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7권, 영조 28년 1752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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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기미

새 돈을 주조하였다. 이에 앞서 훈국(訓局)과 어영에서 새 돈을 나누어 주조했는데, 한 해를 넘겨 비로소 주조를 마쳤으니, 모두 44만 4천 냥이었다.

 

의금부에서 상달하기를,
"‘적소(謫所)에서 어버이의 상(喪)을 당한 자에게는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 이미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정의현(旌義縣)에 도배된 죄인 이존중(李存中)이 아비의 상을 당했다고 하니, 돌아가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부수찬 한광조(韓光肇)가 상서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후원(喉院)에서 ‘헌신(憲臣)이 처치(處置)를 즉시 대신 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추(重推)를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신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삼사(三司)에서 처치하는 규례를 볼 것 같으면, 헌신이 인피(引避)할 경우는 헌료(憲僚) 중 사고가 없는 자가 처치하고, 만약 모두 사고가 있다면 간원(諫院)에 맡기는데, 간신(諫臣)이 처치를 헌부에 맡기는 경우 또한 그러합니다. 그리고 양사(兩司)의 신하에게 모두 사고가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옥당(玉堂)에 맡기는 것이니, 이것은 곧 3백 년 이래의 옛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헌신 이계창(李啓昌)의 처치는 간원을 뛰어 넘어 옥당에 맡긴 것이니, 그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근래 본관(本館)에서 가끔 대신 담당하는 것은 대개 잘못된 규례인 것입니다. 후원에서 계속해서 잘못을 답습하는 것은 훗날의 폐단에 관계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미 규례가 있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우부승지 임집(任)이 상서하여 한광조(韓光肇)의 상서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숙묘(肅廟)을해년224)  의 일기를 상고하고, 한편으로 원중(院中)의 고사를 살펴보았더니, 대간(臺諫)이 피혐(避嫌)한 뒤 양사(兩司)에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고 옥당에 입직한 인원이 있으면 처치는 옥당에 맡겨집니다. 그런데 만약 입직한 옥당이 없고 양사에 미처 숙배(肅拜)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경우는 부득이 처치하는 패(牌)를 낼 것을 청하되, 양사에서는 명에 응하지 아니하고, 옥당에서 바야흐로 입직한 경우에는 처치가 옥당에 맡겨지는 것이 분명히 성규(成規)가 되어 온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신(儒臣)은 도리어 옛 규례를 신명(申明)하여 훗날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미 구례(舊例)가 있으니, 진달한 바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7월 2일 경신

김문행(金文行)을 사간으로, 송덕중(宋德中)을 지평으로, 이의철(李宜哲)을 정언으로, 권혁(權赫)을 부제학으로, 김상익(金尙翼)을 경기 관찰사로, 정희보(鄭熙普)를 승지로 삼았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비로소 출사(出仕)하자, 임금이 이천보를 인견하였는데, 태묘의 추향(秋享)을 직접 지내는 것을 정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몸소 태묘에 임하여 종고(鍾鼓)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조금 펴질 듯하니, 모름지기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중궁전의 진하(陳賀)는 동궁의 정례(情禮)에 있어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윤허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갑년(甲年)이 되면 중궁에게 행하도록 허락한 일을 그 해에 행하지 아니하겠는가? 올해에 막고 난 뒤에야 뒷날 다른 해에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국조(國朝)에 처음 있는 경사이니, 이것은 천리(天理)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처음 있다 하는가? 장렬 대비(莊烈大妃)의 주갑(周甲) 때에도 하례(賀禮)가 있었다."
하므로,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중궁전의 주갑은 처음 있는 경사입니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영상이 고령(高齡)을 이유로 휴퇴(休退)하려는 뜻이 있어 연달아 사직 단자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직(相職)은 유사(有司)의 분주한 직임과는 다르니, 잠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휴양토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대로 체직(遞職)을 허락한다면 나랏일은 어찌 되겠습니까? 오늘날 세도(世道)는 만약 노성(老成)한 사람이 없다면 진정시킬 수 없으니, 결코 휴치(休致)를 허락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태공(姜太公)은 여든에 재상이 되었다.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의지가 어찌 연로한 것 때문에 혹시라도 쇠잔해질 수 있을 것인가?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대리(代理) 이후로 무릇 소장을 일체 금지시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조정의 일에는 대조께 진문(陳聞)할 것도 있고 소조(小朝)께 진문할 것도 있으며, 또 전하의 처분 및 성궁(聖躬)의 궐유(闕遺)에 관계될 경우 감히 소조께 글로 진달하지 못할 것도 있습니다. 동궁께서 비록 대리하고 계시나, 나라의 대사를 감히 스스로 천단(擅斷)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소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상하의 정지(情志)가 서로 떨어지고 언로(言路)가 막혔으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음이 이미 소모되었으니, 이 근력으로 어떻게 나랏일을 볼 수 있겠는가? 지금 믿는 것은 오로지 원량(元良)뿐이다. 상소는 경과 좌상이 맡아 하되, 대신의 것은 답하고, 그 이하는 답하지 않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오늘날 나랏일은 먼저 소장이란 한 길을 열고 난 뒤에야 다른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언로란 사람의 핏줄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허다한 대신(臺臣)은 전하께 대해 모두 쓸데없는 관원이니, 전하의 핏줄이 통하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신 또한 소장을 받아들이도록 허락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장은 허락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한 달에 두 차례 대조께 입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조가(朝家)에 연고가 많아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고, 비국 당상과 여러 신하들 중에서는 혹 한 해를 넘기도록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 어찌 더욱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미 몽매함을 무릅쓰고 명을 받들었으니, 삼가 마땅히 한 달에 두 번 입시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갓 문구가 될 뿐이고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 또한 유익함이 있을 것이니, 어찌 문구라 하여 전혀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사령(辭令)은 심히 소중한 것입니다. 왕의 말이 한번 나오면 사방에 전송(傳誦)되니, 관계되는 바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사령을 내릴 즈음에 절박하게 하심으로써 실수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그 정리를 벗어난 하교를 당하는 뭇 신하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요사이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규채(李奎采) 무리의 일로 하교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 중 ‘협박’이란 두 글자는 승지의 진달로 인해 즉시 환수하셨습니다만, ‘기관(機關)’이란 두 글자는 왕언(王言)의 체통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이규채의 무리는 오찬(吳瓚)과 더불어 이미 같이 일을 했던 사람이니, 감히 급작스레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무슨 기관이 그 사이에 있었겠습니까?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만약 기관을 쓴다면, 그 죄가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약이 사람을 어지럽게 하지 않으면 그 병이 나을 수 없는 법이니, 경의 말이 간절하다. 두 글자는 환수하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오찬의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으니, 곧 극률(極律)입니다.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직첩을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고 하니, 그 정리가 참담하고 절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공정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라. 오찬은 불충 불효한 사람이다. 어찌 풀어주기를 청할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존중(李存中)의 아비는 아들을 생각하다가 병이 나서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하니, 듣건대 또한 참혹합니다. 오찬의 어미는 미처 직첩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반드시 지하에서 원한을 품을 것입니다. 청컨대 오찬에게는 직첩을 돌려주고, 이존중은 돌아가 아비의 장례를 보게 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정신이 전적으로 여기에 있으니, 어찌 그르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이 어찌 한낱 오찬을 위해 전하를 속이겠습니까? 신이 처음 연석(筵席)에 올라 군부(君父)께 의심을 받았으니, 물러가 부월(斧鉞) 아래에서 복주(伏誅)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때문에 내가 경도(傾倒)하였다. 어찌 인구(引咎)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는 목사(牧使)가 된 사람이 몇 사람에 불과했는데, 요새는 현감에서 차례로 승천(陞遷)하여 목사에 이른 자가 많으니, 음로(蔭路)의 조경(躁競)이 모두 이에서 말미암습니다. 이후로는 여러 차례 군과 현에 시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목사에 의망하지 말도록 엄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충주 목사(忠州牧使) 이경조(李景祚)를 단지 부사의 이력으로 목사에 복직시킨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나, 이경조는 평소 성적(聲績)이 있는데다 또 이미 부임하였으니, 지금 인혐하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조(銓曹)에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국가의 급선무는 오로지 인재를 수습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임상원(林象元)은 평소 문화(文華)가 드러났고 선치(善治)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연주(筵奏) 때의 말이 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일 때문에 끝내 영원히 벼슬길이 막히고 말았으니, 실로 애석합니다. 또 피차를 논할 것도 없이 앞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이 많지 아니합니다. 민백상(閔百祥)은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기국(器局)과 재유(材猷)가 크게 쓸 만한데, 한때의 망발 때문에 장기(瘴氣)가 있는 바다에서 해를 넘겨 살면서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청컨대 출륙(出陸)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상주 목사(尙州牧使) 서명빈(徐命彬)을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3일 신유

홍문 제학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관각등록(館閣謄錄)》에 목호룡(睦虎龍)의 맹제 제문(盟祭祭文)이 있는데, 관리(館吏)에게 물었더니, ‘향실(香室)에서 베껴 온 것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래서 《등록》을 신이 베어버렸습니다만, 향실의 원본도 또한 잠시라도 그대로 둘 수가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가져와 불태우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조재호(趙載浩)의 고 좌상에 대한 제문(祭文)은 나 역시 들었는데, 또한 지나쳤다."
하니, 홍문 제학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고인에게도 또한 이런 제문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순(孝純)225)  이 일찍이 전조(銓曹)를 맡기지 말라고 말했는데, 내가 총재(冡宰)를 맡겼으니, 실로 내 효부(孝婦)의 말을 저버린 것이다."
하였다.

