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7권, 영조 28년 1752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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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인

대왕 대비전에서 상복을 벗었다.

 

평안도의 불에 타 죽거나 범에게 물려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등에게 휼전(恤典)을 베풀게 하였다.

 

6월 3일 임진

임금이 균역청 당상(均役廳堂上) 조영국(趙榮國)과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을 소견(召見)하여 균역 절목(均役節目)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결(結)마다 5전(錢) 1분(分)으로 한다.’는 조목에 이르러 조영국이 말하기를,
"이 1전은 인정으로 쓰는 관민(貫緡)의 값에 지나지 않는데, 절목에 실려 있으니, 아마도 호수(戶首)가 빙자하여 함부로 받는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고, 홍봉한이 말하기를,
"잡비(雜費) 때문에 1전을 더 바치게 함은 또한 자질구레한 데 관계되니, 원수(元數) 가운데서 덜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덜어내는 것은 어렵지 아니하나, 그 말폐(末弊)가 대동법(大同法)과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동법을 창설했을 때 16두(斗)로 정했다가 14두로 감하였고, 12두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이 경우는 대동법과는 다릅니다. 본청(本廳)에서 1년간 쓰고 남은 수는 그래도 7천 민(緡)이 되며, 또 통영(統營)의 급대전(給代錢)으로 1만 냥을 갈라주는 것 또한 지나칩니다."
하자, 제조(提調)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수세(收稅)하는 곳으로서 1만 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마땅히 통영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영이 이미 선세(船稅)를 잃은 뒤에 이교(吏校)들이 살아갈 길이 없어졌고, 또 해선(海船)을 관장하지 않으니 완급(緩急)에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방어할 때에 어찌 일찍이 팔도의 어선(漁船)을 기다렸겠습니까?"
하자, 홍봉한이 급히 앞서 했던 말을 고쳐 말하기를,
"1전을 덜어주는 것은 그 은혜가 작고, 또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절목 또한 가벼이 고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법칙(法飭)을 엄히 세워 수령(守令)이 함부로 거두지 못하게 함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어떤 벌을 베풀어야 하겠는가?"
하므로, 홍봉한이 말하기를,
"수령이 두려워하는 것으로는 금고(禁錮)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조영국과 홍상한이 그 율을 끌어댐이 적합하지 아니함을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수(戶首)의 소위는 몽매하여 알지 못하고서 죄를 입는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미 몽매하여 알지 못한다면 또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조영국이 절목을 읽다가 북도(北道)의 청차 어곽조(淸差漁藿條)에 이르러 말하기를,
"육진(六鎭)의 어염선세(魚鹽船稅)를 만약 청차(淸差) 때문에 덜어준다면 길주(吉州) 이북의 아홉 고을 또한 궁절(窮絶)한 고을로서 거둘 것이 또 적으니 마땅히 모두 수봉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축말(逐末)하는 부류에게 징수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고 또 수봉하지 아니하면 수령의 사사로운 주머니를 채우기에 꼭 알맞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북로(北路)는 민호(民戶)가 드물어 전세(田稅)를 이미 상납하지 아니하는데, 이제 별역(別役)을 더하니, 또한 심히 딱합니다. 또 북병영(北兵營)의 경우 그 많은 선세(船稅)를 빼앗고 있으니 균역청에서 3백 민을 떼어 주는 것은 실로 이익됨이 없습니다."
하고, 홍봉한이 말하기를,
"육진의 경우는 마땅히 본읍(本邑)에 보류해 두어서 수재(水災)·한재(旱災)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주전(鑄錢)에 관한 일은 지금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장차 주전을 거의 끝마치게 되는데 원수를 모두 계산해 보면 장리(長利)에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자(董子)213)  는 말하기를,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이(利)를 도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이(利)를 말하는가?’라고 하였으니, 이제 이의 많고 적음을 말할 필요는 없다. 백성들이 전화(錢貨)의 폐단에 곤란을 겪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자연히 전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의 아룀으로 인해 존호를 올린 기념으로 치르는 경과(慶科) 정시(庭試)를 9월 안으로 날짜를 잡으라 명하고, 계유년 식년시(式年試)의 제과(諸科)의 초시는 내년 봄으로 물려서 시행하게 하였다.

 

판부사 김약로(金若魯)가 차자를 올려, 늦더위가 혹독하므로 대조(大朝)께서 태묘의 추향(秋享)을 직접 거행하겠다는 명을 정침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대해서는 이미 하유하였다."
하였다.

