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해
임금이 친히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을 인솔(引率)하고 동조(東朝)에 진하(陳賀)하니, 대비전(大妃殿)께서 국모(國母)로서 계신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1월 3일 신축
경상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에 긴요하지 않은 각진(各鎭)을 혁파하여 다른 진에 옮겨 보충하자는 뜻으로써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달(狀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참(單驂)으로써 순찰(巡察)을 떠나 연해(沿海)의 각진을 두루 살펴보았고 해방(海防)의 고로(故老)들을 불러서 그 해로(海路)의 험란하고 평탄한 것과 연혁(沿革)의 고사(故事)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또 좌우(左右)의 수신(帥臣)들과 난만(爛漫)하게 상의하였더니, 그들은 말하기를, ‘동래(東萊)의 다대포(多大浦)·개운포(開雲浦)·두모포(豆毛浦)·서평포(西平浦)·부산포(釜山浦) 5진과 웅천(熊川)의 가덕(加德)·천성(天城)·안골(安骨)·청천(晴川)·신문(新門)·제포(薺浦) 6진과 거제(巨濟)의 장목(長木)·조라(助羅)·옥포(玉浦)·지세(知世)·율포(栗浦)·소비포(所非浦)·가배량(加背梁) 7진은 모두 한 조그마한 고을 안에 처하여 실로 중첩되고 긴요하지 않은 개탄스러운 점이 있으나, 이곳은 왜선(倭船)이 왕래(往來)하거나 표박(漂泊)하는 곳으로 진장(鎭長)이 얼마가 되고 선척(船隻)이 몇개쯤 된다는 것을 저들이 모두 익히 보아서 잘 알고 있으니, 애당초에 창설(創設)을 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창설을 하였다가 다시 철거를 한다는 것은 결국 변방의 위엄을 견고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니, 아직은 경솔하게 혁파를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도 또한 의견(意見)이 있으니, 이것은 그대로 두고 거론하지 마소서. 고성(固城)의 사량포(蛇梁浦)와 진주(晉州)의 적량포(赤梁浦)는 모두가 절도(絶島)의 단진(單鎭)이고, 고성의 구소비(舊所非)는 우수영(右水營)의 구기(舊基)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고, 남해(南海)의 미조항(彌助項)·평산포(平山浦)는 혹은 깊고 먼 바다에 들어가 있어 보경(報警)에 긴요하기도 하고 혹은 호남(湖南)의 좌수영(左水營)과 마주 대하여 성세(聲勢)가 서로 원조되기도 하니, 이 다섯 진은 비록 왜선이 오고 가는 곳은 아니지만 또한 혁파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나머지의 각진들은 그 형편의 경중에 따라서 혹은 혁파하기도 하고 혹은 보존하기도 하여 조금도 방해가 없을 것입니다. 대개 좌도(左道) 연해(沿海)는 동래(東萊)·기장(機張) 이북(以北)은 애초에 밀물이나 썰물이 나가고 들어오는 일이 없는데 파도(波濤)가 스스로 서로 부딪쳐 언덕 위를 때립니다. 그리고 또 언덕의 돌이 높고 날카로워 우리 나라의 선척은 비록 혹시 간간이 정박할 수 있는 곳이 있지만 경박(輕薄)한 왜선 같은 것은 애당초 무리를 지어 일제히 정박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왜선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 좌도 연해 같은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주(慶州)의 감포(甘浦), 영해(寧海)의 축산포(丑山浦), 흥해(興海)의 칠포(漆浦), 장기(長鬐)의 포이포(包伊浦)는 임진년001) 이후로 그곳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도(本道)의 감영(監營)으로부터 장문(狀聞)하여 동래 수영성(水營城) 밑으로 이전시킨 것인데, 이것은 대개 수영(水營)의 책응(策應)하는 장소이며 이전(移轉)하는 지역으로써 관액(關阨)의 요해지(要害地)를 삼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수영에 이미 4척(隻)의 전선(戰船)이 있고 또 그 수십 리의 안에 부산(釜山) 등 7척의 전선이 있고 또 그 동쪽으로 1백 리의 안에 서생포(西生浦) 등에 3척의 전선이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히 위급한 시기의 우익(羽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영 아래 새로 옮긴 4진의 잘못 배치하고 중첩으로 설치한 것이 어찌 매우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좌도에서 폐지할 수 있는 곳이 이 4진 같은 데가 없는데, 지금 만일 모조리 혁파해 버린다면 수영이 조잔(凋殘)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포이진(包伊鎭)의 포구(浦口)에 있는 것은 그대로 두고 축산(丑山)·감포(甘浦)·칠포(漆浦)의 성(城) 좌우에 있는 것은 폐지하는 것이 결단코 의아스럽게 여길 만한 점이 없습니다. 