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6권, 영조 28년 1752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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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진

임금이 현빈궁(賢嬪宮)의 복제를 벗었다.

 

병조의 계달로 인하여 선전관 허협(許浹)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그와 친숙한 사람이 야순(夜巡)에게 붙잡혔는데 자신이 그날 밤의 감군(監軍)으로 있으면서 되려 부하가 구속한 것을 죄로 삼아 곤장을 쳤기 때문이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서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묘소에 치제(致祭)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일찍이 내훈(內訓)에서 옛날에 돌보아 사랑하여 주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들으니 그 후손이 호서(湖西)에 유락(流落)하여 살고 있다 하니, 어찌 돈목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봉사손은 등용하고 호조로 하여금 공가(工價)를 후히 주게 하여 대군의 사우(祠宇)를 묘 아래에 세우게 하라"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크고 작은 국상 때에 멀리서 비추는 관솔 횃불이 민폐가 된다 하여 모두 없애라는 하교가 이미 계셨기 때문에 왕세손의 예장 때 소용으로 준비시킨 것은 90인에 불과합니다. 구례에는 비록 경기·충청·황해 3도의 유청군(有廳軍) 여정(餘丁)으로 사역시켰으나, 〈이번에는〉 청컨대 서울의 유청군을 사용하여 시골 백성의 폐단을 덜어주고, 도성에는 장정이 있는 집이 없으니 또한 담여군(擔轝軍)도 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일 계사

묘소 도감의 도청(都廳)과 호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도감의 낭청 홍낙성(洪樂性)이 말하기를,
"감조관(監造官)이 제상(祭床)에 덮을 상보[床巾]의 크기를 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상성(金尙星)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상보는 으레 4면(面)을 둘렀는데 이제 생초(生綃)의 큰 보(袝)로 덮는다면 낭비일 뿐더러 제도도 잘못된 것 같으니, 덮지는 말고 누르기만 하라."
하고, 이어 각 능묘의 상보를 일례로 법식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얼마 전에 묘소에 와무(瓦甒)와 와조(瓦竈)를 더 줄이라는 하교가 계셨으나, 와무는 술과 젖갈을 담는 그릇이니 예(禮)로 보아서도 폐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곡(五穀)은 벌레가 생기기 쉬우니, 정결하지 못한 것 같다. 와무는 없애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삼상(蔘商)이 만일 호조의 황첩(黃帖)도 없이 사사로이 매매하면 해당 부사(府使)는 금고(禁錮)의 율로 시행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일본(日本)의 예단(禮單)에 쓰일 삼을 채울 수 없다고 진달하였는데, 대체로 삼상이 삼을 가지고 왜관(倭館)에 가서 매매하면 이익도 많고 황첩이 없으면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몰래 잠입한 자가 많았으므로, 동래 부사가 이들을 금칙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4월 5일 병신

빈궁(殯宮)의 제조가 입시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균역청 사목을 이제 장차 재가를 받아야 하겠는데, 은결(隱結)과 진전(陳田)에 대하여 신이 일찍이 여러 차례 고집한 바는 비록 베를 감하고 대충을 주는 경우라 하더라도 사세가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국의 전부(田賦)를 이제 나누어 둘로 만들어 원결(元結)과 시기결(時起結)은 호조에 소속시키고 은결과 진전은 균역청에 소속시키는 것은 사리로 보아 참으로 거리끼게 될 것입니다. 명칭은 비록 은결이라 하더라도 다 같이 민전(民田)이고 또 꼭 매년 기경하는 것도 아닌데, 만일 은결이라 하여 급재(給災)한다면 균역청에 장차 손실이 있게 되고, 시기결이라 하여 급재한다면 정상적인 세부가 점점 줄 것이므로 호조에서는 필시 즐겨 시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소민(小民)이 된 자가 어찌 폐를 입지 않겠습니까? 의당 아울러 호조에 소속시키고 균역청에서 대충해 주되 만약 모자람이 있을 경우에는 조정에서 구획(區劃)하여 쓰게 하는 것이 명목상으로도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기는 하나 균역청을 새로 설치하고 갑자기 감하는 바가 있게 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한 번 호조에 소속시킨 다음에 호조에서는 어떻게 균역청을 위하여 굳게 지키고만 있겠는가?"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만일 균역청에 여유가 있어 호조에서 가져다 쓴다면 사리나 체면으로 보아 진실로 어떨런지 모르겠으나, 호조에 소속시키고 균역청에 갈라 주는 것은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결코 변통할 수 없으니 다 익은 밥을 어찌 놓아두고 먹지 않으려는 자가 있겠는가? 이 다음에 균역청의 여러 당상이 함께 들어와 품의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이 뒤로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월 7일 무술

진하사(進賀使)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摙) 등이 청대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연이 말하기를,
"신 등이 떠날 시기가 임박하였는데 규제 받는 일이 많으니, 마땅히 물려서 잡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만일 떠난다면 5, 6월 사이에 필시 장마를 맞게 될 터인데 방물(方物)이 비에 젖기 쉽고 또 은화(銀貨)도 도중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므로, 북경에 도착하여서도 뇌물을 써서 무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왜인들이 장기도(長崎島)에 시장을 개설한 뒤로는 동래의 은화도 떨어졌는가?"
하였다. 연이 말하기를,
"그곳에서 교역하고 우리와는 통화하지 않기 때문에 동래의 은화가 떨어진 지 이미 20년이 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월에 사신을 차출하여 가을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도 늦추는 것 같다."
하였다. 연이 말하기를,
"신이 영상 김재로(金在魯)에게 물어 보니, 말하기를, ‘무오년125)  에는 사신의 사명이 금년보다 더 무거웠지만 가을이 되어 들어갔으나 저들이 나무라는 말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 등은 우제(虞祭)·졸곡(卒哭) 때의 반열과 앞으로 있을 나라의 경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마음에 몹시 결연합니다."
하니, 임금이 7월로 물려서 날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4월 9일 경자

비변사에서 말하기를,
"호서의 잡역(雜役)을 상정(詳定)한 뒤에 온 도를 통틀어 각 고을에 배분하여 보니, 잡역이 비록 부족하여 더 지급하여야 할 곳도 있었으나 남아서 회록(會錄)해야 할 것도 있었으므로 족히 추이(推移)하여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별도로 구획할 것은 없겠습니다. 부족한 읍에 더 지급해 주어야 할 곳은 그 고을에 있는 저치미(儲置米)로 지급해 준다 하더라도, 여유가 있는 고을의 회록한 것으로 수량을 맞추어 저치에 넘기면 회록미가 부족한 것을 저치미에서 실제로 더 지급해야 할 수량은 1백 90여 석에 불과합니다. 이는 올 가을에 균역청에서 회록한 군작미(軍作米)126)  에서 나온 모곡(耗穀)으로 저치미에 충당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전라도의 익사한 사람과 아전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4월 10일 신축