 

7월 4일 임술

복중(服中)의 졸곡(卒哭) 전에 황단(皇壇)의 제사에는 음악을 쓰고, 사직(社稷)의 제사에는 악기(樂器)를 진설하되 음악을 연주하지는 말며, 헌가(軒架)·고취(鼓吹)는 모두 진설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하교하기를,
"무릇 나라의 대상(大喪)·소상(小喪) 때 습악(習樂)·용악(用樂)의 여부를 서울에 있는 대신에게 물어 입시하여 품정(稟定)하게 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헌의(獻議)하기를,
"악원(樂院)에 있는 전후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경신년226)  ·신사년227)   국휼(國恤) 때는 졸곡 후 모든 제사에 모두 음악을 썼으며, 좌기(坐起) 때 습악하였습니다. 무술년228)   졸곡 후에는 육도일(六都日)의 습악을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였고, 7월 진하(陳賀) 때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신년229)  에는 상고할 만한 문자가 없으나 졸곡 뒤에 전악(典樂) 취재(取才) 때 전례에 의거하여 습악하고 시취(試取)하였습니다. 기축년230)  ·기해년231)  ·갑인년232)  ·경자년233)  ·갑진년234)   국휼의 졸곡 후에는 대제(大祭) 때 기일에 앞서 한 차례 습악하였고, 경자년·갑진년 전의 사직 제사에는 악기를 진설하되 연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전례를 살펴 시행한다면 별달리 혼동될 염려가 없지만, 다시 명백하게 정식을 마련하기는 해야겠습니다. 대상 졸곡 뒤에 만약 음악을 써야 할 제사를 당한다면 임시로 일차 습악하되 매월 육도일의 습악은 음악 소리가 끊어져 고요하다는 뜻으로 정지해야 할 것입니다. 내대상(內大喪)의 경우는 기년(朞年) 뒤 전례에 의거해 습악하고, 소상은 졸곡 뒤 모두 전례에 의거해 습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복제(服制)를 다 벗기 전에 진하(陳賀)가 있다면,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마도 융쇄(隆殺)하는 의절에 맞을 듯합니다. 대상의 졸곡 전에 사직의 제사에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지 사직에 제사하고 월불(越紼)235)  하여 제사를 거행하는 것이 《예경(禮經)》에 실려 있으니, 이미 그 제사를 지냈다면 감히 음악을 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지금 황단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비록 졸곡 전이라 하더라도 음악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졸곡 전 사직·황단의 제사에는 모두 음악을 써야 마땅하겠습니다. 또한 원컨대 다시 널리 하순(下詢)하시어 처분하소서."
하고, 판부사 김약로(金若魯)는 헌의하기를,
"신의 뜻은 영상의 뜻과 같습니다. 다만 대상의 졸곡 전에는 사직 제사에 악기를 진설하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 것은 일찍이 전에 이미 시행했던 일이고 또한 의의가 있으니, 제도를 변경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황단은 사체가 비록 중대하기는 하지만, 또한 사직과 더불어 전례를 본떠 행할 수 있으니, 전대로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오로지 널리 하순하시어 처분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도성 밖에 있는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어본 뒤에 입품(入稟)하도록 하라. 내 생각으로는 졸곡 전에는 헌가·고취를 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리고 비록 졸곡 뒤라 하더라도 복제가 다하기 전에는 흉배(胸背)가 없는 곤의(袞衣)를 입고 또 동가(動駕) 때 이원(梨園)의 악기를 어가(御駕) 앞에 진설하는 것이 어찌 기공(朞功)에 사죽(絲竹)을 연주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심히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이것을 또한 문의하라."
하였다. 영부사 유척기(兪拓基)가 헌의하기를,
"삼가 듣건대, 옛날 명성 대비(明聖大妃)의 소상(小祥) 뒤에는 무릇 중사(中祀)에도 또한 모두 음악을 썼다 하니, 경신년·신사년 졸곡 뒤에 습악한 것이 어찌 또한 차등이 있어 그러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무술년에 습악한 방법을 졸곡 뒤에 행한 것이 아마도 또한 경신년·신사년과 차이가 없는 듯하니, 참량(參量)해 정제(定制)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복제를 다 벗기 전에 비록 하례가 있다 하더라도 음악은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모두 졸곡 전후를 논할 것 없이 복제를 다 벗기 전에 똑같이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다면, 동가 전의 전하는 동일한 처지인데 혹은 진설하고 혹은 진설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비록 연주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단지 진설만 하여 예의(禮意)를 보존하는 것이 또한 기공에 사죽을 연주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니, 그전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미 월불하여 행사하는 경훈(經訓)이 있으니, 일이 있어 음악을 폐한다면 또한 예의에 어긋납니다. 따라서 졸곡 전의 사직 제사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이나, 감히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황단의 사체는 나라의 사직에 견주어 논할 바가 아니니, 비록 졸곡 전이라 하더라도 더욱 음악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전 부사 박필부(朴弼傅)는 헌의하기를,
"신이 마땅히 언급해야 할 바를 대신이 이미 대략 언급하였으니, 또한 감히 중언부언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월불 행사는 정자(程子)·장자(張子)·주자(朱子)의 세 설(說)이 이미 바른 데로 귀착되지 못하였으니, 신은 국조(國朝)의 제도가 어떠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황단 제사는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니 사직과 같은 비중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설하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는다는 한 가지 의절(儀節)은 비록 월불의 제사라고는 하지만, 졸곡을 마치기 전에는 아마도 어가(御駕) 앞에 진설해서는 마땅치 않을 듯합니다."
하였고, 집의 윤봉구(尹鳳九)는 헌의하기를,
"신이 삼가 의랑(儀郞)236)  이 보여 준 문자를 보았더니, 열조(列朝)의 대소 국휼 때 용악·습악을 이미 거행했던 전례가 예의(禮意)를 깊이 얻었다고 논하였습니다. 당(唐)나라의 신하 안진경(顔眞卿)은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의 주(註)에 있는 ‘장악(藏樂)·석악(釋樂)’이란 말을 논하기를, ‘가장 소중한 것은 장악이요 가장 가벼운 것은 석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국휼의 졸곡 뒤 큰 제사 때에는 비록 동일한 예로 음악을 쓸 수는 없겠지만, 습악이란 한 의절은 국휼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한계를 진퇴(進退)시킴이 경중의 뜻을 잃지 않을 것이니, 실로 다시 논할 단서가 없습니다. 교사(郊社)의 제사에 이르러서는, 《예경》 왕제편(王制篇)의 월불이란 말은 대개 ‘국군(國君)을 비록 미처 장사지내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제사를 폐할 수 없다.’는 뜻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정자(伯程子)237)  는 ‘월불은 너무 조급한 것 같으니, 비록 낮은 것으로 존엄한 것을 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장례를 치르고 행하는 것이 아마도 또한 가할 듯하다.’ 하였고, 숙자(叔子)238)  는 ‘예(禮)에서 말한 월불이란 이 일은 행하기 어렵다.’ 하였으며, 횡거 장자(橫渠張子) 또한 말하기를, ‘예(禮)가 아닌 것으로 상제(上帝)를 뵙는 것은 제사가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월불이 이미 《예경》에 실려 있으니, 비록 낮은 것으로 존엄한 것을 감히 폐할 수는 없겠지만, 교사(郊社)에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음악을 써야 하는지는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또 인군이 천지와 사직의 주인으로서 빈소(殯所)에 있으면서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았으니, 비록 소중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음악을 쓰는 일은 끝내 미안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제사는 비록 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음악은 〈악기를〉 걸어 놓고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현(先賢)의 훈의(訓義)를 참작하고 인정과 예의(禮義)로 헤아려 보더라도 진실로 해로움이 없을 듯하며, 황단의 제사는 그 예가 또한 응당 이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헌가·고취를 어가 전에 진설하는 것은 비록 가벼운 상(喪)이라 하더라도 졸곡의 전후를 논할 것 없이 일이 당저(當宁)에 관계되는 것은 묘사(廟社)나 대제(大祭)의 쓰임과는 다른 것이므로, 오로지 성상께서 한때 처분하기에 달려 있습니다마는, 복(服)을 벗기 전까지 한정하여 설치하지 않는 것이 또한 어찌 정(情)과 예(禮)에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전 대사헌 심육(沈錥)·부호군 민우수(閔遇洙)·금성 현령(金城縣令) 신경(申暻)·전 주부 최재흥(崔載興)·전 장령 송능상(宋能相)·장령 송명흠(宋明欽)·전 현감 이양원(李養源)은 모두 헌의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이제 헌례(獻禮)한 것을 보았다. 복제를 다 벗기 전에 최복(衰服)을 입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없다. 습악에 관한 한 가지 의절(儀節)은 비록 소상(小喪)이라 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만약 기복(朞服)을 입고 있다면 한결같이 국휼 내상(內喪)의 예에 의거해 시행토록 하라. 황단의 제향은 졸곡 전에 헌의한 데 의거해 음악을 쓰도록 하고, 사직 제사는 졸곡 전에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는 말도록 하라. 아! 예(禮)는 미치지 아니하는 것도 예가 아니요, 지나친 것도 역시 예가 아니다. 여러 신하들이 최복을 입고 음악을 듣는 것이 예가 아니라면 나 또한 최복을 곁에 두고 악기를 앞에 둘 수 있겠는가? 이 한 가지 의절은 복을 다 입은 뒤에 거행토록 하라. 국기(國忌)와 청재(淸齋)는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것은 최복을 입은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것을 아울러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입시했을 때 승지 김상구(金相耉)가 말하기를,
"윤광의(尹光毅)는 사람됨이 비루하고 잗답니다. 그가 이조 참의가 되었을 때 이택징(李澤徵)을 정언으로 삼고, 정박(鄭樸)을 견복(甄復)했는데, 정박의 아비 정익하(鄭益河)가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부형(父兄)을 폄하(貶下)하였으나 혐의로 여기지 않고 직접 검의(檢擬)했으니, 무륜(無倫)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정주(政注)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개인적인 원한으로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 보복하고자 하면서 겉으로 공(公)에 의탁해 한다면 이것은 공이 아니라 사(私)이다. 이것은 바로 천리와 인욕이 같이 행해지되 그 정실은 다른 것이다. 이번 병조 참의의 일로 인해 듣건대, 정박을 복직시키고 이택징을 정언으로 삼았다 한다. 이것은 감히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공적인 일에 보복을 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나는 옳다고 생각하며, 또 이 사람은 천리와 인욕 사이에서 계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저 근래에 이 길이 너무 넓어져 한때 부형의 추고(推考)를 청한 일로 함께 일을 하지 아니하는 하나의 의리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나는 이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윤광의가 계교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비천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어찌 윤리에 관계될 것인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아니한 줄 알고 있다. 그 사람이 본래 소탈하니, 어찌 이런 일을 했겠는가? 승선(承宣)의 아뢴 바는 근거없는 말로 떠드는 데 동요된 것이며, 또한 연석(筵席)에서의 체통이 아니다.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승지 김상구를 체차(遞差)하여 한편으로는 연석의 체통을 엄중히 하고, 한편으로는 근거없는 말로 떠드는 말속(末俗)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김상구를 양천 현감(陽川縣監)에 보외(補外)하라 명하고, 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삼았다.

