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6권, 영조 28년 1752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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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유

임금이 효순 현빈(孝純賢嬪)에게 친히 제사를 지냈다. 친히 제문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안으로는 마음을 알아주는 어진 며느리가 없고 밖으로는 뜻이 통하는 어진 신하가 없다.’ 하였으니, 조현명(趙顯命)이 요사이 졸한 때문이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왕세손의 발인시에 종위사(從衛司)의 복색을 현빈궁(賢嬪宮)의 예대로 흑립(黑笠)·흑철릭[黑天翼]으로 하되 흑립의 장식은 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강원도의 불에 타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5월 3일 계해

예조에서 말하기를,
"본조의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판윤 박문수(朴文秀), 도감 당상 원경하(元景夏)와 함께 묘소에 나아가 경계를 정하고 화소(火巢)153)  를 만들었는데 서쪽으로는 복자현(卜子峴)에서 독송정(獨松亭)까지, 남쪽으로는 독송정에서 늑방교(勒坊橋)까지, 동으로는 늑방교에서 무현(武峴)까지. 북쪽으로는 무현에서 승전봉(勝戰峰)까지이며, 동쪽은 도성의 백호이기 때문에 호를 팔 수 없어 산등성이로 경계만 나누어 놓았습니다."
하였다.

 

5월 4일 갑자

호조 판서 감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이번 묘소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경사(京司)에서 진배(進排)하였으니 외방의 군읍에는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마는 경사의 공인(貢人) 등은 마치 새로 설치한 응역과 같고 또 행해지기 어려운 사단도 있었으므로 앞으로 묘소의 진배는 한결같이 경기 감영의 등록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농사일이 한창 바쁜 때라 백성을 부역시키기도 어려우며, 지금은 묘소에 재목을 쓸 일이 없으니, 서둘러서 베어 올 것이 없으므로 관동에서 형편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사복시(司僕寺)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사복시에서 관리하는 전관리(箭串里)의 밭은 사복시에서 세를 받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임진 왜란 때에 말을 끌을 사람이 없었음을 징계하여 경기의 백성 1백 20명을 뽑아 올려 전관리에 살게 하고 밭을 나누어 주어 생활의 터전으로 삼게 하였으며 또 남은 세곡(稅穀)으로는 조곡(糶穀)을 나누어 주어 진휼하는 저축을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내농포(內農圃)가 관리하는 신천(新川)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내농포의 밭이 혹 포락(浦落)154)  이 되면 사복시의 밭을 빌려 채소를 심어 공상(供上)하여 왔는데, 저지난 무자년155)  에 처음 대용으로 받기를 청하여 결국 전관리의 밭을 떼어가 버렸으니, 말을 끌 인부들은 농토를 잃고 점차 보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들으니 내농포의 밭 이생처(泥生處)156)  에 다시 개간할 것이 이미 원 평수가 족히 되고 또 잠실(蠶室)의 밭을 더 떼어 받은 것도 있다 합니다. 전에 떼어간 〈전관리의 밭을〉 사복시에 되돌려 줄 것이며, 여러 궁가(宮家)에서 자기들 채전을 사복시의 밭과 바꾸어 달라고 늘 요청하고 있으니 또한 윤허하시지 마시고 현저하게 법으로 삼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5월 7일 정묘

예조 판서 이익정(二益炡)이 존숭(尊崇)의 택일에 관하여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동조(東朝)157)  에 관계되느니만큼 지연할 수 없겠으나 다음 달이 두 번째 전향(傳香)이니 어찌 차마 받으려 하시겠느냐? 그러나 가을까지 기다리자면 너무 머니 이달 안으로 택일하여 들여보내라."
하였다. 이익정이 또 청양군(菁陽君) 유엄(柳儼)과 좌윤 유정(柳綎)이 졸(卒)하였다고 아뢰니, 임금이 도석(悼惜)하는 하교를 내렸다.

 

5월 8일 무진

임금이 호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국사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당인(黨人)들은 괴롭다고 하고 백성들은 원망스럽다고 하나 나는 임어한 지 20여 년에 일찍이 한 사람의 조정 신하도 억울하게 해친 일이 없고, 또한 한 사람의 미약한 백성도 침해한 일이 없다. 후일에 비록 꼭 한(漢)나라를 생각하고 구가(謳歌)하는 것처럼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필시 나를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주공(周公)이 《주례》를 지었으나 미처 시행되지는 못하였는데, 내가 만든 것도 꼭 행해질지를 어떻게 알겠느냐?"
하니,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뭇 신하들이 비록 형편없으나 전하께서 나라 일에 마음을 쏟으신다면 천하의 일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균역(均役)의 일도 또한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지? 조영국(趙榮國)의 소견은 홍계희(洪啓禧)의 책자와 별로 다른 것이 없던가?"
하니, 김상성이 말하기를,
"비록 꼭 다 같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의를 제기한 곳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영국은 사리의 판단에도 명철하고 지론(持論)함에도 어긋나는 일이 없으니 만일 두 당상을 불러들여 상세히 검토하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신은 언제나 ‘일에 다달아서는 두려워하고 생각하기를 좋아하여 기어코 이룬다.[臨事而懼 好謀而成者]’는 말은 바로 일을 이루는 요체(要諦)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그러기 때문에 전당(殿堂)에 올라가서는 각기 자기 소견을 주장하다가도 전당을 내려서면 화기를 잃지 않았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같은 가운데에서 다른 점을 찾고 다른 가운데에서 같은 점을 찾아 같고 다른 점을 합해야만 가위 대동(大同)의 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참으로 좋다."
하였다.

 

5월 11일 신미

하교하기를,
"3년 동안 무릎 위에서 길렀더니 이제는 꿈이 되었구나! 오늘은 재실(梓室)이 또 처량한 산천을 향하여 가겠구나! 교산(喬山)158)  이 지척(咫尺)에 있는데 광중(壙中)에 임하여 한 번 이별을 하지 않으면 죽는 날까지 한이 맺힐 것 같다. 내일 아침에는 몸소 광중에 임하여 한 번 울고 올 작정이니 그렇게 분부하라."
하였다.

 

여러 승지가 합문에 나아가 청대하였는데, 대개 장차 동가(動駕)를 정지할 것을 청하려는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동가는 목석(木石)이라도 다 감동할 것인데 청대한 승지들은 윤기(倫紀)도 모르느냐? 그들을 중추하라."
하였다.

