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5권, 영조 28년 1752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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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갑자

호랑이가 경복궁(景福宮) 후원(後苑)으로 들어왔다.

 

1월 2일 갑자

다음달 12일에 영수각(靈壽閣)에 전배(展拜)하겠다고 명하였다. 대개 보령(寶齡)이 금년에 선조(先朝)001)  가 기사(耆社)002)  에 들어간 해와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예조로 하여금 기사에 들어간 월일(月日)을 상고해 내게 한 다음 이 명이 있게 되었다.

 

1월 3일 을축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기를,
"이운해(李運海)는 곧 충군(充軍)한 죄인 이시번(李時蕃)의 지친(至親)입니다. 본원(本院)에서 바야흐로 이시번을 율(律)에 의거 처단하라고 해가 지나도록 쟁집(爭執)하고 있는데, 이제 이에 이시번의 지친을 대망(臺望)에 통의(通擬)했으므로 물정(物情)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우 이중해(李重海)는 출신(出身)한 처음에 가관(假官)003)  에 차임하는 것도 저지당하였으니, 제방(隄防)을 엄히 하는 방도에 있어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통의된 이운해는 의당 개정(改正)해야 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부교리 윤광찬(尹光纘)이 상서하기를,
"《소학(小學)》 책을 거듭 강(講)하게 한 것에서 대조(大朝)께서 근본을 배양하게 하는 뜻을 더욱 우러러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대조께서 수제(修齊)와 치평(治平)의 기반과 시발로 삼으신 것이고 요순(堯舜)의 극진한 치공(治功)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미 강한 책이요 어릴 적에 배운 것이라 하여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백성과 나라의 정무(政務)에 대해 저하(邸下)께서 날마다 부지런히 자문(諮問)하여 더욱 힘써 익히고 연마해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할 적에 공문에 응하고서 그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빈객(賓客)의 접대가 탈품(頉稟)004)  된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는데, 이는 비록 국가에 상고(喪故)가 있었고 낭묘(廊廟)에 일이 많았던 소치에 연유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저하께서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정성에는 끝내 독실히 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아울러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마음에 새겨 강토(講討)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동칙(董飭)함으로써 예학(睿學)과 예치(睿治)가 모두 해와 함께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에 이르게 하소서. 아! 국가는 백성에게 의존하고 백성은 농사에 의존하는 것이니, 농사가 없으면 백성이 없게 되고 백성이 없으면 국가도 없게 되는 것은 이것이 필연(必然)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농우(農牛)가 여역(癘疫)에 의해 죽은 것이 수십만 마리가 되고, 농민(農民)이 여역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수백만 명이 됩니다. 관북(關北)의 요사스러운 쥐와 호남(湖南)의 날아다니는 벌레는 이미 더할 수 없이 놀라운 것인데, 경성에는 호랑이가 마구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시변(時變)이 이러한데도 그윽이 근일 조정의 거조를 살펴보면 또 걱정과 탄식을 견딜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공도(公道)는 완전히 없어지고 사의(私意)가 멋대로 활개치고 있기 때문에 과제(科第)에는 요행을 바라는 문이 바야흐로 활짝 열려 있고 관방(官方)에는 난잡스러운 폐단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절(廉節)은 전부 없어져 풍습(風習)이 날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역서(譯胥)는 권문(權門)의 귀객(貴客)이 되어 있고 대각(臺閣)은 재상(宰相)의 사인(私人)이 되어 있으며, 좋아하는 경우에는 명기(名器)를 주지 않는 것이 없고 시기하는 경우에는 공격과 축출이 오히려 뒤질까 두려워하여 백 가지 천 가지 기괴(奇怪)한 일들을 모두 이름지어 형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대조(大朝)께서 수십년 동안 고심하여 조절 화협시킨 정치를 기필코 일체 무너뜨리려 하고 있으니, 어찌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한번 시의(時議)를 거스르면 차제(次第)로 배척하기 때문에 앞사람을 금고(禁錮)시키고 나서는 뒷사람을 공격하여 탄핵이 번갈아 발론되니, 앞으로의 형편이 두렵습니다. 따라서 대조께서 의지하여 기용한 사람 가운데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비록 근일에 있었던 한 재신(宰臣)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무엇이 시의에 거스름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한규(鄭漢奎)가 먼저 앞섰고 이홍직(李弘稷)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하나도 너무 심한 것인데 둘로도 오히려 부족하여 조종부(趙宗溥)가 이제 또 나와서 입술을 서로 맞대고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근거 없는 일을 끌어대고 나서 끝에 가서는 또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오직 극력 비난하지 못하고 속히 제거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기 때문에 한때 좌전(佐銓)이었던 사람도 또한 격렬한 공격의 여파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아! 또한 심한 일입니다. 지금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세도(世道)가 날로 저하되어 가므로 비록 세가(世家)와 세신(世臣)을 조정에 포열(布列)시켜 모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의견을 조정하는 사이에 무너지기는 쉽고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법인데, 도리어 온갖 계교로 선동하고 알력을 부리면서 오직 배격하여 쫓아내는 것만을 능사(能事)로 여김으로써 대조(大朝)께서 세워놓은 황극(皇極)005)  과 지극히 공정한 치도(治道)를 저패(沮敗)시키고야 말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설의(設意)가 무엇인지 자못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설사 나라를 걱정하여 봉공(奉公)하려는 신하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인의(引義)하면서 물러가려 함으로써 자신을 위해 도모하기에 겨를이 없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그 정상을 통찰하소서. 그리고 전후 대의(臺議)를 가차하여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것을 달갑게 여긴 자들에게 아울러 견벌(譴罰)을 시행하여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임으로써 공도를 괴란시키는 무리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그런 습관을 부리지 못하게 하소서. 연래(年來) 겹쳐 흉년이 든 나머지 기전(畿甸) 백성들의 힘이 대체로 고갈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제 큰 역사(役事)가 겹쳐 닥쳤던 판국에 객사(客使)가 또 나아와 노비(勞費)가 많게 되었으니, 조채(凋瘵)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대조께서 전후 내리신 윤음(綸音)의 내용에 딱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간절한 마음이 지극하였었으니, 저하께서 그 덕음(德音)을 우러러 본받아 백성들의 고통을 곡진히 걱정하는 도리에 있어 또한 특별히 안타깝게 여겨 돌보는 은전(恩典)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월 4일 병인

예조에서 말하기를,
"현빈궁(賢嬪宮)의 신주(神主)를 이달 18일에 만들어 19일 오시(午時)에 위선당(爲善堂)에 봉안(奉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한성부에서 말하기를,
"이번 예장(禮葬)의 여사군(轝士軍)이 9천 5백 26명이었는데, 무신년006)  에 견주어 더 마련한 숫자가 1천 5백 90여 명이었습니다."
하니, 무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두역(痘疫)이 점점 치성하니, 궐문(闕門)의 금표(禁標) 안에는 각별히 수색해서 내어 보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궐내에 출입하는 사방의 사람들은 곧 한집안 사람이나 같은 것인데 금표의 안만을 유독 수색해서 축출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또 듣건대, 여무(女巫)로 하여금 들어가서 수색하게 하는데 그 폐단이 매우 많다고 한다. 백성도 또한 자식인 것이니, 우선 버려두어 편안히 살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북백(北伯)007)  이 곡식을 옮겨다가 진구(賑救)를 보조하게 해 줄 것으로 장청(狀請)했으니, 의당 동남(東南)의 두 도(道)의 것을 획송(劃送)해야 합니다. 영남(嶺南)의 곡식 1만 7천 곡(斛) 안에 1만 곡은 본도(本道) 연해 고을의 대동미(大同米)와 저치(儲置)한 군작미(軍作米) 등의 쌀을 획송하게 하고 7천 곡은 포항창(浦項倉)과 연해의 상진곡(常賑穀)을 획송하게 하며, 관동(關東)의 8천 곡은 연해변의 아홉 고을에서 무슨 곡식이든지를 막론하고 숫자에 충당시켜 획송하게 하소서. 그리고 선척(船隻)은 북도(北道)와 각 해도(該道)의 선척을 반반씩 사용하여 운송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수령은 사폐(辭陛)한 뒤에는 비록 체직(遞職)시켜야 할 단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도신(道臣)이 의당 장문(狀聞)해야 하는 것인데, 은율 현감(殷栗縣監) 이국보(李國輔)는 그의 어버이의 병이 위중(危重)하다는 것으로 칙행(勅行)이 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조(吏曹)에서 초기(草記)008)  로 파출(罷黜)시켰습니다. 이를 응당 행해야 하는 전례와 똑같이 여겨 끝없는 폐단이 불어나게 해서는 안되니, 이조 당상을 중추(重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30년 동안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을 기울여 탕평(蕩平)의 정치를 실현시켜 점차 서로 도와 협동하게 될 기대가 있게 되었습니다만, 근래에는 더욱 해이해져 가고 있습니다. 대개 호대(互對)하는 것이 비록 졸렬한 법규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의거할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호대하는 것을 공척(攻斥)하는 의논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그 이야기를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금은 마치 말이 굴레와 재갈을 벗은 것처럼 되어 의거하여 모방할 데가 없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만약 이를 분명히 아시어 앞서 행한 것을 뉘우치신다면 좋겠습니다. 이는 신 한 몸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앙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30년 이래 다행히 살육(殺戮)하는 걱정이 없었던 것은 그래도 탕평을 행한 효험인 것입니다. 신하들이 서로 살육하게 되는 동기는 그 시초가 작록(爵祿)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에 불과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들 사이에 서로 사이가 나쁘게 되는 것이 말린 밥 때문에 어긋나게 된 것이다.’ 했는데, 작록을 말린 밥에다 견주어 보면 어찌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폐족(廢族)이 무릇 얼마입니까? 무신년009)  의 일을 생각하시어 경계하소서. 저 대신(大臣)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형체를 볼 수 없는데 그 그림자를 살펴보기를 원하니, 지금의 경우는 그림자를 살펴보는 것보다 지나치다."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이 뒤로 반드시 계속될 것이 있게 되는데 계속될 것은 바로 살육인 것입니다. 대저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을 남들이 혹 작록을 오로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수(分數)로 말한다면 어찌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또한 반드시 언자(言者)들이 하는 말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대저 살육을 야기시킬 기미가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릉(豊陵)의 호대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자, 조재호(趙載浩)가 말하기를,
"처음에 호대한 것은 피차의 지면(知面)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그 뒤에는 어찌 반드시 호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의 형(兄)의 뜻은 대개 매듭이 풀려 혼화(渾化)된 뒤에는 피차의 정지(情志)가 서로 미더웁게 될 것이니 호대하는 것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는 탕평의 극공(極功)인 것입니다만, 지금 과연 매듭이 모두 풀려 혼화된 상태입니까? 대저 호대할 적에는 진실로 피차 살육을 할 기미가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상반(相反)된 상황에 있습니다. 위로 종묘(宗廟)에 고하여 천지 신명(天地神明)이 또한 모두 알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의당 초지(初志)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기미라고 하는 것은 발동이 있게 될 조짐인 것입니다. 정미년010)   이후에는 다행히 살육하려는 의도들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 기미가 있습니다. 근래 소장(疏章) 사이에는 대단히 괴이한 말들이 없었는데, 이번 조영국(趙榮國)이 당한 대언(臺言)에는 신축년011)  ·임인년012)  의 구기(口氣)가 완연하였습니다. 수상(首相)의 말도 또한 이와 같으니, 대개 수상이 일찍이 전에 아홉 사람의 계사(啓辭)를 당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홉 사람의 계사는 내가 잊었다."
하자, 정우량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권익관(權益寬)이 아뢴 바입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적(指的)한 것이 없이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는 것이 흡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성(李宗城)을 미워하고 아울러 조영국을 공격한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 조짐이 좋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이미 하교하였는데 그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홍직(李弘稷)이 상서한 뒤에 조영국의 대장(對章)이 있었고 조종부(趙宗溥)가 또 논하였는데, 동궁(東宮)의 비지(批旨)가 기특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떠했는가?"
하자, 조현명이 외어서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조영국이 혼자 남았기 때문에 과녁이 되어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아까 대체(大體)에 대해 진달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각별히 더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삐뚤어진 마음을 품고 있은 지 오래이니, 무너뜨리기는 어렵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삐뚤어진 마음을 품어 온 지 오래었어도 감히 내어 부리지 못했었다가 이제는 내어 부리고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인재를 수습(收拾)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하였고 지금의 시사(時事)도 인재를 수습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으니, 인재들을 초야(草野)에 버려지는 일이 없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이제 물러가려 하고 있는데, 조정에 있을 적에 기용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감히 이번에 하나하나 거론하겠습니다. 한익모(韓翼謨)는 결코 경솔하고 조급하고 들뜬 사람이 아니며, 이후정(李貞)은 진실로 일을 맡길 만하며, 이창의(李昌誼)는 국사를 감당할 수 있으며, 조영국은 이미 저와 같습니다. 또 이성중(李成中)이 있는데 이성중은 재능을 구비하고 있으며, 김상복(金相福)이 있는데 신에게 지친(至親)이 됩니다만, 옛사람의 말에 ‘내거(內擧)013)  에는 지친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상복이 외모는 비록 중후하지 못하지만 그 마음은 상서롭고 길(吉)합니다. 서지수(徐志修)는 그의 아비처럼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을 지니고 있고 또 표숙(表叔)의 정신을 겸하였으니, 잘 배양하면 크게 쓰일 곳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래도록 변방 고을에 그대로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연소배(年少輩)들 가운데에는 황인검(黃仁儉)이 순실(純實)하여 잡된 마음이 없습니다. 임상원(林象元)은 또한 신과 지친의 관계인데 방면(方面)을 맡을 만한 재능이 있습니다만, 죄를 받은 뒤에 외방 고을에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또한 유의하여 배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지금 고하고 물러가면 3년 안에는 다시 만날 수 없는데, 신의 나이 이미 노쇠하여 다시 천안(天顔)을 뵈올 기약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감히 천안을 우러러보고 물러가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제 장차 오래도록 천폐(天陛)를 멀리하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체(聖體)를 보중(保重)하소서."
하자, 여러 신하들이 교대로 아뢰기를,
"이 대신(大臣)의 일은 너무 지나칩니다. 이는 이미 예경(禮經)에 없는 것인데, 3년은 더더욱 과중(過中)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 일이 있게 되면 대신이 반드시 스스로 올 것이니, 내가 이제 억지로 만류하지 않겠다. 나무는 조용히 있으려 하는데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아들은 효도를 하려 하는데도 어버이는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대신의 이번 걸음에 어찌 다시 선친(先親)을 만날 수 있게 되겠는가마는 정리(情理)는 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뢴 내용이 이러하기는 합니다만, 신의 이번 걸음은 결코 중지할 수 없습니다.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의당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올 것입니다만, 다행히 일이 없다면 다시 들어올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슬픔과 오열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였다.

