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신축
임금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및 경재(卿宰)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눈앞의 일은 오히려 두 번째에 속한 일인데 어찌 경들을 소견하고 싶지 않아서 한번이란 글자에 고심하였겠는가?"
하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만약 보름 전과 후의 차대(次對)를 없애면 신료들이 진현(進見)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약로는 말하기를,
"대리한 후에 여섯 차례의 차대를 없애고 시좌 차대(侍坐次對)를 했는데, 그후에 시좌 차대를 없애고 보름 전과 후의 차대로 했습니다. 이제 또 보름 전과 후의 차대를 폐지하면 이는 전하께서 장차 영원히 차대라는 이름을 없애고 다시는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으려는 뜻이니, 신들이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익원(李翼元)은 ‘전례(典禮)에 없지 않다.’라는 말을 신하인 자로서 어찌 감히 발언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영상이 백수(白首)의 나이에 달가운 마음으로 옹호함은 무슨 마음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영상이 대신(臺臣)을 편들고 종신(宗臣)을 파직하라고 청하여 내가 매우 개탄했었다. 내가 영상 때문에 곤란에 처한 것이 몇 번이었는가? 향(香) 주머니의 색이 바라면서 이현필(李顯弼)의 일이 있었고 주서(朱書)를 인용하여서 송형중(宋瑩中)의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영상의 ‘쾌(快)’ 자의 병통 때문이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보름 전과 후의 차대를 정지한 전교를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3일 임인
우박이 내리며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연중(筵中)에서 유음(兪音)을 듣지 못하여 밤새도록 합문(閤門)을 지켰는데, 다시 전의 청을 거듭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빈청에서 재계(再啓)하고, 옥당의 청대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4일 계묘
천둥의 이변으로 인해 감선(減膳) 10일을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명리(趙明履) 등이 아뢰기를,
"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하늘이 위엄으로 견책하여 천벌의 징조가 거듭 이르고 있는데, 성상께서 매우 성내시어 거조가 평정을 잃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중외(中外)가 들끓고 있는데 복월(復月)246) 에 천둥 번개의 재이가 어찌 또 일어납니까? 음양(陰陽)이 서로 부딪혀 우박이 뒤섞여 내려 시인(詩人)이 이른바 ‘불안해하고 두려워 한다’는 것이 오늘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아!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면 반드시 견책이 위로 나타나는데 그 감응하는 이치가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빠릅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궁리(窮理)·격치(格致)가 이미 깊으시니, 삼가 생각하건대 밤늦게 주무시며 경계하여 마음에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아! 지금의 광경이야말로 진실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해도 부족하다 할 것인데, 성상의 근심하고 슬퍼하시는 마음으로 이제 도리어 팔짱을 낀 채 제왕(帝王)의 모습만 지으시고 모든 기무(機務)를 제쳐두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한 달에 두 번 인접하는 것도 오히려 드물다고 할 것인데 도리어 정지하라는 명이 계셨으며, 5일 동안 합문(閤門)을 두드리며 울부짖어서 겨우 한번을 뵈었으나 윤허한다는 전지를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몹시 성내시어 말씀이 예사롭지 않으므로 상하가 반목(反目)하여 마음과 뜻이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맺힌 정성으로 올린 상소문에 한결같이 비답을 아끼고 계시며, 군국의 기무에 대한 주달(奏達)도 계하되지 않고 있어서 인심이 소란하고 나라 형세가 위태로워 휴식할 곳을 모르는 형편입니다. 