왕세자가 낙선당(樂善堂)에서 여러 승지를 소접하였다. 동부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신은 지난해에 관북의 감진 어사(監賑御史)로 나갔었는데, 가만히 북도의 지세와 민속을 살펴보니, 그 곳은 오른쪽에 산을 끼고 왼쪽에는 바다를 접하여 길이는 2천여 리가 되나 넓이는 1백 리를 넘지 못하며 군읍(郡邑)이 본래 뒤섞여 늘어서지 않고 일직선으로 연도에 깔려 있습니다. 또 함관(咸關)·마운(磨雲)·마천(磨天)·귀문(鬼門)·무산(茂山) 등의 아주 험한 준령(峻嶺)이 사이에 끼어 있어 지형이 마치 병과도 같고 대통과도 같으며,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기 때문에 장마가 조금만 지면 바로 빠지지 못하여 걸핏하면 적지(赤地)를 이루니, 거슬러 따져 보면 14년 동안에 일곱 차례나 진휼을 베풀었습니다. 다른 도의 진휼은 궁핍한 백성을 가려내어 진휼하는 데에 불과하지만 북도는 한 번 흉년을 만났다 하면 아무리 잘 산다는 백성도 공곡(公穀)을 타먹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대체로 물과 육지의 배나 수레가 모두 험한 길을 넘어야 하니 사서 옮겨 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풍속도 검박하여 개를 길러 갓옷을 만들고 삼을 길쌈하여 거친 옷을 마련하며 또 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는 떡이나 술을 팔거나 신을 삼고 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삼는 자가 없으니 진휼을 베푼다 하면 반드시 식구를 세어서 주어야만 쇠약하고 수척함을 면할 수 있으므로 비용은 많이 들어도 가장 어렵습니다. 대조께서는 이러한 실정을 깊이 통촉하시고 이례적으로 구제할 길을 찾아 영남의 곡식을 발송하여 바다를 건너서 먹이셨으니 덕택이 백성들에게 입혀진 것이 깊습니다. 이 다음에 기근을 고하거든 원컨대 저하께서도 이를 깊이 유념하시어 백성을 가엾이 여기소서."
하니, 동궁이 가납하였다.

 

함경 감사 황정(黃晸)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길주(吉州)의 읍(邑)을 옮기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본 바가 있습니다. 이른바 창덕(倉德)이란 새 터는 길주의 고을 남쪽에 있는데, 산세가 우뚝 솟아 길고 넓게 서리어 뻗어 약간 갈령(葛嶺)에 가깝기는 하나 멀리 트여 있는 길거리는 사실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총괄할 수 있는 곳이니 가위 평지의 산성이라고 할 만하고, 옛 터에 비교하여도 또한 조금 낫다고 할 만한데 우물을 파서 물을 얻지 못한다 하여 문득 버려진 판국이 되었습니다. 전 목사 이방수(李邦綏)가 창덕 아래 몇 리(里)되는 곳에 터 하나를 옮겨 잡고서 정청(政廳)을 창건하다가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한 채 그대로 중단해 버렸는데, 터전을 논하자면 본 터에 비교하여 규봉(窺峰)이 흠이 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나 앞에 큰 내가 있어 이 다음에 물이 부딪쳐 무너질 염려가 반드시 있을 형세이고, 또 그 지형이 낮아 지어 놓은 새 정청이 이미 앞으로 기울고 뒤로는 무너졌으니, 이로 보아서도 읍기(邑基)로 합당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온 고을 백성이 신이 다시 새 터를 건설한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 풀이 죽어 심지어 ‘결국 고을을 옮겨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돌을 져 나르고 성을 쌓으라 한다면 차라리 지금 구렁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새 터의 취할 만한 것이 없음이 이미 이와 같고 인심이 옮기기를 원치 않음이 저와 같으니 읍을 옮기는 일은 거론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본주의 정청이 우연히 불에 탔으나 아직까지 중건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빨리 새 터의 빈 정청을 뜯어다가 옛날의 정청자리에 옮겨서 짓는 것이 사실 사리에 합당하리라고 여겨 집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북도에 가서 형편을 살펴보고 길주의 관청이 새로 화재를 겪었으니 고을의 남쪽 10리 되는 창덕에 고을을 옮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터를 잡은 뒤에 우물을 10여 군데나 파보았으나 끝내 물을 얻지 못하였다. 전 목사 이방수 역시 창덕 아래 몇 리(里)되는 곳에 한 터를 잡고 정청을 창건하였으나 상을 당하여 갑자기 돌아오게 되니 바로 중단되어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황정이 상서하여 파하기를 청하니, 약방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연전에 병조 판서를 따로 보내서 길주를 살펴보게 한 뒤에 특별히 유서(諭書)를 내리시어 경영하여 설시하게 하셨는데 지금 도신(道臣)이 갑자기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니, 마땅히 엄히 신칙을 가하여 나라의 체통을 유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도신을 중추하고 그 글은 물시(勿施)하며 길주를 영원히 무신의 자리[窠]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예장 도감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교유서(敎諭書)라 하더라도 모두 정문을 경유하여야 한다. 교명(敎命)·죽책(竹冊)·시책(諡冊) 등은 사체가 더욱 중하니 마땅히 정문을 경유하여야 하는데 모두 동문(東門)을 경유했다고 하니 사체가 그렇지 않다. 이 뒤로는 정전(正殿)에 친히 나와 책서를 내릴 때에, 세자가 책서를 받은 뒤에 내가 세자와 더불어 비록 동문을 경유하여 가더라도 교명과 죽책은 먼저 정문을 경유하여 행해야 한다. 그리고 도감에서 대내(大內)에 올리는 것은 소중함이 어람(御覽)을 위한 것이고, 대내에서 내리는 것은 소중함이 전교가 되는 것이다. 또 명관(命官)의 책봉은 친히 책서를 주는 것과도 차이가 있으나 소중함이 따르는 법이니, 책서와 인보(印寶)를 막론하고 모두 정문을 경유하여 행하도록 해조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4월 11일 임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하교하기를,
"좌홍로(左鴻臚)127)  의 직임은 중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달수에 준하여 자품(資品)을 올려 주었다. 지금은 처음부터 이미 정히 가리지 않아 인도할 때에 혹 포복하기도 하고 찬청(贊請)할 때에 선후가 전착하기도 하니 이 어찌 의문(儀文)을 중히 여기는 도리라 하겠는가? 또 우로(雨露)는 이미 땅을 가려서 내리는 것이 아닌데, 벼슬자리를 마련함이 어찌 사람을 위하여 조종하겠는가? 특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도록 하라. 아! 선조의 누(累)로 그 자손들까지 고폐(錮廢)시키는 것은 왕정(王政)의 할 바가 아닌데 하물며 그 부형의 일로 자제를 욕보이게 한단 말인가? 한갓 이 일만이 지극히 원통할 뿐만 아니라 이는 또 삼무사(三無私)128)  의 도리를 받드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함구할 수 있겠는가? 이 전교 한 통을 써서 동궁에게 올려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통례(通禮)를 잘 가리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신칙하는 하교를 두어 말하기를,
"이거원(李巨源) 같은 이는 통례가 될 수 없는가?"
하니, 승지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이거원은 그의 아들 이우화(李宇和)와 함께 침체하고 있습니다. 이우화는 등과한 뒤에 형조의 낭관이 되었으나 바로 체직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하도다. 그의 누가 어떻게 이우화에게까지 미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이철보가 말하기를,
"전조(銓曹)에서는 비록 검의(檢擬)해 보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의 말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이 전교가 있게 된 것이다.

