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갑오
김치인(金致仁)을 승지로 삼았다.
2월 3일 을미
임금이 태묘(太廟)와 영희전(永禧殿)을 배알(拜謁)하였는데, 왕세자가 수가(隨駕)하였다. 이어 육상묘(毓祥廟)로 나아갔고 두루 효장묘(孝章廟)에도 들렀다. 임금이 승선(承宣)071) 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묘(廟)에 들어가서 곡(哭)을 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나아와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묘에 들어가서는 곡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리(情理)를 펴는 것이 어찌 곡을 하는 데 있는 것이겠습니까? 승지도 반드시 가정(家庭)에서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하문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자,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3년이 지난 뒤 묘중(廟中)에서 곡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왕세자에게 먼저 환궁(還宮)하라고 명하고 밤이 되어서야 반가(返駕)하였다.
2월 4일 병신
유성(流星)이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평안도의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김광세(金光世)를 대사헌으로, 심익성(沈益聖)을 사간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정언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병조 판서 예문 제학으로, 조창래(趙昌來)를 장령으로, 유언국(兪彦國)을 보덕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팔로(八路)의 수륙(水陸) 조습(操習)을 정지시키라고 명했는데, 대신(大臣)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2월 5일 정유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판서로, 윤상임(尹尙任)을 승지로, 이명희(李命熙)를 헌납으로 삼았다.
이번 능행(陵幸)에 제도(諸道)의 감사들은 경상(境上)에서 대기하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겨울에 우레가 치고 무지개의 변이가 발생했다는 것으로 인구(引咎)하니, 하령(下令)하기를,
"모두 내가 불민스러운 소치인 것이어서 바야흐로 깊이 경척(警惕)하고 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북도(北道)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장차 다 죽게 되었으므로 대조(大朝)께서 특별히 진휼(軫恤)하여 곡식을 옮겨다가 진구(賑救)를 설행하게 한 것입니다. 영남(嶺南)의 곡식을 전후 획급(劃給)한 것이 이에 10월 보름 사이에 있었는데 이제 중춘(仲春)이 되도록 아직껏 발선(發船)시켰다는 통보가 없으니, 경상 감사 조재호(趙載浩)를 중추(重推)하고 독운 도사(督運都事)를 특별히 차임하여 내려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령하였다.
2월 8일 경자
임금이 공릉(恭陵)·순릉(順陵)·효순묘(孝純墓)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흉배가 없는 흑사 철릭(黑紗貼裏)에 삽우(揷羽)를 제거한 여(輿)를 타고 명정문(明政門)으로 나아갔다. 여에서 내려 말을 타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가교(駕轎)로 바꾸어 타고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효장(孝章)·효순(孝純)의 묘(墓)의 축문(祝文)을 불러서 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국휼(國恤) 때 취라(吹螺)를 아뢴 선전관(宣傳官)은 회가(回駕)할 때 결곤(決棍)하도록 대령(待令)하게 하라."
하였다. 공릉의 홍문(紅門) 밖에 이르러 전알(展謁)하고 봉심(奉審)하였으며, 순릉에 나아가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효순묘의 홍살문에 이르러서는 최복(縗服)으로 바꾸어 입고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곡림(哭臨)하였으며, 이어 묘에 올라가 또 곡림하고 재실(齋室)에 이르렀다. 하교하기를,
"대소신(大小臣)을 막론하고 임금이 곡림하면 동·서반(東西班)은 즉시 그곳에서 위로하는 문안을 올리는 것이 바로 전례인 것인데 오늘은 빠뜨렸으니, 해당 당상(堂上)을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도로 공릉의 재실로 돌아와서 수시묘관(守侍墓官)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경기의 기병(騎兵) 10명을 수묘소(守墓所)에 더 배정하라고 명하였는데, 수묘관(守墓官) 해봉군(海蓬君) 이인(李憐)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영복(李永福)을 어사(御史)로 삼아 암행(暗行)하면서 각무 차원(各務差員)을 염찰(廉察)하라고 명하였다.
좌우 통례(左右通禮)에 사람을 잘 가리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특별히 전조(銓曹)를 신칙시키도록 명하였다.
수위관(守衛官) 김정보(金鼎寶)를 재임(再任)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리가 나는 대로 우선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이 뒤로도 세 곳의 수위관은 실제의 사일(仕日)을 계산하여 조용할 것을 특별히 전조에 신칙시켰다. 임금이 공릉의 재실에 나아가 유숙(留宿)하였다.
2월 9일 신축
해 위에 관(冠)이 있었다.
이철보(李喆輔)를 도승지로 삼았다.
환궁할 때 임금이 최복(服)을 갖추고 묘(墓) 위에 곡림(哭臨)하였고, 흉배가 없는 흑사 철릭(黑紗貼裏)을 갈아입고 삽우(揷羽)를 제거한 다음 말에 올랐다. 10여 리를 와서 고양(高陽)의 유생(儒生)이 상소(上疏)한 것을 보고 하문하니,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대의 나이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글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러가서 학업을 닦아라."
하였다. 희릉(禧陵)·효릉(孝陵)·소현묘(昭顯墓)는 승지에게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고, 명릉(明陵)·익릉(翼陵)에도 또 승지를 보내어 봉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의 묘(墓)와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의 묘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묘에서 회가(回駕)한 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도신(道臣)에게는 표피(豹皮)를 주고 본주목(本州牧)에는 전부(箭部)를 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어 환궁(還宮)하였다.