 

1월 5일 정묘

송도(松都)의 진사(進士) 이휘동(李徽東) 등이 상서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부(本府)에 성균관을 창설한 것은 고려(高麗) 때부터였는데 우리 태조 대왕께서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옮긴 뒤에도 그 학교에 성균관이라는 호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무릇 관계되는 의절(儀節)도 옛법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분봉상시(分奉常寺)를 설치하여 서적전(西籍田)014)  에서 자성(粢盛)015)  을 봉진하여 석전제(釋奠祭)에 제공하게 하여 왔습니다. 아! 우리 나라 3백 개의 주현(州縣)에는 성균관이란 이름이 없습니다만, 유독 본부에서만 이렇게 일컫고 있으며, 계성사(啓聖祠)를 태학(太學)의 법규를 모방하여 분봉상시에서 자성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는데, 기타의 식례(式例)도 태학과 똑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면세(免稅)에 관한 한 조항만 다른 주현의 예(例)와 혼잡시켜 시행하고 있어 태학의 4백 결(結)에 대한 것과 달리하고 있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이 학궁(學宮)에는 전부터 있던 것과 새로 매입한 것이 80여 결에 불과한데 구전(舊田)은 이미 면세시켰으니, 새로 매입한 전지 40여 결에 대해서도 특별히 그 세금의 견면(蠲免)을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엊그제 북관(北關)의 진구(賑救)에 관한 일을 대조(大朝)께 진달했는데 한가지 미처 앙품(仰稟)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가계(家計)가 좀 풍족한 자들에게 사곡(私穀)을 연출(捐出)하게 하여 진구해서 살린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열성조(列聖朝)에서 특별히 정직(正職)에 제수하고 가자(加資)하기도 하여 뒷사람을 권면하는 방도로 삼았었으니, 지금도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상을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은 명도(命途)가 험난하여 태어난지 2세 때 신의 아비가 사망하였으니, 실로 천지 사이의 죄인인 것입니다. 금년은 곧 신의 아비가 사망한 구갑(舊甲)이기 때문에 이제 물러가 분묘(墳墓)를 지키기 위해 어제 이미 대조(大朝)께 영구히 하직하는 인사를 올렸습니다. 3년이 지난 뒤 다시 들어와 뵙게 될는지는 미리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영구히 물러가는 즈음을 당하여 감히 못잊어 안스러워하는 정성을 진달합니다. 신이 일찍이 숙묘(肅廟)께서 14개월 동안 혼자 거처하겠다는 일 때문에 연석(筵席)에서 주달할 적에 그윽이 저하(邸下)를 살펴보건대, 기부(肌膚)가 풍성하나 겸하여 안환(眼患)이 있으셨으니, 일호라도 삼가지 않으시면 염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쪼록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황극(皇極)을 세우고 당파를 타파시키는 것이 대조(大朝)의 가장 중대한 사업이었습니다. 대조께서 신의 형과 함께 피차를 참작하여 기용하기로 의논을 정하고 나서 이를 수십년 동안 행하여 온 결과 조상(朝象)이 약간 편안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도(世道)는 점차 처음만 못하니, 이는 저하의 책임인 것입니다. 원컨대 어기지 말고 준수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1월 6일 무진

경상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이 상서하기를,
"조종부(趙宗溥)가 신이 앞서 상서한 내용의 구어(句語)들을 주워 뽑아서 멋대로 비난과 모욕을 가하였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칼자루를 쥐고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어대기를 마치 사수(私讎)를 갚는 것처럼 하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그의 말은 전혀 사리가 없는 것으로 정광운(鄭廣運)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허황한 것에 속합니다. 신에게 무슨 이익과 무슨 권한이 있기에 잠시 이야기하는 사이에 남을 협박 공갈할 수 있겠습니까? 우연히 한번 지나다 찾아온 사람을 맞이하여 왔다고 하면서 고고(高高)한 큰소리를 입증함에 있어 의심이 없기에 이른다면 무슨 말로든 무함할 수 없겠습니까? 저 대신(臺臣)이 칼을 갈면서 기다려 온 지 이미 오랬습니다. 선성(先聲)이 이르는 곳에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는데, 필경에는 용력(勇力)을 과시한 것이 이홍직(李弘稷)이 진달한 말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의 이미 물러가 있는 신의 몸에 대해 논하는 것에 그쳤을 뿐입니다. 과연 그의 말과 같이 신 때문에 저지당하고 위축되어 감히 발론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면, 이는 대각(臺閣)의 수치가 될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죄는 속바치기 어려운 것이 됩니다. 생각건대, 신은 외로운 몸이니 제거하려 한다면 당인(黨人)들의 허다한 심력(心力)을 허비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앞에서는 창으로 막 찌르려는데 뒤에서는 또 계속 활을 들고 달려들어 교대로 기봉(機鋒)016)  을 사용하여 기필코 죽이고야 말려고 하니, 그 계교가 너무도 수고롭습니다. 이런 두서(頭緖)를 살펴보면 반드시 여기에서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죽어 가루가 되더라도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직명(職名)에 아직도 얽매어 여태까지 처분(處分)이 없으니, 신을 삭직(削職)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양하는 것이 지나치다.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1월 8일 경오

달이 목성(木星)을 먹어 들어갔다.

 

복중(服中)의 복색(服色)을 의논하여 결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하교하기를,
"경자년017)  의 상례(喪禮)를 복구시키고 무신년018)  에 복구한 복제(服制)를 준용(遵用)하여 시사(視事)할 때에는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포(白袍)로 하고 연복(燕服)은 백립(白笠)·백의(白衣)로 기년(朞年)을 끝마치게 하라. 기·공(朞功)은 명칭에 비록 차등이 있으나 복(服)은 똑같은 것이다. 이번 장례(葬禮)를 지낸 뒤에는 연복은 흑립(黑笠)과 소의(素衣)로 공월(功月)을 끝마치게 하되 시사복(視事服)에 순일하게 길복(吉服)을 쓰는 것은 끝내 그렇지 않은 것에 관계가 된다. 그리고 무술년019)  의 복제(服制)가 복구(復舊)되지 않은 이전에도 장사(葬事) 전 동가(動駕) 때엔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담복(淡服)을 입기로 했는데, 더구나 성의(聖意)를 본받아 복제를 회복시킨 뒤인 것이겠는가? 나의 의견은 압존(壓尊)020)  되는 곳과 상복(常服)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곳 이외에는 복(服)이 끝나기 전엔 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로 하고 흉배(胸背)가 없는 곤포(袞袍)로 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처음 대신(大臣)에게 하문하려 했었으나 무신년에는 군신(君臣)이 모두 기복(朞服)을 입었었기 때문에 버려두었다.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이는 하복(下服)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널리 순문(詢問)하여 조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예조로 하여금 대신(大臣)·유신(儒臣)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한번 선조(先朝)에서 옛 상례(喪禮)를 모두 회복시킨 뒤로부터 압존과 부득이한 곳을 제외하고 성상(聖上)께서 스스로 펴신 대로 소복(素服)으로 그 달수를 채우는 것을 무신년의 전례와 같게 하는 것이 또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만, 다만 왕가(王家)의 예(禮)는 사서인(士庶人)과는 다른 것이어서 거둥할 때의 복색은 또 연거(燕居) 때의 복색과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장사지낸 뒤의 시사복은 성교(聖敎)에 의해 임시로 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에 흉배가 없는 흑원령포(黑圓領袍)를 사용하는 것이 사의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전 부사(府使) 박필부(朴弼傅)는 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기·공(期功)의 복(服)은 비록 차등이 있지만 정(情)의 소재에 이르러서는 끝내 차이가 없는 것이니,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어 의(義)에 의거하여 행하시되 정례(情禮)를 참작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명하기를,
"영상이 아뢴 것이 이미 옳고 유신(儒臣)들 가운데서 헌의(獻議)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복색은 하교에 의하여 거행하라. 조신(朝臣)의 복색은 아울러 전대로 하고, 연여(輦輿)·의장(儀仗)도 전대로 하며, 복(服)이 끝나기 전에는 전후부(前後部) 고취(鼓吹)와 전정(殿庭)의 헌가(軒架)를 아울러 제거하라. 융복(戎服)으로 동가(動駕)할 때의 복색은 흉배(胸背)가 없는 흑사(黑紗)로 된 철릭[帖裏]과 청대(靑帶)는 그대로 쓰고 입식(笠飾)·옥로(玉鷺)로 청정(靑鞓)·옥대(玉帶)에 상대하는 뜻을 두되 단지 깃털은 제거한다. 여러 신하들의 융복에는 호수(虎鬚)를 그대로 쓰고 평상시에는 단지 깃털 꽂는 것만 제거한다. 이런 내용을 또한 상례 수교(喪禮受敎)에 기재하라. 기복(朞服)에 대해서는 무신년의 예에 의거 참포(黲布)·흑립(黑笠)·흑대(黑帶)를 쓰고 백관(百官)의 복(服)은 공복(公服)과 같게 하되 내시(內侍)는 흑립(黑笠)·청의(靑衣)로 하도록 일체 재록(載錄)하라."
하였다.

 

총관(摠管)으로서 궐직(闕直)한 사람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가 직(職)에 있으면서 제관(祭官)에 차임되어 향(香)을 받아가지고 나아갔는데 다른 당상(堂上)들은 모두 유고(有故)하여 체직(替直)을 하지 않았다. 임금이 이런 사실을 알고 하교하기를,
"총부(摠府)에 궐직이 있은 것은 총부를 설치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 비록 오위(五衛)의 제도는 없지만 숙위(宿衛)하는 아문(衙門)에서 이에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일이 매우 한심스럽다. 공고(公故)로 외방에 가 있는 경우 이외는 아울러 파직시키라. 궐대(闕代)가 있을 적에는 구전(口傳)으로 차출하여 패초(牌招)해서 입직(入直)하게 하라."
하였다.

 

왕세자의 서연(書筵)에서 소대(召對)로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소견(召見)하고 절목(節目) 등의 일을 논정(論定)하였다. 하교하기를,
"원량(元良)021)  이 공제(公除)022)   뒤와 장사(葬事)지내기 전에 주연(胄筵)을 할 적에 평상시의 곤룡포를 입는 것은 잘 살피지 못한 것에 관계가 되기 때문에 장사지내기 전에는 비록 주연을 열더라도 재계(齋戒)하는 날 주연을 여는 예(例)에 의거하여 소대(召對)하는 것으로 하도록 하교했었다. 그런데 중관(中官)이 잘못 듣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주연을 열지 않고 있다가 오늘 아침부터 소대로 하도록 하고 신시(申時)의 소대도 또한 겸하여 행하게 할 것으로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복색(服色)에 대해 이미 결정하였는데 전알(展謁)할 때에는 길복(吉服)을 쓰되 단지 고취(鼓吹)만 제거하고 기사(耆社)에 전배(展拜)할 때에도 또한 같게 하라. 3월에 전배할 때 입을 복색은 전에 강정(講定)한 복색대로 흑원령포(黑圓領袍)로 거행하라. 능(陵)에 전알하는데 이르러서는 기유년023)  에 이미 행하였었으니 또한 흑철릭을 쓰도록 하라. 세자(世子)의 복색은 오월복(五月服) 전에는 당연히 나와 같게 해야 한다. 이번 영칙(迎勅)할 때 출궁(出宮)할 적에는 의당 흑원령포로 해야 하고 막차(幕次)에 들어가서는 다시 곤룡포로 갈아입고 영칙하여 회가(回駕)한다. 관소(館所)와 교전(郊餞) 때는 모두 흑원령포로 거행하라."
하였다.

 

1월 9일 신미

훈부(勳府)의 당상(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날 훈부에서 진향(進香)하기 위해 당상들이 모두 들어왔기 때문에 소견한 것이다.

 

임금이 예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묘소(墓所)의 제관(祭官)에 관해 일정한 예가 없다는 것으로 아뢰니, 혼궁(魂宮)에 명하여 우제(虞祭)에서 담제(禫祭) 때까지 초헌(初獻)은 정2품이 하고 아헌(亞獻)·종헌(終獻)은 종2품이 하게 하였다. 묘소는 3년 안의 헌관(獻官)은 당상관으로 차정하되 혹은 특교(特敎)로 하든지 혹은 구차(求差)로 하든지 구애되지 말 것으로 상례 수교(喪禮受敎)에 기재하게 하였다.

 

1월 10일 임신

내농포(內農圃)의 말을 연수(年數)를 한정하여 환급(換給)하라고 명하였다. 사복 도제조(司僕都提調)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내농포에서 마필(馬匹)은 받아간 뒤에는 전혀 보호하고 아끼지 않는 탓으로 1,2년을 넘기지 못하고 번번이 병이 들어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4년으로 기한을 정하여 봉수(逢授)024)  해 간 사람으로 하여금 기한 안에 병이 들어버릴 경우에는 스스로 개립(改立)하게 하는 것을 청컨대 군병들에게 말을 지급하는 예와 같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몸소 현빈궁(賢嬪宮)의 사시(賜諡)에 대한 고유전(告由奠)의 축문(祝文)과 명정(銘旌)을 세우는 데 대한 고유전의 축문을 지어서 내렸다.

 

1월 11일 계유

퇴광지(退壙地)에 쓰는 회(灰)는 그 두께를 3촌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번 능(陵)에 전알할 때 수가(隨駕)할 사람들에게 순색으로 된 홍의(紅衣)를 입게 하는 것은 옛 복제(服制)를 회복시킨 뜻에 어긋난다는 것으로, 당하관은 온천(溫泉)에 행행할 때의 예에 의거하여 흑록 청의(黑綠靑衣)에 호수(虎鬚)를 쓰게 하며, 액정(掖庭)의 사람들은 황초립(黃草笠)·호수(虎鬚)에 녹청의(綠靑衣)를 쓰게 하도록 명하였다.

 

칙사(勅使)가 서울에 들어오는 것이 26일 경이 될 듯하니, 경기 감사는 묘소(墓所)에 도착한 뒤 먼저 경상(境上)으로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에 대해 이미 이만유(李萬囿)의 예에 의거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으나, 정격(政格)을 문란시킬 수 없다는 것으로 먼저 방어사(防禦使)에 조용한 뒤 곧이어 조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김중만은 무신년025)  의 공신(功臣)인데 나이가 늙고 벼슬이 낮다는 것으로 누차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에게 유시(諭示)하여 곤망(閫望)에 주의(注擬)하게 했었다. 그러나 홍계희는 김중만의 인품이 용렬하다는 것으로 곤란하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수사(水使)에 제수하더라도 어찌 부임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비록 곤수(閫帥)에 제수하려 해도 먼저 방어사에 제수한 뒤에야 수사에 제수할 수가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방어사에 먼저 조용하라. 오늘 제수했다가 내일 체직시키면 혹 부임하기 전에 잠시 곤수의 칭호를 가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가 입시하였다. 승지 남태기(南泰耆)가 아뢰기를,
"신이 예방(禮房)으로 잇따라 대압(代押)을 행하였습니다만, 덕종(德宗) 위(位)의 축문(祝文)은 단지 ‘국왕신(國王臣)’이라고만 쓴 것은 예(禮)에 있어 미안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덕종은 추숭(追崇)한 위(位)이기 때문에 당초의 축식(祝式)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뒤 수의(收議)하여 이정(釐正)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그럭저럭하다가 과단성 있게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종(仁宗) 위(位)의 축문은 ‘효증질손(孝曾姪孫)’이라고 썼으니, 이는 또한 이정한 것이다."
하고, 하교하기를,
"축문의 두사(頭辭)를 전대로 두고 아직 고치지 않은 곳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전일의 문의(問議)를 상세히 조사하게 하여 입시할 때 품하라. 그리고 대신(大臣)·유신(儒臣)에게 문의하게 하라."
하였다.

 