 

4월 12일 계묘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친히 왕세손의 빈궁(殯宮)에 시호를 의소(懿昭)  【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 라 내렸다. 좌참찬 홍상한(洪象漢)이 세 번 향을 올리고 세 번 전작(奠爵)한 다음 교시를 받들어 시책(諡冊)과 시인(諡印)을 올렸다. 독책관(讀冊官) 성천주(成天柱)가 꿇어앉아 책문을 읽기를,
"지극한 심정으로 잘 자라기를 바랐더니 색동옷 어루만지며 슬픔만을 싸서주고 이름을 높힘에는 시호가 있는 법이니 보책을 내려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전(彛典)을 의식대로 준행하니, 남기고 간 자취가 이에 드러났다. 오직 너 세손아! 내가 너를 안았을 때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상서로운 빛 별자리에 뻗치더니 이윽고 네가 태어났으며, 특이한 모습은 해와 달의 표상처럼 빼어났는데 더구나 적전(嫡傳)에 있어서랴? 오직 영특하고 온화한 모습은 자연히 제왕가(帝王家)의 귀상(貴象)이 있었고, 인후(仁厚)하고 자효(慈孝)한 성품은 어린 나이의 양지(良知)가 아님이 없었구나. 소저(小邸)의 명호를 정함에 이르러서는, 갑절이나 늙으막의 위로가 되었었다. 기질은 겨우 두 서너 살에 엄연히 덕기(德器)를 이루었고, 총명은 60여 자(字)의 예서(隷書)를 능히 분변하였다. 오래 침전(寢殿) 곁에 두고도 때로 자리가 비면 문득 허전하였고, 항상 밥상 곁에 앉아서 먹을 때마다 반드시 권하였는데 심지어는 공교로움을 싫어하고 투박함을 좋아했고 미쁘게도 검약을 품부하여 순박함이 터를 잡았었다. 지극한 사랑으로 어린이를 안고서 오직 열성조의 도우심에 감사하였고, 큰 책임 물려줄 곳이 있으니 거의 종사의 걱정이 없음을 다짐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국운이 침체의 운수를 당하여, 내 손자를 죽게 하였더란 말인가? 처음에는 예사로운 질병으로 여겨 저절로 좋아지려니 했는데, 훌륭한 자질이 갑자기 거두어 마침내 아득한 곳으로 가버릴 줄 뉘 알았으리? 기왕에 탄생시키고서 왜 또 죽이는지 그 이치 알 수 없고, 비록 명은 하늘에 있다하나 사람에게도 달려 있으니 이 슬픔 끝이 없구나. 한갓 궐초(厥初)의 철명(哲命)만을 기대했는데, 영영 이후(貽後)의 유모(猷謨)를 저버렸구나. 삼전(三殿)께서는 슬하(膝下)를 잃은 슬픔을 안았으니 노경(老境)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팔역(八域)에서는 눈을 씻고 기대했던 소망을 잃었으니 여정을 알 수 있구나. 그 모습 생각하면 아련하게 맑은 눈망울 보이는 듯한데 빈실(殯室)만이 고궁에 남았고, 자취를 더듬으며 더욱 노쇠한 이의 눈물 훔치는데 사적은 실록에 실리는구나. 진실로 시호를 내리고 이름을 남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사후(死後)를 꾸며 길이 전할 것인가? 아름다움[懿]은 바로 덕성을 안으로 쌓아 이미 정숙하고 순수하였으며, 밝음[昭]은 곧 의용이 밖으로 드러나 오직 공손하고 아름다웠구나. 널리 공론을 수렴하여 조금이나마 나의 슬픔을 풀었노라. 이에 신 의정부 우참찬 홍상한을 보내서 옥책을 받들고 시호를 의소(懿昭)라 내리노라. 강보에서 갑자기 떠나니 비록 오래 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간책(簡冊)에 소상히 실리니 영원히 징신(徵信)은 될 수 있으리라. 다만 바라노니 밝은 혼령아, 거짓없는 이 교유를 받들지어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독인문관(讀印文官) 이양천(李亮天)이 꿇어앉아 인문(印文)을 읽기를, ‘의소 세손지인(懿昭世孫之印)’이라 하였는데, 다 읽자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세 살 짜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하였다.

 

서사관(書寫官)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명정(銘旌)을 고쳐 쓰기를, ‘의소 세손 재실(懿昭世孫梓室)’이라 하였다.

 

4월 13일 갑진

지사 홍계희(洪啓禧)가 상서하여 진계하고 이어 균역청의 일을 말하여 김상성(金尙星)이 경연에서 아뢴 바를 변명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계한 바는 깊이 유념하겠으나, 아뢴 바는 등대하였을 때에 대조께 여쭙는 것이 옳다"
하였다.

 

4월 14일 을사

임금이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균역청의 당상들이 절목을 이미 재가하여 내렸다 해서 들어오지 않는 것인가?"
하니, 승지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조영국(趙榮國)은 한 번 이홍직(李弘禝)과 조종부(趙宗溥)에게 지척을 당한 뒤로는 끝내 균역청 당상에 응명(膺命)하지 아니하고, 홍계희(洪啓禧)는 사정이 있다 하여 글을 올리고 한강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화가 난다 하여 결연히 가버리면 상례의(喪禮儀) 편집은 뉘 손에 맡긴단 말인가?"
하고, 이어 홍계희에게 신칙하는 전교를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도 은결(隱結)은 호조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하니, 김상성이 말하기를,
"홍계희도 간통(簡通)하여 1,2년 뒤에는 본조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와 균역청은 소속의 다과가 현저하게 다르니 나는 많은 곳은 줄이고 적은 곳은 보태주려 한다. 은결을 면세(免稅)로 하여 떼어 받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누락된 전결(田結)을 추심하는 것은 틀림없이 호조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니, 김상성이 말하기를,
"전답이 시내가 되고 모래가 덮치는 재해가 없는 해가 없는데 가령 금년에는 묵히고 명년에는 개간(開墾)하더라도 균역청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2만결 외에는 더 얻기가 어려우므로 형편이 점점 위축될 것이니 민폐가 참으로 가긍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에서 만일 급재(給災)하여 주지 않는다면 유비(有庳)의 백성은 무슨 죄란 말이냐?129)   2만 결은 균역청에서 면세로 떼어 받고 그 나머지 은결은 호조에서 수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5일 병오

임금이 몸소 재실(梓室)에 상(上) 자를 썼다.

 

사간 심발(沈墢)에게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증(李增)의 친아우와 친숙(親叔)이 서울 안에서 편히 지내고 있는 죄를 아뢰니 심발과 대사헌 유건기(兪健基), 대사간 안집(安𠍱), 부교리 임집(任)이 상서하여 모두 변방에 내치기를 청하였고, 심발과 임집의 글에는 이학(李壆)과 이관(李爟)·이당(李爣)의 이름까지 낱낱이 열거하였는데, 오래도록 비답이 없었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이 하교하기를,
"대신이 연석에서 아뢴 것은 사체가 엄하고 비밀스러운 것인데, 법을 맡은 신하가 순례로 청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대신(臺臣) 한 사람이 세 사람의 이름을 한 번에 거론한 것은 마치 비밀스런 글을 베껴 놓은 듯하니, 그를 제서유위율로써 시행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아울러 임집까지 체직시키고, 유건기 및 안집에게 답하기를,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답하였는데도 어찌 다시 이렇게 하는가?"
하였다. 이튿날 김재로가 말을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4월 17일 무신