임금이 주정소(晝停所)에 나아가 영의정·경기 도신(京畿道臣)·각무 차원(各務差員)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잇따라 국역(國役)을 만났으니, 의당 돌보아 구휼하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 금년 봄의 대동미(大同米)를 특별히 2두(斗)씩을 감면시킴으로써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어사 이영복(李永福)이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역사(役事)에 관한 폐단은 없었습니다. 이번 여러 고을에 대해 하나의 물건이라도 민간(民間)에게서 거두어 들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도 민폐(民弊)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가 포장(褒奬)하는 것만 있고 폄하(貶下)하는 것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이영복이 말하기를,
"실제로 폄하할 만한 수령(守令)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고양(高陽)의 아전에게 문의하여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의 묘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2월 10일 임인
장령 유현장(柳顯章)이 상서하여 천재(天災) 때문에 진계(陳戒)하고, 또 말하기를,
"균역(均役)의 법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도 실제의 혜택이 닿지 않아 군민(軍民)이 모두 지쳐 있으며, 조제(調劑)하는 방책은 그 귀중함이 화협(和協)에 있는 것인데 조론(朝論)이 날로 무너져서 서로 공격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근거없는 와언(訛言)에 서로 동요되어 여리(閭里)는 흩어져 버릴 형편에 있고 사욕(私慾)이 멋대로 행하여져 상하에 염치를 지키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명기(名器)는 가벼워지고 요행을 바라는 문은 크게 열렸으며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법령이 제대로 신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들은 진실로 반드시 망할 조짐이어서 사리상 재변이 발생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척연(惕然)히 스스로 경계하여 학문을 강론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진실(眞實)과 근독(勤篤)을 힘쓰고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돈각(敦恪)하고 노성(老成)한 사람을 먼저 하며, 충직(忠直)을 권장하여 언로(言路)를 열고 무너진 기강을 진기시켜 풍속을 바로잡으며 참설(讒說)이 행해지지 못하게 하는 반면, 가언(嘉言)은 반드시 드러내게 하고 조정으로 하여금 잘 화협하게 해서 당습(黨習)을 부리지 못하게 하소서. 그렇게 한 연후에야 온갖 업적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고 온갖 일이 올바르게 되는 것으로, 하늘에 응하는 것을 진실답게 하는 방법도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양서(兩西)에 거듭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일을 조처할 길이 없으니, 특별히 수령을 가리는 것을 제일의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세우(李世佑)는 인품이 아둔하고 잔약하며 미련하여 일을 잘 알지 못하며, 덕천 군수(德川郡守) 한광국(韓光國)은 미련하고 용렬하여 줏대가 없으면서도 오로지 탐학(貪虐)한 짓만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아울러 개차(改差)하소서. 해당 전관(銓官) 또한 의당 경책(警責)해야 합니다. 신은 지난번 간신(諫臣)이 이운해(李運海)의 대통(臺通)을 개정(改正)할 것을 논한 일에 대해 실로 개연(慨然)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운해는 인망·문벌과 문행(文行)이 동류들 가운데서 칭송받고 있는 사람이니, 대선(臺選)에 통망(通望)된 것 또한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충군(充軍)시킨 죄인 이시번(李時蕃)의 시복친(緦服親)이 되는 소족(疎族)이라는 것으로 경솔하게 낙점(落點)에 하자를 제기하였으니, 이렇게 하기를 마지 않는다면 자못 장차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이운해를 개정하라고 한 명에 대해 속히 환수(還收)할 것을 허락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충청 감사 김시찬(金時粲)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누차 연석(筵席)에서 부세를 가중시키는 것이 농정(農政)을 손상시키는 폐단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진달하였었고, 대조(大朝)께서도 또한 일찍이 신의 말을 크게 패려스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변통시킬 방책이 없어 이에 결행(決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감히 지위를 벗어나 정사에 대해 모의(謀議)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평상시 걱정하고 탄식하여 왔었습니다. 현임(現任)에 제수되기에 이르러서는 바로 결역(結役)이 한창인 때를 당하였는데, 그윽이 듣건대, 전 감사 이익보(李益輔)와 균역 당상(均役堂上) 홍계희(洪啓禧)가 의견 교환을 상세히 하여 상정법(詳定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백성이 부세를 더 내고 각 고을에서 경용(經用)을 감삭(減削)당하는 것을 끝내 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끝에 가서는 의논이 어긋나 서로 버티다가 결말을 짓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논쟁한 내용을 들어보면 1천 수백 석(石)의 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득실(得失)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맨 나중의 책임은 신이 실제로 감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불 균역청 당상과 의견의 교환이 있게 되었고 따라서 해청(該廳)의 지휘(指揮)만을 따른 채 본도(本道)의 이해(利害)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리게 된 것입니다만, 갑자기 어제 내려온 관문(關文)에 의하면 해청에서 곧바로 분정(分定)하여 계하(啓下)하였으니, 신은 참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대개 이 균역(均役)에 대한 것은 해당 당상이 으레 주관해야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반드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분배(分排)하게 한 것은 참으로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실제 목격한 것과는 다른 것은 물론 일로(一路)의 대정(大政)은 의당 관섭(管攝)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런 가부(可否)도 없이 곧바로 스스로 구획(區劃)하였습니다.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어찌하여 구백(舊伯)과 서로 버틸 때에 오늘날처럼 곧바로 결단하지 않고 고역스럽게 수정(修整)하여 다시 보고하기를 요구하다가 이에 구백이 이임(離任)하고 신백(新伯)이 감영에 도착도 하기 전에 급작스럽게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신은 진실로 의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만일 문서(文書)에 따라 봉행하고 예(例)에 의거 지휘하게 하는 것이라면 한 사람의 관리만으로도 충분한 것인데 또 무엇 때문에 도신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의 염우(廉隅)에 있어 어떻게 뻔뻔스럽게 무릅쓰고 있으면서 각 고을로 하여금 묵묵히 폐단을 받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을 체직시켜 일로(一路)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사퇴하지 말라고 답을 내렸다.
2월 11일 계묘
임금이 영수각(靈壽閣)에 전알(展謁)하였다. 임금이 기사(耆社)의 전각(殿閣) 뜰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기사 당상(耆社堂上)과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수가(隨駕)하였다. 도위(都尉)·승지(承旨)·사관(史官)도 모두 사배(四拜)하였다. 임금이 전(殿)에 올라가 각문(閣門) 밖에 서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감문(龕門)을 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기사 당상의 말료(末僚)이어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판부사(判府事)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봉심(奉審)할 경우에는 대신이 감문을 열고 예조 당상이 궤(櫃)를 받드는 것이 예(例)입니다."
하였다. 예조 당상과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보책궤(寶策櫃)를 받들어 안상(案上)에 내어놓고 보자기를 풀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2권(卷) 이외에 다른 물건(物件)은 없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몸소 권책(卷冊)을 펴고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위의 2판(板)은 경묘(景廟)의 어필(御筆)이고, 제3판(第三板)은 나의 글씨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서문(序文)은 끝에 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서문은 신의 숙부(叔父)가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다시 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다."
하고, 직접 보책(寶策)에 소지(小識)를 쓰기를,
"이제 내 나이 59세인데, 다행히 기해년072) 에 성고(聖考)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간 연세와 합치되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어서 추모하는 마음이 배나 더하다. 지팡이를 짚고 와서 보각(寶閣)에 전배(展拜)하니, 소자(小子)의 일어나는 감회를 조금은 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개요(槪要)를 갑자년(甲子年)073) 서첩(敍帖)의 끝에 간략히 기록한다. 이때가 황명(皇明)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세 번째 임신년 봄 2월 11일이다."
하고, 또 서(序)하기를,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에서부터 나의 성고(聖考)에 이르기까지의 어첩(御帖)은 곧 나의 황형(皇兄) 경묘(景廟)께서 동저(東邸)에 있을 때 시좌(侍坐)하였다가 명을 받들어 쓴 것이며, 갑자년에 쓴 서첩은 곧 내가 스스로 쓴 것이다. 이에 그 사실을 기록하여 뒤에 살펴보는 것에 대비한다. 임신년 중춘(仲春)에 추서(追書)한다."
