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경오
승지 이태중(李台重)이 상서하기를,
"신이 진흙땅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하여 생사가 오직 명하심에 달려 있었는데, 마침내 붙잡혀 들어와 갖가지로 책망하셨으나 특별히 잘못된 은혜를 내리시어 다시 위장(衛將)으로 차임하여 어가(御駕)를 따라 오도록 하시어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정단(呈單)하고 장전(帳殿) 가까운 밖에서 숙배(肅拜)하였더니 성명(成命)을 다시 정지하셨으나 직명(職名)은 여전하여 그대로 숙사(肅謝)하기를 재촉하셨습니다. 급작스러운 동안에 눈과 서리, 비와 이슬을 맞으며 허겁지겁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모르다가 마침내 염치를 무릅쓰고 명을 받들었더니, 승지로 바꾸어 제수하셨습니다. 또 행차에 시위(侍衛)할 때 행도(行道)가 다급해서 글을 올려서 사양하지 못했으니, 지켜야 할 절개 한 조항을 아주 방치하여 제수(除授)하는 대로 응하여 반성해 보니 부끄럽고 후회됩니다. 모시고 환궁하던 날에 후반(候班)227) 에서 지레 사처(私處)로 돌아 왔고, 평상시에도 소명(召命)을 어겨 죄를 받아야 하게 되었으니, 신의 정상(情狀)과 발자취는 궁(窮)하고 처량합니다. 아!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처신할 의리가 가볍지 않은데, 한 사람의 거취는 매우 하찮은 듯하지만 역시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신처럼 무상한 자가 엄중한 명을 두려워하여 하루 아침에 염치를 잃게 되었으니, 성대(聖代)에서 사부(士夫)의 풍습을 격려하는 도리에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일 신미
헌부에서 【지평 안치택(安致宅)이다.】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엄우(嚴瑀)의 일은 조사하기 전에 사유(赦宥)로 인해 지레 방송하였는데 참으로 범한 바가 있다면 징려(懲勵)하는 법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며, 참으로 죄가 없다면 애매한 죄과에 두어서는 안 되니, 청컨대 붙잡아다 처리하소서. 정석백(鄭錫百)의 허다한 진장(眞贓)은 이미 도신(道臣)의 장계에 자세한데 사유로 인해 지레 방송하였으니, 청컨대 붙잡아다 가두어 감률(勘律)하소서.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우석(李禹錫)은 깊은 산골짜기 편호(編戶)에서 침탈하여 거두어 들였고,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지으면서 마음대로 하여 이익을 도모하였으며, 은산 현감(殷山縣監) 김성대(金聲大)는 오로지 탐욕만 일삼아 짐바리가 끊임없이 오고가니, 모두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5일 갑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여러 종신(宗臣)을 거느리고 상서하여 동조(東朝)와 대전(大殿)에 존호(尊號) 올리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아들은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하니, 자전(慈殿)의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이다. 더군다나 그중 한 가지 일은 비록 꿈속에서 듣더라도 반드시 귀를 막고 듣지 못할 일인데 원량(元良)이 어찌 감히 나에게 진달하겠는가? 아! 여러 종신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어서 부득이 원량을 대신하여 유시한다."
하였다.
10월 6일 을해
원손의 태봉(胎峯)을 영월부(寧越府) 계죽산(鷄竹山)으로 정하였다.
10월 8일 정축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경기·황해 두 도의 균세사(均稅使) 김상적(金尙迪)이 봉산(鳳山) 땅에 이르러 뜻밖에 졸서(卒逝)하였습니다.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길에서 죽었으니, 관(棺)과 염(斂)하는 여러 물건을 본도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균세사의 대신은 청컨대 전 참판 황정(黃晸)을 차하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9일 무인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서(勅書)를 맞이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칙사를 접견하고 청나라의 사유(赦宥)를 반포하였다.
10월 10일 기묘
임금이 관소(館所)에 나아가 연례(宴禮)를 행하였다.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윤광찬(尹光纘)을 사간으로, 김문행(金文行)·권항(權抗)을 장령으로, 한광협(韓光協)을 지평으로, 유언민(兪彦民)을 헌납으로, 송명흠(宋明欽)을 충청 도사로 삼고, 김상익(金尙翼)에게 가선(嘉善)을 더했으니, 진휼을 잘해서였다.