이정작(李庭綽)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이양제(李亮濟)를 내사복(內司僕)에서 친국(親鞫)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판의금부사 김성응(金聖應)이 참국(參鞫)하였다. 이에 앞서 투서한 적(賊)을 오래도록 체포하지 못하자 엄히 신칙하여 기찰하라고 연달아 명하였는데, 이날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 장태소(張泰紹)의 집 문 밖에 선비 옷을 입은 늙수그한 사람 하나가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두리번거리며 왔다갔다 하므로 행동이 의심스러웠는데 장태소의 종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끌어들여 그 옷을 수색하여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이윽고 바지를 더듬어 보니 봉서(封書) 하나가 땅에 떨어졌는데 겉봉에 쓰여 있기를, ‘장 대장 친집 개탁(張大將親執開坼)’이라고 하였으므로 뜯어 보니 그 속의 말 뜻이 전일의 투서와 같았었다. 그 사람에게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나는 바로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인데, 가평(加平)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름은 이양제(李亮濟)이다."
하였다. 장태소가 속여서 묻기를,
"너는 전에도 우리 집에 투서하더니 또 투서하려 한 것은 무슨 의도이냐?"
하니, 이양제가 답하기를,
"전에 투서한 곳은 포도 대장의 집이 아니라 정휘량(鄭翬良)의 집이었다."
하였다. 장태소가 말하기를,
"글 내용에 무슨 말을 하였느냐?"
하니, 이양제가 말하기를,
"이증(李增)과 이학(李壆)의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글 내용에 윤태(尹台)라고 한 것은 누구를 지칭한 것이냐?"
하니, 답하기를,
"심(沈) 자를 잘못 윤(尹) 자로 쓴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5냥 백금(五兩白金)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니, 답하기를, "양(兩) 자가 아니라 두(斗) 자를 잘못 쓴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이 밖에 달리 한 말은 없느냐?"
하니, 답하기를,
"홍계희(洪啓禧)의 균역청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홍(洪) 자 아래에 무슨 자를 썼느냐?"
하니, 답하기를,
"태(台) 자를 썼다. 홍계희의 서제 홍계량(洪啓良)이 증(增)과 연혼(連婚) 관계이기에 언급한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장태소가 청대하여 보고하니 바로 친국을 명하게 된 것이다. 이양제의 투서속의 사의(辭意)로 임금이 묻기를,
"포도청에서의 공사(供辭)를 보아 이미 알고 있지마는 너도 조선의 신하인데 ‘5두 백금(五斗白金)으로 술을 나누면서 서로 축하한다’는 등의 말을 어찌 차마 할 수 있느냐? 낱낱이 솔직히 불어라."
하니, 이양제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과연 사혐(私嫌)으로써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으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으나 여선군(驪善君)이 이소(李炤)의 아들이 땅에 엎드려 호소할 때에 잘못 주달하여 소의 자손으로 하여금 보존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깊이 통분을 품어 왔으므로 투서 내용에 여선군까지 극악한 죄과로 몰려고 약연(躍然) 등의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은 숭선군(崇善君)의 손자 소(炤)와 이종간이 되므로 소가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 신에게 서신을 보내서 자신이 죽은 뒤에 반장(返葬)해 줄 것과 계후(繼後)를 세워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소가 죽자 그 가족은 길에 떠돌게 되었고 소의 처도 이미 죽었습니다. 소의 서자는 이름이 이인명(李仁明)으로 나이 15세요 둘째 이경명(李景明)은 나이 13세인데, 소의 양자는 신과는 혐의가 있어 서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심성희(沈聖希)는 여천군(驪川君)의 가까운 인척이기 때문에 과연 그 자신이 죽어 애석하다고 썼는데 심(沈) 자를 잘못 윤(尹) 자로 썼습니다. 이번에 균역법을 실시한 뒤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기에 홍태(洪台)만 제거하면 혹 균역법이 중지될까 하여 쫓아내려고 쓴 것입니다."
하였다. 김덕해(金德海)에게 묻기를,
"너의 근본은 누구이며 어느 해에 일산 사지(日傘事知)가 되었고 이양제를 과연 알고 있느냐?"
하니, 김덕해가 공초하기를,
"신의 아비는 김진성(金振聲)인데 맹인이고 신의 어미는 곧 권의형(權義衡) 집의 비자(婢子)입니다. 신은 무신년130)  의 업무(業武)로서 갑인년131)  에 금군에 들어갔고 임술년132)  에 출신(出身)하여 영남의 변장(邊將)이 되었다가 교체하고 돌아온 뒤에 다시 일산 사지가 되었습니다. 이양제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권집(權䌖)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국청에서 장폐(杖斃)했다 하기에 고의로 과연 시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4월 18일 기유

임금이 친국하였다. 이경제(李經濟)를 신문했는데, 이경제는 이양제의 아우이다. 이경제가 공초하기를,
"신의 형 이양제는 계축년133)  에 논을 파는 일로 직산(稷山)에 갔었는데 이소(李炤)의 아우 이현(李炫)의 비첩(婢妾)의 말에 ‘신의 형이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다 하여 감사 정언섭(鄭彦燮)이 장계하여 성상께서 원서(爰書)134)  를 본 뒤에 짐작하여 처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형은 이항(李杭)135)  의 집안과 친숙하였으나 신은 단지 소의 얼굴만 알 뿐입니다. 강행정(姜行鼎)은 신과 6촌 인척인데 신의 형은 그 집에서 유숙하였으나 신은 그 얼굴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금월 11일에 신의 형을 약국에서 만났는데 그 행색이 초라하기에 민망해 하며 탄식하는 말을 많이 했더니 신의 형의 대답이 ‘학장(學長)이 되면 먹고 살 수는 있게 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기는 소(炤)의 아들들의 관직을 알선해 주는 일로 자연히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말하기를, ‘반드시 되지도 않는 일을 형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신의 형이 계축년에 국청(鞫廳)에 들어간 뒤로는 종전부터 친했던 사람들도 또한 왕래를 하지 않았는데, 답십리(踏十里)의 안가(安哥) 집에는 신의 형이 상을 당했을 때에 빚을 얻어 쓰고 오래도록 갚지 못했기 때문에 신의 형이 항상 내왕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유제(李裕濟)를 신문했는데, 이유제는 이양제의 아우이다. 이유제가 공초하기를,
"신은 계축년136)   뒤로는 이소(李炤)의 집과는 서로 왕래한 일이 없었습니다. 듣건대, 셋째 형 이경제(李經濟)는 소의 양자를 얻어 주고 둘째 형 이양제는 소의 첩자를 위하여 돌보고 주선하여 주기 때문에 두 형들 사이가 서로 좋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신과 형 이양제와는 금년들어 만난 지가 다만 두세 번이 되었는데, 서울에 올라와서 거처하는 곳을 물으니, ‘강행정의 집에서 유숙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길에서 신의 형한테 글을 배우고 있는 소의 첩자 두 사람을 만나 신의 형의 소재를 물으니 주가(朱家) 집에서 조석으로 기식(寄食)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갔더니 강행정의 집에 갔다고 대답하였으므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왔습니다."
하였다.