하였다. 다 쓰고나서 임금이 몸소 봉함하여 보궤(寶櫃)의 자물쇠를 채웠다. 예조 당상과 예방 승지가 받들어 전에 있던 장소에 가져다 놓았다. 임금이 일어나서 보궤를 따라가 봉안한 다음 김재로가 감문(龕門)에 자물쇠를 채웠다. 임금이 기사 당상의 연기(年紀)에 대해 두루 하문하니, 권적(權𥛚)·조석명(趙錫命)·신사철(申思哲)과 김재로가 각기 자신들의 나이로 대답하였다. 기사 당상 가운데 외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도록 명하였고, 서울에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약물(藥物)을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보내 주게 하였다. 임금이 돌아오다가 종각(鐘閣)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지영(祗迎)하는 사람들 가운데 직책이 있는 사람은 관대(冠帶)를 하고 그 나머지는 마땅히 청의(靑衣)를 입어야 하는데, 이제 시종신(侍從臣)들을 보건대, 백의(白衣)로 지영하고 있어 일이 매우 한심스럽다. 이 뒤로는 각별히 엄히 계칙시키라."
하였다. 공주(公主)들의 집을 두루 임어한 다음 유시(酉時)에 환궁(還宮)하였다.
함경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2월 12일 갑진
동부승지 윤상임(尹尙任)이 상서(上書)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 대신(大臣)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복해(李福海)가 돈을 선물한 일에 대해 논하였을 적에 신이 마침 옥당(玉堂)에 입직(入直)하고 있었으므로 어사(御史)와 함께 연석(筵席)에 들어갔었습니다. 돈을 선물한 것이 공안(公案)인 줄 알았는데 책장(冊張)을 발거(拔去)하여 진장(眞贓)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너무도 놀랍고 통분스러워 곧바로 장률(贓律)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이복해를 대신하여 본읍(本邑)의 수재(守宰)가 되기에 이르러 그 사정을 상세히 탐문하여 보니, 요망한 이태(李泰)가 문전에 왔다가 축출당하고 책장을 하리(下吏)가 사사로이 발거한 것이 과연 그의 공초(供招)와 같았습니다. 또 스스로 7백 석(石)의 미태(米太)를 준비하였고 성(城)을 쌓는 역사(役事)에 쓰려고 대비한 1천여 냥의 전화(錢貨)로 장차 대동미(大同米)를 감하려 했는데, 그것들이 모두 현재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신이 그때에 돈은 호조(戶曹)에 보고하여 옮겨 전세(田稅)를 대신하게 하고 미태(米太)는 영문(營門)에서 가져다가 민역(民役)을 견면(蠲免)시키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복해가 죄에 걸린 것이 지극히 원통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신이 전에 아뢴 말은 경솔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신이 그 고을에 있은 지가 1년이었으니 이복해가 벼슬살면서 한 모든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장오(贓汚)에 근사한 것을 듣거나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매양 한번 그의 원통한 정상을 밝히려 했었는데, 이제 이덕해(李德海)가 신을 끌어대어 증거를 삼으면서 곧바로 신이 남을 무함하고 임금을 속였다는 것으로 공척(攻斥)하였으니,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청컨대 신이 주대(奏對)를 삼가지 못한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왕세자가 예사롭게 답하였다.
2월 13일 을사
오언유(吳彦儒)를 승지로, 조돈(趙暾)을 대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을 형조 참판으로, 홍봉조(洪鳳祚)를 동의금으로, 이명희(李命熙)를 부수찬으로, 박필부(朴弼傅)를 판 결사로 삼았다.
2월 15일 정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부사직(副司直) 홍계희(洪啓禧)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충청 감사 김시찬(金時粲)의 상서에 대해 의아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오직 이 잡역미(雜役米)를 상정(詳定)한 것은 곧 결미(結米)를 정하여 행하기로 한 뒤의 절목(節目)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구백(舊伯)이 장문(狀聞)하여 복주(覆奏)한 내용 가운데 이미 만들어진 절목을 내려 보내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에 전일 정한 것에 나아가 대대적으로 증손(增損)을 가하여 더 정한 것이 1천여 석(石)이었습니다. 이를 신미년074) 의 3두(斗)와 견주어보면 더 부과한 것이 오히려 1천 9백여 석이었으니, 비록 본도(本道)에서 정한 숫자와는 맞지 않더라도 피차 각기 자기의 의견을 굽혀 모쪼록 절충시켜 사의(事宜)에 맞게 한다면, 일을 성취시키는 방도에 있어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신(道臣)이 이를 이유로 인혐(引嫌)하면서 심지어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으로 신을 허물하니, 신은 참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의 성신(誠信)이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소치인 것이니, 신의 불안스러움이 이에서 배로 가중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계하(啓下)한 절목은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은 것이어서 각 고을에서 거행함에 있어 조금도 완만히 해서는 안되니, 우선 이에 의거하여 반행(頒行)하소서. 시행하는 과정에 구애되는 일이 생긴 연후에 혹은 장문(狀聞)도 하고 첩보(牒報)도 하게 하여 다시 의논해서 변통시켜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도신에게 의혹을 당했으니, 감히 갑자기 청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여 분부(分付)하게 함으로써 응당 행해야 할 일을 지연시키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해도(該道)로 하여금 사목(事目)에 의거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6일 무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전하(殿下)의 지극한 행실과 큰 공렬은 전고에 으뜸입니다. 일찍이 경신년075) 에 억지로 마지못해 휘칭(徽稱)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 두어 글자를 더하는 것이 무슨 손익(損益)될 것이 있겠습니까? 답답하게 여기는 하정(下情)을 끝내 면부(勉副)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이 그럴 때인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흡연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제 와서는 억지로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제때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존주 대의(尊周大義)076) 는 곧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인 것이어서 태조(太祖)께서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함으로부터 이미 존주(尊周)의 본령(本領)이 확립된 것입니다. 그뒤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서로 계승하여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하여 왔으며, 선묘(宣廟)에 이르러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종계(宗系)의 변무(辨誣)077) 와 도이(島夷)078) 를 감정(勘定)079) 하는 데 이르러서는 끝내 명나라 조정의 망극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효묘(孝廟)께서는 창을 베고 자면서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뜻을 성취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지사(志士)들의 감읍(感泣)이 지금껏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숙묘(肅廟)께서는 지난 세월을 추모하여 특별히 의리에 의거 단(壇)080) 을 축조하여 향사(享祀)함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의 유사(遺事)를 이어받고 황통(皇統)이 영원히 실추된 것을 슬퍼하여 모든 정령(政令)과 모훈(謨訓)이 비풍(匪風)·하천(下泉)081) 의 뜻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단(壇)의 계단을 아홉 계단으로 증축하고 아울러 삼황(三皇)082) 을 제향하는 거조가 있기에 이르러서는 우뚝하게 더욱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과거 기사년083) 4월 초에 진향(進香)하던 날 밤 갑자기 번쩍거리는 전광(電光)이 북쪽에서 일어나더니 조금 있다가 구름이 몰려들어 비를 부리면서 한줄기 바람이 일어나 완연히 영기(靈旗)가 오르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반열(班列)에 있던 백관들은 차탄하고 탄식하면서 감모(感慕)하여 흥기(興起)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제1위(第一位)의 헌작(獻爵)을 막 파하고나자 풍운(風雲)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달과 별이 다시 환히 밝아져 감통(感通)하는 이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옛날 공성(孔聖)084) 께서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 대일통(大一統)을 제일의 의리로 삼았는데도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인(仁)을 가차하여 주(周)나라를 높인 것을 그래도 허여하였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지성이 환히 신명에게까지 이르러 성덕(聖德)이 더욱 빛났으니, 장차 천하 만세(萬世)에 영원히 할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뭇 신하들이 이를 천양(闡揚)하여 발휘(發揮)하고 싶어하는 것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비록 겸덕(謙德)을 굳게 지키려 하십니다만, 선조(先朝) 때에도 이미 행한 전례가 있어 선묘(宣廟)와 영고(寧考)께서는 임어하여 있으실 적에 몸소 스스로 받으셨었고 태조와 효묘(孝廟)를 추상(追上)한 법전 또한 선조(先朝)와 당저(當宁)의 세대에 있었습니다. 