이같은 기상으로 장차 어떻게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어 아름다운 명(命)을 맞이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지금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법은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께서 마음깊이 생각하시어 두려운 마음으로 뉘우쳐 지난달 22일의 전교를 속히 거두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장 급한 일이니,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태구(泰九)의 시의(時義)247) 를 채득하시고, 비륙(否六)의 규저(暌阻)248) 를 깊이 징계하시어 빨리 풍뢰(風雷)의 익(益)249) 을 옮겨 일월(日月)이 다시 뜨는 것을 우러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주 신료들을 인접하시고, 연방(延訪)250) ·주자(疇咨)251) 하시어 하늘의 견책에 응하는 실제의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면려함이 절실하니,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정원에서 또 아뢰어 진계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지평 안치택(安致宅)이 상소하기를,
"언로(言路)가 오랫동안 막혀서 실로 끝없이 염려됩니다. 말로써 죄를 얻은 자들이 대부분 경계(警戒)하고 있는데 다행히 두 간신(諫臣)이 뇌정(雷霆)의 위엄을 무릅쓰고 근포(芹曝)252) 의 정성을 바쳤으니, 조양(朝陽)에 봉(鳳)이 한 번 울었다253) 고 할 수 있는데 그 상소를 돌려주고 갑자기 체차하여 물리쳤으니, 청컨대 전교를 다시 거두소서. 전(前) 진선(進善) 윤봉구(尹鳳九)는 학문의 연원이 있고, 명망이 조야(朝野)에서 중한데도 행궁(行宮)에서 사대(賜對)하고는 뒤따르는 수레에 태워 데리고 오지 않아 사림(士林)이 서운해 하고 모두 처음만 있고 끝이 없었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더욱 성의와 예의를 돈독히 해서 서울로 불러다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차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다시 지나친 거조를 하신다는데, 이는 본디 여러 신하들의 죄이기는 하나 전하께도 역시 잘못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동조(東朝)를 존경해 받드심이 어찌 그 끝이 있기에 깊은 곳에 팔짱만 끼고 계시면서 상하가 막히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모양입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명(明)나라 만력(萬曆) 10년254) 가을 8월에 황제(皇帝)의 원자(元子)가 출생하여 태후(太后)에게 휘호(徽號)를 더 올렸으니, 금년 8월의 경사와 한결같이 어찌 그렇게 서로 부합됩니까? 신이 헌하(獻賀)할 때 미처 명나라의 고사(故事)를 진달하지 못해 지금까지 한탄하고 있습니다. 빨리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를 불러 마음의 정성을 진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인용한 고사는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아! 모후(母后)께서 임하신 지 50년이니 나라 역사에 드물게 있는 일인데 애일(愛日)하는 마음으로 어찌 여러 신하들의 청을 기다려 하겠는가? 말없이 있었던 것은 그 뜻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하니, 원경하가 다시 상차하기를,
"삼가 《명사(明史)》를 상고해 보건대, 태후의 인자하심과 신황(神皇)의 효성이 명나라와 우리 나라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하물며 우리 성모(聖母)께서 임하신 지 50년이 되셨으니, 이는 명나라에는 없던 바로 우리 나라에만 유독 있는 것입니다. 만력 5년 동안에 재차 태후에게 휘호를 올렸는데 왕이 작호(爵號) 내려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청했던 것은 사체를 존중해서입니다. 신의 하찮은 정성은 오직 우리 임금께서 효성을 바치기만을 바라오니, 삼가 원하건대 지나친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과 경재 및 정원·옥당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전후의 하교를 모두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우참찬 원경하가 말하기를,
"지난날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 가운데서 ‘마땅히 태후(太后)를 생각하라’는 등의 글자는 고쳐야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날 영상(領相)의 면직(免職)을 허락하는 하교 가운데 있는 ‘윤강(倫綱)을 엄히 하라.[以嚴倫綱]’ 네 글자 및 좌상과 우상의 차자 비답 가운데 있는 ‘마땅히 태후를 생각하라.[宜思太后焉]’의 다섯 자를 지우라."