 

강행정(姜行鼎)을 신문했는데, 강행정은 곧 진사이다. 지의금부사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강행정은 이름이 알려진 선비입니다. 초년에 다소 성취하였으나 북경에서 운명을 물어 보니, ‘좋게 마치지 못하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20년 동안 글만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동궁관(東宮官)에 가합한 사람이라고 신에게 말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사람을 알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취향(趣向)이 이양제와 같더냐?"
하니, 포도 대장        장태소가 말하기를,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비록 와서 유숙하기는 하여도 뜻은 통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강행정이 공초하기를,
"신이 이양제와는 이성(異姓) 6촌간이지마는 한 번 그가 국청에 출입한 뒤로는 신의 집에 내왕하는 것을 반가와 하지 않으니 자칭 말을 조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에 가평에서 올라와서 신의 집에서 유숙하기를 청하기에 허락하였더니 연달아 5, 6일을 머물면서 신의 집에서 유숙하고 밥은 다른 곳에서 먹었습니다. 또 신은 늦게 일어나는데 그는 새벽이면 나갔다가 어두워져서야 돌아오기 때문에 신이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처자가 굶주리고 있어서 환자곡을 얻거나 혹은 빚을 얻어서 구제하려고 한다.’라고 답하고는 그가 친숙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양제의 글은 겨우 서찰을 통할 만하나 글씨는 꽤나 작자(作字)를 잘하는 편입니다. 이경제는 글이 그 형보다 낫고 신의 집에도 왕래하였으나 이유제는 오지 않았습니다. 2월 사이에 이양제가 와서 말하기를, ‘청계산(淸溪山)에 명화적(明火賊)이 도처에서 호응하고, 마량(馬梁)의 수적(水賊)은 돛을 높이 달고 바다에까지 나가 소리 높혀 창도(倡導)하고 있으니 불일내에 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청계산은 서울과 아주 가까운 곳인데 만일 명화적이 있다면 어찌 모르겠으며, 마량에 수적이 있다면 감사나 병사가 틀림없이 장계를 올렸을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자네는 가위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성(李城)을 신문하였는데, 이성은 곧 이소(李炤)의 양첩(良妾)의 아들이다. 이성이 공초하기를,
"신과 이양제와는 5촌척이고 신의 이복 아우 둘이 이양제에게 글을 배웠으나 신과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안도행(安道行)을 신문하니, 안도행이 공초하기를,
"이양제의 매부는 곧 권인(權燐)이고 권인의 아비는 권기(權琦)입니다. 신이 가난하여 권기의 집을 빌려 들었고 이양제 형제가 글을 잘 한다는 소문이 있으므로 신이 들어 알고는 있었습니다. 정월에 이양제가 두 번이나 신에게 찾아와서 말을 청하였어도 말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경명(李景明)을 신문하니, 이경명이 공초하기를,
"신은 과연 이양제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7,8일 전에 서소문(西小門) 안의 안가(安哥)가 이양제와 길에서 서로 만나 문자로 수작하였고, 강 진사 집에는 언젠가 책을 팔려고 이양제와 한 번 간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안도행을 다시 신문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방향에 따라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였는데 안가(安家)와 항가(杭家)는 대대로 친하니, 참으로 이들은 역적 집안의 씨로다."
하였다. 안도행이 공초하기를,
"안세정(安世楨)은 신과는 3촌 숙질인데 신사년137)  의 숙정 옥사(淑貞獄事)138)  에 장폐(杖斃)하였고, 안여익(安汝益)은 신의 6촌 대부(大父)인데 신사년에 숙정·장희재(張希載)와 함께 죽었습니다. 안여익의 아들은 안세항(安世恒)이고 안세항의 아들은 안윤상(安允祥)인데 역시 무신년139)  에 죽었습니다. 안세준(安世準)은 안세항의 서제(庶弟)인데 역시 역적의 공초에 들어 죽음을 당했고, 안세최(安世最)는 안세항의 4촌인데 무신년에 역시 장폐하였습니다. 이양제가 신의 돈을 쓰고 갚지 않기에 문서로 전당을 잡고 신이 매양 갚으라고 다그쳤더니, 원망하고 질시하는 마음이 생겨 말을 빌렸다는 말을 하였으나 당초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양제를 다시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이 언서(諺書)는 바로 이경명(李景明)의 어머니 편지인데, 이소(李炤)의 비인 향옥(香玉)이 연줄을 타서 상궁(尙宮)의 방자 나인(房子內人)이 되어 봄사이 수진궁(壽進宮)으로 나갔는데, 정동(貞洞)에도 자주 왕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이 향옥이 있으니 비록 경비(經費)를 쓰지 않더라도 족히 흉사(凶事)를 해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의 투서는 모두 선무사(宣武祠)에서 신이 직접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언서 속에 향옥이라고 한 자가 아주 수상하다."
하였다. 대개 언서라고 한 것은 포도청에 잡혀 있는 소의 첩 초정(草貞)이 이양제에게 보낸 서찰(書札)이었다.

 

초정을 신문하였는데, 초정은 이소(李炤)의 비첩(婢妾)으로 이인명(李仁明)과 이경명(李經明)의 어미되는 사람이다. 초정이 공초하기를,
"신은 본래 숭선군(崇善君)의 방자 나인으로서 소의 첩이 되었는데, 이양제는 소의 6촌이기 때문에 신이 알게 되었습니다. 기미년140)  에 소가 죽으니, 그의 처 박씨(朴氏)가 20년이나 소박받은 몸으로 상차(喪次)에 와서 신의 모자의 의복과 집물(什物), 전지(田地) 등을 모조리 빼앗고 신의 모자를 쫓아냈습니다. 신의 지아비가 살아 있을 때 어린 것들을 이양제에게 부탁하여 이양제가 항상 신의 세 아들을 데리고 가서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신이 과연 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평(加平)의 이양제 집에 가서 거접하였습니다. 신의 자식 하나가 죽은 뒤에 처음으로 이양제 집의 노복 한 사람을 박씨에게 보내서 장례 비용을 청하였더니, 주지도 않고 쫓아보냈습니다. 박씨가 들여세운 양자는 몇 촌간이나 되는지는 알지 못하나 과천(果川)에 사는 이홍서(李弘緖)의 아들입니다. 이홍서는 박씨와는 인척이 되는 사이인데 이경제(李經濟)가 사이에 들어 지시하여 양자로 삼았습니다. 향옥은 처음에는 나인(內人)의 방자이었으나 나인이 죽은 뒤에는 궁에서 나와 시전(匙廛)에 살면서 궁인에게 술을 팔아 생계(生計)를 삼았는데, 그저께에도 소의 집에 왔었습니다. 신의 지아비에게는 첩이 또 하나 있었는데 곧 막례(莫禮)로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소가 죽은 뒤에 막례와 신은 한꺼번에 쫓겨났는데, 소의 처가 죽은 뒤에는 막례의 소생과 신의 아들이 함께 양자의 집에 있습니다. 병인년141)  에 땅에 엎드려 호소했을 때에는 신의 아들에게 부직(付職)을 바라고 신이 과연 지휘하여 한 것이나 여선군(驪善君)이 아뢴 말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이양제에게 언찰(諺札)을 보낸 것은 다만 전토(田土)를 추심하는 일로 서찰을 왕래한 바가 있었으나, 공모하였다는 일에 있어서는 천만 애매합니다. 나라를 원망하는 말은 입에서 나온 일도 없는데 이양제가 지만(遲晩)하였다고 납공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는 과연 흉악합니다."
하였다.