우도(右道) 연해(沿海)는 칠원(漆原)의 귀산포(龜山浦)와 웅천의 풍덕포(豊德浦)는 내양(內洋)의 산(山)이 둘러싼 지역에 처하여 있어서 외양(外洋)과는 멀리 떨어져서 피란(避亂)의 장소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외적(外敵)을 방어하기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귀산포는 과거 갑인년002) 에 비로소 별장(別將)을 배치하였다가 그 뒤 을유년003) 에 그것을 폐지하고 그 전선을 옮겨다가 가덕(加德)의 제2선(船)으로 삼았으며, 그 뒤 계축년004) 에 본도의 장문으로 인하여 다시 도로 설치하여 별도로 전선 하나를 배치하였습니다. 혹은 혁파하기도 하고 혹은 설치하기도 하여 이와 같이 누차에 걸쳐서 변경하였으니, 애당초 긴요하지 않았다는 대강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풍덕포는 본래 병영(兵營)으로서 별장을 주둔시켰는데, 임진년 이후에 통제사(統制使)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전선을 설치하고 방포(防布)005) 를 지급하다가 칠원의 경계로 이전했는데, 이는 새로 소모(召募)한 것이지만 처한 바가 또한 요충지는 아닙니다. 남해(南海)의 상주포(尙州浦)는 금산(錦山)의 아래에 위치하여 전쟁과 수비에 있어 모두 불리합니다. 만일 단지 보경(報警)만을 위한 것이라면 금산의 망봉(望烽)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곡포(曲浦)는 다만 선창(船艙)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섬 안에 많은 진을 배치하는 것은 진실로 거듭 겹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제(巨濟)의 영등포(永登浦)와 고성의 남촌포(南村浦)·삼천포(三千浦)·당포(唐浦)는 통영(統營) 여덟 전선의 아래에 있는데, 모두가 내양(內洋)의 한만(閑漫)한 지역입니다. 오직 이 귀산포 이하의 여러 진은 신은 혁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뜻으로써 통제사 정찬술(鄭纘述)에게 의논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귀산포는 바로 창원(昌原)의 해로(海路)로 인후(咽喉)이며 남촌포·삼천포·당포는 모두가 바로 해구(海口)의 방수(防戍)이니, 폐지할 수 없다.’ 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가타부타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귀산포가 이미 창원의 인후(咽喉)라면 그 전선은 진실로 폐지할 수가 없으나 우도 연해의 각 고을에는 각각 한 척의 전선이나 혹은 두 척의 전선이 있는데 오직 칠원만 없으니, 이제 만일 귀산포의 첨사(僉使)를 폐지하고 그 배[船]를 칠원에 옮겨서 준다면 전기(戰器)는 예전 그대로이고 방포(防布)도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남촌포(南村浦) 등 3진의 수신(帥臣)은 이미 방수(防守)를 한다고 하고 선척을 또 전선이 있는 지방관에게 거듭 줄 수가 없으니, 그대로 두어도 아마 무방할 듯합니다. 대개 좌도에서 폐지할 수 있는 곳은 축산포·감포·칠포이고 우도에서 폐지할 수 있는 곳은 풍덕포·상주포·곡포·영등포인데, 칠원의 귀산포를 또 이속(移屬)을 허락한다면 급미(給米)로 줄일 수 있는 것이 2천 3백 40석(石)쯤 되고 방포로 얻어지는 것이 2백 15동(同) 6필(疋)이 됩니다. 매필마다 미(米) 6두(斗)를 만들면 4천 3백 2석쯤 되니, 줄일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수량을 통계하면 도합 6천 6백 40석쯤 됩니다. 이 수량으로써 분정미(分定米) 8천 4백여 석에 계산하여 제하면 부족한 바가 1천 8백 석쯤 됩니다. 이것은 각 고을의 월름(月廩) 가운데 나아가 짐작(斟酌)하여 손감(損減)해서 그 수량을 기준한다면 다만 뜻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을 뿐만 아니라 공사(公私)간에 모두 그 편리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불필요한 관원을 제거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는 것은 실로 또한 나라를 경영하는 장구(長久)한 계책(計策)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품의(稟議)하게 하라."