권일형(權一衡)·홍봉조(洪鳳祚)를 승지로, 정휘량(鄭翬良)을 대사헌으로, 박평(朴玶)을 장령으로, 이사관(李思觀)·허휘(許彙)를 지평으로, 이양천(李亮天)을 헌납으로, 최태형(崔台衡)·김시묵(金時默)을 정언으로, 심육(沈錥)을 좨주로, 윤광찬(尹光纘)을 보덕으로, 한명여(韓命輿)를 문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빈궁(殯宮)에 친림(親臨)하여 현빈(賢嬪)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일 전에 도감(都監)의 도제조와 당상이 흑단령(黑團領)·오사모(烏紗帽)에 품대(品帶)를 갖추고 책인(冊印)을 받들어 각각 채여(彩轝)에 실은 다음 봉배(奉陪)하고 대궐로 나아갔는데, 세장(細仗)으로 전도(前導)하고 고훤(考喧)026)  하였으며, 대궐에 이르러서는 승지가 전봉(傳捧)하여 들여왔다. 이날에 이르러 사자(使者) 이하가 흑단령을 갖추고 모두 조당(朝堂)에 모였다. 예랑(禮郞)이 채여 두 대를 명정문(明政門) 밖에 진설하여 놓았고 병랑(兵郞)은 세장(細仗)을 채여 남쪽에 진설하였다. 사자 이하는 문밖의 위차(位次)로 나아갔는데 전의(典儀) 이하가 먼저 들어와 위차로 나아갔다. 전교(傳敎)하여 승지(承旨)와 집사자(執事者)를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게 하니, 사자 이하가 동문(東門)을 거쳐 들어와 위차로 나아갔다. 내시(內侍)가 시책인(諡冊印)을 받들고 합문으로 나아가 전교관(傳敎官)에게 주니 전교관이 꿇어앉아서 받았다. 집사자(執事者)가 각각 안상(案床)을 들고 전교관 앞에 꿇어앉으니 전교관이 책인(冊印)을 각각 안상 위에 놓았으며, 전(殿)의 동문을 경유하여 동계(東階)로 나아갔다. 사자가 동북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서고 집사자는 각각 안상을 들고 나아가 전교관의 남쪽에 섰다. 전교관이 ‘전교가 있다.’ 하니, 사자 이하가 꿇어앉았다. 전교관이 선교(宣敎)하기를,
"현빈에게 시책(諡冊)과 시인(諡印)을 내리는데 경(卿)에게 전례(展禮)하기를 명한다."
하였다. 선교하고 나자 사자 이하가 네번 절하였다. 집사자가 안상을 들고 전교관 앞으로 나아가서 전교관이 시책함(諡冊函)을 가져다가 사자에게 주자 사자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시책함을 안상 위에 놓았다. 안상을 드는 사람이 마주들고 물러가 사자의 뒤에 가서 섰다. 전교관이 시인록(諡印盝)을 가져다가 사자에게 주니 사자가 꿇어앉아 받아서 시인록을 안상 위에 놓았다. 안상을 드는 사람이 마주 들고 물러가 사자의 뒤에 가서 서니 사자가 네 번 절하였다. 전교관이 물러가니 사자가 동문을 경유하여 나아갔다. 책인안(冊印案)을 드는 사람이 차례대로 앞으로 나아가니, 사자가 책인을 각각 채여(彩輿)에 놓았다. 세장(細仗)이 전도(前導)하고 사자 이하가 그 뒤를 따랐다. 빈궁(殯宮)의 문밖으로 나아가 사자가 책인을 임시로 대문 밖 악차(幄次)에 가져다 놓았다. 사자가 들어가서 중문(中門) 밖으로 나아가니, 책인안을 드는 사람이 각각 마주 들고 따라 들어와 위차로 나아갔다. 내시(內侍) 알자(謁者)가 승언색(承言色)을 인도하고 사자(使者)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았다. 사자가 일컫기를,
"사자 서명빈(徐命彬)이 전교를 받들어 현빈(賢嬪)에게 시책과 시인을 내린다."
하였다. 말을 끝내고 나서 사자가 책함(冊函)을 가져다가 승언색에게 주고 난 다음 또 인록(印盝)을 가져다 승언색에게 주니, 승언색이 받아가지고 내시에게 주었다. 내시가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안상에 올려놓으니, 안상을 드는 사람들이 각기 안상을 내시에게 주었다. 먼저 들어가 빈궁(殯宮)의 계하(階下)에 놓자 임시로 욕위(褥位)에 가져다 놓았으며 사자 이하는 잠시 물러갔다. 여관(女官) 2인이 꿇어앉아 책인(冊印)을 가지고 함께 들어가 권욕위(權褥位)에 놓으니, 여집사(女執事)가 하속(下屬)들을 데리고 예찬(禮饌)을 받들고 들어와 영좌(靈座) 앞에 진설하였다. 향로(香爐)·향합(香盒)·병촉(幷燭)을 앞에 진설하였다. 전의(典儀) 이하가 먼저 들어와 위차로 나아가니, 사자가 배위(拜位)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았다. 여집사가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 세 번 향(香)을 올리고 술을 따라 영좌 앞에 올렸는데, 잇따라 석 잔을 올린 뒤에 본래의 위차로 돌아왔다. 승언색(承言色)이 합문 밖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전언(典言)에게 전고(傳告)하니, 전언이 영좌 앞으로 들어와서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고하기를,
"사자 서명빈이 전교를 받들어 삼가 시책(諡冊)과 시인(諡印)을 올립니다."
하였다. 고하고 나서는 본래의 위차로 돌아갔다. 여관(女官) 2인이 함께 책인안(冊印案) 앞으로 나아가 한 사람은 책함을 취하고 한 사람은 인록을 취하여 중계(中階)로 올라오니, 전언과 여집사가 각기 안상을 들고 따랐다. 향안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먼저 안상을 놓고 책인을 그 안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관이 책함을 열고 시책(諡冊)을 읽기를,
"왕은 말하노라. 쌓인 슬픔이 병이 되어 구저(舊邸)를 버리고 나를 버렸는데, 남긴 덕에 대한 시호를 내려야겠기에 새로운 책문(冊文)을 높이 걸어 그대에게 내린다. 이에 이전(彛典)을 따라 아름다운 칭호를 선양(宣揚)하노라. 오직 그대 현빈(賢嬪)은 아름다운 성품과 단아한 자태를 지녔다. 그 영의(令儀)가 깊고도 조용하여 지닌 덕이 규곤(閨閫)의 법칙이 되기에 합당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현빈에 간택(揀擇)되어 저사(儲嗣)의 존위(尊位)에 짝하였다. 큰 복을 누릴 것을 기대하였으므로 자무(慈撫)에 틈이 없으니 동조(東朝)께 함이(含飴)027)  의 정의를 미루어 주었고, 효양(孝養)에 흠결이 없으니 내전(內殿)에서 주궤(主饋)의 법을 도와주었다. 그랬는데 하늘이 돌보아 주지 않는 아픔이 있게 되어 갑자기 미망(未亡)의 슬픔에 걸리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아름다운 복숭아 나무에 꽃이 피었으나 육궁(六宮)028)  의 영가(詠歌)가 오래가지 못했고, 선계(仙桂)에 열매가 없으니 20년의 세월에 대한 슬픔이 더욱 깊구나. 눈물을 참고 억지로 기쁜 얼굴을 지은 것은 나의 뜻을 위로하여 주기 위한 것이었고, 병이 오래 되어 고황(膏肓)의 증세가 된 것을 숨긴 것은 이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해서였다.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였던 것은 예전에 있었던 것만 같고 시종 시선(視膳)을 부지런히 한 것은 오늘까지 법식이 되었다. 오직 만년(晩年)에 길이 의지하려 했더니 갑자기 젊은 나이에 서거(逝去)함을 통곡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때의 병이라 여겨 약원(藥院)에서 창황히 애를 썼는데 그 누가 밤중에 초혼(招魂)하게 되어 초액(椒掖)이 놀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남모르게 사그라지는 것이 빌미가 되어 있는 것인데 어찌 의원이 치료를 잘못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후한 보답을 내리는 징험이 없으니, 더욱 신리(神理)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겠다. 자애로운 삼전(三殿)이 슬픔에 잠겨 있으니 지난 일을 어떻게 차마 거론하겠으며, 온 조정(朝廷)이 근심에 휘말렸으니 노경(老境)의 허전한 마음이 어떻게 위로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시호를 내려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어떻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밝혀서 아름다움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어서 성경(誠敬)이 갖추 지극하였으며, 순일(純一)함은 덕의 정수인 것이어서 화정(和正)을 겸하여 지녔다. 이에 남긴 아름다움을 척기(摭記)하고 이어 공의(公議)를 채택하여 신(臣) 의정부 우참찬 서명빈을 보내어 시책(諡冊)을 받들고 가서 효순(孝純)이라 증시(贈諡)하게 하였다. 그대의 의형(儀形)이 영원히 사라졌으니 현목(玄木)029)  을 어루만짐에 슬픈 마음이 가중되고, 행의(行誼)가 더욱 드러나니 동관(彤管)030)  을 잡고서 아름다운 칭송을 널리 전한다. 만일 정령(精靈)이 혼매(昏昧)하지 않다면 이 총명(寵命)을 흠봉(欽奉)하기 바란다. 아! 슬프다."
하였다. 다 읽고 나서 시책을 도로 책함(冊函)에 넣으니, 전언(典言)이 책함(冊函)을 들어다가 영좌(靈座) 앞에 가져다 놓았다. 여관(女官)이 책함을 안상(案床)에 놓고 본래의 위차로 돌아갔다. 여관이 꿇어앉아 녹함(盝函)을 열고 낭독하기를,
"효순 현빈(孝純賢嬪)의 인(印)이다."
하였다. 낭독하고 나서는 인(印)을 도로 녹함에 넣어 안상 위에 놓고 본래의 위차로 돌아갔다. 사자가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사자가 대궐에 나아가 복명(復命)하였다.

 

도감(都監)의 당랑(堂郞) 각각 1원(員)이 시복(時服)을 갖추고 집사(執事)와 서사관(書寫官)도 시복을 갖추고서 빈궁(殯宮) 외정(外庭)에 있는 악차(幄次)의 상전(床前)으로 나아갔다. 서사관 홍봉조(洪鳳祚)가 명정(銘旌)에 ‘효순 현빈 재실(孝純賢嬪梓室)’이라고 썼다. 쓰고 나자 도감 당상이 명정을 받들어 내시(內侍)에게 주니 내시가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명정을 세웠다. 그리고 그전의 명정은 받들고 나아와 궁정(宮庭)에서 불태웠다. 그리고 나서 여러 신하들이 물러났다.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명정을 고친 데 대한 전(奠)을 행하였다.

 

1월 12일 갑술

명하기를,
"이번 알릉(謁陵) 때에는 금영(禁營)의 유도 대장(留都大將)은 총융사(摠戎使)에게 대신하게 하고 전배(前陪)인 순령수(巡令手)·군뢰(軍牢)는 각각 다섯 쌍으로 하며 협연군(挾輦軍)은 4백 명으로 교대해서 운행하게 하라. 척후병·복병은 한결같이 기유년031)  의 예(例)에 의거 거행하고 군병(軍兵)은 13초(哨)로 거행하라."
하였다.

 

생원(生員) 이심보(李心輔) 등이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태어난 옥천(沃川)의 구룡촌(九龍村)은 곧 공성(孔聖)이 태어난 궐리(闕里)이고 주자(朱子)가 태어난 무원(婺源)인 것입니다. 선정이 태어난 곳을 평일 학문을 강습(講習)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이유신(李裕身)이란 자가 도점(盜占)하여 늑장(勒葬)하였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분묘(墳墓)를 파내게 하여 주소서. 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이유신이 선현(先賢)을 무시한 죄를 감단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마땅히 사문(査問)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도성(都城)의 안팎에 호랑이의 환란이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사(高麗史)》에도 호랑이가 도성으로 들어온 일이 있으니, 여기에서 음(陰)이 성대하여지고 양(陽)이 쇠미하여지는 단서를 알 수 있다."
하니,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옛날에는 있지 않던 변괴입니다. 근래 외간(外間)에 근거없는 말로 인해 소요가 일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연은문(延恩門)의 철삭(鐵索)이 끊어지고 기둥 사이에 쓴 글씨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철삭은 세월이 오래되면 끊기기 마련인 것이어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글씨는 더더욱 가소로운 것입니다."
하고, 승지 홍봉조는 말하기를,
"상한(常漢)들에게는 으레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자, 홍계희가 말하기를,
"숙묘(肅廟)임신년032)   정월(正月)에 도성 안의 소요 때문에 하교하여 엄히 계칙했었는데 금년 정월에도 또 이와 같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였다.

 

