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6권, 영조 28년 1752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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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계해

경상 수사가, 북관으로 곡물을 운송하던 배가 파손되어 익사자가 6인이고 손실된 곡물은 9백 곡(斛)이라고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 우리 북도 백성은 굶주림을 참아가며 곡식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데 남도 백성은 이 일 때문에 고기밥이 되었구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슬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다. 익사자의 부모와 처자를 후히 구휼한 뒤에 계문(啓聞)하고 운송한 형편과 배가 통과한 소식과 곡물의 도착 여부를 즉시 계문하라는 뜻으로 3도의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3월 3일 갑자

약원(藥院)에 명하여 모두 직숙하게 하였는데, 행 부사직 홍봉한(洪鳳漢)도 함께 직숙하였다. 왕세손의 환후가 위중하였기 때문이었다.

 

삼도 통제사 구선행(具善行)이 상서하기를,
"신의 진영이 있는 곳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사방이 솔밭이어서 본래부터 곡물이 생산되는 땅이 없었으니, 참으로 백성이 살 만한 곳이 못됩니다. 또 한산도(閑山島)는 끝없는 바다를 가리우고 견내량(見乃梁)은 그의 인후(咽喉)를 이루었으며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하고 험한 돌섬은 바둑처럼 널려 있어 본시 배를 달릴 만한 곳이 못됩니다. 그 지세를 보자면 적이 들어오는 첫 길목이고 그 형세를 논하자면 삼도의 요충지(要衝地)이니, 그대로 큰 관방(關防)을 여기에 설치하고 널리 살아갈 길을 열어 어염(魚鹽)의 이권을 전속시키고 상선(商船)을 관장하며 백성을 초래(招來)하여 큰 진보(鎭堡)를 만든 것은 오로지 넉넉한 이웃 고을과 연계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버리지 말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오래도록 평화롭자 인심이 안일에 익숙하여져 삼남의 바다 이득[海利]이 삭감하지 않아도 자연히 축소되니 진영의 모양이 파탄되고 군민(軍民)의 실업자가 10에 7,8을 차지하였으므로, 식자들의 걱정과 탄식을 자아낸지 이미 오래입니다. 가만히 삼가 생각하건대, 군포(軍布)를 감면해 준 뒤로 전국의 군민은 너나없이 은혜를 입어 봄 기운과 단비와도 같은 혜택이 사망자와 유아에게까지 미치고 있건만, 유독 신의 진영만은 치우치게 삭감을 당하여 4천 호(戶)의 군민이 먹고 살 길이 끊기고 살고 싶은 마음마저 잃어 거개가 확고한 의지가 없는 것이 마치 물이 스며드는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작년 겨울 이후로는 도망자가 잇달아 이보(里報)가 날마다 쌓이는데, 신이 시험 삼아 계산해 보게 하였더니, 몇 달 사이에 이미 3백여 호를 잃었고 남아 있는 사람도 거의 짐을 꾸려 짊어지고 섰다시피 하고 있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형편이 장차 1년이 채 못되어 모두 비어 버리겠습니다. 신이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만반으로 개유하니 장교와 군민이 울면서 고통스럽고 각박한 실상을 호소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허다한 군민이 이미 경작하거나 누에를 칠 땅이 없어 평생의 입고 먹는 것을 전부 바다의 이득에만 맡겼었는데 일체를 삭파하여 명맥이 모두 끊겼으니, 비록 일시의 안위(安慰)하는 정사가 있다손 치더라도 결코 보존할 형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 견사(繭絲)102)  와 보장(保障)은 옛부터 나라의 급선무로서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견사를 꼭 해야 하지마는 보장도 생각치 않을 수 없으니, 번진(藩鎭)을 이미 폐할 수 없다 한다면 군민을 안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진영 사졸들은 손바닥만한 해변에서 달리는 살아갈 길이 없어 집에 돌아가면 고기를 잡아 생필품과 교역하고 나오면 창을 메고 경비를 서니, 비록 군병을 바다에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이 어찌 성세(聖世)의 훌륭한 계책이라 아니하겠습니까? 어염은 조세(租稅)와는 다르고 군정(軍政)은 민생고보다 급한 것이니만큼 나라에서는 의당 참작하여 구별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는데도 침탈을 임의로 하게 하여 바다 관방의 중진(重鎭)을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하니, 국방을 튼튼히 하는 도리에서도 이럴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 밖에도 신은 또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접때 7진(鎭)을 혁파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조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당초의 설치는 국가에서 지난 일을 되새기고 뒷일을 염려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그 의도가 참으로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배치한다고 해서 낱낱이 힘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적이 많으면 이쪽의 힘이 분산된다는 것은 전부터 전략가들이 원리로 여겨 온 바이니, 지금 비록 이에서 더하여 설치한다 해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하루아침에 혁파하기를 갑자기 이토록 하였으니 그 걱정되고 한탄스러움이 어찌 오늘에만 그치겠습니까? 옛날 명(明)나라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계진(薊鎭)에 총독으로 있을 때에 날마다 장병을 접촉하여 집안 살림살이를 묻고 이야기가 질병과 고초에 미치면 몇 줄기 눈물을 흘리며 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탄식을 하였다 하는데, 지금 신이 처한 이 곳이 계진과 다름이 없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는 정성은 일찍이 군민이 굶주리고 배부른 데에 따라서 조금도 해이하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마는, 눈앞에 보이는 것은 슬프고 애처로운 것 아님이 없으니 아픈 마음이 어찌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는 정도뿐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옛사람이 경원(涇原)103)  의 산천을 그려 낸 뜻을 본따서 도본(圖本)을 써서 만들어 책자를 첨부하여 백배하며 재계 목욕하고 우러러 예감(睿鑑)을 더럽히오니,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조종조에서 웅번(雄藩)을 설치하고 군민을 자식처럼 보살핀 지극한 뜻을 생각하시어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서의 내용을 비국으로 하여금 대조(大朝)께 여쭙게 하겠다."
하였다.

 

3월 4일 을축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해에는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해 위에는 관(冠)이 있었다.