10월 12일 신사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이익원(李翼元)을 정언으로, 정이검(鄭履儉)·이응협(李應協)을 승지로,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를 사은 정사로, 윤득화(尹得和)를 부사로, 윤광찬(尹光纘)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10월 13일 임오
경연관(經筵官) 한원진(韓元震)이 상서하기를,
"삼가 소지(召旨)를 내리시어 신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로 오게 하시어 감히 잘못된 은혜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랐었는데, 성비(聖批)를 받고 보니, 도리어 신이 죽기에 이르러 위태롭고 괴로운 말씀으로 마치 질병을 핑계하여 으레 사양하는 것처럼 되어 신은 어색하고 두려워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대개 신의 나이가 장차 70이 차서 등이 굽고 눈이 어두워서 오랫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무릅쓰고 말을 타느라 덧나서 본래의 병에 별도의 증세가 더 보태져 가까운 산가(山家) 초가집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런데 여창(旅窓)에서 죽도록 외쳐도 떠메여 돌아갈 길이 끊어져 장차 여사(旅舍)에서 죽는 것을 면치 못해 돌아가지 못하는 넋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뜻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위로는 다시 천안(天顔)을 우러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저하(邸下)에게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워 저승에서도 영원히 슬퍼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틈이 나기를 기다려 올라와 나의 미치지 못함을 도우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 이석표(李錫杓)는 신병이 매우 중하니, 체직을 허락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여 《자성편(自省編)》을 강하고 시독관 이중조(李重祚) 등에게 초모(貂帽)를 하사하였다. 이중조가 아뢰기를,
"일전 관소(館所)에 거둥할 때 금부 도사가 나졸(邏卒)을 검칙하지 못해 어주(御廚)의 하인을 구타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우나 그 범한 바가 군무(軍務)가 아닌데 어찌 곤장을 치겠습니까? 수역(首譯)에 이르러서는 바로 하찮은 무리여서 도감(都監)에 내어 주어 다스리게 해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천지처럼 높고 일월처럼 밝으심으로 이런 일에 어찌 성심(聖心)을 번거롭게 하십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박상덕(朴相德)은 말하기를,
"인정문(仁政門)은 바로 정문으로 어찌 군율에 관한 일이 아닌데 관복을 입은 조정 관원을 끌고 다니겠습니까? 참으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또 죄벌은 마땅히 경중을 적당하게 하여야 하니, 방류(放流)하거나 찬적(竄謫)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생각밖의 도에 넘치는 일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매우 좋다. 나 역시 생각해 보았는데 역시 통쾌하게 하려는 병통이다. 나중의 정문이라는 말 역시 좋다. 이번 온천의 거둥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인데 후손을 위해 깊이 염려함도 없지 않았다. 군무가 아닌데 곤장을 쳤다는 말도 그 염려가 깊다. 명나라 말엽에 일찍이 궁정(宮庭)에서 곤장을 친 일이 있어 내가 일찍이 탄식하였다. 또 원접사(遠接使)의 말을 듣건대 건륭(乾隆)228) 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때려 죽였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서 매우 놀랐으니, 이런 일은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바이다. 유신이 간절하게 진계(陳戒)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고, 초모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참찬관 이응협(李應協)이 말하기를,
"지금 관서의 장계를 보건대 무신년229) 에 죄를 지은 무리들을 처음에는 섬에 안치하였다가 문득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번에 사유(赦宥)를 입어 모두 석방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흉도들이 뒤섞여 사유를 입었는데 비록 정원의 복역(覆逆)을 인해 즉시 반한(反汗)230) 하시기는 했으나 몇 달 사이에 두 차례나 사전(赦典)을 행하셨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삼가서 사(赦)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런 방지할 곳에 더욱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가서 사하지 말라는 말이 아주 좋다."
하고, 이어서 선온(宣醞)231) 을 명하였다.