 

6월 4일 계사

경상도의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등에게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이봉령(李鳳齡)을 헌납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지평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정언으로, 이양천(李亮天)을 부교리로 삼았다.

 

전 동지(同知) 유억기(兪億基)를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하라 명하였는데, 문생(門生) 한 사람이 급제하고 15명이 생원·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6월 5일 갑오

윤광찬(尹光纘)·임집(任)을 승지로 삼았다.

 

균역청 당상을 불러 입시케 하라고 명하였다. 균역청 당상 조영국(趙榮國)이 사목(事目)을 홍계희(洪啓禧)에게 가져 가서 상의하고 부표(付標)하여 진품(陳稟)하기를,
"결전(結錢)을 남봉(濫俸)하는 데 대한 율에 대해서 홍계희는 ‘색리(色吏)와 호수(戶首)를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먼 곳으로 유배시키고, 수령의 경우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을 적용하되 2년이 지나서야 서용하게 한다면 완전히 갖추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의 뜻은 금고(禁錮)함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하고, 승지 김치인(金致仁)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뜻은 같되 말이 간략하니, 간략한 쪽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양호(兩湖)의 잡역(雜役)에 관계된 일에 대하여 홍계희는, ‘이미 도신(道臣)에게 맡겨 작정(酌定)하였으니, 사세(事勢)의 활협(闊狹)을 보아 만약 남봉하는 수령이 있거든 장오(贓汚)의 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혜청(惠廳)에서 세로 받는 품질이 거칠고 열악한 면포는 균역청에서 쓸 수가 없기에 급대(給代)하는 세포(稅布) 1필을 애초에 4백으로 값을 쳐서 주었다가, 중간에 3백으로 감하였으며, 작년부터는 또 2백으로 감하였습니다. 비록 순전히 돈으로 받는다 하더라도 백성에게 원망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내년부터는 세포 5천 필을 돈으로 균역청에 수송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영국이 또 말하기를,
"각 고을의 선무군(選武軍)의 제번포(除番布)는 비록 군포와 차이는 있다 해도 거칠고 짧음이 너무나 심합니다. 들으니, 여러 고을에서 돈으로 거둔 뒤에 포를 사서 바친다고 합니다. 일후에 만약 적발된다면 감색(監色)은 중벌로 다스리고 수령은 균역청에서 초기(草記)하여 잡아다 국문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치인이 아뢰기를,
"이번 나라의 경사는 실로 드물게 있는 것이어서 크나큰 은혜가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자에게까지 미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나 죄를 지어 쫓겨난 사람들은 모두 용서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반교문(頒敎文) 가운데 있는 ‘인(仁)을 미루어 한 가지로 본다.’는 뜻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찬(吳瓚)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미 죽은 사람은 오찬이고, 정리가 딱한 사람은 윤학동(尹學東)입니다. 이 이외에 안윤행(安允行) 또한 죄를 지어 쫓겨난 사람 가운데 들어 있고, 황합(黃柙) 또한 늙은 어버이가 있는데 조건은 위에 말한 여러 사람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6월 7일 병신

임금이 친히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전하였다.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거둥하였다.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자 균역 윤음(均役綸音)을 쓰라고 명하며 말하기를,
"아! 군역 사목(均役事目)을 이제 장차 인쇄 반포하려 한다. 문(門)과 전(殿)에 나아가 군포를 줄이고야 말겠다 한 것은 나의 백성을 위한 정성이 아니라 곧 열조의 거룩한 뜻을 깊이 유념한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있고서야 정사가 행해진다.’고 하였다. 또 옛 법이 실행되지 아니함은 법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곧 준행(遵行)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먹을 것과 군대를 없애라.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일후에 나를 이은 임금이 어찌 감히 자나깨나 조금이라도 해이해질 수 있겠으며, 그 신하된 자도 어찌 감히 제멋대로 저희(沮戱)할 수 있겠는가? 그 중에서 은결(隱結)은 나라에 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비록 균역청이 없다 하더라도 결단코 사실대로 조사해야 한다. 어염(魚鹽)에 이르러서는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이번의 이 일은 곧 나의 한 가지 정사이니, 비록 균역청이 없다 할지라도 결단코 제멋대로 침어(侵漁)하도록 맡겨 둘 수 없다. 비단 양민을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해민(海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 작년 겨울과 금년 봄 이후로 마음이 더욱 소모되고 기운도 더욱 쇠퇴해졌는데, 또 한더위를 만났다. 그럼에도 그 고달픔을 꺼리지 않고 사목(事目)을 이정(釐正)하였으니, 이 또한 백성을 위한 고심인 것이다. 아! 군포를 감한 뒤에 만약 전처럼 다시 군포를 받는다면 장차 나라는 나라답지 아니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를 이어 임금이 될 사람과 우리 조정에 설 사람이 그것을 감히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사목의 권수(卷首)에 첨가하고 인쇄해 넣어 널리 보이도록 명하였다.