 

왕세손이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薨逝)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달 사이에 며느리를 잃고 손자를 잃었으니, 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랴? 세손이 지금 3월 초4일 묘시(卯時)에 훙서하였다. 예조에서는 자세히 알아 두라."
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이번의 왕세손 초상에 대전(大殿)·대비전(大妃殿)·중궁전(中宮殿)·왕세자빈궁(王世子嬪宮)에서는 대내(大內)에서 거애(擧哀)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므로 전례대로 마련하여 들이는 뜻을 감히 여쭙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세손궁의 문밖에 곡림(哭臨)하고 파산(罷散)한 조관(朝官)과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도 역시 소복(素服)으로 궐문 밖에서 회곡(會哭)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궁내의 백관은 이미 천담복으로 곡림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도의 크고 작은 사신(使臣)과 외관(外官)은 문서가 도착하는 날짜에 각자 그곳의 정청(正廳)에서 천담복으로 거애함과 동시에 전례대로 동궁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위(陳慰)하고 조장(弔狀)을 올려 거듭 조위하게 할 일을 행회(行會)104)  하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상식(上食)할 때나 제(祭)를 올릴 때에는 종친과 공신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이 윤번으로 직숙(直宿)하는 규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전례대로 해부(該府)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종부시(宗簿寺)에서 말하기를,
"이번에 혼궁(魂宮)에 입직할 종실 4인과 상식할 때와 제를 올릴 때에 집례할 충의(忠義) 한 사람을 전례대로 차출하라고 하셨는데, 해당된 품계가 모자라니 종2품 이하를 통틀어 의망(擬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에서 말하기를,
"대전관(代奠官)을 수묘관(守墓官)의 예에 의하여 종2품으로 차출하라고 윤허를 내리셨는데, 종친부에서 이문(移文)하기를, ‘종2품 중에는 가합한 사람이 없으니 종1품으로 의망하여 보내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써 들입니다."
하였다.

 

황단(皇壇)의 제향을 물려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대보단(大報壇)의 대향(大享)을 초6일에 행하기로 택일하여 들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제향을 파하는 것이 옳은지 섭행(攝行)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를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물릴 수는 있어도 폐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상(國喪)이 있을 때에도 사직(社稷)의 제향을 행하는가?"
하니, 김재로가 그렇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가 될 만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기를 초10일에 섭행할 것이니 제관을 오늘 차출하여 바로 치재(致齋)하게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약원의 제조·예조 당상·호조 판서·어영 대장·강서원(講書院)의 관원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곡하면서 말하기를,
"두 해에 걸쳐 모두 이러하니,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의 복제(服制)는 상복(殤服)으로 낮추어야 할 것인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남자는 직첩을 받으면 상(殤)이 될 수 없다고 상례(喪禮)에 실려 있습니다. 위호(位號)까지 이미 정해진 뒤인데 어떻게 상복으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의 복제는 마땅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무신년105)  의 예보다 한 단계 낮추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전(各殿)의 복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의례(儀禮)》에 이르기를, ‘적자(適子)가 있으면 적손(適孫)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준거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에게는 적자가 되느냐?"
하니, 행 부사직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동궁에게 압존(壓尊)이 되니, 적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체모는 비록 있어야 하나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다. 빈궁(殯宮)·예장(禮葬)·묘소의 3도감(都監)을 합하여 하나의 도감으로 만들고 각 1인씩을 두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홍상한(洪象漢)·홍락성(洪樂性)·홍인한(洪麟漢)·홍락인(洪樂仁)을 모두 집사(執事)로 정하여 입참하게 하고 어영 대장도 함께 입참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존숭(尊崇)하는 일은 도감에서 장사를 치룬 뒤에 다시 날을 받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관(禮官)과 시강원의 관원에게 복제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원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대공(大功)의 복제로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이 마땅할 것 같다, 옛 요속(僚屬)들의 복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신년에는 내가 기년(朞年)의 복을 입었는데 그때에 동궁의 관원들도 모두 임금의 복제에 따랐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번에도 이 복제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승정원·홍문관·시강원·익위사·강서원(講書院)·위종사(衛從司)에서는 성복(成服)하기 전에 모두 입직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께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고 나와 곤전(坤殿)은 대공의 복을 입고 세자와 빈궁은 기년복을 입어야 하겠다. 뭇 신하들은 예(禮)에 복이 없으나 명호가 정해진 뒤라서 빈궁의 상사(喪事)와는 차이가 있으니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에 백관은 천담복으로 배제(陪祭)하고, 입시(入侍)에는 대공의 복제와 마찬가지이니 현빈(賢嬪)106)  의 상 뒤에 입시하였을 때와 같이 하며, 강서원과 위종사에서 입직할 때나 배제할 때에는 천담복을 입고 평상시에는 딴 때처럼 상복(常服)을 입도록 하라. 강서원과 위종사는 졸곡을 기다려 혁파하고, 혁파하기 전에는 사부(師傅)에 결원이 생겼다 하더라도 우제와 졸곡에 후임을 내지 말며, 대·소상(大小祥)에는 무신년의 예대로 세손의 옛 요속이 배제하도록 하라. 이번에는 기왕 무신년과는 차등을 두기로 하였으나 체모는 있어야 하니, 무신년에는 복이 다한 뒤 대상에 2품 이상이 배제하였으나 이번에는 소·대상에 대신과 정2품 이상만 천담복 차림으로 배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라에 역사(役事)가 자꾸 겹치니, 경기 백성이 민망스럽구나. 이번의 제물 값을 경기 감영에 배정하지 말아야 하겠는데, 이제 듣건대, 이 배정의 명칭을 외방에서는 ‘백성의 부조(賻助)’라고 일컫는다 하니, 그 명칭이 바르지 못하다. 이것은 조사(詔使)와 산릉(山陵)의 일은 대동법(大同法)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국상이 났을 때에 모든 물력을 각 고을에 배정하였던 것인데, 경자년107)   이후로는 민폐를 생각하여 공인(貢人)으로 하여금 먼저 바치게 하고 공물(貢物) 값의 명목으로 여러 도에 배정하였으니, 이 역시 하나의 대동법인 것이다. 이 뒤로는 제수(祭需)의 공가(供價)라고 부르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연여(輦輿)와 의장(儀仗)은 보수하지 말고 그대로 쓰고 책인(冊印)의 상(床)도 호조의 옛것을 가져다 쓰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혼궁(魂宮)을 이미 강서원으로 정하였으니 혼궁의 중관(中官)108)  은 위종사에서 접거(接居)하고 종실과 충의는 승문원에서 접거하며 헌관청(獻官廳)과 전사청(典祀廳)은 효순(孝純)109)   혼궁의 헌관청과 전사청을 함께 쓰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빈궁(殯宮)의 진향(進香)은 의정부와 6조의 관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나, 종친부와 충훈부에서도 진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의시(議諡)는 성복이 끝난 뒤에 바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사시(巳時)에 목욕의 의식을 행하고 오시(午時)에 염습(殮襲)을 하였는데, 시임·원임 대신과 도감의 당상 및 강서원과 위종사, 승지와 사관이 입참하였다. 염습에는 곤룡포(袞龍袍)와 조라(皂羅)110)  의 수관(首冠)·대대(大帶)·충이(充耳)111)  ·멱목(幎目)112)  ·악수(握手)·신[履]을 썼으며, 염습이 끝나자
이불로 덮었다. 대전관(代奠官)이 습전(襲奠)을 행하자 참찬관(參贊官)이 쌀이 담긴 주발과 구슬이 담긴 소반을 가져와 무릎을 꿇고 바치니 내시가 손을 씻은 뒤에 받아 와 상의 동편에 나아가 서쪽을 바라보고 꿇어앉아 베개를 빼고 수건을 거둔 다음 숟가락으로 쌀을 조금 떠서 입의 오른쪽에 채우고 구슬 하나를 왼쪽에 채웠으며 가운데에도 같은 식으로 하고 이불을 덮으니, 슬피 곡하고 영좌(靈座)를 설치하였다. 내시가 입던 옷을 수북히 내어놓고 작은 함에다 담았으며, 흰 비단 한 필로 혼백(魂帛)을 만들어 옷가지 위에 얹고는 함을 받들어 교의(交椅)에 안치한 다음 향안(香案)을 그 앞에 설치하고 백선개(白扇蓋) 각각 두 개씩을 만들어 좌우로 설치하였으며, 세수하고 머리를 빗는 기구를 평시와 다름없이 진열한 뒤에 비로소 조석전(朝夕奠)과 상식(上食)을 설행하였다.

