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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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계사

정기안(鄭基安)을 집의로, 김도(金䆃)·이광익(李光瀷)을 장령으로, 이홍직(李弘稷)을 헌납으로, 조종부(趙宗溥)를 정언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원경하(元景夏)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일 갑오

김시찬(金時粲)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9일 신축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납 이홍직(李弘稷)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처럼 나라에 예장(禮葬)이 있고 사역(事役)이 바야흐로 펼쳐진 시기를 당하여 성상께서는 곡진하게 백성의 고통을 진념(軫念)하시며 힘써 절약(節約)을 따르시는데도 도감 당상(都監堂上) 이춘제(李春躋)는 예전부터 관직에 있을 때마다 번번이 비쇄(鄙瑣)하다는 비난을 초래하였습니다. 현재의 직임(職任)을 맡게 되자 물정(物情)이 진실로 이미 놀라고 의혹을 가졌는데, 과연 고군(雇軍)의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즈음에 뇌물이 오가는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은 빨리 개체(改遞)하여 민폐(民弊)를 제거해야 될 것으로 여깁니다. 우윤(右尹) 유만중(柳萬重)과 형조 참판 홍중징(洪重徵)은 모두가 80을 바라보는 아주 늙은 사람으로서 번잡한 곳의 중임(重任)은 결단코 알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두 재신(宰臣)을 모두 체직(遞職)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구수훈(具樹勳)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나이도 또한 쇠모(衰耗)하여 간사한 노비와 교활한 서리(胥吏)가 중간에서 용사(用事)하여 도둑을 다스리는 즈음에 양민(良民)이 피해를 입고 첨정(簽丁)을 할 때에는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응몽(洪應夢)은 나이 많아 노쇠(老衰)하고 병들어 혼미하여 청단(聽斷)이 궤궤(憒憒)242)  하니, 아전들이 이 때문에 농간을 부려 백성들의 수심과 원망이 많습니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태상(李泰祥)은 성격이 본래 어리석고 패악한데다 또 술마시기를 즐기어 오로지 형장(刑杖)만을 일삼고 징렴(徵斂)이 번거롭고 무겁습니다. 환곡(還穀)을 돈[錢]으로써 대신 거두고 간사한 기녀(妓女)들이 일에 따라 뇌물을 받아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신은 세 고을의 수령(守令)들은 모두 파직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12월 10일 임인

헌납 이홍직(李弘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장령 김도(金䆃)는 나쁜 질병으로 인해 얼굴이 훼상(毁傷)하여 여러 사람들이 다 코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대망(臺望)에 검의(檢擬)한 것은 진실로 이미 해괴하고 개탄스러운 일인데도 이에 감히 청금(淸禁)243)  에 돌입(突入)하여 이미 발설된 논의를 멋대로 정지하였으니, 그가 공의(公議)를 어기고 당(黨)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죄는 결단코 용서해 줄 수가 없습니다. 신은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는 형률(刑律)을 가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아!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고심(苦心)으로 조제(調劑)하시어 당습(黨習)을 제거하기를 힘쓰시는데, 저들 한 떼의 당심(黨心)을 포장(包藏)한 무리들은 옛 습관을 고치지 않고 얽혀서 맺고 엉겨서 모였습니다. 그 중에 공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은 이종성(李宗城)의 인아(姻婭)이며 혈당(血黨)으로 심법(心法)을 서로 전하여 그들 가운데의 대·소(大小)의 이론을 주장(主張)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앙연(昻然)244)  히 당의 우두머리로써 자처(自處)하면서 그를 찾는 발걸음이 문(門)에 가득했으며 경영(經營)하고 배포(排布)하여, 이종성이 몸은 비록 밖에 있었지만 그 말과 의론은 세상에 기탄없이 행해졌습니다. 지난번에는 그의 집에다가 정광운(鄭廣運)을 불러들여 이권을 가지고 위협하여 진달을 정지하는 계획을 실현하려 하였고 그것이 탄로남에 미쳐서는 그 자취를 가리어 숨긴 채 홀로 어리석은 윤득재(尹得載)로 하여금 죄파(罪罷)를 당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의 교활한 태도는 진실로 차마 정시(正視)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도의 응견(鷹犬)같은 자가 풍지(風旨)를 승망(承望)하며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세도(世道)의 우려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마땅히 견삭(譴削)을 시행하여 당인배(黨人輩)의 부정(不靖)한 관습을 징계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지난번에 이러한 당심으로써 성궁(聖躬)을 번거롭게 하였고 심지어 정청(庭請)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성상의 뜻을 제대로 우러러 본받지 못한 결과가 아님이 없으니, 황름(惶懍)한 마음이 지금까지도 가시질 않는다. 오늘날의 신자(臣子)된 자가 지난번의 성상의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헌납 이홍직을 체차(遞差)시키고 그 장주(章奏)는 되돌려 주라."
하였다.