 

다시 이양제를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금월 15,16일간에 초정의 언찰을 받았는데, 그 아들 이경명이 가지고 왔기에 서소문 안 박주부(朴主簿) 약계(藥契)의 책방 바깥채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신은 포도 대장의 집에 두 번 투서한 뒤에는 가평으로 내려가려고 하였고, 요사스러운 술법(術法)은 《열국지(列國志)》와 언문 책 속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4월 19일 경술

임금이 친국하여 이경(李坰)을 신문하였는데 경은 이소(李炤)의 양자이다. 경이 공초하기를,
"신은 소와는 25촌이고 외가에서 키워 길렀는데 양모와는 척분이 있는 집입니다. 신의 양모가 제사를 받드는 일은 사체가 소중하니 천첩의 소생으로 적통(嫡統)을 이을 수 없다고 여기고 기어코 후사를 세우려 하였는데, 이경제(李經濟)가 사이에 들어 주선하여 신의 나이 16세에 출계하여 소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양제는 ‘신의 양부가 살아 있을 때에 천첩 소생을 부탁하였다.’라고 말하고 그들로 뒤를 이으려 하여 신의 양모와 척(隻)지었기 때문에 신과 5촌 숙질이지마는 원수와 같이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양제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양제에게 글을 배운 서제들도 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신의 양부가 살아 있을 때에 신의 양모를 소박하여 버리고 이경명의 어미만을 두고 집안 일을 전담시켰습니다. 신의 양부가 죽은 뒤에 신의 양모가 서모에게 집을 사 주고 또 보령(保寧)에 있는 전토(田土)도 주어 한결같이 그의 말대로 하여 세간을 내 주었는데, 이양제는 이경명 형제를 가르친다고 칭탁하고 이경명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계해년142)  에 이경명의 어미가 신문고(申聞鼓)를 치고 신의 파양을 청하니, 예조에 내렸으나 오랫동안 미결되었기 때문에 이양제가 식량과 잡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경명의 어미를 사주하여 보령의 전토를 다 팔도록 하고, 신의 양모에게 본 문권(文券)을 내달라고 청하였으나 신의 양모가 팔아서 써버릴가 걱정하여 내주지 않으니, 이양제가 또 날조하여 형조에 정소(呈訴)하였기 때문에 신의 양모가 결국 내주어 버렸습니다. 서모는 이로부터 발길을 끊고 신의 집에는 오지도 않았으며, 이어 집까지 팔고 이양제를 따라서 가평으로 가버렸습니다. 지난 섣달에 신의 양모가 죽은 뒤에 이경명의 모자가 올라와 전토와 노비를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제사를 받들 위토만이 남았기에 아직까지 나누어 주지 못하고 그대로 신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서모는 날마다 해괴한 일만 만들어 내고 불순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발악할 즈음에는 아무 해에 땅에 엎드려 호소한 일이 여선군(驪善君)의 저지(沮止)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여선의 교악함이 심하다.’고 하기도 하고, ‘마음씀이 그와 같기 때문에 저렇게 잔패(殘敗)했다.’고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가 납공할 때에 하교하기를,
"왕자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이 마당에까지 들어왔으니, 나의 마음이 서글프다."
하였고, 그가 납공을 마치자 초립(草笠)을 내주고 사배(四拜)한 후에 나가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고한 바가 정직하니 이미 간섭된 일이 없다. 너는 바로 왕자의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특별히 놓아보낸다."
하니, 경이 감읍하고 나갔다. 임금이 다시 불러 들여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요 구하기 쉬운 것은 전토다.’라고 하였다. 너의 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의 서제가 비록 불량하다 하더라도 너는 가장(家長)이 되어 어찌 검칙하고 통솔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 뒤로는 함께 살면서 살림살이도 나누어 주어 동기간이 떠도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박섬(朴暹)을 신문하니, 박섬이 공초하기를,
"신은 이인석(李寅錫)과 함께 책방을 내고 있는데, 이양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략(史略)》 초권을 가르친다고 간 뒤에 다시 와서 《대명률(大明律)》을 사 가지고 갔습니다."
하였다.

 

점남(占男)을 신문하니, 점남이 공초하기를,
"신은 집이 몹시 가난하여 떡을 팔아서 살아가는데, 이씨(李氏) 성을 가진 양반 한 분이 금년 정월부터 번번이 와서 떡을 사 먹었습니다. 혹은 하루 걸러 오기도 하고 혹은 며칠만에 오기도 하는데 오면 반드시 아침 일찍 왔습니다. 또 반드시 글씨가 쓰여진 종이가 있어 크기는 손바닥 만하였으며 언문으로 썼었고 따라다니는 두 아이로 하여금 번갈아 전하게 하였는데 정동궁(貞洞宮)에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양반이 걸어 와서 조용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곧 데리고 나갔는데, 이씨 양반을 따라온 아이가 ‘과천(果川)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하였다.

 

이양제를 다시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신은 남을 악역으로 무함(誣陷)하여 이미 죽을 죄를 졌으니 죽임을 달게 받겠으나 초정(草貞)이 무고한 바 나라에 대하여 흉패한 말을 했다는 점만은 천만 거짓입니다."
하였다.

 

초정과 이양제를 대질하였다. 초정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겁간하지 않았느냐? 또 땅에 엎드려 호소하였을 때에도 저지(沮止)한 일로서 여선군(驪善君)을 음해(陰害)하려고 이러이러 해놓고도 그의 계략이라고 핑계대겠다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또 여선군 집의 묘소에 흉물을 묻으려 하다가 나의 만류를 받아 드디어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는 또 투서할 때에 나더러 지으라 하면서 경임(景任)더러 쓰라고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경임은 이경제(李經濟)의 자(字)가 아니더냐?"
하니, 이양제가 처음에는 비록 승복하지 않았으나 마침내는 말이 모두 막혀 문득 ‘그랬다.’ 하였고, 또 ‘경임과도 과연 상의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양제와 이경제를 대질시켰다. 이경제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언제 나와 상의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이양제가 말하기를,
"이는 내 말이 아니다. 초정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너와 상의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나도 너와 상의하겠다고 답하고 바로 불에 태워버리라고 하였으며, 아까 초정과 대질하여 내가 말문이 막혔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초정은 난초(亂招)143)  를 면하지 못하겠다."
하고, 다시 초정을 신문하니, 그가 공초하기를,
"신이 양자의 일로 감정을 품고 과연 무함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20일 신해

임금이 친국하였다. 이경명(李景明)을 다시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양제가 서찰을 신의 어미와 주고받을 때에 신의 형제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전하였습니다. 금년 3월에 서찰을 써서 신에게 주어 전하게 하고서 서찰를 본 뒤에는 바로 태워버리라고 신신 당부하였습니다. 또 그가 답십리의 안가(安哥) 집에 자주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점남(占男)의 집 근처에 이영장(李營將)이 있었는데 또한 서로 왕래하였고 또 박주부(朴主簿)의 집에도 왕래하였습니다. 이양제는 안생(安生)·이영장·박주부와 항상 누동(漏洞)의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한 집에서 만나 이야기하였는데 혹시 다른 손님이 오면 바로 말을 그쳤으며, 그 집 주인은 자리에 없었습니다.

 

안도행(安道行)을 신문하니, 안도행이 공초하기를,
"애당초 만난 일조차 없습니다."
하니, 이경명과 대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이경명이 말하기를,
"네가 누구 누구와 만나지 않았느냐?"
하자, 안도행이 말하기를,
"나는 이영장도 모르고 또 누동에 간 일도 없는데 너의 말은 천만 맹랑하다."
하였다. 이경명과 박섬(朴暹)을 대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이경명이 말하기를,
"너희 네 사람이 누동에서 만나지 않았느냐?"
하니, 박섬이 말하기를,
"나는 당초에 누동에 가지도 않았고 이영장의 집이 누동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하였다.