10월 14일 계미
이익정(李益炡)을 형조 판서로, 이기진(李箕鎭)을 판의금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지의금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균청(均廳)과 형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정우량이 아뢰기를,
"흉년의 진휼은 한 도(道)를 통틀어 진휼을 베풀지 않으면 원래 논상(論賞)하는 법이 없는데, 근래에 요행을 바라는 문이 점차 열려 혹 10여 고을이나 혹은 5, 6고을만 진휼을 베풀어도 먼저 포상(褒賞)하여 가자(加資)하니, 아주 미안합니다. 금후에는 한 도를 통틀어 진휼을 베푼 이외에는 상(賞)을 청하지 못하도록 정식(定式)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기(軍器)를 별도로 마련하고서 반드시 헌 군기를 일시에 수리한 연후에야 가자를 허락하라는 칙교(勅敎)가 일찍이 계셨는데, 근래에는 낡은 군기를 수리하고도 아울러 논상을 청합니다. 이후에는 특별히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염문(廉問)하여 만약 부실하면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을 아울러 중률로 다스려야 마땅하니, 이를 제도에 엄칙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대전(大典)》에 이르기를, ‘80세 이상은 양인과 천인을 물론하고 1계(階)를 제수하고, 원래 품계(品階)가 있는 자는 또 1계를 더하며, 당상관은 유지(有旨)가 있어야만 제수한다.’라 하였고, 《속대전(續大典)》에는 이르기를, ‘동반(東班)·서반(西班)으로 일찍이 4품(品) 실직(實職)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나이 80인 자는 해조로 하여금 세수(歲首)에 가자하고, 사서인(士庶人)으로 1백 세인 자는 가자하고, 그 자손이 상언(上言)하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가자와 품계를 제수하는 구별의 한정을 정한 법의 뜻이 매우 엄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 법이 아주 없어져 실직 5품 이하로부터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나이 80에 이르면 모두 상언으로 인해 혼돈하여 가자를 허락해 나이를 늘려 상언하는 폐단이 분분(紛紛)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특별히 전교하시어 추은(推恩)하는 이외에는 한결같이 법전을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교하기를,
"은결(隱結)로서 스스로 현고(現告)한 자는 묻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속대전》에 실려 있고, 또 이번 절목에도 들어 있는데 감히 이처럼 지체해서야 되겠는가? 제도의 도신(道臣)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면 본래 거기에 해당하는 율이 있다. 만약 또 지체하면 해당 수령은 마땅히 숨기고 보고하지 않은 율을 시행해야 하니, 이로써 엄히 신칙해야 한다. 아! 균역(均役)의 일을 마친 연후에야 백성들이 믿게 되고 나도 편히 잘 수 있으니, 지금부터는 제도의 도신을 절대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형조 참판 이성중(李成中)이, 충주의 죄인 이애(李愛)의 율(律)을 언의(讞議)232) 하여 아뢰니, 이애를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라고 하였는데, 이애는 여종의 남편을 죽인 자이다.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 이애의 아들 이종림(李宗林)이 어가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니, 임금이 본도에 조사하라고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장(査狀)이 이미 도착해 이성중이 그 율을 아뢴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율문(律文) 가운데 고공(雇工)을 구타할 율을 참조할 만하다고 하겠는데, 장(杖)을 쳐 도배하는 율은 인명을 중시하는 도리에 있어 아주 너무 가벼운 듯하다."
하고, 마침내 이애를 감사하여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한(漢)나라 순우의(淳于意)가 형(刑)을 받게 되었는데, 그 딸 순우제영(淳于緹縈)이 억울함을 호소해 특별히 육형(肉刑)을 면제했었다233) . 이번 길가에서 이종림이 관(冠)을 벗고 울부짖었으며, 회가(回駕)할 때 기전(畿甸)에 이르도록 곳곳에서 울었으니, 어찌 그 일과 다르겠는가? 그 아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도신에게 명하여 조사해 보고하게 해 율문에 따라 작처한 것 역시 한나라 문제(文帝)와 같은 뜻이다. 비록 그러하나 상명(償命)의 법이 중한데 만약 이 일을 수교(受敎)로 삼으면 혹 이를 빙자해 함부로 죽이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수교에 싣지 말라."
하니, 형조 참의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그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만 살옥(殺獄)은 체통이 중하여 마음대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살인을 하고도 살아난다면 또 장차 살인하는 자가 있게 되니, 이는 사수(死囚)한 사람을 살려 또 한 사람의 사수를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고요(皐陶)234) 의 뜻이다."
하였다.