하였다.
1월 4일 임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백(嶺伯)의 상소는 몇 개의 진(鎭)을 폐지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니, 도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일곱 개의 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세 개의 진도 오히려 폐지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일곱 개의 진이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변진(邊鎭)은 태평한 시대에는 본래 그다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전선(戰船)들이 깊이 해곡(海曲)에 감추어져 있어서 만일 외적(外賊)의 침입을 당하면 형세상 미처 대양(大洋)에 나올 수가 없으므로 진을 폐지하자는 논의는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동래부(東萊府)의 경우 긴요하지 않은 진보(鎭堡)가 비록 많지만 왜인(倭人)이 나타난 곳은 폐지할 수 없다는 영백의 견해(見解)는 참으로 당연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진보를 폐지한다면 오랫동안 근무한 자리로 옮겨서 채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약로(金若魯)가 또 말하기를,
"황해 감사 정형복(鄭亨復)이 재결(災結)을 더 획급하는 일로써 지난번 청한 바가 있었으나 조가(朝家)에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2천 5백 결(結)을 나누어 준 뒤 상서(上書)하여 죄를 자수(自首)하였으니, 마땅히 논책(論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파직한 뒤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오언유(吳彦儒)·이후(李)를 승지로, 김상로(金尙魯)를 호조 판서로, 남태량(南泰良)을 대사헌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집의로, 이운(李塤)을 사간으로, 권항(權杭)·안치택(安致宅)을 정언으로, 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정필녕(鄭必寧)을 호조 참판으로, 조명채(曹命采)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5일 계묘
임금이 균역 당상(均役堂上)과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전(戶錢)은 이름이 있는데 별군관(別軍官)은 이름이 없으니,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이기진(李箕鎭)이 관서(關西)에 있을 때 충의사(忠義士)로써 그 이름을 좋게 하여 충정(充定)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이름을 정한 뒤에 파정(把定)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니, 예조 판서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각 고을에 비록 속오군(束伍軍)이 있기는 하지만 난리를 당하면 영장(營將)에게 부속되어 본읍(本邑)에는 다른 군졸(軍卒)로 방어(防禦)할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의 이 별군관은 평상시에는 포(布)를 거두고 만일 위급한 사태가 있으면 본읍에 소속되니, 이노(吏奴)로 대(隊)를 만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균역청(均役廳)의 본래의 뜻은 오로지 포를 거두고 급대(給代)를 충당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하고, 교리(校理) 이현중(李顯重)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대변통(大變通)의 일입니다. 신은 지식(知識)이 없어 실로 앙대(仰對)하기 어려우나, 이태중(李台重)은 바로 신의 족형(族兄)입니다. 이태중이 일찍이 홍계희(洪啓禧)에게 말하기를, ‘군(君)의 경륜(經綸)은 바로 결포(結布)에 있는데 갑자기 별군관을 만드니, 이른바 검려(黔驢)의 기량(技倆)006) 이 이에 그칠 뿐이라는 것인가? 전하(殿下)께서 한마디 말에 움직여 갑자기 백성을 위한 자비(慈悲)의 마음을 내어 이런 대변통의 거조를 하셨는데 여러 신하들은 본래 경제(經濟)의 계책이 없어서 결포(結布)와 호전(戶錢)이 변경하여 감포(減布)와 충대(充代)의 일이 되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야 폐단이 없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래 정한 계획이 없었다는 말은 옳다."