1월 13일 을해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균역(均役)의 사실을 기록한 책자를 왕세자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때에는 전지(田地)에 의하여 군병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병이 농정(農政)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군정과 농정이 한 번 나뉘어져서 선왕(先王)의 정치가 실추되었습니다.
아조(我朝)의 오위법(五衛法)은 실로 부병(府兵)의 제도033)  를 모방한 것으로 번(番)을 나누어 돌려가면서 교대로 쉬게 하였기 때문에 병정(兵政)이 농정(農政)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간혹 성(城)을 쌓거나 변방에 수자리 사는 역사(役事)가 있기는 하였지만 조정에서 기병(騎兵)·보병(步兵)들이 식량을 싸가지고 멀리 달려가는 폐단을 진념(軫念)하여 포목(布木)을 바치고 고립(雇立)034)  시키는 것을 허락하여 왔는데, 이것이 징포법(徵布法)이 생겨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임진 왜란(壬辰倭亂) 이후 오위법을 혁파하고 훈국(訓局)을 설치했는데, 군병을 배양하는 데 드는 수요(需要)를 오로지 양보(良保)에게 책임지웠기 때문에 징포하는 길이 차츰 넓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이 서로 잇따라 만들어지기에 이르러서는 징포법이 이미 처음보다 외람스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밖에 교묘한 명색(名色)을 만들고 일을 빙자하여 징렴(徵斂)하는 것이 달마다 보태지고 날마다 가중되게 되었습니다. 양군(良軍)이라고 일컫고 포(布) 2필(疋)씩을 거두는 것이 숙묘(肅廟) 초년에는 그래도 30만이었었는데, 지금은 50만이 되고 있습니다.
국초(國初)에는 신역법(身役法)이 매우 엄하여 위로 공경(公卿)의 아들에서부터 아래로 편맹(編氓)에 이르기까지 각각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음덕(蔭德)이 있는 사람은 충순위(忠順衛)나 충찬위(忠贊衛)에 예속되고, 음덕이 없는 사람은 정병(正兵)이나 갑사(甲士)가 되었으므로 민지(民志)가 안정되고 민역(民役)이 고르게 되었었습니다. 근래에는 세도(世道)가 점점 변하고 법망(法網)이 점점 해이하여져서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은 이미 다시는 그 이름을 제위(諸衛)에 예속시키지 않았고, 향품(鄕品)의 냉족(冷族)들 또한 양반(兩班)이라고 일컬으면서 신역을 면하기를 도모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군역(軍役)이 모두 피폐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피폐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으로 날로 불어나고 달로 가중되는 군역을 충당시켰으니, 이 백성들이 어찌 날로 더욱 곤고하여져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들 가운데 양역(良役)에 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내(畿內)·삼남(三南)·해서(海西)·관동(關東)에 있는데, 이 여섯 도(道)의 민호(民戶)가 모두 1백 34만인데 그 가운데서 잔호(殘戶)·독호(獨戶) 72만을 제하고 나면 실호(實戶)는 겨우 62만입니다. 그런데 사부(士夫)·향품(鄕品)·부사(府史)·서도(胥徒)·역자(驛子)·치곤(緇髡) 등 양역에 의의(擬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또 5분의 4나 되기 때문에 양역에 응하는 사람은 단지 10여 만 뿐입니다. 10여 만의 민호로 50만의 양역을 충당해야 하니, 한 집에 비록 4,5인이 있다고 해도 모두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신포(身布)에 드는 비용이 4,5냥의 돈인데, 한 집에 있는 4,5인이 모두 들어 있을 경우 거기에 해당되는 비용은 20여 냥이 됩니다.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20여 냥의 돈을 판출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판출하여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망한 자와 죽은 자들을 또 그 대신으로 충당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에 백골 징포(白骨徵布)와 황구 첨정(黃口簽丁)의 폐단이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징족(徵族)·징린(徵隣)하게 되어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하게 되고 원통하여 울부짖는 것이 갈수록 심하여져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양역을 변통시키자는 의논이 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변통시키자는 이야기가 네 가지가 있는데 호포(戶布)·결포(結布)·구전(口錢)·유포(遊布)입니다만, 각기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고 있어 귀일시킬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 숙묘(肅廟)께서 한 번 이혁(釐革)시킬 마음을 먹고 누차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일찍이 하교하기를, ‘적자(赤子)가 물불 속에 들어있는데 부모가 된 사람이 어떻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핑계대면서 태연한 마음으로 편히 앉아서 구제해낼 방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마음을 다해 강구(講究)하라. 만일 10에 7,8이 좋다면 비록 2,3분은 구애되는 것이 있더라도 내가 마땅히 따르겠다. 일이 어찌 10분 완전하고 좋은 것이 있겠는가?’ 했습니다. 임금의 말씀이 위대하여 분명하고도 간절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신민(臣民)들은 누구든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정사년035)  에 호포를 시행하려 했었고, 고 상신 이건명(李健命)은 신축년036)  에 결포를 시행하려 했었습니다만,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결국은 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대조(大朝)께서는 선조(先朝)의 덕의(德意)를 본받아 만백성이 곤궁에 시달리는 것을 진념하였으므로 항상 변통시키려는 뜻을 지니시고 누차 딱하게 여기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경오년037)   3월에 신 홍계희가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책자(冊子)를 올려 결포(結布)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5월에는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호전(戶錢)을 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만, 조정의 신하들이 혹은 호전을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결포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변혁시켜야 된다고 하기도 하고 더러는 변혁시켜서는 안된다고 하기도 하여 여러 의논이 분분했던 탓으로 끝내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달 19일 대조(大朝)께서 홍화문(弘化門)에 친림(親臨)하여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과 오부(五部)의 방민(坊民)들에게 굽어 순문(詢問)하시기를, ‘오늘의 이 신민은 나의 신민이 아니라 곧 열조(列祖)와 성고(聖考)께서 사랑하고 돌보신 신민이다. 대저 부형(父兄)이 항상 아끼던 집물(什物)을 자제(子弟)에게 맡겨 주면 자제된 사람은 이를 아끼고 보호하여 혹시라도 손상시킬까 걱정해야 하는 것인데, 더구나 나의 억조 사서(億兆士庶)들을 어찌 한때 아끼고 보호하는 집물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바야흐로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데 잘 구제하여 살리지 못한다면, 뒷날 무슨 낯으로 돌아가 열조와 성고를 배알(拜謁)할 수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열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그런 까닭에 더운 계절 정섭(靜攝)하는 때를 당하여 병(病)을 억지로 견디면서 임문(臨門)하여 사서(士庶)들을 불러 하문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폐단을 구제하는 데 대해 이야기하여 온 것은 호포와 결포와 유포와 구전이었었지만, 구전과 유포는 나의 생각에는 결단코 시행할 수 없다고 여긴다. 이제 하문하노니 호포·결포와 이밖에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 각기 면대하여 진달함으로써 모쪼록 추후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니, 사서와 군병들이 각기 진달한 내용이 있었는데, 호포가 편하다고 말한 사람이 많았고 결포가 편하다고 말한 사람은 열에 두세 명뿐이었습니다. 대조(大朝)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비국(備局)에 직숙(直宿)하면서 호전에 관한 법안을 마련하라고 명하였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호(戶)마다 4, 5전(錢)씩을 거두면 양역(良役)에 의거 바치는 숫자를 충당시킬 수 있습니다.’고 했다가, 상세히 계산하기에 이르러서는 ‘대호(大戶)에게는 2, 3냥을 거두고 소호(小戶)에는 6, 7전을 거두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하였습니다.
7월 초3일 임문(臨門)하여 다시 백관(百官)·유생(儒生)과 서민(庶民)에 순문하고 나서 특별히 윤음을 내리기를, ‘호포·결포 가운데 호전법(戶錢法)을 시행하려 하는데, 적법(籍法)이 다 없어져 버려 계산하여 보아도 충당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감포(減布)시킨 끝에 징포(徵布)하는 것을 내가 매우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 호(戶)를 수괄(搜括)하는 정사에는 백성들이 모두 동요하는 마음이 있게 될 것이다. 임어(臨御)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쳐가게 하지 못하였는데, 흰머리 늙은 나이에 도리어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정사를 행한다면 이는 나라 백성의 반 때문에 도리어 온 나라의 사민(士民)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그 명을 정지시킨다.’ 했습니다. 그달 초9일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비국의 여러 재상들과 육조(六曹)·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접하고 특별히 양역에 대해 1필씩을 영구히 감면시키라고 명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호포·결포는 비록 시행할 수 없지만 감포(減布)하는 조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경 등은 급대(給代)할 방책을 구획(區劃)하여 가지고 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만날 생각을 말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치미(儲置米) 1만 3천 석(石)을 획급(劃給)하고 여타의 재곡(財穀)도 또한 이를 모방하여 마련하였으며, 제도(諸道)의 감사가 자기의 가솔(家率)을 데리고 가는 것을 파기시키고 그 영수(營需)를 감하였으며, 수어사(守禦使)에게 남한 유수(南漢留守)를 겸하게 하여 광주(廣州)로 나가 있게 하였으며, 총융사(摠戎使)에게 경기 병사를 겸하게 하여 탕춘대(蕩春臺)에 영(營)을 설치한 다음 그 군미(軍米)를 감하여 아울러 급대하는 수요에로 귀결시켰습니다. 또 윤음을 내리기를, ‘호포·결포는 모두 구애되는 단서가 있어 이제는 모두 1필씩을 감면시키는 정사로 귀결시켰는데, 이는 대동(大同)과 다름이 없다. 흰머리 늙은 나이에 한더위를 무릅쓰고 전(殿)에 임어하였으니, 아! 구관(句管)하는 신하와 교목 세신(喬木世臣)은 내가 주야로 백성을 위하는 뜻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차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도신(道臣)·수재(守宰)가 다시 전처럼 인색한 마음을 가지고 필수(疋數)를 감한 정사를 젖혀두고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임금만 저버릴 뿐이겠는가? 뒷날 무슨 낯으로 자신의 할아비와 아비를 만나볼 수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언급되니, 내 마음이 척연(慽然)하다. 식견이 있는 조신(朝臣)과 글을 읽은 사부(士夫)들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양역(良役)에 관한 절목(節目)을 정하되 구관 당상(句管堂上)과 삼공(三公)이 총찰(摠察)하라. 아! 오늘의 이 거조는 푸른 하늘이 이 마음을 조감(照鑑)하고 오르내리는 영령(英靈)이 굽어 임하였으니, 이 마음을 반드시 알아줄 것이다. 나이 먹은 나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숙식(宿食)하기 편하게 해주기 바란다.’ 하고, 이어 제도(諸道)에 이 하유를 선포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감면한 숫자를 계산하여 급대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청(廳)을 설치하고 균역(均役)으로 이름할 것과 삼공(三公)에게 구관(句管)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만(申晩)·김상로(金尙魯)·김상성(金尙星)·조영국(趙榮國)·신 홍계희를 당상에 차임하여 한자리에 모여 강확(講確)하게 하였습니다만,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지금 호포·결포를 범하지 않으려 하지만 없는 데서 판출(辦出)한다 해도 감면한 숫자의 반도 다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했습니다. 경외(京外) 아문(衙門) 가운데 응당 급대해야 될 것은 그 숫자를 헤아려 혹은 그 액수(額數)를 감하여 여보(餘保)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병조의 기병·보병에 대해 전에는 8번(番)으로 만들어 16개월마다 한 번에 2필씩 바치게 하던 것을 고쳐서 6번으로 만들어 12개월마다 한 번에 1필씩 바치게 하였으며, 제도(諸道)의 수군(水軍)에 대해 전수(全數)를 급대할 수 없을 경우에는 1인마다 4두(斗)의 쌀을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목·전(米木錢)을 내는 곳의 경우는 다섯 조항이 있는데, 이획(移劃)이라고 하는 것은 곧 저치미(儲置米)·세작목(稅作木)·상진모(常賑耗)·군향모(軍餉耗) 등을 획급하는 것입니다.
어염선세(魚鹽船稅)라고 하는 것은, 우리 나라는 삼면(三面)이 바다로 싸여 있는데 어염의 이익이 모두 사문(私門)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숙묘조(肅廟朝)에서 별도로 하나의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오로지 수습(收拾)하는 것을 관장하게 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박문수(朴文秀)·김상적(金尙迪)·이후(李) 등을 영남(嶺南)·관동(關東)·해서(海西)·기내(畿內)·호서(湖西)·호남(湖南) 등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어 살펴보고 나서 세금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상적이 해서에서 병으로 졸(卒)하였으므로 황정(黃晸)이 명을 받들어 해서의 여러 고을을 살폈으며, 기내·관서·관북은 도신(道臣)을 시켜서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여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한 어전(漁箭)과 소속된 선척(船隻)을 혁파하여 일체로 세금을 징수하게 하였으며, ‘진실로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면 내가 몸과 터럭인들 어찌 아끼겠는가?’라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천고에 있지 않던 성대한 일인 것입니다.
은여결(隱餘結)이라고 하는 것은 각 고을의 기경 전답(起耕田畓) 가운데 거짓 진탈(陳頉)이라고 일컬으면서 공부(公賦)의 납입에서 누락된 것으로 수령의 사용(私用)으로 들어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실대로 자수(自首)하게 한 것입니다.
군관포(軍官布)라고 하는 것은, 양민(良民) 가운데 가계(家計)가 조금 넉넉한 사람이 공교하게 군역을 피하고 한유(閑遊)가 된 지 이미 오래어서 이제 와서 정역(定役)하게 되면 반드시 소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을 선무 군관(選武軍官)으로 만들어 각각 그 도(道)로 하여금 도시(都試)038)  를 설행하게 하여 수석에 있는 자는 급제를 주고 그 다음 1인은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고 그 다음 5인은 당년의 포(布)를 면제시키고 그 나머지에게는 포 1필씩을 징수하여 급대의 수용(需用)에 보충하게 한 것입니다.
분정(分定)이라고 하는 것은 제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 각각 돈 몇 냥(兩), 포목 몇 동(同)씩을 돌려가면서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또 각 고을로 하여금 모양(某樣)에 의거 거두어 들이게 하여 수군의 양미(糧米)에 충급(充給)하게 한 것도 그것입니다. 이를 시행한 지 반년 만에 원망과 비방이 사방에서 일어나 상서하여 불편함을 말한 것이 날마다 공거(公車)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대저 군관(軍官)은 여러 해 동안 한유(閑遊)하던 나머지 갑자기 징포(徵布)당하기 때문에 원망하게 된 것이며, 수령은 은결(隱結)을 자수(自首)한 뒤 사용(私用)이 궁핍하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이며, 해민(海民)은 정해진 세금이 조금 가벼워져 혜택이 진실로 큽니다만 중간에서 이익을 얻던 자들은 모두 거개 그 이익을 잃었기 때문에 원망하게 된 것이니, 원망과 비방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세(理勢)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전곡(錢穀)을 분정한 것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구간(苟簡)스럽고 외방이 조잔(凋殘)되어 지탱하기 어려운 실정이니,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이 또한 지나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신미년039)   5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기를, ‘각처에 분정한 것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어염과 군관에 관한 것은 이정(釐正)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또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고친 법에서 도리어 한없는 폐단이 속출되고 있으니 도로 구법(舊法)을 보존시키는 것이 나은 것이 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대조(大朝)께서는 ‘나라가 비록 망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백만의 군민(軍民)에게 신의를 잃을 수 없다.’고 하교하였습니다.
좌의정 조현명이 《균역혹문(均役或問)》이란 책자를 올리고 나서 두 군문(軍門)을 변통시키고 진보(鎭堡)를 감하고 영장(營將)을 파하고 주현(州縣)을 합병시키고 회록법(會錄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여러 의논이 대부분 분분하게 변경시킨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겼습니다. 신 홍계희도 상소하여 변통시키는 데 대한 사의(事宜)를 진달하고 나서 육도(六道)의 전결(田結)에 대해 1결(結)마다 돈 5전(錢)씩을 거두고 은여결(隱餘結)과 어염세(魚鹽稅)·선무 군관(選武軍官)에 이르러서도 대략 정돈(整頓)을 하는 것은 물론 분정한 여러 조항은 일체 모두 파기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6월 초3일 대조께서 명정전(明政殿)에 임어하여 문신(文臣)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였는데, 양역(良役)을 변통시키는 것으로 직접 책제(策題)를 내어 물었습니다. 다음날 또 명정전에 나아가 음·무(蔭武)를 불러서 하문하고 나서 특별히 월령 진상(月令進上)을 감면시키고 그 가미(價米)로 급대의 수용에 보태게 했습니다. 17일에는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결전(結錢)의 편부(便否)에 대해 유생(儒生)·서민(庶民)과 향군(鄕軍)·향리(鄕吏)에게 굽어 하문하니,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대조께서 하교하기를, ‘두 번 임문(臨門)하고 한 번 임전(臨殿)하여 포(布)를 감면시키는 정사를 비록 시행하기는 했으나 균역(均役)에 있어서는 아직도 합당하게 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과거에 백성을 위하여 필수를 감면시킨 뜻을 본받는 것이겠는가? 이제 또 두 번 임전하고 한 번 임문하여 개연(慨然)스럽게 여기는 뜻에 대해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이미 하교를 받들었는데도 근래에는 더욱 해이하여 오직 임금으로 하여금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임금 한 사람에게만 미루어 버린 채 소매에 손을 넣고 곁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나의 정성이 부족한 것에 연유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러 신하들에게 또한 경칙(警飭)시키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병판(兵判) 이외의 균당(均堂)은 아울러 월봉(越俸) 1등040)  을 시키라. 그리고 오늘부터 낭청(郞廳)과 함께 비국에 숙직(宿直)하면서 그에 대한 일을 강구하여 등대(登對)할 때 아뢰라.’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균역청 당상 신만(申晩)·김상성(金尙星)·신 홍계희(洪啓禧)·홍봉한(洪鳳漢)·조영국(趙榮國)과 낭청 한광조(韓光肇)·김치인(金致仁)으로 더불어 상의하여 절목을 기초하여 만들어서 연석(筵席)에서 품재(稟裁)한 다음 조항에 따라 산정(刪正)을 가하였습니다. 또 관문(關文)을 보내어 팔도(八道)의 도신(道臣)들에게 순문하니, 도신들의 장문(狀聞) 내용이 모두 이의(異議)가 없었습니다.
9월에 결미(結米)에 관한 절목이 비로소 완성되어 계하(啓下)하여 반포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포(良布)를 반을 감면시킨 것은 오로지 성상께서 만백성을 위해 진념하는 지극한 정성과 딱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감면한 것을 계산하여 보면 모두 50여 만 필에 이르는데, 돈으로 계산하면 1백여 만 냥이다. 안으로 각 아문(衙門)과 밖으로 각 영진(營鎭)의 수용 가운데 강확(講確)하여 비용을 줄인 것이 50여 만 냥인데, 군수(軍需)의 경비(經費)로서 급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직도 40여 만 냥이나 되기 때문에 작년에 절목을 계하할 적에 요량(料量)한 것은 어염선세와 선무 군관에게 받는 것, 은여결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모두 합하면 십수 만 냥인데, 이것으로 충당시켰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었으므로 또 각 영읍(營邑)에 분정하여 충당시켰었다. 그러나 뒤이어 이의를 제기하는 여러 의논으로 인하여 정파(停罷)하였다. 분정한 전목(錢木)은 모을 데가 없어 국계(國計)를 조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성상께서 주야로 걱정하시던 끝에 또다시 임문(臨門)하여 굽어 순문하시었다. 결포(結布)에 관한 논의는 그 유래가 오래였는데, 대략 거두어 들인 의논은 중외(中外)가 귀일되었으므로 부득이 서북(西北)의 양도(兩道) 이외에 육도(六道)의 전결(田結)에 대해 1결마다 쌀 두 되씩이나 혹은 돈 5전씩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제 상년(常年)의 전결(田結)로 계산한다면 미전(米錢)을 논할 것 없이 절계(折計)하면 30여 만 냥이 되는데, 이는 부족한 급대의 숫자와 대략 서로 같다. 또 회록(會錄)에 대한 한 조항이 있는데 제도(諸道)의 전곡(錢穀)에 대한 회록을 양정(量定)하고, 군작미(軍作米) 10만 석을 또한 이속(移屬)시켜 반을 나누어 조적(糶糴)041)  함으로써 수한(水旱)과 풍상(風霜)의 진자(賑資)로 대비하여 둔다. 양호(兩湖)의 어염(魚鹽)은 호남의 도신 이성중(李成中), 호서의 도신 이익보(李益輔)로 하여금 이정(釐正)하여 개안(改案)하게 하고 균역청을 전의 수어청 자리에 설치한 다음 당상(堂上) 2원(員)을 차임한다. 또 1원은 호판(戶判)이 으레 겸하게 하고 또 2원은 우선 그대로 임무를 수행하게 하며 문랑청(文郞廳)은 감하(減下)한다. 무랑청(武郞廳)은 3원으로 하는데 그 가운데 1원은 비국의 낭청이 겸하여 맡게 한다. 서리(書吏)·사령(使令)은 요포(料布)를 주는 아문(衙門)의 원역(員役)을 이차(移差)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12월에 신 홍계희가 대조(大朝)께 아뢰기를, ‘이 일은 백성과 국가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니, 이제 소조(小朝)께서 대리(代理)하는 때를 당하여 이 일의 사의에 대해 한 번 그 전말을 진달해야 합니다.’ 하니, 대조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1통(通)을 기록하여 이명(离明)042)  께 진달하는 것입니다. 매우 초솔(草率)하기는 합니다만 또한 대략 대체(大體)를 알 수 있기에는 충분하며, 우리 대조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가엾게 여겨 불을 끄고 물에서 건져내듯이 하는 성대한 덕업(德業)을 한두 가지는 볼 수가 있으실 것이니, 저하(邸下)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였다.