10월 16일 을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0월 17일 병술
임금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감선(減膳) 10일을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밤중에 일어나 앉아 생각하니, 마음이 떨리고 슬펐다. 기강(紀綱)이 이와 같음은 참으로 나의 박덕(薄德)으로 말미암아서이고, 조정의 기상이 이와 같음도 참으로 나의 박덕으로 맘미암아서이며, 인심이 이와 같음도 참으로 나의 박덕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원량(元良)이 처음으로 정사(政事)를 보니 더욱 면칙(勉飭)해야 한다. 나와 원량은 금일부터 감선 10일을 하겠으니, 대소 신료들은 그 직책에 부지런하여 이런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옥당과 정원에서 천둥의 재이로써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아울러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또 동궁(東宮)에게 진계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간원(諫院)과 춘방(春坊)에서 또 상서하여 진계하니, 왕세자가 아울러 예사 비답을 내렸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차자를 올려 진계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한 가지 견해가 있고 일마다 각기 시비(是非)가 있게 마련이니, 이른바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면 하나는 맞고 성인(聖人)도 반드시 추요(芻蕘)235) 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지난번 이래 여러 진언(進言)하는 신하들이 핑계를 대어 협잡하는 병폐가 있기 때문에 전하께서 조용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고사(故事)까지도 아울러 없애 버리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윤음을 내리시어 고사를 닦으시어 모든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는 경중과 구근(久近)을 물론하고 혹 거두어 서용하기를 명하기도 하고, 혹은 뽑아 쓰기도 하시어 언로를 넓히시면 조정의 노성(老成)한 어진 사람과 초야(草野)의 바른말하는 선비가 충성스런 말과 기이한 모책(謀策)으로 위로 명주(明主)의 뜻에 부응하여 재이를 돌려 상서(祥瑞)가 되는 방도가 없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또 동궁에게 차자를 올려 진계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10월 19일 무자
대사간 송징계(宋徵啓)가 천둥의 재이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은 바로 하늘이어서 한번 기뻐하고 한번 성내는 것 역시 양서(陽舒)와 음참(陰慘)을 본받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병(兵)이란 성인(聖人)이 부득이할 때만 쓴 것으로 그 율(律)은 삼군(三軍)의 이목에 관계되어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한 차례 거둥하시면서 문득 곤장을 치는 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호필(扈蹕)하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금오(金吾)와 전조(銓曹)의 낭속(郞屬)이 군사의 좋고 나쁨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조의(朝衣)를 입은 많은 사람이 기고(旗鼓)사이로 끌려 다녀야 하며, 하찮은 역관(譯官)들 역시 친림(親臨)하여 곤장을 쳤으니 군사 놀이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벼슬하지 않으려는 조사(朝士)를 혹 군율로 위협하기도 하고, 영(營)을 떠난 대장은 잠깐 박벌(薄罰)을 시행했다가 그대로 두었으니, 전하의 사율(師律)이 경중의 마땅함을 잃었으니, 어떻게 여러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겠습니까?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군도(君道)는 날로 강해지고 신절(臣節)은 날로 투박해져서 만약 일언 반사(一言半辭)라도 성상의 뜻에 맞지 않으면 혹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폄손(貶損)하고, 혹은 현저히 꾸지람을 주어 주부자(朱夫子)가 이른바 ‘노예처럼 여기고 돼지처럼 꾸짖는다.’라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우리 전하의 평일의 학문의 공부와 넓은 덕으로써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습니까? 그래서 대소의 관원이 모두 몸을 움츠리고 망서리며 나서지 않아서 조정에 비록 큰 의론과 큰 시비가 있더라도 한 사람도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 본디 관계된 일이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모두가 우리 전하께서 반박하는 의론을 즐겨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가까운 곳에서 살피시어 참으로 한여름의 천둥과 벼락과 같은 위엄으로 성내실 때에는 마땅히 성내시고, 한번 성내신 후에는 그 노여움을 거두시어 연기가 사라지고 안개가 걷히듯 하시면 이 땅에 사는 그 누구가 두려워하고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때아닌 노여움의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마지않아 날마다 그러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목에 익숙해져 도리어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전하께서 