 

명정(銘旌)을 만들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홍봉한이 금박의 예서체(隷書體)로 ‘왕세손 재실(王世孫梓室)’이라고 쓴 다음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어 영좌(靈座)의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체모는 유지되어야 하나 마땅히 차등을 두어야 하고 또 몇 달 동안에 3도감(三都監)을 연속 설치하여야 하니, 민폐도 돌보아야 하겠다. 모든 일에 내가 절약하여야 하겠지만 도감에서도 생략하기에 힘써 세 살된 나의 손자를 저버림이 없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빈궁(殯宮)은 숭문당에다 만들고 강서원과 위종사에서는 복제가 끝나기까지 조석으로 진참(進參)하라."
하였다.

 

김약로(金若魯)를 빈궁·예장(禮葬)·묘소(墓所) 도감의 도제조로, 원경하(元景夏)·김상성(金尙星)·이익정(李益炡)을 제조로, 동양군(東陽君) 이당(李㭻)을 수묘관(守墓官)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를 보덕으로 삼았다.

 

3월 5일 병인

하교하기를,
"세손궁(世孫宮)에 올리던 모든 물품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전례대로 3년을 한하고 진상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졸곡(卒哭) 전에도 크고 작은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문의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번의 상례는 무신년113)  에 비하면 차등이 없지도 않은데, 종묘의 제향을 오래 중지하는 것은 사체로 보아 중대하고 곤란하니 작년 겨울의 예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영부사 유척기(兪拓基), 영돈녕 조현명(趙顯命), 판중추 김약로(金若魯)·정우량(鄭羽良)은 영의정의 헌의와 같았으니, 상재(上裁)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헌의한 대로 시행하라고 하교하였다.

 

묘시(卯時)에 소렴(小斂)을 행하였는데, 시임·원임 대신과 도감의 제조, 강서원과 위종사, 승지·사관이 입참하였다. 소렴교(小斂絞)는 백색 방형(方形)의 사주(紗紬)를 썼으며 이불로 염하였는데, 강사포(絳紗袍)의 염의(斂衣)는 19칭(稱)이었다. 염이 끝나자 이불로 덮고 병풍을 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부복(俯伏)하여 곡하다가 곡을 멈추고 재배하였다. 내시가 찬수를 받들어 영좌 앞에 진설하니, 대전관이 소렴전(小斂奠)을 지냈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 3도감의 당상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묘소에 차등을 두라고 이미 하교하였으니, 문석(文石)·망주(望柱)·장명등(長明燈) 외에는 단지 호석(虎石)과 마석(馬石)을 각각 한 쌍씩만 설치하되 종전의 제도에 비하여 모두 4분의 1을 감하고 혼유석(魂遊石)과 표석(表石)도 두 자[尺]를 감하며 정자각(丁字閣)의 길이와 넓이도 4분의 1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감의 당상 2인을 더 내라고 명하여 박문수(朴文秀)와 홍상한(洪象漢)을 차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봉폐관(封閉官)은 지평이 할 것인가? 지난날에는 봉폐관의 이름을 써 넣고 근봉(謹封)이라 하였는데 괴이한 일이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혼인과 상사(喪事)는 사람의 대사(大事)이니, 품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신 등록(戊申謄錄)에는 사대부 집안의 혼가(婚嫁)·장제(葬祭)를 모두 졸곡 뒤에 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번에는 무신년에 비하여 차등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의 예대로 공제(公除)가 지난 뒤에 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3월 6일 정묘

대렴(大斂)을 행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도감의 제조, 강서원과 위종사, 승지와 사관이 입참하였다. 대렴교(大斂絞)는 백색 방형의 사주(紗紬)로 하였고 염금(斂衾)을 썼으며 면복(冕服)의 산의(散衣)114)  는 90칭(稱)이었다. 종친과 문무 백관이 들어와 자리에 나아갔다. 염이 끝나자 교(絞)를 묶었고 보쇄(黼殺)로 발에서부터 씌워 올린 뒤에 금모(錦冒)로 머리에서부터 씌워 내려 일곱 매를 묶었다. 재실(梓室)을 받들고 들어와 영상(靈床)의 남쪽에 놓고서 시신을 받들어 재실에 넣고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네 귀퉁이에 넣은 다음 개(蓋)를 덮고 임(袵)을 설치하여 그 합봉된 곳 주위에 옻칠을 발라 가늘게 문지른 뒤에 수보(繡黼)의 관의(棺衣)를 덮고 병풍을 쳤다. 종친과 문무 백관이 곡하고 재배가 끝나자 내시가 제수를 받들어 영좌 앞에 진설하니, 대전관이 대렴전(大斂奠)을 행하였다.