 

7월 5일 계해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7월 6일 갑자

임금이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냈다. 대제를 마친 뒤 장차 육상궁(毓祥宮)으로 가려고 재실(齋室)을 나와 여(輿)에 올랐다. 그런데 전상(前廂)이 이미 이현(梨峴) 동구로 향하였으므로 어가(御駕)가 광화문(光化門)에 이르자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잡아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령(軍令)에 엄고(嚴鼓)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앞을 향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특별히 파직시켰다. 효장묘(孝章廟)까지 둘러 보고 이어 환궁(還宮)하였다.

 

7월 7일 을축

경기·함경도·강원도의 익사하거나 압사하거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게 하였다.

 

7월 8일 병인

홍문 제학 원경하(元景夏)에게 반궁(泮宮)에서 원점 유생(圓點儒生)을 시취(試取)하라고 명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 임준(任㻐)에게 직부 전시할 것을 명하였다.

 

7월 11일 기사

황해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임금이 진하 정사(陳賀正使)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摙), 부사(副使) 한사득(韓師得), 서장관(書狀官) 유한소(兪漢蕭) 등을 소견하여 문단(紋緞)의 수입을 금하는 것에 대해 신칙하였다.

 

7월 12일 경오

달이 저성(氐星)을 범했다.

 

조재민(趙載敏)을 대사간으로, 임경관(任鏡觀)을 정언으로, 남학로(南鶴老)를 지평으로, 유언술(兪彦述)을 보덕으로, 이양천(李亮天)을 사서(司書)로, 정홍순(鄭弘淳)을 부교리로, 홍상한(洪象漢)을 평안도 관찰사로, 이종백(李宗白)을 함경도 관찰사로, 홍봉조(洪鳳祚)를 개성부 유수로 삼고, 박찬신(朴纘新)을 특별히 판윤에 제수하였다.

 