하였다. 좌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동조(東朝)께서 모후(母后)로 임하신 지 곧 50년이 되십니다. 장렬 왕후(莊烈王后)255) 의 주갑(周甲) 때 선조(先朝)에서 숭봉(崇奉)하는 예(禮)를 행하였으니, 전하께서도 거행하기를 명하셔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는데 어찌 갑자기 하교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지금은 천재(天災)가 이와 같아서 신들이 우선은 진달해 청하지 못하나 명년은 꼭 50년이 되니, 마땅히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지나친 거조를 하시어 나라 일이 문득 뒤쳐지게 되어 실로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내가 사기(辭氣)를 높여 처리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명나라의 일과 우리 나라의 오늘날 일이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신이 두 번에 걸쳐 차자로 진달한 것입니다."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비록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가 있기는 하지만 그때의 정령(政令)을 어찌 반드시 모두 본받겠습니까?"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명나라의 전장(典章)을 비난하여 배척하는 것이 옳은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을 까다롭고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중신(重臣)들이 전하께서 동조(東朝)를 존숭해 받들지 못하시어 이런 거조를 하신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차자를 올린 것입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신이 경신년256) 에 존호를 올릴 때 일찍이 빈청(賓廳)의 계사(啓辭)를 만들었으나, 이번에는 영상이 동조께 존호 올리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데 동요되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말을 어찌 그렇게 합니까? 사람을 참소하면 사람이 다 죽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자는 그 때가 아니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못났으나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는데 어찌 미관 말직에 있는 사람처럼 시기를 틈타 영합하여 차자를 진달하겠습니까? 대신은 그림자를 감추고 말하지만 신은 본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을 승지로, 윤동준(尹東浚)을 대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이사조(李師祚)를 장령으로, 이진길(李晉吉)을 지평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채제공(蔡濟恭)·이준휘(李儁徽)를 정언으로, 신위(申暐)를 부응교로, 임상로(林象老)·김상구(金尙耉)를 교리로, 김치인(金致仁)을 부교리로, 이득종(李得宗)을 수찬으로, 이양천(李亮天)을 부수찬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사서로, 김치인(金致仁)을 겸 문학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예조 판서로, 조현명(趙顯命)을 영돈녕으로 삼았다.
11월 5일 갑진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돈녕 조현명이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였다.
이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이 아뢰기를,
"원손 안태사(元孫安胎使)를 신의 조(曹)에서 차출해야 하는데, 전례를 상고하니 고 상신인 이후원(李厚源)을 2품(品)으로 하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경(亞卿)으로 차출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교도(敎導)하는 사부(師傅)가 중요한데, 양조(兩朝)의 실록(實錄)에는 모두 사부로 차출하기를 청하였으니, 그런 예는 알 수 있으나 다만 몇 품이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이는 중요한 국사이어서 마땅히 미리 강정(講定)해야 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7일 병오
윤득화(尹得和)를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7일 병오
사은 겸 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부사(副使) 황재(黃梓), 서장관(書狀官) 임집(任)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부사 황자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미천하나 역시 경악(經幄)의 옛 관원이어서 일찍이 《자성편(自省編)》을 보고 흠탄(欽歎)하면서 ‘성상께서 어찌 다시 지나친 거조를 하시겠는가?’라고 하였었습니다. 그 후에도 지나친 거조가 잦으셨고, 이번에 이르러서도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으셨으니, 성덕을 손상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거두신다고 하교하시어 모두 성대한 뜻을 우러르고 있으니, 이후에는 더욱 힘쓰시어 다시는 지나친 거조가 없도록 하시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간략하니 극진하다. 일로 인해 지나친 거조를 하는 것은 나 역시 후회한다."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무늬 있는 비단이 비록 이미 금조(禁條)에 들어 있지만 기타 사치를 돕는 물건도 마땅히 금해야 한다."
하였다.
11월 8일 정미