 

우익선(右翊善) 윤광찬(尹光纘)이 아뢰기를,
"궁료(宮僚)의 복제를 이미 바르게 개정하였으나, 궁료는 정신(廷臣)과는 차별이 있는데 전연 복이 없다는 것은 정리나 격식으로 헤아려 보아도 몹시 흠결이 되는 일입니다. 영상이 조금 전에 송(宋)나라 효종(孝宗) 때에 장문 태자(莊文太子)의 요속(僚屬)들이 입은 복제로 참조하여 증거할 만한 대목을 찾아서 드러내어 의논한 바가 있었으므로 감히 이렇게 앙달하오니, 다시 대신과 예관에게 하문하시어 처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과 원임 대신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제는 대소를 막론하고 참최(斬衰)나 자최(齊衰) 이외에는 원래 대공(大功)·소공(小功)이나 시마(緦麻)의 복제가 없는 것입니다. 당초에 결정한 궁료의 대공(大功) 복제는 바르게 개정한 것이 참으로 마땅하였습니다마는, 전연 복이 없다는 것은 조금 어떠할까 합니다. 기왕 참조하여 증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비록 삼대(三代)115)  의 예는 아니오나 본받아 행하여 자최 3월로 정하고 장례가 끝난 뒤에 벗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판부사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신의 의견도 영상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궁관(宮官)이 나가서 합문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자, 윤광찬이 두 원임 대신에게 문의하고 아뢰기를,
"영부사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비록 송나라 때의 일로 보더라도 뭇 신하들은 다만 성복(成服)한지 하루 만에 벗었는데 궁료만이 자최 3월을 입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예(禮)에도 고거할 만한 것이 없고 송나라 예도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닌데, 이제 와서 새로운 준례를 만든다는 것은 중난할 것 같고 이미 정한 궁료들은 천담복으로 입직하고 곡림(哭臨)한다는 절차도 조정의 신하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니, 그대로 행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하였고,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이는 비록 근거할 만한 고례(古禮)는 없으나 송나라 예제 역시 참조할 만한 것이므로 신의 의견은 영상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궁의 요속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영상의 논의에 따라 자최로 정하여 장례가 끝난 뒤에 벗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지금 3월 초8일에 있을 선잠제(先蠶祭)는 바로 상사일(上巳日)에 설행하는 제사입니다. 기왕 공제(公除)가 끝나기 전에 있어서 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등록을 상고해 보니 무술년116)   2월 상무일(上戊日)에 사직제(社禝祭)를 행하려 하다가 마침 세자빈 심씨(沈氏)의 빈실(殯室)이 마련되기 전이라서 중무일(仲戊日)로 물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의 선잠제도 이 예대로 20일의 중사일(仲巳日)로 물려서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찬실(欑室)을 숭문당(崇文堂)에다 설치하여 재실(梓室)을 찬실에 안치하고 화보(畵黼)의 큰 관의(棺衣)로 덮었다. 영좌(靈座)를 찬실의 남쪽에 설치하고 악장(幄帳)을 찬실의 동쪽에 설치하여 악장 안에 영침(靈寢)을 설치하고 교명안(敎命案)을 영침의 남쪽에 둔 다음 대전관(大奠官)의 성빈전(成殯奠)을 의식대로 행하였다.

 

3월 7일 무진

사시(巳時)에 성복(成服)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합문 밖에 나가 꿇어앉아서 성복하기를 계청하니, 상의원의 관원이 옷을 올렸다. 임금은 대공(大功)의 복을 갖추고 왕세자는 기년(朞年)의 복을 갖추었다. 내시가 예찬(禮饌)을 가져와 영좌 앞에 진설하고 종친과 문무 백관이 문외위(門外位)에 들었다. 내시가 전하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가 앉아서 곡하였고, 왕세자도 자리에 나가 앉아서 곡하였다. 곡이 그치자, 백관이 곡하고 재배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대전(大殿)의 대공복(大功服)은 의상(衣裳)과 관(冠)에 수질(首絰)·요질(腰絰)·포대(布帶)·백피화(白皮靴)인데, 9일 동안의 공제(公除) 전에 시사복(視事服)은 참포(黲袍)117)  와 익선관(翼善冠)에 오서대(烏犀帶)이고 공제 후의 시사복은 양(揚)118)  이 없는 흑원령포(黑圓領袍)에 익선관·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이며, 연거(燕居) 때에는 흑두면(黑頭冕)에 소복(素服)과 소대(素帶)로 9개월에 마친다. 중궁전의 대공복은 대수(大袖)·장군(長裙)에 개두(蓋頭)·두수(頭𢄼)·포대(布帶)·백피혜(白皮鞋)인데, 9일 동안의 공제 후에는 짙은 옥색의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대(帶)와 피혜로 9개월에 마친다. 왕세자의 자최 기년복은 의상과 관에 수질·요질·교대(絞帶)·백피화인데, 13일 동안의 공제 전의 시사복은 백포(白袍)·익선관·오서대이고 공제 후의 시사복은 익선관·참포·오서대이며, 연거 때에는 흑두면(黑頭冕)·백의(白衣)·백대(白帶)로 기년에 마친다. 왕세자빈의 자최 기년복은 대수·장군·개두·두수·죽차(竹釵)·포대(布帶)인데, 13일 동안의 공제 후는 백포의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백피혜로 기년에 마친다. 대왕 대비전의 시마복(緦麻服)은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대와 백피혜인데, 3일 동안의 공제 후에는 짙은 옥색의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대와 피혜로 3개월에 마친다. 세자궁과 빈궁의 상궁(尙宮) 이하의 복은 각각 위의 복에 따른다. 세손궁에 소속된 상궁 이하의 복은 참최(斬衰) 3년이고 수묘관(守墓官)과 시묘관(侍墓官)의 복도 참최 3년이며, 세손궁의 내시·반감(飯監)의 복도 참최 3년인데, 의상과 관에 수질·요질·교대를 하고, 공복(公服)은 천담복·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피화이며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될 때에는 언제나 최복을 입는다.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은 생포(生布)의 직령의(直領衣)·두건(頭巾)·마대(麻帶)·백승혜(白繩鞋)로 3년에 마친다. 세자궁과 빈궁의 내시 이하 각 차비인은 각각 위의 복에 따른다. 강서원·위종사의 관원은 자최 3월인데, 의상과 관에 수질·요질·포대(布帶)·백피화이고 무릇 상사에 관계될 때에는 최복을 입으며, 입직할 때에는 천담복을 입고 장례가 끝난 뒤에 벗는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초종(初終)과 성복에 곡림할 때와 무릇 배제(陪祭)할 때에는 천담복에 오사모와 흑각대를 착용하며 대조(大朝)와 소조(小朝)에 진현(進見)할 때와 평상시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대상(大祥)과 소상(小祥) 때에는 대신과 정2품 이상만 천담복 차림으로 배제한다.