 

6월 9일 무술

정언 윤득양(尹得養)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참의 윤광의(尹光毅)는 기회를 따라 위아래로 눈치나 보고 진취(進取)에 교묘한 술책을 부려 왔는데, 전임(銓任)을 차지하게 되자 오로지 오랫동안 버틸 것만을 도모하여 남의 동정이나 살피고 있으므로 정사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접때 수료(首僚)가 조당(朝堂)에서 꾸짖고 재신(宰臣)이 공회(公會)에서 면대하여 질책하자, 곁에서 듣는 사람들이 대신 부끄러워할 정도였는데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처럼 거칠고 비루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전부(銓部)에 둘 수가 없으니, 견책(譴責)·삭출(削黜)함이 마땅합니다. 함경 감사 황정(黃晸)은 성망(聲望)이 평소 가벼웠고 위신(威信)이 부족하였는데, 한두 차례의 장문(狀聞)이 듣는 이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탄압당하여 잔폐(殘廢)한 지방을 소생시킬 가망이 없는 듯하니, 체개(遞改)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군기(軍器)를 새로 갖추거나 공해(公廨)를 수리·건립한 상을 무쉬(武倅)나 음리(蔭吏)에게 베풂은 옳습니다만, 명관(名官)·명덕(命德)의 직질(職秩)의 경우 이것을 가벼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 양주 목사(楊州牧使) 조명겸(趙明謙)의 경우 가세와 이력을 보건대 차례를 밟아 승진·발탁한들 어찌 그럴 계제가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 도신(道臣)이 장문하여 포상을 청한 것은 곧 군기와 공해의 건이었습니다. 명기(名器)를 신중히 다루고 뒷날의 폐단을 방지하는 도리로 보아 가자(加資)를 환수(還收)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윤광의의 일은 지나치고, 황정의 일은 당초 제수한 바에 성의(聖意)가 있었다. 조명겸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처분하신 바이니, 내가 어찌 다시 품(稟)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0일 기해

‘선천 방어사(宣川防禦使)’에다 ‘겸수군(兼水軍)’ 석 자를 첨서(添書)하여 《속전(續典)》에 싣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상서하여 중궁 전하의 주갑(周甲) 때 축하 의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땅히 우러러 품하겠다."
하였다.

 

의주 부윤 남태기(南泰耆)가 아뢰기를,
"의주의 사마(私馬) 몰이꾼 홍금(洪金)이 문단(紋緞) 10필 때문에 현착(現捉) 되었는데, 이 자는 상역(商譯)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 엄중하게 가두어 놓았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만윤(灣尹)은 먼저 율을 쓰고 뒤에 장문(狀聞)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미 장문한 뒤이니, 의당 참작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엄형(嚴刑)한 뒤 삼수부(三水府)에 정배(定配)하라. 그리고 차후로는 병인년214)  에 정식으로 삼은 상역에 관한 율을 따라 먼저 효시(梟示)하고 뒤에 장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1일 경자