천위(天威)를 보이시고자 마음 먹으시면 먼저 마음을 치경(致敬)하시어 희로(喜怒)를 중(中)에 맞게 하시어 행동에 허물이 없게 하신다면 혁혁(赫赫)하게 높으신데 어찌 감격하여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재이를 늦추는 방도는 성(誠)과 실(實)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매양 전하께서는 재이를 만난 처음에는 문득 두려워하는 하교를 하시어 경외하는 마음이 사륜(絲綸)236) 에 넘치시나 마침내 감선(減膳)하는 등의 겉치레만 하고 마는데 불과하여 원래 크게 경동(警動)하시고 크게 분발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양역(良役)의 베 필수(匹數)를 감해준 정사에 이르러서는 성단(聖斷)에서 나와 크게 묵은 폐단을 제거하여 실로 억만년의 끝이 없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전(傳)237) 에 이르기를, ‘절약해 쓰고 백성을 사랑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전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상소를 보건대, 숙묘조(肅廟朝) 때 1년의 경비가 10만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용도가 거의 20만여 냥을 넘고 있으니, 상용(常用)하는 경비를 어디에 소모해 이처럼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궁가(宮家)의 제택(第宅)으로 논하자면 열조(列朝) 때의 공주와 옹주의 제택 값이 1천 금(金)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여러 부마(駙馬)의 제택은 값이 모두 2, 3천 금을 밑돌지 않고, 혹은 이웃집을 더 사들여 넓히기도 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항간에 사치가 날로 성해지고, 집과 집물(什物)의 사치가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근본을 따져 보면 공사(公私)를 물론하고 모두 재물을 축내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어서 전하께서 평일 몸소 절검(節儉)하는 뜻과 아주 다르니, 신은 삼가 옛사람의 ‘궁중의 높은 상투[髻]가 사방 한 자나 된다238) .’는 노래를 전하를 위해 외어드립니다. 또 지금의 조정에는 미열(媚悅)239) 이 풍습을 이루어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말이 한번 나오면 순순히 따르는 것만을 일삼고 혹 웃거나 울면서 전혀 존경하는 모습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조정의 체면입니까. 암아(媕娿)240) 가 날로 심해져 관사(官師)241) 가 서로 규간(規諫)한다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복(福)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정언 이익원(李翼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직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寶齡)이 높으시어 성지(聖志)가 점점 피곤하여 혹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기색이 일을 하는 사이에 저절로 나타나고 넓은 뜻이 인접(引接)하는 즈음에 때때로 드러나며, 뜻을 두면 일의 선부(善否)를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단행하여 통쾌하게 하며, 말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이치의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꺾어 누르기에 힘쓰시어 병의 근원을 이루고 폐단의 근본을 끼치고 있습니다. 근래에 전하께서 이목의 책임을 맡기고 논사(論思)하는 직임을 부탁한 자는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것이 풍습을 이루고, 아첨하여 잘 보이는 것이 법도가 되어 임금의 잘못은 처음부터 바로잡아 보필하려는 뜻이 없고, 조신(朝紳)의 허물과 악행을 서로 모르는 체하여 죄를 면하게 하는 것을 장책(長策)으로 삼아 자리를 보존하는 계책을 삼고 있습니다. 임금의 마음을 바루는 대신으로서 조정 일을 계획하는 자들도 전혀 떨치고 일어나려고 애를 쓰는 정사(政事)가 없고, 연석(筵席)의 진대(進對)에는 거의 공손하게 순종하는 데 가깝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일 여러 종신(宗臣)들의 상서에 대해 10행의 사륜(絲綸)으로 성상의 뜻을 분명하게 보이시어 신은 감탄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아! 천둥과 번개의 소리가 우리 행궁(行宮)을 뒤흔들고 칙사(勅使)의 행차가 이미 우리 국경에 들어왔는데 이에 온천에 거둥하였다가 막 돌아오는 날에 서로 이끌고 상서하기를 마치 하루 종일을 기다릴 수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학식이 없는 여러 종인(宗人)이야 괴이할 것도 없으나 전후해서 등대(等對)한 대료(代僚)들 역시 한마디도 전하를 위해 겸손한 덕을 이루어 주고 누습(陋習)을 드러나게 배척한 자가 없음을 신은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10월 20일 기축
전교하기를,
"두 대신(臺臣)이 아직껏 피혐(避嫌)하지 않고 있다는데, 이미 엄한 하교를 들은 뒤이니, 금오(金吾)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대죄(待罪)해야 옳을 것인데 끝내 인피(引避)하지 않으니, 방자하고 무엄하다 하겠다. 대사간 송징계(宋徵啓)와 정언 이익원(李翼元)을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신묘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전교하기를,
"망전(望前)·망후(望後)의 입시(入侍)는 같으니, 날짜를 하교함이 있거나 혹은 품정(稟定)할 일이 있거든 입시하라."