 

1월 14일 병자

임금이 균역청 당상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박문수에게 균역청의 폐단 때문에 야기되는 불편한 단서에 대해 하문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조정의 시비(是非)와 시의(時議)의 득실에 대해 신처럼 이미 물러가 있는 사람은 참여하여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균역(均役)은 국가의 안위와 생민의 휴척(休戚)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 만들면 하늘에 기원하여 국명(國命)을 영원하게 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고 잘못 만들면 멸망의 화가 금방 닥치게 될 것이니, 신이 어찌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필수(疋數)를 감면시킨 뒤에 백성들이 모두들 고무되었습니다만 이에 선무 군관(選武軍官)의 폐단이 있으니, 성상께서 백성을 위한다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이 여러 재상들과 이에 관해 이야기하여 보니 파기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이 여러 신하들을 책하기를, ‘물러나와서는 뒷말을 하고 들어가서는 임금에게 고하지 않는 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했습니다. 군관에 대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양반(兩班)도 아니고 상한(常漢)으로 첨정(簽定)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첨정한 것이 매우 범위가 넓은데, 돈이 있는 사람은 돈 5, 6민(緡)을 바치고서 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하고, 1년 동안 이렇게 하고 백년 동안 이렇게 한다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병판(兵判)이 이미 입시(入侍)해 있으니, 하순(下詢)하여 보시고 속히 파기시키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필수(疋數)를 감면한 정사를 다시 복구시켜야 한다고 여기는가? 군관을 제하고도 또한 감면한 필수의 대수(代數)를 충당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요량(料量)하고 있는 바로는 어염선세(魚鹽船稅)가 12만여 민(緡)입니다. 이밖에도 저치미(儲置米)·세작목(稅作木)·상진모(常賑耗)·군향모(軍餉耗)·은여결(隱餘結) 등 각항의 명색(名色)을 아울러 계산하여 보면 돈이 57만 3천여 민의 숫자가 되니, 비록 군관포(軍官布)로 급대(給代)하지 않아도 남는 것이 의당 3,4만 민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1필(疋)씩에 대한 급대를 충당하지 못하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경이 능히 1필씩에 대한 급대를 충당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비록 군관포를 제하더라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신이 각항의 명색에 대해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영남(嶺南)의 방영미(防營米)와 결미(結米)로도 또한 충보(充補)하기에 충분합니다. 결수(結數)에 이르러서는 신해년043)  의 비총(比摠)044)  에 의거 정식(定式)한 연후에야 폐단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에게 하문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영성(靈城)의 말이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선무 군관(選武軍官)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신도 처음부터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사리에 합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원망과 비방이 떼 지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입니다만, 여러 신하들이 건백(建白)하여 시행하게 되었고, 시행하고 나서는 신 또한 쟁집(爭執)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양역(良役)의 폐단은 실로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닌 아무 것도 않고 놀고 먹는 자들이 공교스러운 계교로 군역(軍役)을 면함에 따라 이것이 모두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귀결되어진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만일 신역(身役)을 균일하게 하려면 이에 대한 정사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만, 각 고을에서 잘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그런 고질적인 폐단이 있는 것이 어찌 군관(軍官)만 그러하겠습니까? 양역을 대탈(代頉)할 즈음에 수령이 잘 살피지 않을 경우 한 명이 탈이 나면 그 해가 열 집에 미치게 됩니다. 이런 때문에 수령을 잘 가려서 임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방도입니다. 저 중신(重臣)이 진달한 각종 명색(名色)은 모두 실수(實數)에 지나친 것입니다. 선무 군관의 숫자에 이르러서는 계산하기가 매우 쉬워서 도합 2만 4천 5백입니다. 그런데 중신은 그것을 5만으로 알고 있으니, 신은 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매년 시사(試射)하여 직부(直赴)시키고 면포(免布)시키는 것이 차등이 있는데, 선무 군관들이 어찌 감사하는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수만 명 가운데 겨우 4인만이 급제(及第)할 수 있는데, 감사하는 마음을 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먼 곳으로 부시(赴試)하는 것 또한 폐단이 됩니다. 신은 외방에 뇌물을 받는 문이 점점 열려 민폐(民弊)가 점차 많아지게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실군(實軍) 수만 명을 얻게 되었으므로, 의논하는 자들 가운데는 혹 아름답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가솔 군관(假率軍官)도 오히려 탈을 도모할 걱정이 있습니다. 신이 10여 년 동안 호서(湖西)에 있었으므로 민정(民情)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10년을 넘지 않아 반드시 후회하고 난처하게 될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렇게 충보(充補)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 이런 일을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돈을 바치고 면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 돈을 바친 것이니, 반드시 남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한번 들어갔다가 면하고 나면 다시 또 들어가게 되고 다시 들어가서 면하고 나면 세 번째 또 들어가게 되니, 반드시 파산(破産)한 뒤에야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이런데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염(魚鹽)의 세금을 설치한 데 대한 폐단을 말하는 것도 이와 같았다. 정홍순(鄭弘淳)의 말에 의하면, 어염세에 대해 해민(海民)들은 원망이 없지만 토호(土豪)들이 거짓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을 만들고 있으며 선무 군관은 또한 원망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어염세는 끝내 믿을 수가 없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어세(漁稅)는 바다가 있으면 이에 고기잡이가 있는 것이니, 비록 동쪽에서는 잃었다고 하더라도 서쪽에서는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비록 봄에는 실패보았다고 하더라도 여름에는 반드시 이익을 얻게 되어, 반드시 전혀 이익을 얻지 못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염은 각기 징수하는 곳이 있으니, 결단코 인족(隣族)의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폐를 제거하기 위해 또 중인(中人)과 군관(軍官)을 침탈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1필씩에 대한 급대(給代)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병판(兵判)이 신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만, 수년 뒤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급대(給代)는 갈수록 더욱 가중되고 수입은 갈수록 더욱 감소되고 있으니, 감소만 있고 증가는 없는 수입으로 증가는 있고 감소는 없는 급대에 응하게 된 것이 실정입니다. 신이 비록 구차스럽게 미봉(彌縫)하기는 했습니다만, 뒤에는 반드시 낭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은 이미 설행된 폐단에 대해 말하였으니, 의당 폐단을 구제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폐단을 구제하려면 선무 군관을 파기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앞으로 경비(經費)가 부족할 경우 비록 호조(戶曹)나 혜청(惠廳)의 것을 베어내어 보충하더라도 선무 군관은 결단코 파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홍계희는 말하기를,
"선무 군관의 경우는 진실로 원망이 있습니다만, 이제 중신(重臣)이 연석(筵席)에서 창도하였으니, 외간에서 〈알게 되면〉 반드시 큰 소요가 일 것입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오늘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이 폐단에 대해 말하였으니, 이는 곧 대동(大同)의 의논인 것으로 신 한 사람만이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들 불편하게 여겼다면, 어찌하여 한마디도 와서 고하는 사람이 없었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전번에 병판을 공척(攻斥)할 적에는 혹 당론(黨論)이나 사오(私惡)에 의거해 분분히 소장을 진달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전하께서 굳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의 경우는 당론 때문도 아니고 사오 때문도 아닌 것으로 한결같이 나라를 위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2필을 회복시키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팽형(烹刑)045)  에 처하겠다. 만일 선무 군관이 한번 동요되면 어염 등의 일도 반드시 틈을 타서 발론하여 끝내는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만, 그래도 김육(金堉)을 죄주라고 청하는 상소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 신법(新法)은 반드시 모두 좋은 것은 아닌데 어떻게 이의를 제기하는 의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결미(結米)를 더 부과하는 것이 군관의 일에 폐단이 있어서 더 부과하는 것이라고 하면 해가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어찌 정대하지 않겠습니까? 이 의논은 김상성(金尙星)이 주창하고 김약로(金若魯)가 주관한 것입니다만, 파기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균역청을 설치하는 것은 긴요한 일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의당 호조·병조·선혜청 등의 아문(衙門)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은여결(隱餘結)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낭청을 시켜 마련하게 하여 판조(版曹)에 예속시키는 것이 어찌 간편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혜청은 따로 설치하여 청명(廳名)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병판의 뜻은 처음에는 청(廳)을 설치하려 하지 않았었지만 한광조(韓光肇)가 처음부터 주장하였고 영돈녕(領敦寧)도 설치해야 된다고 했었다. 김 판부사(金判府事)와 대신(大臣)들은 대부분 설치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나의 의견은 그렇지 않았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앞으로 반드시 원역(員役)을 내어야 하고 또 그에 따른 구채(丘債)를 내야 하니,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장차 수만 금이 될 것입니다.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1월 16일 무인

예장 도감(禮葬都監)에 명하여 처음과 두 번째 습의(習儀)할 적에 가재실(假梓室)을 쓰는 것은 매우 긴요하지 않은 것이니, 이 뒤로는 제거하고 한결같이 세 번째의 예(例)에 의거하여 소금저(素錦褚)·윤대판(輪對板)을 쓰게 하였다. 뒤에 묘소(墓所)에서의 습의에서도 또한 쓴다는 말을 듣고 아울러 제거하게 한 다음 이를 상례 수교(喪禮受敎)에 기재하게 하였다.

 

혼궁(魂宮)의 촉대(燭臺)와 상(床)을 더 설치한 2건(件)을 감소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홀기(笏記)를 보고 말하기를,
"혼궁의 촉대와 상은 곧 2건으로 되어 있는데, 더 설치한 2건은 잘못이다. 이 뒤로 혼전(魂殿)·혼궁에는 2건은 그대로 두고 2건은 감손시킬 것이며 함(函) 네 개, 목기(木器) 네 개를 일례(一例)로 제거할 것으로 상례 수교에 기재하라."
하였다.

 

습의(習儀)할 때 장막 안을 빙빙 돌 적에 어린아이들을 시켜 울면서 뒤따르게 하는 예를 제거하라고 명하였다. 습의할 때는 으레 사복(司僕)의 하전(下典) 가운데 어린아이를 임시 궁인(宮人) 모습으로 꾸며 곡하면서 뒤따르게 했었는데, 임금이 매우 놀라서 드디어 없애라고 명하고 상례 수교에 기재하게 하였다.

 

병조(兵曹)·태복(太僕)에 입파(入把)046)                  하는 말의 숫자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등록(謄錄)을 열람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제 무술년047)                  에 사복마(司僕馬)·역마(驛馬)를 입파한 숫자가 매우 많은데, 마패(馬牌)로 분부(分付)한 것은 그 숫자에 들어 있지 않고 혼동하여 그대로 의장마(儀仗馬)로 기록하고 있다. 내시(內侍)가 타는 말은 본래 그 숫자가 정해져 있으며, 배위(陪衞)하는 궁인(宮人)이 타는 말도 또한 그 숫자가 정해져 있으니, 일체 그 숫자에 따르게 하라. 병조·태복에서는 임시(臨時)하여 단자(單子)를 올려 계하(啓下)하도록 하라. 내사(內司)에서 제물(祭物)로 쓰기 위해 만든 과자를 싣고 오는 말은 5필(匹)로 정하고 수라간(水剌間)에서 제물을 싣고 오는 말도 5필로 정하라. 대내(大內)에서 쓸 제물과 기타 마패(馬牌)에 따라 거행할 것은 예식(例式)에 넣지 않는다. 빈전궁(殯殿宮)의 차지(次知)와 중사(中使)·도설리(都薛里)가 타는 역마와 기타의 것은 모두 사복으로 하여금 입마(立馬)하게 하라."
하였다.

 

1월 18일 경진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었다. 사시(巳時)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이번 능(陵)에 전알(展謁)한 뒤 군병들의 호궤(犒饋)는 건물(乾物)로 후하게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복제(服制)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1월 19일 신사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도승지 김한철(金漢喆), 승지 조재민(趙載敏)·이응협(李應協)이 아뢰기를,
"정월(正月)은 곧 삼양(三陽)의 첫머리인데, 요사스러운 햇무리와 음산한 기운이 위로 달과 해를 간범하여 청대(靑臺)048)  의 점후(占候)가 잇따라 흉함을 고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를 잊은 하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지만 나 때문에 노하는 하늘에 대해서는 그래도 해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인애(仁愛)하는 하늘의 경고(警告)가 마주 대하여 귀엣말로 명하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닌데, 이에 봉답(奉答)하기 위해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노여워하는 위엄을 되돌리고 아름다운 천명(天命)을 맞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제왕(帝王)이 지치(至治)를 이루고 태평을 보전하는 방도는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정화(政化)의 자폐(疵弊)가 위징(魏徵)이 경계한 십점소(十漸疏)049)   정도 뿐만이 아닙니다. 낭묘(廊廟)에서 접견하는 때가 드물어서 온갖 법도가 번쇄(煩碎)하게 되는 걱정이 있고 기강이 무너져 풍습(風習)이 비하(卑下)되는 탄식이 있으며, 언로(言路)가 막혀 올바른 간언(諫言)이 들리지 않고 공의(公議)가 막혀 사의(私意)가 마구 횡행하고 있습니다. 균역(均役)은 실로 큰 혜택인 것이지만 그 고택(膏澤)이 부옥(蔀屋)에까지 닿지 못하고 있고, 재화(財貨)를 생산하는 문로(門路)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저축(儲畜)이 미려(尾閭)050)  에서 새 나가는 것과 같은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민생(民生)이 날로 초췌해져 방본(邦本)이 장차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아! 하늘이 성인(聖人)을 탄생시키는 것을 매우 인색하게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인을 만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만, 오늘날의 신민(臣民)들은 우리 전하를 만났으니,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는 것도 또한 어찌 옛날 삼대(三代) 때의 성왕(聖王)만 못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전하께서 더욱 풍기(豊芑)와 연익(燕翼)051)  의 모유(謨猷)를 더욱 힘써 태산 반석처럼 영구히 공고한 기반을 다져야 할 때인데, 성지(聖志)가 근래 더욱 퇴비(退卑)되어 매양 기운이 노쇠했다는 하교만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심(聖心)에 격뇌(激惱)가 있으면 그때마다 상도에 벗어난 유지(有旨)를 내리시기 때문에 상하의 사이가 막혀 버리고 대소 신하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없는 일을 끌어대어 얽어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답답한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 등이 잘 다스려 질 때 걱정하고 현명한 임금을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에 있어 어찌 천지 같은 큰 도량에 대해 유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금년은 임신년인데 곧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천명을 받아 기업(基業)을 세운 해입니다. 따라서 황천(皇天)이 오늘 경고(警告)한 것은 우리 전하로 하여금 척연(惕然)히 감동하여 더욱 성덕(聖德)을 새롭게 하고 조선(祖先)의 공렬(功烈)을 발양하게 하여 거듭 태평하고 아름다운 국운을 열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어서 바야흐로 두려운 마음이 간절하다. 면려한 내용이 옳으니,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정원에서 또 학문에 부지런할 것과 정사에 근면할 것으로 진계(陳戒)한 달사(達辭)에 대해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20일 임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정휘량(鄭翬良)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어제 하루 낮과 밤 사이에 음산한 흰 무지개가 아울러 해와 달을 꿰뚫었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태양을 침범한 것이 어제보다 더 극심하다고 했습니다. 아! 우리 성상(聖上)께서 하늘의 명을 삼가고 누차 반성하는 공이 있고서야 이에 다스림을 이루었으며, 저하(邸下)께서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심에 있어도서 대조(大朝)의 마음에 합치되게 하고 있으니, 상제(上帝)와 신명(神明)이 의당 기뻐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삼양(三陽)의 달인 정월(正月)에 은근히 경고(警告)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위에는 성명(聖明)한 임금이 있는데도 아래에는 잘 받들어 봉행하는 신하가 없어서 창언(昌言)052)  은 들리지 않고 사의(私意)가 마구 행하여지고 있는 탓으로 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기강과 정령(政令)의 도구가 날로 남김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과거(科擧)의 경우는 시방(試榜)이 한번 나아가면 사람들의 말이 낭자한 상황이고, 경비(經費)의 경우는 새어나가는 단서가 많아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그윽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명기(名器)가 너무 가벼워졌는가 하면 요행을 바라는 문은 크게 열려 있으며, 당의(黨議)가 갈수록 격렬하여져 서로 힘을 합쳐 화협하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나라를 병들게 하고 정사를 해치게 하는 단서들을 하나하나 다 거론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그리고 신이 가장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비록 한때 권병(權柄)을 잡고 용사(用事)하는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사람마다 모두 현재(賢才)라고 기필할 수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임사(任使)하게 되면 차허(借許)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그것입니다. 경(經)에 이른바 ‘의심스럽거든 임용하지 말고 임용했거든 의심하지 말라.’ 한 것이 진실로 이 성인의 지훈(至訓)인 것으로, 임용하기 전에 살피는 것이 정밀하고도 분명했기 때문에 능히 의심없이 쓸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람도 또한 임금이 알아준 뜻을 저버리지 않고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즐거운 저 동산의 나무 아래에는 낙엽이 쌓여 있고 타산(他山)의 돌이 옥(玉)을 다듬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랑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아야 하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운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시인(詩人)의 말을 가지고 성인이 의심하지 말라고 한 훈계를 참고하여 본 뒤에야 바야흐로 사람을 알고 사람을 쓰는 방법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념(睿念)에 깊이 유의하소서. 지금 이 변괴가 해와 달에 있으니,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것이 어떠한 변이(變異)입니까? 그런데도 군신 상하가 태연한 태도로 한가히 놀며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있으니, 상천(上天)이 이를 내려다보고 거듭 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더욱 예학(睿學)을 증진시키고 능히 명덕(明德)을 힘써서 스스로 수련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의당 유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사간 박치문(朴致文), 장령 박평(朴玶), 정언 최태형(崔台衡)이 재이(災異) 때문에 상서하여 진계(陳戒)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효순 현빈(孝純賢嬪)의 계찬례(啓欑禮)를 행하였다. 여집사(女執事)가 손을 씻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서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 찬물(饌物)을 진설하고나서 향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수칙(守則)이 영좌(靈座)의 왼쪽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고 물러갔다. 궁인(宮人) 이하가 슬프게 곡(哭)하고 나서 집사가 축문을 받들어 향로에다 태웠다. 영좌와 전(奠)을 당내(堂內)의 서남쪽으로 옮겨놓고 고계빈관(告啓殯官)이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들어와 중문(中門) 밖으로 나아가 꿇어앉으니, 상전(尙傳)이 고계빈관 앞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꿇어앉았다. 고계빈관이 부복(俯伏)하고 꿇어앉아 상달(上達)하기를,
"의정부 좌참찬 권적(權𥛚)은 삼가 길신(吉辰)에 찬도(欑塗)를 엽니다."
하였다. 상전이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 여관(女官)에게 전고(傳告)하니, 여관이 찬실(欑室) 남쪽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았다. 상달(上達)이 끝나자 본래의 위차로 돌아왔다. 고계빈관이 나아가니 상전이 여러 내시(內侍)들을 인솔하고 올라가서 찬도를 거두고 나서는 상전이 수건을 받들고 가서 재실(梓室)을 닦아내고 관의(棺衣)를 덮은 다음 내려와 나아갔다. 내시가 찬물을 거두고 장막과 영좌를 설치하였다. 여관이 영침(靈寢)을 진설하는 것을 모두 처음처럼 하였으며, 여집사가 찬물을 받들어 영좌 앞에다 진설하니, 궁인들이 슬프게 곡하였다. 여집사가 향(香)·전(奠)·주(酒)를 올리는 것을 위의 의식(儀式)처럼 하고 물러갔다. 이뒤로부터 발인(發引) 때까지는 대곡(代哭)하였다.