 

5월 12일 임신

의소 세손(懿昭世孫)을 장사지냈다. 하루 전에 대전관(代奠官)이 계빈전(啓殯奠)을 행하였다. 참찬 홍상한(洪象漢)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참찬 홍상한이 삼가 길신(吉辰)에 찬도(欑塗)를 열겠습니다."
하였다. 선공감의 관원이 올라가서 찬도를 걷으니 참찬이 수건으로 재실을 닦고 관의(棺衣)를 씌웠다. 조전(祖奠)의 시각이 이르자 조전을 행하고 해시(亥時)에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견전을 마치자 독애책관(讀哀冊官) 한광조(韓光肇)가 책안(冊案) 앞에 나아가 애책문을 읽기를,
"유세차(維歲次) 임신(壬申) 3월 초4일 을축(乙丑)에 의소 세손이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졸하시어 석 달이 지난 5월 신유삭(辛酉朔) 12일 임신(壬申)에 양주(楊州) 안현(鞍峴)의 남쪽 기슭에 옮겨 가려하니 예에 따른 것입니다. 소역(素帟)이 열리고, 단조(丹旐)가 펄럭이니, 공축(工祝)159)  은 조전(祖奠)을 거두며 분분하게 울고, 지발(池綍)160)  은 길을 조심하며 멀리 가도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손성(孫星)이 갑자기 떨어짐을 슬퍼하시고, 소저(少邸)가 영영 적막해짐을 슬퍼했도다. 이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자취을 선양하게 하였다. 그 사(辭)는 이러하다.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돌보사, 신손(神孫)이 태어났도다. 상서로운 빛 하늘에 빛나고, 복록도 번성하였네. 총명한 재질과 온화한 기상이요, 별빛 같은 눈동자에 일월의 이마였다오. 삼전(三殿)의 기특한 사랑이요, 양궁(兩宮)161)  의 지극한 즐거움이었네. 아롱진 건책(巾幘)을 쓰고 책을 받아서 동궁까지 조작거리며 걸었고, 겨우 두 살이 되자 손가락으로 사방을 가리켰네. 글자는 얼마를 분간했는고 하니, 예순하고도 아홉자라.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눈물을 흘렸고 밥그릇을 열면 손으로 지범거리기도 하였다. 옥음(玉音)이 조금만 들리면 얼굴빛 쭝긋하고 기뻐 날뛰었으니, 천부의 효성은 민·증(閔曾)162)  과도 짝할 수 있었다오. 질박함을 취하고 호화로움을 싫어함은, 본질을 소중히 여기는 덕성이었네. 종사의 태산 반석같으리라고 팔도의 백성들 목을 늘이고 눈을 비비며 기대했는데, 어쩌자고 하늘은 아득하여 필경엔 신도(神道)도 변덕이 많구려! 빨리 굴러가는 상여(喪轝)는 막을 길 없고, 아득한 진경(眞境)에 노니는 것 따를 수 없구나. 아! 슬프도다. 난초의 새싹처럼 일찍이 무성했고, 기린의 새끼라고 다투어 칭송하였네. 자손의 계책 세워 감싸주시고, 기뻐함은 함이 농손(含飴弄孫)163)  하였지. 비록 열병에 걸려 끌기는 했어도 바로 나아 회복되리라고 기대했건만, 유부(兪跗)164)  는 의술을 다했어도 효험이 없이, 문득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도다. 아! 슬프도다. 조각 난간 처량하고 비단 장막 적막한데, 부앙간(俯仰間)에 진적(陳跡)을 이루니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슬픔만 돋구는구나. 생각건대 맑은 음성 귀에 쟁쟁하고, 잘생긴 그 얼굴 눈에 삼삼하도다. 구중 궁궐에 슬픔은 한이 없고, 많은 사람들의 눈물 움켜만 낸다. 아! 슬프도다. 울창한 새 묘역은 궁궐과 아주 가까우니, 영령이 앎이 있거든 조석으로 조알(朝謁)할지어다. 성상의 슬픈 회포 위로해 준다면, 이승과 저승이 어찌 다름이 있을손가. 현실(玄室)의 문이 닫치니 끝없는 밤이요, 궤연(几筵)은 엄숙한데 높은 산만 둘렸구나. 아! 슬프도다. 고금의 북망산(北邙山)에는 수요(壽夭)가 함께 가는데, 휘황한 옥돌들 천세에 꽃다우리라. 지극한 정회 은하수를 쏟은 듯, 글자마다 눈물지며 참고서 읽네. 아! 영명(令名)은 갔으나, 사책속에 길이 남으리로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책을 함에다 도로 넣고 드디어 발인하였다. 여재실관(舁梓室官)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상여를 밀자, 섭익례(攝翊禮)가 천담복 차림으로 꿇어앉아 수레에 올리라고 찬청(贊請)하니 교명책인(敎命冊印)·시책인(諡冊印)·애책(哀冊)을 각각 요여(腰轝)에 올려놓고 향로(香爐)·향합(香盒)을 향정(香亭)에 올려놓았으며, 혼백함(魂帛函)을 요여에 안치하고 신주함(神主函)을 그 뒤에 놓았다. 섭익례가 나아가 재실 앞에 이르러 꿇어앉아 상여 앞으로 나오라고 찬청하니, 내시(內侍)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뜰을 내려 서자 참찬(參贊)이 천담복 차림으로 여재실관과 내시를 인솔하고 윤여(輪輿)로 재실을 받들어 뜰을 내려와서 소금저(素錦褚)로 덮었다. 섭익례가 꿇어앉아 상여에 올리라고 찬청하고, 외문(外門) 밖에 이르러 섭익례가 꿇어앉아 수레에 올리라고 찬청하였으며, 또 꿇어앉아 출발(出發)하라고 찬청하였다. 혼백여·요여·우보(羽葆)165)  ·명정 및 삽(翣)이 차례로 늘어서니, 승지는 천담복을 입고, 강서원(講書院)과 위종사(衛從司)의 관원은 최복(衰服)을 입고 걸어서 뒤를 따랐다.【판전(板廛)의   병문(屛門)166) 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고 수행하였다.】  종묘의 앞길에 이르자 여사(舁士)들이 줄을 늦추어 메니 섭익례가 꿇어앉아 출발하기를 찬청하였고, 창덕궁의 앞길에 이르러 또 그렇게 하였다. 숭례문(崇禮門) 밖 노제(路祭) 자리에 이르러 노제를 지냈는데 노제가 끝나자 백관은 하직하였고, 배종(陪從)하는 여러 관원은 차례를 지어 배종하였다. 묘소에 이르러 영장궁(靈帳宮)에 재실을 봉안하고 조전(朝奠)과 상식(上食)을 올렸다. 천전(遷奠)을 행하자 참찬 홍상한(洪象漢)이 꿇어앉아 찬도(欑塗)를 열겠다고 아뢰니 섭익례가 수레에 올리라고 찬청하고 또 상여에 올리라고 찬청하였다. 연도(羡道)의 남쪽 봉사위(奉辭位)에 이르러서는 녹로(轆轤)167)  를 써서 재실을 받들어 내렸다. 참찬 홍상한이 여재실관 등을 인솔하고 재실을 받들어 현실(玄室)의 대관(大棺) 안에 북쪽으로 머리가 향하게 하여 안치하였다. 참찬이 내시를 데리고 관의(棺衣)와 명정(銘旌)을 재차 손보아 평평하고 바르게 하고 도감의 제조가 그 수하(手下)를 데리고 보삽(黼翣)과 불삽(黻翣)·화삽(畵翣)을 재실의 양 곁에 꽂고 현실을 폐쇄하였다. 참찬과 지평 박사눌(朴師訥)이 함께 폐쇄한 것을 살피고 박사눌이 봉함에 쓰기를 근봉(謹封)이라 하고 참찬이 흙 아홉 삽(鍤)을 덮고 이어 회(灰)를 다져 채웠다. 또 애책(哀冊)을 퇴광(退壙)의 서쪽에 꿇어앉아 바치고 하사한 옥백함(玉帛函)을 역시 꿇어앉아 애책의 남쪽에 바쳤다. 도감 제조가 수하를 데리고 명기(名器)와 복완(服玩) 등 갖가지 기구(器具)를 받들어 차례로 진열하고 작공(作工)을 거느리고 계속하여 일을 마쳤으며, 지석(誌石)을 내려놓자 뭇 관원이 곡하며 재배하고 하직하였다.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우리 세손의 유휘(幼諱)는 창흥(昌興)이니, 이는 백일에 명명(命名)한 것이다. 나의 즉조(卽祚) 26년 경오(庚午) 8월 27일 축시(丑時)에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였는데, 날 때에 붉은 빛이 하늘까지 뻗쳤었으며 곧 빈궁(嬪宮) 홍씨(洪氏) 소생이다. 외조는 참판 홍봉한(洪鳳漢)이니 영안위(永安尉)168)  의 현손이다. 이듬해 신미(辛未) 5월 13일에 세손으로 봉하여 오장복(五章服)을 입히고 숭문당(崇文堂)에서 품에 안고 예를 행하였다. 날 때부터 석대(碩大)하였고 의젓하기가 어른같았다. 책봉할 때에 다시 명명하기를 정(琔)이라 하고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기거하였다. 임신년 3월 초4일 묘시(卯時)에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薨逝)하니 나이 겨우 세 살이다. 아! 슬프도다. 이것이 우리 세손의 생졸(生卒)이다.