부수찬 이양천(李亮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근년 이래로 재이가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으니, 비록 군신 상하가 두려운 마음으로 고치기를 도모하더라도 오히려 소멸시키기에 부족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거듭 예사롭지 않은 지나친 거조를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고 일을 행하는 즈음에 혹 스스로 반성하는 뜻이 부족하십니다. 비록 천재와 시변(時變)이라 할지라도 임금이 스스로 그 허물을 책임져야 할 일인데 때로는 인심과 세도(世道)로 핑계대고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인심을 기쁘게 복종시키도록 하고자 하면서도 이와 같이 하시기 때문에 뜻이 날로 자만하고 군도(君道)는 날로 높아져서 이것이 지나친 거조를 하게 되는 근본이 되며 바로 이 한 생각이 재이를 부르는 단서가 되기에 족합니다. 신에게 또 깊이 우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경(書經)》에 ‘내가 어기는 것을 너희들이 보필하고 너희들은 면전(面前)에서 아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왕(聖王)의 다스림은 오로지 신료들이 교수(交修)함에 있는데 이제 위에서는 비상한 잘못이 있고, 아래에는 바로잡는 사람이 없어 대소의 신하들이 모두 공손히 따르기만 하여 비록 이러한 때를 당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안일 무사만 일삼아 한결같이 순종하는 모습만 하고서 일찍이 털끝만큼도 바로잡는 말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고 일을 바로잡는 도리이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지금은 상하가 말을 꺼리는 것이 이미 심하고 대소 신하가 입을 다물고 잠잠한 것이 풍속을 이루어 조정에 바른 말이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또 어찌 일찍이 천갈래로 뒤흔들고 백방으로 시험함이 있었기에 대신의 차자에 이런 말이 있게 되었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하고서 성심(聖心)을 넓게 열고 언로(言路)를 넓히려 해도 되겠습니까? 성상은 남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만 더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근일에 말하는 자들이 모두 임금은 거만해지고 아랫사람은 아첨하는 것이 오늘날의 큰 걱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실로 한 세상의 여론입니다. 그런데도 대신이 이에 혹 임금은 해이되고 아랫사람은 방사(放肆)한 것이 병통이라고 하여 천둥이 발동하는 상(象)을 하늘이 이를 경계한 것이라는 말까지 하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야흐로 성상의 노여움이 은연중에 나타나 여러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는 때에 묘당(廟堂)의 의논이 이와 같음 역시 우려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두려워하시어 평상시에도 재변을 만나는 날처럼 하시어 잘못을 두 번 하지 마시고 자주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시며,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문을 널리 열어 뜻에 따르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인심을 기꺼이 복종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초복(初覆)257) 을 행하였다.
11월 9일 무신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평상시에 일식(日食)·월식(月食)이 하늘 끝에서 보이면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11월 15일 갑인(甲寅) 보름날 월식을 하는데, 사편법(四篇法)으로 추산(推算)하건대 명나라 역법(歷法)으로는 월식하지 않고, 시헌법(時憲法)으로는 신시(申時) 정삼각(正三刻)에 다시 둥글게 되며, 내편법(內篇法)으로는 다시 둥글게 되는 것이 유시초(酉時初) 초각(初刻)이며, 외편법(外篇法)으로는 다시 둥글게 되는 것이 유시초 3각(三刻)입니다. 삼편법(三篇法)으로 보면 해가 들어갈 때와 서로 가까워 대궐 뜰에서 바라보아서는 즉시 징험해 보기가 어려울 듯하니, 전례에 의해 감관(監官) 2원(員)을 별도로 정해 남산(南山)에 올라가 자세히 보게 하여 달이 뜰 때 미처 빛을 회복하지 못한 형상이 있으면 마땅히 불을 피워 서로 알려 구식(救食)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1월 11일 경술
유언국(兪彦國)을 사간으로, 이수관(李壽觀)을 헌납으로, 박사눌(朴師訥)·이만회(李萬恢)를 지평으로, 윤급(尹汲)을 부제학으로, 김양택(金陽澤)을 필선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판의금으로, 신만(申晩)을 지돈녕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삼았다.
명하기를,
"세손사(世孫師) 1원(員)은 숭록(崇祿) 종1품으로, 부(傅) 1원은 숭정(崇政) 종1품으로 정하라."
하였는데, 이때 세손 사부(世孫師傅)를 차출하려고 하였으나, 예(例)를 상고할 수가 없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세자가 입학할 때에는 대제학이 박사(博士)가 되니, 세손이 입학할 때에는 예문 제학이 되고, 원자(元子)의 안태사(安胎使)를 중신(重臣)으로 차출하니, 원손의 안태사는 재신(宰臣)으로 차출해야 하는데, 이는 참조(參照)해서 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예조에 명하기를,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영부사 김재로가 말하기를,
"마땅히 성교(聖敎)를 참조하여 대략 동궁(東宮)의 사부와 차등을 두어야 합니다."
하고, 다른 대신의 의논 역시 같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11월 12일 신해
서명구(徐命九)를 안태사로 삼았다.