하였다.
10월 23일 임진
천둥하고 번개가 쳤으며, 우박이 내렸다.
정원에서 연명으로 아뢰어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또 동궁에게 진계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차자를 올려 진계하니,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차하기를,
"어제 밤에 천둥과 번개가 또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이것이 무슨 상(象)이라고 여기십니까? 반드시 위망(危亡)의 화(禍)가 아침저녁 사이에 임박한 것인데도 전하께서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한 육사(六事)242) 나 송(宋)나라 경공(景公)이 한 한마디의 선언(善言)을 하셨다는 말243) 은 듣지 못하겠고 다만 서너 사람의 종신(宗臣)이 연달아 아첨해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을 올려서 장차 용안[天日]을 그리고 금석(金石)에다 새겨 하늘이 큰 노여움을 보일 때 장황(張皇)하게 빛내려 하는데도 전하의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익원(李翼元) 한 사람의 말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윤허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몹시 성내시어 허다한 엄한 하교가 계셨습니다. 송징계(宋徵啓)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말마다 충직하고 마디마디가 강개(慷慨)하였는데도 역시 받아들이심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경고(警告)에 응하여 재이를 늦추는 술책이 이러하니, 하늘이 전하께 경고한 것이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금년에는 큰 역질이 유행하여 사망한 백성이 거의 수십만 명에 이르러 들판에 드러난 해골(骸骨)이 뒹글고 있으며, 여염 마을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때가 어떤 시절입니까? 그런데도 종신(宗臣)들이 전하를 이와 같이 인도하니, 아! 종신들만은 유독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제(齊)나라 사람들이 내가 왕(王)을 공경하는 것만도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종신들이 전하에게 불경(不敬)함이 심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도리어 대신(臺臣)이 종신에게 불경하다고 하교하시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수창(首唱)한 종신은 빨리 견책(譴責)하여 파직하고, 이익원과 송징계의 상소를 다시 바치게 하여 조용히 비답을 내리고, 체차하라는 명과 전후의 불평스런 하교를 모두 거두시어 한마음으로 인외(寅畏)하여 지성으로 대월(對越)하면 거의 천심(天心)이 기뻐하여 재이가 소멸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찌 많은 유시(諭示)를 하랴? 그러나 경의 한결같은 병통은 바로 ‘쾌(快)’ 자 하나에 있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이러한 의리는 이미 대략 알고 있어서 그걸 통렬히 배척하는데 어찌 경의 차자를 기다리랴만, 소중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경은 비록 늙었으나 글은 젊을 때와 같아 소중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필(一筆)에 통쾌하게 하려 한다. 나이 젊고 무엄한 무리를 어찌 족히 비난하랴. 경을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10월 24일 계사
대신과 비국 당상이 천둥의 이변으로써 청대하니, 전교하기를,
"하교하는 날에 들어오라."
하였다.
10월 25일 갑오
영의정 조현명이 연석(筵席)에서의 하교가 준엄하다는 것으로써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렸다.