열조(列朝)에서 이미 모두 이와 같이 했는데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것도 또한 계술(繼述)해야 하는 것인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전례(典禮)를 행하였으니, 또한 어찌 계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이 어떤 날인가? 나에게 만약 정성이 있다면 어찌 감동하여 미덥게 되지 않겠는가? 나와 경은 나이는 좀 차이가 나지만 뜻은 서로 부합되었으므로 나는 항상 경이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여겼었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가?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내가 이미 싫도록 경험하였으므로 이 마음이 냉각된 지 이미 오래이니, 경은 모쪼록 양지(諒知)하기 바란다. 앞서 받은 바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이라는〉 여덟 글자에 대해 내가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때 자성(慈聖)께서 정청(庭請)한 지가 오래라는 것으로 하교가 계셨었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받은 것이다. 그 뒤로 그 여덟 글자를 볼 적마다 부끄러워 땀이 등을 적시고 있다. 순덕(純德)이란 글자는 장주(章奏)에 으레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익히 들은 지 이미 오래어서 보통으로 보아 넘길 수 있으나, 그 위의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상성(上聖) 이외에 그 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 두 글자를 들을 적마다 마음이 실로 크게 부끄러워 몸둘 곳을 모를 정도이다. 한 번도 오히려 지나친 것인데 두 번을 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2월 17일 기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서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전하께서는 열조(列朝)의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하여 황통(皇統)이 영원히 실추된 것을 매우 슬퍼하시어, 무릇 모훈(謨訓)에 형용되고 정령(政令)에 발현된 것이 비풍(匪風)·하천(下泉)의 비모(悲慕)와 지성(至誠)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원단(苑壇)을 증축(增築)하고 삼황(三皇)을 아울러 제사한 데에 이르러서는 실로 성고(聖考)께서 이루지 못한 유의(遺意)를 끝까지 다한 것으로 성대한 예절을 잘 갖추어 신인(神人)이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아! 아름답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번국(藩國)이 천조(天朝)에 대해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존주(尊周)’ 두 글자는 상경(常經)이요 통의(通誼)일 뿐만이 아니라 곧 우리 성조(聖朝)에서 대대로 지켜온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대저 그 실상이 있으면 이에 그 이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선묘(宣廟)와 숙고(肅考)께서 이미 몸소 현호(顯號)를 받으시면서 사양하지 않으셨으며 태조(太祖)와 효묘(孝廟)께 존시(尊諡)를 더 올린 것이 또 성고(聖考)와 당저(當宁)의 세대에 있었으니, 열성(列聖)께서 이미 받으신 것을 전하께서만 유독 사양하면서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응당 행해야 할 이전(彛典)은 억지로 군정(群情)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점차 회색(晦塞)되어 가는 의리는 바로 쇠세(衰世)에 표장(表章)하여야 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신민(臣民)의 큰 소망을 굽어살피시고 우러러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한 전례(典禮)를 따르시어 속히 유음(兪音)을 내려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아! 나의 굳은 마음은 옥루(屋漏)가 알고 있다. 지난번 여덟 글자에 대해서도 마음속으로 오히려 부끄러워했는데, 이제 한 글자를 더한다면 이를 더더욱 효(孝)라 할 수 있겠는가? 추봉(追奉)하는 일은 사리상 진실로 당연한 것인데, 이를 인하여 받는다면 이를 더욱 충(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 임금과 신하로 몇 십년 동안 함께 있으면서 고굉(股肱)이요 원보(元輔)로 있는 사람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니, 이는 내가 평일 경 등을 대한 정성이 부족했던 탓인 것으로 얼굴이 뜨겁고 마음이 부끄러워 진실로 듣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꿈속에서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뒷날 무슨 얼굴로 돌아가 영령(英靈)들을 배알할 수 있겠으며 오늘날 무슨 얼굴로 묘당(廟堂)에 봉심(奉審)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냉각되고 때가 아니라는 것은 또한 제2건(第二件)의 일인 것이다. 비록 하루에 백 번을 청하고 한 해가 다가도록 버틴다 하더라도 먹은 마음이 이미 굳혀졌다. 수서(手書)로 다 유시(諭示)했는데 다시 무엇을 유시하겠는가?"
하였다.
2월 18일 경술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서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빈청(賓廳)에서 2품 이상이 계청(啓請)하기를,
"성고(聖考)의 휘지(徽旨)를 본받아 쾌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황해도의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가 강령현(康翎縣)의 전패(殿牌)를 잃어버린 일 때문에 대죄(待罪)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2월 19일 신해
빈청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이어서 끝내 막을 수 없는 것이고, 열조(列朝)에서 이미 행한 것이어서 끝내 빠뜨릴 수 없으니, 원컨대 유음(兪音)을 내려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부사(府使) 박필부(朴弼傅)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만 뜻밖에 대신(大臣)이 신의 성명(姓名)을 대조(大朝)께 거론하여 승진 발탁시키라는 명이 있게 되었으며, 계속해서 기성(騎省)085) 의 제수가 있었습니다. 신이 소장(疏章)을 준비하여 올리려 했었는데, 미처 입달(入達)하기도 전에 곧이어 은체(恩遞)를 받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여기에 있으면서 간혹 동읍(東邑)에 제수되기는 했었습니다만, 감히 무릅쓰고 부임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사(政事)086) 의 제배(除拜)에 대해서는 신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것이 전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신은 젊은 나이 때부터 과장(科場)을 드나들었다가 만년에는 사환(仕宦)에 분주하였었던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호사자(好事者)가 유담(遊談)한 것을 인하여 한 번 잘못 전해지고 두 번 잘못 전해지고 하다가 결국은 청현직(淸顯職)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만, 신의 용렬하고 비루함으로 어떻게 한때의 요행을 인하여 〈정도(正道)를〉 문란시킬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자급(資級)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답을 내렸다.