 

3월 9일 경오

혼유석(魂遊石)은 길이는 5척, 넓이는 8촌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영돈녕 조현명(趙顯命)과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세손궁의 유모가 근실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날 대사헌 김광세(金光世)가 상서하기를,
"안아서 일으키고 젖을 먹여 기르는 일은 참으로 십분 조심스럽게 하여야 하는데도, 보모(保母)가 되어 함부로 술을 마시어 중간에 교체하는 일이 있게 하였고 지금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유사(攸司)에게 내려 율대로 단죄하여야 마땅합니다. 또 의관(醫官)의 무리는 정성을 다해서 맞는 약을 잘 살펴서 쓰지 못하고 마침내 이렇듯 망극한 일을 당하게 되어 여론이 통절하게 여기고 있으니, 나문(拿問)하여 엄히 처벌해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유모에 관한 일은 대조(大朝)께서 하교가 계실 것이다. 의관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도헌(都憲)의 말이 사리에는 당연하나, 이 사람이 이미 8모(八母)119)  의 반열에 있으니 지나친 처벌은 내리고 싶지 않다. 계영(桂永)을 삼수부(三水府)에 정배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번 일은 실로 나라의 액운이다. 내의원에서 이 일로 대명(待命)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고, 아울러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차비문에서 대령(待令)하고 있는 의관은 국문을 하지 말고 파직만 시키라고 하였다.

 

3월 10일 신미

빈청에서 세손의 시호를 의소(懿昭)로 의정하였다.

 

이날 밤 2경(二更)에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이 청대하고 입시하여 말하기를,
"신의 아우 정휘량(鄭翬良)이 경기 관찰사로 감영에 있어 그 집은 줄곧 비었는데, 길가 대석(臺石) 위에 봉서(封書) 하나가 있는 것을 비녀(婢女)가 가져다가 신의 제수(弟嫂)에게 주니 제수가 바로 신의 집으로 보내 왔습니다. 겉봉에 ‘정 판부사댁 친집 개탁(鄭判府事宅親執開坼)’이라고 썼는데, 펴서 보니 내면의 말 뜻이 흉패하여 잠시도 머물러 둘 수 없어 바로 궐하에 달려와 감히 이렇게 청대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친히 펼쳐서 본 뒤에 하교하기를,
"극히 흉참하다.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도성 안에 필시 요사스러운 자가 있어 우리 나라를 어지럽히려고 한 짓이다. 장신(將臣)에게 명하여 심력을 다해 기포(譏捕)하여 기어코 찾아내게 하라."
하였다.

 

3월 11일 임신

관상감의 당상(堂上)이 산을 살펴보고 돌아와 입시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신이 연희궁(衍禧宮)을 봉심하고 돌아올 때에 거지를 만나 물어보니, 동북면(東北面)의 유민(流民)이었습니다. 마땅히 진휼청에서 구제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북의 굶주린 백성이 많이 도성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린이도 있다 하니, 듣기에 매우 측은하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구제하게 하되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식량을 주어 내려 보내고 어린 무리는 식량을 주어 믿을 만한 사람에게 직접 맡겨 잘 구제하게 하며, 동북의 도신(道臣)은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에 역사가 겹치니, 이 마음이 어떻게 놓이겠느냐? 경기의 제수 공가(祭需貢價)는 접때 이미 감해주라고 하였으나, 이미 민폐가 되어왔다. 어찌 경기 고을 뿐이겠는가? 여러 도의 제수 공가를 일률적으로 특감하고 그 대용은 작년의 모곡(耗穀)에서 갈라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4일 을해

하교하기를,
"이번에 행상(行喪)할 때의 배종(陪從)은 마땅히 차등이 있어야 하겠다. 5상사(五上司)120)  와 6조 당상은 각 1인, 종친은 매 품계마다 각 1인으로 하고, 사부(師傅)와 강서원·위종사의 옛 요속이 배종하게 하라. 또 혼궁(魂宮)의 제관으로는 초헌관(初獻官)은 종2품으로, 아헌(亞獻)과 종헌관(終獻官)은 당상의 정3품으로, 입묘(入廟) 후의 제관은 당하의 종3품으로 거행하되, 특별한 교시(敎示)가 있거나 차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품수(品數)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5일 병자