아! 세 살짜리 어린이에게 어떻게 행록(行錄)을 기술하겠으며 시호가 있고 지문(誌文)이 있겠는가? 그러나 행록이 없으면 어떻게 징신이 되겠는가?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기술하려니 간장이 찢기는 듯하다. 기왕 시말을 기술하였으니 행의(行誼)를 기록해야 하겠는데, 아! 내 어찌 차마 세 살짜리 손자에게 한 마디인들 과장할 수 있겠느냐? 다만 그 대강만 기록하련다. 두 살되던 겨울부터 능히 글자를 알았다. 옛사람도 여섯 살에야 비로소 방위의 이름을 가르쳤는데 겨우 두살에 이미 사방을 가리키면 그 곳을 대답하였고, 글자 수를 아는 것을 시자(侍者)더러 기록하게 하였더니 곧 예순하고도 아홉 자였다. 또 이(李) 자를 가리키면 스스로를 가리켰는데 이는 우리 성을 말한 뜻이다. 내가 무엇을 먹을 때면 와서 밥상 오른쪽에 서서 손으로 복개를 열곤 하였다. 작년 겨울에 효순(孝純)의 초상으로 며칠을 못보았더니 나의 말만 하면 바로 눈물을 머금었고 또 나의 소리만 들으면 아무리 멀고 가늘게 들려도 반드시 귀담아 듣고 좋아하였으니, 이는 바로 천부의 효성인 것이다. 모든 아이의 성미는 화사함을 좋아하는데 항상 투박하고 질실(質實)한 것을 취하였으니, 이로써 양지(良知)의 효성과 또 그 총명함을 〈알 수 있었다.〉 병이 한 번 나자 달포를 끌었는데 마침내 고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빛같은 눈망울과 또렷한 음성을 어디에서 다시 보고 들을 것인가?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몸소 행록을 짓고 이어 지문을 지었으며 재실(梓室)의 상(上) 자와 묘표(墓表)의 앞, 뒷면을 모두 손수 썼다. 【행록은 현실과 본묘(本廟)에 간직하였고, 지석은 혼유석(魂遊石) 밑에 간직하였다.】  모든 의물(儀物)은 반드시 제도보다 낮추게 하였으니, 뒷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손자를 위하여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게 하려 함이다. 4월 12일에 의소(懿昭)로 시호를 내렸고 5월 12일에 양주(楊州)의 안현(鞍峴) 남록(南麓) 사향원(巳向原)에 장사지냈다. 때는 황명(皇明)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3임신(三壬申)169)   모춘(暮春)에 나의 양지(良知)한 현손(賢孫)을 위하여 슬피 울면서 기록한다."
하였다. 현실을 닫기를 기다려 제주관(題主官)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가 올라가서 탁자 앞에 나아가 먼저 함중(陷中)170)  에 쓰기를, ‘조선국 왕세손 휘 정 신주(朝鮮國王世孫諱琔神主)’라고 쓰고 다음 앞 면에 쓰기를, ‘의소 세손 신주(懿昭世孫神主)’라고 썼다. 쓰기를 마치자 입주전(立主奠)을 올리고 이어 반우(返虞)하였다. 【모두 《상례보편(喪禮補編)》의 의식에 따른 것이다.】  봉묘(封墓)의 제도는 전면의 높이가 6척 3촌 3푼이고, 후면의 높이가 5척 7촌 3푼이며, 좌우의 높이가 6척 2푼이고, 직경이 19척, 둘레가 57척이다. 표석을 세우고 전면에 쓰기를, ‘조선 의소 세손지묘(朝鮮懿昭世孫之墓)’라고 하였는데, 어필(御筆)이다. 후면의 어제문(御製文)에 이르기를,
"나의 즉조 26년 경오 8월 27일에 탄생하여 임신 3월 초4일에 졸하니, 아! 나이 겨우 세 살이다. 5월 12일에 양주의 안현 남록 사향원에 장사지냈다. 아! 이것이 우리 세손의 생졸이다. 전면의 대자(大字)와 후면의 음기(陰記)를 모두 손수 썼다. 모든 의물을 수효도 줄이고 제도도 줄였으니 뒷사람으로 하여금 내 손자를 위하여 묘를 보고 눈물을 흘리게 함이다."
하였다. 임금이 양(揚)이 없는 흑사(黑紗)의 철릭[貼裏]을 갖추어 입고 수레에 올라 명정문(明政門)을 나서니 백관은 평상시의 청융복(靑戎服) 차림으로 칼만 차고 시위하기를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였다. 임금이 선인문(宣仁門) 앞길에 이르러 선전관을 불러 하교하기를,
"거동할 때에는 길가 곡식을 밟기가 쉬우니, 구경 나온 백성들이나 시위하는 군병들이 짓밟지 말라는 뜻으로 이 두 영기(令旗)를 가지고 금위영의 도감에게 분부하여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의소(懿昭)의 묘소에 이르러 막차(幕次)에 들어가 최복으로 갈아입고 곡림(哭臨)하고, 오시(午時)에는 광혈(壙穴)에 임하여 재실을 내려놓은 것을 보고 또 곡림한 뒤에 대차(大次)로 돌아와 흑사의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수레에 올라 재궁(齋宮) 밖에 나가 대사간 조재민(趙載敏)을 탈고신(奪告身)하라고 명하고 지평 박사눌(朴師訥)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 앞날 임금이 광혈(壙穴)에 임하여 한 번 곡하고 오겠다는 하교를 내리자 모든 승지가 청대하니 임금이 거듭 엄한 하교를 내려 모든 승지와 제품(提稟)한 중관(中官)을 중추하게 하고 심지어 법가(法駕)171)  를 가로막은 것은 군율(軍律)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꾸짖었으나 양사에서는 미처 청대하지 못하였었다. 이날 임금이 묘소에서 회가(回駕)하려 하는데 대사간 조재민이 비로소 청대하자 임금이 까닭을 물으니, 조재민이 말하기를,
"몸소 광혈(壙穴)에 임하는 것은 제왕가(帝王家)의 상례(常禮) 밖입니다. 직책이 대각(臺閣)에 있으니 어찌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대각의 체통을 위해서 왔단말이냐?"
하고, 기장 현감(機張縣監)에 보직(補職)하라고 명하고 재촉하여 숙명(肅命)하게 하였다. 조 재민이 승지에게 묻기를,
"숙명 단자는 직접 올려야 하는가?"
하니, 임금이 거만하다 하고 기장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지평 박사눌이 앞으로 나오자 임금이 그가 서서 아뢰고 땅에 부복하지 않았다 하여 중추하라 하였다. 박사눌이 겨우 대간(大諫) 두 자를 말하자마자, 임금이 그가 추고를 당하고도 인피하지 않는다 하고 체직을 명하였다. 임금이 말에 오르자 박사눌이 미처 융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조복 차림으로 맞으니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가 뒤미처 그만두라 하고, 다시 조재민에게는 탈고신 삼등(奪告身三等)172)  하라 명하였으며, 박사눌에게는 파직하라 명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들어가서 말하기를,
"중관이 만일 승지의 구대(求對)를 품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와 아래가 서로 막히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조재민과 박사눌을 구해(救解)하니, 모두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5월 13일 계유