11월 16일 을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11월 19일 무오
형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상소하기를,
"삼가 전하께서 현기증이 있어 삼복(三覆)을 기다리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사형수의 삼복은 국가의 대정(大政)으로 바로 성상께서 불쌍하게 여겨 흠휼(欽恤)하는 뜻입니다. 근래에 성후(聖候)가 연달아 정섭(靜攝)하는 중이어서 계복(啓覆)을 행하지 못한 지가 지금 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사람이 지금까지 옥에 갇혀 있는 자가 있고, 혹은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지금까지 요행히 면하는 자도 있어서 형(刑)을 자세히 하는 것으로 논하면 모두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이제 초복(初覆)과 재복(再覆)을 막 거쳤는데 삼복이 이처럼 지연되어 만약 이달을 넘기게 되면 장차 정폐(停廢)될 형세여서 경외(京外)의 허다한 죄수가 반드시 체옥(滯獄)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잠시 현기증이 조금 덜할 때를 기다려 즉시 삼복을 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임금에게 질병이 있는 줄은 모르고서 신하로서 먼저 떠보는 것이 의리인가? 돌려주라."
하였다.
도승지 조명리(趙明履)가 아뢰기를,
"형조 판서의 상소를 돌려 주라고 하고, 이어서 ‘삼복은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라.’ 명이 계셨습니다. 대리(代理)한 후, 대조(大朝)에 아뢰는 것은 단지 형옥(刑獄)·군정(軍政)·용인(用人) 세 가지 일 뿐이어서 이는 결코 대신 행해서는 안되므로 신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이 말하기를,
"삼복은 물려서 행해도 무방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약로는 말하기를,
"삼복을 물려서 하는 것과 대신 행하게 하는 것은 경중(輕重)이 아주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복을 대신 행하는 것 역시 전례가 있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이는 바로 대조에서 하실 일이지 동궁이 어찌 대벽(大辟)258) 을 논단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절목(節目) 사이의 일에 불과하다."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이 절목이 바로 대절(大節)인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비망기(備望記)를 다시 바치고서 물러났다.
11월 20일 기미
우박이 내렸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11월 21일 경신
전교하기를,
"현기증이 다시 일어나 아직껏 낫지 않고 있다. 만약 이렇게 낫지 않으면 금년의 삼복을 또 못하게 되는데, 율(律)에 의해야 할 자는 비록 법을 늦추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혹 살려 줄 자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결단하지 않아 만일 감옥에서 죽게 되면 어찌 왕법(王法)으로 차마 할 일이겠는가? 율에 의해야 할 자와 살려 주어야 할 자를 초복(初覆) 때 여러 사람의 의견으로 이미 결단하고, 지금은 단지 일복(一覆)만 남아서 대신 행하도록 지시하고자 했는데 여러 신하들이 굳이 다투어 아직껏 지체되고 있다. 양복(陽復)259) 이 가까워져 차거운 날씨가 이와 같으니 짐작해서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여러 죄인을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살려 준 사람이 5인으로 이어서 해조에 명하여 즉일로 거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소대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철장·목마(鐵杖木馬)260) 는 이미 뜻이 있었으나, 다시는 성어(聖語)가 들리지 않음은 왜인가?"
하니, 참찬관(參贊官) 황경원(黃景源)이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를 좋아한 자는 드물었습니다. 주자(朱子)의 봉사(封事)에 군덕(君德)의 궐실(闕失)과 조정의 시비(是非)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는데, 복수하여 치욕을 씻는 의리를 반복해 개진(開陳)하였으나 이를 당시 임금이 쓰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 효종 역시 현군(賢君)이니, 강화(講和)의 설은 잘못된 것일 뿐이다."
하였다.
11월 23일 임술
임금이 대신과 균역 당상(均役堂上)을 인견하였다. 균역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지난번 경상 감사 민백상(閔百祥)의 장계를 보건대 말하기를, ‘수군(水軍)에게 줄 양미(糧米)를 마련해 낼 곳이 없으니, 긴요하지 않은 진보(鎭堡) 서너 곳을 혁파하고, 다대포(多大浦)의 전선(戰船) 2척 가운데 한 척을 줄여야 하니, 전선 한 척을 줄이면 수군이 거의 1천 명에 이르러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다대포는 선항(船港)이 아주 좋아 다른 진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당초 세 척을 마련해 둔 것은 깊은 뜻이 있었으니, 지금 줄여서는 안 됩니다. 진보에 이르러서는 임진년261) 후에 징창(懲創)하여 설치한 것이 매우 많아서 두모포(豆毛浦)나 개운포(開雲浦) 등은 모두 한곳에 있어 매우 긴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해행(海行)할 때에 자세히 보고는 마땅히 감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입시한 승지(承旨)도 그때 신과 함께 보았습니다."