정언 이의철(李宜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성덕(盛德)이 환히 빛나 전성(前聖)을 뒤따를 수 있으나, 선(善)을 받아들이고 간언(諫言)을 포용하시는 도량은 도리어 쇠퇴한 시대의 중주(中主) 아래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은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 알지 못합니다마는 언로(言路)는 아래서 막히고, 군도(君道)는 위에서 오만해지고 있으니, 무릇 말 때문에 전하의 조정에서 죄를 얻은 사람이 지금 몇 사람입니까?
대저 대각(臺閣)이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이자 공의(公議)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현명한 인주는 항상 존경하고 경외하며 모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그 말이 광알(狂訐)하여 미워할만 하고, 소활(疏闊)하여 따르기 어렵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기를 굽혀 낮추고 마음을 기울여 허여하면서 오로지 그 말을 다하지 못할까 자신의 잘못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무릇 앞에서 진언(進言)하는 사람이 있어 조금이라도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곧 달갑지 아니한 기색을 보이시고 심한 경우 금고(禁錮)하여 버리고 유배시켜 견책(譴責)하십니다. 그리고 더 심한 경우는 옥중(獄中)에 가두어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베푸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론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벌을 주십니다. 한 가지 일을 논하면 그 일에 대해 갈수록 더욱더 거스르고, 한 사람을 논박하면 그 사람을 다시 더 발탁하여, 홀로 성지(聖智)만을 믿고 군의(群議)를 극력 배척하기에만 힘쓴 뒤에야 그만두십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인(聖人)이 이른바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거나 ‘나의 잘못을 그대가 보필하라.’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옛 법은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광정(匡正)하지 못하면 형벌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신하가 말을 하면 죄를 면하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근년 이래로 조정에서는 기상이 수축(愁縮)되고 언의(言議)가 쓸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좌우 근친(近親)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아부나 하고 뜻만 맞추면서 명위(名位)를 훔치고, 군상(君上)의 잘못을 좌시하면서 바로잡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고립되어 숱한 사람의 말을 도외시하고 국사를 홀로 운영하시니, 무릇 자신을 부지런히 하여 다스리는 것이 모두 허문(虛文)으로 돌아가고 볼 만한 실효(實效)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전후로 진언한 신하들은 전하의 덕의(德意)가 융성하고 두터운 데 힘입어 비록 잠시 죄를 얻어 떠나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생을 보존하여 감옥이나 영해(嶺海) 사이에서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성세(聖世)의 상서롭고 화기가 넘치는 상(象)이 됨을 잃지 아니한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오찬(吳瓚)이 절새(絶塞) 밖에서 죽었는데, 비록 그 죄가 죽을 만하더라도 효(孝)로 다스리는 아래에서 마땅히 용서하여 그 늙은 어미를 위로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그 죄가 이에 미치지 아니하는 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찬찬히 구명(究明)하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졸지에 임금을 잊고 형을 잊은 죄에 걸려 들었으니, 신은 그윽이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저 인신(人臣)의 직분은 그 의리를 따르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법입니다. 이번에 오찬은 이미 그 직임에 있으면서 의리상 그 지키는 바를 굽혀 성상의 뜻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제 이 때문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부하면서 명령을 받든 자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 말을 다하여 숨김이 없는 자는 직임을 잃게 된 것이니 이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이존중(李存中)이 좌죄(坐罪)된 바는 한 대신을 논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대저 대각의 사체는 군상(君上)에 관계된 것일지라도 오히려 논주(論奏)를 허락하는 법이니,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대신을 논척한 일로 자신은 절해(絶海)에 갇히고 아비가 죽어도 볼 수가 없으니, 그 정리(情理)가 절박합니다. 마땅히 성명(聖明)의 딱하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옳고 대신이 그르다면 진실로 마땅히 그 말을 따르고 대신을 물리쳐야 할 것이며, 그 말한 것이 그르고 대신이 옳다면 비록 반드시 그 말을 따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또한 그 사람을 죄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개 그 말이 아무리 그르다 하더라도 졸지에 죄를 준다면 언로에 방해가 되고, 그 옳은 말까지도 아울러 진달하지 못할 것이니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비를 논하지 않고 곧 견척(譴斥)을 행하시어 재상(宰相)의 기세는 날로 높아지도록 만들어 주고 간관(諫官)의 기세는 날로 낮아지게 만드니, 심히 우려할 일입니다.
대저 ‘역(逆)’이란 말은 천하의 지극한 변고로서 그 죄를 범한 자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으며, 그것을 토죄(討罪)하는 일도 또한 심히 불행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에 명백한 증거가 있고 죄에 귀착될 바가 있으면, 아무리 관대하게 처분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데, 이는 즐겨서 하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에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당심(黨心)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시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정론(停論)한 자는 유독 당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에 곁에서 엿보는 무리들이 감히 몰래 헤아려 보고 마음을 내어 심지어는 스스로 흉적의 문도(門徒)라고 일컬으면서 조금도 꺼리지 않기까지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외람되이 절차와 추배(推排)를 가차(假借)하여 마침내 삼사(三事)239)  의 반열에 두셨는데도, 그것을 간하여 그만두도록 한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권세의 무거움을 볼 수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 언로의 막힘과 군주의 청문(聽聞)의 가리움이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바로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옛부터 국가가 패망(敗亡)하는 길이 한 가지 단서에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간언(諫言)을 싫어하여 자신의 견해만을 쓰는 화(禍)가 더욱 혹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망국(亡國)의 연유를 논함에 있어, ‘오직 내 말대로 하고 나를 어기지 말라.’란 한마디 말을 으뜸으로 들었고, 성색(聲色)과 황음(荒淫)으로 패망하는 것은 거기에 끼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두려워할 만함이 이와 같은데, 국조(國朝)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대단함이 있었습니다. 대신(臺臣)의 논할 만한 작은 죄는 법리상 형리(刑吏)에게 내려 추책(推責)할 수 없었던 것이니, 문충공(文忠公) 신 김성일(金誠一)은 걸(桀)·주(紂)를 인용하여 선조(宣祖)를 간했으나 선조께서 우악하게 용서하셨고, 대사간 신 유백증(兪伯曾)은 혼조(昏朝)의 일을 끌어대어 인묘(仁廟)를 규간(規諫)했으나 인묘께서 그르게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또 전하의 가법(家法)이 전해 내려온 바이니 멀리 요순(堯舜)을 본받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에 대해 살피지 아니하십니까? 허물이 있는데도 그 규간을 선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상하가 어긋나고 벌어져 직언(直言)을 듣지 못합니다. 직언을 듣지 못하면 임금의 마음은 날로 교만해지고, 임금의 마음이 날로 교만해지면 아래서 보도(輔導)할 바가 없게 되어 인주의 세력은 점차 고립될 것이니, 인주의 세력이 고립되면 위망(危亡)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틀이 이와 같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무릇 전후로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는 석방하고 대론(大論)을 간범(干犯)하거나 아부하며 말하지 아니한 자는 모두 물리쳐서 대방(大防)을 보존하고 호오(好惡)를 밝힐 것을 청합니다. 전하께서도 마땅히 스스로 힘쓰시어 허물이 없는 것을 귀히 여기지 마시고 오로지 선한 말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소서. 이것이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제일가는 요점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지난날 외람되게도 사직(史職)에서 청광(淸光)을 가까이 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가 보았더니 전하께서 단정한 선비의 곧은 말을 즐거워하지 아니하시고 소인들의 아부하는 말을 편안히 여기시는 것이 가장 절실한 큰 병통이었습니다. 신이 전하께서 스스로 힘쓰시기를 바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불태워 버리고 하교하기를,
"임금은 날이 갈수록 지치고 고달파지는데 당습은 날이 갈수록 치성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아! 노쇠한 만년에 등과하였으되 당심은 쇠하지 아니하니, 만약 종반(從班)에 둔다면 그 임금의 고심을 저버리고 원량(元良)의 초정(初政)을 어지럽힐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먼저 체직시켜 대정 현감(大靜縣監)에 제수하고, 배도(倍道)로 부임케 하라."
하였다. 이어 이의철을 입시하라 명하고 임금이 연달아 엄한 하교를 내렸다. 그리고 칠사(七事)240)  를 외어 보라 명하였는데, 이의철이 잘못 외니, 하교하기를,
"대정 현감 이의철은 칠사를 알지 못하니, 자목(字牧)의 직임을 맡길 수 없다. 즉시 그 곳에 투비(投畀)하되, 즉일로 배도하여 압부(押付)하라."
하였다.

 

7월 13일 신미

정언 황인검(黃仁儉)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대조께서 내리신 이의철(李宜哲)을 투비하라는 명을 받들고 신은 그윽이 착잡하고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의철의 상소는 순수하게 충성을 원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엄한 하교를 급작스레 내리시어 즉일로 길을 곱으로 해서 가게 하였으니, 경색(景色)이 수저(愁沮)합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있을 바이겠습니까? 더욱이 신의 벼슬도 똑같이 간관(諫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신은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죄가 없고 그는 진언하다가 견벌(譴罰)을 당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예자(睿慈)께서는 특별히 신의 직임을 삭탈하여 신의 함묵(含默)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대조께서 처분하시며 그 글을 도로 주셨는데, 공의를 저버리고 비호하려 하니, 즉시 체차하라."
하였다.

 

7월 15일 계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학문에 힘쓰고 정사에 부지런해야 할 것을 진계(陳戒)하고, 또 말하기를,
"침묵은 진실로 제왕의 배움입니다만 강학(講學)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침묵만 지킬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반복해서 토론한 뒤에야 아는 바가 더욱 정밀해지는 것입니다. 민생(民生)의 휴척(休戚)과 나랏일의 이해에 대해서는 저하께서 일일이 다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만,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학문과 왕패(王覇)를 분석하는 방도에 혹시라도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뭇 신하에게 하문하고 대조께 품하소서. 그러면 자연히 영인(迎刃)241)  의 효과가 있을 것이니, 한결같이 은묵(隱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 가납하였다.

 

판부사 김약로(金若魯)가 이의철(李宜哲)의 상소로 인해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니, 왕세자가 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대사간 송창명(宋昌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래(東萊)의 공삼(貢蔘)은 값이 본래 등귀한데다가 공용(公用)이 넉넉하지 아니하니, 병폐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청컨대 저축해 둔 모곡(耗穀)을 적당히 헤아려 획급하게 하소서. 각도(各道)의 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 거두는 군포(軍布)는 실제로 군교(軍校)의 상격(賞格)이 되는 것인데 반절 이상을 남겨 제마음대로 사사로이 쓰고 있습니다. 청컨대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곤수(閫帥)에게 엄하게 금지시키되, 상(賞)에 준용(準用)하지 않고 사사로운 주머니에 돌리는 자가 있으면 장오율(贓汚律)을 베풀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7월 17일 을해

황해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게 하였다.

 

7월 18일 병자

전라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박사눌(朴師訥)을 정언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교리로, 한광조(韓光肇)를 수찬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우참찬으로, 홍봉한(洪鳳漢)을 호조 참판으로, 신사건(申思建)을 형조 참판으로, 성천주(成天柱)를 보덕으로, 이성경(李星慶)을 사서(司書)로, 조중회(趙重晦)를 문학으로,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을 동지 겸 사은 정사로, 이창의(李昌誼)를 부사로, 정기안(鄭基安)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이 언로(言路)를 열어야 한다고 진달하였는데, 대소(臺疏)가 잇따라 나와 지극히 황송합니다. 이의철(李宜哲)은 신도 또한 그르게 여기고 있으나, 신은 고 참판 오원(吳瑗)과는 인아(姻婭)의 친척일 뿐 아니라, 진실로 마음을 아는 벗이었습니다. 그 사람됨이 문장은 곧 여사(餘事)일 뿐이었고 심사(心事)가 결백·정명(精明)하였으니 진실로 사대부였습니다.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고 나라를 집처럼 걱정했는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았기에 신은 항상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의철이 그 아우를 신원하고자 하여 도리어 그 형을 무함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이 죽고 난 뒤의 탄핵하는 글입니다. 이 때문에 그르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원의 평생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의 나라를 위한 정성스러운 마음은 저 푸른 하늘을 두고 맹세할 만한데 가깝다. 어찌하여 그의 목숨을 그리도 빨리 빼앗아 갔는가? 경신년242)   교문(敎文)의 일로 동류들에게 곤핍(困逼)을 받아 마음을 쓰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으니, 대개 마음이 약해 그랬던 것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아뢰기를,
"교문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때에 성교(聖敎)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이로 인해 병들어 죽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우를 구원하느라 형을 해쳐 윤리를 저버렸으니, 그 마음은 전적으로 당에서 나온 것이다. 경은 지금도 다시 언로를 열자고 청할 것인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그때 성교가 너무 지나쳐 삼가 환수하시기를 바랐는데, 소장을 불태운 일과 같은 것은 더욱 지나친 거조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서(諫書)를 태운 것이 아니라 당서(黨書)를 태운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각릉(各陵)의 표석(表石)에 대해 일찍이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수(代數)가 먼 능부터 시작한다면 마땅히 정릉(貞陵)의 비역(碑役)으로부터 해야 할 것이고, 가까운 대수부터 시작한다면 마땅히 장릉(章陵)의 비역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가까운 대수의 능침(陵寢)부터 하되, 내년 봄이 되기를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예조 참판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올해 7월 16일은 곧 태조 대왕께서 천명(天命)을 받으신 연월일(年月日)로 무릇 여섯 번째 회갑(回甲)이 되는데, 열조(列朝)에서 경과(慶科)를 많이 설행(設行)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국조방목(國朝榜目)》과 숙묘조(肅廟朝)의 임신년243)   일기(日記)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7월 19일 정축