임금이 대신과 균역청 당상 및 편집 낭청(編輯郞廳)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상례(喪禮) 가운데 하교하여 줄여 없애거나 이정(釐正)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상례수교(喪禮受敎)》라 했다가 이제 또 이름을 고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라 하고, 단지 《오례의(五禮儀)》 가운데서 언급한 의주(儀註) 및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으로서 고금(古今)의 제양(制樣)이 다른 것만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의주 또한 반드시 뒤섞어 기록할 필요는 없고, 본래 《오례의》와 같은데 ‘벼슬은 아무 벼슬, 품계는 아무 품계’라고 주를 달도록 하라. 그리고 무릇 수교(受敎)는 그 차례에 따라 같은 부류들끼리 편입(編入)한다면 간략하고도 완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추향(秋享)을 섭행(攝行)케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고 시직(侍直) 신익륭(申翊隆)은 곧 고 상신(相臣) 신흠(申欽)의 조카로 병자년215)   난리 때 빈궁(嬪宮)을 호종(扈從)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었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효묘(孝廟)께서 손수 풀어 주시어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난리 뒤에는 몸을 정결히 하여 자폐(自廢)하였고, 그 아들 신만(申曼) 또한 충효 대절이 있었습니다. 갑신년216)  에 황도(皇都)의 함락 소식을 듣자 부자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온 집안이 먼 곳으로 떠나 은거(隱居)하였는데,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대명 천지(大明天地) 숭정 일월(崇禎日月)’이란 여덟 글자를 써 준 적도 있었으니, 실로 기위(奇偉)·고절(高節)한 선비입니다. 이 두 사람은 특별히 높은 품계와 직질을 추증하되 오랑캐의 연호는 쓰지 않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축년217)  에 척화(斥和)한 여러 신하들을 애초에 10여 명을 초계(抄啓)했었습니다만, 필경에는 단지 삼학사(三學士)만 보냈고 나머지는 모두 삭직·찬배하였습니다. 이제 대의(大義)를 천명(闡明)하는 날을 당하였으니, 이 사람들에게 한 자급을 더 추증하여 표장(表奬)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영돈녕(領敦寧) 조현명(趙顯命)은 근자의 예에 의거해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칭경(稱慶)의 큰 은혜로 품질(稟秩) 가운데서 적소(謫所)에서 본인이 사망한 경우 및 문출(門黜)된 여러 죄인을 풀어줄 것을 청하여 누누이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크게 벌려 사령(赦令)을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 신회(申晦)가 ‘이존중(李存中)의 모친이 매일 아침 저녁에 물을 떠 놓고 살아 생전 그 아들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빈다.’고 진달하고, 이어 이존중을 적소에서 풀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가 기회를 틈타서 풀어줄 것을 청한다고 책망하면서 신회를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이성경(李星慶)의 장계로 인해 예단(禮單)의 삼(蔘)으로 돈삼계(獤蔘契)나 조삼(造蔘)을 쓰지 말고, 동래부의 세삼(稅蔘) 및 상역(商譯)들에게 있는 삼으로 수를 채워 주도록 명하였다.

 

새로 복상(卜相)하여 이종성(李宗城)을 좌의정에, 이천보(李天輔)를 우의정에 제배하였다. 조재호(趙載浩)를 병조 판서로, 이인원(李仁源)을 지평으로, 윤방(尹坊)을 정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예조 참판으로, 이중조(李重祚)를 겸필선(兼弼善)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교리로, 이득종(李得宗)을 부수찬으로, 이명희(李命熙)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2일 신축

임금이 편집청의 당상관과 낭청(郞廳)을 소견하였다. 예조 참의 윤봉오(尹鳳五)가 중궁전의 진하(陳賀)를 누누이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편집청 당상관 이철보(李喆輔)가 초선(抄選)한 의절(儀節)을 올리자, 임금이 하람(下覽)하다가 조석곡(朝夕哭) 조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새벽 북소리를 듣고 기침(起寢)할 때에 조곡(朝哭)을 행하며, 잠자리에 들 인정(人定) 때에 석곡(夕哭)을 행해야 할 것이다. 【내례(內例)에는 봉화(烽火) 때 먼저 석곡이 있었으나 겹쳐서 행하는 것이 되기에 금후로는 없앤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뒤에는 조곡은 매상(昧爽) 때 행하고 석곡은 초혼(初昏) 때 할 것이며, 【만약 대제(大祭)를 만나면 제사를 지내기 전에 수시로 행하고, 삭망(朔望) 때는 제사에 앞서 행한다.】  소상(小祥) 후에는 그쳐야 할 것이다. 【무릇 조석곡 때는 내시와 궁인이 조곡(助哭)하고 배례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석곡 뒤에는 혼백(魂帛)을 받들어 영침(靈寢)에 넣도록 해야 한다. 무릇 대상·소상에 있어서 상(喪)이 같은 궁(宮)에 있다면 의주(儀註) 가운데다 ‘거애(擧哀)’라고 일컬어야 하고, 궁이 같지 않다면 ‘망곡(望哭)’이라 일컬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혼백은 《오례의》에 의거해 속백(束帛)을 쓰도록 하라. 무릇 빈전(殯殿)은 내상(內喪)·외상(外喪)의 찬궁(欑宮) 네 문에 청룡·백호·주작(朱雀)·현무(玄武)를 그린다. 빈궁(殯宮)은 외상일 경우 찬실(欑室)을 설치하여 찬궁과 같이 하되 단지 청룡·백호·주작·현무만 그리지 아니하며, 내상일 경우 또한 찬실이라 칭하되 소금저(素錦褚)의 예에 의거해 양쪽을 포개어 4면의 장자(欌子)를 덮게 한다. 그리고 4면에 모두 문이 있는데, 덮개는 4면의 폭을 이은 곳과 접해 붙이되 못을 박아야 할 것이다. 성빈(成殯) 때에는 처음에 화보 홍단 구의(畵黼紅緞柩衣)를 덮는데, 옻칠을 다 마친 뒤에 그대로 덮되, 유금(襦衾)이 먼저이고 홍전(紅氈)이 그 다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꿰메어 싼 뒤에는 윤대판(輪對板)에 안치하고 홍단 대구의(紅緞大柩衣)를 더 덮어야 한다. 고문(古文)에 실린 저사 소관의(紵絲小棺衣)는 이제 없앤다. 홍전은 무신년218)  에는 12부(浮)였으나, 이번에는 16부로 했는데, 내가 절약해서 쓴 것이니, 비록 대상(大喪)이라 할지라도 또한 남음이 있을 것 같다."
하였다.