왕세손의 재우제(再虞祭)를 행하였다.

 

지중추부사 홍계희(洪啓禧)가 상서하여 사면하였는데, 이양제(李亮濟)의 일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답을 내려 힘써 나오라고 하였다.

 

5월 14일 갑술

예조에서 아뢰기를,
"존숭의 길일을 이달 5월 26일로 가렸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대사헌 신사건(申思建)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대사간 조재민이 어제 구대(求對)한 것은 뜻이 말씀을 올리고자 함에 있었는데 탈고신(奪告身)의 율(律)을 베풀기에 이르렀으며, 전 지평 박사눌은 소회를 아뢰려 하다가 말 한 마디 진달하지 못하고 역시 파직의 벌을 받았으니, 언로가 막힌 때를 당하여 말로써 죄를 얻는 것은 또한 나와서 간하는 도리에 흠이 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조(大朝)께서는 중관(中官)173)  의 아룀이나 승정원의 청대까지도 엄한 하교가 계셨습니다. 무릇 승지의 청대를 중관에게 전하면 중관은 위에 아뢰는 것이 내려온 상례(常例)입니다. 그런데 만약 중관이 중간에서 막혀짐에 따라 덮어두고 진달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장래에 폐단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대조께 앙품하여 먼저의 전지(傳旨)를 모두 거두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의 처분이신데 어떻게 다시 여쭙겠는가?"
하였다.

 

5월 15일 을해

필선 이민곤(李敏坤)이 상서하여 열성조께서 부지런히 배우시고 묻기를 좋아하셨던 덕을 두루 아뢰고 이어 때때로 궁관을 접견하시고 슬픔으로 인하여 학문을 폐하는 일이 없게 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요사이는 병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소견(召見)하지 못하였으나 조금만 나으면 마땅히 영을 내리겠다."
하였다.

 

왕세손의 삼우제(三虞祭)를 행하였다.

 

5월 16일 병자

신회(申晦)와 김치인(金致仁)을 승지로 삼았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상을 내렸다. 장생전(長生殿) 도제조 김재로(金在魯)에게는 숙마(熟馬)를, 세 도감(三都監) 도제조 김약로(金若魯)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묘소 도감 제조 원경하(元景夏)와 박문수(朴文秀)에게는 각각 숙마를, 빈궁(殯宮)·혼궁(魂宮)의 양 도감 제조 이익정(李益炡)·홍봉한(洪鳳漢), 예장 도감(禮葬都監) 제조 김상성(金尙星), 계찬실관(啓欑室官) 홍상한(洪象漢), 첫번째의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홍봉한(洪鳳漢), 시책문(諡冊文) 제술관(製述官) 조관빈(趙觀彬), 애책문(哀冊文) 제술관 원경하(元景夏), 인전문(印篆文) 서사관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 등에게는 각각 숙마를 내리고 현실 명정(玄室銘旌) 서사관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시책문(諡冊文) 서사관 김상익(金尙翼), 애책문(哀冊文) 서사관 남유용(南有容), 대전관(代奠官)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제주관(題主官) 낙풍군 이무(李楙), 도감 낭청 홍낙성(洪樂性)·윤광찬(尹光纘), 봉폐관(封閉官) 박사눌(朴師訥) 등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박사눌은 뒤에 이조의 계복(啓復)으로 인하여 준직(准職)174)  에 제수하였고, 그 밖에 당상과 낭청은 혹은 숙마와 혹은 궁전(弓箭)을 내리기도 하였으며, 혹은 승서(陞敍)하고 혹은 참상(參上)에 올리기도 하였다. 최천약(崔天若)은 예전부터 나라의 역사(役事)에 수고가 많았다 하여 특별히 가자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양(揚)이 없는 흑단령(黑團領)과 청정(靑鞓)·소옥대(素玉帶)를 갖추어 입고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다례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때가 되면 의소묘(懿昭廟)를 여기에 세워야겠다. 3년 뒤에는 먼저 그 궁의 정당(正堂)에 들게 하였다가 사당으로 들어간 뒤에는 전사청(典祀廳)과 여러 대청을 모두 겸용하게 할 터이다. 사당을 지을 처소를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살펴본 뒤에 도면을 그려 뒤에 참고가 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서글픈 표정으로 또 말하기를,
"여기는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豊沛)와 같은 곳인데, 아들과 손자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더욱 처량하구나."
하고, 바로 환궁하였다.