사간 심익성(沈益聖)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근이 겹쳐 이르러 사망(死亡)한 사람이 거의 반이나 되니, 이를 구제할 방책이 한시가 급한 실정입니다. 양도(兩道)의 조운(漕運)이 기일을 어길수록 만백성들이 물고기처럼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갈망하는 고통이 점점 심하여지니, 양도의 도신(道臣)에게 무겁게 경책(警責)을 가하여 제때에 구제하게 함으로써 북도(北道)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시키게 하소서. 균세법(均稅法)은 대조(大朝)께서 백성을 구휼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실제적인 혜택이 내려가 닿지 않고 폐단만 겹쳐 발생하고 있으니, 신법(新法)을 빙자하여 정세(正稅) 이외에 마구 거두어 들이는 폐단이 없을 수 없는데 수성(隋城)087) 의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수원(水原)의 전 부사(府使) 구수훈(具樹勳)은 의당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해야 합니다. 경기 수사 원필규(元弼揆)는 늙고 혼암하고 귀가 먹어서 오로지 공무(公務)는 전폐하고 형장(刑杖)만 일삼음으로써 군졸들에게 원망만 사고 있으니, 의당 개차(改差)해야 합니다. 정평(定平)의 전 부사 정덕재(鄭德載)는 현재 관서(關西)의 차원(差員)에 차임되었는데도 오만스럽게 거행하지 않으면서 일부러 법을 범하여 체면(遞免)되기를 도모하고 있으니, 의당 멀리 정배(定配)시키는 율(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양도의 도신과 구수훈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원필규의 일은 풍문(風聞)은 믿기 어려운 것이다. 정덕재의 일은 정배시킬 것을 청한 것은 지나치니 나문(拿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임자
임금이 각 능전(陵殿)의 한식제(寒食祭)에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압(親押)하고 친전(親傳)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합사(合辭)로 일제히 아뢴 지 이미 3일이 지났습니다. 처음의 계사에 대해 수서(手書)로 비답(批答)을 내린 뒤에 연일 내리신 비답에는 단지 이미 유시(諭示)하였다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삼자(三字)에 대해 성청(聖聽)을 더욱 멀리하여 유음(兪音)을 아직도 내리지 않고 있으므로 신 등이 마음이 막혀 답답함이 극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관을 이끌고 나아가 대정(大庭)에 엎드려 다시 피맺힌 진심을 아룀으로써 성명(聖明)께서 굽어살피시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존주(尊周)의 일념(一念)이 해와 별처럼 찬란히 빛나서 무릇 정교(政敎)와 문사(文辭)에 드러난 것이 만절 필동(萬折必東)088) 의 뜻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숙고(肅考)께서 끝마치지 못한 지사(志事)를 더욱 천명하여 제단(祭壇)을 증수(增修)하고 아울러 삼황(三皇)을 제사지냄에 있어 예의(禮儀)를 완전히 갖추었으므로, 신인(神人)이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삼황의 휘신(諱辰)에 북쪽을 바라보고 분향(焚香)할 적에 천안(天顔)이 슬픔에 젖어 눈물을 줄줄 흘리셨으니, 이는 실로 우리 전하의 지극한 성심이요 지극한 충심인 것으로 인극(人極)을 확립시키고 풍성(風聲)을 세운 큰 공인 것입니다. 군부(君父)에게 이러한 성대하고도 큰 덕업(德業)이 있는데 신하가 되어 가지고 끝내 그 만분의 일도 유양(揄揚)한 것이 없다면, 천하 후세에서 오늘날의 조정을 마땅히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아! 비풍·하천은 문자(文字)로 슬픔을 서술한 것에 불과하고 한칸 모옥(茅屋)은 단지 남은 백성이 정성을 바친 것뿐이었는데도 오히려 천고에 감탄을 자아내게 했는데, 더구나 이제 신주(神州)089) 가 망하고 나서 사해(四海)가 오랑캐의 풍속으로 더럽혀졌는데 한모퉁이 동쪽 땅에 아홉 계단 제단(祭壇)이 엄연하여 오르내리는 영령(英靈)이 왕림해 있는 것 같고 아름다운 제물(祭物)이 예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미 끊긴 황사(皇祀)가 다시 계속되게 되었고 점점 회색(晦塞)되어 가던 의리가 다시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전고(前古)를 두루 열람하여 보시더라도 속국(屬國)이 천조(天朝)에 대하여 천지가 뒤집어진 뒤에 향화(香火)090) 를 존봉(尊奉)하는 것이 오랠수록 더욱 부지런한 것이 어찌 오늘날과 비슷한 경우가 있은 적이 있었습니까? 이러한 일을 간책(簡策)에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한다면, 반드시 충신(忠臣)과 지사(志士)로 하여금 천백 세대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차탄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신 등이 몸소 성세(聖世)를 만나 성대한 거조를 목도(目睹)하게 되었으니, 이를 발휘(發揮)하여 높이 드러내어 군부(君父)의 덕을 환히 밝히려 하는 것은 천리와 인정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인데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이 제왕(帝王)의 효(孝)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선계(善繼)하고 선술(善述)하였다.’고 했습니다. 대저 우리 숙고(肅考)께서는 겸손하여 빛나는 지극한 덕으로도 뭇 신하들의 똑 같은 마음에 핍박되어 억지로 현호(顯號)를 받으시고 끝내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이미 숙고의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하였는데, 어찌하여 유독 현호를 올리자는 청에 대해서만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시면서 힘써 따를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원컨대, 속히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한 준례를 윤허하심으로써 온 나라가 크게 바라고 있는 뜻에 부합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 등은 청정(請庭)을 고수하고 있지만, 나는 마음을 고수하고 있다."
하였다.
2월 21일 계축
대신(大臣)과 백관(百官)이 정청(庭請)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종신(宗臣)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2일 갑인
대신과 백관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종신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 대해 휼전(恤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2월 23일 을묘
대신과 백관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종신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4일 병진
대신과 백관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종신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5일 정사
함경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하였다.