묘소 도감에서 말하기를,
"도제조·제조·관상감 제조 원경하(元景夏)·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남원군(南原君) 이설(李卨)이 여러 지사(地師)를 인솔하고 새로 점혈(占穴)한 곳을 봉심하니, 바로 옛 연희궁(衍禧宮)의 동남간에 있는 사축서(司畜署)의 옛터 우록(右麓)으로, 지명은 계당(鷄堂)이고 해좌(亥坐)·사향(巳向)의 자리인데, 여러 지관이 모두 길지(吉地)라고 말합니다. 재혈(裁穴)한 뒤에 준례대로 봉표(封標)하고 바자[把子]121)  로 둘러친 다음 당부(當部)의 색리(色吏)와 동임(洞任)으로 하여금 수직하게 하자는 의도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전 참판 남태량(南泰良)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재신(宰臣) 남태량은 굳은 지조로 마음을 가져 한 번 일을 당한 뒤로는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도성에 들어오려니 했는데 이미 작고하였다니, 아픈 마음을 어디에 비하랴? 규례에 따라 치부(致賻)한 이외에 본군으로 하여금 상수(喪需)와 제수(祭需)를 특별히 돌보아 주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 예조 판서를 소견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빈궁(殯宮)을 이미 강서원(講書院)에 설치하였으나 앞으로 입묘(入廟)한 뒤에는 마땅히 다시 차비문의 바깥에 하여야 할 텐데, 장례를 치룬 뒤에 혼상(魂箱)을 빈궁에 묻게 되면 불결한 생각이 있다고 하면서 윤광찬(尹光纘)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예(禮)에 「혼상을 초우(初虞)가 지난 뒤에 궁벽하고 정결한 곳에 묻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만일 길이 멀어 유관(留館)한 곳에서 초우를 지내게 되면 반드시 집에 돌아와서 삼우(三虞) 후에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집에 돌아온 뒤에 묻는다는 것이 예의 뜻은 분명합니다마는, 사가(私家)로 말하건대, 집안에 궁벽하고 정결한 곳이 꼭 있지 아니하고 또 자주 옮겨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조주(祧主)122)  를 묘소에 묻는 예를 본받아 초우 뒤에 묘의 윗쪽에 묻고 있으니, 이번에도 세속을 따르는 것이 혹 무방할 듯합니다만, 제주(題主)한 뒤에 반우(返虞)하는 수레 속에서 반드시 혼상을 신주 뒤에다 놓는 것은 예의 뜻이 미묘한데, 이는 신도(神道)로 하여금 서로 합쳤다가 옮겨지게 하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장례의 당일에 환궁하여 혼궁에서 우제를 지내게 될 듯한데 우제를 지내기 전에 곧 매안(埋安)하는 것은 예의 본의에 어긋날 것이므로 신주의 수레에 함께 받들고 궁중에 돌아와 초우를 지내고 다시 묘소로 받들고 가서 매안하여야 할 형편입니다. 그 사이의 절차가 조금은 불편할 것 같으니, 삼가 상재(上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영상의 의논이 간결하여 다시 논의할 것이 없겠고 초우 뒤에 혼상을 받들고 묘소로 가는 절차는 꼭 난처한 단서가 있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으며,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제주한 뒤에 혼상을 신주 뒤에 놓고 반우의 수레로 함께 돌아오는 것은 예의 뜻이 미묘하고 주밀하다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초우 뒤에 바로 매안하는 것은 너무 조급한 듯하니, 오우(五虞) 뒤에 거행하는 것이 예의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 〈혼상을〉 받들고 가는 절차에 있어서는 발인(發引)할 때에 비하여 약간 감손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대신의 논의가 모두 같으나 영돈녕이 헌의한 오우 뒤에 매안한다는 의견은 나의 뜻과 일치하니, 이에 의하여 거행하라. 예조 당상 한 사람이 모시고 가되 의절(儀節)은 한결같이 우주(虞主)를 봉안하는 예대로 수레는 성대하게 의장(儀仗)은 세밀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8일 기묘

빈궁(嬪宮)에게 올릴 금궤당귀산(金櫃當歸散)을 조제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빈궁이 염진(厭進)하고 어지러운 증세가 있어서 여러 의관들이 진찰하고 약을 의논하였는데, 드디어 이 명이 있었다.

 

3월 19일 경진

도감의 당상들이 입시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존숭(尊崇)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인데,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만드는 공역(工役)이 심히 어렵기 때문에 도감에서는 비록 중지하였으나 신이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감조(監造)하게 하였으니, 장례 뒤에는 바로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때가 아니라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강원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얼어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충청도·황해도의 불에 타 죽은 사람과, 경상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하였다.

 

3월 20일 신사

우빈객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상사(喪事)에는 위의(威儀)가 몹시 슬퍼서 몸이 손상되기 쉬울 것이니, 이치를 관찰하고 슬픔을 억제하는 방도는 오직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는 것뿐입니다. 원컨대, 대조께서 무신년123)  에 하신 전례를 본받아서 자주 서연(書筵)을 열어 빈료(賓僚)를 인접하고 경전(經傳)의 뜻을 날마다 마음에 새기시면, 천하의 이치가 밝아지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고 지극히 간절한 슬픔을 이로 말미암아 저절로 잊게 되어서 그 모든 일을 섭리하실 즈음에도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진계하여 권면하는데, 체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요서(妖書)를 보고부터 어찌 하루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죄인의 체포는 아직 기약이 없습니다. 종전에 이유정(李有禎)이 투서했을 때에는 두 종신(宗臣)이 나이가 어려 조정에서도 그 억울함을 알고 있었으나 단지 환난을 염려하는 도리에서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찬배(竄配)의 형전을 베풀었었는데, 하물며 이번에는 도성 안에서 버젓이 지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투서를 어떻게 믿겠느냐?"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도 이 사람이 참으로 이러한 일이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 환난을 염려하는 도리에서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자, 공조 판서 원경하(元景夏)·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승지 김선행(金善行)이 같은 소리로 앙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엄히 신칙하여 죄인을 빨리 잡는 것이 옳겠다. 경들도 생각해 보라. 자기 부형에게 욕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잡을 것을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먼저 의심을 사게 만든 사람을 다스리겠는가? 종신이 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나의 친당(親黨)에게 번번이 불측한 죄명을 가하는 것을 나는 일찍이 슬퍼하였다. 무신년 뒤에 종반(宗班)은 거의 다하였는데, 이제 또 그 여덟 자[慮患之道不可置之]를 가하여 쫓아낸다면 이것이 어진 마음이라 하겠는가? 조선에 없다면 몰라도 죄인을 어찌 끝내 잡지 못하겠는가?"
하고, 이어 포도청을 엄히 신칙하였다.