 

12월 11일 계묘

공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 헌납 이홍직(李弘稷)의 상소를 보았더니, 졸지에 독봉(毒鋒)이 신에게 미쳤습니다. 지의(旨意)가 음험(陰險)하여 곧바로 사람을 침멸(湛滅)의 죄과(罪科)에 몰아넣으려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위태롭고 두려워 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근일에 시의(時議)가 공교롭게 기괄(機括)을 만들어 연루(連累)된 자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여 반드시 조정을 텅 비게 한 뒤에 그만두려고 하니, 신은 우려와 탄식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가령 신의 대지(臺地)에 처했다면 부달(府達)의 정지를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많이 양보할 필요가 없겠으나 그저께 대각(臺閣)에 나아간 헌신(憲臣)에 있어서는 신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지가 거의 10년이 지났습니다. 신이 비록 지휘(指揮)를 하고자 하고 그가 비록 승망(承望)을 하고자 하더라도 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 웃을 만한 것은 바로 정광운(鄭廣運)의 일입니다. 저 대신(臺臣)이 비록 사람을 모함하는데 급하다 하더라도 임금께 고(告)하는 말을 어찌 그다지도 상세히 살피지 않는 것입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그물이 사방(四方)에 펼쳐져서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이 모두 걸리고 있습니다. 신도 또한 스스로 반드시 요행이 없을 줄을 알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러한 말에 대하여 어찌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보았더니, 무술년245)  에 발인(發靷)할 때는 협영여 포수(挾靈轝砲手)가 60명이었고 무신년246)  에 발인할 때는 40명이었습니다. 평상시에 협여군(挾轝軍)이 이미 40명이니 협영여군(挾靈轝軍)도 마땅히 40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무신년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충청도 유생(儒生) 유원명(柳垣明) 등 수백인(數百人)이 연명(聯名)하여 상서(上書)하기를,
"고 봉조하 김유경(金有慶)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과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는 지조는 본시 진신(搢紳)·사림(士林)이 높이 우러르는 바입니다. 그런데 김유경은 열 살에 그 아버지를 잃고 나이가 어려서 집상(執喪)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지(天地) 사이의 죄인이라고 여겨 지극한 정성으로써 편모(偏母)를 섬겼고 상(喪)에 미쳐서 슬퍼하고 수척함이 예제(禮制)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무오년에 이르러서는 바로 그 아버지가 서거(逝去)한 해입니다. 드디어 추복(追服)을 단행(斷行)하여 그 돌아가신 날로부터 애호(哀號)하고 곡벽(哭擗)하기를 한결같이 단괄(袒括)247)  할 때와 같이 하였고 의복(衣服)과 관구(冠屨)는 모조리 흰 포(布)의 장식을 사용하였습니다. 묘소 곁에다 여막[廬]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가 곡읍하기를 슬프게 하니, 눈[眼]이 다 말라붙을 지경이 되었고, 엎드려 있던 곳의 사초(莎草)는 자국을 형성하여 풀이 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몹시 춥거나 덥고 크게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더라도 일찍이 혹시 폐지하는 일이 없이 3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며, 누차에 걸쳐서 제수(除授)하는 명(命)이 있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부임(赴任)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추복을 끝마치고 난 뒤에도 그대로 묘소 아래에 살면서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 먼저 사묘(祠廟)를 배알(拜謁)하고 다음에 묘소 살피기를 죽음에 이르도록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금(古今)에 드물게 있는 일이니, 청컨대 그 직(職)을 추증(追贈)하고 그 여(閭)에 정표(旌表)하소서."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복주(覆奏)하여 허락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경의 일은 비록 드물게 있는 일이긴 하지만 정려(旌閭)에 대해서는 내가 몹시 아끼고 있다."
하였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근래에 작설(綽楔)248)  의 은전(恩典)이 너무 한절(限節)이 없기는 하지만 김유경은 효성이 탁연(卓然)하여 호중(湖中)의 사람들이 감복(感服)하지 않음이 없으니 특별히 정려(旌閭)를 허락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증직(贈職)에 있어서는 정경(正卿)·봉조하(奉朝夏)는 사인(士人)과는 차이가 있으니 비록 추가로 증직을 함이 없더라도 또한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이장(李彛章)은 말하기를,