대신과 백관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종신이 정청하면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6일 무오
대신과 백관이 정청하면서 아뢰니, 답하기를,
"수서(手書)로 내린 처음의 비답(批答)에서 이미 다 유시(諭示)하였으니, 경 등이 양지(諒知)하기 바랐었다. 그런데 경 등은 ‘이것은 이에 예겸(禮謙)하는 것이다. 만일 굳이 청한다면 어찌 한결같이 계속 윤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있으니, 이는 정성이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제 처음의 비답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가지고 환히 유시하겠으니, 대소 신료들은 모두 나의 유시를 들으라. 아!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기는 하지만 추모하는 마음은 밥먹고 숨쉬는 사이에도 해이해지지 않고 있다. 이제 만일 한 글자를 과거의 것에다가 가호(加號)한다면 효(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과거의 일은 예(禮)에 있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데, 만일 감당할 수 없는 호(號)를 받는다면 충(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번 이 일이 있음으로부터 아직까지 우리 자성(慈聖)께 아뢰지 않았는데, 이제 윤종(允從)하게 되면 반드시 동조(東朝)께도 호(號)를 올려야 된다. 자식된 도리는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것인데, 나로 인하여 나의 자성을 슬프게 한다면 또한 효(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국인(國人)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신(信)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성심(誠心)이 미덥지 못하게 되어 정청(庭請)에 참여한 백료(百僚)들과 서리(胥吏)·여대(輿儓)가 반드시 이마를 찡그리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렇게 고집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피곤하게 만드는가?’ 하면, 인(仁)을 지킨다고 할 수 있겠는가? 효·충·신·인이 모두 땅을 쓴듯이 없어지면 장차 무슨 얼굴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진실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다. 속히 정청을 중지하고 나의 원량(元良)을 보호하라."
하였다.
종신(宗臣)들이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정청에 대한 유시에서 다 하유하였다. 아! 나의 종신들은 나의 고심(苦心)을 알아서 정청을 중지하고 돌아가서 쉬라."
하고, 하교하기를,
"임금은 날마다 시달리고 백관들은 날마다 지치는 상황에 있는데 식견이 있는 사부(士夫)들도 이제 또한 이렇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소일(消日)할 거리가 되는 것이겠는가? 마음이 바야흐로 답답하니, 내일은 마땅히 구저(舊邸)에 한 번 임어하여 이 회포를 펴겠다."
하였다.
승지들이 합문(閤門)에 나아와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한번 구저(舊邸)에 임어하였다가 돌아오려 하니, 내리는 이 글을 보고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감히 자성(慈聖)께 앙달하지 못하였다.〈구저(舊邸)로 가려는 것은〉 나의 슬픈 회포를 이로 인하여 개도(開導)하려는 것인데, 승지가 어떻게 감히 저지할 수 있는가?"
하고, 하교하기를,
"모든 크고 작은 일은 반드시 자성께 아뢰었었는데, 이것이야 장차 무슨 얼굴로 아뢸 수 있겠는가? 구저에 가서 대신 나의 회포를 읍주(泣奏)하려 하는데, 신하가 어떻게 감히 저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다시 2년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늦을 것이 있겠는가? 대의(大義)를 밝히려 하면서 임금을 무식(無識)하게 만들고 깊은 슬픔에 젖게 만드니, 더더욱 개연(慨然)스럽다. 굳은 뜻이 가슴 속에 있어 부질없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나, 다시 어떻게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하교하기를,
"이제 이미 몇 년이 되었는데 먼저 하지도 않고 뒤에 하지도 않은 채 바로 금년에 청하니, 임금을 위하여 대의를 밝히려는 데 있어 4년을 기다릴 것이 뭐 있는가? 내가 비록 노쇠하기는 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은 반드시 자성께 여쭈어야 하는데, 내가 장차 무슨 얼굴로 아뢸 수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나를 대우하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고 또한 후하지도 못하다."
하였다.
예방 승지가 다시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내가 여러 날 동안 품고 있는 마음을 어찌 경솔히 먼저 말할 수 있겠는가? 예방 승지가 탐지하려고 온 것이니, 물러가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정경(正卿) 이상이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의 구대(求對) 때 이미 다 하유했는데, 어찌하여 다시 마음을 돌리려 하는가? 청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다시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하유했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다시 청대하고, 또 아뢰기를,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세 개의 ‘귀(歸)’ 자와 ‘구저(舊邸)’라는 두 글자는 끝내 승수(承受)하기 어려우니, 황공스럽습니다만 환납(還納)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삼가 정청(庭請)에 대한 비답을 받들었는데, 정원에 내린 하교에 미쳐서는 황송하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잇달아 답답하다 하시니 감히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청대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처음 비망기를 정원에 내렸었는데, 정원에서 환납했기 때문에 경 등에게 내린 것이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처음 내린 비망기의 내용 가운데 상단(上段)의 ‘귀(歸)’ 자는 감히 받들어 들을 수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하문(下文)의 두 ‘귀(歸)’ 자도 끝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따라서 정원에서 환납한 것은 옳은 조처였습니다. 신 등도 또한 어떻게 감히 봉승(奉承)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귀(歸)’ 자가 비록 긴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경 등이 이미 이렇게 하기 때문에 고쳐서 내리게 하였다."
하였다.
빈청에서 아뢰기를,
"상하의 두 ‘귀(歸)’ 자는 비록 이미 고쳐서 내리게 했습니다만, 중간에 있는 한 ‘귀(歸)’ 자는 고쳐서 내리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귀(歸)’ 자, ‘행(幸)’ 자, ‘구저(舊邸)’ 두 자를 막론하고 결단코 감히 봉승(奉承)할 수가 없어, 이에 또 황공스럽게도 환납(還納)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기운이 지쳐 현기증이 나고 계일(戒日)이 곧 있으니, 구저에 거둥하는 것은 다시 하교를 기다려 거행하라."
하였다.
2월 27일 기미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청대(請對)하니, 답하기를,
"어제 이미 하유했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백관(百官)이 정청(庭請)하면서 아뢰니, 답하기를,
"멀리 저녁 구름을 바라보니, 스스로 눈물만 흐를 뿐이다. 내가 정한 마음이 있으니, 경 등은 스스로 쉬기 바란다."
하였다.
종신(宗臣)이 아뢰니, 답하기를,
"아! 나의 종신들은 이제 의당 식견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정청하면서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무슨 답을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종신들이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하였다.
정청하면서 세 번째 아뢰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계사(啓辭)를 도로 내린 것은 더욱 뜻밖이었습니다. 신 등이 외람되이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관을 인솔하고 정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거조입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이에 전고에 없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만번 죽을 각오로 다시 전에 올린 계사를 바치니, 바라건대, 비교(批敎)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잠을 자려고 하니, 물러가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판부사 김약로(金若魯)·정우량(鄭羽良)이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자, 대명하지 말고 서계(誓戒)091) 한 뒤에 하교하는 일이 있거든 아울러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황단(皇壇)의 서계(誓戒)를 받았다. 임금이 판위(版位)에 이르러 서니, 독서문관(讀誓文官) 서명빈(徐命彬)과 형조 판서 정익하(鄭益河)가 함께 올라갔다. 서문(誓文)을 읽고 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들어왔는가?"
하니, 승지 권일형(權一衡)이 말하기를,
"왔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은 물러가라."