김광세(金光世)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예조 당상관이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임어한 지 2기(紀) 동안 능히 열조의 유열(遺烈)을 계승하여 따르지 못했는데, 어찌 오늘 우리 성조(聖祖)께서 개창(開創)하신 날을 맞게 될 줄 생각이나 했으랴?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하물며 삼조(三朝)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기쁨을 표시하였음에랴? 옛날에도 여섯 차례 임신년을 맞아 영전(影殿)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렸는데, 이제 다행히도 용비(龍飛)한 해를 만났고 또 이 달을 맞이했으니, 어찌 정례(情禮)를 조금이나마 펴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진전(眞殿)에 작헌례를 올릴 날을 가려서 들이도록 하고, 시사(試士)는 바야흐로 복제(服制)를 다 벗지 못한 가운데 있으니, 봄철의 알성(謁聖)을 기다린 뒤에 시행하도록 하라. 작헌례를 올리는 때에는 원량(元良)도 일체로 예를 행할 것이다."
하였다.

 

7월 20일 무인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정현(大靜縣)에 도배(徒配)된 죄인 김시욱(金時煜)이 아비의 상(喪)을 당했다고 합니다. 청컨대 법전에 의거해 돌아가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말미를 허락하되, 장례가 끝난 뒤에는 다시 배소(配所)로 보내라."
하였다.

 

7월 21일 기묘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흉배(胸背)가 없는 흑원령포(黑圓領袍)를 갖추고 영화당(暎花堂) 뜰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일(忌日)이기 때문이었다.

 

7월 23일 신사

정홍순(鄭弘淳)을 교리로, 민택수(閔宅洙)를 보덕으로, 권항(權抗)을 필선으로, 이인원(李仁源)을 사서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필선으로, 서효수(徐孝修)를 겸 사서로, 김상로(金尙魯)를 좌빈객으로, 조재호(趙載浩)를 우빈객으로 삼았다.

 

예조의 당상관이 입시하였다.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접때 마땅히 진품(陳稟)해야 한다 한 것이 어찌 내 마음을 깊이 유념한 도리이겠느냐? 경자년244)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눈물이 먼저 흘러내린다. 경자년 칭경(稱慶)은 내가 진참(進參)할 수 없었으나, 신축년245)  에는 보령(寶齡)이 61세가 되시는데 먼저 궁검(弓劍)의 아픔을 안았으니, ‘주갑(周甲)’이란 두 글자에 내 마음속으로 촉발되어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이다. 지나간 해에 진하(陳賀)를 받았던 데는 세 가지 부득이한 조건이 있었으니, 하나는 선지(先志)를 받든 것이고, 하나는 삼황(三皇)에 대한 보전(報典)이었으며, 하나는 존주(尊周)의 의리였다. 그러나 한 글자의 명호(名號)도 감히 옛날에 비해 더하지 아니하는 것이 내 뜻이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은 다시는 진주(陳奏)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하교하기를,
"나라를 위해 혈성(血誠)을 바친 재신(宰臣)이 장차 지하에서 한을 머금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잠자코 있겠는가? 당습은 날이 갈수록 고질이 되고 세도는 날이 갈수록 떨어져 임금과 선조를 배신하는 일이 하나로 족하지 아니하더니, 이의철(李宜哲)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다. 그 아우의 당심(黨心)을 인정하고 그 형이 마음을 씻은 것을 모욕했으니, 가령 오찬(吳瓚)에게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차마 즐겨 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오찬을 위하려다가 도리어 구함(構陷)한 것이다. 아! 고 재신(宰臣) 오원(吳瑗)은 그 아비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한번 경신년246)   이후로부터 통렬하게 스스로 징창(懲創)하여 명을 받들어 교문(敎文)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당습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세도(世道)에 통분을 느낀 나머지 한을 머금고 세상을 떠났다. 이번의 하교는 한편으로는 이의철의 무륜(無倫)·패의(悖義)한 일에 대해 환히 유시하고, 한편으로는 재신의 혼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7월 24일 임오