 

5월 17일 정축

왕세손의 사우제(四虞祭)를 행하였다.

 

엄우(嚴瑀)를 대사간으로, 김조윤(金朝潤)을 장령으로, 이만회(李萬恢)·송덕중(宋德中)을 지평으로, 송문재(宋文載)를 문학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조중회(趙重晦)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18일 무인

왕세손의 오우제(五虞祭)를 행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혼백을 받들고 묘소에 모시고 나아가 곡장(曲墻) 뒤 15보(步)되는 곳의 간방(艮方)에 매안(埋安)하였다.

 

5월 21일 신사

내의원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상언(上言)으로 인한 승자(陞資)를 일률적으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모두 백 살이나 되어야만 가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은 70세도 또한 드물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백 살이겠는가? 이는 혈구(絜矩)175)  의 도리가 아니다. 이 뒤로는 나이 80세 된 일명(一命)176)   이상의 사부(士夫)와 일찍이 직명을 가졌던 중서인(中庶人)은 모두 허시(許施)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쌍령(雙嶺)의 사절신(死節臣) 허완(許完)의 증손 전 전부(典簿) 허상(許鋿)과 강도(江都)의 사절신 홍명형(洪命亨)의 증손 전 참봉 홍우구(洪禹九)가 나이 모두 80세이니 특별히 가자를 명하심이 아마도 늙은이를 높히고 절의를 숭상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부령 부사(富寧府使) 윤지수(尹志修)를 내직으로 옮겨 주라고 명하였다.

 

5월 22일 임오

윤급(尹汲)을 이조 참판으로, 남유용(南有容)을 대사성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동지 경연사로, 윤동성(尹東星)을 사서로, 윤동도(尹東度)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지평 송덕중(宋德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휘호(徽號)를 더 올리는 것은 본래 대조(大朝)의 타고 나신 성덕에는 손익(損益)이 없는 것이나 당초에 정청(庭請)을 마지 못해 따르신 것은 자전(慈殿)의 하교에 순종하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이번에 시일을 앞당긴 것도 또한 소중히 여기는 바가 있는데 연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작년 겨울 이후로 국운이 불행하여 연달아 막중한 애척(哀慽)이 있었고 한 달안에 슬픔과 기쁨이 서로 고달프게 하고 조정의 반열에도 위로와 하례가 섞바뀌었으니 나라의 체통으로 헤아려 볼 때 황망하고 급거한 듯한 면이 있습니다. 청컨대 대조께 아뢰어 날짜를 조금 물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떻게 손 아래의 슬픔으로서 삼전(三殿)의 상호(上號)를 물리겠는가?"
하였다.

 

5월 23일 계미

혼궁(魂宮)과 묘소의 중삭제(仲朔祭)를 하순(下旬)으로 물려서 지내라고 명하였다. 대개 중삭제는 으레히 상순으로 날을 받는 것인데 상순은 장례 전이었고 중순은 졸곡 전이었기 때문에 대신에게 수의(收議)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헌의를 따른 것이다.

 

임금이 호조와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의소궁(懿昭宮) 제수(祭需)의 공가(貢價)에 모곡(耗穀)을 돈으로 만들어 9만여 냥을 떼어서 대충해 준 것은 대체로 민결(民結)에서 돈을 책징하는 폐단을 염려한 것이니 백성에게는 큰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효순궁(孝純宮)의 제수 5만 냥을 마땅히 복정(卜定)177)  할 것이 있는데, 외방의 세민(細民)들은 전후의 사정이 달라진 줄은 모르고 필시 조정의 명령에 신빙성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신미년178)  의 모곡을 돈으로 만든 것이 6도(六道)를 통산하면 필시 14만 냥은 될 것으로 여기오니 이 돈으로 변통하여 공가를 지급하고 다시는 민결에 분담시키지 말아야 모든 백성에게 시종의 혜택이 되리라고 여깁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사령(赦令)을 반포한 뒤에는 의당 경과(慶科)를 설행하여야 하는데 시관의 감정만 공정하면 고(故) 판서 김진규(金鎭圭) 같은 이는 대제학 세 사람을 절제(節製)179)  에서 얻기도 하였는데, 하필이면 증광시(增廣試)를 설행하여야만 실재(實才)를 얻는다고 하겠느냐? 호조가 바닥이 나기는 요사이 같은 때가 없었다. 또 한밤중의 자전 하교인지라 비록 마지못해 따르기는 하였으나 어찌 차마 확대하여 정시(庭試)를 크게 치룰 것이야 있겠느냐? 작년의 예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처 정씨(鄭氏)에게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정씨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6대 손녀인데 집안에서의 기거하는 의범(懿範)이 일문의 긍식(矜式)이 되었었는데 홀로 된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을 다지고 미음도 마시지 않아 결국 따라 죽었다. 이에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그 실상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5월 25일 을유