 

조영국(趙榮國)을 발탁하여 호조 판서로 삼았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조재호(趙載浩)를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6월 13일 임인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했다.

 

임금이 균역청 낭청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균역청의 설치는 양민과 해민을 위한 선정인 것이다. 은결(隱結)의 경우 이미 현록(現錄)한 뒤라 그 잡비와 세(稅)가 대동(大同)과 같다. 하지만 선무포(選武布)의 결전(結錢)과 어염세(魚鹽稅)의 경우 만약 남징(濫徵)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한 가지 민폐를 덜고 한 가지 민폐를 더하는 격이니, 어찌 내가 백성을 위하는 뜻이 되겠는가? 경외(京外)에 만약 이런 폐단이 있다면, 감관(監官)·호수(戶首)·색리(色吏)는 엄하게 형신하여 정배하고,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시키도록 하라. 만약 봉납(捧納)한 돈과 무명을 제마음대로 환색(換色)하되 범죄한 것이 수령에 있을 경우는 10년 동안 금고(禁錮)하고, 범죄한 것이 색리에 있을 경우는 엄하게 형신하여 먼 곳으로 정배하라. 이것을 사목(事目)의 끝 부분에 싣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조삼(造蔘)을 보았는데, 족두리풀 부리[細辛]로 가짜 형체를 만들어 삼(蔘) 껍질을 풀로 붙여 봉했으니, 납(鉛)을 바친 것과 어찌 다르랴? 옛날 양호(羊祜)219)  는 일개 장수였지만, 정성이 적국(敵國)을 감동시켜, ‘어찌 사람을 해칠 양숙자(羊叔子)이겠는가?’란 말이 있었다. 당당한 나라로서 보잘것 없는 공인(貢人)이 이처럼 가짜를 만들어 교린(交隣)에 미더움이 없게 하였으니, 이런 모양의 삼은 실로 꼴을 묶어 높은 값을 받고자 한 것이다. 계인(契人)은 일률(一律)을 적용하여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함이 마땅하나, 십분 참작하여 행수 공인(行首貢人)과 조삼을 맨 먼저 주창한 자를 엄하게 형신하여 절도에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5일 갑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처음 정사(呈辭)하였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렸다.

 