 

3월 21일 임오

남태경(南泰慶)을 대사간으로, 서명천(徐命天)을 정언으로, 임위(任瑋)를 헌납으로, 박사눌(朴師訥)을 지평으로, 권혁(權爀)을 부제학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교리로, 심발(沈墢)을 사간으로, 이중조(李重祚)를 부수찬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사서로, 이규채(李奎采)를 겸우찬독(兼右贊讀)으로, 김형로(金亨魯)를 황해 병사로, 손진민(孫鎭民)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3월 22일 계미

부교리 한광조(韓光肇)가 상서하여 의관(醫官)과 계영(桂永)을 나국(拿鞫)하기를 논하고, 또 말하기를,
"죄인 이증(李增)의 아우와 숙부에게 먼저 변방으로 내치는 벌을 시행하고, 대계(臺啓) 중에서 언급한 이증과 이관(李爟)의 일에 대하여 모두 윤허하여 따른다는 내용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단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대신에게 하교하셨는데, 어찌 이토록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회령부(會寧府)에서 진위(陳慰)의 전문(箋文)을 올리지 않은 일로 도신(道臣)이 전례를 상고해 달라는 청이 있었습니다. 삼가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거림조(擧臨條)를 상고해 보니, ‘외방의 관원은 부음(訃音)을 들은 날 소복으로 곡하고 사배(四拜)하되, 관찰사와 목사 및 2품 이상은 전문을 올려 진위한다.’고 하였고, 소주(小註)에 ‘연변(沿邊)의 관원은 거애(擧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연변의 고을에서는 비록 거애하지는 않는다 해도 전문을 올려 진위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만둘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회령부에서 거애를 하지 않는다는 문구만 의거하고 진위의 전문까지 올리지 않은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이미 대신에게 문의한 일이니, 이 뒤로는 비록 거애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위의 전문은 전례에 따라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3일 갑신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니, 예조 판서·호조 판서·병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병조 판서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이 접때 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궁인(宮人) 한 사람이 신의 집에 와서 신을 만나려 하였으나 신이 이미 입궐하고 집에 없자 얼마 동안 방황하다가 조금 전에 돌아갔다고 하기에, 신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뒤를 쫓아 탐문하게 하였더니 곧 훈련 도감의 군사인 한가(韓哥)의 누이로 도감의 별무사(別武士) 김찬이(金贊伊)와 정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김 찬이를 위하여 신에게 변장(邊將) 자리를 구하려고 하였다 하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그 오라비와 김찬이는 모두 무겁게 결곤(決棍)을 당한 처지인지라 그 궁인을 한번 품달하고 유사(有司)에게 출부하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연석에 나오지 못하여 이제야 비로소 진달하는 바입니다. 들으니, 그 궁인은 얼마 전에 이미 죽었다고는 하나, 궁인이 이러한 것은 오로지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았으니 신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죽음은 당연하다. 죽을려고 실성을 하여 그런 짓을 한 것이다."
하였다.

 

3월 24일 을유

약방에서 말하기를,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의녀(醫女)를 데리고 빈궁(嬪宮)에 입진하였는데, 물러나온 뒤에 여러 의원과 상의하여 금궤당귀산(金櫃當歸散) 다섯 첩을 더 지어 올렸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3월 25일 병술

충청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였다.

 

대사간 남태경(南泰慶)이 상서하여 의관과 계영(桂永) 그리고 이증(李增)의 아우와 숙부의 일을 논하였는데, 답은 전과 같았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함경 감사가 환자곡을 가분(加分)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지금 북도 백성이 몹시 굶주리어 거의 죽게 되어서 다른 도의 곡식까지도 옮기어 수송하는 처지이니 본도의 환자곡을 굳게 가두고만 있을 일이 아닙니다. 창고에 저장된 것 중에서 백성의 형편을 상세히 참량하여 혹 절반이 되든지 혹 3분의 1이 되든지 가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좋다고 하령(下令)하였다. 김재로가 또 투서(投書)의 시말을 말하면서 ‘글 가운데 사연의 귀추가 오로지 종신(宗臣)과 그의 아우 및 서숙(庶叔)을 안치(安置)하려는 데에 있는지는 비록 꼭 준신할 수 없으나 일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 귀양 보내지 않을 수 없기로 대조께 청하였더니,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하께서 비록 천단하실 수는 없겠으나 품달하여 엄히 처치하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고 하니, 하령하기를,
"만일 내가 품청하면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리는 일이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말을 하니, 하령하기를,
"만약 품청한다면 어찌 슬픔을 끼쳐 드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지평        박사눌(朴師訥)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증(李增)의 아우 이학(李壆)은 그 형이 범죄한 관계가 어떠한데, 버젓이 집에 있으면서 감히 죄 없는 사람과 같이 행동하여 방자하고 무엄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화란의 싹을 자르는 도리에 있어 도성 안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학을 외딴 섬에 정배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겠다고 하령하였다. 또 아뢰기를,
"변방에 정배된 죄인 계영(桂永)은 유모로서 감히 지극히 존엄하고 지극히 공경해야 할 곳에서 마음대로 술을 마시며 조심스럽게 보양하는 방도가 전혀 없어 의술의 효험이 없게 하고 마침내는 이러한 경우를 당하게 하였으니, 그 범죄를 논하자면 결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변방에 정배하는 것으로 감처함은 너무 가벼운 실수여서 여론의 분통해 함이 갈수록 더욱 격렬합니다. 청컨대 계영을 속히 법대로 처단하소서."
하자, 따르지 않겠다고 하령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간(臺諫)의 계달은 사체가 소중하기 때문에 달사(達辭)로 앙진할 때에는 감히 덧붙여 쓸데없는 말을 섞어가며 소상히 아뢰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윽이 미진한 소회가 있어 감히 다시 앙달합니다. 연사(連辭) 가운데 증(增)·관(爟)·이당(李爣) 등의 범죄는 지극히 무거워서 가장 시급히 곧 준청하셔야 할 것인데도 아직껏 윤종하지 않으시니, 여정(輿情)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또 지금 학(壆)의 일은 조사(措辭) 이외에도 현재 관계된 바가 비상하여 잠시도 도성 안에 둘 수 없는 것이 있고 대신과 중신이 진달한 바로 보더라도 그 일이 요망스럽고 흉측한 데 관계되어 시급히 엄히 처벌해야 할 정상을 저하께서도 반드시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일은 바야흐로 극비에 부쳐져 신도 그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고 또 기포(譏捕)가 한창인 때를 당하여 문자로 아뢰는 과정에서 드러난 말이 밝혀지고 누설되어서는 않되기 때문에 달사 중에 오히려 실제를 들어서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저하께서는 달사의 조어(措語) 이외에 그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함을 깊이 살피시어 빨리 처분을 내리시고 혹시라도 망설이고 의심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라는 것이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대조(大朝)께서는 비록 종실을 중히 여기는 덕성 때문에 차마 처분을 못하셨으나 환란을 염려하는 도리에서는 미리 화근을 잘라 버려야만 비록 재앙의 조짐이 있다 하더라도 화란을 조성할 길이 없어 저절로 시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일 주저하고 결단하지 못하여 앞으로 화란이 커진다면 저들이 비록 목숨을 보전하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니 찬배의 청을 어느 겨를에 논하겠습니까? 왕법은 지엄한 것이어서 절대로 사은(私恩)이 있다 하여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하께서는 이러한 내용을 대조께 앙품하시어 빨리 처단 내리시기를 절대 그만둘 수 없는데도, 아까 대신과 중신의 소청에 모두 앙품하기 어렵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저하께서 오늘날 부탁을 받으신 바가 과연 얼마나 지중하고 이 일의 관계된 바가 또한 얼마나 지대한데, 줄곧 여쭙기 어렵다고만 말씀하시고 속히 처단할 길은 생각지도 않으시니 이 어찌 저하에게 기대하였던 바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저하께서 진작하시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니 신은 그윽이 섭섭하게 여깁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오늘의 달사는 잘못되었습니다. 증·관·당의 연사에는 의당 새로운 절차의 조사(措辭)가 있어야 했는데도 단지 전에 준청하지 않으셨다는 말로만 진달하였고, 학(壆)에 관한 일의 연사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이름이 요서(妖書) 속에 들어 있었던 일을 바로 말하여야 하는데도 전연 빠뜨려버렸습니다. 대신이 과연 요서속의 말을 전혀 모르고 단지 이렇게 진달하였다면, 그가 도성 안에 버젓이 있어 온 지가 벌써 몇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찬배를 청한단 말입니까? 대신의 달사는 전부 잘못되었습니다."
하자, 박사눌이 피혐하고 체직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월 26일 정해