이조 참판 윤급(尹汲)이 사직 상서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 추후 토죄(討罪)의 논의가 빈번하게 일어남을 비롯하여 문득 조정의 알력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매양 윤리와 기강은 세도(世道)가 평탄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갑자기 정체(停滯)한 데에 맡겨 둘 수는 없다고 여겨왔습니다. 신은 병인년180)  에 앞장서서 창도(倡導)하였고 이어 작년에 또 발론하여 일심으로 추진하여 몇 번을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그 죄를 논하기로 한다면 신이 사실 으뜸이 됩니다. 그러나 뜻밖에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분하여 신진의 간관(諫官)들만 엄한 견책을 받아 먼 변방에서 시체로 돌아오고 신은 요행히 모면하여 도리어 직책까지 받고 있으니, 이 어찌 의리상 편안할 일이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5월 26일 병술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존호를 받았다. 존호를 올리기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상언(上言)하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보명(寶命)181)  은 더욱 새로워 태운(泰運)을 맞아 지치(至治)를 도모하였고, 대의(大義)가 더욱 나타나니 비호(賁號)182)  를 올려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이는 국가의 전장(典章)에 따름이요, 신하의 사사로운 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 주상 전하께서는, 마음을 전해 받으심이 정일(精一)하시고, 집에서는 《춘추(春秋)》를 익히셨습니다. 독행(篤行)은 민·증(閔曾)183)  을 따를 수 있어 백성들도 도솔(導率)의 교화에 귀착되었고, 홍유(弘猷)는 한(漢)·당(唐)을 능가하니 온 세상이 태평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연전의 선양은 생각하면 표현에 미진함이 있었는데, 노령에도 분발하시니 아직도 그 사업 무궁하겠습니다.
전에 영고(靈考)184)  께서는 신경(神京)185)  을 몹시도 그리워하셔 금원(禁苑)에 황단(皇壇)186)  을 창건하셨습니다. 재조(再造)187)  의 은혜를 갚았으니 열성조에서 존주(尊周)188)  하던 정성을 본받으심이요, 대의를 만방에 표방하니 후손에게 이연(貽燕)189)  의 준칙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어 우리 임금님 잘도 계술(繼述)하신 덕으로, 결국 이제(二帝)를 추향(追享)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창업하던 초기에 국호를 내렸으니 일찍이 명나라 태조의 지극한 혜택을 입음이요, 위급한 계제에 군대를 내주었으니 의종(毅宗)의 깊은 인덕 어찌 잊으리까? 만절(萬折)190)  의 조종(朝宗)은 사실 선훈(先訓)에서 받았으나, 일체로 향사(享祀)한 것은 당시에는 겨를이 없었습니다. 천운이 회복되지 못하여 세계는 깊은 밤에 빠져들었는데, 신충(宸衷)의 감화를 넓혀서 전례(典禮)를 백년 뒤에도 갖추어 들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선조의 훌륭하셨음에 빛을 더하는 일인 줄을 알기는 하였으나, 이는 때가 오늘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바람과 번개 번득이니 어렴풋이 옥로(玉輅)191)  가 강림(降臨)한 듯하였고, 변형(邊鉶)192)  은 가로 세로 빽빽하니 엄연히 청묘(淸廟)의 적합한 흠향입니다. 미쁘게도 의리의 올바름을 얻어 길이 억대(億代)의 명성을 세웠고, 효제의 윤리를 다함에 바탕하여 널리 삼강(三綱)의 첫 대목을 천명하였습니다. 모두 전고에 듣지 못했던 훌륭한 절의를 우러렀고, 다시 하늘에서 명(命)을 밝히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진 성문(聲聞) 본디 드러났건만 어루만져 다스린 공렬(功烈) 빛을 더하고, 만년(晩年)의 복록 한창 성대하지만 크게 내려준 복을 받는 것이 더욱 융성합니다. 훌륭한 존호는 더 높히기에 참으로 합당하니, 성대한 의식으로 송축함을 어찌 늦추리까? 겸양의 덕 고집하고 윤허를 미루시어, 몇 번이나 백관의 제청(齊請)을 번거롭게 하셨으나, 자전의 하교 받들고 억지로 따르셔서 크게 사조(四朝)의 옛 전장(典章) 이으셨습니다. 신 등은 큰 소원 그지없어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고 존호를 가상(加上)하기를 장의 홍륜 광인 돈희(章義弘倫光仁敦禧)라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여망에 부응하셔서 광대한 규모를 더욱 힘쓰소서. 신령한 보록(寶籙) 면면(綿綿)히 번창하여 높은 하늘과 짝하여 무궁하고, 성스런 유모(猷謨) 밝게 빛나 후세에 전하여 실추함이 없게 하소서. 신 김재로(金在魯) 등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즐거워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상언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전에 휘호(徽號)를 올리기를,
"국왕 신 【어휘이다.】 은 머리 숙여 재배하고 삼가 책보를 받들어 상언하나이다. 삼가 훌륭한 모유(謨猷)로 자손을 감싸시니 팔역(八域) 끝까지 어지심 받들었고, 호를 높여 어버이 현양함에 두 글자 더하여 덕을 드날리겠습니다. 이에 이전(彛典)에 따라 조그마한 정성을 펴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혜순 자경 헌열 광선 현익 강성 정덕(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 대왕 대비께서는 사록(沙麓)193)  의 상서(祥瑞)에 응하셔서 염유(簾帷)에서 복록을 누리셨습니다. 성신(聖神)의 세상에서 음화(陰化)를 베푸심은 태사(太姒)194)  가 주(周)나라의 배필이 된 것과 같았고, 위의(危疑)의 시기에 큰 계책을 결행하심은 고태후(高太后)195)  가 송(宋)나라를 도움과 같았습니다. 모의(母儀)는 오래일수록 어진 규범(閨範) 더욱 드러나셨고, 나라의 봉양이 갖추어졌으나 검박한 덕성 더욱 나타나셨습니다. 날로 세 차례를 뵙고 오직 훈계하신 말씀 실추하지 않기를 기대하였고, 한 해에 한 번 수상(壽觴) 올리면서 매양 겸양하신 뜻 돌리지 못함을 한탄하였습니다. 자전의 보령(寶齡) 높아지시니 경축하는 마음 갑절이나 간절하였고, 책문(冊文)의 존호 여러차례 올렸으나 어찌 선양에 족하였겠습니까? 양덕(凉德)196)  이 마지못해 군정(群情)에 따르게 된 것은 작은 정성이나마 의열(懿烈)은 드러내고자 힘입니다. 의리로 정삭(正朔)197)  을 높힘은 선조(先朝)에 빛이 될까 하여서이고, 예절로 장추(長秋)198)  를 높힘은 다만 오늘날에 유감이 없이 하고자 함입니다. 과궁(寡躬)으로 하여금 유서(遺緖)를 실추하지 않게 함은 스스로 자훈(慈訓)의 도와 주심인 줄 알겠고, 성대한 의전(儀典)을 돌아보아 반드시 옛 법을 상고하니 조정 의논이 있는 것을 알겠습니다. 비록 신하로서 임금을 현양하려는 뜻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자식이 어버이 높히려는 정성만 하겠습니까? 한밤중 은근하신 글발에 감동하여 당초의 뜻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1만 년 길고 긴 복록을 송축하오니 지극한 소원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덕성과 공적은 금석의 옛 기사(紀事) 아닌 것이 없지만, 한편 기쁘고 두려운 마음이 천일(天日)의 새 규모(規模)에 어찌 늦추겠습니까? 자전께 아뢰어 얄팍한 이 마음 헤아려 주시고, 좋은 날 가려 공경히 소중한 예식 행하여 삼가 존호를 올리기를 수창(壽昌)이라 하였으니, 엎드려 생각건대 거룩한 호(號) 크게 받드시사 순일한 복록 성하게 누리소서. 성대한 덕성은 징험이 있으니 구오복(九五福)199)  에 강(康)과 수(壽)이요, 아름다운 천명은 어긋남이 없으시니, 팔천세(八千歲)로서 봄을 삼고 가을을 삼겠습니다. 신 【어휘이다.】 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즐거워 머리 숙여 재배하고 상언하나이다."
하였다. 중궁전에 존호를 올리기를,
"영의정 김재로 등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상언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곤위(坤位)에 나아가심으로써 홍도(弘圖)를 돕기 시작하였고, 건존(乾尊)과 짝하심으로써 아울러 이전(彛典)에 따라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성스레 현책(顯冊)을 받들어, 아름다운 이름 밝힙니다.