 

빈궁(殯宮)의 조전(祖奠)을 행하였는데, 여집사(女執事)가 찬물을 받들고 들어와 영좌(靈座) 앞에 진설하였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서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 향(香)을 올리고 술을 따른 다음 물러나니, 수칙(守則)이 축문을 읽었다. 읽고나자 궁인(宮人)들이 슬피 곡(哭)하였으며, 여집사가 축문을 받들어 향로에다 태웠다.

 

1월 21일 계미

빈궁(殯宮)의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예장 도감(禮葬都監)에서 상여와 혼백거(魂帛車)·요여(腰轝)·향정(香亭) 등을 중문(中門) 밖에 대기시켜 놓고 영여(靈轝)는 외문(外門) 밖에 대기시켜 놓았으며, 길의장(吉儀仗)은 혼백거 앞에 진설하여 놓고 흉의장(凶儀仗)과 명기(明器)는 영여 앞에 진설하여 놓았다. 여집사가 찬물을 영좌 앞에 진설하였다. 여관(女官)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서 향을 올리고 술을 따르니, 궁인들이 곡을 그쳤다. 수칙(守則)이 축문을 읽고나니 여관이 애책안(哀冊案) 앞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았다. 이어 책함(冊函)을 받들고 중계(中階)를 거쳐 올라가 향안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안상(案上)에 놓았다. 여관이 책함을 열고 애책을 펴서 읽기를,
"유세차(維歲次) 신미(辛未) 11월 갑자삭(甲子朔) 14일 정미(丁未)에 효순 현빈(孝純賢嬪) 조씨(趙氏)가 창덕궁(昌德宮)의 건극당(建極堂)에서 졸(卒)하였다. 다음해 임신(壬申) 정월(正月) 계해삭(癸亥朔) 22일 갑신(甲申)에 장차 파주(坡州)의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墓)에 합부(合祔)하게 되었으니, 예(禮)이다. 소위(素衞)가 길떠날 준비를 하니 현당(玄堂)의 장막을 걷어내었다. 누각(漏刻)이 새벽을 알리면서 처연(凄然)히 오열하고 명정(銘旌)이 바람을 안고 펄럭이고 있다. 오직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아름다운 덕행을 지니고 일찍 운명하였음을 슬퍼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영원히 볼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에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그 아름다운 자취를 선양(宣揚)한다."
하였고, 그 애사(哀詞)에 이르기를,
"꿈에 동관(彤管)을 받으니, 화려한 문벌(門閥)에 숙기(淑氣)가 뭉쳐 태어났다. 이름난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척분(戚分)이 왕실(王室)과 연결되었고, 복숭아 꽃처럼 아름다운 자태 널리 소문이 나니 이극(貳極)053)  의 빈(嬪)이 되었다. 단아하고 깨끗한 지조에 정일(貞一)한 덕을 지녔으므로 아침 일찍 문안할 때 차고 있는 고리가 울리어 온다. 어려서부터 위의(威儀)를 어기지 않았으므로 잘 공경하고 정성스럽게 하였으며, 사전(四殿)에 기쁨이 넘쳐흘렀으므로 육궁(六宮)의 축하가 비등하였다. 오래도록 복을 누리면서 온갖 상서로움을 다 맞게 되기를 축원하였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젊은 나이에 짝을 잃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최복(衰服)을 입고 있는 동안에 계례(筓禮)를 올렸는데, 주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돌아가기를 마음으로 맹세하여 오직 시기가 속히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요컨대, 성의(聖意)를 너그럽게 해드리기 위해 정을 억제하면서 기쁜 안색을 지었으며, 하루 세번 문안드리는 예절을 행함에 있어 병들었으면서도 피로함을 말하지 않았다. 시선(視膳)을 함에 있어서는 배가 부르고 고픔을 잘 조정하여 맞추었고 몸소 어석(御席)을 살펴 온도를 알맞게 조정하였다. 반걸음 사이의 잠깐이라도 우러러 명을 받들어 하였으므로 신정(宸情)이 감탄하여 나의 효부(孝婦)라고 하였다. 이에 마음을 알아주는 것으로 허여하고 의지하여 마음의 상처를 잊을 수 있었으니, 진실로 순일한 의범(儀範)은 백행(百行)의 근원인 것이다. 귀하게 될수록 더욱 겸손하게 하여 사문(私門)에 대한 경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만(盛滿)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누차 얼굴에도 드러나 있었으므로 외경(外逕)을 끊고 중위(重闈)를 엄숙히 하였다. 이미 온화하면서도 장엄한 위의를 지녔으므로 모든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 오랫동안 슬하(膝下)에 두고서 만년(晩年)을 즐겁게 보내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타고난 운명도 그리 기구한데다가 아울러 수명까지도 끝내 인색하게 받았더란 말인가? 아침에는 기쁜 얼굴이었는데 저녁에는 볼 수 없게 되어 갑자기 영혼되어 떠난 적막한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군탄(涒灘)054)  을 추념(追念)하니, 아직도 남은 슬픔이 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휘신(諱辰)이 다시 돌아왔는데도 외로이 그림자 안고 시절따라 흐느끼더니, 드디어 내일이면 서로 따르게 되었구나. 아! 슬프다. 옛집에 봄이 돌아오고 비어 있는 상랑(廂廊)에 달이 비추니, 그 모습 완연하여 마치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남은 정을 말음(末音)에 기탁하니 그래도 옥식(玉食)을 돌아보게 되고, 우뚝 솟은 운궐(雲闕)을 등지고 아득한 천로(天路)를 행하누나. 아! 슬프다. 저 가성(佳城)055)  을 바라보니 같은 산등성이에 함께 하는 것이 길(吉)하다는 점괘가 나왔고, 상석(象石)의 설치는 전의 것을 그대로 두니 소나무 잦나무도 애상(哀傷)에 잠겼구나. 그대의 숙원(宿願)이 여기에 있는 줄을 알고 있는데, 이제 이에 머물 곳을 얻게 되었다. 오직 이별은 짧고 만남은 장구하게 되었으니, 어찌 신리(神理)를 어길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어진데도 복을 받지 못한 경우 예로부터 슬프게 여겨 왔는데, 그러나 영명(令名)은 영원히 실추되지 않을 것이다. 뚜렷한 운한(雲漢)의 상덕(狀德)은 영원히 졸서(卒逝)한 효성스러움에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성필(聖筆)로 징거하여 슬픈 마음 술회하노니, 백세(百世)에까지 찬란히 전하여지기 바란다. 아! 슬프다."
하였다. 읽고 나자 애책을 도로 함(函)에 넣어 영좌 앞에서 조금 동쪽에 있는 안상에 받들어 놓은 다음 본래의 위차로 돌아왔다. 궁인(宮人)들이 슬프게 곡(哭)하였다. 여집사(女執事)가 찬물(饌物)을 치우고 나서 축문을 받들어 향로에다 태웠다.
드디어 발인(發引)하였다. 하루 전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신주를 만들어 상자에 담고 파(帕)로 덮어 요여에 안치하고서 빈궁의 문밖으로 나아가니, 내시(內侍)가 전하여 받들고 들어갔다. 여관(女官)이 이를 혼백(魂帛) 뒤에다 봉안하고 견전(遣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여재실관(舁榟室官)이 상여를 빈궁 문밖에다 남쪽을 향하게 대기시키고 혼백여(魂帛轝)는 상여 남쪽에 진설하였다. 섭상례(攝相禮)가 나아와 영좌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서 영좌에서 내려와 요여에 오를 것을 찬청(贊請)하였다. 내시가 교명(敎命)·시책인(諡冊印)·애책(哀冊)과 평시(平時)의 책인(冊印)을 집사(執事)에게 주니, 집사가 이를 각기 요여에 안치하였다. 집사자(執事者)가 향로(香爐)·향합(香盒)을 받들어 향정(香亭)에 놓아 두었다. 협시 내시(挾侍內侍)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에 봉안하고 신주궤(神主櫃)는 그 뒤에다 가져다 놓았다. 내시가 요여를 받들고 중문을 거쳐 나아가니,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재실(梓室)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서 상여로 나아가라고 찬청하였다. 내시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계단을 내려오니 봉재실관(奉梓室官)이 【참찬(參贊)이다.】  여재실관과 내시를 데리고 윤여(輪輿)로 계단에서 내려와 출발하였는데, 소금저(素錦褚)로 덮었다. 내외(內外)가 모두 곡하였다.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내시가 삽(翣)과 행장(行障)·좌장(坐障)으로 재실을 가려 막고 명정을 들고 앞서 출발하였다. 혼백여가 중문 밖에 이르니 섭상례가 나아와 혼백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서 여(輿)에서 내려 거(車)로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거에 안치하고 신주궤는 그 뒤에 가져다 놓았다. 재실이 중문 밖으로 나오니, 섭상례가 나아가 재실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서 상여로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봉재실관이 여재실관과 내시를 데리고 재실을 받들어 상여에 올려놓았다.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명정문(明政門) 밖에 이르러서 혼백거(魂帛車)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조금 머물라고 찬청하니, 여사(轝士)들이 멘 끈을 잠시 동안 늦추었다. 섭상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였다. 상여가 이르니 섭상례가 나아가 상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머물 것을 찬청하자, 여사들이 멘 끈을 잠시 동안 늦추었다. 섭상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였다.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외문(外門) 밖으로 나왔다. 섭상례가 나아가 상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상여에서 내려 영여(靈轝)에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봉재실관이 여재실관과 내시를 데리고 재실을 받들어 영여에 올려놓았는데,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혼백거와 교명·시책인을 실은 요여와 애책을 실은 요여, 우보(羽葆)·명정(銘旌)과 삽(翣)을 차례대로 진열하여 놓았다. 섭상례가 나아가 혼백거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서 출발할 것을 찬청하였으며, 또 영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였다. 의위(儀衞)와 도종(導從)은 의식대로 하였다. 방울을 잡은 사람이 방울을 흔드니 영여가 움직였으며, 말을 타고 뒤따르는 궁인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행유(行帷)로 가려 막았다.】  내시들은 곡하면서 걸어서 따랐고 승지가 분시강원(分侍講院)·익위사(翊衞司)에서 수행(隨行)하였다. 영여가 판전(板廛)의 병문(屛門) 앞길에 이르자, 종친(宗親)과 배종관(陪從官)은 천담복(淺淡服)으로 길 왼쪽에 순서대로 서 있다가 혼백거와 영여가 이르자 몸을 굽혔으며 지나간 다음 몸을 펴고 차례대로 말을 타고 배종(陪從)하였다. 【종묘(宗廟)의 앞길과 창덕궁(昌德宮) 앞길에서 섭상례가 조금 머물 것을 찬청하여 〈여사들이〉 멘 끈을 늦추었다가 출발하는 것은 모두 위의 의식과 같았다.】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서 섭상례가 나아가 영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머물 것을 찬청하였다. 강(杠)을 고치는 것을 끝내도록 꿇어앉아 있다가 출발할 것을 찬청하였다. 숭례문 밖에 이르러서는 또 꿇어앉아 조금 머물 것을 찬청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영장(靈帳) 안에 있는 영좌에 안치하니, 정부(政府) 이하 응당 참여할 관원들이 들어와 위차로 나아갔다. 여관(女官)이 혼백을 받들어 내어오니, 반수(班首) 이하가 부복(俯伏)하고 곡하였으며 곡이 끝나자 두 번 절하였다. 반수 이하가 꿇어앉자 여집사가 향(香)을 안상 앞으로 내어 왔으며 향을 올리고 술을 따라 영좌 앞에 올렸다. 수칙(守則)이 영좌 왼쪽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축문을 읽었는데, 끝내고 나자 반수 이하가 본래의 위차로 돌아가 부복하고 슬피 곡하였으며 곡이 끝나자 두 번 절하였다. 여관이 혼백을 받들어 함에 안치하니, 동·서반(東西班)이 의식대로 봉사(奉辭)하였다. 섭상례가 꿇어앉아 영좌에서 내려 거(車)로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거에 안치하니, 섭상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였다. 또 영여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니, 영여가 움직였다. 의위와 도종은 의식과 같이하였다.

 

출발하여 주정소(晝停所)의 유문(帷門) 안에 이르자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거(車)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거에서 내려 영좌(靈座)로 오를 것을 찬청(贊請)하니, 내시(內侍)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장궁(帳宮) 안에 있는 영좌에 안치시키고 신주궤(神主櫃)는 그 뒤에 가져다 놓았다. 영여(靈轝) 앞에 꿇어앉아 조금 머물 것을 찬청하니, 궁인(宮人)들이 말에서 내려 위차(位次)로 들어갔고 배종(陪從)하는 관원들은 말에서 내려 위차로 나아갔다. 여집사(女執事)가 예찬(禮饌)을 전해 받아가지고 들어가서 진설하기를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하였다. 이 일이 끝나자 섭상례가 꿇어앉아 영좌에서 내려 거로 오를 것을 찬청하니, 내시가 함(函)을 받들어 거에 안치시켰다. 섭상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고 또 영여 앞에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니, 영여가 움직였다. 의위(儀衞)와 도종(導從), 궁인(宮人)과 군관(群官)의 배종은 처음과 같았다. 묘소(墓所)의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러 영장궁(靈帳宮)의 유문 밖에 도착하자, 섭상례가 나아가 영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영여에서 내려 상여로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참찬(參贊)이 여재실관(舁梓室官) 등을 데리고 영여에서 내려 상여에 올려놓았다.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내시가 삽(翣)과 행장(行障)·좌장(坐障)으로 재실(梓室)을 가려 막았다. 여사(轝士)들이 상여를 받들고 유문 안에 이르자 섭상례가 꿇어앉아 상여에서 내릴 것을 찬청하였다. 참찬이 여재실관 등을 데리고 재실을 받들어 탑(榻) 위에 안치했는데, 머리가 남쪽을 향하게 하였다. 내시가 영좌를 재실의 남쪽에다 남쪽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 혼백거(魂帛車)가 유문 안에 이르니, 섭상례가 꿇어앉아 영좌에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신주궤(神主櫃)는 그 뒤에 가져다 놓았다. 내시가 명정(銘旌)을 진설하고 또 시책인(諡冊印)·애책(哀冊)과 평시(平時)의 교명(敎命)·책인(冊印)을 진설하였다. 또 영침(靈寢)·거여(車轝)·의장(儀仗)·명기(明器)를 장궁(帳宮)의 유문 밖에다 나누어 좌우로 진설하였다. 궁인이 들어가 장위(帳位)에 나아가 처음처럼 곡하였으며 배종한 군관(群官)들은 잠시 물러갔다. 여집사가 찬물(饌物)을 내어오고 나서 향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또 조석전(朝夕奠)과 상식(上食)을 아울러 처음처럼 하였다.

