윤봉구의 상소는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 가운데서 반드시 종용(慫慂)한 자가 있을 것이다.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며, 송(宋)나라 신하 주희(朱熹)의 이름은 상소문에서도 감히 휘(諱)하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임금 앞에서 문득 선정(先正)이라 일컬으니, 아주 그르다. 내가 사성(四聖)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데222)  , 하물며 우리 나라의 신하이겠는가? 이후에는 연석(筵席)에서 승지가 신칙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약로가 아뢰기를,
"정유년223)  에는 본군(本郡)의 전함(前銜)이 있는 사람을 녹용한 예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일체로 신은 정사(新恩政事)에서 임용하라."
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참의로,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박사눌(朴師訥)·안치택(安致宅)을 지평으로, 윤동도(尹東度)를 장령으로, 임위(任瑋)를 문학으로, 권경(權儆)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행궁(行宮)에 있었다. 옛날을 생각하여 감흥(感興)이 있어 칠언 절구를 지어 내리고, 이어서 판(板)에 새겨 걸도록 하고, 또 시 한 수를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도록 명하였다.

 

이태중(李台重)을 병조 참의로 삼았는데, 이태중은 진도(珍島)에서 체직되어 돌아와 시관(試官)으로 입시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온양군(溫陽郡)의 금년 전세(田稅)를 감하였다. 우의정 정우량이 말하기를,
"온양은 주필(駐蹕)하는 곳이니, 선조 정유년의 고사에 의해 전세를 감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이어서 정우량에게 말하기를,
"윤증(尹拯)에게 치제(致祭)를 명한 것은 그가 일찍이 의정(議政)을 지내서이지 선정(先正)으로 사제(賜祭)한 것이 아니므로, 윤봉구(尹鳳九)의 상소가 틀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9월 21일 경신

임금이 온궁문(溫宮門)에 나아가 장사(將士)들에게 상을 주었다.

 

손진민(孫鎭民)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고려(高麗) 때 한성 좌윤을 지낸 맹희도(孟希道)의 묘에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는데, 묘는 본군에 있었다.

 

9월 23일 임술

천둥하였다.

 

대신과 정원·옥당·간원이 천둥의 이변으로 진계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있는데, 마땅히 더 힘쓰겠다."
하였다.

 

9월 24일 계해

대가(大駕)가 온양군에서 돌아와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다. 임금이 묻기를,
"병조 참지 이태중(李台重)은 이미 숙명(肅命)224)  하였는가?"
하니, 승지 남태기(南泰耆)가 말하기를,
"이태중은 숙사(肅謝)하지 않고 온궁(溫宮) 문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잘못을 기록해 직산으로 잡아들이라."
하였는데, 어가가 직산에 이르러 이태중을 잡아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 역시 늙어서 임금이 임용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내가 사율(師律)로써 하교하였는데 기일이 되어도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이는 곧 군행(軍行)이니, 네가 거기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상소하더라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이태중이 진도(珍島)에서 올라올 때에 거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와서 지영(祗迎)하였으며 인하여 제수(除授)하는 명이 있자 몸을 바쳐 영직(榮職)을 얻었다는 것을 혐의하였는데 이후부터 그 역시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할 것이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수(河水)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으며, 나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참지(參知)를 체차하고, 오위 장(五衛將)에 특별히 제수하여 어가를 따르게 하라."
하니, 좌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참지로 숙사하게 해야지, 오위 장으로 어가를 따르게 하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인데 그가 어찌 참지로 사은(謝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지로 즉시 숙사하도록 분부하라."
하고, 잡혀 나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태중이 이처럼 늙었구나."
하니, 승지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이태중이 등제(登第)한 지가 이미 20년이 되었는데, 사모(紗帽)를 쓰고 벼슬한 때는 아주 드물었으며 단지 한 번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갔을 따름이고, 그 나머지는 남북으로 귀양을 가 늙었습니다. 지금 진도에서 5일을 빨리 달려 행궁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하니, 도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어제 갖은 방법으로 이태중에게 권유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고 밤새도록 비를 맞을며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움직이게 하기 어려운 자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9월 25일 갑자

장령 권기언(權基彦)이 상서하기를,
"한(漢)나라의 약법 삼장(約法三章)225)  은 살인(殺人)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우리 숙묘(肅廟)께서는 상명(償命)의 율(律)에 더욱 엄하시어 비록 귀하고 가까운 자리에 있더라도 용서함이 없으시어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 할 줄을 알아서 범한 자가 적었습니다. 근래에는 수재(守宰)가 된 자가 인명을 경시해 이따금 생살(生殺)을 희로(熹怒)에 따라서 하니, 어찌 매우 놀랍지 않겠습니까?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광우(金光遇)는 전임지인 해주(海州)에 있을 때 상관 없는 일로 유성(柳姓)의 사인(士人)을 때려 죽여, 그 사인의 아내가 상경하여 격고(擊鼓)하였는데 병조에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통함을 머금고 돌아갔다고 하니 그 맺힌 억울함이 천화(天和)를 해치기에 족합니다. 신은 그때 입직했던 병조의 당상과 낭관을 아울러 파직하고, 김광우는 잡아가 심문하여 엄히 조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진신(搢紳)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다니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인데, 연풍(延豊)의 전 현감 송제우(宋濟愚)와 공주(公州) 전 판관 김유행(金由行)은 바로 같은 도(道)의 수령인데 어찌 감히 세력을 믿고 노예처럼 머리채를 잡고 끌고 다녀야 하겠습니까? 송제우는 끌려 다님을 당했으니 본디 파직해야 마땅하며, 끌고 다니게 한 자는 더욱 광망(狂妄)하니, 후일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파직의 가벼운 벌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김유행과 송제우는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는데, 그후 임금이 송제우는 삭판하지 못하게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철보(李喆輔)가 상서하여 본도의 수재를 자세히 진달하고, 영남의 곡식 수삼만(數三萬) 석을 더 조치해 주기를 청하였다. 끝에서 또 말하기를,
"나라에서 새로 돈을 주조(鑄造)하라는 명령이 있는데, 신의 영(營)에 마침 임술년226)   돈을 주조할 때 호조에서 보낸 동석(銅錫) 80근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만약 먼저 교제창(交濟倉)의 전목(錢木)을 가지고 곡식을 바꾸어 진휼에 보태고, 다시 이 동석을 임술년의 예에 의해 돈을 주조해 교제창의 전목으로 대신 충당하면 일이 매우 편리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6일 을축