"김유경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평일에 효행(孝行)이 특이함이 한결같이 호서(湖西) 유생의 상서한 바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경이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는가?"
하매, 이이장이 말하기를,
"다만 추복(追服)을 입고 시묘살이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년(晩年)에는 묘옥(墓屋)에서 오래 거주하였으니 바로 오래 시묘를 한 것입니다. 행의(行誼)가 매우 높고 정신(精神)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가 임종(臨終)할 무렵에는 재계 목욕하고 바르게 누워 편안한 자세로 세상을 떠났고 먼저 그 시기를 알았으니 이는 마치 고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경우와 똑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이 이상(異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이제 그 효행(孝行)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感動)을 하게 된다. 다만 모든 일은 마땅히 적중(適中)하여야 되니 단지 정려(旌閭)만을 허락한다."
하였다. 홍계희가 또 서기(徐起)·송익필(宋翼弼)에게 증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상세히 진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서기는 바로 선현(先賢) 이지함(李之菡)의 문인(門人)인데 5, 6세 때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오기에 그 부모(父母)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말하기를, ‘한 마리 작은 새가 양기(陽氣)를 따라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궁구(窮究)하고자 하여 그래서 늦게 귀가(歸家)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궁리(窮理) 격물(格物)의 학문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입니다. 주자(朱子)를 존상(尊尙)하여 학문이 정심(精深)하였고 계룡산(鷄龍山)의 고청봉(孤靑峰) 아래에 살면서 자호(自號)를 ‘고청(孤靑)’이라 하였습니다. 공주(公州) 충현 서원(忠賢書院)에 배향(配享)되었는데 호중(湖中)의 학문이 성대하여진 것은 서기(徐起)의 힘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송익필(宋翼弼)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도의(道義)로 사귄 벗이고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의 스승입니다. 그 경학(經學)이 일세(一世)의 표준이 되어 지금까지도 학자(學者)들이 귀봉 선생(龜峯先生)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은 학행(學行)이 탁연(卓然)한데 그 문지(門地)가 미천한 연유로 해서 아직까지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어떤 직(職)을 추증(追贈)해야 하겠는가?"
하매, 홍계희가 말하기를,
"선현(先賢)의 증직은 혹은 집의(執義)를 하기도 하고 혹은 지평(持平)을 할 경우도 있으니, 굳이 고관(高官)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옳게 여기고 세자(世子)에게 복달(覆達)하게 할 것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현빈(賢嬪)에게 치제(致祭)하니, 탄신(誕辰)인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균역(均役) 한 가지 일은 일국(一國)의 큰 거조(擧措)이니, 수말(首末)을 간략하게 적어서 왕세자(王世子)에게 들여보내고 이어서 그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을 진달하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변통(變通)하게 된 곡절(曲折)과 임문(臨門)할 때의 일을 다 마땅히 적어서 올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신이 그 본말(本末)을 간략하게 적어서 ‘균역사실(均役事實)’이라 이름하여, 정원(政院)과 왕복(往復)하며 선사(繕寫)한 뒤 소조(小朝)의 차대(次對) 때에 정납(呈納)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아!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는 비록 뱃속 가득히 당심(黨心)이 있다 하더라도 근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땅히 마음을 씻어야 할 것인데, 전 헌납 이홍직(李弘稷)은 처음의 장주(章奏)와 두 번째의 장주에서 당심이 이미 탄로되었다. 남을 배척하여 당(黨)이라고 하였지만 이른바 스스로 자신의 경우를 이야기한 것이라 할 것이다. 아! 임금이 이미 쇠(衰)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도깨비[魅]를 비추는 거울은 저 푸른 하늘에까지 비치니, 그 누구를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12일 갑진