 

1월 22일 갑신

효순 현빈(孝純賢嬪)을 효장(孝章)의 묘소(墓所)에 부장(祔葬)하였다. 도감 제조(都監提調)와 장생전 제조(長生殿提調)가 작공(作工)을 데리고 먼저 퇴광(退壙)으로 나아가 외재실(外梓室)을 개탁(開坼)하고 임시로 우판(隅板)에 내려놓고서 정제(整齊)하고 기다렸다. 방상시(方相氏)056)                  가 먼저 와서 현실(玄室)로 들어가 창으로 네 모퉁이를 친 다음 명기(明器)·복완(服玩)·증백(繒帛) 등의 물건을 현실의 문밖에 진열하여 놓았다. 여집사가 찬물(饌物)을 진설하고 향을 올리고 술을 따라 영좌 앞에 올렸다. 수칙(守則)이 축문을 읽고 나자 여집사가 찬물을 치웠고 내시가 축문을 받들어 구덩이에 묻었다. 참찬(參贊)이 꿇어앉아 찬도(欑塗)를 열 것을 고하니, 내시가 찬도(欑塗)를 치우는 것을 처음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섭상례가 꿇어앉아 영좌에서 내려 요여(腰轝)로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내시가 교명·책인·시책인·향로·향합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니, 각각 요여와 향정(香亭) 안에 안치시켰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요여에 안치하고 신주궤는 그 뒤에 가져다 놓았다. 이를 받들고 길유(吉帷) 안으로 나아가니, 섭상례가 꿇어앉아 영좌에 오르기를 찬청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신주궤는 그 뒤에 가져다 놓았는데, 교명·책인·향로·향합은 앞서의 의식대로 하였다. 길의장(吉儀仗)은 길유궁(吉帷宮) 밖에다 좌우로 진설하였다. 섭상례가 나아가 재실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상여에 올라 현실(玄室)로 나갈 것을 찬청(贊請)하였다. 내시가 애책함(哀冊函)을 받들어 집사자에게 주니, 집사자가 요여에 안치시킨 다음 상여 앞에 서자 내시가 수건을 올렸다. 참찬이 수건을 받들고 나아가 재실(榟室)을 닦고 아울러 관의(棺衣)를 털었다. 내시가 명정을 받들어 충의위(忠義衞) 전도(前導)에게 주니, 참찬이 여재실관과 내시를 데리고서 재실을 받들어 상여에 올린 다음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였다. 내시가 삽(翣)과 행장·좌장으로 재실을 가려 막았다. 여사(轝士)가 상여를 받들어 왼쪽으로 돌려 머리를 북쪽으로 한 다음 현실로 나가려 하니, 궁인들이 모두 곡하였고 배종하는 관원들도 곡하면서 걸어서 뒤따랐다. 연도(羨道)057)                   남쪽에 이르러 사위(辭位)에 봉안하였다. 상여가 현실의 방목(方木) 위에 이르러서는 녹로(轆轤)를 사용하여 재실(梓室)을 봉하(奉下)하니, 내시가 관의(棺衣)를 덮고 강(杠)을 버리고 명정(銘旌)을 취하여 그 위에 놓았다. 참찬이 옥백위(玉帛位)에 나아가니 애책(哀冊)을 받든 관원과 옥백(玉帛)을 받든 관원이 그 뒤를 따랐다. 참찬이 여재실관(舁梓室官)과 내시(內侍)를 데리고 윤여(輪輿)로 재실을 받들고 연도로 들어가 현실의 대관(大棺) 안에다 머리를 북쪽으로 가게 하여 안치하였다. 참찬이 내시를 데리고 다시 관의와 명정을 정돈하여 평정(平正)하게 하였다. 도감 제조(都監提調)가 속관(屬官)을 거느리고 보삽(黼翣)·불삽(黻翣)·화삽(畵翣)을 재실의 양쪽 곁에다 세웠으며, 묘소 제조(墓所提調)가 그 속관을 거느리고 현실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참찬과 장령(掌令)이 함께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는 것을 감독하고 나서 통훈 대부 사헌부 장령        박평(朴玶)은 근봉(謹封)한다고 썼다. 참찬이 흙을 아홉 삽을 떠서 덮었고 이어 회(灰)를 이겨 쌓아서 막았다. 또 애책문을 가지고 들어가서 꿇어앉아 퇴광(退壙)의 서쪽 위차(位次)에 올렸고 증옥(贈玉)·증백(贈帛)은 꿇어앉아 애책의 남쪽에 올렸다. 예장 제조가 그 속관을 거느리고 명기·복완 등 제구(諸具)를 받들어 편리한 대로 진열하여 항렬이 있게 하였다. 묘소 제조가 작공(作工)을 데리고 뒤이어 일을 끝맺고 지석(誌石)을 내렸다. 현실 왼쪽에 땅을 닦아 놓고 관상감(觀象監)이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의식대로 하였다. 영여와 상여 등속은 백성(栢城) 안 경지(庚地)에다 불태웠다. 어제(御製)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효순 현빈(孝純賢嬪) 조씨(趙氏)는 관향이 풍양(豊壤)이다.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개국 공신(開國功臣) 상주국(上柱國) 삼중 대광(三重大匡) 문하 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조맹(趙孟)이고, 11대조(代祖)는 부사(府使)        증(贈) 사복시 정(司僕寺正)        조신(趙愼)인데 우리 태종(太宗)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의 감반(甘盤)의 옛일058)                  로써 수총군(守塚軍)을 주라고 명하였었다. 고조는 증 판서        조민(趙珉)이고 증조는 증 좌찬성        조상정(趙相鼎)인데 판서 조형(趙珩)의 아들로 조민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조(祖)는 도사(都事)를 지낸 증 영의정        풍흥 부원군(豊興府院君) 조인수(趙仁壽)인데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이다. 고(考)는 분무 공신(奮武功臣) 좌의정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조문명(趙文命)이고, 비(妣)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인데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 참판        이상백(李相伯)의 딸이다.
이부인(李夫人)의 꿈에 어떤 사람이 동필(彤筆)을 건네주는 것을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 드디어 동부(東部)의 숭교방(崇敎坊)에서 빈(嬪)을 낳았으니, 진실로 우리 성고(聖考) 을미년059)                   12월 14일이었다. 용모는 단아하고 깨끗하였고 성품은 부드럽고 정일(貞一)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장난하며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내가 즉조(卽祚)한 3년 정미년(1727)에 간선(揀選)하여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빈(嬪)으로 삼았는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문안(問安)하고 시봉(侍奉)하는 예절에 있어 반드시 정성스럽고 공경스럽게 하였으므로 나의 두 분 자성(慈聖)께서도 아름답게 여겨 사랑하였다.
아! 슬프다. 가례(嘉禮)를 행한 다음해 중동(仲冬) 16일에 효장(孝章)이 요절(夭折)하였으니, 예로부터 어찌 청상 과부가 없었겠는가마는, 빈(嬪)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는가? 상여가 나가던 날 자리에 몸져누워 곡읍(哭泣)하면서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내가 온갖 방법으로 개유(開諭)하였더니, 빈이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이미 후사가 없으니 산들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눈물을 부리면서 대답한 말이 있었고 자성께서도 지성으로 권면하니, 빈이 억지로 마지못해 음식을 들기도 하였다. 거상(居喪)하면서 예(禮)를 행함에 있어서는 성인(成人)과 다름이 없어 오시(五時)의 제전(祭奠)을 몸소 스스로 살폈으며 기상이 항상 늠연(凛然)한 상태로 3년을 지냈으니, 처음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 가운데 더더욱 애통한 것은 최복(衰服)을 입고 있는 동안에 계례(筓禮)를 올린 것이었다. 무신년060)                   이후로 구부(舅婦)가 서로 의지하여 회포를 위안해 왔었는데, 이제 빈은 돌아가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지만 나는 장차 어떻게 위안받을 수 있겠는가? 아! 빈은 비록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위를 섬기는 예절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항상 치료하기 어려운 기질(奇疾)을 앓고 있었지만 제전(諸殿)에 문후(問候)하는 예절은 한결같이 전일과 똑같이 하였다. 선의(宣懿)061)                  의 국휼(國恤)이 복(服)을 끝내는 해에 있었는데, 빈이 더더욱 비통해 하였으니, 그의 마음을 추구하여 보면 절실한 슬픔이 그지없었을 것이다.
빈은 성품이 본디 담박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즐겨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는 태연하게 기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지닌 마음의 정확(貞確)함과 일을 처리함이 주밀하고 상세하였으니, 식견이 있는 군자(君子)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의 숙부(叔父)가 정승에 제배되었을 적에는 마음으로 항상 민망하게 여겼으며 해직(解職)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였고 제배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위축되었다. 눈썹으로 표지(標識)를 만들어 사형제(私兄弟)의 아내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문안하는 서찰(書札)을 이를 빙자하여 고험(考驗)하였는데 반드시 가장(家長)에게 보여준 연후에야 들여오게 하였으니, 그 근엄함을 가히 알 수 있다. 풍릉(豊陵)과 부인(夫人)의 상사(喪事)가 수년 사이에 잇따라 났었으니, 빈의 효성스런 마음에 더더욱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지탱하여 왔으니, 그것만도 또한 다행인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가려 한 것은 곧 빈의 지극한 소원인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루어 같은 달에 돌아갔으니, 빈이야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내가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는 것은 세상에 누군들 구부(舅婦) 사이가 없겠는가마는, 나와 빈의 사이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부가 서로 마음을 알아주면서 지낸 지가 이제 25년이나 되었는데 또 마음을 알아주는 효부(孝婦)를 영결(永訣)하였으니, 이 뒤로는 추모(追慕)하는 회포와 슬퍼하는 마음을 다시 누구에게 말하면서 회포를 풀 수 있겠는가?
평소의 성효(誠孝)에 관해서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하기 어렵고 그 대략만을 기록하면, 평상시 자신이 먹는 데 쓰는 것은 두어 그릇의 음식에 불과한데다 그 또한 먹지 않는 때가 태반이었고 그런 가운데도 내가 즐기는 음식은 차마 먹지를 못하였다. 근래 내가 식사를 적게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만일 그의 궁(宮)으로 임어할 때가 있으면 여러 가지 찬물(饌物)을 반드시 극진히 맛있게 장만하여 주었다. 이런 지극한 성효(誠孝)가 시어(侍御)들을 감동시켰으므로 앉자마자 찬물이 뒤따라 도착하니, 시기에 앞서 음식을 준하여 놓은 것이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것같이 하였다. 방안의 좌탑(坐榻)도 그 요가 혹시라도 찰까 염려하여 탑(榻) 아래에다 깔아놓아 따스하게 만들었으니, 비록 몸으로 이불을 따뜻하게 만들었다는 효성인들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하루에 밥을 먹는 것이 한 번에 불과하고 숟가락을 드는 것도 몇 번 드는 것에 불과한데,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내가 남기는 찬선(饌膳)뿐이었다. 내가 많이 먹으면 기뻐하여 많이 먹다가도 내가 수저만 대고 말면 걱정하면서 먹지 않았다. 나를 먹이려고 직접 스스로 밤을 삶았는데 영원히 졸서(卒逝)하던 날에도 삶아 놓은 것이 오히려 소반에 남아 있었으니, 이는 진상(進上)하려 하다가 병이 위독하여 하지 못한 것이다. 아! 또한 슬프기 그지없다. 빈이 금년에 나를 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너무 지나쳐 내가 가서 만나고 돌아올 적이면 반드시 문까지 따라 나왔는데, 혹 내가 알까 저어하여 신발도 신지 않고서 따라 나온 경우가 많았었으니, 어찌 그의 마음이 동요되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아! 슬프다. 동가(動駕)하여 하룻밤을 묵는 날이면 옷을 벗지 않고 앉아 있었으며 연로(沿路)에서 적어서 전한 말은 사람들이 밟을까 염려하여 모아서 봉지에 싸서 넣고는 연월(年月)을 기록하여 두었으니, 이 또한 경근(敬謹)히 하는 것의 한 단서인 것이다. 작년 온천(溫泉)에 거둥할 적에도 찬선(饌膳)을 도중에 계속 보내어 왔었는데, 우연히 상자에서 소지(小紙)를 취득하여 보니, 날짜를 안배해서 기록하고 또 보낸 사람의 이름을 써 두었으므로, 내가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몸소 재실(梓室)에 넣어주었다. 아! 효장(孝章)의 기일(忌日)이 곧 빈의 사고(私姑)의 기일이다. 그래서 매양 그달이 되면 기일(期日)에 앞서 소식(素食)을 했으므로 토황증(吐黃證)이 여러 해 누적되어 빌미가 되었는데, 같은 날 무덤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리하여 병이 위독한 날 밤에도 초혼(初昏) 이전에는 나에게 수라(水剌)를 권하였는데 보루(報漏) 이후에는 단지 지금 졸서하려 한다는 소리 한마디만 들렸을 뿐 권진(勸進)하는 소리는 다시 듣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무신년에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효장의 행록(行錄)을 지었었는데, 이제 이 효부의 행록을 또다시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가면서 기록하는구나.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다만 스스로 억장만 무너질 뿐이다. 신미년062)                   11월 14일 효장의 기일(忌日)을 하루 사이에 두고 창덕궁(昌德宮)의 의춘헌(宜春軒)에서 훙서(薨逝)하니, 곧 건극당(建極堂)의 동실(東室)이요 내가 예전에 거처하던 곳이다. 빈은 향년(享年)이 37세이고, 현빈(賢嬪)이라 호칭하도록 명한 것은 을묘년063)                  에 있었으며, 임신년064)                   정월 11일에 시호(諡號)를 효순(孝純)으로 내렸다. 불쌍한 나의 효부여! 걸맞는 시호를 얻었도다. 같은 달 22일 효장의 묘(墓) 왼쪽 을좌(乙坐)에 부장(祔葬)했는데, 외봉(外封)도 또한 유방(酉方)을 향하게 하였다. 무신년의 전례에 따라 행록(行錄)에 의거 지문(誌文)을 지었으니, 또한 집모(集摹)하게 하라. 내가 쓴 효장의 지문의 글자 가운데 빠뜨려 놓았던 것도 보충하여 새기게 하라. 내가 이제 노쇠한 나이에 전후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다고 하겠으나, 옛 슬픔과 지금의 슬픔으로 아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눈물 흘리고 오열하면서 쓰노라니, 밤은 어찌 그다지도 깊단 말인가? 이를 돌에 새겨 영구히 보관하여 먼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노라. 황명(皇明)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백 24년 내가 즉조(卽阼)한 지 27년 되는 중동(仲冬)에 기록한다."
하였다.

 

제주관(題主官) 심성진(沈星鎭)이 들어와 길유궁(吉帷宮)의 위차로 나아갔다. 도제조(都提調)와 도감 당상(都監堂上), 예조 당상(禮曹堂上) 각각 1인씩과 승지 조돈(趙暾)이 흑단령(黑團領)으로 들어와 위차로 나아갔다. 내시(內侍)가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신주궤(神主櫃)를 들어다가 탁상(卓上)에 올려놓고 나서 궤를 열고 신주를 꺼내어 향탕(香湯)에다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은 다음 탁상 위에 뉘어놓았다. 제주관이 탁상 앞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먼저 함중(陷中)065)  에다 ‘조선국 효장 세자빈 조씨 신주(朝鮮國孝章世子嬪趙氏神主)’라고 쓰고, 그 다음 전면(前面)에다 ‘효순 현빈 신주(孝純賢嬪神主)’라고 썼다. 묵서(墨書)를 끝마치자 내시가 신주를 받들어 궤에 넣고 덮개를 덮어서 영좌 위에 안치하였으며,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두었다. 도제조 이하가 물러 나아가니, 헌관(獻官)이 들어와 위차로 나아갔다. 내시가 예찬(禮饌)을 받들어 영좌에 진설하고 나서 궤를 열고 신주를 받들어 내어 제자리에 안치하고 저건(苧巾)으로 덮었다. 궤(几)는 그 뒤에 설치하였다. 헌관이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세 번 향을 올리고 술을 따라서 집사(執事)에게 주어 영좌 앞에 올리게 하였는데, 잇따라 석 잔을 올렸다.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고 나서 본래의 위차로 돌아가니, 헌관 이하가 부복하고 슬프게 곡을 한 다음 두 번 절하였다. 내시가 신주를 받들어 궤에 넣으니 헌관 이하가 물러 나아갔으며, 내시가 찬물(饌物)을 치웠다. 내시가 축문을 받들어 구덩이에 묻고나서 이어 초우제(初虞祭)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묘소(墓所)는 왼쪽에서 갑·묘(甲卯)로 감싸 안게 되었는데 용(龍)이 묘(卯)에서 입수(入首)하였으며, 을좌(乙坐)에 신향(辛向)으로 되어 있다.【신묘(辛卯)·신유(辛酉)로   분금(分金)066) 하고 해방(亥方)에서 득수(得水)067)  하여 경방(庚方)에서 파문(破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5책 7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3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註 066] 분금(分金) :  시체를 묻을 때 위치를 똑바로 정하는 일.[註 067] 득수(得水) :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산속에서 산속으로 흐르는 물을 일컫는데, 묘지(墓地)에서 보아서 처음 보이는 지점의 물을 득수라고 하고 나중에 보이는 지점의 물을 파문(破門)이라고 함.