현빈(賢嬪)의 대공복(大功服)을 기년(朞年)의 복제(服制)로 고쳐 정하라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하교하기를,
"효순 현빈(孝純賢嬪)과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복제를 대왕 대비전에 대해서는 ‘고(姑)가 있으면 하지 않는다.’라는 글을 적용했고, 나에 대해서는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손(嫡孫)은 없다.’라는 글을 적용했다. 이것은 비록 《의례(儀禮)》와 《가례(家禮)》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모두 방례(邦禮)는 아니다. 또 나는 효순에 대해 대공복을 입었는데, 이것은 효장(孝章)과 견주어 차등을 두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례의(五禮儀)》에는 현주(懸註)가 없고 모두 기년(朞年)이라고만 하고 있다. 방례를 따라야 할 것인가, 사례(私禮)를 따라야 할 것인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헌의(獻議)하기를,
"신이 지난 겨울 효순빈의 상(喪)이 났을 초기에 허둥지둥 입시하였더니, 예관(禮官)이 말하기를, ‘대전과 중궁전의 복제는 《의례》를 볼 것 같으면 대공이라 하였고, 국제(國制)는 기년이라 했는데, 무신년247)  에 이미 기년의 제도를 시행하였으니, 한 등급을 낮추어 대공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고 하기에 하순(下詢)하실 때에 신 또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대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무술년248)  과 같지 않음에 대해 의문을 갖고 이렇게 문의(問議)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으니, 신은 전날 망언했던 죄를 무릅쓰고 감히 예(禮)의 뜻과 천견(淺見)을 죄다 진달하여 명감(明鑑)의 취사 선택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의례》를 살펴보건대, 천자 제후 정통 방기복조(天子諸侯正統旁朞服條)에 이르기를, ‘천자·제후는 방기(旁朞)249)  를 끊는다. 그러나 존귀함이 같으면 낮추지 않는다. 정통의 기복도 낮추지 않으나 중자(衆子)에 대해서는 끊고 복(服)이 없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형제가 모두 제후가 되었을 경우 복은 부장기(不杖朞)로 하며, 군(君)은 고(姑)·자(姉)·매(妹)의 딸로서 국군(國君)에게 시집간 사람을 위해 대공을 입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존귀함이 같으면 낮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아래에 고조부(高祖父)·고조모(高祖母)로부터 현손(玄孫)·현손부(玄孫婦)에 이르기까지 두 줄로 나란히 써 놓았는데, 아들 아래에는 ‘장자(長子)는 참최(斬衰)’, 며느리 아래에는 ‘적자(嫡子)일 경우 대공’, 손자 아래에는 ‘적손(嫡孫)일 경우 자최(齊衰)’라고 쓰고는 주(註)에 ‘적자(嫡子)가 있을 경우 적손(嫡孫)은 없다.’ 하였으며, 손부(孫婦) 아래에는 ‘소공(小功)’이라 썼으니, 이것이 곧 제왕(帝王)의 복도(服圖)로서 바로 방례(邦禮)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방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상복편(喪服編)》의 적부 대공장(嫡婦大功章)의 소(疏)에 이르기를, ‘그 며느리는 남편을 따라 그 구고(舅姑)에 대해 기복을 입고, 그 구고는 아들을 따라 그 며느리에 대해 대공을 입으니 한 등급을 낮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疏)에 이르기를, ‘부모는 적장자(嫡長子)를 위해 3년 동안 복을 입는다.’ 했는데, 지금 적부(嫡婦)를 위해 한 등급을 내리지 않고 기복을 입는 것은, 장자(長子)는 본래 정체(正體)가 되기 때문에 더하여 3년에 이르나 며느리는 단지 적자(嫡子)의 아내로서 정체의 의리가 없기 때문에 곧장 서부(庶婦)보다 한 등급을 더해 대공에 그칠 뿐인 것입니다. 대개 고례(古禮)는 이와 같으나, 당(唐)나라 때부터 며느리의 구고에 대한 복을 더해 3년으로 하였기 때문에 구고의 며느리를 위한 복 또한 더하여 기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적부란 모두 3년의 복을 입는 장자의 아내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약 아들에 대해 3년의 복을 입지 않는다면 그 며느리 또한 대공을 입는 것이니, 비단 사가(私家)의 예(禮)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실로 상하에 통용되는 예인 것입니다. 무신년의 상(喪)에 전하께서 이미 기복을 입으셨으니, 지난 가을의 상복은 대공을 입으신 것이 진실로 고례(古禮)에 맞는 것이며, 또한 그 남편에 대해 한 등급을 낮추는 뜻에도 어긋나지 아니합니다. 생각건대, 《경국대전(經國大典)》 오복조(五服條)에는 장자(長子)·중자(衆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朞年)으로 하고, 며느리의 경우는 장자·중자를 구분하여 기년·대공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그 당시 《대전》을 편찬한 사람의 두찬(杜撰)250)  일 것입니다. 《오례의》에 이르러서는 사서(士庶)의 상(喪)의 성복(成服) 제도 외에 그밖의 오복(五服)에 대해서는 거론한 바가 없으며, 영묘(英廟)251)  께서는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빈궁(嬪宮)으로 있을 때의 상에 대공의 상복을 입으셨던 것은 이미 《실록》을 상고해 낸 데 나타나 있습니다. 또 《대전》은 광묘조(光廟朝)252)  에 시작되어 성묘조(成廟朝)253)  에 이루어졌는데 이번의 이 오복(五服)은 《대전》에는 실려 있고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아니한 것이니, 영묘께서 기년으로 개정(改定)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소(懿昭)의 상복제에, ‘적자(嫡子)가 있는 경우 적손(嫡孫)은 없으며 손부(孫婦) 또한 같다.’라고 한 것은 이미 《의례》에 전(傳)해 오는 글이며, 또 《의례》의 천자 제후 복도(天子諸侯服圖)에 나와 있으니 또한 방례(邦禮)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중자부(衆子婦)·중손(衆孫)에 대해 혐의쩍음을 의아하게 생각하신다면, 크게 그러하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이번 두 차례의 상에 지존(至尊)의 복제가 있었던 것은 바로 적통(嫡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자부·중손의 경우 당초 어찌 논할 만한 복제가 있었겠습니까? 지난 겨울의 복제는 이미 의거할 만한 고례가 있고 또한 그 남편보다 한 등급을 낮춘다는 뜻에 합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무술년에 추개(追改)한 것은 잘못이었는데, 이제 비로소 바른 도리를 얻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봄의 복제는 이미 고례의 ‘적자가 있으면 적손은 없다.’란 글에 합치되었고, 또 무신년에 대해 차등을 두어 낮춘다는 뜻에 합치되었기 때문에 또한 다른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것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어 전날의 오류를 한번 씻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차자를 올리기를,
"전에 올린 헌의 중 하단에 의소(懿昭)의 복제를 논한 조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한 방례(邦禮)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의 아랫 대목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만약 적손의 복을 입지 않는다면 도리어 복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합니다마는 신은 그것이 그러하지 아니함을 밝히고자 청합니다.
천자 제후 복도에 이르기를, ‘천자·제후는 방기(旁朞)를 끊는다. 그러나 존귀함이 같으면 낮추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여자의 낮은 처지로도 국군(國君)에게 시집간 사람에 대해서는 단지 그 시집간 것 때문에 강등(降等)하는 것인데도 그 대공복을 폐하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존귀함이 같은 세손(世孫)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또 그 도표에 이르기를, ‘증손(曾孫)·현손(玄孫)은 시마(緦麻)이다.’라 하고, 방주(旁註)에 이르기를, ‘적증손(嫡曾孫)은 기복(朞服)이고 적현손(嫡玄孫)도 기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정통(正統)을 서로 계승하는 손자일 경우라면 비록 승중(承重)하지 아니한 증손·현손일지라도 그를 위해 시마복을 입는 것입니다. 하물며 손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방친(旁親)의 복은 존귀함이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비록 기년복이라 하더라도 또한 끊고, 정통의 복은 비록 시마라 하더라도 또한 복을 입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헌의 가운데 ‘크게 그렇지 아니하다.’란 말 아래 다음 문장을 변석(辨釋)한 것이 이미 환하였으니, 어찌 혹자의 의심이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한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대전》 가운데 ‘적자(嫡子)’ 아래 부분에다 만약 고례(古禮)에 의거해 3년복(三年服)을 실었다면, 지금 효순(孝純)에 대해서는 마땅히 기복(朞服)이 되어야 할 것이니, 어찌 의심이 나겠는가? 그런데 경이 고례를 따르고자 한다면 어찌하여 적자(嫡子)의 경우 기복이 되는 것을 이정(釐正)하지 아니하고 단지 적자부(嫡子婦)의 경우 대공이 되는 것만을 이정하고자 하는가? 경의 헌의 중에 ‘이제 대공의 제도로 전의 오류를 씻어야 한다.’는 것이 어찌 협소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적자의 기복을 다시 3년복으로 한 뒤에야 참으로 전날의 오류를 한번 씻을 것 같다. 경의 차자가 나를 일깨웠기에 유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경은 모름지기 대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헌의하기를,
"삼가 성비(聖批)를 받들건대, 장자를 위하여 3년복을 입음으로써 고례를 복구하는 일에 대해 하순하셨습니다. 인주(人主)의 한 몸이 진 부담은 지극히 무겁습니다. 위로 대통을 계승한 3년복 이외에 아래로 전중(傳重)하는 복제를 어떻게 또 3년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역대에서 행하지 않던 일이며, 아조(我朝)의 열조(列祖)들께서도 또한 행하지 아니하셨으니, 그 뜻이 어찌 은미하고 또 길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제도를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경자년254)  에 3년으로 복구하면서 예를 제정한 것을 깊이 유념해서이다. 아! 향곡(鄕曲)의 서인(庶人)도 4대(代)를 봉사(奉祀)하는 법인데 하물며 대통을 이어 주창(主鬯)하는 주자(胄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것을 대신과 유신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전 지평 김원행(金元行)·부호군 민우수(閔遇洙)·부사과 송명흠(宋明欽)·전 현감 이양원(李養源) 등은 모두 왕조(王朝)의 예는 감히 가벼이 헌의할 수 없다 말하고, 진선(進善) 윤봉구(尹鳳九)는 헌의하기를,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는 것은 주공(周公)이 경(經)에 밝혔고, 주자(朱子)가 몸소 실천했습니다. 대개 중자(衆子)에 대해서는 기복인데, 장자에 대해 3년으로 하는 것은 복을 더한 것입니다. 이것은 상하 고금의 경법(經法)이나, 시왕(時王)의 제도는 장자·중자를 논할 것 없이 한결같이 기년복을 하였으니, 당시 찬집(纂輯)한 여러 신하들이 혹 까닭이 있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반드시 이정하려고 한다면 예(禮)를 아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경전과 선현들의 말씀을 고구(考究)하고 상세히 살펴 진선 진미(盡善盡美)하기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드디어 기년의 제도를 정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아! 상(喪)과 복(服)은 비록 경중과 대소의 구분이 있으되, 정(情)에서 비롯되고 예(禮)에서 나옴은 마찬가지다. 경자년 이후로 방상(方喪)255)  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졌는데, 이제 또 《예경(禮經)》에 실린 장자(長子)에 대한 3년의 복제를 복구한다면 3대(代)의 옛 제도를 복구하고 석년(昔年)의 성덕(聖德)을 계술할 수 있을 것이다. 아! 1년 더 복을 입는 것을 아껴 3대의 구전(舊典)을 실추시킨다면, 경중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아조(我朝)의 상제(喪制)는 본래 스스로 찬연한데다 방상의 제도가 또 크게 갖추어졌으며, 무술년의 〈복제에 대하여〉 기복을 추행(追行)한 것 또한 구제(舊制)를 복구하기 위한 한 전기였다. 이제 내가 복구하지 아니한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아! 3년 상은 곧 천하의 공통된 상제인데 아직도 능히 행하지 않고 있으니, 누가 전중(傳重)256)  의 중요함을 알아 장자를 위해 3년의 최복(衰服)을 입을 것인가? 아! 여러 신하들은 비록 나를 위한다 하지만, 나는 전중을 중요하게 여기고 고전(古典)을 아끼노라. 이와 같은 연후에야 비록 장자·중자의 구분은 있으되, 철주(掣肘)의 폐단은 없게 될 것이다. 예조(禮曹)로 하여금 즉시 장자를 위해 3년의 상복을 입는 것으로 복구하게 하라. 장자부(長子婦)의 경우 고례에 구고에 대해 기년복을 입었기 때문에 따라서 대공으로 하였으나, 당나라 이후 구고를 위해 3년의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장자부의 복도 또한 기년으로 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이것을 따를 것이다. 편집청으로 하여금 《상례보편》에 싣게 하되, 시사복(視事服)·연거복(燕居服)은 참작해 규식을 정하도록 하라. 전중에 대한 3년의 복은 무신년에 강정(講定)한 데 의거하되, 공제(公除) 전의 시사복은 백포(白布)로 싼 익선관과 백포로 싼 오서대와 백포 원령포(白布圓領袍)와 백피화(白皮靴)로 하고, 연거복은 백포로 싼 입(笠)과 백포의(白布衣)·생포대(生布帶)·백피화로 하라. 그리고 공제 후의 시사복은 익선관·오서대·백포 원령포·백피화로 하고, 연거복은 흑포(黑布)로 싼 입과 백포의·백포대(白布帶)·백피화로 하라. 기년복(朞年服)은 공제 전 시사복의 경우 백포로 싼 익선관, 백포로 싼 오서대, 백포 원령포·백피화로 하고, 연거복의 경우 백포로 싼 입과 백포의·생포대·백피화로 하라. 【부장기(不杖朞)는 익선관·오서대, 흑포로 싼 입(笠)으로 한다.】  그리고 공제 후에는 시사복의 경우 익선관·오서대·백포 원령포·백피화로 하고, 연거복의 경우 흑포로 싼 입과 백포의·백포대·백피화로 하라. 【부장기(不杖朞)는 시사복을 참포(鞓布)·연녹비화(烟鹿皮靴)로 하며 연거복도 같다.】  대공(大功)·소공(小功)의 공제 전 시사복은 익선관·오서대·참포·연녹비화(烟鹿皮靴)로 하고, 연거복은 흑포로 싼 입과 백포의·백포대·백피화로 하라. 그리고 공제 후에는 시사복의 경우 익선관·청정 소대(靑鞓素帶)·흑원령포(黑圓領布)·흑피화(黑皮靴)로 하되, 연거복은 공제 후와 같게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 이제 비록 기년(朞年)의 체제는 정했지만, 최복(衰服)을 입는 달은 약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효장(孝章)의 복은 지금 다시 입기 어려우니 정과 예를 펼 수 있는 비는 단지 효순(孝純)이 있을 뿐이다. 예조로 하여금 절목을 무신년의 전례에 의거해 써서 들이도록 하고,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또한 무신년의 전례에 의거해 만들어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신이 삼가 《의례》의 장자를 위해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조목을 살펴보건대,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네 종류의 참최복을 입지 못하는 설(說)이 있었습니다. 대저 장자를 위해 참최복을 입는 것은 반드시 할아버지·아버지·자기 자신이 적통(嫡統)으로만 서로 이어서 온 연후에야 비로소 참최복을 입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면재(黃勉齋)257)  가 고정(考亭)258)  의 단서를 이어받아 《속통해(續通解)》를 지으면서 또한 이것을 《상복전(喪服傳)》에 올렸던 것이며, 아조(我朝)의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이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실었던 것입니다. 기해년259)  에 이르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제현(諸賢)이 이 설을 채용하자 이의(異議)를 가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서로 배격하여 예송(禮訟)이 또 당론(黨論)을 이루었던 것이나, 또한 일찍이 가공언의 소를 죄다 그르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복제의 제정은 그 대체(大體)를 말하자면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상경(常經)이 되겠지만, 네 종류의 설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언급됨이 있지 아니하였으니, 크게 빠진 바와 갖추어지지 아니한 점이 있습니다. 어디에 그 고례(古禮)를 복구하여 《상례보편》을 완성한다는 뜻이 있겠습니까? 심히 애석한 일입니다.