하교하기를,
"어제 명백히 하유(下諭)하였는데, 오늘 또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니 어떻게 타락한 풍속을 진작시킬 수가 있겠는가? 전 헌납 이홍직(李弘稷)을 특별히 삭탈 관직(削奪官職)하라."
하였다.

 

12월 14일 병오

이후(李)·이응협(李應協)·조돈(趙暾)을 승지로,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참판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박홍준(朴弘儁)을 헌납으로, 신만(申晩)을 판돈녕으로 삼았다.

 

12월 15일 정미

임금이 승지 남태기(南泰耆)에게 인장(靷葬)할 때 사용할 물건들을 나열하여 적어서 도감(都監)에 내릴 것을 명하였다.
"1. 결과(結裹)에 사용할 윤대판(輪對板) 【욕석(褥席)과 단상(單床)을 구비하고 또 산달피(山獺皮) 모석(毛席)을 마련한다.】 ·행상 구의(行喪柩衣)·정칠 교의(正漆交倚) 【상(床)은 혼궁(魂宮)에 대기시킨다.】 ·영좌 소란상(靈座小欄床) 【욕석(褥席)을 갖추고 그대로 정자각(丁字閣)의 것을 쓴다.】 1. 정자각(丁字閣)에 사용할 영침 장상(靈寢帳床)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주정(晝停)함으로 인해서 대령(待令)한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영좌 홍장(靈座紅帳)·찬실(欑室)의 제구(諸具) 및 소장(素帳) 【모두 빈궁(殯宮)에서 배설(排設)한 것으로써 그대로 사용한다.】 ·정자 각 삼문(正字閣三門)의 홍초장(紅綃帳) 【빈궁(殯宮)에서 사용하던 것으로써 그대로 사용한다.】 1. 혼궁(魂宮)에서 사용할 신탑 교의(神榻交倚) 【새로 만든다.】  당가 답장(唐家踏掌) 2 【전면(前面)과 좌우(左右)에 옛것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용준상(龍樽床) 1·용준대(龍樽臺) 2 【모두 내하(內下)한 것으로써 사용한다.】 ·청개(靑盖) 2, 작선(雀扇) 2, 삼문(三門)의 홍초장(紅綃帳) 【모두 새로 만든다.】 ·제상(祭床) 4, 향상(香床) 1 【모두 빈궁(殯宮)에서 만든 것으로써 사용한다.】 ·책인장(冊印欌) 【효장묘(孝章廟)의 장(欌)을 가져다가 사용한다.】  교명 죽책(敎命竹冊)·옥인(玉印) 2·시책(諡冊)·시인(諡印)·애책안(哀冊案) 【내하(內下)한 것으로써 수보(修補)하고 책인(冊印)은 그대로 혼궁(魂宮)의 것을 사용한다.】 ·독안상(讀案床) 【감(減)한다.】 ·옥등(玉燈)  【다시 전례(前例)의 절차를 상고한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7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2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1. 정자각(丁字閣)에 사용할 영침 장상(靈寢帳床)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주정(晝停)함으로 인해서 대령(待令)한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영좌 홍장(靈座紅帳)·찬실(欑室)의 제구(諸具) 및 소장(素帳) 【모두 빈궁(殯宮)에서 배설(排設)한 것으로써 그대로 사용한다.】 ·정자 각 삼문(正字閣三門)의 홍초장(紅綃帳) 【빈궁(殯宮)에서 사용하던 것으로써 그대로 사용한다.】 1. 혼궁(魂宮)에서 사용할 신탑 교의(神榻交倚) 【새로 만든다.】  당가 답장(唐家踏掌) 2 【전면(前面)과 좌우(左右)에 옛것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용준상(龍樽床) 1·용준대(龍樽臺) 2 【모두 내하(內下)한 것으로써 사용한다.】 ·청개(靑盖) 2, 작선(雀扇) 2, 삼문(三門)의 홍초장(紅綃帳) 【모두 새로 만든다.】 ·제상(祭床) 4, 향상(香床) 1 【모두 빈궁(殯宮)에서 만든 것으로써 사용한다.】 ·책인장(冊印欌) 【효장묘(孝章廟)의 장(欌)을 가져다가 사용한다.】  교명 죽책(敎命竹冊)·옥인(玉印) 2·시책(諡冊)·시인(諡印)·애책안(哀冊案) 【내하(內下)한 것으로써 수보(修補)하고 책인(冊印)은 그대로 혼궁(魂宮)의 것을 사용한다.】 ·독안상(讀案床) 【감(減)한다.】 ·옥등(玉燈)  【다시 전례(前例)의 절차를 상고한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7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2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1. 혼궁(魂宮)에서 사용할 신탑 교의(神榻交倚) 【새로 만든다.】  당가 답장(唐家踏掌) 2 【전면(前面)과 좌우(左右)에 옛것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용준상(龍樽床) 1·용준대(龍樽臺) 2 【모두 내하(內下)한 것으로써 사용한다.】 ·청개(靑盖) 2, 작선(雀扇) 2, 삼문(三門)의 홍초장(紅綃帳) 【모두 새로 만든다.】 ·제상(祭床) 4, 향상(香床) 1 【모두 빈궁(殯宮)에서 만든 것으로써 사용한다.】 ·책인장(冊印欌) 【효장묘(孝章廟)의 장(欌)을 가져다가 사용한다.】  교명 죽책(敎命竹冊)·옥인(玉印) 2·시책(諡冊)·시인(諡印)·애책안(哀冊案) 【내하(內下)한 것으로써 수보(修補)하고 책인(冊印)은 그대로 혼궁(魂宮)의 것을 사용한다.】 ·독안상(讀案床) 【감(減)한다.】 ·옥등(玉燈)  【다시 전례(前例)의 절차를 상고한다.】 "