임금이 수원을 지나면서 독성 산성(禿城山城)에 올라 해문(海門)을 바라보면서 승지 황경원(黃景源)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해문에서 등주(登州)까지의 거리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황경원이 대답하기를,
"동강(東江)에서 등주까지는 3천 9백 58리입니다."
하니, 임금이 탄식하기를,
"수길(秀吉)의 난리에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광서(廣西)·광동(廣東)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행장(行長)과 노량(露梁)에서 싸워 크게 격파해 행장이 도망하였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이 포위당하자 총병관(摠兵官) 김일관(金日觀)이 산동(山東) 제진(諸鎭)의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려 했는데, 군사가 이르기 전에 성이 이미 함락되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내가 어찌 차마 황제(皇帝)의 은혜를 잊겠는가?"
하니, 황경원이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김일관이 여러 장수인 초계공(楚繼功) 등과 장산(長山)에 이르러 오랑캐와 서로 7일간 밤낮으로 버티다가 힘이 지탱할 수가 없어 마침내 죽었는데, 의종(毅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특진 광록 대부 태자 태사(特進光祿大夫太子太師)를 추증하고 바닷가에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초계공 등에게는 차등있게 휼전(恤典)을 내렸다고 하니, 매우 불쌍합니다."
하였다. 이때 산 위에 상수리가 떨어지자 좌의정 김약로가 손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신은 어찌하여 상수리를 좋아하는가? 나는 시물(時物)을 보고 명나라가 한참 강성할 때를 생각하니, 그때는 사신(使臣)들이 조천(朝天)하였지만 지금은 할 수 없게 되어 천자에게의 조회(朝會)도 영원히 바랄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서글프고 슬프지 않겠는가?"
하고, 인하여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황경원에게 명하여 독성(禿城)의 군기(軍器)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 말하기를,
"궁시(弓矢)와 검극(劍戟)·기고(旗鼓)가 모두 낡아서 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하게 하교하여 개수(改修)하도록 하였다.

 

이양현(李揚顯)에게 지사(知事)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양현이 길가에서 지영(祗迎)하였는데, 나이가 바야흐로 90이어서 특별히 제수한 후, 입시를 명하여 어시(御詩)와 비단 2필을 하사하였다.

 

전교하기를,
"도성(都城)으로 들어갈 때 선무사(宣武祠)를 거쳐 갈 것이니, 단장(丹粧)하고 개수(改修)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7일 병인

이태중(李台重)을 승지로 삼았다.

 

9월 28일 정묘

임금이 환궁하였다.

 

9월 30일 기사

금오와 형조의 죄수를 방송하도록 명하였다.

 

기호(畿湖) 두 도에 쌀 7백 석을 내려 온천 거둥 때 역(役)을 한 백성에게 줄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거둥 때 두 도의 민폐를 생각하여 특별히 쌀 1천 석을 주었는데, 기백(畿伯) 유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
"이번의 역사는 모두 전부(田夫)로 하여금 길을 닦게 하였으니, 쌀을 줄 필요가 없으며, 비용을 아끼는 도리에서 환납(還納)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전부들이 길을 닦았다고 하지만 교량(橋梁)의 재목은 백성들에게서 나오지 않았느냐?"
하고, 7백 석을 본도에 신칙하여 도로와 교량을 닦은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상훈(常訓)》 술편(述編)에 이르기를, ‘오늘의 신하들은 원량(元良)이 대리 청정(代理聽政)할 때에 어찌 감히 지난 일을 제기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지난번 문의(文義)로 인하여 이위보(李渭輔)가 원량에게 말한 것은 이미 그와 달랐는데 이는 말하는 사이의 구습에 불과하나 이제원(李濟遠)이 상소에 쓴 것은 이것이 무슨 뜻이며, 원량이 예(例)에 따라 비답하였으니, 뜻은 대개 나의 고심(苦心)을 본받은 것인데 임사하(任師夏)는 무슨 마음으로 감히 다시 진달하였는가? 원량의 하답 가운데 ‘무단(無端)히 소란을 피우다.’라고 한 것은 관엄(寬嚴)이 알맞았다. 아! 지금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때는 말해 무엇하랴. 엄히 방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제원은 파직하고, 임사하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이달에 여역으로 사망한 자는, 경기가 3천 3백 82명, 관동이 5백 72명, 호서가 6천 2백 66명, 호남이 1만 6천 7백 52명, 영남이 1만 7백 39명, 해서가 1만 1천 3백 71명, 관서가 1천 8백 53명, 북관이 1만 2천 1백 41명, 강도가 2천 3백 91명, 송경이 1천 5백 20명, 제주가 8백 8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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