 

이기상(李麒祥)을 신문하니, 이기상이 공초하기를,
"신의 집은 서문 안에 있는데 원래 누동에 왕래한 일이 없고 또 신은 시골에서 올라왔으니 설사 지나가는 길에 왕래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실은 어느 동네가 어느 동네인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무사(武士)를 사랑하는 바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서 감히 임금을 속이려 하는가? 누동을 모른다고 한 것은 바로 근본부터 끊으려는 것이니, 속이는 것이다."
하고, 형문(刑問)을 10도(度)로 하라고 명한 뒤에 이경명과 대질시키게 하였다. 이경명에게 또 묻기를,
"너의 공초에 차오(差誤)가 많은데 만일 사람을 무함하려 한다면 죄는 너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니, 이경명이 공초하기를,
"아침에 발고한 네 사람 중에서 이영장과 안생(安生)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전필현(全必賢)을 신문하고 다시 이경명과 대질시키도록 명하였다. 이경명이 두 칸의 방에 한 칸의 마루라고 하자, 전필현은 내 집은 방 한 칸에 마루 한 칸이라고 말하였고, 이경명이 바자[把子]144)  에 대하여 말하니, 전필현이 내 집의 울타리는 눕혀서 엮은 바자라고 말하였다. 이경명이 개가 두 마리라고 하였는데, 전필현이 나의 집에서는 본래 개를 기르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경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집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경명을 데리고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명하였는데, 과연 맞지 않았으니 임금이 전필현을 놓아보내라고 명하였다.

 

경필삼(景弼三)을 신문하니, 경필삼이 공초하기를,
"신은 본래 알고 지내는 양반이 없었는데, 이른바 이가(李哥) 양반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두 아이를 데리고 와서 바깥 마루에 앉아 글을 가르치기에 신도 자식이 있으므로 그가 글을 가르치는 것이 반가와서 그에게 청하였더니 자기는 오래지 않아 시골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필삼은 물어볼 단서가 없으니 특별히 방면하라."
하였다.

 

이기상을 방면하고 그 관직은 그대로 잉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문사랑(問事郞)에게 명하여 하유하게 하기를,
"이제는 의심을 벗었으니, 나의 마음도 기쁘다. 다만 누동의 일을 속인 죄로 형만 받고 직명은 개체하지 않는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충신의 손자가 사서 매를 맞았다."
하고, 이경명은 형조로 이송하고 김덕해(金德海)는 포도청으로 이송하라고 명하였다.

 

4월 21일 임자

임금이 여러 죄인을 친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145)   이후로는 이번과 같은 요서(妖書) 사건이 있지 않았으니 나의 마음에는 저주(咀呪)가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다. 초정(草貞)은 바로 이항(李杭)146)  의 며느리요 이소(李炤)의 첩인데, 항은 그 법을 중국에서 배워 와서 신사년147)  의 변고가 있게 된 것이다. 소의 아들을 이인명(李仁明)·이경명(李景明)·이현명(李顯明)·이문명(李文明)으로 이름을 지은 것도 나라를 원망함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본래부터 역적 민종도(閔宗道)의 일도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이양제(李亮濟)가 다만 4촌의 첩과 함께 협동하여 음모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여겼는데 이제 사실이 탄로되었으니, 이런 뒤에는 그 여타의 것은 알 만하다."
하였다. 지의금부사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이양제는 꼭 죽는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으므로 시종 어물거리고 있으니 만일 살아날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면 틀림없이 더 추구해낼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이제는 이미 법을 바루어야 할 사람으로 확정된 이상 살아날 길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과 지의금의 말이 하나는 정도(正道)이고 하나는 권도(權道)이니 둘다 합당하다 하겠다."
하였다.

 

이인명(李仁明)을 신문하니, 이인명이 공초하기를,
"신은 아우 이경명과 함께 신의 어미와 이양제가 주고받은 서찰을 번갈아 전하였고, 또한 이양제를 따라 박주부(朴主簿)와 강진사(姜進士)의 집에도 갔었으며, 또 안생(安生)과 이양제가 남문의 길가 돌 위에 함께 앉아서 문자로 수작하는 것도 보았으나 신은 나이 어려서 자세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인석(李寅錫)을 신문하니, 이인석이 공초하기를,
"신은 녹사(錄事)로서 퇴직하여 박섬(朴暹)과 서로 친하였습니다. 서책을 사는 일로써 이성(李性) 양반이 신의 집에 몇 차례 내왕하였으나 매매하는 일로 서로 문답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양제를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박필범(朴弼範)은 박태인(朴泰寅)의 아들이고 박태인은 숭선군(崇善君)의 외손서(外孫壻)입니다. 천안(天安)의 전토(田土) 일로 신이 미워한 것은 사실이며, 박필범은 역적 이하(李河)의 처조카로서 이하에게 글을 배워 사람됨이 음흉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나라를 원망하고 있을 것 같아서 투서 속에 언급한 것입니다."
하였다.

 

막열(莫烈)과 덕이(德伊)를 신문하였는데, 둘은 다 이소(李炤)의 늙은 비녀이다. 공초에서 모두 초정의 요악스런 거조와 저주하고 기축(祈祝)한 일을 말하였다. 이인명을 형조에 이송하고, 이경명을 다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이경명에게 이양제가 전부터 점을 치는 실상을 묻고 점남(占男)의 집에서 그의 행장을 찾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우변 포도 대장 장태소(張泰紹)가 말하기를,
"그 점책과 점돈[占錢]을 가져오려고 점남의 집에 포교(捕校)를 보냈더니 이기상(李麒祥)이 석방된 뒤에 말하기를, ‘네 집이 우리 집 근처에 있지만 않았다면 내게 어찌 이번 일이 있었겠느냐?’ 하고 그 집을 헐고 쫓아내버렸기 때문에 찾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혀 말하기를,
"나라의 은혜도 모르고 남의 살림집을 헐었으니 이는 남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고 문득 이 임금에게 불공(不恭)을 저지른 짓이다. 이기상을 잡아 오라."
하였다. 대사간 안집(安𠍱)이 말하기를,
"이는 국청의 죄인이 아니니 도사(都事)를 내보내는 것은 부당할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는 옳지 못하다. 도사에게 서둘러서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이기상이 들어오자, 하교하기를,
"참작하여 처분을 내릴 때에 그 장임(將任)을 그대로 둔 것은 비록 우둔하다 하더라도 감동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인데, 열 대의 형장(刑杖)으로 인하여 분을 품어 어처구니 없고 망칙한 일을 만들었고 위에 대해서 불공을 저질렀으니, 그 죄가 가볍겠느냐? 그러나 법에 없는 법을 새로이 만들어 내고 싶지는 않으니, 비록 승복을 받아서 법을 바룰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도리로 보더라도 예사롭게 처치하여서는 않되겠으므로 한 차례 형문를 가한 뒤에 기장현(機張縣)에 종신토록 정배하되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압송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좌전(左傳)》에 이를기를, ‘그 임금에 무례하게 함을 보면 매나 솔개가 멥새를 쫓듯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이기상이 스스로 위에 대하여 불공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자신이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되어서 의당 중죄를 내리기를 청해야 하는데도 감히 죄를 감하기를 청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대사간 안집을 먼저 체차(遞差)하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대신(臺臣)의 일로 인하여 듣건대 정언 서명천(徐命天)이 물러가서 대명하고 있다 한다. 그 소청이 방자하고 무엄하니, 대각(臺閣)에 그대로 둘 수 없겠다. 먼저 그를 체차하고 탈고신(奪告身)의 죄율로 시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조재민(趙載敏)을 대사간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4월 22일 계축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중도에 돌아와 상서하기를,
"사유마(私有馬)의 몰이꾼 홍금(洪金)이 금물인 채단을 몰래 사서 책문(柵門) 아래로 옮겨 숨겨두었다가 의주부의 수색에 적발되었습니다. 이는 신 등이 아랫사람을 단속하여 간계를 꺾지 못해서 종예(從隷)들이 금령을 범하게 된 것이니 무거운 죄를 받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동지사 낙창군 이탱(李樘)과 부사 신사건(申思建), 서장관 조중회(趙重晦)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인견하고 그 나라의 사정을 물었다.