 

12월 15일 정미

하교하기를,
"와부(瓦缶)·와정(瓦亭)·변두(籩豆)의 등속은 바로 고례(古禮)에 기재된 것이나 그 나머지는 본래 의의(意義)가 없다. 명기(明器) 가운데서 목노비(木奴婢) 각 50, 목산마(木散馬)·목안마(木鞍馬) 각 2, 목공인(木工人) 33, 가인(歌人) 8, 복완(服玩) 가운데서 내상(內喪)의 홍저사의(紅紵絲衣)·분홍저사 수보라(粉紅紵絲繡甫羅)·백릉(白綾)의 겹(裌)·말(襪)·군(裙)·수의(手衣)·백련포 말(白練布襪)·태의(苔衣)·청리(靑履)·온혜(溫鞋)를 모두 감(減)하고 이것으로써 상례수교(喪禮受敎)에 기재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복제(服制)로써 하순(下詢)하였을 때 수상(首相)이 예문(禮文)을 참고하여 대비전(大妃殿)의 복제를 소공복(小功服)으로써 마련(磨鍊)하였는데, 《무신등록(戊申謄錄)》을 가져다가 보니 유신(儒臣)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계체(繼體) 【선왕(先王)의 뒤를 이음.】 의 중함으로 인하여 대비전의 복제를 증손(曾孫)의 시복(緦服)을 적용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 미루어 본다면 이제 소공복으로써 마련한 것은 경중(輕重)이 도치(倒置)된 것입니다.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다시 이정(釐正)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예(禮)는 정명(正名)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갑진년249)   국휼(國恤) 때에 주상께서 산발(散髮)을 하고 무신년250)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상(喪)에 대비전께서 증손복(曾孫服)을 입고 선의 왕후(宣懿王后)께서 손자복(孫子服)을 입은 것은 전연 명리(名理)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비록 계체(繼體)를 중히 여긴다고 하지만 형제(兄弟)의 천륜(天倫)을 어찌 변란(變亂)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경종[景廟]과 선의 왕후의 상(喪)에 삼년복(三年服)을 입으신 것은 옳습니다. 다만 형제의 윤기(倫氣)로써 부자(父子)의 친애(親愛)로 삼는다면 아주 불가하니, 무신년의 복제는 이미 큰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이제 적손부(嫡孫婦)의 복(服)으로써 결정한 것은 실로 타당함을 얻은 것이 되니 어찌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복제는 고례(古禮)에 대해서도 또한 의문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의례(儀禮)》에 말하기를,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손(嫡孫)이 없다’ 하였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는 ‘적손부는 소공복을 입는데 그 시어머니가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 살펴 본다면 마땅히 소공복을 강등시켜 시복(緦服)으로 해야 하는데 국조(國朝)에서 이미 시행한 예(禮)의 고거(考據)할 만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강정(講定)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문의(問議)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와서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신들은 모두 헌의하지 않았습니다. 대사헌 심육(沈錥)은 헌의하기를, ‘대비전의 복제는 이미 무신년에 시행한 전례(前例)가 있으니, 지금에 이르러 다르게 할 수가 없을 것같습니다.’ 하였고, 전 부사 박필부(朴弼傅)는 헌의하기를, ‘제왕(帝王)의 가문(家門)에서는 비록 계체(繼體)를 중히 여기지만 복제에 있어서는 마땅히 천륜(天倫)으로써 바른 것을 삼아야 합니다.’ 하였고, 진선(進善) 윤봉구(尹鳳九)는 헌의하기를, ‘제왕(帝王)의 가문에서는 통서(統緖)를 중히 여겨 비록 계체의 의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조손(祖孫)은 천륜입니다. 명실(名實)이 한번 정해지면 손자가 변하여 증손자가 될 수 없으니 손부(孫婦)에 대해 시복(緦服)을 입는 것은 《예경(禮經)》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하였고, 유신(儒臣) 민우수(閔遇洙) 등은 모두 헌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계체(繼體)가 비록 중하지만 윤서(倫序)도 또한 문란시킬 수 없다. 후사(後嗣)라고 칭하였으면 최복(衰服)을 입는 것이 예(禮)에 본시 당연한 것이지만, 복제에 있어서는 명분을 문란하게 할 수 없다. 이미 효사(孝嗣) 사왕(嗣王)이라고 칭하였으니, 무신년의 복제는 세밀히 관찰하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미 깨달은 뒤에는 선후(先後)가 비록 같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그대로 따라 할 수가 없다. ‘시어머니가 계시면 소공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비록 있지만 국조(國朝)의 전례(典禮)에 또한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그대로 두라."
하였다.