10월 26일 을미
좌의정 김약로와 우의정 정우량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그저께 서로를 이끌고 청대하였다가 삼가 ‘하교하는 날에 들어오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한 달에 두 번 입시하는 것으로 제도를 정한 것도 여러 신하들의 진대(進對)가 매우 드문 편입니다. 이제 또 그 드문 것조차 행하지 않고 단지 하교하는 날과 품정(稟定)할 일이 있기를 기다리다가 만일 한 달 안에 혹 ‘너희들은 오라.’는 옥음(玉音)을 받지 못하거나 혹 품정할 일이 없으면 한 달 동안 입시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찌 한 달뿐이겠습니까? 비록 두 달, 세 달이 되고 1년에 이르러도 입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두 차례 진대하는 때도 사이가 뜨고 안색을 우러르는 날이 드물지 않은 것이 아니나 그래도 응당 행할 날이 보름 전과 보름 후에 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제 명하기를, ‘오직 하교하는 날만 입시해 들고, 오직 일을 아뢸 자만 진대하라.’ 하시니, 이는 성상의 마음이 실로 ‘너희 여러 신하들을 만나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하고자 그 법을 분명치 않게 하신 것입니다. 대저 신하로서 군부(君父)를 뵙지 못한다면 살아나서 무엇하겠으며 어떻게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특별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또 삼가 생각하건대 3일 동안 밤에 눈이 오면서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이는 더욱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어서 고로(故老)들이 모두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였다.’라고 합니다. 연달아 3일 동안 하늘의 노여움이 무섭게 겹침이 이와 같은데 어찌 말미암은 바가 없이 그렇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먼저 신들을 물리치라 명하시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상의해서 잘못된 정사를 강구(講究)해 하늘의 견고(譴告)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기(氣)가 바야흐로 성대하니, 다시 무슨 유시를 하랴?"
하였다.
황재(黃梓)를 호조 참판을 삼았다.
10월 28일 정유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날 동안 구대(求對)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절하시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약 잠시 인접(引接)을 허락하시어 마음을 벌려 주시면 신들이 구구한 소회(所懷)를 다 진달하겠으니, 빨리 소견을 허락하시기를 천만 간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만두라."
하였는데, 세 번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9일 무술
빈청에서 아뢰기를,
"신들은 보름 전과 보름 후의 인대(引對)를 정지하라는 하교를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세자에게 기무(機務)를 대리하게 한 것은 노고를 나누려는 뜻이어서 군국(軍國) 형정(刑政)의 중요한 일은 위로 성단(聖斷)을 거치지 않을 수 없고 응당 처리해야 할 공무는 비록 동궁(東宮)이 헤아려 처리하기는 하지만 대소의 신료가 대조(大朝)에 등대하는 것은 스스로 법식대로 해야 하지만 여러 신하들이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모든 진접(進接)하는 절차를 보통 규정보다 조금 줄였습니다. 또 성교(聖敎)로 인해서 여러 차례 고치고 여러 번 다투다가 마침내는 단지 한 달에 두 번만 인대하기를 허락하시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드문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규정을 없앤다면 신료들이 등대할 길이 끊어져 상하의 마음과 뜻이 막히어 통하지 못해 마침내는 나라가 없게 됩니다. 혹 전하께서 이에 생각이 미치시면 어찌 차마 신들의 청을 끝내 거절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연중(筵中)에서 군민(軍民)의 정사와 균역(均役)의 일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하교하셨다고 하는데, 그러나 전하께서 인접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군민의 정사를 어디를 말미암아 위에 진달하며, 균역의 일 역시 어디를 말미암아 우러러 아뢰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전지(前旨)를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자성모(慈聖母)께서 임(臨)하신 지 50년이니, 지난 역사에 이런 일이 언제 있었겠는가? 그런데 저 이익원(李翼元)은 무슨 마음으로 ‘전례에 없지 않다[不無典禮]’라는 네 자를 상소문에 쓴단 말인가? 아! 백수(白首)인 고굉(股肱)의 신하가 그를 편들어 이름을 낚으면서 중한 바를 돌보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뜻밖이다. 나에게도 정한 바가 있으니, 모름지기 이 마음을 이해하라."
하였는데, 대개 이익원의 상소 가운데 종신(宗臣)의 소청(所請) 가운데 있는 ‘전례에도 없지 않다.’라는 말을 인용했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었다.
정원에서 아뢰어 청하기를,
"보름 전과 후의 입시를 정지하라는 하교를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과 경재들이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영의정 조현명은 특별히 상직(相職)을 면하기를 허락하니, 윤강(倫綱)을 엄히 하라."
하였다.