 

편집 당상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원래 결과 의주(結裹儀註)가 없으니 첨부하여 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결과포(結裹布)는 3필(疋)로 규식을 정함이 옳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옹가(甕家)의 재목으로 연전에 대나무를 쓰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번 의소묘(懿昭墓)의 옹가는 새 제도를 처음 만들었으니, 어떤 제도로서 규식을 정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로운 제도로서 규식을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소상(小喪) 때의 명정(銘旌)을 영상이 7척으로 품정(稟定)하였는데, 다시 《오례의》를 상고해 보았더니, 조신(朝臣) 5품 이상은 모두 8척을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소상에 7척을 쓴다면 미안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상(大喪)의 예에 의거해 9척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발을 묶는 비단[帛]은 마땅히 상의원(尙衣院)에서 만들어 들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주[紬]를 쓰고 비단을 쓰지 말며 대내(大內)에서 만들어 쓰라. 그리고 이후로는 ‘만들어 들이지 않는다.’고 주(註)를 달도록 하라."
하였다.

 

검열 박정원(朴正源)을 소농보(小農堡)의 권관(權管)으로 출보(黜補)하였다. 별겸춘추(別兼春秋) 이덕해(李德海)·윤동성(尹東星)이 박정원과 함께 모여 한권(翰圈)을 했는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그 자리를 파하자, 소장을 올리고 나갔으므로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7월 25일 계미

정원에서 박정원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다 하여 진계(陳啓)하고 복역(覆逆)260)  하기를,
"회권(會圈)하는 신하로서 서로 버티다가 끝내 권점(圈點)하는 일을 이루지 못한 자에게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이에 앞서서도 한권은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함으로 인해 완권(完圈)할 수 없었던 경우가 손으로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중죄로 죄주었음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박정원에게 유독 이런 처분을 내리신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일개 박정원이 죄를 입음은 진실로 관계됨이 없으나 이에 신 등이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는 전하의 사교(辭敎)이며, 근심하는 바는 전하의 처분입니다. 다시 세 번 생각을 더하시어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늙은 나이에 신칙하였음에도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당(黨)을 비호하며 방자하게 구는가? 김치인(金致仁)은 군부(君父)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용인 현감(龍仁縣監)에 제수하라. 정희보(鄭熙普)가 노년에 추세(趨勢)를 가린 것 또한 비루한 데 관계되니 해미 현감(海美縣監)에 제수하라. 수창(首唱)한 자는 필시 좌승지 이익보(李益輔)일 것이니, 고성 군수(高城郡守)에 제수하라. 그리고 나머지 승지는 또한 현재의 직임에서 해임하라."
하였다. 대개 세 사람은 진계하는 데 참여했고, 그 나머지 세 사람은 진계하는 데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광세(金光世)·김선행(金善行)·윤광찬(尹光纘)·이이장(李彛章)·조돈(趙暾)·유언국(兪彦國)을 승지로 삼도록 명하였다.

 