 

승지 남태기(南泰耆)가 아뢰기를,
"경술년251)   10월의 일기(日記) 한 권(卷)을 공연히 유실(遺失)하였으니, 즉시 마땅히 빠진 곳을 채워넣어야 하는데, 연설(筵說) 및 소장(疏章)은 지난해의 일기청(日記廳) 준례에 의거하여 비록 사가(私家)에 소장된 것이 있더라도 재록(載錄)하지 말고 단지 양사(兩司)의 초기별(草奇別) 및 각사(各司)의 초기(草記)만을 베껴야 합니다. 그리고 기유년252)   5월 망후(望後)의 일기도 전에 또 유실하여 그 당시에 가주서(假注書)로 하여금 베껴 쓰도록 하였는데 잡란(雜亂)하고 소략(疏略)하여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일체 수정(修整)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2월 16일 무신

강화 유수 조관빈(趙觀彬)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번 본부(本府)의 어염(魚鹽)이 모조리 균역청(均役廳)에 소속된 이후로부터 전일의 융비(戎備)에 수용(需用)되던 것들이 다시 손을 쓸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허다(許多)한 장사(將士)들의 매달마다 으레 내려 주던 것이 이로 인해 정폐(停廢)되어 1년도 계속되기 어려운 세미(稅米)로써 추이(推移)하여 충급(充給)하므로 형편상 될 수 없는 바로서 호소(呼訴)가 몰려 오고 있으니, 궤산(潰散)이 우려됩니다. 그리고 40리에 걸친 연성(沿城)이 모조리 무너지고 수백년(數百年) 된 전기(戰器)가 모두 황폐되어 가니, 진실로 한결같이 인순(因循)하고 포치(抛置)하는 데로 맡겨둘 수가 없습니다. 신이 이를 위해 두려워하여 대조(大朝)께 장문(狀聞)으로 이해(利害)를 논진(論陳)하고 또 야연(夜筵)에서 남은 뜻을 우러러 거듭 진달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마음을 자못 비우시고 거의 채납(採納)할 희망이 있었는데, 끝내 한두 가지의 갈라진 의논으로 저알(沮遏)한 바 되어 말이 중요시 됨을 보지 못하고 일이 곧바로 서로 어긋나서 장차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으로 하여금 끝내 믿을 만한 형세가 없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신의 죄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7일 기유

유언국(兪彦國)을 집의로,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경술

고(故)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과 고 영돈녕 정석오(鄭錫五)에게 모두 시호(諡號)를 하사할 것을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동평위에게 시호를 하사하는 일로써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정씨(鄭氏)들이 시호를 청하지 않는 것은 본래 그들의 가법(家法)입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과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는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된 연고로 해서 조가(朝家)에서 시호를 하사하였고, 그밖에는 누세(累世)의 공경(公卿)들이 하나도 시호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정씨들의 시호를 청하지 않는 것은 대개 겸읍(謙挹)한 뜻에 연유된 것인데, 특별히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한다면 자손(子孫)이 된 자들이 어찌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갖추어 시호를 청하도록 해도 아마 옳지 않을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고(故) 도위(都尉)의 청덕(淸德)은 말세(末世)에 사표(師表)가 될 수 있으니, 어찌 그 시장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고 도위 및 고 영돈녕에게 모두 시호를 하사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갑인