 

헌부 【지평 이사관(李思觀)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오늘날의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어려움이 위태롭기만 할 뿐입니다. 상천(上天)이 기뻐하지 않아서 천문(天文)이 누차 경계를 고하고 음산한 기운이 위로 해와 달을 간범하였으니, 이는 비상한 변괴인 것으로 실로 지난 역사에도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이는 바로 군신 상하가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위태롭게 여기면서 크게 진기하고 면려할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청대(靑臺)의 주달(奏達)이 있은 지 이미 3,4일이 되었어도 원사(院辭)와 대장(臺章)이 초초하게 의례적인 글을 올린 이외에는 일찍이 하나의 명령을 내고 하나의 일을 조처하여 조금이나마 상천이 인애(仁愛)하는 뜻에 답하고 우러러 대조(大朝)의 측신 수성(測身修省)하는 성의를 본받은 것이 있지 않았으니, 신은 그윽이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비록 지금 발인(發靷)하고 하관(下棺)한 끝이라서 마음이 슬픔으로 동요되어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는 합니다만, 또한 어찌 인접(引接)하는 때를 오랫동안 그대로 넘기면서 전혀 모유(謨猷)를 세우지 않음으로써 심상(尋常)의 사무(事務)로 여긴 채 방과(放過)하여 버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덕음(德音)을 발하여 반우(返虞)한 뒤 빈대(賓對)할 시기를 미리 정하고 조종조(祖宗朝)에서 재변(災變)을 만나 수성(修省)하던 법전을 상고하여 찾아내어 거행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공사(工事)를 일으켜 백성들을 번요(煩擾)스럽게 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은 중외(中外)에 분명하게 신칙시켜 일절 정파(停罷)하게 하소서. 중명(重明)이 위에 계시고 철명(哲命)이 시작되었는데, 많고 많은 만사(萬事) 가운데 예학(睿學)을 힘써 밝히고 성덕(盛德)을 날로 새롭게 하는 것보다 더 급히 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덕업(德業)을 증진시키는 요점은 또한 단정한 사람과 훌륭한 선비들을 인진(引進)시켜 아침저녁으로 좌우에 두고 계옥(啓沃)하고 보익(輔益)하는 공효의 도움을 받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리(明离)068)  께서는 서연(書筵)을 오래도록 철파하고 있고 멀리 은둔한 선비들을 등진(登進)시킨 일이 없었으니, 신은 그윽이 걱정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천재(天災)가 겹쳐 발생하고 국사(國事)가 걱정스럽기만 한 때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더욱 명덕(名德)이 있는 이들을 불러들여 경석(經席)에 포열시켜 놓고 그들에게 훈도(薰陶)하는 책임을 맡기고 겸하여 재변을 없앨 방도를 강론하게 해야 합니다. 청컨대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들을 초선(抄選)한 다음 아울러 하유(下諭)하여 돈소(敦召)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절실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언 김시묵(金時默)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변을 당하여 경계(警戒)하는 것은 언로(言路)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사(三司)의 관원들이 방축된지 1년이 지났고 일에 대해 말하는 신하가 영해(嶺海)로 유찬(流竄)된 상황인데, 세 명의 대관(臺官)을 견파(譴罷)시키라는 청이 논사(論思)하는 자리에서 발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들이 비록 시재(時宰)를 영호(營護)하기에 급급해서 그러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각(臺閣)을 가벼이 여겨 무시하고 언로(言路)를 가로막아 다시 여지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의당 전후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들을 소석(疏釋)시키고 이어 구언(求言)하는 유지(有旨)를 내려 당직(讜直)한 말을 하는 길을 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제 재이(災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때에 마음을 합쳐 재이를 없앨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심(私心)을 품고 나서서 영호(營護)한단 말인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하였다.

 

1월 23일 을유

재우제(再虞祭)를 행하였다.

 

반우(返虞)할 때 배종(陪從)한 군관(群官)들이 홍문(紅門) 밖의 위차(位次)로 나아가 부복하고 곡(哭)하였다. 곡을 그치고 나서 두 번 절하고 묘(墓)에 하직을 고한 다음 동서(東西)로 나뉘어 차례대로 서서 기다렸다.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길유궁(吉帷宮)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영좌(靈座)에서 내려 거(車)로 오를 것을 찬청(贊請)하였다. 내시(內侍)가 교명(敎命)·시책인(諡冊印), 평시(平時)의 책인(冊印)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니 각각 요여(腰轝)에 안치시켰고, 향로(香爐)·향합(香盒)은 향정(香亭)에 안치하였다. 신주(神主)를 받들어 거에 봉안하고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놓았다. 섭상례가 나아가 거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찬청하니, 신주거(神主車)가 움직였고 의장(儀仗)은 차례대로 앞에서 인도하였다. 동구(洞口)에 이르자 배종하는 군관들이 몸을 굽혔고 지나간 다음에는 모두 말을 타고 차례대로 배종하는 것을 처음과 같이 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서는 영좌에서 내리고 거에 오르는 것을 올 때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성문(城門)밖에 있는 백관(百官)의 지영소(祗迎所)에 이르러서 섭상례가 꿇어앉아 조금 머물 것을 찬청하니, 백관과 재추(宰樞)·기로(耆老)·유생(儒生)들이 부복하고 곡을 하였으며, 두 번 절하는 것도 의식대로 하였다. 이를 끝내자, 섭상례가 꿇어앉아 출발하기를 찬청하였다. 혼궁(魂宮)의 문밖에 이르러 섭상례가 꿇어앉아 거에서 내려 여(轝)로 오를 것을 찬청하니, 내시가 신주궤(神主櫃)를 받들어 여에 안치시키고 혼백함은 그 뒤에 놓았다. 내시들이 여를 받드니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섬돌 위에 이르러서는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영좌로 오를 것을 찬청하였다. 내시가 신주궤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시키고 혼백함을 그뒤에 가져다 놓았다. 교명·책인은 영좌 앞에 가져다 놓고 좌우에 산선(繖扇)을 설치하였다.

 

1월 25일 정해

삼우제(三虞祭)를 행하였다.

 

이익보(李益輔)를 대사간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김선행(金善行)을 사간으로, 유현장(柳顯章)을 장령으로, 김치인(金致仁)을 교리로, 박사눌(朴師訥)을 문학으로, 이명희(李命熙)를 겸 문학으로 삼았다.

 

1월 26일 무자

청(淸)나라 사신이 나왔는데, 태후(太后)의 존호(尊號)를 올리고 반사(頒赦)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을 갖추고 흉배(胸背)가 없는 흑원령포(黑圓領袍)에 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로 동가(動駕)하여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렀다.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곤룡포(袞龍袍)로 고쳐 입었는데, 칙사(勅使)가 이르자 몸을 굽히고 지영(祗迎)하는 것을 의식대로 하였다. 이를 끝내고 나서는 인정전(仁政殿) 뜰의 막차에 이르러 의식대로 행례(行禮)하였다. 행례가 끝나자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칙사와 마주 대하여 황제(皇帝)·황태후(皇太后)·황후(皇后)의 기거(起居)를 물은 뒤에 막차로 들어가 다시 흉배가 없는 흑원령포에 청정·소옥대로 갈아입고 나아와 의자에 나아가 앉았다. 다시 제왕(諸王)과 패륵(貝勒)069)  들의 안부를 묻는 것을 앞서의 예(例)와 같이 하였다. 칙사가 나아가자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왕세자도 익선관에 흉배가 없는 흑원령포로 돈화문(敦化門) 밖의 악차(幄次)로 나아갔다. 대가(大駕)가 나아오자 지영하고 나서 대가를 따라 모화관에 이르러서는 막차로 들어가 곤룡포로 갈아입고서 칙서(勅書)를 맞이하였다. 이어 대가를 따라 인정문(仁政門) 안에 이르러 칙서를 받은 다음 행례(行禮)를 마치고 나서는 먼저 나와서 대내로 돌아갔다.

 

간원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27일 기축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흉배가 없는 흑원령포에 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로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근래 역관(譯官)들의 생계(生計)가 점점 박하여지는 탓으로 사람들이 모두 역관되는 것을 싫어하여 피하고 있습니다. 또 글을 공부하여 대과(大科)나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은 추론(追論)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전에는 쇄환(刷還)시킨 사례가 있었으니, 청컨대 역관의 자제(子弟)들 중 다른 기술을 취택해 나간 자들은 아울러 모두 원적(院籍)으로 환속(還屬)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만일 장려하여 기용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전조(銓曹)로 하여금 특별히 녹용(錄用)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방민(坊民)들을 불러서 시내[川]를 파는 것의 편부(便否)에 대해 순문(詢問)하였다. 임금이 돌아오다가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러 시냇가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 순문하기를,
"어장(御將)이 시내가 메워져 막혀 있다고 아뢰었는데, 나는 민력(民力)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제 보건대,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 성을 지키려면 시내를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신 등이 어렸을 적에는 기마(騎馬)가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와 모래가 서로 맞닿게 되었습니다. 전에 일꾼을 동원하여 깨끗이 쳐내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막힌 것이 또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큰 다리가 이러하니, 작은 다리가 어떠한지는 미루어 알 수 있다. 태종조(太宗朝)에 성을 쌓은 것은 후손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니, 나는 다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제 보건대, 다리가 막힌 것이 이와 같으니, 쳐내고 싶다. 그대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가?"
하니, 백성들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이는 모두 백성을 위하는 일이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시내를 치는 것을 어렵게 여긴 것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 가운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하여 이렇게 하문하는 것이다."
하였다.

 

1월 28일 경인

오우제(五虞祭)를 행하였다.

 

채경승(蔡慶承)을 정언으로, 심익성(沈益聖)을 헌납으로, 윤광찬(尹光纘)을 부수찬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예문 제학으로, 이익정(李益炡)을 반송사(伴送使)로,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摙)을 진하 겸 사은 정사(陳賀兼謝恩正使)로, 한사득(韓師得)을 부사(副使)로, 유한소(兪漢蕭)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1월 29일 신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지난번 묘소(墓所)에 있으면서 신주(神主)를 쓴 뒤 장계(狀啓)를 봉진(封進)할 적에 ‘시(時)’자 위의 한 글자를 채워 쓰지 않았었는데, 추후 정원에서 전하는 바를 듣고서는 놀랍고 송구스러움이 실로 깊었습니다. 이는 대개 잇따라 봉계(封啓)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하리(下吏)가 미리 정서(正書)하여 놓았다가 삼도감(三都監)과 장생전 제조(長生殿提調)에게 서명(署名)을 받았었는데, ‘시(時)’자 위에 한 글자를 비워두었다가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써넣고 봉진하는 것이 준례입니다. 그런데 재촉하여 명령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時)’자를 써넣어 봉계(封啓)한다는 것이 도리어 월일(月日) 아래에다 ‘시(時)’자를 써넣음으로써 한 글자를 비워둔 채 끝내 써넣는 것을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계하(啓下)한 뒤에 또 몰래 추후에 써넣음으로써 잘못한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통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하리(下吏)는 이미 수금(囚禁)하여 죄를 매겼습니다만, 옛사람은 ‘마(馬)’자에 점이 하나 빠진 것 때문에 사죄(死罪)를 받았는데 더구나 한 글자를 빠뜨리고 쓰지 않았으니, 그 죄가 어떠합니까? 연일 공고(公故) 때문에 분주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짧은 글을 올려 견책을 내리기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엄히 감처(勘處)하여 주어(奏御)하는 문자(文字)의 체통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사퇴(辭退)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서종급(徐宗伋)을 개성 유수에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칙사(勅使)가 돌아가는 것이 내일에 있기 때문이었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홍봉한(洪鳳漢)도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장(御將)은 부로(父老)들에게 하문했다는 말을 들었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내[川]는 이미 완전히 막혀 있었다. 내가 백성을 동원시키려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이미 완전히 막혔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큰일입니다. 온 도성이 모두 어룡(魚龍)의 굴택(窟宅)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로들은 시내를 쳐야 한다고 하였으나, 나의 생각에는 시냇가에 사는 사람들은 으레 당연히 기뻐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원치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니,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하루 부역(赴役)하는 것이야 누가 원치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며칠 동안 부역시키면 되겠는가?"
하니, 제조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삼문(三門) 밖을 모두 동원하여 3일 동안 부역시키면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5일은 걸려야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낸 사토(沙土)를 어느 곳에다 쌓아 두어야 하는가?"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훈련원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하였다. 도승지 김한철(金漢喆)이 말하기를,
"이는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반경(盤庚)070)  은 물의 걱정 때문에 서울을 옮기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내를 쳐내는 일은 어장이 상의하여 가지고 오라."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마땅히 헤아려서 뒷날 입시할 때를 기다려 다시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삼도감(三都監)의 도제조 김재로(金在魯), 제조 이익정(李益炡)·홍계희(洪啓禧)·김상성(金尙星)·정익하(鄭益河)·서명구(徐命九)·이종백(李宗白)·이춘제(李春躋), 낭청(郞廳)·감조관(監造官)·별공작(別工作) 등에게는 면대하여 급마(給馬)하고, 사마(賜馬)·승서(陞敍)·승륙(陞六)·현궁(弦弓) 등을 각기 차등 있게 주게 하였다. 도청(都廳) 김선행(金善行)·김치인(金致仁)·윤상임(尹尙任)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시책문 제술관(諡冊文製述官) 조관빈(趙觀彬), 서사관(書寫官) 윤득화(尹得和), 애책문 제술관(哀冊文製述官) 이천보(李天輔), 서사관 조명교(曺命敎), 인전문 서사관(印篆文書寫官) 조현명(趙顯命), 표석 대자 서사관(表石大字書寫官)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 음기 서사관(陰記書寫官) 윤봉오(尹鳳五), 돈체사(頓遞使) 박문수(朴文秀), 배왕 대장(陪往大將) 장태소(張泰紹), 사시관(賜諡官) 서명빈(徐命彬), 배왕 승지(陪往承旨) 조돈(趙暾), 고계빈관(告啓殯官) 참찬(參贊) 권적(權摘), 여재실관(舁梓室官) 이내복(李來復)·박종익(朴宗益), 분사서(分司書) 김굉(金硡), 분익위(分翊衛) 박사백(朴師伯), 염습(斂襲)하여 묵고 하현실(下玄室) 때 입참(入參)했던 영돈녕(領敦寧) 조현명, 집사(執事) 조재홍(趙載洪)·조재부(趙載溥)·조재득(趙載得)·조재한(趙載翰)·조재전(趙載田)·조재우(趙載遇)·조재선(趙載選), 배향관(陪香官)·찬의(贊儀)·예모관(禮貌官)·섭상례(攝相禮)·만장 서사관(輓章書寫官)·제집사(諸執事), 경기 감사(京畿監司)·도차사원(都差使員)·배설 차사원(排設差使員), 장생전 도제조(長生殿都提調) 김재로, 제조 원경하(元景夏)·김상익(金尙翼)·홍봉한(洪鳳漢), 예방 승지(禮房承旨) 권일형(權一衡)·남태기(南泰耆)에게는 각각 말과 활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홍봉조(洪鳳祚), 제주관(題主官) 심성진(沈星鎭), 봉폐관(封閉官) 박평(朴玶)에게는 가자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 부장(部將)·주시관(奏時官)·별간역(別看役)·상지관(相地官)·사자관(寫字官)·택일관(擇日官), 계사(計士)·화원(畵員)·원역(員役)·공장(工匠)·별감(別監)·반감(飯監) 등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는데, 빈궁(殯宮)·혼궁(魂宮)·묘소(墓所)에서 도감(都監)·집사(執事)·차비(差備)로 수고했기 때문이었다.

 

1월 30일 임진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전송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흉배(胸背)가 없는 흑원령포(黑圓領袍)에 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를 갖추었는데, 칙사가 관소(館所)에서 이르자 임금이 막차(幕次)에서 나아가 서로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의식(儀式)대로 하였다. 칙사가 떠나자,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자연암(紫烟巖)에서부터 상언(上言)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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