하였다. 이현중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일찍이 양역(良役)을 변통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동궁(東宮)에게 하교(下敎)하신 바가 있으십니다. 이번의 거조는 박문수(朴文秀)의 한마디 말에 동요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이 비록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그 근본은 병판(兵判)이다. 유신(儒臣)은 2필(疋)로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이현중이 말하기를,
"신은 당초에 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지금은 또한 다시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해부(海夫)가 어깨를 쉬는 것으로써 하교를 하셨지만, 수리(水利)는 스스로 이롭고 불리한 시기가 있습니다. 한번 정식(定式)한 뒤에 더하거나 줄일 수가 없다면 또한 어찌 해부의 이로움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노대(露臺) 백금(百金)의 경계007) 를 생각하시어, 비록 새로 일으켜 짓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줄이고 절약할 것을 생각하고 어가(御駕)를 움직임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신중히 한다면, 절손(節損)하여 그 부족함을 보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수찬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군수(軍需)의 비용을 갑자기 절반으로 줄이고 공중(空中)에서 재력(財力)을 만들어내고자 하시니, 장차 어느 곳에서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목(節目)은 비록 정해졌지만 끝내 백공 천창(百孔千瘡)임을 면치 못하니, 신은 이뒤에 다시 2필로 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균역청을 영구히 준수(遵守)한다는 뜻으로써 마음가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1월 9일 정미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와 영희전(永禧殿)을 전알(展謁)한 뒤 지나는 길에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들렀다. 교리 이현중(李顯重)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적에 군주의 거둥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군주는 스스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화평 옹주의 집에 지나는 길에 들르신 것이 지금 몇 차례입니까? 돌아보건대, 이제 세월이 누차 바뀌어 옛자취가 이미 묵었으니, 단지 아픈 마음만 더할 뿐입니다. 그 어찌 차마 청필(淸蹕)008) 로 누차 노굴(勞屈)하시어 한갓 성궁(聖躬)의 궐실(闕失)만 끼칠 것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조속히 회가(回駕)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12일 경술
임금이 경춘전(景春殿)에 나아가니,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坐)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약방(藥房)·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여 임금이 원손(元孫)을 안고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오늘의 경사에 기뻐하는 마음으로써 나의 자손을 잘 섬긴다면 나라의 경사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하교가 여기에 이르시니, 신 등이 감히 폐부(肺腑)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손을 많이 두려고 한다면 반드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라.’고 하였다. 오늘날 나라의 경사는 나의 힘이 아니라 열조(列朝)의 심후(深厚)한 인택(仁澤)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하고, 이어서 어제(御製)를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원손(元孫)을 안고 경 등을 소견한 것은 다만 나의 늙음을 표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개 또한 타일(他日)을 부탁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1월 13일 신해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늙은 것으로 인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원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4일 임자
판돈녕 이기진(李箕鎭)이 상서(上書)하여 치사(致仕)하기를 바랐는데,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고(故) 대신(大臣)과 고(故) 중신(重臣)의 아내에게 식물(食物)을 하사(下賜)할 것을 명하였다.
1월 15일 계축
이석표(李錫杓)를 대사간으로, 윤동도(尹東度)를 집의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황합(黃柙)을 헌납으로, 이인원(李仁源)을 정언으로, 김치인(金致仁)을 부교리로, 성천주(成天柱)·이유수(李惟秀)를 부수찬으로, 이익정(李益炡)을 형조 판서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윤으로 삼았다.