문학 이덕해(李德海)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에 신의 형(兄)이 망극(罔極)한 무함을 당하였습니다. 그 뒤에 차론(箚論)한 대신(大臣)이 터무니없는 무함을 당한 사실을 깨닫고 연중(筵中)에서 누차 진달하였는데, 필경에는 말을 지어내어 사람을 모함하고 군주를 속인 것으로써 윤득화(尹得和)를 논단(論斷)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문서(文書)를 몰래 지어낸 것이 윤득화요 거짓말을 지어 낸 것이 윤득화요 재상(宰相)의 차자(箚子)를 충동시켜 만든 것도 또 윤득화요 지명(指名)을 속이어 유도한 것도 또한 윤득화입니다."
하고, 인하여 그 형의 전일에 무함을 당한 상황을 변론하기를 무려 누천만언(累千萬言)을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답하기를,
"대조(大朝)의 엄중하고 명백한 처분(處分)을 경솔히 의론할 수 없다."
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이덕해(李德海)가 그 형을 위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한 장주(章奏)를 보니 신을 침해하여 비난한 것이 있습니다. 당초에 신의 차자에 거론한 궤전(饋錢)의 일은 대개 김상로(金尙魯)에게 들은 것인데, 김상로는 그 당시의 옥관(獄官)인 윤득화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실로 언근(言根)이 본래 공연히 날조한 데서 나온 것인 줄 짐작하지 못했으며 윤득화의 자수(自首)한 공술(供述)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그가 중신(重臣)에게 말했던 것이 허망(虛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24일 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조종부(趙宗溥)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의 상서는 진실로 놀랍고 개탄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른바 ‘지의(旨意)가 음참(陰慘)하여 곧바로 사람을 침멸(湛滅)의 죄과(罪科)로 몰아넣고자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자기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공교롭게 기괄(機括)을 만들어 연루된 자들을 일망 타진하여 반드시 조정을 텅비게 한 뒤에 그만두려 한다.’고 말한 것과 ‘그물이 사방(四方)에 펼쳐져 날으는 새와 달리는 짐승이 모두 걸려든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 어떤 지의(旨意)입니까? 저 간신(諫臣)의 상서는 그 말이 어떠한가를 물론하고 진실로 사실에 의거하여 일을 논의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에 대해 숨김이 없는 뜻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어찌 혹시 조정을 텅 비우는 것에 털끝만큼이라도 방불(彷彿)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갑자기 제외(題外)에 거짓으로 말을 늘어 놓아 이에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조정을 텅 비게 하려는 것이다.’ 하니 이것은 그 의사가 단지 저하(邸下)에게 알소(訐訴)하고 공동(恐動)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포(排布)하고 반결(盤結)하여 그 수각(手脚)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신은 아마 이와 같이 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맑은 조정의 대각(臺閣)의 신하가 모두 장차 한 명의 조영국(趙榮國)이 협제(脅制)하고 구함(驅陷)한 바 되어 감히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을 논하지 못하게 되고, 반드시 장차 참으로 조정을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두는 결과에 점차 이르게 될까 두려우니, 신은 그윽이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고 정광운(鄭廣運)을 그의 집으로 불러들여 이권(利權)을 가지고 위협하면서 정달(停達)의 계획을 실현하려 한 것은 정광운이 아직 살아 있고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그가 이에 감히 ‘가소(可笑)’란 두 글자로써 분명하지 않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 말한 자는 비록 이미 죄를 입고 체직(遞職)되었다지만 홀로 높이 위에 계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인(黨人)’ 운운한 것에 있어서는 오늘날 조정의 위에 대저 누가 당인이 아닙니까? 정달한 사람에게 배척을 당한 자만이 유독 당인이고 정달한 자는 유독 당인이 아닙니까? 그 서(書)에 말하기를, ‘부달(府達)의 정지는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많은 양보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정달한 사람과 똑같이 한 당(黨)이 되는 것을, 그도 또한 능히 스스로 가리지 못하면서 이에 배척한 자로써 당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울라(罻羅)253)  의 기괄이요 제분(齏粉)254)  의 수단입니다. 가령 신이 소령(召令)을 받들고 대각(臺閣)에 들어가 한결같이 정달한 자의 행위와 같게 하지 못한다면 또 장차 조영국의 구협(驅脅)하는 바가 됨을 면치 못하여 조정을 텅 비게 하는 죄과(罪科)에 함께 돌아가게 될 것이니, 이것이 또한 미신(微臣)이 나아가기 어려운 일단(一端)입니다."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답하기를,
"나는 단지 성상의 마음을 따를 뿐이다. 대조(大朝)께서 지극히 공정(公正)하신 거룩한 뜻으로써 전후(前後)의 비지(批旨)가 말씀이 근엄하고 의리가 분명한데, 신자(臣子)가 된 몸으로서 우러러 실천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당습(黨習)을 향해 달려가니, 진실로 매우 해괴한 일이다."
하였다.

 

12월 28일 경신

도정(都政)을 행하여 신회(申晦)를 대사간으로, 신근(申近)을 지평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윤광찬(尹光纘)을 부교리로, 신명상(申命相)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천보(李天輔)와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의 정사(政事)이었다.