6월 16일 을사

이익보(李益輔)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7일 병오

임금이 문신 한학강(文臣漢學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직강(直講) 정휘진(鄭彙晉)과 판관(判官) 정충언(鄭忠彦)에게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송수형(宋秀衡)에게 내려진 ‘연한을 한정하지 말고 금고(禁錮)하라.’는 율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참의 윤광의(尹光毅)가 윤득양(尹得養)의 말에 대해 변명하며 상서하기를,
"수료(首僚)가 꾸짖고 재신(宰臣)이 면전에서 질책했다고 하였는데,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으니, 대신(臺臣)이 지적한 바가 누구인지 질책한 바가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하여 명백히 말해 신의 죄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에 윤득양이 또 상서하기를,
"윤광의의 변명하는 글은 근거도 없는 말을 지리하게 늘어놓으며 자신의 과오를 덮어 감추고 있어 마치 신이 허구 날조한 것처럼 여김이 있으니, 신이 어찌 그 말을 다 끝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겨울 수료가 중화 부사(中和府使)를 적절한 사람으로 차제(差除)하지 않았음을 들어 그 정사(政事)의 거칠고 비루함을 통박하면서 크게 꾸짖었고, 재신은 그 정사를 자신이 처리하지 아니함을 두루 들어 질책하기를, ‘그대는 좌전(佐銓)이 아니라 집리(執吏)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말은 온 세상이 전해 가며 말하고 있으니, 반드시 이름을 지적하고 사실을 나열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명언 직설(明言直說)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왕세자가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세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승지는 돈유(敦諭)하라."
하였다.

 

제주목(濟州牧)에서 장계(狀啓)하기를,
"죄인 이증(李增)220)  이 물고(物故)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가까운 종친으로는 단지 여선군(驪善君) 형제가 있을 뿐인데, 교활하고 음휼한 권혜(權嵆)·권집(權䌖) 때문에 또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졌던 것이다. 공의를 거스르기 어려워 처치하기는 했지만, 측은한 마음이 항상 풀리지 않았는데, 몇 년간을 해도(海島)에서 지냈으니, 왕법(王法)도 이미 충분히 베푼 셈이다. 아! 이미 죽은 가까운 종친을 만약 풀어주어 뭍으로 나오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옥식(玉食)을 대해도 맛이 없고 상훈(常訓)을 어루만져도 절로 슬프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은혜와 법을 모두 베푸는 바이니, 특별히 풀어주도록 하되, 운구(運柩) 때 해도(該道)로 하여금 담군(擔軍)을 보조해 주고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면포(綿布)·마포(麻布)·쌀·콩·구재(柩材)를 후하게 지급하도록 하여 나의 뜻을 표하게 하라. 그 직첩(職牒)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장(喪葬) 등의 소용 물품’이라 하지 않고, 물명(物名)을 제급(題給)이라 일컫는 것이니, 곧 휼전(恤典)인 것이다. 유사(有司)의 신하가 어찌 감히 다툴 수 있으랴?"
하였다. 승지 임집(任)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종친을 도타이 대우하시는 거룩한 덕이 이처럼 측달(惻怛)하나, 대론(臺論)이 바야흐로 한창 일어나고 있는 때에 죄인을 풀어주도록 하심은 3백 년 이래 없던 일이니 정원에서는 휘지(徽旨)를 봉입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죽은 사람이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즉시 반포(頒布)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사족(士族)의 부인은 비록 이름이 도류안(徒流案)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물고된 뒤에는 검험(檢驗)하지 말게 하는 일을 수교(受敎)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전 판서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상직(相職)을 사직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께서 염매(鹽梅)221)  를 갖추신 것이니, 지금의 정승은 그 인물을 얻었다 할 만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8일 정미

하교하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영묘(英廟) 어첩(御牒) 가운데, ‘신도비가 있다.[有神道碑]’라는 네 글자를 ‘지금 표석이 있다.[今有表石]’라는 네 글자로 고쳤다. 이 이외에도 능침(陵寢)에 표석이 있으나 《선원보략》에 실리지 아니한 곳은 모두 상고하여 일체 기록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9일 무신