7월 26일 갑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행행(幸行)하니, 왕세자가 어가(御駕)를 따랐다. 영희전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하교하기를,
"이달은 곧 태조께서 개창(開創)·어극(御極)하신 달로 진전(眞殿)에 술잔을 올리니, 이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아!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고생 끝에 창업하시어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셔서 과궁(寡躬)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부덕하고 무능한지라 마치 깊은 연못과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다. 국초에 궁시로 개창한 것을 이제 당필(黨筆)로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 신진(新進) 소관(小官)들은 한권(翰圈)으로 장난을 치고, 후원(喉院)에 있는 사람은 반은 검고 반은 희니, 이것이 무슨 꼴인가? 열조(列祖)를 저버림이 부끄러워 참으로 얼굴을 들고 문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 아! 나의 신공(臣工)들은 끝내 그 마음을 씻지 못한다면 진전의 뜰에 들어가지 말라. 그리고 다시 당습을 일삼는다면 진신(搢紳)에 낄 수 없을 것이니, 여러 신하들은 스스로 헤아려 거취를 결정하라. 이것은 대훈(大訓)과 다를 것이 없으니, 속히 반포하라."
하고, 상부(相府)에 명하여 써서 들이라고 하였다. 뜰에 들어온 문음(文蔭)이 각실(各室)에 술잔을 올리자,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에 강개한 나머지 대중에게 맹세하고 뜰에 들어왔나이다. 뜰에 들어온 여러 신하들이 만약 맹세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말을 지켜 척강(陟降)하시는 영혼을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이어 사신에게 말하기를,
"밝게 듣고 쓰도록 하라."
하였다. 제4실(第四室)에 이르러 슬피 흐느끼며 스스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송현궁(松峴宮)에 들러 본궁(本宮)의 후원(後苑) 막차(幕次)에 나아가니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후원에 서서 국도(國都)의 지형을 돌아보고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산세(山勢)는 송도(松都)와 차이가 있다. 송도는 곳곳마다 스스로 국면(局面)을 만들고 국면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정신(廷臣)들이 각자 수립(樹立)하여 권신(權臣)이 많았던 것이다. 아조(我朝) 3백 년 이래 이제 여섯 번째의 임신년이 되었다. 옛날 인묘(仁廟)께서 반정(反正) 후에 하교하시기를,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다시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겠느냐?’고 하셨으니, 당을 타파하시려는 하교가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서 이처럼 하교하는 것도 또한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를 준행하는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송현(松峴)의 옛 궁은 성조(聖祖)의 잠저(潛邸)인데, 거의 다 쓰러져 가고 있다. 오늘 제3실을 첨배(瞻拜)한 뒤 이곳으로 들어와 살펴보니, 감회가 일어나는 가운데 또한 심히 송구스럽다. 선혜청의 쌀 2백 석과 병조의 무명 60동(同)을 재목과 기와와 함께 수송하여 보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7일 을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의조(儀曹)의 초기(草記)한 가운데 외방에서 수의(收議)하여 판하(判下)한 것을 보건대, 즉시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는 것으로 복구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 성상께서 결단을 내리신 성덕(聖德)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이 일의 예의(禮意)는 지극히 정미(精微)하고 사면(事面)은 지극히 중대하니, 이것이 여러 대신들이 모두 지난(持難)했던 까닭이며, 유신(儒臣)이 또한 널리 상고하고 신중히 처리하자고 청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제 곧 하루아침에 단연코 시행하시되, 의문을 가지거나 어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어찌 대례(大禮)를 신중하게 여기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저 아들을 위해 3년복을 입는 것은 곧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입니다. 다만 마땅히 복을 입어야 하고 마땅히 복을 입지 않아야 하는 데 허다한 까닭이 있기 때문에 사가(私家)에서는 비록 장자의 상을 당하더라도 응당 3년복을 입는 경우가 거의 드문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주소(註疏)의 설(說)은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쓰지 않던 바이고, 제왕가(帝王家)에서 주창(主鬯)·승통(承統)하는 경우는 모두 마땅히 정적(正嫡)이 된다.’고 생각하셨으니, 성교(聖敎)의 뛰어남은 진실로 간직(簡直)·통창(通暢)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그 사이에는 곧장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명백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대(前代)에도 태자의 상을 당한 경우가 참으로 여러 번 있었는데, 만약 모두 3년으로 했다면 아들을 위해 참최복(斬衰服)을 입는 것이 마땅히 한 번에 그치고 말지 않아서 혹은 재복(再服)·삼복(三服)의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아들이 하상(下殤)261)  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가 참최복을 입는 경우도 혹 있었을 것입니다. 대저 참최란 복(服) 중에서도 가장 흉(凶)하고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을 위해 참최복을 입는 것은 한 번도 오히려 중난(重難)한 일인데, 재복·삼복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물며 인주(人主)의 한 몸은 종사(宗社)를 받들고 만기(萬機)를 보살피는 지극히 중요하고 지극히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傳)에 이른바, ‘참최복을 두 번 입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 경우를 위해 준비한 것 같으며, 주공(周公)이 예(禮)를 제정한 본래의 뜻도 또한 아마도 이와 같지 아니할 듯합니다. 송나라 효종(孝宗)은 처음으로 3년상을 시행하였으니, 현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장문 태자(莊文太子)의 상에는 단지 기년복만을 입었을 뿐이고, 그때 주자도 3년상을 행할 것을 청한 의논이 있었음은 듣지 못했습니다. 황명(皇明)의 태조 황제(太祖皇帝)는 의문 태자(懿文太子)의 복을 입었으되 또한 기년이었고, 헌종 황제(憲宗皇帝)는 태자의 나이가 채 3세가 되지 않았다 하여 상례(喪禮)를 모두 간소하게 하여 7일 동안 복을 입고 벗었습니다. 세종 황제(世宗皇帝)는 장경 태자(莊敬太子)가 상년(殤年)에 훙거(薨去)하였다 하여, ‘천자(天子)는 기년을 끊으니, 짐이 복을 입음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교하고 예관의 청을 따르지 아니한 채 단지 10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말았으며, 백관으로 하여금 성복(成服)하게 하였습니다. 두 황제가 명분과 체통의 중대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상례(殤禮)로 처리한 데는 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우리 나라에 이르러서도 세조·명종·인조에 모두 단지 기년복만을 입었을 뿐입니다. 또 국제(國制)에 아들에 대해 장자·중자를 분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으로 한 것은 실로 황조와 같은 것이며, 그 뜻이 심원(深遠)합니다. 그러니 선조(先朝)를 따르는 도리와 종주(從周)의 의리로 보아 모두 갑자기 변개(變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결같이 이 예(禮)를 행한다면, ‘참최복을 두 번 입지 않는다.’는 전문(傳文)에도 어긋남이 있고 주공이 예를 제정한 본래 뜻에도 합치되지 아니합니다.
이상과 같이 진달한 바는 신의 천견(淺見)으로서 진실로 시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져 다시 고치기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충분히 성심(聖心)으로 헤아려 보시어 처분하소서.
또 효순빈(孝純嬪)의 복제(服制)를 개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자의 복을 이미 3년으로 정했다면 적부(嫡婦)의 복은 그것을 따라 기년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바야흐로 큰 일을 들어 고치지 말 것을 우러러 청하였으니, 만약 유음을 받는다면 저절로 모두 거두어 들이게 되어 다시 의논할 여지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교(聖敎) 가운데 지금 추복(追服)할 수는 없으니, 단지 복을 벗고 이에 의거해 거행할 뿐이라는 하교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아마도 예의 뜻이 그러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개 기년과 대공(大功)은 최(衰)의 제도가 같지 아니하여 승루(升縷)262)  가 각각 다릅니다. 만약 대공복으로 정한 복제를 그대로 12개월 동안 입는다면, 이것은 거의 예(禮)에 이른바 최(衰)에 마땅하지 아니한 물건이니, 그것이 옳겠습니까? 무릇 복이란 모두 처음 정한 제도로 결단하는 것이 선유(先儒)의 설입니다. 이번 효순의 복은 이미 대공으로 성복(成服)하였고 또 장차 거의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도 당초 하순하실 적에, ‘내가 복을 더 입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예(禮)를 이정하여 후세에 전해 주려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기에, 신의 생각은 3년의 제도를 이미 추행(追行)하지 않는다면, 이미 거의 다 끝나가는 복제가 되었으니 처음의 절목에 의거하여 다음 달에 벗는 것이 아마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바입니다.
의소(懿昭)의 복제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낮추어 대공으로 하셨으니 실로, ‘적자가 있으면 적손은 없다.’는 고례를 준행한 것입니다. 대개 적손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 경우란, 반드시 그 적자가 먼저 죽고 적손이 승중(承重)하여 장차 할아버지의 복을 3년 동안 입는 경우인 뒤에라야 기년복을 입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적자가 있으면 적손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감히 아들을 위해 3년복을 입지 못하고, 아들이 있으면 적손을 위해 기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모두 수중(受重)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위 아래에 있어서 예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와 같으니,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는 여부로 변이(變異)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됨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이번 전교 가운데, ‘세손의 복을 기년으로 고치라.’는 하교가 없어 해조(該曹)에 물어 보았더니, ‘고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의소궁(懿昭宮) 삭제(朔祭)의 어제 제문(御製祭文)을 보았더니, ‘옛 제도를 복구하니, 유감이 없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3년복으로 고례를 복구하는 것이 중대한 의절(儀節)에 관계되므로 특별히 고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성사(聖思)가 우연히 조검(照檢)하는 데 실수하여 이 복제를 모두 고치신 것으로 인식하시고 이러한 고하심이 있는 것입니까? 비록 모두 고치라는 성명(成命)은 있지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의려(疑慮)가 없을 수 없어 곧 이처럼 덧붙여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충청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7월 28일 병술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빈궁의 산실(産室)을 이 달 안에 마땅히 설치해야 하겠는데, 권초관(捲草官)으로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서명빈(徐命彬)과 홍계희(洪啓禧)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계희가 좋겠다."
하였다.

 

서효수(徐孝修)를 부수찬으로, 성천주(成天柱)를 부교리로, 윤득화(尹得和)를 강원도 관찰사로, 오혁(吳)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현빈궁(賢嬪宮)의 상(喪)에 대해 대전·중궁전의 복제를 기년으로 개정하였습니다. 따라서 복제를 고쳐서 마련해 들이되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대공(大功)의 복제 또한 상의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봉출(奉出)해서 내시와 같이 입회하여 매안(埋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30일 무자

조명리(趙明履)를 대사헌으로, 이영복(李永福)을 장령으로, 조종부(趙宗溥)·송문재(宋文載)를 지평으로, 윤방(尹坊)을 정언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대조께서 저하와 함께 진전(眞殿)에 술잔을 올리시며 옛날 창업의 어려움을 느끼시고, 오늘날 당습의 고질적인 폐단을 우려하신 나머지 위로는 척강(陟降)하는 영혼에 고하고 아래로는 신료들을 신칙하셨으니, 저하께서 짐지신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마음을 바로하여 인도하시되, 마음을 바로잡는 근본은 학문에 성실한 데 있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궁전에 진하(陳賀)하는 일을 누차 대조께 진달했습니다만, 끝내 윤허하지 아니하시니, 신 등의 성의가 천박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틈을 타서 진청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실로 책임이 나에게 있으니, 대신이 지나치게 혐의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전의 차자에서 예를 인용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책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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