하였다. 대신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삼황(三皇)에 대한 일을 오늘날 시작한 것인가? 정청(庭請)이 이 무슨 거조인가? 갑신년092) 초에 의종 황제[毅皇]의 제사를 지내려 하다가 단지 신종 황제[神皇]에게만 제사를 지냈고 처음에는 묘사(廟祠)를 세우려 하다가 단지 제단(祭壇)만 축조한 것은 일찍이 어시(御詩)를 보고 알았는데, 그때는 대체로 의종 황제가 우리 나라에 은혜를 베푼 것이 있는 줄 몰랐었다. 기사년093) 황경원(黃景源)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비로소 병자년094) 에 장수에게 명하여 우리 나라를 구원하게 한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들었을 적에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신종 황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이 비록 크기는 하지만, 이는 그래도 황조(皇朝)가 전성(全盛)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의종 황제가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에 위망(危亡)이 박두한 즈음에 있었다. 그 뒤 하성(下城)했다는 소문을 듣고서도 오히려 우리 나라를 죄주지 않고 원병(援兵)이 지체된 것을 책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 나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은혜인 것이다. 따라서 아울러 제사지내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두 황제에게 이미 아울러 제사하였으니, 황조의 일월(日月)이 다시 우리 나라에서 밝아진 것이다. 유독 태조 고황제[高皇]에게만 제사하지 않는 것이 실로 미안스러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의리에 의거 일으킨 것뿐이다. 밤중에 집서문(集瑞門)에서 이슬을 맞고 앉아서 흘러내리는 눈물로 옷깃을 적신 것은 모두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다. 황단에 친제(親祭)하는 날 내가 경과 영돈녕을 시켜 가서 봉심(奉審)하게 하였더니, 단하(壇下)에 상당한 의장(儀仗)을 설치한 것에 대해 영돈녕이 우리가 장대(張大)하게 하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하였으나 나는 개의하지 않았었다. 그날 밤 바람불고 비가 내린 데 대해서 나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뒤에 원경하(元景夏)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영돈녕이 모름지기 이날 밤의 광경을 기록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운운하였다. 내가 이를 현빈(賢嬪)에게 말하면서 그 숙부(叔父)의 전후 태도가 같지 않았던 것에 대해 웃었었다. 그때의 광경은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찌 감응(感應)하여 그랬을 리가 있겠는가? 한번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간혹 존호(尊號)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왔는데, 내가 그런 말을 듣고 매양 마음 아프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하필이면 곤전(坤殿)의 회갑(回甲)에 이 한 글자를 받으라고 하는가?"
하고, 임금이 또 김재로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무신년095) 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흔들린다. 그런데 민백상(閔百祥)이 성무(聖誣)가 아직도 신설(伸雪)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무함이 아직도 신설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것이 나의 일신에만 관계된 것이겠는가? 내가 〈뒷날 지하에〉 돌아가 배알할 면목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니, 승지 이응협(李應協)이 말하기를,
"효경(梟獍) 같은 무리가 임금을 무함한 것은 바로 유언(流言)이 원성(元聖) 주공(周公)을 무함한 것096) 과 같으니, 어찌 이 때문에 털끝만큼인들 누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 몸을 돌려 판위(版位)에 엎드려 말하기를,
"성대하게 오르내리는 삼황(三皇)의 영령이 위에 있으니, 거의 나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하니,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창황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제히 같은 소리로 극력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일어나 앉지 않았다.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이 김재로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은 견거(牽据)097) ·절함(折檻)098) 한 사람도 있는데, 오늘날의 일은 우리들이 마땅히 전하를 부축하여 일어나 앉게 하여야 합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거조가 괴이하다."
하였다. 이응협이 말하기를,
"신비(辛毗)는 일개 소신(小臣)에 불과하였어도 오히려 옷깃을 끌면서 임금에게 간하였는데, 오늘날 전하의 고굉(股肱)인 대신이 어찌 성체(聖體)를 부액할 수 없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동조(東朝)께 아뢰는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하고, 김재로와 함께 추창(趨蹌)하여 대하(臺下)로 내려가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동조에게 구계(口啓)로 청하기를,
"근래 존호를 올리는 일 때문에 백료(百僚)들이 정청(庭請)하고 있는데, 성상께서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면서 중도에 넘친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므로 신 등이 한번 자성(慈聖)께 우러러 아뢰려 했었습니다만, 황공스러워 주저하면서 아직까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황단에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한 뒤 신 등을 불러들여 성의(聖意)를 다 유시하고 나서 이어 삼황(三皇)의 위판에 청명(請命)하는 지나친 거조가 있었던 바 경신년099) 에 선원전(璿源殿)에서 청명하던 때와 똑같이 했는데, 이번에는 더욱 지나쳤습니다. 신 등이 울면서 대내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굳게 버티면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초조하고 당황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호소할 길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만 번 죽을 각오로 우러러 앙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성께서는 성상에게 간곡히 하유하시어 즉시 환궁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승지는 속히 가서 소조(小朝)께 청대(請對)하라."
하니, 왕세자가 편복(便服)으로 걸어 나와서 판위(版位) 곁에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임금이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곳에 네가 어떻게 편복으로 나올 수 있는가? 더구나 흰옷을 입고 말이다. 속히 들어가라."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이런 때에 어떻게 편복의 여부를 헤아릴 겨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모쪼록 동궁(東宮)께서 눈물을 흘리는 정상을 생각하여 속히 지나친 거조를 돌이키소서."
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비 전하(大妃殿下)께서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
"대신들이 일제히 청하는 일은 곧 전의 일을 계승하는 뜻인데, 어찌하여 이런 거조를 하시오?"
하고, 이어 승전색을 통하여 임금에게 하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단 말이오?"
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다시 극력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회주(回奏)를 쓰게 하기를,
"지극한 슬픔이 가슴에 맺혀 있다는 것을 지난 겨울 이미 아뢰었습니다. 삼황(三皇)을 함께 배향(配享)한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계술(繼述)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제 이런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만일 힘써 억지로 따른다면 무슨 얼굴로 우리 열조(列祖)들을 배알할 수 있겠으며 무슨 얼굴로 황단에 배알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소신(小臣)에게 또 더욱 깊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일찍이 경신년에 자교(慈敎)에 의거 명을 받들었었는데 오늘도 자교가 이토록 정녕(丁寧)하여 이미 위에까지 통달되었으나, 지금 신이 고집하는 소견에 있어 결코 봉승(奉承)하기 어렵습니다. 위로 50년 동안 자애롭게 키워준 은혜를 저버리게 된 것은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만, 내리신 봉서(封書)를 삼가 봉납(奉納)합니다."
하였다. 대신이 다시 동조(東朝)께 말하기를,
"성상께서 4경(四更)에서부터 판위(版位) 앞에 부복(俯伏)하시어 삼황에게 청명(請命)하고 계신데, 이제 파루(罷漏)가 지났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울면서 청하고 동궁께서 나아가 입시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도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 등은 초조하고 당황하여 자교를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성상께서는 또 결단코 봉승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회주(回奏)하였습니다. 신 등은 여기에 이르러 조처할 바를 모르겠어서 단지 자성께서 다시 간곡히 개유하여 즉시 환궁(還宮)하게 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하니, 대비전(大妃殿)께서 언서(諺書)로 답하기를,
"주상(主上)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내가 마땅히 다시 개유하여 즉시 마음을 돌리게 하겠다."