지평 이인원(李仁源)·이만회(李萬恢)와 정언 윤득양(尹得養)·윤방(尹坊)이 상서하기를,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물고 죄인 이증(李增)을 특별히 풀어주고 휼전(恤典)을 베풀라 하신 하교를 환수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한데, 어찌하여 다시 이와 같이 말하는가?"
하고, 하령하기를,
"대조의 처분은 한 시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휘지(徽旨)를 봉입한 대간(臺諫)을 즉시 패초(牌招)하여 정달(停達)케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상달(上達)하기를,
"저하께서 아무리 성교를 승봉(承奉)하는 데 급하다 하실지라도 유독 대의(臺議)를 가벼이 여겨 훗날의 폐단을 열게 된다는 것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청컨대 빨리 내리신 영지(令旨)를 거두어 들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물고된 뒤이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하령한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니, ‘정달(停達)’ 두 글자는 환수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청대(請對)하여 어제의 하교를 환수할 것을 누누이 진달하니, 임금이 목소리를 돋구어 말하기를,
"배포(排布)·설계(設計)하여 여천군(驪川君)을 무함한 자는 물고(物故)한 뒤 마땅히 어떤 율을 써야 할 것인가? 이것은 바로 두건덕(竇建德)이 원수를 갚은 일222)  과 진배없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이 다투는 바는 법을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물고되었으니, 이제 다시 어떻게 의논하자는 것인가? 지신(知申)223)  이 아뢴 바는 그래도 여의(餘意)가 있기는 하다만, 만약 이와 같다면 음모를 꾸며 배포한 사람은 이제 무함을 당한 사람보다 죄가 가볍게 되고, 무함을 당해 울며 하소연하는 사람은 음모를 꾸민 사람보다 죄가 무겁게 되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경중이 거꾸로 되었으니, 막중한 주어(奏語)는 마땅히 이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팔촌(八寸)의 친척을 어찌 소원하다 할 것인가? 동부승지의 주어 가운데 ‘소원한 종실’이라 한 것은 또한 원량에게 종실을 돈독히 하도록 권면하는 뜻이 아니다. 지신과 동부승지를 모두 체직(遞職)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윤광찬(尹光纘)이 말하기를,
"휼전(恤典)이란 한 가지 일은 오직 성의(聖意)로 짐작하신 바이겠으나, 풀어주라는 명과 담군(擔軍)을 보조해 주라는 하교를 끝내 환수하기를 어렵게 여기신다면 대각(臺閣)의 쟁집(爭執)이 장차 분분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침묵하다가 말하기를,
"좌부승지의 말이 옳다. 그러니 지금 환수할 수도 있겠지만 동궁이 어찌 한 번 풀어주는 일을 못하겠는가?"
하고, 다시 말하기를,
"바다에 빠져 죽은 백성에게도 오히려 휼전을 베푸는데, 섬에서 죽은 종실에게 휼전을 베풀지 못하겠는가? 담군에 대한 한 가지 일도 그것이 또한 시끄럽게 다투는 단서가 될 것이니, 비록 오늘 시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원량이 어찌 나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한번 이 사람을 풀어주지 못하겠는가? 특별히 풀어주라는 명과 담군에 관한 것은 모두 정침하도록 하고, 휼전은 해조(該曹)에서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리며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후로 국옥(鞫獄)에 관계되는 자 외에는 종신·훈신 및 문(文)·무(武)·음(蔭)의 하대부(下大夫) 이상과 일찍이 시종신(侍從臣)을 지낸 사람으로서 배소(配所)에서 물고된 자는 모두 검험(檢驗)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수교(受敎)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조운규(趙雲逵)·김상구(金相耉)를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6월 20일 기유

전 사직(司直)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여 상직(相職)을 사양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께서 ‘너를 위해 염매(鹽梅)를 갖추었으니, 그 부자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고 하교하시었으니, 경도 또한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1일 경술

유성이 천강성(天江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추향(秋享)의 의절(儀節)은 연습이 이제 박두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의(收議) 전에 습악(習樂)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일 전에 5일 동안 습악해야 할 것이다. 국휼(國恤) 때에 이륙좌기(二六坐起)는 괴이쩍은 일이나 이번에는 이륙좌기도 또한 할 수 있다."
하였다.

 

하교하여 형조의 당상이 개좌(開坐)하지 아니하는 데 대해 신칙하고, 이어 가벼운 죄수는 풀어주어 감옥을 깨끗하게 소제하라고 명하였으니, 때가 한더위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황인검(黃仁儉)·박사눌(朴師訥)을 정언으로, 유건(柳健)을 문학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교리로, 임상원(林象元)을 수찬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이철보(李喆輔)를 좌윤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이육(李堉)·이계창(李啓昌)을 지평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6월 22일 신해

경기에 큰 홍수가 져서 압사한 사람이 33명이고 물에 떠내려 간 인가가 2백 19여 호였는데, 각별히 매장(埋葬)해 주고 넉넉하게 구휼해 편안히 모여 살게 하여 유산(流散)함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일곱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왕세자가 수서(手書)로 돈독하게 하유하였다.