 

임금이 친국하였다. 막렬(莫烈)·덕이(德伊)·초정(草貞)·이경명(李景明)·이양제(李亮濟)를 다시 신문하고 이어 대질시켰다. 점남(占男)·이인석(李寅錫)은 물을 것이 없다 하고 아울러 석방을 명하였다.

 

이양제(李亮濟)가 물고(物故)되었다.

 

4월 23일 갑인

이경명·초정·이경제(李經濟) 등을 다시 신문한 뒤에 한차례 형을 가하게 하였다. 박섬(朴暹)은 놓아 보내고, 이경제는 거제(巨濟)에 정배하며, 이유제(李裕濟)는 곡성(谷城)에 정배하고, 강행정(姜行鼎)은 영광(靈光)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소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인심이 교악하여 요사이 또 익명시(匿名詩)가 있어 암암리에 비방하고 있건만 서로 전파하고 심지어 지위가 높은 사람도 더러 웃으면서 전하여 말하는 자가 있다 합니다. 청컨대 익명서(匿名書)의 예대로 포도청으로 하여금 그 출처를 탐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익명시가 있단 말인가? 대신도 그 풍자 속에 들었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그 뒤에 들으니 오로지 병판의 세 종형제(從兄弟)를 지목한 듯한 글귀의 수가 1백 귀가 넘고 조정 사대부도 많이 들었으며 그 말의 귀추는 벼슬을 얻지 못한 원한에서 연유한 듯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필시 사대부의 자제가 한 짓일 것이다.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자,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일에는 경중이 있는데 일시의 경박한 일로서 포도청에서 비밀 수사를 한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도 시안(詩案)148)  이 있었는데 불량한 무리들이야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뒤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신(搢紳)의 습성이 과연 이렇더란 말이냐? 이는 내가 조정을 바루지 못한 소치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고, 이어 칙교(飭敎)를 내리기를,
"지금 대신의 아뢴 바를 들은 즉,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시를 진신 사이에서도 혹은 보고 외우고 한다 하니, 이 어찌 ‘눈으로는 간사한 빛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본의이겠느냐? 이는 오로지 나의 박덕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제 내가 늙고 기운도 없어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오르지 않는데 이 말을 듣고는 마치 더운 술을 마신 것 같다. 박덕한 내가 인도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고 각자 마음을 바로 가지고 스스로를 수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이장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혼후(渾厚)하신데 사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말씀은 한 번 나오면 팔방에 반포되는 것인만큼 혹 조정의 존엄한 체통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야박한 일은 구태여 조정에 끌어올려 시끄럽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지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말씀드린 것이 마침 해가 되었다면 한갓 죄가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이 하교를 정지하시니 이 불량한 무리들이 무엇에 꺼려하고 두려워 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연교(筵敎)를 써서 내리지는 않았으나 듣는 자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뺨을 맞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경박한 습성은 저절로 공론의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니, 이는 금령을 내려 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년에 온천에 갔을 때에도 길가에 언서를 걸어 그 고을 수령을 훼방한 자가 있었으나 내가 가져다 보지도 않았었다."
하였다.

 

4월 24일 을묘

지중추부사 홍계희(洪啓禧)가 상서하여 사퇴를 청하고 군관(軍官)에 관한 일을 다시 아뢰어 품지를 내려 지휘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말단에 또 말하기를,
"양전(量田) 뒤에 묵은 전지(田地)로서 해마다 진전(陳田)으로 장부에 올리던 것을 금년에 이르러 실결(實結)로 올리고 사사로이 세를 받아 착복하는 자가 많은데 양호(兩湖)가 모두 그러하나 호서가 더욱 심하니,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핵실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뢸 것은 들어와서 대조(大朝)께 여쭙는 것이 옳다. 말단의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초정(草貞)을 신문하였는데, 공초는 전과 같았다.

 

4월 25일 병진

이기상(李麒祥)을 특별히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인상이 귀양길에 나서 겨우 강을 건너서 죽었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4월 26일 정사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졸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궁에서 임금과 신하가 다 젊었을 때부터 알았다. 무신년149)  에는 공을 세워 공이 사직(社稷)에 있었다. 효성을 다하려 하여 조정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기를 청하기에 내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허락하였는데 갑자기 이런 비보를 듣게 되니 슬픈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제반 부조와 상수(喪需)를 후하게 행하여 나의 뜻을 표하라."
하였다. 조현명의 자는 유회(幼晦)이니 조문명(趙文命)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기절(氣節)이 있어 옛날의 명석(名碩)에 스스로를 견주고, 녹녹하게 남의 뒤나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등과하자 오래지 않아 춘방관(春坊官)이 되어 신축년150)  ·임인년151)  의 흉당(兇黨)들이 세제(世弟)를 핍박함을 보고 보호론을 제창하여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았다. 무신년152)  에 적(賊)이 일어나자 종군(從軍)을 자청하여 군병이 중도에 이르렀는데 밤중에 갑자기 군중이 크게 놀라니, 조현명이 자객이 들어왔음을 의심하고 입고 있는 옷 자락을 잘라 가동(家憧)에게 주면서 ‘너는 이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내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라.’ 하고 칼을 집고 원수(元帥)의 장막에 들어가서 적을 수색할 것을 큰 소리로 외쳤는데, 적이 과연 잡히자 군중이 비로소 변동이 없었다. 난이 평정되자 공신에 책훈되고 마침내 영상에까지 올랐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청검(淸儉)하여 장원(墻垣)을 꾸미지 않았으며, 소주(疏奏)에는 개절(剴切) 질직(質直)하여 남이 하지 못할 말을 하였고, 전관(銓官)을 맡은 지 6년 동안에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부탁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뽐내기를 좋아하고 들뜨기가 쉬워 더러는 남의 기만을 당하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홧김에 일을 저지르고서도 그 나쁜 짓을 따랐으니, 세상에서는 이 점을 흠으로 여기나 이것으로 그 어짊을 가리지는 못하였다.

 

죄인 초정(草貞)이 물고(物故)되었다. 막렬(莫烈)은 놓아 보내고, 안도행(安道行)은 멀리 정배하며, 이성(李城)과 이보(李堡)는 형조로 하여금 놓아 보내게 하고, 이경명(李景明)·이인명(李仁明)을 모두 섬에 정배하게 하며, 김덕해(金德海)와 미처 체포하지 못한 죄인 김수일(金守一)은 아울러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지평 박사눌(朴師訥)이 말하기를,
"김덕해는 요망스런 권집(權䌖)의 종이니 처지가 참으로 의심스럽고 이양제와 또 이미 왕래하였으니 결탁한 형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신도 김덕해를 변방에 정배하여야 마땅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우길 일이 아니다마는, 변방은 과하니 멀리 정배하라."
하였다. 대체로 이 옥사는 극히 요사스러웠다. 일이 투서에서 발단하였는데 그 공초에 나온 바 저주(詛呪)와 흉물을 묻은 등의 정상과 나라를 원망하고 사람을 무함한 말들이 여러 죄인의 공초 중에서 모두 나왔었으나, 임금이 문목(問目) 이외의 발고(發告)는 모두 쓰지 말라 하였으며 옥사가 극비에 부쳐지고 문자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4월 29일 경신

신사건(申思建)을 대사헌으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남학로(南鶴老)를 정언으로, 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정홍순(鄭弘淳)을 부수찬으로, 이민곤(李敏坤)을 필선으로, 이명희(李命熙)를 겸 문학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도제조로, 김중만(金重萬)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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