하니, 승지 남태기(南泰耆)가 말하기를,
"동래(東萊)의 여러 진(鎭)은 거의 바둑알처럼 설치되어 있어 과연 긴요하지 않아서 비록 한두 곳을 감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다대포는 형편이 가장 좋아서 부산(釜山)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앞에 큰 바다가 있고, 산맥(山脈) 한 줄기가 바다로 들어가 둘러싸 하나의 큰 호수와 같아서 전선(戰船)을 더 설치해야지 어찌 줄이겠습니까?"
하니, 남태기가 말하기를,
"다대포는 배를 대어 두기에 가장 편리하여 사람들 모두가 좌수영(左水營)을 마땅히 이곳으로 옮겨 설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개 좌수영 앞의 항구(港口)는 모래가 메워져 선박을 대기가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에 그림으로 그려 들이라."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다대포의 전선(戰船)은 참으로 감해서는 안되나 긴요하지 않은 진보(鎭堡)는 줄이더라도 조금도 방해될 게 없습니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진보의 있고 없음을 관계할 것 없이 혁파하여 수군(水軍)을 줄이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하니, 이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진보를 혁파하면 전선(戰船) 역시 줄여야 합니다. 전선 하나에 딸린 군병(軍兵)이 8백여 명이니, 긴요하지 않은 자를 줄이면 균청(均廳)의 일에 도움이 됩니다. 포항(浦項)·산산(蒜山) 등속과 감목(監牧) 몇 자리를 오래 근무하는 자리로 만들어 두면 비록 4, 5개 진보를 감하더라도 장사(將士)들이 실망할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홍계희가 아뢰기를,
"네 가지 일 가운데 선무 군관(選武軍官)의 일은 백성들의 원망이 없지 않아서 시골에서 올라온 자들이 공동(恐動)하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처음 창설하는 초기에 어찌 원망하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한때의 원망하는 말 때문에 먼저 흔들려서는 안되니, 마땅히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을 엄히 신칙해서 잘 마치도록 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남태기가 말하기를,
"신의 형이 지금 군위 현감(軍威縣監)으로 있는데 사서(私書)를 받아 보니, 양군관(良軍官)을 사정(査定)하는 일로 각 고을에서 향소(鄕所)로 하여금 유학(幼學)을 조사해내 함부로 기록하게 해 이 무리들이 향소의 집에 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수령이 잘 처리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인데, 하리(下吏)들이 조종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을 일으킨 것입니다. 효묘(孝廟) 때 시노비(寺奴婢)를 추쇄(推刷)하라고 명하자 민심이 흉흉했는데 관장(官長)을 쏘아 죽인 변까지 있었으나 끝내 동요하지 않아 마침내 일을 성공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일 역시 동요되지 말고 행하면 오래지 않아 정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가지 일이란 무엇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어염(魚鹽)·진전(陳田)·은결(隱結)·군관(軍官)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군관의 일로 공동(恐動)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엄히 처리하겠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신 역시 사서(私書)를 여러 감사(監司)들에게 보내 숫자를 줄여 정밀하게 조사하도록 했으니, 민심이 반드시 점차 안정될 것입니다."
하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감사와 수령이 잘 받들어 행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점차 그칠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선묘(宣廟)의 어화(御畵)인 난죽병(蘭竹屛)을 강화도에서부터 가져온 얼마 후에 지신사(知申事)에게 발문(跋文)을 쓰게 했는데, 나는 여기에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있다고 여긴다. 이제 이 어필(御筆)이 몇 년이 지났는데도 묵색(墨色)이 새것 같은 것이 한 가지 기이한 일이요, 단자(單子) 가운데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를 써서 오늘날 명나라의 연호를 볼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기이한 일이요, 그림을 그린 종이가 바로 문안(問安)·공상(供上)·숙배(肅拜)의 단자(單子) 등속이어서 선묘의 검소한 덕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세 가지 기이함이다. 또 사옹원(司饔院)의 공상 단자에는 진어(眞魚) 2개(箇)라고 쓰여 있는데 만약 지금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면 반드시 두 마리의 진어 공상을 괴이쩍게 여길 것이다. 나 역시 자봉(自奉)262) 이 담박하여 지난번 온천 거둥 때로 말하더라도 배종(陪從)한 여러 신하들에게는 모두 짐바리 말이 있었으나 나는 단지 이불 하나와 베개 하나로 따라가 매우 가볍고 편리하였다. 이 그림은 선묘께서 승하하시기 3년 전에 그리신 것으로 선묘께서 승하하실 때는 춘추(春秋)가 57세이셨는데 내 나이 역시 57세여서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다."