판윤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얼마 전에 묘소 근처의 보리를 익은 뒤에 베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이는 백성을 돌보시는 성스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외재실(外梓室)은 다음 달 초9일에 떠나야 하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 살펴보고 추산해 보니 대가(代價)는 피곡 20여 석에 지나지 않겠습니다. 이 피곡은 호조에서 나누어 주게 하고 그대로 길을 닦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한창 자라고 있는 곡식을 짓밟지 말고 잘 베어다가 말을 먹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3월 27일 무자

전 판서 정수기(鄭壽期)가 졸하였다.

 

정언 서명천(徐命天)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언로(言路)가 열리고 막힘에 달린 것인데, 오늘날의 언로는 열렸다고 하겠습니까? 막혔다고 하겠습니까? 한 마디만 입에서 벗어나면 찬적(竄謫)이 서로 잇따아서 외딴 섬이나 궁벽한 변방에서 걸핏하면 몇 년씩 지내게 됩니다. 오찬(吳瓚)같은 이는 대간에 들어온 처음부터 과감하게 말하여 숨김이 없었으니, 가위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변방 바깥에서 초혼(招魂)해 오고 이름은 죄적(罪籍)에 실려 있으니 나랏 사람이 모두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어찌 화기를 손상하는 일단(一段)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삼사(三司)의 합달(合達)은 일국의 큰 의론인 것인데 합사(合辭)한 여러 신하들을 모조리 파출하니, 이 때문에 대각(臺閣)을 그물이나 함정처럼 보고 언론을 천오두(川烏頭)124)  의 독약처럼 여기게 되어 일심으로 아첨하기만 하고 염치를 내버렸으니 세상의 도리가 이에 이르고서야 어떻게 위태롭지 않은 나라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침(問寢)하시는 겨를에 조용히 여쭈시어 전후에 언론으로써 죄를 얻은 사람을 모두 소방(疏放)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해 주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의 처분이 지극히 엄명하셨는데, 지금 재해를 만나 진면하라고 한 상소에서 사심을 품고 비호하니 매우 무엄하다."
하였다.

 

3월 28일 기축

한사득(韓師得)을 호조 참판으로, 임집(任)을 교리로, 이규채(李圭采)를 부수찬으로, 김시묵(金時默)을 문학으로, 이만회(李萬恢)를 사서로, 유건기(兪健基)를 대사헌으로,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김한철(金漢喆)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평안도의 익사자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3월 29일 경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근일에 단지 상장(喪葬)의 일에만 마음을 쓰시고 백성의 일에는 유념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3월 30일 신묘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지중추부사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였다. 홍계희가 아뢰기를,
"각릉(各陵)의 수호군이 보포(保布)의 필수를 감축한 뒤에 대충(代充)을 주지 않는다고 칭원한다 하는데, 대개 각 군문·각 아문을 막론하고 관납(官納) 이외의 자망보(自望保)는 일체를 대충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듣건대, 수릉군의 보(保)로 일찍이 6두를 바친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줄어서 3두를 받는다고 합니다. 전에 6두를 받은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6두는 본래 1필 값이었으니, 또 어찌 반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할 때에 하교하시기를, ‘만일 한 필이 못되는 일이 있으면 필시 양민이 그리로 몰리어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니, 일체를 통금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양정(良丁)의 보를 3두만 받으면 폐단이 되기 쉬우니, 전처럼 6두를 받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필 이외에 어디 달리 나올 길이 있는가? 이는 과한 짓이다.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균역 사목(均役事目)을 정서한 다음 입계(入啓)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빨리 써서 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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