1월 17일 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군관(軍官)의 명호(名號)를 선무(選武)로써 정하였으니, 권장(勸奬)의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한 차례씩 수령(守令)이 유엽전(柳葉箭)으로써 일순(一巡)하면서 시재(試才)하여 일중(一中) 이상을 뽑아서 감영(監營)에 보고하고, 감사(監司)는 가을에 순행(巡行)할 때 다시 시험을 보여 한 도(道)를 통틀어 분수(分數)를 계산하여, 으뜸을 차지한 1인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그 다음 1인은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고 그 다음 5인은 그 당년(當年)의 신포(身布)를 면제해 주는 일을 마땅히 정식(定式)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여덟 군데의 진보(鎭堡)를 폐지하기를 청하였는데, 귀산진(龜山鎭)은 여러 의논이 폐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일곱 군데 진보(鎭堡)는 청한 바에 따라 혁파하였는데 이미 7진(鎭)을 폐지하였으니, 오랫동안 근무하는 자리로 조용(調用)하는 일은 장차 자리가 부족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호남(湖南)의 위도(蝟島)·법성포(法聖浦)·가리포(加里浦)·군산(群山) 4진(鎭) 및 산산(蒜山)·포항(浦項)·흑산도(黑山島) 세 곳은 모두 영구히 오랫동안 근무하는 자리로 삼아 택송(擇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고령(高嶺)·혜산(惠山)·아이(阿耳)·다대포(多大浦)로써 변지과(邊地窠)를 만들어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았으니, 좌의정 김약로(金若魯)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1월 23일 신유
왕세손(王世孫)의 명령(命令)은 ‘의지(懿旨)’라 칭하고, 뭇 신하의 주어(奏語)는 ‘백(白)’ 자로 칭하고, 전문(篆文)은 ‘찰(察)’ 자로 썼다. 이에 앞서 이것으로써 대신에게 의견을 수렴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결정하였다.
1월 24일 임술
신사건(申思建)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25일 계해
임금이 육상묘(毓祥廟)를 전배(展拜)하였다.
1월 26일 갑자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집의로, 신위(申暐)를 사간으로, 권기언(權基彦)·박평(朴玶)을 장령으로, 서해조(徐海朝)·이진길(李晉吉)을 지평으로, 남학종(南鶴宗)을 헌납으로, 이성경(李星慶)·윤득양(尹得養)을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응교로, 이득종(李得宗)을 교리로, 김상구(金尙耉)를 부교리로, 윤상임(尹尙任)을 수찬으로, 박상덕(朴相德)을 부수찬으로, 윤동도(尹東度)를 겸 보덕으로, 김선행(金善行)을 겸 필선으로, 이현중(李顯重)을 겸 사서로, 이후(李)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27일 을축
헌부(憲府)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29일 정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국모(國母)로 계신 지 50년이니, 그 존봉(尊奉)하는 바를 어찌 여러 신하들의 청을 기다릴 것인가? 다만 자성께서 겸손하게 억제함으로 인하여, 뜻을 봉양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뒤에 생각을 해보니, 자성의 춘추(春秋)가 칠순(七旬)이 멀지 않고 나도 또한 나이가 60에 가까우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이른바 ‘이 세월의 지나감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종용(從容)히 진청(陳請)하였더니, 자성께서 ‘특별히 그 청을 준허(準許)하여 그대의 마음을 펼치도록 한다.’는 것으로써 하교를 하시었다. 훌륭하시도다. 자성의 하교여! 의조(儀曹)로 하여금 존호(尊號)를 의논하는 등의 절차를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약로(金若魯)를 존숭 도감 도제조(尊崇都監都提調)로, 신만(申晩)·김상로(金尙魯)·유엄(柳儼)을 제조로, 김양택(金陽澤)·조운규(趙雲逵)를 낭청으로, 한사득(韓師得)을 대사간으로, 황최언(黃最彦)을 정언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보덕으로, 심수(沈鏽)를 사서로, 이득종(李得宗)을 겸 문학으로, 정실(鄭實)을 승지로, 유언국(兪彦國)을 사간으로 삼았다.
1월 30일 무진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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