하였다.
11월 25일 갑자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김선행(金善行)을 교리로, 윤학동(尹學東)을 부수찬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설서로, 원경하(元景夏)를 판의금으로, 조재호(趙載浩)를 형조 판서로, 홍계희(洪啓禧)를 예조 참판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좌윤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동경연으로, 정양빈(鄭暘賓)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11월 27일 병인
부사과 심수(沈鏽)가, 엄우(嚴瑀)가 재차 공술(供述)을 꾸며 속였다 하여 상서하여 청하기를,
"어사(御史)를 보내 이 일을 조사해 탐욕을 징계하는 법을 바루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11월 28일 정묘
이진철(李眞哲)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11월 29일 무진
황해도 관찰사 정형복(鄭亨復)이 상서하기를,
"본도의 극에 이른 재이와 참혹한 흉년은 전에 이미 갖추 다 진달하여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못하겠으나, 시험삼아 지금의 각 고을 재결(災結)로 말씀드리자면 최초에 보고한 바가 거의 2만 결에 가까웠는데, 재삼 퇴짜를 맞아 깎고 또 깎이어서 비록 빈 껍질이라도 절반만 벤 것과 곡식이 떠내려가 전부 잃은 것, 단지 낫자국만 보고서도 모두 실결(實結)로 돌리더라도 지금의 그 재해 입은 총숫자가 그래도 1만여 결이 되어 신의 영(營)에서 얻은 5천의 재결로는 충당해 줄 도리가 만무합니다. 이제 만약 그중 6천 결을 깎으면 장차 모래와 자갈 밭에서 세금을 받아야 하고, 채찍질하여 독촉하고 마침내는 그 인족(隣族)을 침해하게 되어 참으로 차마 하지 못할 정사이니, 마침내 원망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또 진청(賑廳)을 설치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각 고을에 물었더니, 아주 심한 고을 이외의 다음가는 고을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환곡(還穀)으로는 결코 구제해 살리기가 어려워 굶주린 자만 뽑아서 양식을 주어야 할 형세인데, 거개가 밀가루 없는 국수를 쑤어야 할 탄식이 있습니다. 올봄에 막 큰 진휼을 겪어서 영읍(營邑)이 모두 바닥이 났는데 전일 획득한 곡식은 5천 석에 불과하니, 앞으로의 허다한 굶주린 사람을 비록 임시 방편으로 구제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어 오직 앉아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할 뿐이니 진청을 설치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환곡(舊還穀)을 받아 들이는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조금 풍년이 든 해라 하더라도 오히려 바치지 못할까 염려하는데 하물며 이제 새 환곡도 이미 모조리 받아 들이지 못하겠으니, 묵은 포흠(逋欠)을 어떻게 논하겠습니까? 아! 번얼(藩臬)263) 이 조정에 대하여 본디 가부간에 서로 구제해야 할 도가 있는데, 신의 경우는 말마다 조정에서 의심해 막고, 일마다 조정에서 거절당하며 번신(藩臣)으로 대우하지 않으니, 신이 마땅히 떠나야 함을 이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중언 부언(重言復言)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백성들의 생사가 아침 저녁에 달려 있어 감히 정적(情迹)이 불안하다고 하여 수수 방관(袖手傍觀)만 할 수 없어서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조(大朝)에 아뢰어 재결(災結)과 진곡(賑穀)을 후하게 조치해 주고 구환(舊還)하라는 하령(下令) 역시 거두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30일 기사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부교리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금년의 여역(癘疫)에 죽은 자가 무수히 많아 추동(秋冬) 이래로 날마다 매장 하기를 일삼아 이때문에 추수(秋收) 역시 때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우역(牛疫)이 연달아 3년 동안 치성(熾盛)해서 가을갈이를 하면서 소 대신 사람이 갈고 있다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지금의 제일 급선무는 바로 백성을 돌보는 정사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옳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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