 

12월 29일 신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조석(朝夕)의 제전(祭奠)에는 배례(拜禮)가 없다. 그러므로 선정신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상례이동(喪禮異同)》에 고례(古禮)를 회복할 것을 의청(議淸)하였다고 한다. 이제 상제(喪制)가 고례를 회복하는 시기에 있어 마땅히 순문(詢問)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 수묘관(守墓官)·시묘관(侍墓官)에 대해서는 마땅히 먼저 강정(講定)해야 할 것이다. 그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도록 하라.’는 일로 명이 내려졌습니다. 대신에게 문의 하였더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3년 안에는 평상시처럼 모시는 의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석전(朝夕奠)의 상식(上食)에 배례(拜禮)가 없고 단지 헌작(獻酌)한 뒤에 배례가 있는 것이니 또한 살아계실 때 섬기는 도리를 본뜬 의리인 것입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에 지금부터 시작해서 한결같이 선정신의 상례(喪禮) 의논을 따라서 조석전의 상식에 헌작을 끝마치고 나서 배례를 행하고자 하니, 뜻이 몹시 거룩합니다. 어찌 이의(異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주상의 재결을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부터는 무릇 대·소상(大小喪)에 있어 장례(葬禮) 전에 비록 그것이 대전(代奠)이라 하더라도 헌작한 뒤에는 곡(哭)하고 사배(四拜)하고, 곡하고 재배(再拜)하는 일을 《상례수교(喪禮受敎)》에 기재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나례(儺禮)255)  는 예전부터 미리 피인(彼人)들에게 청하여 임시로 감(減)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만 들어가는 비용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또 상고(喪故)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임시로 감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현빈궁(賢嬪宮)의 장례(葬禮) 이전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의 여부(與否)로써 대신(大臣)에게 문의할 것을 명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예문(禮文)은 아직 고거(考據)하지 못했지만 새로 묘소를 역사(役事)하는 것은 이미 곡장(曲墻) 안에서 하고 있으니, 매우 분잡하고 소란스러워 형편상 제사를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졸곡(卒哭) 뒤에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삼도감 의궤(三都監儀軌) 가운데서 감하(減下)한 것은 바로 정례(定例)이니, 모아서 한 권(卷)으로 만들도록 하고 명칭을 《상례수교(喪禮受敎)》라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친히 소지(小識)를 지어 권수(卷首)에 기록하였다.

 

12월 30일 임술

칙사(勅使)의 패문(牌文)256)  이 들어오니, 유엄(柳儼)으로써 원접사(遠接使)를 삼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하교하기를,
"무신년257)  에 사무를 보는 옷은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포(白袍)였고 평상시에 입는 옷은 백립(白笠)·백의(白衣)를 착용하고 기년(朞年)을 마쳤다. 기년복(朞年服)과 대공복(大功服)이 명칭상으로는 비록 차등(差等)이 있지만 복(服)은 하나이다. 이번에 사무를 보는 옷은 순전히 길복(吉服)을 착용하고 평상시에 입는 옷은 흑립(黑笠)과 소대(素帶)를 착용한 채 대공(大功)의 월수(月數)를 마치도록 하였는데, 아마도 그렇지 않을 성싶다. 내 생각에는 압존처(壓尊處)라든가 평상복을 착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이외에는 복기(服期)가 끝나기 이전에 청정 소옥대(靑鞓素玉帶)에다 무양 곤포(無揚袞袍)를 착용하는 것이 옳을 듯한데, 널리 문의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한번 선조(先朝)에서 상례(喪禮)가 고제(古制)를 회복한 이후로부터 압존(壓尊)이나 부득이한 곳을 제외하고는 성상의 스스로 신축(伸縮)할 수 있는 것이면 소복(素服)으로써 그 월수를 마쳤습니다. 가령 무신년에 이미 시행한 준례와 같이 하여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한데, 다만 왕가(王家)의 예(禮)는 사서(士庶)와는 다르고 동작(動作)을 할 때의 복색(服色)은 또 평상시의 복(服)과 구별이 있으니 장사를 지낸 뒤에 사무를 보는 옷은 성상의 하교에 따라 임시로 청정 소옥대·무양 흑단령포(無揚黑團領袍)를 착용하여도 아마 타당할 듯싶습니다."
하고, 여러 대신(大臣)들은 모두 헌의(獻議)하지 않았다. 임금이 밖에 있는 대신과 유신(儒臣)의 헌의가 모두 도착한 뒤에 다시 품의(稟議)할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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