삼가 생각건대 혜경 왕비(惠敬王妃) 전하께서는, 주(周)의 구신(九臣)200)  에 하나를 더하시고 당(唐)의 십칙(十則)201)  도 지으실 만합니다. 굉담(紘紞)202)  을 낮에 짜면서도 계월(鷄月)203)  로 경계하는 글귀를 아뢰고, 《춘추(春秋)》를 밤에 외우면서 마장(馬杖)204)  의 존주(尊周) 양이(攘夷)의 의리를 기리셨습니다. 보령(寶齡)은 난로(難老)205)  와 가지런하셨고, 경복(景福)은 무한히 번연하오리이다. 중전(中殿)의 회갑 돌아옴을 맞아, 온통 해가 돋는 듯한 축복 간절히 올리고, 대전에 존호 아룀을 당하여 견천(俔天)206)  의 아름다움을 포양합니다. 성상께서는 굳이 겸손을 고집하셔, 열흘이 지나서도 더욱 굳건하셨습니다. 자전의 하교 간절하셔 마지 못해 받드시니, 백관은 용동(聳動)하여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오직 해와 달이 덕으로 짝하신 빛 더하니, 그래서 두 글자 더 높히는 성전(盛典)을 함께 하셨습니다. 황상(黃裳)207)  이 길(吉)에 당하니 동조(東朝)208)  를 모시고 경하를 맞이했으며, 동관(彤管)209)  이 명예로움 기록하니 서루(西樓)를 송축하여 함께 빛냅니다. 거의 중외의 큰 바람에 부응해 주셔서 이에 조종조의 옛 전장(典章)을 따르겠습니다. 신 등은 큰 소원 그지 없어, 삼가 책보 받들어 존호를 더 올리기를 장신(莊愼)이라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꽃다운 정열(貞烈) 더욱 빛내시고, 아름다운 규범 더욱 드러내소서. 금빛 글씨 옥의 도장에 소박(素朴)한 치마 덕성을 드러내고, 강릉(岡陵)의 수 축원하며 천세 부르는데 신선한 갈포(葛布) 옷 순화(淳化)를 폈습니다. 신 김재로 등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즐거워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상언하나이다."
하였다. 대왕 대비전에 책보를 친히 전할 때에 통례가 전하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꿇어앉아 위차(位次)에 나오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규(圭)를 잡고서 판위(版位) 위로 나아가 북향하고 사배례를 행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함께 사배례를 행하였다. 사배례가 끝나자 임금이 규를 꽂고 꿇어앉아 책보를 받아 정사(正使)  【정사는 영의정 김재로이다.】 에게 주었다. 정사가 정문을 경유하여 도로 책상에 놓으니 임금이 규를 잡고 사배례를 행하자 백관도 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기를,
"왕은 말한다. 뜻을 굽히고 자전의 전지를 받들어 부끄럽게도 존호를 받았고, 어버이를 현양하여 보책의 의절을 더하고 이에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였다. 이에 빛나는 칭호 드날리고 크게 사방에 고하노라. 보잘것없는 내가 욕되게도 큰 유업을 받들었도다. 신경(神京)을 멀리 바라보며 인조께서 요배(遙拜)하신 정성을 사모하였고, 만년에 마음 상하매 효종의 지극히 비통하신 하교를 우러러 보노라. 생각건대 이 두 황제를 추향(追享)하는 행사를 가진 것은, 바로 성고(聖考)께서 대보단(大報壇)을 세우신 정성을 따름이로다. 명나라 태조의 은덕 편방(偏邦)을 덮어 처음으로 국호를 내렸고, 의종(毅宗)의 내지(內地)와 같이 보신 성려 위란에 다달아 군사로 도왔구나. 칠묘(七廟)는 이미 폐허가 되었으나 어찌 차마 망극하신 지덕을 잊겠으며, 삼단(三壇)에 아울러 향사 올리니 경황없는 예절은 대충 닦아졌다. 여러 신하들 포양하는 정성으로, 열성조의 존숭하던 절의를 따르고자 함이로다. 이는 《춘추》의 유의(遺義)이나 어찌 스스로 존양(尊攘)의 공에 비기겠느냐? 감싸주신 큰 유모(猷謨)에 계술의 책임 다하지 못할까 두렵다. 언제나 충효의 훈계를 받들었으나 직분의 당연함에 지나지 않았고, 만약 조종조에 아름다움을 짝할진대 그 어찌 사업이 드러나지 않을까? 백관의 호소 비록 간절하였으나, 한 마음의 겸허함을 돌이키기 어려웠다. 인덕이란 성인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의 부끄러움만 깊어지고, 복은 곧 상제께서 내려주셨으니 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삼겠는가? 자전께서 특별히 전지를 내리신 뜻 받들어, 나 소자(小子)는 억지로 본 마음 바꾸었노라. 겸손을 고집함이 지나친 사양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신명께서 질정할 수 있는 것이며, 어버이 섬기는 데에는 무위(無違)보다 더 큼이 없으니 드디어 지극하신 뜻을 받들기로 하였도다. 종전의 의열을 회상해 보면 슬픈 심회 어찌 견디겠는가? 모의(母儀)를 높이 받들어 공경하여 현양(顯揚)의 소원을 편다. 더구나 지금 백년의 천운은 극도로 비색(否塞)했으니, 정히 열성의 심법 더욱 밝히는 일이 급하도다. 황통(皇統)이 끊겼으니 만절(萬折)의 맹세는 맑은 한수(漢水)에 헛되이 흐르고, 인심이 감격함은 일양(一陽)이 고음(錮陰)에서 회생하기를 기다리노라. 내 한 몸 어루만져 보매 비록 얼굴이 부끄러우나 풍성(風聲)을 추구해 보면 뉘라서 경청하지 않을손가? 마음과 의식 갖추어 비궁(閟宮)에 경건하게 고하였고, 내외가 모두 즐거워 하니 인하여 전 강토에 크게 고유했도다.
이에 일시(一視)의 인(仁)을 미루어, 사방에 은덕이 두루 미치게 하노라. 금월 26일 새벽 이전으로부터 잡범(雜犯)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노라. 아! 큰 업적 정히 성취(成就)의 단계에 속하였는데 어떻게 무일(無逸)210)  의 경계를 늦출 수 있겠는가? 뭇 신하들의 심정 향상에 더욱 간절하니 서로 유신(維新)의 지치(至治)에 힘쓰리로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모두 알기를 바란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정보(李鼎輔)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49면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註 181] 보명(寶命) : 천명을 뜻함.[註 182] 비호(賁號) : 휘호와 같은 뜻.[註 183] 민·증(閔曾) : 민자건(閔子蹇)·증삼(曾參).[註 184] 영고(靈考) : 숙종.[註 185] 신경(神京) : 명나라 서울을 지칭한 말.[註 186] 황단(皇壇) : 대보단(大報壇)을 말함.[註 187] 재조(再造) : 나라를 중흥하게 함.[註 188] 존주(尊周) :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존숭(尊崇)하는 것. 곧 왕실을 높이고 이적(荑狄)을 물리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정통의 명(明)나라를 존숭한다는 뜻임.[註 189] 이연(貽燕) : 편안함을 물려줌.[註 190] 만절(萬折) : 만절 필동(萬折必東)의 준말. 중국의 큰 강은 굽이굽이 흘러서 마침내 동쪽 바다로 들어가는 것처럼, 여러 곡절이 있더라도 귀결은 일정하다는 뜻.[註 191] 옥로(玉輅) : 천자의 수레.[註 192] 변형(邊鉶) : 제기.[註 193] 사록(沙麓) :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춘추 시대에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백 45년 뒤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백 45년 뒤에 애제(哀帝)가 죽은 후 섭정(攝政)하였던 것임.[註 194] 태사(太姒) : 문왕의 비(妃).[註 195] 고태후(高太后) : 신종(神宗)의 어머니.[註 196] 양덕(凉德) : 임금의 자칭.[註 197] 정삭(正朔) : 정삭은 정월 초하루를 말하는데, 제후가 천자에게 역(曆)을 받는 것을 말함. 이것은 곧 명나라의 제도를 말함.[註 198] 장추(長秋) : 한(漢)나라 때 황후(皇后)의 궁 이름. 일명 중장추(中長秋), 장(長)은 오래 살고, 추(秋)는 만물이 성숙하는 때를 말함. 여기서는 인원 왕후를 지칭함.[註 199] 구오복(九五福) :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에서 오복(五福)에 대한 설명.[註 200] 구신(九臣) :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나에게는 다스리는 신하 열 사람이 있다."고 한 말에 대하여 공자가 말하기를, "인재가 귀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는 부인이니 사실은 아홉 사람뿐인 것이다." 한 것에 유래함.[註 201] 십칙(十則) : 당(唐) 태종(太宗)의 황후 장손씨(長孫氏)는 현숙하여 국사에도 규간(規諫)이 많았으며, 특히 옛날 부인의 사행(事行)을 모아 여칙(女則) 10편을 편찬한 것을 이르는 말.[註 202] 굉담(紘紞) : 관의 끈.[註 203] 계월(鷄月) : 《시경(詩經)》 제풍(齊風) 계명장(鷄鳴章)의 닭 우는 소리가 아니니[匪鷄則鳴] 달이 뜬 빛[月出之光]이라는 뜻을 취한 말인데, 옛날 어진 왕비가 임금의 처소에서 날이 밝아옴을 고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조회에 늦지 않도록 보살펴 줌을 읊은 것임.[註 204] 마장(馬杖) : 목마(木馬)와 철장(鐵杖)을 말한 것이니, 목마는 진영(陣營) 앞에 세로 가로 펼쳐 놓아 적(敵)의 기병(騎兵)의 충돌을 방어하는 것이요 철장은 군기의 일종임. 송 효종(宋孝宗)이 금(金)나라의 침략을 받자 목마와 철장으로서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세웠었음.[註 205] 난로(難老) : 쉬이 늙지 않아 정정함을 뜻함. 이미 맛있는 술을 마시니[旣飮旨酒] 영원히 난로(難老)를 주었다.[永錫難老] 한 데서 온 말임.[註 206] 견천(俔天) : 하늘에 비유할 만한 여인상.[註 207] 황상(黃裳) : 《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로, 왕후(王后)의 정위(正位)를 뜻함.[註 208] 동조(東朝) : 대왕 대비를 뜻함.[註 209] 동관(彤管) : 여자 사관(女子史官)이 쓰는 붓.[註 210] 무일(無逸)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주공(周公)이 정권을 성왕(成王)에게 넘기고 그를 훈계한 글임. "아! 군자(君子)는 안일(安逸)이 없는 법이다. 먼저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고 편히 논다면 소인(小人)의 의지함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음.