하였다. 또 언서로 임금에게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청에 대해 옛날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미 하유하였는데도 어찌하여 이렇게 지나친 거조를 한단 말이오? 마음을 돌린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전의 일을 계술(繼述)하는 효성인 것이어서 나의 뜻을 봉승(奉承)하는 것뿐만이 아니니, 즉시 마음을 돌려 따르시오. 밤 기운이 찬데 오랫동안 한데 있으면 나의 마음이 불안하니, 속히 도로 들어가도록 하오."
하였으나, 임금이 그래도 버티면서 어렵게 여겼다. 도승지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평일에 일찍이 일호도 자성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오늘 두 번에 걸쳐 내린 하교를 끝내 봉승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정우량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국가가 우선 무사한 것을 보시고서 이미 평안하고 잘 다스려졌다고 여기시어 이렇게 지나친 거조를 하시면서 돌아보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만, 사방에서 엿보는 무리가 없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누차 변고를 겪으셨는데 오늘날의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에 대해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위로 동조를 모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에게 임어하여 있으시니, 종묘 사직의 소중함이 전하의 한몸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삼황(三皇)에게 있다."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삼황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어찌 성궁(聖躬)만 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 종묘(宗廟)와 태후(太后)의 소중함은 돌보지 않으시고 삼황만을 따르시니, 신 등은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사세가 장차 들어가 동조(東朝)께 고하여 손을 끌고 들어가기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때에도 장차 삼황을 핑계대면서 봉승(奉承)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두 차례 하교를 끝내 봉승하지 않으신다면 효도하는 도리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봉승하면 이것이 효도이고 봉승하지 않으시면 효도가 아닌 것입니다."
하니, 회주(回奏)를 쓰라고 명하기를,
"경신년과 금년에 나의 자전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은 이것이 신의 불효입니다. 과거의 일을 추념(追念)하고 멀리 황단(皇壇)을 바라보니, 차마 억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자교(慈敎)의 내용 가운데 한 구어(句語)에 대해서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게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신이 감히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양건(兩件)의 자교는 절하고 봉승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자교가 재삼 내려오니, 감히 다시 거스를 수가 없어 절하고 명을 받들었다. 스스로 처음 먹었던 마음을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미 명을 받들었으나 일에는 먼저 할 것이 있는 법이다. 또 경신년의 전례가 있으니, 자전에게 진호(進號)하는 한가지 일에 대해 해조(該曹)로 하여금 먼저 거행하게 하라."
하고, 이어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김재로 등이 세 번째 대비전(大妃殿)께 아뢰기를,
"신 등이 더없이 초조하고 박절하여 사죄(死罪)를 피하지 않고 급급히 자전께 아뢰어 삼가 언서의 하답(下答)을 받았는데, 황공스럽고 감격스러워 눈물이 흐릅니다. 성상께서도 자교로 인하여 힘써 굳게 고집하던 뜻을 돌려 아울러 봉승(奉承)하셨으니, 더욱 경사스런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답하신 글을 삼가 이에 봉납(封納)하였었으니, 신 등이 분수를 범한 죄를 요행히 면할 수 없습니다. 황공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언서로 답하기를,
"주상의 이번 이 일은 듣기에 매우 놀라운 거조였다. 양건의 일에 대해서는 이제 모두 따라서 시행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다. 경 등도 틀림없이 기뻐하리라고 생각이 된다. 부득이한 데서 야기된 일에 대해 대죄할 것이 뭐 있겠는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2월 28일 경신
정우량(鄭羽良)을 존숭 도감 도제조(尊崇都監都提調)로, 이천보(李天輔)·김상성(金尙星)을 제조로, 임집(任)·조재홍(趙載洪)·성해룡(成海龍)·이관섭(李觀燮)·임서(任遾)·김효대(金孝大)·김치온(金致溫)을 낭청으로, 송창명(宋昌明)을 대사간으로, 송명흠(宋明欽)을 장령으로, 유정원(柳正源)을 지평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김상구(金尙耉)를 부교리로, 정홍순(鄭弘淳)을 부수찬으로, 이영복(李永福)을 필선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필선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사서로, 이종성(李宗城)을 우빈객으로, 정휘량(鄭翬良)을 경기 감사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윤광찬(尹光纘)을 겸우익선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오늘 새벽에 주갑(周甲)에 대한 청호(請號)를 결단코 받지 않으시겠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는 공덕(功德)을 유양(揄揚)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일 성수(聖壽)와 임어(臨御)한 해라는 것으로 다시 청하는 것이라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로 나의 뜻에 부합되는 말이다. 내가 매양 이것으로 원량(元良)을 경계하고 있다. 경의 말은 사책(史冊)에 기록할 만한 것이다. 경은 모쪼록 오래 세상에 남아서 반드시 간쟁해야 한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의 옥책(玉冊)·옥보(玉寶) 장황(粧䌙)100) 과 싸는 보자기는 모두 면주(綿紬)로 하라. 의장(儀仗)과 연여(輦輿)는 일체 지난 봄의 예(例)에 의거하여 수보(修補)하게 하라. 자전과 중궁전에게 책보(冊寶)를 올리고 하례(賀禮)를 받는 처소(處所)는 한결같이 경신년101) 의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되, 헌가(軒架)와 고취(鼓吹)는 진설하지 말게 하라.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아울러 거행하지 말게 하고 단지 전문(箋文)만 봉상(封上)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리 자성(慈聖)의 겸손해 하는 덕을 몸받고 한편으로는 내가 억지로 따르는 뜻을 펴게 하라."
하였다.
북관(北關)의 받아들이지 못한 해세(海稅)를 탕척(蕩滌)시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진구(賑救)를 감독하라고 특명(特命)하고서 한편으로 세금을 받아들이는 것은 백성을 위하는 뜻이 아니다. 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종성(鍾城)이 네 고을과 기타 더욱 극심한 고을의 금년 해세 가운데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울러 일체 탕척시키라."
하였다.
2월 29일 신유
빈청(賓廳)에서 호(號)를 의논하여 올렸는데, 존호(尊號)를 장의 홍륜 광인 돈희(章義弘倫光仁敦禧)라고 가상(加上)하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존호는 수창(壽昌)이라고 가상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존호는 장신(莊愼)이라고 가상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규(圭)를 잡고 판위(版位)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니, 선전관(宣箋官)이 전문(箋文)을 읽었다. 좌통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내려와서 지영(祗迎)하는 위차로 내려왔다. 지영을 마친 다음 백관이 월랑(月廊)에서 행례(行禮)하였으며, 임금이 여(輿)를 타고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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