 

6월 24일 계축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여 상직(相職)을 사양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상직을 사양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5일 갑인

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한광조(韓光肇)를 부수찬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6월 26일 을묘

약방에서 추향(秋享)을 친히 지내겠다는 하교를 정침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7일 병진

판부사 김약로(金若魯)·영의정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기를,
"바야흐로 조용히 조섭하고 계신 중인데다가 늦더위가 더욱 뜨거워지니, 청컨대 추향을 친히 지내시겠다는 하교를 정침토록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숭정전(崇政殿)에서 추향 대제(秋享大祭)의 서계(誓戒)를 받았다. 그리고 헌관(獻官)을 구차하게 충원해서 차임(差任)하였다 하여 이조 판서 서명빈(徐命彬)을 특별히 보외(補外)하여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삼았다.

 

6월 28일 정사

임금이 익선관(翼善冠)·흑포(黑袍)·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유신(儒臣)을 불러 편집 절목(編輯節目)을 강정(講定)하라 명하였다. 승지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세손궁(世孫宮)의 경우 ‘상서(上書)’를 ‘상장(上狀)’으로, ‘저하(邸下)’를 ‘각하(閣下)’로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세손은 없지만 절목을 만들어 후세에 전한다면 명료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조재호(趙載浩)를 이조 판서에 제수하고, 감사(監司) 김상로(金相魯)를 병조 판서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조 참판 윤급(尹汲)을 체직시켜 그 대신 김한철(金漢喆)을 제수하고, 이조 참의 윤광의(尹光毅)를 체직시켜 그 대신 남태제(南泰齊)를 제수하였다.

 

6월 29일 무오

균역 사목(均役事目)은 서북 양도(兩道) 이외에 6도(道)의 전결(田結)에 대해서는 결(結)마다 쌀 2두(斗)나 혹은 돈 5전을 받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한다. 각읍(各邑)의 시기(時起) 전결(田結)로서 수조(收租)에 누락된 것을 여결(餘結)·은결(隱結)이라 하는데, 관북(關北) 이외에 7도의 총계가 2만여 결이 된다. 그 중 진전(陳田)은 속전(贖田)에 의거해 반을 감하여 수세(收稅)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해세(海稅)는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혁파(革罷)하고, 한결같이 각도(各道)의 균세사(均稅使) 및 도신(道臣)이 정한 바를 따른다. 각도 선척(船隻)의 대·중·소는 모두 줌수[把數]를 헤아려 정하고 세금을 받는다. 지토선(地土船)에 행상(行商) 장표(掌標)가 있는 경우 당년(當年) 안에 8도를 두루 돌아다니더라도, 다시 침어(侵漁)하지 못한다. 각도의 염분(鹽盆)은 대·중·소 및 염전의 고척(膏瘠)·등수(等數)를 분정(分定)하여 세금을 받는다. 연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경우 어전(漁箭)·어조(漁條)·어장(漁場)·어기(漁基)가 있는데, 그 입선(立船)의 많고 적음과 이득의 후하고 박함에 따라 정식하여 세금을 정한다. 선무 군관(選武軍官)의 명호는 사족(士族)이 아니고 음직(蔭職)이 있지 아니한 한산인(閑散人)의 부류로 뽑아서 정하되, 그 액수(額數)는 경기·관동에 각각 2천 명, 해서(海西)에 3천 5백 명, 호서에 4천 명, 호남에 6천 명, 영남에 7천 명이다. 포(布) 1필을 거두고, 1년에 한 차례 재예(才藝)를 시험하여 장문(狀聞)하는데, 수석을 한 자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하고, 그 다음 1명은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며 당년의 포를 면제시켜 준다. 그리고 그 다음 5명은 단지 당년의 포만 면제시켜 주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해마다 새 저치미(儲置未) 1만 석을 내어 균역청으로 이획(移劃)하되, 제도(諸道) 감영(監營)의 권솔(眷率) 문제로서 영수미(營需米) 1천 석을 제거하고 균역청에 이획하는데 경상도에 1백 석, 전라도에 4백 석, 충청도에 5백 석이다. 그리고 선혜청의 세작목(稅作木) 1동(同)을 균역청으로 획송(劃送)하고 선혜청의 월령(月令)을 균역청에 감부(減付)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각 군문(軍門)·각 해사(該司)의 경우 약간 변통(變通)을 더하고, 외방 각영(各營)·읍(邑)·진(鎭)의 각양 각색의 것은 형편에 따라 감한다. 경상도 7진은 영원히 혁파하되, 7진의 수군(水軍) 도합 9천 2백 69명은 반으로 나누어 금위영·어영청 두 청(廳)에 이속(移屬)시키고, 양여보미(良餘保米)를 받아 급대(給代)에 보충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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