 

조재호(趙載浩)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5월 27일 정해

이규채(李奎采)를 교리로, 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한광조(韓光肇)를 수찬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겸 문학으로, 정순검(鄭純儉)을 겸 필선으로, 한익모(韓翼謨)를 강화 유수로, 오언유(吳彦儒)를 승지로 삼았다. 이천보(李天輔)·김상성(金尙星)·이익정(李益炡)을 정헌(正憲)으로, 이철보(李喆輔)·조명교(曺命敎)를 가의(嘉義)로, 권일형(權一衡)을 가선(嘉善)으로, 김상구(金尙耉)·임집(任)을 통정(通政)으로 가자하였는데,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노고 때문이다.

 

지평 송덕중(宋德中)이 상서하기를,
"큰 경사로 은택이 내려 사죄인도 모두 용서를 받았는데 유독 이미 죽은 오찬(吳瓚)에게만 그대로 두라는 하령이 있었습니다. 오찬의 일은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뜻을 신명함에 불과하였는데 마침내는 궁벽한 변방에서 한을 품고 죽었으니, 청컨대 대조(大朝)께 아뢰어 먼저의 성명(成命)을 빨리 거두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께서 엄정하고 명확하게 처치하셨는데 어떻게 쉽사리 풀어주겠느냐?"
하였다.

 

5월 29일 기축

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이하종(李夏宗)을 대사간으로, 심발(沈墢)을 보덕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균역청 당상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은결(隱結)과 여결(餘結) 및 어염(魚鹽)의 일은 비록 균역에 소관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의당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긴다."
하니, 좌윤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영돈녕211)  이 맡고 있을 때에 항상 은결과 여결은 의당 핵실해 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의 사람됨은 정력이 남보다 지나쳐서 균역에 관한 일에는 참으로 열성을 가졌었다."
하니, 조영국이 말하기를,
"균역을 이와 같이 성사시켜 놓은 것은 홍계희의 힘입니다."
하였다. 권일형(權一衡)이 말하기를,
"홍계희는 이번에 졸연히 균역의 일을 결판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그의 아버지를 따라 호서의 군읍에 갔을 때부터 양역은 불가불 변통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영을 지나면서 도내의 전결·호구·군총(軍摠) 등의 문안을 찾아서 상고하고 반복하여 헤아려 보았으니, 그가 경영하여 온 바는 대개 이미 오래이었습니다. 그 법이 세 번 바뀌어 호전(戶錢)으로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 상신 잠곡(潛谷)212)  의 계획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홍계희는 일을 해나가는데에 부지런하여 평소에도 줏대[籌]를 잡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나의 한 가지 정사인데, 잘 바로잡아져야만 나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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