이익원(李翼元)을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삭간(削刊)하였다. 전교하기를,
"왕자(王者)의 처분을 마땅히 정대(正大)하게 해야 하니, 어찌 소절(小節)에 구애되어 태후(太后)에게 소홀히 하겠는가? 만약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윤강(倫綱)이 이로부터 무너진다. 이익원은 사판에서 영원히 삭간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재로가 상차하기를,
"때아닌 때에 천둥을 하는 재이는 한 번만 있어도 오히려 두려운데 더군다나 대여섯 차례나 밤마다 연달아 있으니, 하늘의 경고(警告)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어서 대소 신료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성명(聖明)께서 하늘의 견고에 응하는 것은 한결같이 어찌 옛 가름침이나 상도(常道)와 다름이 있습니까? 진계(陳戒)한 말이 문득 견책(譴責)을 받게 되고, 몹시 성내는 전지(傳旨)를 받들 수가 없어 영상(領相)이 나라를 떠나고 낭묘(廊廟)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두 번 입시하는 것을 또 중지하라는 명이 계시어 대신이 종일 청대하였으나 막막하게 윤허를 입지 못해 상하가 막히고 천지가 막히어 시급히 품정해야 할 일을 모두 물리치시니, 예로부터 재이를 만난 나라에 이와 같은 모양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하루 이틀에 이런 일을 고치시지 않으시면 장차 나라 일을 어떤 지경에 두려고 하십니까? 지금 추위와 더위가 수시로 바뀌고, 겨울 안개가 사방에 끼어 기후가 더욱 어그러지고 있으니 이것이 또 무슨 모양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시어 마음을 돌려 빨리 빈청의 계사를 따르시고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여 나라 일을 강론하시고 교수(交修)하기를 칙려(勅勵)하여 하늘의 위노(威怒)에 사례하여 온 나라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시임 대신(時任大臣)에게 유시하였다. 이 역시 고심하고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이해하라."
하였다.
10월 30일 기해
우박이 내렸다.
빈청과 정원에서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상차하기를,
"어제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영의정 조현명에게 상직(相職)을 면하라는 명이 계시어 신은 매우 우려하고 개탄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조현명은 바로 전하께서 30년 동안 맡기어 부린 신하이니, 전하께서 어찌 그 사람됨을 모르겠습니까만 신은 삼가 강직한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여깁니다. 그의 마음이 깨끗하고 곧아서 굽히어 헤아리는 것이 적기 때문에 글과 말에 나타난 것 역시 그러합니다. 성교(聖敎)에서 이르신 하나의 ‘쾌(快)’ 자는 그런 병통이 없지 않으시니,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이번 차자의 말로 보더라도 신 역시 그 굽힘이 없는 것을 흠으로 여겼지만 그러나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굴원(屈原)의 잘못은 충(忠)이 지나친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이 역시 충애(忠愛)가 지나쳐서입니다. 전하의 신하 가운데 대절(大節)을 세울 때를 당해 빼앗지 못할 자는 유독 이 한 사람이 있는데 이제 ‘윤강(倫綱)을 엄히 하라.’고 전교하시어 면직시켰으니 아! 전하께서는 어찌 그렇게 하십니까? 신과 조현명은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이 전해지자고 하는 약속이 있었고, 태사(台司)244) 에 이르러서는 한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해 거의 위로는 임금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되었는데, 이제 실정이 아닌 죄가 이에 이르니, 신은 실로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이 바야흐로 합문에 나와 청대(請對)하고 있는데 사방에 천둥과 번개가 쳐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나 성상의 지나친 거조를 보고 이에 감히 짧은 차자로 진달해 아뢰오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전 영의정 조현명에게 상직을 면하라는 명을 거두시어 성덕을 빛내시면 나라 일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되고 영상은 소하(簫何)가 되었다245) . 그러나 내가 비록 효심(孝心)이 적지만 소중한 일에 관계된다. 경들의 조(祖)·부(父)는 바로 옛날의 신하인데 어찌하여 요상(僚相)만 위하는가? 마땅히 태후(台后)도 생각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약로 역시 차자를 올려 조현명에게 상직을 면하라는 명을 정지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72권, 영조 26년 1750년 12월 (0) | 2025.10.02 |
|---|---|
| 영조실록72권, 영조 26년 1750년 11월 (0) | 2025.10.02 |
| 영조실록72권, 영조 26년 1750년 9월 (0) | 2025.10.02 |
| 영조실록72권, 영조 26년 1750년 8월 (0) | 2025.10.02 |
| 영조실록71권, 영조 26년 1750년 7월 (1) | 2025.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